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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0116월 한국조직신학회 편
2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Oct 2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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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k Cha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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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29집 2011년 6월 한국조직신학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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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집 2011년 6월 한국조직신학회편

Page 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차 례

정지련 성육신에대한신학적반성 7

강응섭 예수이름과 양성일치기독론 41

정미현 하나님의선교?-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67

김옥주 포스트-어거스틴필리오케에대한포티오스의 비평 99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25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55

황민효 라인홀드니버의 정의론의재고(再考) 183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15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신학 249

최인식 유대교와그리스도교의만남: 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81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과정에 대한연구 307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77

5

Page 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육신에대한신학적반성

정지련

(감리교인천성서신학원교수)

I. 들어가는말

예수는 누구신가? 이 물음은 초대교회의 복합적인 해석학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그리스도론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무엇보다

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신앙고백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학의 배경이 히브리 사상에서 그리스 사상으로 바뀌어 가면서 하나

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인격이 물음의 대상으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이

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성육신 사상은 참 하나님 참 인간을 말하는

칼케돈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오늘날까

지도그리스도론의주류로 자리매김하고있다.

그러나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예수의 전 생애와 분리된 탄

생의 순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이미 해명했듯

이 인격에 대한 물음과 사역에 대한 물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분리되지 않듯이, 성육신과 십자가

도 분리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성육신 사상에는 십자가와 부활에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Vol. 29

Chung, Chi-Lyun A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Incarnation

Kang, Eung-Seob The Name of Jesus and The Christology of Two Natures

Chung, Mee-Hyun Missio Dei?- The Meaning of Karl Barth’s Theology

for missio Dei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Kong, Hun-Bai A Study on Ministers’ Authority in the 16th Century at

Geneva

Lee, O-Kab Polygamy and Celibacy according to Calvin

Hwang, Min-Hyo Revisiting Reinhold Niebuhr’s Theory of Justice

Park, Hyung-Gug A Post-metaphysical Thinking of Presence in Barth’s

Conception of Revelation

Yu, Jang-Hwan Paul Tillich’s Subject-Object Uniting Theology

Choi, In-Sik A Dialogue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 From the

Perspective of Halachah and Aggadah

Kim, Hwa-Young A Study of the Phenomena and Processes in an Inte-

grated Spirituality

Lee, Jung-Bae Theologie und Ethik im Zeitalter des Zusammenbruches

des Klimas und der Ausrottung der Spezies

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7-40

Page 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전제하에 로고스를피조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동시에 로고스

와 다른피조물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즉 창조주의 입장에서보면 로고

스는분명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시간 이전

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로고스는 자신을 통해 창조된

다른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에 의해 직접창조되었다는 것이다.1) 여

기서 아리우스의 의도가 밝혀진다. 그는 결코 양자론을 대변하려 했던

것이아니다. 그의로고스론에서는오히려 불변하고 고통 받을수 없는

하나님과 고난받는 피조물의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 즉 중보자가 인지

된다. 하나님의 불변성과 불가고통성이당대 신학의 전제였음을감안한

다면, 아리우스의 관심은 사실 중보자 그리스도를 부각시키는 데 있다

고 말할수 있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입장은 곧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주장하

는 니케아 공의회에 의해 정죄되었다. 니케아 공의회를 주도했던 아다

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구원론적 동기가 작용한다. 그는 그리

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신성화(神聖化)의 과정으로 이해된 구원이

실현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성례전적관심도 작용한다. 그

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에참여하는 성

례전은 기껏해야기념이나회상에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2)

따라서 아다나시우스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인 로고스의 고난을 불가

능한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다나시우스도그리스도의 고난을 외면할

수는없었다. 그래서 그는그리스도의고난을 인성에돌린다. 즉 고난당

할 수 없는 로고스가 아니라, 그 로고스가 받아들인 인성이 고난을 당

했다는 것이다. 물론아다나시우스에게로고스와 인성의 결합은 충분히

반성되지않았다.

대한 신앙이 전제되어 있다. 성육신 사상은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분

속에 나타난 인격적 신비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지 사역과 분리된 인

격의선험적 본질을 사색하려는시도가 아니다.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역사적 예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육신 사상은 그리스도론의 한 부분만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론 전체를 포괄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본

소고는 이러한 성육신 사상의 발전과정을 되짚어보면서 칼케돈 신조의

의미와 문제점을 제시한 후 칼케돈 신조의 토대인 성육신 사상을 재조

명해볼 것이다.

I I. 고대교회의그리스도론논쟁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 논쟁에서는 무엇보다도 다음의 모순적인 사

실이 문제로 의식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된 예수는 분명 몸을 가

지신 분이었으며, 이 몸으로 동 시대인과 교제하고 고난당하셨던 구체

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신학적 전제에 의하면, 하나님은 변할

수 없으며 고난당할수 없는분이었다. 극단의선택을 취한양자론과가

현설을 일찍부터 이단으로정죄한 교회는 불가피하게다음과 같은물음

앞에서게되었다. 그렇다면예수안에서 고난당하신분은누구신가? 고

난당하신 예수를 어떤의미에서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는가?

1. 아리우스와니케아공의회

그리스도론 논쟁은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실제적

인 고난이라는 문제에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아리우스(Arius)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불가고통성(不可苦痛性)이라

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9

1) 참조. 자로슬라브 펠리칸/박종숙 옮김,『고대교회 교리사』(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256-257.

2) 참조. 앞의책, 270.

Page 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로고스-아들 이해 속에서 우리는 우주론적 중보자는 물론 구원론적

중보자를 인지할 수 있다”6)는 펠리칸의 진술을 감안해 보면,“아리우스

주의는 하나님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경험하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종교적 이론이었다”7)는

라쿠나의주장이 정당하게느껴진다.

아리우스가 구원자 그리스도를 강조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죄되었

다 할지라도, 중보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한 아리우스의

공헌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라쿠나가 주장하는 것처럼 니케아

공의회가 중보자 개념을 포기한 것은아니다.8) 이러한 사실은 동일본질

론과 종속론을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이후의 발전과정이 명백하게 보

여주고 있다. 구원자와 중보자를 동시에 말해야 하는 과제, 성부수난설

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신학적 상황 속에서 더욱 심각하게 제기되는 그

리스도의고난의 문제는 칼케돈공의회에이르기까지계속된다.

2. 칼케돈공의회까지의발전과정

1) 상황과 전제

니케아 공의회 이후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 신학적 전제가 된

후 부인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 즉 예수의 실제적인 인성이 신학적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육신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성서의

성육신 사상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명제로 받아들인 고대교회는

성육신을 신이 인간으로 변형되거나, 하나님이나 인간도 아닌 제 삼의

존재로 변화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받아들인 사건으로 이

동일본질(Homuousios)을 교리로 채택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이

후 그리스도의 신성은 신학적 전제로 인식되고, 아리우스는 부정적인

판단을 받아왔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카스퍼는

이러한 이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성서의 로고스론은 구원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 로고스론이 하나의 우주론적 사변과 하나의 도덕

으로 변모한 셈이다. 이처럼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헬라화를 의미

하며 이 헬레니즘화는사실심각하였다.…니케아의 교부들이아리우스

의 사변에 말려들어가지 않고 단순히 성서와 전통의 가르침을 보존하

려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3) 그러나 과연 그런가? 펠리칸

이 지적하듯이,“하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자명한 원리, 즉 신성의 절대성과 불가고통성에 의해

조절되었다.”4) 그리스도교의 헬라화가 문제된다면 그 책임은 당대모든

신학에 돌려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리우스가 그의 로고스 그리스도

론에서 우주론적 중보자만을강조했다는주장도 관철되기어렵다. 아리

우스의 로고스 그리스도론은 오히려 하나님의 불가고통성이라는 전제

하에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진지하게 숙고한

다. 가톨릭의 여성신학자 라쿠나는 에우독시우스(Eudoxius)를 인용하

면서“아리우스주의자들은…말씀이 인간의 영혼을 입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고난당하신 하나님 개념을 주장

할 수 있었다”5)고 말한다.“주로는 그의 대적자들에 의해 전수되어 내

려온 아리주의주의의 단편적 정보들에 근거해 본다 할지라도…이러한

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11

3) 발터카스퍼/박상래 옮김, 『예수 그리스도』(왜관: 분도출판사, 1996), 314-315.

4) 자로슬라브펠리칸/박종숙 옮김, 『고대교회교리사』(1995), 298.

5) 캐서린 모리라쿠나/이세형 옮김,『우리를 위한 하나님-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삶』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70.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고난이란 성부의 수

난이아니라 로고스의고난을 말한다. 에우독시우스 인용은다음과 같다.“그리스도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영혼 대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곧 그리스도 전체가 단일 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수육으로인해고난당할수 있었다.”

6) 자로슬라브펠리칸/박종숙옮김, 『고대교회교리사』(1995), 259.

7) 캐서린 모리 라쿠나/이세형 옮김,『우리를 위한하나님-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삶』

(2008), 70.

8) 참조. 앞의책, 85.

Page 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물론 전혀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리우스에게도 로고스-몸

유형이 나타난다. 로고스가 몸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

의 몸은 로고스의 몸이었다. 아리우스에 대한 아다나시우스의 비판은

로고스의몸이아닌 로고스의 피조성에집중되어 있었다. 아다나시우스

는 성육신을 아직 신학적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다.11) 아리우스에게서

예수의 온전한 인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최초의 신학자

는 4세기의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Eustathius)였다. 그는 아리우스의

로고스-몸 그리스도론에 맞서 로고스가 예수의 온전한 인성을 받아들

였다고 주장하며, 양자의 결합은 내주의 모델로 설명했다.12)

이러한 상황속에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가 등장한다. 그는

유스타티우스에게서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로고

스-몸 그리스도론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요한복음1장 14절을 문

자적으로 해석해 로고스가 인간 전체가 아니라 몸만을 받아들였으며,

인간 예수의 영혼은 로고스에 흡수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와 같이

성육신을 로고스가 몸을 받아들인 사건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로고스-

몸 그리스도론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구원론

적 관심이 강하게 대두된다. 이러한 구원론적 동기는 그로 하여금 그리

스도의 인격적 통일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

적 통일을 몸이로고스에 의존된 형태로 설명하며, 그리스도안에 오직

로고스의 본성만이 존재한다는 단성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아폴리나리

우스의 그리스도론은하나님과 인간을 혼합시켜 결국은 실제적인 인성

을, 그리고 온전한 신성도 충분히표현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정죄되었다.

그리스도론 논쟁은 본래 동방교회의 관심사였다. 동방에서는362년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Synode)에서 그리스도론 논쟁이 최초로 다루

해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변하지 않는 분이며 언제나 동일하신 분

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

계가신학의 중심주제로부각되었다.

그러나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해 묻는 존재론적

물음 배후에는 단지 철학적 관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물음의 배후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고난의 문제가 자리잡

고 있었다. 고대 교회는 영지주의의 망령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신

학적 전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육신

신학의 전제요 중심 문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신성에 귀속

시키는 성부수난설도 신학적 불가능성으로전제되어있었지만, 그 고난

을 인성에만 귀속시키려는 시도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성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신성과 인성 모두를, 그리

고 기적들과 십자가 처형 모두를 동일한 한 주체에 귀속시키는 문제”9)

와 씨름하지 않을수 없었다.

2) 니케아 이후의 그리스도론논쟁

이러한 신학적 상황에서 임마누엘 신앙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예수의 순종과 고난의 구속론적 의미를 강조하는 안디옥 학파

가 그리스도론 논쟁을 이끌었다. 전자가 로고스-몸(Logos-Sarx) 그리

스도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로고스-인간(Logos-Anthropos) 그리스도론을 대변하면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학파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멸성과 불가고통성에참여토록 하는

것이라는사실에는의견의 일치를 보였다.10)

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13

9) 자로슬라브펠리칸/박종숙 옮김, 『고대교회 교리사』(1995), 319.

10) 참조. 앞의책, 302.

11) 참조. B. Lohse, Epochen der Dogmengeschichte, 7. Aufl. (Stuttgart: Kreuzverlag,

1988), 86.

12) 참조. 앞의책, 87.

Page 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키릴(Cyrill)은 구원론적이며성례전적관

점에서 비판한다. 그는신성과 인성의 통일을 강조하면서 인성 그 자체

는 존재하지않음을 말한다. 인성은 처음부터 로고스에 속해있다는 것

이다.16) 키릴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을 따라 예수의 몸을 로고스

의 몸으로 이해한다. 두 본성은 이론적으로만구분될 뿐, 그리스도는로

고스에 의해인도되는한 인격이라는 것이다.

키릴에게는 이와 같이 인격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이다. 따라

서 인간성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이 상존한다. 그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동등한 구성 요소로 인식하지 않는다.17) 키릴에 의하면 로고스

는 고통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지만 고통당할 수 있는 육신을 취하였

고 그 결과 육신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18)

그에게는고난받으시는하나님에대해말하는것이가능하다.

I I I. 칼케돈공의회의그리스도론

1. 칼케돈신조의역사적형성과정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는 양성론자 네스토리우스와 단성론자 유티

케스(Eutyches)를 정죄하면서 두 본성의 구분과 통일을 고백한다. 공의

회는이로써 키릴의 실체적 결합이나안디옥의 내주모델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대신 양자의 관계를 혼합되지 않지만 분리되지도 않는 관계로

제시한다. 본성들의 차이가 결합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며, 두 본성이 구분에도 불구하고 한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성과 인성이 둘도아니요 하나도 아니라는것이다.

어졌다. 이 회의에서는 유스타티우스와 아폴리나리우스 추종자들이 격

렬한 논쟁을 벌였다. 보통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불리는

양자의 대립은 칼케돈 공의회까지계속되었다.

3) 5세기의 그리스도론논쟁

아폴리나리우스의 단성론에 안디옥 학파는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

한다. 예수가 우리와 같은 실제적인 인간임을 로고스-몸 그리스도론은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테오도르(Theodor von Mopsuestia)

가 먼저 단성론을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로고스는 몸만이 아

니라 인간 전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고스와 인간은 하나로 혼합되

거나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자립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그리스

도 안에 두 본성이 구분된 채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행위와 말씀들은

신성에 의한 것과 인성에 의한 것으로 구분되고, 고난의 능력이 있는

육과 고난당할 수 없는 로고스가 구분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성론에 당

연히제기되는“로고스와인간이 분리되는 것이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선 로고스의 내주로 양자의 연합을 설명한다.13)

네스토리우스(Nestorius)도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그리스도론이로고

스의 불가고통성을 위협할 뿐 아니라, 인간 예수의 고난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한다.14) 네스토리우스뿐 아니라 안디옥 신학자들

은 십자가상의 절규가 성육신하신 로고스의 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취

한 인간의 소리라고 주장한다.15)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테오토코스”

(theotokos)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결국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

된다.

두 본성이 실제적인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실제적인 구원은 불가능

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15

13) 앞의책, 91.

14) 참조. 자로슬라브펠리칸/박종숙옮김, 『고대교회교리사』(1995), 301.

15) 참조. 앞의책, 319.

16) 참조. B. Lohse, Epochen der Dogmengeschichte (1988), 95.

17) 참조. 자로슬라브펠리칸/박종숙 옮김, 『고대교회교리사』(1995), 322.

18) 참조. 앞의책, 300.

Page 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학파는 예수가 중보자이심을 강조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안디옥에서는로고스와

의 교제를 통해참 인간을 실현한 인간 예수가 중보자라면, 알렉산드리

아에서는 인간이 되신하나님이 중보자가 된다. 그리고 라틴전통은 하

나님과 인간이 함께 연합속에서 중보자가 되신다. 따라서 칼케돈 신조

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이러한 세 가지 전통을 포괄적으로 바라보

는 시각이 요청된다.

서방교회에서는 칼케돈 신조가 오늘날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

한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물론 많은

교회가 칼케돈 신조와 거리를 두었다. 오히려 6세기에는 키릴의 그리스

도론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실체적 통일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고난

을 말하는 신칼케돈주의가선호되었다.

2. 현대신학의칼케돈해석

칼케돈 신조의 의미와 한계를 제시하기 전에 현대신학의 칼케돈 신

조 해석들을 간략하게나마 조명해 보는 것이 문제의 초점에 집중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학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온 라너( K .

Rahner)의 해석을 살펴본 후, 오늘날까지도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가톨릭 교회와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카스퍼(W. Kasper)의 해

석을 살펴 보겠다. 그리고 개신교 신학에서 참신한 해석으로 주목받는

틸리히와20세기 후반부터 그리스도론의 중심으로 성육신에서 부활로

옮겨놓으려 했던판넨베르크와몰트만의해석을 살펴보겠다.21)

이와 같이 모순적인 역설처럼 보이는 칼케돈 신조에는 이 신조의

역사적 형성과정이 반영되어 있다.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절차를

무시하고 파행적으로 이끌었던449년의 에베소 종교회의는 단성론을

주장하며 안디옥 학파의 테오도르를 정죄했다. 당연히 교황 레오 1세

(Leo I)는 에베소 종교회의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서 황제는 칼케돈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따라서 칼케돈 공의회는 처

음부터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이며 신학

적인 타협을 모색해야 했다. 이러한 타협의 과정에서는 서방교회의 신

학을대변하는교황레오1세가주도적인역할을 수행했다.19)

서방 교회의 전통을 계승한 교황 레오 1세는 두 본성과 한 인격 교

리를 제시한다. 레오 1세는 그러나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서, 케노시스

(kenosis) 신학과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교리를 통해

한 인격과 두 본성 교리의 역설을 해명한다. 즉 정적인 양성 교리를 역

동적인 구원론과결합시킨다. 이로써 레오 1세는그리스도를참 하나님

과 참 인간, 즉 하나님과의 연대성뿐 아니라 인간과의 연대성도 가지는

하나님과인간사이의 중보자로제시할 수 있었다.20)

따라서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레오의 사상이 동방교회의 그리스도

론 논쟁을 중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동방교회의 물음에 서방교회가

답변을 준 셈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순종을 통해 참된 인간이

되신예수 상을 강조하는 안디옥 학파의 입장과 말씀이 인간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입장이

동시에 받아들여졌음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칼케돈 공의회의 신조에는

동방의 두 학파와 서방교회 신학이라는 세 학파의 주요 관심사가 반영

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17

1 9 ) 참조. Basil Studer, Gott und unsere Erlösung im Glauben der alten Kirche,

(Düsseldorf: Patmos Verlag, 1985), 258.

20) 참조. 자로슬라브 펠리칸/박종숙 옮김,『고대교회 교리사』(1995), 334. “‘놀라운 교

환’으로 그는구원의 계약을 맺으셨다. 우리들의 것을 자기가 짊어지시고, 자기의 것

을 우리에게허락하셨다.”

21) 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성육신 사상을 다시 그리스도론의중심에 복권시킨

신학자는 칼 바르트(K. Barth)였다. 그는 칼케돈 신조를 재해석하면서 예수 그리스

도를“참 하나님, 즉 자기 자신을 낮추며, 따라서 화해하시는 하나님”이며“참 인간,

즉 하나님에의해높여지고, 따라서 화해된인간”으로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하나

Page 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나님 아닌 존재가 되기를 원할 때 참

된 인간이 생겨난다.26) 이 참된인간이 바로예수그리스도시다.

그러나 라너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인간본질이 유일하게 최고조로

실현된 사건으로 이해한다.27) 즉 예수는 인간의 실존이 궁극적으로 지

향하고 있는 바를 앞당겨 실현한, 결정적인 성육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예수는 중보자시지만, 다른인간과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대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성육신 사건은 원칙적으로 모든 사

람에게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자기비움은 하나님의 존재양

식이며, 인간에게는자기초월의 가능성이주어져 있기때문이다.28)

라너에게는 중보자 그리스도보다 중보자 안에서, 그리고 중보자를

통해 일어나는 성육신 사건이 강조된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

스도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참 인간으로서 현존하시

며, 우리를 참 인간으로부르신다.

여기서 우리는 라너가 칼케돈 신조의 양성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

방교회의 케노시스 신학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너는 서방

가톨릭 신학의 관점에서 가현설과단성론을거부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참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라너는 이 참된 인간을 통해

우리도-하나님의자기 비움에 의해 실현될-참된인간으로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라너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자기실현이하나의 통일을 이룬다.

(2) 카스퍼

카스퍼는 성서의 성육신 메시지(요 1:14)를 구원론적 명제, 즉 믿는

1) 현대가톨릭

(1) 라너

라너는 성육신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로 본다. 삼위일체의 신비

와 교회의 신비도 성육신의 신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라너는 성

육신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계시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역동적인 구

원의행위와 인간의자기실현과정이 성육신 안에나타났다는 것이다.

라너는 성육신 물음을 다음과 같은 역설로 이해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것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변하지 않

고 고난당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순수행위(actus purus)시다.22)

그러나 라너는 불변의 하나님을 그리스 철학의 전제로만 보지는 않는

다. 불변의 하나님은 철학의 요청일 뿐 아니라 신앙의 교의라는 것이

다.23) 그러나 라너는 이러한 전제 하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도

참이라고말한다.

라너는 절대자가 유한자가 되셨다는 성육신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하나님은 인간 본성을 받아들이신다. 왜냐하면 이 본성들은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본성들이기 때문이다.24) 그

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행위에서 우선적인 것은 자기 비움이다.

하나님은 당신자신을 비움으로써 당신 아닌타자의 현실을 당신의 현

실로 받아들이셨다.25) 이러한 행위 속에서 타자의 본래적 실존이 실현

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19

님의 자기 비움과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참된 인간을 말하는 가톨릭의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 바르트의 성육신론을 생

략한다.

22) 참조. Karl Rahner, “Zur Theolgie der Menschwerdung”, Schriften zur Theologie,

Bd. IV. (Einsiedeln Zürich Köln: Benziger Verlag, 1962), 146.

23) 참조. 앞의책, 146.

24) 참조. 앞의책, 143.

25) 참조. 앞의책, 148.

26) 참조. 앞의책, 150.

27) 참조. 앞의책, 142.

28) 참조. 앞의책, 142.

Page 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나 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한 인간이며,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선포될 수 있었다는것이다.

중보자이신 예수가 참된 인간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카스퍼는 라

너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육신 사건보다는 성육신하신

분의인격에 대한 물음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성육신의 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분의 인격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

학에가깝다.34)

2) 현대개신교

(1) 틸리히

틸리히는 칼케돈 신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재해

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칼케돈 신조의 정적인 본성을 문자적으로 받

아들이면, 이 신조는 단지 우리에게 반신(半神)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

이라는 것이다. 칼케돈 신조의 정적인 본성 개념은 역동적인관계의 개

념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스도 예수가 신성과 인성의

인격적 연합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

한 연합이 역사적 실재가 되었다는 진술로 대치되어야 한다.”35) 간략하

게 말하자면예수는 하나님과 부단히 하나가 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틸

리히는 인간 인격만이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라너나 카스퍼와

견해를 같이 한다.“구원은 오직인간 실존의 곤궁에 온전히 참여한 자

자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선포하는 진술로 이해한다.29) 그리고 칼

케돈 신조 형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레오의 그리스도

론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두 본성은 각각 제 고유성을 간직한 채

한 위격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다.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하느님이요 동

일한 인간이면서도 참으로 한 분이 아니셨다면,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의 중보자가 아니실 것이다.”30) 즉 칼케돈 신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

도를중보자로선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카스퍼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 때문에 이 차이를 메울 수 있

는 매개 내지는 중보자가 필요함을 말한 후, 인간의 인격만이 이 중보

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바

와 같은매개는 인간의 본질에 전혀 모순이 되지않는다. 오히려 그 가

장 심오한 성취이다. 인간은 그 인격성을 놓고 볼 때 이를테면 하느님

과 인간 사이의 비규정적 매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규정

적 매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그 규정, 그 충만과

완성을 획득하는것이다.”31)

예수는 인간의 본질을 완전하게 실현함으로써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스퍼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스퍼는“구별되는 것을 하나로 결합하되, 이 결합 한가운데서도 구별

을 존중”32)하는 하나님의사랑의 특성때문에“하나님과의 일치가 밀접

할수록 인간의 자립성도 그만큼 증대한다. 예수는 당신이 아버지와 온

전히 하나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동시에 온전히 인간적인 의

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인간적으로 있을 수 있는 질문도 하고 나이가

듦에 따라 지혜도 자랄 수 있었다”33)고 말한다. 즉 예수는 하나님과 하

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21

29) 참조. 발터카스퍼/박상래옮김, 『예수 그리스도』(1996), 414.

30) 앞의책, 422.

31) 앞의책, 444.

32) 앞의책, 449.

33) 앞의책, 448.

34) 참조. 디트리히 본회퍼/이종성 옮김,『그리스도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48.

“우리는 성육신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되고 성육신하신분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신성과 인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양식을

탐구해야한다.”

35)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148.

Page 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Being)라고 부른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피조물이 동시에 타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매개해 주는

존재, 즉 중보자가된다는 뜻이다.

(2)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부활이다. 부활

이야말로 예수의 신성을 입증해 주는근거, 즉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를

해명해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부활은 종

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 즉 예수가 종말의 선취이심을 공포

하는 사건으로 이해된다.42) 이러한 부활 이해로부터 부활 이전 예수의

자기주장, 당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주장이 확증된다. 이 사건을 통해초

대교회는예수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었음을 인식하게 되

었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부활에 의해 확증된 이러한 본질적인 일

치를 성육신 사상의 의미로 이해한다.“예수의 이러한 자기주장이 헬레

니즘적 표상으로번역된 것이바로성육신 그리스도론이다.”43)

따라서 판넨베르크에게 성육신 사상은 서로 다른 실체들인 신성과

인성이 예수 안에서 결합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 사상

의 뿌리는 예수를 종말의 선취로 보는 종말론에 있기에 결국에는 예수

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따라서 이 인간 예수가 바로 하나

님이심을말한다는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와 같이 성육신 사상의 뿌리를 종말론에서 찾음으

로써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말하려는 것을 성육신 사상의 메시지로 본

다. 따라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불가고통성,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 인

간을 매개해 줄 중보자 사상들은 성육신 사상에서본질적인 것이 아니

로부터만 유래될 수 있지, 우리와 모든 면에서 다른 땅 위를 걸어 다니

는 하나님으로부터유래되는것이아니다.”36)

이러한 틸리히의 이해는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푀ㄹ만은 다음

과 같이 말한다.“종래의 수직적인 신인의 역설(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

느님이며 참 인간이다)이 수평적인 인간 안의 역설(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 인간이며 실존적 인간이다)에 의해 대치되었다.”37) 달리 말하자

면 양자론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틸리히는 양자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양자론도 성서적이라는 것이다.38) 양자론의“받

아들임”사상이 성육신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틀이된다고 말한다.39)

양자론이 배제될 때 성육신은 쉽게 신화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틸리

히는 동시에 양자론의 한계, 즉 양자론은 필연적으로 성육신론으로 발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다.40) 틸리히는 성육신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부하는 존재에 참여하신다는 역설로 이해한다.41) 그리고 하나

님의 이러한 참여를 통해 나타난 것이 바로 본질적인 인간이다. 예수

안에서 본질적인 인간이 나타나는 과정이 동시에 하나님의 실존 방식

이 된다. 틸리히의 이러한 성육신론은 칼케돈 신조와 대립되는것이아

니라, 오히려 그가칼케돈 신조의 정신을 계승하고있음을 보여준다. 틸

리히는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라는 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그

신조의 의도를오늘날의언어로 재해석했을뿐이다.

틸리히는 예수 안에 나타난 본질적 인간을 새로운 존재( N e w

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23

36) 앞의책, 146-147.

37) 앞의책, 292.

38) 앞의책, 148.

39) 참조. 앞의책, 149.

40) 참조. 앞의 책, 149. “양자론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하필 왜 예수이신가’라는 물

음은 동정녀 탄생 이야기, 로고스의 선재 사상, 성육신 기독론, 재림사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예수는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존재이

며, 따라서하나님의실존방식을 보여주는계시라는것이다.

41) 앞의책, 95.

42) 참조. W. Pannenberg, Grunzüge der Christologie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

haus, 1964), 62.

43) 앞의책, 64.

Page 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님의 케노시스를 예수의 수난과 같은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예수의

몸과 고난을 하나님의 몸과 고난으로 제시한다. 라너에게 예수의 수난

은 하나님의고난이 될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의 케노시스로말미암아

생겨난 참된인간의 고난으로이해된다.

몰트만은 고대교회의 신학적 전제였던 신성의 불가고통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몰트만도 하나님의 불가고통성이 단지 그리스 철학의

요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정당성을가진것임을 알고있다.

즉 하나님의 불가고통성이 간과된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쉽게

해소되고, 하나님께 참여함으로써얻게되는구원, 즉 구원받은삶의불

멸성과 불가고통성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몰트만

은 이러한 고난과는다른자발적인고난, 사랑의 고난이 존재하며, 하나

님의 고난이 바로이러한 사랑의 고난이라고 주장한다.“하나님은 피조

물처럼 존재에 있어서의결핍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

서 그는 무감정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존재의 넘쳐 남을 듯한 사랑으

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45) 몰

트만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십자가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

라 창조에서 이미나타난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하나님은 사랑

이시다(요일 4:16). 하나님에게 있어서 창조는 자기 제한과 자기 자신

의 철회, 자기낮추심을 뜻한다. 창조적인 사랑은 언제나 고난을 당하는

사랑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부터 생성된 창조

물에게 참여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사랑으로부터오는고난을 하나님이

받게됨을 뜻한다.”46) 몰트만은이러한 맥락에서“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사람의 죄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안셀름), 창조의 완성을 위하

여 사람이 되었다”47)고 말한다.

몰트만의 그리스도론도 판넨베르크의 그리스도론과 마찬가지로 그

라, 이후해석학적상황의 변화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판넨베르크의 그리스론에 있어서 성육신론은 출발점이 아니라 결론

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활이요, 이 부활이 예수의 신성을 입증해

준다. 물론판넨베르크의그리스도론은예수의 신성을 강조한다는점에

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예수의

인성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의 인성이나 중보

자 예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과예수의 일치는 예수

의 인간적인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순종을 통해그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 판넨베르크에게예수는 신성과

인성이 종합된 제 삼의 존재가 아니며, 인성이 신성에 흡수된 존재도

아니다. 그는 말하려는 것은온전히 순종하는 인간예수가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것이다.

(3) 몰트만

몰트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안에서 고난당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고주장한다. 몰트만에게 신학의 중심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있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 수난이 이미 성육신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성육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제한되었고 유한한 상황과 관계한다. 그는

이 인간존재와 관계할 뿐 아니라, 그것을 또한 취하며 그것을 그 자신

의 영원한 생명의 일부분으로 삼는다. 그는 인간적인 하나님이 된다.…

이것이 아들의 성육신 의미라면, 하나님의 자기비하는 아들 예수의 수

난과 죽음에서 완성된다.”44) 몰트만은 하나님의 케노시스에서 출발한다

는 점에서 라너의 성육신론과 유사하다. 그러나 라너가 하나님의 케노

시스로 말미암아 생겨난 참된 인간에 강조점을 둔다면, 몰트만은 하나

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25

44)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147.

45) 앞의책, 47.

46) 앞의책, 81.

47) 앞의책, 145.

Page 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러한 신학이 말하려는 것은 단지 이 인간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역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사랑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일

치라는 역설을 해명해 줄 수 있는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은 인간의 고난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

실 칼케돈 신조에는 고난당하신 중보자 예수의 참된 인간성이 동시에

하나님의 실존방식이고 말할수 있는가능성이 있으며, 몰트만과 판넨

베르크도 하나님의 고난을 말할 때 인간의 고난을 전제한다. 다름 아닌

이 인간의 고난이 곧 하나님의고난이라는 것이다. 전자도 예수의 신성

을, 후자도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것은아니다. 라너와 카스퍼가 하나

님의 사건으로서의 성육신을 부정하지 않듯이,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도

신성과 인성의 실체적통일을 말하지는않는다.

양자는 신성과 인성, 즉 하나님의 성육신과 참 인간의 실현을 동시

적인 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따라서 이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참된 인간이 하나님의 실존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강조점의 차이야 있겠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참 인간으

로 현존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시성은 실체적 사고에

서는불가능하며, 한 존재는 오직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자신을 실현한

다는 인격적 사고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50) 실체적 사고에서는상

호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인격적 사고에서는 심오한 진리로 이

해된다. 인격적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고 타자를 받아들

이면서 당신의 존재를 실현해 나가시며, 인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

해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실현해 나간다. 양자는 자기실현을위해 타자

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을 실현하는 과정이 인간이 자신

을 실현하는과정이 된다. 실체적 사고에서는 모순일 수밖에 없는 성육

리스도의 한 인격을 강조하고, 이 인격을 하나님의 인격으로 이해한다

는 점에서 로고스-몸 그리스도론에 더 가깝다. 가톨릭 신학의 관점에

서 보자면, 몰트만은 루터의 충실한 후계자다.48) 그러나 몰트만이 알렉

산드리아 학파처럼 실체적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몰트만도 예

수가 온전한 인간, 메시아적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단지 이 메시아적

인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말할수 있었다.

3) 현대신학을통해본 칼케돈 신조의 의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라너와 카스퍼, 그리고 틸리히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 속에서도 구분을 강조하는 칼케돈 공의회의 성육신론을

계승한다. 그들에게 예수는 무엇보다도 참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 참 인간의 실현과 하나님의 성육신이 동시적인 사건으로 제시되

면서도 양자는 구분된다. 이러한 칼케돈 신조의 정신을 이어받는 신학

에서는 예수가 중보자로 제시되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결코해소되지않는신비그 자체임이강조되고 있다.49)

반면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칼케돈 신조보다는 신칼케돈주의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는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가 강조된다.

그러나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거나 하나님과 인간의 실체적 통일을 말

하려는 것은결코아니다.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은그대로 보존된다. 이

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27

48) 가톨릭 신학자 사르토리(T. Sartory)는 다음과 같이 루터를 비판한다.“루터는 분명

예수의 인성을부정하지는않았다. 그러나 인성에 충분한가치를 부여하지도않았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원리 하에 그리스도의 인격의 신비를 축소시킨 것이 아닌

가”참조, Hans Asmussen·Thomas Sartory, Gespräch zwischen der Konfessionen

(Frankfurt am Main: Fischer Bücherei KG, 1959), 56

49) 사르토리는 공의회의 의도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왜곡됨 없이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적 중재직( M i t t l e r t u m )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참조. Hans

Asmussen·Thomas Sartory, Gespräch zwischen der Konfessionen (1959), 56.

50) 인격적 사고에 대해선 참조. H. Ott, Wirklichkeit und Glaube, Zweiter Band: Der

persönliche Gott (Göttingen Zürich: Vandenhoeck & Ruprecht, 1969), 67-102.

Page 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지평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고대 교회가 마르키온(Marcion)을 이단으

로 정죄하면서 구약성서를 그리스도교 경전에 포함시킨 사실이 암시하

듯이,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몰트만이 열정적으로 강조하고 있듯

이,52) 종말론과 그리스도론은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에게 구성요

소가 되어 준다. 따라서 종말론이 배제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정

체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칼케돈 신조의 가장큰 문

제점이 놓여있다.

그렇다면 칼케돈 신조 내의 그 무엇이 종말론적 관점을 차단시켰는

가? 성육신 사건을 존재론적으로 전개시켰기 때문일까? 그러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통일을 해명하려 했던 칼케돈 신조의 존재론

은 오히려 예수의 존재를-하나님이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시는-종말

의 선취로 말할 수 있는 토대를 철학적으로 해명해 줄 수도있었다. 예

수가 하나님이라는 신앙이야말로 유대교 종말론과 구분되는 그리스도

교 종말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론을 통해 그리스도 존재

의 연속성을 제시함으로써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존재 방식을

해명하려 했다는 점도 칼케돈 신조의 커다란 공헌이 아닐 수 없다. 현

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종말 소망의 실질

적 근거가되기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는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영원의 현존에 안주하는 대신 종말을 소망하도

록 만든다. 따라서 몰트만처럼 칼케돈 신조의 존재론에서 종말론 차단

의 이유를 찾는 것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비판은

아니다.53) 일반적으로 존재론은 종말론과 대립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

이지만, 칼케돈 신조에서는 존재론이 제한적으로 적용되면서 종말론의

신 사상이 우리에게 인격적 사고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인지

도 모른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을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사고하는것이개신교라면, 가톨릭은 예수안에서도해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존하기 위해일치 속에서도 양자의 구분을 말

하고있을뿐이다.

3. 칼케돈신조비판

역사적 형성 과정이 암시해 주듯이, 칼케돈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는

달리 전 그리스도교를 포괄하는 표준적인 교리는 아니다. 그리고 카스

퍼가 말했듯이 칼케돈 신조는“그리스도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해주는

일종의 부정적 그리스도론”(christolgia negativa)51)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칼케돈 신조가 양자론과 가현설에 맞서 성서의 메시지를 변화된

상황 속에서 포괄적으로 해석하려 했다는 점은 어떠한 경우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로고스-인간 그리스도론이 전면에 부

각됨으로써 예수를 종말론의 지평 속에서 이해했던 메시아 그리스도론

이 퇴조하기 시작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론

이 종말론과 분리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분리로 인해 본래적인 형태에

서 벗어난 종말론은 주류 교회에서 외면당하고 열광주의적인 종파 내

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혹자는 이러한 사실이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지평이 히브리 사상에

서 그리스 사상으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할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구약성서 종말론은 해석학적

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29

51) 발터 카스퍼/박상래 옮김,『예수 그리스도』(왜관: 분도출판사, 1996), 424. 슈투더(B.

Studer) 또한 칼케돈 공의회의 의도를“그리스도교 전통을 부정적으로 방어하려는”

시도로 본다. 참조. Basil Studer, Gott und unsere Erlösung im Glauben der alten

Kirche, (Düsseldorf: Patmos Verlag, 1985), 261.

52) 참조. 위르겐 몰트만/김균진·김명용옮김,『예수 그리스도의 길』(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1990), 15-21.

53) 몰트만은 메시아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며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을 자신의 토대로

삼지 않는다고 천명한다. 참조. 위르겐 몰트만/김균진·김명용 옮김,『예수 그리스도

의 길』(1990), 11.

Page 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V. 성육신사상에대한전망

1. 그리스도의몸에대한반성

칼케돈 신조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제시한 참 인간 예수는 지상

의 예수에 대해서는 적절한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

도와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참 인간

으로제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단순히 영적존

재와 일치되지도 않지만, 지상의 인간적 형태와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

지도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 인간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

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제시하는것은적절치 않은것처럼 보인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요한복음1장 14절의전후맥락만을살펴보

면 몸을 인간으로 해석한 로고스-인간 그리스도론이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요한복음이 몸 개념

을 채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된다. 신약성서의 주요 그리

스도론 전승들에는 몸이전면에 부각된다. 성령으로잉태하셨지만 실제

적인 몸으로 태어나셨음을 고백하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와 몸의 수난

을 말하는 수난 전승들은 물론이고 몸의 부활을 강조하는 부활 전승과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바울 서신도 몸을 그리스도의 실

존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

하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몸에서 찾아야 함을 지시해주는 것은 아닐

까? 성육신 사상의 실천적 귀결을 강조했던 본회퍼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성서의 그리스도에 부합되지 않는가?“하나님의 아들은

몸으로 오셨고 몸으로 다시살아나셨다.”57)

물론그리스도의인격적 본질을 몸으로 말하는 것은로고스-몸 기독

론을 극단화시켜 이단으로 정죄 받은 아폴리나리우스의단성론을 연상

길을예비해 주는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칼케돈 신조 내의 그 무엇이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의 결합

을 방해했는가? 그것은 바로본회퍼가 비록 단편적이지만 통찰력을 갖

고 지적했듯이54) 성육신의 해석 지평이 인간학적으로 축소된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몰트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리스도론을

“영원의 수직적 전망 속에서”55)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기술한 데 있

는 것처럼 보인다. 성육신이 하나님의 창조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사건

으로 이해되지 않는한, 보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육신이 창조의 전체

연관성 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는한, 예수를 종말의 선취

로 말할수 있는가능성은배제되기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음이 제기된다. 종말론 배제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는 성서의 성육신 사상에 있는가? 몰트만은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인

식하며, 종말론 차단의 책임을 성육신 신학에 돌린다.56)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선포를 로고스-인간 그리스도론으로 해

석하는 것이 과연 성육신 사상에 부합되는가? 칼케돈 신조와 성서의

성육신 사상을 구분하며 성육신 사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

은 없는가?

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31

54) 본회퍼는 그리스도교가 고대 교회 이후 신약성서의 주요 개념들을 종교적으로 해석

함으로써 세상을 신학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개인의 구원에만 주력하게 되었다고 비

판한다. 참조. 디트리히 본회퍼/고범서 옮김『옥중서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7),

226. “종교적 행위가 기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신의 고

난에참여하는것이 기독자를만든다.”

55) 위르겐몰트만/김균진·김명용옮김, 『예수 그리스도의길』(1990), 20.

56) 참조. 앞의책, 20. 57) 디트리히본회퍼/문익환 옮김, 『신도의공동생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4), 23.

Page 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몸은 존재의 전체이면서도 자신과 타자를 이어주는 매개, 즉 타자와

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 존재를 지시해 준다는 것

이다. 카스퍼의이러한 몸 사상은 현대신학의 몸 이해와도상통한다. 브

루너(E. Brunner)도 몸의 본질을 인격성으로 보며,59) 가톨릭 신학자 녹

케(Franz-Josef Nocke)도 몸을인격적 실체로 규정한다.60)

이러한 몸 사상의 빛에서 보면, 로고스가 인간 전체를 받아들였음을

강조하는 로고스-인간 그리스도론이 로고스가 인간의 한 부분만을 받

아들였다는 로고스-몸 그리스도론보다 신약성서의 성육신 사상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성서 전통에서는 몸이 존재의 전체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의몸 개념은 인간개념에 제한되지않고, 오히려

인간개념을 넘어선다. 달리말하자면, 인간만이몸을갖는것이아니며

인간만이 인격존재도 아니다. 부활하신 분의 몸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몸의 부활로 말한다. 그러나 성서는

동시에 부활하신 분의 몸이 더 이상 인간의 신체적 몸이 아님을 강조

한다. 부활하신 분의 몸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몸이며,

영에의해 질적으로 새로워진 몸이다. 이 몸은 세상한가운데 존재하지

만, 세상에속하거나세상에서 유비를 찾을수 있는몸이아니다.

부활하신 분의 몸, 즉 영의몸은 부활 이전의 몸과는 전적으로 다른

몸이요, 오히려 전대미문의새로움 그 자체다. 성서는 부활하신분의몸

안에 나타난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체험을 시공간을 넘어선 하나님의

시켜 준다. 로고스가몸만을 받아들였다는 아폴리나리우스의이론을 정

죄한 것은앞에서 살펴보았듯이신학적으로 정당했다. 그러나 아폴리나

리우스의 몸 개념은 신약성서의 몸 개념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의비판

자들에게는 몸과 영혼을 구분하고 몸을 열등하고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플라톤적인 몸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몸을단지

신체성과 질료로만 보았다. 반면에 성서적인 몸 개념은 플라톤적인 몸

개념과는 정반대의사실을 지시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의 맥락에서성서

의 몸 개념을 해석했던 그리스 신학자들은 성서의 몸 이해를 바르게

드러낼 수 없었다. 아니정반대로해석했다.

히브리 사상은 헬라 사상과는 달리 몸에서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

라 전체를 본다. 모든 교제의 매개와 통로가 되는몸 안에존재의 중심

이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도이러한 몸 이해를 계승하며, 인간의 구원

을 영혼 구원이 아니라 몸의 부활로 이해한다. 다음과 같은 카스퍼의

진술은 성서적 몸 사상의 특징을 잘 설명해 준다.

히브리 사람에게 육체란 그리스 사람에게서처럼 영혼의 무덤도 아니

요 더구나영지주의자에게서처럼악의원리가 아니다. 그러기에인간

의 본연적 자아가 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도 없다. 육체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전부를 표시한

다. 육체는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인간의 전부를 고전

적 그리스에서처럼 제 안에 폐쇄된 모습으로 파악하지도 않으며 유

물주의에서처럼 하나의 육괴(肉塊)로 생각하지도않으며, 관념론에서

처럼 하나의 개성으로 이해하지도 않는다. 육체는 하느님과, 함께 사

는 이웃 사람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전인간(全人間)이다. 육체

는 인간이 하느님과 자기의 이웃 사람을 만나는 장소이다. 육체는 사

귐의 가능성이요그 현실이다.58)

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33

58) 발터카스퍼/박상래 옮김, 『예수그리스도』(왜관: 분도출판사1996), 267.

59) 참조. Eill Brunner, Das Ewige als Zukunft und Gegenwart (Zürich: Zwingli Verlag,

1953), 164.

60) 참조. 프란츠 요셉 녹케/조규만옮김, 『종말론』(서울: 성바오로1998), 170.

61) 참조. 발터카스퍼/박상래 옮김,『예수그리스도』(왜관: 분도출판사, 1996), 260. “부활

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만남, 신체험(神體驗)이라는 특징을 띠고

나타난다. 제자들에게 떠오른 것, 그들이 체험하고 깨달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죽음을 거쳐 궁극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라는 현실이요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의얼굴에 하나님의다스림이비쳤다는사실이다.”

Page 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진 상태로 우리 곁에 계시다고 말할 수 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예수

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

로 성육신 사상의 핵심적인 메시지라 할 수 있다.64)

2. 맺는말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님 나라로 선포한다면, 성육신 사상은 이미 종

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를 종말의 선취라고 말하는 것이나,

예수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는 것은 강조점의 차이야 있겠지만 결국은

동일한 종말론적 사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말씀이 육신이 되었

다는 선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가운데 한 부분을 당신의 현존으

로 충만케 하셨다는 것이요, 이로써 하나님의 새 창조가 선취되었음을

공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육신 사상의 배경이 되는 로고스 그리스도

론도 본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아니 예수의 전 생애의 우주적 의미

를 표현하려했던우주적 그리스도론이었다.65)

본 소고는 이러한 성육신 사상의 본래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칼케돈 신조의 로고스-인간 그리스도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몸 그리스

도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즉 성육신 사상을 성서의 몸 사상의 맥락에

서 고찰해 봄으로써 예수를 인격적 하나님 나라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본 소고는 성육신 신학이 메시아 그리스도론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시아그리스도론을 심화시키려는시도임을 밝히려 했다. 그러

나 성육신 신학이 보다 큰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차원에 대한체험으로묘사한다. 성서의 증언을 주의깊게살펴보면, 부

활하신 분에 대한 체험이 하나님 나라 체험과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된

다.61) 현대 신학자들도 이 점에서 견해를 같이 한다. 카스퍼는“그리스

도의 영적 육체”62)를 하나님 나라로 규정하며,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실존 속에 나타난“새로운 존재”(New Being)를 예수의 본질로 제시한

틸리히의 통찰력도 바로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

라서우리는 예수의 정체성을몰트만과같이“인격으로오신하나님 나

라”63)라고부를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부활하신 분의 이러한 신비도 몸으로 묘사한다. 성서

전통의 몸 사상의 빛에서 볼 때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

하고 있다. 부활하신 분은 부활 이전의 몸과는 전적으로 다른 신비의

몸, 곧 하나님 나라로 현존하지만, 부활이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

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며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인격존재로 현존하

신다. 부활 이전과 이후의 동일성은 인간이 아니라 몸에, 즉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자신을 실현하는 인격존재에 있다. 사실그리스도교전통

이 부활 이후에도 몸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현존하시는 그리스

도가 오늘도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인격존재라는믿음때문이었다.

그러나 부활 이전과 이후의 몸의 형태가 다르다면 자연히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전자를 예수의 정체성으로 보는 견해

가 바로 양자론이다. 그러나 교부들은 양자론을 비판하면서 후자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찾는다. 영의 몸은육의 몸이사라지는 순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의 인격을 동반해 온 예수의 본질이

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신비의 몸은이미

지상의 예수의 실존안에 감추어져 있었고, 승천 이후에도 다시 감추어

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35

62) 발터카스퍼/박상래 옮김, 『예수그리스도』(왜관: 분도출판사, 1996), 270.

63)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1997), 15-16.

64) 틸리히도 동정녀 탄생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역사적 운명이

새 존재의 담지자( b e a r e r )를 그의 탄생 이전에 이미 결정했다.”참조. P. Ti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160.

65) 참조. 야로슬라프 펠리칸/김승철 옮김,『예수 그리스도2000』(서울: 동연, 1999). “예

수의 사후 첫 세대가 채택했던 여러 가지‘그리스도의 위업을 나타내는 칭호’중에

서 4세기 무렵까지 가장 중요한 칭호는 바로 로고스였다. 한마디로 말해 이 칭호에

의해서예수를 우주적그리스도라고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112-113.

Page 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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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öttingen Zürich: Vandenhoeck & Ruprecht, 1969.

Pannenberg, Wolfhart. Grunzüge der Christologie. Gütersloh: Gütersloher

드러내는 과제에 더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드러내는 일

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이기 때

문이다.

주제어

성육신, 칼케돈, 그리스도의몸

Incarnation, Chalcedon, Body of Christ

접 수 일 2010년 9월 28일

심사 (수정일) 2010년 11월 6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37

Page 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Incarnation

Chung, Chi Lyun

Professor

Methodist Incheon Bible Theological Seminary

Incheon, Korea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is central to the traditional

Christian faith as held by the Catholic Church, the Orthodox Church,

and most Protestants. Historically this doctrine has been developed

into the Dogma of Chalcedon. Through this process the question of

Jesus’s nature, closed with the defeat of Arianism in 380, had been

reopened and answered.

In this paper, I have attempted to make clear the theological

thinking of the incarnation, especially the dogma of Chalcedon, so

that we could find the way to make an approach to the reality of the

incarnation.

The result is as follows. First, the dogma of Chalcedon, “True

God, and at the same time true man”, negatively can be defined as an

attempt to prevent from gnosticism and adoptionism, but positively as

an attempt to unite the interest of Alexandrian theology and of

Anthiochean theology.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Chalcedon,

Jesus is both mediator and savior.

Second, the representatives of the modern theology accept the

meaning of the Chalcedon, although they reinterpret this dogma

newly in the light of New Testament. They agree on the maintenance

that Jesus is the true man, and this realized man is at the same time

Verlaghaus, 1964.

Rahner, Karl. “Zur Theolgie der Menschwerdung”. Schriften zur Theologie,

Bd. I V. Einsiedeln Zürich Köln: Benziger Verlag, 1962.

Studer, Basil. Gott und unsere Erlösung im Glauben der alten Kirche.

Düsseldorf: Patmos Verlag, 1985.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The university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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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련, 성육신에 대한신학적 반성 39

Page 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예수이름과양성일치기독론1)

강응섭

(예일신학대학원대학교부교수)

들어가면서: 문제제기

성서는 기호들로 엮어진 하나님의 말씀 담론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담론은 초기 기독교부터 교회와 신학 공동체에게 중요한 신앙적, 신학

적 주제가 되어왔다. 오늘날 문화신학 민중신학 복지신학 디아코니아

신학2) 공공신학3) 등 많은 영역에서도 이런 담론은 도입되고 있다. 최근

권진관은 담론에 의해 창조되는 민중을 소개한 바 있다.4) 주체가 담론

the self-realization of God. Here the thinking of kenosis can help to

understand this paradoxical thinking.

Nobody couldn’t deny its contribution to the christology. The

Chalcedon contributes to the understanding of the faith that Jesus is

God for us. Nevertheless it proved to be true that the dogma of

Chalcedon is short of the cosmic eschatology of early church that can

never be distinguished from the christology. We must accept the

eschatological meaning of Messiah-Christology, that regards Jesus as

the “Vorwegnahme” of Eschaton, in which God will be all in all(1

Corinthians 15,28).

This problem leads us to reflect on the biblical thinking of

incarnation. Here this paper suggests the possibility of the Body-

Christology, which considers the essence of Jesus not as the true man

but as the body(John 1,14; Colossians 2,9). This christology finally

describes the reality of Jesus in terms of the kingdom of God that

contains the cosmic eschatology. So this paper argues that the

doctrine of incarnation is an attempt to realize and actualize the

Messiah-Christology.

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41-65

1) 이 논문은2009년 4월 25일 호서대학교에서 개최된 제4회 한국조직신학자전국대회

제3세션에서 발표된 논문(「라깡의 기호학적 정신분석에 따른‘예수 이름’연구: 현대

신학의 양극화된 기독론 재고」)의 일부를 확장하여 수정 및 보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양성일치’는 본문에서 말하는‘양성이의2위격 일치’와 같은 의미이다. 각주

38번을참고하기바란다.

2) 홍주민, 『디아코니아학개론』(서울: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 2009).

3 ) Kim Sebastian Chang-Hwan, “Christianity in a Multicultural World: Global

Encounters and Regional Expressions,” 『21세기 한국문화와 기독교』(한국기독교학

회 제38차 정기학술대회자료집(하), 2009. 10. 17.) 559-579.

Page 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서의 담론을 통해 주체를 연구한 것이다. 이 두 연구물은 접근하는

다른방법에 따라 생성되었다. 즉 하나는 주체가 담론을 생산한 구약학

의 연구이고또 하나는 담론이 주체를 생산한 신약학의연구이다.

이런 마찰은20세기의 기독론 연구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역사적 예

수에 관한 논의가 그 시발점이다. 기존의 신앙의 그리스도10)에 반하여

전개된 역사적 예수 연구는 담론 위주의 논의가 아니라 주체 또는 실

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실재에서

출발하는 연구는 텍스트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성공을 보장하기

가 쉽지않다. 그래서 텍스트를새롭게 구성하려는노력이 이어진다. 그

러나 결국 더 이상 새로운 텍스트는 구성되지 못한다. 이에 비해 담론

에서 출발하는 연구는 텍스트에 담긴 다양한 기호를 분석하면서 주체

의 모습을 찾는다. 그동안 소홀하게 다루어진 기호들을 새롭게 논의하

게 된다.11)

이런 정황 가운데서 이 글은 아이히로트에게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쿨만의 관심을 끌었던‘주의 이름’으로서‘키리오스’(kuvrio", Kyrios)12)

에 시선을 주목한다. 여기서 출발하여 세 번째 관점인 상호적인 관계에

대해 숙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다음 두 가지 문제제기를 통해 논의

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이 주체를 생성한다는 뒤집는 발상은 기

존 체계를 새롭게 보는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주체와 담론 그리고

실재와 담론이 둘 간의관계는 적어도 세 가지 가능성이 성립된다. 첫

째는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는 관계이고, 둘째는 후자가 전자를 포함하

는 관계이고 셋째는 상호적 관계이다. 첫 번째의 관계는 고전적인방법

론이라 볼 수 있고 두 번째의 관계는 현대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런데세 번째의 관계는 우리에게균형잡힌안목으로안내할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런 관점을 도입하여 기독론을 전개할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론은 인성을 도외시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으며 현대의

기독론은 신성을 도외시하고 인성만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

정할 수 없을것이다. 그렇기에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는 신학은 처음부

터 존재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는 반문하게 된다. 역사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기독론은하나의 이론에 함몰된 채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인 진행 과정 가운데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는 진행되었다.

이 논문은 그런시도의 반복에 해당한다고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구약학자 아이히로트는『구약성서 신학』5)에서 언약

의 하나님 이름으로서‘야훼’를 다룬 바 있다. 이 연구는 역사적 접근

방법론에 근거하고 있다.6) 달리 말해 주체가 생산한 담론에 대한 연구

이다.“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묘사”7)가 바로 언약의 하

나님 이름으로서 야훼이다. 반면20세기 중반에 신약학자 쿨만은『신약

의 기독론』8)에서 칭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었다. 이 연구는“역사

적 순서…시간적 순서와 똑같지는 않다”9)라고 쿨만은 말한다. 즉 신약

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43

4) 권진관,“중진국 상황에서 민중신학하기-민중론을 중심으로,”『다시, 민중신학이다』(서

울: 동연, 2010), 273.

5) 발터아이히로트, 『구약성서신학1』(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5), 185-216.

6) 앞의책, 28.

7) 앞의책, 31.

8) 오스카쿨만, 『신약의기독론』(서울: 나단, 1988), 22.

9) 앞의책.

10) 2002년 봄호『신학사상』(제116집)은‘역사적 예수 연구와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

이란 심포지엄을 정리하고 있다. 편집자와 참여한4명의 전문가는‘역사적-신앙적’

과‘역사적-신앙의’를 구분하지 않고‘역사의 그리스도’,‘케리그마(신앙)의 그리스

도’등의용어 또한사용한다. 본 논문에서는‘역사적-신앙의’를 사용한다.

11) 김경재,『이름 없는 하느님-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 비판』(서울: 삼

인, 2002), 89. “어느 특정 문화 공동체의 신 이름만이‘참 하나님’의 이름이고 다른

문화 공동체에서 표기된 신 이름은 우상의 이름에 불과하다는 단순 논리는21세기

를 살아가는성숙한현대인들에게받아들여질 수 없다.”

12) 쿨만,『신약의 기독론』(1988), 376. 쿨만은“만약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

수 Kyrios 간의완전한동일화만 말하고양자간의구별을하지않고있다고 우긴다

면, 너무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예수Kyrios에 관해 언급하지

만 이는 우리가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담론으로서Kyrios에 관한 범위에는 미치

지 못한다.

Page 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런 중에 신학은 당대의 학문을 방법론으로 사용

하여 신학적 상황의 돌파구를 찾아왔다. 현대신학은‘원저자와 청중’,

‘원저자와 공동체’그리고‘주체와 담론’이라는 구도를 부각시켜 때로

는 대립적으로 때로는 소통적으로 때론 환원적으로 두 축을 다루면서

해석학적논의를 진전시켜왔다. 이런과정에서한편으로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신학은‘정통주의’또는‘각 교파’의 이름으로

대표되었고, 다른한편으로 보편성보다는개별성에근거한 특정한 지역

과 사람의 신학은‘ ~ 신학’으로불렸다. 여기서‘~ ’는 정통적인그룹에

는 포함되지못하는, 전체집합에서제외된 신학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기호‘~ ’는 개별성에근거한 신학에 포함시켜 새로이 신

학적구성을해야하는것으로 볼 수 있다. ‘

최근 여러 신학이 등장하여 화두가 되고 있다. 이런 신학이 등장한

데는 시대적 상황과 함께 그것을 담론으로 세울 수 있는 주변 학문의

도움이 있었다. 가령 민중신학은 사회경제사 및 문학사회학13)의 도움을

받았고, 생명신학은 환경공학과 생명권 정치학,14) 여성신학은 여성학과

인류학15) 등 새롭게 등장한 관련 학문을 방법론으로 채택하여 성서의

의미를 확장해 왔다. 복제또한 당면한 과제인데 아직 정합적인 의견을

담은 신학으로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16) 생명공학이 탄생시킨‘인공적

생명’때문에 신학은 생명에 대해 새로운 논의를 해야 하는 위치에 서

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이렇게 몇 가지 학문으로만 새로운 신학이

형성되는 것은아니다. 언급된 몇 학문들은 이미다른 학문과의 연관성

를 전개하고자한다.

1) ‘역사적 예수’와‘신앙의 그리스도’라는 현대 기독론의2자 구도 상

황에서,‘주’(키리오스) 또는‘예수 이름’을 연구하는 의의는 무엇이

며 그 이름이 기독론에서차지하는위치와의미는 무엇인가?

2) 복음서와 서신서의‘그때-거기’에서도 제시되었지만 오늘날 신앙생

활의‘지금-여기’에서도 활용되고 있는‘주’(키리오스) 또는‘예수이

름’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인‘야훼’와 칠십인경의

‘주’(=키리오스)와 비교할 때, 어떤관계속에 있는가?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아래에서는, 우선 요청되는‘두 가지 조건’을

설정 및 검토하고, 둘째 보렌에 따른‘이름의 경쟁’, 셋째 루크-슈뢰더

의‘야훼 이름과 키리오스: 단절과 연속의 문제’살피기, 그리고 넷째

‘주’(키리오스) 또는‘예수이름’이 거론된‘신조사’를 검토할것이다.

주체와 담론 간의‘세 번째 관계’를 다루는 이 논문은 선행된 연구

가운데 참고할 근거를 많이 갖지 못한다. 또한 한 문제를 깊이 사색하

기보다는 옴니버스식 전개 방식을 통해 전체적인 문제 의식과 아울러

이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 방안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렇기에

하나의 주제를 깊이있게논하지 못할것이다.

I. 두 가지조건

‘현대신학의 정황’가운데 자리를 잡게 된‘토착화 신학’은 새로운

과제를 제시해 오고 있다. 민중, 생태, 여성, 복제 등의 주제는 이미 사

회적인 요청인 동시에 신학적인 요청이 되었다. 신학은 지난2천 년 동

안 각 시대와 문화의 질문에 답변을 제시해 왔다. 이때 신학은 성서 본

문과 성서 해석에 근거하여, 교리와의 상호대화를 통하여, 교리를 극복

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45

13) 서남동,『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안병무,『민중신학이야기』(서울: 한

국신학연구소, 1988).

14) 이정배,『한국적 생명신학』(서울: 감신대출판부, 1996). 박재순,『한국생명신학의 모

색』(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15) 정현경,『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아시아 여성신학의 현재와 미래 아시아신학7-』

(왜관: 분도출판사, 1994). 이은선,『한국 여성조직신학 탐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16) 김영선, 『생명과죽음』(서울: 다산글방, 2002).

Page 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유는‘구약성서’와‘유대교’에서‘호명’이 금기시되었던‘YHWH’를

‘주’로‘호명’하게 된 데서 비롯된다(로마서10장 9절). 이런 맥락에서

신약성서에서예수그리스도를‘주’로 지칭하게된 것은시사하는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Cf. 사도행전3-4장의금기).

그런데 이‘주’가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구약성서의‘야훼’를 지

칭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예수’와‘야훼’간의 연속과 단절에 해당

하는 복잡한 것이다. 이는 쿨만이“만약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 아버지

와 예수Kyrios 간의 완전한 동일화만 말하고 양자 간의 구별을 하지

않고 있다고 우긴다면, 너무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17)라고 말한

것에 비추어볼 때 의미 있는 문제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의 신관을

지칭하는‘주(키리오스)’또는‘예수 이름’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한

주요한 기호라고볼 수 있다.

(2) ‘현대신학’은‘학제간 공동연구’로 진행되는‘통합학문의 시대’

에 위치해 있다. 이는 내용 면에서 뿐 아니라 방법 면에서도 통합적인

학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사용되는‘주의 이

름’또는‘예수 이름’은 신을‘대리’하는‘기도 형식’과 아울러‘신적 능

력’을 드러내는‘치유 사역’등의기호로 통용되고 있다. 너무나 일상적

인 기도 형식과 치유 사역에 사용되는 이 기호는 역설적이게도 신학적

인 문제제기를 받아본 일이 없을 정도로 신앙인에게서 그리고 신학자

들에게서낯설면서도 친숙하다. 그런 측면에서‘신약성서’에 표기된‘주

의 이름’은 고고학, 사본학, 배경사, 해석학 등 다각적인 면에서 검토되

어야 할 것이다. 또한‘기독론’의 범주에서 이해하고자 하는‘주’는 신

학사에서 제기된‘군주론적 유일신’과의 관계에서,‘내재적-경륜적 삼

위일체론’과의 관계에서,‘계시’와‘경험’간의관계에서 어떤 의미인지

를 갖는지 질문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키리오스’라는 기호가

실재에 관한 것인지 담론에 관한 것인지, 주체 자신에 의한 것인지 청

속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감히 하는 말이다. 21세기는‘학제간 공동

연구’의 시대라 볼 수 있다. 연구의 깊이가 더해가는 개별체로서 학이

또 다른 개별체로서 학의 진로를 주시하지 못한다면 갈등과 분열의 골

이 깊어질 것이다. 회개와 화해의 장을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진보를 신중하게 관측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라 사료된다. 어떤‘기호’

가 기독교에서‘현대신학’의 주제로 던져지거나‘토착화 신학’의 테마

로 다루어지기위해서는최소한 두 가지조건을 충족해야한다고 본다.

(1) 성서에서 다루어지는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밀접한가?

제자들에의해 전승되었는가?

(2) 현대신학의정황과 현시대적요청에 부합하는가?

첫 번째 조건은 내용에 관계되는 것이고 두 번째 조건은 방법론에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면에서 볼 때 기호‘키리오스’(Kyrios) 또

는‘예수 이름’에 대한 연구가 정합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향후 논의될 가능성으로 볼 때, 위의 두 조건에 부합하는지를 우선 거

론하는 것은가능하리라본다.

(1) 우선‘키리오스’또는‘예수 이름’은‘신약성서’에 등장한다(야훼

대신 키리오스가 사용된 구약성서의 번역서인 칠십인 역이 있기는 하

지만). 이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도 하고,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확실히‘신약성서’여러 곳에서 현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두 번째로

‘키리오스’또는‘예수 이름’은 이 땅에서의예수-그리스도의인격-사

역을 지칭하고‘키리오스’에 준하는‘내 이름’(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자

신을 두고 하는 말)은 하나님 우편으로 가신 다음의 인격-사역까지도

포함하는 의미에서‘요한복음’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키리오스’와‘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에 관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제자들의 전승에 관해 말하는 것은 간

단하지 않다. 칠십인역은‘야훼’를‘주’(키리오스)로 대체하고 있다. 그

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47

17) 쿨만, 『신약의기독론』(1988), 376.

Page 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것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력하게“이

름은 교환할 수 없다. 그것은 일회적,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다. 그러므

로 이를 번역할 수 없다. 야훼 이름을 바꿀 수 있다고 하면 첫째 계명

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18)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어떤 다른 이름

이 주어지지않았다고말한다. 이는구약성서의신명에 관한것이다.

반면 그가 신약성서의 신명에 관해서는 말하는 대목은 이러하다.

“야훼가 번역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번역불가

능하다.”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교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교환할 수도 번역할 수도 없는 두 이름이 산출된다. 그것은 야훼 이름

과 예수 이름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연속적이라면 이 이름은 서

로 교환되고 번역되어야 한다. 즉 교환 방식에 따라 야훼 이름은 예수

이름으로 대체되고, 번역 방식에 따라 히브리식 야훼 이름은 그리스식

예수이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렌은 이 질문을 피해간다. 단지야

훼가 번역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번역될 수 없다는

말만 남긴다. 야훼 이름과 주의 이름 간의 교환과 번역 문제는 거론되

지 않는다. 그가 교환불가능성을 말하는 이유는 구약성서의 본문 정황

에서이고 신약성서 또한 그런 범위 내에서이다. 보렌에게서 교환과 번

역은연속성의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속성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간의 연속이 아니라 구약성서의 본문에 한정된 것이다. 보렌은 이름에

관하여서는 신·구약전체의 연속성을 부정한다. 본문의 정황에서 부정

된 연속성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라는 큰 범주에서는 당연하게 부정된

다. 이런 의미에서 보렌은‘야훼 이름’과‘키리오스’간의 교환 및 대체

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고볼 수 있다. 보렌은 단절또한말한다. 그

가 말하는 단절은 철학적 신과야훼와의대결, 이름없는 신과 야훼간

중에의한것인지에따라접근방법은달라진다.

I I. 이름의경쟁: 보렌

성서에 나오는 신의 이름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주요한 질문 가운

데 하나는,‘하나님의 이름’,‘야훼’등으로 표기되던‘구약성서’의 본문

과‘주의 이름’,‘키리오스’,‘그리스도’등으로 표기되는‘신약성서’본

문을 어떻게 연결하여야 하는가 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구약성서의‘야훼이름’과 신약성서의‘주의 이름’또는‘예수

이름’간의 단절이고, 둘째로는 두 이름 간의 연속이다. 여기서 이름 간

의‘경쟁’이 발생한다. 가령 사도행전에는“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4장 12절)라고 하고 빌립보서에는“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1장 9절)라고 한다. 전자의

구절은 구약성서의‘야훼 이름’을 폐기하거나‘야훼 이름’이‘주의 이

름’으로 교환되는 인상을 주며, 후자는‘주의 이름’이‘야훼 이름’과 동

일하게 높여져서‘주의 이름’이‘야훼 이름’을 대체한다는인상을 준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이름 간의 경쟁을 통해 볼 때, 한 이름

에서다른한 이름으로의 교환또는대체가 실제로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름의 경쟁관계에 문제 제기를 한 이는 독일의 설교학자 루돌프

보렌이다. 그러나 보렌은 야훼이름과 구약의 다른이방 종교의 신과의

교환을 문제 삼았지 신약의 주의 이름이나 예수 이름과 연관하여 생각

하지는 않았다.『설교학 원론』(제2부 설교의 근거, 제5장 하나님의 이

름, 제2절 해석학의 문제로서 이름)에서 보렌은‘야훼 이름’을‘바알’

로 교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출애굽 시대의 종교다원화상황

하에서, 바알은 구약성서가 말하는‘유일신’사상을 대변하고 강화하는

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49

18) 루돌프 보렌, 『설교학원론』(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118.

19) 앞의책.

Page 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령-예수이름-함께 하시는 하나님(1:18-23)22)

하나님-하나님의 종인예수그리스도-성령(12:18-21)23)

아버지와아들과성령의 이름(28:16-20)24)

이 구도는‘야훼 이름’과‘예수 이름’간의‘경쟁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 주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유일성 또는 통일성에있어서 그러하

다.‘야훼 이름’과‘키리오스’의 또 다른 이름인‘예수 이름’간의 독점

적인‘경쟁관계’구도는 이런 삼위일체 구조를 통해 통일적인 구도를

모색하게 한다. 즉 이 구도는“‘하나님의 통일성’은 침해하지 않으면서

도 하나님과 성령에 의한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독점적 관계’를 생성

하고 전권의 근거를 만드는 예수와 하나님으로 연결되는 기능적 배열

의 것이며 이 두 대극간의대결에서비롯된다.

I I I. 야훼이름과예수이름간의연속과단절의문제:

루크-슈뢰더

최근에 야훼 이름과 예수 이름 간의 연속과 단절에 관하여 질문을

제기한 이는 루크-슈뢰더이다. 그녀는 보렌의 단호하면서도 모호한 주

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에 따르면, 보렌이 주장한‘교환불가능

주의’와‘번역불가능주의’는‘야훼와 바알’간의 관계에서이지‘야훼 이

름’과‘키리오스’또는‘예수 이름’간의 관계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20)

이는 논자가, 앞서 서술했듯이, 이해한 보렌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루

크-슈뢰더는 보렌이 단지‘야훼 이름과 바알’간의그리고‘키리오스와

바알세불’간의 불가능성을 내세웠을 뿐,‘야훼 이름과 키리오스’간의

불가능성에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본다. 구약성서와신약

성서를 연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질문해야 하는 야훼 이름과 키리오스

간의 관계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문

제에 대한답을 찾지않는다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잘 부각시

키지 못할 뿐 아니라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간의 관계 또한 잘 설명하

지 못할것이다.

야훼 이름과 예수 이름 간의 연속과 경쟁 문제를 제기한 이는 루

크-슈뢰더이다. 그녀는‘예수 이름’이 나타나는 신약성서 대부분의 본

문을 주석한다. 신약성서의담론으로서 예수이름을 분석하면서 역사적

실재로서 예수에 접근한다. 우선‘마태복음’에 나타난 이름 공표 문맥

을 주석하면서3개의‘삼위일체구조’를 발견한다.21)

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51

20) Adelheid Ruck-Schröder, Der Name Gottes und der Name Jesu: eine neutesta-

mentliche Studie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 1999), 5.

21) Ibid. 262.

22) 마태복음 1장 18절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

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

에 주의사자가현몽하여이르되 다윗의자손 요셉아 네 아내마리아데려오기를무

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번역한즉 하나님이우리와함께 계시다함이라.

23) 마태복음12장 18절을 보라내가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

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1)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하리니 또는 연기나는 삼대를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

루려하심이니라.

24) 마태복음 28장 16절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

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

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2)세례를 베풀고 헬, 또는

침례 20 내가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지키게 하라볼지어다 내가세상끝

날까지너희와 항상함께 있으리라하시니라.

Page 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능하지만‘하나님의 이름’을 대체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근거는 두지

만 대체하지 않는 이름으로서 키리오스와 야훼의 관계는 유일신적인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격’이 다른 이름이 된다. 즉 삼위일체의 제1격

에 해당하는야훼의 이름과 제2격에해당하는키리오스의이름이다.

‘빌립보서’의 찬양시를 주석하면서는, 칭호‘주(키리오스, 2:11)’를

‘YHWH’가 아니라 예수를 지극히 높여“모든 이름 위에뛰어난 이름”

(빌 2:9)에 연관시키면서예수와 하나님 간의‘친밀함’31)을 보인다. 그녀

는 이름이 주어지는 과정을‘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빌립보서’에서도

“계보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계보의 끝에 등장하는 이름은‘연결’,‘친

밀함’이지 계보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과의‘일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치’가 아니라서 통일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삼위일체 구조’가

보여주듯이‘통일성’과‘밀접한 관계’는 각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

다. 삼위일체의 핵심은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고 관계에 있어서는 차이

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설명은‘히브리서’1장 4절32)과 2장 12절33)을 주

석하면서부연된다. 이 문맥에 따르면 예수는‘YHWH’ 그 자체는 아니

지만‘다른 이름’인‘예수 이름’을 담지한 분이다. 여기서‘담지자’

(Träger)는 그 속에 들어가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형식이다. 이는 내재

적 삼위일체의제2격과경세적 삼위일체의 제2격의일치문제와도같

은 문제이다. 즉 신성만을 지닌 신적 제2격의 상태에서와 신성과 인성

을 지닌 신적 제2격의 상태와의 일치 문제와도 같은 논의이다. 육신이

된 제2격은 육신이 되기 전의 상태와 같기도 하지만 같지 않기도 하

다. 그래서 루크-슈뢰더가 일치의 문제를 다루면서‘담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는의의가 있다고 본다.

을 연상시킨다.”25) 마태복음28장의‘이름’은 단수인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유일성 또는통일성을표시하는것이다.

이렇게 독점적이면서도 통일적인 구도를 가져다주는 신약성서의 본

문이‘예수 이름’과 관계된다는것이루크-슈뢰더의 견해이다. 가령베

드로의 설교(행 4:12 전후 문맥)는 오순절 설교(행 2:14)26)와 빌립의 전

도(행 8:12)27)가 함축하는 형식과 일맥상통한다. 즉“하나님 나라의 공

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권능이 그

것이다.”28) 또한 사도행전4장 12절의‘다른 이름에는 구원이 없다’는

구절은‘기독론의 강화’(하나님의 이름과의 관계)인 동시에‘예수 이

름’과“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떼어내지 않을 경우에만 유효”29)하다

는‘통일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굳이‘다른 이에게는’을 덧붙인 이유에

대하여 루크-슈뢰더는“하나님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는 예수의 이름에

서 구원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또한“다른 어떤

이름이 아니라 예수이름으로하나님의이름에 덧붙여질 수 있는것이라

고 말하면서도 예수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 차지하지 않는다”30)라

고 말한다.

‘사도행전’주석을 통해 루크-슈뢰더가 내리는 결론 또한 이름 경

쟁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하나님의 이름’에 덧붙

여진‘예수 이름’을 말하면서‘통일성’의 근거를 전자(하나님의 이름)

의 이름에 둔다. 그리고‘하나님의 이름’에 덧붙여진‘예수 이름’은 가

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53

25) Adelheid Ruck-Schröder, op.ci. 262-263.

26) 사도행전 2장 14절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

과 예루살렘에 사는모든사람들아이 일을너희로 알게할 것이니 내 말에귀를기

울이라.

27) 사도행전 8장 12절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

함을그들이믿고남녀가 다 세례를받으니.

28) Adelheid Ruck-Schröder, op.ci. 263.

29) Ibid..

30) Ibid.

31) Ibid. 264.

32) 히브리서 1장 4절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

업으로얻으심이니.

33) 히브리서 2장 12절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중에서 찬송하리라하셨으며.

Page 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제까지 전개한 주석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바로 위의 인용 단

락을 평가해 보자.‘마태복음’첫 부분 주석에서‘예수 이름’은‘전(前)

-삼위일체 구조’의 한 요소이지만 뒷부분에 가서는 통일성 범주(단수

로 된 이름)에서서술된다. 그리고 이 이름은 덧붙여지고‘담지’된 이름

으로풀이된다. 그러나‘요한복음’에서는‘구약성서’에서 하나님 자신이

라고 보인 바 있는‘은혜와 진리’(출 34:6, 인자와 진실), 바로 이것을

‘담지하고-매개하고-그자체’가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을 본 아들 예

수 그리스도,‘예수이름’으로 표현된다.“기독론은 하나님의 통일성의

해석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탄생 계보-이름’이 예수로 위임

되는 것이 유태인의 이해로는 신학적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신약은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의 일치와 통일성에 관한 성서적 확

신을객관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이다.”37) 이렇게‘요한신학’의 증언에 따

라‘야훼 이름의 통일성이 곧 예수이름의 통일성의근거’가 된다는 것

을 보여준다.

I V. 주의이름또는예수이름: 신조사에서검토하기

현대신학의 결실 중 하나는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역사적 예수에게

로 가까이 가게된 데 있다. 이런흐름은 여러겹으로 덧씌워진 성서의

예수 이해에서 비롯된다. 가령‘하나님=예수’라는 이해,‘나사렛의 목

수=예수’라는 이해,‘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예수’라는 이해는 지

난 2천 년의 신학에서 일정한 결합 방식을 유지해왔다.‘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에도,‘역사적 예수’문제는‘가현설’등으로 제기되었지만,

이는‘신앙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초기 교회는‘두

기독론’, 즉 선재의 기독론과 거양의 기독론,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

로부터의 기독론을 통해‘역사적 예수’와‘신앙의 그리스도’를 조정하

이런 견해는‘요한복음’에서 더 두드러지는데,‘히브리서’에서 말하

는 정도의 수준을 넘어선다. 즉“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즉 그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예수는 그 이름 자체인 것이다”34)라고 말한다. 그녀가 평

가하는‘요한복음’은“‘요한복음’에서는 아들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

이 한없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담지’한 자로

서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담지한 자”35)로 소개된다. 루크-슈뢰더의

‘요한복음’이 보충해주는 이름에 관한 증언은 이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이름공표에 관한 본문은 사도들의 설교

나 전도에 관계된 수준이었으나‘요한복음’은 경험적인 요소에서 출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적인 측면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근본적으로 다른구도에서접근한다.

‘아들 이외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 1:18)는 요한의 기

본테제 또한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출 32:13-15, 34:6). 하나

님의 이름을 묘사하는“은혜와 진리”가 인간화되어, 다시 말해 육신

화된 로고스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동시에“은혜와 진리”를 위임받은

자(요 1:14)로서의 시작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요한의 이름에 관한 개

념은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계시론적 기능을 갖고 있다. 어느 누구

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육신화된 로고스를 의미하는 아들

의 이름은 은혜와 진리의 매개자로서 아버지의 이름과 더불어 아버

지 자체를 명시한다(요 17:26). 이러한 현상에 부합하는 인간의 태도

를 요한은“예수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요 1:12) 또는“예수 이름으

로 구한다”(요 14:13)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예

수를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예수의아버지로서인정한다면, 하

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하는것이다.36)

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55

34) Adelheid Ruck-Schröder, op.ci. 264.

35) Ibid..

36) Ibid. 264-265. 37) Ibid. 265.

Page 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강조하기 위해 맨 앞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계시’에 대한

‘고백’은 겉으로는‘예수가 주’라고 보이지만 우선순위에서는‘주가예

수’라는 것이다. 이는 야훼 이름‘에서’예수 이름‘으로의’,‘점진적’계

시를 드러낸다. 그렇다고 야훼‘와’예수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초대교

회에서 양태론과양자설을포함한‘단일신론’이 단죄된이유도 이런맥

락에서라볼 수 있다.

‘계시’와‘고백’은 서로 다른 극에 위치한다. 계시의 점진성은 순서

상‘로고스→역사적 예수→신앙의 그리스도→예수 이름(키리오스, 내

이름)’으로 이어진다.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기호‘예수 이름’은 기독론

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호가 맨 나중에

거론되느냐 맨 처음 거론되느냐에 따라 실재와 담론의 관계는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루크-슈뢰더는‘예수 이름’이 공표되는 문맥은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예수의‘실존’문제가 제기되는 곳이라고 말한

다. 즉‘예수이름’은 실재에 관한것이아니라 담론에 관한것이된다.

예수는 더 이상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진술들은 예수의 권능과 행하심과

제자들의복음전파에 있어서의하나님의 권능을현재화한다. 예수의

“이름으로”행하는 자는, 예수 자체를 현재화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 하나님을 현재화하는것이다.39)

이 문구를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루크-슈뢰더가 말하고자

하는 맥락과는 맞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역사적 예수

에 대한 충분한 전제 위에 이름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예

수이름’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현재화해야 할 때, 하나님의 통일성을 담

지하고-매개하고-그 자체라고 나타내야 할 때 사용된다. 이는 루크-

려 한 듯하다. 역사적 예수에는 귀납적인 요소가 있으며 신앙의 그리스

도에는 연역적인요소가 있다.

제1-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통해

그리스도의‘신성’을, 제3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는 성자와 인간의

동일본질을 통해 예수의‘인성’을, 그리고 제4-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에서는 한 위격에 두 본성과 두 의지의 제2격에 일치를 통해‘양성이

의 2위격일치’(兩性二意 二位格一致)를 정리하였다고 볼 수 있다.38) 이

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오늘날 북미를

중심으로 진행되고있는‘예수세미나’에서는‘역사적예수’를 더 연구

함으로,‘신앙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시금 정리하고 있다.‘예수 세

미나’에 따른 성서해석은‘역사적 예수’를 더 연구함으로‘신앙의 그리

스도’로부터 독립적인 한 항목으로 등극시킨다. 이런 과정에서 두‘예

수’는 각각서로다른양축으로이해되기시작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빌립 등이 선포한‘예수 이름’은 단지‘역사

적 예수’에 관한것일수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역사적 예

수’가‘신앙의 그리스도’로 내재화된 다음 고백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역사적 예수가 신앙 안에서 예수로 이해된다.’라는 것은‘주가

성육신’한‘계시’를 믿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계시’가 먼저 있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반대로‘예수가 주’라는‘고백’이

우선적이라면 이는 환원적인 것이 되기때문이다.‘환원’이란현재에서

과거로 퇴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에 따르면 모든 주제가‘주’로 환원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요한복음’의 로고스론은‘계시’의 중요성을

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57

38) 이 신조의 원문을 보려면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이장식,『기독교 신조사』(서울: 컨

콜디아사, 1993). A Select Library Of The Christian Church, The Seven Ecumenical

Councils Of The Undivided Church,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4,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1999. 일명‘양성일치’기

독론을 논자는양성각각에 신적의지와 인적의지가있기에‘양성이의’라고표기하

고,‘양성이의’는 제2격인‘성자’의 위격에 해당하기에‘2위격 일치’라고 표기한다.

그래서‘양성이의2위격일치기독론’이라고 표기한다.

39) Adelheid Ruck-Schröder, Der Name Gottes und der Name Jesu: eine neutesta-

mentliche Studie(1999), 267-268.

Page 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전통적 기독론에서 제기한 제2격의 신적 동일본질과‘양성이의2위격

일치’(兩性二意 二位格一致)가 담겨져 있다.‘예수 이름’은 신성으로서

성부와통일성을확보하는동시에,‘양성이의2위격일치’라는‘결합’을

볼 수 있는곳이다. 이때 결합은 제4차 에큐메니칼 공의회(451년 칼케

돈 신조)에서고백하기시작한‘속성의교류’로 설명된 바 있다.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론을 존중하는 칼뱅에 의하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의 이름이 부분적으로라도 사용되는 경우는, 그

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간적 입장에 설 때에한해서다”41)라고말한

다. 양성의 교류와 통일의 예를 요한복음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칼뱅은 자신이 제시한 여러성구들보다“주의이름”이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할 수 있는‘기호’라고 말하고 있다. 칼뱅이‘주의 이름’

을 다루는 맥락은 성서의 기호 가운데‘주의 이름’을 양성의 제2격에

서의통일이 실현되는곳으로 보고있다.

에큐메니칼 공의회와 칼뱅과 함께 우리는 신약성서에서‘성육신된

예수를 주’라고부르고 이를‘예수 이름’에 연관시키는본문을 다수발

견한다. 다시 말해 인성이면서 신성이다가‘인성-신성’이 결합되는 지

점일때, 즉‘속성 교류’의 때를찾는다면이 외에도 여러경우를 들 수

있다. 가령, 한편으로 가나혼인잔치에서공생애 첫 이적을 행하는 장면

이다. 즉“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주인에게 갖다 주라”고 하실 때

이고, 주체와 객체의 공감을 보여주는“누가 내 옷깃에 손을 댔느냐”

말씀하시면서12년 동안 혈루증으로고통받던여인에게“네믿음이 너

를 구원하였다”고 말할 때이고, 동성애적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

던, 나흘 동안 무덤에 있던나사로에게“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고“묶

였던 끈을 풀어주라”고 말씀하실 때 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 자

슈뢰더가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이름과 예수이름을 연구한 후 내리는

결론이다. 그녀는‘야훼 이름=예수 이름’이란 공식을 주장하지는 않는

다. 진정한 통일성은‘야훼 이름’에 있고,‘예수 이름’은‘담지-매개-

그 자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계보를 타고 내려왔기에 진정한 통일성

을 획득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통일성’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이

는 마치 피조물이 하나님을 닮았지만 불완전하게 닮았다고 말하는‘유

비 개념’과도같은방식이다.

논리적으로 맞지않는 이런유비적 표현을 뒷받침해주는것은‘뫼비

우스의 띠’라는 위상학이다.40)‘뫼비우스의 띠’는 안쪽 표피와 바깥쪽

표피가 교류하면서 봉합되는 것을 표현한다. 출발점은 종료점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야훼 이름’과‘예수 이름’은‘안’과‘밖’이지만‘밖’과

‘안’이 되고 결국 같은 자리가 된다. 이 둘은 다른 것이지만 하나이다.

하나가 되는이 지점은 쌍 화살표로서상호소통의 성격을 지니는‘야훼

↔역사적 예수·신앙의 그리스도↔키리오스’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안쪽 표피와 바깥쪽 표피가 한데 섞여 있다. 그래서‘야훼이름∞역사

적 예수·신앙의 그리스도∞키리오스’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안과

밖은 분명 다르지만 연결된다. 그런면에서‘뫼비우스의 띠’는‘연결선’

이 곧‘단절선’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통일성을 보여준다.

‘야훼↔역사적 예수·신앙의 그리스도↔키리오스’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근거하여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각 항목에 관해서는 기

존에 발표된 여러 연구를 참조할 수 있지만, 각 이름의 연관성에 관해

서는 연구가 진전되어야 할 것 같다. 항목‘야훼와 키리오스’는 상호

연관되고,‘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그 사이에 섞여있다. 즉

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59

4 0 ) 참조. J. Lacan, L’identifcation, 1962. 4. 11일 강의. J. Lacan, La Logique du

Fantasme, 1967. 1.11, 1.18, 1. 25일 강의. J.Lacan, “L’étourdit,” Scilicet 4(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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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Editions de l’Association freudienne, 1990), 167-257(ch. V I. L’a Topologie

du sujet.).

41)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Paris: Librairie de Ch.Meirueis

et Compagnie, 1859), 272.(2.14.3.) 제2권 14장 1-6절. 이오갑.“칼뱅의 속성 교류

연구,”『신학사상』81(1993). 이오갑,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연구,”『기독교사상』

420 (1993): 80-93, 421(1993): 119-136.

Page 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예수 세미나’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43) 이상직은 이런2

자 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으로‘현존 그리스도론’을 소개한 바

있다.44)

이런 시도와 함께 이런 시점에서 이 글은 다시금‘양성이의2위격

일치’의 기독론을 보여주는 성서의 기표로서‘주의 이름’또는‘예수이

름’을 제시해 본다. 몰트만45) 이후신학계에서 새롭게 논의되고있는삼

위일체론이 성립되려면, 삼위일체론의한 요소인 기독론 또한우선적으

로 합의된 내용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은‘양

성이의2위격 일치’의 기독론 기표로서‘주의 이름’또는‘예수 이름’

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미약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준비되었음을 밝

히면서 끝을맺는다.

주제어

기독론, 주, 예수이름, 보렌, 루크-쉬레더, 신조

Christology, Lord, Name of Jesus, R.Bohren, Ruck-Schröder,

Creeds

접 수 일 2010년 10월 14일

심사 (수정일) 2010년 10월 30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신에게서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

어라”고 말하면서 이적을 경험할 때 등이다. 그러나 이런 성서의 담론

이 기이한 신화의 자리로 추락한 것은 현대의 현저한 일이다. 그러나

신앙-성서-신학의 결합방식에 대해 고민하며‘양성이의 불일치’의 시

대에서 신학하는 논자에게 이런 성서본문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고 하겠다. 이를어떻게 읽을것인가 하는문제는 논자가 이 글에서 스

케치한‘양성이의2위격일치’라는‘키리오스’또는‘예수 이름’을 어떻

게 바라볼 것인가에 주목하면서 비롯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옴니버

스식 전개방식에서 더 구체적인 연구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더 구체적

인 성서학적 및 조직신학적 깊이 읽기뿐 아니라 많은 지면의 할애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가면서

‘현대신학’에서‘예수’라는 주제는 뜨거운 감자이다.‘신약성서’에서

‘예수’는 나사렛의 인물, 그리스도, 주, 예수 이름 등 다양한 겹으로 이

해되고 있다. 그러나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니케아신조) 이후, 양성

일치 또는 두 품성의 한 위격에서의 일치로 대변된 삼위일체의 제2격

은 현대신학에서 위협을 받게 되고, 그 통일성은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

다. 이런 시점에서 제2격을 회복하여 삼위일체론의 한 요소로 다시 복

귀시키고, 통일성-관계성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일은,‘현대신학’에

서 귀중한 주제를 재론하는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난 2천 년간 기독론(Christologie) 연구는‘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나사렛 예수’라는 2자 구도로 치달아 왔다. 오늘날 한국적인

상황에서도 이런 논의는 극명하게 드러난다.‘신앙의 그리스도’연구는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42) 동시대적으로‘역사적 예수’연

구에 몰두하고 있는 김진우와 김진호는 북미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인

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61

42) 이종성, 『그리스도論』(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43) 김진호, 『예수 르네상스-역사적 예수연구의 새로운 지평』(서울: 한국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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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이상직,“현존 그리스도론의과제,”『성장 이후 시대의 교회와 신학』(제2회 전국 조

직신학자대회2007.4.27-28 충북영동단해교회), 24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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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63

Page 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ême. On commence cette étude selon les deux questions:

1. Quel est le but de rechercher Jésusonoma, dans la situation de

deux pôle entre le Jésus historique et le Christ en foi. Quelle est sa

position dans la christologie?

2. Le Jésusonoma ou L’onoma que les évangîles et les êpîtres se

présentent, quelles sont son identité dans la trinité et sa signification

théologique?

La première partie ébauche la situation de la théologie contem-

poraine, la deuxième partie développe le Jésusonoma dans la

catégorie de la christologie.

C’est une écoute encore une foi de la Bible et une lecture sans pré-

voir de l’écritures qu’on essaie de voir le mot Jésusonoma dans cette

étude. On le considère en tant que le signe de la trinité et une autre

unification de la christologie.

The Name of Jesus and The Christology ofTwo Natures

Kang, Eung Seob

Associate Professor

Yaeil Theological Seminary

Hwasung, Korea

Cet article se développe sur lequel le signe Jésusonoma est un

autre représentation de la trinité. Mon article précédent ‘Lacan, objet

a, Jésusonoma’(Journal of Lacan & Contemporary Psychoanalysis,

Vol. 8 No. 1 Summer 2006) est une semence du sujet présent, et mes

autres article parus ‘De la relation entre verbe et mens de St.

Augustin selon la sémiotique lacanienne’(Research in Philosophy

and Phenomenology , Vol. 36, Winter 2008) et ‘Lecture

d ’I d e n t i f i c a t i o n selon J. Lacan’(Journal of Lacan & Contemporary

P s y c h o a n a l y s i s, Vol. 9 No. 2 Winter 2007) sont une graine de la

méthodologie. On prend la psychanalyse sémiotique de J.Lacan

comme la méthodologie.

La christologie présente est à la tension dure des relations entre la

christologie deductive(Logos→Sarx) et la christologie inductive(Sarx

→Pneuma ou Anthropos→Theos) de sorte que le deuxième personne

de la trinité est blessé. On ne peut pas non plus décrire univa-

lentement la christologie et la trinité. Donc on cherche un autre signe

pour les remplacer. Cette étude vise à chercher un mot nouvel dans la

Bible qui indique le deuxième personne de la trinité et la trinité soi

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강응섭, 예수이름과양성일치 기독론 65

Page 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나님의선교?-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묻다

정미현

(스위스바젤미션 21, 여성과 젠더데스크의장)

I. 들어가는말

선교와 식민지주의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은 교회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비극적 사실이다.1) 가톨릭 선교가 시작되고 태동한 때는 다름

아닌 종교개혁이 일어난 직후였다. 즉 이러한 현상은 유럽 대륙 안에

생겨난 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바깥으로 돌리는 한 방편과 연관되

어 있는것이다. 가톨릭 교회 내부적 문제를 감추거나 무마하고자 하는

하나의 정책으로써 다른 대륙으로의 선교 활동이 이 즈음진행된 것이

며 그것은 식민지 정책과 맞물려 있기도 했다. 그럼으로 인하여 선교와

식민지 팽창정책은 특별히 남미,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세기 동안

이 맥락에서진행되었다.

1511년 스페인 사람들이 쿠바에 도착했을 때 이러한 일화가 전하여

지는 것이있다. 그 지역하튀추장은 자기부족사람들을 불러 놓고,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67-98

1 ) Vgl. Karl Hammer, Weltmission und Kolonialismus. Sendungsideen des 19.

Jahrhunderts im Konflikt (München: Kösel Verlag, 1978).

Page 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직 말씀에 의지하고, 정치적 권세나 교파적, 경제적 이익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그러한 선교, 생명을 살리고, 진정한 기쁜소식을 나누는 선교

의 본래적 모습,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에 동참해야 하는

그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4) 이제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를 부산에서 치루게 될 한국교회는 신학적으로 선교와 에큐메니즘에

대하여 보다 심도 깊게 준비해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현재

신학적 논의를 점검하고 교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될 방향을 모색

해야한다.

과거에 대한기억은 미래에 대한준비에 꼭 필요하다. 1926-1939년

사이에 바젤선교부5)의 원장을 지냈던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

stein, 1894-1952)은 1928년에 행한 강연에서 선교의 방향성을 정립

하기 위한 논의에서 바르트 신학의 중요성을 역설 하고 있다.6) 이러한

바르트 신학이 선교신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한국 신학계 뿐만아

니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하르텐슈타인이 바르트

의 신학에서 발견한 이와 같은 신학적 토대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행

하고 있는 선교의 문제성을 짚어보고 개선 방향과 지향점을7) 추구하는

황금은 스페인 사람들의 하나님이라 설명하고 이를 다 강에 버리게

하였다. 그러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여겨진 황금이 자기 부족 사람

들을 더 이상 해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 지역이

스페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고 난 뒤에 그는 산 채로 화형당했다.

죽음이 임박해서 프란시스회수도사가 그에게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해강론을 하였고, 그가 믿음을 갖은 채 죽게되면 축복을 받을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가 말문을 열고 질문했다. 그

천국의 문이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느냐고 말이다. 천국문이

기독교인인스페인 사람들에게 당연히 열려 있다는 대답을 수도사를

통해 듣게 된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천국이 아니라 차라리 지옥

에 가겠다고 바로 답변을 했다. 그 이유는 잔혹한 스페인 사람들을

다시마주하고싶지않기때문이라고했다.2)

21세기에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방법이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과거에 대한죄책 고백과 더불어 진행되어야 한다. 가톨릭 선교

가 시작되던 초기에 가톨릭 신학자 중에는 바르톨로메 드 라 카사스

(Bartolome de la Casas)3)와 같은 인물이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선교

와 신학의 문제에 일찍이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감스럽게도 개신

교에는 이러한 죄책 고백과 갱신의 노력이 없었다. 신식민주의라 불리

우는 지구화된 현 경제 체계는 성실하게 자기의 땅에서 땀 흘려 노동

하여소득을 얻어야 하는 소박한 사람들이 제대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살게 하지못한다. 이와같은상황에서 초대교회의 선교의 방법대로 오

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69

2) Vgl. Fritz Blanke, Europa und der Kolonialismus (Zürich: Artemis Verlag, 1962),

99.

3) 참조: 정미현,“개혁주의적 원칙: 마틴 루터-바르톨로메 드 라 카사스를 중심으로,”

「말씀과 교회」, 16 (1997), 80-87. Vgl. Mariano Delgado, Hunger und Durst nach

der Gerechtigkeit. Das Christentum des Bartolome de Las Casas ( F r i b o u r g :

Kanisius, 2001).

4) Vgl. Fritz Blanke, Europa und der Kolonialismus (Zürich: Artemis Verlag, 1962),

118.

5) 바젤 선교회는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스피틀러(Christian

Friedrich Spittler, 1782-1867)에 의하여1815년 스위스 바젤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에큐메니즘과 선교를 위한 교육 전문기관이다. 2001년 그 기구와 조직, 명칭이 바뀌

어 현재는 스위스미션21 (http://www.mission-21.org) 로 개편되었다.

6) 하르텐슈타인이바르트로부터받은 신학적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참조: 김은수,『현

대 선교의 흐름과주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131ff.

7) 한국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미국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

이다. 우리가 받은 것을선하게 되돌려 주고싶은 한국인의아름다운 선한 열정이 가

득하기 때문이다. 또한그 안에는 훌륭한의도로 아주헌신적사역을 하는이들이있

음을 먼저 인정한다. 다만 필자가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의도구로사용되고있는선교, 에큐메니칼정신을 몰이해하고, 현지신학교와 교

Page 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계 선교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회개를 촉구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이 내용은 교회의 핵심적 과제가 선교이며, 선교의 최종목적은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상호 교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활

동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하르텐슈타인은 교회 숫자를 늘리는 것

이 아니라, 이 세계와 우주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 선교의 최종 목표임을 분명히 한다. 즉“선교란 단순히

개인의 회심이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복종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공동체의 회집에 대한의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

지고 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11) 하나님의

선교란 이 개념은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 시각으

로부터 비롯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특성과 예언적 직분에 입각

한 기독론에 강조점을 두고, 종말론적 차원으로 연결된다. 빌링엔 국제

선교대회에서 비롯된 에큐메니칼 연합운동의 역사적 성과는 서구식 강

압적 십자군 선교의 문제성을 구체화하고, 하나님의 선교라는 거시적

맥락에서예수그리스도를따르는 선교적 행진을 되새기는데 있다.12)

데에도 아주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바로그 점에착안해서 바

르트 신학을 되짚어 보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이다. 바르트가 선교를

하나님의 활동으로 규정하여 하나님의 선교라는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8) 현재 진행중인 부산 총회를 둘러싼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의논쟁은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남으로논외로 한다.

I I. 하나님의선교개념의기원과전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1952년 빌링엔 국

제 선교 협의회에서 네덜란드 신학자 호켄다이크(Johannes C.

Hoekendijk)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이 아니다. 라틴어 형식의 이 개념

은 당시 독일 슈투트가르트 감독이었던 하르텐슈타인이9) 빌링엔 대회

에 관한 보고서를 쓰는 과정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다.10) 이 개념은 세

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71

회 체계,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한채 독단적으로벌이고있는선교, 기독

교 전통과 역사 안의 다른 교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선교, 양성 평등의 원칙을

전혀염두에 두지않은구시대적 선교, 종교간의평화, 연대와협력의원칙을 무시한

선교, 총제적으로19세기의 선교국과피선교국의 가부장적부권주의의모델을 복사한

선교,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의원칙을 전혀염두에두지 않은선교의 내용과방법을

지적하는것이다.

8) Vgl. Karl Barth, “Die Theologie und die Mission in der Gegenwart”, Theologische

Fragen und Antworten. Gesammelte Vorträge Bd. I I I (Zürich:TVZ 1957), 115.

9 ) Vgl. Karl Hartenstein, Ein Leben für Kirche und Mission, hrsg. von Wolfgang

Metzger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1953).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Christof Sauer,

Mission und Martyrium: Die Bedeutung Karl Hartensteins für die evangelikale

Suche nach einer Theologie des Martyriums (Tübingen: Ch. Sauer, 1991).

10) 선교학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선행 연구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남으로 제한하기로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선교신학자

김은수의 논문과책을통하여 비교적잘 정리되어 소개된바 있다. 참조: 김은수,

“missio Dei의 기원과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신학사상」94 (1996), 142-164.

김은수는 하나님의 선교의 신학은‘통전적 선교신학’임을 강조한다. 그는 세계교회협

의회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급진주의적인 신학이라는 인식

으로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임을 밝힌다. 이는 호켄다이크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선교를 현재적 종말론의 시각에서 지나치게 해석했기

때문임을 지적했다. 또한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선교의 한쪽 일면만 부각시킨 결과

이며 하르텐슈타인이 본래 의도했던 바와는 매우 거리감이 있다. 하르텐슈타인은 종

말론적 시각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균형있게 설명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이 개념이 나온 배경 자체가 서구의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제3세계의 도전이기 때문에 제3세계선교신학이면서제3세계의 상황에

서의복음의 해석을 위한‘토착화신학’의 근거를제공하는것이다.

1 1 )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Mission zwischen Gestern und

Morgen, hrsg. von Walter Freytag (Stuttgart: Evang. Missionsverlag, 1952), 54.

12) 참조: 김은수, 위의책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416.

Page 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교회의 사회 참여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지극히 편협한 이해 방식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회참여는 교회의 본

질적과제의 극히 일부일 뿐이며,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은 우주적인하

나님의 구원사역을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라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사회 참여만

을 중시해서전도를 무시하는 신학으로 이해되어왔다. 이것은 보수진

영과진보 진영양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실제로 전도는

하나님 선교의 기본이며 본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상

황적으로 접목한 교회의 사회 참여의식때문에 이 개념의 의미를 무조

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신학적 맥락을 철저히 왜곡하는 것이다. 복음

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감을 잊은 채 교회의 사회 참여만을

강조하는것은맹목적이고, 공허한 일이며,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연

관성을 잊은채 전도만을 강조하는 것은무의미 하다.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를 찾아 보는 것은 복음주의 계열과 에큐메니칼 계열을 아우르고

서로간의공통분모를찾을수 있는교차점이다.

I I I.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미

하나님의 선교는“하나님으로부터”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는 종교

개혁의 원칙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는 바르트 신학의 중요한 정선율

(cantus firmus)이기도 하다. 특히『로마서 주석』을 통해“하나님은 하

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명제를 강조한 바르트의 분명한 신학노

선은 이후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되어, 마치 그가 뜬 구름 위의

신선과 같은 가부장적 하나님의 모습을 고착시켰다는 정당하지 못한

비판을 난발하게 만들었다. 이 선언적 명제는 하나님과 인간의“질적

하나님의 선교 개념과 연관된 신학적 주제는 하르텐슈타인 이후 세

계교회협의회의 선교와 전도국에서 일했던 호켄다이크에 의해 세계교

회 협의회를 대변하는 신학적 화두로 등단했다. 또한 휘체돔에 의하여

이 개념은 성서신학적으로 접근되고 더욱 널리 보편화 되었다.13) 그런

데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반감을 갖는 한국 복음주의권에서는 그 내

용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이 개념을 거부하는 막연한 현

상이 지배한 것이다. 이 개념과 이 개념이 추구하는 방향은 신학적 의

미에서 볼 때 오히려 복음주의권에서환영할 내용이며, 복음주의권에서

성서와 신학에 충실하고자 할 때 동의해야 할 많은 긍정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4) 실제로 복음주의권에서 중요하

게 여기는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선교대회에서 로잔언약

(THE LAUSANNE COVENANT)을 신학적으로 이끌었던 영국의 존

스토트(John R.W. Stott)는 이 점을 예의 주시하고, 이 문서에서 다음

과 같이 설명해 내었던 바 있다.“선교는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표출

되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파송하는 하나님이며 이

것은 선교를 의미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그의 아

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그는 또한교회에 성령을 보내셨고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성령을 보내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하나

님의선교로부터발생되며 그것은선교의 모델이 된다.”15)

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73

1 3 ) 참조: 게오르크 F. 휘체돔 /박근원 역, 『하나님의 선교』(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1980).

14) http://www.lausanne.org/covenant(2011년 3월 1일 방문) 이 로잔언약 문서에서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이 이중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이 문서에서 이미 사회 구원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

이 특기할 사항이다. 이 문서의 내용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잘 수용하고 발전시키

고 있음을 강조해야한다.

15) Peter Beyerhaus et al., Alle Welt soll sein Wort hören: Lausanner Kongress für

Weltevangelisation, Bd. 1 (Neuhausen-Stuttgart: Hänssler, 1974), 66-67, 김은수, 위의책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72에서재인용.

Page 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나님으로부터”라는 신학적 주제어를 강조하는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서 한국의 복음주의 계열에서는 이에 대한 이해보다는 오해가 더

지배적이다. 미국 신학적 시각에 의해 각색된 바르트가 우리에게 소개

된 것이 그 한 원인이 된다. 그런데 사정은 에큐메니칼 계열에서도 크

게 다를 바 없다. 같은 내용을 다른 각도와 맥락에서 비판하는 것 뿐이

다. 예를들어서진보적 신학계열에서는바르트가문화를 무시했고, 그

점에무지했다는 문제를 자주거론한다. 그런데 이 내용은 바르트 신학

이 주는 근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오히려 바르트의

신학은 전통적 서구 유럽, 미국 중심의 선교의 문제성을 교정하는 비판

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오히려 유럽의 기독교 문화의 문제성

을 비판했지, 유럽 기독교 문화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제3세계의 종교

와 문화를 경시하는 의미에서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성을 말한 것이아

니다.18) 즉 선교의 주체가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한 서구 교회가 아

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유럽과 북미의 선교

정책과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도전이 된 것이다. 미국식 선교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한국교회가 이 점을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행

되는 모든인간의 교만을 교정하고 정화하며 경계하는 시금석이다.“하

나님으로부터”비롯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삼위일체적 접근과 이해

는 건강한 신학적 논의를 위해서 중요하며 그 내용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바르트의 화해론의한 대목을 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차이”를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독립성과 자유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이

념과 도덕적 이상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으로부

터 벗어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핵심을 현

대신학에서의미있게재 수용한 내용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적 내용과 방향은 하르텐슈타인에 의하여 심

도 깊게 포착되었다. 즉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기초에는 바르트의 변

증법 신학과 삼위일체적 지평 안에서 계시에 대한 기독론적 화해론과

연관되어 있는것이다.16) 그는“바르트의신학은 선교에 대해무엇을 말

해야 하는가?”라는 강연에서 바르트를 진정한“하나님의 계시의 증언

자”로 표현하고 있다.17)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성이 모

든 신앙고백의 근거, 내용이고규범이 된다. 또한인간에게 진정한 회개

를 촉구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교만을 경

계하며, 이것을 선교에도적용하는것이다. 즉 선교의 주체는 인간이 아

니다. 하나님의 영이 선교를 이루어 가심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자신

이 선교의 주체가 된다는 신학적 인식론의기본틀을마련한 것이다.

하나님이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인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

씀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에의하

여 가능하다. 이 말씀은 유일회적으로 그 당시에 증언되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각 신앙인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계신것이다. 그러

므로 쓰여지고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선포된 말씀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 연합성이다.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인

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 때문에 그렇다. 이 역사적 사실성과 실재성이

성령의 능력으로부터우리에게하나님을증언하는 것이다.

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75

16) 하르텐슈타인이어떻게 바르트를 수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 연구는 이후 논

문에서의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17) Vgl. Karl Hartenstein, Was hat die Theologie Karl Barths der Mission zu sagen?

(München: Kaiser Verlag, 1928), 4.

18) Vgl.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Die Lehre von der Versöhnung. IV/3

(Zürich: TVZ, 1989), 1002ff.

Page 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경은 선교 상황에서 서양 기독교 문화와 각 지역의 문화 사이의 접목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20) 바르트는 다른 진리들과 계시들의 가치

와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진리들이 하나님의 계시

와 하나님 말씀의 선포의 근거와 가능성으로 이해되는 것을 부정한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연신학의 가능성은 열어 두었으되, 그것이 계

시와말씀선포의 근거로 작용하는것을거부하고 문제시 한 것이다.21)

베르톨드 클라퍼트(Bertold Klappert)에 의하면 1 9 3 3년 바르트가

“신학의 원칙으로써의 제1 계명(Das erste Gebot als theologisches

Axiom)”이란 제목 하에 행한 코펜하겐 강연과22) 1959년『교회 교의학』

의 IV/3권에서 빛의 이론(Lichterlehre)으로 불리우는 이 화해론의 교의

학적 전개 사이에는 주제의 구성에서 연관성이 있을 뿐 아니라, 내용적

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코펜하겐의 강연에서 바르트가 바르멘

선언을 미리 내용적으로 선취한 반면,『교회 교의학』의 이 부분에서 바

르트는 역사적, 사회적, 자연적, 종교적 경험을 바르멘 선언의 마지막 주

석으로 완성하고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에서 바르트가 자연신

학에 대한 부정적 단절의 입장을 취했다면, 후자에서 그는 경험에 대한

계시의 관계를 긍정적으로관계, 설정하고 재검토하는것이다.23) 1961년

I I I. 하나님의선교와바르트의화해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내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된다. 이것은 삼위가 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 사역의 내용이다. 바

로 그 하나님의 선교의 근본이 되는 것이 화해론인데, 1959년 바르트

의『화해론』IV/3, 69는 바르멘 선언1항의 재해석으로도 잘 알려져 있

다. 자연신학을 문제시한 바르트의 입장은 그가 문화 개신교주의

(Kultur Protestantismus)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과연관되어 있다. 화해

론의이 부분에서 그는 자연신학의 문제를 다시 새롭게 언급하고 있는

데, 그 방법은1930년대 나치주의와의 투쟁의 상황에서 나왔던 것과는

내용과 방법면에서 전혀 다르다. 이러한 바르트의 변화를 두고 자연신

학으로의 회귀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으나, 필자는 이전보다 전반적으로

열린 태도를 드러냈다고 해서바르트가 본래적 입장을 뒤바꾼 것이 아

니라, 오히려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다고 본다. 이 부분에서 바르트는

화해론의 측면에서 예수의 삼중직 가운데 예언자적 직분을 강조하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의 교회와 기독교의 역할과 연관지어 전개시키고 있

는 것이다.

창조에서의 이중계시와 자연신학 문제는 바르트와 에밀 부른너

(Emil Brunner)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1930년대 이후신학의 주요한

화두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담론이 나온것은 선교와 교회를 분

리하느냐 아닌가 혹은 세상과 교회의 연결성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

다. 교회의 증언은 신론과 연결되어 있으나 자연스럽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 스스로가 증언자가 되셔서 세상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와 선교 사이의 분리성과세

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과 관계성에 대한 맥락에서 부른너는 접촉점

(Anknüpfungspunkt)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19) 즉 이 개념의 등장 배

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77

19) Cf. John G. Flett, The Witness of God. The Trinity, Missio Dei, Karl Barth, and the

Nature of Christian Commun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1f.

20) Emil Brunner, “Die Bedeutung der missionarischen Erfahrung für die Theologie,”

Die deutsche evangelische Heidenmission: Jahrbuch 1933 der vereinigten

deutschen Missionskonferenzen (Hamburg: Selbstverlag der Missionskonferen-

zen, 1933), 3; John G. Flett, ibid.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21) Vgl. Meehyun Chung, K. Barth-J.L. Hromadka-K o r e a (Berlin: Alektor Verlag,

1995), 97.

22) Karl Barth, “Das erste Gebot als theologisches Axiom”, gehalten in Kopenhagen

am 10. März 1933, Theologische Fragen und Antworten. Gesammelte Vorträge

Bd. I I I (Zürich:TVZ 1957), 127-143.

23) Vgl. Meehyun Chung, ibid. (Berlin: Alektor Verlag, 1995), 97; Bertold Klappert,

Page 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문화(Die Kirche und die Kultur)”라는논문에서 자연신학에 대한 긍정

적 입장을 밝힌바 있다. 계시신학은 자연신학을 포괄해야만한다는 것

이 요지였다.“계시신학에서는 자연신학을, 신적 은혜의 사실성 안에서

는 신적 창조의 진리를 내포하고 이것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혜는 자연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는 것(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이다. 즉 창조의 망각된 진리를 드러내는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27)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어스

발타자르는 바르트가 이러한 입장을 계속 견지했더라면 부른너와의 갈

등을 피할 수 있었겠다고 말한 바 있다. 마치 바르트가 신학적 내용을

시대마다달리변화시켰듯이말이다.28)

자연신학에대한 긍정적 접근을 시도했던1927년의“교회와문화”라

는 논문과는 차원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본격적 초석을 놓

았던 1 9 3 2년의 강연“오늘날의 신학과 선교(Die Theologie und die

Mission in der Gegenwart)”29)에서 바르트는 선교와 접촉점, 자연신학

의 관계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르트는 여기에서도 신학이 선교

를 위한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도 복음의 소식을 각각의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로 전하는 모

든 선교 행위에서 접촉점을 필요로 함을 물론 인정한다. 모든 언어가

접촉하여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를 연결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시에 대하여 자연계시의 접촉점 이론에 의하여 풍부

하게 증언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접촉점이란 사람들 간의

인간적 언어의 영역과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아니라, 교회와 선

바르트의 한 강연에서 이러한 입장은 더욱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논쟁적 상황에서 말한 것을 그냥 그 문제 그대로 옮겨서는 안된다…

1934년 에밀 부른너에게 맞서서 말했던 나의 자연신학에 대한 날카로

운 부정이 그 한 예이다. 후에 나는자연신학을기독론적으로재도입하

였다. 오늘 나의 비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내용을

단지기독론적으로다시말해야만한다는 것이다.”24)

한편 부른너의 접촉점이나 존재의 유비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적 입

장은 선교 전반에 대하여 바르트가 부정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여겨지

게 하였다.25) 그러나 문화개신교주의에대한 바르트의 입장을 이해한다

면, 그가 얼마나19세기 이후 서구 기독교 선교의 문제성에 대한 냉철

한 통찰력을 견지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며 나치주의와 독일

기독교인들이 히틀러를 제2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정하는 상황에서

왜 일차원적으로 접촉점이나 존재의 유비를 긍정하지 않았는지 이해하

게 할 것이다.26)

앞서 언급한 코펜하겐 강연 이전에 바르트는 이미 1927년“교회와

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79

“Gottes Offenbarung und menschliche Erfahrung. Erfahrungsfelder der Ver-

söhnungslehre Karl Barths,”Versöhnung und Befreiung ( N e u k i r c h e n-V l u y n :

Neukirchner Verlag, 1994), 6f..

2 4 ) Karl Barth, “Ein Gespräch in der Brüdergemeine”, Civitas Praesens, Nr. 13,

Königsfeld 1961, 7f. 자연신학에 관한 부른너와 바르트의 논쟁에 대해서 이 논문에

서는 지면상 더 다룰 수 없고, 다음을 참조: 정미현,“바르멘 선언 제1항과의 관련

성에서 본 자연신학의 문제,”「조직신학논총」, 1(1995), 85-101. Cf. John G. Flett,

ibid.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167.

2 5 ) Cf. John G. Flett, ibid.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174f.

26) 바르트가 짧고 간결하게 직설적으로 선교의 본질이 왜곡된 서구 기독교 선교의 문

제성, 즉 교파별 세력 확장, 서구 유럽, 미국 문화의 일방적 이식, 식민지 팽창의 맥

락을 언급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Vgl.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Die Lehre von der Versöhnung. IV/3 (Zürich: TVZ, 1989), 1002-

1005.

27) Karl Barth, “Die Kirche und die Kultur”, Die Theologie und die Kirche (Zollikon-

Zürich: EVZ, 1938), 375.

2 8 ) Vgl. Hans Urs von Balthasar, Karl Barth: Da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Olten: Summa-Verlag, 1951), 105.

2 9 ) Karl Barth, “Die Theologie und die Mission in der Gegenwart”, T h e o l o g i s c h e

Fragen und Antworten. Gesammelte Vorträge Bd. I I I (Zürich: TVZ 1957), 100-

126.

Page 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면, 화해론 전체가 하나님의선교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때문이다.

I V. 예수가승리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진정한 증언자가 되심과 중재자의 영광

(Die Herrlichkeit des Mittlers)을 역설하고 있는 바르트의『화해론』에

서 가장 핵심적 주제어는 예수가 승리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그의신학적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가운데 하나이다. 바르트가신

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던 요한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J o h a n n

Christoph Blumhardt)의 신학의 내용을 축약한 다음과 같은 시가 있

다.35)

예수께서승리하신다는사실은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돌아가신 밤 이후에 모든 것이 그의 손에 놓여

있기때문입니다.

그 분은십자가에서내려오신이후보좌위에오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승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승리하십니다.

설령주님의 백성이혹독한 시련을 겪을지라도,

사탄의화살이 그들에게 가까이혹은멀리있든지

그리고각양각색의간교함으로덤벼들던지,

예수께서팔을들어그 불을끄십니다.

주께서궁극적으로는그 전투장을평정하시리니

그렇습니다. 예수께서승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승리하십니다.

교 활동에서 중요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하는 상황에서

그 언어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여 접촉시켜 주던 간에, 은혜의 사건

으로기적적으로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30)

자연신학과 계시, 접촉점에 대한 이상과 같은 바르트의 견해는 그의

신학 내용이 불안정하게 기회주의적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표현의 양상과 강도, 방법을 달리한 것 뿐이며, 내용적으로

는 바르트가 일관성을견지하고있다고 본다.31)

프리드리히 마르크바르트(Friedrich W. Marquardt)는 엑스트라 칼

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 이론에 따라 바르트가 문화, 역사, 사

회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그의 화해론에서 재검토하고 있다고 보았

다.32) 바르트는 이러한 교의적 개념과 내용을 갖고서 자연신학에 자리

를 마련해 주는것이다. 바르트가 그의빛들의 이론에서 소위자연신학

적 가설을 다시 재검토한 것은 이 이론에서 자연신학을 갱신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한스 요아킴 크라우스(Hans J. Kraus)의 견해처럼33) 자연

신학에 대한 긍정적 보충으로 인식되어야지 자연신학으로의 회귀로 이

해될수 없다.

이제부터는 바르트의『화해론』I V/3, 69의 한 주제어에 집중하여 살

펴보고자 한다. 바르트가『교회 교의학』에서 선교라는 개념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직선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극히 일부에 국한되어 있다.34)

그렇지만 이러한 직설적인 표현 방식을 벗어나서, 거시적 안목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선교를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구속의 시각의 차원으로 보

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81

30) Karl Barth, ibid, 125.

31) Vgl. Meehyun Chung, ibid. (Berlin: Alektor Verlag, 1995), 98.

32) Vgl. F. W. Marquardt, Theologie und Sozialismus (München: Chr. Kaiser, 1972),

264.

33) H. J. Kraus, Theologische Religionskritik (Neukirchen-Vluyn:Neukirchner Verlag,

1982), 50f.

34) Vgl.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Die Lehre von der Versöhnung. IV/3

(Zürich: TVZ, 1989), 872ff;1002-1007.

3 5 ) Johann Christoph Blumhardt, E v a n g e l i s c h-reformiertes Gesangbuch, Nr. 857

(Zürich: TVZ, 1998).

Page 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권리와 그 분의 힘이 그 반대되는 적대자에 맞서 승리하고, 이러한 문

제와적대자를 결국제거하는것이다.”36)

흔히 예수가 승리자라는 사실은 종교로써의 기독교가 승리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남용되기 쉽다. 바르트의 화해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

분인 예수가 승리자라는 이 대목이 형성된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이해

하지못하고 문자적으로만 인용될 때 굉장히 오해될 여지가 있다. 특별

히 지난 세월 동안의 선교 정책에 대한 죄책 고백과 방향 전환이 진지

하게 모색되어야 하고, 종교간의 협력과 관용이 강조되어야 하는 오늘

날의 세계 상황 가운데, 이러한 제목을 들을 때 굉장히 독선적이고 구

시대적이며 편협한 것으로 여겨질 위험성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37)

따라서 그 진술의 역설적 성격이 쉽게 이해되기 어렵다. 즉 기독교 자

체가 배타적이고 우월하고 규범적이며 절대적 기준이며, 신적 권위를

갖고 존재하는 유일한 종교로 부각되는 것이다.38)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우월성, 독단적 배타성이 아니라 말씀의 자유로운 독립성과

권위이다.39) 물론 그 말씀의 선포자가 말씀 자체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부터 벗어나야 함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따라서 타종교인은 선교의 숫

적 확장을 위한 선교의 대상이나 객체로 여겨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

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은 기독교 정체성의 중요한 핵

심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문자주의적으로단순히 이해되기보다는역설

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자유하심에는 어떤

한계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타종교와는 대화와 협

아직 사탄의멍에가운데에서거대한한 무리가탄식합니다.

그들이 구원의해를갈망합니다

그 때가아직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가되면모든억압의 사슬로부터벗어나서

주님이 피조물을 구원하시리니

그렇습니다. 예수께서승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승리하십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갖고 선하게싸워나갑니다.

예수께서우리를 어떻게이끄시던지

그 모든 어두움을헤치고

우리는 예수, 당신만을따릅니다.

왜냐하면모든것이예수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침내 마지막원수까지도입을다물게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승리하십니다.

이 시에 담긴 불룸하르트의 핵심적 신학 내용을 바르트가 그대로

이어받아그의 화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설명

한다.“불룸하르트의 이야기와 그 내용은 요약적으로‘예수는 승리자’

로 표현된다. 이 문장은 이 행위의 주체, 극적사건의 지배적 인물, 우리

가 다루는 투쟁의 영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언자, 빛, 말씀,

계시자로 사역하시는 그 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불룸하르트 이야

기에서 잊을수 없는 것이며, 그 분을 특징짓는 것은 그 투쟁의 결말과

관련하여 그분이 출발부터 결말을 짓고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분이 가장 낮은 가치를 지닌 상대와 관계하는 것

이다. 또한이 과정은 예수의 이름을 분석하며 요약한다. 예언자적섬김

의 목적과 역동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 분이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이며, 확실한 의미에서 이를 특징짓고 있는 것이다. 처음

부터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통치로 그 분의

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83

36)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196.

37) 블룸하르트와 바르트의 화해론의 신학용어 가운데에는 전투적 용어가 많이 등장하

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평화 논의가 신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우리의

시대 상황에서 걸맞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용어 선택의 한계와 문

제를인정하고 감안해야하지만, 중요한것은그 내용과 의미를파악하는것이다.

38) Vgl. Karl Barth, ibid. (Zürich:TVZ, 1989), 1003.

39) Vgl. Karl Barth, “Die Theologie und die Mission in der Gegenwart”, Theologische

Fragen und Antworten. Gesammelte Vorträge Bd. I I I (Zürich: TVZ 1957), 110.

Page 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바르트는 그의 신학적 주제어를“은혜의 승리”라고 표현하지 않고,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임을 고집한다.45) 화해론을 하나님의 선교와

연관지을 수 있는 근거를 바르트의 음색으로 다음과 같이 들어볼 수

있겠다.“칭의와 성화의 하나님의 사역 자체는 그 사건의 전체성 안에

서 계시되고기독교적 인식의 근거가 되며, 세상과 인간가운데 실제화

된 것이다. 또한 다른 말로 하면 화해의 실제적 현재성은 기독교적 인

식의 대상, 근거와 내용이 되는 살아 계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성인 것이다. 특별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그 안에서 화해는 계시가 되

며, 그 방법으로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예언자적 직분과 사역에서 역사

적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예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를 이루시고,

그것은 기독교적인식에서 사건이 된다. 그리고 그 분이그의 예언가운

데에서 이를 행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화해의 역사성은 세 번째의 중재

적 직분이자예언적 사역에서 드러날 수 있다. 그분이 투쟁하는 분이시

며, 승리자인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조명된다.”46) 또한“예수 그리

력을위한창조적 긴장관계에 있어야 한다. 성령은 이러한 사역을 가능

케 하시는 역사를 도우시며 이루신다.“선교는 우선적으로 교회의 행위

가 아니라 하나님의 술어이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40)

선교란 교회와 기독교를단순하게 지리적, 물리적으로 방어하고 확장하

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총체적으로 동참

하는것이다.41)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화해론의 주제어를 택한 바르트는 앞서 언급

한 바와 같이 불룸하르트의 신학을 철저히 수용한다.42) 불룸하르트의

이야기로부터 유래하는 이 문장은 어떤 새롭고 특이한 계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신약성서적 말씀들을 축약한 표현이

다. 바르트는 신약성서 전체의 핵심적 진술을 요약한다면 이렇게 표현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43) 바르트는“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라는 요

약과 문귀에서 불룸하르트의 목회 현장 체험에서 나온 증언을 구체적

으로다루고 있다.44)

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85

40)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Maryknoll N.Y.: Orbis, 1991), 390, quoted by John G. Flett, ibid.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5.

41) Cf. Libertus A. Hoedemaker, “The People of God and the Ends of the Earth”, F. J.

Verstraelen et. Al. ed, Missiology: An Ecumenical Introduction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1995), 164, quoted by John G. Flett,

ibid.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5.

42) Vgl.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192ff.

43) 성서적으로는 몇 구절만 예를 들어 본다 해도요 16,33 혹은 골 2,15, 딤후1,10, 히

2,14, 계 6,2, 롬 8,37, 고전15,57, 요한1 5,4, 고후2,14 등이 이 내용에 관련되어 있

다.

44) 블룸하르트는이 문장을 자신에게서 추론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목회하고 있던 뫼

트링엔의 교회에서 목회상담을 통해 병고침의 사역을 마치고 나서, 그의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다. 이 개념은 그가 2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던 고트리벤

디투스라는 여성을 목회상담적으로 치유하는 과정에서 1843년 12월 28일 그 자신

뿐 아니라, 지켜보던 다른사람들과 함께 들었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더 정확히 말해서고트리벤자신의 입을통해서가아니라, 이 상황을지켜보았던여

동생카타리나로부터유래한 말이다. 신약성서에서자주 등장하는 악령들린 사람의

치유 형태와 유사한 상태로 진행된 이 사건은 블룸하르트 자신의 목회적 돌봄의 능

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자체에 의하여 치유되었음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치유의 사건에서 명백히 살아 계신 예수가 신약성서에 기록된 바 치유를 일으키

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게 억누르는 악령을 제압했다는 것이다. 블룸하르트

는“예수가 승리자”라는 외침을 여동생의 말이 아니라, 그 입을 통해서 나온 어떤

회의스러운 절망적 외침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인간의 소리라고는

볼 수 없는 그녀에게 낯설은 어떤 힘을 가진 존재의“외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트리벤을 사로잡았던 이 힘은 이를 능가하는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에 의

해 패배한 것이다. 바로그 분이예수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이승리하신것이다.

45)“은혜의 승리”는 1954년 네덜란드어로(1956년 영어판, 1957년 독어판) 출판된 베르

쿠버(G.C. Berkouwer)의 책 제목이기도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때까지 출간된 바

르트의 교회교의학의내용을 다루고 있다.『교회교의학』IV.2 서문에서 바르트는이

책의가치를 이미치하한바 있다. 그의 지적 해박함과 단호하고 포괄적 묘사 방법을

긍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가 왜 그 제목을 택하고 싶지 않은지 그 이유

와 내용은 네덜란드 신학자 베르쿠버에 대한 바르트의 응답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다음을 참조. Vgl. Karl Barth, ibid. (Zürich:TVZ, 1989), 198ff.

Page 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며, 인류를 위한 인식에서 생겨나고 행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확실성이고, 그의 미래에서 이미 현재에 영향력 있는 승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옛 것으로의 회귀는 있을 수 없다. 인류의 어떠한 승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즉 어두움에 대한 빛의 승리는 모방될 수 없는

순수한확실성을지닌독창적인것이다.”49)

바르트는 단순한 교회 성장 낙관주의나 선교 낙관주의의 시각에서

비롯된 승리의 확실성을 문제시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 확실성의

근거와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낙관주의가 인간에게서 비롯

된 것이문제이다.“…확실히 교회와 그 목표와 길을위한분명한 승리

의 확신이 있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식에서, 그 중심에서, 받아

들이게 된 그의승리의 확신은 분명한 것이다.…여기에 어떠한 회귀란

있을수 없으며, 예수그리스도에 대한시각을 단지지나치고, 부분적으

로 추상화하는 것도 아니며, 기독교나 교회적 일에 관련한 어떤과거나

현재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확실성이 있는것도아니다.…그것은인간

자신의 자체적 확실성에 의한 인간의 내적이고 인간본연의 신앙의 일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그 근원과 대상을 둔 확실성이다.…여기

서도 또한회귀가 있을 수 없다. 신앙의 확실성 그 자체는 유혹가운데

지켜진 승리의 확실성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께서 그것을 행하

시기때문에 이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것이다.”50)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자임을 강조하는 그의 화해론에서

다소의 사울이 바울이 되는 회심의 과정을 인식론의 차원에서 한가지

예로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51)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사울이 비인식의

어두움에서 인식의 빛으로 나오는 과정을 바울 서신의 다른 성서 본문

과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비인식의 경계선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 사건 이전에

스도의 역사는 인간의 공로로 얻은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인간

을 향한 분명한 하나님의 긍정이다. 이 긍정의 선포자이며 생명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분의 계획가운데 행위하신다. 그래서 처음부터 승

리자이신 것이다. 기쁜 소식인 복음이 그분의 예언적 말씀의 내용이

다.”47)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자가 되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

하고 그 뜻에 순종하게 권면하신다.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21:

5).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승리자가 되신다는 초월적 소식은 개

인과 사회의 모든영역에서 현상태의 문제성, 불의한 구조를 무조건 수

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변혁의 주체

가 되고이를개선하게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승리의 확실성의 가치를 갖는가? 예수 그리

스도가 인류의 주님이며, 교회의 머리이고, 신앙의 근거, 대상과 내용이

다. 이러한 확실성을 드러내는 것은 인류나 교회, 혹은 우리의 신앙이

아니다. 그분이 인식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그분

자신 그 모습대로의 존재 자체의 탁월함에서 인식하는것이다. 살아계

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승리의 확실성은 본래적인 것이며, 단지 그

분으로부터만 가능한 것이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이러한 확실성을 비추이며, 가능하게 만들고,

일깨우며 보증하신다는 것이다.…그분이 인류를 위하여 존재하는 분

이다. 그 분이그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분이다. 그분이 그를 믿는자

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 분, 그 분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 인격 안에서 임박해 온 하나님 나라의 예언자로서

말하는 것이다.”48)“그러한 확실성은 순수히 유지될 수 있는 확실성이

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87

46)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242.

47)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262.

48)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306ff.

49)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303.

50)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305f.

51) Vgl.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226ff.

Page 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다.

계시의 성격에서 볼 때 영향력 있고, 기독교적 인식에 근거한 화해

와 그 계시에 근거하여, 그 현상에 참여하는 기독교적 인식 사이의 관

계와 상호성이 이어진다. 화해는 이러한 성격에서 볼 때 쓸모 없는 것

이 아니다. 예수가 그 모든사건에서 이런 성격을 갖고 또한그분은 예

언의 사역에서 세상과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저항과 모순에 맞선 승리

자이다. 화해의 계시는 그 사건전체의 통합적 순간이기때문에, 화해는

그 자체를 위해서만 일어나는 것이거나 화해가 직면하는 저항과 모순

에 의해서 닫혀진 특수 공간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화해는

오히려 세상가운데서일어나고, 우리가운데에서사건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써기독교적인식의 근거가 되는것이다.

화해는 계시에 의한 기독교적 인식에서 서로 연관된 것이다. 화해는

그때 거기라는 것과 지금 여기라는 것의 길 위에서 변화된다. 화해를

인식하는기독교인은중립적이고, 어떤생각하기 어려운 이유에서 옳다

고 여기는 진리나, 어렵사리 고안해 낼 수 있는 생각들을 형성하고, 고

정적으로관찰되는 원칙이나 체계에서가 아니라, 올바르게성립되고교

회적인 권위로 허락된 교리와 함께 하는것이다. 화해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서 인간에게서 드러난다. 살아 계신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화

해이다. 계시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상한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다. 화해에 내포된 그 모든 것은 그분이 그 자체

로 현실적으로계시되는것이다. 그 분은스스로 낮추시고, 그의낮춤에

서 그의인간적 형제, 자매들을 의롭게 하는하나님과의 연합에서 고양

되는하나님의아들이며, 높이들리우심에서 그의 모든인간적 형제, 자

매들을 성화하고 상승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자기 비움(빌

2,6-11)이 하나님 선교의 근본이 된다. 이러한 구원의 사건이 예수 그

리스도이다.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사건을 계시하고, 그 분과이 구원

사건이 그 대상이자, 이유와 내용이 되고, 구원사건이 기독교적 인식의

바탕이다. 이 구원의 사건은 그 분에게서일어난 구원의행위이고, 세상

는 이 인식의 대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자신

이 사울의 회심에 주체가 된다. 사울은 비인식의 어두움에서 인식의 빛

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탁월한 존재자에 대한 복종에서사울

은 인식의 빛 가운데 자유롭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며, 사로잡힌 자로서의 바울이 되었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이러

한 사건은 회개(메타노이아)와 인식(그노시스)의 과정으로예수 그리스

도의 예언적 사역에 관련되어 있다. 예수 자신이 예수를 사울에게알렸

다는것이다. 예수자신이 사울이 태어나기전부터 그를선택하였다. 예

수 자신이 사울이 그렇게도 강력히 긍정했고 집착했던 율법과 이스라

엘 계약의 완성이다. 독선적인 자기 아집 속에 빠졌던 사울이 회심과

회개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그의 능

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그를만나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리

고 그 인식을 위한 전제는 자기 비움과 방향 전환, 즉“떨쳐 일어나 방

향 전환하고 고백하는것”이다.52)

예수께서 승리하게 될 것이며, 승리 안에서 이해된다는 것을 위한

보증도 이미 그분 자신이 주고 있는것이다.53) 그 어떤 설명도 그분자

신을 대치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그 분 자신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적 인식의 근거와 계시의 성격에서 유효

한 화해와 구원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그 때 거기에서(illic et

tunc)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고 그것에 관련하여 지금 여기에서

(hic et nunc) 참여적으로 일어나며, 그 역사에 참여하는 가운데 일어나

는 기독교적 인식의 역사이다. 화해의 유일한 실재성과그 진리에서 화

해는 세상과 인간 가운데 실행되며 기독교적 인식에서 사건이 되는 것

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89

52) 바르트는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연합 운동을 위하여 남긴 그의 마지막 자필원고에

서 교회 공동체의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인식의 전제

가 된다. 참조: 칼 바르트/정미현 역,“떨쳐 일어나- 방향전환하고-고백하며”,『마지

막 증언들』(서울: 한들출판사, 1997), 64-75.

53) Vgl.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243-252.

Page 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서와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닌의 중

간기적 긴장 관계 속에서, 예수가 궁극적인 승리자이심에 대한 믿음을

통해오시는 하나님 나라를 마주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가장중요한 것

은 인간안에서의 반역적인 것이아니라, 그 분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시

게 된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살아계신 그 분은 그분

의 예언자적 사역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한 화해의 길 위에 계신 것이

다. 궁극적인 승리자로서, 예언자적사역의 완성자로서계신그 분은이

미 우리가운데 임하신 것이다.55)

V. 나가는말

지금까지 선교를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 유래함으로 설명하고,

삼위일체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이해하는 것이바르트의 신학적

공헌 가운데 한 가지임을 이 논문에서 살펴 보았다. 즉 선교는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속성자체이며, 교회는 선교를 위한도구가 된

다. 선교의 가장 깊은 원천은 사랑이신 하나님이며, 사람들을 사랑하시

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선교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심

판에대한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감

염시키고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자

로 부각시켜서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옭아매는 온

갖 옛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해방토록 하는 것이다. 즉 선교는 죽음의

권세에굴복하는 것이아니라, 생명의 힘에의존하여, 죽음의 세력에 맞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와 돌보심과 구속의 완성과 관

련하여 세상을 위하여 사역하시는 그 행위 자체가 선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교란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두고, 정의, 평화, 창조의 보존

과 회복을 지향한다. 그 특성상 공동의 선을추구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전체와 모든 인간을 위해 그 분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써 신적 구원

행위에 은혜롭게 참여하는 예언적 사역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몸을

낮추어 내려 오신 이 땅이 바로 말씀 선포와 아울러 선교의 양 측면을

이루는 사회적 책임의 크고 작은 윤리적 실천과 봉사(디아코니아)의

공간이다. 이 세상의 약한 자와의 연대의 사건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때문이다(마 25,45).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는“이미”와“아직

아닌”의 긴장성과 긴박성이 존재한다.“예수 그리스도 예언의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마지막 말은 영광 가운데 그가 궁극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화해의 사역이 아니라, 그의구원의 사

역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종말론에서 우선 말해질 수 있겠다. 이러한

최종적인 종말에 대한 시각은 그의 예언의 역사에서 지금 여기 관계되

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예수는 승리자이

다. 이미그의예언의 역사가 일어남에서그러하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

게 되기까지 투쟁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에서 그러하다. 그 분은패

배당하지 않는다. 그분은 휴전의 상태에 있거나 뒤로 물러나는 법이없

다. 그렇지만 그분은 그분의 성공적 목표에 아직 도달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목표에 앞서 나가는 승리자로서 그분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

게 이미알려졌는데, 왜냐하면이미그 사실이 드러났기때문이다. 그분

은 그러나 세계와 그 속에 속한 사람들에게 아직 그분의 대제사장적,

왕적, 예언적 사역을 이미완성한 자로서 드러내지않았고, 목표를 향한

도상 가운데 있는 것이다. 빛은 어두움과, 인간 가운데 반역적인 것과,

어두움의 제후들과함께공존한다.…이 빛은항상어두움 가운데 비추

이는 빛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승리자의 승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5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나

님의 구원은 이미이 땅에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하늘에

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91

54) Karl Barth, ibid. (Zürich:TVZ, 1989), 301ff. 55) Vgl. Karl Barth, ibid. (Zürich: TVZ, 1989), 303.

Page 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행위는 통전적으로조화를 이루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과 불순

종, 모순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은개인과 사회 구조를 변혁

시키며, 이에대한 우리의 헌신을 요청하신다. 영적구원과 사회구원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야 할 내용이 아니라,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아야 될 것이다.57)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회심이 일어나게 된다면, 믿

음의 수직적 차원은 사랑의 수평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기 때문이

다. 우리는하나님이이미창조를 보존하고다스리고계심을 믿고, 하나

님의궁극적 통치의 공적현현을 기다리며 사는존재이다. 그러므로우

리는 그분의 예언자적 사역에 잇대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것이다.

주제어

미시오 데이, 화해, 예수가 승리자, 삼위일체 하나님, 변혁

missio Dei, Reconciliation, Jesus is Victor, Triune God, Trans-

forming

접 수 일 2011년 3월 29일

심사 (수정일) 2011년 4월 25일

게제 확정일 2011년 6월 1일

하나님이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라는고백에서비롯

된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

은 이러한 역동적인하나님 선교에 참여토록부르심을받았다.

이제 한국교회와 신학은19세기의 북미와 유럽의 선교 방식을 그대

로 답습하는 마태복음28장의 문자주의적 이해의 반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의 목표인 생명의 살림을 중심에 두고(요 10,10) 전 피

조세계와의 화해의 온전성을 실현하는21세기 선교의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교파간의연합, 젠더의식, 생명중심, 경제 정의,

파송보다는 영접을 강조함, 각 지역문화의 토착화 등이언급될 방향전

환에 몇가지 주제어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초

석을 놓은 바르트의신학은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교의 중심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의 온 인류와 우주를 향한 구속 행위에 우리는 단지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되는 피조물 공동체를 억압하는 모든 행위를 떨쳐

버리고 방향 전환하고 고백하며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56)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통치가운데 이루어질하나님의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과 사회, 현

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초대되었다. 우리는 그리스

도인으로서 개인과 사회 공동체 차원에서의 모든 것에 변화를 불어 넣

도록부름받은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파송하심에 근거한다. 이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그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과 그 그리스도의

영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하셨음을 말씀과

행위로 선포하기 위한 그 행진에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와 사회 안에서의 공동체의 선과 정의를 추구하는 섬김과

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93

56) 생명의 영을 체험한 초대교회 공동체는 새롭게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삶의 공동체

로 거듭났었다. 그들은 생산의 공동체가 아니라, 소유와 분배의 정의를 실현한 공동

체였다(행2,44f; 4,32ff.). 57) 참조: 존 스토트/정지영역, 『균형잡힌기독교』(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Page 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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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95

Page 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issio Dei? - The Meaning of Karl Barth’s Theology for missio Dei

Meehyun Chung, Dr. theol.

The Head of Women and Gender Desk

Mission 21,

Basel, Switzerland

As we move toward the 2013 General Assembly of World Council

of Churches, which will be held in Pusan, South Korea, the Korean

Church and Korean theology will have an opportunity to develop a

renewed perception of mission and ecumenism. To prepare future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e developments of the past. In this article I

reflect up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eology of Karl Hartenstein

and that of Karl Barth regarding missio Dei. This article reviews

Barth’s influence both on the concept itself and the general theo-

logical development within miss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since the late 1920s.

The concept missio Dei is based on the doctrine of the triune God.

God’s sending of Jesus Christ and the Spirit is the origin of the missio

Dei. God seeks to renew the whole of creation through the once-for-

all event of Jesus Christ. Therefore, the missio Dei is related to

christology within a Trinitarian framework. We are called to partic-

ipate in this dynamic process. Engaging in the missio Dei means not

only doing evangelism, but also transforming the whole church and

the worldwide community. God’s people are called to participate in

Missio Dei, Karl Barth, and the Nature of Christian Commun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Klappert Bertold. “Gottes Offenbarung und menschliche Erfahr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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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 묻다 97

Page 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Filioque

Kim, Okjoo

(Hansei University Lecturer)

I. Introduction

The theological environment in the west dramatically changed

since, soon after the death of Augustine (430 AD), new conquerors

generated a threat to the catholic faith. They began not only to

territorially invade Rome and the western Mediterranean, but also to

impose their Arianism upon these catholic lands.1 ) In facing this

challenge, the western church reinforced itself with its doctrine of

the communitarian life of God.

This article considers Barth’s doctrine of reconciliation found in

IV/3, 69 in terms of the first article of the Barmen Declaration. “Jesus

is Victor,” a theme Barth adopted from the theology of Johannes

Christoph Blumhardt, is the focus of this section of the Church

Dogmatics. The concept “mission” does not merely indicate the cause

of cultural and geographical expansion. Mission begins with a real

knowledge of Jesus as victor and as an infectious movement of hope

and good news.

An wholistic approach to missio Dei, instead of a dualistic one,

will help to correct the tension and various misunderstandings which

have characteriz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ose within the ecu-

menical tradition and those within evangelical tradition.

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99-124

1) Before the death of Augustine, the West was already being besieged by the Arian

Vandals. The other Germanic peoples also began their conquest of the Western

Mediterranean and began encircling Rome. These tribes had been converted to an

Arian Christianity in the middle of the fourth century by the half Goth Ulfilas who

was consecrated a Bishop by Eusebius of Nicomedia. Arriving in the West as

conquerors, they sought to impose their own Arianism upon the mainly Catholic

population they had taken over. This was, in effect, for most of the West, the first

practical experience of Arianism. Thomas Marsh, The Triune God (Mystic, Conn:

Twenty-Third Publications, 1994), 138-9.

Page 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istakenly attributed to Athanasius, the so-called Athanasian Creed

or Quicunque, with the rest of the Latin Church through the Middle

Ages.6) In the third of its twenty-three anathemas, they declared that

the Church “anathematizes those who do not profess that the Holy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7 ) The Council shut

down Arianism with a strong view on the Son’s role in the Spirit’s

procession and declared that the Son was in no way inferior to the

Father. Here, the f i l i o q u e, expressing the double procession of the

Spirit, indicates that the Son is the equal of the Father, precisely

because, like the Father, he breathes forth the Spirit. Even the Franks

reject the statement of the Spirit’s procession 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since they insist that this is against Augustine’s claim in De

Trinitate, 15.26, 47 that the Spirit is the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pirit of the Son.8) Quoting directly Augustine’s materials to support

their teachings, they, thus, affirm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This emphasis became so strong and pervasive that it practically

disregarded Augustine’s particular emphases such as on “the

consubstantiality,” “the attribution of divine attributes equally and

indifferently to the three Persons,” “the unity of divine operations ad

extra,” and his final confessions of human incapability to fathom the

mystery of God. 9) While Augustine finds, in the filioque, a way to set

God as Trinity in a markedly anti-Arian manner. Thus, Augustine’s

comments on the Spirit’s procession ab utorque, especially, in D e

Trinitate Book 152) had been virtually unquestioned and adopted by

his western successors to defend the Arian challenges.3)

The western theologians in Spain especially had struggled at

length with the Arian heresy at the beginning of the fifth century.4) In

589, the Council of Toledo promulgated that “the Holy Spirit is to be

confessed by us and preached as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et a filio) , ”5 ) while relying on an Augustinian creed that they

1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01

2) Augustine argues that the Spirit proceeds accordingly from the Father and the Son

Augustine, De Trinitate, trans.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Edmund Hill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15.29). This statement is an answer to the question

why the Spirit should not be seen as another son. For Augustine, the Spirit is

distinctive in origin because, while the Son proceeds from the Father, she proceeds

from the Father a n d from the Son(ibid., 4.29; 5.12; 5.15) That the Spirit is the

common bond of love/gift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is closely related to the

idea that the Trinitarian persons are constituted by relationships. The relationship of

the Spirit to the Father and the Son is constituted by the procession. Being the gift

and love between the two within the inner relations, the Spirit, therefore,

necessarily proceeds from both. The Spirit proceeds timelessly and simultaneously

from Father and the Son as one principle. The Son’s power to breathe forth the

Spirit was given to him by the Father in his generation (ibid., 15.17).

3) Richard Haugh notes that almost all the Latin theological writers, even those who

vigorously opposed Augustinian thought in other areas, expressed a belief in the

f i l i o q u e, providing the Carolingian theologians a host of “authorities” to support

their position (Richard Haugh, Photius and the Carolingians: the Trinitarian

Controversy (Belmont, MA: Nordland Publishing Co., 1975), 23-4).

4 ) Yves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vol. 3, trans. David Smith (London:

Geoffrey Chapman, 1983), 51.

5) According to Alasdair Heron, it is possible that the prime motive of this statement

was to emphasize the full divinity of the Son, but it may equally be that those

present at the council simply took it for granted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Son as well as from the Father. Denzinger Schonmetzer, Enchirindion Symbolo-

rum, 34th ed, 470 quoted by Alasdair Heron, “The Filioque Clause,” One God in

Trinity, ed. Peter Toon and James D. Spiceland (Westchester: Cornerstone Books,

1980), 64.

6) M. Fahey, “Son and Spirit: Divergent Theologies between Constantinople and the

West,” in H. Küng, and J. Moltmann ed. Conflicts about the Holy Spirit ( N e w

York: The Seabury Press, 1980), 16.

7 ) J. D. Mansi,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Florence and

Venice, 1759), 9.985 in Haugh, Photius and the Carolingians, 28.

8) Libri Carolini, 112 in ibid, 51.

9) Marsh, The Triune God, 139.

Page 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mportant is his Mystagogy of the Holy Spirit.12)

Photios’ M y s t a g o g y stands firmly within eastern Orthodoxy in

terms of, on the one hand, the first reasoned response from an eastern

“Cappadocian” point of view to the Augustinian filioque, and, on the

other hand, its continuous influence that has shaped the pattern for all

subsequent Byzantine anti-Latin polemics. 1 3 ) His theological

arguments, thus, should be taken into consideration in any dialogue

having to do with f i l i o q u e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Before

observing the arguments brought by Photios against the f i l i o q u e, I

will attempt a brief survey of the theological and philosophical con-

nection between the Augustinian filioque and Neoplatonism in which

Photios observes the filioque problematic.14)

I I. The Filioque and Neoplatonism

Augustine’s Trinitarian thought, in the context of the fourth-

century patristic theology, is molded more by philosophical inquiry

forth a distinctive relation between the Son’s generation and the

Spirit’s procession and at the same time reserve the logical priority of

the Father’s origo pricipalis,1 0 ) the post-Augustine western church

modifies it as the double procession for asserting the full deity of the

Son by arguing that the Son, too, spirates the Holy Spirit.

This feature of the filioque provokes the East in such a way that it

breaches the monarchy of the Father by confusing the Father’s

hypostatic characteristic with that of the Son. For the East, the denial

of the Father’s monarchy consequently means the violation of the

divine unity, on the one hand, and the Trinitarian consubstantiality by

subordinating the Spirit to the Son, on the other hand. It is Photios,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in the ninth century who vehemently

criticizes what he believes to be the theological, biblical and ecclesial

defects of their teachings on the doctrine and, thus, stresses the

“monou tou Patros” against it.1 1 ) Of his several works, the most

1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03

10) Augustine, De Trinitate, 15.29, 47.

1 1 ) Francis Dvornik, a Czech Roman Catholic scholar, has written a multitude of

articles and books on the historical dynamics of the f i l i o q u e c o n t r o v e r s y ,

especially during the era of Photios. His most representative and classic work is

The Photian Schism, where he writes that “The Photian case is not merely a matter

of Byzantine interest. It concerns the history of Christianity and the world, as the

appraisement of Photios and his work lies at the core of the controversies that

separate Eastern and Western Churches.” Dvornik’s contribution to Photios’ study

is that his work discredits the false Western acknowledgement that Photios was the

instigator of the ninth century schism between East and West Francis Dvornik, The

Photian Sch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48), 15); Michale Azkoul

attempts to correct the widely held notion that the filioque is the sole cause of

separation between East and West by surveying the separation within various

political, theological and ecclesial contexts. “Saint Photios and the Filioque,” in

Saint Photios, On the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trans. of Holy Transfiguration

Monastery (Long Island, NY: Studion Publishers, Inc., 1983), 1-30; Philip Zimaris

suggests that the so-called Photian Schism could more correctly be named the

“Nicholonian Schism” since it was in fact Pope Nicholas I’s insistence on meddl-

ing in Eastern affairs which led to the schism. See Philip Zimaris, “Neoplatonism,

the Filioque and Photios’ Mystagogy,” Greek Orthodox Theological Review, 46:3-

4 (2001): 345-362.

1 2 ) Photios,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trans. Joseph P. Farrell (Brookline, MA:

Holy Cross Orthodox Press, 1987). All quotations are taken from this translation.

Photios’ two other significant works deal with 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

Encyclical Letter to the Eastern Patriarchs (P G 1 0 2 : 7 2 1-741) and Letter to the

Archbishop of Akyleia (PG 102:793-821).

13)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58.

1 4 ) Joseph P. Farrell arrives at the conclusion that the f i l i o q u e problem, that is, the

double procession, shares common philosophical structures, commitments and

ancestry with the great Christological and Trinitarian heresies and that the shared

philosophy is Neoplatonism. Farrell, “Introduction,” in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19.

Page 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lato understands that the true being or reality of things was to be

found in the immaterial universals, or, the perfect prototypes that the

material particulars imitated. Within this scheme God is seen as the

universal above all the particular universals - that is, a “Universal”

universal - defined as being “simple” distinct from the multitude of

particulars.18) Being simple implies, on the one hand, that it has “no

composition,” and, thus, transcends “the plurality of immaterial

universals as well as the plethora of particular material finite beings,”

and, on the other hand, that “essence, will and activity are wholly

indistinguishable in the One.”19)

The idea of the divine simplicity was developed in detail into

Neoplatonism by the work of the philosopher Plotinus (205-270 AD)

and his disciple Porphyry (234-305AD). According to Neoplatonism,

God necessarily creates two finite particulars which ultimately lead to

all the others. God produces the Nous which, in turn, together with

the One, produces the World-s o u l .2 0 ) According to Philip Zimaris,

these acts of creation, as well as the creation of all finite particulars

which follow, are acts of the essence because of the identification of

will and activity with the essence.21) Thus, since there is no distinction

in Neoplatonic system between theology and economy, creation is

understood as a series of emanations from the divine essence. In this

scheme, all things are seen as pieces of the divine essence and,

than that of Athanasius and the Cappadocians.15) Augustine seeks to

contemplate and comprehend the mystery of the Trinity, and, indeed,

believes that he can defend the rationality of the Christian faith in the

frame of Neo-P l a t o n i s m .1 6 ) The Bishop of Hippo writes about his

intellectual pilgrimage to search for truth in C o n f e s s i o n s, passing

from Manichaeism to Neoplatonism to Christianity.17)

1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05

15) I do not agree with the depiction, where Augustine is philosophical whereas the

Cappadocians are biblical. They all rely on Scripture as ultimate authority and

employ discursive reason and philosophical terms and notions such as essence,

hypostasis, immutability, time and eternity.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while

the former presents his thought as a kind of tentative personal speculation about

the Trinity, the latter, along with Athanasius, write about the doctrine facing

immediate challenge of various forms of Arianism. See, Theodore Stylianopoulos,

“The Filioque: Dogma, Theologoumenon or Error?” Greek Orthodox Theological

Review. vol.31 (1986): 260.

16) J. N. D. Kelly, Early Christian Creeds, 5th revised ed.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1978), 272. On various discussion on Augustine’s Neo-Platonism, see C.

Starness, Augustine’s Confessions (Waterloo, Ontario: 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1990), 182-3, 202-5; G. Bonner, St Augustine of Hippo: Life and Contro-

v e r s i e s (London: Faber & Faber, 1967); J. McEvoy, “Neoplatonism and

Christianity: Influence, Syncretism, or Discernmen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Neoplatonism and Christianity, ed. T. Finan and V. Twomey (Dublin:

Four Courts Press, 1992), 155-70; On the unity of philosophy and theology in

Augustine, see R. Crouse, “St. Augustine’s De trinitate: Philosophical method,” in

Studia Patristica, vol. 16, ed. E. Livingstone,(Berlin: Akademie-Verlag, 1985),

501-10; J. Burnaby, Amor Dei: A Study of the Religion of St. Augustine (Norwich,

Canterbury Press, 1991), 15-21; R. J. O’Connell, St Augustine’s Platonism

(Villanova, Penn: Villanova University Press, 1984); Du Roy, “Augustine” in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1 (New York: McGraw-Hill, 1967), 1041-58.

17) As noted above, Augustine begins not with God the Father, but with the simple,

indivisible, and absolute being, that is, the divine substance which bears the mark

of Neoplatonims. His emphasis on the oneness of the divine substance can be

viewed, first, in the notion that each of the divine persons is identical with the

other or with the substance itself from the perspective of substance (Augustine, De

Trinitate 6.9; 7.11; 8.1). Second, whatever belongs to the divine nature as such is

be depicted in the singular. Thus, that each of the Persons is increate, infinite,

omnipotent, eternal does not mean three increates, infinites, omnipotents, eternals,

but one (5.10). Third, the Trinity possesses a single, indivisible action and a single

will in a way in which the three Persons will and operate inseparably as “one

principle” (2.9; 1.7).

18) Farrell, “Introduction,” 20.

19) Zimaris, “Neoplatonism, the Filioque and Photios’ Mystagogy,” 347.

20) Farrell, “Introduction,” 22.

21) Zimaris, “Neoplatonism, the Filioque and Photios’ Mystagogy,” 348.

Page 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nd his eastern successors, it appears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an

uncaused cause and a caused cause in the same way that the World-

soul proceeds in the Neoplatonic pattern.26)

Interestingly enough, this essence-centered theology, which led to

the double procession, earned an overwhelming acceptance and

popularity among the Franks, who eventually took over the western

half of the Roman Empire.2 7 ) In the attempt to defend the consub-

stantiality of the Son against Arianism one could argue that both the

Father and the Son cause the Holy Spirit. Augustine became the

Father of the western Church par excellence.28) Thus, during the sixth

century, one finds that the “Athanasian ”Creed, a thoroughly

Augustinian symbol of faith which contained the f i l i o q u e, was

spreading throughout Gaul. In Spain the Visigoths, led by King

Reccared, rejected Arianism and supported the doctrine as a way to

stress the divine consubstantiality of the Son as seen in the councils

of Toledo during the sixth century.29)

therefore, are regarded as gods in themselves. It shows an obvious

priority of unity over diversity, of simplicity over composition, of

spirit over matter.

Augustine’s Trinitarian thought displays the traces of this

Neoplatonic pattern.22) One of the most prominent residues is the fact

that the divine essence corresponds to the Neoplatonic One and is

defined as being “simple.” The simple transcends any plurality such

as the divine attributes and persons within the Godhead. As in the

Neoplatonic system, Joseph P. Farrell claims that “the Augustinian

system identifies being, will and activity in God wholly indistin-

guishable within the one substance.”23) This, in turn, means that these

divine attributes and persons become relativized in favor of the unity

and simplicity of the essence. Here, according to John Zizioulas, the

patristic axiom-that is, the Father as the only principle of the two

persons-was also relativized in favor of the oneness.24)

Photios acknowledges, in the filioque doctrine, that the system of

the Neoplatonic emanations from the essence fits into the pattern of

the doctrine where the Father causes the Son and then the Son

together with the Father, in turn, both cause the Spirit.25) For Photios

1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07

22) Paul Henry contends that Augustine owes the most for his Trinitarian principles to

the fourth century neo-Platonist Marius Victorinus, especially his work, A d v e r s u s

Arium. He also adopts from Victorinus “the relation of opposition” in which the

Father and the Son are opposites coupled in the production of the Spirit (Adv.Ar.

I I I, I V 2-2, 18 quoted in Paul Henry, “The Adversus Arium of Marius Victorinus,

the First Systematic Exposi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I, 1 (1950): 42-55).

23) Farrell, “Introduction,” 27.

24) John D.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85), 40ff. On the monarchy of the Father, see John Meyendorff,

Catholicity and the Church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83), 18.

25) Azkoul, “St. Photios and the Filioque,” 9; Farrell, “Introduction,” 22.

26) Zimaris, “Neoplatonism, the Filioque and Photios’ Mystagogy,” 349.

27) Ibid., 10.

28) It is interesting and ironic to note that Augustine never intends to write his D e

Trinitate to impose a new theology on the Church. He was dissatisfied with this

work and was not ready to publish it when the manuscript was stolen by friends

and published without his permission. Characteristically he ends this work with the

following prayer, “O Lord the One God, God the Trinity, whatsoever I have said in

these books is of you, may those that are yours acknowledge; whatsoever of

myself alone, do you and yours forgive” (Augustine, De Trinitate, 15:51).

29) Haugh, Photius and the Carolingians, 60-62.

Page 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arkos A. Orphanos claims that, in the M y s t a g o g y, Photios also

has the idea of the Spirit’s procession through the Son, but deals

almost exclusively with the Spirit’s ex monou tou Patros.32) Photios’

central argument against the filioque is rooted in the patristic axiom

that anything within the Trinity must be either in common to all three

persons or the property of only one person. He writes, “E v e r y t h i n g

not said about the whole, omnipotent, consubstantial, and supersub-

stantial Trinity is said about one of the three persons. The procession

of the Spirit is not said to be common to the three, consequently it

must belong to one of the there.”3 3 ) It presupposes four premises.

First, a distinction must be made between the properties belonging to

the divine nature and those belonging to the hypostases. Second, what

is common in the Trinity is equally common to all three hypostases,

and what is hypostatic is individual and uniquely belongs to the

corresponding hypostasis. It indicates, thirdly, uncommunicable and

unconfused characteristics of hypostatic properties. Finally, the

Father is the unique cause of the Son and the Spirit.

The f i l i o q u e doctrine, especially the Carolingians’ interpretation,

hardly fit into the eastern Trinitarian model. While the Carolingian

West refers to the first principle of the Godhead as the divine essence

which results ultimately in the procession, eastern theology regards it

as God the Father. For the Patriarch, it is impossible for the existence

of the Spirit to come forth from the essence without brutally destroy-

I I I. Photious’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1. The Rise of the Conflict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The process whereby the filioque became the center of the polemic

was inflamed by arrogance, ignorance, and the issue of language

posited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which hardened their

d i f f e r e n c e s .3 0 ) The iconoclastic controversy (726-787 and 813-8 4 3 )

and Emperor Leo I I I’s (717-741) imposition of Constantinopolitan

ecclesiastical jurisdiction upon Calabria, Sicily and Illyricum also

fueled this cleavage and specificallyled to evoke the popes’ persistent

attempt to regain these territories. This problem was especially acute

during Photios’ time and, with the mistaken geographical notion that

Bulgaria was part of eastern Illyricum, Pope Nicholas sent Frankish

missionaries to Bulgaria, expelled the original Byzantine mission-

aries, and introduced the filioque into their worship and theology.

The filioque insertion to the Creed was then reported to Photios by

these expelled Byzantine missionaries. Because of the seriousness of

the matter, the Patriarch sent to all the eastern Patriarchs an encyclical

letter informing them of the uncanonical insertion of the filioque into

the Creed and its imposition on the territory. In this document he used

some of the same arguments against the f i l i o q u e that he later

developed further in his work on the subject, the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which he completed during his second exile in 886.31)

1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09

30) Dvornik, The Photian Schism, 237ff.

31) For mor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filioque debate, see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4); Theodore Stylianopoulos and S. Mark Heim

(ed.), Spirit of Truth: Ecumenical Perspectives on the Holy Spirit (Brookline: Holy

Cross Orthodox Press, MA, 1986); Avery Dulles, S.J., “The Filioque: What Is at

Stake?”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vol. 59, no. 1-2 (1995): 31-48; Robert

M. Haddad, “The Stations of the Filioque,” St. Vladimir’s Theological Quarterly

46 2 (2002): 209-216; Orthodox-Catholic Theological Consultation, S t .

Vladimir’s Theological Quarterly 48:1 (2004) 93-123.

32) Markos A. Orphanos, “The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certain Later

Greek Fathers,” in Spirit of God, Spirit of Christ: Ecumenical Reflections on the

Filioque Controversy, Faith and Order Paper 103, ed. Lukas Vischer (London:

SPCK; 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1), 21.

33) Photios,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36.

Page 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opponents, “If he [the Spirit] is known more fully in another

procession which is proper to the essence, then what precisely does

that production by another Person provide?”37) In other words, if one

accepts the concept of personal processions, which are somehow also

essential, then there can be no Trinity.

Photios finds in it a serious point that distorts the traditional view

of the monarchy of the Father. 3 8 ) Indeed, in the Cappadocian

conception of the Trinity, the Father is seen as the personal origin of

divine existence.39) For Photios, the insertion of “and from the Son” is

a blasphemous challenge and objection to the dogma. More

particularly, Photios rejects the Latin theologians ’justifications of the

doctrine of the double procession of the Spirit. Their arguments make

it appear that the Spirit’s mode of being is not, primarily, a hypostatic

personal origin from the person of the Father, but a “composite” of

the common essence of the Father and the Son. 4 0 ) This teaching

presents the Father as a simple name so that, by confusing the Father

and the Son into one impersonal essence, the property characterized

by that name no longer exclusively belongs to the Father. According

to Photios, if the Son participates in the property of the Father’s own

person, the Son and the Spirit also lose their own personal distinc-

tions. Here one falls into the view of a Sabellius, or rather of some

other “half-Sabellian monster.”41)

More seriously, if the double procession is accepted, then it leads

one to doubt whether or not the Spirit’s procession from the Father is

p e r f e c t .4 2 ) In Photios’ understanding, if the Father and the Son both

ing the monarchy of the Father and, thus, the unity of the Holy

Trinity.

2. The Monarchy of the Father

It is no surprise that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vigorously and

repeatedly endeavors to assert that God the Father is the unique cause

of the Son and the Spirit and, does not, thus, communicates his own

particular property to them.34)

Photios views the f i l i o q u e clause as inevitably rooted in an

essence-centered theology. That is, Neoplatonism in a way in which

it posits the act of the Father’s spirating, not on the ground of his

unique hypostasis, but on that of his nature. It leads either to the dual

procession that the Spirit springs forth from two separate causes, two

Gods in the Trinity, or to monotheism by confusing the two personal

causes within the one essence. The Patriarch senses these possibilities

in the system of simplicity that is required in Neo-Platonism and

Augustinianism.35)

In Photios’ estimation, within this “simplicity,” all personal

activities of the Trinity become relatively mere internal functions of

the essence rather than true principles. In this way, they lose their

ontological value. Therefore, all hypostatic activities, as well as their

very existence, are in fact submerged into the simplicity of the

essence. Photios argues that, if the dual procession were a character-

istic of the divine essence and not a personal property, all productions

from the Father were features of the essence. Thus, the personal

procession of the Spirit from the Son, and even from the Father, is

artificial and superfluous. 3 6 ) Photios throws a question to his

1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11

34) Ibid., 15.

35) Ibid., 17.

36) Farrell, “Introduction,” 43.

37) Photios,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42.

38) Ibid., 9.

39) John Meyendorff, Catholicity and the Church: Historical Trends and Doctrinal

Theme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74), 18.

40) Photios,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44.

41) Ibid., 29.

Page 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of the three in terms of proceeding from one substance, the Holy

Spirit, in order to be an equal consubstantial Person, must also

produce another Person, “for reason demands equality for each

person so that each person exchanges the grace of causality indistin-

g u i s h a b l y . ”4 8 ) Otherwise the Father and the Son have this privilege,

while the Spirit, supposedly of equal rank in the divinity, is excluded.

Since all things common to the Father are common to the Son are in

any case common to the Spirit, she must thus proceed from herself,

which consequently results in the plurality of the hypostases. For

instance, if the Son is begotten from the Father, and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two, then the Spirit must produce something else,

because of the equality of the divine persons. This implies that

instead of three we must have four hypostases and even possibly an

infinite number of processions and persons. Then, the triune God is,

in this perspective, transformed into a Greek polytheism.49) If the Son

is given, by the generation, the power to originate and to become a

source of another who is equal to him and of the same nature, the

Son’s sonship itself would be destroyed and the Spirit could be called

a grandson.50) The filioque, emphasizing the causal participation of the

Son in the Spirit’s mode of existence, introduces two causes and two

principles to the Trinity one of which is unoriginated and the other

originated.51)

Moreover, Photios points out that, according to the f i l i o q u e

teaching, the Father and the Son end up being closer to each other

than the Father and the Spirit because the Son possesses not only the

Father’s nature but also the property of his person. According to this

understanding, the Spirit is two degrees, or steps, removed from the

produce the Spirit, then the procession from the Father is somehow

incomplete, for it indicates the Father’s deficiency and, thus, an

essential need from the Son for completion and perfection.43) On the

other hand, if the Son is added to the perfect cause, the Father, the

cause must be imperfect, inferior and existentially superfluous, in

comparison to the first.4 4 ) Photios questions that “if the procession

from the Father is perfect-because Perfect God proceeds from Perfect

God-then what specific and concrete thing does the procession from

the Son contribute?”45)

Photios’ concern lies in the filioque’s implication that the Christian

God as Trinity is ultimately a relative matter, since the double pro-

cession obviously breaches the monarchy of the Father and, thus, the

equilibrium of the Trinity, making a true Trinity impossible. If one

does not end up with a monistic modalism, on the one hand, or a

series of infinite emanations on the other, he or she certainly ends up

either with a “dyad” or a “tetrology.” According to Photios, that the

Father and the Son breathe forth the Spirit means either that the Son

shares the hypostasis of the Father, or that he is a part of that. This

view is a rather dyad or diarchy and suggests the misbelief of Son-

F a t h e r h o o d .4 6 ) Or the other possibility is if the Spirit proceeds from

both the Father and the Son simultaneously, two Spirits are actually

produced and the Trinity becomes a “tetrology.”47)

The Patriarch also reasons that if the common cause of procession

is applied to the Father and the Son, the Spirit, too, cannot be exclud-

ed from it. In other words, if the filioque implies the consubstantiality

1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13

42) Ibid., 44.

43) Ibid., 15.

44) Ibid., 7, 31, 44.

45) Ibid., 31.

46) Ibid., 15, 16.

47) Ibid., 37.

48) Ibid., 3.

49) Ibid., 37.

50) Ibid., 60.

51) Ibid., 14, 43.

Page 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n the existence of her being, but in her temporal mission to the

world. It is the result of the perichoresis of the divine hypostases and

their common energies.56) Against the western implication of “Spirit

of the Son” as the Spirit’s procession from the Son, Photios also uses

sheer common sense.5 7 ) That is, “do these expressions such as ‘the

Spirit of wisdom,’ of ‘knowledge,’ etc., imply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such attributes as wisdom and knowledge?” Or, “does the

expression the “Father of the Son” imply that the Father proceeds

from the Son?”

Photios’ biblical argument is simple. Only one text signifies the

eternal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the one in which it is said that

“He proceeds from the Father”(John 15:26). Those that relate the

Spirit to the Son signify her homoousia with, or mission by, the latter

which applies only to the economy of salvation and not to the eternal

God.58)

Inserting the f i l i o q u e phrase into the Creed without ecclesial

consensus is unthinkable for Orthodox people of tradition, too.

Photios refutes the Carolingian argument that the filioque is sup-

ported by the tradition of the church.59) He is aware that certain Latin

Fathers, such as Ambrose, Augustine and Jerome, advocated the

Spirit’s procession from the Son. He responds to the argument with

the patristic view that defines the Church as conciliar but not a

collection of saints. For Photios, the Church is an event of commu-

nion, a community of sinners united as the body of Christ and striving

towards eschatological perfection. Authority in the Church, therefore,

never comes from any specific individual, no matter how saintly he

may be. Rather it comes through the ecclesial event of communion,

Father and, thus, has a much lower rank than the Son. Photios and the

eastern theologians inevitably reject the filioque based on the fact that

the f i l i o q u e forms the Son as the co-originator with the Father.

Consequently, this not only places the Spirit in a state of inferiority,

but also destroys the divine monarchy of the Father.52)

3. Biblical and Ecclesial evidences

In his Mystagogy, Photios also argues that the double procession is

not supported by biblical evidence. Photios’ basic thesis is that, just

as the Son is begotten by the Father alone, so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alone. In contrast to the Frank’s understanding, he asserts

that Paul’s statement “God has sent forth the Spirit of the Son into

your hearts, crying Abba, Father” does not suggest that the Son is the

cause of the Holy Spirit’s existence.53) Rather, it simply indicates that

the Spirit is consubstantial with the Son. In the same sense, the reason

that the Spirit is called the Spirit of the Son is not only because she is

sent by and is consubstantial with the Son, but also because she

anoints Christ in his human nature.54) Photios stresses that the Spirit is

actively involved in Christ’s life and ministry and that Jesus’ true

identity is revealed as the Son of God at his conception and bapt-

ism.55) The Patriarch accepts the Spirit’s procession from the Son, not

1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15

52) Ibid., 11.

53) Ibid., 49-50.

54) Ibid., 51. Zimaris points out that, while the Carolingians interpreted this same

expression as supporting a priority of the Son over the Spirit (Father-S o n-H o l y

Spirit), Photios, on the other hand, interpreted this same expression as supporting

(in the economy of salvation) a priority of the Spirit over the Son, i.e., a pneuma-

tological conditioning of Christology (Father “Spirit “Son). See Zimaris,

“Neoplatonism, the Filioque and Photios’ Mystagogy,” 354.

55) Photios,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84, 88, 91.

56) Ibid., 23.

57) Ibid., 56.

58) Ibid., 91-2.

59) Ibid., 5.

Page 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n initial difference between the Cappadocians and Augustine

comes from different linguistic understandings. According to the

former, in John 15:26 Jesus deliberately chooses the present tense

when he speaks of the Holy Spirit’s e t e r n a l procession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comes from the Father) and uses the

future tense when anticipating the t e m p o r a l mission of the Spirit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6 2 ) Moreover, the Greek

terms, the proeimi or exchomai (coming forth) of John 8:42 and the

e k p o r e u o m a i (procession) of John 15:26 are translated unambigu-

ously: the latter term, “procession” is reserved only for Spirit’s pro-

cession and refers to the Father as the original source.63) This delicate

subtlety of the Greek is lacking in Augustine. Through these

distinctions, the Cappadocians teach a “mediation” of the Son in the

“eternal procession” as well as the “temporal mission” of the Spirit.

Dumitru Staniloae states that “the eternal relation of the Son to the

Spirit is the basis of the sending of the Spirit to us by the Son.”64)

On the other hand, the Latin verb, p r o c e d e r e means “coming

forth” from another in a more general sense. For Augustine, this is

presented as a problem in which he has to distinguish the “generation

of the Son” and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He finds a solution in

the concept of the divine relationship that makes the divine persons

distinct from each other in the expression of their proper names and

the relationships of origins.6 5 ) Augustine develops the understanding

as a whole, which is expressed through the synods or councils of the

Church. Thus, Photios writes of the Carolingian method that “You

cite western Fathers. But this simply pours the West down the abyss,

because it contends with the whole world.”60)

Hence, for Photios, the question of the Spirit’s procession was

clearly anchored in former Ecumenical Councils, clearly implying

that the filioque has no foundation either in Scriptures or in the tradi-

tion of the church. Furthermore, he stresses that, even if Ambrose or

Augustine in the West taught the filioque, and if ten or twenty fathers

taught it, there are many others that did not.61) For Photios this means

that the church Fathers must be interpreted within the context of the

Church, which is expressed in the ecumenical councils. For this

reason any new teaching that has not yet been approved by an

ecumenical council should not be presented as a legitimate teaching

of the Church, otherwise one brings unintentionally shame to his

church Fathers.

I V. Evaluation

A final note is necessary to clarify the distinctive view of Photios

concer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conomic Trinity and the

immanent Trinity. Photios seems to strictly distinguish the former

from the latter while Augustine and the West refer the economic

relations between the Father, Son and Spirit to their immanent

relations in the eternal substance.

1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17

60) Ibid., 77.

61) Ibid., 87-9. Photios names a great number of Roman Pontiffs such as Celestine,

Leo the Great, Vigilius, Agatho, Gregory the Great, Hadrian I, Leo I I I, Benedict I I I,

John V I I I and Hadrian I I I who maintain the Holy Spirit’s procession from the

Father.

62) Bernd Oberdorfer,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 and the Son? The use of the

Bible in the filioque debate: a historical and ecumenical case study and hermeneu-

tical relations,” Multivalence of biblical texts and theological meanings (Atlant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6), 152.

63)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88.

64) Dumitru Staniloae, “The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from the Father and his

relation to the Son, as the basis of our deification and adoption,” in Spirit of God,

Spirit of Christ, 182.

65) Hill, “Note,” De Trinitate, 45.

Page 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 Greek text of Augustine’s Trinity was not available at Photios’

time. According to Demacopoulos and Paranikolaou, Augustine was

known in the East mostly by reputation. Because Photios did not have

the Augustine’s original Latin text at his disposal when preparing the

M y s t a g o g i a in exile, he develops his arguments, relying upon the

Carolingian claims that their position on the double procession is

grounded in the teachings of Augustine. It can imply that Photios

would not be aware of Augustine’s theological intent of consubstan-

tiality grounded in the power of one substance.

This aspect of Photios’ thesis has been questioned on his own

Orthodox side. Olivier Clement points out the limits of Photios’

argument in the Mystagogy of the Spirit as follows.

The weakness of Photios consists of having thought against,

spatially, without understanding or pinning down the truth of the

other. The double affirmation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alone and that his sending by the Son concerns only his

temporary missions cannot account, it seems, for either the richness

of the revelation or for all the expressions of the Fathers. And,

consequently, not for the authentic intuitions of filioquism.69)

It is a pity that Photios’ polemical manner is so strong that he

actually fails to discuss the various interpretations of the Greek

patristic teachings of the procession of the Spirit through the Son.70)

For Photios, the “through the Son” refers only to the “economic”

of the Holy Spirit as the mutual community/love/unity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drawing from the Trinitarian economy to the

immanent Trinity, or the missions from the processions. This

tendency becomes representative of the western conception.66)

In contrast to Augustine, Photios argues it is necessary to

distinguish between the sendings/missions of the Son and the Spirit

from the eternal processions. The Spirit is sent by the Son, which

points to the filioque but, for Photios and the East, it is only possible

in the economic Trinity. Instead, the Holy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o n l y in the immanent Trinity. Photios’ pronounced tenet

grounds in the Cappadocian concept of the non-transmission of the

hypostatic properties. This is why, to preserve the traditional concept

of the monarchy of the Father, Photios maintains the procession

“from the Father alone,” which for him is the only expression to

explicate the biblical truth of John 15:26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Unfortunately, his insistence on “ex monou tou

P a t r o s” to protect the Father’s certain priority becomes a barrier to

the West to approach to the East, just as the filioque to uphold the

Son’s consubstantiality with the Father is an obstacle for the East

approaching the West.

Of course, there is some weakness in Photios’ arguments. Photios’

work, though providing the content for the orthodox critiques of the

filioque, is not a systematically elaborated treatise. It is worth noting

that, according to Josef Lossl, Augustine’s works in the east were not

introduced until the thirteenth century, when his De Trnitate was first

translated into Greek.6 7 ) This translation was produced by Maximus

Planoudes and subsequently used by some of the most prominent

orthodox theologians, including Gregory Palamas.6 8 ) In other words,

1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19

66)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85.

67) Josef Lossl, “Augustine in Byzantium,” Journal of Ecclesiastical History, vol. 51,

no.2 (2000): 267-73.

68) George Demacopoulos and Aristotle Paranikolaou, “Augustine and the Orthodox:

The West in the East,” Orthodox readings of Augustine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2008), 15.

69) Olivier Clement, Essor du Christianise oriental (Paris, 1964), 17-8 in ibid.

7 0 ) Orphanos, “The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certain Later Greek

Fathers,” in the Spirit of God Spirit of Christ, 22.

Page 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접 수 일 2011년 3월 24일

심사 (수정일) 2011년 4월 24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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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ity of the Trinity. That is, the procession of the Spirit through the

Son is restricted to the Spirit’s temporal mission. It appears that there

is no space for a procession through the Son in eternal, inner life of

the Trinity. The Photian statement on “ex monou tou Patros” deals so

distinctively and respectively with the plane of the eternal proces-

sions and that of the temporal missions that there seems to be no

connection, then, between immanent Trinity and the economic

Trinity. Richard Haugh rightly mentions that the Constantinople

Patriarch has often been accused of neglecting the eternal relationship

between the Son and the Spirit.71)

Indeed, in following Photios’s argument, one has to choose either

the ex monou tou Patos or the f i l i o q u e or be considered either a

Christian or a heretic. Of course, I do agree with Photios’ arguments

that emphasize the non-transference of the hypostatic properties, the

processions from the Father, and, thus, the Father’s uniqueness as the

origin of the Son and the Spirit. Yet, his Trinitarian thought seems so

rigid that it actually restricts the richness of the perichoretic relation-

ship in the immanent Trinity. In my perspective, the relations of

origin from the Father mean not only that the Son and the Spirit

receive their existence, but that they also, at the same, relate mutually

to each other in perichoretic ways. In other words, there are more

than the “ex monou tou Patros” and “filioque” in the eternal life of

the Trinity. Unfortunately Photios’ thought does not express anything

other than “from the Father alone.”

주제어

필리오케, 포티오스, 아버지의 모타키, 페리코레시스,

Filioque, Photios, Monarchy of the Father, Perichoresis

1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21

71) Haugh, Photius and the Carolingians,176.

Page 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Kim, Ok Joo

Lecturer

Hansei University

Kunpo, Korea

The Augustinian filioque arrives at the conclusion that the Father

and the Son are the common cause of the eternal being of the Spirit in

light of Augustine’s psychological analogy in De Trinitate. What this

paper attempts to do is to put his Trinitarian thought within the

perspective of Photios,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who critically

pointed out what he believed to be theological, biblical and ecclesial

defects of the Augustinian f i l i o q u e in the ninth century East. His

work, the Mystagogy of the Holy Spirit has been read as the eastern

manual guideline with the “Cappadocian” point of view against the

Augustinian filioque. What he mainly insists on the work is that

anything within the Trinity must be either in common to all three

persons or the property of one only. It, thus, leads Photios to affirm

the Spirit’s monou tou Patros.

Throughout this chapter, I will point out two principal points.

Firstly, Augustine does not teach two origins of the procession of the

Spirit from Father and Son. Rather, it is his successors, the Carol-

ingians who adopted Augustine’s view on the Spirit’s procession in

the De trinitate Book 15 without critical observations. Secondly,

although Photios criticizes the possibility of theological dangers that

the doctrine of the filioque would produce, his position of the “mo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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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Kim, Okjoo, Photios’ Critiques of the Post-Augustinian Filioque 123

Page 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교역자의위상: -교회의 규례들(1541)-1)을 중심으로

공헌배

(에츠마얀성서문화연구원강사)

I. 들어가는말

1. 연구의 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16세기 제네바에서 이루어졌던 목양의 방식을 살

핌으로써, 한국 칼빈파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바른 위상을 제언하는 데

있다.

최근 학계의 한 동향을 살필 때,‘만인(萬人)제사장’론과‘종의 리더

십’또는‘섬김의 리더십’이라는 종류의 주장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인제사장론은 만인교역자론이 아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만인제사

장론’을 마치‘만인교역자론’이라도 되는 양 오용해왔다. 그리하여 평

신도의 설교라든가, 장로가 하는 기도를‘목회기도’2)라고 부르는 등 다

tou Patros” fail to sufficiently and adequately present the wide range

of the mutual relationship between the Son and the Holy Spirit.

1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25-153

1 ) J.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J. K. S. Rei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56-72.

2) 향린교회의경우, 장로가 주일낮 예배시간에 사회를맡고, 또 장로의기도를 일컬어

Page 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특징을 드러낸다. 첫째,‘만인제사장론’은 주로 루터의 신학과의 연

관성에서발견된다. 둘째, 루터의 주장이‘만인제사장론’이다. 그러나 종

교개혁 운동이‘만인제사장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평신도의‘만인 교역

자론’을 승인한 것은 아니다.8) 그리고‘만인제사장론’에 대해 간과하기

쉬운 또 한 가지가 있는데,‘만인제사장론’은 루터뿐만 아니라 칼빈파

의 교회에서도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개혁교회의신앙고백에

있어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는 하인리히 불링거의 제2 스위스 신앙

고백( 1 5 6 6 )에서도‘만인제사장론’은 인정한다.9 ) 즉‘만인제사장론’이

반드시 루터파의 전통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불링거가 쓴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교역자의 위상을

매우높게인식한다. 하지만 한국일부에서는‘만인제사장론’과‘만인교

역자론’을 오해하는 흐름이 있다. 물론 이에 반대하여 만인제사장론에

대한 인식을 반드시 평신도의 권리 또는 역할 강화에 국한하는 일반적

흐름과는 차이가 있는 주장도 있다.『신학이 있는 묵상』2권의 경우에

는 목사의 제사장 직임을 인정하면서 목사는, 평신도와는 분명하게 구

분된다는것을주장했다.10)

그리고 한편으로는 교역의 역할을‘교회론’을 중심으로 쓴 논문이

있다. 배경식은“칼빈의 교회론이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에서 주로 칼

양한 혼선을 가져왔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칼빈시대 제네바에서 결

정하였던“교회의 규례들(1541)”이라는 글을 통하여16세기 당시 스위

스의개혁교회가시행했던 교역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찾고자 한다.

2. 선행(先行) 연구

최근‘뉴스앤조이’3)를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일명‘만인제사장론’

을 주장하며,‘평신도’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하고, 평신도와 교역자가

직무에 있어서도 차별을 줄여야 함을 주장한 경향이 있었다. 또한정홍

열은“한국교회의 바람직한 목회자상”이라는 글을 통하여,‘만인제사

장’론을승인하며, 종교개혁의 전통에 있어서‘교역자’란‘제사장’이 아

니라고 주장했다.4) 이와 같은 흐름은 한국 교계에서 일반적으로 잘 알

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양한계는“루터의 만인제사

장론과 평신도의 재발견”이라는 글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제사장론을

공격하며, 루터를 해석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했다.5) 또한 김화민은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에 대한 개혁교회의 바른 직분론”이라는 글을 통

하여 교회 안의3중직으로서‘목사, 집사, 장로’라는 직분을 소개했다.6)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룬 글들은 많이 있다.7) 이런 글들은 주로 두 가지

1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27

‘목회기도’라고했다. 그러나 이는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의 원리에맞지않다.

3) http://www.newsnjoy.co.kr/

4) 정홍열, “한국교회의바람직한목회자상,”『한국조직신학논총』20 (2008. 6): 26-34.

5) 양한계, “루터의 만인제사장론과평신도의재발견,”(경성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8).

6) 김화민,“루터의 만인제사장론에 대한 개혁교회의 바른 직분론,”(안양대학교 신학대

학원석사학위논문, 2008).

7) 조영승,“루터의 교회론과 기독교 한국루터회,”(루터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

문, 2007); 김진경,“루터, 칼빈 그리고 웨슬리의 교회론 고찰,”(감리교신학대학교 신

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2); 최범황,“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

구,”(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2); 오혁진,“만인제사장적 사

고와 장애인 이해: 경건주의를 중심으로,”(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2); 정홍열, “루터의 만인제사장직,”『신학과선교』9 (2005. 12): 177-193; 이광호,

“만인제사장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고찰,”『한국개혁신학』14 (2003. 10): 356-

381 등.

8)“그러므로 제사장직과 교역자직은 서로 크게 다르다. 방금 지적한 대로 제사장직은

모든기독교인들이공유하고 있으나 교역자직은 그런 것이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황의 제사장직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거시켰다고 해서 교회의 교역자

직을 폐지시킨 것은 아니다.”(C.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Michigan: Baker Books, 1931), 281; 이형기,『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1), 184).

9 ) C.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Michigan: Baker Books,

1931), 281.

10) 김동건, 박정호, 김종복, 『신학이있는묵상』, 2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72-76.

Page 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제에 관해서도 다루었기 때문에16) 본 논고에서 다루는 주제와의 연관

성이 깊다. 이와 같은 연구는, 안은찬의“장 칼뱅의 목회신학과 그 적용

가능성 연구”의 경우와도 비교할 수 있다. 즉 안은찬은 단순하게‘칼빈

의 신학’만을 연구한 것이아니라 그 적용의 가능성을 살핌으로써 한국

교회를 위해 지침을 제공한 셈이다.17) 이와 같은 논문들은 칼빈시대 제

네바의 목양방식과한국교회와의상황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국내에 있어서 누구 못지않게 칼빈시대의 목양방식을 잘 소

개한 이로는 이정숙을 꼽아야 한다. 그의 저술들18)은 16세기 당시 스위

스의 목양 방식을 잘 보여주었는데, 특별히‘종교법원(consistory)’19)과

연관하여 칼빈의 목양신학을 소개했다는 점에 있어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칼빈 연구로 명성을 얻은, 부스마(W. J. Bouwsma)의 경우에는“칼

빈은 각종 무질서를 보고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인 통제방

식을 좋아하게 되었다”20)고 했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 동의한다. 칼빈이

빈의『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칼빈의 교회론을다루었는데 그의주장

을 따르면, 칼빈의 경우, 교회를‘신앙생활의 학교’로 여겼으며, 교회에

서 중요한 것은‘말씀 선포’와‘성례’그리고‘권징’이라고 하면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였다.11) 이 논문은 칼빈시대의‘직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칼빈시대의 목양방식을 살필때, 중

요한 한 초점은‘치리’에 있었다. 하지만 배경식의 논문에서는‘치리’에

해당하는 권징 부분의 분량이 작으며12) 또한 권징을 통하여 교역자의

위상을 드러낼 수도 있었는데, 배경식은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13)

반면배광식의“장로교 정치원리와치리제도형성에 관한역사적연구”

의 경우에는 칼빈주의의 정치원리와 영·미권 계열의‘치리의 원리’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는 한국 칼빈파 교회의‘치리

원리’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논

문의 경우에는 주로 스코틀랜드의 치리 상황을 다루었기 때문에 칼빈

시대 스위스의 상황은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14) 사실 스코틀랜드의

사태와 스위스의 목양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윤은수의“개혁신

학에 나타난‘귄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치리의 원리’를 다루었기

때문에15) 본 논고의 주제와는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목양자의

위상에 집중된 연구서는 아니다. 반면 박희영의“칼빈의 교회론: 그의

직제론과 한국 장로교회 직제론의 비교 연구”의 경우에는 칼빈시대의

직제론과 한국칼빈파 교회와의 상황을 비교함으로써, 한국교회와칼빈

시대의 직제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알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임

1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29

11) 배경식,“칼빈의 교회론이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신학과 과학』5회 한국조직신학

자 전국대회 (2010. 4): 60-74.

12) 배경식, “칼빈의 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70-71.

13) 배경식, “칼빈의 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70-71.

14) 배광식,“장로교 정치원리와 치리제도 형성에 관한 역사적 연구,”(계명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05).

15) 윤은수,“개혁신학에 나타난‘귄징’에 대한 역사적 고찰,”(계명대학교 박사학위 논

문, 2009).

16) 박희영,“칼빈의 교회론: 그의직제론과한국장로교회 직제론의비교연구,”(계명대

학교석사학위 논문, 2002).

17) 안은찬,“장 칼뱅의 목회신학과 그 적용 가능성 연구,”(총신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7).

18) 이정숙,“제네바 컨시스토리: 칼빈의 신학과 목회의 접목,”『한국기독교신학논총』18

(2000. 8): 159-185; 이정숙,“목사는누구인가?-칼빈의 목사직 이해와 실천,”『한국

교회사학회지』23 (2008. 11): 207-235; 이정숙,“출교에 관한 존 칼빈의 신학과 제

네바 컨시스토리의 활동,”『최근의 칼빈연구』칼빈신학회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2001), 306-329; 이정숙,“칼뱅이 그린 목회: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이,”『종교개

혁과 칼뱅』4 (2010. 10): 238-250; 이정숙,“칼뱅의 제네바 목회로부터‘종합적 목

회’배우기,”『종교개혁과칼뱅』4 (2010. 10): 251-263.

19) 이정숙은‘consistory’라는 단어를 킹던(Robert M. Kingdon)의 표현을 빌어,‘심리

법정’,‘강압적 상담 서비스’,‘교육 기관’으로 이해했다(이정숙,“출교에 관한 존 칼

빈의 신학과 제네바 컨시스토리의 활동,”『최근의 칼빈연구』칼빈신학회 엮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322). 그런데 ‘consistory’의 역할을 본다면‘가정법원’으로

옮겨도별 무리가 없다. 본 논고에서는‘종교 법원’으로옮긴다.

20) W. J. Bouwsma/ 이양호, 박종숙옮김, 『칼빈』(서울: 나단, 1991), 512.

Page 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I. 칼빈이주창한교회의규례들에나타난목사와장로의역할

한국 칼빈파 교회에서 나타난 특징 중 가장 심각한 문제하나를 꼽

으라면 당연히 목사와 장로와의 갈등구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칼

빈이‘목사와 장로’라는 제도를 만들었다고는 알고 있는데, 칼빈이 그

역할에 대해 무어라고 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로 인하여 생긴 직무상의 오용은 교회의 갈등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칼빈파 교회에서 주로 야기될 수

있는결정적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목사의 청빙제도와 위임제도, 그리

고 장로선출에 관련되기도 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통합 측 헌법을 보면 목사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있어도 장로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제도적으로 미약

하다.23) 또한 장로는70세에 은퇴하도록 되어 있는 항존직(恒存職)이어

서 이는16세기의 제네바 개혁자들의 의도와는 판이(判異)함을 알 수

있다. 물론 관습을 제외한 법적 근거로만 본다면 합동 측의 경우에도

통합측과대동소이(大同小異)한 점이있다.24) 그러나 이는16세기스위

스의제네바 교회에서 의도한 바와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학계

나 교계의 일부에서는 목사의 독재를 우려하기도 하며, 목사들을 공격

하는, 날카로운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16세기

의 개혁교회의 특징을 통하여 교역자의위상을 다시살피고자한다.

‘장로제도’는 칼빈이 그 원류가 아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

을 따르면 장로제도는 고대 교회에도 있었다.25) 다만 스위스에서는 그

제도를16세기에 되살렸다. 그래서16세기 개혁교회에서는로마가톨릭

의 교황및 주교제도를반대하여, 평신도의권리를 높였고, 교역자는마

말한 목사들의 권위는 특별히 말씀의 선포에서도 두드러진다. 이와 관

련된이양호의다음과 같은주장은 고려해야한다.

칼빈(J. Calvin)은 설교자가 설교할 때“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 속

에 빛남으로 그의 종들을 통해 말씀할 때마다 마치 그가 우리와 대

면해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것에 의해 감동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가“그들의 입이 자기 입으로 간주되고

그들의 입술이 자기입술로 간주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목

사의 직임이야말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직임이다.“하나

님이 인류에게 준 많은 중요한 은사 중에서 독특한 특권은 그가 사

람들의 입과 혀를자신을 위해 성별하고 그것들 안에서 자신의 음성

을 울리게하는것”이라고 칼빈은 말했다.21)

이와 같은 이해는 목사야말로 신의 대리인임을 인식하게 할 정도이

다. 뿐만 아니라 부스마는 칼빈의 말을 빌려,“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

들의 가르침에 대적하는 자들을 정죄를 받도록 하나님의 법정 앞에 소

환해야 한다”22)고 했다.

그런데 한국은 적지 않은사람들이‘만인제사장론’의 근거를 루터의

신학에서 인용함으로써, 정작 칼빈주의의 목양방식을 놓쳐버렸거나 칼

빈시대의 목양방식이 오용된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본 논고에서는 개혁교회의 목양 원리가 어떤 것이며, 개혁교회에

있어서 교역자의 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16세기제네바의 목양방식

을 통해살펴보려고한다.

1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31

21) 이양호, “종교개혁과목회자상,”『연세목회자신학세미나강의집』16 (1997. 6): 90.

22) Bouwsma, 『칼빈』, 518.

23)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통합)』(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175, 177-179, 182.

2 4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합동)』(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출판부, 2005),

152, 157-159.

25)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283.

Page 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보인다.28)

이전과 달리 그리고 현재와도 달리 특별한 안수식은 없었다. 킹던은

칼빈이 안수(laying on of hands)를 가톨릭교회가 미신적 신앙으로

가게 된 주요 임무라고 판단하여 생략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중략) 칼빈은 사도들이 집사들에게 안수한 것(행 6:6)을 해석하면서

안수는 유대인들에게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이며 거룩한 예식이나

안수 자체로는 어떤 힘도 능력도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성령에 그

효과가 달려있다고 말한다.29)

그래서 얼핏 보면 그 당시에는 장로뿐만 아니라 목사들도 안수 없이

세워졌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전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16세기 목

양방식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에

서 목사는 반드시 안수함으로 세우라고 했다.30) 그런데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것은, 그 당시의‘목사 안수’는 누구에 의해 이루어 졌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영어로 번역된 미국 판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의

중요한 오류가 드러난다. 영어로 옮긴 미국 판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

서는‘장로들(elders)’에 의해 안수하라고 되어 있다.31) 하지만 이는 원

래의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의 원문에는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 삽

입 및 변질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16세기 당시, 스위스 교회의 구조

를 볼 때, 장로들은 주로 시(市)의회의‘종교법원’에서 활동을 했고, 또

한 장로들은‘선서’함으로 세워졌으며, 그 도시에서 목사들을 도와 주로

‘치리’문제를 맡았는데, 장로의 임기는1년이었다. 그들의 신분은 대체

땅히 장로들에게 견제라도 받아야 할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나 그게 바로 오해였

다. 스위스 개혁교회의 의도대로 한다면 목사보다는, 장로가 견제될 가

능성이 훨씬 더 크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데, 첫째, 장

로는 매년 신임을 물어야 한다는1년직 임시직이며, 둘째, 장로는 목사

의 소환을 받아야 임명될 수 있었고, 오늘날과 같이 교회에서 투표로

선출된 직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장로는 시의회에서 선임되었다.

“교회의 규례들(1541)”을 따르면 장로에게 안수해서 세우라는말이 없

다. 그리고 장로가 임직될 때에는‘선서’하라고 했다.26) 즉 장로는 안수

로 세워지는 직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목사는‘안수’로 세워

졌다.27)

안수와 관련된 이정숙의 견해를 살펴보자. 이정숙은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칼빈은 루터나 쯔빙글리와는 달리 안수 받은 사제 출신이 아니었다

는 것에 대해 일체의 열등감 내지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것으로

1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33

26) J.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J. K. S. Rei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64.

27) “Et qui electi sunt, ordinentur a senioribus cum orationibus publicis, et impositione

manuum. Damnamus hie omnes,”(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280). 그러

나 이 부분을 번역한 미국 판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장로들’에 의해 목사임직

의 안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삽입 및 변질시켰다(Schaff, The Creeds of Christen-

dom, 878). 하지만 칼빈시대의 격률을 감안한다면 장로는 단지‘선서’에 의해 세워

진 1년 직 임시직인데다, 장로의 직무가 주로 시(市)의회와 연관되었을 것이므로, 장

로가 목사의‘서품식(ordinentur)’에 참여했을 리는 만무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목사의 서품 혹은 입회를 뜻하는 ‘ordinentur’라는 단어는‘order’라는 단어와 연관

하여 볼 수 있는데, ‘order는‘수도원’을 뜻했다고 한다. 따라서 목사의 입회식(ordi-

nentur)은 목사들의 회(會)에 가입하는중요한 절차였다. 이 예식이 장로와 연관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16세기 스위스의 임직 방식과 근대 미국

의 임직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본 연구의 후

속 과제이다.

2 8 ) 이정숙, “목사는 누구인가?-칼빈의 목사직 이해와 실천,”『한국교회사학회지』2 3

(2008. 11): 213.

29) Ibid., 226.

30) “Et qui electi sunt, ordinentur a senioribus cum orationibus publicis, et impositione

manuum. Damnamus hie omnes,”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280).

31)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878.

Page 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려고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들을 통

하여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기 때문에 우리는 목사들에게 인간적인

도움을 요청할수 있습니까?

답: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는 목사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서 주신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사들을

통하여 모든것을 선사하셨기때문입니다.34)

위의 근거를 감안한다면 목사는‘축복(祝福)의 통로’이다. 뿐만 아니

라 하나님은‘목사’라는 수단을 통하여 교인들을 다스리신다. 따라서 칼

빈이 주장한 바를 따르면, 목사들의 독보적 권위는 인정되어야 함이 마

땅하다. 특히이러한 종류의 권리는 장로와는공유될 수 없는 목사고유

의 권한이다. 칼빈이 말한 목사의 권한 및 권위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

다. 칼빈은 목사들을치리자로 명명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말했다.

문: 교회들은목사들의치리를따라야 합니까?

답: 예,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들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적

설교를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목사들을 경멸히 여기고, 목사들의 말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버리고 교회 공동체에

서 신도들의 사귐을 떠나는사람입니다(마 10:40; 눅 10:16).

문: 목사들에게 한 번 가르침을 받으면 충분합니까? 아니면 계속 가르

침을 받아야 합니까?

답: 만일 열심히 추구하여 목사들의 가르침을 항상 끈기 있게 지속하지

않는다면 시작하는 것이의의(意義)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학도가 되어야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또 예

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교회에

목사들을임명하셨기때문입니다.35)

로 시의원들이기도 했기 때문에32) 그 장로들에 대해‘안수’했을 가능성

은 희박하다. 따라서 장로들이 목사들의 입회식(임직식)에서‘안수기

도’했다는 것은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

판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의 오류를 깊이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칼빈이 목사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

다. 칼빈은 목사들에대해다음과 같이말했다.

문: 만일 이것이 그러하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를

요구하는것이어떻게허용됩니까?

답: 실지로는 그 두 가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에게 (도움을) 호소할 때, 우리는 선을 위해 다른 방향으로는 아무것

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외에는 어떤 다른

곳을 통해서도 도울 곳을 정해놓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하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타인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그들에게그 권세를주는한 말입니다.

문: 당신의 견해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드리는 것과 타인에게

인간적인 도움을 호소하는 것은모순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결코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적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

나님께서는 목사33)들을, 자신의 은총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사용하실

것을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목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

었을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자신의 능력을통하여 우리를도와주시

1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35

32)“장로들은 시의원들 중에서 매년컨시스토리의 일을 위해 임명된 사람들이었다.”(이

정숙,“제네바 컨시스토리: 칼빈의 신학과 목회의 접목,”『한국기독교신학논총』18

(2000. 8): 163).

33) 박위근과 조용석은 이 단어를‘목사들’로 번역하지 않고,‘봉사자’로 번역했다(J.

Calvin/ 박위근, 조용석 편역,『요한네스칼빈의제네바 교회의교리문답』(서울: 한들

출판사, 2010), 155-157). 하지만236문에나오는‘ministers’라는 단어는 단순한‘봉

사자’가 아니라‘말씀의 봉사자’를 뜻하므로, 이는‘목사들’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

다. 또한 필자는 여기서 말하는‘사람’이나‘봉사자’가‘목사들’을 뜻하므로 본 논고

에서는 일괄적으로‘목사들’로 이해한다.

3 4 ) J. Calvin, “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1545),” in Calvin: Theo-

logical Treatises , J. K. S. Rei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119-120.

Page 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분명하게차이가 있다.

4중직을 볼 때‘장로’는 목사보다순서가 뒤에있다. 그리고 목사다

음은장로가 아니라 신학교수였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노회나 총회

에서‘신학 교수’는 그저 기관목사의하나로 등한시 되는수가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스위스의 개혁교회가 추구한4중직에서는 결코‘신학

교수’를 도외시 하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신학의 역할을 중요시 했다

고 보아야한다.

16세기 스위스에서는, 교회의 규례(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를 다룸에 있어서‘목사의 직무’에 대해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

했다. 그러나 장로에 대해서는 한 페이지 가량의 설명으로 마감했다.41)

반면 집사에 대한 설명은 장로의 직임에 대한 설명 보다 더 길다.42) 이

로 볼 때 과연 그 당시‘교회의 규례들(1541)’이 장로의 기능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를살펴봐야 한다. 거기서 구상했던 장로의 직분은

다음과 같다.

1. 삶에있어서모범을 보이며, 타인을지도할 수 있는사람.

2. 소(小)위원회에서는 두 명을 선택하고, 60인 위원회에서는4명을, 그

리고 200인 위원회에서는6명을선택하는것이좋을것 같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도시에서모든사람들을 감시한다.

4. 목사들의 소환을 받아야 선출될 수 있다(즉 목사들의 개입없이는 선

출될 수 없다).

5. 일 년에 한 번은, 년 말에 반드시 당회(seigneury)에서 그 직무(장로)

를 계속 수행하게 할 것인지, 그만 두게 할 것인지를 허락받아야 한

다. 그러나 부당하게 그 직무를 그만두게 해서는안 된다.43)

이를 따라서 보더라도 교인들의 의무는 당연히 목사의 치리에 순종

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이 목사들을‘치리자’로 명명한 것은 그의 프랑

스 신앙고백(1559)에서도 드러난다.36) 그러나 칼빈 연구에 있어서 전문

가인이양호는다음과 같이말했다.

칼빈은 평민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귀족집안의 자녀들과교제하면

서 성장하여 그 안에는 귀족적 의식이 있었다. 귀족적 평민이라는그

의 독특한 상황때문에 그는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정이라는그 나

름의 특유한 정치형태를 선호 하였다. 이것은 현대적 용어로 하면대

의 민주주의이다.37)

그래서 마치 칼빈은 민주주의의 선구자 인양 이해될 수도 있다. 그

러나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선행된 체제였고, 공화정은 고대의

로마가 시행했던 정치형태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여기서16세기 당

시, 장로를 어떤 직분으로 여겼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스위스의

개혁교회에서 만든 직제의 구조를 살필 필요가 있는데, 그 제도는4중

직으로서, 그것은“목사, 신학 교수(박사), 장로, 집사”이다.38) 여기서 주

의를기울일 것은, 1번 목사, 2번 교수, 3번 장로, 4번 집사이다. 물론츠

빙글리의 선언(1528)이나 불링거의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을 감

안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형제”39)이므로 평등할 뿐만 아

니라“고대 교부시대에는 아무도 누가 누구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

다”40)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적인 면이나 역할에 있어서

1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37

35) Calvin, “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1545),” 130-131.

36)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377.

37) 이양호, 『칼빈-생애와 사상』(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7), 12-13.

3 8 ) J.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J. K. S. Rei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59-66.

3 9 ) C.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3 (Michigan: Baker Books,

1931), 208.

40)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283.

41)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63-64.

42)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64-66.

4 3 ) J.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J. K. S. Rei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63-64.

Page 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바로 이것이 제네바의 개혁교회가 창안한 제도와는 결정적으로 반

대되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임시직이어야할 장로는 항존직이 되어있

고, 항존 직분자로서, 노회의 회원이며, 노회에서 공식적으로 파송 받아

야 할 목사가 오히려 임시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목사의 독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독재를 제도

상의 문제 때문으로 볼 수는 없다. 유럽이나 미국의 사례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칼빈파 교회처럼 목사에게 불리한 법을 적용한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한국에서는 목사의 독재를 우려했을까?

이는제도상의 문제 때문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개개 실존의 인간성에

있어서의문제였거나관습상의문제였다.

과거의 제도를 연상해 보자. 임시목사나 전도사의 임기는1년이었다.

예장 통합 측의 경우, 최근에야 비로소 임시목사의 임기를3년으로 개

정했다. 그랬다면 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교역자는 해마다 재(再)청

빙을 받아야 했다는 말인데, 장로들이나 교인들은 그 제도를 악용하여

목사를 내보내는 근거로 활용했을수도있다. 이럴경우, 목사는 장로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렵게 된다. 그러면서비공식적방법이라고 할 수 있

는 일명‘부흥회’로,“목사에게 잘 하시오”라든가,“목사에게 잘못하면

벌 받습니다”라는 종류의 미신을 퍼뜨려 공포를 조성해 왔다. 즉 정상

적 방법46)으로는 목양이 어렵게 만들어 놓은 점도 있다. 따라서 목사들

은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쓸 수밖에 없도록 강요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

지이다. 즉 칼빈시대나 외국의 사례들과 비교할 때, 한국은 법 자체가

목사에게 불리했기 때문에, 결과는 교인들 개개 실존의 양심이나 도덕

성에의존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장로는 임

시직이다. 뿐만아니라 미국의 경우, 장로는 한국처럼특이한 계층에속

하기어렵다. 즉 미국에서는 청년이나청년회장도 장로를 한다. 또 미국

이와같은의도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뜻이된다.

첫째, 장로는 시민회의 또는 시의회의 위원회에서 선임되었고, 장로

의 직무는 시(市)에서 이루어졌다. 즉 오늘날과 같이 교인들의 투표에

의한, 직접선거가 아니라 시의회의 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선임한 간접

선거였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는 목사들의 소환 하에 선출될

수 있었다. 셋째, 장로는 시의회가 관리했던 직임임에도불구하고 그 임

기에 관한 심의는 당회(seigneury)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장로의 임기

년 한에 대해 목사도 개입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의 당회란? 오늘

날 한국에서 보는 개(個)교회의 당회가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노회

(presbytery)’와 같은 기능을 행사한 시(市)당회였다. 그 당시 스위스의

제네바에는 개(個)교회에 당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경우, 이 점

을 숙고해야 한다. 스위스의 개혁교회가 창안한 장로의 임기는1년이었

다. 그것도 년 초가 아닌, 년 중에 선출되었을 때에는 잔여기간만 직무

를 수행하기 때문에1년도 채우지 못했다. 적어도 초임 장로일 경우에

는 그랬다. 년 중에 뽑힌 초임 장로가 임기1년을 넘기려면 년말에 당

회에서 재(再)신임 받을 때에만 가능했다. 따라서16세기 제네바에서의

장로는 철저하게 임시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바로 이 부분에 있

어서 거꾸로 되어 있다. 즉 노회에 소속된 회원인 목사는 임시직이고,

개혁교회에서 임시직으로 정해 놓았던 장로는 항존직이 되어 있다. 이

야말로 제네바 개혁교회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즉 오늘날 한

국에 있어서 통합 측의 경우, 부목사는1년에 한 번씩 청빙을 받아야

하고, 임시목사는3년에 한 번씩 청빙을 받아야 한다.44) 합동측의 경우

에는 임시목사일 경우, 임기가 1년이며, 재청빙을 받을 때에는 공동의

회에서3분의2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45) 반면 장로는 계속 그 지

위가보장된다. 즉 한 번 선출되면그 자리는 그대로 유지된다.

1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39

44)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176-177.

4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헌법』, 157. 그러나 합동측의 경우, 조직교회일 때에는 위임

목사를 청함이원칙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 157).

46) 여기서 말하는‘정상적 방법’이란? 헌법에 근거하고, 교리에 근거하며, 16세기 제네

바의개혁교회가시행한 목양의 원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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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의되었다).”(중략) 당회(노회)에서 파송(선택)된 몇 명의 목사들

은, 결혼문제에 대한 판관(判官)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확실히 목사들

과 함께협의하였다.48)

이와 같은 말은 그 당시‘종교법원(consistory)’의 구조를 이해해야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종교법원에서는 목사가 아니라 시민행정관들에

의해 치리가 이루어졌다. 16세기 스위스의‘종교법원(consistory)’에서

는 다음과 같은원칙이 있었다.

Sometimes one of the elders or ministers also intervenes, but in

principle this is task of the syndic.

때때로 장로들이나 목사들도 끼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원칙은 (시

민) 행정관의일이다.49)

이 말은 종교법원에서의‘치리’또는‘판결’은 시민행정관(syndic)50)

들에의해이루어졌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종교법원에서조

차도 목사들의 치리권이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다. 따라서16세기 당시

목사들의 권위는 높았으며, 목사들의 권력도 약하지 않았다. 즉 목사의

직임이 설교와 성례, 교리교육뿐만 아니라 종교법원에서의 치리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51) 이러한 칼빈시대의 목양 및 치리 방식은 부

스마의 말과도 견주어 볼 수 있는데, 부스마는다음과 같이말했다.

에서는 장로를 해 본 사람들의 수가 많다. 즉 웬만하면 한 번씩 장로의

직분을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견줄 때 한국의 장로들

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 장로가 70세에 은퇴하는 항존직은, 서구나 미

국 칼빈파 교단의 사태가 아니라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

이다. 그렇다면 성직자와섬김의 도를강조한다른사례를 찾아보자. 막

기는다음과 같이말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청은 가장 절대적이며 군주적인 형태의 대

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톨릭교회가민주국가들에자리잡고있으

며 다른 국가들과도 협약을 맺고 있습니다. (중략) 교황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 신자들과 항상 의논하며 그들이 기꺼이 가고자 하는

길로 이끌며 하나님의 종들에게 전적으로 봉사하는 교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런 지도자가 이끄는 교회라면 민주주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수 있을것입니다. 왜냐하면교회는 좋은예를실제로

보여 줌으로써‘목회자들’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봉사

하며 모든 사람이 자유와 존엄성을 지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핵심

적인특징을 성숙시킬것이기 때문입니다.47)

그러나 위와 같은 말이 한국 개혁교회의 상황과 어울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황은 본질적으로계층의 최상위에 있으며, 로마가톨릭교회

에는 여전히 성직자들의계급이 존재하기때문이다. 그렇다면칼빈시대

의 치리사례에 관해살펴보자.

종교법원의핵심내용은 칼빈의 초점에서벗어나 있었다. 종교법원은

기독교의 전통을 잃어버렸다. (중략) 1537년 1월 1 6일에“제네바의

예배와 교회의 기구는 목사들의 회에 의해서 (그 구조가) 짜여졌다

1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41

47) J. P. Mackey/ 김동건 편역,“기독교 교회와 세속국가,”『신학과 목회』, IX(1995. 4):

57.

4 8 ) Edited by R. M. Kingdon and T. A. Lambert and I. M. Watt, Registers of the

Consistory of Geneva in the Time of Calvin, Translated by M. W. McDonald, vol.

1,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0), X XI II-X XI V.

4 9 ) Edited by R. M. Kingdon and T. A. Lambert and I. M. Watt, Registers of the

Consistory of Geneva in the Time of Calvin, Translated by M. W. McDonald, vol.

1,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0), X XI V.

50) 이정숙은이 말을‘행정장관’으로옮긴다(이정숙, “제네바컨시스토리,”164).

51) 이정숙, “제네바컨시스토리,”162-164.

Page 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재함을 알았으며, 그는“우리가 악덕들을 꼭 비판해야 할 경우 우리

는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래서 자신의

약점들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온건하게 대하도록”규정

했다. 우리는 사실들을확인하고신중하게판단해야 한다.54)

이를 따른다면, 사실상 장로들의 직무는 시의회와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로가 교회일 때문에 목사와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은 희박했

을 것으로 보인다. 장로들의 직무는 주로‘종교법원’과 시의회에서 이

루어졌다. 따라서 그 당시의 구조 안에서는 오늘날 한국에서 볼 수 있

는, 그런 형태의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16세

기 스위스에서 목사와 장로가 갈등을 일으켰다면, 그 사안은 아마도

‘치리’에 한정되었을 터인데, 그 일은 주로‘종교법원(consistory)’에서

의 직무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실상은 종교법원에서의

갈등은 목사와 장로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사와 시민행정관

(syndic) 사이에서 두드러졌다고 한다.55) 따라서 그 당시에는 목사와 장

로와의 갈등 구조가 성립되지 않았거나 갈등이 있었더라도 약했을 것

으로 추측한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의한국교회의 상황과16세기 스위

스의 행태와의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장로들

의 사적인 모임이 있었듯이 목사들의 모임도 있었다.56) 그 당시의 목사

들은 매주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57) 즉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같은

개(個)교회주의를 한 것이 아니라 제네바 시의 전반적인 목양의 문제

를 목사들이함께논의했었다.

그렇다면칼빈이 목사의 권위에 대해어떻게 이해했는지살펴보자.

칼빈은“모든인간사회에서 공동적 평화를 증진하고 일치를 유지하

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조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조직은

“특히 교회들에 있어야 하는데, 교회들은 모든 것들이 질서 잡힌 구

조 아래 있을때 가장 잘 유지되며, 일치가 없다면 전혀교회가 되지

못한다.”(중략) 교회도 역시질서(la police)를 필요로 한다. (중략) 그

래서 이상적으로 말해서 목사와 관리는 교회적인 집단인 동시에 정

치적인 집단인 한, 집단에서병존하는직임자들인것같이 보인다.52)

그의열성은 구교회의권징에 대한프로테스탄트의 공격이 무정부 상

태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강화되었다. 그는 활동 초기

에“민중도 제후도 그리스도의 멍에와 교황의 폭정 사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하고 탄식했다. 많은 사람이“그리스도의 멍에를 벗어 버리

고 어떤 권징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종교개혁이라

는 이름을 대담하게사용하지만모든질서를 뒤엎기를원한다.”53)

이를 따라서 볼 때 칼빈은 결코 무질서를 용납한 사람이 아니었다.

즉 칼빈은 권징의 필요성을잘 알았다. 부스마는다음과 같이말했다.

칼빈은 공동체 내에 권징을 지속시키기 위해 제네바에 사적으로 모

이는“장로들”의 당회를 창설하여“그들이 군중이 없는 자리에서 토

의함으로써 좀 더 질서가 있도록 했다.”그는 [교회와 국가와의] 병립

적 통치개념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장로와 교회와의 관계는

의회와 시(市)와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병립적 설명

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의 체계에 있어서 장로들은 사실상

이전에는 의회에 속했던 주된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이에 첨가해서

교회의 전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책망하고 교정할 의무가

있었다.(중략) 그는 원한 관계 때문에 비난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

1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43

52) Bouwsma, 『칼빈』, 508-509.

53) Bouwsma, 『칼빈』, 510.

54) Bouwsma, 『칼빈』, 510-511.

55) 이정숙, “제네바컨시스토리,”164.

56) 박경수/ 김종렬 엮음,『교회의 교사 칼뱅의 생애와 사상,”『2011 예배와 강단』(서울:

기독교문사, 2010), 39와 비교.

57) 이정숙, “목사는누구인가?-칼빈의 목사직이해와 실천,”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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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말은 예전의 권위나 효력이 집례자의 자질이나 도덕성에

의해 좌우될 수 없음을 뜻한 것이다.61)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교회에

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세상의 권력도 함부로 점할 수 없는 것이

목사들의 권위이다.62)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과 같이, 개 교회의 몇 장로

들이목사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었던 사태는, 종교개혁 시대의 의도

나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의 의도와는무관했다. 그랬다면16세기의 스위

스에서 교역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없었을까? 이에 대해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다음과 같이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ministros)을 위한 적절한 치리가 있어야

한다. 대회 안에서는(in synodis) 목사들의 가르침과 삶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교정될만한 범법자들은 목사들(pastores)63)에 의하여

견책받아야하고, 올바른 길로인도되어야한다.64)

이를 따른다면 목사에 대한 견책도 가능했다. 그러나 목사에 대한

‘치리’는 대회 안에서 자정적(自淨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목

사들에 대한 견책을 개 교회나 개 교회의 어느 장로가 마음대로 집행

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목사에 대한 견책은 그 사유가 정당해야

그는 자기의 성직자주의를 여러 방식으로 변호했다. (중략) 사제적

권위는“교회의 선을 위한 필수적 굴레”로서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

했다. 그는또한사제직의 부성적(父性的)권위에 호소했다. (중략)“말

씀 사역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다스릴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부모의 관계로 대해야 하며, 그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아 여러분 가운데서 행하는 봉사를 존중하고 존경

해야 합니다.”그는 또한 널리 알려진 중세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성

직자를 교회의“영혼”으로 (때때로 칼빈은 심장으로 묘사하기도 한

다!) 평신도를 단순히 교회의 몸으로 묘사했다. 칼빈은 되풀이해서

평신도 위에 있는 성직자의 권위를 인정했다. (중략) 제네바의 성직

자들은 평신도로 구성된 시의회가 교회를 지배하려고 하는 데 대항

해서“용감하고 대적할 수 없는 열성으로”,“침해해서는 안 되는 거

룩한권세”를 위해싸웠다.58)

이를 따라서 본다면 칼빈은 목사의 권위를 충분하게 인정했다. 그리

고 16세기 스위스의 목양방침은 특별히 목사들의 말씀 선포에서 두드

러졌다. 즉“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59)일 뿐만 아니라 말씀의 권

위가 선포자의 자질에 국한되지 않음을 인정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566)의 경우에는다음과 같이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사악한 목사의 입을 통해서 나오더라도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안다. 성례전이란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에 의하여 성화되기 때문에 비록 합당치 못한 목사들이 그것을

베풀더라도믿는성도들에게효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종 어거스틴이성경에

근거하여여러차례도나티스트들을반박하였다.60)

1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45

58) Bouwsma, 『칼빈』, 513-514.

59)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237-238.

60)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285; 이형기, 『세계개혁교회의신앙고백서』(서

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1), 190.

6 1 ) Hrsg. von Erwin Fahlbusch, T a s c h e n l e x i k o n , Religion und Theologie Bd. 4, 3.

Aufl., (Göttingen: 1978), 11-12와 비교.

62)“아무도 교역자들의 영예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Schaff, The Creeds of Christen-

dom, 280; 이형기, 『세계개혁교회의신앙고백서』, 183).

63) 이형기는이 단어를‘장로들’로 번역하였는데, 결정적인 오역(誤譯)이다. ‘pastores’는

‘목자(牧者)’를 뜻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목사’로 번역함이 마땅하다. 영어로 번역

된 미국 판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 라틴어 원문에 없는“of the elders” 라는 말

을 삽입하였다(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884). 영어로 옮겨진미국 판 신

조들에서는이와같은종류의삽입및 변질의 사례들이더러있다.

6 4 )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285; 이형기,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190.

Page 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목사는‘치리자’, 즉 통치자였으며, 판관(判官)이었다. 다시 말해교인들

을 다스리고 교육하는 사람이었지, 교인들을‘섬기는 종’이 아니었다.

당연히 공화정의 형태를 추구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그랬다.‘목사

(minister)’라는 말이‘종(servant)’이라는 의미를 가질 때에는‘하나님

과의관계’에 있어서‘말씀을 위한종’이었지,‘인간을위한종’이 아니

었다. 따라서‘만인제사장론’의 오용으로 인한‘만인교역자론’식의이

해는옳지않다.

오늘날 한국의 칼빈파 교단에서 명시한 목사와 장로, 혹은 집사 등

에 관한 이해는 칼빈시대의 제네바와는 차이가 크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일부에서는‘목사의독재’를 우려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지(肢)

교회들의상황으로들어가 보면‘장로들의횡포’로 인한사례들도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직임에 있어서‘목사 계층’만을

겨냥하여 예리한 비판들을 쏟아내는 학계나 교계 또는 사회의 비판들

을 무작정 수용할 수만은 없다.

1937-1944년대의 판례를 살필 때 평안도‘선천’지방의 교회에서는

‘목사’가‘장로’의 직무 수행을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투표가 아

닌, 목사가 장로 후보자를‘지목(指目)’함으로, 노회의 인준을 받아 장

로를 세운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68) 즉 일제시대 말까지만 해도 목사

의 권한으로 장로를‘정직(停職)’시킬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교파가 갈라지면서, 특별히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한, 소위

‘교회의 민주주의’라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장로나 평신도의 권위나 권

리가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교회의 관습도 일제시대의 행태와는

달랐다. 그러나16세기스위스의 경우에는 공화정을추구했음에도불구

하고 목사의 권위에 대해서 만큼은 충분할 정도로 인정했다. 스위스의

개혁교회에서는‘장로’때문에‘목사’의 목양이 어려울 정도로 구조를

취약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만약 한국에서 목사의 목양이 심히 어렵다

한다. 이를테면‘범법자’일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규정을 목사들

의 권위를 낮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공화정의 행태에서는 누구라도

범죄 사실이 있을 때에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스위스의 개혁교회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장로 제도를 만들지는 않았다. 스위스의 개혁교회가 추구

한 제도의 순서는‘목사와 신학 교수’에게 우위가 있었다.65) 그러나 한

국에서는 이 순서를 바꾸려 했다. 16세기의 구조를 살필 때, 교회의 치

리권은 목사들에게 있었다. 16세기 제네바의 목사들은 시(市)에 소속된

공무원이었다.66) 그것도 고위직 공무원에 해당한다. 이정숙은16세기당

시 스위스에서 목사를 뽑는일은 신중하게 이루어졌고, 또 목사가 되는

일은 어려운 과정을 통해 가능했다고 한다.67) 그러나 이는 당연한 귀결

이다. 고위직 공무원이 되는 일인데, 어찌 그 과정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I I I. 나가는말

이상의 연구 결과를 따르면16세기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행해진 목

양의 형태는 목사가‘섬김의 종’이라든가, 평신도의 역할이‘만인 교역

자론’식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제네바의 행태를 따르면

1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47

65) 한국에서는‘은퇴 장로’나‘원로장로’라는말까지 쓴다. 그러나 16세기당시, 스위스

에서의 장로들은 철저한 임시직인데다, 주로 시의원들이었기 때문에‘은퇴 장로’나

‘원로 장로’라는 종류의 말들이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다만‘은퇴 목사’나‘은퇴

교수’는 가능했다. 이정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는 집사 다음에 장로로 선출

되는 것이지, 장로가 다시 집사가 되는법은 없다. 그런데 이 당시직분은 철저히직

무상의 기능이었기 때문에 장로로 섬기던 이가 집사가 되기도 했다”(이정숙,“칼뱅

의 제네바 목회로부터‘종합적목회’배우기,”『종교개혁과칼뱅』4 (2010. 10): 259).

66) 이정숙, “목사는 누구인가?-칼빈의 목사직이해와실천,”226.

67) 이정숙,“목사는 누구인가?-칼빈의 목사직 이해와 실천,”225-226; 이정숙,“칼뱅이

그린목회: 어머니가자식을 품듯이,”『종교개혁과칼뱅』4 (2010. 10): 245-246. 68) 전택부, 『토박이신앙산맥』, 3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124-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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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목사의 독재가 우려된다면 그것은 16세기 스위스의 개혁교회의

방침을제대로 해석하지못한탓일것이다.

이와 같이 본 연구에서는16세기 제네바의 목양방식을 통하여 현대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국은 스위스나 네덜란드의

칼빈파 선교사들로부터직접복음을 전해 듣지않고, 미국칼빈파 소속

선교회들로부터 복음을 전수했다. 따라서 본 연구의 후속과제로는유럽

의 칼빈파와 미국 칼빈파와의 비교를 꼽을 수 있다. 유럽에서 만들지

않았던 조항들이 미국의 신조들에서는 삽입되거나 변질시킨 사례들이

있다. 따라서 미국 칼빈파 교회의 격률들과 유럽 칼빈파 교회의 격률들

과의차이점에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주제어

만인제사장, 목사, 장로, 목양, 치리.

Key Word: priests, minister, elder, ministry, discipline.

접 수 일 2011년 3월 23일

심사 (수정일) 2011년 4월 25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1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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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51

Page 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inisters were teachers who teach layperson, they should not only have

the authority as spiritual parents but also be ‘the passage of blessing’ as

ministers of God.

In the 16th century, ministers at Geneva were both governors and judges.

However, today, some in South Korea tend towards misunderstanding ‘all

people priests theory’ as ‘all people ministers theory’, which weakens

pastors’ authority.

But this is totally different from pastoral methods in the 16th century at

Geneva, Switzerland. Calvin sufficiently acknowledged ministers’ authority.

A Study on Ministers’ Authority in the 16thCentury at Geneva: In reference to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Kong, Hun-Bai

Lecturer

Etsmayan Bible Culture Institute

Sangju, Korea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lluminate ministers’ authority, by looking

into their pastoral methods done in the era of Calvin at Geneva, through an

article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Today, one of the factors to conflicts in Churches of South Korea is often

seen between pastors and elders. But this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pastoral methods in the 16th century at Geneva, Switzerland.

In the 16th century at Geneva, elders took one-year temporary job, and

ministers were able to manage churches in cooperation with deacons, so was

the structure formed. Thus, ministers and elders seemed to have little cause to

frictions related to tasks in churches.

At that time, elders at Geneva were appointed by the municipal assembly

to be elected through indirect elections, not by church members through

direct elections.

Elders’ duties were accomplished mainly from connections with the

municipal assembly.

According to Calvin’s intention, churches must submit to ministers’

disciplines, and ministers’ authority was predominant in their sermon

proclamations.

1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공헌배, 16세기제네바의목양방식을통해본 교역자의위상 153

Page 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칼뱅에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이오갑

(그리스도대학교교수)

I. 들어가는말

일부다처제와 독신주의는 모두 결혼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두 가지

양 극단의 형태이다. 하나는 중혼으로서 이미결혼을 했는데도 계속결

혼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아예 결혼 자체를 거절하는 것으로서, 모두

인류 역사에 오랜 뿌리를 두고 있고 현재도 성행하고 있다. 즉 일부다

처제는 이슬람 문화권 내에서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나 동양사회에서도 전처럼흔하지는 않지만 음성적으로, 또

는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는유습이다.

또한 독신주의는 주로 종교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 왔던 것으로서,

특정종교인들에게는하나의 의무이며미덕으로 숭상되어 왔으며, 그런

성격은 현대에까지 불교와 가톨릭 교회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

대사회에서는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독신으로 사는 사람

들이 많으며, 독신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매기며 그를 확신하는 독신

주의가 확산되고있다.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55-182

Page 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처제에대한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I I. 일부다처제

칼뱅에게서 결혼이란 이론의 여지없이 일부일처제였으며, 그는 이점

을 분명히 하기위해 많은노력을 기울였다. 즉 그는 결혼을 말해야 하

는 장소에서는거의 일부일처제라는것을강조했고, 이어서 일부다처제

를 공격하면서 그 가능성 자체를 끊으려고 했다.“여기서 둘이라는 분

명한 언급은 되어있지 않지만 의미에 있어서 모호한 점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는(모세) 하나님이남자에게 여러아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

만 배정했고, 일반적인 면에서 여자를 단수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결혼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거기로부터 일부다처

제라고 불려지는 여러아내를 거느릴 권리보다 더 하나님의 제도에 부

적절한 것은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일부다처제가

하나님의 제도에 크게 불일치한다는 점도 쉽게 드러난다.…그러므로

일부다처제라는 것이 참되고 합법적인 결혼의 타락이란 것은 의심할

바 전혀없다.”3)

칼뱅은 말라기서의 예를 가지고도 말한다.“그는(말라기) 유대인들이

여러아내들을 취함으로써 훼손한 결혼의 서약을 다룬다. 그 악을 고치

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이 태초에 함께 결합시켜준 남자와 여자의 쌍을

오직 한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각자가 자기 아내에게 만족하기를 배

우도록 한 것이다.”4) 또한 그는 디모데서 설교에서도 역설한다.“하나님

의 첫 번째명령에서, 우리를 창조하신분, 우리의 아버지인분, 그가오

직 한 남자만을 만들지 않았느냐, 그에게 한 여자만을 붙여주지 않았느

그런 현상을 보면서, 개신교에서는 이에 관해 어떤 입장을 보여 왔

으며, 또 보여야 할까? 단지 우려하기만 하고 비판하기만 하면 될까?

아니면 시대의 흐름과 현상으로 묵인하고, 동조하거나 혹은 개인들의

선택에만맡겨둘 수 있을까?

그런 논의를 위해서, 이 연구는 칼뱅이 말했던 일부다처제와 독신주

의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상 그런 것들에 관한 칼뱅의 입장은

이제까지 개신교 도덕의 표준같이 되어왔던 것으로서 진부하고 새로울

것이 없다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들을 전체적으로 또 상세

하게살펴보면, 그런입장이 나오게 되는과정들, 이유들을 생각하게되

고, 그래서 단편적인 결과들만이 아니라 하나의 맥락을 가진 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이해를 가질 때 칼뱅과 개신교의 전통적인

입장이 새로운 무게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이해가 현대

개신교도들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규범들에 대한 태도들을 훨씬 신중하

고 진지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이 전통을 수용하건, 재해석하건, 재창조

하건 그 어떤 것이라도 다 이유와 의미를 가지고 가능하게 해준다. 그

런 점에서 칼뱅의 생각과 주장을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고 할 수 있다.

연구를위한자료로서는주로칼뱅의『기독교강요』와 성서주석들, 설

교문들을 사용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여러 정황 속에서 그가 이 주제

들에 관해하였던 말들과 주장들을 생생하게 접할수 있다. 유감스럽게

도 칼뱅의 일부다처제나 독신주의를 다루었던2차 자료는 국내외를 막

론하고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앙드레 비엘레의『칼뱅주의도덕

에서의 남성과 여성』에서 독신주의가 일부분 다뤄지고 있고,1) 더글라스

의『칼빈의 여성관』에서도 역시 약간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지만,2) 일부

1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57

1) A, Biéler, L’Homme et la femme dans la morale calviniste, la doctrine réformée sur

l’amour, le mariage, le célibat, le divorce, l’adultère et la prostitution, considérée

dans son cadre historique (Genève: Labor et Fides, 1963).

2) 더글라스 J. D./심창섭 역, 『칼빈의여성관』(서울: 무림출판사, 1990).

3) Commentaires bibliques, Le livre de la Genèse (Genève: Labor et Fides, 1961),

2;24, 60. 이하 Commentaire, Genèse, 2;24의 방식으로표기함.

4) Commentaire, Genèse, 1;27.

Page 8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남자가 여러여자를 거느리는풍습이 있었던이유가 그것입니다.”9)

그렇다면 칼뱅은 어떤 이유에서 일부다처제를 반대하고 비판했을

까? 그것은 이미 위의 인용문들에서도일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

님이창조한 결혼제도가 아니라는것이다. 즉 결혼은 일부일처제이므로

일부다처는“결혼의 부패”이고,“적법하지 않으며”,“하나님의 질서”또

는“하나님의 법칙”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남자가

두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결코 적법하지 않다는 것을 압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훼손하는 일입니다.”10)“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순

수한 말씀을 붙들고, 우리에게 적법한 것만을, 말씀에 따라 정해진 것

규칙만을 주장합시다.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일부다처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누가 두 아내를 얻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반하는 것입니다.”11)

결국일부다처제는합법적일수 없고, 침상을 더럽혀서결혼을 전복

시켜놓는 일과 다름 아니다. 칼뱅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종을 첩으로

내어준 일을 비판하며 말한다.“아무리 사태가 절망적이었다고 해도그

녀는 하나님의 뜻과 자연의 합법적 질서에 맞지 않는 것은 절대로 시

도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은 인류가 거룩한 결혼의 방식으로 생육하

고 번성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사래는 오직두 사람에게만주어진 침

상을더럽힘으로써그것을 뒤엎어버렸다.”12)

그래서 칼뱅은 그렇게 불법적인 일부다처를 하느니 차라리 이혼하

는 것이 낫다고까지 했다. 그는 라반을 비판하며 말한다.“그는(라반)

그런 불법적인 거래를 하게 됨으로써 그에게 닥칠 불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서 어떤 이득이 생기기만 한다면 상관하지 않은채 심지어

자기 딸을 매물로 내어놓기까지 한다. 그는 자기 조카를 일부다처제에

냐고 말씀합니다. 한 남자에게 세 명이나 네 명의아내를 준 것이아니

지 않습니까? 그가 그 안에 풍부한 영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는 한 아담에게 세 하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한 도움이 되어라. 거기서 하나의 도움이라고만 말해집니다. 즉 남자에

게 하나님께서붙여주신아내입니다.”5)

1. 일부다처제를배격한이유

칼뱅이 일부다처제를 그렇게 배격했던 것은 물론그 관행이 너무나

만연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관행을 자신의 나라에서뿐만 아

니라 터키 같은 이슬람 국가들 속에서, 그리고 동시대뿐만 아니라 성

서, 심지어는 신약시대 속에서도 발견했다.“일부다처제가, 즉 여러 아

내를 취하는 것이 이미 많은 이들 가운데서 이뤄지고 있지만, 둘을 서

로 함께 결합하게 하는 하나님의 법을 폐지하고 위반하는 것은 사람들

의지나 욕구에 맡겨진 것이 결코 아니다.”6)“보십시오. 많은 나라들이

셋이나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을 합법적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리

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터키인들이 허용하고 있습니다.”7)“이런 관행은

동방의 여러 나라들에서 아주 흔한 것일 뿐이다.”8)“그런데 족장들은

악한 풍습에 의해서 더럽혀졌고, 그들의 후손은 그들의 인종으로부터

나옴으로써 피부색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들이 여러 아내들을 거느릴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렇게 했고, 다윗과

또 그런 사람들이그랬습니다. 성 바울의 시대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한

1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59

5) 21e sermon sur la 1ere Timothée, Ioh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59

vols. Ed. par G. Baum, E Cunitz, E. Reuss etc. (Brunschwig: Schwetschke et

Filium, 1863-1900). L I I I, 251. 이하 Opera Calvini.

6) Commentaire, Genèse, 16;1.

7) 42e sermon sur l’Epiítre aux Ephésiens, Opera Calvini, LI, 775.

8) Commentaire, Genèse, 29;27.

9) 21e sermon sur la 1ere Timothée, Opera Calvini, L I I I, 245.

10) 4e sermon sur le ch. 17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475.

11) 3e sermon sur le ch. 21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667.

12) Commentaire, Genèse, 16;1.

Page 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 일부다처제어디에서왔을까?

그렇다면 일부다처제는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칼뱅은 창세

기를 주석하면서 가인의 아들라멕에게서 일부다처제의 기원을 발견했

다.“우리는 이 불행하고 패역한 인종에서 일부다처제, 즉 여러 아내를

취할수 있는 제도의 기원을 발견한다. 그것의 최초의 창시자는 인간성

이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것을 마치 지위가 높고 욕심이 많

은 사람들이흔히 그렇듯이, 자기집안을 늘리고 번성하게 하려는 너무

강한 욕심으로 그랬는지, 음란에 사로잡혀 그랬는지를 아는 것은 그렇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두 가지로써 하나님에 의해

명령된 결혼의 거룩한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라고 결정하셨다. 그것이 자연의 항구적인 질서이다. 라멕은 하

나님에 대한야만적인경시로써 자연의 법칙들을 타락시켰다. 그러므로

주님은 합법적 결혼의 타락이 가인의 집과 라멕의 인격에서 시작되게

하기를 원하심으로써, 여러아내를 취하는 자들을 그런 예를따르는 수

치를당하게 하신것이다.”17)

본문에서 칼뱅은 일부다처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인간의 자손에 대한 욕심 때문이건, 성적 욕정 때문이건

어떤 것이든 모두작용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가여기서 중요시 한 것

은 일부다처의 기원이 잔인하고 인간성이 나쁜 타락한 가인의 가계였

다는것이고, 거기에는일부다처주의자들이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한하

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부다처제는 더러운 조상으

로부터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다처가 어디 한 가계, 한 나라, 한 인종만의 문제

인가? 선택된 하나님의백성들, 심지어는믿음의 조상이라고일컫는 아

브라함도 역시 그러지 않았는가? 칼뱅은 그런 딜레마를 관행에 약한

빠뜨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와 자기딸들을 근친상간적 결혼으로 더럽

히는 중죄를 저지르고 있다. 만일 어떤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조금도 사

랑받지 못할 때, 남편은 아내를 볼모로 잡아둔 채 다른 아내를 얻어서

슬퍼 죽게만드느니 내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말라기를 통해이

혼이 일부다처보다 더 용납할만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13) 또한 신명

기 설교에서도 말한다.“우리 주님께서 그의예언자 말라기가 일부다처

를 다룰때 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봅시다. 만일 아내가 너의 마

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럿을 더하러 가지 말고 차라리 아내를 내보내라

는 것입니다. 그가 남자에게 아내를 내버리는 허가를 주는것이 아닙니

다. 오히려 그는 아내를 그렇게 한탄 가운데 묶어두기보다는 내보내는

것이더 낫다고 말합니다. 그는두 가지악을비교하고 있는것인데, 우

리는언제나 최악의것을피해야 합니다.”14)

칼뱅이 일부다처제를 배격했던 것은 아내들 사이의 불화, 더 나가서

는 가정의 불화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는레아와 라헬 사이의

질투와 시기, 경쟁, 분란을 보면서 사람들이 일부다처제를 두려워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형벌을 발견했다.“라반은 탐욕으로 눈이 멀어서

자기 딸들을 평생 동안 불화와 적대심을 가지고 싸우게 만든다.”15)“레

아는 분노하며 말하는데, 이는 그녀의 마음이 분기로 가득차서 자기동

생에게 예의 바르고 온화하게 말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들

이 천성적으로 투쟁적이지는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녀들

이 그런식으로 싸우게 허용하심으로써후손들로 하여금 일부다처제의

형벌이 어떤것인지를보게하려는 것이었다.”16)

1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61

13) Commentaire, Genèse, 29;27.

14) 7e sermon sur le ch. 23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I, 145.

15) Commentaire, Genèse, 29;27.

16) Commentaire, Genèse, 30;15. 17) Commentaire, Genèse, 4;19.

Page 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자들에게 그런 것이 허용되

고 여러 아내를 가지는 권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너무 혼란스럽고

과대한 것이라고보입니다.”20)

그러나 족장들에게 허용되었다고 해도 역시 일부다처제는 칼뱅에게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태연하게일부다

처로 빠져들어 갈 명분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족장들은 그

랬다고 해도‘우리들은’그래서는안 된다는 것이다. 칼뱅은 말한다.“보

십시오, 믿는 이들의 아비인 아브라함도 여러 아내를 얻었습니다. 그런

데도 그는 정죄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그의 생애 전체가 천사 같은

완전함의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점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붙들고, 우리에게 적법한 것만

을 말씀에 따라정해진 규칙만을 주장합시다.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해

지고 있는 일부다처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누가 두 아내를 얻는다면

그는하나님이 세우신질서에 반하는 것입니다.”21)

4. 왕이나목사들에게금지된일부다처

성경에서도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왕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일부다처가 금지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왕들이나 지도자들은 일부다처

가 안 되고 일반인들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영향력이 크고,

모범이 되고, 주목을 받는사람들에게 일부다처제를금지함으로써 그런

악행이 위로부터 퍼져나가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일반인들도 보고배

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남자가 두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결코 적법

하지 않다는 것을 압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오직 왕들에게 금지되었습니까? 더군다나 그들에게

더 큰 자유가 있는데 말입니다.…우리 주님은 특별히 그들에게 여러

남자들의 습성에서 찾았다.“일부다처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가 아니라 카인의 집에서 발

견됩니다. 그래서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이 악을 거기에 세운 것은 사

탄입니다. 그런데 족장들이 거기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남자가 어떤 일

이 완전히 관습이 되었을 때는 거기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18)

3. 성경이일부다처제를비난하지않은까닭

그렇다면 성서는 왜 그런 족장들의 일부다처에 대해 비난하거나 정

죄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신성한 결혼을 더럽히는 타락한 가인의 후

예들의 악습인 일부다처에 대해 의외로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구약

성서의 시각을 칼뱅은‘허용’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나간다. 즉 성서는

원래 일부다처를 합법적인 결혼이 아닌 것으로 정죄하지만, 그것이 만

연한 현실에서 유대인들이나 족장들에게“허용되었다”는 것이다.“그래

서 그것이(일부다처) 허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경우가 있으니까

그것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왕들에게

아내 수를 늘려나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도 아

내들이나 재물들도 많았고, 또한 솔로몬은 더 하지 않았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여러 아내를 거느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

습니다. 그 다음에 솔로몬은더 많은아내를 거느렸습니다. 거기에 대해

서 그가 정죄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의 마음이 이방

여인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여인들이 자기들의 미신

과 우상숭배로 그를 타락시키지 않았다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

다.”19)“여기에 우선되는 하나님의 제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끝

1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63

18) 4e sermon sur le ch. 17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475.

19) 4e sermon sur le ch. 17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475.

20) 3e sermon sur le ch. 21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667.

21) Ibid.

Page 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목사들에게그런덕목을 요구한 것입니다.”23)

5. 일부다처제하에서태어난자녀들을어떻게대우할까?

그렇다면 일부다처제 하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까? 하나님은 그런 불법적인 결혼을 통해서도 자녀를 허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 칼뱅은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은 것을 보면서 자녀의 축복선언

은 일부다처에도 해당되는 것을 인정했다.“하나님은 반쯤은 서자인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의 그 결혼은 합법적이 아니었기 때문

입니다. 그것이 음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결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인

정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엘을 인정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내가 너

의 기도를 들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것입니다.…”24)“결혼에 부가되는‘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은 잘못된

음행자들에게까지 미친다.”25) 또한 그는 야곱의 첩들로부터 얻은 자녀

들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하나님께서 불법적인

결혼에도 후손을 주는 영예를 베푸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그러므

로 그분은 이 악한 결혼으로부터 태어난 아이들도 합법적인 자녀로 인

정되기를원하셨다.”26)

6. 일부다처의해법: 남편들이여아내를사랑하라, 마녀와

같더라도!

결국 일부다처제는 남편들의 마음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특히 남편

아내들을 가지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이들의 예가 사

적인 사람들보다 더 나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집이나 주변을 넘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탁

월한 사람은 높은자리에 있어서 사람들이 멀리서도 잘 봅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방탕하다면 이 타락은 여기저기로 퍼져나갑니다. 그래서 하

나님은 왕들에게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을 금지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22)

신약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다처는 목사들에게 금

지되었는데 그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바울이 그 말을 했던 당

시도 전래의 관습에 의해서 일부다처가 성행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한

꺼번에 금지하기 어려운 고충이 있어서, 우선은“신중함의 거울로서 존

재해야 하는”목사들에게 금지되었다는 것이다.“아브라함과 야곱이 그

렇게 했고, 다윗과 또 그런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성 바울의 시대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풍습이 있었던 이유

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언했듯이 이것은 적법한 것이 아니었

습니다. 단지 그런악이한 번에고쳐질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그런악

이 범해졌을 때, 기대할 만큼 그렇게 쉽게 치유책이 찾아지는 것이 아

닙니다. 그러므로성 바울은 일부다처제라고불리는 것, 즉 아내를 여러

명 소유하는 것을 정죄하지만, 무지에 의해서 취해졌던 아내들이 남편

들에 의해서 버려지는 것이나 남편들이 그녀들을 내쫓는 것이나 거의

개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일반 대중들의 나쁜

습관이나 악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에게 신중함의 거울

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들에게서 그런 것을 용납하기를 원치 않았습니

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합

니다. 어떤 악이 개인에게는 용서된다고 해도,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는

훨씬 엄격하게 고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에서 성 바울은

1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65

22) 4e sermon sur le ch. 17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475.

23) 21e sermon sur la 1re Timothée, Opera Calvini, L I I I, 245-246.

24) 1er sermon sur le ch. II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11.

25) Commentaire, Genèse, 25;5.

26) Commentaire, Genèse, 30;5.

Page 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든 불행이라고 해도 결합해있어야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아내의 악

들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여

겨 아내를 보듬어야하고평화롭게다루어야합니다.”27)

I I I. 독신주의

칼뱅의 동시대였던15, 16세기는독신의 풍조가 주목할 만큼늘어났

으며, 결혼을 해도늦은나이에 하는만혼의 경향도 뚜렷하게 나타났었

다. 에릭미들포트라는역사가에따르면, 그것은 유럽의 역사상 가장중

대한 인구 변동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당시 남자들의 초혼 연령은

25-30세였으며 여자들은23-27세였고, 독신으로 남는 사람들의 비율

도 약 5% 정도에서 약 20%정도까지 증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더 높았다고한다.28)

그 기준에서 보면 서른 한 살에 결혼한 칼뱅 역시 만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뱅은 결혼을 기피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개혁자로서

가난과 불안정 그리고 위험한 상태 때문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적당

한 상대를 찾지 못했다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스토페

르의 보고가 의미 있다.“젊은 시절에 그가 원칙적으로 결혼에 반대했

던 것은결코아니다! 그 시절그는여러번 교회의 독신생활에항의했

다. 그는 자신에게 결혼의 합법성 문제에 대해 문의했던 한 알려지지

않은 인물(목사)에게썼다.‘독신생활을 그토록 반대하는 내가 아직 결

혼하지 않았고, 또 영원히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내가 부인을

맞는다면 이는 수많은 귀찮은 일들에서 해방되어 보다 주님께 헌신할

이 아내를 사랑하느냐, 하지않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중요한 것은아

내를 사랑하는 일이다. 사실 그것이 일부다처제의 문제를 해결할 근본

적인방법아닌가?

칼뱅은 신명기서를 설교하면서 아내를 사랑하라고, 아내가 밉고 마

녀 같은여자라고 해도 사랑하라고 아주‘처절하게’호소하고 있다.“그

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해야 하는 사랑을 하지

않을 때 이 일부다처제는 악한 감정을 갖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남자가 그에게 명령된 대로 자기아내를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결

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내가 새 장가를 가겠다고 말하는 일도 없

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두 번째 결혼을 바라기에 앞서서 그는 이미

그의 마음이 타락하고 더러워진 것이고, 자기 아내를 거스르는 악심을

품는 것이고, 그래서 그녀에게 해야 하는 자기 의무를 하지 않는 것입

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러분 남편들이여, 자기 아내를 사랑하시오.

미워하면서 자기살을 얻을 수는 결코없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모든

남자들에 대해 잘 논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우리는 우리 안에공통

적인본성의 유사성을가지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는말합니다. 너는네

살을경시하지말라.…그러나남편이나아내에 대해서, 하나의 다른이

유가 있습니다. 적절하게 말해서 그들은 한 사람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해 말한 대로입니다.‘그들은 한 살, 즉 한 인격인 둘

이 될 것이다.’그런데 지금 누가 자기살을 미워한다면 미쳤다고 밖에

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성 바울은 결론을 내리기를,

만일 남자가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괴물과같다고 합니다.

아내들이 종종 남편에게 미움 받을구실을 주는 것도사실입니다. 하늘

의 천사들을 흔들어놓고 타락시키는 마녀들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시험과 싸워야 하고, 어쨌든 그것을 이겨내야하는

데, 성령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가 내가 여기에 한 여인과 결합해 있

다는 것을 알게될 때가있는데, 그것은 우연히 생긴 일이아니라 하나

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그것이 내게 아주힘

1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67

27) 3e sermon sur le ch. 21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I, 667-668.

28) H. G. Eric Midelfort, Witch Hunting in Southwestern Germany 1562-1684: The

Social and Intellectual Foundations, 184-185. J. D. 더글라스/심창섭 역, 124 재인

용.

Page 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결혼생활의 여러 가지 불편함이나 불리함 같은 것들이 결혼을 회피하

게 하기도 한다. 즉 관계에 예속되기보다는 홀가분한 삶을 선호하는사

람들이 많다.

그런 사정은 칼뱅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많은 사람들은 독신이,

즉 아내가 없는고독한 상태가 자기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에서 그들은 비참해지는 것에 겁을 먹고 결혼을 삼간다. 세속인들

은 아내 없는 생활이 행복한 것이라고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조비니안

을 반박하는 성 제롬의 첫 번째 책도 비난과 모욕으로 가득했는데 그

럼으로써 그는 신성한 결혼을 폄하하고 더럽게 하려고 애썼다.”32)“그

러나 하나님이 누구도 결혼을 공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뿐만아니라

또한 그분은 남자들이 들짐승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고, 음란이

유행하는 것도,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것도, 그리고 여

기 저기 모든만남에서 들짐승처럼 자기를 내던지는 것도 원치 않습니

다.”33)

그런 이유로써의 결혼 기피에 대해서 칼뱅은 하나님이라는 대의를

들어서 권면한다. 우선 하나님은 방금 인용한 설교에서 보듯이 사람들

이 들짐승처럼 아무 관계나 맺으면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 칼뱅은 이어

서 말한다.“그분은 우리가 몸으로나 영으로나 순수하고 깨끗하기를 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몸도성령의 전

이라고 말해지는것입니다.”34)

또한 결혼 생활에는 속박이 있고 불편함도 있고 어려움도 있는 것

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제정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칼뱅은 말한다.“그들의 견해에 의하

면, 한 아내와의 결합에 언제나 예속되기보다는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더 낫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통적으로 인류의 선과유익을 위

수 있기위함일 것입니다.’”29)

칼뱅은 개인적으로 결혼을 늦게 했고, 또 했다 하더라도, 그의 서신

에서 보듯이 여성에 대한 동경이나 열정 보다는 어떤 필요나 다소 이

기적인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한 결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해

도 그가 결혼에 관해서 자기의 문제와 별도로, 객관적으로 즉 청중들이

나 독자들에게 서술할 때는 성서적인 가르침과 또 개신교의 신학적인

관점에 입각했다.

그에 따르면 결혼이란 하나님이 세운 제도로서, 그것을 훼손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사탄의 기도이고 획책이다.“이제 모세는 결혼이 하나님

에 의해세워졌다고반복한다.…그래서 사탄이결혼을 여러가지방식

으로 더럽히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것을 모든 비난과 멸시로

부터 지켜야하며 그래서 거기에 속한 존경을 받도록 해야 한다.”30)“사

탄은 결혼을 비방하기 위해서 두 가지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혼에

대한증오를 가지고 그는독신이라는구역질나는 법을도입한다.”31)

어쨌든 칼뱅은 사람들이 독신을 예찬하고 권장하는 이유를 두 가지

로 파악했다. 첫째로, 결혼을 속박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성적으로 자유

로운 삶이좋다는 자유의 추구로서의독신주의이고, 둘째로는종교적인

이유에서의독신주의이다. 그것을 차례로 살펴보자.

1. 자유의추구로서독신주의

독신자들 중에는 결혼에 묶이지 않고 성적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꼭 성적 자유만이 아니라고 해도,

1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69

29) R. 스토페르/박건택 역,『인간 칼빈』(서울: 엠마오, 1989), 23-24. 본문 중 칼뱅의 서

간문은 “Caelibatu, in ministro non ita reauiredu, esse,” Opera Calvini , X/1, 226-

229에서발췌.

30) Commentaire, Genèse, 2;22.

31) Ibid..

32) Commentaire, Genèse, 2;18.

33) 8e sermon sur le ch. V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337.

34) Ibid.

Page 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사제들, 수도사들 그리고 수

녀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선을 거부합니다. 그

들 안에 결함이 있다면 그들은 결혼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분하게 여기고, 멸시하며, 더러운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거슬러 싸우는 일입니다. 사람들이자신들에게 주어진 처방을

발로 밟을 때 그런 거만에 대해서 하나님이 복수해야 하는 것 아니

겠습니까? 환자가 자기 의사가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위한

약을 먹는 대신 땅에 던져 버렸다면 그는 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거룩한 결혼을 배격했던 사제들이나 수도사들 수녀들의

그 모든 해충들, 교황주의의 지옥의 천사들이 했던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그들은명백하게하나님과 전쟁을 벌였던것입니다.36)

이런 비판의 요지는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순수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완전한 삶이고, 결혼은 세상의 일반적

오염이라는 인식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래서 그들은 하나

님이 제정한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들고 선을 악

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들의 자연적 본성이나, 결함이나 약

함 같은것들을 외면하고자연과 거슬려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이 세 번째문제는 사실심각한 폐해로나타나는것이아닐수

없다. 자연적 본성을 거부하고 그것과 싸울 때 잘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 결과 교회 내에서 많은 성적인

문란과 타락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교황제 안에서 수

녀들의 그 강제적 독신주의가 날마다 얼마나 가공할 만큼 무서운 범죄

를 태동하는가? 육체적 욕망을 저해하기 위해서 거기에 어떤 울타리,

어떤 장벽, 어떤 철망을 칠 수 있을까?…나는 단지 여 수도자들이나

수녀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사제들이나 수도

사들에게도 평생동안결혼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해서 결혼을 정하셨으므로거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해

도 그것을 경시해서는안 된다.…결혼에는 많은 불만과 권태가 따르기

때문에 사탄은 그것을 언제나 구역질나는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다.…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우

리는 결혼안에있는모든권태들은 우발적이라는것을기억해야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악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 본성의 타

락을 고려하자. 결혼은 약으로 사용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달콤한 것

에 쓴 것이섞여있다고 해도놀랄필요는 없다.”35)

2. 종교적이유로서독신주의

사람들이 독신주의를주장하는 두 번째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다. 그

리고 칼뱅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다루었던 것도 앞의 속박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독신자들보다는 바로 이 종교적 독신

주의였다. 즉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나 수도자들의 의무로

서의 독신이었다. 칼뱅은 로마교회 성직자들의 독신제를 이렇게 격렬하

게 비판했다.

교황주의에서처럼, 가장 천사와 같은 덕목이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

다. 수도자들은 결혼하지 않으면서 이것이 완전한 상태라고 말합니

다. 사제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바쳐졌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제일 때 우리는 교회의 꽃과같으므로 우리는 세상의 일반

적인 오염들로부터 떨어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교황주의에서

는 결혼하지 않을 때 낙원의 천사들과 가까워진다고 평가합니다. 그

러나우리는 너무나 마귀적인 그런 교만으로 하나님께서조롱당하신

다고 봅니다. 결혼이 그렇게 무시당하는 것은 무지 이상으로 혐오스

1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71

35) Commentaire de Jean Calvin sur le Nouveau Testament. 4 vols. (Toulouse: Société

des livres religieux, 1893-189), t. I. Math. 19;10-12. 36) 8e sermon sur le ch. V du Deutéronome, Opera Calvini, X X V I, 344.

Page 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를 받지도 않은 자가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세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대로 하는것이아

니다.…그러므로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덕목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미친 환상이다. 왜냐하면 금식이 그런 것처럼 (독신의) 상태 그 자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

종의 점수들로써 계산될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목적

으로 관련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특히 표현하기를 원했던 것은, 사

람이 음란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편안함과 조용함만

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고 산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늘의 생명을 위한 더 큰 자유와 명상으로써 헌

신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서 변명할 수 없다. 결

론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최선의 일들에 종사하기 위해

더 자유롭기 위해서 심사숙고한 뒤에결혼하지 않는것 외에는 결혼하

지 않고 순결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

이다.”40)

4. 은사가아니라면고생하지말고죄짓지도말고결혼하라!

그러므로 결혼이냐 독신이냐의 문제는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자연

스럽게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지, 일률적인의무나 강제로써 될 일이아

니다. 그래서 독신이 자신의 은사가 아니라면 당연히 결혼하고, 또 할

수 있어야 한다.“나는 동정이 멸시해서는안 될 하나의 덕목이라는 것

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또 어

떤 사람들에게는일시적으로만 주어졌기 때문에, 욕정으로시달리는사

람들은 결혼이라는 구제책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소명의 정도에 따라서

정절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41)“만일 자기 육체의 욕정을 다스리고 이

정욕이 그들 안에 끓고 있어서 기꺼이 순결을 지키는 사람은 열 명 중

하나이다. 수도원에 대해말하면 단순한 간음은 거기서 가장 작은악에

속한다.”37) 심지어는 동성애까지도 난무했는데 그것 역시 교회의 독신

주의와 관계가 있었다.“교황주의의 열성주의자들이 어떤지를 보십시

오. 가장 거룩한 사람들도 살펴볼 때, 어떤 사람들은(나는 어디에서나

알려지고 유명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입증될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서약 위반이 입증될 것이고, 다른 이들은 거짓이나 도둑질로,

또 어떤 이들은 모든 음행과 모든 더러운 짓에 빠져들어 가는 데 주저

함이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너무나 더럽고 끔찍한 욕망에 이

끌려서 남색가가되는데 이는그들에게는하나의 직업과 같습니다.”38)

3. 독신은소수에게주어진하나님의은사이다

결국 문제가 무엇인가? 칼뱅에 따르면 독신 그 자체는 아니다. 독신

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고, 그 은사로써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결혼하지 않고 정결을 지키

는 것은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오히려 하나님께서 어떤 사

람들에게만부여하는 특별한 은혜로서, 하나님을더 신속하고자유롭게

섬기게 하신다.”39)

그 은사는 자기가 선택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인위

적으로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일이다. 가령 스스로 거세한다든지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독신의 정당성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선선하

고 기쁘게, 그리고 속박 없이 주의 일에 전념하는 데 있다.“하나님은

그 은사를 그가 주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신다.…그런데 그 특별한 은

1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73

37) Commentaire, Ire Timothée, 5;11.

38) 4e sermon sur Ire Timothée, Opera Calvini, L I I I, 48.

39)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4 vols. Ed. par J. Cadier, (Genève: Labor et

Fides, 1955-1958). I I, 8/43. 이하 Institution.

40) Commentaire, Math. 19;12.

41) Institution, I I, 8/42.

Page 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명예로운 일이라고 했던 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예외

도 없습니다. 이는우리가 목사들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

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들이 결혼을 더러운 것으로서 금지했던

것은마귀가 교황주의자들속에서 발명해낸미신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그런 너무나 저주받을 환상을 예방하기 위해서 사도의 입을 통해서 결

혼은 모든 사람들에게 명예로운 일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 누가가 사가랴가 자신의 직무 시간 뒤에 자신의 집으로 돌

아갔다고이야기한데서기억해야하는점입니다.”44)

6. 초대교회의독신녀들은‘서원’이 아니라‘직무’였다

주지하듯이디모데전서5장에는 초대교회에“60세 이상과부들의명

부”에 속해서 주의 일을 하는 독신녀들에 관해 나오지 않는가? 그러나

칼뱅은 그녀들을 이후 교회의 수녀들과 분명하게 구별하고,‘서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직무’로 선발된 여인들이었음을 강조했다.“그러

나 교황제에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덕목이라는 듯이순

결의서원을 한다.…그런데지금은 오늘날 가톨릭 사회에서는 그 때가

(60세) 되기전에, 또는아직 열기넘치는 꽃 같은 나이에 결혼을 포기

하는서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을 영구히 금하는 가학적인

이 법을두 가지이유로써 배격한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에게공로가

되는 봉사라고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이 깊이 생각해보

지도 않고 서원하는 참람함으로써 그들의 불쌍한 영혼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그녀들은 결혼 상태가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

로 순결의 서원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들이 뽑힌 그 직무가 필

요했기 때문이었다.”45)

겨낼 능력이 없다면 그는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에게 결혼의 필요

성을 부과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여자마다 자기남편을 두라. 그리고

‘만일 자제할 수 없으면 주 안에서 혼인하라’(고전7:2, 9)고 선언한 것

이다. 그는 그 말로써 첫째로 인간의 대부분이 욕정의 악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과, 둘째로 그렇게 거기에 예속된 사람들 중 한 명도 예외가

없으므로 음란을 피하기 위해서 그가 제안하는 그 유일한 구제책으로

달려가기를그 모두에게명한다는것을의미한다.”42)

그러므로 표준은 자기에게 있고, 자신의 능력이 정당성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어진 자기의 길을 따라 감으로써 하나님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칼뱅은 말한다.“우리의 삶의 양식을 우리

의 능력의 정도에 맞추어서 하나님과 그가 세우신 본성에 거슬러 싸워

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 명령(7계)에서 음란을 금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순결과 정결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그것을 지

키는 유일한 방법은 각자가 자기의 역량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결혼을 무익한 것이라고나 불필요한 것으로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

고 여자 없이 지낼 수 없다면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을 소원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아무도 자기의 편안함이나 육체의 평온함을 보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인연을 벗어나

서 그분을 더 잘 섬길수 있기만을추구해야 한다.”43)

5. 목사들의결혼을권장하다

그것은 목사들에게, 성직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칼뱅은 공관복음

서 설교에서‘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데

착안해서 말한다.“오히려 우리는 사도가 결혼은 모든사람에게 있어서

1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75

42) Institution, I I, 8/43.

43) Ibid.

44) 5e sermon sur l’Harmonie evangélique, Opera Calvini, X L V I, 59.

45) Commentaire, Ire Timothée,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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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랑으로 고쳐가면서 살라고 권면했다.

독신에 대해서도, 결혼생활이 불편함과 속박과 어려움들이 있다고 해

도, 그런모든 것들은 우발적이고 사람들의 악에서 기인된 것이므로결

혼을회피할 이유가 되지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문제점이 있지만 결혼

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제정한 것이므로“달콤한

것에약간의쓴 맛이섞여있다고 해서”거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칼뱅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결혼과

가정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보수적이고

관례주의(conventionalism)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16세기라는 당시의

관점에서는 꼭 그렇게 보기만도 어렵다. 당시 궁정이나 귀족, 상류층에

서는성적으로개방되어 로코코시대를향해가던 때이기는 하나, 일부일

처의 결혼이라는 제도는 공식적으로 흔들림이 없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일부다처제에서, 칼뱅은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

를 보이기도했다. 가령그가 야곱의 사건의 결과를 주석하면서 일부다

처나 비정상적 결합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써 인정될 수 있다고 했

다.“하나님의 명령과 자연의 거룩한 질서에 반하는 그 계약은(야곱과

빌하 사이의 결혼) 아무런 가치가 없으나, 특별한 혜택으로써, 그 자체

로서는 잘못되고 불법적인 것이 결혼으로 인정되는 명예를 얻었다.”47)

그러나 이것은 야곱과 빌하의 결합의 결과가 좋게 나타났다는 일종의

결과론적인 평가일 뿐이고, 칼뱅이 일부다처제에 대해 가진 부정적 시

각을완화시킬만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는해도 거기

서 칼뱅이 일부다처의 모든 경우를 가혹하게 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엿볼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칼뱅은 일부다처 아래서 태어난 자

녀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합법적인 자녀로 인정된다는

관점을 가졌다. 가령 동시대에 조선에서 기득권 양반층들이 서출들을

이에관해서는 더글라스의 평가가 적절하다.“칼빈은(초대교회의 여

자) 집사들은 이 독신 서약을 그 자체 종교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

으며 오히려 그들이 임명받은 공적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으로 여겼을 뿐이라고 하였다.‘만일 그들이 결혼의 굴레로부터 자유롭

고 독립적이지 못하다면, 그들은 그 직분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여자

집사들의 독신 서약은 그들 직분과의 관계에 있어서 순전히 기능적인

것이었으며 그다지 구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독

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때라도 그 서약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칼빈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교회안에서의 공적 직분을 자

유롭게 감당하기 위하여 독신서약을 하고살았던 초대교회의 과부들과

젊은 시절에 은둔의 게으른 삶으로 도피한 것으로 본 중세 수녀들을

날카롭게구분하고있다.”46)

I V. 결론에대신해서

이상에서 살펴본 칼뱅의 일부다처제와 독신주의에 관해서 다음의

몇 가지 평가를 하면서 그 의의를 살펴보는 것으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칼뱅은 이 주제들을 철저하게 결혼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점이

다. 그에게서 일부다처는 정상적인 결혼을 파괴하는일이었으므로금지

되었다. 또한 독신주의 역시 하나님의 신성한 결혼을 훼손하거나 가치

절하하는 것으로서잘못된 일이었다. 칼뱅에게서정상적인 것은일부일

처제의 결혼이었으므로, 언제나 이 제도를 세우고 강화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관심이었다. 그래서 남편들이 가진일부다처의 욕망에 대해서

도, 아내에게 불만을 갖기 보다는, 그리고 그 불만을 핑계로 새 아내를

얻으려기보다는 기존의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다. 심지어는 아내가 심각

1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77

46) J. D. 더글라스/심창섭 역, 84. 47) Commentaire, Genèse, 30:5.

Page 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운 창조로 보는 성서적인, 유대-그리스도교적 사고에 충실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칼뱅은 비엘레의 평가와 같이“개혁 신학이 왜 역사를

거쳐 오면서 독신을 결혼보다 우월한 상태로 높이려는 경향의 종교적

모든일탈들에 격렬하게맞서왔는지이해하게”50) 해준다.

주제어

칼뱅, 일부다처제, 독신주의, 결혼

Calvin, Polygamy, Celibacy, Marriage

접 수 일 2011년 2월 8일

심사 (수정일) 2011년 4월 24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대했던 태도와 인식을 생각해 보라. 더군다나 유교사회는 일부다처가

더 성행했고 서자들도 훨씬 더 많지 않았는가? 그런 점들은 칼뱅이 복

잡한 삶의현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하고 경직된 율법

주의나 규범주의자가 아니었고, 또한 태생적 조건을 빌미로 약자들을

차별하거나가혹하게대하는 인종주의자도아니었다는점을보여준다.

셋째, 종교적 독신주의와 관련해서, 칼뱅이 적극적으로 싸웠던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의성직자들의독신서원에 대해서였다. 칼뱅이 그것의

여러 문제점들을 보면서 밝히고자 했던 것은 독신은 하나님의 은사로

서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야 하는 것일뿐 결혼보다 더 순수하고 우월한

상태가 아니라는점이었다. 이에대한더글라스의평가를 인용한다.“칼

빈에게 있어서 독신은 드물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며 또

한 주님의 일에 헌신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에게만 그 사역을 잘 감당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혼에 비해 윤리적으로나 영적

으로우월함을뜻하는것은결코아니다.”48)

더 나가서 칼뱅은 독신 서원을 할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소수로서, 일반적인 것은 결혼이었다는 점을 역설했다. 비

엘레가 말했듯이 칼뱅에게“결혼, 그것이 기준이고, 독신, 그것은 때때로

부과되는 예외지만, 영적으로 존엄한 우월한 상태는 아니다.”49) 따라서

칼뱅의 기본적인 입장은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적인

본성을 거슬려 싸우느라고 고생하지말고, 또 유혹에 못 이겨타락하지

말고 일반인들이나 목사들이나“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칼뱅의 그런

태도는 그가 이데아와 현상, 정신과 몸, 영혼과 육체를 나누고 전자를

우월하고 깨끗한 것으로 보는반면후자는 열등하고 속된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 같은 헬레니즘의 이원론이나 금욕주의와는전혀 관계가 없으

며, 오히려 자연과 육체를 포함한 인간과 세상전체를 하나님의 아름다

1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79

48) J. D. 더글라스/심창섭역, 148-149.

49) A. Bièler, 67. 50) A. Bièler, 67.

Page 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olygamy and Celibacy according to Calvin

Lee, Okab

Professor

Korea Christian University

Seoul, Korea

Calvin regarded the polygamy and the celibacy in the view point

of marriage. For him, the polygamy was forbidden because it destroys

the normal marriage.

The celibacy also was wrong because it defames and devaluates

the sacred marriage instituted by God. The normal was the marriage

of monogamy for him so that he has a primary concern to found up

and strengthen it. So he asks always the men to love their wives even

their problems. But he appeared tolerable attitude to the polygamy

even in rare case. Per example, commenting to the illegitimate

marriage between Jacob and Bilha, he told that the polygamy or the

abnormal marriage can be acknowledged by the special grace of God.

At least Calvin acknowledged legitimate the children who are born in

the polygamy. These points show us that Calvin has a understanding

of the complicate reality of man and that he was ni a strict legalist or

normalist, nor racist who discriminate the men with their original

condition.

And Calvin thank that any discomfort, restriction or difficulty of

the married life con not be a pretext by which the men evade the

marriage. Because they resulted from the devil of man, and the

married life is much more delicious than that problems.

참고문헌

더글라스 J. D./심창섭역. 『칼빈의여성관』. 서울: 무림출판사, 1990.

스토페르R./박건택 역.『남편, 아버지, 친구, 목회자로서의 인간 칼빈』. 서울: 엠

마오, 1989.

어윈(M. M. Irwin). “칼빈과 가정관계,”『칼빈신학의 현대적 이해』. 서울: 한국

신대출판부, 1978.

이오갑. 『칼뱅의신과 세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 “칼뱅의여성이해,”「한국조직신학논총」. 제28집, 2010.

. “칼뱅의결혼관,”「신학논단」. 63집, 2011.

.“칼뱅에 따른 성문제들-간음과 음란, 매매춘, 성병, 동성애를 중심으

로,”『장신논단』. 제40집, 2011.

Biéler A. L’Homme et la femme dans la morale calviniste, la doctrine

réformée sur l’amour, le mariage, le célibat, le divorce, l’adultère

et la prostitution, considérée dans son cadre historique. G e n è v e :

Labor et Fides, 1963.

Calvin J.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1559/1560). 4 vols. Ed. par J.

Cadier, Genève: Labor et Fides, 1955-1958.

. Ioh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59 vols. Ed. par G.

Baum, E Cunitz, E. Reuss etc. Brunschwig: Schwetschke et Filium,

1863-1900.

. Commentaire de Jean Calvin sur le Nouveau Testament. 4 vols.

Toulouse: Société des livres religieux, 1893-1894.

. Commentaires bibliques, Le livre de la Genèse. Genève: Labor et

Fides, 1961.

. Calvin, Hommes d’Eglise. Paris/Genève: “Je Sers”/Labor, 1936.

1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이오갑, 칼뱅에 따른일부다처제와독신주의 181

Page 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라인홀드니버의정의론의재고(再考)

황민효

(호남신학대학교전임강사)

I. 들어가는말

인간은 언제나 정의를 꿈꾼다. 근대 이후 인간은 정치제도에 대한

개혁이나 경제구조의 변혁 또는 보다 나은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더 정의로운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

나 실상 근대 이후 역사는 그들이 기대하고 갈망한 만큼 더 정의로운

세상을 가져다주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세상은 여전히 정치적 갈

등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심각한 테러리즘이 만연한 곳이다. 정의는

어디에 있을까? 정의란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상상에서만 가능한 단

지 하나의 이상(理想)인 것일까? 만일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

기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또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정의에 대한 이 질문은 비단 오늘

의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지난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했

던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20세기 전반 정의와 불의의 문제에 대해 가장 심

Calvin struggled against the celibacy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ccording to him, the celibacy as special gift of God is not

superior, even spiritually, to the married life. It can be only chosen

spontaneously by the indebted men. Furthermore the more general

was the married life for Calvin. Such Calvin’s position shows us that

he was not hellenistic dualist nor gnostic ascetist whom we find in the

hellenism or gnosticism that distinguishs always between idea and

phenomena, spirit and material, soul and flesh, and that sees good and

pure the former, on the other hand bad and inferior the latter. So we

estimate that Calvin was completely faithful to the jude-c h r i s t i a n

thinking that regards the universe containing the men’s flesh and the

nature as beautiful creation of God.

1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83-213

Page 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요, 다른 하나는‘에로스 또는필리아’(eros or philia)라 부르는 상호적

사랑(mutual love)이다. 니버는 희생적 사랑은 가장 높은 단계의 규범

이자 덕이라고 말한다. 아가페로서의 사랑은 전적으로 타자-관심적

(other-regarding) 사랑이다. 이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의 이익

을 추구하지않는 것, 심지어 타자를 위해자신의 희생까지도 감수하는

‘무사욕’(disinterestedness)이다.1) 니버는 무사욕의 명백한 예로 그가

‘예언자적 종교의 완전한 열매’(the perfect fruit of prophetic religion)

라 부르는 예수의 윤리를 제시한다.2) 특별히 예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은 가장 완벽하고 유일한 형태로 남겨진 사랑의 기준이다. 그러나

니버는 아가페로서의 사랑은 인간의 역사에서 성취되기 불가능한 이상

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역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자유가 존재

한다. 그리고 자유가 존재하는 곳에는 죄가 존재한다”3)고 믿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유한한 자유와 죄악이 있는 곳에선 아가페의

이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희생적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는

분명원론적으로는 승리라 불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과 사회에

서 실제적 승리의 상징이 될 수 없다.“역사의 율법으로서 사랑은 역사

안에서 모호한 승리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이 사랑에 완전하

게 모순되어 서 있을 수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역사는 사랑의 법

에 실질적으로 모순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4) 그러므로 인간의 세상에

서 희생적 사랑은 도달할 수 없는단지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

상호적 사랑은‘역사의 관점’(from the standpoint of history)에서

가장 높은형태의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5) 상호적 사랑은 자신의 이익

도 깊은 연구를 했던 신학자이다. 그는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불의한 상

황들을 고발했으며,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응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논문의 목적은 니버의 정의론에 대한 세밀

한 분석이 아니다. 이것은 이 작은 논문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또

한 이 논문은 니버의 정의론에 대해 성급한 결론이나 비판을 목적으로

하지않는다. 그보다 정의라는단어가 시대의 화두인 오늘날, 보다호의

(好意)적 관점에서 니버의 정의론의 타당성을 재고하려 한다. 이를 위

하여 먼저 니버의 정의론의 본질을 몇 가지 범주들로 재구성하여 간략

하게살펴보고(I I장), 다음으로 니버의 정의론의 신학적 기반이 되는 신

학적 인간학을 살펴보려 한다(I I I장). 마지막으로 그의 정의론의 의의를

이론적, 실제적 관점에 비추어 재평가할 것이다(I V장). 혹자는20세기

중반의 신학자인 니버의 정의론을 다시금 들추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하거나 진부하다고여길지도모른다. 그러나 그의정의론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간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I I. 니버의정의론

1. 사랑과정의의변증법적관계

니버에 의하면 정의라는 사회적 이상은 사랑이라는 종교적(성서적)

이상에 의하여서만 변증법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정의는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점에 의해서

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니버의 정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

해서는 우리는 그의사랑에 관한진술로부터시작해야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니버는 사랑을 두 가지 형식들로 구별한다. 하

나는 흔히‘아가페’(agape)라고 부르는 희생적 사랑(sacrificial love)이

1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85

1 ) D. B. Robertson, ed. Love and Justice: Selections from the shorter writings of

Reinhold Niebuhr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57), 31.

2) Reinhold Niebuhr,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New York: Harper, 1935),

22.

3)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I: Human Destin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4), 80.

4) 앞의책, 49.

Page 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랑은 역사안의 정의의 모든 성취들에 관하여 완성임과 동시에 부

정이다. 또는 대립적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역사 내에서 정의의 성취

는 보다 완전한 사랑이나 형제애에서 자신의 성취를 찾으려하는 규

정할 수없는 어떤단계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의 새

로운 수준들일지라도완전한 사랑에 모순되는것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9)

한편으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한다. 오직 사랑만이 다른 이의 필요,

자유, 그리고 존엄성을 존중하는 정의를 개시하고고양할 수 있기 때문

이다. 또한 다른한편으로 사랑은 항상 정의를 초월하기 때문에 사랑은

정의를 부정한다. 사랑은‘정의의 규범들의 원천’(the source of the

norms of justice)임과 동시에‘정의의 규범들의 한계가 발견되는 궁극

적 관점’(the ultimate perspective by which their limitations are

discovered)이다.10) 다시 말하여, 사랑은 정의를 완성함과 동시에 부정

한다. 비록 사랑과 정의는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한편으로 사랑이 없는 정의는 정의이기를 그친다.“왜냐하면

사랑의 은혜 없이는 정의는 항상 정의보다 못한 것을 가리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1) 다른 한편으로 정의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기를 그친

다. 그것은 단지 현실을 파악하고 적응하는데 실패한 공허한 감상주의

가 될 뿐이다. 따라서 사랑과 정의는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상호 분

리될수 없는변증법적관계성을가지고 있다.

뿐 아니라 타자의 이익에도 관심하는 호혜적(reciprocal) 성격의 사랑

이다.“다른 이의 이익에 관심하여 호혜적인 애정을 고무시키고 이끌어

내는 오직상호적 사랑 안에서만 역사적 실존의 사회적 요청들이 만족

될 수 있다.”6) 다시 말하여, 역사적 실존영역에서 성취될 수 있는상호

적 사랑은 역사의 가장 높은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해

야 할 점은 상호적 사랑은 궁극적인 기준이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것

이다. 상호적 사랑은 오직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궁극적 원리에 의해서

만 개시(initiate)될 수 있고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가페의 사랑(사랑의 계명)은‘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

bility)이다.7) 아가페의 사랑은 상호적 사랑을 고무시키고 궁극적인 규

범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역사 내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

에 역사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 없는초역사적인 것이기에 또한 불가능

성인것이다.

니버는 정의를 사랑과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정의한다. 희생적

사랑과 상호적 사랑을 구분하듯이, 니버는 정의역시 절대적 정의와 상

대적 정의로 구분한다.“다시 말하여, 정의이기만 한 정의는 정의보다

못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사는 사회에서 성취한 어떠한 정의라도

그것은 완전하지 않는 정의이다.”8) 희생적 사랑의 경우처럼 하나의 이

상에 불과하여 인간의 역사에서 성취될 수 없는 절대적 정의가 있는

반면, 상호적 사랑처럼 인간의 역사에서 성취가 가능한 상대적 정의가

있다. 이 상대적 정의는 삶의궁극적인 규범인 아가페의 사랑과 긍정적

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관계성을가지고 있다.

1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87

5) 앞의책, 69.

6) Robert McAfee Brown, The Essential Reinhold Niebuh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6), 150.

7) Reinhold Niebuhr,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New York: Harper, 1963),

71.

8) Robertson, Love and Justice: Selections from the shorter writings of Reinhold

Niebuhr (1957), 32.

9)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 I: Human Destiny (1964), 246.

10) Niebuhr,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1935), 140.

1 1 ) Robertson, Love and Justice: Selections from the shorter writings of Reinhold

Niebuhr (1957), 28.

Page 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먼저 니버는 정의 실현에 봉사할 수 있는 타당하고도 가능한 원리

들을 제시하는데 그것들은 바로‘자유’( l i b e r t y )와‘평등’( e q u a l i t y )의

원리이다.14) 평등의 원리가 사회적 계층구조의 비판적 기준이 되는 것

에 반하여, 자유의 원리는 공동체의일치성의비판적 기준이 된다.15)

자유보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평등의 원리는 정의의 이상의 정

점(pinnacle)이라 말할 수 있다.“정의의 이상의 정점으로서의 평등은

암암리에 정의의 최종적인 규범인 사랑을 향한다. 왜냐하면 평등한 정

의는죄의 상황속에서 형제애의 근사치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정의는

항상 더 균등한 정의를 뜻한다.”16) 분명 평등의 원리는 사랑의 실현이

다.“만일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의무감이 이성적인 산술로 환원

되어야 한다면, 이 의무감의 실현은 자기가 자신을 위하여 주장하는것

과 균등하게 이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7) 그러나 평등은

사랑과 긍정적인 관계를 가질 때에만 평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의

의 궁극적인 원리가 될 수 없다. 평등이 정의의 궁극적인 원리가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어떤 공동체에서든 나타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 때문이다.“하나는 계층구조가 필연적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

는 상위계층에서의 세력, 권력, 특권, 특별히 특권은 무절제로 나아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8) 이러한 사실들에 직면하여, 평등의 원

2. 정의의원리와구조

정의의 원리(또는 규범)와 체계(또는 구조)는 형제애의 이상에 봉사

하는 한 사랑과 긍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니버는 이러한 긍정적

관계성을이렇게 설명한다.

정의의 체계와 원리들은 그것들이 타자에 대한 의무감으로확장되는

한 형제애의정신의도구요 심부름꾼이된다. (a) 명백한 필요에 의하

여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의무감으로부터 상호 협조의 고정된 원리

속에 표현된 지속적인 의무로의 확장, (b) 자기와 타자간의 단순한

관계로부터 자기와 타자간의 복잡한 관계로의 확장, (c) 마지막으로

개별적 자기에 의해 식별된 의무로부터 더 공평한 관점으로부터 집

단이 정의하는 넓은 의무로의 확장이다. 이런 집단적 정의는 관습과

법률안에서서서히 전개된다. 이것들은 개별적 자기안에서는가능하

지 않은보다높은무사욕의 요소들을포함하고있는것이다.12)

그러나 동시에 정의의 원리와 체계는 사랑과 부정적인 관계를 가지

고 있다. 그것들은 때때로 사랑의 의미에 모순된다.“담장과 경계선은

정의의 정신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타자의 이득을 빼앗는 인간의 사욕

에 제한을 가한다. 정의를 통하여 얻어진 조화는 따라서 단지 형제애

의 근사치에 불과하다. 그것은 기껏해야 인간의 이기심에 의하여 창조

된 조건하에서의 가능한 조화에 불과하다.”13) 즉, 정의의 원리와 체계

는 역사적으로 제한된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이기심의 흔적

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니버는 타

당한 정의의 원리나 체계가 발견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

하지않는다.

1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89

12)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 I: Human Destiny (1964), 248.

13)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 I: Human Destiny (1964), 252.

14) 니버는 1959년 그의 한 논문에서 자유와 평등과 더불어 질서(order)를 일반적으로

타당한 또 하나의 규범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규범은 과거 그가제시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규범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불분명한 면이 있기에 여기서는

제외하였다. Reinhold Niebuhr, “The Problem of a Protestant Social Ethic,” in

Union Seminary Quarterly Review (November, 1959), 10.

15) Reinhold Niebuhr, Pious and Secular America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62.

16)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 I: Human Destiny (1964), 254.

17) Reinhold Niebuhr, Faith and History: A Comparison of Christian and Modern

Views of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9), 189.

18) Niebuhr, Pious and Secular America (1958), 64.

Page 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정의실현의 구조이다.“상당한 수준의 균형이 없이는 그 어떤 도덕적,

사회적 제한도 부정의와 종속을 완전하게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니버는 불의와 종속을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힘

의 균형’또는‘활력의 균형’(the balance of vitalities)은 인간의 죄로

인해 물든 세상에서 나타나는 형제애로의 근사치라고 생각한다. 또한

니버는 힘의 균형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힘의조직화라고 주장한다. 힘의 조직화 없이는 힘의균형을 찾는노력

은 무정부 상태(anarchy)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사회

적 활력의 전 영역을 조직화하는 것은 힘의 균형의 원리보다 더 높은

도덕적인가와 사회적 필연성 위에서 있다.”22)

분명 힘의 조직화와 힘의 균형은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필수적인

사회구조임에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사회와 정의를 실현하는

이 구조 역시 사랑과 형제애의 법칙에 모순되는 부정의를 조장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조직화하

려는 원리와 힘은 쉽게 폭정(tyranny)으로 바뀔 수 있다. 그것은 개인

의 활력과 자유가 무시되는 사회의 강요된 일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

문이다. 폭정에 의한 삶의 일치는 형제애의 졸렬한 모조품에 불과하다.

또한 힘의 균형의 원리는 항상 무정부주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것

이다.”

니버는 이러한 폭정과 무정부주의를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디세이

아』에 나오는 바다 괴물들인 스킬라와 카리브디스(Scylla and Charyb-

dis)에 비유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이며, 하나님

리는 반드시 규제적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가난한 자들의 이데올로기

가 되는것을피할수 없다.

자유의 원리 역시 매우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

면 자유는 인간의 본성일 뿐 아니라19) 인간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원동

력이자 공동체를 확장하고 다양성을부과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자유 역시 정의의 궁극적인 원리가 될 수

없다. 평등의 원리와 같이 자유의 원리도 사랑의 기준 아래 서야함과

동시에 자유의 원리 역시 피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의 원리가 공동체의 계층구조와 상호 대립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자유의 원리는 사회의 일치성과 상호 대립적으로 연관되어 있

다. 공동체의 계층구조의 강조가 공동체 내의 평등의 가능성을 억압하

는 것처럼, 사회의 일치성의 강조는 자유의 가능성을 억압한다. 이와는

반대로 평등의 원리를 극대화할 때 공동체의 계층구조가 무너지는 것

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자유의 원리를 극대화할 때 사회의 일치성이

파괴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평등과 자유의 원리는 그 무엇

보다도 소중한 비판적 기준이요, 원리이지만, 그것들을 궁극적인 원리

로 삼는것, 다시 말하여, 모든불평등이나 강제된 억압이사라질 수 있

다고믿는것은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20)

사랑과 정의의 긍정적임과 동시에 부정적인 관계성은 정의의 체계

(구조)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니버에 따르면 사회적 구조의 두

가지 본질적인 원리는‘힘의조직화’(the organization of power)와‘힘

의 균형’(the balance of power)이다.21) 힘의 균형은 무엇보다 소중한

1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91

19)“인간은자신의 공동체에서자유를 요청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하기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의 과정들과 한계들을 뛰어넘는 불특정의 초월적 능력을 소유

하고있다.”Brown, The Essential Reinhold Niebuhr (1986), 162.

20) Niebuhr, Pious and Secular America (1958), 62-64.

21) 니버는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틀로서 경제적 요소들보다 정치적 요소들을 특별히 강

조한다. “경제적인힘이가장기초적인형태이며 힘의다른양식들은그로부터기인

한 것이라는 근대적 신념은 틀린 것이다…. 정치력은 특별한 범주 속에 놓여야 한

다. 왜냐하면 정치력은 특정한 목적으로 사회를 조직하고 지배하는데 있어서 다른

형식의 사회적 능력을 사용하고 오용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N i e b u h r ,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 I: Human Destiny (1964), 261-

263.

22) 앞의책, 266.

23) 앞의책, 158.

Page 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가사회주의(NAZI)와 스탈린주의의정치적 강령의 문제점과한계를 경

험한후 급격하게변화되었다.25)

민주주의에대한 니버의 긍정적인 견해는 그의『빛의 자녀들과 어둠

의 자녀들』(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에 가

장 잘 드러나 있다.“정의를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하였고, 불의를 추구하는인간의 경향은 민주주의를 필요하게

만들었다.”26) 니버는 민주주의는 자유와 질서가 서로 갈등관계가 아니

라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특별한 제도라고 주장한다.27) 특별히 민주주의

는 두 가지 점에서 기여하고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다양성과 독특성을

보장하는 정신적 측면이고, 다른 측면은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사회적 측면이다.28) 정부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민주주의가 가지는

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일인지 밝힌다.

3. 정치적영역에서의정의의실현

니버는 단지 추상적인 사상가가 아니라 정치 활동가였다. 베넷(John

C. Bennett)에 따르면1940년대와50년대 니버는 적어도100여 개의

단체에 참여했었다. 일부는 정치적인 성격의 단체들(예를 들어, Liberal

Party in New York, 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과 같은)이었으

며, 일부는 학문적인 단체들이었다. 니버는 자신의 정의의 개념을 자신

의 사회정치적 단체들 안에서의 연설이나 저술 활동을 통해 표현하였

다. 특히 미 국무성 정책 기획진에도 참여하면서 미국의 외교정책에도

많은영향을 끼쳤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상적인 사회 기구는 정의의 원리(평등과 자

유)와 정의의 구조(힘의 조직화와 힘의 균형)를 충족시켜야 한다. 니버

는 국내적, 국제적 상황에 비추어 정의의 원리와 구조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제시하였다.

국내적인 경우, 정의실현의 책임은 무엇보다도 정부의 몫이다. 오직

정부만이 사회의 상대적 정의를 유지하는 수단을 조직할 수 있는힘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무

시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보호할 수 있고보호해야만한다. 이

러한 점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정부의 형태에 적합하다. 물론

초기에 니버는 잠깐동안사회주의적 신념에 사로잡힌적이 있었다. 그

는 민주주의적 방법이 사회구조의 극적인 변화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유로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24) 그러나1930년대 이후 니버는 국

1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93

24) 이 시기의 니버는 당시의 많은 종교사회주의자들처럼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연대성을 주장하였다.“비록 낭만주의적인소망일 수 있겠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사회주의 국가가 권력으로부터특권을 분리시키는 것에 성공

할 수 있다면, 국가들의이기심이 현저하게 줄어들수 있을것이고, 국제적분쟁을

야기하는 모든 원인들이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32), 90. “오직 마르크

스적 프롤레타리아만이 이 문제를 명료하게 통찰했다. 비록 그가 자신의 목적을 성

취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틀렸는지 모르지만,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성적 목표로

평등한 정의를 설정하고 정의의 경제적 기반을 이해하는 것에는 오류가 없다…. 그

는 사회적 목표의 설정에서뿐 아니라 이러한 목표 달성이 시급한 것임을 역설한 것

에서도 옳았다.”앞의책, 164-165.

25) 벡클리(Harlan Beckley)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1931에서32년 사이에 일어난 것

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킹크(Michael Kink)는 34년 이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

다. Harlan Beckley, Passion For Justic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220. Michael Kink, The Social Philosophy of Reinhold Niebuhr

(Chicago: Adams Press, 1975), 24-25.

2 6 ) Reinhold Niebuhr,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 N e 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4), xiii.

27) 니버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개안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희생함을 통해 개인의 자유

와 이익을 높이는‘부르주아적 민주주의’(bourgeois democracy)를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가운데 일치를 찾는

책임성 있는 사회(a responsible society)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개인의 이기심이

아닌보편적 법칙아래에서공공선을 도모하는사회라말할수 있다. 앞의책, 2-4.

2 8 ) Harry R. Davis and Robert C. Good, eds. Reinhold Niebuhr on Politics ( N e 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0), 183.

Page 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매우 요원한 일이다. 니버는 입헌주의에 입각해 세계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유주의적, 이상적인 대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상호간의 신뢰와 유대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국제사회

에서 상호간의 신뢰와 유대는 늘 파괴되어 왔었고 또한 파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국가들마다 가지고 있는 국가 이기주의 때문이다.

니버는 세계 정부의 필요성에 관하여 분명히 인식했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회의적이었다. 따라서 국제적 수준에서 근사치의정의를 유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메커니즘을 세우

는 것, 즉 만일 공격적인 한 강대국이 있다면 그 강대국에 반하는 또

다른 강대국의 상계적 힘(the countervailing force)으로 견제하는 것

(예를 들어, 니버의 시대에 미국과 소련의 경우처럼)뿐이라 보았다.“모

든 역사적 세력들이 향해가는 듯 보이는 세계 공동체는 인간의 최종의

가능성임과 동시에 불가능성이다. 이것을 성취하려는 임무는 모든역사

적 성취의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성격을 이해함과 동시에 그 성과의 의

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

면 신앙은 인간의 역사의 완성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인정하기 때문이다.”32)

이처럼 니버는 국내의 경우에서든 국제의 경우에서든 정의라는 가

치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낙관론적 사상들

(공리주의, 자유방임주의, 진화론적 사고)이나 독재적인 정치 전략으로

몰아가는 도덕적 냉소주의보다 공동체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

교적인 세계관 또는 신앙관이 필요하고 더 적합하다는 것을 주장하였

다.

목표와 영속적 중요성은 이중적이다. 하나는“사회적 갈등의 비폭력적

중재와 조정을 통하여 질서와 공동체를 세우는 것에 기여해야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힘을 책임 있게 사용하게 하고, 정부의 권력을 감

시하고, 또한 사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형식을 제공함으

로써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다.29) 독재, 왕정, 또는 과두정치는 소수의

손에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집중되기에 부정의의 가능성을 높일 뿐이

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많은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을 기본골자로 하기

에 가장 근사치의 정의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에 타당한 유일한 방법이

다. 그러나‘그리스도교 현실주의자’(a Christian Realist)로서 니버는

민주주의가 가지는 상대적 가치와 사회-역사적 한계를 분명히 직시하

고 있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낭만적이거나이상적인 견해를 제시하진

않았다. 물론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제도들에 비하여 옹호될 만한 가치

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 궁극적인 가치나 해답이

될 수 없다. 궁극적 가치가 부여되는 그 순간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우

상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30)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적용가능성은 미지

수이다. 민주주의는 하위 공동체들 간의 암묵적 동의나 지리학적-언어

적 일치성과 같은 역사적 조건들에 매우 크게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이

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는

군부 세력과 같은 강제력에 의하여 강요적으로 설립될 수밖에 없을 것

이며결국민주주의는실패할 수밖에 없다.31)

국제사회에서의 정의의 추구는 국내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

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에서 힘은 몇몇 국가들에 집중되어 있

으며, 각축을 벌이는 몇몇 국가들의 힘을 조직하고, 통제하고, 균형을

유지할 어떠한 중심기관이 존재하지않기때문이다. 강대국들의 권력에

대하여 준법률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세계 정부를 완성시키는 것은

1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95

29) 앞의책, 183-184.

30) 앞의책, 191.

31) 앞의책, 309.

32) Reinhold Niebuhr,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1944),

189-190.

Page 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편으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처럼 자연에 참여한다. 인간은 자

연의필연성은 물론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종속된다. 인간은 충동에 의

하여 움직이며, 배고픔, 목마름, 성 행위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

시키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말하자

면 인간은자연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자유

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충동과 환경의 노예가 아니라

자연의 과정을 초월하여 스스로와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

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정신이 공존하는 모순성은인간을 특

정 짓는 가장 중요한 점이며 이러한 모순성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

리스도교의세 가지관점에 의하여 더욱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관점은 인간은‘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는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소유한 자기-초월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유한한 세상을 초월할 수 있으며 초월의 관점에

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니버에 따르면‘두 번째

아담’으로서 예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

하였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자기결정은 자신을 넘어서

는 초월적인 규범, 즉 하나님을 요청한다는 사실이다.35)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투사한 우상으로서의 신을 분별할 수 있

는 능력을-물론 이 사실이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지않는다는 것을의

미하는 것은 아니지만-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6)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

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덕과 도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항상 창조적인 가능성과 파괴적인 가능성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유한성 가운데서 인간결정의 파괴적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I I I. 니버의정의론의기반으로서의신학적인간학

니버의 신학적 인간학은 니버가 역사 안에서의 정의실현의 가능성

과 불가능성, 즉 정의실현의 이상과 실제 간의긴장을 인식하는데중요

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니버의 신학적 인간학은 그의『인간

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 잘 드러나 있다.

니버에게 인간이 가지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 신

학적 기반은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는데, 하나는‘하나님의 형

상’(the image of God)으로서의 인간,‘피조물’(creature)로서의 인간,

그리고‘죄인’(sinner)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세 가지 그리스도교의 상징

들로표현되는 인간의 본성 분석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해석이다.

니버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명백한 사실은 인간의 모순성

(contradictoriness)이다.33)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이‘자연의 아이’(the

child of nature)라는 것을 결론내린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인간이 자연이상의 존재라는 사실, 즉 자연

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의미한다.

명백한 사실은 인간이 자연의 아들이라는 것이며, 자연의 변천에 종

속되며, 자연의 필연에 강요되며, 자연의 충동에 의하여 조종되며, 많

이는 아니지만 자연이 어느 정도 허용하는 변화되는 유기적인 형태

의 시간의 간결함에 한정된다는것이다. 그보다 덜 명확한 사실은 인

간은 자연, 생명, 자신, 그의 이성, 그리고 세상을 초월해 서있는 하나

의 정신이라는것이다.34)

1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97

33)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 Human Natur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4), 1.

34) 앞의책, 3.

35) 앞의책, 164-165.

36) 앞의책, 166.

Page 1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교만’으로서의 죄라 불린다.39)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신의 실존의 중심으로 삼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

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즉, 유한한 피조물에 의한 궁극성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아(ego)가 자기충족(self-sufficiency)과 자기통

제(self-mastery)를 가정하는 그리고 모든 변화에 있어서 안전하다

고 상상하는권력에의 교만이라는것이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우

연적이고 의존적인 성격을 인식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주

인이며, 자신의 가치의 평가자이며,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고 믿는

것이다.40)

교만으로서의 죄는 물질적 영역뿐 아니라 그 정도가 최고조에 달하

는 정신적 영역에서 나타나기도한다.41) 니버는 교만으로서의 죄가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형태의 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육욕’이라는 또 다

른 형태의 죄가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초월의가능성을 희생

하여 자유와 자연적 한계의 모순성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육욕은 식

욕과 성욕과 같이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1) 자기애를

극대화시킴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파괴하거나, 2) 특정한 사상이나 존

니버는‘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제시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두 번째 관점은 인간은‘피조물’

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유한한 세계가 가지는 의존성과우연성은 그 자

체로는 죄라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도리어 이러한 의존성, 우연성, 불

완전성으로 대표되는 유한성은 하나님의창조 계획의 일부이며 인간이

겸허한 모습으로 수용해야만하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피조성과 유한성

은 창조당시 선한 것이라고 선포되었다.“인간의 유한성이 강조되나 업

신여겨지지 않는다는 인간관에 있어서 창조의 선함의 그리스도교의교

리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지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37) 따라서 우연

과 불완전성에 종속되는 인간의 유한성은 악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으

며 본성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모순성이악함

은 아니지만 죄가생겨나는 유혹과 계기로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이러

한 통찰은 세 번째의 그리스도교인간관의상징인‘죄인으로서의인간’

으로인도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세 번째 관점은 인간은‘죄인’이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가지는 자유와 피조물로서

가지는 유한성은 인간에게 창조성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

은 경우 죄를 범할 기회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자연과 정신에 동시에

참여하는 인간의 모순성은 인간에게 불안을 야기하고 결국 죄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다시 말하여, 인간은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

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자신의 한계를 넘어 초

월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

려하거나 또는스스로 초월성을 희생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즉, 인간은

‘교만’(pride)과‘육욕’(sensuality)이라는 두 가지의 죄의형태의 노예

가 되는것이다.38) 권력에의 의지를 통하여 인간의 한계와 우연성을 극

1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199

37) 앞의책, 169.

38) 앞의책, 179.

39)“인간의 죄는 단순히 무지로서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일정 부분 자신의 통찰

력을 과대평가하여 그의 맹목성을 모호하게 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의 힘

을 연장하여자신의불안정성을모호하게하려는 노력인것이다.”앞의책, 181.

40) 앞의책, 188.

41) 니버는 교만으로서의 죄를 네 가지 형식으로 세분화한다. 권력의 교만, 지식의 교만,

덕의 교만, 그리고 정신의 교만이 그것이다. 지식의 교만, 덕의 교만, 그리고 정신의

교만 간의 구분은 상당히 분명하나, 이 세 가지 교만들과 권력에의 교만의 관계는

다소모호하다. 그러나 니버에게 있어서 권력의 교만은 다른 세 가지교만들의 형태

에 모두 표현되는 가장 근본적인 교만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형태의 교만은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즉 권력에의 의지에 기초하고 있

기 때문이다. 앞의 책, 188-203.

Page 1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grace as power)를 소유한다. 니버는 능력으로서의 은혜를 두 가지의

범주로 구별한다. 인간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은혜( t h e

divine grace over the human being)와 인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능

력으로서의 은혜(the divine grace in the human being)이다. 첫 번째범

주인 인간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은혜는 무엇보다도 인간

에게 칭의(justification)와 용서(forgiveness)를 제공하는 의롭게 하시

는 은혜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니버는 이 은혜를‘자비와 용서로

서의 은혜’또는‘관대로서의 은혜’라고 부른다. 바울의 견해에 따르면

이 은총은 하나님의 사죄하심의 보증으로서의 은혜인 것이다.43) 두 번

째 범주에 속하는 은혜는 인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흔히

성령의 은사와 동일시되는 이 능력은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한요소를

향한 접근을 의미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게만

드는 성화의 능력을 의미한다.44) 니버는 갈라디아서2장 20절을 주해하

는 가운데 은혜에 관한 분석이 내포하는 두 가지 의미를 이렇게 밝힌

다.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하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능력 때문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

는 새로운 삶은 아직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안에 사신 그리

스도는 소유물이 아니라 희망이요, 완전은 실제가 아니라 의도이며, 우

리가 경험하는 평화는 성취된 평화가아니라 용서받았음을 확신함으로

부터 오는 존재의 평정이라는 사실이다.45)“그리스도인은‘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justus et peccator)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함

과 동시에 부정한다. 은총은 자연과 연관되면서도 동시에 모순된다. 그

리스도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존재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될 수 없는

존재이다. 심판과 자비에 있어서 하나님의능력은 우리안에있으며 또

한 우리를 반대하는것이다.”46) 이것이 바로은혜의 역설이다.

재, 공동체를 신격화하고 자신을 종속시킴을 통하여 자신의 감옥으로

도피하거나, 3) 무나 무의식의 세계로 도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의미한

다. 교만으로서의 죄가 자신을 자신 이상의 존재로 높이는 죄라면, 육욕

은 자신의가능성을 파괴하여스스로의존엄성을 훼손하려는죄이다.

니버에게 인간이 가지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

또 하나의 신학적 기반은 은혜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이다. 하나님

의 은혜에 관한 니버의 해석은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들을 제공한다.

바로 규범 또는 원리로서의 진리와 그 규범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

이다.

첫째, 인간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의 궁극적인 원리인 진리로서의 은

혜(the grace as truth)를 소유하고 있다. 니버는‘하나님의 아들’( t h e

Son of God), ‘제2의 아담’(the Second Adam), 그리고‘고난 받는 메

시아’(the Suffering Messiah)의 상징을 통하여 진리로서의 은혜를 설

명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역사의 소외를 치유하는 하나님의

사랑(성육신과 속죄를 통한)을 표현하였다. 제2의 아담으로서 예수는

완성된 인간성의 귀감(아가페로서의 사랑을 통해)을 보여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제2의 아담은 고난 받는 메시아가 되어야 했다.

“고난 받는 사랑으로서 역사에 들어온 사랑은 언제까지나 고난 받는

사랑으로 남아있어야 한다.”42)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가 보여준

아가페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드러남이라고믿는다. 동시에 아가페

의 사랑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의 궁극적인

원리이자 규범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가장 높은 규범은 역사적 생명

력으로부터의 해방(그것이 초월적인 것이든 아니면 세속적인 것이든)

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에서 자신의 본성적 존재와 타인과 하나님을 상

호 연결하는 사랑인 것이다.

둘째로 인간은 자신의 삶의목적을 성취하는 능력으로서의은혜(the

2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201

42)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I I: Human Destiny (1964), 49.

43) 앞의책, 103.

44) 앞의책, 99.

45) 앞의책, 125.

Page 10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V. 니버의정의론의평가

니버의 정의론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그 타당성과 실효성이 비판받

아왔다. 그 중 중요한 두 가지 비판점들만을 살펴보자면, 첫째 니버의

정의론은 현실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우리는 니버의 정의론이 매우 비관적인 소리를 내고 있다

는 것을부인할 수는 없다. 분명 니버는 역사적인 영역에서 정의실현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니버는 비관주의자로서

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니버의 정의론은 정의에 대한종말론

적인 소망을 자신의 대답으로 가지고 있는 한 단순히 비관적으로 해석

될 수는 없다고 본다. 비록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역사의 비극적인 측

면을보지못한다는 이유로 자유주의적 낙관주의자들을 비판하기는 하

지만, 그와 동시에 역사 안에서 정의를 실현해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강조한다. 니버의 정의론은 분명 인간을 넘어서는 동시

에 인간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

의 정의론은 비관적인 현실성과 동시에 낙관적인 기대를 소유하고 있

는 것이다. 따라서 브라운(Robert McAfee Brown)은 니버를‘비관적

낙관주의자’(a pessimistic optimist)라고불러야 한다고주장한다.47)

도리어 역사적 불가능성과 한계를 지적하는 니버의 견해는 가장 큰

신학적인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니버는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사람

들이 인간이 공정성에 관한 완전한 대답을 제공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부터깨어나게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니버에 의하면, 자연의 조화를

신뢰하는아담스미스의‘보이지않는손’과 로크의 자연법에 의지하는

자유방임주의자들은 물론,‘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기치 아래 개

인 이익과 집단이익이 쉽게 조화를 이루리라 믿는공리주의자들, 진화

요약하자면, 니버의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있어서

정의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하

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본성 해석은 특별히 정신적 측면에서 정

의추구의 가능성을 보게 한다.‘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성 해석은 인

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의존성과 우연성)의 한계와 그 비극적 성격

은 물론 창조된 본성이 가지는 선함을 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인’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부정의와 파괴의 가능성은 물론 거기에

따르는 인간의 책임을 직시하게 한다. 더 나아가 인간을 넘어섬과동시

에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해석은 역사 안에서 정의실현이 가지

는 가능성과 한계를 제시함과동시에 비극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정의

에 대한희망을 갖게한다.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철저한 분석 위에 서 있는 니

버의 신학적 인간학은 그로 하여금 정의실현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보

다 근사치의 대답을 찾게 하였다. 역사의 불안정성, 불안, 부정의가 완

전히 초월되는 곳은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심과 교

만 그리고 육욕이 완전히 극복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인간이 하

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즉 자신의 완성된 의로움을 경

험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초월을 가능케 하는완전

한 사랑, 완전한 정의, 완전한 진리는 오직 원칙적으로만 가능한 것이

다. 이러한 이상들은 역사 안에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목표일뿐 우리

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정의 실현에 대한 니버의 견해를 한 구절로

요약해 보자면,“하나님의 은혜의 성취를 갈망하는 인간의 기대는 정의

를 위한 투쟁을 가능케 하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정의를 위한

투쟁을 필연적인것이되게한다”고 말할수 있지않을까?

2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203

46) 앞의책, 204.

47) Robert McAfee Brown, “Reinhold Niebuhr: His Theology in the 1980s,” Christian

Century, no. 22. (January, 1986), 66.

Page 1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둘째, 니버의 정의론은 정의의 개념에 관하여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

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니버가 정의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충분히 정의하지 못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원인으로 니버가 이성과 자연법에 근거하여 정의를 규정할 수

있는 근거나 정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모질게 비판했다.“항상 니버가 관심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였

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라인홀드 니버가 정의의 요청과 최고

의 윤리적 규범인 사랑의 요청의 차이점을 이해시킬 수 있는 정의에

관한 명백한 개념을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49) 다시 말하여 사람들은

정의와 사랑을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기에, 사랑에 의존하지 않고

서도 스스로 정의될 수 있는 정의의 자기규정적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

이다.“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정의가 사랑으로부터 구분되는

지 그리고 어떠한 관계에서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주도적인 규범인 사

랑과관계되는지를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50)

그러나 이러한 브루너의 비판은 오히려 그가 니버의 정의의 개념을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버가 정의를 규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분명히 밝히듯,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는의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는 사랑의 상대적, 사회적 체현임과 동시에

사회-역사적 영역에서의 사랑의 근사치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사랑의

실현임과 동시에 사랑을 부정하는 변증법적 성격을 가진 가치인 것이

다. 오히려 사랑과 정의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는 니버의 정의개념은 비

판의대상이라기보다 도리어 창조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더 나

아가 아가페의 사랑을 정의의 궁극적인 규범으로 삼는 니버의 정의론

은 현대정의에 관한담론이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게한다.

론적 낙관주의를 소유한 민주주의적 이상론자들이나 심지어 마르크스

주의자들 역시 인간 역사의 비극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48)

이러한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에 대한 니버의 예언자적 비판은 오늘

날까지 매우 깊은 통찰력을 제시해주고 있다. 공리주의적 가치관과 자

유시장주의가 기초로 하는 효율의 원리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차별의

원리(the different principle)를 주장하는 존 롤즈(John Rawls)의 정의

론에서는 니버의 비판과 다소간의 유사점들이 발견된다. 또한 개인의

존엄과 권리를 무시하고 도덕성을 쾌락의 문제로 환원시킨 벤담의‘최

대행복’의 공리주의와 공정성보다 소유 권리를 강조하며 불평등을 당

연한 것으로 여기는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이나 밀튼 프리드만

(Milton Friedman)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의 정의론 역시 니버의 비판과 동일선상에 서있다.

그러나 도리어 니버의 이론이 세속 정의론들보다 더욱 값지게 여겨지

는 것은 롤즈나 샌델의 정의론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합리적 이기

주의를 넘어서서 시민적 덕성과 공공선을 추구하는 어떤 인간관을 전

제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론의 기반이 될 수 있

는 인간관을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없다. 이와 다르게 니버는 성서적

증언으로부터 확고한 인간론을 도출하였다. 다시 말하여, 자연의 아들

임과 동시자연을 초월하는 정신으로서의 인간은,‘하나님의 형상’임과

동시에‘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모순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결코 스

스로 대답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도리어 그 자신이 문제이다. 문제에서

해답이 도출될 수는 없다. 니버는 분명 우리로 하여금‘이미 그러나 아

직’(already but not yet)라는 성서적 증언이 가지는 긴장을 보게 하고,

우리가 이룬 모든역사의 성취까지도비판적으로 보게한다.

2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205

48) 이상주의와 낙관주의적 경향에 대한 니버의 비판은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1장을참조하라.

4 9 ) Emil Brunner, “Some Remarks on Reinhold Niebuhr’s Work as a Christian

Thinker,” in Reinhold Niebuhr: His Religious,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ed.,

Charles W. Kegley (New York: The Pilgrim Press, 1984), 84.

50) 앞의책.

Page 10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일일지 모르지만-그것이 자신의 이론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

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서적 아가페의 사랑을 정의담

론의 궁극적 규범으로 가지고 전개하는 니버의 정의론은 분명 세속정

의론이 가질수밖에 없는한계(궁극적 규범의부재)를 넘어선다.

이 외에도 정의실현의 문제를 힘의 논리로 풀어내는 니버의 분석은

매우 공감이 가는 분석일 뿐 아니라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

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제시한다. 세상

은 단순히 도덕적인 가치나 이상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힘의 논리

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힘의 논리를 작게는 가정에서부

터 크게는 세계정세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조직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 부정의(injustice)라 할지라

도 그것은 힘의 오용(the abuse of power)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

리는 이러한 힘의 논리와 힘의 오용으로서의 부정의를 우리의 주위에

서도 쉽게찾아볼 수 있다. 국회의 날치기법 통과, 한미FTA 비준, 그리

고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세상이

자신의 공동체만을 중시하는이기주의(자기보호, 자기확장, 권력집중

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와 힘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나타나는 힘의 오용은 분명 부정의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분명하

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바르

게 힘을 조직하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필수적이라는 니버의 주

장은높은타당성을가지고 있다말할수 있다.

V. 나가는글

니버의 정의론은 분명 해결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예를들어, 여기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니버의정의론은(1) 강제와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한다는 점,52) (2) 역사의 성취에 대한 비관적 견해

예를 들어, 샌델은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신념들을 회피하기보다 도

리어 그것들에 관심을 기우려 다른 신념들로부터 새로운 가치들을 배

우고 미덕과 공공선을 고무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왜 샌델은 종교를 정의담론과 공공정치의 영역에 초대하는 것일까? 그

는 종교가 좋은 삶을추구하는데 차지하는 위치와 종교가 장려하는 도

덕성또는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방식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종교들이

현대 공공영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을무시할 수 없기에, 또한공

공선이라는 도덕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의담론에 초대하

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물론 샌델이 인정할는지는 모

르지만-세속 이론으로서의 그의 정의담론은 종교를 논쟁의 중심으로

초청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여, 샌델이 시민적

덕성과 공공선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

가치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떠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정의의 규범이 요

청될 수밖에 없다.51) 그러나 그는 다원화되고 상대화된 여러 정치이론

들 가운데서 어떠한 궁극적 규범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정치철학과는 다르게 계시라는 이름으로궁극적 규범을 주장한다. 따라

서 샌델은 만일 여러 종교들의 궁극적 규범들로부터 시민적 덕성과 공

공선을 고양하는 어떤 합의점을 도출할 수만 있다면-물론 불가능한

2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207

51) 샌델은 정의를 선의개념에 연결시키는 세 가지 방식들을 제시한다. 첫째, 정의 원칙

들이 특정한 공동체나 전통에서 지지를 받는 것 혹은 널리 공유되는 가치로부터 설

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샌델은 이러한 방식은 부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관습이 특정 공동체의 전통에 의해 인정받는다는 사실만으로 그 관습의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의를 선의 개념에 연결시키는 두 번째 방식은 정의원

칙이 만족시키는 도덕적 가치나 본질적 선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권리가

선을 증진시키는가를 통해 권리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이 방식은 엄밀히 말하여 공

동체적이라기보다목적론적이나완전론적 방식이라고부를 수 있다. 샌델은 세 번째

방식을 제시하며 지지하는데 권리의 정당성을‘권리가 기여하는 목적의 도덕성’에

의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 역시 권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성

을 평가할 수 있는어떤궁극적인도덕적 규범이 필요하다는것을역설하는것과다

르지않다. 마이클 샌델, 『왜도덕인가?』(서울: 한국경제신문, 2010), 321-324.

Page 1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단순히 하나의 불가능한 이상으로만 보는 비관

론이나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실체로 간주하는 낙관주의를 넘어서 현실

에서 가능한 상대적 정의를 꿈꾸게 한다. 이러한 견해는 정의에 대한

간단하고보편타당한대답이 없음을 분명히 가르쳐주는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우리

에게이야기해 주었다.

주제어

라인홀드 니버, 정의, 사랑, 은혜, 힘

Reinhold Niebuhr, J5ustice, Love, Grace, Power

접 수 일 2011년 2월 7일

심사 (수정일) 2011년 4월 21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때문에 실제 투쟁하고 항거하는 역사변혁의 힘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53) (3) 집단적 상황속에서 희생적 사랑인 아가페가 원리로서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공동체에서 상호적 사랑을

고양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54) 등에서 비판받아왔다. 그리고 이러

한 비판들은 분명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20세기 전

반 냉전 이데올로기 속의 미국사회와 세계정세에 기반을 둔 니버의 정

의론을 오늘 날 세계 상황이나 동북아의 상황에서 적용하는 것은 상당

한 어려움이 있을것이며, 또한다양한 형태의 정의론과 주제들을다루

는 현대 정의론 담론(사회적, 생태적, 성적, 과학적, 생명윤리와 같은 다

양한 차원에서의 정의)에 비교할 때 정치적 영역만을 관심하는 니버의

정의론은분명편협함을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니버의 정의론에 귀기우려야만 할 것은 그의

정의론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해답을 제시해 주어서가 아니라 오늘

날 그 어떠한 형태의 정의에 관한 담론이라도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니버의 정의론은 세속 정의론자들에

게 형제애와 공공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성서적 인간론과 사랑이라

는 궁극적인 규범을 소유한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 또는 신앙관이 반

드시 필요하고 더 적합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니버는

2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209

5 2 ) 이러한 비판은 요더(John H. Yoder)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John H. Yoder,

“Reinhold Niebuhr and Christian Pacifism,” Mennonite Quarterly Review 2 9

(1955), 101-117.; The Politics of Jesus (Grand Rapids, Mich.: Eerdmans Publish-

ing Company, 1972).

53) 이러한 비판은 해방신학의 정의론에서 주어지고 있다. Karen Lebacqz, Foundations

for a Christian Approach to Justice: Justice in an Unjust World ( M i n n e a p o l i s :

Augsburg, 1987); Ismael Garcìa, Justice in Latin American Theology of Liber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7).

54) Robert Thomas Cornelison, The Christian Realism of Reinhold Niebuhr and the

Political Theology of Jurgen Moltmann in Dialogue (San Francisco: Mellen

Research University Press, 1992), 154-155.

Page 1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Human Destin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3.

.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A Vindication

of Democracy and a Critique of Its Traditional Defens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4.

. Faith and History: A Comparison of Christian and Modern Views

of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9.

.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3.

. Pious and Secular America.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Robertson, D. B. ed. Love and Justice: Selections from the shorter writings of

Reinhold Niebuhr.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57.

Yoder, John Howard. “Reinhold Niebuhr and Christian Pacifism.”

Mennonite Quarterly Review 29 (1955), 101-117.

. The Politics of Jesus. Grand Rapids, Mich.: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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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kley, Harlan. Passion for Justic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Brown, Robert McAfee ed. The Essential Reinhold Niebuhr: Selected Essays

and Addres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6.

Cornelison, Robert Thomas. The Christian Realism of Reinhold Niebuhr and

the Political Theology of Jürgen Moltmann in Dialogue. S a n

Francisco: Mellen Research University Press, 1992.

Garcìa, Ismael. Justice in Latin American Theology of Liberation. A t l a n t a :

John Knox Press, 1987.

Harry R. Davis and Robert C. Good, eds. Reinhold Niebuhr on Politics. New

York, 1960.

Kegley, Charles W. Reinhold Niebuhr: His Religious,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New York: The Pilgrim Press, 1984.

Kink, Michael. The Social Philosophy of Reinhold Niebuhr. Chicago: Adams

Press, 1975.

Lovin, Robin W. Reinhold Niebuhr and Christian Realism. C a m b r i d g e

England.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Niebuhr, Reinhold.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32.

.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New York: Seabury press,

1935.

. Christianity and Power Politic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0.

.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A Christian Interpretation. Vol. 1,

Human Natur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41.

.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A Christian Interpretation. Vol. 2,

2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211

Page 1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world today. However, the purpose of this paper lies neither in

suggesting a comprehensive exploration of Niebuhr’s theory of

justice nor in making a hasty evaluation on it, rather it lies in under-

standing his notion of justice more concisely and accurately in a

sympathetic way. In order to appreciate the nature and magnitude of

Niebuhr’s theory of justice, this paper begins with a brief exploration

of Niebuhr’s understanding of justice focusing on the concept, the

principle, and the structure of justice (section I I). Then, in next

section, I examine how much his view of human nature and destiny

supports to his theory of justice (section I I I). Finally, I present some

contributions and limitations of Niebuhr’s theory of justice (section

I V).

I conclude that Niebuhr’s reservation and caution in our social

behaviors should not be forgotten if we do not want to be trapped in a

naïve attitude or despair when things do not come out as we have

expected.

Revisiting Reinhold Niebuhr’s Theory of Justice

Hwang, Minhyo

Fulltime Lecturer

Honam Theological University and Seminary

Kwangju, Korea

It is certain that justice is what most people dream for themselves

as well as for the global world. Then what is justice? And where is

justice? Is it only a human ideal or imagination that we could only

wish for and never achieve? If we can achieve it, though partially,

what should Christians, the Disciples of Christ, do? In what way do

our spiritual resources inspire our thinking and action for such a

loftiest goal in human relationship?

These questions have been raised not only to Christians of today

but also to all Christians through the ages. Reinhold Niebuhr, who

dominated theological discourse at mid-20th century in the United

States, is one of those theologians who have seriously invested their

whole lives to examine the tragic situation of injustices and the

demands of Christian calling for justice in human relationship.

Although Niebuhr declined to identify himself unequivocally as a

theologian, he has in fact written inspiring theological books and

articles with the aim of defending and justifying the Christian faith in

a secular world.

In this paper I want to delve into Reinhold Niebuhr’s theory of

justice to see how Niebuhr answered the question of justice and how

we, as responsible Christians, can learn from him for our action in the

2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황민효, 라인홀드 니버의정의론의 재고(再考 213

Page 1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바르트의 계시해석에나타나는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1)

박형국

(장로회신학대학교강사)

I. 들어가는글

최근의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2)의 흐름은 사유와 존재 사이의

오랜 시계추 운동의 또 다른 반복처럼 보이지만, 서구 근대 이후 주체

중심의 사유체계와 그 위에 세워진 과학기술문명과 시간이 갈수록 더

욱 더 그 과학기술문명에 의존해가는 인류사회의 미래를 고려해볼 때,

매우 깊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 이후의 주

체 형이상학의 역사는 이성의 빛이 타자의 세계를 밝히는 계몽의 도구

도 되지만, 그 이면에 타자의 세계를 통제 혹은 지배(mastery)하는 도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15-247

1) 이 글은1월 14일 한국조직신학회52차 신진학자 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충한 것이다. 졸고에 대한유익한 심사평을 주신한국조직신학회세 분의심사위원

들에게 감사한다. 소통에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만 심사평들은 필자가 논점을 좀 더

분명하게하는데많은도움이되었다.

2) 이 글에서 다루어지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사유는 주로하이데거적인사유전통과깊

은 관련이 있다. 데리다와 마리옹의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는 하이데거의 (脫)형

이상학적현존의 사유를뿌리로 삼음과동시에비판적으로계승하고 있다.

Page 1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와마리옹의脫형이상학적인 현존의 사유의

어떤 측면이 바르트의 계시해석의 脫형이상학적 면모를 재조명하기 위

한 볼록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데리다와 마리옹의 脫형

이상학적인 현존의 사유가 형이상학적 사유의 과잉의 맥락에서 존재와

사유 사이의 매개적 현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밝혀준다

는 관점으로 접근해 보려고 한다. 바르트의 계시해석은 데카르트 이후

의 형이상학(Cartesian metaphysics of subjectivity)의 과잉이 문제되

는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기에 그 맥락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될 수 있

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유의 맥락에서볼 때, 바르트의계시해석은

주체 형이상학의 과잉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사유 사이에 놓여

야 하는 매개의 성격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데리다와마리옹의脫형이상학적인 현존의 사유의

두드러진 특징은 현존의 사유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형이상

학적인 동일성의 작용을 피하면서 존재의 타자성을 지키는 길을 모색

하려하는 점에있다. 데리다와 마리옹은 현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과잉

의 맥락에서 전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졌던 존재와 사유(언어와 의식)

사이의 지시이론, 즉 존재와 사유 사이에 단순하고 직접적인 상응(cor-

respondence) 또는 일치(adequation)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생각을 다

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필자는 데리다와 마리옹의 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와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에 바르트의 종교와 존재유비에

대한 비판과 유비적 간접계시 사유를 각각 비추어보는 방식으로 바르

트의계시사유의脫형이상학적현존의 면모를 재조명해보려고한다.

구(도구적 혹은 방법적 이성)로 바뀔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脫

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는 의식주체의 타자 세계에 대한 이러한 통제

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규정해 볼 수 있다.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는 단지 형이상학적 사유를 부정하는 사유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순을 밝힘으로써 형이상학적 사유가 동일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더 잘 기능하게 하는 사유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형이

상학적 사유를 존재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탈구축하는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가 존재에 원초적으로 가하는

통제를 줄이고 사유와존재가 함께상승하는길을모색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는 바르트의 신학

적인 계시사유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계

시(신학)와 이성(철학) 사이의 이항대립론(binary oppositionalism)이나

일원론(monism)을 피할 때 가능하다. 필자가 보기에 바르트는 계시와

이성 사이의 일원론이나이항대립론을 견지하지않는다. 바르트의계시

해석은 어떤 간접적인 매개적 현존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의 현존과 인

간의 사유의 차이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脫주체 형이상학적 사유의 면

모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필자는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형이상학을 비

판적으로 성찰하고 보완하는 脫형이상학적인 현존의 사유들에 비추어

바르트의 계시 해석을 재조명해 볼 것을 제안한다. 필자는 형이상학적

인 현존의 사유에 대한 데리다와 마리옹의비판적 성찰과 그들의 脫형

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를 마치“볼록거울”(a convex mirror)3)처럼 사용

2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17

3) 필자가“볼록거울”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데리다와 마리옹의 脫형이상학적 현

존의사유를 바르트의 계시해석과 비교한다거나결합한다는 뜻이아니다. 아마거울

자체와 거울에 비친대상을 비교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것이다. 바르트의 계시해석을

단지데리다와 마리옹의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라는“볼록거울”앞에 세우고 들여

다보려는 것이다.그렇게 할 때 바르트의 계시해석의 내부전경이 확대되어 그 脫형이

상학적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필자는 바르트의 계시해석이 데리다와 마리

옹의 철학적인(혹은 신학적인)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脫형

이상학적사유의면모를 담고있는신학적사유라는점을밝혀보려고 하는것이다.

이로써 근대주체중심적인사유의 해체의 맥락에서 바르트의 계시신학적인脫형이상

학적 사유와 하이데거적 유산의 脫형이상학적인 사유사이에 넓은사유와 실천적 연

대성을 제시해보려고하는것이다.

Page 1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의 논점은 현존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

유를 통해 타자성(otherness or difference)을 지우는 동일성(identity)

의 논리에 대한 해체적 보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

면“현존의 형이상학”은“존재자의 현존(presentation), 즉 지식과 통제

(mastery)로서의 현존안에서의 존재자들의 산출과 회상”을 가리킨다.7)

데리다는“현존의 형이상학”이 존재자들에대한 완전한 현존(full pres-

ence)을 추구함으로써 존재의 타자성이 통제되고 파괴되는 경향에 주

목한다.8)

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가 어떻게 근대 종교개념과

자연신학의 존재 유비개념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을 재조명해줄 수 있

을까? 바르트의 비판의 초점이 슐라이어마허적인 근대 종교개념과 존

재유비의 바탕에 깔려 있는 데카르트적인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

(Cartesian metaphysics or ontology)에 맞추어지고 있음을 주목해 볼

I I. 현존의형이상학에비추어본 종교/존재유비

최근의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담론들은 바르트의 종교와 존재유비에

대한 비판을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전망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인다.4) 이른바“현존의 형이상학”(現存

의 形而上學, metaphysics of presence or self-presence)에 대한 하나

의 脫형이상학적전략으로서데리다의해체(deconstruction)5)는 종교와

존재유비(analogia entis)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의 뿌리에 놓인 脫형이

상학적 예민함을 드러내주는“볼록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데리다는 서구 존재론의 주요 텍스트들에 나타나는“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적 전략을 통해 서구의 진리론 혹은 인식론에서

현존의 사유가 토대(foundation)가 되는 방식을 잘 밝혀준다.6)“현존의

2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19

4)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를 하이데거적인 脫형이상학적 담론들과 연결해보려는 시도들

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워드(Graham Ward)는 바르트의 존재유비개념에

대한 비판을 하이데거의 이른바 존재(Being)와 존재자(beings)사이의 존재론적 차이

(ontological difference)에 비추어보면서그 수렴(convergence)의 측면을밝혀보려고

한다. G. Ward, Barth, Derrida and the Language of Theology ( C a m b r i d g 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100 이하 참조. 한 걸음 더 나아가 코넬(George

Cornell)은 하이데거의 자연신학비판을 바르트의비판과 연결해서 이해하려고 한다.

G. Cornell, “Against Idolatry: Heidegger and Natural Theology,” ed. Merold

Westphal, Postmodern Philosophy and Christian Thought, trans. J. Conley and D.

Po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156 이하참조.

5) 데리다의“해체”(deconstruction)가 형이상학에 대한부정의논리라기보다는해체하면

서 보충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하는 해석을 위해서는 필자의 논문“Karl

Barth의 계시론을 재조명하기 위한 (탈)형이상학적 담론: J. Derrida와 J-L. Marion의

현존(presence)의 사유를 중심으로,”『기독교 사상과 문화』(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11), 105-6 각주 9 참조.

6)“현존”(現存, presence/the present)이라는 개념은 후설(Edmund Husserl)의 초월현상

학(transcendental phenomenology)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기초존재론

(fundamental ontology)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최근에 데리다에 의해 매우

중요한脫형이상학적주제로부각되었다. 이 개념과 현존의형이상학에대한자세한

해설을 위해서는 필자의 논문“Karl Barth의 계시론을 재조명하기 위한 (탈)형이상학

적 담론”을 참조.

7) J. Derrida, Speech and Phenomena and Other Essays on Husserl’s Theory of Signs,

trans. David Allison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102.

8) Rodolphe Gasché, The Tain of the Mirror: Derrida and the Philosophy of Reflect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Ch. 6: “Beyond Reflection: the

Interlacings of Heterology,” 참조. 형이상학(metaphysics)의 본질에 대한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서구의 존재론의기저에 놓인타자에 대한사유의 지배

와 통제의 문제와 함께 그 문제를 야기하는“방법적 관계”(the theoretical relation)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게서 온다. 키에르케고르

의 영향 아래에서 레비나스는 자아-타자의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관계(the meta-

physical relation)의 본질을 무한한 책임성(infinite responsibility)에 기초한“윤리적

(혹은 종교적) 관계”(the ethical relation)에서 찾는다.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 Lingis (Pittsburgh: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참조.

9) 바르트의 근대종교(계시) 개념에 대한 비판과 근대 형이상학의 연관과 관련해서 주목

할 만한 두 연구가 있다. 먼저 근대신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비판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바르트의 종교비판을 재조명하는 연구를 위해서는

Simon Fisher, Revelatory Positivism? Barth’s Earliest Theology and the Marburg

Page 1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있어서 증명할 수는 없지만,“모든 직관과 본래적인 감정”이 계시의

매개가 된다고 본다.13) 바르트가 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별히 문제

로 삼는 것은 바로 슐라이어마허의 이러한 의식에 토대를 둔 현존의

사유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직관과 감정의 방식으로의 계시의 매개

사상을“간접적인 기독교적 데카르트주의”(indirect Christian Car-

tesianism)라고 부른다.14) 그것의 본질은“의식 안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의 경험의 가능성의 내재”15)이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현존의 형이상

학이이러한 계시의 매개사유의 바닥에 깔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르

트가 보기에 하나님의 존재의 의식에의 현존은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

와 의식 사이의 존재유비적 상응에 기초하고 있어서 결국 의식의 현존

을 통한 하나님의 타자성의 동일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는 종교적

자의식을계시의 매개로 생각하는 슐라이어마허의종교적 현존의 사유

에 대한 바르트의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좀 더 분명히 밝혀주는 것으로

보인다.

I I I. 脫형이상학적인현존의사유에비추어본유비적간접

계시사유

1. 데리다의텍스트(texts)와 차연(différance, 差延)에 비추어

본 바르트의계시의매개사유

“현존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면서 데리다가 제시하는 脫형이상학적

수 있다.9) 바르트가 근대 종교담론(religionism)의 문제를 근대의 휴머

니즘 또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같은 보다 큰 담론의 맥

락에서 비판하고 있는 점10)도 이러한 접근의 타당성을 높혀주는 것으

로 보인다. 시각을 조금좁혀서 다소 논리가 거칠기는 하지만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을 등가(equation)시키는 현존의 매개인 슐라이어마허의

“하나님 의식”(God-consciousness)을 비판한다.11) 바르트가“하나님 의

식”을 문제로 삼는 까닭은 이 개념이 근대 종교담론의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의현존의 사유를 표현해준다고판단하기때문이다.

따라서“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론에 비추어볼 때

바르트의 비판의 초점이 근본적으로 근대종교담론의 의식의 방식으로

의 현존의 사유임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바르트의

비판의 초점이 하나님의존재의 타자성이 초월적인 종교적 자아의식의

현존을 통해동일화하는 문제에 맞추어지고있음을 알 수 있다. 슐라이

어마허 역시 모든“유한한 것”을“무한자”(無限者)에 대한 기호(표징, a

sign)로 본다. 그러나 그는 유한자(有限者)의 다양한 기호적 표현들이

“현상의 무한자와 총체자(總體者)에 대한 직접적 관계( i m m e d i a t e

r e l a t i o n s h i p ) ”를 드러내준다고 주장한다.1 2 ) 그래서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모든 세계(the Universe)의 인간에 대한 본래적이고(original)

새로운 소통”이“하나의계시”가 된다. 물론 계시가 의식 너머(beyond)

2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21

Schoo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의 특별히 194-206을 보라. 또한

슐라이어마허의 종교(혹은 계시)개념과 데카르트의 자아의식 혹은 주체성의 형이상

학 사이의 깊은 연관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위해서는Ronald Thiemann, Revelation

and Theology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5), Chs. 1-2, 특

히 24-31을 참조.

10) K. Barth, The Humanity of God, trans. John N. Thoma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68), 35.

11) R. Thiemann, Revelation and Theology, 31.

12) F. Schleiermacher,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trans. John

Oman (New York: Harper & Row, 1894), 88 참조.

13) F. Schleiermacher, On Religion, 90.

14) K. Barth, Church Dogmatics I/1, eds. G. W. Bromiley and T. F. Torrance

(Edinburgh: T. & T. Clark, 1936), 214) 이하에서CD로 약칭.

15) CD I/1, 223.

Page 1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립한다는 지시성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흔들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단순한 지시성의 생각이 쉽사리“자기현

존적인 의미와 진리”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데리다가 텍스

트나 원문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절대적인 근접성

의 상실, 자기현존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20) 한편 개쉐에 따르면 데

리다의 주장은 텍스트 외에 아무것도 없다거나 모든것이 언어라는 뜻

이 아니라, 언어학적으로 말해서 지시와 지시항(a referent)의 궁극적인

일치의 구조적 불가능성, 혹은 현상학적으로 말해서 의식의 지향성과

그에 상응하는 지향대상의 궁극적인 일치의 구조적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21) 달리 말해서 데리다의 일반화된 텍스트 개념은 경험적이든

관념적이든 텍스트의 지시기능을 종결(의미의 동일성)시킬 수 있는 그

어떤 텍스트 밖의 지시대상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

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의 동일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의 다양성 때문도 아니고 해석자의 한계 때문도 아니고

단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일반적인텍스트의모방성과 지시성을 부정하지는않는다.

텍스트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은 존재와 사유의 관계성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은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존재에 대한자기현존적인 의미의 동일성의 불가능함을 역설하기 위해

존재와 사유 사이에 매개를 설정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트에 따르면“텍스트 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은“매개되지 않은 지식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22) 하트

의 해석은 데리다의 텍스트라는 생각이 존재자(beings)에 대한 직접적

혹은 총체적 현존의 불가능성을 위한 매개적 사유임을 밝혀준다. 데리

인 현존의 사유는“텍스트”와“차연”이라는 생각에 잘 드러나고 있다.

데리다는 텍스트 개념의 필수적인“일반화”(generalization) 혹은“확장”

(extension)을 시도한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일반화된 혹은 확장된 텍

스트는“기호들의 짜임새”(fabric of signs)로서 매우 포괄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16) 텍스트를 확장함으로써 데리다는 텍스트의 전통적인 이

해들에서 나타나는 축소를 피하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데리다에게 텍

스트는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기표(signifier)나 혹은헤겔의 변증법적인

지양을 통해 개념적인 기의(signified)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즉 데리다

는 경험주의적으로혹은 관념주의적으로 환원된 텍스트 이해를 피하려

고 한다.

데리다의 이러한 일반화된 텍스트(a general or generalized text) 또

는 원문자(archi-writing)라는 개념은 많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텍스트 밖에 아무것도 없다”(Il n’y a pas de hors-t e x t e; There is

nothing outside the text.)라는 주장을 통해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17)

데리다의 이 주장은 텍스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18) 노

리스에 따르면19) 데리다가 텍스트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텍스트와 관계하는세계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아니고,“지시성

의 문제”가 전통적으로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텍스트와 지시대상 사이에 정확한 상응이나 일치의 관계가 성

2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23

16) J. Derrida, Of Grammatology, trans. G. C. Spivak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4), 14.

17) J. Derrida, Of Grammatology, 158.

18) J. Derrida in Richard Kearney, Dialogues with Contemporary Continental

Thinkers: The Phenomenological Heritage (Manchester, U.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124.

19) 필자가 보기에 노리스가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제공해준다.

특별히 6장“데리다와 칸트: 계몽적 전통”참조. Christopher Norris, D e r r i d 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이종인 역, 『데리다』(서울: 시공사,

1999), 214 이하참조.

20) J. Derrida, Of Grammatology, 112.

21) R. Gasché, The Tain of the Mirror, 278 이하참조.

22) K. Hart, The Tresspass of the Sign: Deconstruction, Theology and Philosophy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0), 26.

Page 1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것(something)이다.”26) 그러니까“차연”은 존재론적인 혹은 형이상학적

인 자기현존적 의미동일성의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 데리다가 고안한

전략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차연”에 대한 생각은 현존의 차

원을 지극히 축소하고 타자성을 극도로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데리다는 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보는것 같다. 데리다가헤겔의 변증법을 해체하면서

부정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이유가 바로여기에 있다. 데리다의 해체논

리는“보충”의 성격이 강한 논리이다.“차연”에 대한 데리다의 또 다른

정의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해체는“헤겔의 변증법적 지양의 논리

( r e l é v e )를 제한하고(limit), 중단시키고(interruption), 해체하는 것

(destruction)”이다.27) 다시 말하면“차연”은 텍스트를 통해 매개되는존

재의 타자성이 절대사유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고 지양되는 것을

막는 텍스트 안의 타자성의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데리다가 보기에 헤

겔의 변증법은 존재와 사유(개념)의 차이(difference)를 결국은 사유의

동일성으로지양(Aufhebung), 이 경우에 폐지되어야 할 하나의 계기적

모순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러나 데리다의“차연”은 형이상학적 현존의

동일성을 부정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종합을 이루어내기 위한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차연”은 형이상학적 현존의 동일성의 움직임을 부단히

해체함으로써 그것이 완전한 현존 또는 의미의 종결로 귀결되지 않게

하는보충의 논리라고말할수 있다.

“텍스트”의 매개성을통한 재현에대한 데리다의 사유는1924년『괴

팅겐교의학』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바르트의 성육신과 언어

적 텍스트의 매개를 통한 유비적 간접계시 사유를 이해하는데 매우도

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에게 있어서“세 겹의 형식의 하나님

다는 텍스트의 매개성에 대한사유를 통해 의미의 어떤 존재론적인 일

치 혹은 상응(데리다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현존이 추구하는 의미의 종

결 closure이라고 부르는 듯하다)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데리다의 텍스트라는 생각은 존재와 사유 사이

에 놓여있는매개의 불안정성을강조함으로써메타포(metaphor)와 유

비(analogy)를 통한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위한 여지를 넓혀주

는 것으로 보인다.23) 비유로 말하면 일반화된 텍스트는 존재를 밝히 보

여주는 투명한 창으로 기능하기보다는희미한 안경처럼 기능한다. 이러

한 점에서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은 존재의 타자성에 대한 칸트적인

“건강한 불가지론”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24) 말하자면 이것

은 바로 존재의 타자성을 사유의 완전한 현존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노리스가 적절하게 지적해주듯이, 데리다

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은‘실재’의 텍스트를 통한 재현(再現, re-

presence)을 통해 실재에 도달하는 문제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

이자는 주장으로이해하면 좋을것이다.25)

그리고 데리다에 따르면 이렇게 텍스트 안에서 현존의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의미의 동일성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작용이 바로

“차연”이라는 것이다. 이른바“차연”이라는 전략적 용어는 데리다의 현

존에 대한 脫형이상학적 사유를 이해하는데 또 다른 중요한 열쇠가 된

다. 데리다에 의하면“차연”은 텍스트 안에서 일어나는“차이( d i f f e r-

e n c e )와 지연( d e f e r r a l )의 결과로서 현존하는 존재자의 지(시)점( t h e

point of a present being)에 기초해서 통달되거나 제어될 수 없는 어떤

2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25

23) R. Gasché, The Tain of the Mirror, 293 이하참조.

24) 잘 알려진 대로 칸트는 물자체(物自體, Things in themselves) 혹은 예지계(睿智界,

noumena)와 같은 의식에 초월해 있는 실재는 이론 이성의 한계 밖에 속하는 것으

로 보아불가지론적 입장을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G. Ward, Barth, Derrida and the

Language of Theology, 233, 220. Donald MacKinnon, The Problem of Meta-

phys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118 참조.

25) C. Norris, 『데리다』, 223.

26)“차연”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설명을 위해서는 Margins of Philosophy, trans. Alan

Bas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7 이하.

27) J. Derrida, Positions, trans. Alan Bas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40-41.

Page 1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현존은 기호(표징)를 통한 간접적 현존이라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

서 하나님의 간접적 현존인가? 바르트의 주장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직접적으로가아니라 간접적으로, 시각에 주어지는것이아니

라 신앙에 주어지고, 하나님의 존재(being)의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호(표징)의 방식으로 주어진다.”31) 바르트의 주장을 좀 더 풀

어보면, 하나님의 존재가 사유에 직접적인 현존(visibility or being)의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현존(faith or signs)의 방식

으로주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사유 혹은의식적 현존에 간

접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바르트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기호(표

징)”와“신앙”이 매개가 된다는 생각에 있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기호

(표징)의 매개를 통해 신앙의 유비의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현존한

다는뜻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기호(표징)의 방식의 매개를 매우 강조한다. 바르

트는 주장하기를 성서는 계시에 있어서“기호들(표징들)의 불가피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그리스도 자신의 현현조차”오직“기호(표징)를 주시

는”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32) 바르트는“성육신”을“모든 기

의 말씀”(the threefold form of the Word of God)은 성육신과 언어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가 의식에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방

식을 피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괴팅겐교의학』과『교회교의

학』에서 현저하게 등장하는 유비적 계시사상의 심층적 의미는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 주체형이상학적 종교의 현존의 사상과는 다른 언어

적 매개를 통한 하나님의 간접적 현존(re-presence)에 대한 구성적 해

석으로 볼 수 있다.『교회교의학』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바르트의 유비적인 변증법적 간접계시사상의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

유의 특징을 두 주제에 집중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기

호(혹은 표징)의 방식을 통한 간접적 현존이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

는 유명한“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에 대한 생각이다. 이 두 주제

가『교회교의학』의 계시사유에서결합되고있다. 먼저전자는“하나님이

기호(혹은 표징)적 텍스트의 매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주신다”

(God gives God-self as signs-giving)28)라는 명제에 잘 나타나는데, 이

명제는 바르트가초기『로마서강해』2판의순수변증법적계시사유를넘

어 1924년 교의학에서 제시한 세 겹의 형식의 하나님의 말씀의 매개

를 통해 하나님의 간접적인 현존의 가능성을 매우 구체적이고 구성적

인 방식으로 추구해나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바르트는 계시의 현존

의 현실성을 긍정한다.“하나님의 계시는…우리의 경험과 사유의 영역

에서 일어난다”29)[강조첨가].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현존의 방식으로

일어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바르트의 유비적 방식의 간접계시 사

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이 기호(표징)의 매개의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현존하신다는 생각이다. 바르트는『교회교의학』에서 이 생

각을 매우 상세하게 펼쳐내고 있다. 바르트는 주장한다. 계시는“기호들

(표징들)을 주시는 것”(giving of signs)30)이다. 즉 계시 안에서 하나님

2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27

28) CD I/1, 299; I I/1, 22, 40, 196.

29) CD I I/1, 69.

30) CD I I/1, 52.

31) CD I I/1, 199.

32) CD I/2, 226.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그리스도와의 간접 교통(indirect

communication)을 강조하기위해그리스도의성육신(the God-Man)을 기호(표징, a

sign)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하나님의 감추심”(the divine incognito)에 대한생

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Practice in Christianity, eds. and trans. Howard Hong

and Edna Ho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124 이하와133 이

하 참조.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The Göttingen

Dogmatics: Instruction in the Christian Religion, vol. I, ed., Hannelotte Reiffen

and trans. Geoffrey Bromiley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143 n. 17. 144 n. 20, 332 n. 5, 333 n. 6 참조. 이하GD

I로 약칭. 성육신, 즉 그리스도의 인간성(육체성)을 일차적(“기원적인”) 기호(표징)로

이해해야 한다는 바르트의 주장은 성육신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이 가현적이라는 의

미로들릴수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바르트의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그리

스도의인간성(육체성)의 매개를통해대상적으로 주셨다(탈은폐)는 의미에서가현

Page 1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God’s objectivity)으로 부르기도 한다.37) 바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

님은 다른 대상들의 감추어진 기호(표징)의 방식으로 간접적인 현존의

방식으로자신의 존재를 알려지도록 주신다. 그리고피조물적인대상성

이 하나님의 존재의 현존을 위한도구와 기호(표징)가 되는것은“피조

물 혼자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렇게 됨”을

강조한다.38)

계시의 매개성에 대한 바르트의 이러한 복잡한 주장을 어떻게 해석

할 수 있을까?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유 사이의 매개성을 새롭

게 생각하게된 것이다. 계시의 간접적 매개성에 대한 바르트의 주장은

헤겔의 형이상학적 절대사유의 매개를 통한현존과 동시에 슐라이어마

허의 절대의존의 감정 또는 하나님 의식의 직접성(immediacy)을 통한

현존의 사유와는 다른 현존의 사유의 모색이다. 바르트는 하나님 의식

을 통한 계시의 매개 사상이 여전히 데카르트의 의식의 현존의 형이상

학에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는것이다. 바르트가 보기에 세계와 의식의

매개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의 현존은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와 의식사

이의 존재유비적 상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의식(코기토)이

하나님의 현존을 동일화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따라

서 바르트는 훨씬 더 두터운 간접적 매개의 사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바르트가 보기에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인“일차적 대상성”

과 의식(사유) 사이에 언어 혹은 기호(표징)를 통한 간접적 현존인“이

차적 대상성”이 자리한다. 그리고“일차적 대상성”과“이차적 대상성”

사이에는 존재유비의 방식으로의 상응이 아니라 하이데거의“존재론적

차이”와 비슷하게“신앙의유비”의 방식으로의지시적 관계가 있어야한

다는것이다.

따라서 기호(표징)의 매개를 통한 하나님의 간접적 현존에 대한 바

호들(표징들) 중의첫 기원적인중요한 기호(표징)”로 본다.33) 그리고 나

아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교회론적인 매개 수단들, 즉 설교, 세례, 그

리고 성찬을 이차적인 기호들(표징들)로 본다. 바르트는 성령의 현존조

차 직접적 교통혹은현존으로 보지않고간접적인현존으로 이해한다.

다시말하면,“기호(표징)를 주시는것에 더해(in addition to) 그리고 그

것을 넘어(beyond)” 성령의 활동에 의한“직접적인 은밀한 하나님의

현존은 없다”고 주장한다.34) 이러한 방식으로 바르트는기호(표징)의 매

개 속에 하나님의 간접적인 현존을 인봉한다. 이렇게 기호(표징)의 방

식으로의 하나님의 존재의 간접적 현존은『교회교의학』에서의 바르트

의 계시의 매개의사유에 있어서 매우중요하다.

바르트는 나아가 기호(표징)의 방식으로의 하나님의 주심을“대상

(objects)의 방식으로의 자신의 존재의 주심”으로 이해하기도 한다.35)

바르트는“일차적인 대상성”(primary objectivity of God)과“이차적인

대상성”(secondary objectivity of God)을 구별하는데, 전자는“피조물

적인 대상성 이전의 하나님의 실재”를 가리키고 후자는“계시를 통해

주어진 대상성”을 의미한다. 전자는 초월적 하나님의 실재를 가리킨다

면, 후자는 현존의 질서에 주어진 대상성을의미하는 것처럼보인다. 바

르트는 주장하기를“이차적인대상성”을 통해 하나님이 현존의 질서에

자신의 존재를 주신다고한다.36) 나아가 하나님은“직접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간접적인 의미에서, 즉 벌거벗은 의미(sense)에서가 아니라 하

나님의 존재 자체와 다른 대상들의 기호(표징)와 휘장을 두른 의미에

서 대상적”이라고 한다. 바르트는기호(표징)를 하나님의“옷을 입은대

상성”(clothed objectivity) 혹은“하나님의 대상성의 옷”(the garment of

2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29

적이지 않지만여전히 간접적이라고말할수 있을것이다.

33) CD I I/1, 199.

34) CD I/2, 236.

35) CD I I/1, 9, 10.

36) CD I I/1, 16, 19.

37) CD I I/1, 17.

38) CD I I/1, 54.

Page 1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새겨볼 수 있을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존의 형이상학이 만드는 존재

의 타자성의 상실을 문제로 삼으면서 실재의 텍스트를 통한 재현을 통

해 실재에 도달하는 문제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고 보는 데리다의 사유는 바르트의 유비적 간접 계시사유와 그 脫형이

상학적인 현존의 사유라는 점에서 수렴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와데

리다가 공유하는 생각은 텍스트의 매개는 항상 지울 수 없는 존재의

타자성을 담는 길이라는 점과 나아가 사유가 형이상학적 현존(감각적

현존이든지 개념적 현존이든지)을 통해 은유성(metaphoricity)을 뛰어

넘어 투명하게 존재의 실재적 현존을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다.40)

2. 마리옹의현상(現象)과 소여(所與)의 사유에비추어본

바르트의선물로서의계시사유

“현상”과“소여”에 대한 마리옹의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는 바르

트의 계시 사유에 나타나는 선물 개념41)을 재조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르트의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사유의 현존의 경륜에 주

어지는 것을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직접적인 현존의 방식에

서 야기되는 사유의 동일성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론적 타자성을 지키

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가 보기에 이러한 방식의“매

개를통한간접적인현존만”이“주체성을 하나님의 존재의 타자적 현존

을 향해 개방시키고 인간 주체가 자신의 마음대로 동일화하려는 것으

로부터 막아준다.”39) 결국바르트가 기호(표징)의 매개와 신앙의 유비를

통한 하나님의 간접적 현존으로서의 계시 사유를 전개하는 이유는 주

체의 형이상학적 현존에서 하나님의 타자적 현존을 지켜내기 위한 것

이다.

데리다의“텍스트와 차연”이라는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는 바르

트의 신앙의 유비의 방식으로의 기호(표징)의 매개를 통한 간접계시

사유를 조명하는 하나의 창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

에 바르트가 하나님의 존재의 직접적 현존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존

재의 대상성을 중첩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데리다가“일반적 텍스트”라

는 생각을 통해서 존재에 대한어떤 절대적인 근접성 혹은 자기현존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것은 서로 수렴하는 듯하다. 데리다가“일반적 텍

스트”라는생각을 가지고 전달하고자하는바가바르트가“하나님의이

차적 대상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의도하는 바를이해하는데 많은 도

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두 겹의 대상성에 대한 바르트의 생각의 본

질은 하나님의 존재에 해당하는“일차적 대상성”(일차적 현존)과 현존

의 경륜에 들어온“이차적 대상성”사이의 의미의 동일성을 불안정하

게 하여 하나님의 존재론적 타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생각은 기호(표징)의 매개와 하나

님의 중첩적 대상성을 통한 하나님의 존재의 간접적 현존을 통해 하나

님의 존재를 지시하는 문제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자는 뜻으로

2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31

39) CD I I/1, 14, 21.

40) G. Ward, Barth, Derrida and the Language of Theology, 247 참조.

41)“선물”이라는 개념은 필자가 바르트의 계시론에서 등장하는“하나님의 자기 주심”

(God’s self-giving)이라는 생각과 서구의 현존의 형이상학을극복해 보려는 하이데

거적인기초존재론에서 등장하는“존재가준다”(Es gibt Sein)는 생각속에들어 있

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의 수렴을 위해작업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하이데거는

초기『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에서맹아적으로 제시하고 후에“휴머니즘에관

한 서신”(Letter on Humanism)과“시간과 존재”(Time and Being)에서 더 명확히

전개하고 있는 선물의 현존에 대한 사유를 통해 데카르트적인 인식관계 이전에 세

계와 맺는 근본적인 선물의 현존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재혹은 존

재와 사유의 관계에서 존재 자체가 자신을 사유에 주는 계기의 근본성에 주목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사유의 구성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와 구별된다. M.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and Edward Robinson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2), 26 n.1, 255

n.1; “Letter on Humanism,” Martin Heidegger: Basic Writings, ed. David F. Krell

Page 1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 직관개념과 매우 다른데, 칸트와 후설에게 있어서 직관은 언제나

“소여의 부족”(shortage of givenness)을 야기한다. 따라서 소여의 부족

은 늘 현상이 근본적으로 직관의 형이상학적 조건의 제약에서 자유로

울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현상은

“결핍된 직관”(poor intuition)의 유한성을 수반하는 인식 주체(the I)의

지평(horizon) 안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늘 유한한 대상성의

지위로, 즉 소여의 부족 상태로 환원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러므로 칸트와 후설에게 있어서는 유한한 직관의 근본적 결핍성으로

인해 순수 혹은 절대 소여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마리옹은 칸트와 후설의 현상 개념을“결핍된 현상”( p o o r

phenomena)이라고 부르면서, 칸트와 후설이 생각하는 유한한 직관의

결핍성에서 야기되는 현상의 형이상학적 제약을 돌파해 보려고 한다.

마리옹의전략은 칸트와 후설의 결핍된 현상대신에“직관이의도가 목

표로삼거나 예견하는 것보다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이 주는 현상

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다.46) 이러한 현상은 직관이 의도하거나 생

각하거나 의미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시킬 수 없을 만큼 더 넘치게 주

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잉여를 통해 순수소여로

서의 현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마리옹은 이러한 현상을“직관

으로 충만한 현상”(phenomena saturated with intuition)47)이라 부른다.

마리옹의 사유는 후설 이후의 脫형이상학적인 현상학적 현존의 사유에

해당한다. 마리옹이 펼쳐내는 소여의 현상학은 소여에 대한 생각을 새

롭게 함으로써 후설의 현상에 대한생각에 나타나는 그 형이상학적 제

약성을 극복하면서 물자체에 이르는 다른 길을 보여주려고 한다.42) 마

리옹은 주장한다.“오직 소여의 현상학만이 사물 자체에 이를 수 있

다.”43) 마리옹에 따르면 소여의 본질은 어떻게 하면“현상이 자체를 주

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44) 마리옹의 생각에서

근본적인 것은현상이 자체를 준다는 소여를 강조하는 점이다:“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먼저 자체를 준다.”45) 소여에 대한 마리옹의 이러한 생

각은 현상학에서 초월적 의식의 구성적 계기보다는 직관의 소여의 계

기를 근본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바로 이 점이 현상을 그 형이상학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마리옹이 후설의 소여 개념을 혁신

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마리옹의 소여개념의 혁신의 중심에“직

관의잉여(剩餘)”(surplus of intuition)라는생각이 놓여있다.

마리옹의“직관의 잉여”라는 생각은 칸트와 후설의 초월철학이 주장

2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정지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33

(New York: Harper San Francisco, 1977), 238; “Time and Being,” On Time and

Being, trans. Joan Stambaugh (New York: Harper and Row, 1972), 19, 27. 참조.

42) 후설의 현상학의 이상은 형이상학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의미의 복합체로서의현상을

통해“사물 자체”(things themselves)에 이르는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후설의 현

상학적 이상은 그의 격언(maxim)인“사상 자체에로 돌아가자”(Back to the things

themselves, Zurück zu den Sachen selbst)라는 모토에 잘 나타나 있다. Edmund

Husserl, Logical Investigations, vol.1, trans. J. N. Findlay (London: Routledge,

1970), 251, 252; The Idea of Phenomenology, trans. William P. Alston and George

Nakhnikian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64), 5, 7.

43) J-L. Marion, Being Given, trans. Jeffrey L. Kosk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 4, 14, 17-18 참조.

44) J-L. Marion, Being Given, 7.

45) J-L. Marion, Being Given, 5; Reduction and Givenness: Investigation of Husserl,

Heidegger and Phenomenology, trans. Thomas A. Carson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8), 32.

46) J-L. Marion, Being Given, 197.

47) 마리옹의“직관으로 충만한 현상”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마리옹의 사상이 로마

가톨릭적임을 고려해서 가톨릭 성당을 배경으로 해서 설명해 보자. 성탄절 이브에

가톨릭 성당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을 바라본다고 가정해 보자.

“직관으로 충만한 현상”에 대한 마리옹의 설명을 따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

리스도의 상(현상)에 대한 우리의 지향적 혹은 의도적 의미 혹은 개념은 십자가에

달린 거룩한 그리스도의 현상을 넘치게 주는 직관에 결코 미칠 수 없다. 여기서 우

리의의도혹은 개념은 그 십자가에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상이직관을 통해보여

주는 현상을 형이상학적으로 통제 혹은 제한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그 거룩한 현

상이우리의 의도적 개념이받고해석하고 이해하는것을지극히넘어서는방식으

Page 1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것이다. 마리옹은 기독교의 계시(Revelation)조차 자신의 순수 소여의

현상학으로 기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리옹은 기독교의 계

시가 소여의 방식으로 현상의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계시신학이 소여의 현상학의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는 길이 열리

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52) 마리옹의 생각은 계시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

님의존재의 현존이 의식의 내재적 지평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왜곡없

이 사유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마리옹의 생각

은 존재와 사유 사이에 텍스트의 매개가 필요하고 또 그 매개의 불안

정성을 깊이 생각하는 데리다의 현존의 사유와 확연히 다르다. 데리다

의 텍스트와 차연이 아포리아의 방식으로 가능한 선물의 현존을 생각

한다면, 마리옹의 현상적 소여는 넘침의 방식으로 가능한 선물의 현존

을 생각하는것이다.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로서의 현상적 소여에 대한 마리옹의 생

각은 바르트의 계시 사유에서 점차 강조되는 매우 독특한 생각을 밝혀

주는창이 될 수 있는것으로 보인다. 바르트의 계시해석에서 마지막으

로 주목할 만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현존을 위해 주신다는

생각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생각은 주체 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식의 현존의 사유로 볼 수 있다. 그것을 신학적

인 선물의 현존의 사유로 불러볼 수 있을것이다.“하나님이 자신의 존

재를 주신다”라는 선물의 현존에 대한 사유가 이미1921년『로마서 강

해』2판에 섬광처럼 등장하여1924년『괴팅겐교의학』을 거치면서 더욱

이것이 마리옹이 의식의 지향성이나 개념에 의한 우상숭배48) 혹은통제

를 피하는 방식으로현상을“현존의형이상학”에서자유롭게 하는방식

이다.

나아가 마리옹은 소여와 현상 자체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 재해석을

현상학적 환원(phenomenological reduction)의 방법의 혁신과 결합시

킨다. 마리옹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그 자체를 의식에 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는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리옹은 현상학적 환원의 혁

신을 새로운 명제를 통해 제시한다:“더 많은 환원을 통해 더 많은 소

여에 이를 수 있다.”49) 마리옹은 순수 소여에 이르게 하는 자신의 현상

학적 환원을 데카르트, 칸트, 그리고 후설의 초월적 환원(첫째 환원)과

하이데거의 실존적 혹은 존재론적 환원(둘째 환원)과 구별해서 셋째

환원이라부른다.50)

이렇게 직관, 소여와 환원에 대한현상학의 근본적인 생각들을 재해

석함으로써, 마리옹은의식을 통한 선물의 현존을 직관의 잉여 혹은충

만한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옹은 현상학적

의식의 현존의 지평에서 선물의 현존의 내재적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볼 수 있다. 마리옹은선물의 현존을 내재적인 소여에 현상학적으로 부

단히 환원함으로써 선물의 현존과 내재적 소여 사이의 근본적 연속성

을 상정하는 것이다.51) 마리옹은 모든 선물의 현존이 절대 혹은 순수소

여와 [직관]의 잉여로 충만한 현상으로서 가능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2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35

로 그 자체를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리옹이“현존의 형이상학”을 피하면서 현상

을“선물의현존”으로 설명하는방식이다.

48) J-L. Marion, In Excess: Studies of Saturated Phenomena, trans. Robyn Horner and

Vincent Berrau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2002), 150.

49) J-L. Marion, Being Given, 14; Reduction and Givenness, 203.

50) J-L. Marion, Reduction and Givenness, 204.

51) J-L. Marion, “On the Gift,” eds. J. Caputo and Michael Scanlon, God, the Gift,

and Postmodernism, 61, 70 참조. 마리옹의 이러한 선물의 현존은 데리다의 아포리

아의방식으로서의선물의 현존과매우다르다.

52) J-L. 마리옹, Being Given, 235 이하, 특히 236, 그리고 242 이하 참조; In Excess, 28

이하 각주 25, 52 이하 각주 158 참조. 그러나 이러한 마리옹의 해석은 많은 현상학

자들로부터 현상학을 신학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Dominique

Janicaud, “The Theological Turn of French Phenomenology,” Phenomenology and

the “Theological Turn”: The French Debate, eds. Dominique Janicaud, Jean-

François Courtine, Jean-Louis Chrétien, Michel Henry, Jean-Luc Marion, and

Paul Ricoeur (Fordham University Press, 2001), 16-104 참조.

Page 1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간 편에서의“인식 자체,”즉“인간의 인식으로의 형식적(formal)이고

기술적인(technical) 특성들”의“폐지”혹은“변경”은 아니다.5 6 )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르트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인 주객 도식을 기

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체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는것이다.57) 바르트는『괴팅겐교의학』에서하나님이주체

(the subject)라는생각을 전개한다.58) 그러나 이 주체는 주체형이상학의

주체처럼대상을 현존의 방식으로구성하는주체가 아니다. 바르트에게

특징적인 것은이 주체가 선물의 주체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자신의 존

재를대상으로 주는 주체라는점이다. 바로 이 점이마리옹의 脫형이상

학적인 현존의 사유와 수렴되는측면일것이다.

바르트의 유비적이고 매개적인 간접계시의 사유에 나타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의 주심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바르트에 따르면

계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간접적으로 매개를 통해 신앙의 유

비의 방식으로 주시는데(God’s self-giving) 있다. 바르트의 이러한 계

시의 유비와 매개에 대한 사유는 하나님의 존재와의 관계가 형이상학

적 현존(방법)의 관계이기 전에 근본적으로 선물(진리)의 관계임을 분

명히 해준다. 바르트의 존재유비에 대한 비판은 형이상학적 현존의 과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37

56) CD I I/1, 181.

57) 바르트가 근대의 형이상학적인 절대 주체성을 하나님에게 전치시킨다는 비판을 받

기도 한다. 즉 바르트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일종의 초월적인 피히테(Fichte)적 자아

의 신적 투사라는 것이다. T. Rendtorff, “Der Ethische Sinn der Dogmatik,” ed. T.

Rendtorff, Die Realisierung der Freiheit (Gütersloh: Mohn, 1975), 119-3 4와 J .

Macken, The Autonomy Theme in the Church Dogmatics: Karl Barth and His

Crit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를 참조. 바르트의전근대성

(premodernity), 근대성(modernity), 그리고 탈근대성(postmodernity)과의 단순하지

않은 관계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J. Webster의 “Barth, Modernity and

Postmodernity,” Karl Barth: A Future for Postmodern Theology?, ed. Geoff

Thompson & Christiaan Mostert(Adelaide, Australia: Openbook Publishers,

2000), 1-28 참조.

58) GD I, 11, 87; cf. 61.

현저해지다가『교회교의학』에 이르러 바르트의 계시사유의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53) 현존하도록 사유에 간접적인 방식으

로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주신다는 바르트의 생각은 그 脫형이상학

적 성격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이

상학적 현존의 사유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르

트는 이러한 선물의 현존의 사유를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제시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이알려지도록 자신을 주시는

(God’s giving himself) 선행하는 선물(prior gift)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divine gift)이다.”54) 바르트의 이 주장은 매우 혁

신적인 脫형이상학적인신학적 현존의 사유로 해석해볼 수 있다. 즉 바

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의 타자적 현존에 대한생각을 제시하고 있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주장한다.“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그 계시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주시는 결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하면, 그러

한 앎은하나님의신비안에서 하나님을 아는것이된다.”55)“신비”라는

것은 하나님이 오직 자신의 존재를 알려지도록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타자적 현존이라는것을의미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매개를 통해 자신을 주신다는 바르트의 계시 사유

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의 선물의 현존은 초기 변증법적 사유가

보여주는 매개를 부정하는 사유가 아니고 매개를 긍정하는 사유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의 선물의 현존으로서의 계시는 창조의

매개지평으로 확대된다.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계시는“하나님의 창조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창조 그 자체의 능력에 의

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바르트에 따르면 그렇다고 동시에 이것이

2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53) K.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6th ed., trans. Edwyn C. Hoskyn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41-42, 361; GD I, 62, 85, 120, 212, 332; CD I/1,

299, I I/1, 22, 40, 196.

54) CD I I/1, 196.

55) CD I I/1, 40; cf. 38이하참조.

Page 1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V. 나가는글

존재를 밝히려는 형이상학의 현존의 사유를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도 않고가능하지도 않는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에 대한 과도

한 형이상학화로 인한 사유의 통제성 또는 폭력성으로부터 현존의 사

유를 끄집어내는 것도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존의

사유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현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

능한 존재의 현존의 길은 무엇일까?“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

와 마리옹의 해체와 재구성은 현존의 형이상학의 과잉이 존재와 사유

의 관계를 여전히 현존의 방식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야기하는 어려

움을 잘 보여준다. 필자가 보기에 데리다의 평생에 걸친“현존의 형이

상학”과의 씨름은 사유와 존재 사이에 광야의 에움길(detour)과 같은

어떤 멀고 복잡한 매개과정이 필요함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보인다. 脫

형이상학적인 선물의 현존에 대한 데리다와 마리옹의 제안은 현존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존재와 사유 간의 참된 상호성

회복을 위한 서로 다른 길을 보여준다. 두 사상가 모두 서구 형이상학

의 토대인 현존의 사유 자체에 대한 전적인 부정의 논리와 그것의 형

이상학적인 남용을 동시에 피하면서 존재가 선물의 방식으로 사유에

이르는 현존의 사유를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는“일반적인 텍

스트”라는 생각을 통해 직접적 상응의 방식으로 존재를 단순하게 지시

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매우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그 결과

현존을 매우 축소함으로써 존재의 현존을 아포리아적인선물처럼 묘사

한다. 한편 마리옹은 보다 더 데카르트의 전통 안에서“현상의 소여”라

는 생각을 통해 존재에 대한 개념의 단순한 일치를 어렵게 만든다. 그

결과 존재의 현존을 충만하게 채우는 선물의 현존으로 만든다. 형이상

학적 왜곡에서자유로운 방식의 현존의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두 사

상가는 손을잡고간다.

필자는 데리다와 마리옹이 열어놓은 선물의 현존이라는 창을 통해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39

잉의 맥락에서 사유와 존재의 관계성을 존재론적 유비의 방식으로 안

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어려움을 표현해주는 듯하다.“신앙의유비”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현존의 과잉의 맥락에서 계시사건에서 하나님의존

재의 원초적 선물을 강조하기 위한논리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존

재와 사유의 관계성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현존을 근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선물을 더 근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

존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선물의 현존의 사유는 존재의 타자적 현존

을 생각하는사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脫형이상학적인신학

적 현존의 사유는 이성과 사유를 부인하는 권위주의로의 복고를 부추

기지 않는다. 오히려 계몽주의적 이성과 사유를 하나님의 존재의 타자

성의 현존을 향해 열어젖힌다. 그리고 계몽주의적 이성이 현존의 논리

를 통해 사유의 동일성의 이름으로 지우려고 했던 그 타자를 회복시키

려 한다.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로서의 현상적 소여에 대한 마리옹의 생

각의 심장에 놓여있는 점도 바로 사유가 존재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형이상학적 현존(방법)이기에 앞서 선물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유비적이고 매개적인 계시에 대한 사유와 데리다와 마리옹의

脫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는 존재와 사유의 관계가 시작되는 근원에

존재의 타자성의 근본적인 행위, 즉 존재가 자체를 주는 선물의 사건이

있음을 상기해 준다. 사유의 모든 현존의 형이상학이 작동하기 이전에

주어지는 이 선물의 사건에 주의를 기울일 때 형이상학적 사유가 상실

한 존재의 타자적 현존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의 타자적

현존은 사유의 빈곤을 부추기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사유를 더욱 풍성

한 길로초대할 것이다.

2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주제어

존재, 사유, 계시, 현존, 선물의 현존,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현존의

형이상학

Being[s], thought(or thinking), revelation, presence, the presence

of the gift, post-metaphysical thinking of presence, metaphysics

of presence

접 수 일 2011년 1월 28일

심사 (수정일) 2011년 5월 3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41

바르트의 계시에 대한 사유가 함축하고 있는 脫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재조명해보려고 했다. 데카르트적인 주체형이상학에 대한 바르트의 예

민함은 초기의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나타나듯이 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를 지극히 부정하는反형이상학으로다가가게한 것이사실이지만,

점차 유비적이고매개적인간접계시 사유를 통해하나님의 타자적 현존

이 사유의 지평에서 가능한 길을 모색하게 된다. 데리다의 텍스트와 차

연의 사유는 바르트의 유비적이고 매개적인 간접계시 담론의 脫형이상

학적인 함축을 밝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리옹의

현상학적인선물의 현존의 사유는 바르트의 계시에 대한사유에서 등장

하는 선물의 현존에 대한 사유를 재조명하게 해준다. 우리는 바르트의

계시에 대한 사유에서 한편으로는 데리다처럼 존재와 사유 사이에 긴

에움길과 같은 유비적이고 매개적인 지시성에 대한 사유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마리옹과 같이 현존의 형이상학을 가득 채

우고도 남는존재의 충만한 선물의 현존을 함께발견할 수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의 선물(God’s self-giving)

에 있고, 그 선물은 현존을 부정하지 않는선물의 현존(the presence of

God’s self-giving)이며, 나아가 유비적인 매개를 통한 간접적인 선물

의 현존(God’s self-giving as signs-giving), 즉 예수 그리스도(계시된

말씀), 성서(기록된 말씀), 설교(선포된 말씀)와 성례전, 그리고 더 나아

가 계시의 매개지평의 확장을 통한선물의 현존임을 밝히고 있다. 바르

트는 매개를 통한 간접계시의 길이 하나님의 타자적 현존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사유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가장 좋

은 길임을주장하는것으로 보인다.

2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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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Post-metaphysical Thinking of Presence inBarth’s Conception of Revelation

Park, Hyung-Gug

Lecturer

Presbyterian College &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e reestablishment of a mutual relationship between being[s] and

thought without total presence and mastery matters. In this paper, we

propose to pay attention to the significance of emerging post-

metaphysical thinking of presence to avoid the mastery of being[s] by

a totalizing human metaphysical thought, that is, what Derrida calls

“metaphysics of presence.” From such a post-metaphysical per-

spective, we attempt to interpret Karl Barth’s conception concerning

the mediation of revelation as a theological form of the post-

metaphysical thinking of presence. To elucidate what Barth tries to

reformulate the presence of God’s being in his conception as to the

mediation of revelation against the backdrop of the modern meta-

physical thought of presence, we shall look into the post-metaphysi-

cal thinking of presence by Jacques Derrida and Jean-Luc Marion as

a convex mirror, bearing their divergence in mind.

Our strategy for a Barth-Derrida/Marion parallel is twofold: on the

one hand, we attempt to illuminate the post-metaphysical thrust of

Barth’s critique of modern “religionism” based on the conception of

the analogia entis in the light of Derrida’s and Marion’s critique of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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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 indirect economy of presence different from the immediate

presence of the being of God via self-consciousness. Barth argues

that God’s revelation is mediated through signs-giving in terms of the

analogia fidei rather than the analogia entis. Barth’s point is that the

r e-presence of God’s being in terms of the linguistic or semiotic

mediation is a viable path to shield the otherness of God’s being,

while eluding the total presence of the Cartesian metaphysical

thought of presence based on self-consciousness. In this way, Barth’s

thinking regarding the re-presence of God’s being seems to converge

into Derrida’s post-metaphysical thinking as to the re-presence of

reality in terms of the generalized text. In addition, what is noticeable

in Barth’s thinking of the mediation of revelation is an evolving idea

that “God gives himself” (the being of God) to the economy of

presence. Barth’s theological conception of the divine gift is a post-

metaphysical mode of presence entirely different from the modern

metaphysics of subjectivity in that Barth’s conception of divine

subjectivity is a giving subject in terms of the presence of the gift

rather than a constructing subject in terms of self-presence. Barth’s

emphasis on the primordiality of the presence of the gift of the being

of God in the knowledge of God tends to be resonant with a certain

fundamental feature of Marion’s phenomenological thinking of the

excessive presence of the gift in terms of “pure givenness” or “the

saturated phenomenon.” For Marion, the phenomenon is funda-

mentally the presence of the gift rather than self-presence. Thus,

Barth’s theological economy of divine presence seems to converge

into Marion’s thinking of phenomenological presence in terms of

their common emphasis on the primordiality of the gift of being[s].

박형국, 바르트의계시해석에나타나는 脫형이상학적현존의 사유 247

“metaphysics of presence.” We would like to highlight Barth’s

critique of the problem of the Cartesian “metaphysics of presence”

foundational to modern “religionism.” In other words, Barth is highly

problematic with the inevitable eclipse of the otherness of God’s

being by the direct or immediate economy of presence of self-

consciousness.

On the other hand, we try to elucidate Barth’s analogically-

oriented dialectical thinking concerning the mediation of revelation in

the light of both Marion’s post-metaphysical thought concerning “the

phenomenon” and “excessive g i v e n n e s s” and Derrida’s post-m e t a-

physical thought about “the text” and “aporetic d i f f é r a n c e.” Both

Derrida and Marion would investigate the economy of presence free

from some structural deterioration of the presence of beings to which

Western “metaphysics of presence” has supposedly given rise and as

its sequel the problem of the domestication of the otherness of beings.

While Derrida suggests the post-metaphysical conception of presence

in terms of the aporetic gift taking after textua “différance,” Marion

proposes the post-metaphysical economy of presence in terms of the

excessive gift resembling phenomenal “givenness.” However, their

approaches are quite different. Derrida tries to make the direct or

immediate self-presence of beings impossible by arguing for the re-

presence of beings via the text as a medium. Marion proposes the

mode of the presence of beings in terms of “the saturated phenome-

non” as “pure givenness” through the excess of intuition over inten-

tion or concepts. However, in spite of their difference, both Derrida

and Marion go hand in hand in laying out the economy of presence

that honors the alterity of beings as the other without their assimila-

tion into human thought through the immediate economy of presence.

In the meantime, when Barth deploys the threefold form of the

Word of God as the mediation of revelation in The Göttingen

Dogmatics and Church Dogmatics, his primary concern is to secure

2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신학

유장환

(목원대학교부교수)

I. 들어가는말

신학사를 되돌아 볼 때, 신학의 역사는 객관성의 신학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갈등의 역사였다. 예를 들어, 17세기의 정통주의는 객관성

의 신학이었다. 17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게르하르트(J. Gerhart)는

객관적인 하나님의말씀에서 출발하고 논리적이며 예리한 사고를 통해

서 신앙 조항들을 세분화하는데 집중했다.1) 반면에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은 주관성의 신학이었다. 19세기신학의 대표자인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신의식(또는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출발하여 그리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49-279

1) cf. 홀스트 G. 貝만, 이신건역,『교의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23. “정통주의는

우리가 거론하는 신학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전개하는가? 게르하르트는신학을‘사람

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과 경건한 생활 속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하느님 말

씀으로부터세워지는교설’이라고 정의했다.”: 헤를네/바그너, 남정우역,“요한 게르하

르트”『신학자 사전』(서울: 한들출판사, 2001), 26. “성서는 문자로 표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이다.”

Page 1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주-객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적인 타자되는 하나님의 인식에 있어서1차적 신인식과2차

적 신인식을 구별했고,3) 루돌프 불트만은 우리의 실존으로부터 하나님

을 말함으로써 주-객 분리를 넘어서 계신 하나님을 대상화하지 않고

비대상적으로 말하려고 시도했고,4) 폴 틸리히는 주관과 객관사이의 분

열을 초월해 있는 신비적인 선험성에 신학의 토대를 둠으로써 경험적

인 귀납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이나 형이상학적인 연역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문제점을 극복하고자시도했다.5) 특히, 폴 틸리히는

그 누구보다도 주-객 통일성에 기초하여 신학의 전 체계를 구성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틸리히 신학의 의의를 궁극적 관심, 소외, 새로운

존재와 같은 새로운 용어를 창조하여 기독교 신앙을 존재론적으로 재

해석한 점이라고 본다.6)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틸리히 신학의 진정한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51

3) cf. 김균진,『20세기신학사상』I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35.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어떤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가능성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먼저하나님 자신

이 인간에게 자기를객체로 세우시고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객체로 등장하심

으로써 하나님의 인식의 문제가 인간에게 비로소 제기된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의 제

1차 주체는하나님이다. 인간의 주체는제2차의주체이다.”

4) cf. 루돌프 불트만, 허혁 역,『학문과 실존』I (서울: 성광문화사, 1980), 123-125. “신으

로부터 말하는 것을 신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그렇게 말하는 것은그렇게 하는 순간에 그의 대상, 즉 신을잃

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으로부터 말하려고 한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분명히드러난다.”

5) cf. 폴 틸리히, 유장환 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서울: 한들출판사, 2001), 22-23.

“우리는 경험적인 방법이나 형이상학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이 둘의 혼합의 무수한

경우에 있어서도 귀납과 연역을 선행하는 선험성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 선험성은 일

종의 신비적인경험이라는 것을관찰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관념론자들과자연주

의론자들, 양자 모두의 신학적 개념의 뿌리는 모두“신비적인 선험성”(mystical a

priori), 곧 주관과 객관사이의 분열을초월한것에대한의식이다.”

6) 목창균,『현대신학논쟁』(1995), 206. “틸리히의 탁월성은 오히려 현대의 역사적 관점

과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근거하여기독교신학을 존재론적인 입장에서해석한것에

고 신의식과 관련하여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려고 했다.2) 물론,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대의 상황에서 보면나

름대로 신학적인 의의가 있었다.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은 냉철한 합리

적 이성을 통해서 활화산처럼 분출한 종교개혁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

립하여 개신교 신자의 교육과 양성의 체계를 확립해 주었다. 그리고19

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신의식(인간의 하나님경

험)에서 출발함으로써 화석화된 정통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생명력 있는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17세기

신학과 19세기 신학 그 자체는 객관성이나 주관성 어느 하나만으로는

“참된 신학”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객관적인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의 주관적인 참여를 배제함으로써‘내가 믿는 신앙이 아니

라 교회가 믿는 신앙을 믿는’신앙의 교리적인 형식화를 초래했고, 주

관적인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은 인간의 경험에서 출발함으로써 계시의

내용을 인간의 경험한계 내에서만 정립하는‘신학의 인간학적인 환원’

을 초래했다.

이와같은 문제점들에 직면하여20세기신학은‘어떻게 하면 객관성

의 신학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신학

적인물음을 신학의 주된과제로 가지고 있었다. 20세기위대한 신학자

들, 바르트와 불트만과 틸리히는 비록 신학적인 경향과 관점에서는 차

이가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관점에서 객관성의 신학과 주

관성의 신학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점에 있어서는 매우 유

2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 cf. 목창균,『현대신학논쟁』(서울: 두란노, 1995), 46. “슐라이어마허는 신조나 교의 또

는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혹은 기독교인의 자기의식을 신학의 토대

로 간주했다. 그는 교리적인 신조 배후에 있는 살아 있는 경험으로 돌아감으로써 신

학의 새로운 토대를 확립하려 했다”: 슐라이어마허, 최신한 역,『종교론』(서울: 대한기

독교서회, 2002), 56.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하며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 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스스로 어린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게채워질수 있으려고한다.”

Page 1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8) 그렇다면 상관관계의 방법은 객관적인 방법인가? 아니면 주관적

인 방법인가? 전통적으로 신학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방법과 위로부터

의 방법으로구분되어 왔다. 여기서 아래로의 방법은 인식 주관과의관

계 속에서 인간의 물음과 상황으로부터 출발하기에‘주관’으로부터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고, 위로부터의 방법은 인식주관과의 특수한 관계

를 배제한 체 신학의 영원한 대상인 하나님으로부터출발하기에‘객관’

으로부터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구분방식에 따라일부신학자

들은 틸리히의‘상관관계의 방법’을 아래(주관)로부터의 신학 방법으로

분류했다.9)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틸리히의 신학 방법은 위(객관)

로부터의 방법이나 아래(주관)로부터의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부

터의 방법과 아래로부터의 방법을 통일시키고 있는 주-객 통전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은 기본적으로‘위’(메시

지-객관)와‘아래’(상황-주관) 어느 한쪽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방

법이 아니라 오히려 양자를 똑같이 강조하면서도 이 양자를 상호의존

속에서 통일시키고 있는제3의 방법이기 때문이다.10) 이것은 틸리히 자

신의 글들 속에서 입증될 수 있는데 상관관계 방법론을 다루고 있는

『조직신학』I에서명백히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우리는 틸리히 자신이 그의 상관관계의 방법이야말로 메시지

와 상황을 부적절하게 연관시킨 잘못된 방법들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

이라고 강조한 부분에서 그의 신학방법이 주관의 방법이나 객관의 방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53

8) 폴 틸리히, 유장환 역, 『폴틸리히조직신학』I(2001), 21.

9) 홀스트 G. 貝만, 이신건 역,『교의학』(1994), 270.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

론은틸리히와 판넨베르크의그리스도론이다.”

10) cf. Anne Marie Reijnen, “Tillich’s Christology ”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aul Tillich ed. Russel Re Manning(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68. “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기독론이라는 일반적인 대립이

외에제3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틸리히는 위와 아래“사이”(between)의 기

독론이다. 틸리히의 주된강조점은안(만남의내적인 경험)과 밖(역사에 나타난새로

운 존재)사이의움직임이다.”

의의는 주-객 통일성의 신학을 통해서 신학사의 근본적인 문제점인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의 분열을 극복한 점이라고 생각된다.7) 따라서 필

자는 본 논문에서20세기 지성인의 사도인 폴 틸리히가 어떻게 주-객

통일성의 신학을 제시했는지 그의 주요 신학사상들(방법론, 계시론, 기

독론)을 통해서 살펴본 후에 틸리히의 주-객 통일성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신학사적인의의를 평가해 보고자 한다.

I I. 본론

1. 방법론과관련하여

먼저 폴 틸리히의 신학방법은“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이다. 상관관계의 방법이란신학의 영원한 상수인 메시지와

상황을 상호 대립시키거나 어느 한 쪽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지 않고

양자를 상호 연관시켜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려는 신학 방법

이다.“상관관계의 방법은 상황이 안고 있는 물음을 메시지가 안고 있

는 대답과 연관시키려는 시도이다. 이 방법은 자기 기만적인 변증신학

이 한 것처럼 물음으로부터 대답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또한 이 방법은

자기 기만적인 케리그마 신학이 한 것처럼 대답을 물음과 연관시키는

것 없이 대답을 제시하려고하지 않는다. 상관관계의 방법은 물음과 대

답,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신의 현현을 상관시키려는 방법이

2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있다. 그는 궁극적 관심, 새로운 존재, 상관의 방법과 같이 현대인의 감성에 와 닿는

신학개념과 용어를제시했다.”

7) cf. 김경재,『폴 틸리히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6), 219. 김경재는“틸

리히 신학이 위대한 것은 정통주의적 초자연주의와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

고 인간실존 상황과 기독교 진리의 메시지, 그 둘 중 어느 것 하나를 버리거나 약화

시킴이 없이 그의 신학적 과제를 성취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암시했다.

Page 1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말해진 것이지만 계시는 인간에게‘말해진’것이며, 그것도 인간에 의해

서 인간 그 자신에게 말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인 방법

은 잘못된 방법이다.

잘못된 세 번째 방법은 자연적인 하부구조 위에 초자연적인 상부구

조를 세우고 있는 이원론적인(dualistic) 방법이다. 이 방법은 초자연과

자연 사이를 구별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연으로부터 초자연을 유추

한다는 점에서 아래(주관)로부터의 방법의 변형이다. 예를 들어, 자연신

학은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의 무한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는 적극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깨닫고서 자기모

순적인 표현이지만“자연계시”를 통해서 일단의 신학적인 진리를 제시

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이른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 이원론적 자연신학의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틸리히에 따르면 자연신학의 논증 방법은 인간의 유한성을 분석하고

이 유한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물음들을 분석한 점에서는 옳지만 대답

을 물음의 형식으로부터이끌어 오려고 한 점에서는잘못된 방법이다.

이와 같이 틸리히는 잘못된 신학 방법들, 즉 위(객관)로부터의 방법

을 배격하고 아래(주관)로부터의 방법도 배격한다. 따라서 틸리히의 신

학방법을 위(객관)로부터의 방법이나 아래(주관)로부터의 방법으로 귀

속시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오히려 메시지(객관)와 상황(주관)을

상호 연관시키려고한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은 자연신학을 실존에

대한 분석으로 환원시키고, 초자연주의 신학을 실존이 안고 있는 물음

에 대한 대답으로 환원함으로써, 말하자면 주관의 방법과 객관의 방법

을 상호의존시킴으로써주-객 이원론적 분리에 빠져있는 잘못된 전통

적인신학방법들을극복하고자한 신학적인대안이다.

다음으로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이 주-객 분리를 극복한 주-객

통일의 신학방법이라는 것은“correlation”의 용어 분석에서 명백하게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55

12) 앞의책, 103-104.

법이 아닌 주-객 분리를 극복한 주-객 통일의 방법임을 엿볼 수 있

다.11)

먼저 메시지와 상황을 부적절하게 연관시킨 잘못된 첫 번째 방법은

초자연적인(supranaturalistic) 방법이다. 이 방법은 주관과의 어떠한 관

계도 배제한 채 위로부터 인간의 상황 속으로 떨어진 메시지로부터 출

발한다는 점에서 위(객관)로부터의 방법의 전형이다. 여기서 메시지는

낯선 세계에서 온 낯선 물체처럼 인간의 상황 속으로 떨어진 계시된

진리들이기에 인간의 상황에 대한 어떠한 매개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다. 이와 같이인간의 주관적인 수용의 측면을 배제하고 있는초자연주

의적인 방법은 전통적인 이단의 관점에서보면 가현설론적이며 단성론

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방법은 성서를 초자연

적인‘신탁’의 글로서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틸리히

에 따르면 인간은 그가 결코 묻지 않았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받아들

일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이 기독교의 대답들은 인간이 그 자신의 실

존 속에서 물어왔고 또 묻고 있는 물음들에 대한 대답들이었다는점에

서 초자연주의적인방법은 잘못된 방법이다.

잘못된 두 번째 방법은 자연주의적(naturalistic) 또는 인본주의적

(humanistic) 방법이다. 이 방법은 메시지를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 속

에서 유추한다는 점에서 아래(주관)로부터의 방법의 전형이다. 말하자

면, 자연주의적 방법은 인간의 실존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인간의 실존으로부터 대답을 발전시킨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꿰뚫

고 들어오는 실재를 무시하는 자연주의적 방법은 인간의 실존적인 상

태를 그의 본질적인 상태와 동일시하였고, 이들 사이의 분열을 간과했

다. 여기서는 실존적 물음과 신학적 대답이 인간의 창조성의 같은수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틸리히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서

2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1) 폴 틸리히, 유장환 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2001), 110-112. 신학방법론은 이미

유장환, “폴 틸리히의 신학방법에 대한 연구”, 『한국조직신학논총』제13집( 2 0 0 5 ) ,

65-83에 언급된 바 있으나본 논문에서는 주-객 통일성의관점에서재정립하였음.

Page 1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정도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종교적 경험에 있

어서 신(객관)과 인간(주관) 사이의 실제적인 상호의존성은 명백한 것

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의 현현(객관)과 인간의

수용(주관)은 상호의존 속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

경험에 있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현현이 없으면 하나님 경험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현만으로는 하나님 경험이 구성될 수 없

다. 하나님 경험은 오직인간의 주관적인 수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수

있다. 인간의 수용이 없다면 하나님의 현현은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이

처럼 하나님 경험에 있어서 주-객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호의

존 속에서 통일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현현과 인간의

수용을 상호의존시키고 있는틸리히의“상관관계”의 방법은 주관과 객

관이 실제적인 상호의존성 속에 있는 종교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초자

연주의적인 객관적인 신학 방법이나 자연주의적인 주관적인 신학방법

이 지니고 있는 주-객 이원론적인 분리를 극복하려고 한 주-객 통일

성의방법론이다.

2. 계시론과관련하여

다음으로, 밀리오리(D. Migliore)에 따르면 현대신학의 계시론의 주

된 과제는‘계시는 이성을 파괴하는가’와‘계시는 주관적인 것인가 아

니면 객관적인 것인가’에 관한 물음이다.14) 이에 대해 틸리히는 계시는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57

13) 앞의책, 104. 틸리히에따르면 신과인간의 관계는인식적인 측면에서볼 때도상관

관계이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대답의 영향 속에서 그의 물음을 묻는다. 신학은 인간 실존이 안고 있는 여러 물음

들을 전개하고, 인간 실존이 안고 있는 물음들의 빛 속에서 신적인 자기현현 속에

포함되어있는여러대답들을전개한다.

1 4 ) 다니엘 L. 밀리오리, 장경철 역, 『기독교 조직신학개론』(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49. 폴 틸리히의 계시론은 이미 유장환,“파울 틸리히의 계시론 연구”,『한국

기독교신학논총』43집 (2006), 115-144에 언급된바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주-객

엿볼 수 있다.12)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상관관계”(correlation)라는 용

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통계표의 경우

처럼 다양한 일련의 자료들의 대응(correspondence)을 의미하고 둘째,

대극적인 관계의 경우처럼 개념들의 논리적인 상호의존성( l o g i c a l

interdependence)을 의미하며 셋째, 전체 구조 안에 놓여 있는 사물이

나 사건의 실제적인 상호의존성(real interdependence)을 의미한다. 틸

리히는 이러한 상관관계의 의미들을 의미 있게그의 신학에 각각 적용

한다. 먼저 제1부 이성과 계시에서 종교적인 지식의 중심적인 문제를

다룰 때 상관관계의 첫째 의미는 등장하는데 여기서 상관관계는 종교

적인 상징과 이 상징에 의해서 상징되는 것 사이의 대응의 의미를 가

지게 된다. 다음으로 제2부 존재와 신에서 신과 세상에 대한 진술, 예

를 들어 유한과 무한 사이의 상관관계를 결정할 때 상관관계의 둘째

의미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상관관계는인간적인 것을 지시하는 개념과

신적인 것을 지시하는 개념 사이의 논리적인 상호의존성의 의미를 가

지게 된다. 끝으로 종교적인 경험에 있어서의 신-인 관계를 결정할 때

상관관계의 셋째 의미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상관관계는 인간의 궁극적

인 관심과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 사이의 실제적인 상호의존성

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세 번째의미의 상관

관계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종교적인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인간의 관

계는 상관관계이다. 말하자면, 신학의 주관과 객관 사이의 관계는 실제

적인 상관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비록 심연적인 본성 속에 있

는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을지라도 인간에 대한 자기현

현 속에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이 현현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의존되어

있다. 신과인간의 관계는, 따라서 이 관계안에있는인간과 신은모두

계시의 역사의 단계에 따라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발달의 단계에 따라

서 변화한다. 말하자면‘우리를 향한 하나님’과‘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이에는 상호의존성이 놓여 있다.”13) 이와 같은 실제적인 상관관계에

대해서 바르트는 신과 인간 사이의 모든 종류의 상관관계는 신을 어느

2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지만 그 신비의 현현 자체는 주관적인 성격과 객관적인 성격모두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계시는 항상 엄격한 상호의존

성 속에 있는 주관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사건이라고 본다.

“만일 누군가가 신비의 현현에 의해서 사로 잡히게 된다면 이것은 계

시사건의 주관적인 측면이다. 만일 계시의 신비가 누군가를 사로잡을

때 어떤것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계시사건의 객관적인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 발생

하지 않았다면 계시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어느 누구도

발생한 것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이 사건은 어느 것도

계시할 수 없을 것이다.”17) 이와 같이 계시 사건에는 반드시 객관적인

발생과 주관적인 수용이 포함되어야만한다. 말하자면 계시는 받아들이

는 측면이 없다면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주는측면이 없어도 실제

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결국, 신비는 객관적으로는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기적’의 견지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주관적으로는 때때로 사용해

온 ‘황홀경’의 견지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기적과 황홀경 이 두

용어는 모두철저한 재해석이필요한 용어들이다.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황홀경’( e c s t a s y )은 자신의 자아밖에 섬

(standing outside one’s self-脫我)이라는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

이 자신의 자아를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 정신의 비범한( e x t r a-

ordinary)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탈아(황홀경)는 이성의 부정이 아니

고 이성이 자신을 초월하여 있는 정신의 상태, 즉 이성의 주-객 구조

를 초월하여 있는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이성은 자신을 초월할 때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탈아적인 이성’은 여전히 이성이다. 물론 이

것은 비합리적인 또는 반합리적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유한한

합리성의 기본적인 조건인 주-객 구조를 초월한다.”18) 이처럼 계시의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59

17) 앞의책, 184.

18) 앞의책, 185.

이성을 파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며 또한 계시는 신비

한 하나님의 현현과 주관적인 황홀한 수용과 객관적인 기적적인 발생

이라는 삼중적인 차원 속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이성은 계시를 황

홀경과 기적 속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계시가 이성에 의해서 공허해

지지 않는 것처럼 이성은 계시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다.”15) 우리는

틸리히가 제시한 계시의 삼중적인 차원, 즉 신비(mystery), 황홀경

(ecstasy), 기적(miracle)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주-객의 분리를 극복

하고자 하는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신학을 명백하게엿볼수 있다.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 계시란 하나님의 현현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주-객을초월해 있는 신비이기에 계시는 신비의 현현이다.

말하자면, 계시는 주-객 구조 가운데 놓여 있는 주체나 객체의 현현이

아니고 주-객의 분열을 선행하여 있는 신비의 현현이다. 틸리히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신비의 주요 특징은 주-객의 관계를 선행하는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비의 경험을 일반적인 언어로 표현

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언어는 주-객 도식

에서 자랐고 주-객 도식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신비가 일반

적인 언어로 표현된다면 신비는 반드시 오해되고, 다른 차원으로 환원

되고, 세속화되고 말 것이다.”16) 이처럼 인식의 주-객의 관계를 초월하

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신비’는 그 정의상 계시속에서도 여전히 감추

어져 있는 것이기에 그것이 계시될 때조차도 그의 신비성을 상실할 수

없다. 따라서 계시는 신비를 해체하여 지식으로 만들지 않으며, 또한우

리의 일상적인 지식의 총체에, 즉 실재의 주-객 구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첨가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계시는 근

본적으로주-객 구조를 선행하는신비의 현현이기때문이다.

다음으로 틸리히에 따르면 신비의 현현은 주-객 구조를 선행하여

2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통일성의관점에서재구성하였음.

15) 폴 틸리히, 유장환역, 『폴틸리히 조직신학』I(2001), 194.

16) 앞의책, 180.

Page 1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 이런 점에서 기적과 탈아 사이의 이와 같은 엄격한 상관관계는 기

적을 묘사하는 말과 탈아를 묘사하는 말 사이의 교환을 가능하게 만들

고 있다. “탈아는정신의 기적이며기적은 실재의 탈아이다.”20)

결국, 계시, 즉 신비의 현현은 객관적인 발생(기적)과 주관적인 수용

(황홀경)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계시는 신비, 기적, 황홀

경의 삼중적인 차원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계시는 주-객

을 선행해 있는 신비의 현현이다. 개인의 내면세계나 우주의 미지세계

나 역사의 운명적인 법칙의 현현은 계시가 아니다. 다음으로계시는 기

적(객관적인 발생)을 통해서, 말하자면 실재의 초월을 통해서 존재의

신비의 힘과 의미가 전달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실재가 자신을 초월

하여 존재의 신비의 힘과 의미를 전달하는 객관적인 발생이 없다면 계

시란 있을 수 없다. 끝으로 계시는 황홀경(주관적인 수용)을 통해서, 말

하자면 정신이 자신의 초월 속에서 존재의 신비와 재결합됨으로써이루

어진다. 즉, 정신이 자신을 초월하여 존재의 신비와 재결합되는 주관적

인 수용이 없다면 계시란 있을 수 없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계시는 주-

객을 초월해 있는신비의 현현으로서객관적으로는기적을 통해서(객관

의 초월) 주관적으로는 황홀경을 통해서(주관의 초월) 발생하는 주-객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61

20) 앞의 책, 194. 틸리히에 따르면 탈아도, 기적도 인식적인 이성의 구조를 파괴하지 않

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분석과 심리학적인, 물리학적인 연구

도 가능한 것이며 필요한 것이다.“학문적인 연구는 아무런 제한없이 진행될 수 있

으며또한 진행되어야만한다. 이 연구는 계시와 탈아와 기적에 대한미신적인 해석

과 마성적인 해석을 제거할 수 있다. 과학과심리학과 역사학은 참된계시의 초자연

적인왜곡현상들과맞서 싸우고 있는 신학의 연합군이다. 과학적인 설명과 역사적인

비판은 계시를 보호한다. 물론 이들은 계시를 해체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는 과

학적인분석과 역사적인분석이 도달할 수 없는실재의한 차원에속해있기때문이

다. 계시는 이성의 깊이와 존재의 근거의 현현이다. 계시는 실존의 신비를 지시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을 지시한다. 이것은 과학과 역사학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

는 계시의 조건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더욱이 이것은 과학과 역사학이 그 자신

에게의존하도록 만들 수 없다. 실재의 여러 차원들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가능하

지 않다.”

주관적인 차원인 탈아는 신비에 붙잡힌 주관이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주-객 구조를 초월해 있음을지시한다.

다음으로 기적(miracle)이란 말은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과 모순되는 사건의 발생을 의미한다. 이처럼“놀라움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기적의 본래의 의미는 자연적인 구조의 파괴를 초래하는 초

자연적인 개입이라는 나쁜 의미에 의해서 왜곡되어 왔다. 그러나 계시

의 객관적인 차원인 기적은 정신의 요소들의 특별한 배열과 실재의 요

소들의 특별한 배열 사이의 상관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서 결코

사건들의 자연적인 구조의 파괴를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틸리히에

따르면 참된 기적은“첫째, 실재의 합리적인 구조와 모순되지 않으면서

도 우리를 뒤흔드는 놀라운 사건이며, 둘째, 존재의 신비를 지시하고있

는 사건으로서 존재의 신비와 우리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건이며, 셋째, 탈아적인 경험속에서 표적-사건으로서 받아들여진 사

건이다.”19) 따라서 우리를 뒤흔들 수 있는 놀라움의 성격을 가지고 있

지 않은 것은 계시적인 힘이 없는 것이며, 존재의 신비를 지시하는 것

없이 우리를 뒤흔드는 것은기적이 아니고 마법이다. 그리고 탈아속에

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는 것은 현실적인 기적이 아니고 단지 기적

신앙에 대한 보도일 뿐이다. 그리고 기적은 그것이 표적-사건이 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기적을 신앙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

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적은 탈아와 엄격한 상

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용어로서 탈아와 마찬가지로 신비에 붙잡혀 있

는 객관이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주-객 구조를 초월해 있음을 지시한

2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9) 앞의 책, 193. cf.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 G r a n 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3), 67-68. 칼 바르트의 기적이해도

틸리히의 기적 이해와 유사하다.“기적 이야기들은 근본적으로 놀라운 이야기들로서

무엇보다도 형식적으로는일종의 알림의 표징(alarm signal)으로서 기능한다. 성서기

적이야기들이 진지하고 적합한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때 이 이야기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지시하는 표징으로서 그렇게 하려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인정되고있는자연적질서의 파괴로서 그렇게하려는 것은아니다.”

Page 1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 사실의 수용이다. 따라서 틸리히는‘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라

는 이름은 예수라는 성과 그리스도라는이름으로 구성된 한 개인의 이

름이 아니라, 그것은AD. 1년에서30년 사이에 나사렛에서 살았던 어

떤 사람의 이름(사실)과“그리스도”라는 칭호(수용)의 결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실제적인 예전의 많은 경우

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과 이름의 결합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은“그리스도로 불리운 예수”(Jesus who is called the

Christ) 또는“그리스도인 예수”(Jesus who is the Christ) 또는“그리스

도로서의 예수”(Jesus as the Christ) 또는“그리스도 예수”(Jesus the

Christ)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기독교가 근거하고 있는 예수 그

리스도의 사건은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수용의 통일성 위에 서 있

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역사적인 사실인 동시에 신앙

적인 수용의 결과이다. 이것은 틸리히의 기독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틸리히에 따르면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수용, 두 측

면 중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무시된다면 기독교 신학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때문이다.“만일신학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지시하는사실을 무

시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신-인간성이 실존 속에서 나타났고 실존의

조건들에 의해서 정복당하는것 없이자신을 실존의 조건들에 종속시켰

다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만일 실존적인 소

외를 극복한 인격적인 삶이 없었다면 새로운 존재는 여전히 탐구와 기

대에 불과했을 것이고 시간과 공간 속의 한 현실일 수 없었을 것이다.”23) 이처럼 만일 신학이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한다면 신학은 영지주의적

가현설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예

수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인 것 또한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주관

적인수용이 없었다면그리스도는그리스도 곧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의

새로운 존재의 현현일 수 없었을 것이다.“만일예수가 그의제자들에게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63

23) 앞의책, 155.

통일적인 사건이다. 말하자면, 계시는 객관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주관

적인 사건으로서 계시사건 속에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상호 통일성이

존재한다.“계시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

이에, 즉 기적과 황홀경 사이에 상관관계가있지않으면안 된다.”21)

3. 기독론과관련하여

1) 예수그리스도의이름(person)

기독교의 토대는 무엇인가? 역사의 예수인가? 아니면 신앙의 그리

스도인가? 이 물음은19-20세기 신학적 논쟁의 주된 주제였다. 19세기

역사적 예수연구는 역사적 예수 위에 기독교를 세우고자 했고 반면에

20세기의 신정통주의는신앙의 그리스도의 위에기독교를 세우고자했

다. 이 논쟁은 오늘날도진행되고있는심각한 주제이다. 이와관련하여

틸리히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토대의 통전성을 훼손시키는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주-객 통일성에 기

초하여 해결책을제시한다.

먼저,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분석하여 기독교가 근거

하고 있는“예수 그리스도”사건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 h i s t o r i c a l

fact)과 주관적인 신앙적인 수용(believing reception)으로 구성되어 있

다라고 주장한다.“기독교는‘예수’라고 불리운 인간의 탄생에 의해서

가 아니라 그의제자들 중의하나가 그에게‘당신은그리스도입니다’라

고 말하는 순간에 탄생했다.”22)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는 두 측면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나사렛의 예수”라고 불리우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였던 사람들에 의한

2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1) A. J. Mckelway, The Systematic Theology of Paul Tillich (London: Luttherworth

Press, 1964), 81-82.

22) 폴 틸리히, 유장환역, 『폴틸리히 조직신학』I I I (서울: 한들출판사, 2005), 153.

Page 1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행위 속에서 인간의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한 요소

로서는 제거된다. 그러나 이 신적인 행위는 인간이 반응하여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죄의 제거를 받아들일 때만, 즉 죄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이 주시는 화해를 받아들일 때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속죄

는 필연적으로 객관적인 요소와 주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속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신적인 행위(객관적 요소)와 인간적 행위

(주관적 요소) 모두가 필수적이다.”26)

이와 같은틸리히의주-객 상관적인속죄 이해는 주관이나 객관어

느 한 쪽에 치우쳐 있는 전통적인 속죄론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틸리히는 교회사의 대표적인 속죄론들, 즉 오리겐의 속죄론, 아벨라드

의 속죄론, 안셀름의 속죄론의 장단점을 분석한 후에 참된 속죄론은

주-객 통일적인속죄론임을제시한다.27)

먼저, 오리겐(Origen)의 속죄론은 철저하게객관적인 속죄론이다. 오

리겐의 속죄론은 일반적으로‘우주적 갈등론’또는‘승리자 그리스도

론’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속죄론에 따르면 죄와 자기 파괴의 속박

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사탄이 속아 넘어간 하나님과 사탄과 그리

스도 사이의 거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힘을 부여받았지만 사탄은 무죄한 자에 대해서 이 힘을 휘두를 수 있

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와

함께있는 자들에 대한그의 지배력은파괴되었다. 이러한 오리겐의속

죄론은 악의실재와 세력을 강조한 점, 하나님의 승리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점, 하나님의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점 등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고, 반면에 예수의 인성을 단지 악의 세력을 속이기 위한 술수로만

축소한 점, 신자들을 우주적 전쟁의 방관자로 만든 점, 우리의 삶과 역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65

2 6 ) L. Gordon Tait, The Promise of Tillich (New York : J.B. Lippincott Company,

1971), 69.

27) 폴 틸리히, 유장환 역, 『폴틸리히조직신학』I I I (2005), 261-165.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그 다음의 모든 세대들에게 그리스도로서 깊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면, 나사렛의 예수로 불리운 사람은 아마도 역사적

인, 종교적인 중요한 인물로서만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24) 이처럼 만

일 신학이 신앙적 수용을 무시한다면 그리스도는 예비적인 계시에 속

하였을 것이고, 아마도 계시의 역사의 예비적인 단편에 속하였을 것이

다. 결국, 틸리히에 따르면 기독교가근거하고있는예수그리스도는역

사적인 객관적인 사실과 신앙적인 주관적인 수용의 결과로서 객관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사건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객관적인

역사적인 사실이나 주관적인 실존적인 신앙 어느 한쪽 만이아니라 객

관적 사실과 주관적 수용, 이 두 측면의 통일성 위에 세워져 있는것이

며, 이 두 측면의 주-객 통일성만이 기독교가 근거하고 있는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을 창조할 수 있는것이다.

2) 그리스도의 사역(work)

다음으로, 틸리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주-객 통일성의

신학을 예시해 준다.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사역은‘속죄’(atonement)이

다. 속죄란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속죄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가 소외의 상태 속에서 새로운 존재에 의해서 사로

잡힌 사람들에게 끼친 효과에 대한 기술이다.”25) 이 정의에 따르면 속

죄의 과정은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한 측면은 객관적인것, 즉 속죄의

효과를 가져오는새로운 존재의 나타남이고, 다른한 측면은 주관적인

것, 즉 속죄의 효과 아래에 있는 인간에게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정의

의 의미에 볼 때, 속죄는 항상 객관적인 사건인 동시에 주관적인 사건

이요, 신적인 행위인 동시에 인간적인 응답이다. 말하자면, 신적인 속죄

2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4) 앞의책, 156.

25) 앞의책, 260.

Page 1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점이 놓여있다. 틸리히가 지적하듯이주관적인 응답만으로는죄책에

대한 불안과 형벌에 대한 감정을 제거할 수 없기때문이다.“침해된 정

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만으로는 회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

이 정의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나약하고 감성적인 것이 되기때

문이다.”30) 이처럼 하나님의 정의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하나님의 사랑

의 메시지는 인간에게 선한 양심을 줄 수 없다. 말하자면, 진정한 속죄

론에는 주관적인 응답 이전에 정의의 하나님의 객관적인 요구가 전제

되어있지않으면 안 되는것이다.

끝으로, 안셀름( A n s e l m )의 속죄론은 압도적으로 객관적인 유형의

속죄론이다. 안셀름의 속죄론은 일반적으로‘만족설’로 일컬어지고 있

다. 이 속죄론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은 중세의 영주와 농노 사이의

관계로 이해된다. 어떤 종류의 불순종이든 그 행동은 영주를 모독하는

것이기에 보상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어

보상해야만 하는데 하나님께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있는 만족은 무한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만족을 제공해야 하는데 오직하나님만이 이 만

족을제공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 그리

스도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그 만족은 이루어졌고 그 결

과 죄인들은 용서를 받았다. 이러한 안셀름의 속죄론은 기독교신자에게

죄에 대한 깊은 의식을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해서 감당된 형벌의 불가피성을 의식하게 해주는 심리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틸리히에 따르면 안셀름의 속죄론도 명백

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안셀름의 속죄론은 하나님을 자

신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하고 화해되기위해서는 누군가

가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은화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67

30) 263. cf. 다니엘 L. 밀리오리, 장경철 역,『기독교 조직신학 개론』(1994), 226. 밀리오

리에 따르면 도덕적 감화설의 단점은 이 이론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상화시킨다는

것과 이 세계의 악의 능력과 그 집요함을 과소평가한다는것과 예수를 단지 사람들

이 따라야할하나의좋은모범으로간주한다는것이다.

사에 아직도 존재하는 악과 죄의 세력의 지속성을 부인한 점 등을 단

점으로 가지고 있다.28) 특히, 오리겐의 속죄론은 인간과의 관계가 완전

히 부재한 것처럼 보인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우

주적인 드라마가 인간의 머리위에서 펼쳐지고 이 드라마에 대한 보도

가 인간이 악마의 세력으로부터해방되었다는 확실성을 인간에게 제공

해 주고 있다. 그러나 틸리히에 따르면 이것이 오리겐의 객관적인유형

의 속죄론의 참된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없

었다면, 즉 실존적인 소외의 극복 경험이 없었다면, 승리자 그리스도의

상징은 바울에게서도오리겐에게서도결코생겨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악마의 세력들에 대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승

리를 노래하는 바울의 찬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이 경험을

악마의 세력들과 연관되어 있는 상징에 적용하는 것보다, 그 결과로서

악마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상징에 적용하는 것보다 선행하고

있다.”29) 이처럼 오리겐의 속죄론은 외면적으로는 객관적인 속죄론이었

지만그 내면에는주관적인성격이 내포되어있었다.

다음으로, 아벨라드(Abelard)의 속죄론은 속죄 과정의 주관적인 측

면을 강조하는 속죄론이다. 아벨라드의 속죄론은 일반적으로.‘도덕적

감화설’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속죄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게 엄청난 사랑을 부어주어 우리가 경이와 감사 가운데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어 주신다. 말하자면, 십

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진노가 아니라 사랑이 최후의 말이라는 것을 확신케 하는 응

답적인 사랑을 인간 안에서 각성시켜 준다. 이처럼 아벨라드의 속죄론

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응답을 강조하는 주관적인

유형의 속죄론이다. 그런데 바로 이 주관성에 아벨라드의 속죄론의 문

2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8) 다니엘L. 밀리오리, 장경철역, 『기독교조직신학개론』(1994), 224.

29) 폴 틸리히, 유장환역, 『폴틸리히 조직신학』I II(2005), 262.

Page 1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결국, 속죄는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 인간의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

는 주-객의 통일적인 사건이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서(in) 자유롭게 고난에 참여하여 새로운 현실을 가져왔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에 십자가를 통해서(through) 자유

가운데 참여함으로써실존적인소외의 죄를극복할 수 있는것이다.34)

3) 구원의 과정(process of salvation)

그렇다면 구체적인 속죄, 즉 구원의 과정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가? 이제까지 구원의 과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의 강조에 의해서(객관 강조-신정통주의신학), 또는 인간의 자율

적인 행동의 강조에 의해서(주관 강조-자유주의신학), 또는 칭의를 제

외한 중생과 성화에 대해서만 주-객 상관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

다.35) 하지만 틸리히는 구원의 과정에 대한 논의 속에서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주-객 통일성의 신학을 결정적으로

제시한다. 전통적으로 구원의 과정은 중생과 칭의와 성화로 설명되어

왔다. 틸리히는 속죄가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 인간의 참여를 뜻한다는

관점에서 중생은 하나님의 참여에 참여하는 것이고, 칭의는 하나님의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69

34) 여기에서“대리적인 고난”(substitutional suffering)이란 용어가 평가될 수 있다. 이

말은불행한 용어로서 신학에서는 사용되어서는안 된다. 하나님은 실존적인 소외의

고통에 참여하신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피조물의 고통에 대한 대리가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인간의 고난의 대리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고통은 참여와

변화에 의해서 피조물의 자기파괴를 극복하는 힘이다. 하나님의 고난의 성격은 대리

가 아니라자유로운참여이다.

35) 김흥규,“교회사에서의 존 웨슬리의 위치”,『한국조직신학논총』제13집(2005), 139-

170. “회개는 물론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지만 죄를 깨닫게 하

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하나의 인간적인 응답이며, 반면에 의인화는 전적으로 하

나님 한분의 특권일 뿐이다.”,“인간의 내적 기질을 변혁시키시는 성화의 과정은 하

나님의성화시키는은혜에대한인간편에서의동참으로이루어집니다.”

해의 객체가 아니라 화해의 주체이고 중보자는 구원의 근원이 아니라

구원의 통로이다.“기독교의 메시지에 따르면 영원히 화해되어 계신 하

나님은 우리가 그와 화해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를 그와 화해시키신다. 하나님은 항상

행위하는 분이며 중보자는 그가 행위하는 통로이다.”31) 또한 안셀름의

속죄론에는 속죄의 과정의 주관적인 측면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근본적인 문제점도 지니고 있다.“안셀름의 속죄론에는 속죄의 과정의

주관적인 측면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보다 근

본적인 비판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토마스는 기독교인의몸의머

리인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것에 대한 기독교인의 참여의 사상을 덧

붙였다. 대리의 개념을 참여의 개념으로 대체한 것은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보다 적절한 속죄론의 길을 여는

것같이 보인다.”32)

이런맥락에서틸리히는주-객 통일적인 속죄론만이전통적인속죄

론의 유형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참여적인주-객 통일적인속죄론의원리들을제시한다.33)

첫째, 속죄의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조된다. 둘째, 하나님의화

해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보복적인 정의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존재

하지않는다. 셋째, 하나님에 의한죄와형벌의 제거는 실존적인 소외의

현실과 깊이를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넷째, 하나님의 속죄의 활동이

실존적인 소외와 그의 자기 파괴적인 결과들에 대한 그의 참여로서 이

해되어야만 한다. 다섯째, 실존적인 소외에 대한 하나님의 참여가 그리

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여섯째, 인간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존

재인 새로운 존재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죄의 행위의 나타

남에참여할 수 있다.

2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1) 폴 틸리히, 유장환역, 『폴틸리히 조직신학』I I I(2005), 259.

32) 앞의책, 264-265.

33) 앞의책, 265-269.

Page 1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새로운 존재라는 객관적인 실재에 붙잡혀만 하고 동시에 주관적인 참

여 속에서 새로운 존재를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중생은 객관적

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전 존재가 주관적으로 참여

하는주-객 통일적인사건이다.

다음으로, 칭의(justification)는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 참여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기독론적으로 말하면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는 것이다.38)

틸리히에 따르면 칭의도 중생과 마찬가지로 먼저 객관적인 사건이고

그 다음에 주관적인 받아들임이다. 먼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칭의는

“하나님이 범죄에 의해서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자들을 소외되지 않

은 자들로서 받아들이며, 이들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존재 안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통일성 안으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행위이다.”39)

이런 점에서 칭의는 조금이라도 인간에게 의존하고 있지 않은 하나님

의 행위요, 받아들일 수 없는 자를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사

실,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의 전체 메시지에 있어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simul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71

38) cf. 폴 틸리히, 유장환 역,『폴틸리히 조직신학』I I I(2005), 270-271. 틸리히에 따르면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칭의가 먼저인지 아니면 중생이 먼저인지가 논의되었었다.

“루터는 칭의를 강조한 반면 경건주의와 감리교는 중생을 강조했다. 중생은 현실적

인 변화로 정의될 수 있다. 만일 중생이 이처럼 정의된다면, 중생은 성화와 동일한

것이며 당연히 두 번째에 위치해야만 한다. 하지만 중생은 또한 새로운 존재에 대한

참여로서, 즉 아무리 그것이 단편적인 것일지라도 새로운 존재의 객관적인 힘에 대

한 참여로서 정의될 수 있다. 만일 중생이 이처럼 정의된다면 중생은 칭의보다 선행

한다. 왜냐하면 칭의는 신앙 곧 하나님의 현존에 의해서 사로잡힌 상태를 전제로 하

기 때문이다. 신앙곧 칭의하는 신앙은 비록 그것이 인간 안에서 일어날지라도 인간

의 행위가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영의 역사이다. 이 하나님의영의 힘은 그리스도

안에, 개인 안에, 교회 안에, 새로운 존재를 창조한다. 멜랑히톤이 신앙의 행위 다음

에 하나님의 영의 수용을 위치시켰을 때 그것은 개신교 신학의 함정이었다. 그 때

신앙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참여 없이도 가능한 인간의 지적인 행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참여를 뜻하는 중생을 칭의 앞에 위치시켜야만

한다.”

39) 앞의책, 271.

참여에 대한 참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성화는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

참여에 의해서 변화되는것이라고주장한다.36)

먼저, 중생(regeneration)은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 인간의 참여이다.

기독론적으로 말하자면새로운 존재에 참여하는것이다. 틸리히에따르

면 중생은 만물의 보편적인 상태로서 그리스도가 가져온 만물의 새로

운 상태, 새로운 시대를 뜻한다.“화해, 재결합, 부활-바로 이것이 새로

운 창조, 새로운 존재, 그리고 새로운 상태이다. 우리는 그것에 참여하

고 있는가? 기독교의 메시지는기독교가아니라 새로운 현실이다. 만물

의 새로운상태가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숨겨져 있기

도 하고 눈에 보이기도 하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당신을 사로잡게 하라.”37) 따라서 개인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만

물의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야만 한다(객관성). 여기서 개인은 만물의

새로운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그 자신이 만물의 새로운 상태에 참여하

게 되고, 그 참여를 통해서 신앙과 자기포기와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

어나게 된다(주관성). 이처럼 중생에 있어서는 새로운 존재라는 객관적

인 실재가 새로운 존재에 대한 주관적인 참여보다 선행한다. 그러므로

중생(또는 회개)은 개인의 주관성에 호소하여 감정적인 반응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중생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의 변화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 속으로

이끌려져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회개의 메시지는 무엇보다

도 먼저각 사람이 돌아가야 할 새로운 현실에 대한 메시지이며, 이 새

로운 현실의 빛 속에서 각 사람은 옛 현실, 즉 자신이 이제까지 그 속

에서 살아왔던 실존적인 소외 상태를 떠나야만 한다. 말하자면, 개인은

2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6) 폴 틸리히, 유장환역, 『폴틸리히 조직신학』I I I(2005), 269-274.

37) Paul Tillich, New Being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5), 48. 중생의 상

태에 대한 전통적인 용어는 새로운 탄생, 중생, 새로운 피조물이다. 명백하게, 새로운

존재의 특징들은 소외의 특징들의 정반대이다. 즉, 새로운 존재의 특징은 불신앙이

아니라 신앙이고, 자기높임이 아니라자기 포기이고, 욕망이 아니라사랑이다.

Page 1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것을받아들이는 것을묘사해 준다. 하지만 성화는 하나의 과정이 그것

이 시작되는 사건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처럼 이 둘로부터 구별되는 것

이다. 성화란 무엇보다도“성도들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져 있음 곧

새로운 존재의 힘에 의해서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으로 받

아들여졌음을 의미할 수 있다.”41) 말하자면, 성화는 새로운 존재의 힘이

교회의 안과 밖에 있는 개인들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

다. 여기서 개개인과 교회, 종교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 이 모두가

새로운 존재의 현실성인하나님의 영의성화시키는사역의 대상들이다.

따라서 성화는 개인의 내면세계나 정신세계의 고양이 아니라 객관적으

로는 새로운 존재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져서 새로운 존재의 힘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이고 주관적으로는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현실성인 성화시키는 하나님의영을경험하는 과정이다. 주관적

인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화는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영

에 대한 의식이 증가하는 과정으로서 이 과정은 의식과 자유와 관계와

초월이 증가하는 삶의 과정이다.42) 결국, 성화도 중생과 칭의와 마찬가

지로 주-객 통일적인 사건으로서 객관적으로는 새로운 존재의 힘에

붙잡혀서 변화되는 가운데 주관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새로운 존재의

현실성인 하나님의 영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전 영역 속에서 변화되고

성숙해져가는과정이다.

I I I. 나오는말

신학의 역사는 객관성의 신학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끊임 없는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73

41) 앞의책, 274.

42) 폴 틸리히, 유장환 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V (서울: 한들출판사, 2008), 231-236.

틸리히에 따르면 생명의 성화를 결정하는 원리는 의식의 증가, 자유의 증가, 관계의

증가, 초월의증가이다.

peccator, simul justus)이라는 루터의 역설적인 표현에 나타나 있는 것

처럼“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성격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죄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그의

소외나 자기 파괴의 상태에서 눈을 돌려서 하나님의 칭의하시는 행위

를 보게 해준다. 이처럼 인간의 어떠한 공로도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

는 루터의 사상은 멜랑히톤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법정적인”칭의론을 형성했다. 그는 하나님은 단지 자신이 그렇게 하

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풀어주는 재판장

과 비교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관적인 측면 곧 받아들임을 배제한 채

칭의론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는것은 아무 것도없다. 하지만 인간은 바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명료하게주장

한다.“인간은 그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곧, 그는

받아들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40) 결국 칭의는 객관적으로는 받아들일

수없는 자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행위요 주관적으로는자신이 받아

들여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행위로서주-객 통일적인사건이다.

끝으로, 성화(sanctification)는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참여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이다. 기독론적으로말하면 새로운 존재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중생과 칭의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중생과 칭의는 모두소외된 자의 재결합에 대한 묘사이기 때

문이다. 말하자면, 중생은 현실적인 재결합을 뜻하고, 칭의는 이 재결합

의 역설적인 성격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 둘은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2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40) 앞의 책, 272. cf. Paul Tillich,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s, edited by Carl E.

Braten (New York: Harper & Row, 1968), 246-247. “루터에게 있어서신앙은 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실 때 그 신을 답아들이는 행위이다. 그는 이런 유형의 신앙을

역사적 신앙과 구별했다. 신앙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의 현존인 하

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강조점은 신앙의 수용적인 성격에 있다. 즉, 신앙

이란‘아무것도하지않고단지받아들이기만’하는것이다.”

Page 1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와 마찬가지로 주-객 통일적인 사건으로서 객관적으로는 새로운 존

재의 힘에 붙잡혀서 변화되는 가운데 주관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새

로운 존재의 현실성인 하나님의 영에참여함으로써 삶의 전 영역 속에

서 변화되고 성숙해져가는과정이다. 이처럼 틸리히의 핵심적인신학사

상을 볼 때 틸리히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주관과 객관의 상호의존을 통

해서 주-객 분리를 극복한 주-객 통일성의 신학이요, 객관성의 신학

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중재하고 화해시킨 주-객 통

일성의 신학이다.

오늘날도17세기의 객관성의 신학과19세기의 주관성의 신학은 다

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객관성의 신학의 후예는 역사의 객관적

인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역사주의 신학’이고, 주관성의 신학의 후예

는 인간의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있는‘경험주의 신학’이다. 이들

은 각각이전의 신학적인 경향들이 노출한 문제점을 반복하고 있다. 한

쪽은 사실에 토대를 둔 신학의 형식화를 초래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인간의 경험의 한계 내에정초된 신학을 초래하고 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는 객관성의 신학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학의 근본적인 모순을 분석

해주었고 또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도 제시해 준 틸리히의 신

학은 신학사적인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틸리히의 신학사상은 비

록 그가죽은지 반세기 가까이 되었지만여전히 주-객을 초월해 있는

신비를 지시하는 참된 신학을 구상하려는 우리의 신학적인 비전에 좋

은 길잡이가되고있다.

주제어

주-객 통일성, 상관관계의방법, 계시, 속죄, 구원의과정

S u b j e c t-Object Unity, Method of Correlation, Revelation,

Atonement, Process of Salvation

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75

갈등의 역사였다. 한 예로17세기에는 객관성의 신학이 지배했고, 19세

기에는 주관성의 신학이 지배했다. 그 결과20세기 신학의 대표자들은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예를 들

어, 칼 바르트는 주-객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적인 타자되는 하나

님의 인식에 있어서1차적 신인식과2차적 신인식을 구별했다. 그리고

루돌프 불트만은 우리의 실존으로부터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주-객 분

리를 넘어서 계신 하나님을 대상화하지 않고 비대상적으로 말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폴 틸리히는 주관과 객관사이의 분열을 초월해 있는

신비적인 선험성에 신학의 토대를 둠으로써 경험적인 귀납의 학문으로

서의 신학이나 형이상학적인 연역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특히, 틸리히는 그 누구보다도 신학의

전 체계 속에서 철저하게 주-객 통일성의 신학을 확립했다.43)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틸리히의 신학 방법은 메시지(객관)와 상황(주관)을 상

호 연관시켜서 초자연주의적인 객관적인 신학 방법과 자연주의적인 주

관적인 신학 방법 사이의 대립, 즉 주-객 이원론적인 분리를 극복하고

자 한 주-객 통일성의 방법론이다. 그리고 계시는 주-객을 초월해 있

는 신비의 현현으로서 객관적으로는 기적을 통해서(객관의 초월) 주관

적으로는 황홀경을 통해서(주관의 초월) 발생하는 주-객 통일적인 사

건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사역인 속죄는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 인간의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주-객의 통일적인 사건이다.

끝으로, 중생은 객관적으로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전 존

재가 주관적으로 참여하는 주-객 통일적인 사건이고, 칭의는 자신이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을받아들이는것, 즉 하나님의 참여에 대한참여

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주-객 통일적인 사건이고, 성화도 중생과 칭

2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43) cf. 김동건,『현대신학의흐름-계시와 응답』(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592. “틸리

히는 신을 대상화시키지 않기 위해하나의 존재로 간주하지 않았다. 틸리히의 이 시

도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이고 그의 신학 구조 안에서는 주-객 이원화가 거의 극

복된다.”

Page 1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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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환, 폴 틸리히의주-객 통일성의 신학 277

접 수 일 2011년 3월 29일

심사 (수정일) 2011년 4월 26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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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fication is the subject-object uniting event in which we accept that we

are accepted. Sanctification is the subject-object uniting life-process

in which the power of the New Bing objectively grasps us and

subjectively transforms us in all realms of life.

In conclusion, Tillich’s theology is a subject-object uniting

theology mediating between an objective-type theology and a sub-

j e c t i v e-type theology. Tillich’s theology, although he died 56 years

ago, is still a good guide to show us the way to point the divine

mystery transcending the object-subject structure.

유장환, 폴 틸리히의 주-객 통일성의 신학 279

Paul Tillich’s Subject-Object Uniting Theology

Yu, Jang-Hwan

Associate Professor

Mokwon University

Daejeon, Korea

When we survey the history of theology, we find that it was the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an objective-type theology and a sub-

jective-type theology. For example, in the 17th century an objective-

type theology was overwhelming and in the 19th century a sub-

j e c t i v e-type theology was overwhelming. As a result, great theo-

logians of the 20th century tried to overcome the conflict between

subjectivism and objectivism.

This can be proved in the case of Paul Tillich(1886-1 9 6 5 ) ,

because Tillich constructed his theological system on the base of a

subject-object uniting theology. According to Tillich, the method of

correlation is the subject-object uniting methodology in which the

conflict between supranaturalistic method and the naturalistic method

is subsided. Revelation is the subject-object uniting event in which

the manifestation of the mystery appears objective in terms of what

traditionally has been called ‘miracle’ and subjective in terms of what

traditionally has been called ‘ecstasy’. Atonement of Christ is the

subject-object uniting event in which atonement is accomplished by

human participation in the divine participation. Regeneration is the

subject-object uniting event in which we subjectively take part in the

objective reality, namely the New Bing in Jesus as the Christ. Justi-

2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유대교와그리스도교의만남

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교수)

I. 들어가는말: 문제제기와방법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학계는 특별히 북동 아시아권 종교문화와의

만남과 대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본질적 문화신학을 추구해 왔다.

그 가운데 불교, 유교, 도교, 무교(巫敎), 동학과의 대화가 두드러진다.

그것은19세기 말에 들어와20세기에 널리 퍼지게 된 복음을 한국의

종교적 콘텍스트에 변증하거나, 우리의 것으로 토착화해야하는신학적

및 선교적 필요성이 시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대한 학문적 결실

은 매우 폭넓게 확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종교신학’이란 새로운 영

역으로까지심화되고있다.

이러한 때 우리에게 또 다른 종교문화와의 만남을 향한 과제가 주

어졌음을 직시해야 될 것이다. 즉,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자국에만

제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동 아시아권을 넘어 전 세계의 민족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며 그 가운데 교회를 세우는 제2의 선교 대국으

로 이미 성장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한국교회는 힌두교, 무슬림교,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81-305

Page 1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기 전에 먼저 유대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만남의 가능성

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일 자체가 유대교가 추구하는“사랑의

실천”에 참여하는할라카적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유대교의 신앙과 삶을 결정짓는 해석학적 원리로 볼 수 있

는 할라카와 아가다가 지니는 각개의 특징과 이들 사이의 관계를 세

랍비학자들의 연구에 기초하여 먼저고찰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서 유대교 신학의 형성 동력을 확인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유대교의

해석학적틀이 그리스도교의 자기 이해를 위해서도 신학적으로 정당히

수렴될 수 있으며, 바로그 자리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서로 만날

수 있는가능성에대해서 논하고자한다.2)

I I. 유대교의할라카와아가다전통

할라카와 아가다 전통은‘타나크’라 불리는 유대교 성서로부터 시

작해서 미쉬나, 탈무드, 미드라쉬 등 유대교의 경전에 해당되는 모든

문헌들 가운데 발견된다. 문헌에 따라 다르지만, 예를 들어 미쉬나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83

keiten und Differenzen Gemein in der Wirkungsgeschichte: ein Dialog mit Papst

Benedikt XVI (Nordhausen: Verlag Traugott Bautz, 2008).

2) 한국신학계, 특히 조직신학 영역에서의 유대교와의만남은 아직극히미미한 상태다.

필자가 문헌 조사한 것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박창건(1983), “유대교에 있어서 영

이해”,『신학과 세계』제9집, 151-95; 이찬수(1995), “위르겐 몰트만이 보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사목』제194집, 80-93; 최성식(2003), “유대교의 신비주의 하씨디즘”,

한국종교학회 발표 논문(미간행); 정승훈(2004),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크바르트:

아우슈비츠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이경재(2005), “프로이드

의 관점에서 본 유대교와 기독교”,『신학과 세계』제54집, 384-401; 장호광(2006),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크바르트의 신학에서 나타난 유대교의 의미”,『조직신학논

총』제17집, 55-87; 최인식(2008), 『예수와 함께 걷는 유대교 산책』(부천: 예루살렘아

카데미); 폴 밴뷰런, 최인식 역(2010), 『이스라엘의예수, 교회의 예수를만나다』(시흥:

예루살렘아카데미).

유대교 등과 같은 종교문화와의 보다 적극적인 만남이 불가피한 시대

가 되었기 때문에 세계 종교와의 각론적인 대화를 시도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필자가 선택한 것은 유대교와의 대화이다. 유

대교와의 만남은 가까우면서도먼 것이그간의 역사로서, 그리스도교의

시작 당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등을 지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교

황 요한 바오로2세가1986년 로마에 있는 회당에 역사적인 방문을 했

을 때 십자현수를 몸에 지니고 들어갔었는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

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상황에서 십자현수와 함께 했던것은 적절

치 않은 행동이었다고 일부이스라엘 측의보도가 있었다. 십자가는 유

대인들에 가한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생각나게 하는 부정적 심벌로 작

용하고 있기때문이라는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교의편에서

도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박해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화해

의 복음이어야 할 십자가가 양대 종교 간의 만남이라는 상황에서는 서

로에게 박해로인한고난의 징표로만보이는 것이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과 대화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 왔으나,1) 필자는 그리스도교의 관점으로 접근

2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 유대교와그리스도교간의만남에 대한최근경향을 보기 위해서는아래의 연구를 참

고하라: Alan J. Avery-Peck/Jacob Neusner (ed.), Judaism and Christianity: New

Directions for Dialogue and Understanding (Leiden/Boston, Brill, 2009). 1세기부

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있어 왔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교섭을 신앙의 사회적,

문화적, 신학적 지평에서 다루면서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밝히고 있

다. Stuart Dauermann, Christians and Jews Together (Eugene: Wipf & Stock Pub,

2009). 다우어만은 신앙고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하

여 새로운 길들을 찾도록 촉구하고 있다. 독일어 권에서 나온 학문적 업적으로는

Strassburg의 Marburg대학 박사학위 논문이 눈길을 끈다. Klaus-Dieter Strassburg,

Die Trinitätslehre im jüdisch -christlichen Dialog ( N e u k i r c h e n-V l u y n :

Neukirchener Verlag, 2009); Ludwig Schneider, Israel als Herausforderung:

warum Israel für Christen so wichtig ist (Holzgerlingen: SCM Hänssler, 2009);

Winfried Döbertin, Das Judentum und der Jude Jesus aus Nazareth: Gemeinsam-

Page 1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곧 할라카 전통과 아가다 전통이다.

할라카(hklj; 걸음, walking)란 유대인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법

·규례·규범이다. 할라카는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정치·가정·경제의

현장에서이루어지는모든인간관계를다룬다. 종교법과 세속법 사이에

구분이 따로 없다. 유대교 종파의 차이는 결국 할라카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하스칼라8) 이후 랍비

유대교는 정통파·개혁파·보수파로 구분되어 존재해 왔는데, 그 기준

이 할라카에 대한 태도에서 나누어진다. 정통파 유대교는 할라카의 요

구사항을 철저히 지키며 어떤변경도 용납하지 않는반면, 개혁파 유대

교는전통적 실천 조항을 폐기하거나 새롭게 해석하는 데 자유롭다. 보

수파는 전통을 지키되 유기적 변화를 시도한다. 할라카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나, 그것들은 모두 할라카적 유대교 안에 포함된다. 곧

“하나님의 도(道) 위에 행하라”는 것이다.9) 주로 할라카적 해석을 시도

하고 있는 전승으로서는 팔레스틴 탈무드, 미쉬나와 성격이 유사한 토

세프타(Tosefta sufflement), 레위기 미드라쉬의 할라카적인 것만을 다

룬 시프라(Sifra)가 있다. 바빌론 탈무드는할라카적인것과아가다적인

것이모두 포함되어 있다. 미쉬나야말로 랍비유다에 의해 편집된 할라

카적구전의 집대성이라할 수 있다.10)

아가다(hdga, narration)는 법 조항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을 의도

하지 않는 모든 것들, 즉 역사적 사건들·야사·민담·전설·교훈 등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가르치고, 각성케 하는 이야기다. 아가다는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85

8) 유대인들은 유럽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살 것이 아니라 타민족과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던18세기 후반 유럽의 유대인들 가운데 일어났던 유대교 계몽주의

운동.

9) Harry A. Cohen, A Basic Jewish Encyclopedia: Jewish Teachings and Practices

Listed and Interpreted in the Order of Their Importance Today ( H a r t f o r d :

Hartmore House, 1965), 104f.

1 0 ) Martin S. Jaffe, Early Judaism (Upper Saddle River, N.J.: Simon & Schuster,

1997), 87.

(Mishnah)3)와 같은 문헌에는 할라카 전통이 지배적인 반면, 미드라쉬

(Midrash)4) 같은 문헌에는 아가다 전통이 지배적이고, 바빌론 탈무드

(Babylonian Talmud)5) 같은 경우에는 할라카 전통이 다소간의 우위를

차지하면서도 아가다 전통이 힘 있게유지되고 있는것을 볼 수 있다.6)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때 유대교의 할라카와 아가다 두 전통은 유대

교에핵심에 해당하는부분이다.

그렇다면 할라카와 아가다 전통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 특징은 무엇

인가? 사실 이러한 물음은 유대교 연구에서 가장 기초적 단계에 속하

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바른 이해의 여부에 따라 유대교에 대한

시각이 본질을 향할 수도있고 유대교 자체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킬 수

도 있기때문에, 끊임없이양대전통의실체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7)

유대교는 미쉬나와 미드라쉬를 토라와 타나크 혹은 그 이외의 전승

들을 편집하여 집대성할 때 분명한 해석학적 혹은 현실적 의도와 원리

를 가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원리에 따라 정밀하게 분류 구성되

었으며, 그에 따라 유대교 내에 해석학적 전통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2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 ) The Mishnah: A New Translation, trans. Jacob Neusner(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8).

4) Midrash Rabba. Bereshit: Genesis Rabbah - The Judaic Commentary to the Book

of Genesis. A New American Translation, trans. Jacob Neusner (Atlanta: Scholars

Press, 1985).

5) The Babylonian Talmud, trans. into English with notes, glossary and indices under

the editorship of I. Epstein. Introduction by the editor. vol. 1-18 (London: Soncino

Press, 1961).

6) Jacob Neusner, The Aggadic Role in Halakhic Discourse, vol. 1(Lanham, Md.: Uni-

versity of America, 2001), 29. “It is in the Bavli that Aggadah plays a formidable

role in Halakhic discourse. Indeed, only when we come to the Bavli, do we find a

clearer link between Halakhic and Aggadic discourse, even though by no means all

of the Aggadah plays a role in the Halakhic presentation.”

7) 할라카와아가다 전통에 대한유대교해석학에 대한필자의연구는 아래의 졸저를 참

고하라: 『예수와함께걷는유대교 산책』(시흥: 예루살렘아카데미, 2008), 324-58.

Page 1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으로써 교과서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할라카와 아가다의 특징을 비교

고찰한다.15) 유대교의 역동성과 경직성, 그 강인함과 부드러움의 실재는

바로 할라카적 유대교와 아가다적 유대교가 삶의 현장에서 충돌하거나

조화를 이루거나하는긴장가운데서 생기게 되는것이다.

할라카는 어둡고, 좁고, 무겁고, 고정적이고, 강인하며, 곧고, 안정적이

며, 직선적인 반면에, 아가다는 밝고, 열려 있고, 경쾌하고, 유동적이며,

유연하며, 휘어짐이 있고, 흔들림이 있고, 곡선적이다. 할라카는 정의를

앞세우며, 형식을 갖추며, 보이는 실체(몸)가 중요하며, 행동적이고, 무

감정적이며, 무색이며, 단선적인 반면에, 아가다는 자비가 우선이며, 내

용에 관심을 두며, 보이지 않는 실체(마음)가 중요하며, 새로움을 추구

하며, 색깔이 있으며, 다중적이다. 또한 할라카는 복종을 요구하며, 산문

적이고, 결정적 스타일을 추구하며, 지성 우선적이며, 긴장의 연속인 반

면에, 아가다는 자유가 우선이며, 시적이고, 비결정적이며, 감성의 표현

을 억제하지 않으며, 느슨하다. 할라카가 얼음처럼 단단하며 확고하다

면, 아가다는 물처럼 부드러우며 고정됨이 없다. 할라카가 견고한 반석

같다면, 아가다는 확 트인창공과 같다.

이처럼 서로 대조되는 두 전통이 유대교라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적

실체를 이루고 있다. 유대교가 역동적일 경우는 아가다가 할라카에 정신과

내용을 주고, 할라카는 아가다에 실천과방법을 주는때이다. 또한아가다가할

라카에 자유를 주고, 할라카가 아가다에게 확고한 행동을 하도록 구체적 현실

을 줄 때이다. 다시 말해서, 할라카로 연결되지 않은 아가다는 들뜬 감성

의 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아가다 없이 할라카만을 반복하는것은 경직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87

15) H. N. Bialik, “Halacha and Aggada,” Modern Jewish Thought: A Source Reader,

55-64. ed., N. N. Glatzer (New York: Schocken, 1977), 56-61. 이글은1944년에

나온 것과 같은 내용이나 축소되어 있다. H. N. Bialik, Halakhah and Aggadah,

trans. Sir Leon Simon, with an introductory note by Ephraim Broido (London:

Education Department of the Zionist Federation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944). 할라카와 아가다의 특징에 대한 비알릭의 명쾌한 정리는 두 전통에 대한 탁

월한안내가 될 것이다.

어원적으로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11) 첫째는 교육적 목적이 강한

데, 그것은“본문이 말하기를”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면서 텍스트에

강조를둔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주석적 아가다의모습으로 나타난다.12)

두 번째는“네 아들에게 말하라”(출 13:8)에 근거하여 전래하는 이야기

들을 구두로 전달하는 미디어의 기능, 즉 구전이 강조되는 아가다이

다.13) 대표적으로 미드라쉬가 주로 아가다적인 전통에 서서 히브리성서

를 해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창세기의 모든절들을 아가다 전통

에서 해설한 베레쉬트 랍바(Bereshit Rabba)와 아가다적 미드라쉬의

관점에서 레위기를 교훈적 설교로 해설한 바이크라 랍바( V a y i q r a

Rabba) 등이 있다. 미드라쉬야말로 토라에 대한 아가다적 해석과 해설

(homiletic interpretation)의 집대성이다.

먼저, 우리는 할라카와 아가다라는 두 해석학적 전통이 유대교 안에

서는 어떻게 이해되는 지, 그 특징들을 하임 비알릭, 사무엘 유멘, 요셉

하이네만의설명을통해서 파악코자 한다.

1. 하임나만비알릭(Hayyim Nahman Bialik)

2 0세기 초 당대 최고의 히브리 시인 하임 나만 비알릭( H a y y i m

Nahman Bialik, 1873-1934)이14) 분석하고 비교하여 시적으로 묘사함

2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1) D. Ben-Amos, Narrative Forms in the Haggadah: Structural Analysis (Ann Arbor:

Indiana University Ph. D. University Microfilm, 1967), 2f. 아가다의 어원은“말하

다”혹은“연결하다”. 아가다는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이어가야 하는 전통을 구두

로 소통하는것을포함한다.

12) Wilhelm Bacher, “Origin of the Word Haggadah (Aggadah),” Jewish Quarterly

Review 4(1892): 406-29. D. Ben-Amos, 앞의책, 2.

13) L. Zunz, Die Gottesdienstlichen Vorträge der Juden Historish Entwickelt. trans.

M. A. Jack, ed., H. Albeck (Jerusalem, 1954), 250. note 1.

14) H. N. Bialikand and Y. H. Ravnitzky(ed), The Book of Legends Sefer Ha-

Aggadah: Legends from the Talmud and Midrash(New York: Schocken, 1992).

Page 1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원 후 초기 몇 세기 동안 형성된 미드라쉼이라불리는 성서강해

의 역사는 소페림(Sopherim)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미드라

쉬 랍바, 미드라쉬 탄후마 등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한다. 이들의 공통

된 특징은 본문과 해석이 함께 병존하는데, 이는 미쉬나 형식과 다르

다. 미쉬나 형식에서는 해석의 결과물은 해당되는 본문 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두 번째 시대(Second Commonwealth, 530BCE-70CE)

를 지내는 동안 겪은 박해와 투쟁과 승리와 희망의 수많은 우여곡절과

타 문화와의 침략과 만남 속에서 경험한 것들은 모두 아가다를 구성하

는 요소들이되었다. 역사의 진행가운데 경험한 이스라엘의이러한 모

든 것들은 크게 두 방향, 즉 한 편으로는 성서해석으로연결되었고, 다

른 한편으로는 이야기, 잠언, 비유, 경제, 직장, 과학, 및 문학 등의 다양

한 형태들과 접목이 되어 제2성전이 파괴되기 전부터도 백성들 가운

데 회자되었다.20) 그러나 아가다가 꾸준히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매

안식일과 절기 때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전한 설교자들이 있었기 때문

이다.

아가다는내용적으로크게여섯가지종류로 분류가능하다.

첫째는 강해인데, 주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둘째

는 윤리로서 직유(直喩, simile), 위로, 우화, 비유, 속담, 수수께끼, 유머

등이다. 셋째는 종교로서 교의신학, 이단사상, 유대교 변증이 이에 속한

다. 넷째는 대중과학인데 의술, 마술, 천문학, 점성술, 수학 등이다. 다섯

째는 역사로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전설, 기적, 영웅들의 이야기, 성

서역사 이후의 보고들, 개인들의 자전적 이야기, 전통, 성서 인물들에

대한민담 등이다. 여섯째는 신화로서 하나님과 그의이름들에 대한명

상록, 우주, 창조, 하늘나라, 천사론, 마귀론, 및 게마트리아21) 등이 이에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89

Library, 1963), 28.

20) Umen, 30.

21) Gematria; 히브리어의알파벳이나타내는 숫자를통해그 단어가지닌뜻을풀어해

된 교조주의에로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성숙한 개인이나 공

동체에서는 그 가운데 언제나 할라카와 아가다의 통전성을 발견할 수

있다.16)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할라카에 집착함으

로써 아가다의전통을 배척해 버리는 결정적인 오류들을 범해왔다. 그

결과 역동적인 유대교를찾기가 쉽지 않게되었다. 토라의 할라카를 지

나치게 신성시함으로써문자적으로해석하여 신조로 삼거나, 반대로 토

라의 아가다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단순한 얘깃거리로 폄하해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들은 할라카가품고 있는시적광채를 보지못했

으며, 아가다 뒤에 숨겨져 있는 진리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17)

할라카와 아가다는유대교의 문헌을 구성하고 있는텍스트이면서 동시

에 규범이며 또한 해석학적 원리이기도 하며 문헌 편집의 카테고리이

기도 하다.18) 이상은 이미20세기 초 당대 최고의 히브리 시인 하임 나

만 비알릭에 의해밝혀진 할라카와 아가다의특징들이다.

2. 랍비사무엘유멘(Samuel Umen)

유멘(1917-1990)은 그의『바리새주의와예수』에서할라카와 아가다

는 바리새인들의 결실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할라카와 아가다

는 바리새파 유대교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 토라

해석이란 매우 단순한 일이었고, 이를 미드라쉬-토라라고불렀다. 대중

적으로는 짧게미드라쉬라했다. 넓게는 성서, 좁게는 토라에대한강해

(homiletic exposition)라 할 수 있는것이다.19)

2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6) H. N. Bialik, Halakhah and Aggadah, 61.

17) H. N. Bialik, Halakhah and Aggadah, 62.

18) 최인식,『예수와 함께 걷는 유대교 산책』(시흥: 예루살렘 아카데미, 2008), 328-30으

로부터 재인용.

19) S. Umen, “Halacha and Haggadah,” Pharisaism and Jesus(New York: Philosophical

Page 1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행동 방식을 제시하는데, 이를 할라카라 부른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의 할라카가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히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에 바리새파의 원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할라카는 곧 하나님의 명령

이 된다.

할라카는 특정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랍비

들의회합에서 연구된 후에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처음 발효

된 할라카보다 더 나은 것이 나왔을지라도 다른 랍비들의 회합에서 먼

저 것을 폐기할 수 없다(M. Edu. 1.5). 반면에 어떠한 법도 공동체의

대다수가 수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강요될 수 없게 되어 있다(b. A.

Zara, 36a B. Bather. 60b).

할라카의 목적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실천 영역 전체를

망라한다. 각 세대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할라카에자신들만의새로운

할라카를 더해 나간다. 그렇게 하여 장로들의 전통이라 불리는 전통이

확대되어 나간다. 바리새인들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 활동은

중단되는법이없다.

3. 요셉하이네만(Joseph Heinemann)

아가다의 기원이 되는“마기드 하-카투브(성서가 말하기를) ”이란

말은 성서로부터 인용된 본문을 소개하기 위하여 미드라쉬 문헌에 종

종 나타난다. 그러나 이 말은 아가다적 미드라쉬보다는 할라카적 미드

라쉬에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24) 그렇다고 모든 아가다가 미드라쉬이거

나, 모든미드라쉬, 예를들어할라카적미드라쉬가아가다는아니다.

두루마기로 된 성서는 시나고그에서 큰 소리로 낭독되었지만, 아가

다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설교를 통해서 말로

전해졌다. 아가다는 오랜 역사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에서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91

24) Joseph Heinemann, “The Nature of the Aggadah,” Midrash and Literature, ed. G.

H. Hartman, S. Budick (New Haven, London: Yale Univ. Press, 1986), 41.

속한다.

아가다는 유대 백성의 덕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다. 또한 선택된 백

성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유대 역사에 있는특정한 이야기들을 과

장하여 전개한다. 심지어는 포로 가운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이스라엘백성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보여준다. 아가다에서주로다루어지고있는주제

는 유대 백성들의 고난 문제다. 이때 죄에 대한 징계와 미래에 주어진

상급이 다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아가다는 메시아 시대에 대해 집중한

다. 메시아는 이상적 인물이 되었다.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서 광범위하

게 또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고난은 메시아에 의한 구원이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완성된 메시아의 시대는 물질적인

것과영적인 것이혼합되어나타난다.

아가다는 특히 추방된 유대인들에게 갈증을 해갈해 주고, 영감을 넣

어주며, 위로를 베풀 때 생수의 샘과 같은 것이었다. 심한 고난 가운데

피할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주었다. 아가다의 풍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상상의 세계를 넓힐 수 있었고, 시편의 저자들이

지녔던 시적 감정을 키울 수 있었다.22)“아가다는 하늘이 사람들(회중)

에게로 내려오도록 하며, 사람을 하늘로 올리려고한다. 이러한 일을통

해 아가다는 하나님을영화롭게하며, 이스라엘을위로하고자한다.”23)

출애굽기18장 20절에“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명령에 근

거하여 바리새인들이 토라를 해석할 때 사용한 미쉬나 형식은 토라에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법들에 대해 다루면서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2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석하는 방법.

22) Umen, 32.

23) Leopold Zunz, Die gottesdienstlichen Vorträge der Juden, historisch entwickelt.

Ein Beitrag zur Alterthumskunde und biblischen Kritik, zur Literatur-und Reli-

gionsgeschichte (Berlin: A. Asher, 1832), 349. Umen, 앞의 책 29쪽에서재인용.

Page 1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필요에 부응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으므로 랍비들의 아가다들은

일반적으로 꾸며진 이야기나 독립적인 창작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28)

그렇기에 아가다는 스스로“성서해석의 즐거운 영역”( E c c l e s i a-s t e s

Rabba I I 8)이라고 말할수 있었다.29)

대부분의 아가다 주석들은 비유 아니면 은유로 되어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해야 할 대상들은 현실의 문제를 관념적으로나 이론적으로

해명하면 알아들을 수 없었던 서민들과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일반

대중들이었기때문이다. 이미많은사람들에게익숙한 비유나 이야기들

을 활용하여대중성 있게성서의 의미를 풀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아가다들이 랍비시대에“철학적 문헌”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함

축적이면서 경구적이서 소위“줄간”을 읽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

다.30)

아가다와 할라카는 탈무드 시대에 활동하던 성현들의 영성과 지성

을 보여주는두 얼굴이다. 그러나 보다 영성적인 아가다와 보다지성적

인 할라카의 차이는 분명하고 그 가는 길에 확연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탁월한 할라키스트가동시에 탁월한 아가디스트이며, 또한그 역으로도

그러한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팔레스틴에서 활동하던 아모라임들은자

신들을 할라키스트나 아가디스트 중 어느 한 쪽으로 규정되는 것을원

하지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탈무드와 할라카 미드라쉬 안에두 타입

의 해석학적입장들이자연스럽게공존해 내려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다의 세계와 할라카의 세계 사이에는 커다

란 차이가 있다. 레위기 랍바(Leviticus I 2)에서 말하듯이, 할라카는 빵

에 비유할 수 있다면, 아가다는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다. 할라카는“곡

식같이 풍성할 것이며”, 아가다는“포도나무와같이꽃이필 것”이다(호

14:8). 할라카로서의탈무드는삶의주된영양공급원이고, 아가다는포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93

28) Heinemann, 47.

29) Heinemann, 48.

30) Heinemann, 50.

당한 고난의 격변기에 처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창조적 응답이

다. 밖으로부터 억압해 오는 외국의 문화적 영향과 안으로부터의 분파

주의에 의한 불안 요소들로 인한 위기의 때에 그리고 갈등의 시대에

성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창안된 새로운 주석 방법이라 할 수 있

다.25)

특히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것이나 정치적 독립을 완전히 잃어

버린 것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야기된 위기들에 대한 대처 요령이 필

요했다. 이러한 때 그들은 토라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것을 추구했다.

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토라가 그들에게 역동적인 것이 되어야

했고, 극적으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상황이 안겨주는 도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토라해석이 열려 있어야 했다. 이때 아가디스트들이

창조적 주석의 방법을 발전시킴으로써 현실의 변화를 고민할 수 있는

새로운 대답과 가치를 성서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26)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 이스라엘의 구속 방법이었던 희생제사를 드

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아가다의 마스터들은“희생제사와 비교할 수

있는 구속 수단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사랑

의 실천이다”(Avot de-Rabbi Natan, ver. A, chap. 4)라고 과감히 선언

했다. 아가다는 성서의 이삭번제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하나님의뜻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제물로 허락하는 이삭의

순교에서 보고 있다. 특히 종교적 박해가 심했던 시대에 순교와 배교

사이에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아가다의 새로

운 관점은 매우영향력이컸다.27)

또한, 성서의 이야기들은 원래보다 확대되어 들려졌고, 심지어는 그

이야기 자체가 변형되기까지했다. 그러나 탈무드나 미드라쉬의 아가다

들은 성서의 본문을 설명하고, 정교하게 다듬고, 응용함으로써 현실의

2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5) Heinemann, 42.

26) Heinemann, 43.

27) Heinemann, 46.

Page 1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신념과 행위는 토라에 대한 믿음이고 토라의

가르침에 대한 따름이다. 토라 이후의 모든 텍스트들은 그러한 믿음과

실천을 철저히 하기위한주석이요또한해석의 집합이라할 수 있다.

유대교의 히브리 성서는 토라를 비롯하여 선지서(느비임)와 성문서

(케투빔)로 되어 있어‘타나크’라 약칭하여 부른다. 이를 근거하여 이후

미쉬나, 탈무드, 미드라쉬, 그리고 유대교 신비주의의 경전이 되는 예찌

라, 바히르, 조하르 등이 나온다. 이 모든 텍스트들은 지금까지 살펴본

할라카와 아가다라는두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또한두 방식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유대교를 관통하는 해석학적 방법으로서의 할

라카와 아가다는유대교의 삶과사상을 이해하는열쇠가되는것이다.

이처럼 할라카와 아가다는 유대교의 전반을 다루는 해석학적 열쇠

인 만큼 그에 대한 이해의 범위도 매우 넓다. 유대교 학자들마다 할라

카와 아가다에 대한 개념 정의가 다양하지만, 성서를 할라카와 아가다

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때 성서는 단지 법률만도 아니고, 삶의 지혜

를 들려주려는 이야기만도 아닌, 할라카와 아가다가 함께 어우러져 하

나의유기체적 통일을이루고 있는것임을 알게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구약성서라 불리는 히브리 성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결정해주는 신약성서를

볼 때도동일하게적용할 수 있다. 즉, 신약성서를 읽을때 할라카와아

가다라는해석학적 방법의 도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네 개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이야기해 주는전

형적인 아가다이며, 그 외의 편지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아가다이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따르고 지켜야 할 할라카

를 제시하는할라카적 미드라쉬들이라볼 수 있다. 로마서를예로 본다

면, 1장부터11장까지는 예수그리스도 신앙에 근거한 구원의 원리들을

이야기한 아가다의 형식이라면,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반드시 있어야 할 소위‘복음적 할라카’이다.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CE 70년 이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95

도주와 같이즐거움을더 한다. 할라카는토라의본체이나, 사람은 빵만

으로는 살지 않는다. 포도주는 빵에 없는 무엇인가를 더해 준다. 아가

다는 노래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에 기쁨과 힘을 주는생명력이며시적

창조력이다.31)

아가다적 코멘트들은 법적 전통과는 달라서 아가디스트 자신의 마

음에서 우러나오는 명령에 따라 해석하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을 결정

적 진술로 주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앙의 원리를 다룸에 있어서도 해

석들간에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해석의 다

양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신앙에 대

해서 R. 힐렐과 같은 아모라는“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메시아는 오지

않을 것이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미 메시아를 맛보았기 때문이다”(B.

Sanhedrin 99a)라는견해를 밝힌다.

I I I. 유대교와그리스도교의만남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의 모태(matrix)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오늘날

까지도 적대적 관계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반

유대교적 정서는 종교문화의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

치 사회 전 분야의 일상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

다. 이러한 때에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학은 유대교와의깊은 대화를 통

해 그리스도교 신학의 본래적인 인프라인 유대-히브리적 유산을 정당

히 평가할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모세할라카와예수아가다의만남

유대교의 모든종교 사상은 토라에서 출발하여 토라로 돌아간다 해

2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1) Heinemann, 52.

Page 1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야기였듯이, 유대교의아가다들(aggadot)은 기본적으로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패러다임을 가진다. 그것은 주로타 민족과 타 문화의 침입

으로말미암아 민족의 생존 여부에 관련된 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

므로아가다는종말론적인 성격을 띤다. 즉, 아가다는구원을 향한미래

의 희망을 말함으로써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지혜를 모색한다.

사무엘 유멘이 앞서 밝혔듯이 유대 백성들의 고난 문제가 아가다의

주제인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복음서 역시 메시아 예수의 고난이 이야

기의핵심이다. 그런데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난을 주고받는 비극의 역사를 연출해 왔다. 그리

스도교의 복음서 아가다는 동족 유대인의 박해 가운데 경험했던 초대

그리스도인의 고난 이야기를 통해 종말론적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고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아가다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근거로서의 유대교 할라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유대교의 관점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대부분 유대인들

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의 할라카를 지켜야 하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할라카를 드러내놓고 어기었기 때문에 반 할라카주의자들로보

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바리새파의 원리를 받아들인 자들에

게는 할라카가 하나님의 계명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예수 공동체는 하

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 다음의 절차는 출교(Charem)였

고, 박해가 이어졌다. 그러므로 교회가 출발하면서부터 반 유대주의적

사상이 신약성서 내에자리 잡게되었고, 초대교회 교부들에의해서 더

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말론적 희망의 눈으로 본 고난의

복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

으며, 오가는 모든세대에 전해져야할 하가다가되었다.

반면, 유대교의 탈무드와 미드라쉬, 그리고 특별히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리즘은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하는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핍박

과 차별과 천대를 받고 심지어는 추방당하고 살해당하는 상황 속에서

토라를 지켜나가기 위해 할라카와 아가다를 발전시켜 나간결과물들이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97

으로부터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팔레스틴 땅에 존재하던 다양한 유대

교 종파들은 사라지고, 존재하더라도 극히 미미한 상태이나, 랍비 유대

교(Rabbinic Judaism)와 그리스도교만과거히브리인의 종교적 유산을

이어받아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두 종파는 조상들이 물려준 타나

크를 근거로 해서 랍비 유대교는 미쉬나를 만들었고, 그리스도교는 신

약성서를 만들어 각각의 종교적 체계를 그에 근거하여 이어오고 있다.

랍비 유대교의 미쉬나는 토라의 정신을 할라카의 방식으로 체계화한

것인 반면,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는토라의 정신을 아가다의방식으로

전개한 다양한 문서들을 묶어 놓은것이다. 그러므로 랍비유대교나 초

기 그리스도교나모두 토라를 동일한 신앙과 실천의 모체로 삼았고 현

재도 그 흐름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안에서 미

쉬나와 탈무드 그리고 미드라쉬를 읽으며, 유대교 안에서 복음서와 교

회에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서 신앙고백에 차이가 있지만, 한‘아버지’

의 자녀들임을인정하는것은먼 길만은 아닐것이다.

할라카를 대변하는 모세를 통해서 예수를 알고, 아가다를 대변하는

예수를 통해서 모세를 알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비알릭이 말

한 것을 유대-그리스도교적으로 적용해 본다면, 예수 아가다가 모세

할라카에 정신과 내용을 주고, 모세할라카는 예수아가다에 실천과 방

법을 주며, 예수 아가다가 모세 할라카에 자유를 주고, 모세 할라카가

예수 아가다에게 확고한 행동을 하도록 구체적 현실을 주는것은 지금

도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할라카에 있는 시적 광채를

보아야 할 것이며,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의 아가다 뒤에숨겨져 있는진

리의본질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2. 이삭아케다와예수아케다의만남: 아가다의관점

아가다의 원형인 하-아가다(Haggadah)로서의 유월절 아가다가 이

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을 고난 받는 애급의 압제에서 구원했던 이

2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것으로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눈에는 자기를 비판하는 그들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요 7:19). 그렇기에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외식하는”자들이라 비판하면서“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을 삼가라”(마 16:12)고 지적한다. 오히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할라카와“하나님의 계명”을 구별하여, 그들의

할라카 준수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이 되고 있음을 비판한다(마

15:2-3). 그것은“사람의 계명”(마 15:9)으로, 그에 따를 때는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됨을경고하고있는것이다.

“장로들의 전통”이 토라에 대한 잘못된 할라카적 해석으로 나왔다

면, 그것은 폐기되어야 하거나 아니면 옳게 바로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곧 토라에 대한 할라카들은 결코 절대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말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수 당시나 그 후의 랍비 유대교는“사람의 계

명”, 즉 사람이 정해 놓은 할라카를“하나님의 계명”과 동일시함으로써

예수와 예수를 믿는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교와 갈등과 충돌을 빚어왔

다. 예수의 관점에서는 모세의 토라와 예수 자신 사이에 모순과 갈등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깊은 상호연관성이 있을 뿐이다. 예수는“율법이

나 선지자를…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마 5:17) 왔다. 뿐

만 아니라, 예수는“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5)고 밝히 말하였기 때문에, 유대교

와 그리스도교가모세의 토라를 바로준수하려는자세를 가지고 자신들

의 할라카를상대화시킬수 있다면서로의만남은 가능한 일이다.

반면, 유대교가 토라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과 규정을 통해 결정된

할라카를 절대시할 때, 랍비 유대교의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좇

는 게 아니라 사람의 계명을 좇는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유대교

를 비판하는 중에 스스로도 오류에 빠질 수 있는데, 곧 계명의 실천을

등한시 하고 계명의 아가다적 해명에 치우친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경우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299

다. 하이네만이 지적했듯이, 그 가운데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

브라함보다 오히려 아버지의 요구에 응해 스스로 희생제물로 죽기로

각오한 이삭 이야기(Akedah, Binding of Isaac)에서 찾는다. 아케다 아

가다, 즉 이삭이 묶인 이야기는 유대교 역사 내내 종교적 박해로 인해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고난의 형극을 가야했던 유대인의 실존을 대변

해 주는아가다이다.

우리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만남이 가능함을 이삭 아케다와 예

수 아케다가 서로 닮아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그리

스도교의 관점에서 이삭 아케다의 가치는 실로 막대하다. 왜냐하면 이

삭과예수는 고난을 통해하나님께드려진“외아들”(히 11:17)이었으며,

그들은“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살리(심)”(히 11:18)을 받은자들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오리겐과 같은초대교부는 이

삭을 그리스도를 예표한“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32) 의도적으로 거

부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가 이삭 아케다 아가다에서 유대교가 보는

인류 대속의 희생을 보지 않을 수 없고, 유대교가 예수 아케다에서 그

리스도교가 보는인류대속의 희생을 볼 수 있어야하는것이다.

3. “서로사랑하라!”: 할라카의관점

복음서 여러 곳에서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예수와 충돌을 일으킨 경

우들 가운데 특히‘안식일’할라카를 준수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천국에 관한 아가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유독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과 정결에

관한 할라카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보일 때는 여지없이 공격의 화살을

퍼부어댔다.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할라카 지키는 것을 곧 하나님 섬기

2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2) Origen, Homilies on Genesis, trans. Ronald E. Heine(Washington D. 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82), 11-13장.

Page 1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에게‘가해자’로 살아온 길을 더욱 강화하였

다.33)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신조와 교리를 따르겠다는 나의 동의이전에, 예수를 통해 하나

님을 만남으로 주어진 은총의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신학, 종교, 전통

이 나를특정한 종교인으로 만들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나에게 말씀으

로 찾아오신 사건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웃 종교를 종교의 체제나 전통의 틀에서 보는 게 아니라 신 없이 신

앞에 선 코람 데오의 존재로 보게 되며, 이것이 모든 종교인들이 자신

의 전통과 교리에 묶이지 않으면서 각자가 경험한, 틸리히의 표현대로

라면“궁극적관심”을 이야기할수 있는출발점이 되는것이다.34)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보다도 상대적으로 유대인과의 만남이 거의 없

다시피 한 문화적 상황때문에, 유대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은 약한

편이다. 그러나21세기 글로벌 시대를 맞이한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

은 이전과 다르다. 유대교에 대해서도 책임 있는신학적 대화를 건네야

한다.35) 유대교의 삶과 사상을 알기위해 그들의 할라카와 아가다 전통

을 이해하여 그리스도교 신학 내적으로 성찰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시

도는 신학적 대화를 넘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윤리적 실천을 강화

하는데 긴급히 요청되는작은일보에 불과할 것이다.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301

33) 고란 라슨 / 야곱 엘 탈만,『기독교와 유대교의 대화: 유대인의 고난사』배현주 역(서

울: 연합선교회, 1990). 이 책의 부제는 European History as the Seedbed of the

Holocaust이다.

34) 이와 같은 접근 역시 여전히 유신론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겠으나,“궁극적 관심”

의 내용은유신론적절대자의개념에만 제한되지않는다.

35) Paul van Buren, 『이스라엘의 예수, 교회의 예수를만나다』최인식 역(시흥: 예루살렘

아카데미, 2010; 원제, A Theology of Jewish-Christian Reality I I I)에서 그리스도교

는 유대교의현실을중요한 신학적콘텍스트로정당히 다루어야 할 것을주장한다.

다.“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보다는“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믿는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을 믿는 자는 사랑을 행할 때 그가 참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

라 일찍부터초대그리스도교는경고하고있다. 다시말해서, 할라카 없

는 아가다 신앙은“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약 2:26) 이미 죽은

것과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만날 수 있는 길은 모두가“사랑하라”는 계

명으로 요약되는 토라와 선지자의 할라카를 실천하는것이다. 하이네만

이 밝혔듯이, 유대교는 성전 파괴 후 희생 제사 대신 그와 비교할 수

있는 구속의 수단을“사랑의 실천”으로 보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그

리스도교 역시“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예수의 새 계명을 따르지

않으면 더 이상 그리스도교라부를수 없는공동체인 것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게 있어서“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는 어

떠한 교리나 전통도 이를 앞설 수 없다. 사랑의 할라카 없이 유대교도

없고, 그리스도교도 없고, 양자 간의 만남도 없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

면 모두가 모세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며, 예수의 사명이 이루어지는 것

이며, 하나님의 뜻이이루어지는것이다.

I V. 나가는말

정체성은 내가 남과 다르다는 차이점을 찾음으로써만 강화되는 것

은 아니다.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생겼을 때는 더욱 그렇다. 역사적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관계

는 서로의 차이점을 가지고 서로를‘상대’화 한 것이 아니라,‘배제’해

버릴 수 있도록‘대상’화 한 것이 문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이천년 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는 동안‘만남’을 추구

3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라슨, 고란 / 야곱 엘 탈만.『기독교와 유대교의 대화: 유대인의 고난사』. 배현주

역. 서울: 연합선교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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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아카데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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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nz, L. Die Gottesdienstlichen Vortäge der Juden Historish Entwickelt.

trans. M. A. Jack, ed. H. Albeck. Jerusalem, 1954.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303

주제어

유대교·그리스도교·할라카·아가다·아케다

Judaism, Christianity, Halachah, Aggadah, Akedah

접 수 일 2011년 4월 1일

심사 (수정일) 2011년 4월 25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3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Samuel Umen shows that Aggadah has been related with Jewish

sufferings in their history. When they were afflicted, Aggadah

inspired them to understand the sufferings. Heinemann explains that

Halachah is like bread of Judaism, and Aggadah is like wine. Bread

gives power and wine makes singing. When Halachah is more

intellectual, Aggadah is more spiritual in Jewish hermeneutics.

Finally, this essay deals with three Jewish-Christian encounters in

dialogue: Mosaic Halachah and Jesus Aggadah, Issac Akedah and

Jesus Akedah, and Halachic aspects of “Love one another” in Juda-

ism and Christianity. Love is not only the essential subject of Hala-

chic and Aggadic interpretation of Judaism but also of Christianity.

When Korean churches understand Jewish Halachic and Aggadic

tradition of interpretation, our Christian identity could be newly

rediscovered and productive dialogue with Jewish people will be

created.

최인식,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할라카와아가다의 관점에서 305

A Dialogue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From the Perspective of Halachah and Aggadah

Choi, Insik

Professo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Puchon, Korea

One of the Christian theological focuses has been given on the

religious dialogue with Asian religions likewise Buddhism,

Confucianism, Taoism and Shamanism up to date. It was a natural

consequences when Korean churches tried to make responsible en-

counter with neighbor religions. In recent times Korean churches are

not simply regarded as reviving Christian communities, but leading

group for global mission field. In this situation we face not only

Asian religions but also Judaism, Islam, Hinduism, and so on. This

essay is concerned about Judaism in two senses: one is for knowing

Judaism itself and the other for finding common ground of the

dialogue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

Our primary concern is to make sense the hermeneutical main

tradition of Judaism, namely, Halachah and Aggadah. We try to

understand them according to the interpretations of Rabbinic Jewish

scholars, Hayyim Nahman Bialik, Samuel Umen, and Joseph

Heinemann. Nahman as a poet describes them picturesquely. For him

Halachah is dark, narrow, heavy, stable, strong, and direct; converse-

ly, A g g a d a h is bright, open, light, movable, smooth, and flexible.

Judaism became lively when they came together harmoniously.

3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통합적영성의현상과과정에대한연구

양가적(兩價的) 무(無)의 균형(equilibrium)과 돌파(breakthrough)를

중심으로1)

김화영

(서울신학대학교, 조교수)

들어가면서

영성이란 무엇인가? 또 영성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

고 실현되는가? 영성에 대한 관심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대

한 답변은 쉽지않다. 수덕(Ascetic)과 신비(Mystical)로 정의되는가톨

릭 중심의 영성은2) 누구나 인정할만한 풍부한 전승의 자원과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의 금욕적 훈련과정이 삶의 과정을

무채색으로 만들며, 평신도 중심의 수덕신학과 수도원 중심의 종교 엘

리트들이 전담하는 신비신학으로 나뉘어져 성-속 이원적 문화를 낳았

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3) 또 다른 유형의 영성은 폭넓은 인간 경험과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07-338

1) 제5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발표논문을 수정한것임.

2) 조던오먼 / 이홍근역, 『영성신학』(서울: 분도출판사, 1987), 5-6장을참고하라.

3) 예를 들어서 홈즈(Urban T. Holmes)는 신비적 영성은 신과의 합일이라는 신비적 경

험을 묘사한 것으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목적적(terminal) 이미지를가진다. 이러한 신비적영성은 수도원에서 주로실천

Page 1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는 수많은 종교, 역사, 심리학, 신학, 현상학 등의 서적을 보면 수긍할

수 있는것이다.

이와 같이 갈등적 양상을 보이는 두 영성 그룹의 통합은 쉽지 않아

보인다. 각각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우리의 과

제는 두 영성 유형이 가진 장점을 통합하여 어떻게 하면 살아 있는삶

의 다양성 안에 기독교 전통에 숨은 영적 심오함을 조화시킬 수 있느

냐 하는 것과 연결된다. 즉 기독교 전승에 나타난 영성의 고유한 정체

성과 풍부한 자원을 구체적인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인간경험에 비

추어재구성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영성을 연구한 전통적

인 방법론, 즉 영성에 관한 신학 교리나 역사적인 자료들을 삶에 그대

로 적용하는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다우니(Michael Downey)와

슈나이더(S. Schneiders)를 비롯한 현대 영성학자들은 영성 연구를 통

합적이고 경험적인 차원과 연관하여 생각한다. 살아 있는 신학은 언제

나 영적인 경험에 근거되어야 하고, 기독교 영성 연구 역시 삶의 전반

에 걸친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추세로 인하여 광범위한 범위를 아우르

는 분야(field-encompassing field)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

독교 영성에 관한 연구는 기독교 영성 전통이라는 안전망과 더불어 인

간의종교경험을 아우르는 교차학문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별히 영성 연구가 인간 경험과 관련된 광범위한 분야를 총체적으

로 아우르기 위해서는 기독교 영성 전통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역사적

방법과 더불어 인류학적(anthropological) 방법이 가미되어야 한다. 영

성에 대한이해를 시도할 때 우리는 영성 자체를 알 수는 없다. 영성이

라고부를만한어떤공통적인경험, 신과인간, 세계가 만나서 체험되는

깊이나 높이, 넓이의 다양한 현상들을 추적함으로써 영성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두 개의 상호 연관된 방법, 전승에

나타난 영성가들의 지혜와 공통 경험을 통해기독교 영성 전통에 나타

난 지혜를 탐구하는 역사적 방법과, 보편적 인간경험 안에서 나타나는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09

살아 있는 삶의 다양성에 대해 강조한다. 대중화를 꽃피운 이 영성 유

형은 우리의 삶 전체, 즉 사회적, 정치적 영역을 포함하는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삶의모습을 가리키는 말로대치된다.4) 이러한 영성의 흐름에

따라 최근에는 다양한 영성의 분야들, 예컨대 여성해방영성( f e m i n i s t

spirituality)이나 해방 영성(liberation spirituality), 또는 생체영성(bio-

spirituality) 혹은 생태영성(ecology spirituality), 지구영성(earth spiri-

tuality),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 영성(Marxist spirituality)까지 등장하

였다. 그러나 이 영성 유형의 애매함과 방만한 넓이는 자신만의 것이라

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난을 불러일

으킨다. 사실이러한 평가는 오늘날‘영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등장

3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되었는데, 그곳은 세상의 삶과 분리되어 청빈과 침묵과 내면적 고독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는 장소였다. 언어나 개념을 부정하는 침묵(unsaying; apophasis), 금욕

(ascesis), 자기부정(self-denial), 무지(unknowing)의 지(知)라는 역설적 훈련은 신비

를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방식이었고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도달한스승의 지도 아

래 일종의 도제식으로 훈련되었다. 반면 수덕적 영성은 신비적 영성을 체험한 수도사

나 영적 전승에서 내려오는 영적 규범에 따라 훈련하는 것으로 도구적(instrumental)

이미지를 가졌다. 이러한 체계가 영성신학에도 반영되어 성-속 이원 구도를 낳는 평

신도 중심의 수덕신학, 엘리트주의를 강화시키는 신비신학의 위계화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 영성의 이원적이고 위계적인 구조에 대한 성찰이 전통적 영

성에 대한 비판이 현대 영성학자들 사이에서 일고 있다. Urban T. Holmes,

Spirituality for Ministry (Harper & Row, 1982), 50.

4) Downey, Understanding Christian Spirituality (Collectiv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7), 118. 슈나이더 역시 이러한 영성의 경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

이 말한다: 첫째, 오늘날 영성은 기독교적 용어로 제한되지 않으며 유신론적 또는 종

교적 영역에 국한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둘째, 영성은 교의적이거나 규범적인 것이 아

니다. 그것은 신학에서 유출된 원리를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완성과 초

월을 향한 부름에 독창적이고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셋째, 영성은 완성보다는

성장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택된 소수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인간성의

완성을 향한 체험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넷째, 영성은 육체적, 사회

적, 정치적,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내적 삶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영성

은 인간 삶과 체험의 모든 영역에 관계가 있다. Sandra M. Schneiders, “Theology

and Spirituality: Stranger, Rivals, or Partners?”, Horizons, 13, (1986), 264-265.

Page 1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수덕(Ascetic)과 신비(Mystical)로 정의된다. 이때 합일은 엄격한 훈련

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이르게 되는 영적 성장의 완성이다. 즉 합일을

강조하는 영성은 영적 진보의 길을 거쳐서 모든 매개들의 중재가 전적

으로 사라질 때 체험하는 순수한 초월의 경지라 할 수 있다. 합일에 이

른 상태의 의식은 모든 이미지들과 개념과 관념을 넘어 신성으로 충만

해진다. 전통적으로는 삼중의 길(triple way) 혹은 세 단계의 길(three-

fold path)이라는 영적여정7)을 거쳐 합일에 도달하며 정화(purification/

purgation), 조명(illumination), 일치(union)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영성을 일정한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합일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단계가 중요시된다. 단계를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은

일정한 시기마다 통과해야 하는 전환점들이다. 예를 들어 합일은 조명

의 길의후반에 나타나는‘영혼의어둔밤’을 통과해야만도달할 수 있

다. 기도 생활에서도 정화의 길에서 조명의 길로 옮겨갈 때는 확실한

변화가 느껴지지만 조명의 길에서 일치의 길로 옮겨갈 때에는 어떤극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11

서 영성의과정과 작동원리를보여주고자함에그 목적이 있다.

7) 합일에 이르는 삼중의 길(triple way) 혹은 세 단계의 길(threefold path)은 13세기부

터 전통적으로 영적 여정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천상의 위계』

the Celestial Hierarchy에서 처음 삼중의 길의 개념을 제시한 이는 위(僞) 디오니수

스인데, 이것은 이후 모든 전통에서 정화, 조명, 일치의 여정으로 이해되었으며, 영적

발전에 대한 정통적인 이해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 삼중의 길에 대한 전통은 고

중세와 근대의 신비주의 작품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냐시오나 아빌라

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과 같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저서에서 세 단계의 길에 대

해 다루고 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는 자신의『영성

훈련』의 첫 번째주에 정화의 길을대입하고 두 번째 주와세 번째 주에는 조명의 길

을 대입했다. 마찬가지로 테레사는『영혼의 성』Interior Castle에서 첫 번째 저택에

정화의 단계를, 가운데 저택에 조명의 단계를, 마지막 저택에 일치의단계를 대입하였

다. 십자가의 요한이『영혼의 어둔밤』과『가르멜의 산길』에서 정화의 길을 설명한 유

려한 표현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까지 계속해서 이 주제에 대한 관심(Reginald

Garrigou Lagrange, Joseph de Guibert, Adolphe Tanquerey 등)은 끊이지 않으며 최

근에는현대적인해석과 접목의경향을 보이고있다.

영적 현상을 있는그대로 잘 묘사하는 종교 현상학(Phenomenology of

R e l i g i o n )의 방법5 )을 상호 연결한다.6 ) 특별히 루돌프 오토( R u d o l f

Otto)의 신비사상을 중심으로, 1) 신과 인간, 세계가 만나는 공통 경험

에서 영성의 두 양상을 통합할 수 있는 원형을 밝혀내고, 2) 그러한 원

형이실제적인삶에서 발현되고성장하는과정을 보여주고자한다.

이상의 목적과 방법에 따라 본 연구의 구성과 범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서론에 이어1장에서는 영성의 두 길의 갈등 양상을 합일과 임재

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그 논쟁점을다룬다. 2장에서는 두 길의 갈등원

인을 분석하고 통합할 수 있는 근거를 신비 현상학의 관점에서 제시한

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와『동

서양 신비주의』(Mysticism East and West)를 중심으로 하되 무(無)의

양가적 현상을 중심으로 제한한다. 3장에서는통합적 영성이 삶에서 실

현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결론에서는후속연구과제와실천

현장에서의함의를 밝힌다.

I. 영성을이해하는두 길의강조점과한계: 합일이냐,

임재냐?

1. 합일을강조하는영성

합일을 강조하는 영성은 주로 가톨릭 전승과 연관되어 있으며 흔히

3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5) 김성원은 영성이란 성령의 속성적 내용과 인간의 영적 행위를 포함한 차원에서 현상

학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영성신학은 영적 현상을 다

루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데 그것은 영적인 일들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원리가 인용되는 것은 영적 현상에 대한

묘사가 먼저있어야 하기때문이다. 김성원,“영성신학방법론에관한 연구”,『조직신학

논총』5(2000), 92, 99.

6)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말씀과 기도를 비롯한 영성생활의 내용이나 신학적 교의를 다

루는것이아니다. 그러한영성경험이공통적으로어떤현상으로나타나는지를 살펴

Page 1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말씀(Word)이나 정신(Mind), 존재(Being)와 같은 개념적인 말보다, 서

로 일치하지 않고 볼 수 없고(invisible) 영원하고(infinite) 파악할 수

없는(ungraspable) 상징들이다.1 0 )‘빛나는 어둠(luminous darkness)’,

‘보지 않는 가운데 봄(seeing in not seeing)’과 같은 구절은 고의적인

모순의 전형으로 부정적 영성의 특징인 단언과 부정의 이원적 형태를

보여준다.

2. 임재를강조하는영성

임재(presence)를 강조하는 영성은 인간이 경험하는 일상과 세계가

하나님이 이미 내재하시는 장소라는 전제를 중요시한다. 칼 라너(Karl

Raner)는 비일상적인황홀경이나 소수영적엘리트에게 주어진 합일의

완성이나 관상적 상태보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임재의 경험을 강조

한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임재하시며 당신 자신을 전달하시기에, 일상

의 모든 사물이나 사건들을 통해 매 순간 경험하는 신적 현존이 영성

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일상은 이미하나님에 의해고양되어 있으

므로‘높은’하나님 체험이‘낮은’일상 안에 존재하면서 일상을 통해

드러난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의지와 근본적인

자기 전달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임재로 초대받았다.11) 다우니(M.

Downey) 역시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내주(image and abode)를 드러나게

한다. 이러한 임재는 이러한 특정한 표현들에 고정되거나 제한되지 않

고 세계속에개방되어있으며 생명과 능력(the life and power)을 가능

하게 하는 힘이 된다. 시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인 성령은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13

10) Edward Howells, “Apophatic Spirituality,”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Sheldrake, ed., (Louisville, Kentucky, 2005), 117-118.

11) Karl Rahner, S. J., “Reflection on the Unity of Love of Neighbour and the Love of

God,” Theological Investigation 6(Balimore: Helicon, 1969), 231-49.

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정화의 길에서 조명의 길, 즉 추론적 기

도로부터 관상 기도로 이행하는 것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지만 조명

의 길에서 일치의 길로옮겨가는것은비교적 어렵다고알려져있다.

합일의 의식 상태는 흔히 관상8)의 상태로 여겨지는데 관상에 이르

는 길 역시단계적 성숙을 필요로 한다. 관상이란관조, 즉 실체의 내면

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능동적 관상(active contemplation)과 주부적 관

상(infused contemplation)으로 나뉜다. 주부적 관상은 순수하고 사변

적이며 수동적이고 선험적 지혜로서 관상의 최고 상태로 불린다. 그래

서 어원적인 유래로 볼 때 관상은 분석적 사고가 아닌 사랑의 연합에

의한 하나님 체험으로 얻게 된 봄(seeing)의 지식을 말한다.9) 관상에

이르는 기도인 관상기도는 단순한 성찰과 명상과 달리 오랜영적 여정

을 거쳐형성된다는것이다.

자연히 이 영성그룹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법론은 부정성(nega-

tivity)이다. 이러한 부정적 경향은 인간이 지닌죄와 집착 때문만이 아

니라 하나님의초월적 신성 때문이기도 하다. 호웰즈(Edward Howells)

는 긍정보다 부정의 상징이 하나님을 더 적절하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초월적 신성을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3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8) 관상은 라틴어인 컨템플라티오(contemplatio), 템플럼(templum)에서 유래한다. 템플

럼은로마인들이예언을 하기위해특별한 지정한공간으로 사원(temple)을 의미하며

그곳에서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뜻과의도를 읽기위해 사물의내면과 일 속에서 신성

을 바라보는 일을 하였다. 관상이란 관조(觀照), 즉 실체를 바라본다는 뜻으로서 내면

과 사물의 근원을 바라보노라면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으로유추된다. 동방 교부들

은 이 단어를 피조물의 깊이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사용했고, 이러한

봄(seeing)의 가장 높은 형태를 직접적이고 완전한 하나님 인식, 즉 진정한 신학이라

는 뜻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을 나타내는‘테오로기아(theologia)’로 표시했다. 니싸의

그레고리가 테오리아(theoria)에 종교적 의미를 첨가하여‘사랑에 의해얻어지는 하나

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라고 하던 것을 클레멘트가 컨템플라티오

(contemplatio)라고번역하여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9) David Perrin, “Unitive Way,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Sheldrake, ed., (Louisville, Kentucky, 2005), 629.

Page 1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3. 갈등의양상

영성이해의 두 길이 가진 갈등은 일상의 삶과 단계를 바라보는 태

도에있다. 각각은 다음과 같이비판을 받는다. 합일을 강조하는영성은

부정의 방법과 단계를 중요시함으로써 일상의 살아있는 삶과 이원적으

로 분리된다는 비판을 받는다.‘모든 개념과 모든 경험을 넘어서’하나

님에 도달한다는 부정의 방식은 매순간 충만하게 살아있는 삶의 경험

을 심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14) 단계를

강조하다 보니 특별한 계층에 대한 위계적인 질서를 강화한다는 점도

중요한 비판의 요소이다. 홈즈(Urban T. Holmes)는 합일을 강조하는

영성이 받는 비판 중의 가장 큰 요소는 영적 단계에 대한 문화적 전제

들, 즉 세속을 떠나 독신 수도자에게 우선적으로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무흠주의’와‘완전성’에 대한 엘리트주의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체

계가 영성신학에도 반영되어 성-속 이원 구도를 낳는 평신도 중심의

수덕신학, 엘리트주의를 강화시키는 신비신학으로 체계화되었다고 보

는 것이다.15) 이러한 구분은 공통적인 전제를 낳게 되었는데, 그것은 수

덕적인 길을 통해 훈련을 받아야 하는 평신도와 신비적인 길을 통해

고차원적 길을 가는 수도자나 교역자라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위

계적이고이원론적계급구조와일상적 삶의부정이다.16)

한편 임재를 강조하며 긍정의 길을 택한 영성은 일상의 삶에서 누

구나 영성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그

러한 대중성이 인간 성숙 및 초월적 자기실현의 경험과 영성을 구분할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15

14) 특히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 신학은 합일의 관점을 눈에 띠게 중시하

였으며, 성직자 계층과 수도자들에게 그 주도권을 부여함으로써‘만인제사장직’을

강조하는개신교의영성과 차별성을가지려고 노력하였다.

15) Sandra M. Schneiders, “Spirituality in the Academy,” Bradley Hanson(ed.),

Modern Christian Spirituality (1990), 25-26.

16) Urban T. Holmes, Spirituality for Ministry (Harper & Row, 1982), 50.

세상 속에 내재되어 있고, 살아 있고 숨 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

에 의해그렇게 된 것이다.12)

삼중의 길로 대변되는 영적 성장의 단계 역시 그렇게 중요하지 않

다. 특별히 현대영성에서 주로 보이는 경향 중 하나는 인간 삶의경험

가운데 존재하는 신성의 임재를 통해 인격의 요소들을 통합하는 것이

다. 산드라 슈나이더의 관점은 현대영성의 광범위한 특성을 잘 보여준

다. 그녀에 의하면“소외나 자기 몰두가 아니라면 궁극적 가치를 향한

자기 초월을 통해서 삶의 통합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의식적인 모든 경

험이 영성”13)이다. 그녀에 따르면 굳이 영적으로 정해진 어떤 여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삶에서 자유와 평화와 사랑 등 궁극적 가

치를위해일하고있다면, 그는이미영성가인셈이다.

임재를 강조하는 영성은 부득이하게 주로 긍정의 길, 즉 유념적 방

법과 연관되어 탐구된다. 창조물과 신의 속성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신학적 근거로 삼고, 그 유사성을 차이점보다 훨씬 중요하게여기

기 때문이다. 창조물을 하나님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

의 존재안에 내재하기 때문에 창조물과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

님의 임재라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재의 신학적 전

제는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단순한 현현(manifestation)을 넘어서는 존재이긴 하지만, 기본적

인 신학적 전제는 모든 것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하나님 안에 모든 것

이 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은 인간경험의 차원이며 영적관심

은 삶과 세계의 전 영역에 퍼져있다. 이러한 성향은 당연히 영성의 대

중화와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영성이 꽃피울 가능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3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2) Michael Downey, Understanding Christian Spirituality (Collectiv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7), 37-38.

13) Sandra M. Schneiders, “Theology and Spirituality: Strangers, Rivals, or Partners,”

Horizons 13/2 (1986), 266.

Page 1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껴지지 않는다. 즉 이 시기에는 하나님의 부재를 깊이 느끼는 기간이

있고 이러한 부재의 경험을 거쳐서 비로소 합일에 이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단순히 임재만을 강조할 때는 부재의 경험들과 구체적인

영적 전환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특별히 기독교 영성의 중요한 전통인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에서 부재의 개념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불가해성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가장 긴밀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어둠,

무, 초개념, 무지(unknowing)의 지(知) 등으로 표현되는 상징은 하나님

에 대해 갖고 있는 우상적 인식들을 넘어서 초월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며, 임재와 부재의 변증적 진행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임재라는 말만으로는 합일에 이르는 영적 전환에

필요한 불연속성과초월의 측면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I I. 갈등의원인과통합의대안: 원형으로서양가적무

1. 갈등의원인: 역설적신-인-세계관계를담지못하는

이원론적유형론

먼저 영성이해의 갈등 요인을 논하기 전에 영성을 논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를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 영성에 대한 이해를 시도할 때

가장 큰 난관은 영성 자체가 논의의 초점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누구도‘영성 자체’를 정의하고 규명할 수는 없다. 도

리어 영성 이해는 영을 감지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경험과 연관되

어야 하며, 그것은 사회 문화적, 우주적 배경들과의 복합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나타나는‘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즉

영성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작동할 때 일어나는지에

대한규명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

이해는 하나님과 인간이 이 세계 안에서 펼치는 본질적 관계를 파악하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17

수 없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자기 경

험의 가능성과 한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채 신성과 인간성의 분리

를 영속화시킨다. 즉 인간이 자기신성화를 통해 신적 존재와 결별하게

하는 우상화의 길을 걷게 한다는 것이다. 버나드 맥긴( B e r n a r d

McGinn)은 임재(presence)라는말이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 및 객관화

시킬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신비적 인식을 잘 표현하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17) 맥킨토시(Mark A. Mcintosh) 역시 영성을 인간 삶의 전반

을 포함하는 학문 분야로서 확대시키는 경향이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

를 손상시킴으로써, 신적인 징후들의 다양하고 심오한 가치가 쉽사리

탐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고 지적한다.18) 또 다른 한편으로

신비적 타자의 초대가 없는 궁극적 가치에 대한 자기초월적 자아는 의

심스러운 형이상학적 자아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19) 따라서 임

재의 관점은 그 광범위한 폭과 인간학적관심으로 인해 합일의 영성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적 자유와 자기부정의 초점이 사라진다는 지적을

받게된다.

또한 순간순간의 임재만으로는 영적 여정에서 나타나는‘하나님의

부재(absence of God)’와 깊이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특별히 합일의

직전 단계인 조명의 길의 후반부를 특징짓는‘영혼의 어둔 밤’은 영적

순례자가 하나님과 일치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전환점이다. 그런데 영성가들의 공통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조명의

길에서 일치의 길로옮기는 시기에는 하나님의 어떤 임재의 손길도 느

3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7) Bernard McGinn, “The Foundations of Mysticism,” vol. 1, The Presence of God:

A History of Western Christian Mysticism (New York: Crossroad, 1991), x v i i. 여기

서 맥긴의 요점은 합일(union)이라는 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

이다. 이 시도의 한 예로 그는임재보다 신적 근거(ground)라는말이 합일의 역동적

이고복합적인상태를 훨씬더 잘 표현한다고본다.

1 8 ) 매킨토시 / 정연복 역, 『신비주의 신학: 영성과 신학의 어우름』(서울: 다산글방,

2000), 45.

19) 위의책, 46.

Page 1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한 구조 속에 한정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만일 어떤 방식들이‘옳거나’,‘틀리고’,‘더 완벽하거나’,‘덜

완벽하다는’것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면 훨씬 더 큰 위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론은 그것이 영성들을 설명하는‘유일한’

혹은‘대안적’틀(frame)로 이용될때 곧 한계가 드러난다.22)

결국 제도 유형론은 한계가 드러난다. 학파 유형론의 경우도‘뿌리

깊은 근원, 신적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를 나타내기에는 부적합하다.23)

그 결과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은 계층적이고 이원적 이데올로기가

생성된다. 합일을 강조하는 영성이 유형적으로 왜곡될 때 원래가진장

점, 전적 타자인 하나님의 자유와 깊은 영적 전환을 통한 성장이라는

단계의 의미가 자아성취와 위계적 제도의 등급 매기기와 결합하여 이

데올로기로 형성된다. 매킨토시는영성이 신 스콜라주의와병행하여지

나친 이론화로 이어지면서 초월적 존재를 향한 내면적 몸부림은 무흠

주의와 완전성에 대한 자기성취와 엘리트 의식으로 변질되고, 결국‘초

월적 자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위계화가 진행되었다고 본다.24) 그 결과

영적 성장과 단계는 삶과 고립된 개인의 내면을 위해서는 중요하나 절

대타자인 하나님의 세계 도전 및 폭로와는 거리가 멀게 되었고, 말할

수 없는 금욕적 수행의 보상으로서의 계급 승진과 같은 의미가 되었

다.25) 마찬가지 이치로 임재를 강조하는 영성 역시 유형적으로 왜곡될

때 자아의 욕망과 세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26) 따라

서 영성 이해의 갈등은 전적 타자인 신과 인간, 세계의 역설적 관계구

조 안에서 영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유형론적 사고와, 각각의 유형론 뒤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19

22) Ibid., 218-219.

23) Ibid., 212.

24) 매킨토시/ 정연복 역,『신비주의 신학: 영성과 신학의 어우름』(서울: 다산글방, 2000),

21.

25) 위의책, 22.

26) 위의책, 46.

는 것과 관련된다. 맥킨토시는 영성을 신-인-세계의 통합적 관계의

차원에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영적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차원이‘하나님에 의해위태롭게되는동시에 세계를 향한권능을

받았다’는20) 신-인-세계의 역설적 관계성에 있다. 그것은 이 세계 안

에서 살아가는 삶이 자기가 아닌 전혀 다른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서

새로운 관계방식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성은 내적으로 비

범한 자기초월적 체험이나 인식과만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 타자

로서의 하나님의 초월적 주도권이 사람과 세계를 향한 활동과 관련된

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은 내면적으로 몰입된 인식이 아니라 신-인-

세계의 신비적 관계망을통합적으로 인식하는것과관계있다.

그러므로 영성의 이원적 갈등은 이와 같은 역설적인 통합 의식의

부재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성의 역설적이고 총체적

인 요소를 단면적으로 치부하는 유형론적(typological) 사고는 치명적

인 갈등 요인이 된다. 쉘드레이크(P. Sheldrake)에 따르면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혹은유념적 방식과 무념적 방식, 합일과 임재등 기독교 영

성을 유형별로 구분하는 것은 전통적인 역사에서 흔한 일이며, 논평이

나 평가 없이 종종 이용되고 있다.21) 학자들이 유형론적 틀을 많이 사

용하는 것은 그러한 방법이 자료를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체계화하

기 쉽고, 차이점을 분명하게 분석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이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체계적인’영적 신학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서 이러한 경향들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유형론이 자기 우월이나 위계

적 이데올로기를 고착시키기 위해 사용될 때 계급제도를 존속시키는

도구로 변질된다.

유형론적 구분을 절대적으로만들거나 역사적 인물들과 운동들의 복

3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0) 위의책, 19.

21) Philip Sheldrake, Spirituality and History: Questions of Interpretation and Method

(Maryknill. New York: Orbis, 1998), 198.

Page 1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의 경험에 숨은 성취적 자아와 세계관에 숨은 이데올로기에 대한비

평적성찰을 요청받는것이다.

맥킨토시는 대상적이고 유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전체에

대한 깊이’와 불연속적 관계 안에서 관조하는 통찰력을 관상적 직관이

라고말한다.30) 특별히 신-인 관계의 인식은 유형적인 인식이 아니라 무

형적 인식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그러한 영성 인식에 있어서 무(無)는

신성으로서의하나님을지시하는중요한 상징이었다.

존재를 지닌 모든 것은 무(無)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

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과 같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영혼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것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다…‘하나님

은 존재’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초월적인(ati-

saya) 존재이다. 그는 존재 위에 있는 비(非)존재(sat-asat-param)로

서 무이다…내가 만난 하나님이 이해될 수 있는 존재라면 나는 더

이상 그를하나님이라고부르지 않을것이다.31)

무(無)는 어둠, 초개념, 정화의 밤 등으로 표현되는데, 하나님 자체의

초월적인 불가해성을 가장 잘 나타내면서 동시에 신성과 인간이 가장

긴밀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관계의 상징을 나타낸다. 또한합일에 이

르기까지 성취적 자아와 세계관에 근거한 이데올로기를 벗어야 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무는 유형적 사고가 가진오류를 넘

어서 초월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며, 무지(unknowing)의

지(知)라는 모순을 해결시켜 준다.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이 무(無)가

단지 말할 수 없음, 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 대립적 바깥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존재, 혹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것들과는전적으로 다른,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며 반대적인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21

30) 맥킨토시 / 정연복 역, 『신비주의신학: 영성과신학의 어우름』(2000), 27-28.

31)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1957), 25.

에 숨은 성취적 자아와 세계관에 근거한 이데올로기를 무화시키는 장

치가부족한 것에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알 수 있다.

2. 통합적영성의공통현상으로서무의양가성

갈등을 유발하는 유형론적 사고를 극복하고 두 길의 관점을 통합하

는 방법은 무엇일까? 후르내르트(Eduardo Hoornaert)는 영적 전승에

나타난 영성가들의 경험들이 현재의 삶에 맞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은

그 경험들이 단순히 흩어진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전체를 보게해주는

어떤‘공통의 구조(common structure)’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7)

영성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내적 관계만이 아니라,28) 그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세계를 향한 삶의 태도나 행동을 형성해 주는

인식의 구조를 뜻하기 때문이다.29) 이 구조는 한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경험이 만들어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세계와의 진정한 관계성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인식이다. 또한 합일

을 강조하는 영성의 초점인 신비적 타자의 자유와 임재를 강조하는 영

성의 초점인 일상적 삶이 통합된 관계구조, 즉 초월적 타자로서의신이

인간 경험 및 세계와 만나 일으키는 역설적 구조가 현재의 다양한 삶

에서 어떤 현상들로 드러나고 진행되는지를 밝히는 과정과 연관된다.

이 구조에는 숨겨진 이야기와 일종의 불연속성이 포함되어야 한다. 자

3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7) Eduardo Hoornaert, “Models of Holiness among the People,” Models of Holiness,

eds., Christian Duquoc and Casiano Florista’n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9), 36.

28) 특별히 버나드 맥긴(Bernard McGinn) 같은 학자는 내면적 깊이를 추구하는 영성의

특성상 자칫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을 무시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Bernard McGinn, “Introduction,” Christian Spirituality: Origins to the Twelfth

Century, eds. Bernard McGinn and Leclercq (New York: Crossroad, 1988), xvi.

29) 방성규,“초기 수도원 영성에 있어서의 덕목의 삶,”『성결과 하나님 나라: 강근환 교

수 은퇴기념논문집』(서울: 한들출판사, 2000), 77.

Page 1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온전히 하나가되었음을 느낀다.33)

이 상태에서 영성가는 예전의 자신이 완전히 죽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새로운 지성과 감정, 의지가 합해진 에너지가 자신의

내부에서 흘러 넘쳐 활기를 띠고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34)

그것은 그와분리된 어떤것이아니라 그의존재자체이다.

두 번째는 부정과 긍정의 통합으로서 오직 하나이자 동시에 모든

것으로서의 무의 양가적 측면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인‘오직(sola)’의

정신은 바로 이 무의 역설적 측면을 나타낸 것이다. 오토에 의하면 이

‘오직’은 수(數)나 양(量)의 속성과 대비된 배타적 하나가 아니다. 즉

수(數)로서의 하나라는 의미나 다양성을 배제하는 부정의 의미가 아니

고, 모든 수를 초월한 것, 따라서 하나라고 하는 수까지도 초월한 절대

타자, 전혀 다른낯선 존재로서의 통일성, 하나이지만 모든 것이다.35) 이

무와 만날 때 비로소‘오직(sola)’의 감정이 일어난다. 이 감정은 시편

작가의 글에서 표현된 대로‘오직 당신만이’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

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you alone are worthy to receive honor and

glory and praise)라는 고백을 불러 일으킨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그들

의 존재를 지니는 방식과는다르게 자신안에서 스스로 홀로존재하며,

모든 피조물은 이 신성의 존재 범주 안에 위치한다.36) 따라서‘오직’으

로서의 신성은 우월과 배제의 부정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

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대긍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통합적 영성의

원형은‘오직 하나이면서 모든 것(Only One and All)’인 무의 부정, 즉

긍정의 역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개념 및 개념의 분화 위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23

33) Jan van Ruysbroeck, The Spiritual Espousals and Other Works, 171, 183. 칼 아리

코 / 엄성옥역. 『집중기도와관상여행』(서울: 은성출판사, 2000), 55.

34)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1957), 255.

35) Ibid., 13.

36) Ibid., 6.

‘그무엇’32)의 원형(archetype)이라는 것이다.

오토는 이러한 무의 원형을 신-인-세계 안에서 나타나는 양가적

구조를 통해 밝히는데 전율과 매혹, 부정과 긍정, 겸손과 고양의 세 가

지 역설적 통합의 측면으로 피력한다. 첫 번째는 전율과 매혹의 통합으

로서 전적 타자 앞에서의 자기부정과 신적 사랑이라는 양가적 구조이

다. 합일의 상태는 이러한 양가적 구조가 극대화된상태로서, 자기자신

을 전적 타자 앞에서 완전히 죽어서 비울 뿐 아니라 온전한 신적 사랑

의 황홀경 안에잠겨드는 것이다. 플랑드르의 신비가인 루이스브렉(Jan

van Ruysbroeck)은 이 경험을 자기부정과 사랑의 극치 안에서 다시

조명한다.

그곳에서 우리의 정신은 사랑을 통해 수용적인 가장‘적나라한무의

상태’로 거할 것이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며 무지의 어두

운 상태에서‘모든이성적인 관찰들에 대해 죽을’때에 우리는 아버

지의형상이신 영원하신 말씀의 역사를 통해변화된다. 그것은 첫 번

째로 우리가 사랑하는 그 분 안에서 온전히 쉬는 것이다. 마치 사랑

하는 사람이 순수하게 본질적인 사랑 안에서 연인에게 사로잡힐 때

처럼 이런 일이 발생한다.…이제 이 상태에 이른 사람은 자신이 완

전히 죽어 길을 잃었다는 것과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두 (역설이)

3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2) 루돌프 오토 / 길희성 역,『성스러움의 의미』(2003), 71-72. 이러한 측면과 관련하여

구쉬(T. A. Gooch)는 인간이 신들을 자신들의 모습을 따라 만들고 그 이후에는 하

나님을 자신들의 모양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오토는 신들의 기원은 알

수 없고 생소하며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발견된다고 말했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경우 신들이 너무 익숙하게 알려지게 되면서 그들은 종교적인 능력

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전적 타자 앞에서의 피조물적 무의 감각이 상실된 것이다.

신인동형론에 따라 여신들과 신들이 너무 고상하고 매력적이며 인간과 같아지는 지

점에서 그리스 종교는 쇠퇴의 신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전적 타자의

실재가 더 가까이 있다고 믿었던 극동과 이집트의 낯설고 이국적인 신들의 재출현

을 위한 길을 열어 주게 된다. Todd A. Gooch, The Numinous and Modernity: An

Interpretation of Rudolf Otto’s Philosophy of Religion (2000), 116.

Page 1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I I. 통합적영성의실현과정: 양가적무의균형과돌파

1. 양가적무의균형과돌파를통한성장의이치

지금까지 살펴 본 무의 역설적인 양가 구조는 신-인-세계관계를

나타내는 원형 안에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되는 속성이 있어서 연결된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장의 과정은 원형에 잠재된 양가성이 드러

나고 연계되면서 진행된다. 오토에 따르면 영성은 각자의 구체적인 삶

에서 나타나는 원형의 현상들을 주목하고 합리적 도식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통합적 영성을 이루는 중요한 전제이자 고등종

교들이 가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해석의 작업이며 말씀 묵상과

성찰, 기도, 혹은본질을 잘 드러내는정교한교의체계일 수도있다. 그

러나 이러한 체계화가 형식적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양가성의 균형 잡

기가요구된다. 오토는 그러한 균형이 합리주의의한계나 틀에막혀더

이상진행되지 않을 때, 루터가 발견한 신앙의 원형이 합리주의적 정통

주의로 전락한 것과 같은 결과를 빚게 된다고 말한다.41) 따라서 부정이

지시하는 초월적 속성을 그대로 잘 간직하면서 긍정이 지시하는 내재

의 요소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긴장이 사라질 때 영

성은왜곡된다.

예를 들어서 전율과 매혹의 경우, 전자가 결여된 후자는 종교 체험

을 기복이나 감정의 충일함으로 만들지만 기복으로 흐를 염려가 있고,

후자 없는 전자만의 강조는 종교를 억압적 권위와 교리 체계와 사랑

없는율법으로 만들고 만다. 정의의 본질은 윤리나 무흠의 차원이 아니

라 절대 타자인 신성을 대면할 때 나타나는 전율로서 신인동형론이나

인격적 신의한계를 벗어나 초월적 본질을 간직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사랑은‘전혀 다른 것’의 적극적인 속성을 감정의 충일의 차원 가운데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25

41) 루돌프 오토 / 길희성 역, 『성스러움의의미』(2003), 189.

에 자리하고 이해와 파악을 초월해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합리성 및 도덕성 등 가능한 모든 유념

적 소통을 통해드러나야 한다.37)

세 번째는 전적 타자인 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겸손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고양의 통합이다. 오토는 이 무의 감정이 전혀다른

타자를 만난체험에서출발하며, 전적타자가 지닌전율의 속성, 두려움

과 압도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것은‘하나님을 본 자는 죽을 것이

라’는 존재적 속성으로서수동적 관상의 상태, 즉 음침함, 깊은침묵, 심

연, 밤, 황야, 버림받음의 고통, 영혼의 고갈과 같은 것 속에 살아 있는

요소이다. 그것은‘피조물적 감정’, 즉 전적 무화의 감정으로 종교적

‘겸손의 감정’을 이루는 원료가 된다.38) 그러나 오토는 종교는 절대의

존 감정으로만정의할 수 없는고양의 감정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비전과 연관된 것이다. 진정한 종교는 절대자 앞에서‘세

계, 죄, 악 그리고 죽음’을 초월하는자유와 승리라는 고양의 감정이 우

선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39) 따라서 무화의 감정은 신을 향해서는

겸손의 무력감을 세계를 향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역동성이 넘치는 고양

감(exaltedness)과 기쁨을 가져다주며,40) 세계관을 상대화시키는구원의

비전으로 나타난다. 이 겸손은 실존의 한계와 고통이나 고상한 자기반

성이 아니라 신성과의 관계 속에서 세계를 향한 고양의 감정과 위엄과

박력의 힘을소유한 겸손이다.

3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7) Ibid., 132.

38) 루돌프오토 / 길희성역, 『성스러움의의미』(2003), 57.

39)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1957), 146.

40) Ibid., 181.

Page 1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 그런다 할지라도 완성에 이르는 단계의 전환점은 부정으로서 궁극

적으로는 부정적 신비주의의 전형인 하나님에 대한 어두운 관상(dark

contemplation)으로 변화된다. 즉 전환의 시기에는 부정이, 균형의 시

기에는 긍정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전율과 매혹, 부정과 긍정의 균형을 통한 성숙은 세계를 향한

비전으로 연결된다. 누미노제가 완성되려면 구원의 관계인식, 즉 겸손

과 고양의 양가 구조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 통합적 인식이 영혼

의 핵에서 일어나는‘말씀과의 관계 인식’이며, 하나님의 세계 구원을

향한 창조 인식이라는 것이다. 흔히 영혼 신비주의나 자연 신비주의로

불리는 유형들은 합일을 향한충동, 동일화의 감정, 타인의식의소멸또

는 개별과 보편 사이의 대립의 소멸, 비합리적이고 역설적 논리 등 누

미노제가 가진 초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성과의 관계를 통해세

계 구원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즉 통합의 원형이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신-인-세계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한성숙이 요청된다. 즉 합일의 신비

는‘신성과의 관계 안에서’세계를 위한 지속적인 창조의 신비이다. 오

토는 이 창조의 원리를 에크하르트의 고유한 표현인 관뚬(in guantum,

in principio) 원리에서 발견한다.46)‘하나님에게서 낳음을 받는 한’피

조물은 참된 존재이고 단일하며, 하나이고 영원하며, 신성과 동일시된

다. 그러나 피조물이 스스로‘자기 자아에게서 나오는 한’그것은 무가

치하고 공허하며 무의미하다. 특별히 누미노제의 본질에서 벗어날 때

이러한 왜곡의 상태를 뚫고 지나갈 돌파(breakthrough)47)가 필요하다.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27

46) 이름과 형태를 지니고 존재하는 생산물(피조물)의 다양성 전체는 그것이 존재 자체

(Being itself)인 한에서 참되다. 그 자체로부터나오는한 그것은거짓이다. Ibid., 96

47) 에크하르트에게 하나님과의 합일은‘초탈’(disinterest: 초연, 무심, 무)과 돌파이다.

이 둘은 영혼이 신과 합일되기 위해 모든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하며, 신적

인 것에 이르는 데에 합당치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내어버리는’자기 부정의

자세를 가리킨다. 초탈은 아들의 탄생이라는 합일과 신성에로의 돌파라는 위계적 순

서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경험을 단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있다. 즉 영

적 여정이지향하는궁극적인목적은‘돌파’이며, ‘황홀경’은 그 여정의 중간단계이

서 묘사한 것으로, 두려움과 힘의 추구로 점철된 초기 종교가 힘의 이

데올로기로왜곡될 가능성에서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영적 성장의 여정에서 전율의 요소는 신비적 여정에 동반되는 낮은

차원의 갈망들을 죽이고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깃든 우상성을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원죄 교리는 누멘42)적 존재 앞에 섰을 때 피조물이 느끼

는 이 무의 체험을 합리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서 속죄의 필연성

과 갈망이 나타난다.43) 따라서 단순한 도덕적 토양에서는 구원의 필요

성이나 성화, 가리움, 속죄의 필요성은 생겨나지 않는다. 구원의 교리는

무를 직관하는 상태에서만 그 내적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오토는 교

의학이 이러한 누미노제의 상태에서 형성된 구원과 속죄와 같은 개념

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으로 완화시켰기 때문에 그

타당성에대한시비가 가중되었다고 본다.44)

부정의 길과 임재를 강조하는 유형인 긍정의 길은 때와 필요에 따

라 서로 교차되고융합되면서 균형적으로 발전한다. 두 방식 모두하나

님의 신성을 드러낸다. 즉, 한편으로 무지(無知)의 지(知)에 도달하기

위해서 모든 개념이나 이미지가 적나라한 상태가 되어야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할 수 있으면 많은 상징들이 사용되어 어떤 특별한 상

징이 절대화되거나 우상화되는 것을 막기도 해야 한다.45) 즉 전체적인

통합의 여정에서 보면 비록 우상적인 요소가 통상적이라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근원적인 실체에 굴복해야 한다. 따라서 부정의 길

(Apophatic Way)은 하나님과 만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긍정의

길(Cataphatic Way)을 영성을 삶의튼튼한 토대위에세우게 하는것이

3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42) 라틴어누멘(numen)으로비합리적인절대타자(他者)를 나타내는 말이다. 오토는 종

교의 본질이 여기 있다고 본 것이다. 누미노제(Das Numinose)는 절대 타자를 만나

서 형성되는직관적 감각을나타낸다.

43) 위의책, 115.

44) 위의책, 114.

45) Janet K. Ruffing, “The World transfigured: Kataphatic religious experience,”

Studies in Spirituality 5(1995), 232-59.

Page 1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욕망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성찰과 원형적 돌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균형인 것이다.49) 자연 신비주의의 심미적 직관이나 자연주의적 직관

역시이 이 부류에 속할것이다.

2단계(저항기)는 1단계를 돌파한 후 양가성이 출현함으로써 관상적

직관의 원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인→관계의 구조가 비로소 생

성되기 시작한다. 회심의 시기가 이 단계이다. 그동안 동일시하던 세계

관을 해체하고, 자아를 일깨우는(The awakening of the self) 비합리적

감각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신은 다수의 속성과 똑같은 중요

성을 가진 채로 남아 있지 않는다. 이전까지 알 수 없었던 어떤 힘이

인격의 힘의 중심을 바꾸어 놓고, 두려움과 불안과 긴장 등의 부정적

감정과 고양과 황홀의 긍정적 감정들이 양가적으로 수반된다. 자연히

그전까지 동일시하던 세계관과 대립되고 저항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다. 이 때 균형은 자신이 체험한 비합리적누미노제 체험을 합리화하면

서 진행되고, 돌파는 세계관을 상대화하기 위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난

다. 즉 한편으로는 세계와의 소통을 위한균형으로 다른한편으로는세

계관을 상대화시키는돌파의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다 할지라도

이 단계의 가장 큰 특징은 아직 비합리적 누미노제의 균형 잡기가 완

성되지 않은상태이므로전반적으로는 저항의 모습을 띠고있다.

따라서 이 단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혼란스럽고 통합과는 반대되는

이원 대립의 상태로 보이지만 실은 신성 안에서의 통합을 향한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다. 세계와 동일시하던자연 직관의 우매함이 사라지고

세계를 대립적인 두 진영으로 바라본다. 겸손과 고양의 양가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12세기의 대표적 여성신

비가인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의 사상

에는겸손과 고양의 양가적 무의구조가 잘 드러나있다.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29

49) Ibid., 48.

50) Ibid., 14.

균형이 양가성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돌파는 불연속성을 강조

한다. 성장의 과정은 이러한 균형과 돌파의 긴장(tension)이 이루어 낸

결과이다. 돌파를 필요로 하는 시점은 무의양가적 특성이 충분히 균형

을 이루면서 성장해서 다음 단계로 전환할 시기가 되었거나 환원이나

왜곡으로치우쳤을때이다.

2. 신-인-세계관계의변화를통한통합적영성의실현과정

무의 양가적 원형이 성장하는 과정은 신-인-세계 관계가 현상적으

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양가적 무의특성을 중심

으로 영성을 실현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1단계는 동일시(同一視)

적 시기이다. 양가적 무의 특성이 발생하기 전의 단계로서 다음 단계와

직접적인 연속성은 없다. 오토에 따르면 이 단계에서는 문제와 사건들

이 다양하거나 개별적이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의 본

성은 세계관과 동일시된 상태로 하나로‘보인다.’반대로서의 모든 다

름이 사라지고 사물들이 더 이상 이것과 저것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러한 직관은 전체적 동일성을 유기체적으로 보는 것이며 그 안에서 보

는 자는 세계관과 동일시되어 있다.48) 신‖인⊆세계의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균형은 실은 무의식적 욕망과 세계관이 일치하는

것으로 비 본래적으로 구조화된 세계와 동일시된 상태에 불과하다. 즉

3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고‘초탈’은 그 준비 단계이다. 한편각각의용어는 신성에 가깝게 고양된 인간존재

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며,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영혼의 불꽃에서 활동하

시고 일치하시는 하나님은 영적 여정의 출발부터 전 과정에서 그 원동력으로 작용

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를 피조물과 분리되어 메마르고 텅 빈 이탈의 상태만을 요

구하는 신비가로 오해하게 되는이유가 여기있다. 즉 초탈과 돌파가 양가적이 아닌

위계적인 구성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합일에 이르는 전체 과정이 목적적 수단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돌파가 의미하는 초월적 역동성은 중간과정에 작용

하지않고연속적 자기부정의초탈이합일에 이르는과정전체를지배하게된다.

48) Ibid., 44.

Page 1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치의 체험을 두 차례 하게 된다. 첫 체험은1958년 3월 18일에 일어난

것으로서 월넛가의 모퉁이에 서 있던머튼은 쇼핑 센터를 드나드는 사

람들을 보고있었다. 갑자기 그는자신이 이들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하

고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머지 인류들과

하나가 되기위해태어난 영광스러운 운명임을경험하게되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이 모든 사람을 사랑했고 그들은 나의 사람들이며

나는 그들의 것이라는 깨달음에 압도되었다…그것은 분리의 꿈, 특

별한 세계에서 위조된 자기고립의 꿈, 부정과 가장된 거룩한 세계에

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이 해방감은 거의 큰 웃음을 터뜨릴만한

깊은 안도감과 기쁨의 경험이었다…갑자기 나는 그들 마음의 비밀

스러운 아름다움, 죄나 욕망이나 자기 지식이 다다를 수 없는 곳, 그

들의 실재의 핵심,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개개인의 참된인격체를본

것 같았다. 그들이 오직 그들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만이라도 서로를 매순간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그곳엔 더

이상 전쟁도 증오도 탐욕도없을것이다.54)

이 체험은 머튼으로 하여금 깊은 기도와 관상의 삶이 곧 정의와 사

랑의통합적 삶이며, 사랑의 근원안에서 세계와 일치하는비전을 갖는

것이었다. 머튼은 이후로 점점 더 평화와 일치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역사적 책임감이 있는 수도자였고 동시에

세계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인권운동가였다. 힐데가르트 역시 그녀가

체험한 환상을 세상에 발표하라는 음성을 들은 후 교회와 사회에 대한

반대 세력에 저항하고 그녀의 기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과 함께새

로운공동체를 만든다.

3단계는 통합의 시기다. 신↔인↔세계의 도식이 가능해진다. 이 시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31

5 4 ) Thomas Merton,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 (Garden City, N.Y.: New

Directions, 1977), 156-158.

신의말을완성하려는자들은 늘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

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흙으로 빚은 그릇이라 그들이 어떤 존재이

고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그들은

스스로에게허락된 소리를 내는나팔처럼 불가사의를알리기만 하는

것이지, 자신이 악보를 만드는 원천은 아닌 것이다.50) 저는 보잘것없

고 피조물이자 나약한 그릇에 불과하지만, 제가 당신들에게 하는 말

은 제게서온 것이아니라 선명한 빛으로부터온 것입니다.51)

이 단계는 전체적인 경향으로 볼 때는 부정의 길에 들어서 있지만

그 이면에는 회심을 전제로 한 성령의 임재가 전제되고 있다. 영적 성

장이 진행됨에 따라 차츰 세계관의 억압과 환상이 걷히면서 분리와 다

양성이 사라진다. 신성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통찰의 빛이 강해지면서

원시적인 누미노제감각은 신-인-세계전체를 총체적 구원의 관계속

에서이해한다.

2단계(양가적 통합기)는 저항기가 사라지면서 통합의 국면이 시작

된다. 세계를 향해 조명된 비전(illuminated vision)을 표현하기 시작하

며 평범한 신앙인들과는 다른 신적 인식의 양태를 나타내기 시작한

다.52) 유기체적 균형 감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체험자는 비전에 대한

깊고 직관적인 지식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데, 언더힐은 이것을 성

사적 의식의 확장(the expansion of sacramental consciousness)이라고

부른다.53) 영성가들은 이 시기에 세계와 일치되는 직관을 체험하며 그

이후 세계를 해방하는 새로운 비전의 길에접어든다. 토마스 머튼은 이

시기에 수도원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한복판에서 놀라운 영적 일

3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51) R. R. Ruether, Visionary Women: Three Medieval Mystics(facets) ( A u g s b u r g :

fortress publishers, 2002), 13.

52)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1957), 58.

53) Underhill, Evelyn. M y s t i c i s m-The Nature and Development of Spiritual

Consciousness, (Oxford: Oneworld publication, 1999), 254.

Page 1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바라기는 이 글이 개신교 영성의 정체성을 찾는 작은 교두보가 되

었으면 한다. 그 교두보는 이 글에서 밝혀낸 작은 공헌들에 기초한다.

즉 종교개혁의 핵심인‘오직(sola)’이 의미하는 것이 우월과 배제의 부

정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무의원

형이라는 것, 그 원형이 초기적인 종교성이 시작되는 누미노제 감각에

서부터 출발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 구원

의 지혜와 비전의 확장을 통해완성되고 성숙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

료는 개신교 영성이 정체성을 확보하면서도 배타성 없이 그리스도교

영성전통및 타 영성과조우할 수 있는가능성을열어놓게될 것이다.

본 연구를 토대로 다양한 후속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다원주의 종교 상황에서 무속, 유교, 불교 등이 가진 종교 경험의 특성

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누미노제 감각의 비합리적

역동성을 무속의 제의가 가진 역동적 힘과 연결시켜서 연구해 볼 수

있을것이다. 무속적 역동성이 한국의 종교 상황에서 어떤 공헌과 한계

를 가지는지, 비합리성의성숙과정과 유교적 요소, 불교적 요소들은어

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핌으로써 세계에 유래 없는 한국의 종교적 부흥

을 설명할 수 있을것이다. 또한원형안에 숨어 있는신-인-세계관

계 구조를 중심으로 각 종교를 비교할 수 있을것이며, 또한어떤 왜곡

의 형태를 가지게 되는지를 성찰하여 실천적 차원에 도움을 줄 수 있

을 것이다.

실천적 측면에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목회현

장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인물들과 영성 전통에 나타나

는 영성가들의 삶을 분석해 보면‘세계관에서 이탈-대립과 저항-세

계를 향한 비전과 신적직관 의식의 나타남-비전의 실현과 일치의 현

상들이 나타남’이라는 공통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양한 영성가들의 공통 경험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자칫 주관적으

로 흐르거나 사이비 영적 현상에 빠지기 쉬운 영적 경험들을 잘 인도

하고 역동적인 목회적 자원으로 삼을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특별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33

기에 영성가들은 균형이 완성되어 신성 안에서 신이 통합되고 영혼의

핵 안에서 영혼의 기능이 통합되고 구원된 비전 안에서 세계가 통합된

다. 균형과 돌파가 숨바꼭질처럼 섬세하게 진행되다가 궁극적 통합이

완성된다. 2단계에서3단계로의 전이는 오직 이러한 신성의 충만한 일

치의 반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어느순간 모든한계와 속성은 사라

지고하나가 된다.

십자가 요한이 말한 영혼의 어둔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은

이 과정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터널로서, 부정과 긍정의 양가적 무의

의식이 극대화되면서 통합되는 것이다. 또한 누미노제 감각의 균형과

돌파가 부정과 긍정의 교차를 통해 계속 조율된다. 세계 구원을 향한

위대한 삶이 신성과의 연합 안에서 실현된다. 신성과 생활세계가 연결

된다. 어떤 원인도 없이 영원히 부동하는 합일이 신성 안에서 삼위가

끊임없이 활동하도록 존재와 생명을 준다. 이 부동성으로부터 모든 것

은 운동을 부여받고 생명을 부여받는다.55) 신-인-세계의 온전한 통합

이 이루어지는것이다.

나가면서

오늘날 개신교 영성의 모습은 둘 중의 하나다. 가톨릭의 수도원이나

특별한 종교 엘리트 중심의 영성 지침을 기웃거리면서 그대로 따라하

든지 혹은 말씀, 기도, 성령론, 인간 성숙, 윤리적 실천 등 굳이 영성이

라고 이름붙이지 않아도 될 내용을 영성이라는 이름 하에 사용하든지.

둘 다 시원하지는 않다. 전자를 취하면 영성 전통을 잇는다는 안심은

되지만 가톨릭적 영성의 경향을 따라 보통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영성

할 수 있는 길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보통사람들이 하는 신앙 형태를

모두영성이라고하자니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귀걸이가된다.

3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55) Rudolf Otto, Mysticism East and West (1957), 169-170.

Page 1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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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35

히 여성 영성가들의 삶과 신비 체험들에 대한 연구가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연구들을 참고 삼아 한국 여성들의

경험들과 비교 분석하여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라 하겠다. 본 연

구는 영성가들의 실제적인 경험과 사상, 실천적이고 목회적인현장에서

의 세밀한 경험들을 보충하여 사용할 때 더욱 실천적 힘을 갖게 될 것

이다.

주제어

합일, 임재, 관상적 직관, 양가적 무, 누미노제, 균형, 돌파, 원형, 통합

union, presence, contemplative intuition, ambivalent nada,

numinous, equilibrium, breakthrough, archetype, integration

접 수 일 2011년 3월 31일

심사 (수정일) 2011년 5월 9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3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Study of the Phenomena and Processes in anIntegrated Spirituality

through Equilibrium and Breakthrough of the Double-meaning in Nada-

Kim, Hwa Young

Adjunct Professo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Puchon, Korea

This study is to integrate the spirituality centering on union or

presence, and, to help realizing an integrated spirituality in everyday

life. Spirituality focused on union emphases the transcendence of God

and the depth of human internals, and reach the state of unity through

strict ascetic stages. But the spirituality that reflects the current flow

emphasizes the presence of God and the moments of everyday life.

Two major spiritualities represents dualistic conflict. In order to inte-

grate, a new method is needed. Rudolf Otto’s mystic phenomeno-

logy contains the archetype of contemplative intuition. Specially

D o u b l e-meaning in Nada presented in contemplative intuition con-

tains the holistic perception that perceives God-man-world relations

holistically and the paradoxical archetype to integrate two major

spiritualities. This archetype, double-meaning in Nada, gradually

matures through equilibrium and breakthrough. The first stage does

not have a continuity with the next stage, and the individual and the

world are regarded as the same of the world view and ideology. The

early period of the second stage, which is the dualistic stage, is a

김화영, 통합적 영성의 현상과 과정에 대한연구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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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신학과윤리

E. 윌슨의‘생명의편지’에 대한한 답신

이정배

(감리교신학대학교교수)

들어가는글

필자는 본고에서‘기후 변화’란 말보다는‘기후 붕괴’라는 다소 과

격한 개념을 내 걸었다. 앞의 말로는 쉽게 망각하고 편안과 익숙함에

길들여진 일상적 사고에 어떤 충격도 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미 과학적, 경제적 관점 하에서 오늘의 생태위기 및 기후 변화의 현실

이 여러 경로로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기후붕괴’는 여전히

이론일 뿐 현실이 아닌 듯싶다. 수없이 논문을 읽고뭇 뉴스를 보고들

었으나 삶을 달리 만들거나 생태적 회심에 이르지 못한 것은 기득권적

안일함 때문일 것이다. 주지하듯 생태적 파괴로 인한 일차적 희생양은

빈국의 사람들이다. 생태와 가난이 본래 동전양면처럼 상호얽혀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부자병(Affluenza)1)에 걸린 21세기 대한민국 사람에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39-377

1) 토머스 프리드먼,『코드 그린-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최정임 外 옮김, 21세기

북스 2008 참조. 이 단어는 전염병이란‘Influenza’와 풍요를뜻하는‘Affluence’의 합

성어이다.

period of resistance against the world view. The latter stage, which is

a period of illumination, revealed an appearance of creative reforma-

tion as the light of illumination. It comes out from the Godhead and

the Relationship in God-m a n-world was viewed holistically. In the

third stage, an ultimate integration occurs as a great transformation

through great breakthrough.

3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든 방주 역시도 기후붕괴 원년을 사는 인간들에게 생태(명)공동체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곳이 필요/불필요라는 인간적 가치척도를 넘어선

다양성의 공간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차원에서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생명의 편지』5)를 보낸『통섭』의 저자E. 윌슨의 수고가 고맙다. 유물론

적 진화론자란 딱지가 붙어 있어 기독교인들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지구몰락의 현실을 적시하고 그를구원하는 길에과

학자와 종교인이 함께 손잡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기독교 창조신앙에 대한 몰이해와 과학의 오만함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으나 혹자의 평가처럼 참을 수 없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6) 자연

과학이 발견하여 제시한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共鳴(Consonance)하며

신학 역시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생명의 편지』를 불쾌하게 수취

할 이유는 없었다. 필자는 그 편지속에 담지된 자연에 대한뭇 지식을

오히려 고맙게 받아 읽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진정성을 담은 그의 서

신에 대한 기독교적 답신을 보내는 일일 것이다. 이에 필자는 본고를

그에 대한 답신 형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기후붕괴의 실상을 알리는

과학적 지표는 이미 앞선 학자들에 의해 고지되었을 터, 본 논문에서

필자는 그를 반복하기보다 좀 더 큰 틀에서 기후붕괴 시대를 사는 신

학의 고뇌와 역할에 집중할 생각이다.7) 이는 결국 탈(脫)인간중심주의,

곧 생태적 자아로서기독교인의 재(再) 주체성의 물음과 직결되는 사안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41

5) E. 윌슨, 『생명의편지』, 권기호 역, 시이언스북스 2006.

6) 신재식 외,『종교전쟁』, 사이언스 북스 2009. 이 책 후반부에는 기독교를 보수 편향된

시각에서 바라보는 윌슨의 시각이 정당치 않다는 신학자의 비판이 언급되어 있다. 필

자 역시 이점을 인정하나 윌슨이 대상으로 한 것은 소수의 진보 신학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 교회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라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7) 필자는 이미「기독교사상」2010년 1월호 특집에‘어떻게 우리는 기후붕괴 원년을 살

게 되었는가?’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기독교사상」2009년 11월에도‘시간이 촉

박하다’는 명제하에기후변화에대한신학적, 목회적 성찰을담은글들이 여러편 소

개되었다. 좁은의미의‘기후변화’에 대한신학적 대응은이를참고하면좋을것이다.

게는 기후붕괴 현실이 實感되지 않는다. OECD 국가 중에서 욕망지수

가 가장 높은나라가 된 것이그 이유이다.2) 풍요와 번영, 곧 기술이 자

신을 둘러 싼 불변의 환경이라 여기고 있으며 이 와중에서 자신을 무

언가를 결핍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것이다. 하여 인류가 직면할 생태적

파국 현실을 자신의 욕망과 편안함에 묻고 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불편한진실’의 진실인 것이다. 다행히도 최근 TV에서 방영한

‘북극의 눈물’과‘아마존의 눈물’프로그램을 통해 생태적 파국의 묵시

록이 여느때보다 강하게 전달되었다.3) 당시 예능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압도할 만큼 주목을 끓었다 하니 기후 붕괴의 메시지가 시청각적으로

확실히 각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빙하의 상실로 멸종 위기 種으로 전

락한 북극곰의 운명과40% 이상 손실된 아마존 원시림의 장래가 향후

몇 십 년에 걸쳐 인간 種의 그것과 궤적을 같이 할 것이란 사실이 과

장이 아닌 것을실감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인류가 다시 한 번 생태계

위기를 각성할것을기대해 본다.

주지하듯 몇몇 환경학자들은 2010년 올해를 기후붕괴의‘원년’(元

年)으로 선포하자고 했다. IPCC의 권유로 덴마크에서 새로운 기후회담

이 열린 이 시점을‘Post’(-이후)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을 낭만이라

여긴 것이다. 탈(脫)현대를 말하고 기독교 이후시대를 논하기에는 하나

뿐인 지구생명의 치명적 상처가 미래를 가늠할 수 없도록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점에서필자는 기후붕괴원년을 사는인간상으로서 성서의

노아를 제시하고 싶다.4) 자신의 시대적 징조를 꿰뚫어 보고 인류의 미

래를 준비했던 노아의 에코지능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말이다. 그가 만

3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 최근 영국 BBC 방송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인은 포르노 중독, 성형수술 그리고 명품

에의 욕구 등 10개 이상의 지표에서 상위 그룹에 속해 종합적으로 욕망지수1위라는

평가를 얻었다. 욕망과 반비례하는 것이종교의 본질이고보면한국이 종교(기독교)대

국이란 말이한없이 초라하게느껴진다.

3) 한겨레신문2010년 3월27일 자 신문26면에는이에관한컬럼이실려 있다.

4) 토머스 프리드먼, 앞의 책, 여기서 저자는‘100만 명의 노아, 백만 척의 방주’라는 표

제어하에새로운인간상과문명론을펼치고 있다.

Page 1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진화론)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반역이었다.9) 대자연을 파괴하고 인공 생

태계를 만들어 그 속에 안주한 것은 기독교의 청지기성(Stewardship)

에 대한 혼란이기도 했다. 청지기성은 대자연자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인 까닭이다. 이점에서 윌슨은 기독교 목회자들에

게 대자연의 본질을 탈(脫)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피력한다. 그에게

대자연은 인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속할 수 있는 지구상의 모든 것이

다.10) 인간에 의해 태초의 정체성은 상실되었고, 지구의 인간화로 생명

종의 수없는 멸종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그것을 대자연이

라 했다. 파괴되었음에도 그곳에는 아직 지구를 다시금 녹색으로 회복

시키려는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자연 역시도 우

리 인간의 마음이 바뀌기를 고대하고 있다(롬 8:18-25)는 것 역시 윌

슨의 생각이다.11) 대자연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이 公屬관계에 있음을

아는 것이 청지기성의 본질이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서구 기독교는

인간을 생태학적으로 특화된 종(種)으로 인식했었다. 호모 사피엔스란

말은 물론 하느님 형상 또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자폐증세를 달리 말

한 것이다.12) 윌슨의 말로 인간은‘협소한 생태적 지위에 갇힌 種’이라

는 사실이다.13) 이는 인간이 본래 하등 원시생물로부터 기원(진화론)했

음을 부정하는 창조신앙의 탓이다. 인간이 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

기면 여길수록 지구물리학적 영향(파괴)력은 피할 수 없다. 금세기 안

에 지구온도가6도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IPCC 보고서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14) 이는 살아 있는 대자연이 다양성, 복잡성을 통해서 안정화

되는 경우와 전혀 상반되는 개연성이다. 이로부터 윌슨은 인간에 의한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43

9) 위의 책, 17 이하내용.

10) 위의책, 26-27. 51 참조.

11) 위의책, 35.

12) 토마스 베리,『신생대에서생태대로』, 김준우 역, 에코조익, 12. 이정배,『켄 윌버와 신

학』, 시와진실 2008. 193-212.

13) E. 윌슨, 앞의책, 41-42.

14) M. 라이너스, 『6도의악몽』, 이한증 역, 세종서적2008, 21-27

일 것이다. 본고는 다음의 구조로 진행될 것이다. 첫째는 윌슨의『생명

의 편지』내용을약술할 것이며 둘째는 그의 제안에 대한 기독교적 응

답으로 가톨릭(토마스 베리)과 개신교(멕페이그) 측의 생태신학을 소개

할 것이고 셋째는『생명의 편지』의 근간이 되는 윌슨식 ’通攝‘의 한계

를 적시하고 그 대안으로 새로운 ’通涉‘을 多夕의 시각에서 구체화할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지성과 영성이 하나 된 에코지능의 활성화를 위

한 방책과 구체적 현실태를신학적 맥락에서언급하고자한다.

I. E. 윌슨의『생명의편지』풀어읽기-생명을위한

연대의제안

기후붕괴로 생명 다양성이 파괴되고 생명 종의 멸종 및 변종으로

기후붕괴가 가속화되는 현실을 목도하며 진화 생물학자인 윌슨은 대자

연을 지키는 일을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식했다.8) 하지만 인간중심 가

치관과 내세관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 기독교는 그에게 생태계의 빈곤

화 내지그 멸종속도의 가파름을진지하게 성찰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지구가 천국행(영혼 구원)을 위한 임시 거점처

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이에 윌슨은 생명 다양성은 물론 기후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인류의 공동목표라 재차 확인하며 종교가 과학과

함께 그 일에 앞장 서 줄 것을부탁하고 있다. 물론 창조신앙과 진화론

간의 세계관적 차이가 항존 함에도 후자가 피조물을 유지, 보존하려는

기독교 신앙에 유익하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주지하듯 창조신앙이

란 이름하에기독교는 대자연으로부터의자유를 추구한 종교였다. 생육

과 정복의 성서적 에토스가 근대 진보이념과 맞물려 근대 서구문명을

일궈낸 것도사실이다. 그러나 윌슨의 눈엔이것은 대자연을 향한등정

3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8) E. 윌슨, 앞의책, 11. 이점에서윌슨은 포스트모던사조를 거부한다. 35. 참조.

Page 1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는 맹신에 대한 염려인 것이다. 하여 기후붕괴와 멸종을 당연시하고

새로운 種의 출현과 기술의 탄생을 신적 섭리로서인식하는 종교적 이

데올로기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술하겠으나 창조과학, 지적

설계론에 대한 윌슨의 비판 역시 이런 이유에서였다. 기독교의 창조신

앙이 그런 형태의 이념과 공존할 경우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없다고 믿는것이다. 종의 멸종률이 그 발생률보다 최소100배 이상급

증한 오늘의 현실에서 점차 진화가 사라져 버린다면 대멸종을 뜻하는

아마겟돈(熱點, hot spot))의 징후들로 인해 창조 역시 종식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20) 해서 윌슨은 경제, 일자리 창출 보다 기후붕괴를 염려

하며 종 다양성을 지키고 서식지를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역설

한다.21) 대자연(야생) 자체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어떤 환경보다 경

제적 가치가 높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22) 그렇기에 윌슨은4대강

살리기란 이름 하에 뭇 생명의 서식처를 파괴하고 다양성을 헤집는 한

국 정부의 행태를 과학기술주의와 종교적 예외주의 간의 불행한 결합

이라여길 듯하다. 이제윌슨은‘생물호성’에 의거,‘창조물을 보호하라,

그 속의 모든 것을 구하라’23)라는 메시지를 기독교 측에 전한다. 대자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45

과학 지상주의자가 아님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하다. 본고 후반부에서 설명코자 하

는 생체모방(Biomimicry)은 윌슨이 추구하는 새로운 생물학(과학)으로서 자연개조

가 아니라 자연(생명)의 모방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재닌, M 베니아스,『생체모방』,

최돈찬外 역 2010. 참조.

20) 위의책, 125-126, 142-145, 170. 여기서 말하는熱點은 기후붕괴, 서식지파괴로 생

명 종이위험에 처해있는 지역들 일컫는다. 현재열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은 지

구 전 면적의2-3%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열점의 지역이 육지를 넘어바다

로까지계속확장되는것이오늘의추세이다.

21) 위의책, 127.

22) 熱點 지역 생명체들의 멸종으로 인한 경제 피해는 그것을 보존함에 있어 소요되는

경제비용보다 수십배 많다는 것이환경경제학자들의판단이다.

23) 위의 책, 134-135. 여기에는 토양1톤 속에400만 종의 미생물이 살아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소위 ‘dark matter’가 지구를 유지하는

소중한 역할을 한다는것이다.

문화적 균질화가 생물권의 균질화를 초래하는 상황을 걱정한다.15) 기후

붕괴가 생명 종의 다양성을 소멸시키듯 생태계의 同種化 경향성이 대

자연의자기조절능력을 최소화시키는까닭이다.

이로부터생물학자 윌슨은 인간본성을 신학(기독교)적 전제와 달리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인간 본성 속에 대자연의 흔적, 곧 생물호성

(biophilia)이 유전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16) 대자연과 통합

할 수 있는가능성이 인간본성, 곧 유전자 속에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써 윌슨은인간과 대자연이 다르지 않음을 언급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종교성, 도덕성 역시 인간 본성과 대자연(유전자)의 통합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와 대척점이 형성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기독교계

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녕 염려했던 바는 지구가 급속도로 빈곤

화되는 상황이었다.17) 지금껏 지구는4-5차례의 대멸종을 경험했다. 그

러나 목하의 지구 대멸종을 자초한 주체가 최초로 인간인 것이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딜레마이다. 윌슨은 종종 기후붕괴를 초래한 이런 인간

을 지구를 멸망시킬 거대한‘운석’으로 비유하곤 했다. 기후붕괴로 인

해 금세기 중반 지구상 생명종의25%의 붕괴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누구나‘평평하게’살려고 했기에 지구는‘뜨거워 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써 지구 생명체가 멸종되는 것은 명약관하한 일

이다.18) 지구가 이처럼 빈곤해 지는 것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무관심을

윌슨은 무섭게 질타한다. 창조물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함께 생각지

못하는 치명적 질환을 그는기독교인들의종교적(이데올로기적) 예외주

의에서 찾았다.19)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

3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5) E. 윌슨, 앞의책, 80-81

16) 위의책, 96-107.

17) 위의책, 111-122.

18) Th. 프리드먼,『코드 그린-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최정임 外 역, 21세기 북

스 2008. 49 이하내용참조.

19) E. 윌슨, 앞의 책, 123-135. 138-139. 윌슨은 예외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 인간재능

에 의지한과학적(세속적) 예외주의를거명한다. 그가대다수 생명공학자들과같은

Page 1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는 까닭이다.28) 해서 기독교 신학 역시도 지적 설계의 폐해를 우려하

며 그를성서종교와 무관한 것으로 보고있다. 동시에 신학이 자연선택

의 우발성만으로만족하지 않는 것도사실이다. 초월관계된 세상의 실

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윌슨의 경우처럼 종교 자체를 부

정하는 대립만이 능사가 아니라 상호공명하되 신학고유한 입장을 견

지하는 일도 중요하다. 분명한 것은 진화론을 인정치 않는다면 기후붕

괴 및 생명 다양성을 복원할 수 있는 여지를 잃게된다는 점이다. 그럼

에도‘생물호성’을 유전자로 환원하는 것으로 생명연대가 가능하다는

주장에는달리대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논자의 판단이다.

2. 『생명의편지』에 대한기독교적응답

토마스 베리의우주진화적 신학과 S.멕페이그의성육신적 생태신학을

중심하여

앞서 본대로 진화생물학자E, 윌슨은 종의 멸종의 시각에서 생명연

대를 주창했으나 기후붕괴 역시 그와 동전 앞뒤의 관계로서 지구 대

멸종을 야기시키는 급박한 원인으로이해되고 있다. 4억만년 간 항상

성( 2 8 0 p p m )을 유지했던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산업혁명 이래로

3 8 0 p p m에 달했고 향후 5 0년 안에 이산화탄소의 대기 함유량이

550ppm이 될 것인 바, 그 때가 되면 지구 온도3도 이상 상승으로 인

류가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29) 2도 이

하로 기후변화의 폭을 제한시켜야 지속가능한 생존이 가능함에도 마지

노선을 지키지 못할 것이란 비관주의가세를 얻고있는것이현실이다.

기후붕괴가 種의 멸종을 가속화시키면 아마겟돈의 참사는 결코 멀리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47

28) 이정배,“진화론, 우주적 그리스도 그리고 없이 계신 하느님-종의 기원과 멸종 사이

에서-”, 『신학과세계』, 2010년 봄호, 참조.

29) 토마스 프리드먼, 앞의책, 172-176.

연 정복에만 관심하는 예외주의자인 기독교를 대신하여‘환경전도사’

직을 자임하고 나선것이다. 지구 생명체의 신참자로 출현한 인간이 이

웃 생명과 공생하기 위해선 인구감소를 비롯하여 자원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소비량(이산화탄소) 줄이기 등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흔히 자연

과학자에게 부재한 생태계와 가난의 문제를 함께 인식하는 혜안 역시

고맙게도 그에게 존재했다. 하지만 생물학자로서 그 본연의 과제는 생

물학에서 발견된 지혜에 근거 기독교와 생명의 연대를 이루는데 있었

다.24) 녹색은총의 감각25)에 무지한 기독교가생물학으로부터배움을 얻

어 자신의 창조신앙을 풍요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창조가 아닌 자연선택을 신뢰하는 윌슨은 인습화된 교리적 창조신앙은

물론 과학의 옷을 입은지적설계론에대한 거부감을 유감없이표한다.

“생물은 암호화하는 분자가 일으킨 임의적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

해 자기 조직화되었다”26)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생명의 편지』에 쉽게

답하지 못했던 것도여기에 이유가 있었을 듯싶다. 그러나 논자는 그의

서신을 접하면서 성서의 창조신앙과는 차이를 인정하되‘지적 설계론’

과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말에 더욱 주목했다.27) 진화 자체가 초자연

적 지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지적설계의 입장을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

한 것이다. 이는 진화를‘사실’로 수용치 않는 기존 창조신앙 보다도

정당치 않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과학적 증거로 제

시하는 것이 생물학자의 시각에선 의당 불합리하게 여겨졌을 듯하다.

여기선 창조물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오히려 결핍될 수 있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지적 설계는 진화 과정 속에 내재한 비극적 깊이를 도외시

3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24) 위의책, 229 이하내용.

25) 논자역시도 생태신학자 맥 다니엘에게서배운 바, 녹색 은총의 감각은 주변의 식물,

곤충 등의 이름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논지를 편 적이 있다. 이정배, 앞의 책,

167-192.

26) E. 윌슨, 앞의 책, 230.

27) 위의책, 230-231.

Page 17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시를선사하는 신학함의 선한이웃임을적극천명했다. 지금도 생성중

에 있는 우주(Cosmogenesis), 진화 속의 자연은 성서가 알지 못한 새

로운 차원의 계시라는 것이다.31) 하여 그는 성서를 한 3년간 서고에 놓

아두고 자연을 더 많이 보고 느끼자고 권유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생

태신학이자신을‘예외주의자’로 만들고 있는기독교 초월적 신관대신

전 우주와 친족관계 속에있는애니미즘에 근거해 있음을 반증한다. 우

주 내 인간 출현도 중요하지만 그로인한 자연 파괴의 실상에 무게중심

을 두었고 생태대(Ecozoic)로의 전환을 추동했던 것이다. 이는 진화의

파괴적인 면을 보지 못했던 샤르뎅 식 낙관주의(오메가 점)를 현실적

으로 수정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역사적 역동성을 발현시켰던 기독

교가 방향을 옳게 선회한다면 공헌할 바가 여전히 적지 않다는 믿음

역시 여기에 내재되어 있다.32) 이처럼 신생대로부터 생태대로의 이행은

진화론에 대한적극적 수용에서 비롯한 것이다. 윌슨처럼 우주내 만물

이 유전자적으로 상호얽혀 있는친족관계임을 인정했던 까닭이다. 여

기선 인간중심주의, 기독교적 예외주의가 설 자리를 잃는다. 신생대 말

기 무임승차한 인간33)이 대자연 전체를 이용하고 파괴하는 것을 용납

지 않기위함이다. 그에게 인간의 이런 실상은 자폐증 환자처럼 여겨졌

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윌슨과 달리 우주가 오늘의 상태로 정교하게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49

30) 토마스 베리. 앞의책, 235.

31) 위의책, 20. 93-94. 이점에서베리신부는 성서66권(가톨릭73권) 속에하느님계시

가 완벽히들어났다는생각을 더 이상인정하지 않고있다.

32) 위의 책, 56-57. 이점에서 베리 신부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이 유기체의 상호 작

용성을 밝히는 데는 공헌했으나 우주가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해 명쾌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S. Dunn & A. Lonergan, eds. Befriding the Earth: A Theology of

Reconciliation between Humans and earth: Th. Berry in Dialogue with Th. Clarke,

Mystic, CT: Twenty third Publication, 28. 이재돈,“토마스 베리 생태사상과 생태신

학, 「가톨릭철학」11호(2008) 참조.

33) 흔히 이 지점에서‘인간원리’(Anthropic principle)가 말해진다. 그러나 베리 신부는

인간의 인격적 초월성을 말할 목적으로 이 개념을 차용치 않았고 오히려 인간과 자

연의상호관계성에무게중심을 두었다. 이정배, 앞의책, 198. 참조.

있지 않다. 광합성 작용을 통해 산소를 배출해야 할 아마존 밀림이 역

으로 이산화탄소를 토함으로 산림과 토양 파괴를 부추기며 바다의 산

성화가 산호초(막)를 붕괴시켜 급기야 먹이사슬 구조를 파탄시키는 일

이 기하급수적으로일어나는까닭이다. 지구온난화로 시베리아 凍土에

묻힌 메탄의 방출 역시 지구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고 있다. 지

구 대멸종을 뜻하는6도의 악몽이 현실일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인

간의 우둔함을 바로『생명의 편지』가 적시하고 있는 바이다. 사적 재산

을 자율성의 상징으로 여겼고 종교가 그것을 축복이라 했으며 소비가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척도가 된 상황에서 종교와 과학간 생명의

연대를 일구자는 윌슨의 손 내밀음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창조신앙의

틀거지에서 볼 때 종의 멸종, 기후 붕괴는 그자체로 신학적 주제가 아

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월의 문제를 생략한 생물학자의 시각에

대해 무조건 동의만 할 수 없는법, 본고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두 신

학자의 견해를 기독교적 답변의 형식으로 고찰할 것이다. 단 진화론을

버리는 것보다 그것과의 대화를 통해 생태계 위기 극복의 단초가 있다

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는‘생물호성’을 인간 본성으로 보았던 윌

슨과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두루 아우를 수 있는 길이 될 듯하다. 여

기서는 세계관의 갱신과 더불어 인간의 재구성, 곧 생태적 자아로서 기

독교인의 재(再)주체화가 요청될 것이며 인간 책임성이 중요하게 부각

될 것이다.

1. 가톨릭신학자토마스베리의우주진화론적생태사상

지난 해 타계한 베리신부는 종래의 기독교가 자연 착취를 조장 내

지 방임하는종교였음을지적하는급진적 생태신학자이다. 윌슨의 기독

교 비판을 대부분 긍정하는 신학적 입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렇

기에 베리 신부는 자신을 신학자가 아니라 지구 신학자(Geologian)라

불러주기를 희망하였다.30) 그는 현금의 과학을 우주에 대한 새로운 계

3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37) 이를 베리 신부는 생태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갈등과 긴장이라 여

긴다. 지난세기 자본주의와 사회(공산)주의 간 갈등의 또 다른 모습이

란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베리는 수치심의 은총을 지닌 기독교인들이

생태대를 실현시킴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감당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베리 신부는 생태대로의 도약을 위해 다음4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필

수 요건으로 제시했다.38) 첫째는 지구를 국가들만이 아니라 종(種)들의

연합(The United Species)으로 보는 지구 공동체 의식의 함양, 곧 민주

주의로부터 생명주의(Biocracy)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항차UN에서비

준된‘자연을위한세계헌장’39)에 정치적 힘이실린것을주문했다. 둘

째로 자연의 한계를 고려한 경제체제의 확립 필요성을 주장했다. 자연

적자, 지구 빈곤화를 방지하려면 지구 경제학이 우선이고 인간 경제학

이 부차적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베리신부는 현금 대학교육

이 단연과의 친밀공동체를 말하기보다 자연에 대한 인간 지배를 확장

시키는 역할로 축소되었다고비판한다. 생태대를 위한대학교과과정의

전적인 혁신을 주문한 것이다. 이는爲己之學이 못되고 爲人之學으로

전락한 오늘의 한국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크다. 끝으로 종교계를질

타하는 베리 신부의 사자후 역시 우렁찼다. 자연세계가 계시경험의 우

선적 지평임을 교회가 앞장 서 가르치라는 것이다. 성서만을 우선시하

는 교회교육은 생태위기를 치유할 힘이 없다고 보았다. 생태파괴. 지구

파괴와 같은 것이 간접적이지만 절대적 악인 것을 가르치는 감수성과

책임성 함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베리 신부는 항차

인류가 기술대를 선택하지 않고 생태대로 진화하는 것을 인간의 위대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51

37) 생명 공학과 반대되는 핵심 개념인‘생체모방’에 대한 이해 및 소개는 마지막 장에

서 적시할 생각이다. 필자는 이미 앞에서도 이 말을 언급했으나 설명치 않았다. 본고

에서대단히 중요한개면임을인지하는 것이좋을것이다. 각주19)번 참조

38) 이하내용은이재돈, 앞의글, 8-9의 요약적재서술이다.

39) 이점에서 실험 단계를 넘어선‘유럽연합’은 환경과 인권을 공동헌법의 서문에서 중

요하게 다룬 첫 번째 법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J. 리프킨,『유로피안 드림』, 민음사

2009, 272-273, 384.

존재한 것을 우주를 감싸고 있는 자비, 태초부터 존재한 우주의 영적

측면이라 이해했다.34) 이는 지구가 태초부터 물질적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차원도 동시에 지녔다는 샤르뎅 식 사고의 재현인 셈이

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그에게 진화론적 우주는 계시의 토대일 뿐이란

지적이다.35) 즉 우주 자체를 신학화시키는 것이 그의 주목적이 아니라

는 점이다. 우주에 대한 새로운 과학이론이 발견되는 만큼 그에 대한

종교적 체험또한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그의 소신이었다. 베리신부

가 동양의 지혜들에 대해 열려진 시각을 담지한 것도 동일 맥락 하에

있다. 생태적 상처를 치유함에있어아시아 종교들의 영성에 남다른 기

대와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이들 동양의 긍정적

지혜에 견줘기독교의 역할을‘수치심의은총’36)이란 말로개념화한 바

있다. 인간 중심적 문화중독증(부자병, Affluenza)에 걸려 영원히 존재

하리라 믿었던 대자연 자체를 붕괴시킨 지난삶으로 부터의 해방, 새로

운 출애굽을 위해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적 수치심이란 것이다. 대

자연 속에 내주한 영적 측면(경험적 주체)을 무시한 채 함부로 살아온

인간 중심적 삶에 대한 수치감, 바로 이것을 베리 신부는 역설적으로

은총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種의 멸종, 기후 붕괴의 현실은‘생

태대’로의 도약을 위한 수치심의 은총일 수밖에 없고 그로써 기독교의

역할을 종래와는다르게 설정해야마땅할 듯하다.

그렇다면 윌슨이 제안한 생명의 연대는 이미 베리 신부에게 생태대

로의 출애굽이란말로써 그 방향과 모형이 주어진 셈이다. 생태대란 베

리 신부에게 기술대(Technozoic), 곧 인간 목적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

는 문명 형태와 대척점을 이룬다. 전자가 지구의 자기 조직 과정에 의

거한 소위‘생체 모방’의 문명이라면 나중 것은 자연을 인간 중심적으

로 개조, 인간과 기계를 합성하는 예상 가능한 또 다른 문명이라 하겠

3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34) 위의책, 36.

35) 이재돈, 앞의글, 5 참조.

36) 토마스베리, 앞의책, 150.

Page 1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전체를 無化시킬만큼 기후 임계점에 이른 현실을 걱정하며 이론을 전

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여 멕페이그는 IPCC 자료를 세밀히 분

석했고 성육의 공간인 땅(기후)의 붕괴 실상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고

지했다. 급격한 기후변동은 성육의 종교인 기독교 자체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이다. 種의멸종을 근거로 기독교인의 각성을 촉구한

윌슨과 다른 점은 기후붕괴가 제3세계에 일차적 부담일 수 있다는 정

의적 차원을 강조한데 있다. 세계내 가난한 이들이 기후 부채(Climate

debt)의 일차적 희생자란 사실이다.43) 즉 환경문제가 가난의 실상과 동

전의 앞뒤처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생물학자인 윌슨보다 정확히 짚

어 낸 것이다. 환경적자를 메우기 위해 방만했던 이전의 생활양식과사

투를 벌여야 함은 물론3세계 사람들과의 기술 및 자원의 공유(분배)

역시 인류가 감당해야할 몫이었다.44) 전 지구적GNP의 2-3% 정도면

환경폐해로 인한 빈국의 삶을 치유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날카로

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근거인 기후를 파괴한 인간 자신이

자신의 적(敵)인 것을 숙지시키는 것이1세계 신학자로서 그녀가 감당

할 과제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멕페이그는 종교의 私事化를 거부하고

‘지구에 속한 존재’라는 새 인간상을 통해 공동체성을 구현할 것을 주

창했다.45) 이는 심리적 차원으로 복음과 신학을 축소시키는 것에 대한

이의제기이기도하다. 실상개인의 至福 및 영적상태와 관계하는 하느

님은 기후붕괴 및 종의 멸종이 신학적 주제라는 사실을 각성시키지 못

한다. 그렇기에‘오이코스(Oikos)’가‘경제적’인 것과‘일체적’인 것의

뿌리임을 환기시키며 교회의 우주적 차원을 복원시키는 것이 그녀의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53

1993.

43) S. 멕페이그, 앞의 책, 34-35. 미국을 중심한 북미와 서유럽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배출량의2/3에 달하며 반면 아프리카 대륙은 3%에 불과한 실정이다. 하지만

가뭄, 홍수등 기후붕괴의폐해는이들빈국에서거듭된다.

44) 앞서 언급한 대로 멕페이그는 기후붕괴를 인간이 맞서 싸워야 할‘새로운 나찌’라

했다. 위의책, 24.

45) 위의책, 59 이하내용.

한 과업(The Great Work)이라고 했다.40) 그러나 이것은 물질주의와 소

비주의와의싸움을 동반하는영적투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음에서 다

룰 멕페이그는 현금의 생태위기를 우리가 맞서야할‘새로운 나찌’,‘새

로운 2차대전’이란 말로 명명한 것이다. 종교가 과학보다 앞서 잘 할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의 우주적 발견을 계시(초월)로

수용하되 실천에 있어 과학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에

윌슨이 종교에게생명연대를제안한 것이라고생각한다.

2. 개신교신학자S. 멕페이그의성육신적생태여성신학

진화론을 적극 수용한 베리 신부와 달리 멕페이그는 기독교를 내세

및 초월의 종교가 아닌 성육신의 종교 곧 이 땅의 종교임을 역설했다.

‘땅’이란 초월을 초월하는 공간으로서 기독교가 관심해야 할 주제란

것이다. 우주자연을‘초월의 빛’41)으로 본 것도이런 시각의 다른표현

이다. 이런 입장은 윌슨의 기독교 誤讀에 대한 정당한 답변일 수 있다

고 생각한다. 그녀의 마지막 책이 될 공산이 큰『기후변화와 신학의 재

구성』(New Climate for Theology- God, the World and Global Warm-

ing)은 종래와 같은 학문적 관심의 산물이기 보다 어린 손녀의 장래를

걱정하며 진지하게 지구의 미래를 성찰한 의미있는 책인까닭이다. 기

후를 인간 삶의 근본조건으로 설정하고 기후붕괴를 신학적 주제로 심

도있게 다룬 그의 책은 윌슨의『생명의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부족함

이 없다. 주지하듯 메타포(은유)를 신학언어의 본질로 보았던 멕페이그

는 세상을 하느님‘몸’의 은유로 읽어냈고자연세계에대한생태감수성

을 일깨웠다. 그녀의 생태신학 역시 이미『하느님의 몸』(The Body of

God)42)을 통해충분히 전개된바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지구생명

3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40) Th. Berry, 『위대한과업』, 이영숙역, 대화문화아카데미2008.

41) S. 멕페이그, 『기후변화와신학의 재구성』, 김준우 역, 기독교연구소2008, 164-165.

42) S. Mcfague, The Body of God: An Ecological Theology, Mineapolice: Rortress press,

Page 1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알던 철없는 시절을 벗고 우주 안에서의인간 위치와 그 몫을 아는 생

태적 인간은 그 자체로 종교적 존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지구에 속하는 생태적 인간상은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

게 인식할 수 있다. 우선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기(panta)에 창

조론과 성육신은 본래 나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란 것이 전제된다.51)

하느님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으나 세계를 하느님의 육화라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닌 이유이다. 세계를‘하느님 몸’으로 비유한 것도 이런 차원

이다.52) 이로써 삼라만상은 하느님을 들어내는 표지이고 임계점에 이른

기후붕괴는하느님의 고통이자 죽음으로 각인될 수 있다. 무엇보다‘하

느님 몸’으로서 세계는 神을 지금 이 땅에서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우주(세계) 안에서 神을 만나는 일이 생태적 실천의 문제로 귀결된 것

이다.53) 굶주린 이를 먹이고 온실가스를 줄이고 생명의 종을 살리는 일

이 세계내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이란 말이다. 메페이그는 바로하

느님 몸인 세계 안에서 그와 대면하는 인간학적 실천적 삶을 성육신

신학 전통의 핵심으로 여긴 것이다.54) 이는 생태적 재앙을 초래했던 인

간에게 전혀 다르게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여하튼 기후붕괴 시

대, 종의 대 멸종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서 속죄의 기독교 대신 일체

피조물이 생명의 잔치에 참여하는 우주(땅)적 기독교를 주창한 것은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55

량을뜻한다. 현재 지구상에는6-7개의아메리쿰이 있고이를기다리는 차상위 계층

(중국, 인도등)도 수없이많다. 토마스프리드만, 앞의책, 87 이하내용.

51) Illa Delio, Christ in Evolution, Newyork:Orbis books, 2008, 1-14.(서문)

52) 하지만 멕페이그의 이런 시각은 하느님과 세계를 참으로‘하나’로 인식하는데 많은

한계를 지닌다는 비판도 있다. 필자는 그 비판을 유의미하게 생각하고 있다. 세계가

‘하느님의 몸’이란 말 속에는 그것이 하느님의 정신(영)이 될 수 없다는 이원론의

잔재를 남기는 까닭이다. M.I. Wallace, Fragments of the spirits, N e w Y o r k :

Continuum press 1996. 140. 이하 내용. 이정배,『성령의 시대, 생명의 신학』, 한들출

판사 1998, 96-132. 참조.

53) S. 멕페이그, 앞의책, 113.

54) 위의책, 114.

시급한 과제였다.46) 먹고 사는 땅의 문제 곧 경제 역시도 성육신 종교

의 본질에서 멀지않다는 것이그녀의 생각이다. 육화된 성서의 하느님

이 개인적이거나인간만의 존재일 수 없고 아울러 피안적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일체 피조물들의 요구가 충족되는 至福47)의 상태야말로 기독

교적구원인 것을멕페이그는확실히 언급했다.

그렇다면 기후붕괴 원년을 살고 있는 현실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독교인의 재(新)주체성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과학자

들이 발견한150억 년의 우주사 속에서 인간의 자기이해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멕페이그의 기본 생각이다. 우주를 최초로 인식한 존재가

인간이긴 하나 인간이 결코 만물의 잣대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신들에게로 집중(축소)했던 역사관을 접어야 할 때가 이르렀다는 말

이다. 하느님이 온 우주속에 육화되었기에‘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되었다’는 생태학적명제는‘하느님은사랑이다’라는신앙적 명제와 다

르지 않게된 것이다.48) 하지만‘관계’로서의 생태학적정체성이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숲에서 나무들

이 군집을 이루나 그 속에서 개체 나무들이 사라져 버리지 않듯 그렇

게 존재하는 까닭이다. 해서생태적 자아는 결코 생태적 파시즘으로 귀

결되지 않는다. 이런 생태적 자기 정체성은‘클리넥스’관점으로 세상

살기를 거부할 것이다.49) 이전처럼 세상이 풍요로운 호텔로 상상된다면

자연 및 자원을 일회성으로 생각하는 이런 시각은 결코 교정될 수 없

다. 쉽게 사용하고 버리는 미국식‘클리넥스 관점’을 인류가 지속하는

한 지구와 같은 혹성이7-8개가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50) 해서 인간만

3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46) 위의책, 55.

47) 생태학적시편으로알려진시편 104편을참고하라.

48) 위의책, 78-81.

49) 위의책, 82-83.

50) 여기서‘아메리쿰’(Americum)이란 새로운 신조어를 소개해야 될 듯하다. 이는 미국

적 생활방식을 하나의 에너지 단위로 생각하는 계산법인 바, 하나의 아메리쿰은 국

민소득 5천불이상으로 소비성향이급증한 인구3억 5천만명이사용하는에너지 총

Page 1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유지하려는 고뇌의 표현이긴 하나 윌슨의 시각에선 여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주제일 것이다. 두 번째는 우주의 초월적 측면을 부정하는 윌슨

의 통섭(通攝)론57)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물질/정신의 이원론적 구도속

에서 정신을 물질(유전자)로 환원시키는 윌슨식의 서구적 通攝은 진정

한 의미의 통섭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즉 물질을 큰 줄기로 하여 모든

것을 그곳으로 귀결시키는 서구식 通攝으론 기독교적 초월은 물론 동

양적 직관 세계를 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58) 자신의 통섭론에 근거하

여 기독교와의 생명 연대를 이루려는 윌슨의 생각에 선뜻 손 내밀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의 두 논점은 분명 상반되는 관점

이다. 후자의 관점을 유지하면 기독교의‘덜’이원론적 관점 역시 비판

될 수밖에 없고 처음의 시각을 고수하는 경우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

강도가 약화될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논자가 택한

것은 한국적‘通涉’론이다.59) 이것은 우주의 영성(초월)적 측면을 긍정

하는 동시에 탈(脫)이원론적 관점을 철저화할 수 있는장점이 있다. 학

문들 간의 경계도 허물 수 있는 이론인 동시에 기후붕괴, 種의 멸종으

로 인한 생명위기 상황에 대한 철저한 실천적 대안일 수 있다는 판단

이다. JPIC 이래로 논자는 기후붕괴가 문명의 총체적 위기임을 인식했

고 서구 생태사상만이 아니라 동양적 지혜를 힘입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한국적 생명신학이란 것이 논자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표제

어가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런 맥락에서 논자는‘通攝’이 아닌

‘通涉’의 논리를 제시할 것이고 그 정점에 多夕유영모의‘없음’의 철

학이자리함을 강조할 것이다.

먼저 여기서‘通攝’과‘通涉’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듯 싶

다.60) ‘Consilience’의 한자어인 通攝은‘큰 줄기를 잡다’라는 뜻을 지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57

57) E. 윌슨, 『통섭』(Consilience), 최재천역, 사이언스북스 2005.

58) 최민자, 『통섭의기술』, 모시는사람들 2010. 26-27.

59) 논자는본 입장을 풀어감에 있어 최민자의『통섭의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본 장에

서는그의논지를 논자의시각에서풀어재정리 할 것이다.

윌슨의 일천한 기독교 이해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을 법하다. 그 옛날

엑카르트가말했듯‘존재를결여할 만큼무가치한것이없다’는 메시지

가 육화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본질이란 선언은 정말‘다르게’살게 하

는 힘이라 확신한다.

I I I. 기후붕괴및 종의멸종시대와多夕의 생명사상-

‘通攝’을 넘어‘通涉’으로

지난 장에서 논자는 진화 생물학자 윌슨이 기독교 측에 전달한『생

명의 편지』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 내 두 생태신학자들의 응답을 소

개했다. 인습화된 기독교의 환경 몰지각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나 대자

연의 붕괴에 직면한 사실 적합한 신학으로 거듭나려는 구성적(con-

structive) 작업 역시 평가되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윌슨 역시 이런

생태신학의 흐름을 접했더라면 자연과학자의 다소 오만함을 삼갈수도

있었을 법하다. 하지만 논자는 본장에서 서로 상반된 시각에서 윌슨의

문제의식을 재검토할 생각이다. 첫째는 윌슨적 입장에서의 되물음인

바, 우주가 시초부터 초월 내지 영성적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확증할

수 없다는 비판일 것이다. 물론생태신학자들의구성적 작업이‘지적설

계’와 달리 피조물의 비극적 상황에 주목하나 그들 역시 우주 안에서

‘계시’나‘초월’을 상정하는 까닭이다. 멕페이그의 경우 대자연을‘초

월을 넌지시 비추이는 빛이라 했으나 여전히 자연(몸)과 神(영)을 구별

하였고55) 베리 신부또한계시와‘계시적(revelatory) 경험’의 구별을 통

해 신과 자연의 일치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56) 이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3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55) 각주52) 내용참조.

56) 이는 기독교와 동양적 종교들 간의 만남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구별법이다. 필자는

이런 내용을 토마스 베리 신부의 생태신학을 전공한 가톨릭 이재돈 신부와의 대화

및 토론과정에서배웠다.

Page 18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를 보지 못할 때 서구적 생명지배 논리는 종식될 수 없다고 보았다.63)

도구적 이성, 분석적 사고, 환원론적 세계관이 생명파괴의 주범이란 생

각이다. 물질이든 사람이든 간에 개체의 존재성을 우주 흐름전체(관계

성) 속에서 보지 못할 경우 사람과 물질세계를 도구적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64) 서구 학문이 진정한 通涉, 탈(脫)경계에 이르지 못

한 이유는 근원적으로 우주가‘한생명’으로서 영적 일체성을 지녔다는

생각의 부재 때문이란 것도 같은 말이다.65) 우주 진화가 그자체로 영적

진화임을 깨닫고 만유 속의‘하나’(全一)인 그것을 자신 속에서 찾는

일이 通涉, 곧 玄妙之道로서의 함(含)을 실현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接

化群生이란 含의 논리 속에서만 현실태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白死千

難의 수고를 통한 절대‘하나’의 포착, 즉 歸一66)에로의 길을 터 닦은

분이 바로 多夕 유영모 선생이다. 多夕 선생에 대한 이해 방식이 여럿

있을터이지만 논자는 여기서 그를 通涉, 곧 含의 논리를 실현시킨‘생

태적 회심자’로 서술할 생각이다.67) 우주의 절대적‘하나’를‘없이 계신

이’로 보고 그것을 자신 속에서 체화(歸一)시켰던 多夕사상 속에서 우

리는 기후붕괴 시대의 근원적 처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多夕의 생태적 회심이 기독교적 방식으로 언표되었기에 본고에서 다루

는 것이 유용할 듯 여겨진다. 물론 시대상황이 달랐기에 多夕사상에서

생태학적 언술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재해석의 여지가 있겠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59

63) 최민자, 위의책, 44.

64) 이점에서 不然其然의 논리를 지닌 동학 역시 통섭의 사상체계라고할 수 있다. 동양

의 體用 논리가모두이런측면에서강조될필요가 있다.

65) 위의 책, 36-7.

66) 본래歸一사상은『天賦經』의 골자이다. 다석을 다룰때 천부경을 함께거론하는것이

옳으나 지면 관계상 약하는 것을 양해 바란다. 이에 대한 논자의 글은『없이 계신

하느님, 덜없는인간』, 모시는사람들 2009에 잘 실려있다.

67) 이정배,“다석 신학과 생태학적회심-빈탕한데 맞혀놀이”, 1-7. 본 논문은 일본교토

포럼의 회원들과 한국 씨알학회 회원들이 2009년 8월 목포대학교에서 공동 심포지

엄을했는데 그 자리에서발표된 것으로아직활자화되지않았다.

닌다. 이때의 通은 거느려 합친다는 의미이고 攝은끌어당겨 손에쥠을

말한다. 반면‘通涉’은 相卽相入 구조를 지시하는 바, 전체와 개체가 상

호 관통되는 실재를 적시한다.61) 전자가 생물학에 기초하여 지식의 통

일성(환원)을 목적하는반면, 후자는 생명의 전일성, 즉 우주가 의식(영)

이자 물질이라는 시각을 견지한다. 하여‘通涉’은‘通攝’이 직관의 영역

을 배제한 채 생물 제국주의에 몰입되었음을 비판한다. 기독교의 생태

사상 역시영성/지성, 영/육, 신/인간간의전일적 소통성의 부족을 지적

받을 것이다. 논자는 이를‘함’(含)의 논리로 다시 풀어 본다.62) 주지하

듯 오랜 중국 유학생 최치원이 발견한 한국 고유한 玄妙之道는 接化群

生하며 包含三敎하는 것이었다. 유불선 사상을 품으면서 그것으로만물

을 살린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函’과 구별

되는‘含’의 논리인 것이다. 앞의 것이 큰 상자가 작은 것을 품는 형세

라면 나중 것은 소금이 물에 녹아 소금물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해서

전자가‘실체성’을 전제로 한 반생명적제국주의의 틀이라면 후자는 실

체를 탈(脫)하는 전일적 소통성을 본질로 한다. 유불선의 맛을 지니면

서 그것을 아우르는 道인 까닭이다. 종교마저 생물학 영역에 집어넣으

려는 通攝의 환원성은 여기서‘函’의 논리와 같고 이들 양자를 전일적

관점에서 소통시키려는‘通涉’이‘含’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환원의 토대가 神에서 생물(유전자)로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通攝’혹은‘函’을 지향하는 한, 생명의 지배와 파괴는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적 通涉을 주창한 정치생태학자 최민자 역시 논리/직

관, 이성/영(神)성, 물리/성리, 들어난 질서/숨겨진 질서 간의 含적 논리

3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60) 이하내용은 위의책, 23-34의 요약적 재서술이다.

61) 부언하면 이 경우通은 전체라는 뜻이고 燮은건너다, 관계하다는 의미인 바, 주객의

경계가 무너지는 실상을 적시한다. 초월과 내재의소통이라고도 하겠다. 위의 책, 특

히 24-25 참조.

62) 이에 대해다음글을참고하라. 이정배,“민족과탈민족의 시각에서본 토착화 신학-

제3세대토착화론에 대한 비판적 탐색”, 한국 신학재단 발족식 발표 논문(2010년 4

월 9일) 1-25, 특히 5-7 참조. 김상일, 『동학과신서학』, 지식산업사2000, 32-58.

Page 1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一言仁’이란 말로 십자가를 풀어냈다.71) 줄여 말하면斷食과斷色으로

몸을 줄이고 마음을 늘리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쌀 한 알을 심어 천

알 만 알 수확하는 것도 이득이지만 斷食으로 나 자신을 하느님께 바

쳐 하느님 아들로 변하는 이득이 훨씬더 크다.”72) 이 경우斷食은 다시

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통섭의 기술(십자가)이 된다. 예수가 그랬듯 이

역시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는 일이기 때문이다.73) 이를 통해

多夕은 우주만물과 조화롭게 사는 中庸(알맞음)을 강조했고 그것을 인

간이 지켜야 할 禮라 하였다. 多夕이 盡物性 개념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즉 물질을 보고 욕망을 일으키지 않으려면(見物不可生)

자신에게 생명을 바치는(代贖) 물질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74)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는 일체의 것이자신을 代贖한다는 말 역시盡物

性에대한 숙고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결국 盡物性에 근거한

一食(斷食)은 인간을 생태적 자아로 회심시키는 구원사적 의미가 있다.

21세기의 화두가 평등도 자유도 아닌‘단순성’(Simplicity)에 있다는

서구 환경론자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알맞음’(中庸)을‘禮’로 인식하

는 多夕의 수행(동양)적 기독교는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삶’을 현실화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것이다. 斷色의 문명 비판적 의미 역시 짧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多夕은 인간은 동물과 달리 낮은 단계(몸적)의

욕망을 제어하려는 욕망이 인간의 본성, 곧 자연이라 생각했다.75) 하여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61

71) 김흥호,‘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 다석 선생 탄신101주기, 서거1주기

기념강연(1991, 3. 9), 8. 여기서 一食은 하루 한 끼 먹는 일, 一座는 항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 一言은 남녀 간의 관계를 삼가는 일 그리고 一仁은 어디라도 걸어 다

니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각주 62)와 67)에 소개한 논문에서 이들 각각의 생태적

의미를풀어낸 바 있다.

72) 다석학회편, 『다석강의』, 현암사 2006, 499.

73) 위의책, 446, 622.

74) 위의책, 539.

75) 多夕은 흙과돌이지닌땅적물성과생물의 그것이 인간의본성과 같지않다고보았

다. 땅으로부터 하늘의 太虛(빈탕)으로 나가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로써인간이 만물

과 소통하는존재가될 수 있다는것이다.

으나 그가 남긴 글과 삶의 족적은 우리 시대를 위한 생태학적 寶庫라

고 해도결코과언이 아닐듯하다.

多夕사상의 핵심이‘없이 있는’하느님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없이 있는’하느님은 그러나 서구 주류 담론 중 그 어느 것으로

도 쉽게 해명되지 않는다. 多夕이 그런 하느님을 인간의 바탈(本性)에

서 찾은 까닭이다. 초월이란 그에게 자신의 뿌럭지인‘밑둥’을 파고 들

어가는 일과 같았던 것이다.68) 이것은 천부경이 말하는‘人中天地一’의

하나(一)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體的 언술만이 아

니다. 왜냐면 순 우리말인 바탈(本性)을‘받 할’, 즉‘위로부터 받아서

할’것(用)이 인간 속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이면서 윤리

적 양면성을 함께내포하는 개념인 것이다. 즉 多夕의‘없이 있는’하느

님은 我와非我(하느님)를 通涉하는영적차원의 기술의 산물이다.69) 예

수는 多夕에게‘빈탕’의 아들임을 자각한 존재였다. 하느님이 자신의

‘바탈’인 것을 믿고 십자가를 통해 그와 父子有親했던 까닭이다.‘바

탈’의 아들이 되었기에 그는 절대생명(부활)을 살 수 있었다. 예수 역

시 탐진치의상징인‘몸나’(제뜻)’를 죽여소위‘얼나’에 이른존재였던

것이다. 多夕에게 십자가란 우주와의 영적 일체성을 깨치는 通涉의 기

술이었다. 하여 예수의‘얼나’는 오늘의 시각에서 가장 철저한 생태적

회심이라 불러도 좋다.70) 온우주(하나)가 자신과 소통함을 깨쳤기 때문

이다. 제 뜻 버려 자신의‘바탈’과 하나된 존재(歸一)인 예수 곧 그의

‘얼나’가 그래서 모두가 가야할 길이 된 것이다. 하여 인간 역시도 자

신 속에서 그리스도(얼나)를 탄생시켜야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하느님

영이‘바탈’로서 어느 경우든 자신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개

체 존재인 인간 누구나 십자가를 통해‘몸나’를 벗고 바탈을 불살라야

한다는 것이다(바탈태우). 여기서 多夕은 수행전통에 입각하여‘一座食

3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68) 유영모, 김흥호풀이, 『명상록』3권, 성천문화재단1998, 228.

69) 최민자, 앞의책, 37 참조.

70) 이정배, 앞의글, 3.

Page 1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게 맛(物)이 아니라 뜻(허공)을 찾으라 했다. 소유할 수도 잡을수도없

는‘하나, 곧‘없이 있는’그것에로 우리 인간을 이끌려 했던 것이다.

‘빈탕한데 맞혀노는일’바로 그것이 생태적 회심을 이룬多夕 삶의본

질이었던 까닭이다. 논자는 이런 多夕을 미래를 준비시킨 하느님의 사

람 노아와 견주고 싶다. 우주 대자연의 본질을 꿰뚫은 첨예한 생태지능

의 소유자로재해석 하고픈 것이다. 주지하듯 기후붕괴, 種의대멸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류는 생태적 영성을 넘어 대안을 마련할 수 생태

지능의 소유자를 필요로 한다. 인간적 척도-필요/불필요-를 넘어생명

일체를 품은 자연과 꼭 닮은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감성, 지성 그리

고 영성이 한없이 소중하다. 해서『코드 그린』의 저자 프리드먼은 우리

모두가 노아가 되고 자신들이 공간을 방주로 만들자는 제안을 진지하

게 한 바 있었다.80) 붕괴 및 멸종이란 단어가‘멸종(붕괴)’되기를 바라

서 일 것이다. 이런 혜안을 多夕을 잉태한 한국적‘通涉論’에서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마지막 장을연다.

IV. 한국적通涉論의시각에서본‘에코지능’과‘생체모방’-

생태영성과윤리의새 차원

익히아는대로 성서의 노아는‘놋’이란지역에서가인이 일군도시

문화의 몰락이후 새 문명의 비전을 선포한 중요한 인물이다.81) 신화적

언표이긴 하나 노아는 당대의 파멸을 감지할 만큼 감수성이 뛰어난 존

재였다. 세상을 향한 神의 뜻을 예감하는 일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기존 가치관과 달리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당시 노아 역시 방주를 만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63

80) 토마스 프리드먼, 앞의 책, 434-436. 저자는 우리 시대가100만 명의 노아와100만

척의방주를 필요로하고있다고 말한다.

81) 이에 관한 다음 책을 참고하라. 자크 엘룰,『도시의 의미』, 최홍숙 역, 한국 로고스연

구원 1992.

몸적 사랑이 필요하나 실성(失性), 곧 자연을 상실한 존재가 되지 않도

록‘마음은 넓게 갖고 몸은 꼭 졸라매야 한다’(博而約之)고 말했다.76)

정(情)이 간직되어야 마음이 놓일 수 있고(放心) 그로써 자신의 바탈을

태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까닭이다. 多夕은 이런 이를 일컬어‘마음

씻어난 이’라 하였다.77) 자신의 몸을 꼭 졸라(꽁문이) 마음을 저‘위’에

꼭 대는(꼭대기) 사람이 점점많아지기를소망했다. 우주와의 소통능력

이 그로부터 비롯함을 믿고, 알기 때문이다. 뜻 글자인 한문의 두 단어

‘癌’과‘靈’을 일견해 보아도 多夕의 이런 뜻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의미가 상반된 두 단어에는 입‘口’가 저마다3개씩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여기서 앞의 입은 자신을 채우려는 욕망을 상징하고 나중 것은

비움을 위한 기도를 뜻한다. 즉 癌은 세 개의 입으로 산(山)처럼 많이

먹은 결과라면 靈은 아래글자 巫가 지시하듯 하늘과 소통하려는 인간

이 하늘을 향해 비(雨)가 내려주기를 간청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땅의 생명을 위해서 말이다. 같은 입(口)이지만 그것으로 하는 일이 달

랐기에 결과가 같을수 없음은 당연지사이다. 자연과 여성의 운명이 동

근원적인 것을 밝힌 생태여성주의 시각에서도 多夕의 斷色을 부정적으

로 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78) 자연이 어머니, 마녀를 거쳐 창녀로 비유

된 과정을 익히 아는차원에서 斷色이 경제를 위해 4대강을 마구파헤

치고 갯벌을 메워 상업 용지를 만드는 失性한 인간에 대한 일침임을

생각할 일이다. 하지만 多夕은 하느님은 언제든‘없이’있으나 인간이

항시‘덜’없기에‘몬(物)에 맘(心)이 살아 맘이 자격을 상실했다’고 안

타까워했다.79) 그럴수록 그는 허공(비탕)만이‘참’임을 강조하며 인간에

3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76) 유영모, 박영호편, 『다석어록: 죽음에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344.

77) 유영모, 김흥호풀이, 『다석일지공부』2권, 2001 솔 출판사, 562-563.

78) C. 머찬트,『자연의 죽음-여성과 생태학 그리고 과학 』, 전규찬 外 역, 미토 2002 참

조. 물론 혹자는 다석이 解婚을 통해 性을자식 낳는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하기

도 한다. 그러나그보다 多夕을깊게재해석할일이다.

79) 다석학회편, 앞의책, 622.

Page 1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 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

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85)“…깨끗은 깨끝입니다. 상대계가 끝이 나

도록깨트리면진리인 절대가 나타납니다. 참 나를깨닫는 것이지요. 깨

끝이면 아멘입니다. 다 치워야지요. 없도록 치워야지요. 덜 치워 덜 없

는 것이 더러운 것입니다.”86) 이런 多夕의 생각은 지식과 영성, 물질과

생명을 通涉한 결과물이다.‘없음’(빈탕)이 생명 그 자체인 神의 본체

이듯 그 활동(작용)인 우주 및 인간 역시 없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白死天難의 지난한 과정이 있어야 이런 영성적 의식이 생겨난

다. 多夕에겐 몸을 줄였던 십자가가 바로 통섭의 기술이었으며 부활이

지성과 영성을 아우른 일상의 삶 자체였던 것이다. 이제마지막으로歸

一에 근거하여 개체와 전체를 아우른 多夕의 通涉的 영성, 곧‘빈탕한

데 맞혀 사는’삶의 생태적 구체성을 윤리적 관점에서 언급할 차례가

되었다. 多夕의 생태적 회심의 본질의 현실적, 실제적의미를 묻고자 함

이다. 이를 위해먼저 최근출판된『에코지능』87)과『생체모방』88)의 두 책

의 내용이 크게도움이 되었음을밝힌다.

우선‘빈탕한데 맞혀 사는’일은 생태계와 공존하며 수백 년을 살아

온‘오래된 미래’의 생활양식일 수 있다.89) 그들의 에코지능이 현대(과

학)적 지성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이 앞의 책의 결론이다. 옛

지혜인 에코지능이 지성과 영성의 通涉으로서 온 생명을 지향하고 있

는 까닭이다. 논자는여기서 에코지능의 두 측면을 적시코자 한다. 첫째

는 생체모방(Biomimicry)의 핵심으로‘자연 따라살기’이고 둘째는 환

경 비용을 고려하는 윤리적 소비능력이다. 전자는 인간이 자연의 한계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65

85) 다석학회편, 앞의책, 529

86) 김흥호, 『다석일지공부』2권, 383.

87) 대니얼 골먼, 『에코지능』, 이수경 역, 웅진지식하우스2009.

88) 재닌 M 베니어스, 『생체모방』, 최돈찬외 역, 시스테마2010.

89) 대니엘 골먼, 앞의책, 71-84 참조.

들며 우스꽝스런 존재로 폄하되었다. 기후붕괴가 현실임에도 생태론자

들이 여전히 이 시대의 소수자인 것이그때의 정황을 상기시킨다. 노아

의 방주는 미래 세대를 위한 종의 다양성을 보전하는 역할을 감당했

다.82) 이를위해그는有/無用, 필요/불필요라는 인간적 가치척도를멀리

해야만 했다. 일체의 존재가 새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만 했던 까닭이

다. 성서가 말하듯40일간의 대홍수 이후 방주 밖으로 나온 노아는 하

느님께 예배하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죄의 강도를 높이는 이전의 도시

문화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가 새문

명의 비전으로 선포한 것은‘사람들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지 말

것’과‘동물(자연)을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83) 하지만 당시로

서는 이것은 대단히 낯선 요구였다. 그러나 노아는 처음 창조 時보다

더 큰 축복을 약속하며 그렇게 살 것을 주문했다. 하여 이 명령은 믿음

과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계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神께서 일방적으로 희년법을 선포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담지 않았고 온갖 갈등(차별)을 야기하며 생존했

을 뿐이다. 그 결과 인간을 비롯한 전 피조물이 탄식하는 지경에 이르

렀다고 로마서가 전언한다.84) 우리 시대가 초래한 기후붕괴와 종의 멸

종이 성서증언의 실상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논자는 多夕의 생태적

회심을 재차 주목한다. 그가 우리 시대를 위한 노아라는 생각 때문이

다. 소유(Having)와 존재(Being)의 상호 다른 삶의 양식을 배태한 인

간에게‘없이 있는 하나’, 곧 빈탕(허공)에 대한 깨침은 소유욕을 벗겨

내는 급진적 길이다. 지성적 차원의 通攝‘과 있음’에 근거한 서구의 어

느 종교사상도 多夕의 생태적 회심처럼 철저할 수 없을 듯하다. 이어진

多夕의 말 들 속에서 세상을 구할 노아의 일면이 보인다.“꽃을 볼 때

3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82) 토마스프리드먼, 앞의책, 203 이하내용.

83) 창세기9장1-7절 참조.

84) 로마서8장 18-25절 참조. 창세기9장과 로마서8장을 연결시키는 신학적 입장을 논

자는 독일성서학자E. 케제만에게서배웠다.

Page 1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를 힘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말이 가능하다. 한계에 대한 이런 성찰은

생체모방과 생명공학사이에서, 그리고 기후붕괴와種의 멸종의 상황에

서 인류가 유념해야 할 지혜가 아닐 수 없다.『생체모방』에서는 특별히

인류의 농사법을 본보기로 인류 문화의 향방을 바꿀것을 제안한다. 소

위‘자연 모습대로 농사짓기’가 그것이다.94) 최근 한국도 점차 산업형

농업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 토양의 유실은 물론 그 파괴 정도가 심각

하다. 농촌을 노인들만의 거주처로 만들었으며 폐가 및 폐교가 속출하

고 있는 상황이다. 이 모두는 다년생 대신 일년생을, 다품종 대신 단종

재배를 선호한 기업농업의 탓이다. 주지하듯 대다수 일년생 생물은 유

전형질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전자 조작 처리되어 있다.

하여 소득높은 변종을 키우기 위해 농가 역시도 빛을 내어 기업을 흉

내 내며 대량 생산을 목적하게끔 되었다.95) 이미 농작물을 토양이 아니

라 석유가 키운다는 말도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값비싼 농기계와 살충

제, 비료등의비용이 농가부채를 가중시키는 까닭이다. 농축산업이 제

1의 오염산업이 된 것도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다.96) 이런 현실은 자연

의 패턴을 파괴한 오만한 행위로서 생체모방과는거리가 한참 멀다. 이

는 자연과정과의 협력내지 동조가 아니라 일종의 전쟁인 것이다. 토양

이 오염, 침식되고 농작물이 약화되어 생태적 자본을 결국에는 한없이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점에서 생체모방은 생태계의 성장 구

조 자체를 모방하는 새로운 기술을 제안했다.97) 무질서 하에서도 생태

계의자기 조직화하는 힘을 믿자는 것이다. 이들이 발견한 인간이 모방

해야 할 자연계의 본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자연계의99.9%가 다년생

식물로 구성되었고種의 다양성이 해충을 스스로 조절하고 필요 성분

을 상호 공급하며 철마다 바뀌는 식물들이 스스로 거름이 되는 순환구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67

94) 위의책, 32.

95) 위의책, 38-39.

96) 위의책, 41.

97) 위의 책, 49.

내에서 자연을 표준삼는 문화를 창출하는 일이며 후자는 환경위기에

둔감하고 무능한 인간 두뇌를 깨워 소비와 생산 활동이 지구환경에 미

칠 영향을 성찰하는 삶의 양식을 말한다. 이런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한

전제이자 토대가‘빈탕한데맞히려는 多夕의 십자가, 곧‘一座食一言仁’

에 있다고 확신한다. 우선 생체모방은 자연이 인내의 한계를 보이는 상

황에서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90) 인간이 멸종시킨 뭇 생명 종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앞날을 점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인간은 지구 속에

서 지속가능한 삶의방식을 애타게 찾았던 바, 그 답이바로생체모방,

자연 따라사는 것이었다. 주지하듯 자연 속의생명체는 지구를 오염시

키지 않았고 미래를 저당잡지도 않았다. 생체모방은 지금껏 인간이 그

래왔듯 자연지배나 개조, 착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로지 자연으

로부터 배운것을토대로 새 문화를 열려는 시도이다. 자연계를 오롯한

스승으로 여기자는 말이다.91) 들의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를보라는 성

서의 가르침도 이런뜻을 함축한다. 인간 세계가 자연을 닮고자연처럼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지구는 인간을 吐해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구

가 인간에게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구환경에 적응해야 함을

일컫는다. 생태적 자본을 거의 손실하지 않고 지금껏 생존한 자연생명

체, 바로 그들의 생존방식에 적합한 기술을 찾는데 인류 미래가 있음이

분명하다.92) 그렇기에 생체모방은 생명을 물질로 보고 그 본성을 조작

하는 생명공학과는 근본에서 다르다. 이는 보편적‘한계’에 대한 인간/

자연 간의인식의 차이에서 비롯한다.93) 지금껏 인간이‘한계’를 극복해

야 할 과제로 인식했으나 자연은 그것을 정중히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한계가 늘 상 도전의 영역이었다면자연은 그것 안에서 오히

려 생존 능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점에서 자연생명이‘한계’그 자체

3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90) 재닌 M, 베니어스, 앞의책, 14-15

91) 위의책, 18.

92) 위의책, 24-25

93) 위의책, 23.

Page 1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자는 인간 두뇌가 환경위기 같은 것에 둔감하고 무지한 사실을 직시하

고 윤리적 소비의 중요성을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100) 에코지능의 척도

가 윤리적 소비 여부와 有關하다는 판단에서다.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반(反)생태적 다국적 기업으로부터의 탈주 역시 에코지능의 역할

인 것이다. 주지하듯 시장의 물건어느 하나에도 숨겨진 비용이 존재하

는 법이다.101)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에는 공장 노동자들의 대

가, 소비자의 건강, 지구 환경 부담 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소비자의

경우 값싼 것을 선호하나 실상 그 속에 숨겨진 비용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싸구려 재료로 만들었으며 적은 임금을 지불했거나 제3세계로부

터 장거리 수입된 상품일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무심코 사먹는

커피 한 잔 속에도 공정무역의 여부를 묻는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이

점에서 에코지능은 숨겨진 비용까지 계산하는 시장의 투명성을 위해

대단히 긴요하다.102) 일상적 생산과 유통그리고 소비가 지구 환경에 악

영향계산 하는 것이‘에코지능’의 역할인 까닭이다. 하지만 에코지능은

결코 생물학적 두뇌와 일치되지 않고 지성 차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다. 저자가 감성지능, 사회지능을근거로 에코지능을 논한것도이런通

涉적마인드로인함이다.103) 인드라그물망을에코지능과연계시켜자주

언급하는것도 같은맥락일 것이다.104) 분명한 것은인류의 미래가치인

‘녹색’이 상태가 아니라 동사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105) 덜 소비

하는 것과 숨겨진 비용을 계산하는환경 영향 평가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가야 하는 까닭이다. 인간 두뇌가 생산 및 구매 방식과 그로

인한 부정적 영향 간의 거미줄 같은 연결고리를 인식 못하는 것이 저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69

100) 천규석, 『윤리적소비』, 실천문화사2010. 참조.

101) 대니엘 골만, 앞의책, 24.

102) 위의책, 26.

103) 위의책, 25.

104) 위의책, 40-41.

105) 위의책, 56.

조이다.98) 이것이 대자연의 현실이라면 인간 농업 역시 생태계 자본을

유지하는 자연의 경작법을 모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생체모방』에서

는 이에 근거한 농사법을 소개하며 구체적 실례를 상당한 분량으로 기

술하고 있다. 본고는 이 모두를 소개할 이유와 여유가 없다. 하지만 있

는 그대로의 자연을 볼 수 있는 눈, 자연따라 하기의 영성의 소중함을

강조할 필요는 한 없이 있다. 오로지 인간중심적 적색 은총의 대속 사

상에 골몰한 나머지 자연이 주는 녹색 은총의 감각에 눈 어두워진 기

독교인들에게 생체모방은 충격이었을 듯싶다. 당분간 성서보다는자연

에 집중하라는 베리 신부의 조언도 떠오르며 우주자연을 초월의 빛으

로 본 멕페이그도 상기된다. 하지만 多夕이 강조한‘盡物性’만큼 생체

모방의 종교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자연 생명이 인간을 代贖한

다는 그의 생각 역시도 생체모방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자연

따라 살기’는‘빈탕한데 맞히려는’通涉적 생명의식 없이 단순 모방만

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사안인 까닭이다. 오로지‘생각하기 위해 세상

에 왔다’고 믿은 多夕이 평생 벌을 치며 농사꾼으로 살았다는 것의 의

미가더한층 소중하게다가온다.

같은 시각에서 에코지능은 윤리적, 친환경적 소비의 주제를 부각시

킨다. 그러나『에코지능』의 저자는 인간의 생태적 삶에 무게 중심을 두

기 보다는 자본의 확장을 위해 환경마저 이용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환경문제의 실상을 보도록 안내한다. 하여 그는 친환경 제품이

란 말도 신뢰치 않는다. 대다수의 경우 그것들은‘그린워싱’( g r e e n-

washing)99)인 경우가 많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실제로 유명세 있는

배우를 소비자의 판단을 현혹시키는 광고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

여 저자는‘악마가일상 곳곳에 숨아있음’을 전제로 제품의 생태적 투

명성을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에서 밝히는 노력을 경주했다. 하지만 저

3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98) 위의책, 50-52.

99) 대니엘골만, 앞의책, 11. 50.이 말은외면상 그린 이미지를앞세우나 실제로는환경

피해를 가중시키는기업의 행위를지칭한다.

Page 1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능의활성화를 위한 가시적 노력을 행사해야만 한다. 탄소 발자국의비

용을 계산하여 환경헌금으로 봉헌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반가운 일

이긴하다. 그보다 논자에게 중요한 것은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화시

켰는지 아니면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 시켰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회개하는 일이다.110) 세상의 변화에 뒤떨어진 교회도 문제지만 잘못된

세상가치를 반영시킨‘세상적인너무도세상적인’교회현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작지 않음을 보기때문이다. 하여 토착화 신학자로서논

자는 궁극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通涉의 영성을 갖기를 소망한다. 영성

의 폭을 넓히고 하느님을 한없이 작은 울타리 속에 가두지 않기를 바

라는것이다.

나가는글

언제부터인가 논자는 진화 생물학자 윌슨의『생명의 편지』에 대해

답하는 글을쓰고 싶었다. 그 내용이 틀려서가 아니라 뭔가부족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명 종의 다양성을 비롯하여 생태문제

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실천가인 것을 알았을 때 존경할 마음까지

일었다.『생체모방』을 읽으며 생태계 회복을 위한 윌슨의 선도적 역할

에 신학의 입지가 작아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회정치적 안

목이부족했고 多夕이 보인 치열한 십자가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

히 생물학적 환원주의 크게는 서구 학문적 제국주의에 안주한 듯 여겨

지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베리 신부와 멕페이그의 생태신학으로 윌슨

의 물음에 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종교와 과학 간 대립(갈

등)의 대화법에 익숙한 윌슨이었기에 이들 신학자들의 견해가 충족한

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논자는 그의 通攝을‘通涉’으로 비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71

110) 마커스 보그존 도미니크크로산,『첫번째 바울의 복음- 어떻게 급진적 바울이보수

신앙의우상으로둔갑했는가?』, 김준우역 2010 참조.

자의 걱정이다. 인간 두뇌 시스템에 내재된 기능만으로는 이들 상관성

과 그에 따른 위험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106) 이는 환경적 위협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작은 단위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에서 다가

오기때문이다. 자유시장경제체제속에서 기업은 이익, 소비자는가격

에만 관심하도록 학습된 것도 또 다른 이유일 듯하다. 하지만 인류는

가해자면서 피해자인 슬픈 진실을 함께 극복해야 할 절대적 순간에 봉

착해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생체모방’에서 배웠듯 인간의 활동

과 자연계간의 복잡미묘한 상호작용을 인식할 줄 아는 힘, 에코지능이

다. 이런 근원적 힘은 서구의 환원적 지식에 의해 오래전 난파되어 버

렸다, 오로지‘오래된 미래’를 사는 토착민들이 그 맥을 잇고 있을 뿐

이다.107) 인간과 우주 그리고 神적인 것의 상호 소통을 통해 일체 생명

체와 공감할 수 있는 힘, 通涉의 영성이 바로 그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이점에서 盡物性 또한 에코지능의 다른표현일 수밖에 없다. 비록자본

화된 현대 문명 속에서 인간의 뇌가 반(反)생태적 행동을 제어하는 시

스템을 망각했으나108) 그럴수록 두되 시스템의 약점을 후천적으로 보완

하는 것이 종교에게 맡겨진 책무가 된 것이다. 이점에서‘一座食 一言

仁’을 통해 근원적‘하나’,‘없이 있는’존재를 자신 속에서 깨친 多夕

의 삶과 지혜는 생태적 능력을 집단지능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제시

한다.109)‘덜’없는 인간을 질타하며‘빈탕한데 맞혀노는’것을 인간 삶

의 궁극처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길을 가다스스로 길이

되는 自贖의 길을걷도록 한 것이다. 이런맥락에서 에코지능이 집단지

능으로 확대 재생산될 경우 인류 산업 시스템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올 것이며 지구 환경에 미칠긍정적 영향이 상상을 불허 할 듯싶다. 최

소한 기독교가 우주적 구원을 선포하는 종교라면 이런 시기에 에코지

3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06) 위의책, 61.

107) 위의책, 73.

108) 위의책, 78.

109) 위의책, 79-80.

Page 1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주제어

생명을 위한 연대, 자연따라 살기, 에코지능, 우주적 진화론, 성육신적

생태신학, 통섭,

윤리적 소비, 기후붕괴 시대, 부자병, 아메리쿰, 오이코스, 생태대, 생명

주의, 생명의 편지.

Die Kooperation für das Leben, Das Leben nach der Natur, Die

ökologische Geisteskraft, Die gemäß der Menschwerdung Gottes

ökologische Theologie, Conscilience, Der ethische Verbrauch,

Die Zeitalter des Zusammenbruches des Klimas, die Krankheit

des Reichen, Amerikum, Oikos, Biokratie, Bioregion, Der Brief

des Lebens.

접 수 일 2011년 4월 8일

심사 (수정일) 2011년 5월 10일

게제확정일 2011년 6월 1일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73

판하는 한국적 시각을 소개했다. 이로부터 윌슨은 물론 두 신학자들의

견해와도 변별력이또렷해졌다. 평소서구 생태사조를 한국적 세계관의

빛에서 재해석했던 필자로서는‘通涉’이 반 생태적 인류 문명의 재(再)

정위를 위해본원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정점에 한국

고유한 사상가 多夕의 기독교 이해가 자리했다. 비록 多夕이 通涉이란

단어를 몰랐고 생태에 관한언급을 하지않았으나『천부경』으로까지소

급되는 사상적 맥락에서 多夕사상과 通涉은 상호 호환될 수 있는 개념

이었다.111) 그렇기에 多夕신학의 通涉的 영성에 힘입어 생태적 의미를

밝혔고 그것을 논자가 최근 읽은 두 책『에코지능』과『생체모방』의 내

용으로 牽强附會하였다. 다소 엄밀치 못한 논리이긴 하나 多夕의‘없이

계신’하나에 대한신학이야말로현실극복을위한일체대안적 노력에

있어 ‘Subsistence Perspective’112)를 제공한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소유

지향적 인간 이해를 종식시키려면‘덜’없음을 더러움, 곧 죄로 인식하

는 이 논거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것

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기후붕괴 및 種의 멸종 시기에 多

夕만큼 철저히 생태학적으로 재해석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가장 근

원적인 것을말했다고 그를小乘으로평가하는 것은옳은일이아니다.

단지 삶 권력과 맞서는 다른 길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자연 따라 사는

것은‘없이 있기’를 바랄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시대에게 필요한 에

코지능 역시通涉의 눈이 있어야 정확하게 지속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

는 것이논자의 확신이다.

3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111) 이에관한필자의 글 참조. 『없이계신하느님, 덜없는 인간』, 3장 논문참조.

112) 반다나 시바 外,『에코페미니즘』, 손덕수, 이난아 역, 2000, 386 이하. 천규석, 앞의

책 98-99에서재인용. 이 책에서는 이 개념을‘자급적관점’이라해석했다.

Page 1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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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8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dieser Hilfe konnte der Autor die Wirklichkeit von Conscilience im

Blick auf den Gedanken von als Nichts seiende Gott bei Dasok, Yu

Y o n g-Mo konkreitisieren. Zum Schluss stellt der Autor die These

auf, dass die Menschheit nach der Natur leben sollte, indem er

ökologische Geisteskraft entwickelt. Dabei erweist sich die Kon-

kretiheit dieses Lebens als den ethischen Verbrauch.

이정배, 기후붕괴와種 멸종시대의 신학과 윤리 377

Theologie und Ethik im Zeitalter des Zusammen-bruches des Klimas und der Ausrottung der Spezies

Lee, Jung Bae

Professor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Seoul, Korea

Die folgende wissenschaftliche Arbeit “Theologie und Ethik im

Zeitalter des Zusammenbruches des Klimas und der Ausrottung der

Spezies” ist als einen Anwortsbrief auf den “Brief des Lebens”

geschrieben, der von E. Wilson, Autor von “Conscilience” gesch-

rieben ist. E. Wilson als der Evolutionsbiologe fordert von den

Christen nicht nur die Rettung der Erde aus der Ausrottung der

Spezies, sondern auch in Zusammenarbeit miteinander die Beschüt-

zung der Natur, indem er kritisiert, dass das Christentum die Krisis

der Natur nicht wahrnimmt und nicht kennt. Obwohl der Autor in

diesem Aufsatz die Thesen von Wilson akzeptiert, kritisiert er an der

Grenze der Thesen. Dabei versucht er die christliche Antwort sowohl

durch die kosmologisch-evolutionistische Theologie bei Thomas

Berry, dem katholischen Theologe, als auch durch die gemäß der

Menschwerdung Gottes ökologische Theologie bei Sally Mcfague,

der Protestantischen ökofeministischen Theologin zu geben.

Insbesondere, die Lebenstheorie bei Manja, Choi, die an der Theorie

von “Conscilience” bei Wilson als einem abendländischen Reduk-

tionismus kritisiert und “Conscilience (統攝)” als “Conscilience (通

涉)” zu korrigieren vorschlägt, leistet diesem Aufsatz Beistand. Mit

3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로 한다.

제6조 회원의가입

제5조의 자격을 갖춘 자로서 본 회에 가입하고자하는 자는 소정의 입회원

서를제출하여총회의허입을 받아야한다.

제7조 회원의 권리

본 회의 정회원은 의결권,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지며 본 회의 각종 학술

활동에참여할 수 있다.

제8조 회원의 의무

본 회의 회원은 회칙을 준수하고 소정의 회비를 납부해야 하며 본 회가 주

최하는학술대회에참석하고학회지에기고해야 한다.

제9조 임원

본 회는 학회운영을 위하여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대외협력부장, 편

집부장, 감사각 1인의 임원을 둔다. 필요시 학문적 교류를 위하여 지회와 지회

임원을둘 수 있다.

제10조 선거와 임기

본 회의 임원은 총회에서 2인 이상의 추천과 최다수 득표로 선출하고 임원

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회장과 부회장임기는각각 1년으로한다.

제11조 총회

본 회의 정기총회는 매 년마다 회장이‘한국기독교공동학회’기간 중 소집

하고 회칙 수정, 임원 선거, 사업 및 예, 결산 승인, 회비 결정, 회원 허입, 특별

회원 추대 등의 회무를 처리한다. 임시 총회는 회장이 학회 운영을 위하여 불

가피하다고 판단되었을때에임원회의결의에따라 소집한다.

한국조직신학회회칙 379

한국조직신학회회칙

제1조 명칭

본 회는“한국조직신학회(Korean Society of Systematic Theology)”라 칭한

다.

제2조 목적

본 회는 회원 상호간의 학문적 교류와 공동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조직신학

을 정립 발전시킴으로써 한국과 세계의 교회와 신학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사무실

본 회의사무실은회장이임직하고있는학교나근무지에두는것을 원칙으

로 한다.

제4조 사업

본 회의 목적 수행을 위하여 연구발표 및 학술대회, 학회지 출판 및 기타

사업을 한다.

제5조 회원의자격

본 회의회원은 다음과같다.

1. 정회원: 본 회의 정회원은 조직신학 및 인접 학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거나 또는 대학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

고 있는 자로한다.

2. 준회원: 준회원은 조직신학 및 인접 학문분야에서박사학위 취득 과정에

있는자로 한다.

3. 특별회원: 특별회원은임원회의제청에 의해서 총회에서허락을 받은 자

3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제1조 명칭과 사무실

본회는 한국조직신학회 회칙 제13조에 따라 한국조직신학회 편집위원회라

칭하며, 사무실은 편집위원장이 소속된 학교나 근무지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조 목적

본회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에 소속된 회원들의 학문적 교류를 원활히

하고자 회원들의 연구결과를 수록한 조직신학 전공 학술지를 출판하는데 있다.

또한이러한 출판사업을통해 회원들의연구 업적이소속기관 및 학계에서공

정하고객관적으로평가받도록 협조하는데있다.

제3조 위원 구성임기

본회의 위원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추천한 약간 명으로 구성된다.

위원장은 본 학회 편집부장이 담당하며, 편집위원은 국내외 대학에서 조직신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일 전공분야에서5년 이상 연구활동을 계속한

자로 연구 및 학술 실적이 우수한 자여야 한다. 편집위원의 임기는2년으로 한

다.

제4조 회의 소집

편집위원회는 편집위원장이 소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시 인터넷

상에서 회의할 수 있다. 또한 편집위원 과반 수 이상의 요청으로 회의를 소집

할 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381

제12조 임원회

임원회는 회장이 필요시 수시로 소집하고, 총회에서 위임된 업무를 처리한

다.

제13조 편집위원회

편집 위원회는 본 회의 학술지 간행 및 출판사업을 주관하며 편집위원회에

관한 규정은따로둔다.

제14조 재정

본 회의 재정은 회원의 입회비와 연회비, 찬조금 그리고 기타 수익금으로

한다.

제15조 부칙

1. 본회의 회칙은통과일로부터시행된다.

2. 회칙은 정기 총회에서출석회원2/3 이상의 찬성에 의해서 수정할 수 있

다.

3. 본 회칙에 명시되지 않은사항은정기 총회및 임원회의의결과통상 관

례에따른다.

3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도서관 및 학문 연구를 위하여 구입을 희망하는 자에게는 회비에 상당하는 후

원금을받고 배부한다.

제12조 발행 및 인쇄

본회 학술지의 발행인은 한국조직신학회회장으로 하고, 인쇄 출판 및 배부

에 관한세부 사항은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13조 판권

본회에서 출판된 모든 글의 판권은 저자가 소유한다. 단, 인터넷 출판의 경

우 학회가그 판권을소유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 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383

제5조 업무

편집위원회에서는 한국조직신학회 정기학술대회 주제에 대한 논문 기고자

를 위촉하고, 논문 심사위원 선정 및 우수논문을 심사하며, 한국조직신학회의

모든 출판업무를주관한다.

제6조 학술지명칭

본회가 편집 출판하는 학술지는「한국조직신학논총」(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이라 칭한다.

제7조 학술지발간

「한국조직신학논총」은 매년 3회( 6월 3 0일, 9월 3 0일, 12월 3 0일) 발간함을

원칙으로한다.

제8조 학술지 편집

논문은 투고순서에 따라 심사에 회부하며, 책의 구성 및 편집에 관한 모든

사항은 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9조 통보

편집위원회는 투고논문의 접수, 심사 및 게재 여부에 관련된 사항을 투고자

에게 통보한다.

제10조 원고료 및 게재료

편집위원회는 학술대회를 위하여 채택한 특별한 주제에 관해 연구 위촉한

논문에 대하여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불하고, 외부 연구비 지원에 따른 연구 결

과물 게재시편집위원회에서정하는소정의 게재료를납부해야한다.

제11조 학술지배포

본회 학술지는 연회비를 납부한 한국조직신학회회원에게 무료로 배부하며,

3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4. 고전어(히브리어, 헬라어)는 원어 사용을 원칙으로 하되, 음역할 수도 있

다.

5. 내용구분은I, I I → 1, 2 → 1), 2) → (1), (2) → a), b) → (a), (b)의 순으로

한다.

제6조 각주와 참고문헌

1. 논문은 각주를 사용해야 한다. 각주 및 참고문헌의 양식은 표 1을 참조

한다.

2. 논문에서언급된 것만을참고문헌목록에 포함한다.

제7조 외국어 초록

1. 내용

논문의목적, 연구방법론, 연구내용및 연구성과등 제시

2. 분량

A4 1매 이내혹은외국어 300단어내외

3. 제목및 인적사항

논문 제목, 성명, 학위, 직위, 소속, 소재지를기재

예) Kyun-Jin Kim, Dr. Theol.

Professor, College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비전임의경우직위를 Lecturer로 표기함

제8조 주제어

한국어와외국어주제어를각각 5개 이내로 작성한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85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고자 하는 자가

준수해야할사항을 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자격

본회 회원으로서 정기적으로 본회 소정의 연회비를 납부하는 자는 누구든

지 투고할 수 있다. 본회 회원이 아니라도 편집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투고할

수 있다.

제3조 투고신청서양식

투고자는 본회‘논문투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투고신청서 양식

(양식1)은 조직신학회홈페이지에서다운받아사용할수 있다.

제4조 구성요소

투고논문은 다음의 5가지 구성요소를 갖춰야 한다. 1. 논문 2. 각주 및 참고

문헌목록 3. 외국어 초록(abstract) 4. 한국어 주제어 5. 외국어 주제어( k e y

word)

제5조 논문

1. 모든 논문은 한글 혹은 외국어로 된 다른 학술지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

어야한다.

2. 본회학술대회발표원고도 규정에따라투고해야한다.

3. 「한국조직신학논총」과「한국기독교신학논총」등 학술지에 관련된 선행

논문들이 있을 경우, 이를 참고하여 인용하고, 각주, 참고문헌에 그 사실

을 표기한다.

3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논총」각주및 참고문헌 작성법 (투고규정표 1)

*각주 및 참고문헌에서의 영문 표기는“시카고 스타일”을 따른다.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th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각주 및 참고문헌 작성에 있어서의“시카고 스

타일”의 대한 간단한 용례(Chicago-Style Citation Quick Guide)는

다음을 참고할 것: http://www. chicagomanualofstyle.org/tools_

citationguide. html

I. 한국어 학술지

1. 각주표기원칙

·논문의제목은 쌍 따옴표(“ ”)로, 학술지나 정기간행물 이름은 외 꺽쇠

괄호(「 」)로, 한국어 도서의 경우는 쌍 꺽쇠괄호(『 』)로 표기한다. 단,

외국어책 제목과 학술지제목은모두 이탤릭체로표기한다.

·동일한 논문이나 책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경우: 앞의 논문(또는

앞의책), 30.

·동일 저자의 논문이나 저서를 각주 한 개 이상 건너 뛰어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 인용의경우

황승룡,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 위치,”「조직신학논총」6

(2001), 101-119.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 n t e r-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87

제9조 원고분량

투고 논문(본문10p, 각주9p, 바탕체, 줄 간격160)은 A4용지 15매 이내로

작성한다.

제10조 제출방법

투고자는‘논문투고 신청서’(양식1)와 함께 논문을 E-mail로 제출함을 원

칙으로 한다.

제11조 제출기한

원고마감은출판 3개월전으로하고, 제출된원고는반송하지않는다.

제12조 게재논문제한

논문은연속으로게재되지않는 것을원칙으로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기타자세한 사항은관례에 따른다.

2. 본 규정은 편집위원2/3 이상의 찬성으로개정할 수 있다.

3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배치하는것으로 하되, 반드시각주에서사용된자료만을 제시한다.

2) 국문 자료의 경우 저자의 성명에 따라 가, 나, 다 순으로, 영문 및 외국

자료의경우는알파벳순으로제시한다.

3) 저자 및 책명에는 마침표를 붙이고, 출판지, 출판사, 출판 연도를 표기함

에 있어서는괄호를 삭제한다.

4) 외국인 이름 혹은 한국인의 영어명은 성, 즉 가족명(family name)을 앞

에 쓰고이름을뒤에 쓰며그 사이를 콤마로구분한다.

5) 동일한 필자에 의해 쓰인 논문/저서는 아래 하이픈( 하이픈을 6

번 누름)을 써서 동일 필자에 의한 논문/저서임을밝히되, 최근에 출판된

것부터먼저제시한다.

6) 논문명 혹은 책명이 길어서 둘째 줄까지 사용하게 될 때는 저자명이 잘

드러나게9칸 들여서 글을쓴다.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 『기독교조직신학I』.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김철수.“우리말사도신경에 삭제된‘음부에내려 가사’에 대한 연구.”계명대학

교 박사학위논문, 2004.

몰트만, 위르겐/이신건옮김. 『희망의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황승룡.“폴 틸리히의신학에서의그리스도론의위치.”「조직신학논총」6(2001):

101-119.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89

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2) 저서인용의경우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I』(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135.

Peter C. Hodgson,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67.

3) 편·역서인용의 경우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희망의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4) 학위논문인용의 경우

김철수,“우리말 사도신경에 삭제된‘음부에 내려 가사’에 대한 연구,”(계명대

학교박사학위 논문, 2004), 12-23.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참고문헌작성법

1) 전체 구조는 한국어 자료를 앞 쪽에 배치하고, 그 뒤에 외국어 자료를

3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2. 참고문헌 작성법

*위에서제시한 한국어논문작성법 용례의경우와 동일하다.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91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

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I I. 외국어 학술지

1. 각주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동일한 페이지에 있는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다른 페이지에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34.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글을 각주 1개 이상 지나서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학위논문의경우: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 n t e r-

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저서/편 역서의 경우: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3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1. 논문형식심사

투고된 논문의구성요소들이미비되었을경우 수정을요청한다.

2. 논문내용심사

1) 논문구성의완성도(20점)

논문의 구성상 목차와 내용 전개가 논리적이며 참고문헌 및 문장은 적

절한가?

2) 연구주제의타당성 및 심도(20점)

주제에관한연구가 타당하며, 충실하고심도있게이루어졌는가?

3) 학문적독창성(20점)

주제의선정과내용 전개및 결론제시가 독창적인가?

4) 학문적공헌도및 적용성(20점)

주제에 관한 연구가 국내외적으로 학문적 공헌도가 있으며, 교회와 사회

에 적용성이있는가?

5) 연구방법, 선행연구 및 통합학문적지향(20점)

연구방법은 타당하며, 선행연구의 검토와 통합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는

가?

제5조 심사판정

1. 제출 논문은 관련 전공자인3인의 심사위원에게 심사를 위촉한다. 심사점

수가 90점 이상‘게재가,’89-80점‘수정 후 게재,’79-70점‘수정 후 재심,’

69점 이하‘게재 불가’로 판정한다.

2. 심사위원2/3 이상이‘게재 가’또는‘수정 후 게재’(즉 80점 이상)이면

‘게재가’로 판정하고 투고자에게 수정 부분을 고치게 한 후 게재한다. 심사위

원 2/3 이상이‘수정 후 재심’또는‘개재 불가’(즉 79점 이하)이면‘게재 불가’

로 판정한다.

제6조 비밀 유지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이나 논문 제출자는 모두 익명으로 하여야 하며, 심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393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 학술지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에 관한 제

반 사항을정하는데 있다.

제2조 투고에서발송의 과정

편집위원회는아래와같은일을 수행한다.

1. 논문투고안내를학회홈페이지및 회원들에게E-mail로 공지한다.

2. 투고된 논문의 구성요소(투고 규정4조 참조)들이 미비할 경우 투고자의

수정을 거친후, 논문접수를 통보한다.

3. 편집위원회의에서 익명으로 처리된 각 논문에3인의 심사위원을 배정한

다.

4. 심사결과를 종합하여 편집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게재여부를 결정하며, 1

주일이내에 심사결과를투고자에게통보한다.

5. 게재 논문은1, 2차 교정을 거쳐 인쇄하며, 인쇄된 학술지는모든 회원에

게 발송한다.

제3조 심사위원자격

본회는 논문심사를 위해 국내외 대학에서 해당 전공분야의 박사학위를 취

득한 후 5년 이상 전공 관련 주제에 관한 강의 또는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온

자 가운데 편집위원회에서 의뢰한다(양식2 논문심사 의뢰서). 심사의뢰 시 소

정의 심사료를지불한다.

제4조 심사기준

심사위원은 아래의 심사기준에 따라서 기일 내에‘논문 심사결과서’(양식

3)를 제출하여야한다.

3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 규정

제1조(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연구자의 연구윤리와 부정행위의 규제에 관한 제반 사

항을정하는 데 있다.

제2조(적용대상)

본 규정은 본 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으로서 한국조직신학회가간행하

는 학술지나 저서에기고하는 자에한하여적용한다.

제3조(연구부정 행위의범위)

연구에서의 부정 행위는 연구의 제안과 수행, 연구 결과의 보고 및 발표

등에서행해진 다음각 호의행위에 해당한다.

① 존재하지 않는데이터또는 연구결과등을허위로 만들어내는행위

② 다른 사람의 독창적인 연구내용과 결과를 정당한 승인 또는 인용에 대

한 정확한 정보의기재 없이표절하는행위

③연구 내용 및 연구 결과에 공헌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논문저

자/역자의 자격을 표시하지 않는 경우, 반대로 아무런 공헌이 없는 자

에게 감사 또는 예우를 목적으로 부당하게 논문저자/역자를 표시하는

행위

④ 동일 논문을 반복하여 게재하거나 이미 발표된 자신의 논문과 현저하

게 유사한 논문을이중으로발표하는자기 표절행위

⑤ 학계에서 통상적으로 허용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난 부정행위로 위

원회의 자체적인조사가 필요하다고판단되는부정행위

제4조(연구윤리위원회의설치와 운영)

제3조의 부정행위를 규제 및 조치하기 위한연구윤리위원회(이하 위원회)

를 두며, 이 위원회는연구윤리와 관련된다음각 호의 사항을심의, 의결한다.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 규정 395

사 결과는 필자 이외에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심사위원은 심사 대상, 내용

및 결과와관련된모든 정보를타인에게 누설하지않는다.

제7조 심사결과통보

투고자에게심사 결과를즉시통보한다.

제8조 재심신청

심사위원3분의2 이상으로부터‘수정 후 재심’판정을 받은 논문 제출자는

지적 사항을 수정한 후 재심을 신청할 수 있으며, 재심을 포기할 경우는 게재

불가로 판정한다. 재심을 청구할 경우 동일 심사위원의 재심을 통과해야 차호

에 게재할수 있으며 논문재심신청은1회에 한 한다.

▣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기타자세한 사항은관례에 따른다.

2. 본 규정은 편집위원2/3 이상의 찬성으로개정할수 있다.

3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1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다.

제9조(부정행위제보및 접수)

제보자는 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및 편집위원회에직접또는 서면, 전자우

편 등으로 제보하되 논문 명(또는 연구 과제명)과 구체적인 부정 행위의 내용

과 증거를제시하여야한다.

제10조(부정행위의조사)

위원회는 구체적인제보가 있거나 상당한 의혹이 있을 경우에는 부정행위

의 존재여부를 조사하여야한다.

제11조(출석및 자료제출요구)

①위원회는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진술을 위한 출석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이 경우 피조사자는이에 반드시응해야한다.

② 위원회는 피조사자에게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으며, 증거자료의

보전을 위하여 해당 연구기관장의 승인을 얻어 부정행위 관련자에 대

한 해당 연구자료의압수, 보관등을할 수 있다.

제12조(제보자의권리보호)

①위원회는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니며, 제보자의 실명은

공개되지않도록해야한다.

②제보 내용이 허위임을 알고도 이를 신고한 제보자에 대해서는 신원보

호의 의무가 요구되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관련사실을 해당 소속기관

에 통보할 수 있다.

제13조(피조사자의권리보호)

위원회는 부정행위에 대한 사실규명의 조사가 종료될 때까지 피조사자의

명예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무혐의로 판명될 경우 피조사자의

명예회복을 위해노력하여야한다.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 규정 397

①연구윤리확립에관한사항

②연구부정행위의예방, 조사에 관한사항

③제보자 보호와비밀유지에 관한사항

④연구윤리위반검증, 검증결과처리와후속조치에관한사항

⑤피조사자명예회복조치에 관한사항

⑥기타 위원회 위원장이부의하는사항

제5조(구성)

위원회의 구성은 위원장을 포함하여 총 5명으로 한다. 회장이 위원장 및

위원을 임명하고, 이 중 1명을택하여필요한 행정업무를관장하게한다.

제6조(임기)

위원의임기는해당 사건의종결시까지이다.

제7조(회의)

①위원장은위원회의회의를 소집하고그 의장이 되며, 회의를주재한다.

②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이상의 찬성으

로 의결한다. 단, 징계 판정에서 제17조의 ④-⑥에 해당하는 의결은

재적위원 3분의 2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

결한다.

③위원회의 회의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필요에 따라 관계자의 출석

을 요구하여 의견을청취할수 있다.

제8조(권한과책무)

① 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출석

과 자료제출을 요구할수 있다.

②피조사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 또는 자료 제출을 거부할 경우에는

혐의사실을 인정한것으로추정할 수 있다.

③위원회는 연구기록이나증거의 멸실, 파손, 은닉 또는 변조 등을 방지하

기 위하여그에 상당한조치를취할 수 있다.

④위원회 위원은 심의와 관련된 제반 사항에 대하여 비밀을 준수하여야

3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2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9조(재심의)

판정에 대한 재심의 요청의 경우, 판정 이후 3개월 이내에 해야 하며, 재

심의요청이 있을경우위원회는6개월이내재심의하여결정을내려야 한다.

제20조(비밀엄수

위원회는 제보, 조사, 심의, 판정, 재심의 및 건의조치와 관련된 일체의 사

항에 대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으며, 여기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자

역시도모든 정보에대하여비밀을 지켜야한다.

제21조(기록의보관및 공개)

① 조사와 관련된 기록은 조사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5년간 보관하여야

한다.

②판정이 끝난이후의 결과는 학회상임이사회에보고 해야 하며, 제보자,

조사위원, 증인, 참고인, 자문에 참여한 자의 명단 등 신원과 관련된 정

보에 대해서는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위원회

의 결의로 공개대상에서제외할수 있다.

제22조(운영예산)

위원회 운영 및 조사와 관련하여 필요한 예산은 별도로 책정하여 지급할

수 있다.

▣ 부 칙

1. 이 규정은 2008 년 12월 19일부터시행한다.

2. 이 규정은 윤리위원회의결의로 개정할수 있다.

3. 이 규정은 학회임원회의승인 하에효력을갖는다.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 규정 399

제14조(기피, 제척, 회피)

①위원에게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경우에 제보자 또는

피조사자는 그 이유를 밝혀기피를 신청할 수 있다. 기피신청이 인정된

경우에기피신청된위원은당해 조사와관련하여배제된다.

②당해 조사와 직접적인이해관계가 있는 자는안건의 심의, 의결, 조사에

관여할수 없다.

제15조(이의제기및 소명기회의보장)

위원회는 제보자와 피조사자에게 의견 진술, 이의 제기 및 변론의 권리와

소명의 기회를충분히 보장해야할의무를 갖는다.

제16조(조사, 심의및 판정 기간)

①위원회는부정행위에관한 제보가 접수된날로부터6개월 이내에 조사,

심의및 판정을 내려야한다.

②제보의 접수일로부터 역산하여 만 5년이 경과된 부정행위는 원칙적으

로 처리하지 않는다.

제17조(징계판정)

심의결과부정행위로판정될경우아래의 징계들을판정할 수 있다.

①경고

②논문 불인정

③일정기간논문투고금지

④제명

⑤일정 기간 재가입불허

⑥해당 기관장에게통보

제18조(결과의통지)

위원장은 조사결과에 대한 위원회의 결정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지체 없이

제보자 및 피조사자 등 관련자에게이를 통지해야한다.

3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

Page 2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임원명단

회장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부 회 장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총무 정홍열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서 기 황민효 (호남신학대학교)

회계 황돈형 (중앙신학교) 편집부장 유장환 (목원대학교)

대외협력 김성원 (나사렛대학교) 미 디 어 최광진 (호서대학교)

부 장 부 장

감 사 구춘서 (한일장신대학교)

편집위원

편집위원장 유장환(목원대학교)

편집위원

신옥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장윤재 (이화여자대학교)

신재식 (호남신학대학교) 전현식 (연세대학교)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교)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이상직 (호서대학교) 허호익 (대전신학대학교)

이오갑 (그리스도대학교) 황재범 (계명대학교)

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2011년 6월 23일 인쇄

2011년 6월 30일 발행

편집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

발행 한국조직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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