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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직신학논총 3020119월 한국조직신학회 편
2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Oct 2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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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k Cha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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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0집 2011년 9월 한국조직신학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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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직신학논총

제30집 2011년 9월 한국조직신학회편

Page 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차 례

백충현 프레데릭 데니슨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7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

관한연구 39

황돈형 Barth 신학과현대과학의관계성에 대하여 73

전 철 민중신학의 서구신학비판에 대한연구 107

황덕형 바르트와 반틸의성서이해의 비교 133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 함의 167

석종준 리쾨르의 내러티브이론을통한 모던정통주의

“예수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199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47

윤철호 악의기원과 극복에대한신학적 고찰 279

이찬석 일치에서 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 고찰 305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33

이세형 정의와평화를 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

생명삼위일체론 363

임형모 종교적상징과 해석의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393

4 차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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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데니슨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백충현

(장신대, 학술연구교수)

I. 서론

20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의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이 새

롭게 재발견되고 있다. 테드 피터스는『삼위일체 하나님-신적 삶 안에

있는 관계성과 시간성』의 서문에서20세기 후반기의 신학에서 삼위일

체신학은으뜸으로다루어지는주제이라고 진술하였다.1) 스탠리 그렌츠

는『현대신학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재발견』에서 삼위일체 신학은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된 기독교적 주제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가장 인기

있는신학사조들 중의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2) 이런 점에서 크리

스토퍼 슈뵈벨은 삼위일체 신학은 신학의 역사에서 오늘날 르네상스를

누리고있다고 표현하였다.3) 이 르네상스는칼 바르트, 블라디미르로쓰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Vol. 30

Baik, Chung-Hyun The Trinity and Society in Frederick Denison Maurice

Kim, Sung-Won A Study on Postmodern Religious Pluralism and

Methodology in Comparative Theology

Hwang, Don-Hyung A Study on the Possible Relationship between Barth’s

Theology and the Modern Sciences

Chun, Chul Eine Studie über die Kritik der Minjungtheolgie an der

Westlichen Theologie

Hwang, Duk-Hyung A Comparison between Barth and Van Til on the

Understanding of Bible

Park, Seoung-Gyu Theologischer Sinngehalt der Allversoehnung Karl

Barts

Seok, Jong-Joon An Attempt to Overcome “Hermeneutics of Jesus” of

Modern Orthodoxy through Paul Ricoeur’s Narrative

Theory

Shim, Kwang-Seop Practical Divinity as John Wesley’s Theological

Methodology

Youn, Chul-Ho A Theological Investigation into the Origin of Evil and

the Conquest of It,

Lee, Chan-Seok From Unity to Harmony

-A Study on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Choi, Dai-Yeol Reinterpreting the Exclusion of the Person with

Disability from the Priesthood

Lee, Se-Hyoung Leonardo Boff’s Life Trinity toward the Society of

Justice and Peace

Yim, Hyung-Mo A Study of the Religious Symbol and Interpretation

-Centering around Paul Tillich and Paul Ricoeur

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7-37

1 ) Ted Peters, God as Trinity: Relationality and Temporality in the Divine Lif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3), 7. 테드 피터스/이세형 옮김,『삼위일체

하나님-신적삶 안에있는관계성과시간성』(서울: 컨콜디아사, 2007), 7.

2) Stanley J. Grenz, Rediscovering the Triune God in Contemporary Theology (Min-

neapolis: Fortress Press, 2004), 1.

Page 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된 표현을 사용한다. 콜린건톤은 인간의 철저한 죄악성으로인하여 사

회적 삼위일체론을 무제한적으로 적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음을 확증

한다.8) 그러므로 현대 삼위일체신학에서 삼위일체와 사회와의 관계를

탐구하고모색하는논의는 여전히 계속뜨거운 주제가 되고있다.

이 논문에서는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논의를 더 확장시키고 풍성하

게 위하여 1 9세기에 활동한 프레데릭 데니슨 모리스( F r e d e r i c k

Denison Maurice, 1805-1872)의 삼위일체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영국의 기독교사회주의자로널리알려져 있지만, 그의신학이 삼위일체

론에 근거하고 있음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오늘날에 삼위일체

신학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기에, 사회와 관련된 그의 삼위일

체론은 새롭게 논의될 가치가 있다.9) 모리스는1854년에 출판한 자신

키, 칼 라너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

르그, 로버트 젠슨, 레오나르드 보프, 노만 피턴저, 조셉 브라켄, 메조리

스하키, 캐써린 모우리 라쿠냐, 이정용 등등의 삼위일체 신학자들에 의

하여더욱더 발전되고심화되어왔다.

현대 르네상스 시대를 누리고 있는 삼위일체 신학의 가장 큰 특징

들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론이 신학의 모든 분야들과 주제들에 적용되

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삼위일체론이 교회 혹은 교리 내로 한정되지

아니하고 사회와 세계와 우주 전체에로 확장되고 적용되고 있다는 점

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이 지닌 사회적

함의를 본격적으로 밝힌 자는19세기 말의 러시아정교회 신학자인 니

콜라스 페도로프이다. 그는“삼위일체론은 우리의 사회적 프로그램이

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당대의 사회를 삼위일체적으로 변혁시키기를

원하였다.4) 이러한 원리는 위르겐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과5) 레오

나르드 보프의 해방신학적 사회적 삼위일체론6) 안으로 적극적으로 도

입되었다. 그런데 밀로슬라브 볼프는 페도로프의 명제를 무제한적으로

지지하기보다는 약간의 제한을 가하되 교회론적으로 적용하고자 한

다.7) 볼프는“삼위일체론은 우리의 사회적 비전이다”라는 명제로 완화

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9

3) Christopher Schwöbel, “The Renaisssance of Trinitarian Theology: Reasons,

Problems and Tasks,” in Trinitarian Theology Today: Essays on Divine Being and

Act, ed. Christopher Schwöbel (Edinburgh: T & T Clark, 1995), 1.

4) 장윤재,“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에 대한 한 제언,”박상증 목사 평전 출판기념회 기

념심포지엄(2010년6월 21일), 16 (http://www.kncc.or.kr)

5) 신옥수,“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비판적 대화를 중심으로,”「장신논단」제30집

(2007년), 203-230.

6) Leonardo Boff, Trinity and Society (New York: Orbis Book, 1997). 레오나르도 보프/

이세형 옮김,『삼위일체와 사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1); 이세형,“정의와 평화

를 지향하는레오나르도 보프의 생명삼위일체론,”아시아 평화를 위한국제학술대회

및 제6회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제2분과 여성, 해방, 생태 및 과학)(2011년 4월

9일): 117-130.

7) Miroslav Volf, “‘The Trinity is Our Social Program’: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nd

the Shape of Social Engagement,” Modern Theology 14 (July 1998): 403-4 0 4 ;

Exclusion &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8) Colin Gunton,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 (2nd edition)(London: T&T

Clark, 1997), 73-75.

9) 모리스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다음과 같다. Guy Harvey Ranson, “Trinity and

Society in F. D. Maurice,” Religion in Life, Vol. 29 No. 1 (Winter 1959-1960): 64-

74; Guy Harvey Ranson, “F. D. Maurice on the Social Nature of Man,” Canadian

Journal of Theology, Vol. 11 No. 4 (October 1965): 265-276; Neville C. Master-

man, “Christian Socialists of 1848-1 8 5 0 ” , T h e o l o g y. Vol. 73 No. 595 (January

1970): 15-23; A. J. Hartley, “Way to Unity: Maurice’s Exegesis for Society,”

Canadian Journal of Theology, Vol. 16 No. 1-2 (1970): 95-99; Hubert Cunliffe-

Jones, “New Assessment of F. D. Maurice’s the Kingdom of Christ,” C h u r c h

Q u a r t e r l y. Vol. 4 No. 1 (July 1971): 38-50; James W. Clayton, “Reason and

Society”, Harvard Theological Review , Vol. 65 No. 3 (July 1972): 305-335; David

Young, “F. D. Maurice and the Unitarians,” C h u r c h m a n, Vol. 98 No. 4 (1984):

332-340; Jeremy Morris, “Reconstructing the Reformation: F. D. Maurice, Luther,

and Justification,” in Church Perspective (Woodbridge: Boydell Press, 1997): 487-

500; John Oakes, “Transforming Conservatism: The Cultural Vision of F. D.

Maurice,” Crux, Vol. 33 No. 2 (1997): 18-26; Jeremy Morris, “A Social Doctrine

of the Trinity? A Reappraisal of F. D. Maurice on the Eternal Life,” Anglican and

Page 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I. 모리스의“사회도덕(Social Morality)”

모리스에 따르면, 도덕은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난 행동들을 다루지

않고, 내적인 인격을 다룬다. 인격은 내적인 품성 또는 성향을 의미하

며, 모리스는 이것을 에토스(ethos)라고 명명한다.13) 외적인 행동은 내

적인 인격에서 나오기에 모리스에게는 내적인 인격이 더 중요하다. 모

리스는 체스터필드 경(Lord Chesterfield)(1694-1 7 7 3 )과 헨리 필딩

(Henry Fielding)(1707-1754)이 인격을 어떤 성향이나 품성으로 이해

한다고 여겼다. 내적인 품성이 인간의 행동과 말과 몸짓에 공정함과질

서를 부여한다는 체스터필드 경의주장에 모리스는 동의한다.14) 그리고

소설가와 극작가로 알려진 필딩이 모든 인간은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

름에관하여 어떤 본유적인 이해를 가진다고 주장할 때에 모리스는 이

점에 대해서도 동의한다.15) 더 나아가서, 모리스는『법의 정신』(L’Esprit

des Lois)의 저자인 몽테스키외(Montesquieu)(1689-1755)가 인간존재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인격적 특징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이해

하였다.1 6 ) 몽테스키외는 루이 1 4세의 궁중작가인 라 브뤼에르( L a

Bruyère)로부터 영향받았다. 필딩과 몽테스키외에서 발견되는 계몽주

의적인 인격개념도 라 브뤼에르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라 브뤼

에르의 인격개념은 당대의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위에서 언급한 네 명의 인물들과 같이 모리스는 단지 사회 겉으로

드러나는외적인 현상들에만 주목하지않았다. 현상들 아래에서그것들

을 일으키는“화산들(volcanoes)”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모리스는 이러

한 통찰을 신약의 산상수훈에 근거하여 강조한다. 모리스에 따르면, 산

의『신학 에세이』(Theological Essays)에서 삼위일체는인간의 삶의 토

대이며 인간사회의 토대라고 주장하였다.10) 1869년도에는 캠브리지대

학교에서 사회도덕(social morality)에 관하여 2 1회의 강연을 하면서

사회도덕을 위한 신학적 기초를 탐구할 것을 제안하였다.11) 그리고 모

리스는 모든 신학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의 이름 위에 토대를 두고자 하는 자신의 신학 기획이 삼위일체를 사

회도덕의토대로서여기는 자신의 입장을 확증한다고여긴다.12)

이 논문은 모리스가 어떤 방식들로 자신의 주장과 확증에 도달하였

는지에 관하여, 즉 모리스가 어떻게 삼위일체와 사회를 연결하는지에

관하여 탐구한다. 이를 위해서 이 논문은 모리스의 저작들 중에서『신

학 에세이』(Theological Essays)와『사회도덕』(Social Morality)을 중점

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이 논문의 주제와 관련된 범위 내에서만 그의

다른저작들을추가적으로 분석한다.

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11

Episcopal History Vol. 69 No. 1 (March 2000): 73-100; Paul Dafydd Jones,

“Jesus Christ and the Transformation of English Society: The ‘Subversive

Conservatism of Frederick Denison Maurice,” Harvard Theological Review, Vol.

96 No. 2 (April 2003): 205-228; Frederick Denison Maurice, To Build Christ’s

Kingdom: F. D. Maurice and His Writings, ed. Jeremy Morris (Norwich:

Canterbury Press, 2007); Michael C. Busk, “F. D. Maurice: The Radically

Inclusive God,” Anglican and Episcopal History, Vol. 78 No.1 (March 2009): 67-

83.

10) Frederick Denison Maurice, Theological Essays (1st edition)(NewYork: Redfield,

1854), 309. 이 책의 3판은 1871년에출판되었다. 이후로Essays (3rd)로 표기.

11) Frederick Denison Maurice, Social Morality: Twenty-One Lectures Delivered in

the UniversityofCambridge (London: Macmillan, 1869). 이후로 Social Morality로

표기.

12) Frederick Denison Maurice, The Doctrine of Sacrifice: Deduced from the Scrip-

tures: a Serious of Sermons (London: Macmillan, 1893), x i i. 이후로Sacrifice로 표

기.

13) Maurice, Social Morality, 10 그리고 21.

14) 앞의책, 2.

15) 앞의 책, 3.

16) 앞의책, 6.

Page 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따라,22) 모리스는 사회도덕 안에 세 가지 단계들, 즉 가정도덕, 국가도

덕, 보편도덕이 있음을 제안한다. 이 세 가지는 함께 공존하며, 이러한

단계들 안에서 인간은 남들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모리스는 설명

한다.

태어나면서나는 이미 사회 안에 존재한다. 모든 사건들에서나는 아버

지와 어머니와 관련을 맺는다. 이러한 관계는 나의존재의 일차적인사

실이다. 나는이것이외의 다른어떤사실들도생각할수 없다.23)

너와 나는 어느 가족의 구성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어느 국가의 구성

원들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에 못지않게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엄연한

사실이다.24)

나는 가족의 구성원이다. 나는 국가의 시민이다.…그렇다면 나는 세계

라고 불리우는더 넓은 사회에속하지않겠는가?25)

여기에서 우리는 모리스의“사회도덕”이라는 개념이 가정과 국가와

세계에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존재론적 소여성을 전제하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리스에게 사회적 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범

주이다. 우리에게 사회적 관계들은 이미 사실로서 주어진 소여이다. 이

러한 의미에서 사회란 단순히 다수의 개인들이 모여서 인위적으로 형

성한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련의 사회적 관계들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만우리는 참 인간이 된다. 19세기신학사 연구의 거장인 클로드

웰치(Claude Welch)에 따르면, 모리스에게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회

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포함하는 사회는 인간존

재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26) 가이 랜슨(Guy H. Ranson)에 따르면, 모

상수훈은“행동이란내적인 상태의 열매라는점을말하는 것 이외에 아

무것도 아니며, 행동이란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

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17)을 전제한다. 마치“인간의 말이 인간의

정신이나목적을 표현한다는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것”18)과 같다.

그렇다면, 모리스에게“사회도덕”에서“사회(social)”라는 용어는 무

엇을 뜻하는가? 모리스가 캠브리지대학교에서 행하였던 강연들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모리스는 강연들의 서문에서“사회도덕(social

m o r a l i t y ) ”과“개인의 독립적 도덕(independent morality)” 을 구별한

다.19) 사회도덕은 사회에서 형성된 관계들로부터 시작하지만, 개인의 독

립적 도덕은 사회의 관계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모리스는 개인의

독립적 도덕이 인간존재의 어떤 단계에서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닐

수 있기에 나름대로의 중요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리스는 사

회의 관계들과 분리되어서는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인간은 가족의 사랑의 관계와 국가에 대한 의무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게다가, 모리스는 개인이 독립적이라는 것은

사회 내의어떤 한계들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모

리스는 철저하게 독립적인 도덕이란 사실상 가장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20) 이러한 까닭에 모리스는 도덕을 모든 사회적 관계들과의

연관성 하에서 다루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과제를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의 강연들을 통하여 탐색하였다.21)

모리스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관계들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

이다. 가정, 시민사회, 보편사회를 구분하는 쟝-자끄 루소의 방법론을

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13

17) 앞의책, 23.

18) 앞의책.

19) 앞의책, xi.

20) 앞의책.

21) 앞의책, x i i i.

22) 앞의책, 10.

23) 앞의책, 24.

24) 앞의책, 121.

25) 앞의 책, 246.

26) Claude Welch, Protestant Thought in the Nineteenth Century, Vol. I (1799-1870)

(Oreg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3), 250.

Page 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테어리언주의자들의 입장과 매우 유사함을 주장하였다.31) 그러나 모리

스가삼위일체론을거부했다는주장은 명백하게잘못된 평가이다.

모리스는 비록 유니테어리언주의 목사의 아들로 성장했지만 소년기

이후로 유니테어리언주의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불만족은

모리스가 영국 성공회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성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인식하면서부터 해소되었다.32) 모리스는 영국 성공회의 신앙고백인39

개 신앙조항을 신봉하였고, 1831년에 다시 세례를 받았으며, 1834년에

는 안수를 받았다. 39개 신앙조항의 제1조항은 성 삼위일체에 대한신

앙이다. 즉, 제1조항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들이 신성의 일치

안에서 하나의 본체와 하나의 권능과 하나의 영원성을 지닌다고 고백

한다.33) 모리스의『신학 에세이』(Theological Essays) 제1장은 일치성

안에 있는 삼위일체를 다룬다. 모리스 자신은 이 부분을 유니테어리언

주의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썼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모리스에 따르면,

유니테어리언주의자들은 삼위일체에 관한 개념이 심각한 모순에 빠져

있기에 합리적임을 자처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거부해야 한

다고 보았다.34) 더욱이, 모리스는 임종시 자신의 입술로 삼위일체 신앙

을 고백하면서 죽었다.35) 그러므로 모리스를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자

로서여기는것이더 적절한 평가라고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모리스에게 인간됨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모리스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

리스에게 사회는 인격들(persons)이 존재하는 곳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모리스에게 인격적(personal)인 것은 이미 항상 사회적(social)이기 때

문이다.27)

모리스의 관계론적 인간론과 사회론은 그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

(Christian Socialist movement)의 토대가 되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모리스는 노동자들의 교육, 협동조합들의 설립, 참

정권의 확대와 같은 활동들에 선구자적으로 참여하였다.28)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모리스는17세기와18세기에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임마

누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도덕을 개인주의화하는 경향을 비판할

수 있었다. 모리스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철학자들은도덕을 논할때에

사회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적인 독립적 존재로서의 인격

자체로부터시작하는오류를 범하였다.29)

I I I. 모리스의삼위일체론의특징

『신학 에세이』(Theological Essays)에서 모리스는 삼위일체는 인간

삶의 기초이며 인간사회의 토대이라고 주장하였다. 18세기와19세기에

삼위일체론이 일식현상의 보였던 주된흐름과는달리, 모리스가 삼위일

체론을 거부하지 않았던 점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30) 모리스는 삼위

일체론을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삼위일체주의자이라고 공언하였다. 데

이비드 영은 자신의『프레데릭 데니슨 모리스와 유니테어리어니즘』(F.

D. Maurice and Unitarianism)에서 모리스가 유니테어리언적인 배경

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모리스의 신학이 당대의 탁월한 유니

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15

27) Guy H. Ranson, “The Kingdom of God as the Design of Society: An Important

Aspect of F. D. Maurice’s Theology,” Church History 30 (1961 December), 459.

28) 앞의논문, 463.

29) 앞의논문, 411.

30) Maurice, Essays (3rd), 409.

31) David Young, F. D. Maurice and Unitarianism (Oxford: Clarendon Press, 1992),

195.

32) John F. Porter & William J. Wolf, Toward the Recovery of Unity: The Thought of

Frederick Denison Maurice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64), 7.

3 3 ) “In unity of the Godhead, there ar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34) Maurice, Essays (3rd), xv 그리고 432.

35) David Young, “F. D. Maurice and the Unitarians,” C h u r c h m a n 98 No.4 (1984),

338.

Page 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자신(the God-self alone)”이 아니라,“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

이다. 완전한 사랑을 지닌 존재는 자신 안으로 닫힌 분이 아니며, 자신

의 탁월함과완전함을 관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분이 아니다. 그 대신

에, 모리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비록“내적인 심오한 삶”을 형성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삶은 근본적으로 소통과 전달의 삶이다. 하나님의 삶

이 소통되지않고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이다.38)

게다가, 모리스가 하나님의 의지와 말씀에 관하여 논의할 때조차도,

모리스의 주된관심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 안에말

씀과의지의 두 내적발출들(processions)이 있음을 주장하고 설명하였

던 토마스 아퀴나스와는 달리,39) 모리스는 하나님의 의지와 말씀을 주

로 하나님의 외적인 활동들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의지는 말씀 없이

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자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전제한 후에,

모리스는의지는 말씀과 함께 말해야 하며 의지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

을 표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모리스는 의지와 말씀의 외적

인 활동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40) 모리스에게 하나님의 의지는

단순히 삼위일체 하나님 내의 내적인 발출을 가리키지 않고 성부 하나

님의 의지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

적인발출을가리키지않고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적용되는 모리스의“위격/인격

(person)” 개념은 하나님의 안의 내적인 구별들에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모리스의“위격”개념은항상우리와 관련을 맺는것이다. 첫

째, 성부의 위격과 관련하여, 모리스는 하나님은 하나의 위격이신 성부

이시며 이러한 성부는 우리를 향한 정화와 긍휼과 사랑을 지니고 계신

분이시라고 진술한다.41) 성부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며, 결코 우리에게

님이 어떤 방식들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과 연관될 수 있는지를, 즉

모리스가 어떻게 삼위일체와 사회도덕을 연결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

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탐구로 나아가기에 앞서, 여기에서는 모리

스의 삼위일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the immanent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the economic Trinity)의 관점에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전

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내적인 관계에 주목하는 개념이고, 후

자는삼위일체하나님과세상과의관계에 주목하는개념이다.

분명한 것은 모리스의 주된 관심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있다. 그렇지

만 모리스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내적인 심오한

삶”을 형성한다고 진술하기에 모리스에게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관

심이전적으로 배제되어있다고 말할수는없다. 더욱이, 모리스는성부

와 성자가 성령 안에서의 하나의 복되며 영원한 일치 안에 거주한다고

진술하며,36) 성부로부터 그리고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성령은 성부와 성

자를 연합시킨다고 진술하며, 연합의 성령을 통하여 성부는 성자 안에

머물며 성자를 가장 깊이 알고, 마찬가지로 성자도 성부 안에 머물며

성부를 가장 깊이 안다고 진술한다.37) 그러므로 모리스에게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가 비록 충분하게 전개되거나 명시적으로표현되

어 있지는 않지만, 암시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칼 바르트와 칼 라너와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한 다수의

현대 삼위일체 신학자들이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관계를 명시적으

로 다룬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모리스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사이

의 관계들이 하나님의“내적인심오한 삶”을 형성한다고진술할 때조차

도, 그의일차적인관심은 내재적 삼위일체에있지않고, 경륜적 삼위일

체에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모리스 자신의 하나님 이해에 직접적으로

근거한다. 모리스에게 따르면, 하나님은 단순히“홀로 존재하는 하나님

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17

36) Maurice, Essays (3rd), 432.

37) 앞의책, 426.

38) 앞의책.

39)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trans.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Westminster: Christian Classics, 1981), I, 27, 3.

40) Maurice, Essays (3rd), 422.

Page 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삶”이라는 신적인 사회를 형성한다. 세 위격들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에

대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지닌다. 그러나 이 신적 사회는 그 자체 안으

로 닫혀진 사회가 아니라, 우리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회이다. 하나님의

“내적인 심오한 삶”은 우리에게 전달되고 소통된다. 이것을 모리스는

하나님의 사랑(charity)으로 설명한다. 즉,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

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

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기위하여 하

나님의“내적으로 심오한 삶”이 우리에게 소통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삼위일체 하나님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이시고, 이러한 하나님

은 우선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며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

시는분이시다.

I V. 사회도덕의토대로서의삼위일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리스에게 사회적 관계들은 인간에게 본질적

인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

이다. 인간은 수평적인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수직적인차원에서 사랑으로써 일치를 이루시

는 삼위일체하나님과의관계를 맺는다.

이제, 모리스가 삼위일체는 사회도덕의 토대이라는 주장을 어떤 방

식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모리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해방신학적인 입장에서 사회와 관련하여 삼위일체론

을 전개한 레오나르도 보프의 입장과 그의 입장을 비교하는 것이 도움

이 된다.

보프가『삼위일체와 사회』(Trinity and Society)에서 제시한 주된 전

제는“태초에 한 분의고독이 아니라 세 신적 위격들의 연합이 있다”이

다. 보프의 설명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한 상관관계와상

무관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원리가 아니라, 우리와 관

계를 맺으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모리스는 칸트의 개념,

즉 이성에 근거한 보편명령이라는 칸트의 개념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칸트의 이성은 우리의 기도와 간청을 듣을 수 없으며 우리의 실패에

관한 고백들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성은“너는 이것

을 행할의무가 있다거나 이것을 행할의무가 없다”42)라고단지명령만

내릴뿐이다.

둘째, 성자의 위격과 관련하여, 모리스는 성부가 인격이시듯이 하나

님의 아들또한 인격이라고 진술한다. 오직인격 안에서만 성자는 자신

의 형상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43) 모리스는 신약에 근거하여 성자의

인격됨을 확증한다. 신약에서성부가 자신의 본성을 우리에게보여주신

것은 문자나 율법에서가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 그리고 인격의 활동들

을 통해서였기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위격과 관련하여, 모리스는『신학 에세이』

(Theological Essays) 14장에서 성령의 인격성과 가르침에 관하여 논

의한다. 모리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인 것처럼, 하나님의 의지도

인격이다. 말씀이 비인격적이라면, 성령도 비인격적이다.44) 오직 인격만

이 성부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45) 모리스에게 인격은 성부

의 의지가 우리에게전달될 수 있는최선의 형식이다.

요약하자면, 모리스에게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들

로서 일치를 이루는“내적인 심오한 삶”을 형성하는 분이시다. 성부는

성자 안에 머물며, 성자는 성부 안에 머문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연

합시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내적인 심오한

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 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19

41) 앞의책, 412.

42) Maurice, Social Morality, 404.

43) 앞의책, 422.

44) 앞의책, 422.

45) 앞의책, 422.

Page 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는 말씀이 있음을 모리스는 주목

한다.49) 모리스는 이러한 구절들이 보편도덕을 가장 완전하게 처음으로

선포한 것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절들은 악인이든 선인이

든, 의로운 자이든 불의한 자이든 인간을 분리하는 어떤것이라도 분쇄

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성부는 모든사람들과관련을맺는분이시다.

둘째, 성부 하나님의 의지는 인간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고자 하신다.

모리스에게 그러한 성부의 의지는 우주를 다스리기에 자신의 의지를

전달해주는 어떤 자를필요로 한다. 성부의 의지는 하나님의아들에 의

하여 전달되고 표현된다. 성자는 성부에 순종하고 성부의 의지를 따른

다. 성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성부로서 표현하며, 모든 인간들에게 성부

의 활동들을 드러내준다. 성자는 보편적인 희생으로써 구속을 성취한

다. 여기에서 희생과 구속은 어떤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50) 성부의 의지는 성자의 희생으로써 모든 인간

피조물들을 악과 사망의 매임으로부터구원하고자하시는 것이다. 성만

찬을 통하여 기념되는 성자의 보편적 희생은 인간도덕의 가장 심오한

기초이며, 성부와 모든 인간 자녀들이 교제하는 만남의 장소이다.51) 여

기에서, 성부가 모든인간과 관계를 맺듯이, 성자도 자신의 희생을 통하

여 모든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셋째, 모든 인류를 위한 성자의 보편적인 희생은 성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모든 인간들을 창조하셨다라는사실과 성자인 그리스도가 인

류의 머리이며 왕이며 주님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점을 강조하면

서 모리스는 링컨스 인 채플(Lincoln’s Inn Chapel)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복음이 선포하듯이, 인간의 삶은헛된 것이아니다. 왜냐하면인간의삶

호침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한 분 하나님을 형성하며, 세 신적

위격들의 일치는 세 신적 위격들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런다음에 보프

는 이러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가득찬 신적인 사회를 인간사회에 적

용한다.46) 보프와 같이 모리스도 세 위격들의일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모리스의 주된 관심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었고, 항상 우리

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라는 점에 있었다. 심지어 세 위격들 사이의

일치를 이루는“내적인 심오한 삶”조차도, 우리와 관계를 맺으며 우리

를 위한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기에모리

스는 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 시작한 후에 하나님의 내적인 삶을 외적

으로 인간사회에 적용하는 순서로 명확하게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리스는 삼위일체를 인간사회와 연관을 짓는 다른 방식을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모리스는 신적인 삶의 원리로부터, 즉 성령이 성부

와 성자를 연합시킨다는 신적인 삶의 원리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다음

에는 세 위격들 각각을 인간삶과 인간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방

식을택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첫째, 성부와 관련하여, 성부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성부는 어떤 이들을 다른 이들로부

터 분리하지 않으신다. 성부는 나를 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사

람들을 위하신다. 삼위일체가 인간 삶과 인간 사회의 토대이라는 모리

스의 주장은 삼위일체는 나만을 위하지 않고 모든 인간들을 위한다는

점을 함축한다.47) 모리스에게 모든 인간을 위하는 것이 바로 보편도덕

이다. 그에게 따르면, 보편도덕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완전하게 선포되

었다. 성경에서는“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

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명하시기 때문이다.48) 이 구절 바로 앞

에“하나님[성부]이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21

46) Leonardo Boff, Trinity and Society, 9.

47) Maurice, Essays (3rd), 409.

48) 앞의책, 454. 괄호는 논자의것임.

49) 앞의책.

50) 앞의책, 444.

51) 앞의책, 274.

Page 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금 서로에게일치의 관계를 맺도록 하신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신적인 삶에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적인 사회에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은 하나님

의 아들인 성자에게 아버지이시듯이,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한 형제자매가된다. 모리스는다음과 같이진술한다.

성령을 성부의 성령이라고 고백하는 한, 이러한 고백은 그들이 하나님

의 아들들이 됨을 의미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고백하는

한, 이러한 고백은그들이 한 형제들이 됨을의미한다. 하나님의성령은

그들의 생각들과 말들까지 소유하셨다.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로 연합시키는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고백한다. 그들은 한 형제

들이다.58)

요약하면, 세 위격들 각각은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성부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며, 성자는 보

편적 희생을 통하여 성부에게 순종하시며, 성령도 우리 모두를 위하여

활동하신다. 세 위격들각각이 우리와 맺는직접적인관계를 통하여, 삼

위일체는사회도덕의토대가 된다.

V. 관계의두 수준들(Levels)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관계에는 두 차원들(dimensions), 즉 수평적인

차원과 수직적인 차원이 있다. 수평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서로에게 맺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 수직적인 차원에서 인

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

들은 모든 인간의 주님이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의 생명은 인간

들을 위한 빛이다. 인간 자신의 빛은 단지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신 분

과의관계성을 고백하지않는다면헛된가식이된다.52)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되었다.53) 하나님의 아들은 모

든 인간의 주님이시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다. 완전한 인간성

이 하나님의 아들안에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이 그리스

도 안에서 창조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54) 이

러한의미에서하나님의아들은 모든인간들과관계를 맺고있다.

넷째, 성령도 어떤 사람들만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성령은 우리와 모든 사람들의 생각들을 안내하고 가

르치신다. 성령은 인간들 중에서 어느 사람들만을 존귀하게 여기시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를 일깨워 활동하게 하시며, 우리가 분열하고자 하

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하나로 보존하신다.55) 성령은 인간

들이 하나가 되도록 활동하시며, 성령 자신이 유래한 성부에게 모든인

간들이 연합되도록 하신다. 성령은 성부의 의지를 행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56) 성령의 현존은 보편사회의 가장 중요한 유대이다.57) 우

리 안에 있는 내적인 스승은 하늘에 계신 성부의 성령이시며, 이 성령

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인류와 하나되게 하신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성령은 우리로 하여

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23

52) Frederick Denison Maurice, Sermons Preached in Lincoln’s Inn Chapel (London:

Macmillan, 1891), 90.

53) Maurice, Social Morality, 288.

54) Alec R. Vidler, The Theology of F. D. Maurice (London: Macmillan, 1893), 52.

55) Maurice, Social Morality, 449-450.

56) 앞의책, 274.

57) 앞의책, 445. 58) 앞의책, 272.

Page 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지만, 우리 인간은 비록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불

구하고 사람들을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로,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며

분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 수준(the first level), 즉 평범한

수준(the plain level)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며, 두 번째 수준(the second level), 즉 심오한 수준( t h e

deep level)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하여 사시는 것처럼

우리인간이 그렇게 사는것을가리킨다.

모리스는 관계에 있어서 두 수준들 사이의 긴장이나 간격을 무시하

지 않는다. 한편으로, 모리스는 산상수훈 전체의 원리는 우리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임을 주장하며, 우리의 행

동들로 이러한 도덕의 대원리를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59) 게다가,

모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기때문에 우리도

도덕의 대원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리스는

우리가 이러한 모범을 따르는 것이 쉽지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래서

모리스는여기에 역설(paradox)이 있다고 이해한다. 그렇지만 모리스는

이러한 역설은 은혜로운 역설이며 기독교적인 역설이고 인간적인 역설

이라고 여긴다.60)

V I. 역설에대한모리스의해결책

모리스가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삼

위일체가 인간삶과 인간사회의 토대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을 평가하

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모리스의 보편도덕에 따르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성부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해야한다. 성부하

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비추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이들을

간은 사랑으로써 일치를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이

러한 두 차원들은 존재론적으로 이미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들

이다. 아들이 아버지가 없이는 아들이 될 수 없듯이, 인간은 다른 인간

과 맺는 수평적인관계들을 떠나서는, 또는삼위일체 하나님과 맺는수

직적 관계들을 떠나서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의 두 차원들은 또 다른사실을, 즉 비록 우리가 사회적으로 이미관계

를 맺고 있지만 수평적이든 수직적이든 이러한 관계들을 자주 깨뜨린

다는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못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리스의 논의전개 속에서 관계의 깊이의 수준

이라는 관점에서 관계의 두 가지 수준들(levels)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

다. 우리가 사회적 관계들을 맺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남들과 일치하며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

야기이다. 왜냐하면우리에게 사회적 관계들이 이미존재한다는 사실에

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관계들을 깨뜨리고자 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이러한 관계들 속에서조차 중심이 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

이다. 첫 번째 수준(the first level), 즉 평범한 수준(the plain level)은

우리가 이미사회적 관계들 속에 있다는 사실자체를 가리킨다. 반면에

두 번째수준(the second level), 즉 심오한수준(the deep level)은 우리

와 이미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이들과 일치를 이루어 살

아가는 것을의미한다.

관계의 깊이의 관점에서 본 두 수준들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수직적인 차원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며 사는것은 전혀다른 이야기이다. 하

나님의 아들은 완전하게 성부의 의지에 순종하실 수 있지만, 우리인간

은 비록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

님의 뜻을완전하게 따라서 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성부하나님은 악

인이든 선인이든, 의로운 자든 불의한 자든 모두에게 해를 비추실 수

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25

59) 앞의책, 455.

60) 앞의책, 462.

Page 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원을 깨닫지 못하고 신뢰가 사라진 관계가 된다면, 사회는 견딜 수 없

는 거짓말의사회로 전락한다.

셋째, 형제자매의 관계에서우리는 형제와자매가 동일한 기원을 지

녔음을 함축하는 혈연관계를 인정해야 한다. 형제와 자매가 동등한 자

로서 동등한 수준 위에 있음을 깨닫는다면, 이것은 경제적 형제애, 종

교적 형재애/자매애, 보편적 형제애와 같은 다른 종류의 형제애들로

확대될 것이다. 형제와 자매 사이의 그러한 관계를 부인하면 경쟁의

감정과 지배의 열망을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경쟁이 가족관계를 무너

뜨릴 것이며 또한 사회의 존립을 위협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서 소유욕과 지배욕이 형제애보다 더 강하다면, 그는 독재자이거나 노

예이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이다. 형제애가 매우 강한 자는 희생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사회를 파멸로부터 보존하는 데에 기

여할것이다.62)

넷째, 모리스는 주인-종의 관계가 가족관계들 중의 하나이라고 주

장한다. 모리스에 따르면,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은 필연적으

로 서로에게관계를 맺고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다. 주인과 마찬가

지로종도 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주인과 마찬가지로종도 법정

에서 주인에 반대되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인과 종 사이

에서도 서로를 존경하는 태도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인간을 단순히

소유재산으로 다룬다면 사회의 무질서가 초래될 것이다. 이 점을 강의

를 듣는청중에게적용하면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주장한다.

만약 영국이힘으로써 통치한다면, 영국의 통치는곧 끝날 것입니다. 만

약 영국이 정의와 온유로써 통치한다면, 영국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행

동들을 통하여 그러한 특징들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

로써 우리는 알려지고 판단될 것입니다. 종들을 대하는 우리의 행동에

포용해야 한다.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들은

사랑에서시작되어야 한다. 성자하나님이 최고의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우리는 자기희생의 삶을살아야 한다. 성령하나님께서우리 모두를 위

하여 일하시듯이 우리는 모두와 연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모든 이들을 품을 수 없으며 자기희생의 삶을항상 살 수는 없으며, 다

른 이들과 항상 연합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할 것인가?

모리스의 해결책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에 거슬러서 억지로

살도록 강요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 마음대로 자유방임적으로 살

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다. 모리스의 해결책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이미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더 분명하게 깨닫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모리스는이러한 깨달음은 인간삶과 인간사회에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모리스가 사회도덕이라는 영역의 세 단계들

을, 즉 가정도덕과 국가도덕과 보편도덕을 제안하였기에, 모리스가 그

러한 깨달음을 각각의 단계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적으로, 가정도덕과 관련하여, 모리스는네 가지관계들, 즉 부자

관계, 부부관계, 형제자매관계, 주종관계가 있다고 말한다.61) 첫째, 아들

은 아버지가 없이는 아들이 될 수 없고, 역으로 아버지는 아들이 없이

는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부자관계가 권위-순종의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부자관계는지배-복종의 관계로 전락한다.

둘째, 부부관계가 단순히 인간이 만든 관계가 아니라 부자관계에 함

축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부부관계는 신뢰의 관계가 될 것이다.

신뢰는 동성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우정으로 표출된다. 신뢰는 부분관계

를 통하여 국가의 모든 가정에로 확산된다. 그러나 부부관계의 참된기

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27

61) 앞의책, 12.

62) 앞의책, 82-83.

63) 앞의책, 100.

Page 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나님의 보편적인 도시를 발견하는 것을기대하는 마음을 드러냄으로

써, 또한 동시에 분리주의와 제국주의를 모두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캠

브리지 강연들을끝맺는다. 그는다음과 같이진술한다.

그러므로지상의 모든 정치들 아래에, 모든국가의 질서를 지탱하며모

든 가정의 사랑을 떠받치는 큰 도시가 있을 것이다. 이 도시의 토대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이 도시를 건설하시고 만드신다. 이 도시는

모든 동족과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인류를 나누는 분리

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보편적인 교제를보편적인사망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에맞서서, 화해할수 없는 전쟁을치러야 한다. 분리주의

와 제국주의에 맞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기를기도하고요청한다.67)

V I I. 결론

이 논문을 마치기 전에, 모리스가 제시한 역설의 해결책이 신학적

과제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희생의 교리』(The Doctrine of Sacrifice)에서 모리스는 자신의 신학적

인 바램을 다음과 같이표명하였다.

나의 바램은 신학 전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

름 위에토대를두는 것이다.…이것은 내가 성경으로부터배웠던방법

이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하나

님 자신을 계시하시며, 행동하시며, 말씀하시며, 통치하신다.68)

이러한 바램에 일치되게 모리스는삼위일체가인간 삶의기초이며 인간

의하여 우리가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종들 중의 종으로 떨

어질것인지 드러날것입니다.63)

두 번째로, 국가도덕을 살펴보자. 모리스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만약 국가를 구성하는 자들이 개인들이 아니라면,

국가가 있을수 없다. 만약 온전한 의미로서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면, 온전한 의미로서의 개인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

들은 독립적인 개인도덕과는 관련이 없다. 국가는 언어와 법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특징들이 있다. 첫째, 국가들은 언어의 구별로서 이루어진

다. 이러한 의미로 방언은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방언이 결코 될 수 없

음을 깨닫는 것이, 예를 들면, 영어는 다른 언어들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둘째, 국가는 각 사람을 서로 동등한

개인으로서 다루도록 요구하는 법이 있다. 모리스는 법이 신적인 근거

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는 허구들 위에서 세워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64) 이러한 법은 재산의 침해로부터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개인의 생명을 보존한다. 게다가, 법은각 사람으로하여금 자신의 책임

성을 깨닫도록 한다.“나 자신을 개인으로, 즉 구별되는 살아있는 인격

으로느끼는 것은나의행동들에대하여 책임을 지는것이다.”65)

마지막으로, 보편도덕은 보편사회 또는 보편세계에 적용되는 도덕을

가리킨다. 보편도덕의 단계에서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당연히 인정

하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과 특징이 계시되어 있음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맺으심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

다. 하나님의 그러한 이름과 특징이 드러난 것과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가 드러난 것은힘으로 세워진 제국과는공존할 수 없다.66)

이와 같은 점들을 모두 고려한 후에, 모리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29

64) 앞의책, 243-244.

65) 앞의책, 178.

66) 앞의책, 314.

67) 앞의책, 482-483.

68) Maurice, Sacrifice, x i i.

Page 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모리스는 깨달음과 인정함의 원리가 비실천적이며 비기독교적인 방법

으로보여질 수 있다는 점을기꺼이 인정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모리

스는 이러한 원리는 우리의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원리이며,

신자들에게 기독교로 하여금 단순히 인위적인 종교 이상의 것이 되도

록 하는유일한 원리이다.71)

이 논문에서는 모리스가 사회와 관련하여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전

개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그의 사회도덕의 개념을 검토하고 그의

삼위일체론의특징을고찰하였다. 그런후에 사회도덕의 토대로서 삼위

일체론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논의

속에는 두 차원들과 두 수준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더 중요

하게는, 두 수준들 사이의 긴장 또는간격을 모리스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비록모리스의 논의전개 방식이 정답이라고는할

수 없지만, 그의입장은 오늘날의 현대 삼위일체 신학을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삼위일체론이 지니는 사회적 함의들

을 모색하고적용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좋은 모형이 될 수

있다. 해방신학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한 보프의 입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모리스의 논의 방식은

오늘날의삼위일체신학의 논의에 중요한 통찰을제공할 수 있다.

물론 모리스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19세기 영국의 정황을 배경으

로 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 단순히 적용하는 것은 무

리가 있다. 특히 그 당시의 가정에서는 여전히 주인-종의 관계가 존재

하고있었다는 점은오늘날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19세기의 영국

은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노동자들의 소외와 비참한 상태가 큰 사회문

제였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모리스는 기독교인이지만 사회주의자로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을 실질적으로 창시하는 자가 되었다. 이러한 점

사회의 토대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모리스는 사회도덕을 위한 신학

적인기초를탐구하면서삼위일체가사회도덕의토대임을 주장하였다.

모리스의 사회도덕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라는 점과 우리가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

를 맺고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모리스는 이

러한 깨달음과 인정함의 원리가 인간사회에 좋은 열매들을 맺을 것이

라고 기대한다. 게다가, 이러한 깨달음의 원리는 신학의 과제에 관한

모리스 자신의 이해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 리차드 노리스에 따르면,

모리스에게 신학의 과제는 일치를 위하여 모든 것들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일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노리스의 주장에 따르면, 모리스는 일치에 대한자신의 탐구를

초월하면서도 지탱하는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신학의 과제

란 건설(construction)의 과제가아니라 발견(discovery)의 과제이라고

이해한다.69)

더 나아가서, 인정함의 원리는 신학이란 건설하는 것(building)이 아

니라 파내는 것(digging)이라고 간주하는 모리스의 이해에 의해 확증

된다. 이 점은1852년 자신의 친구인 러들로우(J. M. Ludlow)에게 보

낸 서신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서신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신학자이며 신학 이외에 소명이 없기 때문에, 나의 할 일은 건설

하는 것이 아니라 파내는 것이며, 경제와 정치가 그 이면에 어떤 토대

를 지니고있음을 보여주는것이며, 사회가 우리 자신의 배열에 의해서

새롭게만들어지는것이 아님을증명하는것이며, 사회질서와사회조화

의 법과 토대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점을 발견함으로써사회는 새롭게

개혁될수 있다.70)

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31

69) Richard Norris, “Maurice on Theology,” in F. D. Maurice: A Study, eds. Frank

McClain, Richard Norris, and John Orens (Cambridge: Cowley Publications,

1982), 17-18.

70) Frederick Maurice, The Life of Frederick Denison Maurice Chiefly Told in His

Own Letters , Vol. I-I I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884), 137.

71) 앞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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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인간, 인격, 사회에 관한 모리스의 사회적 관

계적 이해는 오늘날의 사회에 여전히 많은 통찰력과 적용점들을 제공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주제어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 삼위일체, 사회, 사회도덕, 일치

Frederick Denison Maurice, the Trinity, Society, Social Morality,

Unity

접 수 일 2011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1년 8월 11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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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 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35

Page 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perfect unity. The three Persons have social relations to one another

within God. Nonetheless, Maurice’s primary interest is not in this

immanent Trinity but rather in the Trinity for us.

For Maurice, divine society is not closed in itself but open to us,

for the inmost life of God is delivered and communicated to us. For

him, God’s communication of the inmost life to us is explained in

terms of God’s charity. He states that God is charity and thus God

desires us to be like God and to have God’s charity. In order that we

may be like God, God’s inmost life has to be communicated to us.

Therefore, the Triune God, who is charity and is in unity, is primarily

related to us and for us. For Maurice, what is the most fundamental

principle of social morality is to realize and recognize clearly that we

are essentially social beings and that we are essentially related to the

Triune God. He expects that such a realization and recognition would

bear good fruits to our human society. This principle of realization is

affirmed by his understanding of the task of theology, not as pulling

things together for a unity, but as uncovering a unity which is already

given, and not as constructing but as digging out.

Despite some limitations, Maurice’s understanding of the Trinity

and its social implications is sure to provide many insights and

implications for furthering contemporary Trinitarian theology with

regard to society or social problems.

The Trinity and Society in Frederick Denison Maurice

Baik, Chung-Hyun

Full-Time Instructor

Presbyterian College &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In the light of contemporary renaissance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this paper attempts to understand the theological project of

Frederick Denison Maurice (1805-1872) who approached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relation to society or social morality. In

order to do so, this paper focuses on the ways that Maurice argued

that the Trinity is the ground of social morality, and that a theological

task is to ground all theology upon the Triune Name of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In so doing, this paper examines

primarily his books Theological Essays, Social Morality, and some

other related writings.

Maurice delivered a series of twenty-one lectures regarding social

morality at the University of Cambridge, where he proposed to

investigate a theological basis for social morality. In Theological

Essays he held that the Trinity is the ground of human life and human

society. For him,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Spirit

have “the inmost life” in which the three Persons are in unity. The

Spirit unites the Father and the Son. The Father rests in the Son and

the Son rests in the Father. The three Persons form unity among them.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establish a divine society which is

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백충현, 프레데릭데니슨모리스에서의삼위일체와사회 37

Page 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포스트모던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

방법론에관한연구1)

김 성 원

(나사렛대학교교수)

I. 서론

포스트모던 지구촌 시대가 되면서 여러 종교가 상호 소통과 비교가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차원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

다. 그동안 비교종교학이 진전된 종교시스템을 모색하고 종교간의대

화와 각 종교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최근에“비교신

학”(Comparative theology)이 다시 등장하면서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비교신학은

기독교의 신학적 전통에서 다양한 종교이해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학문적 접근을 하고있다.

본 연구는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비교신학의방법론”들을 정리하고

분석 비평하면서 비교신학의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제안하고자 한다.

비교종교학이 객관적인 차원에서 종교학적 접근을 중심으로 시도되었

던 것과 다르게, 새로운 시대적 신학지평의 가능성으로서 비교신학이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9-72

1) 본 연구는 2011년도나사렛대학교학술연구지원비로이루어진것임.

Page 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심 내용은 신학적 작업은 결국 종교 간의 관계를 통해서 심화될 수밖

에 없는 세상이 되었고, 종교적 경험도 종교간의 관계와 해석에서 경

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비교신학은 앞으로 중요한 학문이라고한 것

이다.4) 그러나 트레시 자신은 비교신학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았으

며, 오히려 철학적인해석학적 신학에많은기여를 하였다.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키스 와드(Keith Ward)는 비교신학에서적

지 않은기여를 하는사람이다. 와드는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개념들

을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의 자료들을 근거로 재해석하고 있

다.5) 기독교의 창조주 신에 대한 인간의 언어를 재해석함에 있어서 다

른 종교에서 언급되고 있는 신적인 언어들을 탐구하여 우주론적 주제

들을 다루면서 창조와 삼위일체를 심화하여 재해석하고 있다.6) 와드의

신학방법에서 독특한 것은 고백적 신학과 비교신학을 구분해서 서술하

면서, 고백적 신학은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반면, 비교신학은 세

상에서 신의 광범위한 사역을 강조하는 것으로 기술하면서, 와드 자신

은 고백적 신학의 입장이 아니라, 신의 광범위한 사역을 탐구하는 비교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언급하였다.7) 클루니는 와드의 방법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와드에서 더 진전된 방향(“Ware-plus”)

으로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8)

비교종교철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로버트 네빌(Robert C.

Neville)은 심오한 종교철학적 이론을 비교종교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면서선두적 위치에 나아가고있다. 클루니는 네빌

신앙과 진리에 기반을 둔 것을 논하는 것이다. 특히 보수적 교회가 대

다수인 한국교회가비교신학을활용해서종교간의갈등을 새로운 국면

으로 이끌 수 있는 기대효과를 모색할 수 있다고 본다.2) 한국의 보수적

인 교회들은 기존의 비교종교학과 종교신학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

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으로 나타난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보수적교회들도 공감을 가질수

있는 비교신학의방법을 제시함으로서종교 간의갈등을 약화시키고기

독교신학의지평을 넓힐수 있는가능성을모색하기 위한것이다.

연구 주제에 관한 선행연구로서 최근에 비교신학에 관에 관심을 가

지고 있는 사람들은 키스 와드(Keith Ward), 로버트 네빌( R o b e r t

Neville), 프란시스 클루니(Francis X. Clooney) 등이 있다. 클루니는

가톨릭 교회의 배경을 갖고 다양한 종교 특히 힌두교와 기독교를 비교

연구하면서 심오한 진리의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 기

독교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신학적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면이 있고,

그러한 면에서 비교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비교신학을

심화하고있다.

최근에 비교신학이라는 말을 화두로 사용한 사람은 사실 클루니가

아니라 데이빗 트레시(David Tracy)가 1986년에 사용한 것이다. 트레

시는 비교신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종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s)에서 사용하였다.3) 트레시가 언급하고 있는“비교신학”의 핵

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 관한연구 41

2) 로버트네빌(Robert C. Neville)은 그동안기독교 신학은 한 종교적 공동체 안에서 자

기비평적 사유작용(self-critical reflections)이 가능한 상태이었지만, 새로운 지구촌

세계의 정황이 전개되면서 한 가지 종교적 전통에만 국한되어서 해석하는 것은 제한

성을 갖게 되어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비교언어와 비교신학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상

황이 되었다. 비교신학은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고 해석하면서 공적인 진리를 선포하

는 것이다. Robert C. Neville, Religion in Late Modernity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2), 232. 본 논문은 네빌의 진리주의적인 입장을

수용한다기보다는기독교의 정체성 중심의 비교신학을시도하는 것으로서 네빌의 입

장과는부분적으로차이가 있다.

3 ) Francis X.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Deep Learning Across Religious

Borders (Wiley-Blackwell, 2010), 42.

4) 앞의책.

5) 앞의책, 43-44.

6) 앞의책, 44.

7 ) Kieth Ward, Religion and Human Fulfillment (London: SCM Press, 2008), 40;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44-45.

8)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45.

Page 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밝혀보고자 한다. 그리고 최근의 포스트모던 정통주의 신학과 연계해서

비교신학방법의 가능성을타진해보고, 비교신학의방법론을 제시해 보

고자한다.

I I. 비교신학의역사

기독교신학은 기독교의 형성 단계에서부터 비교신학이 방법론적으

로 적용되었다. 기독교는 당시의 유대교와 이방종교들 사이에서정체성

을 나타내었고, 기독교의 존재와 전통을 세워 나갔다.12) 즉 비교신학은

이미 기독교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가나안 제사장인 멜

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추앙을 받은 사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13) 초대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바울과 같은 전도자들은 희랍

의 의례와 문학적 사상들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구체적인 희랍 사상과 철학을 섭렵하였고, 로마 종교에 대해서도 일가

견을갖고전도에 임하였다.14)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은 유대적 개념이 메시아를 희랍어“그리스

도”혹은“주”라는 단어로 표현하면서 이방 도시 안디옥에 있는사람들

에게 선교를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리스도 혹은 주라는 개념이1

세기 희랍어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개념이기 때문이다.15) 최고

의 비교신학에 대해서 극찬을 하면서 크게 감탄을 드러내고 있다.9) 네

빌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배경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과정사상과

유교사상을 다루고 있으며, 매우 심오한 비교신학적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10) 네빌이 펼쳐낸 방대한 비교신학이론, 비교형이상학, 비교종교철

학 등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평가

하면서 적지않은지혜를 배우게 될 것으로 보인다. 네빌의 비교신학이

론은 선두적인 입장에서 복합적인 다작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네빌

의 비교신학은 진리 추구를 우선적인 과제로 접근하기 때문에 기독교

의 교회적 활용에서는미흡함을드러내고있는것이사실이다.11)

비교신학은 서양의 신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이 신중하게 다루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시대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비교신학을 다루게 된 것이다. 특히 유교, 불교, 무교, 기

독교 등이 편재한 한국적 상황에서 한국의 교회가 비교종교학에 대해

서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중요성 혹은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의 구조는 먼저 적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는 비교신학의 학문

적인 역사를 기독교 전통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비교종교학과 다르게

비교신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비교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비교종교학, 종교 간의 대화, 비교종교철학과 비교해서

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43

9) 앞의책, 47.

10) 네빌과 클루니의 차이점은 네빌은 중국의 유교적 사상 특히 성리학과 불교이론에

관심을 갖고 비교종교철학을 시도하였지만, 클루니는 인도의 힌두교를 연구하면서

비교신학을 시도하였다. 네빌은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접근을 하지만, 클루니는 실제

적이고 구체적인 가치관과 삶의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네빌은 초월적인 분리적

(detachment)접근을 하지만, 클루니는 실제적인 참여적(engagement) 접근을 시도하

고 있다.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47.

11) 네빌은 공적인 차원에서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 비교신학의 필요성이라고 언급

하고있다. Neville, Religion in Late Modernity, 232.

12) 여기서 비교신학과 변증학(apologetics)은 방법론적으로 다른 양상을 갖고 있는 것

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변증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고, 비교신

학은 다른 문화나 종교를 관찰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지

혜, 이미지, 언어, 상징, 개념, 등을 수용적으로 활용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 이해와

진리의발견을 위한신학적 작업을하는것이다.

13)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24.

14) 앞의책, 25.

15) John H. Berthrong, The Divine Deli: Religious Identity in the North American

Cultural Mosaic (Maryknoll, NY: Orbis Books, 1999), 28.

Page 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서 힌두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기독교와 유사점과 상이한 점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클루

니 자신도 인도의 힌두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비교신학을 시도하고

있다.

구체적인 비교신학으로서 실제 학문적으로 접근한 것은 300여 년

전부터이다. 18-19세기의 비교신학은 주로 선교적인 맥락에서 기독교

중심적으로 접근한 것이 특징이다. 18세기 초입에서 제임스 가든

(James Garden, 1645-1 7 2 6 )은『비교신학』(Comparative Theology)이

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였다.20) 가든은 기독교 안에서“오직 기독교

신학”으로 시도되고 있는“절대신학”과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상호

비교하고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비교신학”사이에서 방법론적접근

을 모색 하였다. 가든이 언급하고 있는 비교신학방법은 기독교의 중심

적인 신앙과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돈독히 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다른종교와 관계속에서 비교신학을 시도하였음에도불구하고, 가든은

주로기독교 내적신학(intra-Christian)을 시도한 특징을 갖고있다.21)

막스뮬러(Max Müller)는 19세기비교신학의대표적인사람으로꼽

을 수 있는데, 뮬러는 주로비교종교학 차원에서 다른 종교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종교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비교신학에 접근하였

다.22)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종교에 대

해서 결정적인 평가와 판단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23) 뮬러는 종교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면에서 상호 관계적 신학을 시

의 신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선교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지속적으로그리스도라는 어휘를 사용하면서이방

인들과 희랍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교훈과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다.16)

바울은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서, 지중

해 연안의 유사문화를 업고전도에 박차를 가하였다. 때로는 이단신앙

들에 대한 준엄한 거부를 선언하면서 비교종교 혹은 비교신학을 시도

하였다.17) 기독교 변증가들도 다른 종교적 사상의 도전과 세속적 사상

에 대해서 비교하면서 변증(apologetics)을 시도하였다.18) 토마스 아퀴

나스는 그의 조직신학(Summa Theologie)에서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

들과 대화를 하면서 신학적 작업을 시도하였다.19) 클루니는 카톨릭 전

통에서16-17세기에 인도에 간 선교사들이 힌두교를 접하고 선교하면

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45

16) Berthrong, The Divine Deli, 28. 버스롱은 기독교는 혼합적 성격을 가진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희랍권의 형이상학과 문학적 도구

를 활용해서 발전한혼합적 사상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희랍의 교부들은 플

라톤의 철학 혹은 신플라톤주의, 스토아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활용해서 유

대적 사상을 기독교화 하였다고 하였다. 희랍어로 기록된 성서가 어쩔 수 없는 혼합

적 성향을 가졌으며, 라틴어번역 성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라틴어 성

서를 바탕으로 서구의 로마 가돌릭 교회 전통이 형성되어20세기 중반에 까지 이르

렀다고 언급하고 있다. The Divine Deli, 28. 버스롱의 관심은 기독교의 혼합적 성향

에 관심을 가진것이 아니라, 그러한 종교적 내용이 오늘날에도 안정적이고 옳은 것

이냐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결국 버스롱은 다원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The Divine Deli , 29.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의 정체성인 케리그마의

핵심은 유구한 역사를 두고 사실상 변하지 않았다. 케리그마에 대한 표현에서 혼합

적 성향은 나타난다고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의 종교적 핵심인 그리스도의 사건은 변

했다고 볼 수 없다.

17)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25.

18) 본 연구는 이미 기독교 초기 역사 속에서 있었던 것과 유사하게 변증학(apology)을

시도하기 위해서 비교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아니다. 비교신학은 지구촌시

대에 종교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기독교의 신

학적이론들을심화하는차원에서시도하는것이다.

19)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25.

2 0 ) James Garden, Comparative Theology; or The True and Solid Grounds of Pure

and Peaceable Theology: A Subject very Necessary, tho hitherto almost wholly

neglected (London, 1700);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31.

21)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31.

22) 뮬러는 비교신학으로 간주될 수 있는 책을 펴냈는데, Lectures on Natural Religion

(1889)과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1873)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age 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 다른종교와의 비평적 대화를 통해서 얻은 지혜를 가지고 이제까지

기독교 신학이 발견하지 못한 기독교의 진리를 발견하는 차원으로 접

근하는 것이필요한 부분이라고여겨진다.

오랜 역사를 두고 비교신학적 성향이 있어왔지만, 구체적으로 신학

적 학문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트레시 티미어

(Tracy S. Tiemeirer)는 비교신학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였다.

데이빗 버렐(David Burrell), 프랑시스 클루니(Francis X. Clooney), 제

임스 프레드릭스(James L. Fredericks), 로버트 네빌(Robert C.

Neville), 키스 와드(Kieth Ward)와 같은 학자들이 심도 있는 학문을

시도하고 있지만, 학문의 정체성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 있으며, 신

학의 독특한 학문분야로 드러나는 과정에 있다고 티미어는 언급하고

있다.28)

클루니는비교신학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져야 할 학문이며,

다음 세대에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학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29) 비교신

학은 기독교의 독특한 정체성과 신학적 이해의 광역화에 기여할 수 있

는 면이있는것은사실이다.30)

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뮬러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구체

적인 언급은 없지만, 특정 종교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비교신학을하는

데에걸림돌이된다고 보지않는것은독특한 면이라고할 수 있다.

뮬러와 비슷한 시기에 제임스 클라크(James Clarke)는 열 개의 주

요 종교에 대해서 소개하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에서 다른 종교들이

갖고 있는 부분적인 진리들은 이미 기독교의 우월한 진리 안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 전개하였다.24) 클라크는 종교의 미래에 대해서 유대교

와 이슬람과 기독교가 보편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보지만, 그의 결론은

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둔 기독교라고 언급하였다.25) 클라크

는 오직 그리스도를 매우 강조한 면에서 배타적인 기독교 신학(exclu-

sively Christianity)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 멕쿨로크(John A. MacCulloch)도 비교신학이라는 제목을 책을

출간하였지만, 클라크와 유사한 맥락에서 기독교의 독특성과 절대성을

언급하였다.26) 멕쿨로크는 유일신론, 삼위일체론, 창조론, 성육신론과 같

은 기독교의 교리적인 범주들을 가지고 다른종교와 심도 있게 비교탐

구하면서, 기독교만이 완전한 종교라고 주장하였다.27) 뮬러를 제외하고

는 가든이나 클라크 그리고 멕쿨로크는 기독교를 중심으로한 비교신학

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에서는

방법론적 차원에서논란의 여지를 안고있다. 기독교의 우월성이라기보

다는 진정한 진리를 찾고 생명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양식에서 기독교

의 진리의 타당성을 논증하는 쪽으로 접근했어야 하는 것이아닌가 한

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47

23)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32.

24) 클라크는Ten Great Religions: An Essay in Comparative Theology (1871)과 이 책

의 후속으로Ten Great Religions Part II: A Comparison of All Religions (1884)를

펴냈는데, 후자는앞의책의해설증보판이다.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33.

25)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33-34.

26) John MacCulloch, Comparative Theology (Methuen and Company, 1902).

27)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34.

28) Tracy S. Tiemeier, “Comparative Theology as a Theology of Liberation,” in Com-

parative Theology: Interreligious Insights from the Next Generation, ed. Francis

X. Clooney (NY: T & T Clark International, 2010), 21. 티미어는 최근에 발전하고

있는 비교신학은 다양한 방법들을 갖고 접근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기독교 안에서,

백인 중산층이고 남성 중심이라고 꼬집고 있다. 한 집단의 독점적인 접근은 보편성

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시아 신학 혹은 해방신학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문화

와 종교그리고다양한사회적 맥락에서접근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보고있다.

29)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52.

30) 아울러 다양한 종교와 문화 그리고 사회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과학과 같은 분야에

대해서 심도 있는 비교신학이 발전되어야 한다고 본다. 최근에 종교와 과학의 관계

에 대해서 적지 않은연구들이 나오고 있는데, 비교신학적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하다.

Page 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들을구체적으로 비교하면서 신학적으로 작업하는것이다. 신앙을 모색

하는 신학적인 작업으로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며, 한 종교적 전통에

서서 다른 종교적 전통들로부터 지혜를 얻고 아이디어를 학습하는 것

이다. 신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새롭게 접하는 다른 종교적 전통에서신

앙을고무하는 내용을 학습하는 것이다. 신학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있

으면서다른종교적 전통을 탐구하는 것이다.31)

비교신학은 직관적이면서 합리적인 통찰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며,

실천적이면서도이론적인시도를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비교신학은두

개 이상의 종교를 비교하면서 어떤 종교가 더 좋다고 다른 종교에 대

해서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학문적 방법으로 다른종교의 본

질에대해서 분석하는 작업을 하는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다른 종교

를 바라보고, 다른종교적 입장에서자신의종교를 살피는 것이다.32)

기독교 신학은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른 종교

혹은 비기독교적 사상과 접하면서 변증하고, 활용하고, 수용하고, 심화

하면서 발전해온 것이사실이다. 포스트모던 지구촌 시대에 접어들면서

비교신학은 더욱진지하게시도되어야할 과제이다. 그동안 시도되었던

비교종교학과 비교신학의 유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교종교학과 비교신학의 목적에는 네 가지 유형으로

I I I. 비교신학의새로운지평

비교신학과 연관된 학문적 부류에서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즉

비교신학, 종교신학, 종교간의 대화, 비교종교학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비교종교학(comparative religions)은 서양에서 소위 종교학

(history of religions)과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종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다. 두 개 이상의 종교와 관련된 아이디어, 어휘, 이미지, 행위, 역사

적 발전 등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

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로 학자들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교하면서 탐

구하는 것이다. 특별한 구심적인 없이 다양한 종교적 요소들에 대해서

비교하고분석하면서접근하는것이다.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이란 신학적인 작업으로서 자신의

종교를 염두에 두고 다른 종교의 전통에 대해서 진리에 합당한 것인지

살피고, 종교적 중요성에 대해서 평가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다. 일반적으로구체적인 주제들을 다루기보다는일반적인 범주와전통

을 비교하면서 신학적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종교신학과 비교신학이

서로 구분이 에메한 면이 있다고 보는견해들도 있지만, 종교신학은 종

교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고, 비교신학은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탐구하

면서기독교 신학적작업을 심화하고보편화하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interreligious dialogue)는 말 그대로 종교간의 실제

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대화 혹은학문적인 대화를

하는것이다. 종교적인이슈들에 대해서대화를 하는것이고, 사람과 사

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과 종교적 가치에 대해서 귀를기울일 용의가 있는 것이며, 상대방

의 입장에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

이다. 다른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입장을 취하면, 종교간의대화는 실

제적으로이루어지기어렵다.

비교신학(Comparative theology)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적인 내용

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49

31)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10.

32) 앞의책, 10-11.

Page 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존 힉(John Hick)은 타종교와의 대화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전제하고, 종교간의 대면과 다양한 진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면서 힉은 혼합주의적인

“지구촌 신학”(A Global Theology)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힉이

언급하고 있는 지구촌신학이란 기독교, 힌두교, 불교에 나타난 구원론

혹은 사후세계에 대한 이해를 융합해서 보편적 신학(universal theo-

logy)을 시도하는 것이다.34) 힉에게 있어서 신의 보편적 구원의 의지라

나타나고 있다. 혼합주의, 평화주의, 진리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정체성

을 심화하는 유형이다. 혼합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다양한 종교적 성향

에서 인간이 종교적으로 안정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합성되어가

는 것을모색한다. 기독교가이미혼합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도 더욱 혼합적 성향을 나타낼 것으로 보고 있다. 존 힉(John Hick)과

존 캅(John Cobb)은 다원주의 입장에서 혼합주의 종교론을 모색하고

있다.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구원은 크게다르게 보지않으며, 궁극적

으로 구원은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혼합주의를 추구하는 유형에

서는 비교종교현상학을 방법론으로 받아들이면서, 종교현상을 분석하

고 해석하면서종교간의유용한 내용을 공유하는입장을취하고 있다.

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51

33) 한국의 대표 신학자들 가운데 윤성범 교수는 서양의 감리교단에서 인정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를 상대적으로 수용하면서 진전된 종교시스템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성(誠)의 신학”을 하나님의종교신학(A Theology of Religions)을 시도하고있는것

으로 보인다. 클루니 교수는 종교신학에 대한 정의를“자신이 속한 종교적 입장에서

다른종교의 의미를살피는 것”이라고 하였다.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14.

일반적으로 종교신학과 비교신학의 차이점은 종교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고, 비교신

학은타종교에 대해서 탐구하면서 기독교 신학을 심화하고 보편화하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이며, 신재식 교수는 종교와 다른

학문분야와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종

교 간의 대화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을 주장하면서, 대화가 소위“종교전쟁”을 줄일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보고 있다. 김흡영 교수는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적 진리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도와 로고스”의 비교를 통한 진리의 발견과

동양적 신학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세 부류의 교수는 기독교 신학전통을 떠나지 않

고 비교학문을 시도하고 있다. 필자는 비교종교에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는 없

지만,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은 다른종교 특히 유교혹은 성리학에서 언급되

고 있는 유기체론과 윤리론이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에 신학적 심화를 제공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색하고 있다. 클루니는 자신의 비교신학적 입장을 칼 라너와

유사한 것으로 보면서, 기독교의 독특성을 언급하면서 다른 종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배우겠다는 열린 입장을 갖고 있는 수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16.

종교신학에 대해서 크리스틴 킵링거(Kristin B. Kiblinger)는 종교신학은 자신의 신

학적 입장에서 다른 종교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Kristin B. Kiblinger, “Relating Theology of Religions and Comparative Theo-

logy,” in Comparative Theology: Interreligious Insights from the Next Generation,

ed. Francis X. Clooney (NY: T & T Clark International, 2010), 21. 유거 니콜슨

(Hugh Nicholson)은 비교신학은 종교신학의 새로운 대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Hugh Nicholson, “The New Comparative Theology and the Problem of Theo-

logical Hegemonism,” in Comparative Theology: Interreligious Insights from the

Next Generation, ed. Francis X. Clooney (NY: T & T Clark International, 2010),

43-47. 그러면서니콜슨은신학적주도주의에대한문제점을제기하고있다.

Page 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mita)37) 사상과 비교되어서대화와 공유기반을모색하면서그리스도와

아미타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믿는 데에는 어렵지 않다고 하면서

다원주의적이고혼합주의적인성향으로 나타나고있다.38)

트렐치(Ernst Troeltsch)는 다원주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기독교의

우월적 독특성을 언급하였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이유는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정도가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렐치가 비교신학적 차원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입

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차원에서 모

든 종교는 유사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신의 계시

와 자신의 현존을 경험하게 하는 종교적인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이다.39)

평화주의적인 비교종교학의 대표는 한스 큉(Hans Küng)이라고 할

수 있다. 존 힉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위해서 비교종교학을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지구촌 신학이라는 혼합주의적인 신학의 필연성

을 언급하면서 다원주의 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존 힉과 비슷한 목

적을 가지고 종교 간의 학문적 대화를 우선적으로 시도하려고 했던것

은 아니다.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서 지식의 확장과 종교적 경험의 심

화를도모하며 궁극적으로는지구촌의 평화를 도모하려고하였다.

한스 큉은 지구촌 공동체의 원만한 협동과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

간의 대화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종교간의 대화를 추진

하였다. 한스큉은비교종교학혹은비교신학을구체적으로시도하였다

기보다는 종교간의 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 에큐메니칼 신학( E c u-

는 개념은 기독교를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이동하게 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전제이다. 기독교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구원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구원에서 실재중심의 보편적 구원을 받아들여야 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힉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한 비교종교신학

을 시도하였지만, 결국에는혼합주의적인 보편적 신학 혹은지구촌신학

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종교적 시스템을 모색하는 것이다.

존 캅(John Cobb)은 존 힉이 신중심적인 차원에서 보편적 신학을

시도한 것과는 다르게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혹은로고스의 창조적 변화

의 원리를 보편적인 신학적 특성으로 보면서 불교와 대화를 모색하였

다.35) 로고스는 역사적 예수에 구체적으로 화육한 것이고, 그리스도는

보편적인 로고스의내재이다. 세상에는 보편적 로고스가 어디든지내재

되어 있으며, 창조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캅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불교의 공(空)은 궁극적 실재(the ultimate

reality)이고, 기독교의 신은 궁극적 사실(the ultimate actuality)이라고

하면서 서로의 궁극적인것에대한공유기반을언급하였다.36) 이 공유기

반을통해서 서로대화하고진전된 종교이해를해야한다는 주장이다.

혼합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존 캅은 비교종교의 방법론에서 범

주적 비교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기독론에 대한 해석에서 창조적 변화

의 능력을 갖고 있는 로고스는 과정신학에서 언급하고 있는합생의 원

리(principle of concrescence)와 혼합되어서 보편적인 창조적 변화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것이 불교의 아미타(阿彌陀,

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 연구 53

34) John Hick, Death and Eternal Life (London: Collins/Fount, 1976) 참조.

35) John Cobb, Christ in a Pluralistic Ag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5),

62-94.

36) John Cobb, Beyond Dialogue: Toward a Mutu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 and

Buddhism (Philadelphia: Fortress, 1982), 42-43.

37) 중생을 제도하는서방극락정토의여래(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

38) Cobb, Beyond Dialogue, 123-128.

39) Paul F. Knitter, No Other Name?: A Critical Survey of Christian Attitudes toward

the World Religions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 25. 아놀드 토인비

(Arnold Toynbee)도 종교는 결국 같은 것으로 보면서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No Other Name? 34-38.

Page 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동정(動靜)이 일어나고 음양(陰陽)이 생성되어서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생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주염계는 태극은 존재론적인 것을 넘

어선것으로 보면서 무극이라고 한 것이다. 네빌은 무극이 세상에 존재

하는 만물의 근원적 존재로서 비결정적 기반(indeterminate ground)과

같은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비결정적 기반은 창조성을 갖고 있으며, 세상은 창조적 기반에서 생

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에 있다.43) 비결정적인 창조적 기반이 종교적으로

신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종교적으로 궁극적인 근원에 대한

느낌 혹은 감사와 함께 변화를 경험하는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44) 세상

에는 창조된 질서가 존재하고, 그 창조의 기반은 창조주가 되는 것이

다. 창조의 기반은 신적인 존재로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세상

의 궁극적 조건(the Ultimate condition)으로 이해된다면 신으로 불릴

수 있는것이다.45)

궁극적 조건이란 모든 것에 대해서 영향을 주고, 원인이 되며, 상황

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 조건은 스스로만 조건이 될 뿐이지,

다른어떤 것에의해서 조건되는 경우는 없다. 창조적인 기반은 세상의

궁극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46) 세상의 존재론적 근원을 무극 혹은 창

menical Theology) 혹은 비평적 에큐메니칼 신학을 주장하였다. 한스

큉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핵심은 기독교의특수성에서 보편성을 모색하

고, 논리적인 논쟁의 신학에서 서로수용하고 대화할 수 있는신학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한스 큉의신학적 핵심은 기독론 중심적 특성

을 갖고 있다.40) 그러면서 지구촌 평화는 종교 간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비평적 에큐메니칼 신학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조직적 방법(historical-systematic method)을 제안하면서 종교간

의 대화를 위한신학적 작업을 제시하고있다.41)

진리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 로버트 네빌(Robert C. Neville)은 심

오한 종교철학적 이론을 정교하게 전개해 가면서 비교종교철학적인차

원에서 창의적인 이론들을 괄목하게보이고 있다. 네빌이 비교종교학을

시도하는 것은 진전된 종교론을 모색하거나 지구촌의 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심오한 진리가 무엇이고, 실제로 필요한 진리가

무엇인지밝히는 것이그의학문적 목적이다.

네빌은 신은 창조자이며 창조성을 갖고 창조 행위를 일으키는 존재

이다. 창조자라는 언어는 기독교에서 온 것이지만, 네빌의 종교철학적

형이상학에서는 형이상학적 창조주에 해당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결정된 존재의 근원으로서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이 창조자는 세상에

내재해 있으며, 창조행위 자체로서 작용하고 있다.42) 이러한 신은 성리

학에서 언급되고 있는 태극(太極)사상과 비교되어서 해석되고 있다. 원

래『주역』(周易)에서 언급된 태극사상은11세기 주염계에 의해서 무극

(無極)과 연계되어 해석되었다. 세상의 만물이 화생되는 것은 태극에서

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55

40) Hans Kü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ium: An Ecumenical View (New York:

Doubleday, 1988), 179.

41) Hans Küng,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s (New York:

Continuum, 1993), 120-129.

42) Robert C. Neville, The Tao and the Daimon: Segments of a Religious Inquiry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2), 54, 73.

43) 앞의책, 117.

44) 앞의책.

45) 앞의책, 118. 네빌은 비결정적기반이 존재와 비존재의 양면성을갖고있는것을잘

묘사하고 있다. 피조건 사물을 떠나서 볼 때에,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반은 비결정적

인 것이며, 모든결정은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된 사물과 관련해서 생각하

면, 기반은 결정적인것이고 세상에모든 결정된 것은창조된 것이다. 비결정은없는

것이고, 결정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반은 무(nonbeing)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

가지로 유(being)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이며, 공(emptiness)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순수행위(pure act)라고불릴수도 있는것으로 해석하고있다. Ibid.

네빌이 창조주를 유기체적인 차원에서 존재와 비존재의양면성을 언급한 것은, 포스

트모던 신론에서 주의 깊게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의 초월성과 내

재성의 전통적인이원론적인문제를유기체적인차원에서새롭게 해석한것은가치

Page 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체성을 심화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담고

있다. 한국적 상황은 불교와 유교의 분포가 상당한 부분에 이르고 있

고, 오히려 기독교가 열세에 있는입장에서 다른종교에 대해서 배타적

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능사가 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기독교는 독특

한 정체성을분명히 하지않으면, 성장하고 있는다른 종교에 상대적으

로 쇠잔의 일로를 걷게될지도 모른다. 그런맥락에서 클루니가 언급하

고 있는 비교신학은 기독교의 정체성 심화에서 일조가 될 수 있는 방

법론적 이론이라고볼 수 있다.

다른 종교에 있는 이미지, 범례, 개념들을 접하면서, 이들을 충분히

이해하고서로충돌하지말아야 지혜를 얻는다고 클루니는 주장하였다.

세련된 사유능력을 가지고 거대한 우주의 다양한 이미지를 포용할 수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였다.52) 기독교의 정체성을 강조

하는것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경계할 것도 클루니는 언급하고 있다. 다

른 종교의 이미지나 상징 들을 단순히 기독교의 신학적 심화를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은 지양하고, 다른 종교의 이미지와 상징 자체의

가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53) 다른 종교의 이미지와

상징 자체의 가치에 대한 언급은 어떤 가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명료하

게 언급하지않은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I V. 비교신학과포스트모던정통주의

비교신학과 포스트모던 정통주의의 관계를 여기서 다루는 이유는

조자로 본 것이다. 네빌이 추구하는 것은 비교종교철학을 통해서 형이

상학적인 진리를 모색한 것이며, 네빌의 신론은범재신론으로 볼 수 있

고, 혼합주의라기보다는진리를 추구하는 진리주의로보는것이타당할

것이다.47)

클루니의 수용적 정체성주의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사람들과 다르게

기독교의 정체성과 신앙을 전제로 비교신학을 시도하고 있다.48) 클루니

의 비교신학은 수용주의적인 입장에서 시도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독

특한 정체성을 선언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울

것은 배워야한다는 열린 입장을 취하고 있다. 칼 라너(Karl Rahner)처

럼 수용주의적인 입장에서“수용적 신학”(including theology)을 시도

하고 있다. 자신이 다른 종교에서 배운 것을 기독교 정체성의 이해 혹

은 심화에 활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9) 다른 종교에서 갖고 있는 지혜

를 삭제하는 것은 정직한 학문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정직한

학문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교에서 배운 지혜를 왜곡하거나 소외시

키는일이있어서는안 된다는 입장이다.50)

클루니는 포스트모던 지구촌 다원주의 사회에서 앞으로 신학적 작

업은 비교신학의 임무가 지속적으로 제기될 것이며, 다음 세대에도 중

요한 신학적 주제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51) 보수주의 신학이 지배

적인 한국에서 클루니의비교신학적입장은 가능성이있어보인다. 기독

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의 지혜를 섭렵해서 기독교의 정

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57

있는주장으로여겨진다.

46) 앞의책.

47) Neville, Religion in Late Modernity, 232. 네빌은 후기현대의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

는 상황에서 종교적인 전통에서 사용하는 언어만 사용한다면, 결국세상은 기독교를

외면하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Neville, Religion in Late Modernity, 134.

48) Clooney, Comparative Theology, 12.

49) 앞의책, 16.

50) 앞의책.

51) 앞의책, 52.

5 2 ) Francis X. Clooney, Beyond Compare: St. Francis de Sales and Sri Vedanta

Desika on Loving Surrender to God (Washington, DC: Georgetown University

Press, 2008), 141.

53) Clooney, Beyond Compare, 16. 이러한 클루니의 입장은 배타주의자가 아니고 수용

주의자라는사실을 분명히하는모습이기도 하다.

Page 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신학을 시도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학문이나 종교 혹은 문화라 하더라도 신의 은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

에,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제일의 신학

은 기독교의메타내러티브이며교리의 근본이 되는것이고, 그 외의것

은 제이의 신학으로서 신의 은총이 내재되어 있는 모든 자연과 학문과

종교를 포함것에대해서 해석을 시도하는것이다.55)

이러한 급진적 정통주의 입장에서 비교신학은 방법을 보면, 상호 대

화와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면을함축하고 있다. 아직까지 급진적

정통주의와 비교신학 사이에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논평을 하고 평

가하고 해석을 시도한 것이 없다. 기독교 정체성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는 차원에서 서로 공감할 수 있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 탐구하고 해

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편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보수적인 한국교

회가 비교종교학 혹은 종교신학을 거부하였지만, 비교신학으로 접근한

다면거부할 명분이 줄어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비교신학은 급진적 정통주의에 비해서 다른 종교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는 입장이지만, 급진적 정통주의에서는오직기독교 신학

적 해석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서로 차이점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양한 종교와 복합 문화적인 맥락에서 살고 있는 포스트모

던 지구촌 공동체는 다른 종교와 문화를 접하지 않고살 수 있는 길이

없어지고 있다. 비교신학이든 오직신학이든 간에 비교종교적인 접근을

불가피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기독교 정체성주의를 축으로

하는입장에서 상호 방법론적 교류는 보수적 교회가 거부할 이유가 없

한국의 교회와 비교신학의 연계성을 실효적으로 논의하고 적용하기 위

해서이다. 한국 보수주의 교회가 부담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최근의 신

학적 흐름은 포스트모던 정통주의라고 본다. 포스트모던 정통주의적인

차원에서 비교신학을 시도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종교 간의 문제에 효

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던 정통주의

는 스텐리 그랜츠(Stanley Grenz)와 토마스 오덴(Thomas Oden)이 대

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정통주의는 모더니티의 한

계를 넘어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독교의 정통주의 신앙을 보전하는

차원에서 접근하고있는신학적 유형이다. 탈이원론적인인간이해를 모

색하고, 초이성주의적인 기독교 신학을 추구하고, 탈지식중심주의적인

신앙을 시도하면서, 보편적이고역동적인 정통주의 신학을 모색하는 것

이다.

탈이원론적이고, 초이성적이며, 탈지식주의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여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랜츠와 오덴

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한 것은 아니지만, 비교신학적 차

원에서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포스트모던 정통주의 신학에 위배되기

때문에 거부하는 입장을 취할 가능성은 약해 보인다. 기독교의 독특주

의를 언급하면서도, 이성중심주의와 지식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원론

적 사고에 대해서 유기체적인 창조적 이해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비교

신학의 가능성 여지가 있다. 보편적 계시 혹은자연계시를 부정하지 않

으면, 보편적 계시 속에서 지혜를 얻고 진리에 대해서 심화적 이해를

도모하는것은얼마든지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정통주의와 유사하면서도 성격이 조금 다른 급진적 정

통주의(radical orthodoxy)는“오직신학”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존

밀뱅크(John Milbank)가 포스트모던 어거스틴주의 이론을 중심으로

진전된 정통주의를급진적으로 주장하고있다. 모더니티의평면적 허무

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포스트모던 참여적 신학을

주장하고 있다.54)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신의 은총이 내재되어

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59

54) John Milbank, Catherine Pickstock, and Graham Wards, eds., Radical Orthodoxy:

A New Theology (London: Routledge, 1999), 4.

55) John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Beyond Secular Reason (Malden, MA:

Blackwell, [1990] 2007), 1. 밀뱅크는 신학이란 메타 내러티브로서“조직적 논리”

(organizing logic)라고 하면서, 신학적 메타 내러티브로 회귀가 그의 신학적 목적이

라고언급하고 있다.

Page 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학의 방법론을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

V. 비교신학방법론

비교신학은 기독교의 진리가 불가피하게 갖고 있는 부족한 면을 갖

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 담겨있는 지혜를 살

피면서 도움을 얻어서 기독교의 진리를 보완하고자 하는 방법이 아니

라, 기독교 진리에 대한이해를 심화하는것이다. 기독교의진리는 이미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 것이고, 그 진리의 심오함을 더 잘 이

해하고 삶의 정황 속에서 다원적 적용성을 구체화하여 진전되고 향상

된 삶의 조건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 진리의 다원적 적용성과

같은 것은 창조적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삶의 맥락의 새로운 국면에

서 기독교 진리가 살아서 움직이도록 하기위한것이다.

비교신학은 독특주의에 제한되지 않고 수용적 독특주의 입장을 취

하는 것이다.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기반을 가지고 열린 자세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신앙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

교와비교하고 공적 대화와 비평적 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급진적 정

통주의가 신플라톤적인 어거스틴주의적 일원론에 입각해서 메타 내러

다고본다.

급진적 정통주의에서는 비교종교 혹은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서 비

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종교 간의대화는 상대방의 사상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을 전제하고 대화를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신

의 은총으로 보는 견해에 합당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대한 해석은 오직 신의 은총의 범주 안에서 기독교 신학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에도움이 되는접근만 인정된다고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급진적 정통주의는 비배타적 배타주의(non-exclu-

sive exclusivism)라고 할 수 있으며, 클루니의 비교신학은 수용주의적

인 모습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비배타적이란 세상의 모든 학문과 종

교와 문화는 신의 은총 안에 있다고 보는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며, 배

타적이란 모든것을 기독교의 신학적 해석을 위한 것으로만 보는 것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신학이수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기

독교의 정체성 이해의 심화를 근본적으로 추구하면서도, 다른 종교와

문화의 가르침에 대해서 열린 자세를 갖는 다는 차원에서 수용주의라

고 할 수 있다. 클루니 자신도 수용주의적인입장으로 치우치면서수용

주의의 대표자인 칼 라너(Karl Rahner)와 유사한 입장에 서 있다고 언

급하고 있다.56) 포스트모던 정통주의는 수용적 독특주의 차원에서 비교

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61

56) 라너의 수용주의적인 신학적 특성은 그의“신의 자기소통론”에서 살피는 것이 의미

있다고 본다. 신의 소통은 우주적 주체들의 상호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의 소통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Karl Rahner,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New

York: The Crossroad [1976] 2002), 193. 물론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소통은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신의 소통이다. 그러나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통해서

신과 소통이 가능한데, 인간이 순수의지를 가지고 우주의 기원, 미래의 역사, 초월적

인 초청, 수용적인 지식,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신의소통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 내

면에 신을 경험할 수 있는 순수상태는 선험적(a priori)인 것이다. 역사와 사물을 통

해서 경험하는 신의소통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점진적인 깨달음이나 성

숙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Ibid., 83. 역사와 사물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신의소통은 다른종교에서도일어날 수 있는것으로보고있다. 라

너의 초월적 그리스도론은 다른 종교에 대한 수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데에 기

반이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초월적 그리스도는 신의자기소통 차원에서 세상의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을 보편적 로고스로 부르고 있다. 보편적 로고스는 다

른 종교에도 있을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배타적

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신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신의

자기소통은 신의 일반계시와 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계시라는 전통적인 개념보다 소

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라너는 보다 실제적인 신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라너는 인간은 세상과 신의중간 위치에 있는존재로서, 역사와초월 사이에

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가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Karl Rahner, Spirit in the World,

trans. William V. Dych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8), 407.

Page 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다. 이 점은여전히 종교간의 대화 차원에서 논란의 여지를 안고있

는 것이지만, 한국의 보수교회가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이러한 접근에

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본다.

비교신학이 공적 대화(public discourse)를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열린대화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것이다. 공적대화는 밀뱅크가급진적

정통주의에서 세상의 여러 학문들과 대화를 모색하는 데에 방법론적으

로 사용한 것이다.57) 신의 은총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세상에는 어

떤 학문이라하더라도 하나님을 알고이해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러

한 학문과 공적인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급진적 정통주의에

서 언급하고 있는“오직 신학”의 이론은 세상의 모든 학문이 신학이고,

기독교 교리신학은 일차신학이며, 다른학문을 이차신학으로 보는것이

다. 다른 학문의 이차신학은 일차신학의 이해를 돕는 학문으로서 공적

대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비교신학에서 공적대화를 방

법론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급진적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세계관과 공

통점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신학만을 주장하는급진적 정

통주의와 다르게 비교신학의 공적대화는 다른 종교에서 새로운 아이디

어나 지혜를 이해하고 학습하면서 기독교의 진리의 이해의 지평을 넓

히는차원에 머무는 것이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지혜와 진리를 알리고

나누는 것이함께병행되는 것이다.

비평적 대화(critical dialogue)는 열린 대화와 다르게, 진정한 진리

를 모색하고, 기독교의 메타네러티브의 영적인 미의 타당성을 인지하

며, 새로운 삶의 정황에서 창의적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비평

적 사고 없이대화를 하는것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진

티브의 방법론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비교신학은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신의은총의 보편적 내재는 타종교에 대한 해석의 가능

성을열어두는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보수 신학적 입장에서 바르트와 크레머와 같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연계시를 거부한 바

르트의 경우,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실증적 계시만 믿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다른종교에 대해서는절대적인 배타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

나 비교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에 온 세상에 내재되어 있고, 자연적 계시

를 전제하기 때문에 신학적 지혜를 자연의 세계에서 혹은 세상의 다양

한 문화와 종교 속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의 메타

네러티브에 신학적 기반을 두고 공적 대화 혹은 비평적 대화를 통해서

메타네러티브의 이해를 심화할 수 있는 차원에서 수용적 독특주의 입

장을취하는 것이다.

수용적 독특주의(particularism)는 배타적 수용주의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 독특주의란 배타주의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서 기독

교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세상에 다양한 종교

가 있지만, 기독교의 정체성 중심으로 다른 종교를 보고 해석하는 것

이다. 다른 종교도 신의 은총의 보편적 내재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

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안에 담겨있는 지혜를 이해하고 의미와 가

치관에 대해서 이해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심오하게 터득해 가

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기독교의 종교적 정체성과 진리성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지혜를 얻어서 기독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

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진리는 근본적인 것으

로 믿는 것이며, 다만 인간의 지혜로 그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

는 면이 있기때문에, 다른종교에 담겨있는 지혜를 이해하면서 기독교

의 진리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가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진리에

대한 비타협적 근본성을 전제한다는 차원에서 독특주의라고 부르는 것

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63

57) 트레시(David Tracy)가 공적 신학(public theology)를 다원주의 문화에서 시도해야

한다고 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David Tracy, Analogical Imagination: Christian

Theology and the Culture of Pluralism (New York: Crossroad, 1981). 그러나 이들

의 신학적 입장은 서로 다르다. 즉 밀뱅크는 급진적 정통주의 입장이지만, 트레시는

수용주의적인가톨릭 신학입장을취하고있다.

Page 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 있는것은 사실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할 분야로 떠오

르고 있다. 비평적 대화는 단순한 공적 대화의 차원을 넘어서 진정한

진리와 종교적인미를모색하는데에피할수 없는방법이라고본다.

VI. 결론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맞이해서 비교종교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사업적으로 문화적으로 국제적으로

가까이 지낼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갖고 있고, 서로 대화를 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배타적이거나 자신의 종교의 우월성만

주장한다면 대화와 평화는 고사하고 갈등만 심화될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동서를 막론한 종교학, 신학, 인문학에종사하는많은학자들이비

교종교학에 힘을 쏟고 있다. 지구촌의 종교간의 갈등을 조절하기 위해

서 종교간의 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에 여기저기에서 종교 간

의 대화가 시도되고 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 속에서 최상의 진리를

찾고추구하는 것은 시대적인 필연적 요청이다. 심오한 진리를 찾아진

전된탐구가 활기를 찾기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주의 신학이 지배

적인 한국 상황에서는 아직도 비교종교학에 대해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회피적인 반응을 보여왔던 것이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신학이 배

타적인 입장에서 지구촌 공동체의 새로운 시대적인 요청을 언제까지

왜면할 수는없다고본다.59)

정한 진리와 종교적 아름다움 그리고 창의적인 지혜를 얻기는 쉽지 않

을 것이다. 수평적 대화는 상대의 부족한 점도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소극적으로 하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진리와 종교적 미의

본질을 간과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신학은 비평적 대화를

통해서 진전된 이해를 위한지혜를 얻는방법으로접근하는것이다.

종교간의 대화는 서로 종교의 동등성을 전제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다. 종교의 동등성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평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실제적으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 간의 대화의 유형이 안고 있는 문제는 특정 종교가 문제

가 있을 경우에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이다. 이를테

면, 이슬람의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들이갖고 있는극단적인 배

타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로 남아 있다.

물론이러한 종교적인 관습과 교리는 나름대로 논리를 갖고 있고, 그런

것이 생겨나게 된 배경들이 있다.58) 극단적 배타주의는 대화의 문을 닫

고 있기때문에 종교의 동등성이나 대화의 가능성을찾아보기 어렵다.

비교신학은 비평적 대화를 통해서 다른 종교를 향해 접근할 수 있

다. 힌두교를 깊숙이 연구한 클루니는 힌두교 경전에 대해서 심오한 이

해와함께 구체적인 지혜를 얻어서 기독교 진리의 이해를 도모하고 있

다. 네빌은 유교 혹은 심오한 성리학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자신의

창의적인 형이상학적 신론을 제시하고, 인간조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비하였다. 물론 이들이 본 논문에서 다루

고자 하는 비교신학의 방법에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창의적

이고 새롭게 진전된 아이디어들은 학문적으로 매우 진전된 공헌을 하

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65

58) 일부다처제는 생활고에 있는 여성을 구제하기 위해서 사회복지 차원에서 발생되었

다는 이론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생활고에 있는 여성들을 부를 가진 자들이

후처로 삼아도 되는것인지 의문이다. 일부다처제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며, 보편적인사회질서의규범으로받아들일수는없는것이다.

59) 비교종교학은 그동안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신학에서 시도되어진 것이지만, 비교

신학 방법은 보수주의 신학에서도 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기독교 신학의 심화를 위해서 다른 종교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순응하는 것으로 본다. 기독교의 형

성 과정에서 히브리 사상의 메시아가 희랍 언어 그리스도로 표현되어서 이방세계에

복음을전하는 데에크게기여를 하였고, 예수의신성을 이해하는 데에희랍의 로고

Page 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면이있다.

오늘날 보수주의 신학에서도 비교신학 방법을 활용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심화하고 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모색할 필요성을 더욱 고려

해야할 때가 되었다고본다. 포스트모던 지구촌 다원주의 사회에서기

독교의 정체성을 갖고 다른 종교를 대하고 관찰하고 대면하면서 정체

성 심화와 전도의 용이성을 위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혜를 얻는것

은 보수주의신학에서도고려할 수 있는방법이라는사실이다.

주제어

비교신학, 포스트모던종교다원주의, 비교종교학, 종교신학, 비교종교철학

Comparative Theology, Postmodern Religious Pluralism, Comparative

Religion, Theology of Religions, Comparative Philosophy of Religion

접 수 일 2011년 7월 11일

심사(수정)일 2011년 7월 31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한국 보수교회가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 정통주의

혹은 급진적 정통주의에서 비교신학을 시도하면, 이전보다진전된 교회

의 열린 이미지와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포스트모던 정

통주의는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열린 자세로 정통주의를 이루고 있다.

모더니티의이원론을 넘어서 탈이원론적인 방법, 지식주의를넘어서 초

지식주의 방법, 개인주의를넘어서 공동체주의의방법을 긍정적으로 수

용하고 정통주의 신학을 주장하고 있다.60) 비교신학도 배타적인 기독교

신학의 절대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향하고 있다. 다른 종교가 갖

고 있는 지혜를 삭제하고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배타적 입장은 갈등을

심화하고선교적 가능성을 제한시키는한계성이있다.61)

비교신학의 핵심적인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 대해서

열린 자세로 진리를 모색하고 발견하는 것이며, 발견된 진리는 그리스

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진리주의를 추구하는 비교종교

철학과 다르다. 비교종교철학에서는 진리를 발견하지만, 그 진리가 그

리스도와 연계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다. 태극과 기독교 신과 과정철

학의 신 개념을 비교해서 창의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로버트 네빌의

형이상학적 창조자 신은 요한의 로고스 그리스도와 전적인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교종교철학이 진리를 발견하지만 그

리스도와 연계성이 약하기 때문에, 비교신학은 비교종교철학과 다른

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67

스의 개념을 활용해서 해석한 것은 소아시아와 유럽을 기독교화 하는 데에 많은 영

향을 주었다.

60) Stanley J. Grenz, A Primer on Postmodernism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 Publishing Co., 1996), 167. 포스트모던 시대에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토마스 오덴(Thomas Oden)은 과학적인 내용에대해서 심도있게 대화를 하면서 기

독교의 정체성이해의 심화작업을 시도하였다.

61) 비교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를 포함한 모든 것에 신의 은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열린자세로 모든 것에대해서 탐구하고 이해를 모색한다. 열린자세로

분석하고 탐구하면서 얻은 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비교신학의 열린 방법은 종교 간의 문제를 보수주의 교회들이 새롭게 생각할 수 있

는 것이라고여겨진다.

Page 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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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69

Page 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Study on Postmodern Religious Pluralismand Methodology in Comparative Theology

Kim, Sung-Won

Professor

Korea Nazarene University

CheonAn City, Korea

As an epoch of postmodern global village emerges, the urgent

need of communication, interpretation, and comparison among

various religions in diverse ways exposes inevitably for scholars of

religious studies, theology, humanity, etc. Confronting the needs,

comparative religions, interreligious dialogue, comparative philo-

sophy of religion, and comparative theology have been attempted by

many dedicated scholars in various dimensions.

This study deals with this trend of comparative religions focusing

on a relatively new scope of comparative theology. Specially, com-

parative theology within postmodern orthodoxy perspective was

made rubric for Korean evangelical churches, which would accom-

modate without any serious resistance. It has been the fact that most

of Korean churches were relatively conservative and tended to be

exclusive to other religions, even though Korea is religiously a plu-

ralistic society. This essay categorized the current trends of compara-

tive religions as the following chart.

Panikkar, Raimon. The Intrareligious Dialogue. Mahwah, NJ: Paulis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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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김성원, 포스트모던 종교다원주의와“비교신학”방법론에관한연구 71

Page 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Barth 신학과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신학적인간론을 중심으로

황돈형

(서울중앙신학교, 부교수)

I. 들어가는글

바르트 신학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19세기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

하고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하였던 것에 있다. 1, 2차 세

계 대전의 와중에서 인간의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문화적 성취를 통해

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하려고 한 모든 시도가 불신을 받고 하나님에

대한 말이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들리기 시작할 때 바르트는 그 이전의

시대와 달리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하

였던것이다. 그는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 증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밝힘으로써 신의 부재

를 경험하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위해서 스

스로인간적으로자기를 나타내셨는가를밝힌것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그의 신학적 입장은 비판을 받고 있다.

This essay urgently emphasizes evangelical “comparative theo-

logy” and suggests methodology for comparative theology as well,

which Korean evangelical churches would agree with and engage in

the discipline to promote the church development and activities in the

pluralistic society with minimizing any possible conflicts with other

religions.

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73-106

1) 데이비드 F. 포드 편집/ 류장열 외 옮김,『현대신학과 신학자들』(서울: 기독교문서선교

회, 2005), 61-66.

Page 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참된 인간을 통해서만 참된 신학적 인간 이해가

가능하다는 바르트의 사고가 최근의 과학적 인간이해와 비교하여 볼

때 과학적으로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인간학적 지식을 충분히 포함하

지 못하기에 그의 신학적 인식의 정당성은 시대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제시하는 바르트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시대에 따른

지식의 한계에 있어서 모든 신학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오히려 바

르트가 강조한 것처럼 신학 자체가 인간의 학문으로서 자신의 현실을

떠나서 신학을 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

인다.6) 그렇다면 과연바르트가 신학을 수행하였던 신학적 사고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사고방식으로서만 보아도 무관한 것일까? 아니면 바르

트의 신학적 사고는 과연오늘날의 과학적 시대에도 새로운 과학적 세

계상에 상응하는 대화의 가능성을 나타낼 수 있을까? 만일 그의 인간

현실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신학적 인식의 정당성을 한계 짓는 것으로

드러날 때 과연 오늘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본 논문에서

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바르트의 사상적 특성을 다시 한번 새롭

게 살펴봄으로써 그의신학적 입장에서신학과 과학사이의 대화를 긍

정적으로이룰수 있는보다새롭고 포괄적인 대안을추구하려고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적 인간이해의 특성이 무엇

인가 파악하고자 한다. 즉 바르트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계시적 인식에

서 어떻게 하나님 인식과 인간이해의 연관성이 서술되는가를 이해함으

로써그의신학적 사고의 특징을 파악하고, 둘째바르트가 신학적 인간

이해를 위해서 과학적 인간이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의 방식을

살펴보고, 셋째 인간을 다루는 현대의 과학적 차원에서 바르트의 신학

과 연관될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화해론적으로

이러한 비판은 주로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식으로 등장한다. 첫째, 계시

가 발생하는 구체적인 상황으로서 일반적 경험의 차원을 서술하는 자

연계시에2) 대한 문제와 더불어 계시적 사건의 종교적 차원을 무시하였

다는 것에서,3) 그리고 둘째로 믿음이 발생하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인간적 경험의 차원이 전제되고 있는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았다

는 이유에서,4) 그리고 셋째로 바르트가 펼치고 있는 성서와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해석학적 전제가 너무나 근대적이었다는 것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5) 이러한 비판의 공통적인 요소는 바르트가 추구하였던계시

인식이 인간학적 전제를 반대하는 입장에 따라서 형성됨으로써 오히려

현대적 입장에서 볼 때 현실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제한적으로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이루시는 하나님

인식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 바

르트 자신의 해석학적 세계에 묶여있지않았는가하는비판인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적 지식의 정당한 한계를 자신이 이해하였던 현실에 따

라서 제한했다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참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인인 현실적 인간으로서는 참된 인간을 알 수 없고 예수

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75

2) A. McGrath, The Science of God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83-84.

3 ) W.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vol. I(Göttingen: Vandenhock &

Ruprecht,1988), 133ff. 그에 따르면 계시가 발생하는 구체적인 종교적 상황을 무시

하고있다고 본다. 즉 계시는 빈 공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현실로서 종

교적 경험의 가능성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P. J. Rosato, The Spirit as

Lord: The Pneumatology of Karl Barth (Edinburgh: T&T Clark, 1981)

4) G. Ward, Christ and Culture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5), 8.

5) J. Moltmann/김균진 옮김,『신학의 방법과 형식』(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301-

302. Wolf Krötke, “The humanity of the human person in Karl Barth’s anthropo-

logy,” ed. J. Webster Karl Bar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169. 그리고C. Janowski, “Zur paradigmatischen Bedeutung der Geschlechter-

differenz in K. Barths ‘Kirchliche Dogmatik’,” ed. H. Kuhlmann, Und drinnen

waltet die züchtige Hausfrau. Zur Ethik der Geschlechterdifferenz ( G ü t e r s l o h :

Mohn, 1995).

6) K. Barth/ 이형기 옮김,『복음주의 신학 입문』(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137-

147. 특히 바르트는 인상적으로 신학이 지니는 한계성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통과해야할 것으로묘사한다.

Page 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비판적 방식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7) 그리하여 인식

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인식의 주체가 되시고, 인식하는 인간은 수동적

으로그 인식에 참여하는 존재인 것이알려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시

적 하나님 인식은 변증법적 관계성 가운데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만

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식도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한 인간현

실에대한 이해를 동반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적 행위의 사건인 예

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

었던 자신의 죄의 현실을 경험하고 하나님 인식의 한계성을 경험하게

되는것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은 계시적 인식을 통해서 자신을 추상적

인 개념이나 자신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생물학적이나 물리학적 특성

한 가지로 환원적인 축소 과정을 통해서 발견될 수 없는 가장 현실적

인 인식으로서 자신 안에 감추어진 죄의 왜곡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된

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이러한 자신의 죄의 왜곡된 면에 대한 인식을 가져오는 것에만 해당되

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죄의 왜곡된 관계를 드러낼 수 있는하

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성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인식이 참된 인간 인식의 출발점이 되

는 것이다.8)

계시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밝혀진 참된 인간을 다루

는 학문으로서의 과학의 미래적 성격에 대하여 밝히고자 한다. 이를통

해서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의 한계로서 논해지는 계시에 따르는 인간

학적 주장이 오히려 과학과의 진실한 대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방

식이됨을강조하고자한다.

I I. 바르트의인간학적이해의방법론적특성

우선바르트의 신학적 인간 이해가 나타내는 방법론적 문제를 살펴

봄으로써 그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고자 한다. 가

장 중요한 특징으로, 바르트는 인간론을 기독론에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 까닭은 인간 이해의 가장 중요한 면이 현실적 인간에 대하

여 말하는 것이고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연관성 가운데 있는 인

간을이해하는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이해될 수 있는존재가 아닌가? 과연 인간은 하나님

을 통해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과 함께 바르트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가장 현실적인 문

제로서 인간은 물질이나 인간의 정신이 창조해 낸 이념적 존재 그 이

상으로서 실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복합적인

차원에서 현실적 으로 인간이 실재하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과

의 관계성 가운데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통해서 인간을 말하게 된다는 것은다시금 인간이 어떻게 하

나님을 현실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

이다. 바로여기서 바르트는 이러한 사실이 계시의 현실인 예수 그리스

도를 따라서 주어져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하나님 인식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게 된 것은기독론적 계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

고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시행위에 의한 신앙의 자기

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77

7) 참조. Bruce L. McCormack, Karl Barth’s Critically Realistic Dialectical Theology:

Its Genesis and Development, 1909-1936 (Oxford: Clarendon, 1995). 참조. 바르트

에게 유비는 신앙의 유비로서 세상과 하나님은 관계의 유비로서 발생하지 존재의 유

비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세상에 행위하시는 방식으로서 비판적

실재론의 변증법적 방식이 유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관계의 유비 방식을 신학적 인간이해에 분명한 이해방식으로 제시한 것으로 E .

Jüngel, “Die Möglichkeit theologischer Anthropologie auf dme Grunde der

Analogie. Eine Untersuchung zum Analogieverständnis Karl Barths,” Barth-

Studien (Gerd Mohn: Gütersloher Verlag, 1982), 216-222, 225.

8)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 I I/2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3), 33-35.

Page 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존재론적 차원에서인간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또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참된 존재를 밝히

는 타자적 존재로서12) 세상의 현실 가운데 하나님과 인간의 참된 모습

을 동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서 발견된 인간성이 아무런 단절이나 차이 없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성인 것처럼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인간

성은 우리의 인간성에 전적으로 동참하고 있지만 우리의 인간성과는

다른것이다. 인간스스로 인정하는 현재의 인간모습은 하나님과 분리

된 인간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님 없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으며,

무신론적으로 인간이 경험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을 사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면에서 볼 때에 우리의 인간성과 예수의 인

간성 사이에는 분명하게 상반되는 차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에도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과 전적으로 다른 인간에게 이제

까지 불가능했던 하나님과 하나된 모습을 전적으로 나타내신다는 것이

다. 또한 자신안에 드러난 이 모습을 인간의 진리로서 성령을 통해우

리의실존 가운데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예수의 인간

성에 신성이 드러나는 사건은 존재의 유비로서 우리의 인간성에서 발

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유비 가운데 발생하는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진다. 이제우리에게현실적으로 죄로인해불가능해지고 감추

어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 예수 안에서 나타남으로써 우

리 인간성의진리로 밝혀지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적 사실은 이제까지의 인간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인간이 인격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동

일시하여 왔던 인간의 역사적 현실, 바로그 가운데 이루어졌고 앞으로

도 이루어질 하나님과의 새로운 현실을 기대하고 파악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신학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구체적인 인격

위와 같은 변증법적 관계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바르트는 참된 인

간 이해의 구체적인 현실적 모습을 그리스도에게서발견한다.9) 예수그

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방식은 모

든 인간의 현실적 상황의 왜곡된 면이 감추고 있는 참된 모습을 드러

내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으로서 경험한 모든 현상을 무시

하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정한 존재에 대한신학적 인식만을 말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일반적 현상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가능한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과학적 인식을 포함한 다양한 인

간학적 인식을 긍정하고10) 이러한 인간에 대한지식을 역사적 실재로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였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나는 계시적 인

식과의 개방적인 관계성 가운데 연관이 이루어지도록 시도하는 것이

다.11) 그리하여 바르트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인간의 모습은 근

본적으로 과학을 통해서 제한되어 있는 것이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통해서 개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

스도의 실존은 전적으로 타자적 존재로서 규정될 수 있다. 이 말은 인

간 삶의 총체적 차원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참

다운 개방성을 지시하는 말로써 예수 안에 계시된 인간의 참된 모습을

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79

9) 앞의책, 74.

10) 앞의책, 23, 25-26. 특히“Wir befinden uns hier offenbar in einer anderen Lage als

vorhin. Die exakte Wissenschaft vom Menschen als solche kann nicht der Feind

des christlichen Bekenntnises sein.” (26)

11) 앞의 책, 158. 인간예수의 피조적 존재는 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의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이 사건으로 일어남을 보여준다. ③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피조존재의 창조자요 구원자로서 영광을 계시하셨음을 알려준다. ④ 하

나님의 주권을 이루심을 보여준다. ⑤ 피조적 존재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뜻의 완

성을 이루는 것임을 보여준다. ⑥ 피조적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안에서 살아가

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

는 존재임을보여준다.

12)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 I/2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3), 209. 그

리고또한Kirchliche Dogmatik, I I I/2, 170-179.

Page 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최소한 두 가지연관성을제시할 수 있을것이다. 1) 인간을 더 이상어

떠한 특정한 이념이나 전제에 따라서 규정짓지 않고오히려 역사적 과

정을 통해서 형태화된 다양한 인간의 존재형태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

는 과학적 연구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 인간

의 이해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가장 인간적으로 살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통해서 밝힘으로써 과학적 연구가

추구해야 할 구체적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러

한 두 가지 결과에 대하여 먼저 바르트의 글을 중심으로 바르트가 이

해하였던 과학과의 연관성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 후에 현대의 과학적

연구의 결과와 더불어 바르트의 신학이 가지는 과학과의 연관 가능성

에 대하여 살펴보고자한다.

I I I. 바르트의인간이해와과학적이해와의연관가능성

바르트의 인간이해의 강조점은 인간론을 다룬 교의학 처음 단락

“Der Mensch im Kosmos”가 제시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우주적 실

재 안에 있는 인간이다.15)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우주 속에

있는인간을 다루는 것이아니다. 바르트가 표현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

함에 있어서 언제나 인간학적 전제가 개입되어 있으며 여기에 우주를

하나님과의 연관성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중시하고자 하는 것이

다.16) 이것은 우주를 무시하거나 인간과 자연과의 연관성을 제한하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우주나 자연적 과정을 하나님 없이이해하려는근

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 현실적 인간의 삶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우주

안에있는인간을 이해하고려는것을보여준다.

은 비 인간이 아니고 참되신 인간으로서 인간의 역사가운데 실존한다.

그리고 그와 연관된 가운데 인간의 인격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

해서 밝혀지는 역사로서실존하게 된다. 그리하여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을 찾으시며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였던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이

발생하는 구체적 장소로서,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또한 동료적 인간이며, 시간 안에 실재하는 자로

서 하나님과 함께하는존재임을알리는 것이다.13)

이와 같이 바르트는 인간의 존재를 어떤 특정한 요소에 따라서 폐

쇄적으로 관찰하고 모든 것을 환원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인간의 삶의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현상적으로 설명될 수 있

는 모든 것을과학적으로 설명하되, 그 가운데서가장현실적이고인간

적인 존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신학적 인간이해를추구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이러한 가장포괄적 차원의 인간의 모습을, 다름아

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인간의 참다운 모

습은 인간의 특정한 부분을 다루는 과학적 연구를 넘어서 포괄적으로

인간의 역사적 인격으로서 주어진 삶 가운데 실재하는 예수 그리스도

의 사건에서 밝혀진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바르트에 따르면 참다운 인

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드러난 새로운 존재로서 하나

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가운데 주어진 역사적 과정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개방적 관계를 이루어가는것에서 알려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바르트의 인간이해는 현대과학과의 이해에 어떤

연관성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제까지 있었던 일반적인 견해 가운데

바르트와 과학사이의 분리적인 면을 강조하였던 것14)과 달리 우리는

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81

13) Barth, Kirchliche Dogmatik, I I I/2 (1993). Barth가 인간론을 다루는4가지 범주적

틀에 있어§44 피조물로서의 인간, §45 계약의 상대자로서의 인간, §46 영혼과 몸의

존재로서 인간, §47 시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룰 때 각 항목마다 늘 먼

저 예수를 제시한다.

14) Ian G. Barbour/ 이철우 옮김, 『과학이종교를만날때』(서울: 김영사, 2002), 46.

15) Barth, Kirchliche Dogmatik, I I I/2, §43. I. Der Mensch im Kosmos 참조.

16) 앞의책, 5-10.

Page 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은 아닐지라도, 감각적인 것과정신적인것 사이의 서로의 분명한 경계

선을 인지하고 양자의 통일성을 추구한다.17) 이러한 과학적 사고와 신

학적 사고의 상응되는 면에 대한 이해를 기점으로 바르트는 신학과 과

학의 인간이해의 연관성을 양자택일이 아닌 동일한 인간에 대한 신학

적 차원중심의 포괄적 방식으로보고자 하였다.

과학적 논리를 긍정하는 것과 더불어 바르트는 인간의 현상적인 것

을 다루는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과 같은다양한 방식의

인식을 부정하지 않았다.18) 그리고 그는 같은 맥락에서 이제까지 인간

을 다루고 있는 세 가지 방식의 결과를 서술하고 있다. 즉 주어진 물질

적 현상을 통해서 인간의 특성을 연구하는 과학적 차원에서 시도되었

던 인간이해와19) 인간의 정신적이며 의지의 윤리적 차원에서 구성되는

인간의 현실을 탐구하는 관념적 인간 이해20)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 현

상으로서경험되는“자아 밖의근원적 한계”를 제시하는초월의차원을

포함하는 실존적 인간이해 등을 중요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21) 이와

같이 바르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인간에 대한 다양한

연구방식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그

가 매번마다 발견하고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시도들은 인간의 특징을

총체적으로 규정짓기에는 애매하다는 것이다.22) 그리고 이러한 이유는

인간의 현상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중립적이고 상대적

이며 이중적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 즉 인간을 연구하

고자 할 때 연구의 대상인 인간 자체가 지니는 모순적인 대립의 어둠

과 애매함에 의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규정짓고자 하는 시도들은

이러한 과정을 바르트는 세 가지 상세한 논술과정을 거쳐서 다루어

간다. 첫째는 신학적 논리와과학적 논리사이의 관계성을 다룬다. 둘째

는 과학적 논리를 신학적으로 잘 못 적용할 때 발생하는 과정을 다루

어 나간다. 그리고 셋째는 과학적 진리가 신학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

는 방식에 대하여 다루면서 현실적 인간을 다룰 수 있는 신학적 인간

이해의 방식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럼 이러한 세 가지 논술 과정을 살

펴보고자한다.

1. 신학적논리와제 학문적논리와의관계성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르트가 신학적 방식의 논리를 전개

하고자 할 때 과학적 논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하나님

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경험과 실험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근거

하며, 또한 주어진 대상을 물리적 현상으로서 이해하며 결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계

시적 현실을 뒤따라서 설명하고자 하는 신학적 학문성과 주어진 사실

자체를 설명하려는 엄밀한 과학적 사고 사이에 일치점들이 있다고 믿

었다. 그리하여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일치점을 주장하였다. 첫째, 양자

는 대상을 파악하고자 함에 있어서 주어진 현상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법칙적으로 이해하며 설명해 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지, 세상에 대한

어떠한 우주론적 세계상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는 그 본질

상 어떠한 세계상도 만들지 않으며 단지 주어진 현상을 정확하게파악

하여설명하고자하는것이다. 둘째, 신학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는 근본

적인의미에서 서로다른 관점으로 우주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마치

신학이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와 사고체계를 통해서 설명하는 것처럼

과학은 우주를 이해하고설명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경험방식과 사고방

식을중심으로 이루어질 밖에없다. 셋째, 신학과 과학은 자신들의고유

한 연구 과정에 있어서 비록 신학이 명명한 것처럼 하늘과 땅의 구분

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83

17) 앞의책, 12.

18) 앞의책, 26.

19) 앞의책, 93-105.

20) 앞의 책, 109-128.

21) 앞의책, 129-143.

22) 앞의책, 144-145.

23) 앞의책, 88.

Page 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일반적인 과학적 신념으로서 인간에 대한 주장에 대하여는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르트는 과학적 인간 이해가 신학적 인간이해

를 정당화하는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추구한다. 다시말

해서, 그는 참다운 인간의 현실을 드러내는 예수그리스도를통해서 주

어진계시적 사태에 따른이성의 합리적 구조를 발견하며, 이러한 사태

를 따르는신학적 인식을 강조하는것이다.27)

바르트는 과학적 논리를 근거로 신학적 인간이해를 시도하는 것의

부당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과학을 중심으로 신학과의 연관을 시도한

고전적 학자로서Polan(1609)을 상세하게 거론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폴란은Contemplatio theologica hominis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을

따르는 과학적 규정을 근거로 신학적 인간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폴

란은 인간을 먼저는 이성적으로 규정된 동물(Homo est animal ratione

praeditum)로 파악하면서 이성의 기능을 하나의 상태에서다른상태로

의 변화나 운동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설명한다. 그리고 세상

모든 상태의 변화를 파악하는 이성은 바로 영혼의 작용으로 서술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과 영혼을 동일한 인간의 본질을 상응적으로 묘사

하는 것으로 판단하면서 과학적 지식과 함께 신학적 사유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폴란은 이성을 인간이 동물 이상의 존재로

서 설명될 수 있는 면을 제시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무엇보다도 이 세상을 창조한 지혜의 근원

으로서 하나님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고 보고있다. 그리하여이성은 인

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세상과 인간 자신의 창조자와 주로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육체와 이성적 특성을 지니

는 영혼은 은유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케 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폴란은 인간의 이성적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특별한 모습으로서 모든 동물들과 다른

모든 것을포괄하는궁극적인 분명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보기에는 인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근원적 어려움은 인간

이 자신을 나타내는 현실에 의존하여 연구방식을 결정하고 연구를 진

행하는데 이러한 현실성 자체가 언제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

로 변화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24) 그리하여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이 인간 고유

의 특징으로서 현실적인 면을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

이 문제의 중심이 되는것이다.25)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는 가운데 바르트는 과학적 연구로서 우선 생

물학적으로 인간에 대해 새롭게 밝혀진 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고자

한다.26) 이것은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인간의 총체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과학적 인간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과학이 추구하는 인간의 현상적 연구에 대하여는 개방적이다. 그

러나 원리적으로 과학적인 인간에 대한 지식을 근거삼아서 인간 자체

를 규정짓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과학적 지식의

중요성을 긍정하지만 하나님 없이 구성된 세계상을 통해서 주어지는

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85

24) 앞의책, 145. 이러한바르트의 이해는그 누구보다도 현실자체가의미의 전부를 제

공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데리다의 견해를 이미 나타내고 있는 것이

라고볼 수 있다. 참조. J. Derrida, “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the

Human Sciences,” Writing and Difference, tr. Alan Bas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353. 그럼에도 데리다와 바르트를 연결 짓는 것은 데리다가

현실 자체에서 의미의 충족을 추구할 수 없다는 분명한 한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측

면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데리다를 통해서 바르트를 해석하는

것의 오류에 대하여, 박형국,“바르트의 계시해석에 나타나는 탈형이상학적 현존의

사유”, 「한국조직신학논총」29 (2011): 215-247.

25) 앞의책, 90-91.

26) 앞의 책, 91, 102. 바르트는 인간의 존재를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는 것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Aber daran kann niemand zweifeln, daß der Mensch,

sofern er sich selbst erkennen will, sich auch mit seiner Umwelt und also wohl

oder übel zunächst mit seiner tierischen Umwelt zusammensehen muß.” 27) 황덕형, 『삼자적임재』(서울: 한들출판사, 2000), 95, 105.

Page 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즉, 신학자가 하나님 자신을 신학적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지못하고, 인

간의의식적인경험의 대상으로서만 인정하였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

리하여 신학적 인식 자체가 인간학적 근거에 근본적으로 종속되어 있

기에 인간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방식에

의거하여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0) 그리하여 근대

과학을 통해서 드러난 진화론적 세계관은 신학적 차원에서 인간의 사

유 자체의 가능성으로서 신을 변증하던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만

들었고 신학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다시금 인

간중심적 신 존재증명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학이 과학을 신학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변증적 기초로 받아들였

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새롭게 밝혀진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밝히려고 한다는 것이다.31) 신학적 사고의 정당성은 이제 분명하게 과

학적 사고방식을 통해서 추론하게 된 것이다.32) 이런 사고의 문제점을

밝히고자 바르트는 세 단계의 역사적 과정을 서술한다. 이는신학적 정

당성을 과학에서 찾고자 할 때 발생하는 결과로서 신학적 인간 이해가

인간의 특성으로 주장한다. 그리하여 폴란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서

규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간상을 기초하여 인간의 이성적 특성을

신학적 차원으로 해석하여 연계시킴으로써 자연과학과 신학과의 연관

성 속에서 인간을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이러한 폴란의 시

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단지 이성적 사고의 현실에 대한

보충적인 해석의 방식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주목한다. 즉 폴

란이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밝히는 신

학적 인간이해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자체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충분

하게 가질 수 없고 단지 그렇게 믿어질 수도 있는 해석적 차원에 지나

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28) 여기서 바르트는 신학적 인간이해가 단지 인

간의이성이 자신의 논리에 따라서 종교적으로 해석하여 낸 추상적 가

공물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즉 폴란이 보여주는 신학적 인

간이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현실

적 차원의 인간이해를 이루지 못하고 단지 과학적 사실에 기초할 수

있는 가상의 해석을 지칭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과학적 이

성의 구조에 따라서 밝혀진 인간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신학적 인간이

해를세우고자하는모든시도들은 부인하는것이다.

2. 과학적논리를신학에잘못적용하는과정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인간

을 밝히는 계시 중심적 신학적 인간 이해와 달리 자연 과학적 차원에

서 밝혀지는 인간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변증적으로 신학적 인간 이해

에 적용하는방식에 대하여 비판적으로상세하게 다루고 있다.29)

바르트는신학자들이변증적 차원에서 자연과학의 견해를기반으로

신학적 인간이해를 추구하게 된 근본적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87

28) Barth, Kirchliche Dogamitk, I I I/2 (1993), 89.

29) 앞의책, 92-93.

30) 앞의책, 92.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한국의 신학적상황에서 반틸과 바르트의신

학적 차이와 연관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즉 반틸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 계열은 바르트의 신학을 칸트의 뒤를 따르는 비현

실적 신학이요 영지주의적인 가장 위험한 신학이라고 보고 있는 반면에 사실 바르

트는 계시적 인식을 토대로 믿음으로 성격지어지는신학적 인식의 특성을 포기하고

맹목적으로 과학적 세계상에 따라서 진리의 당위성을 결정지으려는 변증적 시도들

을 불충분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참조. 한국칼바르트학회2011년 제2차 정기

학술발표회. 주제: 코넬리우스반틸의 변증신학의특성(2011년 6월 17일 발표집).

31) 앞의 책, 106. “Sie(신학자들) ging mit dem Gegner(과학자들) davon aus, daß der

Mensch auch und vor allem ein animal, ein höheres Säugetier als ein höchst

besonderes sah und beschrieb, daß sie von der gemeinsamen, als Ausgangspunkt

und prima veritas anerkannten naturwissenschaftlichen Grundlage aus in eine

Höhe wies, in der zum Verständnis des Menschen entsprechend höhre, nicht-

naturwissenschaftliche Maßstäbe und Methoden zur Anwendung kommen

müßten.”(괄호의 설명은논자).

32) 앞의책, 93.

Page 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근거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오토에게는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는 진화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인간으로서의 특성인

정신적 사유를 생각할 때 인간의 사유는 어떤 물질적인 무엇을 생각하

는 것만이 아니고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반성

적 존재라는 것이다(95). 그리하여 인간으로서의 참다운 주체성은 결국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생각하는 자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과학과 예술 그리고 윤리와 종교성을

통해서 분명하게 본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토에 따르

면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인 근원에 대한 진화론적 면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인격성이야말로인간의 정신적 세계를 하

나의통일적 방식으로만나고 파악하는과정으로서 보고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물질적-육체적 성격과 정신을 나누지 않고 양자

를 통합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육체적 방식으로부터 정신적 방식으로의 새로운 진화적인 전이과정을

설명한 것을Arthur Titius (Natur und Geist, 1926)에서 발견한다(96).

티티우스는 인간을 정신적 인격성을 지니고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원

숭이로서설명하였다. 인간은 유인원과연관된 존재로서 인간이 지니는

뇌의특징적 요소가 일찍이 인간의 신체적 부분들, 손과직립보행 등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충동은 자연을 넘어문화적 차

원으로 인간을 발전시켰다는것이다. 그리하여인간의 특성은 진화론적

으로 육체적이고 물리적 환경을 넘어정신적 차원을 통해서 자신의 고

유한 개체화와 인간으로서의 삶의 환경을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리고 인간의 정신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어진 종교적 성격

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서 예수의 세 가지 정신적 지표를 통해서 표현

된다고 주장되어지는 것이다(97). 그것은 Hermann Lotze의 글

Grundzüge der Religionsphilosophie( 1 8 9 4 )을 통해서 배웠던 A. v.

Harnack이Das Wesen des Christentums(1900)에서나타내고자 한 인

간에 대한 정신적 이념으로서“하나님의 자녀됨, 인간에 대한 사랑, 하

과학적 인간 이해인 진화론적 인간 이해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말하고 있다.33)

첫 번째 단계에서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다른 과학적 자료를 기초삼

아서 신학적 인간이해를 시도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시도를 O t t o

Zöckller가 PRE에 기고한 글 Mensch에서 찾고 있다. 최클러는Jean-

Bapsiste Lamarck, Lorenz Oken, 특히Charles Darwin으로부터 근거

세워지고 Ernst Heackel에 의해서 주장된 진화설에 기반한 인간 이해

를 반대할 수 있는 과학적 인간이해를 제시하고 있었다(93). 우선최클

러는 뇌 과학의 선구적 연구의 결과를 제시하면서 인간이 원숭이나 혹

다른 중간적 존재들과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결론적으로 생물유전학적 근거에 따라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구별을 확고하게 세우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클러는 동물과 다른 인간 안에 기초된 새로운 생물학적 특징을 통하

여 인간으로 하여금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완성을 향해 갈수있도록 만

들고 있었던 것이다(94). 그리하여 진화론과 연관된 과학적 지식 이외

의 다른과학적 지식을 통해서 인간을변증하고자하였다는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를 받아들이는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점차로 진화

론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관념론적 사고에 등장하는발전사상

과 함께 연관시켜서 인간과 자연의 특성으로 파악하게 된다. 바르트는

이를Rud. Otto가 쓴 Naturalistische und religiöse Weltansicht (1906)

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94). 오토는 인간의 물질적 존재방식의 기

원에 대하여 진화론적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그에게 중요한 인

간의 정신은 단지 물질적 기능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물질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신을 실현한 것으로서 자신을 추구함으로써 더욱

독립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한다(95). 그리하여 인간의 기원에

대한 불확실성 가운데도 인간의 정신적 사유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89

33) 앞의책, 93 이하의 괄호안의페이지는동일한 책의페이지를 지시한다.

Page 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 동일성을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특성은 인간 자신

의 생물학적 발전이 개인의 인격적 발전과 형성을 이루는 하나의 고유

의 역사를 통해서 일치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101). 바르트는 이러한

포르트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간을 우선적으로 자연환경

과 연관해서보고 있으며, 이러한 면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

는 것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34) 물론 인

간의 자연적 특성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업은 신학자에

게 부가적인 과제로서 단지 전문적 과학자들을 더욱더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언제나 엄밀한 과학적 사

실로서 밝혀지는 확실성을전제하는데, 이러한 확실성은 사실상 과학적

방법과 연구의 대상에 의하여 제한되고 한계가 있으며 상대적인 확실

성에도달할 뿐인 것이다.35) 그리고 과학적 인간이해가 밝히는 것은 인

간 안에 발견되는 어떠한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요소나 기관들에 대

하여 말하는 것이며 한 인간의 총체적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36) 그리하여 포르트만이 밝히고 있는 논지와 연관하

여 볼 때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다른 동물과 자연 환경을 통해서

만 규정되는 것으로 보려는 시도도 잘못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37) 오히려 인간의 참다운 모습은 인격성이란 개념을 통해서 암시

될 수 있는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상황에 속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자

유로울 수 있는 모습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38) 이러한 면에서 바르트

는 과학적 인간이해는 그 자체로 한계가 있으며 인간을 논의하기 위해

서는 철학적 차원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학적 차원에서의 인간이해에

대한구체적인 논거가 필요함을제시하고있다.39)

나님의 나라”라는 정리와 일치한다(99). 결국 인간의 종교적 특성이 긍

정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진화론적 차원에서 인정되어진 정

신의해석학적차원이 될 뿐인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적 지식을 근거로 세워진 신학적 지식을 통해서 인

간의 진정한 특성이 밝혀질 수 있다는 변증적 방식에 대하여 바르트는

의문을 제기한다. 즉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과 연관되는

것은 언제나 주어진 과학적 사실에 대한 하나의 종교적 해석으로서만

나타나고 더 이상참다운 현실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신

학적 주장은 결국 진화론적 주장에 따라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 비 현

실적인 것이 되고만 것이다.

3. 과학적인식과신학의올바른관계방식

여기서 바르트는 과학을 무시하지 않고 신학적 인간이해와도 연관

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이제 바르트는 변증적

의도를 제거하면서도 과학적 지식이 지니는 긍정적인 면-과학적으로

인간의 특성을 성격화하는 것-을 강조하고자한다(99). 바르트는 이러

한 면을 Adolff Portmann의 Biologische Fragmente zu einer Lehre

vom Menschen(1944)에서 발견한다(99). 포르트만은 생물학적 이해를

매개로 인간의 특별한 점을 밝히려고 하지만 결코 종교적인특성을 강

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따르면 인간의 특성은 무엇보다 다른동물

에 비해3배나 무거운 뇌와 또한 조기출산에 기인하여 이루어진 것이

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모습은 미리 주어진 어떤 기능적인 것에 따라

서 이루어가지 않고, 공동체적인 문화 환경의 영향 아래서 출산 후 1년

을 지나면서 자신을(걷기, 배우기, 말 등) 이루어간다는 것이다(99). 포

르트만의 가장중요한 주장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세계 개방적

인 특성을 지니고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육체적인 성장과 함께 자신

의 정신적이고 문화적 세계를 더욱 완성시키며 자신의 고유한 개체적

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91

34) Barth, Kirchliche Dogmatik, I I I/2 (1993),103.

35) 앞의책, 103.

36) 앞의책, 103-104.

37) 앞의책, 103.

38) 앞의책, 109-110.

Page 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V. 현대의과학적인간이해와바르트의신학적사고와의

연관성

현대의 새롭게 발전된 인간에 대한 지식은 전반적으로 바르트가 강

조하는바 현실적인 인간으로서 예수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특징과 연

관되어 이해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예수는 현실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 가운데 계시된 말씀의 응답으로서 드

러난 동료인간이며 말씀에 대한 응답의 자발성을 이루는 주체이다. 이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공동적으로 실존하는 나

와 너의 관계 속의 존재이며 동시에 영혼과 육신의 일체로서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통해서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 안에

서 미래를 기대하는 새로운 존재임을 보여준다.41) 이러한 예수의 하나

님과 함께 하는 인간이해의 특성은 최근의 인간에 대한 학문의 발전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과학적 지평 안에서 서로의 입장을 긍정하는 방

식으로 논의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최근의 심리학이나 다른 인간학적 과학의 발전에 따르면 인격

적 존재는 더 이상 이성적 실체로서 규정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42) 첫

째, 인격적 실존은 더 이상 구체화된 매개적 실재 없이 추상적으로 파

악되는 이성적 논리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인간은 이원

론적 차원에서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전제로 영혼의 이성적 차원이 우

월한 것으로서 강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 사회 과학자들은

구체화되지 않은 이성적 작용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지식

이제까지 논의를 살펴본다면 바르트는①신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함

에 있어서 엄밀하게 수행되는 과학적 방식과 그로 밝혀진 지식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과학적 사실과 달리과학적 신념의 표상으로 세

계상을 구성하는 지식의 형태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며, ②아무리 과학

적 사실이 엄밀한 지식을 전달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과학적 사실을

신학적 인식의 근본적 원리로서 세우는 변증적인 시도에 반대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③과학적 지식을 신학적 인식의 원리로

서 세우려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과학적 인식 자체가 인간을 총체적으

로 이해하기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의 방법론적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고, 또한 인간자체가 지니는 인간으로서의 특성은 인간을 현

상적 지식으로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는오

히려 과학적으로 밝혀진 인간에 대한 지식도 이제 다시금 분명하게 실

재하는 현실적 차원의 인간이해로부터 보충되어지고 개방적으로 다루

어질 때 비로소 과학적 인간이해의 참다운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바르트는 인간을 현실적 차원에서 하나

님과 함께 하는 실존적 인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

이 과학적 인간이해의 과제를 새롭게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제시

하고있는것이다.40)

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93

39) 앞의 책, 105-106, 그리고 E. Brunnder의 Der Mensch im Widerspruch(1937)을 상

세히 분석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참다운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

일 뿐임을 강조하고있다이에대하여153-157.

4 0 ) Chr. Frey, “Zur theologischen Anthropologie Karl Barths,” Anthropologie als

Thema der Theologie, hrgs., Hermann Fischer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8), 42-43.

4 1 ) Christofer Frey, Die Theologie Karl Barths (Waltrop: Hartmut Spenner, 1994),

287-288. 도표참조

42) F. LeRon Shults, Reforming The Doctrine of God (Cambridge: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5), 57. 이에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역시 F.

LeRon Shults, Reforming Theological Anthropology: After the Philosophical Turn

to Relationality (Grand Raips: Eerdmans, 2003), 8장 참조.

Page 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다. 즉 인간은 더 이상 자신 안에 내재적인 변화하지 않는 실재하는

어떤 요소에 인격성을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경

험되어지는 자아의 세계 속에서 계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인격성을

지닌것으로 이해될 수 있게되었다.47)

위와 같은 현대의 인간학적 연구를 통한 인격 이해의 세 가지 주요

한 변화는①인간을 정신과 육체의 일체적인 존재로서 보고②인간은

개별적 단독자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공동체적 상황에서 이해되어

야 하며③개별적인어떤실체적인 것으로 연구되지않으며 역사적 경

험을 통해서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 존재로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들은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이해를 통해서 강조되어진 모습과 상응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정신과 육체의 일체적 작용으로서 인간의 인격

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바르트가 그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그토록 강

조하고 있었던 참된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참된 하나님으로서

참된 인간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타자적 존재이해에 상응함을

볼 수 있다. 현대적 인간이해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예수그리스도안에

계시된 인간성 자체의 성격을 밝힘으로써 또한 하나님의 가능성을 통

해서 더욱 인간의 참된 삶의 현실을 이루는 존재로서 인간을 더욱 분

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것이된다.48)

또한인간의 인격적인 의미가 더 이상 개별적인 단독자로서 밝혀지

지 않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 모습이 자신 안에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에 있는 사회의 구성을 통해 이해되어야 함을

과 행위 그리고 감정은 이성적 과정을 수행하는 자의 구체화된 관계를

통해서 중재된다고 강조하고 있다.43) 그리하여 이런 입장에서 볼 때

Howard Gardner는 모든 사람은 다차원의 지성을 소유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공간적이고 육체적-신경운동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모

든 것은 분리되어 작용하지 않고 전체 인격 안에서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다.44) 뇌신경학자인Antonio Damasio 역시 인간의 뇌는 몸과의 연

관성에서 존재하며 이성적인 작용과 감성적인 작용은 더 이상 분리되

어서 이해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45) 인간의 존재를 몸과 정신의

총체적인일치성을통해서 파악하고자하는것이다.

둘째, 인간의 인격성은 개인적 실체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인격적 과

정은더 이상 자발적 개인으로서 자아나 부분적 의식의 단면으로서 이

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로서 형성된 것은 사회적 문화적

체계의 역동적 과정을 통해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Mead

는 사회 안의 타자를 통해서 자아의 인식에 이른다는 것을 밝혔고

Parsons는 사회적 지시의 행위구조에서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도록 하

였으며 Jung은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자아의 깊은 그물망을 발견토록

하였으며Piaget는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의 동화와 적응을 통해서 지

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지속적인 적응과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즉 인간은 더 이상 실체적인 개별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관계성의 존

재로서 밝혀지고있게된 것이다.46)

셋째로 인격성은 이제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

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 관계성에대하여 95

43) Mary Field Belenky et al., Women’s Ways of Knowing: The Development of Self,

Voice and Mind (New York: Bssic Books, 1986) 참조. Reforming the Doctrine of

God, 57.각주46 인용

44) F. LeRon Shults, Reforming The Doctrine of God (2005), 57.

45) 앞의책, 58. 그리고 이러한뇌의 작용과인간의 인격적 자아이해에 연관성에대하여

황돈형,“현대과학에서의 자아문제와 삼위일체적 자아이해,”「한국조직신학논총」28

(2010): 67-107 참조.

46) 앞의책, 58-59.

47) 앞의 책, 59. 이와 함께 바르트의 인간학적 사고가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와 깊은 연

관성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서Daneil J. Price, Karl Barth’s Anthro-

pology in Light of Modern Thought (Cambridge: Willam B. Eerdmans Publishing,

2002) 참조.

48) Barth, Kirchliche Dogmatik, I I I/2 (1992), 188ff. 그리고 §46. Der Mensch als Seele

und Leib, 특히 425, 468ff.

Page 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과학의 발전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질문을 바르트식으로

바꾸어서 다시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과학의 발전은

복음의 진술을 위해서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과연 바르트는 과학의 발전을 복음의 해석과

선포에 대한 방해로 생각하였는가? 바르트는 과학주의를 통해서 이루

어지는 이념적 형태에 대하여 반대하였지만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통

해서 이루어지는 과학의 발전은 긍정했다고 보여진다.53) 왜냐하면 바르

트가 그의 교의학의 마지막 부분인 화해론에서 강조한 것처럼 복음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밝히며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화해된 세계로서 유일하게 규정하고 있기때문이

다. 그렇기에 바르트의 입장에 따르면 이 세상 자체를 드러내는 세상

진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화해되고 존재하게 되었으며 복음의 빛 가

운데 미래를 얻은 세상의 진리들로서 근본적으로 전혀 새로운 그리스

도의 빛 가운데 존재하게 되며 그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확인받는 것이

다. 이것은 바르트가세상을 연구하는과학을 무시하는 것이아니다. 오

히려 오늘날처럼 과학이 인간과 세상을 파괴할 수 도 있는 새로운 상

황에서 참된 과학이 어떤 과학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 바르트식으로 말한다면 이제 참된과학은 하나님의 구원의 빛 가운

데 사랑의 대상으로 서 있는 세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은

세상의 참다운 하나님의 구원 가운데 드러난 미래를 추구하는 과학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주장과 상응하여

Torrance에 따르면 세계가 추구하였던 과학적 인식이 과학과 신학의

연관성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동기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변화가 있다

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인식이 전에는 하나님 없이 그 자체

로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적, 객관적 인식을 추구했지만 현대는 변화를

예상하고 그 가운데 미래를 위해서 구성적인 인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인간성을 통해서 드러난 인

간 존재에 대하여 상응하는 것이다. 즉 예수 안에서 밝혀진 인간의 존

재란 창조이래로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의 역사

와 더불어 성립되는 선택된 인간으로서 역사적 과정 가운데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된 존

재이며, 부름 받은 공동체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당사자가

되는동시에 인격적 주체로 실재하게되는것을 보여주는것이다.49)

또한 인간이 자신 안에 주어진 고정된 요소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

이 아니라 역사적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개방된 존재로 파

악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성 안에서 인간의 시간성이 밝혀

지는 것과상응된다. 즉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성 가운데 자신의

시간적 한계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개방되어진새로운 시간성을 경

험하며 그 자신의 인격적 현실을 이루어가는 존재라는 것을밝히고 있

다.50) 이와 같이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 이해는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연구하는 현대의 과학적 내용들과 상응되게 인간이 하나님을 통해 새

로운 변화를 기대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 과학의 인간 이해가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와

더불어 보여준 상응적 성격은 앞으로 현대 과학의 지식과 바르트의 사

고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 바르트 자신은 현대의 과

학의 발전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강조하기를 신학적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어

진 복음을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책임적으로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

다.51)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새롭게 밝히는 것만이 신학자가 우

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하였다.52) 그렇다면 이런 면에서

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97

49) 앞의책, 207. 그리고§45. Der Mensch als Bundespartner Gottes 특히 252ff.

50) 앞의책, §47. Der Mensch in seiner Zeit, 특히 671ff.

51)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1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3), 1

52) 앞의책, 11.

53)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 V/ 3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3), 188ff.

Page 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의 현실을 밝히는 바르트의

신학적 이해는 과학이 복합적 차원에서 통일성을 이루고자 하는 과제

를 분명하게 긍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어진 복음으로부터 자연을 약속의 실재로 이해하는 것은신학이

과학적 연구가 밝힐 세계의 미래성과 함께 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V. 나가는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과학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진작 과학 자체는 빠른 발전 가운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어제까지 타당한 과학적 지식이 언제변할지 아무도 장

담할 수 없다. 이러한 변화하는 과학적 지식이 모든 인간의 문화와 삶

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질수록

우리는 더욱 애매해지는 미래가운데 불안해하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한

다는 것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믿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과학을 뒤따라가며 과학적 진리를 말하

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복음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기독

교적 진리와 연관하여 과학적 발전에 따른 과학적 진리는 어떻게 이해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문화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현대인으로서 경험하는 기독교

적 복음의 진리는 세상적 진리로서의 과학적 지식과 더불어 경쟁관계

에 있는것처럼 경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 복잡성은현대의 많

은 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신학과 과학의 다양한 관계성들을 주장하

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애매한 것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바르트는 복음의 빛으로 신학과 과학 사이의 분명한

관계성을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복음과 과학적 지식이 분

한다.54) 이것은 현대의 객관적 진리세계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변화에

서 살펴볼 수 있듯이 객관세계란 합리성의 구조가운데 참인진술이 가

능한 존재자들의 총체라는 의미에서 더 이상변화하지 않는 과거에 기

원을 둔 실체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세계가 아니고 이제는 변화하는가

운데 상호적으로 실재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칸트적이고 실용적이

며 화용론적인 진리가 강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55) 이것은 과학적 지

식도 역시 사물들과의 연관성에서 분리된 것을 나타내지 않고 세상의

변화되는 것 가운데 드러나는 복합적인 다차원의 합리적 지성의 통일

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음을 알려준다.56) 다시 말해서 과

학의 새로운 발전은 과학 스스로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근원적 선택

을 향해서 개방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인식에도

연관된 과제를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과학

은 새롭게 신학적 차원과의 연관성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것이다. 그

리고 이러한 사실을 신학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더 이상 신학적 진리

자체를 과학에 의해서 근거짓는 것과는 다르게 과학과의 관계성이 가

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히려 신학적 영역의 특별한 고유성을 밝힘

으로써 신학과 과학의 연관성을 새로운 차원에서 제시할 수 있게 되었

다는 것이다. 과학이 밝히는 과제위에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능성

으로부터 드러나는 인간의 현실을 나타낼 수 있는 미래적 차원을 제시

함으로써 신학이 과학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제 근본적으로 과학의 연구는 더 이상 세상을 하나님을 통해서 이해하

려는 복음의 신학적 연구와 분리되지 않고 개방적인 형태로 상호관계

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들은 이제 전혀 다른 차원의

신학적 진리에 의해서 세상의 미래성을 드러내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99

54) Tomas F. Torrance, Reality and Scientific Theology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1), 17-18, 21-22.

55) J. Habermas/ 윤형식역, 『진리와정당화』(서울: 나남출판사, 2008), 133-134.

56) Tomas F. Torrance, Reality and Scientific Theology (2001), 64-67. 79-81.

Page 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만드는 것이 바르트가 강조하였던 화해론적 차원에서의 신학과 과학의

연관성이었던 것이다. 과학이 이전에 종교가 밝히지 못했던 면들을 밝

히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들은 아직도 제한된 특정 영역에 대한 지식이

라는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과학을 세상전부를 위한 이념이나포

괄적 진리처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시

금 분명하게 현실적인 인간을 통해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신학이 해야할 긍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

고 있는 것이다. 즉, 신학의 주제요 유일한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현

실적인 인간으로서, 참된 하나님이요 참된 인간으로 실재하는 역사 속

에서 인간과 함께하셨고, 부활의 빛 가운데 이 세상과 새롭게 화해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밝힘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미래를 연구

하는 과학과 함께 새로운 전망을 추구하도록 계속 대화할 수 있는 방

향을제시하고 있는것이라 할 수 있다.

주제어

신학적 인간학, 아돌프 포르트만, 교회교의학, 현대인각학, 신학방법,

Theological Anthropology, Adolf Portmann, Kirchliche Dogmatik,

Modern Anthropological Sciences, Theological Method

접 수 일 2011년 7월 10일

심사(수정)일 2011년 8월 5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리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음의 진리가 과학을 통해서

근거를 발견하고 과학의 인정을 받은 것도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복

음의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참다운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진

리를 보여줌으로써 과학을 그 고유한 영역에서 미래적 전망가운데 신

학적 진리와 통합적으로다루어지게만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을

밝히는 신학적 작업은 과학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아니라 오

히려 과학적 지식이 복음의 진리 가운데 드러난 인간과 세상의 참다운

질서를 밝히는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과학의 한계를 밝히

며 그 입장을 세워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변화하는 세계 가운데 인류가

지향해야 할 과학의 방향에 대하여 보다 분명한 길을 제시할 수 있게

되는것이다.

오늘날 과학과 신학 사이의 정당한 관계성을 묻고 있는 시기에 바

르트는 단순히 과학적 지식을 배척한 것도아니고 과학의 지식을 신학

적 진리와 혼돈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과 세상의 관계성을 기점으

로 하여 복음을 통해서 과학적 지식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한 세계의

진리로서 드러날 수 있는 관계성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있

을 신학과 과학의 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입장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은 그 자체가 특정한 대상의 한계

가운데서 연구의 결과를 밝히는 것이다. 즉 원자나 DNA처럼 인간의

근원적 물질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이것들이 인간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은아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총체적 차원의 연구는 서로가

다르게 중첩되는 영역들에 대한 상호관계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

하여 이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총체적인 인간의 차원은

철학적일 뿐 아니라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변화를 예상케

하고 가능할 수 있게 만드는 현실적 차원에서 다시금 논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날 인간과 세상을 밝히기 위한과학

적 지식이 지니는 영역적 한계 가운데 제시되는 개방성과 신학적 지평

이 포괄하는 과거와 미래의 변화의 가능성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1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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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103

Page 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requires also the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At

this point it seems natural that Barth sees the possibilit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with the another anthropological sciences as a answer for the need of

the most realistic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Barth has tried to

grasp the meaning of the divers researches of human being; scientific

researches and philosophical understanding and lastly the existential

meaning of human being. In this context Barth does not reject a

e x a c t-scientific method. On the contrary, he makes it clear that the

exact scientific method could be coincided with the theological

method. Barth insists that science should not be abused by religious

or philosophical concerns. Barth speaks for the exact scientific

procedure for science itself. Under this condition Barth insists that the

scientific knowledge can be used for the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The attitude of Barth toward the science is summarized

as such as that he accepts the scientific knowledge, meanwhile

rejecting the scientific world view which is departed from the exact

scientific procedure.

And it is also important to see that the new development of the

scientific knowledge supports the Barth’s interpretation of the human

reality. Recently many kinds of anthropological sciences and the

psychological understanding of human person represent the more

abundant possibility of the connection with Barth’s theological

perspective of human being. Even though it needs a more scrutinizing

study for building this connection, a new kind of scientific frame and

philosophical approaches to reality affirm the positive relationship

between the Barth’s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and

actual human being. Moreover, according to Barth’s perspective of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the world, theology does not find any

disturbance to the unified understanding of the world with the

A Study on the Possible Relationship between Barth’s Theology and the

Modern Sciencesconcentrated on the view of the theological anthropology

Hwang, Don-Hyung

Associate Professor

Seoul Central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In recent theological discussion, there has been a somewhat critical

realization of the need to connect with the scientific truth. The

connection between the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Gospel and

the scientific understanding of world is of particular concern to a

modern theology, and is developed more substantially. Here, I

attempt to show the possibilit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Barth’s

theological method and the scientific method, concentered on the

thema of anthropological views.

First of all, it is to be mentioned that Barth asserts that the impor-

tance of the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comes from

the historical fact, that Jesus Christ has existed as a actual human

being in the history and showed the actual reality that man does not

exist alone, but in connection with God. In contrast to this distinct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the modern human scientific

methodological ambivalence, which defines the actual human reality,

1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돈형, Barth 신학과 현대과학의관계성에대하여 105

Page 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안병무의민중신학에서구상된서구신학비판의네 가지 테제를중심으로

전 철

(한신대학교, 외래교수)

“서양신학의물결이 얼마나도도한지 몰라요. 이런식으로

저항하지않으면 백인신학자들의물결에 빠져죽어요.”1)

I. 들어가며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Minjungtheologie)은 한국의 고유한

환경에서구현된 자생적인신학의 성과이자유산이었다. 민중신학은소

위 서구신학의 다양한 방법론적 흐름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한

국이라는 생생한 현실속에서 구체화 한 고유한 한국적 신학이었다. 이

러한점에서 민중신학은 한국신학이자철저한 상황신학이다. 그리고 서

구신학에 대한 비판을 그의 핵심 동력으로 지탱하는 토착신학이다. 그

렇다면 서구신학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민중신학적 해체와 창조적인

감수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만약 민중신학이 서구신학을

비판했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서구신학의 어떠한 방법론에 대한 비판

인가? 그리고 이러한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던 민중신학적

development of the science. He will may argue for a new possibility

of connection between theology and science. According to his view,

it is sure that theology supports the scientific truth as a truth of the

world. Barth’s idea of Light theory which is developed in his church

dogmatics I V/3, grounds and characterizes the basic relationship

between theology and science. Theology as a explanation of gospel

makes disclose the reciprocal relation between God and the world. In

light of the reconciliation of God with the world, it must be

emphasized that the world is nothing but the creative work of God. In

so far as the science is the intellectual discipline which attempt to

understand this world, it’s intellectual aim corresponds to the

recognition of the creative work of God in the nature, which is open

to the future of God’s redemptive acts.

Barth points out the problems and failures which plagu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ology and science and attempt to reestablish

the basic relation which is based on the gospel.

1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07-132

1) 정양모,“심원 안병무 선생 회고-심원 선생을 기린다,”(제14주기 심원 안병무 선생

추모강연, 2010. 10. 17), 4.

Page 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1) 주객도식의 사고, (2)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사고, (3) 개체주의적 사

고, (4) 사변으로서의 학문이다(I I I). 마지막으로, 서구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민중신학의 비판적 테제에 대한 의미를 조명할 것이다(I V). 특히

이 연구는 성서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민중신학적 작업을 수행한 성서

신학자 안병무의 사유를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검토함으로 민중신학이

서구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어떠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비판하는지

를 밝혀내는것을목적으로 한다.

I I. 70년대민중신학의자리

1970년은 심원 안병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1970

년은 전태일의 분신 사건의 해이기도 하며 그 사건은 민중신학의 태동

의 중요한 발화점이었다. 이 연구는1970년대의 시기에 안병무의 민중

신학이 전면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된 시기로 이해하고 그의 중기 시기

를 1965년부터1980년대까지로 정의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 연구는 안

병무가 그의 중기 시기에 자신의 민중신학적 사유를 어떻게 확고하게

견지했으며어떠한 방식으로 확대해 나아가는지를주목하고자 한다.2)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는 이미 서구적 신학과 한국적 신학 사

이의깊은 골을그의 초기시절부터민감하게 자각하였다는점이다. 즉

안병무는70년대고난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

리고70년대 한국사회의 현장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한국적 신학에 대

한 관심과 연구를 심화해 나아가기 이전부터 어떠한 우리만의 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성서학자로서 서

구신학의 해석사와 한국신학의 독특한 해석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대안의 방법론은얼마나정당한 전략이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를 가지고 여기에서는 민중신학이 서구신학의 방법

론적 문제점을 어떻게 직시, 포착, 비판하였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특

히 서구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민중신학의 독특한 안티테제는 구체적으

로 무엇이었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는 서구신학에

대한 저항신학의 관점에서 구축된4가지 테제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하

여 다루고자 한다. 물론 제3세계 신학의 흐름과 해방신학적 해석학은

어느 정도서구신학에 대한방법론적 비판을 공유한다. 이를 전제로 특

히 이 연구는 한국의 민중신학자 심원 안병무(心園 安炳茂, 1922. 6.

23-1996. 10. 19)의 사상에서 서구신학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진행되

었는지를성찰하고자한다.

우선 이 연구는 민중신학과 서구신학의 객관적 정의와 내용을 검토

하는 작업이 아니라 민중신학의 서구신학에 관한“민중신학적 자화상”

을 검토하는 작업임을 분명히 밝힐필요가 있다. 실로서구신학의범위

와 영역은 매우 방대하며 이러한 신학적 흐름을 민중신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단선적으로 정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

실 민중신학은 서구신학의 구체적인 요소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였기

보다는 메타적으로 비평하고 비판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 민중신학

의 정당성은 서구신학의 요소 안에서 민중신학과의 연관관계를 섬세하

게 구축한 점에 있지않다. 오히려 서구신학의 다양한 흐름과 방법론에

대한 민중신학의 메타적 비평(meta-criticism)에 그 정당성과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신학에 대한 외부적 비평은 서구신

학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라고 하기보다는 민중신학이라는 내면적 자의

식의반영과 투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서구신학에 대한 민중신학적 자의식이라는 전제와 문제제기

를 바탕으로 이 연구는 다음의 순서를 밟는다. 첫째, 70년대 민중신학

의 자리를 검토할 것이다(I I). 둘째, 민중신학에서 바라보는 서구신학의

네 가지 테제의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1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09

2)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초기 안병무에 있어서의 서구신학의 이해와 비판에 대한 연

구는 다음을 참조: 전 철,“초기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의 빛과 그림자,”「신학사

상」152(2011/3), 79-108.

Page 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주요한 주제는 십자가의 신학과 고난의 신학이었다. 이에 관하여 우리

는 서구의 신학의 두 흐름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과 십자가

의 신학(theologia crucis)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두 흐름에 대

한 구분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은『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t, 1972)에

서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에 대한 개신교적 재해석을

통하여 새롭게 십자가의 신학을 신학적으로 조명하였다. 즉 몰트만은

가톨릭으로부터의 저항의 큰 흐름을 만들었던 동력이기도 한 루터의

십자가에 대한 집중을 주목한다.4) 루터는 신학이 영광의 신학(가톨릭)을

넘어선 십자가의 신학(개신교)으로 가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만약

개신교의 새로운 전통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한 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민중신학은이러한 십자가

의 신학의 가장정점에 서 있는신학이라고말할수 있을것이다. 더 나

아가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기점에 십자가가 놓여 있다면, 민중신학의

십자가의 신학은 적어도 서구 개신교의 체제유지(status quo)의 십자가

신학을 더욱비판하면서등장하는신학이라고평가할 수 있다.

서구 개신교가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한 십자가의 신학을 전개했지만, 결국은 당대의 교회 권력

과 사회체제 유지를 위한 이념으로 작동되었음을 민중신학은 지적한

다.5) 민중신학은 어떠한 신학보다 더욱 십자가와 고난을 중요하게 생각

하는 신학이다. 이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은 고난신학이다. 민중신학은

가톨릭의 영광의 명상, 개신교의 십자가의 회상을 넘어서는 고난의 참

여를 주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민중신학의 핵심 태도는 고난의 관조가

이미마음속에품고있었다. 그에의하면‘오직 성서만’(sola scriptura)

이라는 테제는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의 해방을 촉구하였던 루터와 개

혁자들의 정신이었다면, 한국의 신학이 서구신학의 그림자로부터 벗어

나는테제또한바로‘오직 성서만’이라는 모토임을안병무는역설적으

로 강조하였다. 즉 서구신학에 의존하여 성서를 읽는 것을넘어서서 철

저하게 한국의 눈과 사유로 고유하게 성서를 집중함으로서 어떠한 서

구신학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성서와 기독교의 핵심을 새롭게 구출

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에게있었다.

‘學’으로서 신학을 추구하는데‘한국적’이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적 신학의 영향에서의 독립 내

지 탈피를 전제하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거의 전적으로

서구신학에 의존해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서구신학에서의탈

피라고 할 때는 서구신학은 저들이 저들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저들의

문제를 성서에서 묻고 얻은 대답이기에 곧 우리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성서에 마주 서서 우리의

물음을 하여 대답을 얻자는 것이다. 이렇게 규정하면‘한국신학’이란

곧‘우리’또는‘나의’신학이라는 뜻이 된다. 위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

는 우선 개혁자들의 주장인‘성서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로써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우리와 성서 사이에 있

는 西歐 解釋史에서 일단 독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성서만으

로’라는 우리의 주장은 그 결과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개혁자들의 이 주장은 카톨릭 교회에서 독립하는 거점이 된 데 대해서

우리에게는서구의 신학에서독립하는거점이되기 때문이다.3)

서구신학으로부터의독립에 대한 안병무의 고민은 이미70년대 이전부

터 분명하게 자신의 신학적 세계안에존재하고있었다. 70년대신학의

1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11

3) 안병무,“韓國神學의 可能性: 성서신학에서의 可能한 길,”「현대와신학」4(1967/12),

30.

4) Jürgen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München: Chr. Kaiser, 1972), 66-77.

5)“기독교는 원래 그것[교리와 제도, 필자 주]과 싸워서 출발한 것인데 또 다시 교리와

제도를 만들어 가지고 이것을 절대화 해버리므로 하나의 관념이 되었고 그것이 국가

세력과 야합하므로꼭 같은모습을 드러냈읍니다.”안병무,“평화를 위한종교,”「씨알

의 소리」9 (1972/2), 52.

Page 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안병무 초기사상의 실존주의적 성격(existential character)이 중후기

로 들어가면서부터사회적 성격(social character)으로 변화되었다는점

을 이해하기 위하여 번거롭게 실존주의의 모토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의 실존주의적 사유는 실존을 잉태하는

그 현실과의참여와 투쟁으로 연계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는 있다. 왜

냐하면 실존주의에서의 진정한 실존은 현실을 도피하는 단독자로서의

성격을 의미하기보다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대면하면서 중심을 견지하

려는그 중심성을뜻하기 때문이다.

현실참여의 반경이 점차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

는 70년대의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고통과 고난의 현실

에 짓눌림 당하는 냉랭한 시절에서그는“고난의 극치”를 보았고“한국

의 현실”을 신학적으로 직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1969년 7월에월

간지「현존」(現存)(1969. 7-1980. 8)을 창간하여 잡지를 통한 신학 대

중화 운동을 진행한다. 안병무 외 65명이 서명한“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도 1974년 11월 발표된다.9) 이후 안병무는70년대 중반인

1976년 3월“3·1 민주구국선언”10) 관련으로 투옥된다. 안병무의 감옥은

민중신학을 잉태하는 중요한 사상적 태반이었다. 1970년대는 민중신학

아니라 고난의 참여이다.6) 이러한 이유로 안병무는기독교의 고난에 대

한 깊은 성찰의 전통을 바탕으로7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한국의

고난 현장에 대한신학적 반성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민중신학은 개

신교의 고난신학과70년대 한국 고난의 현실 사이의 결합 속에서 본격

적으로 등장한다. 안병무는 민중신학의 기원과 그 동기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말을한다.

“사람들이 민중신학이 누구에 의해서 창시됐느냐고 물으면 나는 한국

의 근세사 특히70년대의 폭정과 그로써 일어난 고난의 역사가 창출해

냈다고 한다. 고난의 역사도상에서 나는 민중과 민중사건을 만나고 체

험한 것이다. 그들에게서 고난의 극치를 보았고 한국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그것은 내 삶 사고 전체를 그러잡으므로 내 모든

것의중심이 되어버린것이다.”7)

초기안병무는 서구의 현장에서 예수(Jesus)를 학문적으로 밝히려는

작업과 교회(Church)를 만나려는과제를 넘어이제중기에서는현실의

고난(Passion)을 그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채택한다. 우리는 여기에

서 흥미롭게도 안병무 사상의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안병무 초기시절

그에게 실존으로서의 예수가 관심이었다면, 교회는 그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집단적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며, 고난의 문제는 현실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등장하는 주제이다. 즉 안병무의 사상적 변화는 실존적

태도의 문제에서부터 사회적이며 집단적 현실의 문제로 점진적으로 확

대해나아가고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8)

1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13

6) 참여를중시하는민중신학의해석학적태도에서우리는민중신학의 신학적관심을 핵

심적으로 헤아릴 수 있다. 즉 민중신학의 관심은 민중에 대한 신학적 이론화가 아니

라 민중의현실에 대한신학적참여에 있다.

7) 안병무,“삶에서 형성된 학문과정-민중신학에 이르기까지,”「철학과 현실」3(1989/6),

235.

8) 70년대고난의 문제를 주제로 성찰한 그의 문헌은 다음과 같다: 안병무,“너희는 나를

누구라고하느냐,”「새가정」63(1970/2), 46-47; 안병무, “강단: 수난자(受難者) -마

가 8:27,”「현존」70(1976/4), 3-9; 안병무,“강단: 현재(現在)의 고난(苦難)과 장차올

영광(榮光) ,”「현존」74(1976/9), 3-8; 안병무, “강단: 그리스도를 따라서(i m i t a t i o

Christi) -고전11:1,”「현존」84(1977/9), 3-8 ; 안병무,“고난을 짊어지고 그림자

같이,”「씨알의 소리」73(1978/5), 13-15 ; 안병무,“‘십자가(十字架)를 지고’의 뜻,”

「현존」107(1979/2), 3-11.

9) 안병무 외 65명,“한국 그리스도인의신학적성명,”「씨알의 소리」39(1974. 12), 53-

59.

10) 1976년 3월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 신도 700여 명이 모여 3.1운동 57주년 기념

미사를 올렸으며 여기에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의 최종 서명자

는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김관석, 은명기,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

동환, 이우정 등 12명이었다. 이로 인하여 김대중, 문익환, 서남동, 이문영, 안병무, 윤

반웅, 신현봉, 문정현, 문동환, 함세웅, 이해동 등 11명은 구속기소되었으며1977년 3

월22일 대법원 확정판결을받는다.

Page 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안병무가 가

한 서구신학에 대한 비판의 테제를 다음과 같이 포착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서구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안병무의 비판이 어떠한 방식으

로 가능한지를 고려하면서 다음의 네 가지 테제를 구성할 수 있을 것

이다.

1. 주객도식의사고(Subject-Object Thinking)

주객도식의 사고는 한 사건의 주체와 대상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사고이다. 주객도식의 사고라는 주제는 사

실상 칸트(Immanuel Kant, 1724-1 8 0 4 )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그리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철학적 반성과 함께 치열하게 고민

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들은 주객도식에 근거한 주체와 대상의 명료한

구분이 결코쉽지가 않다는 점을철학적인 성찰속에서 보여주었다. 신

학사에 있어서도 주체와 대상에 대한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저항의 정

신은 변증법적 신학(dialektische Theologie)의 흐름을 통하여 전개된

다. 서구적 사유의 주요한 토대로 기여되었던 주객도식의 사고에 대한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저항은 이미18세기부터 사상적으로 구현되었다

고 보는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서구의 기계적 과학주의를 기반으

로 한 주객도식의 사고에 대한 저항은 서구의 사상적 변화 안에서 점

진적으로형성되어왔다는 점을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주객도식의 사고가 서구적 사유를 형성하는 중요한 방법론적 태도

였다는 점을우리가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주객도식의사

고를 저항하려는 노력또한 근대 서구의 사상사적 흐름 안에서 출현하

였다는 점도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적 주객도식의사

고에 대한 안병무의 비판은 정확하게‘서구신학에 대한 동양적 사고의

비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20세기 초 과학주의와 합리주의 전

의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안

병무는 민중신학의 핵심 테제이자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민중론인

오클로스론을1975년 처음제기한다.11) 그만큼1970년대중반은 안병무

에 있어서 자신의 민중신학적 방법론의 토대와 현장을 얻게된 중요한

시기이기도하다.

I I I. 서구신학의네 가지테제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서구의 신학에 대한 경험과 비판 속에서 등장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서구신학에서도분명히 민중신학과

의 사상적 근원성을 공유하는 신학적 흐름이 있어왔다는 사실이다. 예

를 들어서20세기 초의 탁월한 신학자이자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 2. 4-1945. 4. 9)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문

제를 신학적으로 깊이 씨름하였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인들은 고난 가

운데 있는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이들이다.12) 안병무도 기독교 전승 안

에서의 고난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참여에 대하여 큰 동의를 한다. 또

한 안병무는 본회퍼를 서구신학의 전통을 거슬러 새로운 방식으로 사

회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기독교의 정신을 정면으로 구체화한 참된

신학자이자참된크리스찬으로높이평가한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안병무는 기독교의 원형의

빛 속에서 서구신학은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며, 그 태생적 한계가 극복

1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 연구 115

11) 안병무 민중론인 오클로스론 모티브는 이후 1984년 10월 12일 전국신학대학협의회

가 개최한 한국 기독교 100년 기념 신학자 대회에“예수 사건의 전승 모체”라는 주

제의 논문으로 처음 발표된다. 안병무,“예수 사건의 전승 모체,”『1980년대 한국민

중신학의전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229-255.

12) 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51),

242.

13) 안병무, “해방과 참여의신학,”「월간중앙」80(1974/11) 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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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다. 존재자(Seiende)가 주체가 되어 존재(Sein)를 객체로서 객관적

으로이해할 수 있는 시선은 결코존재자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자와 무한한 존재의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에 우

리가 주목한다면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온전히 파악한다는 말

은 성립되지않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에 의해파악될

뿐이다. 이렇게 존재자와 존재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성찰은 적어도

주객도식의 사고에서는 철저하게 반영되지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고려

는 주객도식의사고에서는철저하게 배제된다. 하이데거는이러한 존재

론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서양의 전통 형이상

학의물음이 참된존재물음(Seinsfrage)이 아니라고 비판한다.15)

만약 우리가 주객도식을 버리고 신을 생각한다면 이제 신은 객관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 체험의 대상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신은

결코인간에게 객관화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신에의하여 파악될

뿐이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오

히려유한은 무한에 의하여 파악될 뿐이다(Infinitum capax finiti).

이 주객도식의 사고에 대한 안병무의 철저한 거부는 주객의 명료한

구분을 붕괴시키며, 동시에 주객이 그물처럼 엮여있으면서발생되어지

는 민중신학의 사건론으로 전이된다. 성서의 신은 사건(event)이기 보

다는사건을 일으키는힘(force)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사건의 그물안

에 산다. 사건의 그물안에있는 인간은 자기와 얽혀 있는 사건을 객관

화 할 수 없다.16)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민중신학의 사

건론에 의하면 예수와 민중 사이에서 형성된 질적인 사건은 오늘날에

도 여전히 탄생되고 있다는 점에 핵심이 있다. 그리고 사건의 질

(quality)에 대한 문제제기가 안병무의 사건론의 핵심이지, 형이상학적

이며철학적으로현실사건의출현(quantity)을 해명하는것은 사건론의

통에 대한 비판의 태도를 지닌 실존주의 전통이 안병무의 주객도식 비

판에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안병무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9. 26-1976. 5. 26)와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 8. 20-

1976. 7. 30)의 실존주의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14) 이러한 점에

서 안병무의 주객도식의 사고에 대한 저항은 순수하게 동양적 사고를

기원으로 하였다기 보다는 실존주의적 사고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고

보는것이적절할 것이다.

분명 안병무는 주객도식의 사고를 서구적 사유의 병폐로 인식한다.

특히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모두가 신을객관화시키고있다는 점에서

이 양자 모두는 주객도식에 매여 있다고 본다. 신은 주객도식에입각하

여 대상화 되는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신은 순수한 객체(object)로, 순

수한 객관적 실재(objective reality)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

은 사실 신론의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

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대답의 다양성과는 무관하게 안병무는 서구신

학의신에 대한 물음과 대답의 방식이 주객도식에 매우 의존하고 있으

며 그것이 신학의 진정한 과제인지에 대한 회의를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안병무는 신학의신에 대한 객관적 해명(objective explanation)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나고 해석하고 주관적으로 체험( s u b-

jective experience)하는것을신학의 핵심과제로 인식하고있다.

주객도식의 사고는 실존주의적 사고에서는 쉽게 용인될 수 없는 사

1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17

14)“주객도식에서먼저해방되어야합니다. 불트만은“프뉴마는 자기자신을초월하는 의

식“이라고했습니다. 나는민중은 자기초월이 가능한집단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불트만의 성령론과 우연한 일치를 보게 됩니다. 이 생각을 조금 더 진전시키

면 성령이 따로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민중운동 자체가 곧 성령운동이라고

말 할 수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그러면 무엇이 자기 초월을 가능하

게 하느냐?’고 물을 수 있을것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일어난 사건을 주-객으로 분

리시켜서 어느 하나를 객관화하여 소외시킴으로써옳은 대답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안병무,『민중신학을말한다-안병무 전집2』(서울: 한길사, 1993),

271-272.

15) Martin Heidegger, Was ist Metaphysik? (Frankfurt am Main: Klostermann, 1986),

8.

16)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13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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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에서부터아래로의사고(Top-Down Thinking)

민중신학의 사고는 철저하게 바닥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사

고이다. 이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은 전통적인 텍스트주의와 영웅담론을

거부한다. 텍스트의 배경인 컨텍스트, 영웅적인 것과 관계되는 환경을

오히려 주목한다. 안병무의 이러한 영웅 담론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거

부20)는 주로 예수를 예수 주변의 오클로스의 삶의 자리에서 조명하려

는 문제제기의 주요한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예수는 그 자체로서 존

재하는 영웅과 엘리트가 아니라 민중의 대표가 된다. 안병무는 마가가

예수를 민중의 대표로 보려고 하였다는 해석을 하며, 그에 비해마가복

음이‘확대된케리그마’라는 불트만의 견해를 거부한다. 이러한 서구의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사고에 대한 거부와 비판의 관점으로 안병무는

예수, 성서, 신학, 교회를 재해석하기시작한다.

민중신학은 철저하게 예수의 담론을 단지 종교적인 규범의 영역에

서 조명하지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담론을 잉태하게 하는 당시의 사회

경제사적해석을 통하여 그 담론의 정당성과 의미를 문제 삼는다. 이러

한 점에서 그가 서구신학의 주요한 방법론이라 채택하였던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사고에 대한 거부는 근본적으로 안병무에 있어서 신학적 방

법론의 획기적인 전향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성서의 코드를 종교적

인 범주에서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코드의 물적 토대에 대한 성찰

을 바탕으로 종교적 의미를 추출하는 작업이다. 바로 여기에서 신학의

추상적 개념은 현실적 조건과 환경에서 정당성을 얻는 것이지 결코그

핵심이 아니다.

안병무의 사건론은 이러한 점에서 철학적 사변을 통한 사건론

(theory of event)과는 다른 궤적을 지니고 있다. 안병무 사건론의 핵심

은 예수사건이 어떻게(how) 오늘 이 자리에 재현(representation)되느

냐에대한관심에 있는것이아니라, 그 예수사건이 어디에(where), 그

리고 왜(why) 오늘 이 자리에 재현되느냐에 대한 관심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20세기 철학적 사변을 통하여 구현된 다중적-구성주의적 사건

론의 다양한 담론들을 민중신학적 사건론과 연결시키려는 작업의 목적

과 의미는 매우비판적으로검토될 필요가 있다.

안병무는 민중 개념의 명확한 정의에 대하여 회의적인 견해를 지니

고 있다. 이러한 민중 개념 정의에 대한 회의에는 주객도식에 대한 거

부가 맞물려 있다. 즉 이는 서구적 방법론의 주요한 태도인 주객도식을

폐기하면 민중에 대한 개념정의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왜

냐하면 개념의 등장은 철저하게 대상(Object)을 대상화(Objectifica-

tion) 시킬때에만 가능하기때문이다:“그동안민중이 누구냐? 혹은무

엇이냐? 라는 질문을 거듭 받아 왔으나 지금까지 그것을 개념화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자세다.”17) 이렇게 안병무는 민중에 대한 개념화

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끝까지 견지해 왔다. 민중을 개념화 하는

것은 그에 의하면“서구적인 사고에 말려들기 시작”18)한다는 것을뜻할

뿐이다. 실체로서의 민중을 인식의 대상으로서의‘민중’개념으로 범주

화 하는 것은“개념화된 민중이 실체로서의 민중을 억압하는 결과밖에

안 되”19)기에안병무는철저하게민중의 개념화를거부한다.

1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19

17) 안병무 외,“민중신학의 성서해석 방법,”『그리스도와 국가 권력』안병무 저작선집I I

(심원안병무선생기념사업위원회, 2006), 372.

18) 안병무,“제3세계의 신학,”『민중과 성서-서남동 신학의 이삭줍기』(서울: 한국기독

교교회협의회, 1999), 404.

20) Ibid.

20) 안병무의 역사관이 엘리트 중심적 사관이 아니라 철저하게 민중사관으로 이루어졌

다는점은 매우분명해 보인다:“그러니까 전 역시 끝끝내 생명을 유지해온 것은민

중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너무 무시되어온 민

중을 다시 평가해야 되고 엘리뜨 중심으로 꾸며지고 엮어진 역사관도 고쳐져야 된

다고생각해요. 3·1 운동이다 하면33인, 이렇게 보는 역사관도 잘못이지요.”안병무

외, “한국 민중운동의성격과 새 방향,”「씨알의 소리」62(1977/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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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결국 살아있는 삶과 역사에 대한 작업 속에서 그 의미를 얻는

다.22)

이러한 방법론적 경향은 신/인간, 예수/민중, 교권/교회, 언어/사건, 개

념/현실, 해명/참여라는 대립항의 방점을 후자로 찍게 한다. 이로 인하

여 민중신학은문자주의적신학을 철저하게거부한다. 말하자면민중신

학 이전에 민중운동이 앞섰고, 민중사건이먼저 있고그 사건에서 언어

가 생기고 텍스트가 생겼다고 안병무는 이해한다.23) 즉 책을 읽고 학문

으로민중사건을해명하는것이아니라“책을 읽는대신민중운동에참

여함으로 거기서 흡수한 것을 언어화한 것이 곧 학(學)을 하는 길”24)이

다. 그는 말한다.“우리는 지금까지 과거의 모든 것을 위에서부터 아래

로 보던것을아래로부터보기로 한 것이다.”25)

3. 개체주의적사고(Individualistic Thinking)

안병무와 신학적인 대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던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은 민중신학의 민중-그리스

도론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민중-그리스도론은 서구 전통신학이 배

타적으로 견지하는 대리의 그리스도론(Stellvertretungschristologie)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나누시는 하나

님의형제들을 포괄하는 연대의 그리스도론(Solidaritätschristologie)으

자체로 순수한정당성을지닌영역이 아니다.

사실 서구의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사고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신학의 기능을 신에 대한, 신의 말

씀에 대한 이해로 이해한다면 신은 말씀하고(deus dexit) 인간은 그 말

씀을 듣는존재가 된다. 신의말씀은 철저하게 이러한 점에서 위에서부

터 아래에로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적 경향성은 다른 학문

적 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신학의 독특한 성격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신학은 말 되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말함,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에 대한 이해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에“위에서부터 아래에로의 방법론”은 신학의 공리와도 같은 태도이기

도 하다. 이러한 서구신학의 태도가 신론, 기독론, 교회론의 성격을 주

요하게 결정지었다.

그러나 안병무는 이러한 위에서부터 아래에로의 신학적 방법론을

거부한다. 오히려 반대로 아래에서부터위로의 방법론을 주요하게생각

한다. 예를들어 이 태도는 안병무의 기독론에 있어서도 주요하게적용

된다. 신학적으로도 민중신학의 기독론은 철저하게 아래에서부터 위로

의 기독론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신이 인간에게’가 아니

라‘인간에 의해서 신이’라는 도식으로바라본다.21) 안병무의 신학적 방

법론은 포이에르바하가 던졌던 테제이기도 한“신학은 인간학이다”라

는 노선을 계승한다. 이는 신에 관한 명제는 모두 동시에 인간에 관한

것이라는 불트만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안병무는 아래에서부터 위로의

방법론을 통하여 신학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자신의 민중

신학을 통하여 감행한다. 그에 있어서 신학은 삶의자리에서 형성된 언

어이며 신이인간을 찾기보다는 인간이 신을찾는존재이다. 그리고 신

또한 그 자체로서 자명하고 순수한 범주이기보다는 인간과 역사의 구

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정당성을 얻는 함수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적

1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21

21) 안병무, “삶에서 형성된학문과정- 민중신학에이르기까지”(1989), 237.

22)“이 세계는 사건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빠른 템포로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이에 대

해서 신학하는 자는 그러한 변화는 아랑곳 없이 기성의 교회의 전통이나 해석을 고

수하고 그것을 되풀이하면 될까? 그럴수는 없다. 성서가 하늘을 가르치는 것이아니

라 바로 이 역사와 그 안의 인간의 종국을 말하기 때문에 역사의 귀추에 예민해야

한다.”안병무, “신학한다는일,”「세계와선교」16(1970/12), 3.

23) 안병무 외, “민중신학의성서해석방법,”(2006), 372.

24) 안병무, “삶에서형성된학문과정- 민중신학에이르기까지”, 235.

25) 안병무,“세계 한 민중의 새 지평,”『그리스도와 국가 권력』안병무저작선집 I I(심원

안병무선생 기념사업위원회, 2006),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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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의 그늘로 인해 개체주의적 사유는 매우확산되어 갔다는 인식을 안

병무는 갖는다. 그에 비해성서적 전승은 바로 이러한 사고를 근원에서

부터 거부한다고 그는 본다. 그리하여 죄는 公의 私有化이다.29) 그가개

인주의적이며 개별주의적 사고를 거부하는 태도는-결국은 실패로 돌

아갔던-사적 소유의 유혹을 넘어 공동체생활을 꾸려나간 모습30) 속에

서도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성서신학자 안병무는 성서적 전승에 담겨

있는 공동체적인 정신이 개인적 차원으로 협소하게 해석되어졌다고지

적한다. 특히 종교개혁의 주요한 모토이기도 하였던 오직 성서만(sola

scriptura)의 정신이 성서를 직접 연구할 수 있는 문을 제공해 주었으

나 여러 문제점을 남겼으며, 그중의 하나가 바로“성서해석의 권한을

개개인에게 돌림으로써 성서해석의 공동체성을 희미하게 만들었다”31)

는 점이다.

한편 서구의 이러한 개체주의적 사고의 경향성은 예수에 대한 이해

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안병무는 이러한 개체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예

수를 만난다. 즉 그는 예수를 개체적 영웅주의로 바라보지 않고“그를

둘러싼 이름 없는 민중의 시각에서”32) 바라본다. 예수는 이제 더 이상

개별적 인격(Personalität)이 아니라 민중과의 함수 속에서 등장하는

관계적 사건(Ereignis)이다. 특히 그의 오클로스론은 서구의 개체주의

적 사고와 그로 인한 성서해석에 대한 저항을 통하여 발견한 민중신학

로 이해한다. 몰트만은 민중신학의 그리스도를 세상을 대신한 존재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존재인 그리스도로 이해한다.26) 여기에

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하나는, 서구신학의 민중/그리스도 사이의 존

재론적 위계를 민중신학은 회의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기능

(Funktion)이 아닌 연대(Solidarität), 영웅적 존재방식이 아닌 연대적

존재방식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점을 민중신학은 부단히도

강조한다는점이다. 이러한 점은민중신학이얼마나 개체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서 연대적이며 공동체적인 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

여준다.

그렇다면 안병무에 있어서 이러한 개체주의적 사고의 비판은 어떠

한 방식으로 작동되는가. 안병무의 개체주의적 사고의 비판과 그 대안

인 공동체적 사고는 특별한 기원과 역사적 변화-발전을 지니지 않아

보이는 사유이다. 그의 사유의 여정에 있어서 공동체적 사고를 집중하

는 특별한 계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은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자연스럽게 그가 초기부터 체현하였던 공동체적 사고와 감각으로 기독

교의 본질과 신학의 과제를 일관되게 형성해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27)

이러한 점에서 안병무의 공동체적 사유는 거시적으로는 동양적 사유의

체화된 바탕, 혹은미시적으로는그의북간도 청년시절에서부터자연스

럽게훈육된 태도에 기인하였다고할 수 있다.

분명 안병무는 철저하게 개인화되고 개별화된 사유를 비판한다. 예

를 들어 그는 서양에서 쉽게 발견될 수 없는“우리”개념에 대한 관심

을 갖는다.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이다.28) 서구의 개인주의적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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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위르겐 몰트만 (곽미숙 역), “1975년 이래로 한국에서 맺은 나의 인연과 경험,”『세

계 속에있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위한 공적인 신학의 정립을 지향하며』(서울: 동

연, 2010), 456.

27) 안병무는1992년 6월 기독교사상에 투고한“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

계”에서“공동체”와“우리”의 관점이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인

식과자산으로 구체화 한다. 참고. 안병무,“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기독교의개혁을위한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433-446.

28) 안병무, “삶에서형성된학문과정-민중신학에이르기까지”(1989), 237.

29)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1990), 202-208.

30) 안병무,“왜 공동체인가?,”『그리스도와 국가 권력』안병무 저작선집 I I(심원 안병무

선생기념사업위원회, 2006), 477-483.

31) 안병무,“성서 해석의 과정,”「세계와 선교」20(1971/10), 52. 안병무는 여기에서“성

서해석의 공동체성의 상실”을 말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개인의 성서 해석과 성서의

개체적 해석은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안병무는 여기에서 성서를 개인이 해

석하는 것을 성서의 정신을 개인적 차원으로 해석한다는 것과 연결시켜서 보는 듯

하다.

32) 안병무, “삶에서 형성된학문과정-민중신학에이르기까지”(1989),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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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화-추상화하려는 모든 학문적 접근의 퇴로를 자체내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사변으로서의 학문에 대한 저항에는 그가 독일에서

대면했던 그레꼬-로만 사유의 기독교적 수용에 대한 근본적 반감이

연동되어있다.35)

안병무는70년대부터 신학은 사변의 산물이 아니라“증언의 산물”이

되어야 한다고 선명하게 강조하였다. 안병무는1970년 12월에 출간된

「세계와 선교」에“신학은 증언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표현하였

다. 즉 그에의하면 신학하는 자는현상을 분석관찰하는 것이 그의과

제가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성서에서 만나는 계시의 빛 아래에서 해석

하는것이다. 신학은 해석이며그리고 그것은 증언의 성격을 띤다.36)

또한안병무는1970년대중반기본적으로기독교를“말씀”의 종교가

아니라“사건”의 종교로 인식하였다. 그는 성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

다:“성서는, 기독교는예수의 말씀보다는예수를 통해서 일어나는사건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가 로마 병정에 의해서 정치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이 십자가의 사건이 기독교의 초점입니다.

기독교 신학은‘사건의 신학’입니다. 성서의 신학은 사건의 신학입니

다.”37) 이러한 태도는 안병무가 얼마나“말씀”의 허울을 빙자하여 사변

의 숲으로 숨어버리는 기독교와 신학을 거부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확고한 태도 속에서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사건의 신

학, 현장의 신학, 사변을 넘어서는 참여의 신학으로서의 성격을 선명하

의 성서해석학적유산이기도하다.

실로 안병무는 개체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전체주의적 사고를 신

학의 중요한 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기반은 그의 신학을公의 신학으

로 형성하게 한 중요한 동력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사

고의 빛 속에서 죄론, 인간론, 우주론의 구도를 새롭게‘공의 신학’으로

전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하늘은 공이다. 하늘은 어느 누구도 사

유할 수 없다. 땅도 본래는 공이다. 그것을 경작하고 그 소산을 나누어

먹을 수는 있으나 사유화할 수는 없다. 하느님도 공이라고 해야 할 것

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어느 누구에게 소유될 수는 없다. 어

떤 종파나 종교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 없으며 독점되지도 않는다. 그러

므로이 공을침범하면전체의 질서가 깨진다.”33)

4. 사변으로서의학문(Speculative Theory)

안병무는 사변과 실천의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안병무는 서구와 동양이 보여주는 학문전통의 차이를 매우

거침없이 강조한다. 안병무는 독일에서 학위를 마친 후 3년 후인1968

년 독일 교역자대회에서 서구신학과 동양신학의 대비를‘말함의 신학’

과‘침묵의 신학’으로 명료하게 규정한 바 있다. 안병무에 있어 성서는

말로담을 수 있는 것과없는 것 모두가 양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

러나 서구신학은 지나치게 가시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

을 기울였다고 안병무는 지적한다.34) 앎과 행함, 언어와침묵, 사변과 행

위라는 길항적 관계가 안병무에게는 서양과 동양의 학문 태도의 관계

로 연결된다. 더 나아가서 안병무는 전략적으로 민중신학을 사변화-개

1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25

33) 안병무,“전통과 이단,”『민중과 성서-안병무 전집5』(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6), 439.

34) 안병무,“동양의 한 시각에서본 서구신학비판,”『기독교의개혁을 위한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93.

35)“성서의 성격은 그 대상을 사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험이나 경험으로 그 대상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단지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체험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은 사변에서 세계의 상을 형성하고 그것을 실험과 경

험으로 입증하는 일반 학문의Cogito Postulat에 예속되지 않는다.”안병무,“신학한

다는일,”『기독교의개혁을 위한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9), 65.

36) Ibid.

37) 이 글은1976년 2월 15일“사건과 복음의 전진(빌 1:12-14)”이라는 제목으로 이화여

대 대학교에서 설교한 내용이다. 안병무,“사건과 복음의 전진,”『그리스도와국가권

력』안병무저작선집 I I (심원안병무 선생기념사업위원회, 2006), 63.

Page 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개체주의적 사고, 그리고 사변적 학문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수행하였

다. 이러한 비판은 민중신학의 방법론을 형성함에 있어서 중요한 반면

교사가 되기도 하였다.

안병무의 서구신학 비판 테제는 분명 서구신학 안에서도 다양한 방

식의비평과 대안적 재구성이 진행된 부분이기도하다. 즉 안병무의민

중신학이 지적한 서구신학의 방법론적 한계의 내용 또한 서구의 내재

적이며 방법론적인 성찰 속에서 어느 정도 부각된 점이다. 특히 서구

자신의 자신을 향한20세기 초의 내재적 성찰의 신학담론에 안병무가

어느정도영향을받았다고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20세기는 서구신학

에 있어서도 시대와 문명과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에 대한 자성의 목소

리가집중적으로분출된 시기였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병무가 볼 때 서구신학의 방법론은 그 근본상

한계를 노정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한국의 현장을 증

언하는 한국의 민중신학자의 시선에서 서구신학적 사유의 한계는 더욱

크게 부각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병무는 사변을 통한 논리의 구

성으로서 신학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그리스도 사건의 현장

을 반영하고 증언함으로서 신학이 존립 가능하다는 철저한 체험의 신

학(Theologie der Erfahrung)의 해석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학

의 체험적 성격을 바탕으로 서구신학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선명하게

가하였던 민중신학이었기때문에 역설적으로 서구신학은 민중신학과의

창조적 대화를 잉태할 수 있었다.

20세기의 신학의 세계화라는 격변의 흐름 안에서 서구신학은“민중

신학”(Minjung-Theology)을 현대신학사의한 장으로 기록하였다.39) 그

게 확대해 나아간다.

실로 안병무는 어느 누구보다 사변과 경험, 개념과 현실, 이론과 참

여의 차이를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민중신학의 중요한

방법론적 기초가 되기도 하였으며, 바로이 이유 때문에 민중신학을 둘

러싼 많은 신학적 논란과 쟁점을 촉발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민중신학

에 대한서구신학의질문은 주로“민중이 무엇인가”라는질문으로요약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안병무와 서구신학자들과의 대화와 토론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질문이었다. 그에 대한 안병무의 대답은 다

음과 같다:“우리는 민중신학을 민중이 무엇인지 정의하는사변에서 시

작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민중의 이야기

를 듣고 말하는 것이 민중신학이지, 민중을 정의하고 어떤 범주 속에

넣어서 규정하고그 범주안에민중을 가두어 두는신학이 아니다.”38)

I V. 나가며

우리는 여기에서 서구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민중신학의 비판과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검토하였다. 특히민중신학이서구신학의비판을 통

해서 어떠한 신학적 자의식을형성했는지를 검토하였다. 구체적으로 여

기에서는 민중신학의 관점에서의 서구신학 방법론의 네 가지 문제점을

포착하였다. 총론적으로 안병무는 서구신학이 예수에 관한 담론화를 제

대로 수행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즉 그는 예수사건(Jesus event)과 서구신학이 구축한 신학적 구성

(theological construction) 사이의 깊은 골을 감지하였으며 이 부분에

대한 지적은 매우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특히 안병무는 각론으로서 서

구신학이 보여주고 있는 주객도식적인 사고, 위에서 아래에로의 사고,

1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27

38) 서광선,“아시아 속의 민중신학: 아시아 신학의 시각에서,”『안병무 신학사상의 맥

I I』(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6), 166.

39) Wolfgang Kröger, “Grundlinien der Minjungtheologie. Theologie der Befreiung in

koreanischem Kontext,” Evangelische Theologie 48/3(1988), 364-366. Volker

Küster, “Minjung-Theologie,” RGG4 (Tübingen: Mohr Siebeck), 1254-1256. 특히

RGG(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4판에서 민중신학( M i n j u n g-

Theologie) 개념을정리한 폴커퀴스터(Volker Küster)는 민중신학의중요한 미래의

Page 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1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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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9), 3-8.

. “강단: 수난자(受難者)-마가 8:27.”「현존」70(1976/4), 3-9.

렇다면 민중신학의서구신학에대한비판은 서구신학의전통안에서 얼

마나 내재적 정당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비판인지를따질 수 있을것

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신학의 시대적 모색의 관점에서도 서구신학은

그 자신을 향해 가하는 민중신학의 방법론적 비판에 대해 응대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이 서구신학을 향해 가한 신학

적 비판과 전략은 한국이라는 생생한 신학적 현장과 고유한 문맥에 의

존하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21세기 신학과 신학적 사유가 정면으로 씨

름하고 대면해야할 미래적이며원형적인 통찰에 의존했기때문이다.

우리는 민중신학의 위와 같은4가지 방법론에 대한 비판과 자의식이

이후 신학적인대안담론의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주목해야할 필

요가 있다. 21세기 포스트모더니티의 정신이 구현된 해체주의적 신학은

분명 민중신학 방법론의 전위적 요소와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 민중

신학의 방법론적 전략이 전통신학에대한해체와 새로운 입론의 구성이

라면,‘민중신학’은‘전통적 신학’과 포스트모더니티 시대의‘해체적 신

학’사이 어느 곳에서 그의 고유한 신학적 방법론을 고유하게 구축해

나아가고 있는지를성찰하는 것이이후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주제어

민중신학, 안병무, 서구신학, 주객도식의 사고,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사

고, 개체주의적사고, 사변으로서의 학문

Minjung Theology, Ahn Byung Mu, Western Theology, Subject-

Object Thinking, Top-Down Thinking, Individualistic Thinking,

Speculative Theory

접 수 일 2011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1년 7월 31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1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비판에대한연구 129

과제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하나는 생태계의 위기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화

로 인하여 급속도로야기되는이민자들의문제이다.

Page 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ine Studie über die Kritik derMinjungtheolgie an der Westlichen Theologie

Chun, Chul

Lecturer

Hanshin University

Osan, Korea

Der starke politische, wirtschaftliche und soziale Wandel, der

während der 1970er Jahren in Korea stattgefunden hat, macht in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Koreas eine noch stärkere theologische

Wahrnehmung Leidens notwendig. Minjungtheologie ist eine eigene

Antwort auf diese gesellschaftlich-theologische Herausforderung.

Der Ausdruck Minjungtheologie ist in den 1970er Jahren von

südkoreanishen Theologieprofessoren geprägt worden. Professor Ahn

Byung-Mu ist einer der wichtigen Minjungtheologe.

Die Wirklichkeit ist nach Ahn Byung-Mu grundsätzlich durch

Leiden des Lebens gekennzeichnet. In diesem Sinne geht Minjung-

theologie nicht um theologia gratia, sondern um theologia crucis.

Ahn behauptet, dass die klassische theologische Vorstellung von Gott

und die Gesellschaft sich in der Wirklichkeit nicht mehr getrennt

beschreiben lassen. Daher wendet sich Whitehead gegen die statische

Vorstellung von Gott und Gesellschaft in der klassischen theologi-

schen Konzeption.

Nach Ahn Byung-Mus Ansicht liegt die große Differenz der

Methode zwischen westlicher Theologie und Minjung-Theologie in

ihrem unterschiedlichen Verstandnis von der Aufgabe der Theologie.

. “해방과참여의신학.”「월간중앙」80(1974/11), 218-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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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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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전 철, 민중신학의서구신학 비판에대한연구 131

Page 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황덕형

(서울신학대학교, 부교수)

I. 현실이란무엇인가? - 계시현상학적존재이해와

형이상학적종교적존재이해

1. 바르트의현실이해-계시현상학적존재이해

바르트의 신학은 아직도 할 말이 있다.1) 그의 신학을 다양하게 평가

할 수 있지만 분명히 그는 말씀의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의 주

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의 능력으로서 우리의 현실과 삶의

현상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점 때문에 바르트의

성서이해는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보수적 신앙을 갖은 많은분들은 바

르트의 성서론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그들의 일반적인 비판

에 의하면, 바르트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지

Seine Kritik an die Methode der westlichen Theologie zielt daher auf

die wahre Suche nach Bedeutung und Ursprung der Theologie.

Aus dieser methodologischen Originalit?t der Minjungtheologie

hat sie in dem westlichen theologischen Bereich ein breites Echo

gefunden. In diesem Sinne können wir fragen, was eigene Kritik an

den westlichen Theologie ist und was eigene Methode der Minjung-

theologie ist. Ahn Byung-Mus Kritik an der westlichen Theologie

kann man bezüglich der Methode in vier Punkte einteilen: 1. Subject-

Object Thinking; 2. Top-Down Thinking; 3. Individualis-t i c

Thinking; 4. Speculative Theory. Minjungtheologie schlägt ein neues

Paradigma des “Minjung” auf der Basis dieser Kritik vor.

Das Ziel dieses Aufsatzes besteht darin, die minjungtheologische

Kritik an der westliche Theologie im Rahmen der Methologie zu

untersuchen. Dieser Aufsatz will dadurch zeigen, dass diese Kritik

sowohl für eine neue minjungtheologische Orientiung als auch

konkret für eine neue theologische Überlegung des 21. Jahrhundertes

gilt.

1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33-165

1) 황덕형,“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바르트신학의 의미: 신학적 담론 가능성으로서의 바르

트의 화해론”,「한국조직신학논총」6권 (한국신학대학협의회 한국신학교교육 연구원,

2007), 211 이하.

Page 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식기제가 따로 작용해야만 성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경으

로서 문서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하나님의 계시의

구체적인 또 다른 현실이다.5)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의관심은 이에 상응

하여 의심의 해석학이나 독자중심의 해석학에서처럼문학적 자의성이

나 이데올로기 비판의 한계를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문자가

이미 우리에게 성령의 계시로서 주어진 해석 자체를 진행하는 현재진

행형인 해석학이다.6)

이와 연관해서 바르트의 성서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두 가지 신

학적이며 철학적인 자세가 이해되어야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요소들

은 바르트의현실성이해와 깊은 연관이 있다. 먼저 바르트 해석학의전

제를 살펴보자. 그의 성서이해는 철저하게 신학적이다. 바르트는 우리

않고 성서라는인간의 문서에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성서가 하나

님의 말씀으로 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마치 바르트가 글로써의 문

자를 무시하고 형이상학적 논리를 중시하는 내면의 음성주의자인 것처

럼 행동한다는것이다.2) 물론 많은구절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으로 일어나고, 그 사건은 인간이 가진 구체적인 현실의 조건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

의 특별한 행동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3)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가 단지 성령이 역사하는 역동

적 사건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르트가 목적하는 바는 그 성서안의 인간성의 요소들조차도 성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없다는 적극적

인 인간성의 수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4) 성서는 그 어떤 초월론적

1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35

2)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비판은보수주의자들이이미“문자-영”의“내적인말과외적인

말”등 이항 대립적 형이상학적 구도를 전제로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르

트의 성서이해는 오히려 이러한 이항 대립적 형이상학의 전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로 등장하는 차원의 계시적 현실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

다. 특별히 이러한 형이상하적 이항 대립적 비판에 대한 철학적 결론은 오히려 데리

다에서 배울 수 있다. 물론 데리다가 글을 중시하고 음성 중심주의로 표현되는 논리

중심주의를 비판할 때 그의 성향과 한계는 철저하게 글과 말사이의 동등성, 그래서

그 어떤것도형이상학적 근원으로사유되지 못하도록 하는것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소쉬르 비판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대한 비판이며 이런 비판

적 철저함을 바르트는 이미 극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고: J. Derrida, “언어학과 문

자학”,『해체』, trans and ed., by, 김보연(서울: 문예출판사, 1996), 57 이하; H. 키멜레,

『데리다: 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 역. 박상선(서울: 서광사, 1996), 43이하; 특별

히 데리다의 글에대한 이해를 신비주의적 경향, 곧 그의히브리적 특성으로 보는 것

에서 오히려 바르트 해석학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 S. Handel-

mann, “Jacques Derrida and the Heretic Hermeneutics,” Displacement, Derrida and

after, ed., by M. Krapnik (Bloomington: Indiaina Press, 1983), 98이하

3 )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I/1, (이후 K D로 요약),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86), 112; KD, I/2, 523이하.

4) KD, I/1, 89, 특히101이하.『교회 교의학』I/1의 하나님 말씀론이 나타나는§4의 제목

에서벌써알 수 있듯이하나님의말씀과 그 삼중적형태에 대한해명이보수주의자

들의 오해를 해명할 수 있는 구조적 요인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삼중

의 형태 사이의 관계를 집합의 관계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논리를 따라가면 대 집합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기록된 계시로서 성서자체는 소집합

이다. 그렇다면 소 집합이 대집합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그 본질적 규정을 맡는

것이 옳은 것이며 소집합과 대 집합의 관계를 역전시켜서 소집합이 대집합을 소외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안될 것이다. 즉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는 그 자체로 이

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대집합 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성서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

이며, 바르트에따르면, 이제우리의 과제는 어떻게성서를 하나님의말씀이라고제시

하면서 그렇게 되도록 역사하게 되었던 내적 역동성의 사태를 보여줄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성서가 인간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어떻게 극복되어 기적의 문서로 받아들여지고 그 책안에

서 하나님의 음성이들려지고있는가를진지하게설명하고자 하는것이다.

5) Karl Barth, KD, I/1, 103, 107이하. 특별히 바르트는 또한플라톤의 회상에 대한원칙

을 비판적으로검토한다.

6) 참고로 바르트의 해석학의 신학적 지평은 철저히 계시 중심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러한 그의 특징을 객관적인 입장에서“말씀 사건의 실재적 해석학”이며 그 현실적인

모습은“정경적 상황 하의 정경적 이해의 성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Max

Turner, “Reading the Bible within our Tradition”, Between Two Horizons: Spann-

ing New Testament Studies & Systematic Theology, (Michigan: Eerdmadds, 2000)

91이하의 방법은바르트의해석학이갖는모습의 평안한해석이다.

Page 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 우리가 문자인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 할 수 있는지?의 질

문은 물을 수는 있지만 그 물음의 참된 답변은 이미 그렇게 만나고 믿

어지고 있는 현상의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숙고함으로써만해명될

수 있다. 추상적으로 인간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로 일치 시킬 수

있는 철학적 원리를 선험적으로 발견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한 것이아

니다.11) 바르트는 어떤 원리를 먼저 선점함으로써 신학이 시작될 수 없

다고 증언한다. 오히려 그는 성서, 설교,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현실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면서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피는

것에서 그의 신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전제는 우리의

삶과 보편적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존재라는 근본 지평을 새롭게 이해

함을또한보여주고있다.

성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교회적 현실을 중시하는 이 해석학적 특

성은 존재를 이해시키는 철학적 성격도 갖고 있다. 바르트의 해석학은

우리의 자연주의적 현실 개념을 극복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바르

트의 신학은 실증주의적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는 철학 없이 신학으로

만, 오로지 신앙적 확신과 그에 대한계시현상학적 기술에서 하나님과

세계를 찾으려고 노력한 신학자이다.12) 이러한 노력은 기존의 철학적

가 만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것의 가장 밑바닥 이해에

서 시작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발생하였고 이 일을우리

가 부인할 수 없으며 그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이야 말로 모든 신학적

사고의 기본, 즉 첫 출발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전제가 아

니라 현실이다. 바르트는 이 기본적인 사실을 주장하면서 가장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그는 이 하나님의 성서의 현실을 통한 하나님의 말

씀을 듣는것이외에는 다른현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의 말씀이 이미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말한다.7) 정확

하게 말해서 교회적 상황에서 시작하는 것이다.8)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의신학은 항상 교회의 말을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일반적인경험주의의입장에서 추상적이며보편적 인간의 경

험이나 개념적 이해가 논의되는 것9)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

는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교회라는 영역 안에서 신학을 시작하는것이

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교회라는 장을 떠난다면 모든 인간의 사유나

언어는 이미 신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매우 추상적인 것이다.10) 이때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질문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그리

1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37

7) Karl Barth, KD, I/1, 89 이하, 특별히 성서와 연관해서는101 이하. 거기에 의하면 바

르트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형태로 다루게되는 것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을 기억하는현실적 기구라는관점에서시작한다.

8) Karl Barth, KD, I/1, 1. 이미‘기독교교의학’에서‘교회 교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자

신의 교의학의 제목을 바꾼것에서 알게 되듯이 그는 철저하게 교회의 학문으로서

신학을 이해한다. 신학은 교회가 자신의 모든 말을 교회의 존재이신 그리스도에게

부응하도록 비판적으로검토하고변형시키는작업이다.

9) 우리는 여기에서 문학과 기호학에 의거한 다양한 구조주의적 해석학들이 자기의 언

어적 한계를 망각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전반적인 특성을 나타난 논문으로. 김덕기,

“후기 구조주의의 지적 도전과 21세기의 신학을 위한 성서해석,”「신학논총」, 3집

(연세대학교 신과대학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1997 )

10) Karl Barth, KD, I/1, 194 이하. 또한 그의 KD, II/1의 신 인식론의 주된 관심역시 선

험적이 아닌 후험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라고 할때에도 사실 그것은 교회적이라는

의미이다.

11) 뒤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점이 반틸의 고집스러운 근본주의적 성서이해와 차이를 낳

게 하는요인이다. 사실 성서 영감설의 원천을 살펴본다면 초기 문서에서 이미성서

를 로고스적 영의 폭발현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러던 것이 현재의 문

자주의적 이해를 갖게된 것은 성서를 통해서 구원론적 진리를 확신하고 성서만이

구원의 참된 진리를 전달한다는 정통주의자들의논증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임은 자

명한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형이상학적이며철학적 전제를

가지고 성서를 이해하는 것이 이중적인 인간의 자기위안을 위한 것임을 알도록 만

든다. 참고: Handbuch der Dogmatik 1, ed., Theodor Schneider (Düsseldorf:

Patmos Verlag, 1992), 16 이하; 또한 Art.: Bibel IV, Heinrich Karpp, Theologische

Realenzyklopaedie, Bd V I, (Berlin: Walter de Gruyter, 1980), 53 이하.

1 2 )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trans., Grover Foley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63), X i i i,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이m i x o-

philosophicotheologia의 대안이 되기를원한다고기술하고있다.

Page 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런 한에 있어서 그의 세계이해는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바르트의현상학적진술이라고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르트의 계시현상학적 진술은 어떤 특징을 가

지고 있는가? 원숙한 바르트의계시 현상학적 지평은 철저하게 타자론

적이다. 그가 초기에 가졌던 탄젠트 포인트나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15)에서처럼 이 타자가 부정신학적 초월-내재 변증법에 의하여 이

해되어 우리의 현실을 벗어나는 무규정성으로서 이해되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 오히려 거꾸로 철저하게 현실을 구성하는 은총의 종말론적

구현으로서 등장하는것이다. 이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외에는바르트

의 교회교의학에서 찾을 수 있는 타자적 특성은 신앙적 기적으로서 주

어진구체적 존재 구성의 사건으로서, 비로서 여기에서 우리자신의 본

질을획득하게 되는 현실화의 역동적 계기를 마련해 준다. 자연적 이해

가 아닌 신학적 존재이해가 열리는 계시적 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타자

성인 것이다. 이 타자의 하나님은 멀리 우리의 시선을 떠나는 것이 아

니라 우리의 현존재의 단단한 구성과 더불어서 동시적으로 그 존재의

근원으로주어져 있는것이다. 하나님의삼위일체론적 소여성은타자론

적 존재 사건이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의식과 삶의전 영

역을 다스리는 분은 우리와 연속적인 관계에서 존재하는 세계의 내재

적 초월자가 아니고 여기 우리에게 현현하는 타자이다. 우리의 의식과

신학적 체계를 떠나 성령의 증거를 근거로 하는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의 진전을 해 나가는 사상가가 되게 하였던 것이며 그것에 어느 정도

성공한 자기만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성공적인 사상가이다. 그의 이

러한 사유는 마치 훗설이 자신의 현상학에서 모든 존재의 당위성을 주

장하는 자연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 철저한 환원의 결과로서 획득하였

던 절대적 소여성의 세계의 지평에 이르렀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13)

바르트가 지적하는 것은 일상적인 우리의 존재이해나 세계의 자연주의

적 태도를 지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현

장에서 일으키는 말씀의 계시적 세계를 발견하고 그 참된 계시적 세계

로부터 이 세계의 의미를 재구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 바르트는

인간의 모든 추상적 가능성에 대하여 정지! 명령을, 에포케를 추구하는

것이다.14) 따라서 바르트의 현실개념은 교회적이며 동시에 계시적이고

1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 성서이해의비교 139

13) E. Husserl, 『현상학의 이념』,이영호 역 (서울: 서광사,1987), 65 “그러나 절대적 소여

성의의미를 파악함이, 즉 모든중요한 회의를 배제한 소여 존재의절대적 명석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절대적으로 직관하여 자신을 파악하는 명증성의 파악이 모든

것의기초이다.”특히우리의 현 주제와 연관해서그의현상학 이념 제3강의는 중요

하다. 우리 인식에서 항상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하는 초월적인 것은 사실 현상학적

인 의식에 의하여 해결된다고 본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로서

주어진 의식은 존재세계와 연관되어 있는 생활세계를 구성한다. 참고: E. Husserl,

The Cirsis of European Sciences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t r a n s . ,

David Carr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0), 특히 P I I I, Life-

World에 대한해명; 현상학 일반에대한 해명, 한국현상학회편,『현상학이란무엇인

가?』(서울: 심설당, 1983); 즉 모든자명성의 지평, 곧 모든존재의 시원적 지평이 열

리는 그 현상학적 환원의 계기가 바로 참된 존재이해의 원천이듯이 계시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능하도록 허락해주신 새로운 존재이해가 바로 참된 세계이

해의시작인것이다.

14) Karl Barth, KD, I/2, 520.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인간의 모든 추상적 가

능성에 대하여epoche를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현상학적 차원을 염두에

두면서 당시 훗설의 개념을 바르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연결고리를 형

성한다. 참고: H. J. Adriaanse, Zu den Sachen selbst: Versuch einer konfrontation

der Theologie Karl Barths mit der phaenomenologischen Philosophie E. Husserls,

Mouton: S-Gravenhage.

1 5 )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trans., E. C. Hosky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R. I I, X i i i에서지적하는것처럼 하나님은하늘에 인간은 땅

에 있다고 생각되는 결론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Overbeck의 원

역사 개념을 종말론화하여 자기 신학의 논증근거로 삼고 있음에도 나타나고 또한

모든 신학적 진술은 사실 그리스도론의서론에 불과하다는 신학의 평가에서도 이러

한 경향이 드러나고 있다. 참고: 정승훈,『칼바르트와동시대성의 신학』(서울: 대한기

독교서회, 2006), 236 이하; 또한 우리가 보듯이 보수적 진영에서 바르트에 대하여

내리는 비판은 주로 이 초기개념에 의거하여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참고: 이승

구,“초기 바르트의 순간 이해를 통해본 초기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한한 이해,”「조

직신학연구」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편, 제3호 (서울: 살림, 2003), 95이하.

Page 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만 제대로 이해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반틸은 구체적

인 보편19)이며 영원한 존재로서 시간의 유한성을 넘어서 모든 만물의

통일적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존재20)로서의 하나님의 성격을

들고있다. 형이상학적으로 확정적이신하나님의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한 섭리 개념 하에서만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의 성격이 그 자신의

불완전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형이

상학적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이 이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로

인정하도록 만드는 논리적 원천이라는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세

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은 성서와 연관해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유한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반틸은 이 두 문제의 선후관계에서 지

적한 것과 같이 성서의 계시적 현실을 먼저 이해하고 그 후에 우리에

게 주어진 절대성과 확실성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이해하려하지 않

고, 철학적 전제들을 미리전제로서 규정하고 그것을 다시 성서의 무오

류라는 형이상학적 전제하에서 상호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실제로는 성

서보다 형이상학적 철학의 확신을 우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성서의 계시가 그것 안에서부터 절대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스스

로 자기를 우리의 영역 속에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외부의

형이상학적 무오류라는 권위에 의하여 받아들이도록 강요되는 것이

다.21) 성서의 증언은 하나님의 절대성과연관되어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추측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으로부터, 선험적인 이유로부터 그 내용적

절대성이 우리에게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논지를 펼

세상의 존재가 오로지 그의 출현과 더불어서 시작되게 하는우리의 삶

의 원형적 근원이면서도동시에 종말론적계시사건인것이다. 바르트의

현상학적 특성은 이제 신앙의 유비로서 우리의 삶속의 실체적인 효과

를 가지고 오는하나님의 타자성을 강조한다.16)

2. 반틸의형이상학적존재이해

이와 연관해서 대화의 상대자로 삼은 반틸의 사상은 오히려 지나치

게 과거지향적 전통의 형이상학의 영역에 남아있다.17) 그는 철저하게

절대적 자명성과 확실성을 형이상학적 가치로 확인하고 그러한 존재

영역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기독교 계시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18) 왜냐하면 계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자기 증명이고 이 하나

님의 자기 계시는 그럼으로 우리 속에서도 절대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1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41

16) 이에 대하여, 황덕형,“신앙의 유비안에있는 하나님의 타자성,”『삼자적 임재』, 황덕

형 (서울: 한들출판사, 2000). 107-150.

17) Cornelius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Phioladelph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5) 특히 그의 제2장 Christian Philosophy of Reality

를 참조할 것. 이러한 사유는 자연신학을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에 기초한 논리적

반성의 결과로서 받아들이도록한다. 즉, 이 자연세계에서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구성한 형이상학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사

실 이러한 선택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더 현실적인지를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참고: W. Pannen-

berg, Metaphysik und Gottesgedank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8)

판넨베르크는 하이데거류의 존재이해보다 형이상학적 언어가 더 신앙적 표상을 나

타내는 데에적합한언어라고생각한다.

1 8 ) Cornelius Van Til, A Christian Theory of Knowledge (Michigan: Grand Rapid,

1969), 반틸은 이러한 주장을 구체화하기위해서 세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비 연속

성의 원칙을 놓는다. 즉 죄인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렇기에 거꾸로 이제이 세계의 참된모습은하나님의계시로서만알게되는데그 계

시의 내용은 하나님은절대적인 존재이시며존재의 근원이시며 존재그 자체이시다.

이제 그 하나님의 존재에 의하여 이 세계는 자신의 존재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다. 일종의형이상학적순환논법이다.

19) Cornelius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42 이하.

20) 앞의책, 46.

21) 논문의 진행을통하여 알게되지만 실제로이러한 반틸의 주장은반틸 안에있는또

다른 보조주장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즉 형이상학적 존재이

해에 근거한 선-이해와 성서의 증언을 체험한 후-주장이 하나의 전체적인 고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형이상학적사유가우선순위에있어보이는것이다.

Page 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대화가 가능한 것은 이 두 번째, 그가 난제로 남겨놓은 부분의 해석이

다. 그는 거기에서 첫 번째와 달리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신앙의 문서로

서의 성서를 기록하고 있다. 비록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가 주장하는 실제적인 내용은 이 두 번째 측면에 드러나고 있는 것

이고그런점에서 그는바르트와대화가능한 인물일 것이다.

먼저, 그는 아주 고지식한 문자주의자로서의 측면을 선보인다. 그에

의하면 성서가 자족적이라는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고 이는 모든 해명

의 최후의 근거가 성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22) 진리의 종교로서 기

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서가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진 문서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성서의 이 전제를 받

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서가 절대적인 확실성을 갖게 되는 진실한 동기는 하나님께

서 완전무결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을 완전하게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

라는 또 다른 믿음에 의거한 것이다.(15) 반틸의 논리적 추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 원래의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지구상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유사성이 있을 뿐이다.23) 하지만 이

유사성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생각은 원본이며 하나님은 절

대적인 자기내적 체계를 가지신 분이고 이세계의 모든 일들은 그때마

다 하나님의 계획이 계시된 대로 따라가면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러

한 측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과 연관해서도 알 수 있는데 성서의

중심적 고백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며 이는일

회적 사건으로서 단 한번 있던 역사적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이다.(26

이하) 그런데 오직 성서를 권위 있는 문서로 수용한 자만이 이 현실을

받아드릴 수 있게 된다. 이는 성서를 권위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그리고 자기를 계시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치고 있다. 즉 우리는 추상적으로 선험적으로 절대성의 범주를 계시의

현실과 말씀의 현실이 드러날 수 있는 지평으로서 이미 그렇게 받아들

이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그의 방식은 반틸 안에 있는 또 다른 측면,

즉 보다 더 역동적인 성서의 계시현상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반틸은 실제로 자신의 성서이해를 전개하는 부분에서 먼저 철저

하게 이 확실성과 절대성을 전제하고 난 후에야 마치 후담처럼 그리고

여백에 남은글처럼 계시적 현실을 이해하는 글을쓰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적인 것의 범주로 요구하는 철학적 이해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하나님을 말하는 또 하나의 다른길이 될 수

는 있겠지만 반틸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다른철학적 입장을 가진 신학

적 태도와 쓸데없는 긴장을 유발한다. 왜냐하면반틸이 사용하는 이 서

구중심적 형이상학적 구조는 세계 안에서 타자와의 단절을 강조하고

소통을 별로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않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I I. 반틸의성서이해-그의주장과남겨놓은해석학적문제들

1. 절대무오한형이상학적정확성을가진문서로서의성경

반틸의 성서이해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게 되는데 먼저성서의 완전성이라는 관점에서 철저하게 형이상학적

전제를 근거로 해서성서무오설을 강조하는부분을 찾을수 있다. 그런

가 하면 그의 또 다른 의외의 측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반틸이 설명

하지 못하고 남겨져 있는 것으로서 성서가 드러내는 난제들과 연관된

문제들이다. 유한한 우리가 만나는 현상을 모두 다 완벽하게 논리적으

로 설명되지 않기에 그것을 넘어서 자신의 앞의 형이상학적 성서이해

와 모순이 되지 않도록 정합적인 이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측면 모두 사실 반틸의 성서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와

1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43

2 2 ) Cornelius Van Til, A Christian Theory of Knowledge (Michigan: Grand Rapid,

1969), 12이하 이하에제시되는반틸의 성서이해의( )는 이 책의쪽수를의미함.

23) 앞의책, 16.

Page 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 실제적인신앙의과정에서드러나는신앙의문서로서의성서

또 다른 측면으로서 반틸은 이제 성서를 신앙의 문서로 받아들이는

신앙적 역동성도 지적하고있다. 그는칼뱅의 말을인용하면서(32)24) 성

서는 객관적으로 신성의 드러남을 자신의 얼굴에 갖고 있지만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성서의 자기 증거를 받

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더 깊숙이 볼

때 반틸도 성서에 대한 신앙의 근거는 성서 스스로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책이 무오하다는 우리의 신앙도 성서가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반틸에 의하면 신앙은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과 그 내용이라는 것 그 모두를 한꺼번

에 승인하는 것이다.(32) 그리고 이는 성령께서 성서의 신성을 증거하

는 것만이 그 성서가 신성을 자기 증거 한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말한

다. 성서의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정되며 그래서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살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viva vox Dei epistola omnipotentis ad suam creaturam.(34)

이러한 새로운 측면은 오히려 대화를 촉구한다.

반틸도 성서의 무오를 증거할 수 있는 그 어떤사실적 증거가 없다

는 것을 인정하면서 고등비평의 결과 성서의 현실과 무오성의 이념이

서로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원본이

사라짐에 따라 부본들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 되었다

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본들 사이의 불일치인지 아니면 사본 안의

불일치인지 불확실함) 불일치들이 성서 안에서 발견되리라고 예상한

진리의 체계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들

된 것을말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스스로 증거 하는 신앙안에서 그것

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신앙과 더불어 성서의 절대적 무오성을 받

아들인 형이상학적 지식과 더불어서 이 구원 지식이 습득된다는 것이

다. 그렇기에 그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으로 쓰여진 것이바로

성서이며 성서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가장영속적인 형태, 문자화로 되

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27) 여기에서 다시 반틸은 성서가 원본은 없

어지고 다양한 번역본만이 존재한다는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린다. 그

에 의하면 원본과 번역본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받아들이

는 이유는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계시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더 나

아가 역사 이전에, 성서로 문자화되기 이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자신

의 지식을 전달하는 그 전달을 전제로 해야 만이 성서를 하나님의 말

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무오성을 전제로 하

도록 만드는 하나님 관념이 성서의 원본과 복사본 사이, 원저자와 그

이후의 모든 복사본 사이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신뢰와 실체적인 정확

성을제공한다는것이다.(28)

위에서 제시되는 논증의 또 다른 관점에는 항상 진리의 체계가 등

장한다. 즉 성서 자체의 한 문자 문자가 그대로 무오하다는 주장이기

보다는 그 성서에서 얻어낸 신앙의 내용이 무오하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마치 고대교회의 신앙의 규칙(Regula fidei)와 같은 일정한 경

륜적 체계를 지적한다.(33) 원죄(죄)-타락-구원을 위한 십자가-성령

의 능력등이 주요내용들이며 이것이 확실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성서가 이러한 구원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전달하는 자족적인 것이며,

또한 그렇기에 무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반틸의 성서이해를

요약해 볼 때, 앞에서 우리가 제시한 관점, 즉 성서의 내용을 통하여 그

자체의 확실성을 담보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 이외의 다른철학적 이

념의 도움을 받아 그 성서의 완전성과 무오성 그리고 자족성을 주장하

기에이르게 된다.

1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45

24)“성서는 그것의 확실성이 성령에 의한 내적 확신에 의거할 때만 하나님의 구원지식

으로서 충분해지는 것이다.”여기에 밑줄 친 대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로지 성령의

능력에의한신앙의사건에서만그 본질이 나타난다.

Page 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야 한다. 교회의 모든 진술은 결국성서의 진리를 어느 정도맞추기 위

해서 유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틸은 자신의 논증 자체

도 이와 같이 성서의 진리에 맞추어서 어느 정도 유비적이어야 함을

말해야 할 것이다.(38)

3. 반틸의이중적이해와비 형이상학적성경이해의내적요구

사실 반틸이 자신의 성서론의 근거로 삼는 것처럼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로지 성서 스스로 자신이 하

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그 증언에 기초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확증한다면 이는 해석학적 경험이며 신앙 사건에서 가능한 신

앙적확증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확증은 객관적 체계를 가진 추상

적 지식으로 변해서는 안된다. 두 번째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서의 자기 증거가 오로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 증거를 행하실

때 일어나는 일이라는 반틸의 증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는 반

틸이 수행한 것처럼 성서의 완전성을 어떤 형이상학적 구도로서 확증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성서를 내용을 현실화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론적 사건을 지적하는 언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반틸도 이러한 해석

학적 가능성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37이하)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

씀을 알려주면서 우리에게 일종의 진리의 체계를 알려준다고 말할 때,

이 진리의 체계는 현실을 하나님의 눈으로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독해

방법이며 지도서로서 우리가 상정하는 연역적 체계로 보아서는 안된다

고 한다. 오히려 이를 해석할 수 있는 몇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첫

째 성서의 모든 내용을 모아서, 즉 성서적 내용에 맞도록 귀납적으로

볼 것을 말한다. 이는 성서의 모든 내용을 서로 문의하도록 만드는 성

서 전체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서의 모든 내용에 일

정한질서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볼 것을요청한다. 이는체계나 전반적

인 연관성을 확증하는 것이며 부분과 전체의 상호관계에서 가능한 해

이 모두 긍정적으로 답변되리라고 기대해서도 안된 다는 것을 반틸도

알고 있다. 오히려 그는이와더불어서 성서의 현상에서 발생한 문제를

본질의 문제로 삼아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

라고 말씀하시기에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증언하

는 것이다(35).25) 따라서근본적인온전한 답변이 주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반틸이 성서를 신앙의 문서로볼 수 있도록 하는또 다른

단면은 인간이 가진지식의 불완전성에서파생되었다. 성서에서 계시된

그리고 성서에서 근거된 그 진리의 관념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논리

적으로 파고들어서 통할 수 있는 어떤 체계로서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한 분만이 자신과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지만

완전하게 모든 것을다 완전하게 계시하지 않으신다. 피조된 우주나 성

서조차도 하나님을 인간에게 완전하게 다 계시하지 않는다. 그 어떤인

간도 그렇게 완전한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능력이 없다.(36) 하나님

은 인간이 그 하나님을 받아들일수 있을만큼만 계시하신다는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계시는 신인동형론적(antropomorphic)이라고 까

지 말한다.(37) 교리는 신비에서 시작하고 신비에서 끝난다는 점을 인

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교회가 다시 진술하는것은성서안에

있는 진리의 체계를 다시 작동시키는 것26)과 같은 효과에서 비롯된 것

이다. 그렇기에 그 교회의 진술은 성서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그 진리의 체계를 고백의 형태로 진술해가야하는

것이다. 성서를 더 잘 이해하고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해

1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47

25) 사실은 이러한 사실을 수용하는 것은 반틸에 의하면, 다만 불연속의 기독교적 원칙

을 세우는것이다. 즉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죄인은 진

리를 다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

는 것이다

26) 밑줄을 통한 강조(본 저자) 성서는 죄인에게 회개하라고외치는 호소이다. 성서는 하

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성서의 진리는 단순히 규범적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과적이다(not only normative, but also causative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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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우리 안에서 일어난 의식의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한 반틸에 의하면 이 동시대성은 우리가 영원으로부터 참여해야 하는

순간의 사건이다.29) 우리 의식사건속의 이 순간의 한 점을 강조함으로

써 창조와 성육신 그리고 계시라는 정통주의의 진리이론 체계를 무력

화 시켰다고말하는 것이다. 반틸의 평가에 따르면 바르트가자신은 의

식신학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사실은 의식 신학자가 되었고

이렇게 될 때 성서는 자체로 역사적인 의미에서 독립성을 상실하며 성

서의 자족성과 권위가 공격받게 된다는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

의 증거라고 한 바르트는 우리가 갖고 있는 문서로서의 성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포기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비판

한다.30) 반틸에 의하면 바르트는 말씀의 사건성이 근거하고 있지만 이

모든 계시 사건은 초시간적인 지금 여기로 환원 된다31): 마치 훗설의

현상학이 그가 의식의 명증성속에서 순수 소여성의 세계를 현상학적

환원의 지향성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그것이 사실은 순수한 의

식의 행위라고 비난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틸에 의하면 바르트는

거의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초역사적 계시사건

에 얽매어 있다.32) 즉 초시간적이어서 과거도 미래도 없다. 모든 것이

현재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성서에서 계시하는 것은Deus

revelatus와 Deus absconditus의 변증법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명증적

이지 못하다는 것을 비판한다. 즉 바르트는 성서의 자명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33)

석학적 순환과 같은 것으로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이 진리

의 체계는 유비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틸이 그의 주장처럼 문자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체계의 전체적 영감설을

주장하는것처럼 이해할 수 도 있어보인다(37-40).

I I I. 반틸의 바르트 비판: 표상으로서의성서 현실과 타자적

비 표상의 세계인 계시의 현실

반틸의 바르트의 성서관 비판은 결국 위와 같은 그 자신의 이중적

이해에도 불구하고그가 가진 형이상학적 존재이해가 지나치게 강조되

기에 생긴오해이다. 즉 반틸의 바르트 성서관 비판은 신학적이지않고

실제로는 철학적이다. 그가가진형이상학적존재이해와는 다른존재론

적 구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바르트 측면에서 볼 때

자신은 계시론적 현상학에서 파생된 존재이해를 통하여 성서의 사건이

적극적으로존재를 형성하는계기로 보았다면, 거꾸로 반틸입장에서는

이러한 이해는 모든 것을 불 확실하게 만드는 찰라주의적 모험으로 보

인 것이다. 그래서 반틸은 바르트가 성서의 객관적 완전성을 거부한 것

으로 보고 있다. 정작 반틸 자신도 지금 현재의 성서가 하나님의 완전

한 원문서가 아니라고한 형편에서27) 바르트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라고 인정하는 그 과정을 오해하여 바르트가19세기의 의식신학자로서

성서의 객관성을 회손하였다고 비판하는 것이다.28) 즉 바르트의 성서론

은 성서의 사건성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서의 사건성을 강

조하다 보면 이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동시대적이 되어야 한

다는 점을 주장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동시대성이 성취되는 순간이란

1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49

27) 반틸은 성서 원본의 문제, 그리고 성서무오성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등을 말하고

있다.

28) Cornelius Van Til, A Christian Theory of Knowledge, 62이하.

29) Cornelius Van Til, Christianity and Barthianism (Philadelphia: The Prebys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62), 90 이하; 이승구, 초기 바르트의 순간 이

해를통해본 초기바르트의계시관에대한한 이해, 『조직신학연구』, 95-126

30) Cornelius Van Til, A Christian Theory of Knowledge, 66 이하.

31) 앞의책.

32) Cornelius Van Til, Christianity and Barthianism, 15.

33) 앞의 책, 13 이하. 전반적으로 바르트의기독론을 오해하고있음을 보게된다. 이것은

바르트의기독론을보면완전히 오해임

Page 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V. 바르트성서이해의초점: 하나님계시의반복으로서의

성서

1. 계시의증언으로서성서

바르트는 성서론을 해명하기 위해서 먼저 계시에 대하여 물어야 한

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계시에 대한 답변은 오로지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교회의 모든말들이 항상 주목해야하

는 객관적인 상수(常數)이기 때문이다.34) 객관적인 상수란 다름아니라

기준과 표준이라는 의미이며 모든 언어의 근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계시를 문제시해야 하는 것일까? 성서영감설의 핵심은 무엇이

고 그것 때문에 벌어진 것은 어떤 질문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

의 말씀은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자신이시다. 성서가 왜

모든 교회의 언어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바로 이 모든 언어들

은 교회의 존재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말로부터 들려지기 때문이다. 모

세와 예언자들 그리고 복음을 전하던 일차 저자들에게 말씀하셨던 하

나님은 이제이 기록된 문서 안에서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우리의 모든언어의 근거로서 계시의 증거라는 의미는 다름 아니라 성

서가 육체가 되신 말씀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

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바르트의 성서이해

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성서에서 일어나는 계시현상을 구체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그 성서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찾고자 하기 때문인 것이

다. 바르트에 따르면 계시를 지칭하는 특수한 표지로서의 성서는 특정

한 인식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서가 이 계시의 자기-증거

라고 하는 점이다.35) 따라서 성서 영감설로서 알려진 성서론의 참된 과

하지만 이러한 반틸의 바르트 이해는 명백한 그의 철학적 편견에

기인하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바르트는 앞에서 잠시 지적하였듯이

오히려19세기의 철학적 주제들이 한결같이 자의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표상의 사유에 한계지어져 있음을 보고 이를 극복하려 한다. 바르트의

사유가 훗설의 관념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상학적 통찰의

여부, 곧 존재와 의식사이의 관계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얼마나 받아들

일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바르트는 이러한 철학적 논의를

따라 자신의 계시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계시의 현실

인식을 통하여 철저하게 다시한번 우리의 존재의식을 조명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르트가 신앙의 유비라는 고유한 방법론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제시하는 현실적 고백은 우리의 현실이 계시에 의하여

재 구성되었다는 감사와 긍정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트가 의

식적으로 하나님의 타자성을 강조한 것은 그의 고유한 신학적 사유가

의식철학적 반성으로 전락되지 않고 그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비 표

상적 사유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통찰은 지금까지 우리

의 철학적 사유를 관통하고 있는 표상의 사유로는 따라잡기 어렵다. 그

것이 바로 바르트가 표상적 사유를 극복하는 이유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삶을 증거 한 성서의 말씀은 역사 속에 주어

진 하나님의 현현을 비 표상적으로 사유하도록 요구하는 구체적인 말

씀사건으로 보았다. 성서의 말씀은 우리의 이해 속에서 무엇을 그리도

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그려지는 새로운 삶

의 설계도인 것이다. 바르트는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현상학적으로 그

려냄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현실로서 이해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의 현장과 그 속에서 일어나

는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의 타자적 현존 자체였던 것

을 말하고자 하는비 표상적 계시의 사유였던것이다.

1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51

을 알게 된다. 과거에 있었던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

이시다!

34) Karl Barth, KD, I/2, 505. 바르트는 복음주의가 자유주의나 가톨릭과 차이가 나는

점이바로이것이라고말하고있다.

35) 앞의책, 507, 즉heternomie이지autonomie가 아닌것이다. 우리는성서가 하나님의

Page 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해명한 것으로 파악한다.37) 성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절대성과 자족

성은다름아니라 이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서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인식을 정확하게 진술하

는 것은 이 성서가 다른 문서와 판이하게 다른 계시된 문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38)이며 우리가 이 성서의 계시성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

계시의 사건을 추구하며 밝히고자 노력하는 신학적 해석이 바로 성서

론의 의미라고 생각 한다.39) 이는 성서가 스스로 성서의 영감성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뒤쫓아서 해명하는 길인

것이다.40) 그리고 이러한 길의 결론은 성서가 하나님 계시의 증언이라

고 말해야 한다는 것41)이다. 바르트는 다시 이 결론을 이중적으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데 첫째, 이 성서 자체를 계시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성서는 인간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42) 성서는 계시의 증언이다. 성서가 하나

님의 말씀의 증언이라는 명제의 참뜻은 성서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

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 자체가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의 이론, 계시적 성서

론의 입장에서 성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43)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

과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은 억지로 하거나 아직 온전하게이해하지 못

하면서 교회의 권위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하나님

의 계시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완전히 순응하는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

제가인식된다. 즉 성서안의이 계시를 명료화하는작업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바르트의 구체적인 방법, 성서의 사태에 적합한 성서

만의 고유한 해석학이 눈에들어오게된다. 성서 안에계시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시를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석이라 함은 인간의

주관적 측면에서 사물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에서드러난

하나님의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해석하시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방법

이다. 앞에서 지시한 것처럼 표상적 그림이나 실체적 사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하시는 행동안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

이다. 성서론과 연관해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렇게 삼위일

체적 해석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그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의 인식의 원

천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 한다는 점이다.36) 실제로 우리는 하나

님의 삼위일체적 계시를 객관적 사실로 설명하거나, 우리에게 주어진

객관적 사안의 진술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방식

으로 삼위일체를 접근하려고 한다면 그는삼신론이나 일신론으로 기독

교의 신 이해를 곡해하게 된다. 삼위일체를 해명하는 길은 삼위일체의

존재가 스스로 자기를 증언하시는 그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그분의 행

동하심의 현상을 계시로 인정하고 그 계시가 일어난 현상을 묘사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하나님 사역을 증언하는 것을통

하여 그 사역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고 그 사역이 또한 타자적으로 일

어나게 함으로써 성서의 자기 이해를 명료화 시키는 것이 성서해석학

의 과제가 된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건이 일어나는 그것이

바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완벽한 자기 증거인 것

이다. 바르트는 이 삼위 일체적 해석의 과정이 성서론의 핵심적 과정임

을 주장하면서 주관적 신앙에 치우친 개인적 확신으로 이를보지 않고

교회가 이 하나님의 증언에 붙어 있어야 하는 객관적인 필연적 사태를

1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 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53

말씀이라며그 계시의 증언이라고알고말하도록강요받는것이다(gereaengt).

36) 앞의책, 507.

37) 앞의책, 509.

38) 앞의책, 510.

39) 앞의책 .

40) 앞의책, 511.

41) 앞의책, 512.

42) 아마이런제한점에대한이해는 반틸에게도있는데 그는소위기독교교리의 불 연

속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원본과 사본들 사이의 유사성이라는 관점을 통하여 일

정한한계를 인식하고있는것이다.

43) 앞의책, 513이하.

Page 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것이다.

2. 하나님의말씀으로서의성서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이해하고자 하면서 먼저

염두에 두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이 지시하는 표식( z e i g e n d e

Zeichen)으로서의 성서가 자신의 말과 인간적 환경 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본래적 대상(Gezeigten)과 갖고 있는 살아 있는 관계의 성격

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성공적으로 이해하기 위

해서 다양한 관점들을 연관해서 다각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보는 것이

다. 즉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불연속성을 뚫고 성서가 하

나님의 말씀으로 확증되는 그 이해가 신앙의 유비 안에서 성공적으로

해명되기 위해서는 드러나서 해명되어야 할 여러 해석의 층들이 존재

하는것이다.

첫째, 성서를 교회가 자신의Cannon으로 선포하였다는 사실이다.47)

즉, 교회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규범으로서의 성서가 존재한다는 것이

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근거가 된 계시가 이 책을유일한 하

나님의 증인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스스로 절대로 그 어

떤 권능에 의해서도 그것을 할 수 없다.48) 성서 안에기록된 그 성서의

사태가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권능으로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순종하게 복종한 것이다. 둘째,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라는것은 성서 안에 신약과 구약 두 가지 다른 시간이 있음을 인정하

는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상이한 시대에 속한 상이한 인간들의 증언

이는것이다.44)

하지만 곧바로 바르트는 이러한 제한점의 한계를 다음의 계시적 진

술로서 보충한다. 즉 바로 이 차이 속에서, 인간의 언어와 하나님의 계

시의 차이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시

라고 확증한다.45) 그렇다면 이렇게 차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

가 일치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이 일치는 오로

지 말씀의 절대적 자유에서 찾는다. 말해져야 할 그 대상이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 자신을 우리가운데서증거 한다. 우리가 이미우

리의 의식속에 갖고 있는 절대적 소여성이 아니라 타자적 출현이 계시

의 현상학이 드러내야 할 사태라는 것이다.46) 따라서 바르트는 올바른

성서론의 관심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계시의 해석에 있

다고 말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가 바로 이 계시적 상황을 지

칭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언어적 상황에서 벌어

지는 일이라면, 이 대화는 대화를 통하여 지향하는 고유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통하여 나타낼 사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대화적

상호이해에서 그 대화가 지향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성서론에서 주어진

1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55

44) 앞의책, 506 이하. 바르트는 전통적으로여기에서복종의미덕을 말하고 있다. 즉 성

서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로서 이해되는 것은 그 책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받

아들일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르트의 기본 신학적 태도와 일치된다.

그는언제나 우리가그렇게 하나님을인정하게 된 것이그렇게믿게된 선험적 이유

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계시자체가 그렇게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던 것

이다; 또한 바르트는 성서의 권위를 다룬 분야에서 인간의 책임적 순종을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 참고: 538 이하.

45) 앞의 책, 512; KD, I/1, 250 이하. 바르트는 이를 finitum non capax infiniti, peccator

non capax verbi divini를 극복한 하나님의 자유로서 신앙의 혁신에서 발견되는 고

유한 사태인 것이다. 이는 이러한 명제적 진술이 즉 차이 속에서 나타난 동일성은

아무런 제한이 없는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교회의 언어적 환경에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하는것이중요하다.

46) 앞의 책, 521 이하. 성서론의 사태는 사실 그 계시의 사태가 스스로 초월적 자유를

가지고 다시작동하는 것이다

47) 앞의 책, 524 이하. 특별히 성서가 교회라는 책임 있는 공동체의 결단으로부터 이해

될 수 있는 계시의 문서라는 것은 또 다시 그 이전의 역사, 곧 구약의 예언자와 신

약의 복음주의자들의 음성을 듣는 문서가 바로 성서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성서의

바른이해는 회상과기대의 시간을가지고존재하는통전적이해가 요청된다.

48) 앞의책, 524-525.

Page 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명하고 있다. 신성이 그치지 않은채로 인간성을 입으시고 인성이 그치

지 않은 채로 신성이 드러나신 것처럼 성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자유

가운데 인간성의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그렇게 또한 인간성은

적극적으로 신성이 드러나는 장을 형성해 주는 것이다.52) 여섯 번째로

성서가 하나님의 증거말씀을가지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증거이기도

하다는 인식의 시간적 구성은 측면은 또한 인간의 시간성과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성의 측면에서 드러나는 관점을 형성한다.53)

성서에는 인간의 연약성이 존재하며 그 인간적 연약성을 인정해야 비

로서 성서가 신적 완전성을 가진 책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54) 그것은

성서가 많은 인간적 전승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는그것을Sage의 형태로 존재하는것을인정한다. 이렇게 인간적 연

약성, 그 문자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바르트 해석학

의 소극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바르트 해석학의 적극적 측면은 어디에

서 찾을수 있을까? 바르트는성서가 증거가 되는이유는“신앙 안에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일어날 그리고 일어난 그 하나님의 계시

의 사건을 기다리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55) 바르트의 표현대로 말하자

면 성서라는 책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

이 성서에 붙잡혀 있지 않다.56) 바로 이것이 그의 적극성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타자적 주체가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책이 바

이 있더라도 그것을 통합하여 하나로 이해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그리

스도의 계시가 성서 안에 존재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적 통일에서만, 회상과 기대로서 일어나는 그 통합

안에서 이해하는것이다. 셋째, 세계의 모든문헌 가운데서 구별하여성

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성서 안에서

증거 되는 한 특정한 인간 예수가 바로 그 차이의 원천이기 때문에 가

능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다른여타 인간과 동일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다른 모든 존재들을 위한 존재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

를 내포하고 있다. 네 번째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계시가

성서적 증거의 유일한 대상이며 또한 거꾸로 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만

이 성서의 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이

책 이외의 다른 곳에서 계시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성서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대상으로 증거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49) 다섯 번째

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는 성서의 내용인 계시와 성서의

형식적 원리인 형태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로 통합되어(nicht wieder

aufzuloesenden Weise vereinigt)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본문

과 계시는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다.50) 하지만 성서는 그 자신이 하나

님의 말씀이라는 그 사태에 대하여 그 어떤 공허한 현실과 상관없는

이론도 제공하지않는다. 그 대신하나님의행동이거기에 있다. 인간의

무지와 인간의 어리석음을 공격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는 그런 하나님

의 적극적인 공격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51)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

를 지탱하고 있는 인간의 언어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그 어떤 직접

적인 일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결국 이 불가분리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의 모델을 통해서 설

1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57

49) 앞의책, 545.

50) 앞의 책, 545. 바르트는 여기에서 루터가 말한 간접적 동일성(eine indirekte

Identitaet)에 대하여말하고 있다.

51) 앞의책, 552 이하.

52) 앞의책, 554 이하.

53) 앞의책, 557 이하.

54) 앞의 책, 564 이하. 바르트는 여기에서 정통주의가 주장한 성서의 완전성(perfectio)

에 대한 논의를 자세하게 각주로 처리한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그들이 과거 그 책이 영감된 것을 전제로 한 것임을 다시 잊은 것이다. 즉 하

나님의 영감으로 계시 될 때에만 하나님의 계시로 쓰여졌기에 그분에 의하여 계시

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그 책의 진가를 알게 된다. 참고: St. Augustine, “...Quia

inspiratus, dixit aliquid; si nun sinspiratus esset, dixxisset nihil; quia vero homo

inspiratus, non totum quod est, dixit, sed quod potuit homo dixit.”

55) 앞의책, 568.

56) 앞의책,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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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언명한 바르트의 요청인 것이다. 바로 이 입

장에서 바르트의 성서이해의 특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성서가

완전하다거나 자족적이거나 절대적인 자명성을 가져야 한다는 성서이

외의다른 논변을 펼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바르트가 성서를 약화

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르트는 성서의 언어 자체를 통하여 성서가 자족적이며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더욱이 성서는 이 세상과 교회에 대하

여서도 독립적인 실체로서 존재함을 증거하고 있다. 인간의 주관성이

무엇을 발견하거나 인간의 한 개인적 확신과는 상관이 없이 오로지 하

나님의 자유로서 우리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책의독립성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의 핵심은 이 하나님의 자유를 인간의 언어 가운

데서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단지 그 사건의 주인공 되신 성서의

하나님을다시자기말 가운데 등장시킨것이다.

V. 결론: 신학적해석학의실천으로서의성서

지금까지 살펴 본 바르트의 해석학적 의미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다.

반틸의 주장처럼 그는성서를 폄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성서론

은 실천적 해석학이었기에다른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다른이유는 이

전의 다양한 해석학적 원칙과 다른 길을 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고자 하던 바로 그 길을 현상학적 전환을 통해 새로운 해석학적 이

해로서 성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해석학은 오해를 받아왔

다. 그의 현상학적 해석학이 가지고 있는 비 표상적 사유의 운동은 이

제 지금까지 해석학에서 준비해왔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보도록 강요

하고있는 것이다. 먼저성서가 하나님의말씀이라고 증언하는 것과성

서가하나님의말씀이라고확신하는것이 하나님의 결정과 그의행동58)

때문이라고 바르트는말한다. 성서가 하나님의말씀이라고인정되는것

로 성서인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계시에 의해 형성되고 그

계시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성서 안에서 계시된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서적 사태이다.57)

지금까지 살펴본 특징들이 대개 바르트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라고 말할때 이해되어 할 내용들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특징적인것은

그는 어떤 철학적 개념이나 특수한 논증으로부터 성서를 변호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로그가 많은곳에서 철학적 논의를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철학적 논의는 철학적 하나님과 상관없는 성서의

하나님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의 일완일 뿐이라는 확신을 바르트는 갖

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신학적 언어의 특성은 모든 철학적 개념과 논의

에서 사용되는 개념중심의 일의적 언어사용을 지양하고 성서에서 보존

하고 있는 보다 활용론적 유비적 언어의 특성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즉, 성서적이며 현실적이라는 그의 신학의 주도적인 특성은 하나님의

자유를 우리의 현실의 경험 속에서 인식되고 체험되도록 강요하는 성

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를 읽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해방의

사건이 경험되듯이 그는 자신의 신학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가 표현되

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그것을 감히 기대할 수

있게 되는가? 바르트는 그것을 성서적 구조와 언어에 맡김으로서 성서

적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일을 스스로 성취하신다는 것을증언하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 그것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자유! 바로 그것을

신앙에서 증언하고자 한 점에서 바르트의 신학이 성서적인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철학과 함께 섞어져 있는 신학의

1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 성서이해의비교 159

57) 이와 연관해서 바르트는 축자영감설을 다루고 있다. 참고: Karl Barth, KD, I/2, 571

이하. 그렇다면 바르트는 축자영감설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바르트는

축자영감설이 초대교회로부터 주어져 있는 전통임을 잊지 않는다. 초대 교회로부터

말씀들이 전체로서 영감 되고 그 저자들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문자 하나가 모두

쓰임을 받았으나 그 역사의 전체로서 참된 의미는 종교개혁자들의 글 속에서 찾을

수 있다.

Page 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나님의 능력이며그 능력에 상응하는 인간의변화인 것이다.

주제어

성서무오설, 형이상학적절대성, 유비, 현상학적계시, 타자성

Infalliblity of Bible, Metaphysical Absoluteness, Analogy, Pheno-

menological Character of the Revelation, Otherness

접 수 일 2011년 7월 11일

심사(수정)일 2011년 8월 4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은 앞에서 지시한 것처럼 기표로서의 자기존재에충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성서가 인간적인 문서가 됨으로써 동시에 그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

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동일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59) 오히려 거꾸로이다. 쉴라이에르마허가찾은 인간과 신의공통

점인 신앙의 성격도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공고하게 해주지 못

한다. 바르트는 이미 신앙이라는 인간학적 매개를 통하여 보편적 해석

학과 공동적 기반을 찾고자 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한 것이다. 바르

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거꾸로

이 공동의 기반을 공격함으로써 가능해진다.60) 요컨대 바르트는 이로써

그 어떤 내재적 유사성도 거부한 것이다. 신앙의 사건은 출현이며다가

오는 하나님의 타자성에 근거한다. 성령에 의한 구체적인 현실을 바르

트는 이렇게 하나님의 출현으로, 인간의 삶과의 공동성의 개현으로 설

명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매개될 수 있는 공동성을 성령에게

귀속시킨것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해석학적 수고를 부인 한

것일까? 인간적인 어떤 사건이나 어떤 속성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하고자 한 것을지목해 보아야한다. 그는신학적 해석학의 기초를, 말씀

의 특이성을 인간학적 속성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

고 계시 사건 그 자체의 발생에서 찾고자 한다. 그의 해석학은 현상학

적 지평 위에서 열리고 자신의 신학적 해명에서 실제로 행한 일은 신

학적 토론의 과정을 통하여 어떤 숨어 있는신지식의 비밀스러운 통로

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일으키고 있는 우리들의 변

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는것이었다. 만약 어떤 하나님 말씀이 해

석학적 과정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면 그 과정을 통하여 다다르게 되는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학의 목표는 결국 이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

1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61

58) K. Barth, KD, I/2, 590.

59) 앞의책, 593.

60) 앞의책, 593.

Page 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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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 Til. Cornelius. A Christian Theory of Knowledge. Michigan: Grand

1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성서이해의비교 163

Page 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ologically. This theologically determined, and radical changed

understanding of the Being by Karl Barth is the core reason why his

theology is so difficult to be accepted. But our these is this, that as far

as the theological content of the Bible understanding is concerned,

Barth and Van Til can go together parallel, because they both wants

to preserve the gospel of the Bible. But there may be some difference

in philosophical way to understand the circumstances of the world, in

which the Gospel must extend itself. As a result, we can confirm that

the accusation which Van Til makes on Barth is not a theological

matter, but throughly philosophical difference. If this is truth, then we

can demand Van Til and his followers of that they withdraws their

groundless accusation on Barth.

A Comparison between Barth and Van Til on the Understanding of Bible

Hwang, Duk-Hyung

Associate Professo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Puchon, Korea

There is a deep misunderstanding about Barth’s concept of Bible

especially in some group of korean conservative theologian who are

deeply influenced by Van Til. They criticise Barth’s understanding of

Bible even as heretics. The crucial point which they blames is that

Barth makes Bible unstable in letting Bible depend on occasional

occurrence of the Holy Spirit. They means that in doing this Barth

reveals himself as a “consciousness-theologian” whom Barth himself

tried to overcome. As already known this is a typical accusation on

Karl Barth which Van Til has made fast 40 years ago. But if this is

not a fact, as we try to demonstrate, why does this complain about

Barth spread so wide under so many theologian and prolong so long

time? We maintain that this strange situation comes from the

particularity of Barth’s understanding of Biblical Hermenenutics.

Karl Barth achieves a unique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reality

through his concept of revelation. His understanding of Revelation

functions as a critical reflection of our natural understanding of the

Being itself as E. Husserl’s phenomeology does. His concept of

revelation opens the dimension of absolute givenness of Being, not

connecting to any philosophical structure before given but purely

1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황덕형, 바르트와반틸의 성서이해의비교 165

Page 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박성규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술연구교수)

I. 들어가는말

만유화해론은 기독교 신학사상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고 아직까지도

신학적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20세기 현대신학

에서 이 주제는 칼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비판하는 핵심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왔다. 신학의 역사에서‘만유화해론’이라는 주제는 사실 바

르트가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트는 이런

개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르트의 신학이 만유화해론

하나에 의해 대표될 수도 없고, 또 범위를 좁혀서 볼 때 바르트의 구원

론이 곧 만유화해론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은 자유주의 신학 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신학 진영에서

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한국의 일부 신학자들에게서“바르트

의 신학은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는신학!”이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무분

별한 비판을 가하는 경향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이 이런 비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르트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당한 것인가?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67-198

Page 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만인구원론’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그러한

개념정의에 따르면 만유화해론이 문제 삼는 신학적인 배경으로 두 가

지가언급된다. 첫째로는당시구원받은 자와버림받은 자, 구원과 멸망

을 날카롭게 분리하는‘이중적 구조’의 종말론(예를 들면마 25:31-46)

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드물게 주장되는 것이긴 하지만 모든 불신자를

종말에 멸한다는 내용(계 21:1-8)의 종말론이다. 이러한 종말론의 내용

은 물론성서적으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러한 종말론적인 구조가 끊임없이 문제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

이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관한 이해와 어울

릴 수 없는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

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종말 때의 이원론적구원과 심판은 서로 모순된

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만유화해론적 인식은 바로 이러한 모순에

대한문제의식에서출발하고 있다.

2. 만유화해론의성서적전거와교리사적배경

그렇다면 성서에는 만유화해론의 전거를 찾아볼 수 없을까? 만유화

해론은 완전히 비성서적인 것인가? 비록 만인구원론 혹은 만유화해론

이란개념이 성서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2) 우리는 만유화해론이 비록 교

리사에 있어서 한 번도 정통 교리로 인정받은 바 없지만, 그렇다고 만

그리고 바르트의 신학에서 만유화해론적인성격을 나타내는 부분이 있

다면, 그것은 어떤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는가? 우리는 만인구원론에

대한 바르트의 신학적 견해와 그에 대한 이해 또는 오해를 풀어내기

위해서 무엇보다 만유구원론 그 자체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필요하다

고 본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만유구원론이 바르트가 처음으로

주장했거나 바르트에 의해서만 주장된 것처럼 여겨지는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우선 만유구원론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전거와 신학역사상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

런 다음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의 신학적 함의의 본질에 어디에 있는지

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서 바르트에 대하여 무분별하게 가해온 만인화해론 혹은 만인구원론

비판에 대한 오해를 바르트의 입장에서 해명해 봄으로써 오해가 있다

면 바로잡고 이해는더 명확하게하는시도를 해보고자한다.

I I. 만유화해론의개념정의와역사적배경

1. 만유화해론의신학적문제의식

독일의 대표적인 신학 전문용어 사전이라 할 수 있는RGG(Reli-

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에 나타난‘만유화해론’의 정의에

따르면“만유화해론(a j p o k a t a v s t a s i " p a v n t w n)은‘만인구원론’혹은

‘만물의 회복’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모든 인간(사물, 본질을 포함하

여)을 예외없이종말론적인 구원(혹은하나님의나라)에로받아들인다

는 종말론적인 사상”1)을 뜻한다. 참고적으로말하자면 한국의 신학에서

는 만유화해론( A l l v e r s ö h n u n g s l e h r e )을‘만인화해론’, ‘만유구원론’,

1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 함의 169

1 ) Hans Dieter Betz, ed. R G G4, Band1 (Tübingen: J.C.B. Mohr Siebeck, 1998),

322.(앞으로RGG로 표기.)

2) 특히 골 1:20; 엡 1:10; 롬 11:32; 행 3:21; 고전15:21ff.; 롬 5:18; 11:32 등은 그 대표

적인 전거라 할 수 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

이라;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

려 하심이라; 롬 11:32, 하나님이 모든사람을 순종하지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

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행 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ajpokatastavsew" pavn-

twn) 때까지는하늘이 마땅히그를받아두리라.

Page 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자들이었던 벵엘(J.C. Bengel)과 외팅어(F.C. Oetinger)에 의해 강한

지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19세기 교부(敎父)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

(F. Schleiermacher)도 만유화해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6)

특히 인상적인 것은 블룸하르트(Blumhardt) 부자(夫子)가 이 만유화해

론의변론가를 자처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블룸하르트(J. C. Blum-

hardt)는 내적인 싸움 끝에 만유화해론에 대한 확신을 감행하는데, 그

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십자가가가져다주는 결과였다.“성 금요일은

전 세계에 대하여 총체적인 용서를 선포한다.”7 ) 아들 블룸하르트( C .

Blumhardt)에게 중요한 문제는 복음 전체가 근본적으로 강조하고 있

는 것이었다.“하나님이 영원히 아무것도 더 이상말할것이없는곳에,

즉 복음 전체가 폐지되는 곳에 지옥이 건설된다.”이 말은 곧 복음 전

체가 폐지될 리 없고,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못하는 곳은 없

기 때문에 지옥이 있을 리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두 부자

블룸하르트는 여기서 공통적으로‘복음의 사회적 결과’를 강조하는데,

미국의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을 가르친 라우셴부쉬( W .

Rauschen-busch)도 이와유사한 주장을 한다. 즉 복음이 전 세계를 위

해 어떤희망을 가지는가 하는관점을 강조하여 가르쳤는데, 이러한 맥

락에서 만유화해론은 오늘날의 신학에서 종말론적이고도 사회적인 동

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의 대표자로 슈텔린(E. Staehelin)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 바르트 역시 이러한 동기를 동조하는 관

점에서 열어두고 보았던 것은사실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때 만유화

해론을 보편적인 구원론으로 확대시키지는않았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

의 만유화해론에 대한 입장은 앞의 신학자들의 입장과는 확실하게 구

별된다. 따라서 바르트를 만유화해론자로 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유화해론이 전혀 성서적 근거 없이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교리는 아니

라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만유화해론이 성서적

전거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사에서 끊임없이 정죄받은 이유

는 무엇인가? 실재로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543)에서 이 교리가 정죄

받은 이후로 한 번도 교회에서 정식교리를 인정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유화해론에대한 신학적 인식과 해석들은 잊히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아마 교의학

역사상 만유화해론만큼 교회에서 정죄받으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으로

주장되어온교리는 찾아보기힘들 것이다. 만유화해론을대표했던대표

적인 최초의 신학자는 교부 오리게네스(Origenes)3)였다. 오리게네스는

사도행전3장 21절에근거하여“창조된모든본질의 회복이라는 의미에

서‘만유화해론(Apokatastasis)’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인간의) 죄로 인해발생한 창조의 방해물을 제거하는것을

목표로 하며, 그와함께모든피조물에게의학적, 정치적 그리고 우주적

인 차원에서 광범위한 존재질서의 조화를 회복시켜 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4) 고대후기와 유대교적만유회복(Apokatastasis) 개념을 수용했

던 이러한 만유화해론은 오리게네스 외에도 나지안즈(Nazianz)의 그레

고르(Gregor), 닛사(Nyssa)의 그레고르(Gregor)에 의해서도 주장되었

다.5) 따라서 만유화해론은 특히 동방교회 전통에서 위대한 신학자들과

민간 신앙에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만유화해론에 대한 신

학적 해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종교개혁시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소위‘종교개혁 좌파들’에 의해 대변되었다. 특히덴크(H. Denck)와 재

세례파들(Wiedertäufer)이 만유화해론을 지지했고, 무엇보다 경건주의

1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71

3 ) G. Pöhlmann, Abriss der Dogmatik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haus Mohn,

1985), 325; R G G, Bd.1, 325; Jan Milic Lochmann, “Apokatastasis,” E K L B d . 1 ,

202.

4 ) Origenes, Princ1,6,1-4: I I, 3 , 1-5: I I I, 6 , 1-9. 참고. O. Weber, Grundlagen der

Dogmatik, Bd.II, 501ff.

5) EKL. 앞의책.

6 ) H .-G. Link / C. Breytenbach, “Versöhnung,” Theologisches Begriffslexikon zum

Neuen Testament Bd. 2(Wuppertal: R. Brockhaus Verlag, 2000), 1776.

7) Erwin Fahlbusch, Jan Milic Lochman, ed. EKL, Bd.1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6), 202. (앞으로EKL로 표기).

Page 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나 복음의 최종적인말씀은분명히하나님의‘예(Ja)’라는것이다.

I I I. 만유화해론에대한바르트의신학적해석

1. 이중심판론과만유화해론의장점과한계

우리는 여기서 만유화해론에 대한 바르트의 신학적 견해 혹은 해석

을 다루기에 앞서 우선 앞의 장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분

명히붙잡고 가야 할 것이다. 다시말해서 만유화해론은 종말론적 구원

론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숙고를 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앞서 제기한 대로 만물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단순

히 영원히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 선택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로

양분되어 해석되는 이원론적인 구조는 이미교리적인 정설로 받아들여

진바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성서적 근거도 확보

하고있고 또 구원이해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는 장점이 있다. 우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인간의 무능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

이 있다. 둘째,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인격성과 그에 근거한 책임성을

잘 부각시켜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셋째, 왜냐하면 구원받을자와하

나님에 대적하는 자 사이의 분명한 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에반

해 만유화해론은 이러한 점들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

한 이중적 구조는 한계도 있다. 우선이러한 이중적 구조가 급진적으로

강조될 때에는 극단적인 이원론적 분리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둘째,

그럼으로써 자칫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사랑과 자유에 제한을 둘 위험

이 있다. 셋째,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심판으로 양분되는 종말론적 이중

구원론 구조에서 특히,‘영원한 심판’으로부터 추론되는 무자비한 하나

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즉, 독생자 예수 그리스

도를 주시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한 영혼이 버림

있어서는 아직도 논란 가운데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동조적인 관점에서 열어 두었던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

님의 자유와 사랑에 그 어떤 한계도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나름대로

정당한 신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뒤에 바르트의 만유화해

론을다룰때 이 점을좀 더 구체적으로서술해 보고자 한다.

3. 잠정적결론

만유화해론의 개념정의와 역사적 맥락을 잠시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은 경건주의자였던 바르트(C. G.

Barth)의 지혜로운 명언이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만유회

복을 믿지않는 사람은 소와같이 미련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유회복론

가르치는 사람은 당나귀처럼 멍청한 사람이다.”8) 결국우리는 신약성서

에서도 신학의 역사에서도 두 가지 관점이 동시에 흐르고 있다는 결론

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한편으로는 심판과 저주의 가능성 그리고 구

원과 영벌의 이중적인 종말론에 입각한 구원관이 있는가 하면, 다른한

편으로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구원관이다.

이 두 노선은 양극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 하나의 교리로 통합하기

어려운 성향이 있다. 그렇다고 그 두 노선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무시

할 수 없다. 우리가하나님의 경륜을 다 손 안에넣을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두 노선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도 없을 것이

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다. 즉,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의빛에서 해석한 것이다. 위의긴장을 해소할 수 있

는 유일한 길은 양자를 모두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길

이라고 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고난과 부활의 빛에서 보면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의‘예(Ja)’와‘아니오(Nein)’를 알고 있지만, 그러

1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73

8) EKL, Bd.1,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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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게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리 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논의를 반복하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바르트의‘예정론’과‘화해론’에 나타

난‘만유화해론’이 어떤신학적 함의를 담고있는지를살펴보고그러한

신학적 함의가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

추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논의의 진행을 위해서 바르트가 과연

‘만유화해론’을 주장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을 미리 간략히 정리해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가장 명쾌한 답을 제시한 것은

다름아닌칼 바르트자신이었다. 에브하르트윙엘(E. Jüngel)에 따르면

바르트는 이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증법적인 대답을 하였다고 한

다. 즉,“나는 그것(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르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10) 이러한 그의 역설적인 대답은 단순한 언어유희

가 아니라 사실 그의‘만유화해론’에 대한 생각을 가장 신학적으로 잘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칼 바르트의‘선택론’에

대해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틸리케(Helmut Thilicke) 조차

도“바르트는항상이 교리(예정론)의 경계선(Grenze)에서움직인다”고

보았던 평가와도 일치한다.11) 이는 또 다시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바

르트의 대답과도 일맥상통한다. 1937년 이후로 바르트와 절친한 사이

였고 또 그야말로“만유화해론의 전도사”였던 리하르트 임베르크

(Richard Imberg)와의 대화 가운데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

다.“나는 만유화해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만유를 화해케하신 예수 그

리스도를 믿는다.”12) 상호 일치하는 위의 두 대답은‘만유화해론’에 관

받아 지옥의 형벌을, 그것도 영원히 받도록 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

답을 주기 어렵다. 이 문제는 특히 현대적 구원론 논의에서 중요한 자

리를 차지하는 물음 가운데 하나이다. 비록 만유화해론 역시 신학적인

한계를 안고있는것은사실이지만, 바로 이러한 한계점들에 대해교리

적 보완기능을한다는 사실은 전혀 부정할 수 없을것이다.

2. 바르트의예정론(KD I I/2)에 나타난만유화해론적특성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제 바르트의 신학사상, 특히

그의 예정론(KD I I/2)과 화해론(KD I V/1-3)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우선 바르트가 정말로‘만유화해론’을 주장하고 가르쳤는지

에 관한 해묵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바르트

의‘선택론’과‘화해론’을 중심으로 시도해본 다음, 바르트의 그런 신

학적 시도는 과연 어떤 신학적 함의 가운데 이루진 것인지를 밝혀 봄

으로써 지금까지 이루어진 바르트의 화해론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풀

어보고자한다.

1) 만유화해론에대한바르트의변증법적인태도

바르트가‘만유화해론’을 주장하고 가르쳤다고 보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입장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비단

한국 신학계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르트가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선택론’을 내놓으면서부터시작된 논쟁이었다. 특히에밀 브룬너는 바

르트의 예정론이 신약성서에 위배된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칼빈의 예정

론에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9) 따라서 이제와서 새삼스

1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75

9) E. Brunner, Dogmatik I, 2.Aufl., 1953, 377.: G. Pöhlmann, Abriss der Dogmatik,

260에서재인용.

10) E. Jüngel, “Barth”, TRE 5 (Berlin, New York: de Gruyter, 1980), 263.

11) Helmut Thielicke, Glauben und Denken in der Neuzeit (Tübingen: J.C.B. Mohr,

1983), 438.

12) K. Barth, “Brief an die Gesellschaft Schweiz-Sowjitunion,” 22.3. 1945. 재인용.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Nach seinen Briefen und autobiographischen

Texten (Zürich: TVZ, 2005),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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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학을‘만유화해론’신학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만큼 아직 논

란 중에있는주제임을알 수 있다.

그렇다면‘바르트는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부정의 의미

를 신학적으로 규정해 볼 차례다.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비판들의 근거는 대체로 크게 나누어 볼 때 두 주제로 정리

된다. 그 하나는 그의『교회교의학』I I권에 나오는‘선택론’이며, 다른

하나는I V권에 나오는‘화해론’이다.‘만유화해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

장의 바르트의 관점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 하나는‘효력’과

‘실현’을 구분하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과 희망을 구분하는 관

점이고, 셋째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과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은

관점이다.

(1) ‘효력’과‘실현’의 구분

우선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부정하는 첫 번째 관점부터 살펴보아

야겠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만유화해론은 우선“효력”의 관점에서 보아

야지,“실현”의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15) 바로 이런“실현”의 의미에서

바르트는‘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바르트는

‘선택받은 자들’을 어떻게‘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선택’은 닫혀

있는개념이 아니라, 열려있는개념으로해석된다. 바로이점에서 바르

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이중예정론”을 비판, 수정 극복하는 시도를

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인“이중예정론”은 영원한 선택과 영원한 버림이

라는 이원론적인 도식으로 하나님의 다른 그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 채

결정 그 자체를 닫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이 이중적인 결정 앞에는

그 어떤 다른 가능성도 열려 있지 않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

한 바르트의 생각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준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풀어줄 결정적인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결정적인 열쇠란 다름 아니라 바로“그리스도 중심

적(Christozentrisch) 신학”이라는 사상이다.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가

르치지 않았다면 만유화해론이그리스도중심성을 상실했을 때이다. 그

리고 만일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라면 그것

은 만유화해론이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되었을 때이다. 바르트는 결

국 만유화해론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만물을 화해케 하신예수 그리스

도를가르친 것이었다는것이지금내릴수 있는우선적인결론이다.

2) 만유화해론에대한바르트의부정적 입장

그렇다면 바르트의 이러한 이중적인 역설적 대답의 시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부정적인 측면, 즉 바

르트는‘만유화해론을가르치지않았다’는 측면부터살펴보고자 한다.

바르트는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명제를 확정하기에 앞

서 우선 개념사전에 나타나는 사실부터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즉, 바

르트가 만유화해론을 직접적으로가르친 것은 아니었다는사실이다. 대

부분의 신학사와 신학 개념사전에 그리고 교의학 개론서를 보면 역대

만유화해론을 가르쳤던 신학자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이 직접적으로‘만

유화해론’을 가르치거나 대변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반면, 바르트에 관

해서는 직접적으로‘만유화해론’을 가르쳤다는 언급은 삼가고 있는 것

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바르트의‘예정론’에서 만유화해론적인 특징들

을 찾아볼 수 있다는 언급 대부분은“아직도 논란 중에 있다”13)라든가

아니면“바르트 자신은 만유화해론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

하려고 애쓰고 있다”14)는 전제를 달고 있다. 이 사실만 보아도 바르트

1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77

13) Hartmut Rosenau, “Allversöhnung”, TRE, Bd1, 322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4) H. Tielicke, Glauben und Denken in der Neuzeit, 438.

15) H.-G. Link, “Hermeneutische Überlegungen,” Theologisches Begriffslexikon zum

Neuen Testament Bd. 2(Wuppertal: R. Brockhaus Verlag, 2000),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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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유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아니예수그리스도라는이름만이 유일하게

이중적인 성격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참 하나님(vere

Deus)과 참 인간(vere homo)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방식과는 달리 예

정론도“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선택된 인간

(der erwählende Gott und der erwählte Mensch)”라는 두 명제로 정의

된다.19)“선택하심이란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인 규정

이고, 선택받음은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적인 규정이

다.”20)‘두 본성론’에서 참 하나님(vere Deus)과 참 인간(vere homo)으

로 정의된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바르트는 자신의‘선택론’에서‘선택

하시는 하나님과 선택된 인간’으로 정의 내리는데, 이는 방법론적으로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니까‘선택하시는 하나님과 선택된 인간’

이란 명제는‘선택론’에서 기독론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

택이란 근본적이고도우선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대한선택이다. 태초

에 선택이 있었는데 그 선택의 주체와 대상은 다름 아닌 처음부터 예

수 그리스도였다.21)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없는, 예수그리스도 외의, 예

수 그리스도옆이나 앞의혹은뒤의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예정론이 선택과 유기를 인간의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결정되

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바르트는 그러한 선택과 유기를 모두 그리스도

안으로 집중시킨다.

‘선택론’에서 이러한 기독론적인 정의, 즉‘선택하시는 하나님과 선

택된 인간’이라는 기독론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면, 그러한 그리스도 집

중적인 정의 내에서 우리 인간의 선택과 인간의 버림은 어떻게 이해되

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바르트는 자신의‘선택론’에서, 특히

지와 무한한 은혜의 가능성까지도닫아버린다. 전통적인이중예정론의

관점에서 인류의 한 부류는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었고, 다른 부류는 영

원으로부터 버림 받았다. 그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전통적인 예정론의

근거가 되는‘하나님의 절대적 결의(decretum absolutum)’라는 개념조

차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16) 예정론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모든후속적인사건들을오직이 하나님의‘절대적 결의’로부터만생각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르트 자신이20세기의 개혁신학자임에도그

의‘선택론’이 많은 깔뱅주의자들로부터 끈질기고도 신랄한 비판을 받

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이유는 아마이러한 바르트의 이중예정론에

대한 수정적인 태도 때문일 것이다. 깔뱅은『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하고도 변치 않는 결의 가운

데 누구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지 그리고 누구를 멸망으로 넘겨주실

지를 확정하셨다. 우리가 주장하건대, 선택받은 자들에 관한 하나님의

이러한 결의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근거해 있는것이며, 인간

의 자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주에 넘겨준 사람

들에 대하여는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우며 저항할 수 없는, 그러나 또한

우리가 다 헤아리기 힘든 심판에 따라 생명에로의 길을 닫으셨다!”17)

깔뱅의 정의에 따르면 선택에는 구원에로의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에로의 선택도 있다. 이러한 이중예정론에 따르면 결국 인

간은 영원한 선택과 영원한 저주라는두 부류로 종말론적 심판을 받고,

영원히 나뉘게 되어있다. 개혁신학자로서칼 바르트는 칼빈의 이중예중

론(gemina praedestinatio)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를 획기적이고

도 혁신적으로 개정한다. 즉,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정론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의된다:“하나님의 예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

다.”18) 물론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역시 선택과 유기가 있지만, 그러한

1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79

16) KD, II/2, 111.

17) J. Calvin, Institutio, I I I, 21,7.

18) KD, I I/2, 110.

19) 앞의책.

20) 앞의책.

21) KD, I I/2,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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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역사, 이러한 두 백성의 본래적이고도 우선적인 대립은 이 두 백성

이 그 자체로서, 즉‘선택된 자들’과‘버림받은 자들’로 대립하여 서 있

는 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26) 그러한 본래적이고도 일차적인 역사

는 오히려“바로‘그 선택된 분’과 바로‘그 버림받은 분’이 동일한 한

분 인격 안에서 대립해 서 있으면서도 서로 위해서 서 있는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바르트는‘선택받은 자들’과‘버림받

은 자들’사이에 있는 긴장과 갈등을 결정론적으로 정의내리는 대신에

그리스도중심적으로변증법적인 종합을 시도한다. 그리고 바로여기에

왜 바르트가 전통적인 이중예정론을 대폭 개정하여그리스도 중심적인

예정론으로 전환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해명된다. 즉, 만일‘선택’과‘유

기’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결정으로만 이해하게 될 때, 거기에서 인간은‘영원히 선택받은 자’와

‘영원히 버림받은 자’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 밖에 없게 된다. 아니, 바

르트에 의하면 사실은 모든인간 그 자체로 볼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버림받을 가능성’밖에 남지 않게 된다.27) 여기서 우리는 흔히 이루어

지고 있는 오해 한 가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흔히들 바르

트의 새롭게 해석된“예정론”에 따르면 버림받은 분은 오직 예수 그리

스도 한 분 뿐이고, 인간은 모두 그 대신에 선택되었다는 측면만을 강

조함으로써 바르트는‘만인구원론자’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데, 위

의 바르트의 글에서 보듯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르트의‘선택론’에

서 예수그리스도는 단지버림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분이기

도 한다. 예수그리스도는 단 한분선택받은 분이신 동시에 단 한분버

림받은 분이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선적으로 선택받은 분이시며,

그렇게 선택받은 분이 되심에 근거하여 버림받은 분이 되신다.“그(예

수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분이시듯이 마찬가지로 버림받은 분이시며,

개인의 선택을 다루면서(§35) 또 다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답을 제

시한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바르트는 개

인의 선택을 다루기에 앞서 공동체의 선택을 먼저 다룬다는 사실이다.

바르트의 예정론 이해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이에 일치하여 그의 선택론에서도 공동체의 선택이 개인의 선

택보다 우선시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나중에 화해론을 다룰 때 바르트가 성령의 사역의 장으로서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 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22) 아무튼

바르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한 분“선택받은 분”이신 동시에

단 한 분“버림받은 분”이시다.23)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

도가‘단 한분 선택 받으신 분’인 동시에‘단 한분 버림 받은 분’으로

규정됨으로써 우리 인간의 예정에 관한 내용의 폭이 좁아지는 것이아

니라, 오히려 훨씬 넓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그리스도가‘단한 분

선택받으신 분인 동시에 단 한 분 버림받으시는 분’이 되심으로써 우

리 인간이 직접 선택받을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선택’과‘버림받음’의 대립이 상대화된다. 우리 인간의‘선택’과‘버림

받음’이 상대화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심판과 버림에 관한 모든 가능

성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될”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게 된다. 따라서 바

르트에 따르면“물론 성서에는 실재로…부름받은 자들과 부름받지 못

한 자들, 신앙인들과 불신자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과 추측컨대 버림

받은 자들, 하나님의 백성과‘인류’라는 세상 백성”24) 사이의 구분이 있

다.“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크건 작건 실제로 이 두 노

선으로 진행된다: 즉, 항상 새롭게 이 두 백성이 분류되고, 분리되었다

가 만나는 역사이다.”25) 그런데 바르트에 따르면“본래적이고도 우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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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참고. KD, I V/1-3, 각권의성령론에해당하는 부분.

23) KD, I I/2, 389.

24) KD, I I/2, 386.

25) KD, I I/2, 387.

26) 앞의책.

27) KD, I I/2,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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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 나가신다. 다시 말해서“각 개인의 선택과 각 개인의 부르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선택된 소수의 닫힌 공동체와 그의 교회가 세상

을 향해 개방되며 확장된다.”32) 이를 세상의 입장에서 보자면“기만이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세계 속으로의 침입이며, 그러한 어둠의 세계의

불신의 자기영광을 제한시키고 후퇴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선택받

은 각 개인의 실존은”바르트에 의하면“은혜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

를 위한은폐되어 있으면서도 그러나 실재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확장

이다.33) 그러나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과 또 그

것이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목표를 지니는지에관

해 결정하는것은선택된 자들의 몫이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다. 따라서“(소위 말하는 만유화해론에 따라서) 하나님이 결국은 최종

적으로 인간의 세계 그 자체를(구원에) 포함시켜야만 할 것이고 또 그

렇게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하나님의 은총의 자유를 존중한다

면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이다.”34) 우리는 바로 이 문장에서“바르트는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저 앞의 명제의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이그렇게 해야 할 의무와 당위

성은없다.“마치 은혜의 하나님이 그 어떤사람도, 단 하사람 만이라도

당연히 선택하고 불러야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전체 세계도 마찬가지

다.”35)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가 막연한 종교일반론적인 의미에서의‘만

인구원론’혹은‘만유화해론’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다.“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인 역사를 유추할 것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증거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36) 이런 방식으로 바르트는

그리고 선택받은 분이되심으로써버림받은 분이시다. 그의 선택에서 볼

때, 그 외에는 버림받은 사람이 없다. 바로 이러한 모든 버림받은 자들

의 선택 때문에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들 모두에 대하여 외롭게 마주서

계신다: 바로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버림받은 분이시고…바로 그

럼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의 유일한 대상이 된다. 이

렇게 해서예수 그리스도는‘선택받은 자들’과‘버림받은 자들’의 주요

머리이시며 또한 그들의 증거의 대상이 된다.”28) 따라서 선택받은 자들

과 버림받은 자들이 누구이며 또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상으로부터만파악될 수 있다.29)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인간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그(정

관사의 의미에서) 선택받은 개인”이며,“그 버림받은 개인”이시다.30) 이

러한 전체 맥락에서 우리는 바르트의‘선택론’에 나타나는‘만유화해론

적인 특징’은 앞서 말했듯이‘현실’이 아니라‘효력’이라는 의미에서

“바르트는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나님

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리시는‘선택’과‘유기’는 일차적으로 우리 인

간의‘현실’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효력’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효력’은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참여’를 통해서만비로소 우리의‘현실’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효력’으로서의 선택은

세상으로 확대되어야 할‘현실’로 이해한다. 이를 위해 바르트는‘선택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일이나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일 뿐이며,

다만 우리에게는 그 선택에 대해“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31)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실 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며 또 선택받은 자가

해야 할‘증거’의 섬김 가운데하나님 자신의 화해사역을 계속진행시

1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83

28) 앞의책.

29) KD, I I/2, 387.

30) KD, I I/2, 387f.

31) KD, I I/2, 461.

32) 앞의책.

33) 앞의책.

34) KD, I I/2, 462.

35) 앞의책.

36) 앞의책.

Page 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해론은 선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가? 그럴 개연성이 있지만 사실은 그

렇지않다는 것이바르트의지론이다. 만유화해론이선교를 약화시킨다

는 생각은 만유화해론의 본질을 절반만 이해한 탓이다. 만유화해론의

온전한 신학적 함의에 의하면 만유화해론은 선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킨다! 왜냐하면 만유화해론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세계를 화해시키는다는내용을 한편으로

담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화해하게 하는 직분”을 주시고

또“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기 때문이다(고후5:18-

19). 만유를 화해케 하신 하나님은 화해케 된 백성으로 하여금 화해하

는 직분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자신과 화해된 백성에게‘화해하

게 하는 직분’을 맡기시고‘화해하게하는 말씀을 부탁하신’것은 선교

사역의 가장 본질적인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만유화해론이 선교의 의

지를 약화시킨다는 편견은 만유화해론을 통전적으로이해할 때에 해소

될 수 있는오해라 본다.

(2) 희망의 언어로서만유화해론

바르트가‘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은 두 번째 관점에 따르면‘만

유화해론’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희망의 언어이다. 만유화해론은 구원

의 현실을 현상적으로 보여주는 술어가 아니라, 우선적으로‘희망의 서

술법’이다. 바르트는 자신의‘선택론’에서 로마서 1 1장을 주석하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Allmacht)하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돌보시고 인간을

대신하신 하나님의 그 구체적인 전능하심을 생각한다면, 이 구체적인

하나님의전능하심과마주서 있는구체적인“인간의 미래는 신앙적사

고이며, 바로구체적인희망의 사고”라고단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

적인희망의 사고 안에서는 인간이 과대평가 되지도 않으며, 또 동시에

하나님의‘선택’을 철저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선교적‘효력’으로 이

해하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현실’로 이해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만유화해론’을 이렇게 배격한 바르트는 이제 그것과는 정반대의 주장

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즉,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당연히 선택해야 할

의무가 없지만, 그렇다고“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신 무리들의 저 개

방과 확장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감히 말해서도 안 된다.”37)

바르트에게 있어서‘하나님의 은총의 선택’개념은 그리스도께서 선택

하신 무리들보다 더 크며, 나아가 그의 교회 개념보다 훨씬더 큰 개념

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은 이미 고정된‘현실’이 아니라, 지속적으

로 개방되고 확장되어야 할 그리스도 안에 있는‘효력’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으로 알지도 않으며, 그

의 교회의 선택으로도 알지않으며, 나아가 각 개인의 선택으로도알지

도 않으며, 오직 그의 자비의 선택으로 이해한다.”38) 왜냐하면 만일 우

리가“하나님의자비에 그 어떤제한을 가하거나경계를 넘어서는하나

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종결시킨다면”, 그 결과는 단지“역사의 형이상

학”을 만들어 내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39)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

서 바르트는 선택과 부르심의 역사를 철저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관

점에서 해석한다.“한 사람이 선택되고 부름 받는 곳에, 즉 옛사람으로

부터 한 사람의 새로운 사람이, 화해되지 못한세계에서 하나의 화해된

세계가 선택되고 부름 받는 곳에는, 또 그러한 은폐된 의미에서 하나님

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언제나 동시에 한 사람의 증거자, 즉 하

나님의 은총의 선택이라는 진리에 대한 증거자요 사자(使者)가 출현한

다.”40)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만유화해론’이 선교의 의지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막연한 우려를 불식시킬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만유화

1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85

37) 앞의책.

38) 앞의책.

39) 앞의책.

40) 앞의책.

Page 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시“나는 만유화해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만유를 화해케 하신 예수 그

리스도를 믿는것이다”라고했던 바르트의 주장을 상기시켜 준다. 이런

의미에서‘바르트는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바르트는 인간에게 낙천적인 희망을 두는 종교일반론적인 의미의

‘만유화해론’을 배격한 것이다. 비록 그러한 낙천적인 희망이‘전능하

시어서 무한한 잠재가능성을 지닌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 있다

고 할지라도사정은 다르지 않다. 바르트도 말하듯이 그렇게 종교 일반

론에 기대어 전개되는 낙천적인‘만유화해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진지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구체적인 근거를

상실하고만다.

(3) 그리스도중심적 관점에서이해된 만유화해론

마지막으로“바르트는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세 번째관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관점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르

트에게 있어서‘만유화해론’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면 가르칠 수도 있

고,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다면 가르쳐서는 안 될 사안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의미에서‘만유화해론’은 가르치지만,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은 의미에서의‘만유화해론’은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서는 바로 이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실재로 바르트는“예수 그리스

도 안에 선택된 자들의 열려 있는 다수를 고전적인 예정론의 지시에

따라 선택된 사람들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으로 남게

되는하나의 닫혀있는수(數)로 만드는 것을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

한다.43)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예수 그리스도 안에 실현되고 계시된

하나님의의지의 일관성”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

서 세상과 자기를 화해시키시고, 또 그 화해속에서 선택되고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유가 제한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바르트

가 왜 틸리케의표현대로‘만유화해론의경계선’에서계속움직이고있

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바르트는 인간의‘선택’이라는 신학적인 질문

앞에서 누구보다도 진지한 자세를 견지한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의‘선택’이라는 물음을 철저히“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끝까지 전능하신‘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관점을 견지하였음

을 알 수 있다. 어쨌든‘선택’은 인간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

이며, 따라서 인간의 편에서 보면‘선택’은 희망의 내용이며, 기도의 내

용일 뿐이다. 그러한 희망은“지금은 비록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지라도 미래에는 믿게 되리라”는 믿음이다.41) 바르트가‘만유화해론’을

선택론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희망의 사고’로 전개했다면, 바르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만유화해론’사상을 가르치지 않은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실재로 바울에 기대어 그러한 일반론적인 의미

에서‘만인구원론’혹은‘만유화해론’을 경계한다.“하나님의 본질의 무

한한 잠재력을 당연시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낙천적인

판단으로부터 소위 말하는‘만유화해(Apokatastasis)론’이라는 이름하

에 고백되는 만유와 만인의 구원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을 얻곤 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았고 또 그러한 주장을 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한편으로는 실재로 버림받은 사람들에 관해 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전능하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인간을 돌보셨고 또 인간을 위해 개입하셨던 그 하나님의 구체적인

전능하심에 관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계시되었고, 교회의 신앙의 기적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예

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관해

말하고 있다.”42) 바르트 자신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종교일반적인

의미에서 낙천적인‘만유화해론’을 바르트는 철저히 배격한다. 이는 다

1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87

41) KD, I I/2, 325.

42) 앞의책. 43) KD, I I/2, 467.

Page 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히려 다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받았고, 그를 통하여 세상안에서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저 선택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할수 있을 뿐이다.”47) 종합해 볼 때“만유화해론”

은 그리스도에 집중하여 해석할 때 신학적 함의를 지니게 되며, 그리스

도에 집중하지 않을 때 단순한 종교일반적인 형이상학에 불과하다. 따

라서 바르트는 철저히 기독론 중심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앞서 말한두

명제모두를 지양시킬 수 있었다. 즉, 철저히그리스도의 빛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열려있는 선택받은 자들의 수를 닫혀 있는수로 제한해서도

안 되고, 또 그렇다고 선택받은 수를 곧 모든 세계로 해석하는우를범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3) 만유화해론에대한바르트의긍정적 입장

우리는 지금까지 바르트의‘선택론’을 중심으로 바르트가 단순히 종

교일반론적인 의미에서‘만유화해론’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을 살펴보았다. 이제바르트가적극적인의미에서 만유화해론을가르쳤

다는 사실을 살펴볼 차례다. 그러나 지면상의 한계로 여기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르트의‘만유화해론’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역으로 생각하면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가르쳤다’는 긍정적인 입장이 해명될 수 있음

을 지적함으로써만족해야 하겠다. 즉, 앞서살펴본 순서대로우선바르

트는 하나님의‘선택’이 당장 결정된 실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무한한 가능성을지닌열려있는‘효력’이라는 점에서 만유화

해론을 가르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철저히 종말론적인‘희망

의 언어’라는점에서 바르트는 만유화해론을가르친다. 즉, 만유를 화해

케 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가운데 일어나는 종말론적인 희망의 언

어로서의‘만유화해론’을 가르친다. 셋째, 만약에 바르트가‘만유화해

론’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될 때이다.

자들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확장시키려는 하나님의 화해

의 의지에 역행된다고 보기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를 바르트는 다름아

닌 바로 그리스도에 집중하여 찾는다.“우리가(선택받은 자들의) 수를

닫혀져 있는 수로 제한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러한 제한의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

나님의 전능하신 자비의 현실이요 계시로서죽어 있는분이 아니라, 살

아 계시며(Er lebt!) 영원히 다스리시기 때문이다.”44) 부활하신 그리스

도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에 근거할 때, 우

리는 선택받은 사람의 수를결정론적으로확정하거나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바로똑같은 이유로 인해그 역의주장 즉, 하나

님이 선택하시는 수가 곧 전 세계여야 한다는 주장도 불가능해진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선택받은 자들의) 수를 곧 인간

전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45) 오히려 바르트에 의하면 요한복음3

장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러한 선택의 사건이 해당된다. 즉,“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

의 선택에 대한 약속을 인식하고, 붙잡고 받아들이는”사람들에게 해당

된다.“그러나그를 믿는 사람들이 곧 모든 사람은 아니다. 믿는사람들

이 곧 있는그대로의 사람들 혹은인간 전체는 아니며, 오히려 항상 이

전체로부터 구별되어진 사람들이다.”46) 이를 보더라도 그저 막연하게

‘바르트에게 있어 버림받은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고

그 대신에 모든 사람은 선택받았다’는 의미에서라든지,‘바르트에게 있

어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곧 전세계인’이라는 의미에서 만유화해론은

바르트에게 전혀해당 사항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바르트의 말

을 직접 들어보자.“신약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세계가 선택받았다고 말

하지 않는다. 우리도 강제적으로 하지 않고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오

1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89

44) 앞의책.

45) KD, I I/2, 468.

46) 위의책. 47) 앞의 책.

Page 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는 것에 대한“금지”를 의미하는 동시에, 화해를 철저히 일어난 사건

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일 것에 대한“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다.49) 화해

의 사건이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인 만큼, 그 사건은 바

르트에 따르자면 하나의“역사”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역사는“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인데, 이 역사야 말로“인간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가

장 특별한 역사”인 동시에“하나님과 함께하는 인간의 가장 특별한 역

사”이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만이“모든 인간의 가장 근원

적인 역사이며, 인간 실존의 가장 최초인 동시에 가장 내적인 역사”이

다.50)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는 본질적으로“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의 역사”이다.51) 하나님의 화해를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규정짓기 때문에, 그 화해의 사건역시 객관적인 사건으로 규정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외에 다른 것에 근거한 화해는 철저히‘금지’된다. 그리고 순서적으로

거꾸로 되었지만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해의 사건이 절대적인

하나님의주권적 행동으로이해되기 때문에, 바르트에게 있어서 화해의

사건은 하나님의 일관적인 구원의 의지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따라

서 바르트는 화해의 사건과 계약사건의 상관관계를 철저히 강조한다.

바르트의 화해론의 핵심적인 정의에 따르면“화해는…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성취이다.”52) 화해는 계약의 성취이고, 계약은 화해의 전

제가된다. 계약없는화해는 근거없는 공허한 것에 불과하며, 화해없

는 계약은 실효성 없는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화해는 파기된 계약의 회복이며, 계약은 화해를 통한 회복을 기다리는

희망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해는 이 계약의 전제조건 아래에

서 또 이 계약의 틀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계약의 성취

“지금도 살아 계셔서 다스리시는”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발견

되는 가능성에 대하여 열려 있을 때 바르트는‘만유화해론’을 가르칠

수 있었다.

3. 바르트의화해론(KD I V/1-3)에 나타난만유화해론적특성

이상으로 바르트의‘선택론’에 나타나는‘만유화해론’의 신학적 함

의를 살펴 보았고, 이제 바르트의 화해론에 나타나는‘만유화해론’의

신학적 함의를 살펴볼 차례다. 바르트가 그의 화해론에서‘만유화해론

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은 특히 그가 주장한“객관적 화해

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에 따르면 우리가 하

나님과 화해된 것은 우리가 믿는 그 순간이 아니라, 이미2천년 전 예

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객관적 화해의 사건에는 우리 인간의 믿음이 아무런 영향

을 미치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의십자가 사건에서 이미하나님은 세

상을 이미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 객관적 화해론은 하나

님과 세상 사이의 화해의 사건을 인간의 주관적인 신앙에 그 근거를

두지 않고, 철저히 예수그리스도 안에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를

세웠다는 점에서 사실 신학적으로 의의가 있을뿐만 아니라, 큰 장점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이루어진 화해의 사건을 인

간의 주관적인 믿음위에 근거지울 때 본회퍼의 지적처럼 예수 그리스

도의 값진 피로 얻게 된 은혜가“값싼 은혜(Billige Gnade)”로 전락할

위험을 피할길이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

에 이루어진 화해의 사건을 철저히“하나님의 주권적 행동(Göttlicher

Souveränitasakt)”으로 규정한다.48)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이 의

미하는 바는 우리로 하여금 화해의 사건을 다른 근거에 의지하여 해석

1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91

48) KD, I V/1, 85.

49) 앞의책.

50) KD, I V/1, 171.

51) KD, I V/1, 172.

52) KD, I V/1, 71.

Page 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바르트에 따르면 이 특별한 존재는“전체 세계

가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으로 인해 빚지고 있는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그렇지 않은다른사람들과대립해 있을 뿐이다.57) 이 특별

한 존재는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존재에

게 주셨던 긍정적인 의미에 대한 약속의 징표이다. 따라서 이 특별한

존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의 증거자이다. 이 특별한

존재에게“사실적으로(de facto) 일어난 것은 모든사람에게객관적으로

(de facto) 일어난 것이다.”58) 이런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전 인류와 온 세상에 대해일어난“객관적인 화해”는 이제성령의 사역

으로믿음의 주관적인화해사건으로받아들여지고, 인식되고, 고백된다.

종합해 볼 때 바르트의 화해론에서 객관적 화해론은‘만인 구원론’

의 오해를 살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를 대상으로 일어난 화해사건만 언급하고있는것이아니라, 그

객관적 화해사건이 주관적 화해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성령의 사역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기때문이다. 다만바르트에게있어서 이 순서는 뒤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 화해사건이 주관적 화해사건보다 반드시

선행해야한다.

I V. 결론

칼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

해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에 대해 취하는 부정적 관점과 긍정적 관점이

변증법적으로 긴장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바르트의‘선택론’과‘화해론’에서 만유화해론

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되는 부분을 되도록 바르트의 원문에

는 앞서 말했듯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 안에서 일어난

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믿음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라는구체적인 역

사 속에서 화해의 사건이 객관적으로 일어났다는 객관적 화해론은 충

분한 신학적 설득력을 지닐 뿐만 아니라, 신앙이 인간의 신앙행위 그

자체로 이해될 때에는‘행위로서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인 신앙이해와도 일치한다. 더구나

바르트는 객관적 화해론만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바르트에게 있어서

화해사건의 두 측면인 칭의와 성화는“원칙적으로(de iure) 세계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난 변화의 사건이자 새로운 규정의 사건(칭의의 측면)이

자 하나님께로 귀의(Umkehrung)의 사건(성화의 측면)”이다.53) 따라서

‘원칙적으로’(de iure)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관적인 신앙 이전에 이

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세계와 모든 인간과 화해시키셨다. 그

러나바르트에따르면 이렇게‘원칙적’으로혹은객관적으로 일어난 화

해의 사건은‘실재적으로’(de facto)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

다.54) 칭의와 성화가 주관적인 사건으로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성

령에 의해“믿음으로일깨워진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고, 인식되고 고백

될 때이다.”55) 다만 이 믿음의 백성에 속하게 되는 사람들의 범위는 하

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이 백성에로의 초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다. 바르트에 따르면“물론 이 백성은 인류 그 자체와 동일시되지 않는

다. 물론 그 백성은 특별한 백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사람들 가운

데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서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마주 서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56)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과 주

관적 화해론의 변증법적인 긴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간다. 즉, 하나님의백성의 이러한“특별한존재그

1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93

53) KD, I V/2, 578.

54) 앞의책.

55) 앞의책.

56) 앞의책.

57) KD, I V/2, 578.

58) 앞의책.

Page 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주제어

바르트, 만유화해론, 예정론, 화해론, 구원론

Barth, Allversöhnungslehre, Erwählungslehre, Versöhnung, Er-

lösungslehre

접 수 일 2011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1년 8월 5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충실하게 분석해 보았다. 이 연구를 통해 그동안 쌓여왔던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적 성격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해명되기를 기대하고 목표

로 삼았다. 기대한 목표가 달성되었는지는 열어놓고 생각할 문제라고

본다. 다만 바르트의 신학을 너무 한 쪽의 편견으로만 보지 않는데 조

그만도움이 되었으면만족한다.

본 논고를 최종적으로 결론 맺으면서 내린 필자의 결론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바르트는‘만유화해론’을 가

르치기도 하고, 가르치지 않기도 했다. 둘째,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적인

성격은 그의 선택론과 화해론이 철저히 기독론 중심적으로 진행됨으로

써 발생한 것이다. 바르트 자신의 말대로 바르트는“만유화해론을 믿은

것이 아니라, 만유를 화해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다. 따라

서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오해

는 풀리고, 이해는 더욱 분명히 될 것이다. 셋째, 바르트의‘만유화해론’

적인 성격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이중예정론”을 둘러싼 논란과“만

인구원론”의 문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진지한 신학적 시

도였다는 점에서 신학적 기여도를 인정할 수 있을것이다. 바르트의 이

런 신학적 시도에 힘입어 브룬너와, 틸리히, 몰트만에 이르기까지 만유

화해론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의 시도들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감

안하면 그 기여를 절하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만유화해론은

그간 인간중심적인 구원이해를 우주적, 생태학적, 보편역사적 차원으로

확대하기에단순한 종말론적이중심판보다는유리하다는장점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 객관적인 구원이해는 인간의

주관적 믿음에 기초한 구원이해에 좋은 보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

히 구원 사건이 사적 사건으로만 이해됨으로써 교회 신앙의 대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 현장의 실

천을위해서도좋은신학적 동기를 제공하리라여겨진다.

1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박성규, 칼 바르트의만유화해론의신학적함의 195

Page 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ologischer Sinngehalt der AllversoehnungKarl Barts

Park, Seoung-Gyu

Full-Time Instructor

Presbyterian College &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In der vorliegenden Abhandlung handelt es sich darum, die Missvers-

tändnisse der Allversöhnung Karl Barths zu beseitigen und ihre rechten

Verständnisse zu verstärken. Dieser Aufsatz geht von der Situation aus, dass

die Allversöhnung Barths ohne genaue Untersuchungen vorgeworfen ist, und

zwar sowohl in der westlichen Welt als auch im theologischen Feld in Korea.

Deshalf soll hier zunächst darauf hingewiesen werden, dass Barth niemals

selber die Allvesöhnungslehre wörtlich behauptet hat. Und auch das, dass es

nicht allein Barth ist, der die Allversöhnung gelehrt hat. Der Gesichtspunkt

soll auch klar gemacht werden, dass Barth in seiner Erwählungslehre und

Versöhnungslehre gegen die Allversöhnungslehre eine dialektische

Stellungnahme abgibt, und zwar je nach der Einsicht von der Wirkung, der

Hoffnung und der christozentrischen Interpretation. In diesem Zusam-

menhang ist es zu sagen, dass Barth die Allversöhnunglehre “nicht lehrt und

auch nicht nicht lehrt”. Vor allen Dingen soll man and die christozentrische

Interpretation Barths im Hinblick auf die Alleversöhnung festhalten, wenn er

keine Misverständnisse aufkommen lassen will. Wenn die Allversöhnung

sich auf Christus zentriert verseht, ist sie schon verstehbar und annehmbar.

Aber wenn sie sich nur im Sinne der allegemienen Religiösität versteht, ist

sie niccht akzeptabel, weil Jesus Christus allein “der erwählende Gott und der

참고문헌

Barth, Karl. Kirchliche Dogmatik. II/2. Zürich: TVZ,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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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통한

모던정통주의“예수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석종준

(목원대/침신대, 강사)

I. 서론

이 논문은 정통주의(orthodoxy) 입장에서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의 내러티브(Narrative) 이론을 포스트모던 지평 위의“예

수 해석학”에 적용할 때, 모던 정통주의 신학담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어떤 인식론적 함의가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모던“기초주의”(foundationalism) 인식론의 한계를 문제 삼는

방법론적 대안들은 적지 않다.1) 대표적으로 데리다(Jacques Derrida)의

erwählte Mensch” sei. Somit kann manche kritische Urteilungen gegnüber

die Erwählungslehre als die Allversöhnungslehre beseitigt werden. Er hat,

wie er selber gesagt hat, nicht an die Allversöhnungslehre, sondern an Jesus

Christus geglaubt, in dem Gott sich mit der Welt versöhnt hat.

Und nun in Hinblick auf die Versöhnungslehre Barths soll ein Missver-

ständnis beseitigt werden, dass Barth aufgrund seiner objektiver Versö-

hnungslehre die Allversöhnung gelehrt hat. Zunächst soll es klar gemacht

werden, dass Barth nicht nur die objektive Versöhnung gelehrt hat, wie die

Kritiker wie immer auch gedachat haben. Nach der Ansicht Barths ist die

Versöhnung Gottes mit den Menschen de iure der Welt samt der allen

Menschen geschehen, aber de facto nicht allen Menschen. Gerade in diesem

Pointe besteht die Möglichkeit der subjekten Verwirklichung der Ver-

söhnung, und zwar kraft der Wirkung des Heiligen Geistes. Von daher kann

jenes grosses Missverständnis auch beseitigt werden. Barth hat nicht nur die

objektive Versöhnungs, sondern auch die subjektive Versöhnung gelehrt.

In Konklusion kann hier behauptet werden, dass die Allversöhnung nur

dann eine hilfrieche Ergänzung zu dem doppelten eschatologischen Gericht

sein kann, wenn sie genau christozentrisch interpretiert wird. Wenn sie allein

chritozentrisch verstanden wird, kann die Konflikt zwischen beiden eschato-

logischen Gedanken überwunden werden. Außerdem ist die Allversö-

hnungsgedanken hilfreich für die kosmoligische Erweiterung der Erlösung-

lehre zur Umwelt und Universalgeschichte.

1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99-246

1) 이미 상식이 된 것처럼“기초주의”(foundationalism)란 모든 인식에는 가장 기초적인

인식이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지식의 근거가 제공된다는 입장의 사상이다.

가령 몇 가지기본 체계로부터 공리를 세운 유클리드 기하학, 모든 지식의 확증을 방

법적 회의를 거친 주체이성의 기초에서 찾으려는 데카르트(Descartes), 본질 직관을

통해 엄밀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을수립하려는 후설(E. Husserl) 등이다. 반면 주체이

성에의한어떤절대적 기초의상정도 거부하는것이“반기초주의”(nonfoundational-

ism or antifoundationalism)이다. John E. Thiel, Nonfoundationalism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4), 81-88 참조.

Page 1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주의”(evangelicalism) 진영에서 가장 충성스럽고 일관되게 사수되었다

고 가정한다.6)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논자가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주의

진영의 기독론적 교의의 핵심이 정통주의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대

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진영이

개진하는“예수 해석학”과 관련한 기독론적담론의 질서가 모던기초주

의 방법론의 인식론적 한계를 극복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7) 즉 논자는 이 시대의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 담론

해체사상을 신학적으로 수용한 해체주의 신학,2 ) 일체의 개종주의

(conversionism)를 거부하고, 오히려 제 종교 간의 상호 성장과 상호

변혁을 추구하고 있는 다원주의 신학,3) 특정한 담론의 질서에 의한 악

순환을 바로잡겠다는 민중신학, 남미해방신학, 여성신학, 생태계 신학

등의 각종해방신학의지류들이 그것이다.4) 이러한 신학의 방안들은 각

각의문제제기에대한해법을 제안하고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적 담론들은 니케아와 칼케돈 신조 이래 아우구

스티누스(Augustinus), 루터(Luther), 칼뱅(Calvin), 웨슬리(Wesley) 등

을 거쳐 이어져 온, 이른바 정통주의 기독론의 방향에 근본적인 손상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즉 논자는 정통주의 기독론 계승의

관건은“참하나님이시고참 인간이신예수그리스도는모든인간의 구

원자가 되시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전제적 교의에 기초

한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전제한다. 또한 논자는 이

러한 정통주의의 기독론적 정체성은 모던 시대가 개막된 이래,5)“복음

2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01

2)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사상을 신학에 차용한 대표 신학자는 마크 테일러

(Mark C. Taylor)와 존 카푸토(John D. Caputo)이다. Mark C. Taylor, Erring: A

Postmodernism A/Theology (Cambridg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John D. Caputo, The Prayers and Tears of Jacques Derrida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7).

3) 다원주의 신학(Pluralism Theology)의 시대적 당위성은 한스 큉(Hans Küng)의 다음

과 같은주장에서 잘 표명되었다:“그러므로나의 논제는이것이다: 종교들 사이에 평

화 없이는 세계평화는 없다. 종교들 사이에 대화없이는종교들 사이에 평화는 없다.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는 종교들 사이에 대화는 불가능하다.”Hans Küng,

“Christianity and World Religion: Dialogue with Islam”, Toward a Universal

Theology of Religion, ed. Leonard Swidler (Maryknoll: Orbis Books, 1987), 194.

4) 이러한 해방신학들은 각자의 이데올로기적당파성에 입각한 인식론적 기초를 전제하

고 있다는 측면에서기초주의적이지만수세기이상다듬어져 온 지배적신학“담론의

질서”에 대한 반대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기초주의적인 포스트모던 신학으로

볼 수 있다.

5) 낸시머피(Nancy Murphy)는“모던 시대”가 데카르트(Descartes)로부터시작되었다는

인식에광범위한동의가 있음을주지시킨다. Nancy Murphy, Anglo-American Post-

modernity: Philosophical Perspectives on Science, Religion, and Ethics (Boulder:

West view Press, 1997), 9.

6)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에 따르면“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역사를

떠나, 교파에 상관없이,“정통주의”(orthodoxy)의 다음 지배적 확신을 공유한다. 1) 구

원 방안으로서의“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유일성”(밑줄은 논자 강조), 2) 하나

님 계시로서의“성경에 대한 절대적 권위”, 3) 성령 역사로서의 모든“인간의 회심의

필요성”, 4) 교회 사명으로서의“선교의 우선성”. 알리스터 맥그라스/김선일 옮김.『복

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서울: IVP, 1996), 27; 알리스터 맥그라스/신상길·정성욱

옮김,『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서울: 장로교출판사, 1997), 55-95 참조; 또한 이

전제들의 수용은어느시대, 어느공동체(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등)의 일원이

든 그가 복음주의자라는 것을 확인시킨다. Millard J. Erickson, “Evangelicalism,”

Modern Christian Thought (Oxford: Blackwell Publishers, 1993), 183. 따라서 논자

는“복음주의”를 니케아와 칼케돈 이래 계승되어 온“정통주의”신학 담론의 핵심을

이어받은모던시대대표적정통주의진영으로간주한다. 즉 이 글에서는“복음주의”

와“모던정통주의”가 문맥적으로호환된다.

7) Reid → Princeton Theology → Fundamentalism

Descartes →Locke → Hume

Kant → Schleiermacher → Liberalism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찰

스 핫지(Charles Hodge)로 상징되는 복음주의(프린스톤) 신학이 모두 인간의 보편

이성의 합리성에 호소하는 경험또는 명제로 진리를 접근하는 모던 기초주의 인식론

의 희생양이었다는 낸시 머피, 스탠리 그랜츠(Stanley Grentz), 존 프랭크( J o h n

Franke) 등의 주장이다. Nancy Murphy, Beyond Liberalism and Fundamentalism:

How Modern and Postmodern Philosophy Set the Theological Agenda ( V a l l e y

Forge: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6), 5-35; Stanley Grentz and John Franke,

Page 10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0세기 중반 북미 복음주의자들은 신복음주의를 천명하였다. 근본주의

자들의 경직된 인식론적접근과 차별을 두고자 했기때문이다.9)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논자는 이 시대 복음주의자

들에게도 포스트모던 지평 위에서 정통주의의정체성을 견지한다는 것

은 모던 기초주의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각자가 물려받은 특정한 해석

학적 담론의 질서를 적확하게 지켜낸다는 의미와 다른 인식론적 접근

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정녕, 역사적으로 정통주의 기독론은 시대마다

제기된 도전들과 상대에 맞서며 오늘날의 축적된 담론의 성과물들을

보유하게되었다. 교부시대의예수의“신성-인성”문제, 중세의 속죄성

격의 문제, 종교개혁기의 속죄 범위와 성만찬 논쟁, 모던 시대의 성서

예수의 역사성(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문제등등. 오늘날은어

떠한가?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제기되는 정통주의 기독론의 최대

과제는 아마도 종교다원상황과 가치상대주의의 도전 속에서 제기되는

예수그리스도의절대성을정당화하는 문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 복음주의자들에게정통주의 신학담론의정체성

은 정통 기독론의 핵심 교의의 사수와 절대적 상관성을 갖는다. 이것은

복음주의 진영의 일원인 논자에게 역시 분명하고도 타협할 수 없는 사

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적 핵심 교의들을 사수하는 것은 수십

년 전, 수백 년 전 특정 시대의 지평 위에서 야기된 도전들과 조우하면

서 형성된 특정 해석학적 주체들의 입장을 반복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정체성은 과거의 것을 영속적으로 지켜내는

측면 뿐 아니라 만들어져가는 측면도 함께 있기때문이다.10) 포스트모던

의 질서가 인식론적 측면에서 모던 이전과 이후의 모든 시대를 관류하

는 큰 맥락에서의 정통주의 기독론의 유일한 대변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포스트모던이라는 인식론적 새 지평 위에서 도전된 과제

들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인 대안을 모색해왔는지에 대해 다소 회의적

이다. 그 중 하나는 정통주의의 정체성을 견지한 입장에서의 예수해석

학에대한인식론적영토회복의 문제이다.

논자는 우선 복음주의 진영에게 정통주의의 정체성을 견지한다는

것과 어느시대, 어느상황에서나 같은해석학적 담론의 질서를 고집한

다는 것의의미를 구별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하고자한다. 가

령 17세기정통주의자들은성서의“기계적 축자 영감설”교리에 기초한

기독론을 강조했다.8) 절대적 주체 이성의 합리성으로 무장한 이신론자

와 자연주의자들에맞서야 했고, 역사비평이본격화되기 전이었기때문

이다. 20세기 초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었다. 고등비평, 역사비평이 본격화된 이후에도1 7세기 복음주의와

동일한 원리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신정통주

의를 탄생시켰다. 복음주의의 핵심교리에 기초하면서도고등비평의 인

식론적 성과들을 비판적으로고려하는 대안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또한

2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03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29-35 참조,

8)“축자적 영감”,“기계적 영감”이라는표현은 칼뱅사후100년 이상이 지나서야등장하

였다. 이 교리는1675년 발표된 스위스 교회일치신조(Formula consensus ecclesiaru

helveticarum)에서 최초 등장한다. 그러나 칼뱅이 이 교리를 인정했겠느냐에 대해서

는 많은논란이 있어왔다. 왜냐하면 칼뱅의 성서주석에는 많은부분들을 교정하고 있

기 때문이다. 가령창세기1장의“하늘의물과 땅 아래의 물”에서하늘의 물은존재하

지 않기에“구름”이나“수증기”라 했고, 바다를 잔잔케 한 예수의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을“제자들”이라고 기록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것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

면서“그리스도를알지 못하는사람들”로 다르게 해석한다. 즉 칼뱅은고린도전서2장

9절 주석에서 바울이 이사야서의 오용했다고 주장했듯이, 많은 구약 본문에 대한 신

약기자들의 잘못된 사용을 지나치지 않고 있음을 그의 많은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이오갑, 『칼뱅의 신과세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132-41 참조.

9) 신복음주의는2차 대전 이후에 헤롤드 옥켕가(Harold John Ockenga), 칼 헨리(Carl

F. Henry),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중심으로 태동되었는데, 이들은 근본주의

와의 차별성을 주장하였다. Ronald H. Nash. The New Evangelicalism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1963). 21-32.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차이에 대한 명료한

정리로는, 존 스토트/김현회 옮김,『복음주의의기본진리』(서울: IVP, 2002), 27-30을

참조하라.

10) Paul Ricoeur, Soi-même comme Autre (Paris: Seuil, 1990), 140-8 참조. 이하는

Page 1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트와 내러티브”,“역사와 내러티브”,“정체성과 내러티브”라는 세 층위

의 주제를 가지고 예수 해석과 관련해서 적용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함께 공유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던정통주의 기독론

의 인식론적영토확장이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I I. 텍스트와내러티브

리쾨르의 텍스트 이론의 방향은 한마디로“철학적 인류학”(philo-

sophical anthropology)이다.14) 인간은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번

거롭기는하지만 언제나 상징, 은유, 내러티브 같은담화의 매개를 우회

하는 길 위에서 드러난다고 확신한다.15) 그리고 그 언어적 매개에 대한

시대에는 이른바“포스트모던정통주의”가 요청된다는것이다.11)

논자는 리쾨르의 내러티브 해석학과 정체성 이론이 가치 상대주의

와 종교다원주의로 도전받는 오늘날의 보수적 정통주의, 즉 복음주의

진영에 제공하는 통찰이 적지 않다고 본다. 논자는 복음주의 진영의 일

원으로서 이 글을 통하여 복음주의 진영이 스스로가 지향하는 정통주

의의 영속적 정체성의 핵심을 견지하면서도시대가 요청하는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조우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해석학적 통찰을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논문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품고 갈

화두는“내러티브”(Narrative)12)와“그는 누구인가?”(Who is he?)“그는

어떤 사람인가?”(What is he like?)라는 물음이다.13) 내용 전개는“텍스

2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05

Soi-même로 표기함. 리쾨르는1) 영속적으로 지켜내는 측면으로서의“자체 정체성”

(identité-idem)과 2) 만들어져 가는측면으로서의“자기 정체성”(identité-ipse)을 구

분하였다. 그리고 이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 정체성 문제에 대한 해법들의 필연적

실패요인이었음을강조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의 자체-정체성의측면은 삼위일체,

예수의 구속의 유일성, 정서의 절대적 권위 등의 영구적 교리이고, 자기정체성의 측

면은 각 시대마다 제기되는 도전들에 대응하며 형성된 신학적 담론들이라 할 수 있

을 것이다.

11) 모던 정통주의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면서 포스트모던 지평에서 모던 기초주의 극복

을 모색한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 신학자들로는 알리스터 맥그라스( A l i s t e r

McGtrath, 성공회). 스탠리 그랜츠(Stenley Grenz, 침례교), 케빈 반후저( K e v i n

Vanhoozer, 장로교), 레오나드스위트(Leonard Sweet, 감리교) 등을들 수 있다.

12) “Narrative”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일차적 혼란은Narrative와 Story,

또는 프랑스어에서는Récit(narrative)와 Histoire(story)가 일상 용법에서 호환된다

는 것이다. 한국 성서학계는Narrative를“서사”(敍事)로 번역해서 쓰고 있다.“이야

기”로 번역할 때 story와의 혼란을 줄이려는 의도인 듯하다. 1920년대 러시아 형식

주의자들은Narrative를 Story(fabula)의 측면과 플롯(Plot, sjuzet)의 측면으로 구분

하였다. story는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Narrative 재료로서의-사건으로, 플롯은 사건들이 조직되게 하는 체계언어 수행으

로 구분했다. 레이만 셀던/김욱동 옮김,『현대문학이론』(서울: 문학과지성사, 1989),

27. 즉 story는 Narrative의 구성요소로서 더 작은 범주이다. 따라서 논자는story를

“이야기”로, Narrative는 그대로“내러티브”로 표기한다.

13) 한스프라이(Hans Frei)는 예수의 정체성을묻는질문에 반드시이 두 가지가필요

하다고 주장한다. Hans Frei, The Identity of Jesus Chris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91; Hans Frei, Theology and Narrative (New York: Oxford Univer-

sity Press, 1993), 64-70.

14) Paul Ricoeur, Figuring The Sacred: Religion, Narrative, and Imagination (Min-

neapolis: Fortress Press, 1995), 10. 이하는 Figuring로 약칭한다. 이 과업의 여정은

어떠한 방향으로든 직접적인 정립이 불가능하다는 반(反) 데카르트(Descartes) 입장

이 전제되어 있다. Paul Ricoeur, Le Conflit des interpretation (Paris: Seuil, 1969),

21. 이하는 Conflit로 표기함. 흥미롭게도 켈시(David Kelsey)는 리쾨르 뿐 아니라

프라이 역시 성서 내러티브를 인류학과 연계시켜서 접근하고 있음을 규명하고자 하

였다. David Kelsey, “Biblical Narrative and Theological Anthropology,” S c r i p-

tural Authority and Narrative Interpretation, ed. Garrett Green (Philadelphia: For-

tress Press, 1987), 121-43.

15) Paul Ricoeur, Du texte à l’action (Paris: Seuil, 1986), 29. 이하는Texte로 약칭함.

리쾨르의 이러한 인식은성서 해석학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Richard Kearney, ed.

“Myth as the Bearer of Possible Worlds,” Dialogues with Contemporary Con-

tinental Thinkers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4), 27. Kevin J.

Vanhoozer, Biblical Narrative in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 C a m b r i d g 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7, 167. “우리는 간접으로 가는 길, 즉 우회로

(detour)를 제안하고자 한다”(Cette étude veut proposer une voie d’accès indirecte,

un detour). Conflit, 33.

Page 10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미는 문자적 의미의 매개를 통해서만 파악되고 지시적 의미는 해석자

의 읽기를 통해서 완성된다.18) 문제는 지시적 의미의 가변성과 그에 의

한 텍스트 의미의 자율성이다. 즉 텍스트의 의미는 사건과 말의텍스트

화로 말미암는“소격화”(distanciation)가 각 시대, 각 상황의 해석 주체

들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극복되는“전유”(appropriation) 과정을 통해

획득되기때문이다.19)

복음서에는“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 있다. 여기서 문자적 의미

는 문장 자체 속에서 관계하고 있는 예수와 베드로의 기호학적 측면의

의미를 말한다. 반면 지시적 의미는 이 문장 자체가 역사적 실재로서의

나사렛 예수와 갈릴리 출신 제자 베드로라는 세계, 또는 나사렛 예수와

이천년 후 성서 독자인‘나’의 세계와 관계되는 담화의 사건적 측면의

의미이다. 복음서의 예수 역시 문자적 의미가 있고 지시적 의미가 있으

며 후자는 전자의 매개를 통해서만 파악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점을

유념하지 않는 복음주의 진영의“예수 해석학”주체자들은 지시적 의미

의 다양성 수용을 정체성의포기나희생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

2. 은유와내러티브의수렴점

일찍이 은유는 고대 수사학에서 단어의 의미를 단순히 확장하거나

대체하는차원으로분류되었다.20)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와

해석학적 접근역시 구조주의, 현상학적의미론, 의심의 해석학 등의긴

우회로를통해서 다가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예수 사건은 이천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현실적 격차

를 안고고정된 담화로서복음서에 보존되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내러

티브로 기록되었을까? 하나가 아닌4개의 복음서로 주어졌을까? 칼 바

르트(Karl Barth)의 주장대로 예수는 그 자체가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

인데, 왜 그 진리의 사건은 현장에서 바로 사관(史官)을 통해 기록되지

않았을까? 부활이후수십년이지나서야 텍스트로고정되었을까? 어째

서 복음서 텍스트의예수 사건은 수천 년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오늘까

지 계속 열려져 있는 해석학적과제로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물음에 대한 진전된 해소가 리쾨르의 텍스트와 내러티브라는 주제의

전개를 통해서 가능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용 전개는1. 텍스트의

의미, 2. 은유와 내러티브의 수렴점, 3. 시간과 내러티브, 4. 미메시스의

해석학적순환에 대한통찰의 순서가 될 것이다.

1. 텍스트의의미

리쾨르에게“텍스트는글에의해서 고정된 모든담화이다.”16) 고정된

담화인 복음서 텍스트의 의미(meaning)는 반드시 두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문자적 의미(sense)로서 텍스트 자체에 순수하게 내재된 문자

적 관념의 측면이다. 또 하나는 지시적 의미(reference)로서 문자적 의

미가 실재에 미치는 의도, 진리 가치의 측면이다. 전자는“무엇”(what)

의 측면이고, 후자는“무엇에 관한”(about what) 측면이다.17) 지시적 의

2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07

16) Texte. 138. “le texte est un discours fixe par l’ecriture.”

1 7 ) Texte. 113; Paul Ricoeur, Interpretation Theory (Forth Worth: The Texas

Christian University Press, 1976), 13-16. 이하는 Interpretation로 약칭함; 본래 의

미(meaning)를 문자적 의미(sense, Sinn)와 지시적 의미(reference, Bedeutung)로

처음 분리하여 설명함으로써20세기 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독일의 철학

자이자 수학자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였다. 여기서“문자적의미”(Sinn)

는 문장 내에서의 언어 자체적 측면을,“지시적 의미”(Bedeutung)는“문자적 의미”

가 지시하고 있는 사물과의 관계적 측면을 지칭한다. Gottlob Frege, “On Sense and

Reference,” trans. Max Black, Translation from Philosophical Writings of Gottlob

Frege, eds. Peter Geach and Max Black (Oxford: Basil Blackwell, 1970), 56-78.

18) Texte. 141.

1 9 ) Interpretation, 4 3-4; Paul Ricoeur, Hermeneutics & the Human Science ( C a 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139-44. 이하는Hermeneutics로 표기.

20) Paul Ricoeur, La Métaphore Vive (Paris: Seuil, 1976), 7. 이하는Métaphore로 표기.

Page 1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요 1:1)…이와 같은 은유들은 단순한 비유가 결코 아니다. 예수가 누

구인지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과 인지적 능력을 제공하

고 있다.24)

이와 유사한 현상이 내러티브의 줄거리에서 나타난다. 잘 알려진 바

와 같이 리쾨르에 따르면 줄거리는 산재된 여러 상황들 서로 다른 계

획들과 동기들, 상호작용과 우연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종합하는, 즉

“이질적인 것의 종합”(synthèse de l’hétérogène)이다.25) 여기서 나타나

는 줄거리 구성 주체자의 인위적인 배열을 통한 새로운 적합성이 은유

의 술어적 기능을 통한 의미 혁신 현상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은유와 내러티브가 직접적인 묘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실

재의 어떤 측면을 재현하는 은유적 진리(vérité métaphorique)를 담지

하는능력에 대한통찰로 안내한다.26)

은유적 진리는“…이다”(être) 동사의“이다”( e s t )와“아니다”( n ’ e s t

pas) 사이에 어딘가에 있는 어느 쪽이 다른 한쪽을 배제하지 않는“…

같은존재”(être-comme)로서의 변증법적 긴장 속의진리이다. 이는동

로크(John Locke, 1632-1704) 등의 근대 사상가들에게 은유는 진리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21) 그러나 리쾨르는 은유가

텍스트에서단순한 수사학적장식이나 대용 어법으로서가아니라, 실재

(진리)에 더 본질적으로 깊이 다가가는 인지적(cognitive) 능력을 지니

며, 이를 통해서 실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인식에 이르게 한다고 본

다.22) 또한 일차적으로 은유는 비유론 중 하나로서 장르들 중의 하나인

내러티브와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생산된 문자적 의미

(sens)의 효과들을 주목할 때“의미론적 혁신”(l’innovation sémanti-

que) 현상을 발생시키는 공유된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 주목된다.23) 은

유에서 의미론적 혁신의 현상은 통상적인 어법의 정합성을 깨뜨리는

부적합한 술어를 할당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론적 정합성을 만들어낼 때

발생한다.

다음의 은유를 생각해보자.“나는 길이요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이것(떡)은 나의 몸이다. 이 잔(포도주)은 나의 피다”(마 26:26-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니…”(요 15: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2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09

21) Dan R. Stiver, The Philosophy of Religious Language (Cambridge: The Blackwell

Publishers, 1996), 114.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서구사

상에서 맹위를 떨친 이러한 고대 수사학적 은유 이해가 리차즈(I. A. Richards,

1 8 9 3-1979), 블랙(Max Black, 1909-1988), 비즐리(Monroe Beardsley, 1915-

1985) 등의 영어권 학자들의 공헌에 의해 새롭게 탐구됨으로써 그 가치가 재평가

되는전기를 마련하게되었다고높이평가하며La Métaphore Vive 3장 전체를 할당

하여비판적으로수용하고있다. Métaphore, 8.

22) Métaphore, 57; Interpretation, 53. 정기철은 리쾨르의 은유론 의미를 다음 세 가지

로 정리한다. 1) 논리적 사유나 사유의 절대성보다 은유나 상징 또는 이야기 개념을

통해인간을 보다쉽게이해할 수 있다. 2) 은유개념이해석학 안에서만이아니라 다

른 여러 학문들에서도 그 정당성이 검증되었다. 3)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을

통해 존재를 밝힌다는 은유론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다. 정기철, 『상징, 은유그리고 이야기』(서울: 문예출판사, 2002). 117-8.

23) Paul Ricoeur, Temps et Récit I (Paris: du Seuil, 1983), 11. 이하는TER, I로 표기함;

Texte. 20-1.

24) 리차즈(I. A. Richards)는 The Philosophy of Rhetoric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36)에서“언어는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Language is vitally meta-

phorical)고 주장했다. 그리고 은유의 의미는 단어 자체만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

으며, 반드시 담론의 맥락(context) 안에 있는 단어들의 상호작용, 다시 말해서“남자

는 늑대다”라는 표현이 있다면, 여기서 남자의 약탈 본능, 탐욕스러움 등이 숨어 있

는 개념인“취지”(teneur; tenor)와 도구가 되는“수단”(véhicule; vehicle)으로서의

개념“늑대”의 상호 작용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Métaphore, 104-6; Max Black은

Models and Metaphors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62)에서어떤대상

(남자)을 문장 속에서 은유 대체하는 용어,“늑대”, 즉“초점”(focus) 언어와 나머지

“문장 전체”로 상정되는“틀”(frame)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그 의미를 드러낸다고

주장하였다. Métaphore, 111, 114; Monroe Beardsley는 A e s t h e t i c s (New York:

Harcourt, Brace and World, 1958)에서 용어에는“사전적 의미”와“비유적 의미”가

있으며, 후자에 포함되는 은유는 주체가 새롭게 부여한 속성을 통해 드러나는“살아

있는말”이라고보았다. Métaphore, 117-125를 참조하라.

25) TER I, 102-3.

26) Texte, 24; TER I, 13.

Page 1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은 결코실재에 대한인지성을포기하지않고작동될 수 있다.

3. 시간과내러티브

시간은 영원한 인식론적 아포리아이다. 그러나 리쾨르는『시간과 이

야기』(Temps et Récit, I )에서 대안을 제시한다.3 1 )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가 간파했듯이 물리적인 시간은 측정될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지않다. 과거는지나갔고미래는 아직다가오지않았으며, 현

재는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32) 그러나 인간은 분명 시간의 길고 짧음을

측정하고 논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정신의 이완”(d i s t e n t i o

animi)과“정신의 긴장”(intentio animi)을 통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33) 인간의 정신 속에 붙잡힌 시간은

어떻게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가?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

의 뮈토스와 미메시스 개념에 주목한다. 뮈토스는 줄거리짜기(mise en

intrigue), 즉 파편화되어 있는행동주체, 목적, 수단, 상호작용, 상황, 예

기치 않은결과 등에대한“이질적인것의 종합”(synthèse de l’hétéro-

gène)이라면,34) 미메시스는 지나간 시간 경험에서 양산된 주체행동에

대한 시적(poétique) 재구성을 통한 창조적 모방이다.35) 내러티브는 뮈

사“…이다”(est)를 절대화 시키는 문법적 혹은문자적 진리와 다르다.27)

은유는 어떤실재에 대한단순한 대체가 아니라“…이기도하면서 아니

기도 한”(cela etait et n’etait pas) 의미론적 혁신의 진리성을 창조하기

때문이다.28) 리쾨르는 이러한 은유의 실재에 대한 재기술 능력이 내러

티브의 미메시스, 즉 창조적인“행동의 모방 또는 재현”(l’imitation ou

la représentation de l’action)에 그대로 작용한다고본다.29)

가령 복음서의 어린 시절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시된다. 특히

누가복음의 처음두 장에서 예수는 개별자 예수가 아니다. 그는 단순한

개별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리자적 인물이다. 그래서 그들 둘러싼

모든 사건들은 그에게 집중되며, 이스라엘 역사의 미결된 과업의 실현

이자 정점으로 소개된다. 예수의 정체성은 마태복음에서아브라함과 야

곱과 유다와 다윗과 연계됨으로써 확증되고, 누가복음에서는인류의 조

상 아담과 연계되고, 아담 안에서 이스라엘과 인류와 하나님은 모두연

결된다. 이는예수를 둘째 아담으로 소개한 바울을 떠오르게하는부분

이다(롬 5:14, 19; 고전15:21-22).30) 은유와 내러티브의 은유적 진리성

2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11

27) Métaphore, 312-3.

28) Métaphore, 282. 스타이버(Stiver)는 리쾨르의상징, 은유, 내러티브로 이어지는비유

언어(figurative language)에 대한철학적 탐구가 신학자들을향한가장탁월한 기여

점이라고 평가한다.“리쾨르 자신의 학자로서의 여정은 그래서 그를 처음에는 상징,

그 다음은 은유, 그 다음은 내러티브를 다루게 된다. 이렇듯이 그는 이러한 비유언어

를 철학의 중심에 올려놓은 최초의 철학자 중의한 사람이다. 비유언어에 관한 이러

한 철학적 성찰은 따라서 신학자들에게 가장 명료한 자산 중의 하나이다.”Dan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New Directions in Hermeneutical Theology

(Lou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117.

29) TER I, 58

30) Frei, The Identity of Jesus Christ. 128-30. 우리는“내러티브신학”방법론에있어서

대조성을 지적받아온 리쾨르와 프라이의 복음서 예수 의미에 대한 해석의 은유적

적용에 주목한다. 플래처(William Placher)는 일찍이 양진영의 차이점은 실제보다

과장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차이를 강조하는 이러한 구분은 상당히 편의적이고 왜곡

의 소지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William Placher, “Paul Ricoeur and Postliberal

Theology: A Conflict of Interpretation?” Modern Theology, vol. 4, no. 1 (Spring

1987): 135-6.

31) TER, I, 21. “이 책의 일관된 주장은 시간에 관한 사색이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되

새김질로서, 오직 내러티브 활동만이 그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Ce sera une

thèse permanente de ce livre que la spéculation sur le temps est une rumination

inconclusive à laquelle seul réplique l’activité narrative).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

의『고백록』(Confessiones)의 11장을중심으로한 시간에 대한사유와 아리스토텔레

스의『시학』(Poetics)을 중심으로 한 미메시스(mimèsis), 뮈토스(muthos) 이론을 종

합하여내러티브가어떻게인간의 시간경험에 대한성공적인담지공간이 될 수 있

는가를검토한다.

32) TER I, 23-30.

33) TER I, 34-40.

34) TER I, 102-3.

Page 1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대를선택하였다. 그리고 가죽부대의 디자인과제작을 성서기자에게위

임했다.39)

4. 삼중의미메시스와해석학적순환

리쾨르는 시간적 경험이 내러티브로 구성되고 유통되는 데 있어서

“미메시스I(전형상화) -미메시스I I(형상화) -미메시스I I I(재형상화)”라

는 해석학적순환체계를 제시하였다.

“미메시스I”은 지나간 사건이 내러티브로 구성되기 전 일차 해석을

통하여 인식되고 간혹 파편적 이야기들이 유통되기도 하는 전형상화

(préfiguration) 단계를 말한다.40) 가령,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나사렛

예수사건의 다양한 에피소드와이야기(story)들이줄거리 구성을 거쳐

텍스트로서의복음서내러티브로구성되기이전의 단계이다.

“미메시스 I I”는 지나간 사건이 줄거리 구성으로서의 뮈토스와 창조

적 모방으로서의 미메시스 작용을 통해 한 전체의 단위의 내러티브로

구성되는 형상화(configuration)의 단계이다.41)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나사렛 예수 사건이 행동과 창조적 모방으로서의뮈토스와 미메시스의

작용을 통해 줄거리짜기 단계를 거쳐 텍스트로서의 복음서 내러티브로

재현되어있다.

“미메시스 I I I ”는 형상화된 텍스트로서의 내러티브가 독자와 만나는

지점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독자가 그 텍스트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재형상화(refiguration)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42) 이천년 전 팔레스타

토스와 미메시스의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 아니라 정신의 시간을 보존

하는 담지자이다. 따라서 리쾨르는 시간과 내러티브의 필연적 상관성으

로 이렇게 정의했다.“시간은 내러티브 양식으로엮임에 따라서 인간의

시간이 되며, 내러티브는 그것이 시간적 실존의 조건이 될 때 그 충만

한 의미에 이른다.”36)

바르트는 말씀의 양태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기록된 말씀인 성서,

선포된 말씀인 메시지, 계시된 말씀인 예수이다.37) 이제 여기에 한 가지

를 보탤 수 있다. 시간경험 담지자로서의 계시인“내러티브 양식”이다.

예수의 시간은 뮈토스와 미메시스에 의해 내러티브 양식에 보존되어

있다. 복음서마다 뮈토스와미메시스의 구체적 구성내용에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뮈토스와 미메시스의 주체들의 줄거리

짜기와 창조적 모방행위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예수의 수난

사화는 각 복음서마다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38) 족보 이야기로부터 시

작되는 마태복음은 기자가 예수 사건을 족보를 중시하는 유대적 시각

에서 뮈토스와 미메시스를 실행했다. 누가복음은예수를 희롱하는로마

병사들 이야기가 생략되었는데, 최초독자인 데오빌로 각하를 의식해서

뮈토스와 미메시스를 실행했다. 복음서는 예수의 시간이라는 포도주를

담고 있는 가죽부대이다. 포도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담을 용

기(그릇)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용기로 내러티브라는 가죽부

2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13

35) TER I, 60.

36) TER I, 85. “Que le temps devient temps humain dans la mesure ou il est articulé

sur un mode narratif, et que le récit atteint sa signification plénière quand il devient

une condition de l’existence temporelle.”

3 7 ) 제프리 브로밀리/신옥수 옮김, 『칼바르트 신학개론』(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24-5.

38) 각 복음서에서실행된 줄거리짜기와 미메시스는 순서의차이를 보인다. 1) 베드로의

배반 예언: 눅(22:23-39); 만찬-예언-감람산/ 막(14:26-31); 만찬-감람산-예언; 2)

예루살렘 심문: 눅(22:54-71); 희롱당하심-공회심문/ 막(14:53-72) 공회 심문-희롱

당하심; 3) 군병들의십자가도상에서의희롱: 막(15:16-20)/ 마(27:27-31)/ 눅(생략).

39)“칼뱅 같은 신학자들은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을 인도하신 방법을 논의할 때, 그들은

“기계적 받아쓰기”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적응(accommodation)에 대하여 말

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영감하시는 사역을 각 기자들의 의식구조, 사고방

식, 기질, 관심, 글 쓰는 습관, 문체의 특징 등에 완벽하게 적응시켰다.”J. I. Paker,

Fundamentalism and Word of God (London: Inter Varsity Press, 1958), 40-47.

40) TER I, 88.

41) TER I, 101.

Page 1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삶에 적용(application) 혹은 전유(appropriation)하는 만남을 통해

완결된다.45)

주목할 것은 이러한 텍스트로서의 내러티브를 해석할 때 세 단계의

해석학적 순환원리 체계, 즉“이해(compréhension) -설명(explication)

- 이차적 소박성(second naiveté)”의 체계가 미메시스 단계 마다에서

개별적으로작동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I I I. 역사와내러티브

역사는 우선 랑케(Léopold Ranke, 1795-1 8 8 5 )가 말한“사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원래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ilich

war) 보여주는것”이 아니다.46) 리쾨르에게역사란 시간경험에 대한기

억, 증언, 자료와 흔적을 가지고 내러티브 양식으로 실현된 재형상화이

인의 나사렛 예수 사건이 텍스트로서의 복음서 내러티브로 재현된 상

태에서, 독자가 이 텍스트와의 만남 혹은 상호작용을 통해 그 사건의

의미를 자신의 삶의자리에서이해하고설명하고 적용하는단계이다.

이러한 형상화의 단계는 상응하는 다음의 접근의 단계들의 해석학

적 순환이 적용된다. 첫째는“이해”(compréhension) 단계로서 가다머

(Gadamer)의“편견”(Vor-urteil)과 무관하지 않은 최초의 해석, 즉 각

자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에 기반을 둔 이해이다.43) 둘째는“설

명”(explication)의 단계로서 처음 이해된 텍스트는 더 정확하고 안전

한 이해를 위해 비평의 과정을 거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더

많은 설명이 더 잘 이해하는 결과를 보증하기 때문이다.44) 셋째,“이차

적 소박성”(second naiveté)의 단계로서, 설명의 단계를 거친 텍스트에

대한 이해(compréhension)를 말하는데, 여기서 해석은 텍스트를 독자

2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15

42) TER I, 109.

43) 가다머에 따르면 우리는 각자 영향을 주는 역사, 즉“영향사”(Wirkungsgeschichte)

를 딛고 서있는 독자라는 점에서 해석 대상에 대한 최초의 만남에서 편견을 극복할

수 없다. 편견과 동일시 될 수 있는이러한 최초의 이해는 한편으로는 부정적이지만,

이러한 전이해(preunderstanding) 없이는 해석 대상에 대한최초의 만남은 불가능하

다는 점에서 필연적이기도 하다. Stiver, The Philosophy of Religion , 92-3. 이 단계

는 허쉬(Hirsch)가『해석의 타당성』(Validity in Interpretation, 1967)에서 논한“추

측”(gussing)의 단계에해당한다.“이해 행위는 첫째 온당한 (또는잘못된) 추측이고,

추측을 (옳게) 하는 방법은 없으며, 직관을 생성하는 규칙은 없다. 우리가 추측을 비

판하고 시험하기 시작할 때 해석의 방법론적 행위는 시작된다.”E. D. Hirsch Jr.,

Validity in Interpreta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1967), 25; Texte, 200.

44) Texte, 22. “그와 같이 우리가 더 많이 설명한다는 것은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Ainsi avons-nous pu dire qu’expliquer, plus c’est comprendre mieux). 리쾨르는

이 설명의 단계가 허쉬의 검증(validation)의 단계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

서 검증은 과학적으로 불변의 답을 입증하는 증명(verification)과는 구별되는 것으

로서, 리쾨르는 칼 포퍼(Karl Popper)가『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1959)에서논한 반증(falsifiability)의 역할과 유사하다고주장한다. Ibid,

202. 스타이버는 이 단계에서 성서 해석학으로 말하자면 본문비평, 전승비평, 양식비

평, 편집비평, 사회학 비평들이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63.

45) T e x t e, 210;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63. Mark I. Wallace, The Second

Naiveté (Macon: Mercer University Press, 1990), 69-70. “이차적 소박성”(second

naiveté)이라는 용어는 리쾨르가『악의 상징』(La Symboique du Mal, 1960)에서 처

음 사용했다. 시공간의 차이가 있는 해석자에게 텍스트는 자신의 의미를 다 열어 보

이지 않는다. 즉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비평 이전의 전이해적 이해(understanding)가

아닌비판적 설명(explanation)의 단계를 철저하게 거친이해(appropriation)를 함축

하는용어이다. Ibid, 12-13 참조.

46)“역사는 다가올 세대를 위해 과거를 판단하고 현재를 가르치는 과제를 맡았다. 현재

의 연구는 그처럼 고귀한 책무를 감당하는 것은 아니고, 사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

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국한된다.”Leonard Krieger, The Meaning of History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 4-5에서재인용. 랑

케의 역사 인식이 이제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려운 계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언어의

불투명성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구조주의든, 영미분석철학이든, 해석학적 철학이든

공통적인 문제 인식은 언어의 은폐성/탈은폐성의 이중성에 대한 주목이었다. 둘째,

자료의 부족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료이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재현할

수 있는 만큼의 충분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기에 판단과 상상력에 의해 메워야할 빈

틈이있을수밖에 없다.

Page 1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가지는가에 대한해명에 있다. 내용전개는 1. 역사와 설명모델, 2 역사

와 내러티브논증, 3. 역사와 허구의 변증법의순서가 될 것이다.

1. 역사와설명모델

역사는 설명이며 내러티브는 설명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는가? 리쾨

르는 현대프랑스 역사학계와 분석철학계의사례를 검토하면서 가능성

을 타진한다. 두 사례 모두는 각기역사기술을 과학적 법칙이나 실증주

의로 환원하려는 계몽주의 역사인식에 반대하면서도 역사 기술로서의

설명에 내러티브를수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공통점이있다.

첫째, 현대 프랑스 역사학은 역사가 일어났던 그대로의 실재 사건을

드러낸다는 사건 중심적 실증주의 역사학에 대한 대안마련에 초점이

있었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과거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

의 총합(la somme)으로서 역사가가 재구성한 사건으로 객관화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마루(H.-I. Marrou)의 타인의 증언에 의한 역사지식

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라 단지 믿음에 따른 지식에 불과하다

고 주장한.53) 또한 아날 학파(l’école des Annals)는 개인이나 사건 중

심의 역사에 반대하면서, 역사는 지속적 시간의“총체적 사회현실”(fait

social total)에 대한 선택적 재구성을 통한 설명이라는 개념으로 전환

시켰다.54)

둘째, 분석철학계의 고민은 역사학을 과학과 동일하게 취급하려는

칼 헴펠(Carl Hempel)의 단일한“법칙론적”모델 또는“포괄적 법칙”

다.47) 역사의 문제는 지나간 시간 경험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

이고, 과거에 대한 해석이자 그 해석을 통해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찾

으려는 노력이며, 궁극적으로 역사기술이 어떻게 내러티브의성질을 갖

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다.48) 물론 역사와 내러티브의 관계적 필연성은

시간의 재형상화가 역사 내러티브와 허구내러티브의 결합된 결과라는

것을어떻게 설득할 수 있느냐에성패가 달려있다.49)

복음서 내러티브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

인가?“역사적 예수”와“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이원론적 접근 유형의

난제는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50) 이것은 복음서 내러티브 속의 예수가

어떻게 역사적 실재성을확보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리쾨르는 기본적

으로“지상의 예수와 그리스도는 연속성과 동일성이 있다”는 입장이

다.51) 이 연속성과 동일성이 모든 기독교 선포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52) 그러나 과연 그 의미는 구체적으로무엇이며 기

존의 지시적 의미와 차이가 있다면 어떻게 정당화 시킬 것인가? 관건

은 복음서 내러티브 양식과 예수의 역사성이 어떻게 필연적 상관성을

2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17

47) 리쾨르는 역사 문제를『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I권 2부와I I I권 전체에서 집

중 논의하고있다.

48) Krieger, The Meaning of History 참조.

49)“즉 나의 생각은 내러티브를 통한 시간의 재형상화는 역사 내러티브와 허구 내러티

브가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다”(la refiguration du temps par le récit est, selon moi,

l’oeuvre conjointe du récit historique et du récit de fiction). Ibid., 136.

50)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부활절 이전의 예수”와“부활절 이후의 예수”로 표현

한다. 마커스 보그/ 김준우 옮김.『예수의 의미』(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29.

윤철호는“역사적 예수”(역사적 사건의 실재론)와“신앙의 그리스도”(말씀사건의 관

념론)의 이분법을“흉한 도랑”으로 규정하면서 리쾨르의 이야기(Narrative) 해석학을

통한“실재론적 관념론”으로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윤철호,『신뢰와 의혹』(서울: 대

한기독교서회, 2007), 557-84.

51) Paul Rcicoeur, “From Proclamation to Narrative,” Journal of Religion 64 (1984),

501. 왜냐하면 복음서예수는 양자를분리할 경우헬레니즘신화나 영지주의 해석에

미혹될 수 있기때문이다. Ibid., 502.

52) Vanhoozer, Biblical Narrative in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133.

53) Raymond Aron, 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a l’histoire (Paris: Gallimard,

1938); H.-I. Marrou,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Paris: Seuil, 1954); TER I,

140-1에서참조.

54) TER I, 143-6. 리쾨르에 따르면아날학파의 강점은 역사를 접근하는데 있어서개인

과 사건 중심의 사고를 동시에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L’idée que l’individu et

l’événement soient à dépasser simultanément, sera le point fort de l’école.” Ibid.,

149.

Page 1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을 소설적 문학 양식의 기술과 유사한 전체 내러티브의 줄거리 구성

(mise en intrigue) 개념으로 접근하면서 일어난 것을 이야기(story) 하

는 것과 설명, 그리고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능력과 역사의식을 동일시

하였다.59) 셋째, 밍크(Louis Mink)는 역사이해란 법칙적 모델의 규칙으

로는 환원될 수 없는 사건들을 역사가가 증명이 아닌 판단을 통해 내

러티브로사건에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과학과 역사기술의 차

이를 보여 주었다.60) 넷째, 화이트(Hayden White)는 언어가 투명한 것

이라는 계몽주의적믿음에 반대하면서 역사와 소설은 동일한 이해양식

에 속한다는 밍크의 입장을 수용하고, 역사기술의 과학성과 문학성 모

두를 존중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기록 자체를 사료와 흔적을 사용한다

는 점에서 허구와 다르지만 저자의 관점이 반영된 줄거리 구성에 의한

설명으로이해하였다.61) 다섯째, 폴 베인(Paul Veyne)은 법칙을 통해사

실을포섭하는 과학, 그리고 줄거리를 통해 사실을 포섭하는역사를 대

조하면서 사건에 대한 설명은 곧 내러티브 줄거리 구성임을 밝혔다.62)

리쾨르는이와같이내러티브는곧 설명이라는입장에동의한다.

3. 역사와허구의변증법

리쾨르는 역사와 허구의 공통점을 내러티브를 따라갈 수 있는 능력

에 있다고 본다. 차이점은역사가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사건의 순서를

기록자에게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반면, 허구는 사건의 배열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63) 또한 역사가는 사실을 창조하지

(covering-law) 모델에 대한 대안 모색에 초점이 있었다. 대안으로 윌

리암 드레이(William Dray)는 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원인 가능성을

용인하는 인과적 분석(l’analyse causale) 모델과“동기”(raison)에 의한

설명 모델을 제안한다.55) 그리고 폰 라이트(Georg von Wright)의“유

사-인과적”(quasi-causale) 설명 모델을 탄생시켰다.56) 리쾨르는 이 모

든 대안적 설명모델들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개연적 설명의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서, 각각 실증주의와 법칙론적 모델을 넘어섰지만, 실제 역

사기술에서 재구성될 때, 결국 줄거리 짜기를 통한 사건의 재구성이라

는 내러티브 양식과 연계시켜 설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

가한다.57)

2. 역사와내러티브논증

리쾨르는 역사와 내러티브의 필연적 연계성은 내러티브가 감당하는

설명능력을 얼마나 정당화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주장하면서 다

음과같은시도들을정리하고평가했다.

첫째, 단토(Arthur Danto)는 헤겔(Hegel)의 도식적 역사철학에 반대

하면서 과거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해“내러티브 문장”(phrase nar-

rative)을 통한 역사기술이 곧 설명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

었으나 그 문장이 전체로서의 내러티브의 줄거리 구성에 연계되어 있

음을주목하지못했다.58) 둘째, 갈리(W. B. Gallie)는 역사기술의결과물

2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19

55) TER I, 173-86

56) TER I, 187-201.

57) TER I, 186, 202.

58) TER I, 204-10. Ibid., 210. 칼리니코스(Alex Callinicos)는 이러한 단토 이론의 목적

이 역사를 내러티브로 환원시키려 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다만 단토는 내러티

브가 설명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설명에 기여할 수 있음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알렉스 칼리니코스/박형신·박선권 옮김,『이론과 서사』(서

울: 일신사, 2000), 104.

59) TER I, 212-3. 밍크에게내러티브는“판단”(judgement)의 성격을 띤 특정의 이해 행

위를 요구하는“고도로 조직된 총체”(totalités hautement organisées)이다. T E R I ,

220.

60) TER I, 221-2.

61) TER I, 229-31.

62) TER I, 239-44.

63) 역사가와소설가의가장 큰 차이가“언젠가있었던것”(à ce qui, un jour, fut)으로서

Page 1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mite)는 가설에 기인한다. 무언가를 허구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

이 마치“일어난 것처럼”(comme s’il s’était passé), “진실같음”(vérisi-

militude)으로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일어난 것처럼’이 허구의역

사화의 본질이다. 이유는 줄거리 구성(mise en intrigue)이 개연적이거

나 필연적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칙에서 인식될 수 있다.68)

즉 허구속에“진실같음”을 입히는것이다.

이렇듯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간의 재형상화는“역사의 허구화”와

“허구의 역사화”라는 변증법을 통과해야 한다. 역사와 허구는 서로를

직조한다. 직조된 역사와 허구는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라기보다는일어

날 수 있었던 개연적 사건이다.69) 이러한 역사와 허구의 교차라는 내러

티브 공간을 매개로 한 변증법은 과거 시간적 행동과 사건들에 대한

재현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면서“인간의 시간”(temps humain)으로

모습을 드러낸다.70)

복음서 예수 내러티브 역시 역사와 허구는 서로 직조되어 있다. 불

트만(Bultmann)과는 달리 리쾨르에게는 복음서 내러티브에 케리그마

로서의 신앙의 예수와 실재로서의 역사적 예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

다.71) 즉 신앙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faith)와 역사의 예수(The Jesus

of history)는 이미 하나이다.72) 이러한 예수의 연속성과 동일성은 복음

않지만 허구의 작가는 사실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대별된다. 그러나 역

사가는 확실히역사적 실재의“흔적”에 의존해서과거를 재현하지만허

구적 상상력의 지원을 받는다.“흔적”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하

기 때문에 역사가는 시간을 재형상화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허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허구는 반대적 의미에서 역사를 사용해야

만 시간의 재형상화라는 목적에 다가갈 수 있다.64)“역사-허구”의 필연

적 상관성은“역사의허구화”와“허구의역사화”라는두 측면이 있다.

첫째, 역사의 허구화는 달력(le calendrier), 세대(la génération), 흔적

(la trace) 같은 특별한 이음쇠들(connecteurs)을 가지고 체험된 시간과

우주의 시간이 관련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할 때 발생한다.65) 이와 관

련해서 리쾨르는 화이트(Hayden White)의 비유를 통한 역사접근에 도

움을 청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란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

적 상상력을 통해 비유적으로“…라고 그려본다”(se figurer que...)는

행위를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있다.66) 그러나 역사에 허구를 얽히

게 한다고 해서 역사의 재현능력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구상을 완성하는데 기여한다.67)

둘째, 허구의 역사화는 허구내러티브가역사내러티브를“모방한다”

2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21

의 과거를 재구성하려는의도여부에있다고본다. TER I I I, 203-4.

64) Paul Ricoeur, Temps et Récit I I I (Paris: du Seuil, 1985), 264-5. 이하는 TER I I I로

약칭함.“사실상, 역사기록에서사용되는 수사어구들에대한 최근의 수사학적분석들

은 역사(history)와 허구(fiction)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장르임을 시사하고 있다.”

데이비드 트레이시/윤철호·박충일 옮김,『다원성과 모호성』(서울: 크리스찬 헤럴드,

2007), 100.

65) TER I I I, 153-83. 역사적 과거의 실재성은 증언, 기록, 목격담 등 다양한 흔적들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역사가는 이 흔적들을 가지고 상상력을 매개로 하여 내러티브

양식에체험의 시간과 우주의시간의가교를 제공하는역사의 시간을 형상화한다.

66) TER I I I, 269-70.

67) “L’étonnqnt est que cet entrelacement de la fiction à l’histoire n’affaitblit pas le

projet de représentance de cette dernière mais contribue à l’accomplir,” T E R I I I,

271. 리쾨르는이를“허구 효과”(effet de fiction)로 설명한다.

68) TER I I I, 275, 277. “Raconter quoi que ce soit, dirais-je, c’est le raconter comme

s’il s’était passé.”; 아리스토텔레스는 줄거리 구성에 시간적이거나 준-시간적

(quasi-temporelle) 의미작용을 전혀 결부시키지 않았다. 또한 그는『시학』에서 실제

로 일어난 것을 다룬다는 이유로 역사를 줄거리 구성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의줄거리 구성대상은오직있을법한 것을다루는 서사시(극)와 관계된다.

69)“허구의 준-과거는‘실제 과거 속에 은폐되어 있는 가능성들’(possibles enfouis

dans le passé effectif)을 탐구하는 것이 된다.‘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던’(aurait pu

avoir lieu) 것-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사실같음’(vraisemblance)-은‘실재’(réel)

과거의 가능성과 소박한 허구의 비실재적(iréels)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TER I I I, 278.

70) TER I I I, 279.

71) Figuring, 183.

Page 1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을 말한다는 것은,‘누가’그런 행동을 했는가?‘누가’그 행동의 주체

이고 당사자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76) 그런데 이러한 정체

성 인식은 직접적인것이아니며 항상문화적, 상징적, 언어적으로 매개

된다.77) 그는 역사적 내러티브와 허구적 내러티브를 가로지르는 자신의

탐구여정의 끝에서 이 두 부류의 내러티브를 통합할 수 있는 경험적

구조가 존재할 수 있는지 자문하고, 내러티브가 개인적 차원에서든 공

동체적 차원에서든 어떤 의미에서 누구의 정체성을 접근하는 건설적

탐구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보여주고자한다.78)

서의 시간성과 시간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들을 낳게 한다. 예수는“지

금”(Now)이 바로 구원의 때임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

렸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아직 다시 오지는 않았다. 복음서에서 예

수가 선포한“이미”(already)와“아직”(not yet) 사이의 시간적 긴장은

복음서를 특별한 시간적 의미를 갖는 역사적 담지자가되게 한다. 특히

예수는 비유 이야기들에서하나님 나라의“임박함”(nearness)을 선포했

는데 시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임박함과 마지막 날에

대한 종말론적인 가르침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73) 다시 말하면 복음서 내러티브 속에서 예수는 비유 가르침을 비

롯한 자신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마지막 날은 단순한 연대기적 시간의 끝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현재에 침입해 들어온 역사적 시간이다. 복음서의 마지막 때와

관련한 예수 사건은“임박한”(imminent) 시간이 아니라“내재한”(im-

manent) 역사적 시간이다. 그리고 이“하나님나라는 인간 경험이 그것

이 선포하고 있는 가르침에 의해 변화될 때마다 항상끝없이 가까워진

다.”74) 따라서 마지막 날을 달력 날짜에 고정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어

리석은 것이다.

IV. 정체성과내러티브

리쾨르에게“정체성”(identité, identity)은 시간성 속에서 변하지 않

는“누구”의“무엇”에 관한 문제이다.75)“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정체성

2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 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23

72) Figuring, 184.

73) Vanhoozer, Biblical Narrative in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205.

74) Paul Ricoeur, “From Proclamation to Narrative,” Journal of Religion, 64 (1984):

505.

75)“같음”을 뜻하는 라틴어idem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클레멍(Elisabeth Clement), 데

몽끄(Chantal Demonque), 깐(Pierre Kahn) 등 프랑스 고등교육원교수들이1994년

함께저술한『철학사전』에서“시간 속에서 같은것으로 머무는 특성, 둘 이상의 사물

을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특성”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엘리사베클레멍 외 2인,

이정우 옮김,『철학사전』(서울: 동녘, 1996), 81. identité(identity)의 번역, 즉“동일

성”인가“정체성”인가의 문제는의미가 어떤지시대상을내포하는지, 어느쪽의의미

가 더 큰 외연을 갖고 있는지를 고려해야한다.“개인(동일성)/집단(정체성)”(탁석산),

“개별화/개성”(김선희), “자체i d e m /자기ipse(Ricoeur)” 등의 제안의 수렴점은 전자

(동일성)보다 후자(정체성)가 용법적으로 더 큰 외연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판단으로 논자는 이 글에서“정체성”이라는 용어를 선택한다. 윤성우,『폴 리쾨르의

철학』(서울: 철학과현실사, 2004), 194-7 참조.

76) TER I I I, 354. 정체성의 문제는 리쾨르가『시간과 이야기』(1. 2. 3)(Temps et Récit, I.

I I. I I I, 1983-1985), 『텍스트에서행동으로』(Du texte à l’action, 1986)를 완결하고나

서 일차적으로 관심을갖게된 탐구의주제였다. Figuring, 306.

77)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171-2. 리쾨르는 정체성 인식의 매개적 성격과 관련

해서 1986-1987년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겨울학기 동안“자기성과 타자성”(ipseité et

alterite)을 주제로 일련의 강연을 하던 기간중 올리베이라(Carlos Oliverira) 와의대

담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그것은 즉각적인 자기 인식이란 없다는 저의 생각에-데

카르트의 코기코(Cogito)나 후설의 그것에 반하여-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자기

인식은 중개되는(mediate) 것이며 그 매개물은 바로 삼인칭‘자기’(Selbst)이고,‘나’

는 우선 삼인칭‘자기’(Selbst) 속에서‘나’를 인식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Cela

me confirme dans mon idée - contre le cogito cartésien, ou encore husserlien -qu’il

n’y a pas de conaissance de soi immédiate; la conaissance de soi est médiate, et

cette médiation c’est justment le S e l b s t à la trisième personne; je me connais

d’abord dans le Selbst à la trisième personne). Paul Ricoeur, “De la Volonté à

l’acte”, Temps et récit de Paul Ricoeur en debat (Paris: Cerf, 1990), 29-30.

78)“역사와허구의통합에서 생겨나는허약한새싹은, 우리가 내러티브정체성이라고

Page 1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데카르트의 코기토 기초주의, 즉“나는 생각한다”의“나”가 최초진리의

토대가 되는것을강력하게 거부한다.80)

무엇보다도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직접 얻은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기

토는 확실히 공허한 진리이다; 나는 그것이 진리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의 진리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진

리는 검증도 추론도 불가능할 것이다;…나는 생각하는 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공허한 진리이다.‘나는 생각한다’(ego Cogito)

에서‘나’(ego)는 나의 대상들, 나의 작품들, 심지어 나의 행동들의 반

사경 속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인 만큼, 그 진리는 첫발을 떼고 더 전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딜타이(Dilthey)의 말에 따르면 삶을 드러내는

어떤 표현들에의해매개되지않는반성은 눈먼직관이다.81)

데카르트는 육체와 영혼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의심하는 주체인

“나”의 정당성을 자신의 순수한“영혼”에서 찾다가, 이내 그 토대를 영

혼의 영속성(permanence) 실체인“신”(Dieu)에게 떠넘겼다. 신은 순수

한 영혼의 일시성만을 담보할 수도 있는“나”와는 다르게 순수한 영혼

의 영속성을 신뢰할 수 있는 실체이기 때문이다.82) 결국 담론에서“나”

의 위치의 결론은 다시 불확실한 자리의 주체로 되돌아간다. 니체

(Nietzsche)는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반-코기토 입장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공격하였으나 이는 대안이 아닌 다양한 주체들의 끝없는 싸

움의 유희를 정당화함으로써 한계를 보였다.83) 앞에서 밝혔듯이 낸시

머피(Nancy Murphy)는 데카르트의 절대적 주체에 의한 인식론적 패

러다임의 영향은 복음주의 진영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고 주장

한다. 즉 20세기 초 대표적인 복음주의 진영인 프린스톤 학파의 찰스

예수의 정체성은“그는 누구인가?”(Who is he?) “그는 어떤 사람인

가?”(What is he like?)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 얻어진다. 기독교

공동체는 지난 2천년 동안 동일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반복했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질문과 대답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모

든 시대의 정통주의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교의적 기초를 공유하는 복

음주의 진영조차 예외는 아니다. 즉 각 시대의 정통주의 기독론들은 유

구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조차“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

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교의적 명제에 출발점을 함께 하며 수많은 담론의

개진을 실현시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음표(?)는 남아있

고 마침표(!)는 아직 찍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

렇지는 않다는 것이 우리가 이제 함께 해명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는

리쾨르의 내러티브 정체성 이론이 이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를 제공한

다고 판단한다. 내용 전개는 1. 누구의 정체성인가? 2. 자체-정체성과

자기-정체성의 변증법, 3. 로크(Locke)와 파핏(Parfit)의 정체성 검토,

4. 내러티브정체성과예수의 순서가 될 것이다.

1. 누구의정체성인가?

리쾨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주체“나”(je)에 대한 대안으로

“자기”(soi)를 제안한다.“누구”의 정체성은 유아론적“나”에 의한 소유

가 아닌 자기(soi), 즉“나”와“그”와“너”를 모두 포괄하는 주체적 개념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략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79) 리쾨르는 모던시

대가 시작된 이래 수세기 동안 인식론적패러다임의 황제로 군림해 온

2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25

부를 수 있는 특수한 정체성을 개인이나 공동체에 부여한다. 여기서 정체성은 실천

의 범주라는 의미이다.”TER I I I, 354.

79) Soi-même, 11. 이는 프랑스어에서 인칭대명사 자기(soi)가“나”와“너”와“그”모든

인칭을 아우른다는점을착안한 리쾨르의전략적선택이다.

80) 머피(Nancy Murphy)는 모던의 시대가대략데카르트가사망한1650년부터 1950년

까지지속되었다고기술한다. Murphy, Beyond Liberalism and Fundamentalism, 5.

81) Conflit, 21.

82) Soi-même, 15-22.

83) Soi-même,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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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을 입고 있다면 그 옷은 서로 바뀐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C.

“중단없는 연속성”(continuité ininterrompue)은 한 그루가 도토리에서

부터완전히 성장한 나무까지 동일한 것이다. 어떤 어린아이의 사진을

부모가 매년 찍을 경우에도 그 사진들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D. “시

간 속의 영속성”(permanence dans le temps)은 유전자(DNA)처럼 어

떠한 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정체성의 측면이다.86) 여

기서가장강력한 자체성의 측면은 마지막 네 번째이다.

복음주의기독론은 이와같은 강력한 자체-정체성의 유전자를 동정

녀 탄생, 예수와 하나님의동등하심, 부활의실재성 등의영속적 교리에

서 확인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의 자원을 품고 있는 성서, 특별히 복음

서 내러티브의 의미들을 통해서 복음주의 진영의 자체-정체성을 확립

할 수 있다.87)

둘째,“자기-정체성”(identité- ipse)은 시간성이 내재된 상태로서의

‘누구’의 정체성이다. 자기-정체성은 성격과 약속으로 나뉜다. A. “성

격(caractère)은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해주는 지속적인 성향들의 총체”

이다.88) 성격은 자체(idem)와 자기(ipse)가 결합되어 있는데 다시두 가

핫지(Charles Hodge)와 그의 아들 아키발드 핫지( A r c h i b a l d

Alexander Hodge),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같은신학자들이마

찬가지로데카르트인식론의영향권 아래있었다.84)

2. 자체-정체성과자기-정체성

리쾨르는 이전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이 명료하지 못하고 결국 미

궁에 빠지는 일을 반복했던 원인이“자체 정체성”( i d e n t i t é-i d e m)과

“자기 정체성”(identité-ipse)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85) 먼저

이 양자가 어떻게 구분되는지살펴보자.

첫째,“자체-정체성”(identité-idem)은 시간의 진행에 영향을 받지

않는‘무엇’측면의정체성이다.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A. “수치적 정

체성”(l’identité numérique)은 개체의 유일성(unicité)을 의미한다. 복

음서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등 4개

의 복음서에 등장하는데, 이 나사렛 예수는 두 명의 다른 인물이 아니

라 단 한 인물을 가리킨다. B. “질적 정체성”(l’identité qualitative)은

극단적인 닮음(ressemblance extrême)을 의미한다. 남아공 월드컵을

응원간 열성팬 철수와 영철이가 같은 치수, 같은 디자인의 박지성 유니

2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27

84) Murphy, Beyond Liberalism and Fudamentalism, 5-35 참조.

85) F i g u r i n g. 307. “한쪽에는 자체성(mêmeneté; 라틴어 idem, 영어 sameness, 독어

Gleichlheit)으로서의 정체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성(ipseité)으로서의 정체성

(라틴어 ipse, 영어 selfhood, 독일어 Selbsheit)이 있다. 내가 여러 번에 걸쳐 언급했

듯이, 자기성은 자체성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주요한 구분이 등한시되었기 때문

에- 우리는 이점을 두 번째 부분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개인의 자기 정체성 문제

에 가져온해법들, 이야기 차원을 무시하는 그 해법들은 실패하는 것이다.”Soi-même

140. 리쾨르가『타자로서의 자기 자신』(S o i-même comme autre)에서 스트로슨

(Strawson), 앤스콤(Anscombe), 데이비슨(Davidson), 파핏(Parfit) 등의 영미 분석철

학자들의 정체성 이론을 검토한 후에 내린 결론은 이들의 접근이 하나같이 시간성을

배제한 외부자의 측면에서만 접근함으로써정체성의 자기성의 측면을 간과한 자체성

측면의인식에만 몰두하고있다는 것이었다.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171.

86) Soi-même, 140-2.

87) 린드백(George Lindbeck)은 기독교의 교리를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영속적인

것과 마리아론으로 대표되는 가변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George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4), 91-111.

88) Soi-même, 146. 사실 리쾨르가“성격”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철학에서 검토한 것은

이번이처음은 아니었다. 1) 그는이미『의지적인것과비의비적인것』(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에서 성격을 절대적으로 비의지적인 것으로서 살아 있는 존재와

무의식과결합시켜우리가 바꿀 수 없는층위의것으로 특징지었으며, 2) 『오류를범

하기 쉬운 인간』(L’Homme faillible)에서 조금 맥락을 달리해서, 즉 성격을 세계로

향한 나의 개방성에 영향을 미치는 내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정리했는데, 이것은 어

떤 의미에서“물려받은부동의 본성”혹은일관된 같음이라고 규정함으로서그 불변

성을지나치게 강조한 결과를 낳았었다. 3) 그러나 리쾨르는『타자로서의자기 자신』

에서이제다시이 특성에 실존의 차원을 추가하여성격을 내 것이라는소유성안에

있는일관된 같음으로새롭게 규정하는 변화를원하고 있다. Soi-même, 144-5;

Page 1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 지속성”(Selbständigkeit)을 구분하고 후자에 연계시켜 파악한 것과

유사한 의미가 있다.94) 예수는 자신의 예언대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

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고 부활했다(막 8:31;

9:31; 10:33-34). 이것이 예수의 지켜진 약속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때에심판자로다시구름을타고오실것이다(마 13:24-27; 14: 62).

3. 로크와파핏의정체성검토

로크(John Locke)는 인격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을 구성이나

조직에 의해 정체성을 확보하는 동물, 식물의 자체성에 의한 정체성과

구별했다. 그에게 인격이란 이성과 반성을 가지고 항상 동일하게 사유

하는 개별자를 의미한다. 인격과 사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으며

의식으로타자와 구별되는정체성을 확인한다. 정체성은 의식으로만확

인 가능하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동일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정체성

은 확보된다. 즉 인격적정체성은의식의 동일성이다.95)

그러나 리쾨르는 로크가 자기성과 자체성을 구별하지 않음으로 인

해서혼란을 자초했다고 본다. 그는 정체성이 시간의 지속 속에서도전

혀 변화가 없는의식의 항구성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왕자

의 기억을 구두 수선공에게 이식할 경우, 구두 수선공은 누구일까? 로

크는의식의 동일성을기준삼음으로 왕자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정체

성은기억만으로는 환원 불가능하다. 신체는 시간속의 경험을 담고있

는 자기성의담지자이기때문이다.96)

파핏(Derek Parfit)은 심리적 기준을 가늠자로 삼은 물리주의적 환

원주의자이다. 그는통념에 맞서다음세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한개

지 성향으로 나뉜다. a) “획득된 습관”(habitude)은 강력한 성향이 있어

서 한편으로는 시간 속의 영속성(Idem)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

으로 습관은 획득된 것(Ipse)으로 시간적 의미를 갖는다. 예수는 위선

적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습관적으로 반목하였다는 것을 복음서는

보여준다. b) “획득된 동일화”(identifications acquises)는 한 인간이나

공동체가 어떤 가치관, 규범, 영웅 등에 스스로를 동일화시켜서 타자성

을 자기(soi)에 내재시키는 것이다. 예수는“인자”89)“선지자”90)“고난받

는 의인”91)으로서의 자의식을 지녔었다.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 지도자들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내면화하고 동일화

하여순교를 두려워하지않았다.92)

B. “지켜진 약속”(parole tenue)은 무엇이 아닌 누구의 차원에서만

자리매김 되는‘자기의 유지’(maintien de soi)를 말한다.93) 이것은 하이

데거가 현존재(Dasein)의 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영속적 실체와“자

2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29

Charles E. Reagan, Paul Ricoeur: His Life and His Work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84.

89) 마가복음에서만 인자 칭호는 무려 14회나 등장한다. 막 2:10, 27-28; 8:31, 38; 9:9,

12, 31; 10:33, 45; 23:26, 14:21(두번), 41, 61). Paula Fredriksen, From Jesus to

C h r i s t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1988). 48-49; Marinus de

Jonge. Christology in Context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68-69;

김세윤/홍성희·정태엽옮김, 『그사람의 아들-하나님의아들』(서울: 엠마오), 198.

90) 막 6:15, 8:28. 제임스 던/최갑종 편독,『최근의 예수 연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240; 보그(Marcus Borg)는 예수가 속해 있던 전통 속에 있던 그 어떤 인물

도 예수만큼 이스라엘의 고전적인 예언자들(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과 닮은 사

람은없었으며, 그 예언자적 전통에서당시의 기득권 세력인권력자, 부자, 종교인 등

을 고발하고, 위협하고, 변화를 요청했던 인물로서 평가한다. 마커스 보그/김기석 옮

김, 『예수 새로보기』(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9), 204. 208-213.

91) C. S. Mann. “Mark,” Anchor Bible. Vol. 27(Doubleday & Company. 1986). 650;

예수가 십자가위에서 낭송한시편22편은 그가자신을시편이 제공하는범례속에

자신을 설정했다는것이다.

92) Soi-même, 147.

93) Soi-même, 148.

94) 마틴 하이데거/이기상 옮김, 『존재와시간』(서울: 까치출판사, 1998), 404.

95)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Oxford: Clarendon

Press, 1975); Soi-même, 150-1.

96) Soi-même, 155; 152.

Page 1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된다. 리쾨르에게“누구”의 정체성은 내러티브 정체성에 다름이 아니

다.”100) 양 측면이 내러티브에 내재되는 것은 줄거리짜기(mise en intri-

gue)가 자체 정체성 아래에서 시간 속의영속성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

였던, 다양성, 가변성, 불연속성, 불안정성이 어떻게 영속성에 통합되는

지를 인식시켜 줄 때이다.101) 물론 미메시스I I를 마치기까지는 긴장이

있다. 줄거리 짜기는 일치(concordance)의 요청과 불일치(discordance)

의 수용이 공존하는 긴장으로 인해서 구성 마지막까지 내러티브 정체

성의 안정을 위협받는다. 그러나 줄거리 짜기를 통한 형상화(configu-

ration)는 우연적일 수 있는 개인의 다양한 행위 사건들이 필연적 사건

으로 변형되어 내러티브의 한 구성요소가 되도록 작용한다는 것은 확

실하다.102)

내러티브의 인물은 행동하는 주체로서 그의 자체 정체성과 자기 정

체성이 줄거리와 필연적으로 엮여있다.103) 이것이 인물그 자체가 곧 줄

거리짜기라고말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미이다.104) 그러나 내러티브는

개인만이 아닌 집단의 정체성의 담지자이기도 하다. 마치 유대민족 공

동체 자신이 지난 역사 속에 생산한 출애굽이야기를 계속적으로 수용

함으로써 정체성을 이끌어 내듯이,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수난과 죽

음, 부활 이야기를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끌어 낼 수 있

다.105)

인의 존재는 하나의 뇌와 하나의 신체의 존재로, 그리고 서로연결되어

있는 신체적, 정신적 사건들의 출현으로 구성된다.”97) 따라서 영속적인

“무엇”으로서의독립된 정체성은없다. 둘째, 가령그는 나의뇌의정보

가 원격전송되어 복제된 또 하나의 내가있고, 본래의 내가 죽었을 경

우에 대한 상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여기서“나”는 복제된 존재로 살아

있는가? 죽은것인가? 묻고결정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린다. 셋째, 중요

한 것은심리적 연속성이기에정체성이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98)

그러나 리쾨르는 각각 이렇게 반박한다. 첫째, 인격은“무엇”으로 환

원할 수 없는 독립적인 실체이다. 둘째, 나와 똑같은 자기의 인격을 지

닌 존재는 유일하기 때문에 정체성은 결정가능하다. 셋째, 체험적 사건

과 신체의 불가분의 관계성은 정체성의 중요성을 정당화시킨다.99) 리쾨

르는 이처럼 자체-정체성과 자기-정체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체성

이론은 자체성과 자기성이 섞여서 난관에 봉착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

체성과 자기성의 분별하려면 매개 영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내러티

브는양 측면의 정체성이 집약되어 있는최적의 담지자이다.

4. 내러티브정체성

자체-정체성과 자기-정체성의 변증법은 내러티브 안에 모두 내재

2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 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31

97) Derek Parfit, Reasons and Persons (Oxford: Clarendon Press, 1984). 211. “A

person’s exisitence just consists in the exisitence of a brain and body, and the

occurrence of a series of interrelated physical and mental events.”

98) Soi-même, 162-3.

99) Paul Ricoeur, “L’identite narrative”, L’Esprit (Paris: Juillet et Aout 1988); 김동윤

옮김,“서술적 정체성,”『현대 서술이론의 흐름』(서울: 솔 출판사, 1997), 66. 리쾨르

가『타자로서의자기 자신』(Soi-même comme autre)에서 스트로슨(Strawson,), 앤스

콤(Anscombe), 데이비슨(Davidson), 파핏(Parfit) 등의 영미 분석철학자들의 정체성

이론을 검토한 후에 내린 결론은 이들의 접근이 하나같이 시간성을 배제한 외부자

의 측면에서만 접근함으로써 정체성의 자기성의 측면을 간과한 자체성 측면의인식

에만몰두하고있다는 것이었다.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171.

100) Figuring, 308.

101) Soi-même, 148. 168.

102) Soi-même, 175

103) 이러한 줄거리와 인물의 상관관계성은그레마스(Greimas)의“행위자”(actantiel) 이

론을통해서 가장정점에 이른다. 다만 내러티브속의 행동들의조작자라는 위상을

강조하기 위해 그래마스는 인물을 행위자( a c t a n t )로 지칭하고 있다. S o i-m ê m e,

173. 또한 리쾨르는 일찍이『시간과 이야기』(1)(Temps et Récit, I)에서인물과아리

스토텔레스가“사상의 배열”(l’agencement des faits)이라고 정의했던 뮈토스

(muthos), 즉“줄거리 짜기”(mise en intrigue)와의 필연적 상관관계성을 강조한 바

있다. TER I, 60.

104) Soi-même, 174.

Page 1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식을 위한 창조적 인지 공간이라는 그의입장은 진리 담지자로서의 성

서 언어해석학에대한영토회복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리쾨르의 내러티브 해석학은 모든 진리를 교리나 명제

로 환원시키려는 명제적 환원주의 야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모던 기

초주의의 인식론적 지평의 한계를 고발하고, 이러한 접근이 얼마나“진

리의 담지공간”을 축소시키는 것인지, 성서언어의 모든진리가 명제나

교리로 환원불가능한(irreducible) 것인지를 재인식시켜 준다. 복음주의

진영, 그 중에서도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의 무오 교리를 진리를

“지나친문자주의”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107) 소속된 공동체의 교의

와 그것을 성서 해석의 절대적 매개로 사용하는데 익숙한 담론의 질서

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내러티브 양식 자체가 함의하는, 결코 명제로

환원할 수 없는 텍스트 자체의 의미적 풍요로움과 역동성을 주목하지

못하도록유혹받는다.108)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방향성이 얼마나 루터와 칼뱅 등이 주창한

종교개혁 정신에 부합하는지를 냉철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것

이 성서의 진리를 모던 인식론의 토대에서 가장 흔한 지배적 검증 장

치인 과학성, 실증성, 합리성의 영역으로 제한한 인식론적 강박관념의

귀결은 아니었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109) 정녕, 리쾨르의 내러티브 해

V. 결론: 내러티브와포스트모던정통주의기독론

“그는 누구인가?”(Who is he?), “그는 어떤 사람인가?”(What is he

like?)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어디서나 유효하고

동일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이 언제, 어디서나 같은 것으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 같은 성서에 기초한 문자적 의미를 공유하더라도 각 시대

마다, 상황마다 해석 주체들이 실현하는 지시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

다.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이 말은 유효하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에게

는 리쾨르의 내러티브 해석학을 통하여“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죽으시고다시 살

아나셨다”는 전제적 교의에 확실히 기초하고 있는 복음주의의 기독론

적 담론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불편한 시

도일지 모른다. 리쾨르 사상은 텍스트 자체의 의미보다는 인간의 보편

적 경험의 반영물로성서언어를 자리매김한다는 의미에서의 오늘날 비

복음주의자들(복음주의 진영에서 판단할 때)의 대표적 진영 중의 하나

로 간주되는, 즉 트레이시(David Tracy), 길키(Langdon Gilkey), 거스

타프슨(James Gustafson)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시카고 학파

(Chicago School)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106) 이러한 불편

함은 리쾨르의 해석학을 텍스트 중심성을포기한 경험주의적 패러다임

의 방법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그럴수 있을것이다. 그러

나 우리는 리쾨르가 언제나 텍스트를 떠난 사유에 반감을 표해 왔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는 언어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 모든 사유에 반대

한다. 또한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를 떠난 지시적 의미를 결코추구하지

도 않는다. 따라서 은유와 내러티브는 의미론적 혁신을 이루는 진리인

2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33

105) TER I I I, 357.

106) Stiver, The Philosophy of Religious Language, 135-9. Comstocs, “Two Types of

Narrative Theology,” Journal of American Acadey of Relogion, 55 (Winter

1986): 687-717;

107) 스토트, 『복음주의의기본진리』, 27. 19-35 참조.

108) Harold Lindsell, The Battle for the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1976), 165-

66. 카메론(Euan Cameron)은 종교개혁기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공헌한 프로테스

탄티즘이 곧 수많은 종파로 나뉘기 시작했고 각 종파마다 교리적 편향과 성서의

해석 방식이 있었으며, 각기 자기들만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확신했다고 기술한다.

Euan Cameron, Early Modern Europ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88-9.

109) William Placher, The Domestication of Transcendence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6). 플래처는 이 책에서 모던 기초주의 인식론이 개막된 이래 아퀴나스,

루터, 칼뱅 후예의 신학 담론들이 어떻게 하나님 진리의 신비성을 순화시켜 논리

성, 객관성, 과학성을 추구하는 명제적 환원주의 담론으로 왜곡되어 왔는가를 추적

하고있다.

Page 1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단계에서 복음서들은 완성된 텍스트가 되었는데 같은 예수 사건에

대한 다양한 줄거리 짜기와 창조적 재현성의 실현이 이 과정의 결실들

이다. 그런데 줄거리 짜기에는 이미“이해-설명-이차적 소박성”이라는

해석의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자기-정체성 측면에서 각 복음

서 내러티브가 동일한 기독론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

다.110) 셋째, 미메시스I I I 단계에서의 세 번째 형상화는 텍스트에 대한

독서를 통한“이해-설명-이차적 소박성”의 해석학적순환을 요청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셀무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존 웨슬리, 칼 바르트,

칼 헨리, 스텐리 그랜츠, 케빈 반후저…등의 기독론은 어떠한가? 정통

주의 기독론의 통일성 속의 다양성은 각 시대의 정통주의자들의 자기

시대 상황적 맥락에서 열매 맺은 자기-정체성의 산물이다. 당연히 성

서는 하늘에서 순식간에 떨어진 물리적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구세

주 예수의 사건과 행위를 내러티브라는양식에 담아주었다.

리쾨르에게예수의 역사성은“역사-허구”의 변증법 안에들어있다.

이천년 전 나사렛 예수에 대한 실재적 시간성의 사건들과 행위들은 내

러티브가 아니면 담아낼 수 없다. 모던 인식론의 유산으로 역사기술을

과학법칙에 대응시키려는헴펠(Hempel)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

은 드레이(Dray)와 폰 라이트(Von Wright)의 사례에서 확인했듯이 실

제적으로 이룰수 없는야망이었다. 오히려 역사기술은 그 형상화 작업

에 있어서 소설을 닮아 있다. 특별히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그렇다. 역

사는 실재의 흔적들을 가지고 형상화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분명 소설

과 다르지만“뮈토스-미메시스”변증법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우연적

사건들을 필연적 사건들로 엮어낸다는 점에서 역사와 허구는 서로 직

조된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흑백 논리

석학은 데카르트 이래모던 인식론의 유일한 진리 담지자의 적자로 간

주하려는유혹에 고무된 명제주의가얼마나 모던기초주의적인것인지,

그 자체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해명해 준다. 리쾨르에게는 복

음서 내러티브의 역사기술적 성격은 과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다. 그

런데 이러한 성격은 더 풍요로운 은유적 진리와 의미적 혁신의 담지공

간으로 작동한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근대적 유형의

이원론은 내러티브 인식론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결코 역사적 실재

성 역시 포기되지 않는다. 이것이 불트만(Bultmann)과 리쾨르의 차이

이다.

리쾨르 해석학에서 텍스트로서의 복음서 내러티브는 지나간 예수의

시간적 사건에 대한보관 창고이다. 이 창고는 생각을 일으키는 상징들

과 의미적 혁신을 생산하는 은유와 비유들로 넘쳐난다. 이에 대한지시

적 의미의 진리치는 해석의 주체들이 어떤 정체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각 시대마다 정통주의자들은 동일한 기독론적 전제 교

의를 붙들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지시적 의미는 달라질 수 있었다. 각

시대마다 정통주의 기독론의 주체들은 자기-정체성을 구성하는 다른

타자성들과대변했기때문이다.

예수 사건은“미메시스I-미메시스II-미메시스I I I”이라는 세 번의

“뮈토스-미메시스”변증법에 의한 형상화 작용이 있었다. 이렇게 예수

사건은 세 번의 미메시스 단계를 거쳐서 이 시대 독자와 만났다. 첫째,

미메시스I의 단계에서 예수 사건은 아직 내러티브 텍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수십 년 간“이해-설명-이차적 소박성”이라는

해석학적 순환이 있었다. 우선 부활절 이전의 제자들과 이후의 제자들

의 기독론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바울과 베드로의 기독론은

차이가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유대인들의 구세주로 보았으나, 바울

은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해석했다.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차이를 확인한다. 유대인 출신들은 예수의

복음 위에 율법의 준수를 동시에 강조하였던 것이다. 둘째, 미메시스I I

2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35

110) 마태복음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에 대한 성취가, 마가복음은 고난받는 종의 기

독론이강조된다. 누가복음은그리스-로마 세계이방인들을염두에 둔 기독론이다.

요한복음은 성육신의 로고스 사상으로 말씀이 되신 하나님 예수를 강조한다. 윤철

호, “신약성서의그리스도론,”『기독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1), 15-48 참조.

Page 1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독론에서는 고대의 예수의 신성과 인성 논쟁 속에서 삼위일체론

의 탄생, 중세의 대속의 성격 논쟁, 종교개혁기의 성만찬 논쟁, 모던 시

대의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논쟁 등은 시대지평의 타자성이

자기성의 일부가 된 사례이다. 이 시대 정통주의 기독론의 가장강력한

상대 중 하나는 종교다원주의 문제일 것이다. 종교다원 상황과 가치상

대주의의 도전이 팽배되고 있는 정황 속에서 정통주의의 후사임을 자

임하는 복음주의 진영이 어떤“자기-정체성”을 구축해낼 수 있겠느냐

하는것은중대한 과제가 아닐수 없다.

리쾨르는“내러티브 신학을 향하여”(Toward a Narrative Theology)

라는 논문에서 내러티브 신학이 추구하는 정체성의 방법론적 기준을

제시하였다.112) 첫째, 내러티브 신학은 사변적인 신학(speculative theo-

logy)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학담론은 성서, 예수, 그리고 초

기 교회에 관한이야기들을 일체언급하지 않기때문이다. 둘째, 도덕적

으로 편향된 신학(morally oriented theology)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러한 신학은 단지 윤리적 기준에 입각한 무시간적 교훈들만을 지향하

기 때문이다. 셋째, 실존주의 신학(existential theology)에 반대한다. 왜

냐하면 이러한 신학은 역사적 차원을 배제하고 신앙적 결단으로 말미

암는사건적 의미만을추구하기때문이다.

리쾨르의 내러티브 이론에 비추어 추구하는 이 시대 복음주의 진영

의“예수 해석학”역시 상응하는 방법론적 성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37

112) Figuring. 236. 이 논문은 본래1982년 하버포드 대학(Haverford College)에서 개

최된 내러티브 신학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되었고, Meedenken Met Edward

Schillebeeckx, ed. H. Häring (Baarn: H. Nielissen, 1983), 80-92에 수록되었던 것

이다. 한편 터랜스 틸리(Terrence Tilley)는 리쾨르의 내러티브 신학이 말 유희가

난무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신 죽음 이후 시대”(post-death-of-God age)에 새로

운 상황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Terrence Tilley, “Narrative Theology

Post Mortem Dei? Paul Ricoeur’s Time & Narrative, I I I, & Post modern Theo

logies,” Paul Ricoeur & Narrative: Context & Contestation, ed. Morney Joy

(Calgary: Calgary University Press, 1997), 175-95.

적 선택을 여전히 강요받는 것은 부당하다. 복음서 내러티브에는 역사

적 예수그리스도가이미실재하고 있다고 보기때문이다.

예수의 내러티브 정체성은 시간 속의 영속성으로의 자체성과 시간

안에 축적성으로서의 자기성에서 확인된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예수에

대한자체성은 삼위일체론, 동정녀 탄생, 부활의 역사성 등의영속적 교

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 자체성의 성격을 갖는교리들은 복음주의진영

안에서 과거에도 그러했듯이영속적이다. 그러나 자기성의 자원들은 과

거에도 그래왔듯이 시대지평과 주어진 상황에서 제기된 도전들에 반응

하며 정체성을 구성하여 간다. 313년 이전 핍박의 시기의 변증가들은

기독교가 천박한 미신종교가 아님을 설득하기 위해 헬라적 사상과 성

경을 조화시키려고했다. 중세의 위대한 교부아우구스티누스는회심한

후 도나투스주의자들과펠라기우스 등과 논쟁하며 은혜의 교리를 강조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면죄부 판매 등 전통에 의한 속박과 그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는 정황 속에서 전통이 아닌 오직 성경, 행위가 아닌 오

직 믿음에 초점을 맞춘 신학적 대안을 마련했다. 교리 중에 마리아 숭

배론, 교황 무오론, 기계적 영감설 같은 것들은 시간 속의 영속성의 도

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주의의“자기-정체성”차원에서 폐기

되었다. 따라서 자기-정체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정체성은 주어진 것에

대한 보존이 아닌역동적인 변화를 내포한다. 즉 정체성은 주어진 시간

속의 영속성을 드러내는 자체-정체성 뿐 아니라 타자들과의 상호작용

속에 새로 만들어가는 측면 자기-정체성의 측면이 분명히 동시에 공

존한다.111)

2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11) 이러한 의미에서 논자는“자기-정체성”의 측면을“자체-정체성”으로 간주하려는

입장에 반대한다. 그것이 루터주의이든, 칼뱅주의이든, 웨슬리주의이든간에 특정한

시대의 정통주의 정체성의 자기적 측면을 자체적 측면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들은

언제나 교조적 근본주의 유혹을 받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17세기 청교도

정통주의는 위대한 것이지만, 시대적“자기-정체성”의 측면을 영속적“자체-정체

성”의 측면으로 환원하려는 유혹으로부터의 치열한 전투의 필요성은 언제나 상존

한다.

Page 1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주제어

폴 리쾨르, 내러티브, 예수 해석학, 자체-정체성, 자기-정체성, 포스트모

던 정통주의. Paul Ricoeur, Narrative, Hermeneutics of Jesus, Idem-

identity, Ipse-Identity, Postmodern Orthodoxy.

접 수 일 2011년 6월 29일

심사(수정)일 2011년 7월 31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39

113) 논자는 반후저(Kevin Vanhoozer)의 최근 작업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가 주장하

는 이른바“비환원적정통주의”(nonreductive orthodoxy)는 교리를단순히 진리명

제로서가 아니라“신학의 인지적(cognitive), 정서적(affective), 화용적(pragmatic)

차원”모두를아우르는확장된 은유로 이해함으로써후기 자유주의, 바르트의후예

들, 칼 헨리의 후예들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약점을 창조적 대화를 통해 통합하여

모던 기초주의를 극복하려는“포스트모던 정통주의”의 대표적 시도로 읽혀지기 때

문이다. Kevin 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A Canonical-L i n g u i s t i c

Approach to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29-30.

다. 첫째, 포스트모던 정통주의 기독론은 사변적인 기독론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텍스트 중심성을 채택함으로써 성서의 예수와 사도행전과 바

울서신 등의 초대교회 이야기 등에 기초한 기독론을 개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도덕적으로 편향된 기독론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정통

주의적 기독론의 정체성을 견지하도록 하는 대속적 구속의 유일성, 성

육신, 기적, 부활, 삼위일체론과 같은 자체-정체성의 요소들을 중시함

으로써 예수를 위대한 도덕 교사로 간주하려는 유혹에 희생당하는 일

체의방향에 반대할 수 있기때문이다. 셋째, 실존주의적기독론에반대

한다. 왜냐하면 랑케가 주창했던“원래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

lich war)의 역사는 아니지만 텍스트 속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결코

배제하지않는예수그리스도해석학을추구할 수 있기때문이다.

결국 정통주의 기독론의 핵심적 교의 사수와 모던 인식론의 극복이

라는 문제 앞에서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은 기독교 정통주의 정체성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두 측면의 실현이 반드시 함께 요청된다. 하나는

물론 시간 속의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삼위일체, 대속적 구원의 유일성,

성육신, 부활등과같은“자체-정체성”의 측면들을영속적 기초로 고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는 각 시대 정통주의 신학담론의

주체들이 각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들과의 조우를 통해서 기독론의 핵

심논점들을달리했던 것처럼, 이 시대복음주의자들 역시가치상대주의

와 종교다원상황이라는 포스트모던 시대 지평이 제기하는 핵심논점들

과의 조우를 통해서“자기-정체성”의 측면을 재구성해 나갈 수 있는

신학담론의 주체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자는 이러한 정체성의

두 측면을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특정 시대지평에서 특정 신학담론 주

체들이 마련한“자기-정체성”을 영속적인“자체-정체성”으로 오해하

거나 강변하려는 유혹을 넘는 해법의 열쇠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것

은 바로 이 시대 복음주의 진영이 이른바“포스트모던 정통주의”를 추

구해야 할 절실한 이유이다.113)

2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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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n Attempt to Overcome“Hermeneutics of Jesus” of Modern Orthodoxy

through Paul Ricoeur’s Narrative Theory

Seok, Jong-Joon

Lecturer

Mokwon University & Korea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Daejeon, Korea

This essay critically considers the epistemological implications of

Paul Ricoeur’s Narrative Hermeneutics on the postmodern horizon,

which is applied to Christology, that overcomes the limitation of the

discourse of the modern orthodox theology. Orthodoxy holds to the

identity of orthodox Christology based on premise preposition that

“Jesus Christ, truly God and truly man, died and rose again to save

humankind.” This is a fact which cannot be compromised for all

orthodoxy(evangelicals) of all generations. Nevertheless, the fact that

evangelical camp today adheres to the identity needs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significance of the interpretative discipline,

which reiterates itself in any period and any circumstances. Ricoeur

actively argues that the narrative hermeneutics is an alternative

discourse that overcomes epistemological horizon of the modern

foundationlism which is not free from the temptation of the proposi-

tional reductionism since Descartes.

First, Ricoeur considers two meanings to a text. One is the sense,

which is the literal idea that is purely intrinsic in the text itself, and the

other is the reference, which is the intention or truth value that the

affects the reality. The main point is the emphasis on “the text cen-

trality”; that is, the reference is always possible through the sense and

석종준, 리쾨르의내러티브이론을 통한모던 정통주의“예수 해석학”극복을위한한 모색 245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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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실천신학으로서의

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1)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교, 조교수)

최근 몇 십 년 동안 신학자로서의 웨슬리 상(像)이 새롭게 연구되기

시작했다.2) 현대의 독자로 하여금 웨슬리 신학에 점점 빠지도록 끌어당

기는 웨슬리의 신학적 독특성과 영감은 무엇인가? 콜린 윌리암스는웨

슬리를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관련성 속에서 해석했다.3) 다른 많은

사람들은 웨슬리의 저작들에 함축된 신학의 질을 다양하게 평가했다.

가령, 랜디 매닥스, 토마스 오든, 케네스 콜린스는 웨슬리를 조직신학자

로 평가해줄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4) 또 다른 학자들은 현대신학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47-278

1) 제2회 전국조직신학자대회(2007년 4월 27-28일)에서“존 웨슬리의 해석학과 방법

론”이라는 제목으로발표했던것을수정하고보완한 것이다.

2) Randy L. Maddox(랜디 매닥스), “유산의 회복: 감리교 신학사에서 신학자 웨슬리,”

『웨슬리신학 다시보기』, 이후정 옮김, 기독교대한감리회홍보출판국, 2000, 281-3 0 2 ;

박종천,“웨슬리 신학의 새로운 동향,”『웨슬리와 감리교신학』,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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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llin Williams, John Wesley’s Theology Today (Nashville: Abingdon), 1960.

4) Randy L. Maddox, “Responsible Grace: The Systematic Nature of Wesley’s

Theology Reconsidered,”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19(2/1984): 7-22; Randy

is completed by the reading of the interpreter. Second, Ricoeur thinks

that every temporal events for human are reconstructed by creative and

irreducible mediating discourse, e.g., symbol, metaphor, or narrative.

In addition, circulations of these media always takes the three-s t e p

hermeneutical circular system: Mimesis I(prefiguration)-M i m e s i s

I I( c o n f i g u r a t i o n )-Mimesis I I I(refiguration). Third, for Ricoeur, the

narrative is a good model of explaining about history. A historical nar-

rative is clearly different from fiction, since narrative reconstructs the

past using the traces of reality. However, these traces cannot

reconstruct all of the past, and hence, the help of imagination is neces-

sary; therefore, relation to the fiction is an inevitable. This is the nature

of historical reality of the Gospel narratives as the reconstruction spaces

of the Jesus events. Fourth, Ricoeur emphasizes distinction between

two sides of the identity. One is “idem-identity”, which is permanent

nature. The other is “ipse-identity”, which is flexible nature. If we do

not keep in mind this distinction, we easily misunderstand or persist a

certain theological discourse in a certain horizon of a generation, that is

“ipse-identity”, to the permanent “idem-identity.”

Truly, the orthodox Christology has encountered challenges of

each generation and resulted the discourse of these days: “divinity

versus humanity” of Jesus in the time of Church Fathers, the nature of

the atonement in the middle ages, the range of the atonement and the

controversy of Holy Communion in the time of Reformation, or the

historicity of Jesus in Bible(historical Jesus versus Christ of faith) in

the modern times, etc. The most important issues of nowadays is

probably to justify the absoluteness of Jesus Christ confronting the

challenge of the relativism and religious pluralism. In conclusion, the

author argues that the contemporary evangelical camp should not

only maintain the eternal values of the identity but also positively

face the timely problems of each generation without fear or

hesitation, through the narrative hermeneutics of Ricoeur. Naturally,

the postmodern era demands the postmodern orthodoxy.

2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학의 특징을 실천성과 삶(生)의 적합성에서 찾는다. 웨슬리가 받은

살아 있는 전통과 유산에서 볼 때 그의 신학의 특징은 바른 이론을 탐

구하는 대학 중심의 학문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이 아니라 현재적 삶의

구원이 문제가 되는‘실험 신학이고 실천신학’(experimental and

practical divinity)이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9) 여기서‘실천신학’이라함

은 신학의 한 전문 분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방법과 근본

적 특성을 말함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웨슬리는 신학에 대한 용어

로서 ‘theologia’란 개념보다‘divinity’란 개념을 선호한다. 16~ 17세기

영국에서‘theologia’가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인 서술이었다면‘divini-

ty’란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취된 삼위 하나님의 구원교리를 말하

는 것으로서인간 구원의 본성과 방법이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였다. 이

구원론은 인간실존의 변화에 초점이 놓여 있으며 웨슬리는“마음과 삶

의 성화”, 곧“기독자의 완전”을 통해 구체화했다. ‘divinity’는 웨슬리

의 신학이 상아탑에서의 논리와 체계에 머무는 것이아니라 실제적 신

앙체험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변화, 그리고 설교와 선교를 목표로 한

신학임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그의 신학은 사변적이고 변증적인 교리

의 이해를 목표로 한 신학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신

앙의 활성화와 삶의 변화를 목표로 한 살아 있는 신학(living Theo-

logy)이다. 웨슬리는 신학의 이론보다는 신학의 실천적 적합성과 적응

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우린 사람이다. 한 마디로, 웨슬리의 신학은 신학

자들만을 위한 상아탑의 신학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신학이요 삶의변

화와성화를 위한신학이다.

웨슬리는 방대한 철학적 체계에 근거하여 신학을 전개하지 않았고,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49

9 ) Robert E.Cushman, John Wesley’s Experimental Divinity. Studies in Method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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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맥락에서 웨슬리를 재해석하고 있다.5) 또 다른 학자들은 서방의 종

교개혁 전통을 넘어 영국교회와 특히 동방교회의 전통 속에서 웨슬리

를 새롭게읽어내고 있다. 또한여전히 많은학자들이그리스도론, 구원

론, 성화론 등의 교리에 기여한 웨슬리의 신학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

다.6) 한국에서의 웨슬리에 관한 저술과 연구 그리고 번역 또한최근 점

증하고 있다.7)

20세기의 저명한 웨슬리 연구가 중 한 사람인 알버트 아우틀러는

웨슬리에게‘대중적 신학자’(folk-theologian)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명칭은“복잡한내용을 창조적으로단순화할수 있는놀라운 기술적 능

력을 가진 원숙한 신학자를 의미한다.”8)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웨슬리

2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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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an and Process Theologies in Dialogue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종교신학의 맥락에서, Al Truesdale with Kerl Mitchell, With Cords of Love. A

Wesleyan Response to Religious Pluralism (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2006).

6 ) John Deschner, Wesley’s christology, 1960; Kenneth J. Collins, Wesley on

Salvation: A Study in the Standard Sermons (Grand Rapids: Zondervan, 1989);

Harald Lindström, Wesley and Sanctifica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83).

7) 많은학자들 중에변선환, 조종남, 한영태, 이후정, 김홍기, 김진두, 김영선, 임승안, 오광

석 등이 있으며, 최근에 웨슬리 설교 전체와 [한국웨슬리학회편,『웨슬리 설교전집(7

권)』, 대한기독교서회, 2006] 논문집[한국웨슬리학회 편,『존 웨슬리 논문집I』, 한들출

판사, 2009)이 번역출간되었다.

8 ) Albert C.Outler, “John Wesley: Folk Theologian”, Theology Today 3 4 ( 2 / 1 9 7 7 ) :

150-160.

Page 1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웨슬리 신학과 메토디스트 운동도 대부분의

교회사나 사상사에서 거의제대로 평가받고 있지못한 실정이다. 그 이

유는무엇일까?

첫째, 나는 그 이유가 오랫동안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신학하기, 이른

바 스콜라적인 방법의 신학만을 학문으로 대접하는 신학계의 오래된

관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후기 스콜라주의 이후 그리스적-철학적 학

문이해가기독교 신학에서도 관철되었다. 여기서 학문은 최고의 원리로

부터 종교적 지식을 조직적이고 연역적으로 끌어내어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하나이고, 존재 그 자체이다. 이 진리에 대한 진술은

사실과 서술이 서로 상응해야 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일 수 있다. 진리

에 대한 모색은 인간의 인식 능력 안에서 참된 존재를 이해시키는 것

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이해는 다르다. 가령구약성경의진리개념은

스콜라적인 태도와 반대된다. 성경에서진리는 하나님께서말한말씀에

대한 신뢰성에서 비롯된다.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영원부터주어진 진리와 우리의 인식이 일치하는 데 있는 것이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비롯되고 하나님이 언제나 동행하는 길에 자

신을 맡기는 데 있다. 진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이며, 그

길의 목적은 희망, 곧 이 길이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게서끝난

다는 희망을 통해서만 규정된다. 이 길 위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길이 주

는 기회이며 동시에 풍요로움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진리에 대한 모

색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모험이다. 그 이유는 말씀이 끊임없이 새롭게

신뢰할 만한말씀으로입증되기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웨슬리를 유럽 대륙의 전통, 특히 독일의 신학 전통이

아니라 영국의 신학적 전통에서 평가해야 한다. 영국은 신학의 표준형

태들과 실천을 대륙(로마 가톨릭, 루터와 칼뱅)과는 달리 이해한다. 영

국교회는 진지한 신학 활동이란 교리에 대한 스콜라적 요약( s u m-

maries)이나 변호(defenses)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본보기를 좇아 신조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51

치밀한 논리적 전개로 신학을 사변적으로 조직하지 않았다. 가령, 아우

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적인 형이상학을 토대로 신학을 전개했으며, 토

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끌어들여 신학을 했고, 존

칼뱅은 체계적인 논리적 신학 책『기독교 강요』를 썼고, 슐라이어마허

는 기독교 신앙전체를 아우르는체계적인『신앙론』을 썼기에 신학사에

남는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런 체계적인

신학책을 저술한 학자가 아니다. 웨슬리는 설교와 전도및 사회적 행동

을 통해, 즉 신앙의 실천을 통해 신학을 전개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흔

히 복음전도와 영성형성의 방법을 위한 모델로서 제시되긴 했으나 신

학 방법론을 생산한 신학자로 봐오지 않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

다.10)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에게는 이렇다 말할 신학이 없는 것으로 여

겨져왔다.

폴 틸리히는 종교개혁 이후 유럽 대륙 여러 나라의 신학적 전통과

특징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11) 네덜란드는17세기의 데카르트주의의

영향으로 비판적 태도가 발전하여 자유주의 교회로 이어져 정통주의적

칼빈 교회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으나 신학적 해결은 없었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으로 기독교의 기반이 무너졌고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무신

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의 교회와 신학은 신앙부흥운동, 사회복음

운동, 사회윤리로 발전했으며, 영국의 특징은 성례전 문제, 정치 구조

문제, 윤리문제, 이신론 등이며 여기에 영국국교회의 자비와 위대성이

있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은 아니다. 그러나 틸리히의 출신

이기도 한 독일의 신학을 논하면서 그는19세기 독일의 변증적 사유의

발전과 신학 사상의 발전 등은 앞선 다른 대륙의 사상을 기반으로 발

전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신학에 흡수한 결과 탁월한

신학 사상을 생산했고, 이것이19세기와20세기초의 독일신학의 우위

2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0) 랭포드, “존웨슬리의신학방법,”『웨슬리신학다시보기』, 43-59중 43.

11) 폴 틸리히,『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송기득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20-22.

Page 1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서 나온 신학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학을 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방법론이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을 서술하는 분야이다.13) 철학에서 방법론은 탐구의 과

정과종류, 탐구로부터나온지식의 체계모두에 적용된다. 신학에서방

법론은 어떤 조건 하에서 신학적 주장이 참인가 하는 것을 해명하는

과정과 관련된다. 모든 신학자는 신학을 수행하면서 신학적 진술이 참

임을입증하는 도구들을필수적으로갖추어야한다.

I. 신학의4중규범

웨슬리는 신학을 철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

셨는가를 성경에서 찾아서, 경험에서 확인하는 것으로 신학을 전개한

다. 신학은 형이상학적으로존재를 추리해가는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사건을 통해무엇을 어떻게 행하셨는가를다루는 것이다. 웨슬리는

첫 연회(1744)에서 동역자들과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1)무엇

을 가르칠 것인가?(교리) (2)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반과속회의 조직)

(3) 무엇을 할 것인가?(교리와 장정)

웨슬리의 신학은 경험적이고 실천적이다.14) 웨슬리는 신학을 기독교

적인 삶과 기독교 신앙의 선포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

다. 신학은 진정한 삶과말씀선포 안에서 실현되는것이다. 신학을 위한

신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신학은 개인의 삶과 사회관계들을 변

화시키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신학은‘신앙에 대한 지적 이해’라기

보다는‘그리스도인의 삶의 갱신과 성화’를 목적으로 한다. 신학은 하

나님을 아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아는 것에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53

13) 김성원,『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학 방법의 유형에 관한개론적 고찰』(서울: 대

한기독교서회, 2001) 참조.

14) 랭포드, “존웨슬리의신학방법,”43f.

(creeds), 교리문답적 설교모음(collections of catechetical homilies),

예전들과 같은 자료를 만들고 생산하는 데 두었다. 그러나 앵글리칸 전

통의 신학적 특징을 모르고 대륙의 신학 전통을 기준으로 삼은 신학자

들은웨슬리의신학을 폄하했다.12)

앞에서 언급한바, 아우틀러는1960년대에 웨슬리의 신학을‘평민신

학’(folk theology)으로규정하고, 그의신학을 학문적인 신학과 구별하

였다. 웨슬리 신학의 가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가르침들을 단순

화하고 종합하고 전달하는 그의 능력에 있는 것이지 사변적인 학문적

인 신학에 대한 공헌에 있는것이 아니라는뜻이다. 그러나 아우틀러는

1980년대에 웨슬리의 이러한 신학적 모델이 그 자체로서 진정하고 창

조적인 형태라고 보기 시작했다. 웨슬리의 모델을 구태여 학문적인 신

학과 비교하여 평가절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의 전환

은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부터 기인한 것만이 아니라 지배적인

신학모델에 대한점증하는거북함을반영한 것이기도하다.

오늘날 학문적인 신학계에서는 기독교적 삶과 예배에 더 밀접히 연

관된 신학적 성찰에 대한이해와 실천을 회복하려는 진지한 요청이 증

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학문적인 신학에 평민적인 신학을 병렬하

여 그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신학의 지배적인 모델 자체

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틀러는 웨슬리

야말로 참된신학적 멘토(mentor)가 아닌가 반문한다.

나는 최근 웨슬리 신학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점증하는 이유를 바

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찾고자 한다.‘좋은 신학’이란 항상‘학문적’

(academic)이고‘체계적’(systematic)이어야 하는것은아니다. 이 연구

에서 나는 웨슬리 신학에 대한 점증하는 연구가 단지 한 교단적 배경

을 가진 신학자라는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웨슬리의 고유한 신학적 특

질, 곧 삶과신앙과 교회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하려는 목적에

2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2) 매닥스, “유산의 회복: 감리교 신학사에서 신학자웨슬리,”287.

Page 1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함께 여전히 강한 새로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웨슬리는 영국국교(성공

회)로부터 종교적 권위에 대한 방식을 전수받았다. 영국 국교회 지도자

들은성경적 권위의 우선성(대륙의 개신교)과 전통의 우선성(대륙의 로

마 가톨릭) 사이에서‘이성’을 내세우면서‘중도의 길’(via media,

middle way)을 개척하고 있었다.18) 웨슬리는 성경, 전통 그리고 이성을

종교의 권위로 받아들였다. 영국교회와비교하여 웨슬리의새로운 점은

이것들에 경험을 종교적 권위로 추가했다는 것이며, 기독교의 믿음, 가

치, 실천이 문제가 될 때마다 이 경험에 호소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험

을 방법론적으로그의목회와 신학및 그의모든저작에 적용했다.

웨슬리가 사중규범에 대한 언급을 명백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

날 웨슬리안들은 그가 자신의 신학을 지지하거나 변호하려고 했을 경

우 성경, 전통, 이성, 경험에 호소했다고 생각한다.19) 그렇지만 아우틀러

는‘웨슬리의 사중규범’이란 말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한,

기운찬 생각이 무너지게 된다고 경고했다.“‘웨슬리의 사중규범’은 웨

슬리의 신학에서 신학의 권위를 나타내는 사중적 가이드라인을 포함한

사 요소에 대한 은유로서 의도된 것이다. 그와 같은 사위일체

(quaternity)에서성경은 확실히 독특(unique)하다. 그러나 이어성경은

사도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에 나타난 모든 기독교 지혜와 문화에 의

하여조명된다. 또한성경은 애매모호함으로부터성경을 구출하기 위해

비판적 이성의 훈련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항상 성경의 계시는

믿음에 의하여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이‘경험’이 요청되

는 이유이다.”20)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55

18) W. Stephen Gunter, “The Quadrilateral and the ‘Middle Way’,” Wesley and the

Quadrilateral: Renewing the Conversa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17-

38) 참조.

19) Donald A. D. Thorsen, The Wesleyan Quadrilateral: Scripture, Tradition, Reason

and Experience as a Model of Evangelical Theology (Lexington: Emeth, 2005).

20) Outler, “Wesleyan Quadrilateral in John Wesley,”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20 (1/1985): 11.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

러한 웨슬리의 신학과 실천은 소위“웨슬리 신학의 사중규범”( t h e

Wesleyan quadrilateral)이라불리는 정식을 통해실행되고있다.

사중규범15)은 성경, 이성, 전통, 경험을 말한다. 이 정식은 웨슬리 학

자 알버트 아우틀러가 처음 사용한 신조어이며, 1972년 미국 감리교인

의 장정에 처음 등장하였고, 1992년 장정에 다시 기재되었다. 장정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살아있는 핵심은“성경 안에 계시되었으며, 전통에

의하여 조명되고,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경험 속에서 활력을 얻고, 이

성에 의하여 확증을 얻는다”16)고 설명한다. 한국의 감리교회도 웨슬리

의 사중규범을 신학을 위한 지침(guideline)으로 채택하고 있다:“기독

교대한감리회는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한국교회가

되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성경에 계시되었고, 전통에 의해조

명되고, 개인적 경험에 의해살아움직이게되며, 이성에의해확인된다

는 웨슬리의 유산을 계승하여 복음이 한국문화에 뿌리 내려열매 맺게

하는신학을 수립해야할 것이다.”17)

종교개혁 신학은 ‘sola scriptura’의 원칙으로부터 구원론의 원칙

(sola gratia, sola fide)과 신학의 원칙(solus Christus, Solus Deus)을

수립해 나간다. 그러나 이‘성경의 원칙’이 종교분열과 종교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성경의 원칙은 정통주의에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된다.

웨슬리는 종교개혁 2 0 0년 후, 18세기를 거의 온전히 살아낸 인물

(1703~ 1791)이다. 18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종교전쟁은 잠잠

해졌다. 그러나 종교(신앙)의 권위에 대한 문제는 계몽주의의 출현과

2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5) ‘quadrilateral’은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을 한꺼번에 말하는 용어인데 이 넷을 각각

분리하여 보아서는 안 되고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에‘사중(四重)’

으로 번역하고자 하며, 전통적으로 성서(norma normans)와 전통(norma normata)을

신학의 규범(norma)으로생각했기때문에‘quadrilateral’을 사중규범으로번역한다.

16) The Book of Discipline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1992 (Nashville: The

United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92), 50 (66); 병행정식을 보라, 76(68).

17)『기독교대한감리회교리와장정』48조.

Page 1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아네트는 웨슬리가 경험을 중시했지만 성경 안의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시했다고 주장한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 모든계시의 진리여부를

알 수 있으며 성경은 진리에로 인도하는 표준이다.22) 웨슬리는 분명히

성경으로부터시작하여 상황을 기술한다. 그러나 웨슬리는교리를 입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도들의 살아있는 신앙을 서술하기 위하여 성

경을사용한다. 그의 성경사용은 단지성경을 행위를 위한 교훈이나명

령(precept)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을 텍스트에서 적용으로

(from text to application), 교리에서 삶으로(from doctrine to life)와 같

은 식으로 사용하지않는다. 이와같은일방통행적이고지적인방향, 곧

‘성경→신학→실천’은 스콜라적인 교리적인궤도를 밟는 것이다. 웨슬

리의 성경사용은 일방통행적이 아니라 양방향적인 것이다. 바로 이 점

이 웨슬리가 성경을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신학의 원칙으로 삼지만

배타적인규범으로보지않는이유이다.

성경으로부터 삶으로, 삶으로부터 성경에로, 성경을 읽으면서성경을

마음에 쓰면서 성경을 풍부히 하고, 마음이 성경을 다시읽음으로써영

성이 깊어진다. 이러한 해석학적 운동은 본래적인 것이며 신앙적인 것

이며, 성령에 의하여 인도되는 것이며 기도로써 수행된다. 이러한 성경

해석은 머리를 포함하지만 마음을 중시한다. 성경과 이성, 성경과 전통,

성경과 경험은 서로 상호작용하고 보충한다. 그러나 이성, 전통, 경험은

성경적 진리를 바르게 해석하고 자기와 관련지으며 적용하기 위한 도

구로써 상호작용하는것이다.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57

John Wesley (NY: Oxford Univ. Press, 1964), 89-90에서인용.

2 2 ) William M. Arnett, “A Man of one Book”[John Wesley-man of one book: An

investigation of the centrality of the Bible in the life and works of John Wesley

with special emphasis on his labours as an interpreter of the New Testament.

I I. 성경

웨슬리보다 더 성경의 본래적 주제(Sache)에 충실한 신학자와 설교

가는 없다. 웨슬리는 계몽주의 시대의 영국 기독교가‘성경적 기독교’

(Scriptual Christianity)가 되기를 원했고 복음의 핵심인 구원도‘성경

적 구원‘(Scriptual Salvation)임을강조했으며 신도들 또한‘성경적그

리스도인’(Bible Christians)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설교의 전형적인

한 문단은 성경의 인용으로 빼곡하다. 인용부호가 없는 내용조차성경

에서 나온 단어이고 문장이다. 웨슬리의 의도는 성경의 메시지를 설교

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경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랐다. 웨슬리는 자신

과 다른 사람을 성경에 열중하면서 형성된 눈으로 이해한다. 웨슬리는

자신에게 성경이 어떤 다른 기준으로 측정될 때 참인지 물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기준을 성경을 통하여 보기 때문이

다. 성경에 대한 우위성은 교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실재이다. 이

실재가 웨슬리의 생각과 경험의 방법을 결정한다. 이 실재가 전통을 읽

어내는 방법을 형성한다. 웨슬리에게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사이에 실

재적 대립은 있을 수 없다. 성경의 우위성에 대한 웨슬리의 강력한 선

언이설교모음집“서문”에 실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시어 이 길을 가르치려고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한권의책 속에이 길을기록하셨습니다. 오! 주님 저에게그 책을 주소

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책을 저에게 주소서! 나는 그 책을

가지고있습니다. 여기에나를 위한충분한지식이 담겨져있습니다. 저

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

는 여기 분주한 인간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앉아 있고 하나님만

이 여기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현존 안에서 나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

을 발견하기 위해그분의책을펼쳐 읽습니다.21)

2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1) “Preface to Sermons on Several Occasions,” §5, Works 1:105-6., A. Outler(ed.),

Page 1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체현된 신실성의 정도에 대하여 자유롭게 판단한다. 그들이 다루었던

주제에 관하여 비판적 반성을 그치지 않는다. 웨슬리가 생각하기에 전

통의 권위는 그리스도교적 사고와 삶을 고무하며 풍성하게 하는 능력

에 있다. 그리스도교적사고와 삶을방해하는 인물과 저작, 신조와 고백

은 그것이 어떤종류의 것이든 제외되거나비판되었다.

IV. 이성

웨슬리는 당시 영국철학의 인식론적 논의의 새로움과 신학자로서

그 문제점을잘 알고 있었다. 웨슬리의 인식론적 측면은 오랫동안 무시

되어 왔다. 그런데 리처드 브랜트리가『로크, 웨슬리, 영국 낭만주의의

방법』24)에서 웨슬리와 영국 경험주의를 연구하였다. 브랜트리는 웨슬리

를 영국 정신사에 위치시켜 놓고 낭만주의의 발전에 괄목할만한 영향

을 끼쳤음을보여준다. 브랜트리는 웨슬리가 가장영향을 많이받은철

학은 경험주의였음에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의견을 같이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합리주의의 인식론적 요체인 생득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웨슬리가 경험철학에서 무시할 수 없

는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는 수동적으로 단순히 철학을

이어받아사용하지는않았다. 그는철학적 경험론을수용하면서독특한

신학적인 인식론, 곧 믿음의 교리를 경험론에 대한 응답으로 발전시켰

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과는 다른지각의형식이 있다는 것이며, 곧“영

적인감각론”25)이다.

웨슬리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 중 마지막 중요한 인물로 간주될 수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59

2 4 ) Richard E. Brantley, Locke, Wesley, and the Method of English Romanticism

(Gainesville: University of Florida Press, 1984).

2 5 ) 심광섭, “미학적 구원론. 영적 감각과 새창조,”『예술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77-313, 특히 282-291 참조.

I I I. 전통

웨슬리가‘한 책의 사람’이라는 말은 그가 성경만 읽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웨슬리는 매우 광범위하게 독서했으며 그것의 진가를 인정한다.

그는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 영국교회와 청교도주의, 대륙의 종교개혁과

경건주의, 중세의가톨릭신비주의 그리고 동방교부들로부터배운다.

우선, 웨슬리는 영국교회의 아들이다. 그는 영국교회에서 교회 전통

의 가치를 평가하는 훈련을 받는다. 영국교회의많은 회원과 같이웨슬

리는 후기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실천의 권위에 반대하여 초대교회

의 권위에 호소한다. 웨슬리가 영국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을 강하게 긍

정한 이유는 부분적으로로마가톨릭교회에반대하기위함이다. 이처럼

웨슬리의 쟁점은 그리스도교 과거 전체의 권위가 아니라 과거의 어떤

권위가 다른권위에 대하여 더 큰 권위를 갖는가 하는것이다. 이런 관

점에서 웨슬리는 성경 다음으로 초대교회와 영국교회, 특히 종교강령,

설교와 공동기도서를 꼽는다. 웨슬리는“성경과 고대교회와 영국교회를

사랑했다.”23) 고대교회와 영국교회에 대한 웨슬리의 사랑은 무비판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비판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자신의 운동의

경험에 근거해 있다. 웨슬리는 영국교회가 감리교 운동을 비판할 때 고

대교회에호소함으로써대응한다.

웨슬리는2세기의 교부들을 좋아했고, 라틴계 신학자들보다 그리스

신학자들을 더욱 좋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법적으로보다는 치

유적으로 이해한다. 웨슬리는 과거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생각하고 행한 것에서 배운다.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이러한 풍부한

자원을 알기 원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과거의 인물이나 교회의 정식에

2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3) “Farther Thoughts on Separation from the Church,” §1-2, Works (J ) 13:272-74.

인용과 이 주제에 관한 논의를 위하여 나는 다음의 책에서 덕을 입고 있다. A.

C a m p b e l l , John Wesley and Christian Antiquity: Religious Vision and Cultural

Change (Nashville: Kingswood Books, 1991, 6장.)

Page 1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던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대답이 지극히 현혹적이며 뒤틀렸음을 발

견하였다. 가령, 웨슬리는 라이프니츠(Leibniz)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다.“나는 그렇게 불쌍한 사상가를 좀처럼 읽어보지 못했다. 그는 감상

적이거나 화급한 성격의 사람이다”.27) 또 웨슬리는 흄(Hume)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지금까지세상에 나타났던 진리와 덕을 가장무례하

게 경멸한자이며…하나님과 인간 및 지상에서 신성하고 가치 있는 모

든 것에 대한공인된 적이다.”28) 웨슬리는 루소(Rousseau)에 대하여, 루

소의“판단력보다 그의 성품을 반대한다. 루소는 인간을 불신하고 있

다. 모든 것에 냉소적이다. 사실 루소는 신을 믿지 않는 형제 볼테르

(Voltaire)처럼거의멋만부리며 행동한다”.29)

그러나 웨슬리는, 이성적인 사람은 종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

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루터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종교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이성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가기에 모든 비이성적인 종교는 거짓 종

교입니다.”30) 웨슬리는 사람들이 진실로 성경적인 것과 완전히 합리적

인 것 사이에 제기하는이의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웨슬리

에게그와 같은긴장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종교와 과

학을 화해시키고자 했던 초기의 신중심적 합리주의[가령, 존 레이,『창

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고 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초

자연주의를 무조건 거부한 계몽주의와 대결한다. 18세기 영국에서 신

학자가 된다는 것은이신론과세속주의와싸우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이성과 성경사이의 통일성과거의 완전한 일치는“이성적

이며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진지한 호소”에 강력하게 나타나 있

다.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61

27) John Wesley, Journal 6:63 (May 22, 1775).

28) John Wesley, Jounal 5:303 (May 5, 1772).

29) John Wesley, Journal 5:353 (Feb.3,1770).

30) Letter to Tomas Rutherforth (March 28, 1768), Letters (Telford) 5:364.

있다. 예를 들어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이 종교

개혁의 위대한 목소리26)를 편집하면서 그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에서 시작하여 존 웨슬리(John Wesley)로 끝을 맺었다. 이것은 몇 가

지 점에서 타당하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히 사상가가 아니고 동시에 조직가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주요 가지들이 종교개혁가들의 사상과 작품에서 출발

했다. 이 주요한 가지들 중 하나가 웨슬리주의다. 웨슬리주의는 종교개

혁의 초기부터 시작되는 통상적인 운동의 분류-루터주의, 칼뱅주의/개

혁교회주의, 성공회주의자, 과격주의-에 포함될 수 없다. 웨슬리가 전

생애에 걸쳐 헌신적인 영국국교회주의자였음에도웨슬리 운동은 영국

교회와는 다른 관습, 다른 조직, 다른 자기이해를 갖고 있다. 이 차이는

부분적으로종교개혁의다른분파들의 영향에서기인하며, 또 부분적으

로 초기교회에 대한 영국교회의 관심을 웨슬리가 독특하게 수용했기

때문이며, 또한부분적으로웨슬리의개인적 기여에 그 원인이있다.

둘째,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초기 종교개혁자들과 근본적으로 같은

세계관 안에서 활동한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알 수 없었던 많은

과학적인 발견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도

전으로 보지 않는다. 웨슬리는 한편으로 성경의 세계관과 전통적 기독

교적 사고, 다른 한편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경

험하지 못했던 마지막 기독교 신학자이다. 이미그 당시 다른신학자들

은 이 긴장과 씨름하고 있었다. 즉 칸트, 헤겔, 슐라이어마허는 부분적

으로 근대 합리적 사고가 제시하는 새로운 도전과 논쟁하면서 이전과

는 전적으로 새로운 양식의 신학을 시작한다.

이것은 웨슬리가 당대의 중요한 세속적 사상가와 그들이 가고 있었

던 방향을 인식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웨슬리가 매우폭

넓게 독서했음에서드러난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들이 제기했던 물음을

2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 6 ) Harry Emerson Fosdick, Great Voices of the Reformation: An Anthology ( N e w

York: Random House, 1952).

Page 1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참된 종교는 마음의 문제이며, 생동하는 마음

은 직접적인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의 사역은 이성과 전혀 충돌을 일으

키지않으며 이성에 의하여 에워싸이지도 않는다. 웨슬리는성경적이면

서 이성적인 기독교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이성주의적

신관인 이신론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 이성을 경시하는 광신주의를

거부한다.33) 만일 기독교가 이성에서 떠난다면 기독교의 본질에서 떠나

는 것이다. 종교를 안다는 것은 생래적인 능력(이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높이고 향상시키는 것이다. 종교는 이성을 향상하고 지

향하며 완성한다. 이성과 신앙의 상보(相補)와 신앙을 통한 이성의 고

양, 이것은18세기 당시과학과 기독교가 서로대화했던 영국의 신학풍

토를반영한다.

V. 경험

영국교회와 신학이 인정한‘중도의 길’(via medeia)에서 성경, 이성,

전통은 많이다루어졌지만 경험의 역할에 주목한 인물은 거의없다. 웨

슬리의 공헌 중 하나는 신앙과 신학에서 경험의 역할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34)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웨슬리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성경은 그것을 언급하는 사람에게 명백한 신학의 근거이지만 경

험의빛에서 해석되어야한다.”35)

웨슬리에게 경험은 감정이나 감동만이 아니라 실재를 수용하고 참

된 실제적인세계에 참여하는 매개이다. 이 매개는 웨슬리 신학에서단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63

33) 데이비드햄튼, 『성령의제국』, 이은재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9), 59-88.

34) 테오도르 러년,“웨슬리 신학의 독특한 공헌,”이후정 옮김,『기독교사상』(2000년 2월

호), 153-165; 테오도르 러년,『새로운 창조』, 김고광 옮김(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홍

보출판국, 2001), 205-231.

35) Harald Lindström, Wesley and Sanctification: A Study in the Doctrine of Salvation

(London: Epworth, 1946; reprint, 1996), 5.

우리는 이제 이성에 기초를 두고 모든 점에서 여기에 동의할 수 있는

종교를 원하고 있다는데 당신과 의견을 일치하였다. 그러나 아직 한 가

지 문제점이 남아 있다. 도대체‘이성’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성이라

면 당신은 영원한 것, 사물의 본성, 신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 그 사이

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상호간의 관계, 이런 것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종교라 할 것이다.

즉 분명히 영원한 이성, 사물의 본성에 기초를 두고, 모든 면에서 거기

에 조화되는 종교를우리는전하고 있다.31)

그러나 웨슬리는 영국의 이신론적 전통에 반대한다. 이성은 본성을

인식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본성,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

과 신앙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이성의종교

가 아니다.

이성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이성으로 하라. 철저하게 이성을 적

용시켜라. 그리고 동시에신앙, 사랑과희망을주는 것에대해서는 이성

이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게 하라. 그리고 결국 참된

가치나본질적인행복을산출하지못함을시인하라.32)

웨슬리는 정확한 믿음의 체계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않

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웨슬리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인간

의 오류 가능성 그리고 죄와 그 결과로 이성은 계시의 독립적인 원천

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홀로 신학을 성사시킬

수 없으며 기독교의 덕을 생산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선행 은총의 덕

분으로 이성은 신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 이성은 성

경을 해석하는 길잡이며 신학적 이념이 표현되는 개념적 도구이기도

2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1) John Wesley, “An Earnest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28, Works

11: 55(“이성적으며종교적인사람들에게보내는호소,”『존웨슬리논문집 I』, 106).

32) John Wesley, “The Case of Reason Impartially Considered”, §I I.10, Works 2: 599.

Page 1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성경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경험으로써 성경적

주장을 입증하는것이다.

여기서 웨슬리에게 미친 경험 철학자 로크(John Locke, 1632-

1704)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로크는 실험적인 증거와 체험을 판단에

이르는 근원으로 삼고 있다. 웨슬리는 타락에 대한 성경적 설명에서부

터 시작하지 않고 인간악의 보편성과 지속성을 드러내는 그 당시의 역

사적 증거와 범례들을 경험적으로 불러 모으는 일로부터 시작했다. 여

기서 웨슬리신학이 요청하는 인식론은 실험적 지식임을 확인할 수 있

다.37)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올바른 교리에 대한지적 동의인“정통주의”

를 넘어 본래적인 경험에로, 곧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인이라는 성령의 내적증거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그래서 웨슬리는“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

교”(칸트)나“기독교의 합리성”(로크)보다“마음의 종교”38)를 선호한다.

마음의 종교는 이처럼 개인의 확신과 인격적 체험을 중시한다. 즉, 우리

의 마음이 종교의 형식으로부터종교의 능력으로돌아서는것이다.

기독교적인 경험은 기독교의 진리의 본질에 어떤 새로운 것을 덧붙

이거나 진리의 원천이 경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전통

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경험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

기에있다. 심미적 체험을 종교적 진리와 혼동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신

앙의 진리에서 경험의 독특한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에 힘을불

어넣어 신자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경험적으로 말하고 행하게

하는 데 있다. 즉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고도‘경험’을 추가함으로써 생

명력을 불어넣게 되어살아 있는진리로 된다는 것이다. 프랑크 베이커

의 주장대로 웨슬리의 경험은 사물에 대한 개인의 감각적 느낌이 아니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65

36) Thorsen, The Wesleyan Quadrilateral, 104ff. 참조.

37) 러년, 『새로운창조』, 111.

38) Richard B. Steele ed., “Heart Religion” in the Methodist Tradition and Related

Movements, Lanham, Maryland (London: The Scarecrow Press, 2001).

지 쓸모 있는첨가제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왜냐하

면 성경과 교리는 수미일관하게 경험을 통해 시험되어야 하기 때문이

다. 특히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경험이후, 경험은 성경을 언제나 확증

할 수 있다는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경험적 검증은 성경과 이성의

일치보다 더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그와같은 확증이 일어날 때까지 성

경의 진리는 추상적이고 심지어 가설적인 진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경험에서얻어진 확신이웨슬리가보는경험의 가장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이 주제를 논의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논의는

관련된 두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웨슬리가 호소하는

경험의 유형이다. 웨슬리가 언급하는 경험은 내적인 영적인 경험인가

혹은 메토디스트들의삶에서 관찰된 경험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웨

슬리가 경험에 호소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경험은 교리적

주장을 형성하는가 아니면 성경으로부터 추론된 교리를 확증하는가?

웨슬리의 경험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러한 논쟁은 그가 다루는 경험

의 서로 다른 맥락을 조심스럽게 구분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구원에 대한개인적 확신의 근원, 곧 성령에 대한경험을

고려함으로써, 둘째, 특정한 교리적 주장, 이를테면 성령의 증거와 같은

주장을 고려함으로써실마리를찾을수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들임에 대한 성령의 확증과 개인적

확신을 매우 본질적 것으로 강조한다. 그와같은 확신의 강고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적 감각(inward sensation)이다. 다시 말해 웨

슬리가 타당하다고 선언하는 확신의 경험은 인격적인 것으로서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 근거하여 웨슬리는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가? 그것이 바로 경험을 언급하는 둘째 맥락인 성령의 증거의 교

리이다. 물론웨슬리는 경험이 이 교리를 입증하기 위한 유일하고우선

적인 증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교리와 관련하여 성경의 주장

을 언급한다. 가령, 원죄론에 관한 긴 논문에서36) 웨슬리는 단지 인간의

일반적 경험을 언급하면서 인간 행동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2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어 해석된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보이고, 저쪽에서 보면 성경에 비추어

져 해석된 기독교인의 경험이 보인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모빌이 돌아

가면, 이번에는교회에 비추어져해석된, 혹은종교경험이나이성에 비

추어 해석된 성경을 보게 된다.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그의 설교, 저서

그리고 찬송가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성경, 교회전통, 종교적 경험,

이성이 서로가 서로를 상호적으로비추어준다는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사중규범’중에서도 웨슬리의 방법론적 기여

를 말한다면 단연 경험이다. 테오도르 러년은 웨슬리 신학에서 경험의

독특성을‘정통교리’( o r t h o d o x y )와‘정통행위’( o r t h o p r a x y )에 대하여

‘정통경험(orthopathy)이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설명하고 있다.40) 이

단에 맞서 교회를 지키고 세울 필요성이 있었던 고대교회나 교단의 고

백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 종교개혁 이후의 고백주의와 정통주의에서

정통교리를 강조했다면,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에서는 정통교리만으로

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정통행위를 강조한다. 복음의 수위성은 사회

의 질병을 드러내 알리고 그것을 바로 잡아가기 위해 실천하는 정통행

위에있다는 것이다. 정통행위의 강조는 분명오늘의 신앙과 교회로 하

여금사회적 실천에 눈을돌리게 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종교인이 된다

는 것, 신앙인이된다는 것은 지적차원에서의 교리적 승인이나 실천적

차원에서의 선행과 자비행 이전에 일어나야 할 존재의 사건, 곧 하나님

의 영이 일으키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경험을 포함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웨슬리는‘죽은 정통교리’를 통렬히 비난하면서 종교의 자리를

이렇게 제시한다.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67

40) 테오도르 러년, 『새로운 창조. 오늘의 웨슬리 신학』, 제5장: 205-2 3 3 . [ T h e o d o r e

Runyon, The New Creation. John Wesley’s Theology Toda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8, 146-167; 테오도르 러년, “Orthopathy: Wesleyan Criteria for

Religious Experience,” Richard B.Steele ed., “Heart Religion” in the Methodist

Tradition and Related Movements, 291-305.

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객관적 실재를 분석한 것이다.39) 웨슬리의

관심은 성령이 직접적으로 어떤 교리에 대한확신을 준다는 것이 아니

라 어느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혹은 사람들의 삶을 통

해 교리의 참됨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교리적 결단

을 위해평가한 경험의 유형은 삶을통해 얻은지혜(phronesis)와 같은

것이지 객관적인정보나 지식(episteme)같은것이아니다.

VI. 실천신학. 전통에의해조명되고이성에의해확증되는

성경적경험의신학

‘웨슬리안4중규범’은 성경의 우위성을 보존하며, 전통의 지혜로부

터 도움을 얻고, 비판적 이성의 학문을 받아들이며, 기독교의 은총경험

을 강조하고 은총에 책임적이며 실존적인 힘을 제공함으로써 신학이

실천적 신학, 곧 구원 받은 삶의 변화와 하나님의 형상의 재형성을 목

표로 삼는 신학의 집을 짓는 네 개의 기둥이다.‘4중적’이라는 용어는

신학자들에게 그들이 통상적으로 감당해야만 할 다음과 같은 책임을

묻는다. (1) 성경에 대한 비판적이며 동시에 신앙적인 친숙성, (2) 과거

기독교의 지혜를 알고 해석한 역사적 경험의 중요성, (3) 이성의 도구

적 역할에 대한흥미, (4) 하나님의 은총에 사로잡혀 신자의 삶 속에드

러나는 생생한경험의 증대등이다.

많은 웨슬리 신학자들은 신학의 기본 요소들인, 성경, 교회의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를 하나로 연결하여 기독교라는 마차를 끌고 가

는 네 마리의 말들로 묘사해 왔다. 이러한 견해와 달리 웨슬리는 이 네

가지 것들을 천장에 매달려 있는 유아용 모빌과 같이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가운데 있으며, 교회전통, 이성그리고 경험은 그 바깥

에서 빙 둘러 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쪽에서 보면 성경에 비추

2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9) F. Baker, John Wesley and the Church of England (Nashville: Abingdon, 1970), 24.

Page 1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 철학적인 성찰만이 아니라15세기 대륙간 바다 여행으로부터 시작

하여20세기 행성 간 우주여행 그리고 물질의 핵, 생물의 유전자, 인간

의 뉴론과 시냅스를 여행하면서 밝혀진 경험을 낱낱이 기술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술한 책들을 다 담아두기에 부족할 것 같은 어마어마

한 분량이다. 신학은 이러한 경험들을 반영하고 담아내며 의미를 부여

받고 부여한 신앙이론을 만들고 있는가? 신학이 경험에 충실해진다는

것은 예전처럼 전통에 충실 한다기보다 자신의 고유한 경험에 충실해

진다는 것이며, 전승된 텍스트의 권위대신 사물과 사건자체의 명증성

에 더 권위를 둔다는 것이며, 사변적인 사유 대신 감각과 몸이 인지한

것에더 무게를 둔다는 것이며, 성경과 교리의 객관적 진리보다는 주체

적 신앙의체험을 우선시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종교가 그렇지만 특히 기독교 신앙은 경험과 밀착되어 있다.

신앙인을 일컫는 증인이나 순례자라 하는 말은 신앙이란 생의 내부에

밀착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경험임을 강하게 암시

한다. 증인이란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생생한 경험을 말할 수

있고말해야하는 사람이다. 순례자란 끊임없이 길 가는나그네로서매

일 새로운 경험에 내맡긴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

의 진리이해는 경험과 뗄 수 없는관계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살아있

는 신앙으로서 생의충일한 경험속에서 자라난다.

에벨링(G. Ebeling)은 스콜라 신학에서‘경험’은 주변적인 개념인데

반해종교개혁자, 특히루터에게 경험은 매우자주 등장하는중요한 개

념이라는 연구를 내놨다.44) 루터는‘오직 경험만이 신학자를 만든다’

(sola experientia facit theologum)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경험은 경

건주의, 특히 아놀드(G. Arnold)의‘경험의 신학’(Theologia experi-

mentalis)을 거쳐 웨슬리에게 오면신학의4중 원칙중 하나가 되는중

요한자리를 차지한다. 슐라이어마허는경건주의적전통만이 아니라 경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69

44) G. Ebeling, Die Klage über das Erfahrungsdefizit in der Theologie als Frage nach

ihrer Sache, Wort und Glaube Bd. I I I, Tübingen: J.C.B.Mohr 1975, 3-28 중 9-10.

한 사람이 모든 점에서 정통이어서 바른 의견을 신봉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열심히 변호할지도 모릅니다. 그

는 우리 주님의 성육신에 대하여 또는 영원히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

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교리에 대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세 가지 신조 모두-사도신

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이라고 호칭되는 것-에 동의할지

도 모릅니다. 그러나그것역시 유대인, 터키인 혹은이방인과마찬가지

로 전혀종교를 갖지않았다는것일 수도있습니다.41)

웨슬리는 정통교리보다는 정통행위에 우선성을 둔다. 그러나 웨슬리

에 의하면, 올바른 것을 승인하는 것과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도 기독

교적인‘믿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웨슬리는 제삼의 것을 찾

았고, 그것을 러년은‘정통체험’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정통체험이란

“진정한 믿음의 표시인 영적 실재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과 참여를 의

미한다.”42) 웨슬리가 가장좋아한 성경본문 중 하나는“성령이 우리 영

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자녀임을증거하신다”(롬 8:16)였다.

경험이 부족하고 결핍된 신학은 밖으로부터 학자들의 책상놀음이요

울림과 감동이 없는 현학(玄學)이라는 비판을 받을뿐더러 안으로는 신

학의 메마름과 허약함을 초래한다.43) 신학의 경험 결핍은 지적인 삶과

감동적인 삶 안에서 전 인격과 관계하는 데 실패하고, 추상적이며합리

주의적 신앙구조로 전락하고 만다. 신학의 경험 결핍은 신학의 태생적

인 구성요소인가 아니면 상황에 의존된 것인가? 기독교 신학은 분명

근대 이후, 가속적으로 증가하는 경험의 홍수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

이 사실이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삶과 고통에 대한 주관적이

2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1) 존 웨슬리, 설교 7, “하나님나라에로의길,”I,06, 『웨슬리설교전집 1』, 136f.

42) 테오도르러년, 『새로운창조. 오늘의 웨슬리신학』, 209.[영문, 149]

43) William J. Abraham, Wesley for armchair theologians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 2005).

Page 1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 허물어질 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경험된 것에 의해 경험한 인간

이 대면하여 변화될 때, 그래서 경험 이후에 그 인간이 이 세상에서 다

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경험 이전과는 달리 존재할 때 실제적인 경험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성경적 진

리가인간의 신체적 감정 안에 새겨져야 한다. 가다머(H. G. Gadamer)

는 바로경험의 이러한 맞닥뜨림의성격과 변화의 성격을 잘 간파했다.

경험한 인간은 경험하기 이전의 인간과 다른인간이 된다. 그리고 경험

한 인간은 세계를 달리 보며 그 전과 달리세계와 관계 맺는다. 신학적

으로 표현하면,“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접촉되는 것, 이러한 참여, 이러

한 교제(koinonia)가 정확하게 말하여 변혁하는 능력이며 새로운 생명

을 가져오는능력이며하나님의형상을 갱신하는능력이다.”46)

경험의 참 뜻은 스스로 경험을 만들고 경험을 겪으며 자신의 삶을

실험에 내맡기면서 얻는 것이다. 겪음은 고난을 참고아픔을 견디고 위

기에서 버티다가 그것들을 스스로 긍정하고 체화하면서 기존의 현실을

뒤집어 새롭게 보고 드러내며 변혁하는 능력이며, 조개의 속살이 모래

에 상처나 진주가 되는기나긴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다양한

경험과학은 경험과 지식을 홍수처럼 쏟아내지만 참된 경험, 실존이 참

여된 맵고 짠 인생의 경험, 모질게 버티고, 독하게 견뎌내고, 지악하게

이겨낸 체험(Erlebnis)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런 체험에서만 비로

소 삶(Leben)과 앎(Lehre)은 하나가된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부으심 속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삶과 앎을 신학화하는 지성적 행위이며, 이는 곧 창작(poesis)

이다. 웨슬리에게 경험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를 지각하는 능

력이다. 가톨릭의 트렌트 공의회와 개신교의 정통주의 이후 서양 신학

은 지적이고 변증적인로고스(logos) 모델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되면

서, 근대 이후 앎(지식)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유일한 기구로 인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71

46) 러년, 『새로운창조. 오늘의웨슬리 신학』, 221(영문, 157).

험의 파토스를 새로운 방식으로 담아낸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을

종합한 경험의 신학자이다. 그가 남긴“신학자는 의심과 시련을 통해서

만 성숙하게 된다”는 유명한 말에 경험의 중요성이 담겨있다. 루터, 웨

슬리 그리고 슐라이어마허 세 사람 모두 신앙의 경험 관련성을 중시한

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에게 신학은 실천신학(theologia practica)이다.

20세기에 보프(L. Boff)는『해방하는 은총』에서“은총의 체험”을 말하

고, 몰트만(J.Moltmann)은『생명의영』에서하나님 경험과삶의경험의

일치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의 성령론을 성령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

다.45)

그러나‘경험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말의 뜻은 경험에 관하여 이야

기 하고 경험을 요청하고경험의 결과를 수용하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

이 아니다. 경험은 대상세계로부터 주어지는 수많은 데이터나 정보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아니다. 근대의 경험주의로 경험이 홍수처럼

몰려왔지만실험적이고과학적 경험은 경험의 객관성만 취한다. 과학의

객관성과 이론적 성격 때문에 그 경험으로 인한 주체의 변화는 별개의

문제이며, 오히려 주체의 변화대신과학의 객관성을 더 강조했다. 경험

과학을 수행하는 인간도 과학을 통해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 외적인 요소이

다. 과학에서는 주-객의 장벽이 높이 세워지게 되며, 객관을 주관에서

떼어내어 객관을 객관성 속에 세운다. 이렇게 될 때에만 과학의 정당성

은 확보된다.

그러나 종교적 경험은 이러한 과학적 경험과 다르다. 경험된 것이

단지 그 자체로서 보이거나 단순한 객체로서 나타남으로써 객관적으로

파악될 때 충분한 의미에서 실제적인 경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다.

실제적인 경험이란 근대 이후주체와 객체의 분열로 높게 쌓은 장애물

2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5) 레오나르도 보프,『해방하는 은총』, 김정수 옮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위르

겐 몰트만,『생명의 영』, 김균진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제1부“성령의

경험들”(36-116) 참조.

Page 1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럼 웨슬리안 전통이 오늘의 세계신학에 공헌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에서 경험의 정당한 역할을 터 닦았다는 것이며,48) 이로써

신학의 정당성을 생활세계 안에서 확보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의 가

장 본래적인 신학의 많은 부분이 경험의 우위성을 새롭게 강조함으로

써 가령, 여성의 경험, 환경파괴의 경험, 구조적 불의의 경험에서 나오

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한다.49) 경험 그 자체란 없다. 경험은 항

상 해석된 경험이다. 기독교 신학은 현대의 왜곡된 경험을 성경의 언어

를 통해이해하고바로세우며 치유하는‘실천신학’이 되어야 한다.

주제어

존 웨슬리, 방법론, 해석학, 성경, 전통, 이성, 경험, 경험적 신학, 실천신학

John Wesley, Methodology, Hermeneutics, Bible, Tradition, Reason,

Experience, Experimental Theology, Practical Divinity.

접 수 일 2011년 7월 4일

심사(수정)일 2011년 8월 1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73

48) 러년, 『새로운창조. 오늘의 웨슬리 신학』, 224.

49) 김성원, 앞의책, ‘제5장 경험적 신학 방법론,’158-195 참조.

정되었고, 앎이실천과 삶으로부터 분리된,“겉도는 말, 헛도는 삶”의 현

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삶과 무관한 앎이 대량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었고, 삶이삶과는 동떨어진 앎을익히느라 지치고 결국 앎에노

예살이하게 되었다. 앎은 삶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어

삶을 이끌어 가고지도하기 위해서 앎이 발전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이 앎이 다시 삶 속에 되먹임되지 않는다면 삶과는 상관없는 앎을 위

한 앎, 지식을 위한 지식이 된다. 이런 경우 앎은 죽은 앎이 되고 신앙

은 죽은신앙이 된다. 삶 속에 다시되먹임되지 않는 앎과신앙은 죽는

다. 앎과 삶의 분리된 데는 근대 합리주의의 영향이 크다. 합리주의는

몸과 마음을 분리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마음과 몸이 함께일한다고 보

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성자들은 한결같이 앎의 목적을 참된삶,

거룩한 삶에두었다. 사람이 삶을스스로 알고그리고 그 앎이삶을 통

해 형태화될 때 성도(聖徒)가 되는 것이다. 자기와 세계와 하나님은 제

각기 흩어진 떠돌이 점이 아니라 성경적 경험을 통해 한 삼각형을 이

루는 세 꼭지점이된다. 웨슬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소외된 인간의구원

자이며 현실을 해석하는 말씀이며, 역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고, 이런

모든 과정을 완성하는 분으로서 참된 삶의 길(hodos, 道)이 되심을 경

험을통해확신시킨다.

웨슬리 신학은 실천적이다. 개신교 신학에서 웨슬리 신학의 공헌은

그의 신학이 체계를 잘 갖춘 학문적인 교의신학이나 이성적인 변증신

학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거나, 인간의 상황 속에서 신학의 일

차적인 자료를 찾는상황신학이라는점에 있지않다. 웨슬리 신학의 특

징은 기독교의 선포와 기독교적인 삶을 지지하고 확장해주며, 그것이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 신실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학을 구성하는

‘실천신학’(practical divinity)이라는 데 있다.47) 러년이 확언하는 것처

2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7) 랭포드, “존웨슬리의신학방법,”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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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ractical Divinity as John Wesley’sTheological Methodology

Shim, Kwang-Seop

Adjunct Professor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Seoul, Korea

In this treatise, we will explore two tasks. One is to establish a

theological Methodology of John Wesley through studying deep into

a “Wesleyan quadrilateral”, scripture, tradition, reason and experi-

ence, and the other is to recover the own character of Wesley’s Theo-

logy. Wesley’s Theology is a experimental and practical Theology in

it’s integral sense. Wesley’s theological methodology justifies his

practical divinity.

In the history of protestant theology since reformation, Wesley’s

theology and Methodist movement did not receive a proper assess-

ment. I will point out two reasons for that. First, it is long-standing

tradition of theological prejudice, which estimate only the logical and

scientific method high. It give birth to intellectualism of Christian

Theology. Second, Wesley’s Theology should not be valuated ac-

cording to continental german tradition of dialectics, but according to

the tradition of anglican church, which focused on the christian life.

Wesley’s theology was growing up in other to overcome the concrete

problems of life, and to reform the church and nation. Theology, for

John Wesley, was intended to transform personal and social life.

심광섭, 실천신학으로서의존 웨슬리의신학방법론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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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악의기원과극복에대한신학적고찰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I. 서론

인간의 삶에는 늘 고통이 있다. 이 세상에는 고통이 넘쳐난다. 어쩌

면 인생에서 참된 기쁨이란 고통의 사막에서 드물게 만나는 오아시스

의 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라고 부른다. 고통은 우리의 생이 지속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나는 고통당한다. 그러므로 나

는 존재한다.”고통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우리

는 어떻게 고통과 맞서야 하는가?

기독교 신학은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실재 또는 현실을 악이라

고 부른다. 물론 이 악은 원천적으로 인간(악으로 고통 받은 그 당사자

는 아니라고 하더라도)이 자초한 것이다. 성서에 따르면 세계는 악의

세력에 묶여있다. 모든피조물이“허무한 것에굴복하여”있으며,“썩어

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으며,“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을 겪고”있다(롬 8:20-22). 엄청난 악의현실과 고통속에서 인간은 하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79-304

The most important significance of Wesley’s theology lies in the

experimentation and practicability. He achieves theses goals through

the four elements of Theology. Scripture is the fundamental source of

theological expression of John Wesley. For Wesley, the Chrsitian

tradition also plays a crucial role in theological understanding.

Theology should also make sense. Wesley has confidence in human

reason: common sense and clear thinking. Wesley also take Christian

experience to be a medium of theology, for scriptural teaching is

confirmed in evangelical experience. Theology has a practical goal:

Christian truth must be applied to both personal and social life.

In sum, Theology of John Wesley can be distinctively character-

ized as the scriptural Theology of experience, which is illumined by

church tradition and confirmed by human reason. Wesley’s Theology

as practical divinity entails transformation of human experience

empowered by the gracious working of the Holy Spirit. In his theo-

logy doctrine directs life, the creed is made incarnate, and the

humanit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It’s goal is “holiness of

heart and life,” or “Christian perfection”.

2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하나님의 섭리의 불가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악이란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감추어진 수수께끼이다. 의인의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욥기에 관해주석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의지혜와 능력

과 순전함을 기술함에 있어서, 욥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인간의

어리석음, 무능함, 부패함을 일깨워 주는 가운데 우리를 압도하는 강력

한 주장을 표현해 준다.”2) 악과 고통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불가해성을 인정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겸손한 그리고 올바른 태도

라고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서 인간을 연단하시고 교육하신다

는 답변이다. 즉 고통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으며 영적인 성장

의 기회를 제공한다.“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성서는 우리에게 질병, 전쟁, 그리고 이

와 같은 종류의 다른 재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스리기 위한

징벌이라고 가르친다.”3) 질병과 전쟁과 같은 재난들이 우리의 죄에 대

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분명히 위험한 생각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사랑의 매를 들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

못을 회개하고 이 땅의 헛된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하늘의 신령한 것

을 바라보도록훈련시키시는 것은사실이다.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배워

서 온전하게 되어가야 한다.“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

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되셨은 즉”(히 5:8).

세 번째는 악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구

약성서에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는 죽음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81

나님의 부재를 경험한다.“고통은 어느 순간 동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1)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것 같은

고통스런 악의 현실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부르짖는다.“주여

언제까지니이까?”(시 13: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15:34).

악의 현실과 고통의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믿는 신앙에 중대한 도전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과 세계의 끔찍한 재난들로 인해 도전을

받는다. 제1, 2차 세계 대전,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 그리고 최

근의 후쿠시마 등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현대인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

렇게 많은 악을 허용할 수 있는지를 묻는데 그치지 않고 그렇게 많은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것은 이른바 신

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문제이다. 그렇게 엄청난 악에 직면하여 어떻

게 하나님의 주권을 계속해서 긍정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한 분이라면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많은 악이존재하는가? 아니, 과

연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은존재하시는가?

이 글의 관심의 주된 초점은 신정론 자체의 문제 즉 악과 고통의 현

실에 있어서의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에 있지 않다. 사

실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최종적인 답은 존재하

기 어렵다. 우리인간에게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완전한 해결이란존재

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사 55:8-9; 욥 9:126). 이 글의주된 관심은 무

엇보다 악의극복또는정복을위한길을새롭게확인하는데있다.

I I. 악의문제에대한전통적인신학적답변

악의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적 답변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2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 Simone Weil, Waiting for God (New York: Harper & Row, 1976), 120.

2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s, ed. John T. McNeill (Phila-

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1.1.3.

3) Dorothee Sölle, Suffering (Phiadelphia: Fortress Press, 1975), 24에서재인용.

Page 1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위해서는악의기원에 대한논의가 선행적으로요구된다.

I I I. 악의기원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악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지 않다.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악이 나올수 없다. 만일악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면

하나님은 악에책임을 져야 하며, 따라서 신정론의 물음에 대하여 답변

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악의 기원을 창조세계

안에서 그리고 특히 인간에게서 발견해 왔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야기는 악의인간학적기원에 대한이야기이다.

1. 창조세계와인간

창조에 관해서 두 가지 점이 언급될 필요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창

조(인간을 포함한)는 선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이 선함은 창조세계가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창조

세계는, 인간을 포함하여,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불완전하

다. 데이비스에 의하면, 창조세계는 추하거나 혼란스러운 혼돈(chaos)

이 아니라 조화롭고 아름답고 순조롭게 운행되는 우주(cosmos)라는

의미에서 선하다.4) 더욱이 창조세계는 조화 가운데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때문에 근본적으로 선하다.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로서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본래적으로하나님처럼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

세계와의 연합 안에서 인간은 본래적으로 선하다. 본래적인 창조세계

안에악은존재하지않는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대한신학적고찰 283

4) Stephen T. Davis, “Free Will and Evil,” Encountering Evil, ed. Stephen T. Davis

(Atlanta: John Knox Press, 1981), 73.

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잉태하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으며, 에

덴에서 추방당하였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장).

따라서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악을죄의 결과로 간주해 왔다. 특히

어거스틴의신정론은악을 죄의결과로 간주한다.

이 세 가지 답변은 각기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모두

정당하다. 이 셋은서로배타적이거나 모순적인 관계에 있지않다. 이것

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안에서 각기 적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 이 답변들은 각기 모든 악과 고통의 경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

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장님 된 사람이 자신의 죄 또는 부모의 죄로

인하여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요 9:1-3), 실로암의 탑이 무너진

것이 실로암의 사람들이 특별히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눅 13:4). 악의 현실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는 답변은 성서에 기초

한 것이며 또한 고전적인신학 전통이지만 그것이 모든 구체적이고 개

별적인 악의현실에 대한유일한 답변이 되는것은 아니다. 또한 이 세

가지 답변은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때 공통적으로 악에 대한인간의 저

항을 약화시킬 위험성을 내포한다. 악이인간의 죄에 대한하나님의 심

판이라고 주장하는 신정론은 때로 악을 초래한 가해자(학살자)를 망각

하고 무고한 피해자를 정죄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악의세력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킬 수 있다. 또한고통이 인간을 연단시키고 영적으로 성

숙케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고통을 다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것

으로 보는 시각은 불의로 인한 피해자들의 외침을 억압하거나 압제받

는 자의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의 불가해

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태도는 우리를 분노케 하는 악과 고통의

현실에 직면하여 모든 질문을 억누르고 고통에 무조건 순응하는 자세

를 가져올 수도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답변들을 구체적인 악의 현

실에적용할 때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이해를 전제하고, 이제 우리는 악의 기원과 극복에 관한

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악의 극복과 정복을 위한 길을 찾기

2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간의 피조물적 본성은 유한성, 의존성, 그리고“자연의 자녀”의 불

충분성을 지시한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성과 가변성은 악도 아니며 죄

의 기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자체로서선하다. 왜냐하면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한성과필멸성

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드러내기 때문에 선하다. 인간

은 최고의 자기초월의 상태에 있어서도 유한성과 필멸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유한성과 필멸성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질

적 차이를 예증한다.

그 안에서 무한한 자기초월의 자유와 유한성이 공존하는 인간은 역

설적 존재이다. 이 역설적 상황은 인간에 의해 잘못 이해될 때 유혹의

계기가 된다. 즉 인간이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며 최종적으로세계 전체

라고 잘못 생각할 때 그렇게 된다. 여기서 불안(anxiety)이 생겨난다.

니버에 따르면, 불안은 유혹의 내적 상태이며, 죄의 내적 선행조건이

다.6) 인간은 자신의 삶이 제한되어 있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불안하다.

인간의 불안 속에서 자신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불안

이 죄는 아니다. 불안은 신앙에 의해 안전감으로 변화될 수 있다. 역설

적 상황의 인간에게 신앙은 이상적인 가능성이다. 신앙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의존성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안에서 안

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은 죄악된 자기주장을 향한불안의 경향성

을 제거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기독교 신학은 불신앙을 죄의 뿌리로

정의한다. 죄는 역설적인 인간의 본질적 상태에 의해 필연적으로

(necessarily) 초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역설적 상황은 유혹과 불

안을수반하며, 이로부터불가피하게(inevitably) 죄가초래된다.7)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대한신학적고찰 285

6) 앞의책, 182.

7) 앞의책, 251-254.

기제한을 통해서 자신과 구별되는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유한자는 무한자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의 대상으로서, 세계는 창조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다. 시간성과

우연성의 세계를 창조하고 포괄하기 위한하나님의 자기제한은 하나님

의 전능성의 증거이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자기제한을 통해 세

계를 창조하시고 동시에 그것을 포함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제한

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와

결정을 무시하거나 인간의 운명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시지 않는다는 것

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은 인간의 진정한 가능성과 창조성의

근거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악의 인간학적 기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

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부인 인간

의 본성은 역설적이다. 한편으로, 피조물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

은 유한하며, 다른 한편으로, 미결정적인 가능성에 있어서 인간은 자유

롭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자의식을가지고 자신을 객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기초월안에

있는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기결정

의 능력은 자유 안에 있는 인간의 본질적 능력이다. 인간은 단지 특수

한 행위를 선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선택한다. 니버에 따

르면,

인간은 자연적 과정에 의해 자신에게 제시된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연적 과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기 결정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체 목적(total end)을

선택함으로써자신을초월해야 한다는의미에서자기 결정적이다.5)

2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5)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1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4), 162-163.

Page 1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불안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발생함에도불구하고 유혹과 불안은 죄의원

인이 아니다. 다른 그 무엇에 의해 야기되는 죄는 죄가 아니다. 왜냐하

면 그럴 경우에 인간은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원

죄란 자유의 첫 번째 오용을 의미한다. 이 첫 번째죄와 더불어 운명이

숙명이된다. 그리고 이후로 자유는 숙명의 굴레에 사로잡히게된다. 죄

의 숙명성은 죄가 초주체적 힘, 즉 악의 세력으로 작용하게 됨을 의미

한다. 보편적 죄의 숙명성, 즉 악의 세력 아래서 자신의 본래적 실존으

로부터 소외된 실존이 인간의 실존이다. 이러한 실존적 소외에 있어서,

자유는 불가피하게 죄가 된다. 성서에서 원죄 이야기에서 유혹은 악마

(뱀)에 의해 상징화된다. 즉 인간은 악마의 유혹에 의해 죄를 짓게 된

다. 그러나 악마는 인간의 죄의 원천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책

임을 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악마(뱀)은 죄와 악의 기원을 상징하

는 실재가 결코 아니다. 인간은 타자에 의해 속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속은것이며, 따라서 스스로 죄에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면, 죄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죄의 뿌리는 불

신앙이다. 불신앙은 하나님의의지로부터 인간의 의지의 분리를포함한

다.10) 이 분리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본질적 일치성을 상실하였

다. 불신앙의 동기는 교만(hubris)이다.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향하여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자아와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

다. 교만의 유혹은 유한성과 무한성 사이에 놓여있다. 교만은 자신의 유

한한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자기

고양(self-elevation)을 의미한다. 교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유한

성을 인정하지 않도록 만든다.11) 자신의 유한성으로부터 말미암는 우연

성, 불안전성, 약함, 시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실재 전체를 자

신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자신을 보편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87

10)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5), 47-48.

11) 앞의 책, 51.

2. 죄

틸리히는 인간의 행동과 역사를 자유와 운명의 양극적 구조로 구성

되는 존재론적구조 안에서 설명한다.8) 운명은 현실화된 이전의 자유로

서 이미 완결된 행동과 그로 말미암은 현실을 가리킨다. 자유는 아직

현실화되지않은 가능성이며책임성의 자리이다. 운명은 주어진 소여성

으로서 모든 새로운 가능성과 행동을 위한 조건이며 출발점이다. 운명

과 자유의 관계는 오직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행위 안에서만 이해 가능

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거로서, 시간적 과정을 창조, 유지, 지

탱하신다. 하나님은 완결된 과거를 현재 안에 보존하심으로써 그것이

자유와 연합하도록하신다. 하나님은자기제한을통해 인간에게 진정한

가능성을 열어주심으로써인간의 창조성의 근거와 원천이 되신다. 궁극

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종말의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나아

가도록 비전을 주시고인간의 행위를 인도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진정한 자유 안에서의 열린 가능성을

허용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통해 인도됨에도 불구하고 신앙

의 이상적 가능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하고 죄에 빠진다. 니버의 표현을

빌면, 역설적 상황으로부터 초래되는 필연적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

고,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모든 행위에 있어서 죄를 짓는다.9)

죄는 인간 실존의 불가피한 결과이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

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죄는 인간의 본질

적 본성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는 보편적이란 의미에서 불가피하

다. 그러면 이 불가피성과 보편성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기독교 신학은

원죄 교리를 이에대한 답변으로제시한다. 원죄 교리가 의미하는바는

죄가 그 자체 외에 다른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가 유혹과

2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8 )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1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182-186.

9)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94.

Page 1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악은 하나님 상실로부터 온다. 악은 하나님

상실과 세계상실로서, 언제나 파괴적 힘으로 경험된다. 파괴적 힘은모

든 문제, 고통, 소외, 배반, 유기, 재앙, 질병, 죽음을 불러온다. 이 파괴적

힘은 단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영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생

동안 이 모든 것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 죄가 불가피하고 보편적인 것

처럼고통도 그러하다. 고통이 인간의 삶이된다.

하나님은 악과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악의

현실은 인간의 자유의 오용, 즉 교만으로서의죄에 의해초래된 결과이

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탱하시며, 인간에

게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비전을 제공해주신다. 그러

나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적 의도를 결정하시지는 않는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를“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시는

것(롬 1:26)이다. 이 내버려두심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이

다. 이러한 의미에서, 피조물의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임재

의 결과가아닌하나님의비활동과부재의 결과라고할 수 있다.12)

악의 실재는 본래적인 창조질서의 존재론적 구조(structure)가 파괴

(destruction)된 것이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면, 자유와 운명, 개체성과

참여, 역동성과 형식의 존재론적 구조가 파괴된 현실이 악의 구조이다.

파괴가 실재 전체 안에서 독립적인 자리를 갖지 못하고 구조에 의존하

며 구조안에서 구조에 대하여 파괴적으로행동하는 것처럼, 파괴적 힘

은 독립적이고 실제적인 자리를 갖지못한다. 그것은 존재의 힘에 의존

하는 비존재의 힘이며, 생명의 힘에 의존하는 죽음의 힘이다. 이 힘은

거짓된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악을무 또는 없음이라고 묘사

했다.13) 물체가 있는 곳에 생기는 그림자처럼, 악은 실재에 기생하는 비

실재즉 무이다. 이 무로서의 악의세력은 어둠과 같다. 어둠이 빛 앞에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89

12) Arthur C. McGill, Suffering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2), 86.

13)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 I I/3 (Edinburgh: T.&T. Clark, 1960), 349-363 참

고.

실패하며, 여기서 보편적 숙명으로서의악의현실이 출현한다.

3. 악의현실

자기고양과 자기집중으로서의교만의 목표와는 반대로, 죄는 하나님

과 세상으로부터의소외를 초래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로부터소외

됨으로써‘하나님 상실’과 이에 의해 수반되는‘세계 상실’의 상황으로

전락한다. 이 상황은 바로 악의 현실이다. 악은 죄의 펼연적인 결과이

다. 죄(교만)가 유한한 자아가 만물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시도라면, 악

은 자아가 그 어떤 것의 중심도 되지 못하는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를 모두 상실한다. 하나님 상실은 인간의 내면에 그 원인

을 갖는 도덕적 악을 수반한다. 도덕적 또는 역사적 악은 피조물의 죄

의 인위적 결과이다. 도덕적 악은 인간이 자신의 결정에 따라 행하며

스스로 책임져야 할 악들이다. 전쟁, 살인, 배신, 폭력, 가혹 행위 등의

모든 사회적, 역사적 범죄가 이에 해당되며 가장극단적인 경우로서 아

우슈비츠의엄청난 악의현실이 이에속한다.

세계 상실은 자연적 악을 수반한다. 자연적 악은 인간이 환경적 영

향의 굴레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적 악이 그 원인을 인간의

안에 갖는지 인간의 밖에 갖는지는 한 마디로 단정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성서는 땅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저주를 받고”,“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되었다(창 3:17-18)고 말씀한다. 이것은 자연적 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음을 함축한다. 자연적 악은 질병, 사고, 지진, 화재,

홍수 등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부상과 고통을 지칭한다. 고통, 질병, 슬

픔, 실패, 무능력과 같은인간의 연약함과유한성 그리고 죽음의 필연성

등은 그 자체가 악은 아니며, 그 중의 어떤 것은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삶의 선함가운데 속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의 질

서 안에서 어떠한 선으로도 보상되지 않는 엄청난 형태의 악과 고통에

직면한다.

2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통적 신학은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규범이 되는‘그리스도안에나타난 계시’를 섭리론에적용하지못하고

하나님을‘사악한하나님’(sinister deity)으로만들었다는것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측면들을 세 가지관점, 즉‘보존’(preserving), ‘동행’

(accompanying), ‘통치’(ruling)의 관점에서 재규정한다.14) 첫째, 피조물

에 대한 하나님의‘보존’은 전능성을 임의대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약의 동반자로 선택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의 표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존의

행위는 섬기는 행위이며, 피조물에 대한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이며, 피

조물이 은혜의 계약 가운데 참여하도록 능력을 주며 지탱해 준다. 둘

째, 하나님은 피조물이 자신의 활력과 자유를 행사하도록 허락하는 가

운데 피조물과‘동행’하신다.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폭

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유로운 행위를 존중한

다는 것을 뜻한다. 피조물은 단지 창조자의 손에 놓여있는 꼭두각시이

거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유한한 자율(finite autonomy)

을 존중하는가운데 다스린다.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계시된

‘하나님의 삶에 일치하며 걸맞는 방법’이다. 셋째, 하나님은 피조물을

그 목표로 인도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통치’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

령으로 통치하신다.“하나님은 자유의 세계 안에서 다스리신다.”15)“하

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을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

시며, 모든것 안에계시지만, 그렇다고하나님이유일한 행위자인 것은

아니다. 피조물과교제를 가지기를원하시는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신

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자유도 허락하신다.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91

14) 앞의책, 58 이하.

15) 앞의책, 93.

서 순식간에 사라지듯이, 악의 세력은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빛

가운데 있는하나님의자녀앞에서 즉시사라진다.

I V. 악의극복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악의 기원은 인간에게 있지만, 악의 극복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있지 않다. 인간은 초주체화된 악의 우주적 보편

성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이 소외된 인간 실존의 비극적 숙명이다. 악의

최종적인 극복과 정복은 하나님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악의 극복과 정

복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통하여,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 하나님의 고난을 통하여 결정적으로성취되었으며 종말론적 미래에

완성될 것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고난은

은총과 행위, 선물과 과제의 변증법적 관계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서의그리스도인의고난을 요구한다.

1. 하나님의섭리

오늘날의 가공할 악과 고통의 현실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섭리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전통적인 섭리론에서 종종당연시되어온

생각들, 곧 모든 사건은 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었으며따라

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생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피조물의자유를 모두존중하는 방향으로

섭리론을 재정립하려고노력해 왔다. 바르트에따르면 전통적 섭리론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상정하는 비극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정통적 개혁신학의 섭리론은‘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신에 의하

여 결정된 것’이라는 스토아적 숙명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2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는, 미래의 개방성이다. 하나님의 자기제

한에 의해 인간과 세계에 진정한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인간과 세계

의 미래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창조적 또는 파괴적 가능성에

열려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진정한 자유가 허락된 인간과의 관계에

서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설득적인 힘에 의해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특히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설득적인 힘에

의해 섭리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힘이 바로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힘이다. 이 자기희생적인사랑의 힘이역사 속에서 결정적으로 예수그

리스도 안에나타났다.

2. 예수그리스도안에서의하나님의고난

악과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은 없지만, 이해 가능하고

설득력 있는 한 가지 답변은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파트너십 안에서 함

께 고통당하는 분으로서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

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폭력적인 힘에 있지 않고

사랑의 힘에 있다.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사랑의 능력 안에서 온 우주

를 통치하시고섭리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절대군주적인강압적 지배

의 통치가 아니라 고통당하는 자기희생적인사랑의 통치이다.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무감각하며 세상으로부터의 영향을 수용

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신실한 사랑 가운데 자유롭게

세상안에참여하며 영향을 수용하며 상처받는 존재이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삶의 새로운 가치의 창조와 아름다움

과 함께 발생하는 삶의 고통, 실패, 그리고 황폐를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분으로 이해하면서,“위대한 동반자-이해하며 함께 고통당하는

친구”(the great companion- the fellow-sufferer who understands)로

묘사하였다.17) 피조물 안에 숨어있는 악의 파괴성은 하나님의 위세에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93

의 전능함에 대한 선입견을 거부하고 지배와‘통제의 논리’에 기초한

섭리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

을 맞추는 가운데 기독교적인섭리론의새 방향을 제시한다.

다니엘 밀리오리는 바르트의 섭리론의 틀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중

심적, 삼위일체적 신정론을 제시한다. 그는 승리주의적인‘통제의 논리’

가 아닌 세계의 창조자와 구속자와 완성자로서의‘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논리’를 강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은 무조건적인 전능

이기보다는 고통당하며 자유케 하고 화해케 하는 사랑의 힘이다. 하나

님의삼위일체적섭리는 보존, 동행, 다스림으로이루어진다.16)

오늘날의 신학자들의 섭리론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과 세계의 상

호적인 관계성에 대한 강조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적 관계성은

2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6) 첫째, 창조자이자 섭리자인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이 유지되고 고양되는 곳에서 역사

할 뿐 아니라생명을 위태롭게하고그 성취를방해하는모든것을저항하고 심판하

는 곳에서도 또한 역사한다. 하나님의 보존은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역사할 뿐 아니

라 악에 대하여 우리가 인내하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저항함을 통하여 또한 역사한

다. 둘째, 구속자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의경험의 최고 상태나 최저 상태에서 모두

역사하는데, 피조물이 강하고 활동적일 때 뿐 아니라 피조물이 약하고 피동적일 때

에도 역시 역사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보존과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과의 싸움 속에

서만 역사하시는 것이아니라, 또한그 활동과 고통 가운데에서 피조물과 함께 밀접

하게 동행하신다. 이스라엘과의 계약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은 피조물의 활동 가운데 함께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고뇌와 죽음 가

운데서도 함께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희생자들과 함께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삶을

새롭게 긍정한다. 셋째, 성화자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며 변혁하는 가운데 모든 곳에서 역사한다. 성령은

신음하는 피조물을 변혁시키며 피조물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의 완

성을 향하여 인도한다. 하나님은 각 개인의 삶의사건과 역사의 모든 사건 가운데서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함께 죽음보다 강한 희생적 사랑의 능

력으로 자유와 죄와고통의 세계를 다스리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Daniel 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ing Company, 1991),

116-119. 한글 번역판으로『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장경철

옮김(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2002)이 있다.

Page 1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나됨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며아

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

의 삼위일체적인 사건으로 잘 묘사하였다.“그러나 그(예수)를 버리고

내어주는 아버지는 무한한 사랑의 슬픔 안에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

여 고통당한다.…아들은 죽음의 고통을 당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

을 고통당한다.”19) 몰트만에 따르면, 아들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세계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고통과 죽음을 경험한다. 아들을 구원

의 사역을 위하여 보낸 아버지도 역시 사랑하는 아들을 상실하는 슬픔

을 경험한다. 이러한 공유된 고통의 사랑의 사건으로부터 새로운 삶과

세계변혁의 성령이 출원한다. 세계의 모든 고통은 아들의 수난과 아버

지의 슬픔과 성령의 위로 안에 다 감싸진다. 성령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고 만물의 새롭게 됨을 위하여 기도하고 힘쓰도록 돕는

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통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승리와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 안에의 피조물의 참여에 대한 희망과 연

결시킨다.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상징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심으로 이 세

상의 악과 고통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상징이다. 하나님

은 악의 허용자가 아니라 희생자이며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대신

고통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분은 희생당했기 때문에 승리한

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회퍼는“성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무력함과 고

통으로 인도한다. 오직 고통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20)고 말했

다. 신정론의문제는 십자가에 못 박힌하나님 앞에서 침묵한다.

맥길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악의 힘은 회피되거나 저지되지 않았다.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95

의해 극복되기보다는 하나님의 고통당하는 사랑의 힘에의해서만 극복

된다. 고통당하는 자기희생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고통을 참

으로경험하면서정복한다.

기독교의 성육신 사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소

외된실존 안에서 파괴적인 악의 힘에 의해 고통당하는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시기위해서 아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

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소외된

실존에 참여하셨으며, 종국적으로 그것을 정복하심으로써 인간과 하나

님의 재연합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

떻게 죄로 인하여 소외된 인간 실존을 정복하였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서 결정적으로 현시된 하나님의 고통당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서이다. 십자가 사건은 단지한 인간 예수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되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

시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사랑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무한히 이타적

인 사랑 즉 아가페가 미움과 증오를 동반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과 만날 때, 이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피하게 고통을 당한

다. 따라서 고통은 아가페의본질적 요소이다. 이 고통당하는사랑의 대

리적희생은 죄악된 인간의 구원을 가져온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은인

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의 고통을 온전히 스스로 담당하시

고 하나님의 영원한 정의가 요구하는 죄의 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대속

(代贖)을 이루셨다.1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대속적인 고통당하는 사랑의

역사적 현현이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인간으로서 인간

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지고 죽음을 당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2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7)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Free Press, 1978),

351.

18) Paul E. Billheimer, Don’t Waste Your Sorrows (Minneapolis: Bethany House

Publishers, 1977), 34.

19) Jürgen Moltmann, The Crucified God, trans. R. A. Wilson and John Bowdon (New

York: Harper & Row, 1974), 243.

2 0 )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Macmillan,

1972), 361.

Page 1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물러 있다. 따라서 역설적 상황은 제거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리스도

인은 자신에게 계시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그러

나 다른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유한성과죄의 부패성 안에남

아 있다. 니버에 따르면,“죄는 원리적으로 극복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극복되지않았다. 사랑은 승리적인사랑이 아니라 계속하여고통당하는

사랑이어야 한다.”23)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이 역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 가능성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니버의 말

을 빌면, 역사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완전한 재연합은“불가능한 가

능성”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랭던 길키는 은혜의 중심적 사역이 구

출(deliverance)이 아닌 칭의(justification)에 있다고 말했다.24) 이것은

기독교의현실주의를표현한다.

루터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죄인이면서 의인”(simul justus et pec-

cator)으로서 이중적 정체성을 갖는다. 즉 우리는 한편으로는 죄와 악

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에 의해 초

래되는 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당하는 우

선적인 이유는 자신의 죄와 실패에 있다. 우리의 죄의 영원한 결과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을 당하고 죽음으로써 영원히 대속

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영원한 결과를 대신걸머지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의 지상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도사

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인

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을 보장하지는 않

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부터 떠나도록 하시기 위하여 종종 우리가

우리자신의 죄로 인해고통을 받도록 내버려두시며, 종종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시며, 종종 우리의 불순종에 대하여 사랑으로

윤철호, 악의기원과 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97

2 3 )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vol. 2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4), 49.

24) Langdon Gilkey, Reaping the Whirlwind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81),

282-283.

악의 힘은아무런 제지를 받지않고오히려 허용되었으며, 그렇게 함으

로써 그 힘이 전적으로 헛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21) 악의 세력은 파

괴적인 폭력과 죽임을 통해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

님의 자기희생적인사랑이 승리하였다. 왜냐하면고통당하는사랑은 단

지 하나님의 선하신 덕목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전

능하신 능력이기 때문이다. 고통당하는 사랑안에서의 하나님의 전능하

신 능력의 지고한 현현으로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승리를 나타내며, 사

탄의허위의 패배를 나타낸다.22)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지만 십자가가 복음의 종국은 아니다.

종국적으로,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악의 세력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

의 승리를 선포하셨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

을 가져오셨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이 새로운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다. 이 새로운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죄인

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서 죄와 악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된다.

3. 예수그리스도안에서의그리스도인의고난

악의 현실 속에서의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의 소외이기 때문에, 구원은 무엇보다도 소외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

되고 재연합하는 것을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하나

님의 고통당하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과 화해되고 재연합된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

해 용서받고 구원받음으로써 소외된 실존 안의 파괴적인 악의 힘으로

부터해방된 존재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유한성 안에 머

2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1) McGill, Suffering, 96.

22) 앞의책, 97.

Page 1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예수는 말씀하였다.“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 21:17).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단지 다

른 사람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미움을 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

리를 미워하는 자들을‘위하여’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때문에’수동적으로 고

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위하여’능동적으로 고난을 당한다.

그리스도인(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초래된 소외된 실존 안의 비극적인 운명의 굴레 아래에서

날마다 파괴적인 악의 힘에 의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대리적이고 구속적인 효력이 있는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처럼 실존적 소외의 고통을 정복하는 자

기희생적인 사랑의 고난, 즉‘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악의 세력과 비극적 운명의 총합은

축소되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역사 안에서 완성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그리스

도인들의 고통당하는 사랑에 의해 누룩처럼 역사 속에서 확대된다. 그

리스도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고통당하는 사랑 외에는 인간에게 고통

을 가져오는 악의 실존을 정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다

른 길이존재하지않는다.

우리는 악과 고통에 대한 해결이 어떤 이론적 답변이 아니라 하나

님이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안다. 아들의 영

즉 성령 안에서의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현존 그 자체가 악과 고통에 대

한 답변이다. 이 답변은 우리에게 사변적 질문에 대한 해결을 가져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통당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가져다 준

다. 모든 우리의 고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

께 계시며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리하여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로써 고난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하

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299

훈계하고우리를 단련시키신다.25)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이 세상의 상호연관

적인 삶의 그물망 속에서, 단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

신이 아닌 타자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우리는 여전히 보편적인 소외의

숙명 아래 있는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타자로부터 초래되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유출로

인하여 일본내의사람들뿐만아니라 주변국가의많은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그 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은 불가피하다. 왜

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소외된 세상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의

한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안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이는 이 의인들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들음으로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2:8).

그러나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의 고통과 다른 차원에서의 그리스도

인의 고난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 또는 예수 그

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죄

와 악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를 위한 고난으로의 부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제자도를 위한 고난이

다. 본회퍼에 따르면, 제자도는 단순히 은혜로부터 솟아나는 삶을 의미

하며, 은혜는 단순히 제자도를 의미한다.26) 제자는 그의 주님의 고통과

버림받음과 십자가에 동참할 때에만 제자이다.27) 예수 그리스도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로 만드는 것

이다.

2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 5 ) Jerry Falwell and Harold L. Willmington, When It Hurts Too Much to Cry

(Wheaton: Tyndale House Publisher, 1984), 103-105.

26)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London: SCM Press LTD, 1982),

47.

27) 앞의책, 77.

Page 1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악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이 인간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예수의 부활은 종말론적 미래에 있을보편적 부활과 악과죽음

의 세력에 대한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선취적 사건이다. 하나님

은 신음하는 피조물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분인 동시에 고난을 가져오

는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새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종말론적미래에 옛 하늘과 옛 땅은 하나님에의

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인간에

의해 땅에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

려오니”(계 21:2).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와 영광의 길로 예정되어 있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

이것이 왜 우리가 현재의 고난,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 가

운데 기뻐할 수 있는가 하는 이유이다. 영광의 그 날에 더 이상고통과

슬픔과 죽음과 눈물은 없을 것이다(계 21:3-4). 현재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 위해 성 금요일의 고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그분의 부활절의 승

리가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과 투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세상에서는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내가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제어

악, 고통, 신정론, 고통당하는사랑, 제자도

Evil, Suffering, Theodicy, Self-Suffering love, Discipleship

접 수 일 2011년 4월 25일

심사 (수정)일 2011년 8월 8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윤철호, 악의 기원과극복에 대한신학적고찰 301

나님은) 우리가모든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우리로 하여금 하나

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위로

도 그리스도로말미암아넘치는도다”(고전1:4-5).

V. 결론

역사의 도상에 있는 인간에게 악과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사변적이

고 논리적인 답변으로서의 완전한 해결은 가능하지 않다. 성서에 따르

면 신정론(神正論)은 없고 단지 인정론(人正論)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

스도인들은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정의, 즉 신정(神正)을 수립하기

위한 실천으로 부름을 받는다. 악과고통의 현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

한 인간의 실천적 행동을 요구한다. 그리스도 안에거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통당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참여하

는 것이다. 메츠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야기는 하나님의 뜻

을 거역하고 인간을 노예로 얽어매는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하나님의

열정적 항거를 회상하는‘위험스런 기억’이다.28) 이 기억이 그리스도 안

에서의 고난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용기와 실천적 힘의 원천이다. 성서

는 악의 기원과 종국에 대한 사변을 전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 가운데 악의 세력에 저항

하는데 훨씬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우리는 오늘날 정치신학자,

해방신학자, 여성신학자, 생태신학자들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개인적인

악 뿐만아니라 제국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인종차별, 성차별, 자연파괴,

생태학적 위기 등과 같은 사회적, 국가적, 지구적 현실 속에서의 악에

대항하여투쟁하도록부름을 받는다.

3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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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호, 악의기원과극복에대한신학적고찰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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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일치에서조화로1)

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고찰

이찬석

(협성대학교, 전임강사)

I. 시작하는말

2013년 WCC(World Council of Church)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

고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에 대한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한편에서는WCC 부산총회에 대하여 적극

적인 지지를 보내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교단과 사람들은WCC가

궁극적으로 교단 통합을 지향하고 종교다원주의를지향한다는 점을중

점적으로 비판한다. 일반적으로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교회 일치

운동으로 정의한다. 사실상WCC의 문서들을 보아도 에큐메니칼 운동

을 교회 일치운동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본 논문은WCC의 문서들을

중심으로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일치운동’이 아니라‘조화운동’

으로 성격화하려고 한다. 왜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치의 운동이 아니라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05-332

A Theological Investigation into the Origin ofEvil and the Conquest of It

Youn, Chul-Ho

Professor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e reality of evil and suffering challenges the Christian faith in the

existence and providence of God. Today, Christian faith is challenged by

incomprehensible absurdities and horrible disasters in the world. In this

paper, I try to make a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origin of evil and the

way to overcoming it. The focus of this paper is not on the problem of

theodicy itself, that is, that of the justice of God who is both omnipotent and

infinitely good in the reality of evil.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firm in

the new way the way towards the overcoming and conquest of evil, for which

the investigation of the origin of evil is a prerequisite.

The origin of evil is investigated with regards to the themes like “creation

and human beings,” “sin,” and “evil and suffering.” In the next, the

overcoming of evil is investigated under the subtitles “God’s providence,”

“God’s suffering in Jesus Christ,” and “Christians’ suffering in Jesus Christ.”

In this paper, it is argued that the power of evil which causes suffering to

human beings is overcome and conquered by the self-suffering love of God

in Jesus Christ which was uniquely manifested on the cross and followed by

the resurrection. And it is also stressed that Christians are called to participate

in the self-suffering love of God in Jesus Christ through the discipleship of

practice, even though the final resolution and conquest of evil and suffering

will be ultimately fulfilled by God Himself in the eschatological future.

3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 본 논문은2011년 6월‘디아코니아 영성 아카데미’에서‘에큐메니칼 영성’이라는 제

목으로 발표한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임.

Page 1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가 추구하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협의회 또는 초대형 교회이었다면

WCC가 추구한 교회일치의 운동은 통합의 운동, 획일화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WCC는 교파적, 교리적, 지역적 차이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획일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전제하고, 다양

성을 인정하는 일치를 추구하기 때문에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치의 운동’이라기보다는‘조화의 운동’이며, WCC의 에큐메니칼 영

성은‘일치의영성’이라기보다는‘조화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치의 운동이 아니라 조화의 운동을 추

구하여 왔고, 추구하고 있음을WCC 역대 총회 보고서를 중심으로 밝

히려고 한다. 더 나아가서2013년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있는 한

국 신학이 집중해야 할 신학적 개념이 조화의 개념임을 주장해 보려고

한다.

I I. 보편교회와지역교회의조화

WCC의 운동이‘조화의 운동’이라는 점은 우선WCC 총회가 제시

한 교회일치에 대한 신학적 근거들로부터 드러난다. 이 근거는‘주어진

일치(a God-given Unity)’ ‘각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all in each

place)’, ‘협의회를 통한 친교(conciliar fellowship)’, ‘코이노니아

(Koinoia)’라는개념들이다.

‘주어진 일치’(a God-given Unity)는 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제

시되어졌다. 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한

민족을 당신의 선민으로 부르심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당신의 몸 되

신 교회에 거하게 하셨을 때 옛 계약은 새로운 계약 안에서 성취되었

다. 우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바로 그 교회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관

심이요, 그 관심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주님이시오, 머리되신분과의 관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 고찰 307

조화의운동으로 성격화하려고하는가? WCC는 표면적으로교회의 가

시적 일치(visual unity)를 추구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양한 교파와

교단의 통합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파들을 인정하면서 다양

한 교파들 사이의 조화를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WCC의 운동을‘교회일치운동’으로규정해 왔기때문에WCC는‘교단

통합’또는‘하나의 초대형 교회’(Super Church)를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아 오고 있다. 최덕성은『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에서 다음과

같이주장한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 교리, 말씀에는 등을 지고 거짓 교

사, 세상 지혜, 이단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있다. 교파 통합을 궁극적

인 목표로삼고 있다. 지극히위험한 방향으로나아가고있다.2)

최덕성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파 통합이라고 규

정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WCC의 활동과 총회 보고서를 세밀하게 분

석한 결과라기보다는에큐메니칼운동은 교회일치운동이라는표면적인

정의를 근거로 선언하는 성급한 규정이다. WCC를 중심으로 하는 에

큐메니칼 운동은 정말로 교파 통합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을까?

WCC 1차 총회 보고서에서 총서기 비셔트 후프트(Visert’ Hooft)는

“우리는 교회들의 한 협의회이지 하나의 일치된 교회의 유일한 협의회

(the Council of the one undivided Church)는 아니다”3)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WCC는 1차 총회에서부터 하나의 초대형교회( S u p e r-

Church)나 교단통합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치의 운동’으로 정의한다면, 최덕성과 같이WCC는 교단 통합을 궁

극적인 목표로 삼는다는왜곡된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을것이다. WCC

3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 최덕성,『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서울: 본문과 현장 사이, 2005), 447. 강조는 논

자의것임.

3 ) 말린 벤엘데렌 엮음, 이형기 역,『세계교회협의회4 0년사』(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33.

Page 1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3차 뉴델리 총회는 교회일치를 위한중요한 개념으로서‘각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all in each place)이라는 구절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가시적인개 교회와 지역교회를의미한다. 추상적인보편교

회나획일주의적인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것이아니다. 살아있고, 구

체적이고, 가시적인 개 교회들과 지역교회들의정체성과 다양성을 지향

한다. 3차 총회는 다음과 같이보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뜻이요, 그의 교회에게 주시는 선물인 하나됨이 가시

화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를 받았으며 그를 주님이시오, 구세주로서 고백하는 각 장소의모든 기

독교인들이 성령에 의해 완전히 헌신하는 하나의 교제로 인도되어서

하나의 사도적 신앙을 갖고 하나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의 떡을 떼고

함께 공동이 기도를 드리며, 공동체적 삶을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증

거와 봉사를하기때문이며, ….7)

우선 3차 뉴델리 총회는1차 총회에서 제시된‘주어진 일치’를 전제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한다.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고백한다.“하나 됨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

되는것이다.”8) 그러나3차 총회는 주어진 일치를 넘어서 지역교회들의

개체성을 강조하기 위하여‘각 장소의 모든 기독교인들’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여기에서‘장소’라는 개념은 교회는 물론 각 지역 공동체로

까지 지평을 확대된다.‘장소’라는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

으로설명한다.

이 성명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장소(place)라는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지역적 주변지역이라는의미와, 현대의 상황 아래서기독교인들이그리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09

계에 대한 우리의 하나 됨을 발견하는 것이다. 경험적 교회, 역사속의

교회들은 가시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은혜로 주신 하나의

교회를 믿고, 가시적 일치추구로 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4) 1차

총회의 제1분과보고서는‘주어진 일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한

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우리의 성

취가 아니요, 당신의 창조인 하나 됨을 주셨다. 우리는 당신의 성령의

권능의 역사를 찬양하고 감사드린다. 성령의 권능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

음을발견하도록다같이인도되었던 것이다.5)

위의 보고서에서 현재 우리들의 교회는 분열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교회의 하나 됨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선언한다. 더 나아가서WCC가 추구하는 하나 됨은 인

간들의 노력에 의한 성취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들에게 주어

진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1차 총회 보고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우리의 교파적 충성과 에큐메니칼한 충성을 조화시키는 것

이 항상 쉬운것이 아니다.…우리는 교회들의 협의회인 까닭에 우리를

보낸 교회들에 대해 책임의식을 통감하고 그 문제들에 논의해야 할 것

이며 대부분의 교회들이 거부할 그러한 합의점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

이다.”6)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WCC는 에큐메니칼 충성만

이 아니라 교파적 충성도 추구한다는 점이다. 즉, WCC는 교회의 하나

됨을 추구하지만 각 교파들의 특성과 책임을 함몰시키지 않는하나 됨

을 추구한다.

3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에큐메니칼위원회 엮음,『21세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

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239-40.

5)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이형기역,『세계교회협의회 역대총회 종합보고서』(서울: 한국장

로교출판사, 2003), 33.

6) 앞의책, 40.

7) 앞의책, 224.

8) 앞의책, 225.

Page 1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4차 웁살라 총회는 3차 총회의‘각 장소의 기독교인들’이라는 개념

에 더하여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웁살라 총회는 교회의 보편성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하

여 사셨고 죽으셨으며, 또한 다시살아나셨기 때문에 보편성은 모든종

류의 이기주의와 파당주의와 반대된다.”12)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에

의하여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있는 삶의 충만함과 온전함, 그리고 전체

성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교회는 보편적이며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웁살

라 총회는 선언한다.13)

1차 암스테르담 총회는‘주어진 일치’라는 개념을 통하여 교회의보

편성을 강조하였다면, 3차 뉴델리 총회는‘각 장소의 기독교인들’이라

는 개념을 통하여 교회의 지역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4차 웁살라 총

회는 뉴델리 총회의 교회의 다양성에 더하여서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

한다. 이와같이WCC는 교회 일치를 위한 근거를 찾는데 있어서 교회

의 보편성과다양성의축을오고가면서 균형을 유지한다.

5차 나이로비 총회는‘협의회를 통한 친교(conciliar fellowship)’를

제시한다. 나이로비 총회는 협의회적 친교를 설명하기 전에 다음과 같

이 주장한다.

우리는 제3차 뉴델리 총회의 성명서를 상기하면서 재차 확인한다. 그

성명서에는 각각의 장소(in each place)와 모든 장소(in all places), 또

모든 시대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전적으로 참여하는 교제라는 관점

에서 본 하나 됨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기술하고 있다. 제4차 총회는

‘보편성’(catholicity)이라는 용어로 표현된 보다 깊은 내적 차원의 하

나 됨에 대해 말하였다. 그 총회에 따르면“보편성이란모든 종류의 자

아중심주의와특수주의반대개념이다. 보편성이란 그 보편성에 의해교

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충만함, 흠 없음, 그리고 전체성을 표현

하는 것이다.14)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11

12) 앞의책, 253.

13) 앞의책.

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드러낼 필요가 있는 다른 지역들 모두를 뜻

한다.…나아가‘장소’는 지역공동체뿐만 아니라 주, 지방, 국가와 같은

보다 광범위한 지리적 장소를 의미하며, 또한 인종이나 계급에 관계없

이 모든장소에 있는모든기독교인들을지칭하는것이 틀림없다.9)

결국3차 뉴델리총회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의 징표로서각각의 장소

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교회들의 지역성, 개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므

로 WCC는 회원교회들의 교리와 자율성을 새로운 하나의 교리로 통합

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3차 총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세계교회협의회는 회원교회의 자율성을 침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또한 세계교회협의회

회원교회들이 인정하고 있는 교리에 어긋나는 하나 됨에 관한 공식적

선언을 해서는 안 되며, 하나 됨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강요하려고 해

서도안 된다.”10)

3차 뉴델리 총회가 지역교회의 지역성과 개체성을 주장하였다면, 4

차 웁살라 총회는 다시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웁살라 총회는 다음

과 같이정리한다.

뉴델리 총회는 도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하나 됨을 명백히 밝힐

필요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우리는‘각 개 교회 차원

에서 모든 기독교인’(all in each) 대한 강조에 더하여서 도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첨가할 것이다. 이것은 도처에

있는 교회들이 그들은 서로 한 데 속해 있으며 함께 행동하도록 부르

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요구한다. 인간의 상호 의존이 너무도

명백한 시대에 전 세계적인 교제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연합시키는 연

대를가시화라는것은더욱절실하다.11)

3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9) 앞의책, 226.

10) 앞의책, 240.

11) 앞의책, 258.

Page 1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적을 몸에 지니고 게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만남이며, 그

리스도께서 성찬식 교제에 살아 계신 임재를 통해서 끊임없이 오늘날

의 제자들을만나는 것이다.17)

7차 캔버라 총회는‘코이노니아’라는 개념으로 교파들의 다양성을

통한 일치를 설명한다. 이 코이노니아는‘성령 안에서의 코이노니아’이

며,“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것에 기반하며, 공동체 내에서

그 삶을 공유함으로써 표현된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

또 이웃과의 화해를 통해 가능해진다.”18)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여 삼위일

체 하나님과 친교를 갖는다. 1990년을 계기로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다양성속에서의 일치’라는 말보다는‘다양성 속에서의 코이노니아’란

말을 더 선호하게되었다. 이후일치 운동은 좀 더 교파들과 교파별 세

계 기독교 공동체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이들 상호간의‘코이노니

아’를 추구하는쪽으로 나가게 되었다.19)

9차 포르토 알레그로 총회는 다양한 교회들 사이의‘깊은 대화’

(deep conversation)를 촉진시킬 것을 제안한다. 9차 총회 보고에 따르

면, 모든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지만 각각 다른 카리스마와

목회자들에 의해형성되었고, 모든교회들의 희망은 하나이지만각각의

교회들은 그 희망을 다른 인간적 기대들로 표현하였다. 교회들은 다른

교회적 출발점들(different ecclesiological starting points)을 지니고 있

다. 더 나아가서각각의 교회들은 보편적 교회이지 보편적 교회의 일부

분이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교회들은 교회의 전체(the whole of

church)는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과 교제를 나눌

때 교회의 보편성을 성취한다. 그러므로9차 알레그로 총회는 다양한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13

17) 앞의책, 342.

18) 앞의책, 521.

19)『21세기한국교회의에큐메니칼운동』, 248.

결국 5차 나이로비 총회의‘협의회를 통한 친교’는 뉴델리 총회의

‘유기적 일치’를 전제하고, 웁살라 총회가 주장한‘교회의 보편성’을

전제한다.‘협의회를 통한친교’는 진정으로 연합된 지역교회들의협의

회를 통한 연합으로서 지역 교회들의 대표들이 충만한 협의회적 친교

를 통하여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협의회를 통한친교는 개교

회의 정체성, 교회들의 다양성, 교회들의 보편성을 더욱 고양시킨다. 협

의회들은 지역 교회들과 보편 교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이런 협

의회적 친교 없이는 보편교회를 향하여 전진할 수 없다.15) 5차 나이로

비 총회보고서는이렇게 정리한다.

이 용어(협의회적 교제-논자 주)는 뉴델리 성명서에서 기술되어 있는

완전한 유기체적 하나 됨과는 다른 하나 됨의 개념을 지향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뉴델리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 용어는 모든

차원에서 분열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교회의 삶의 한 측면을 묘사하고

자 한다. 먼저 그 용어는 거리, 문화, 시간에 의해 갈라져 있는 교회의

하나 됨을, 또 개 교회의 대표들이 공동모임을 위해 다같이 모였을 때

명백히 드러내는 하나 됨을 표현하고있다. 또한 그것은 각 개 교회 내

부의 삶의 질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용어는 진정한 하나 됨은 획

일적이지 않으며 각 신도들과 각 개 교회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은사들

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귀중히 여겨보호한다는사실을 강조한다.16)

5차 나이로비 총회는 진정한 협의회의 근거를 삼위일체에서찾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의 삶 속에서 진정한 협의회가 반영되어 있다

는 것이다. 협의회를 통한 하나 됨은 예수가 하나님께 그의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 같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을 때

기도하신 그 하나 됨이다. 또한 교회의 하나 됨의 근원은 십자가의 흔

3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4) 앞의책, 340.

15)『21세기한국교회의에큐메니칼운동』, 245

16)『세계교회협의회역대총회종합보고서』, 340-1.

Page 1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여 평화가 깨어진 무질서의 상황에서 열렸다. 1차 총회의 주제는 이

러한 상황을 잘 반영한다.“무질서한 인간에게 오시는 질서의 하나님”

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이 친히 세상의 무질서함 가운데서 당신의 질서

를 세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하나님 자신께서 인간의 무질서 한가운

데서 자신의 질서를 다시 세우시려 일하고 계신다”라는 놀라운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22) 무질서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무질

서한 세상이 질서의 세상으로 변화되는 평화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을

품고있다. 전쟁기간에1,200만 명이라는엄청난 난민이 발생하였다. 1

차 암스테르담 총회는 이 문제의 해결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직시하면

서, WCC는 전쟁 난민 돕기 프로젝트의 수행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

을 감당한다. 1차 총회는 다음과같은결의문 채택한다.

I. 세계교회협의회는피난민들의 물질적, 영적 복지를 위해일하는 데에

높은 우선순위를둔다. 그리고 정착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나라들의회

원국 교회들에게 자유로운 이민정책을 위한 여론에 영향을 끼쳐 줄 것

과 그들 나라에 도착한 사람들을 환영하며 돌보아 줄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23)

더 나아가서1차 암스테르담 총회는‘책임 있는 사회’라는 중요한

개념을 주창한다.“책임 있는 사회란 정의와 공공질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자유가 살아 있고,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특권을

소유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책임을

수행하는 사회를 말한다.”24) 또한“책임 있는 사회는 모든 나라의 교회

들이 하나님의 날과 의로움이 거하는 새 땅을 바라보며 한 분되신 하

나님, 모든 이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그것을 위해 일해야만 하는

목적을 상징한다.”25) 1차 암스테르담 총회는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2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15

22)『세계교회협의회40년사』, 32.

23)『세계교회협의회역대총회종합보고서』, 68.

24) 앞의 책, 54.

교회들 사이의 깊은 대화를 제안한다.20) 9차 알레그로 총회의 깊은 대

화는보편교회와개체교회의 조화를 추구한다.

결국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향하는 교회일치는 하나의 교파

나 교단으로의 획일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아니며 어느한 교파나

교단으로의 흡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WCC의 교회일치운동

은‘주어진 일치’라는 개념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난 보편교회와‘각

장소의 기독교인들’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난 지역교회,

즉, 교회의 보편성과다양성의조화를 추구한다.

I I I. 평화와정의의조화

삶과봉사(Life & Work)는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서중요한 세

영역중의 하나이다. 이 영역을 통하여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시대

적 상황에 적합한 교회의 응답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교회의 사회참

여를 시도하였다. 이 운동은 정의와 평화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6

차 벤쿠버 총회의5분과가“우리는 정의에 기반하지않는 평화에대해

서는 참을 수 없음을 안다”21)고 선언한 것과 같이WCC의 삶과 봉사

영역에서정의와 평화는 분리되지않는다.

1차 암스테르담 총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무질서와 혼동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개최되었다.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에 의

3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0) “Called to be the One Church”, WCC 9차 포르토 알레그로 총회 보고서, http://

w w w . o i k o u m e n e . o r g / e n / r e s o u r c e s / d o c u m e n t s / a s s e m b l y / p o r t o-a l e g r e-2 0 0 6 / 1-

s t a t e m e n t s-d o c u m e n t s-a d o p t e d / c h r i s t i a n-u n i t y-a n d-m e s s a g e-t o-t h e-c h u r c h e s /

c a l l e d-t o-b e-t h e-o n e-c h u r c h-a s-adopted.htmlhttp://www. oikoumene. org/en/

r e s o u r c e s / d o c u m e n t s / a s s e m b l y / p o r t o-a l e g r e-2 0 0 6 / 1-s t a t e m e n t s-d o c u m e n t s-

a d o p t e d / c h r i s t i a n-u n i t y-a n d-m e s s a g e-t o-t h e-c h u r c h e s / c a l l e d-t o-b e-t h e-o n e-

church-as-adopted.html

21)『세계교회협의회역대총회종합보고서』, 460.

Page 1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임적 사회를 제안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사회 참여의 표준임

을 선언하였다. 특별히 아파르타이트에 주목하면서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정책을 비판하였고, 흑인과 백인사이의 평화, 조화를 강조하였다.

4차 웁살라 총회의 가장 뜨거운 주제는 경제정의와 사회정의이었으

며, 이 총회는‘개발’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토의하였다. 개발의 목표를

정의, 자기신뢰, 경제성장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의 과제는 가난

한 사람들과 눌린 사람들이 이 세 가지 목표를 위해 분투노력하는 현

장으로 가서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하여WCC는

교회의 개발참여위원회( C C P D-Commission on the Churches’

Participation in Development)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현장 연구조

사, 교육, 자료집을 출판하고, 개발현장에서 기술지도와 재정지원을 하

였으며,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지역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기여하

였다.29) 4차 웁살라 총회는 국제 경제협력에 있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

국 모두가 잘못된 가정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저자본과 기술의

이전이 이루어지면 자동적으로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가정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효과적인세계발전이 있으려면

개발 도상국가들의 내부와 선진국들의 내부의 제도와 구조의 혁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30) 4차 웁살라 총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

한다.

많은 선진국들의 경제적 번영이 지금의 개발 도상국가들의 자원과 노

동력을 사용한 덕분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선진국들은

개발 도상국가들이 경제적인 난관을 타개하고 독립을 성취할 수 있도

록 해야 하는 더욱 더 큰 책임이 있으며 또 선진국 자신의 경제구조를

변화시켜야하는 일단의 책임 역시 받아 들여야한다. 평화적으로 경제

적 부정의를 감소시킬 수 있는 가장 희망적인 방법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협력을 증진시킴으로써 그들 간에 공통관심사의 넓은 영역을 분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 고찰 317

28)『21세기한국교회의에큐메니칼운동』, 213-4.

29) 앞의책, 271.

30)『세계교회협의회역대총회종합보고서』, 275.

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당시 세계사적 무질서와 혼돈을 의식하면서, 복

음과 기독론에근거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목적을 제시하면서하나

님 나라 추구 차원에서 교회일치와 선교와 사회참여를 주장하였다. 암

스테르담은 자본주의 나라이든, 공산주의 나라이든, 이 나라 안에 있는

국민과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촉구하였고, 세상에 참여하면서도 세상에

대하여 초월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26) 결국1차 암스테르담 총회는‘책

임 있는 사회’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인 권력

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책임을 강조

하였고,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전쟁으로 인

한 무질서를극복하고 평화로운세계를만들기위한몸부림이었다.

2차 에반스턴 총회는 아파르타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주목하면서 인종, 피부색, 민족에 따라 격리되고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복음에 거슬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에도 어

울리지 않고 또 교회의 본성에도 조화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총

회는‘책임적 사회’를 주장하였다. 에반스턴 총회 보고서는 책임사회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한다. 책임사회는 인간들이 선택해야 할 어떤 사회

적 혹은 정치적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기성 사회질서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사회질서를 선택하게 될 때 우

리를 인도하는 기준이다.27) 2차 에반스턴 총회의 주요 주제들은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

라고 하는 신학적 틀 안에 있었으며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사회참여의 표준이고, 모든 사회들에 대한 비판의 척도임을 암시하였

다. 자본주의 사회이든, 공산주의 사회이든, 특히제3세계의 그 어느사

회에서든,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사회참여의 표준이요, 모든

사회들에 대한 비판의 척도임을 암시하였다.28) 2차 에반스턴 총회는 책

3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5) 앞의책, 59.

26)『21세기한국교회의에큐메니칼운동』, 212.

27)『세계교회협의회역대총회종합보고서』, 118

Page 1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화로부터 해방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평화를 가로막는 부정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또 잔인한 무력, 고문, 살인, 심지어 대량학살 기도에 의해

서 지탱되고 있는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 중에 있다. 인종차

별, 성차별, 지배, 탐욕, 그리고 군국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평화는 기독

교인들이추구하는평화가 될 수 없다.34)

8차 하라레 총회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하여 응답한다. 이 총

회는 교회와 세상이 연대성 투쟁과 파트너십을 통하여 글로벌화의 병

폐를 극복해야 함을 주장한다. 또한 글로벌화를 지구적 인종차별로 규

정하면서, 나라안에서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빈익빈 부익부를가

져오고 힘의 집중을 초래하는‘글로벌화 공동체’에 대한‘대안 공동체’

를 추구하고촉구한다.35) 이 총회는 이렇게 보고한다.

글로벌화의 논리는 다양성 속에 있는 공동체의 삶이라는 하나의‘대안

공동체’에 의하여 도전 받을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들과교회들은 하나

의 신앙 전망으로부터 글로벌화의 도전에 대하여 숙고해야 하기 때문

에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글로벌화의 일방통행적인 지배에 항거하지 않

으면 안 된다. 현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추구하고 글로벌화 과정과

그것의 함축들에 대한 효과적인 정치적 제약과 교정들이 시급하게 요

청되고 있다.36)

이 대안 공동체는모든 문화들과 인류와 창조세계가다양성 속에서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는 일종의 대안 공동체 혹은 대조 사회를 암시하

고 있다.37) 하라레 총회가 제시하는 대안공동체는 미래 지향적인 하나

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땅 위에 실현해야 할‘샬롬의 공동체’라 할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19

34)『세계교회협의회역대총회종합보고서』, 460.

35) 이형기, 『에큐메니칼운동의 패러다임전환』(서울: 한들출판사서울, 2011), 319.

36) 앞의책, 313.

37) 앞의책, 319.

명히하는것이다.31)

개발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면서 경제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를 제안

한 4차 웁살라 총회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가들의 조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조화로운 삶을 제안한다. 선진국들의 발전은 개발 도상국

가들에 의하여 가능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선진국들의 책임을 지적한다.

선진국들은 개발 도상국가들에게단순히 기술 이전만을 목표로 삼아서

는 안 되며 선진국들 내부의 혁신을 통하여 개발이 정의, 자기신뢰, 경

제성장를지향해야한다고 선언하였다.

5차 나이로비 총회는 정의를 개발(제3세계)의 주된 목적으로 보았

고, 조직적 혹은구조적 부정의에대한대립개념으로보았다. 부정의한

상황이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에 항상 평화 개념을 요청하다고 주장하

였다.32) 6차 벤쿠버 총회는‘정의를 위한 투쟁’과‘평화를 위한 투쟁’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예

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보았다. 발표된 평화와 정의를 위

한 보고서는 교회로 하여금 핵무기의 개발, 생산, 사용이 인류에 대한

심각한 범죄행위임을선포하도록하였다.33)

우리는 정의에 기반하지 않는 평화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음을 안다.

우리 중 많은 수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식민주의의 부정의한 평

3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1) 앞의책, 294.

32)『21세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219, 5차 총회 보고서는 기독교인들과 교회

의 역할은 정의로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목표를 정의하고 그 정당성을 입증하며

또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나아가 그 목표 실행을 보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특

별히 다음과 같은 일들을 제시한다. 1) 가난한 자들이 가난과 불의에 맞서 싸울 때

그들을 조직화하는 일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기, 2) 특권 계층을 계도하

여 부와 수입의 분배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경제질서를 수립하는 데 협력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생산형태와 기술사용을 가능케 하는 것, 3)

인간이 정이, 자유, 평화속에서 함께살아가는새로운 구조를모색하기.

33) 앞의책, 275.

Page 1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그

들이 발견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일부분이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능력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기독교인은 과학적 발견들을

인간의 자연에 대한지배에있어서 새로운 도약들로서환영해야한다.41)

인간이 인류의 이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에 대한 지식을 늘리

고 자연에 대한지배력을 확대해나아가는 것은바람직하다.42)

위의 보고서에서 인간은 피조세계의 청지기가 아니라 지배자로 규

정하고, 피조물들은 인간을 섬겨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선언한다.

결국3차 뉴델리 총회는 인간중심적인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수행이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첨

예화 되었던4차 웁살라 총회 보고서는 해방신학적 요소들을 담고 있

으면서‘개발’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고,‘정의’의 문제를 두

드러지게 제시하였다. 그러나4차 웁살라 총회는 창조세계의 보전에 대

한 신학적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4차 웁살라 총회의 기조 연설에 보

면,

하나님께서는새롭게 하십니다. 인간은 피조물에 대한하나님의청지기

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료 인간들과 함께 피조

물에 대한 우리의 청지기직을 받아들여 그 자원을 관리하고 개발하며

또 함께 나누어야하겠습니다.43)

5차 나이로비 총회는 인간이 환경파괴로 인하여 생존의 위협을 받

고 있으니 이를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유하였다. 기조 연설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21

41) 앞의책, 202.

42) 앞의책, 203.

43) 앞의책, 248. 강조는논자의것임.

수 있다. 그러므로 대안 공동체에 대한 비전과 더불어 희년 정신에 근

거한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화에 대한 극복과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긍정한다. 또한 이 총회에서 제안된 생명 중심적 비전과 가난한 사람들

에 대한 우선 배려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운동

이 추구해야 할 가장중요한 비전이라할 수 있다.38)

결국WCC의‘삶과 봉사’라는 영역은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면서 평

화와 정의의 불가분의 관계, 불이(不二)적 관계를 선언하면서 평화와

정의의 조화를 제창한다. 이 평화와 정의의 조화는 특별히1차 암스테

르담 총회에서는 정치적/경제적 특권이 있는 사람들과 특권이 없는 사

람들의 조화, 2차 에반스턴 총회에서는 흑인과 백인의 조화, 4차 웁살

라 총회에서는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조화, 5차 나이로비 총회

에서는 정의와 평화의 조화, 8차 하라레 총회에서는 다국적 기업들과

지역공동체의조화를 제안한다.

I V. 자연과인간의조화

이형기 교수는3차 뉴델리 총회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뉴델리

는 창조세계의 파괴와 생태계의 위기를 이미암시하였고.…창조세계와

생명보전을 위한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였다.39) 그러나 3차 총회 보고서

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중심적이며 반생태적인 표현들이 쉽게 발견된

다.

인간이 피조세계를지배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고 입증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사실을알게하신다.40)

3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8) 앞의책, 320.

39) 『21세기한국교회의에큐메니칼운동』, 215.

40)『세계교회협의회역대총회종합보고서』, 185.

Page 1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어나고 있다. 2) 과학은 가치중립적이 아니고, 윤리적 결단들과 가치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3) 신학과 과학이 계속적으로 대화를 해야 한

다. 4) 인간은 두 가지축, 곧 창조주와피조물을 인정해야 한다.48)

7차 캔버라 총회는 우리 시대의 도전으로 창조신학을 제시한다. 이

총회 보고서는 과거 창조에 대한 잘못된 인식(정복, 생명을 파괴해온

지배, 자연을 인간의 소유로 보는 것, 등)을 인정하고, 성령중심의 창조

신학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서 여성과 땅은 비슷한 방식으로 여겨지고

취급되어 왔음을 인정하면서, 성령은 이 둘 모두의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일하신다고 선언한다. 세계적인 생태학적위기가 세계적인사회정

의의위기및 경제정의의 위기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았다. 정현경교

수는 특강을 통하여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명중심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결국WCC 총회는6차 벤쿠버 총회에 이르면서 인간중

심주의를 넘어서 생명중심주의를 지향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세계를 선언한다. 물론JPIC 서울대회를 통하여WCC의 에큐메니칼 운

동은생태학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분리될 수 없음을 선언하면서 생

태학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의 조화도 선언하였다.

V. 에큐메니칼운동-조화의운동

WCC 총회가 보고서들을 내놓으면서 일치(unity)라는 말을 강조하

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WCC의 홈페이지는WCC

를 소개하는 글에서‘교회의 일치’(unity of churches)라는 말보다는

‘교회들의 교제’(fellowship of churches)라는 말을 우선적으로 사용한

다.“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원자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49) 물론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고찰 323

48) 앞의책, 465.

49) “What i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n http://www.oikoumene.org/en/who-

창조주시오,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다시금 인간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여 우리가 고백하오니 우리가 살아가고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

우리를 서로 적대하게 만들고 있으며, 우리를 당신의 피조물로부터 소

외시키고 있고 당신께서 생명을 부여하신 것들을 마치 그것이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듯 우리가 착취하고 있습니다.…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

하여 이 땅을 보존하는 투쟁을 도와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사 서로

함께나눔으로서모두가자유롭게되게하소서.44)

6차 벤쿠버 총회에 이르러서야 생명의 문제가 크게부상하면서 인

간중심주의를 넘어선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WCC 안에‘생명’문제

가 크게 부상한다. 6차 총회의 주제는“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이

었으며, 6차 총회기조연설에 보면,

가장충만한 삶은성부, 성자, 성령의하나님과의 사랑의교제를 반영합

니다.…오직 우리가 하나님과이웃과 자연 세계와의 사랑의 교제 속에

서 응답할때만이 충만한삶이가능하게됩니다.45)

6차 벤쿠버 총회 보고서는“우리는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을 서

로서로 관련지어 이해해야 하며, 이와 같은관계의 중심적 표현은 그리

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신학적 일치가 늘어가고 있다”46)고 지적하면

서“과학과 기술이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적인 사회를 위해 봉사하

도록 만드는 방법은 실제적인 관점에서 꾸준하게 철저히 연구되어야

한다”47)고 제안한다. 벤쿠버 총회는 다음과 같은 점을 역설한다; 1) 하

나님, 인간그리고 자연을 서로서로관련지어이해해야하며, 이와같은

관계의 중심적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신학적 일치가 늘

3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4) 앞의책, 320.

45) 앞의책, 414.

46) 앞의책, 465.

47) 앞의책, 466.

Page 1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통일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러나 일

치는지역성과 다양성이 상실될 수 있는위험성이있다. 일치는 중심을

축으로 하여주변들이 흡수 통일될 수 있다. 소수자나 주변으로 밀려난

자, 소수 공동체나 주변화된 공동체가 중심의 공동체와 일치되어진다

면, 주변은 중심을 중심으로 흡수되어질 수 있다.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보편교회를 설정하고, 보편교회를 중심으로 지역교회를 흡수하

려고 하지 않았고, 서구교회를 중심으로 다른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교회들을 흡수하려고시도하지않았다.

기독교의 영성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규정할 수 있지만, 기독교의 참

다운 영성은 일치가 아니라 조화였고, 조화이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의

중심적인 축을 감당하였던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연합

(Union with God)을 추구 하였다. 그러나 이 하나님과의 연합은 피조

물인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이 되는 것, 즉 하나님과의 일치가 아니라,

인간이 피조물로서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더 정확한 표현이다.

서방신학이 구원에 있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집중하였

다면, 동방교회는 죄의 문제를 넘어서 신화(神化, Theosis, deification)

가 최종적인 목적이었다. 동방교부들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

간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라고 말하면서 신화를 기독교 영성의 최종

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 신화는 인간이 신이 되

는 것이아니다. 동방교회는인간이 신화된다고 해서인간이 인간의 본

질로부터 벗어나거나 인간적인 특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특성을 간직한 채 신화되는 것이다. 인간이 신화되었

다고 하더라도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바울은 바울이며, 빌립은 빌립이

다. 각 사람은 그의 고유한 본성과 개인적 정체성을 보유한다. 결국 성

도들이 신화된다고 해도, 하나님은여전히 하나님으로 존재하고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신처럼 되지만, 본질적으

로 하나님처럼되는 것은아니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분은 여전

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화의 유비로서 적합한 것은 결혼의 유비이다.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25

정의한다. WCC는“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와 공동의 삶속에서 표현된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만찬적 교제 안에 가시적 일치를 향한 길 위

에 있는 교회들의 공동체이다.”50) 결국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

회들의 교제와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강조한다. 그러나WCC 총회 보

고서들을 중심으로 본 논문이 고찰했듯이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획일화 운동이 아니라 조화의 운동으로성격화할 수 있다. WCC는 그

리스도도 하나요, 신앙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성만찬도 하나라는 점

에 근거하여 교회의 하나됨을선언하면서가시적일치(visual unity)를

주장하였다. 이 가시적 일치는 하나의 교단이나, 하나의 교회조직을 향

한 통합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는 교회들의 교제

를 의미하기 때문에 교회의 가시적 일치는 교회들의조화운동이다.

WCC의‘신앙과 직제’를 통하여 드러난 사실은 교회 일치에 대한

에큐메니칼 개념이 보편성과 지역성의 축을 오고 가면서 보편성과 지

역성을 통전하려는 시도를 한다. 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제시되어진

‘주어진 일치’는 보편성에 강조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3차 뉴델리 총

회에서 제시된‘각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개념은 지역성을

추구하는 개념이고. 5차 나이로비 총회에서의‘협의회를 통한 친교’는

보편성과 지역성의 가교역할을하려는 개념이다. 7차 캔버라 총회에서

제시되어진‘코이노니아’개념은 보편성과 지역성, 통일성과 다양성을

통전하는 개념이라 규정할 수 있다. 결국WCC가 추구하는 교회 일치

는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의 축을 오고 가면서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의

조화를 시도를 한다. 또한 삶과 봉사 영역을 통하여 흑인과 백인의 조

화,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조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 다국적 기업과 지역공동체의조화를 추구한다.

이러한WCC의 교회일치 운동을 통하여 드러난 영성은 일치/합일의

영성이라기보다는 조화의 영성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일치라는 개념은

3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are-we.html.

50) Ibid.

Page 1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조화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의위격을 유지하면서상호교통하

는 조화가 삼위일체론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조화의

운동으로규정하는것은신학적으로삼위일체론에근거를둔다.

V I. 나오는말

최덕성은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교회연합일치운동에 무조건 동참하는 것이 죽음과 키스하는 것과 같

으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와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것과 다

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5 3 ) 이렇게 비판하는 중심적인 축은

W C C가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총회는 제10차 WCC 한국(부산) 총회 개최 반대에 관한 성명서에

서 다음과 같은이유를 제시한다.

·WCC는‘구원에이르는 유일한 길’이 기독교만이 아니라 타 종교를

통해서도가능하다는종교다원주의를주장하기때문이다.…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근거로,‘복음전파’를 금할 뿐 아니라, 각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 각자 자기 종교를 잘 믿으면 된다는 선교 무용

론을 주장하기때문이다.54)

WCC를 반대하는 한국의 보수적 교단들은WCC의 에큐메니칼 신

학을 종교다원주의로 규정한다. 그러나WCC의 신학을 하나의 신학으

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WCC의 총무이었던 에밀리오 카스트로

(Emilio Castro)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주장한다.“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 신학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도 없다. 우리는 한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27

진정한 사랑과 이상적인 결혼 생활은 아내나 남편이 한쪽으로 흡수되

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의 조화이다. 기독교의 영성의 핵심도 하나

님과의 일치/합일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

이다. WCC를 통하여 드러난 에큐메니칼적 교회일치운동도 일치/합일

이라기보다는 조화로 규정될 수 있고, 조화로 규정되어야한다.

WCC 1-2차 총회에서 깊은관심과 응답을 보여준 주제중의 하나는

인종차별의 문제이었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갈등과 차별에 대하여 차

별대우를 받는것은 교회의 본성에 조화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교회

의 사회적 책임과 책임적 사회를 주장하였다. 책임적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조화를 창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차 웁살라 총회는 개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토론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조화를 추

구하면서 정의를 촉구하였다. 8차 하라레 총회는 글로벌화는 경제적으

로, 문화적으로 일방통행적인 지배로 규정하면서 다양성 속에 있는공

동체의 삶이라는 대안공동체를 제시하였다. 또한 6차 벤쿠버 총회에서

생명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부상하면서WCC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모색하였다. 5차 나이로비 총회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를 제안하였고, 7

차 캔버라 총회는 창조신학을 제시하였다. 결국WCC 총회를 통하여

드러난 문제들은 흑인과 백인,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인간과 자연, 제1

세계와3세계, 남반구와 북반구의 부조화를 지적하면서 조화의 세계를

창출하기위한몸부림을계속해왔다.

WCC의 총무를 지낸 콘라드 라이저는WCC의 에큐메니칼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에서‘삼위일체론’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

어야 함을 주장한다.51) 장윤재는10차 부산총회의 주제가 결정되기 전

에 부산 총회의 주제가 삼위일체론적으로 설정되어애 할 것을 제안했

다.52) 삼위일체론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삼위일체론의 근거는

3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51) 콘라드 라이저의주장에 대하여는이형기,『에큐메니칼운동의 패러다임 전화』, 365-

375 참조.

52) 장윤재, “에큐메니컬운동의 미래에 대한한 제언”http://www.kncc.or.kr/index.asp.

53) 최덕성, 『에큐메니칼운동과다원주의』, 3.

54) 박영호, 『현대에큐메니칼운동과 사회선교』(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10), 369.

Page 1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많은 전통들을 지니고 있다. 이정용 박사는 일찍이 서양의 사유방식을

either/or로 아시아의 사유방식을 both/and로 규정하면서 아시아의 사

유방식이 조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김광식 박사도 서양의

아프리오리는 분석/종합적인 반면에, 동양의 아프리오리는 조화/전개적

이라고 주장하였다. 서구의 여성신학자 맥페이그도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인간 중심적인 이 모델(군주모델-논자 주)은 또한 이원론적이고 위계

적이다. 모든 이원론이 위계적인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중국의 음양이

론은 조화를 추구하고 어느 한 쪽을 다른 것보다 우월하게 여기지 않

는다. 어느한쪽의과다함은바람직하지않기 때문이다.57)

2013년 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있는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이 집중

해야만 하는 핵심어는 조화가 되어야 하고, 조화의 영성을 추구해야만

한다.‘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은 한생명이다’라는 고백을 위에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 인간,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각각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포착할

수 있는 불이론적 세계관, 불이적 논리를 중심으로 한국과 동아시아가

지니고 있는조화적 전통을발굴하면서신학적으로재구성해야한다.

주제어

세계교회협의회, 에큐메니즘, 일치, 조화, 한국신학

World Council of Church, Ecumenism, Unity, Harmony, Korean

Theology

접 수 일 2011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1년 7월 29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29

57) 맥페이그, 정애성역, 『어머니, 연인, 친구』(서울: 뜰밖, 2006), 126.

교회가 아니다. 심지어 산하 교회 안에서도 신학의 다양성이 있다.”55)

송인설은 정작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구하는 교회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정체성을 알기 힘들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

한다. 첫째, 에큐메니칼 운동은 역사적으로‘신앙과 직제’와‘생활과 실

천’과‘선교와 전도’라는 세 흐름의 연합운동이었다. 그래서 에큐메니

칼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도 세 흐름을 종합할 수 있는 안목을 갖기가

어려웠다. 둘째, 에큐메니칼운동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해놓고출

발하지 않았다. 사실WCC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신앙고백이라는최

소한의 기초 위에서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대화의 장(포럼)에 불과하다.

신학적 결정은 언제나 회원교회의 몫이다. 신학적 이슈를 연구하도록

위임받은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위원회가 보고서를 만들고WCC 총회

가 이를 검토하고승인한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수용할 것인지 여부는

회원교회가결정한다.56)

WCC는 하나의 통일된 신학을 제시하기 보다는 다양한 신학들을

수용하면서 조화를 창출하려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종교다원주의 신학을WCC의 신학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종교다원주

의 신학은 다양한 종교 신학 중에서 하나의 신학이고, 종교 간의 갈등

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하여WCC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다양한 신학

중의 하나의 신학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WCC의 공식적인신학이라할 수는없다. 이러한 점에서도WCC의 에

큐메니칼 운동은 조화의 운동이며, 다양한 교단과 다양한 신학들을 포

용하면서다양성 안에서의 조화를 추구한다.

2013년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은 조화

의 영성, 조화의 신학을 발전시켜야한다. 아시아와한국은 조화에 대한

3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55) Emilio Castro, Interview, “Ecumenism means solidarity,” One World ( J a n u a r y-

Februrary 1986), 5.

5 6 ) 송인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패러다임의 발전,”『한국교회사학회지』2 6집

(2010년), 310.

Page 1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From Unity to HarmonyA Study on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Lee, Chan-Seok

Full-time Lecturer

Hyupsung University

KyungKi, Korea

Generally,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World Council of

Church) is defined as the movement of unity. However, this article

tries to characterize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as the

movement of harmony focusing on the report of WCC. The work of

WCC can be categorized as three; Faith and Order, Life and Work,

and Mission. This article will focus on Faith & Order, and Life &

Work. Among them, this article will concentrate on Life & Work and

Faith & Order.

Through the notions of ‘a God-Given Unity,’ ‘all in each place,’

‘conciliar fellowship,’ and ‘Koinoia’ which are significant terms for

the unity of church in Faith & Order, this article will reveal that WCC

tried to integrate universal church and local church. In other words,

WCC seeks ‘harmony in diversity’ rather than ‘unity in diversity’. I

will insist that the ultimate goal of WCC is not the unity of

denominations but the harmony of denominations.

Faith & Order can be defined as the harmony of churches, Life &

Work seeks the harmony of the first world and third world, white

people and black people, and human being and nature. WCC clearly

announced that peace is impossible without justice. In other words,

이찬석, 일치에서조화로-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대한고찰 33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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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 d-m e s s a g e-t o-t h e-c h u r c h e s / c a l l e d-t o-b e - t h e-o n e-c h u r c h-a s-

adopted.html

3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장애인의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레위기 21장 16-24절에대한장애(인)신학적 변증

최대열

(명성교회, 부목사)

I. 서언

성서에는 여러 패러다임의 장애인관들이 들어있다. 그중에 중요한

세 가지는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관점, 장애인을 보호하는 관점, 장

애를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로 보는관점이다. 이 관점들은 성서의

일부분씩을차지하는것이아니라 성서전체를 관통하는관점들이다.

첫째, 장애를 인간의 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로서 보는 관점은 성

서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되는 관점이다(민 12:1-10; 신 28:20-35; 왕하

5:20-27). 이 관점은 형태는 달라도 지금껏 대부분의 사회에서 지배적

이었던 관점이다. 둘째, 장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은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이웃사랑과 약자보호의 구체적인 예이다(레 19:14; 신 27:

18). 이 관점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장애인의 인권보호를 위한 중요

한 근거가 되어 왔다. 셋째, 장애를 신앙의 성숙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보는 관점은 기독교의 복음적인 해석이다(요 9:3; 고

후 12:9). 이 관점은 장애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동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보는기독교의독특한관점이다.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33-362

WCC confirms that peace and justice go hand in hand. Namely, WCC

seeks the harmony of justice and peace.

If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is summarized as the unity

of churches, it is difficult to avoid the criticism that the ultimate goal

of WCC is the unity of denomination. However, WCC never tried to

make one denomination. Its ultimate goal of harmony between

universal and local church, black and white people, the first and the

third world, and human being and nature.

In Korea and East Asia, there are many traditions about harmony.

According to Jungyoung Lee, the Asian way of thinking is not ‘either

or’ but ‘both and.’ both/and way of thinking means harmony rather

than unity. Kwangshik Kim insists that the apriori of Western culture

is estrangement but that of Eastern culture is harmony. In this sense,

WCC and Asian(Korean) way of thinking are harmonious. Therefore,

Korean church and theology should develop the theology of harmony

for Korean ecumenical theology and WCC 10th Busan assembly.

3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위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심을 가지고 본문에 접근하며 장애-변증적 성

격을 갖는다.3) 이를 위하여 먼저 레위기의 정신과 본문의 위치를 고찰

하고(I I), 본문에 열거된 소위‘제사장직 제외규정 장애목록’을 재검토

하고(I I I), 그에 따라서 본문을 중심으로 장애-변증적 논거들을 개진하

고자 한다(I V). 그리하여 본문이 적어도 문자 그대로 오늘날 적용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근본정신에 따라 사회문화적으로 달리 적용해야 할

것을주장한다. 본문이 장애차별적인 본문으로기독교의 장애관을 대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장애배려적

인 본문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장애(인)신학의 구성에 기여할 수 있음

을 논구하고자 한다.

I I. 레위기의정신으로서거룩

1. 레위기에대한이해

레위기는 기독교인들이 매우 어려워하는 책이다. 그것은 내용이 지

루하고 난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대 기독교인의 삶과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레위기의 내용인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이후 기독교 교회에서 더 이상 시행되지 않는

율법이다. 그러면 레위기는 더 이상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폐기된

율법서일뿐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레위기는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 의미와 기능을 가지

고 있다.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35

성서의 여러 장애관점들 가운데 사회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동시에

또한 지양되어야 할 관점이 첫 번째관점이다.1) 성서에서 이 관점의 절

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대표되는 본문들 중의 하나가 레위기21장

16-24절이다. 이 구절은 육체에 장애가 있는아론의 자손이 제사를 드

리기 위해 제단에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할 것을 명령하고있다. 이 구절

은 그동안 주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 장애인이 교회의 성직이나 지도

자의 위치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러한 접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실제로

이 구절이 신학을 지망하거나 성직의 길을 가려고 하는 장애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으며, 장애인들이 교회에 접근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으

며, 일반사회인들에게도 기독교를장애차별적인종교라는 인식을 안겨

주었다.2)

그럼 이 구절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이 구절을 문

자적으로 해석하여 장애인의 접근을 차단하거나 봉쇄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대한 규정으로 현대에는 더 이상 어

울릴 수 없는 것으로 폐기 처분해야 할 것인가? 본문에서 성경의 권위

를 제거하지 않으면서 본문에 새겨진 장애차별을 제거할 방법은 없는

가? 레위기의 정신을 고려하여 오히려 오늘날 교회와 사회를 위한 보

다 적절한 해석의 가능성을찾아볼 수는없는가?

이 글은 레위기의 정신에 따라 오늘날 교회의 장애인리더십을 위하

여 본문을 재고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장애(인)신학의 구성을

3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 김성원,『장애도 개성이다』(서울: 인간과 복지, 2005), 314-317. 김성원은 이 관점의

극복을 가리켜 재활신학의 일차적인 난제로‘장애인에 대한 성서해석학의딜레마’라

고 표현하였다.

2) 유원철,“흠 있는 자의 제사장직,”『함께 불러야 할 노래』(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82-83과 이재서,『내게 남은 1%의 가치』(서울: 토기장이, 2008), 109, 121 참

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의 경우1971년 판까지의「헌법」에는 목사의 자격으로

‘신체가건강한 자’라는조항이들어 가 있었다. 이성웅,『헌법정치론』(서울: 한국장로

교출판사, 2008), 173.

3) 장애인신학구성을 위한성서해석학적 시도의 예로 최대열,“예수의 장애해방선언: 요

한복음 9장을 토대로 한 장애(인)신학의 시도,”「한국조직신학논총」1 7 ( 2 0 0 6 ) : 1 4 9-

174와 채은하,“구약성경에 나타난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인 신학의 한 시도,”「구약

논단」27(2008): 28-50 참조.

Page 1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록된 제사장에 관한 규정도 문자적으로는 폐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당

연한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 성직자 중에 혈통적으로 유대인, 그중에서

도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인 경우는 거의 없다. 기독교에서는 유대의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명을 받

고 그에 응답하여 일정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쳐 안수를 통하여 성직

자가 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레위 지파가 아닌 것처럼 문자적으로

장애가 있기에 성직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지나치게 문자주의적인

해석이다.

2. 제사장의거룩조항

레위기는 크게1-16장과 17-27장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

반부는 출애굽의 동기(출 3:18)에서 천명하듯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거룩한 공동체로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제사 규례들을 기

술하고, 후반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해 지

켜야할 규례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별개의 것은

결코아니다. 오히려 이 둘은자연스럽게연결되는데, 하나님께예배드

리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들의 생활 또한

거룩해야하는것이다(롬 12:1-2).

본문(레 21:16-24)이 속한 레위기17-26장은‘거룩’이라는 말이 반

복되고 있어서 소위‘성결법전’(Holiness Code)이라고 불리고 있다.7)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거룩’을 이룰 것을 요구하고 있다(레

19:2; 21:7-8; 24:9; 25:12).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받은백성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제사장은 거룩하신하나님

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를 담당하는 거룩한 존재로서 일반 이스라엘 백

성보다 더한‘거룩’을 요구받고 있다. 거룩(성결또는정결)은 레위기의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37

7) 채홍식,“성결법전(레 17-26장)의 형성에관한 고찰- 레 19:13-18절을중심으로,”「구

약논단」8(2000): 59-82 참조.

박준서에 따르면, 구약성서의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

다. 첫째, 신앙의 원칙에 관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준수해야 할 율법이

있다(신 6:4-5). 둘째,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활에 관한 율법으로 축자적

으로가 아니라 변화된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하는 율법이 있다

(신 23:24-25). 셋째,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에 관한 율법으로 이제

기독교인이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해방된 율법이 있다(히 9:11-

10:18).4) 레위기의 제사법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해당할까? 제사법은

세 번째의 폐기된 율법의 예로자주인용되지만, 레위기의 정신은 계승

되어 오늘날 새롭게 적용되어야 한다. 사실성서의 불편한 구절을 재해

석되고 그 정신을 밝혀 새롭게 적용되는 일의 확장이야말로오늘날 성

서의정경성을확보하는길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법은 문자적으로 따지자면 현실적으로 폐기된

법에 가깝지만, 그러나 예배신학으로서그 내용과 의미를 고려할 때 이

것은 오히려 재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이해하는데 전이해를 제공하는것이다. 김중은은

예배론적 관점에서 레위기를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을 유지하는 방법이

제사예배이며 그 제사예배의 올바른 원리와 실천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보았다.5) 전정진은 기독론적 관점에서 레위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는전제가 된다고 보았다.6)

레위기의 제사법이 현실적으로 폐기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는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소나양이나 비둘기를 잡아 드

리는 제사법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는 이제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로 대치

되었다. 제사법이 문자적으로 폐기되었다면, 본문 레위기21-22장에기

3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 박준서, 『십계명 새로보기』(서울: 한들출판사, 2001), 25-28.

5) 김중은,『거룩한길 다니리-설교를위한레위기 연구』(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1),

203.

6) 전정진, 『레위기: 어떻게읽을것인가』(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4), 17.

Page 1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애인에 해당한다. 맹인과 다리저는 사람은 구약성서에서 가장자주등

장하는 대표적인장애인이다(삼하5:6, 8; 욥 29:15; 렘 31:8).

코가 불완전한 자(mruj;, 하룸)는‘격리시키다,’‘파괴하다’의 뜻을 가

진 동사mr"j;(하람)에서 왔는데, 어원에서부터 장애차별적인 사회적 배

경을가지고 있지만, 사실이 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뒤틀리거나 부러지거나 갈라진 코나

낮은코로 해석되어 왔고, 확대하여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이나 보기흉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번역한다.「공동번역」은‘얼굴이 일그러졌

든지’,「새번역」은‘얼굴이일그러진 사람’,「현대인의성경」은‘코가 비

뚤어진 자’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안면장애에 해당한다.

지체가 더한 자([æWrc;, 사루아)는‘길게 뻗치다’,‘수가 넘치다’라는

뜻의[r"c;(사라)에서 파생된 단어로 이 역시 구체적으로 신체의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지는 불명확하다. 일반적으로 신체의 일부 특히 손가

락이나 발가락이 더한사람 등의 신체가 기형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

로 번역된다.「공동번역」은‘사지가 제대로 생기지 않았든지’로 번역하

고 있다. 발 부러진 자(lgur: rb,v,, 쉐베르 라겔)는‘상한 발’을 가리키는

데, 그 상했다는것이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불명확하다. 손 부러진 자

(dy: rb,v,, 쉐베르 야드)도 발 대신 손일뿐, 내용은 발 부러진 자와 마찬

가지이다. 오늘날 지체장애로 구분할 수 있으나 만약 그것이 골절이라

고 한다면 구약시대 의술로는 평생 부러진 팔다리로 살아야 했으나 오

늘날은 대개의 경우완치된다.

등 굽은 자(ˆBegI, 기벤)는 척추가 굽은 지체장애인을 가리킨다.「칠십

인역」과「라틴어역」이‘등 굽은자’(hunchback)로 번역하나NEB는 고

대 유대인 전승을 살려‘일그러진 눈썹’(misshapen eyebrows)으로 번

역하고 있다. 키 모자란 자(qd", 다크)는‘적은,’‘가는’의 뜻을 가지고

있어 키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왜소증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되나 또한

비정상적으로 마른 사람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NEB는「칠십인역」

과「라틴어역」을 따라‘눈병’으로번역하고있다.9)

최대열, 장애인의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39

세계에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거룩한 제사장들은 성과 속 그리고 정결

과 부정을 구분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위기에서 제사장과 직접 관련된

구절은‘제사장들을 위한 제사지침’(6:8-7:38), ‘제사장 제도의 설립과

시행’(8:1-10:20), 그리고 본문의‘제사장에관한규례’(21:1-22:33)이

다. 본문은 거룩을 요구받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최고의‘거룩’을 요

구받고 있는제사장에관한규례이다.

레위기21-22장은 여섯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나는 너희를 거

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는 공식구로 단락을 구분할 수 있다(레 21:8,

15, 23; 22:9, 16, 32). 레위기에서이 공식구는 단 한 번의예외로 20장

8절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 반복구야야말로 레위기의 정신이며 주제

이다. 본문 레위기21장은 크게 세 가지 문제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거룩’을 요청받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제사장의 죽은 자와의 접촉금

기, 둘째, 제사장의 결혼 배우자의 제한, 그리고 셋째, 육체적 장애로 인

한 제사장직의 제한이다.8) 본문(레 21:16-24)은 소위‘장애인의 제사장

직 제외 규정’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아론의 자손 중 육체적 흠이 있

는 사람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 제단에 나올 수 없도록 규정

하고있기때문이다.

I I I. 제사장직제외의장애목록

먼저 본문에 열거된 육체적 장애의 목록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문에

소개된 목록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소위‘장애 범주’에 해당할 수 있는

중요한 전거이다. 본문에는12개의증상이 열거되어있다.

맹인(rWE[i vyai, 이쉬 이웨르)은 성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애인

중의 하나로 오늘날 시각장애인에 해당한다. 다리 저는 자(jæSePi, 피세아

흐) 역시 성서에서 많이 언급되는 대표적인 장애인으로 오늘날 지체장

3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8) 존 하틀리/김경렬옮김, 『레위기』WBC주석 (서울: 솔로몬, 2006), 693-694.

Page 1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내용을 파악하기어려우며,11) 둘째로 구약시대와

현대사회의 장애범주가 의학적 발전과 사회적 관심에 따라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목록의 장애를 꼭 오늘 한국의 장애범주에 적용한다면,12) 맹인과 눈

에 백막이 있는 자는 시각장애인으로, 다리 저는 자와 지체가 더한 자

와 발 부러진 자와손 부러진 자와등 굽은자와키 못 자란자는지체

장애인으로, 코가불완전한자는안면장애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발

부러진 나 손 부러진 자는 현대의학에서는 그 정도에 따라 완치가 가

능하므로 장애범주에서 제외될 수 있다. 당시 고대근동의 의술로는발

이나 손 부러진 것이 치료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그대로 장애상태로

살았던 것이다.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자는 피부질환에 속하며 치료가

능하므로 오늘날 장애의 범주에는 잘 속하지 않는다. 다만 매우희귀한

피부질환이나 한센병으로 인한 피부질환은 장애의 범주에 고려할 수

있다. 고환 상한 자는 지체장애의 범주에 속할 수 있으나 외관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장애범주에 적용시키기에애매한

것도 있고, 현대 의술로 완치 가능한 것도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목록

이 오늘날 장애인을 성직에서 제외 규정하는 직접적인 장애목록이 될

수는없다.

본문의 목록과 관련하여 생각해볼만한 중요한 문제는 성경에서 대

표적인 장애 중의 하나인 농아(청각장애와 언어장애)가 본 장애목록에

없다는 사실이다(레 19:14; 사 35:5와 비교). 또한 정신장애나 정서장애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41

눈에 백막이 있는 자(/ny[eB] lLøubæT], 테발룰 베에노)는 눈에 어떤 결함

을 가지고 있는 시각장애인에해당하는데, 여기서lLøubæT](테발룰)는 기능

상 손상 입은 시력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대개 외관상 흰 막이 껴있는

신체적 결함을 강조한다. 그래서「공동번역」은‘눈에 백태 낀 자’「새번

역」은‘눈에 백태가 끼어잘 보지못하는 사람’으로번역하였다.

습진(br:g:, 가랍)은 피부질환으로 가려움증 또는 피부염증이나 딱지

나 옴이나 곪아터진 발진의 의미로 이해된다. 아토피성 피부병으로 보

기도 한다. 버짐이 있는자(tp,L,y", 얄레페트)는 딱지나 비듬이나 동전 버

짐이나 백선등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특히중요한 사실 하나는 본문의

습진과 버짐이 레위기13-14장에언급되고 있는악성 피부병(t[ær:x;, 차

라아트)과 달리 취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약시대 당시의

의술로 습진이나 버짐은 치료가 어려워 항상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

된 반면, 레위기13-14장의 악성피부병은 치유가 가능하였거나 치유가

일어났던것으로 추정된다.10)

고환 상한 자(Ëv,a; jæ/rm], 메로아흐 아쉐크)는 생식능력의 장애를 의

미하지만 먼저는 외관상 생식기의 장애를 가리킨다. 본문의Ëv,a;(아쉐

크)는 하팍스 레고메나(Hapax Legomena)로 신명기23장 1절의‘고환

이 상한자’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이 목록들은 구약시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분명히 치

유 불가능하여 평생 지니고 살아야할 육체적 장애의 목록이다. 그러나

본문의 이 목록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장애목록으로 적용되기에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우선 첫째로 본문의 목록들 중에는 구체적으로

3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9) 서명수,“구약성서에 나타난 장애,”『장애인 차별과 교회』(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

회, 2008), 158.

10) 레위기13-14장의t[ær:x;(차라아트)를「개역개정」은‘나병’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

는 오늘날 말하는‘한센병’과는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로, 레위기13-14장에서

사람이t[ær:x;에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둘째로, t[ær:x;가 사람만이 아니라 옷이

나 가구나 집에도 발생한다는 점에서오늘날 말하는‘한센병’과 차이가 있다. 그래서

「공동번역」이나「새번역」은 이것을‘악성 피부병’으로번역하고있다.

11) 다음의 주석들 모두 본문에 실린 목록들에 해석이 여러 가지이며 임의적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Gordon J.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Michigan: W.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9), 292; 존 하틀리,『레위기』, 344; 마르틴

노트/이상화옮김, 『레위기』국제성서주석(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191

12) 장애범주는 시대마다 나라마다 변화해 왔다. 2011년 현재 한국의 장애범주는 모두

15가지로 다음과 같다: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 지적장애, 뇌병변장

애, 자폐성장애, 정신장애, 신장장애, 심장장애, 호흡기장애, 간장애, 안면장애, 장루장

애, 간질장애이다.

Page 1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직을 수행하는데 기능상 제약을 더 많이받기때문이다. 본문의 장애

목록은 오늘날과 달리 당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중대한 질병이

나 장애로 육체적 완전성에서는현저한 결격으로 부각되었던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적인 불완전성은 레위기 전체에 흐르고 있는 거룩

한 백성의 무흠성의 외관적 표현에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으로 인정되

었다. 거룩한 제사를 수행할 제사장의 완전성의 외관적 표현으로 외형

적 신체장애가부각되었으며, 거룩한 제사를 수행할 제사장의 현실적인

기능의 면에서 본문의 장애들이선택되었을것이다.

IV. 본문에대한장애-변증적논거

1. 흠과부정의차이

본문 레위기21장 16-24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아론의 자손

중) 흠이있는자는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려고제단에) 가까이 하지못

한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본문에서17, 18, 21, 23절에 계속해서 반복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흠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흠으로 앞서 살펴본 대

로 그 목록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흠’(µWm, 뭄)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소위 장애인과 관련된 구절들은 모두 흠으로 표현하

고 있는데, 본문에 4번 사용되고 있다. 레위기에서 본래 흠이라는 단어

는 주로 제물과 관련하여 흠 없는 것을 제물로 바칠 것을 말씀하고 있

다(1:3, 10; 3:1, 6; 4:3, 23, 28, 32; 5:15; 9:2, 3; 14:1; 22:19, 20, 21,

25). 오직 본문 레위기 21장에서만 흠이란 단어가 사람과 관련하여 사

용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의 장애목록(레 21:18-20)이 제물의

장애목록(레 22:22-24)에서왔다는 서명수의 주장은 설득력이있다.

흠이란 단어는 분명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단어이다. 그런데 레

위기에는‘흠’외에도 부정적인 단어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43

도 빠져 있다. 사실 오늘날 모든 장애가 사회적 차별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장애들 중에서 사회적으로는 신체장애보다는 지적장애나 정신장

애가 더 큰 낙인과 편견을 경험하고 있다.13) 당시에 장애나 질병은 본

문에 열거된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 이 목록만 제

사장에서배제되는흠으로 간주되었을까하는의문이다.

서명수는 레위기22장 21-24절에 기록된 제사의 제물이 될 수 없었

던 흠 있는 짐승의 목록에서 그 답을 찾는다. 서명수는 본문(레 21:18-

20)의 목록이 제사장의 신체적 조건이나 제사장직 수행의 기능면에서

처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먼저 제사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흠 있는

짐승에 맞추어서 제사장의 신체적 조건을 설정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제사장이 바치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레 1:3, 10; 22:17-24) 신체적 흠을 가진 제사장은 제사를 주관할 수

없게한 것이다.14)

채은하는 의술의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제사장이 그 부정의 상태를

육안으로 진단해야 하고 또 동물을 옮기고 죽이는 일과 같은 강도 높

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체적으로 장애를 지닌 제사

장을 보호하고 그의 제사 의무를 면제해 주기 위해 제사직에서 제외시

켰을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필요한 동

물이 외적으로흠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처럼 제사를 드리는 제사

장도 외관상 시각적으로 비장애인을 원하시는 것으로 확대 적용한 것

으로보았다.15)

본문의 이러한 목록 결정은 제사장의 완전함의 외적 표현과 제사장

직의 수행의 기능에 따른것이다. 청각장애나정신장애보다 시각장애나

지체장애가 외관상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며 또한 희생제

3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3) 박수경, 『장애의 사회적의미와사회통합』(서울: 집문당, 2008), 138-139.

14) 서명수, “구약성서에나타난장애,”158-159.

15) 채은하,“구약신학의 관점에서: 너희는 거룩하라-정결과 부정의 원리를 넘어서,”

151-152.

Page 1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 있다. 그러나 흠과 나머지 것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흠은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것인데 반해, 허물과 범죄와 부정에는 상당한 가치편향

또는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즉 흠은 주로원인이 불분명하며이미주어

진 조건이나상황인데 반해, 허물은 대개율법을 어기는 데에서부터비

롯된다. 주어진 율법을 범하여 범죄하거나 율법에서 정한 부정한 것을

접하거나부정한일을하여허물을 얻게된다(5:13, 15, 17, 18).

흠과 부정의 대조는 그 해소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레위기의 정신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레위기의 내용은 거룩한 제사와 거룩한 규례로 구성되어 있는데, 레위

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에서 벗어나 부정에 이르렀을 경우에 그들

을 위하여 거룩을 회복할 정결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그 정결의 길이

바로제사, 특히속죄제와속건제이다. 그럴때에허물은 제사를 통하여

속죄가 가능하다. 레위기에 따르면, 부지중에 범죄하였건 부정한 것을

접하여 허물을 얻었건 그것은 제사를 드려 속죄할 수 있다(레 4:2, 26,

31, 35; 5:5, 6, 10, 13, 15-16, 18; 6:7; 19:22). 그러나 흠은 그렇지 못

하다. 흠은 제사를 통하여 없어지거나 정결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실 레위기에서 거룩(정결)을 위해 다루는 주제는 흠이 아

니라 허물, 범죄, 부정인 것이다. 레위기는 장애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

는 것이아니라 죄악을 부정적으로보고있다.

허물이 죄악과 연관된 가치편향적 단어라고 한다면, 흠은 비교적 가

치중립적 단어이다. 본문에서 육체적 장애로 인한 제사장의 제외 목록

에서도 이들을 흠 있는 사람으로 명명하고 있지, 허물 있는 사람이나

부정한 사람이나죄인으로명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레위기에서장애와

죄와의 무조건적인연속성을 단절시키고있는것이다.

그럴 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이 레위기13-14장의 악성피부병

(t[ær:x;, 차라아트)에 관한 것이다. 본문에서 이 병은 부정으로 언급되고

있다(레 13:3, 8, 11, 14, 15, 22, 27, 30, 36, 44, 45-46, 51, 55; 14:44,

46).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21장의 본문과 달리 14장에서 악성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 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45

것들이‘허물’(µva;, 아셈)과‘범죄’(atF;jæ, 하타트)와‘부정’(amefæ, 타메)

이다. 레위기에 따르면 계명을 어기거나 범죄를 하거나 부정한 것을접

하게 되면 허물이 된다(4:2-3, 13, 22; 5:2-4, 15, 17). 여기서 특히 중

요한것이‘부정’이다

레위기에는 여러 가지부정들이 소개되고 있다. 레위기11장 1-23절

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정결한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동물

이 열거되고있고, 11장 24절부터15장까지는 인간의 정결한 상태와 부

정한 상태를 명문화하여 제의적 정결을 통해 거룩의 조건을 갖추도록

설명하고 있다. 정결한 음식과 신체적인 정결을 넘어서 죽은 사람(민

19:1-22)이나 죽은 동물과 부정한 동물들(레 11:1-47)을 만지거나 몸

에 닿게 되어도 부정한 사람이 되고, 또한 악성 피부병과 곰팡이(레

13-14장)에 의해 접촉된 사람도 부정하고, 여성의 경우 생리(레 12장)

와 출산할 경우와 또 남성의 경우성적인 유출(레 15장)이 있을경우에

도 일시적이지만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이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

거나 분리 격리되거나 또는 제사를 통하여 부정한 상태를 벗어나 거룩

하게될 수 있다.16)

또한 레위기에는 또 다른 형태의 부정이 있는데, 이것은 율법을 어

기고 죄를 범하여 부정에 이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범죄(레 18:24-

29)나 우상숭배(레 19:31; 20:1-3)나 살인(민 35:33-34)과 같은부정이

다. 이러한 부정은 단순히 일시적인 분리나 격리에 그치는 제의적 부정

이 아니라 땅을 더럽히는 심각한 범죄적 부정이다. 이러한 부정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이 아니지만 일정한 시간의 경과나 목욕이나 속

죄제사만으로 정결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따른 처벌을 초래하기

도 하며, 그러한 부정으로 인하여 공동체가 고통을 당하게 되기도 한

다.17)

레위기에서 흠과 허물과 죄와 부정은 모두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

3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6) 채은하, “구약성경에나타난장애인의현실과 장애인신학의 한 시도,”31.

17) 앞의글, 31-32.

Page 1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에있어서(레 22:1-9) 제사장들에게주어지는 성물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이다(레 2:3, 10; 6:10-11, 22).19) 육체적 장애를 가진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으로서 제단에 봉사하는 일이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으로서 성물에 대한 특권은 유지되었다. 그래서 그나

그의 가족이 경제적 빈곤에 처하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고 생계에 종사

하도록 강요되지는 않았다.20) 당시 장애차별적인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이것은 장애인제사장에대한큰 배려중의하나로 볼 수 있다.

이어지는 레위기22장 1-16절은 제사장의 성물을 먹는 규례를 언급

하고있다. 아론의 자손중에서 그의몸이부정한 사람은 정결하기 전에

는 그 성물을 먹을 수 없었다. 만약 먹으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는 것

이었다. 여기서 부정한 사람의 예는 악성피부병자와 유출병자, 시체의

부정에 접촉된 자나 설정한 자나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모든 사람과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한 것에 접촉된 자들이

었다(레 22:4-5). 그런 점에서 레위기22장의 목록은21장의 열거된 흠

의 목록과는 별개의 것이다. 사실 불결한 사람, 곧 죄 있는 사람은 성물

을 먹을 수 없었다. 제사장도 불결한 것에 감염되었을 경우, 예를 들어

시체를 만지거나 부정한 것에접촉했을 경우에는반드시 정결을 취하고

와서 제사와 성물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의 장애

는 이미언급하였듯이부정이나 죄와는 다른성격의 것이다.

레위기10장 12-13절에 따르면, 지성물을먹을 수 있는사람은 오직

아론의 자손뿐이고, 아론의 자손은 지성물을 마땅히 받을 권리가 있었

다. 이종록은 성경 어디를 보아도 흠이 있다고 해서 제사장이 되지 못

한다는 규정은 없으므로 장애인도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21)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47

피부병은 정결이 가능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레 14:4, 7, 8,

11, 19-20, 28, 29, 31; 14:48, 53).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언급된 악성피

부병은 오늘날의 한센병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센병도 장애

범주와 약간의 차이를 두고있지만, 그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는 한센병

과 동일시되고 있는데, 레위기의 악성피부병은 옷이나 가구나 집에도

발병이 가능하고 치유와 정함이 가능한 것을보면 오늘의 한센병과 전

적으로 동일시될수는없다.18)

흠과 부정의 차이는 흠 있는 제사장과 부정한 제사장에 대한 대우의

차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정하게 된 사람은 결코 성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정결하게 된 이후에야 성소에 접근이 가능하며 성물을 먹

을 수 있었다(레 22:1-9). 그러나 본문에서 흠 있는 제사장들은 허물이

나 부정이 아니므로 성물을 먹는데 어떠한 제한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그 흠은레위기에서해결하고자하는죄나부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 장애인제사장의성물섭취의의미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은 이러한 흠이 있는 아론의 자손들이 제단에

봉사하러 나오는 일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이들이 정결 상태를 유지하는

3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8) 레위기에 반영된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성피부병은 일반 장애와 달리 질

병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본 소고에서 오늘날 교회의 장애인 리더십을

논의하는데 악성피부병이나 한센병을 제외시키거나 장애 범주 간에 차별을 두고자

하는 것이 결코아니다. 다만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당시고대 이스라엘의 사회문화

속에서 악성피부병은장애라기보다는질병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뿐이

며, 오늘날 실제로 장애인리더십의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악성피부병은당시 레위

기 13-14장이보여주고 있듯이 당시 사회문화속에서 가장 차별적인질병으로 취급

되고 있으므로 장애차별의 문제에 포함되어야 한다; 사라 멜처는 레위기13-14장과

레 21:16-24에서낙인화 과정이 일어나고있다고 보고있는데, 후자가 훨씬더 온건

하다고 지적하였다. Sarah J. Melcher, “Visualizing the Perfect Cult: The Priestly

Rationale for Exclusion,” Human Disability and the Service of God ( N a s h v i l l e :

Abingdon Press, 1998), 58.

19) Gordon J.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Michigan: W.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9), 292.

20) 존 하틀리, 『레위기』, 692, 694.

21) 이종록,“구약성경은 장애인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는가?-레위기21:16-24를 중

심으로,”「교육교회」215(1994. 6), 28.

Page 17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며, 이런점에서 육체적 장애를 가진 제사

장은 역시 사회-종교적 차별을 겪었다고 해석하였다.23) 그래서 채은하

는 이 본문에서 장애인제사장의 제사권 박탈과 차별을 주장한다.24) 제

사장이 어떠한 조건이나 대우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릴 수 없다면 그

것은제사장으로서그의존재와 정체성이무시되는 것이다.

어떠한 변증적 해석에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이러한 장애차별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애목록에 대

한 이해과 장애배려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레위기 전체를 흐르고 있

는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이 본문을 지배하고 있다. 레위기에서 육체적

인 완전성은 거룩이라는 이념의 외적인 표현이다. 더글라스( M a r y

Douglas)는 거룩의 이념은 몸의 온전함으로 외적이고 육체적으로 표

현되며 이 온전함은 또한 사회적 상황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고설명하였다.25)

육체적인 장애는 제사장으로서의 완전함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여

제사기능을 감당하기에는 부적합한 불완전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것

은 단순히 기능상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적 불완전이 성소와 제사를 모

독한다는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유사한 제한은 바빌론 문헌에

서도 발견된다.“(그러나) 점쟁이 아들은 귀족의 혈통이 아니고 모양이

나 신체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사팔눈, 벌어진 치아, 절단된 손가락…온

몸의피부병…(그런사람)은 새마쉬와하다드의계명을볼 수 없다.”26)

게르스텐베르거(Erhard Gerstenberger)에 따르면, 레위기21장은 여

러 성서번역들이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바와같이결코완전한“제사장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49

23) 채은하, “구약성경에나타난 장애인의현실과장애인 신학의한 시도,”36-39.

24) 앞의 글, 36-37.

25)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51-54, Human Disability and the Service of God, 56 재인용.

26) Erhard Gerstenberger, Leviticus: a commentary, tr. by Douglas W. Stott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6), 317.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육체적인 장애가 있어도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바쳐진 가장 거룩한 음식과 거룩한 일반음

식을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먹을수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어떤 차

별도 없었다. 그러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제사장이 음식제사를 드리는

것을금지한 것은 당시의 제의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하나님의 거룩성

과 공동체의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제의적 산물일 뿐 그것이 장애인 제

사장에 대한 본질적인차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22) 달리 말하면 본

문은 제사장의 지위는 유지하나 제사장의 직무는 정지시킨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장애인에 대한 제사장직의 장애차별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당시장애차별적인 문화속에서 장애

인 제사장에 대한종교적이고 생활적인 배려를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

제사장의 장애가 종교적 부정으로 취급되지 않으며 장애인제사장의 장

애가 사회적 축출로 취급되지 않고 있다. 본문에서 무엇을 먼저 볼 것

인가는 중요한 것이다. 본문에서 장애차별을 보기에 앞서 장애차별적

문화 속에서 먼저 장애배려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장애인

의 제사장직 제외규정’이라고 불리는 동시에‘장애인의 제사장직 배려

규정’이라고도불릴수 있다.

3. 부정과정결의육체적이분법을넘어서

육체적 흠의 목록이 부정의 목록이 아니고 흠이 있는 제사장이 성

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레위기 전체에 흐르고 있는 육체적 장

애인제사장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는 지울 수 없다. 채은하는 육체적

흠이 있어도 제사장의 신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하지만 제사장으로

서 제의에 참여할 수 없다면, 제사장의 신분으로 단지생계를 유지한다

는 것은 결국 다른 제사장들에게 의존하면서 그들의 자선이나 동정을

3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2) 서명수, “구약성서에나타난장애,”160.

Page 1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달리 말해 시대

마다 끊임없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목해줄 것을 요청받게

한다. 그래서 후기 유대교에서는 본문의 12항목이142항목으로까지 확

대 해석되었다.30) 사해문서에서는 악성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나 육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예배예식에서 배제시켰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쿰란문서들은 구약성서의 정결의 기준에 강경한 경향을 띠고 그 공동

체의 특별한 상황에 적용시기 위해서 재해석하고 있다.31) 김홍덕에 따

르면,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서 유대의 장애 정책은 세부사항에서 다소

간의 이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오랜 세월 예배공동체의 존엄성을 유

지하려는데에맞추어서시행되어왔다.32)

본문은 레위기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의 영향

아래에 있다. 종교에서 성과 속, 정결과 부정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서로 분리되고 대치되어 있는 동시에 또한 상호교통이

가능하며, 세상 속에 혼재하고 있다. 그러기에 종교에서 사람은 성과

속, 정결과 부정사이에서상호이동이가능하다. 문제가 되는것은그것

을 표현하는 은유와 이미지이다.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결

과 부정의 시각적인 형상화로서 육체적인 장애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오늘날 변화된 사회문화에서 장애에 대한 그러한 이미지는 더

이상유지되기 어렵다.

그래서 채은하는 진정한 거룩을 위하여 정결과 부정의 원리를 넘어

설 것을 주창한다. 많은 경우 거룩의 의미는 정결과 부정의 구분과 같

이 제의적이고 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진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51

30) Jacob Milgrom, Leviticus 17-22, Anchor Bible (Doubleday: Yale University Press,

2008), 1825.

31) Sarah J. Melcher, “Visualizing the Perfect Cult: The Priestly Rationale for Exclu-

sion,” 67-68과 채은하,“구약성경에 나타난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인 신학의 한 시

도,”38.

32) 김홍덕, 『장애신학』(대전: 대장간, 2010), 220-232.

법”도 아니고 힛타이트 문헌에 발견되는“직업 설명서”도 아니다. 오히

려 이것은 거룩한 회중의 이미지에 맞추어진것이고, 그 거룩은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회중에게 부여된 것이다.27) 달리 말하여 거룩한 공동체

를 구성하기 위한 이미지로서 장애가 없는 완전한 제사장의 이미지를

부각시킨것에따른것이다.

이것은 레위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정결과 부정이라는 이원론적

인 구조 때문이다. 헨트리치(Thomas Hentrich)는 본문의 형성에 있어

서 장애인을제한하는 편집의 역사가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일반인들에

게 장애인을 성전에 들이지 말라는 단순한 간청(레 21:19, 20, 23)에서

장애를 가진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수 없다는 조항이 추가되

었다. 즉 장애인의 성전출입 불가 주제에서 장애인 제사장의 제사금지

주제로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장애인제사장의 성전 접근

금지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았다(레 21:17, 18, 21a, 23b).28) 이것은 편집

자가 육체적 장애가 함의하는 불완전과 불결이 거룩으로 상징되는 성

전과 성전제사의 이미지를 해칠 것을 염려하여 의도적으로 장애인을

배제시킨 노력의 결과라고할 수 있다. 함택에 따르면, 편집자들이만약

장애를 불결이나 죄 혹은 징벌이나 불완전을 함의하는 은유로 보지 않

고 육체적 장애를 단지 실존론적인 아픔이나 고통으로 보았다면 성전

의 거룩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장애인을 배제하는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9)

레위기를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은 또한 본문

의 해석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12항목이

3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7) 앞의책, 318.

28) Thomas Hentrich, “Masculinity and Disability in the Bible,” in This Abled Body:

Rethinking Disabilities in Biblical Studies. ed. Hector Avalos, Sarah J. Melcher,

and Jermy Schipper (Atlant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7), 82-84.

29) 함택,“구약성서에 나타난 장애해석에 관한 조망,”『신학으로 이해하는 장애인』(서울:

세계밀알, 2010), 85.

Page 1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적 요소가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은유나이미지로 사용될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특별사제직에 반대하여 만인사제직

또는 보편사제직을 주장하였다. 대제사장이며 희생제물이 되시는 예수

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의 중재자나 보증인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하였다(히 4:14-15; 5:1-10; 7-8장; 9:23-28). 오직 예수 그

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가 되신다. 모든 그리

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하나

님과 화해될 수 있다.35)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화목을 선포하는 그리

스도의 대사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고후5:18-20; 벧전2:9). 만인

사제직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독교적 제의에서 모든 사람의 조건

에 대한 차별을 원칙적으로 거부한다. 더 이상 장애도 하나님 앞에 예

배드리러나아가는데제한조건이될 수 없다.

레위기 21장 16-24절의 신체적 장애목록은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것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것은 당시 고대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정과

정결이라는 원리의 시각적인 효과로 사용된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정

결과 부정은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어진 육체적인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게 지키는 생각과

생활에 달려있는것이다. 거룩이란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 삶의내용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육체적 목록은 오늘날 성직자의 신앙적

목록으로 대치된다. 리더로서의 영적 자격 요건과 합당한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며(시 132:9; 딤전3:1-13),36) 하나님 앞에서 거

룩하고 흠 없는 도덕적 정결에 대한 열망이 요구된다(벧후 3:11-12,

14; 빌 1:10; 2:15; 살전5:12-23; 딛 1:5-9; 2:11-14).37)

김중은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은혜는 아론의 직계 자손 남자가 아니라도 성직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53

35)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I V』(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222.

36) 앨런로스/ 김참동 옮김, 『거룩과동행』(서울: 디모데, 2002), 534-535.

37) 하틀리, 『레위기』, 694-695.

정한 의미에서 거룩은 정결과 부정의 원리를 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이룩할 수 있다. 채은하에 의하면, 구약성서에서 거룩

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데, 하나는 부정한 사람이나 동물이나물건

으로 피함으로써 거룩성을 획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계

명을지키고 순종해야거룩하게되는것이다.33)

그러므로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본문의 문자적 적용보다는

구약시대 성전과 제의가 가지고 있는 은유와 그 이미지를 넘어서 오늘

날 새롭게 적용하는 일이다. 당시로서는 육체적 장애의 불완전성과 성

전의 완전성은전면적으로 배치된다. 육체적 장애의 불완전성과 성전제

의를 수행해야 할 제사장의 완전성은전면적으로배치된다. 현실적으로

불완전성의 대표인 육체적 장애를 가진 완전성의 대표인 제사장이 존

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결은 장애인 제사장의 경우 장애인은 배격

하면서 제사장직은 수호해야할 과제를 안게 되며, 그 해결책으로 택한

방법이 바로본문의 절충안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더 이상그러한 육체

적 장애와 제의적인부정의 동일시가허락되지않는사회문화이다.

문제가 문자가 아니라 은유와 그 이미지라고 한다면, 은유와 이미지

는 시대적으로 변화 가능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장애와 부정을 자연적

으로 연결시키던 은유와 이미지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은유와 이미지

를 창출해야 한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그리스도로말미암아 이 장

애부정적인 은유와 이미지는 거절된다. 성전에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장

애인을 예수는 오히려 가까이 하시고 치유하셨다. 예수는 최고의 거룩

을 지닌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인 완전함이라기보다는신앙과

도덕에서의 최고의 거룩이다(고후 5:21; 히 4:14-15; 7:25-28; 벧전 2:

22; 요일 3:5; 8:46; 행 3:14 참조). 그리고 예수는 교회의 머리로서 교

회가 성결하고 흠이 없도록 자신의 몸인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엡 1:

4; 5:25-27; 골 1:22).34) 더 이상 장애인은 교회나 예배에 대하여 부정

3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3) 채은하, “구약성경에나타난장애인이현실과 장애인 신학의 한 시도,”35-36.

34) 존 하틀리, 『레위기』, 694.

Page 1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김성원은 성서가 당시의 문화적 상황이나 인습 때문에 장애나 특정

질병에 대해 차별적 언어와 고립이 언급된 것이지 성서가 하나님의 형

상으로 창조된 인간 더욱이 신체적 약자와 환자들을 차별하거나 억압

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39) 이재서

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성서에는 장애에 대해 부정적인 언

급이 없다고까지 주장한다.40) 성서는 인간을 어떤 조건으로 차별하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구원과 생명과 축복의 길을 제시하

고 있듯이 장애인에게도구원과 생명과 축복의 길을제시하고있다.

이 글은 이러한 전제에서 장애(인)신학의 관점을 가지고 논의가 되

어온레위기 본문(레 21:16-24)을 변증하는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지금

까지이글에서 논의하였던것을정리하면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이 제사장직에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은 만약 레

위기의 모든구절을 문자적 적용에 따른다면,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모

든 성직자는유대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이어야 하기때문이다. 혈통등

모든 부분을 예외로 하고 유독 장애만 문자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큰

오류이다.

둘째, 본문에 열거된 육체적 흠의 목록은 오늘날 장애목록과 동일하

지 않다. 본문의 장애목록이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장애목록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예이지 당시 사회가 규정한 완전한 장애목록이

아니며, 더욱이 오늘날의 장애목록과 비교하여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이전에 장애였던것이사라지기도 하고, 현대

복지사회로 갈수록 장애목록은 훨씬 더 확대되고 있다. 장애목록은 사

회마다 시대마다 변한다. 따라서 본문의 장애목록으로 오늘날의성직자

의 자격을 제한할 수 없다.

셋째, 본문에 나오는 흠이란 단어는 레위기에서 허물, 범죄, 부정과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55

39) 김성원, 『장애도 개성이다』, 50-51.

40) 이재서,“구약성경에나타난 장애 관련구절 분석,”『신학으로 이해하는 장애인』(서울:

세계밀알, 2010), 47-49.

열어 놓았다. 그것은 장애인과 여성도 교회 사역을 위한 성직의 부름에

포함시킨다(사 35:5-6; 56:4-8; 눅 14:13, 21; 요 5:2-9; 갈 3:28-29 참

조). 성직의 위선과 자격부실은 말과 행동의 불일치, 신앙과 생활의 부

조화, 그리고 아는 것(가르치는 것)과 실천 사이의 모순과 괴리 현상에

서 발생한다(렘 6:13-15; 8:10-12; 마 23:1-4; 벧후2:1-22; 약 3:13-18

참조). 그러므로 성직자의 거룩은 육체적 장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도자의 신앙과 생활에서찾아야 한다.38)

V I. 결어

이 글은 장애를 이해하는데 성경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레위

기 21장 16-24절에 대한 재해석이다. 오랫동안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

석하고 또한 그 이미지를 가지고 장애인을 대하여 교회에서 장애인성

직자나 장애인지도자를양육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이 교회

에 접근하는 것을가로막아 왔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이스라엘의사고

구조나 사회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나친 문자주의에 매여

해석한 것에기인한 것이다.

사실 장애는 장애일 뿐이다. 육체적 흠은 육체적 흠일 뿐이다. 장애

는 악도 선도 아니다. 장애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존재양식

일 뿐이다. 문제는 그 장애를 이해하는 사회문화적인 이해의 틀과그것

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은유와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개인적인

장애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레위기는 이러한

장애를 당시의 사회문화적 틀에서 종교적인 정결의 문제와 결부시켜

육체적인 온전함으로 제의적 정결과 일치시켰지만, 오늘날은새로운 사

회문화 속에서 새로운 은유와 이미지를요구하고있다.

3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8) 김중은, 『거룩한 길 다니리-설교를 위한 레위기 연구』(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1), 334-335, 338.

Page 1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결론적으로 오늘날 기독교 교회는 육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을 제사

장에서 축출할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사람을 교회

의 지도자로 세워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육체적인 장애는 교회 리더십

의 제한조건이 될 수 없다. 이제 육체적인 완전함이 교회 지도자의 자

격조건이 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를 이해하고 품는 그리스

도의 사랑과 고결한 신행일치의 도덕적 생활과 지도자로서의 영적인

은사가 교회지도자의자격조건이되어야 할 것이다.

주제어

장애, 제사장, 레위기, 거룩, 부정

Disability, Priest, Leviticus, Holiness, Impurity

접 수 일 2011년 6월 30일

심사 (수정)일 2011년 8월 8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57

같은 부정적인 늬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과 달리 비교적 가치중

립적인 개념이다. 허물과 범죄와 부정이 제사로 정결케 되는 반면흠은

결코 해소되지 않은 존재양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흠을 가지

고 있는 제사장들은 부정한 제사장들과 달리하나님의 성물을 먹는 것

이 허락되었다.

넷째,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은 육체적인 흠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들

에게 하나님의 성물을 먹도록 허락되었다는사실이다. 이것은 제한적이

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장애제사장에 대한 파격적인 배려이다. 비록 육

체적인 장애로 인하여 제사장의 제사권이 제한되고 있지만 장애제사장

의 생존권과 재산권은 보장되고 있다. 제사장의 직무는 제한받고 있으

나 제사장의 지위는 유지되고있다.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장애인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

지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레위기는 물론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성과 속, 정결과 부정의 구분에 기인한 것이다. 정결과 부정은 종

교의 본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표현과 이미지이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육체적 온전을 제의적 거룩을 볼 수 있는 외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사회문화가 변화한 오늘날 이것은 새롭게 해석되

고 적용되어야한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는 예배로 대치되었다. 제사

장의 자격도 예배인도자의 자격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었다. 이것

이 만인사제직 또는보편사제직이다. 이제 더 이상외적인 어떤 조건이

예배인도자의 자격이 될 수 없다.

일곱째, 그러므로 본문의 육체적인 흠은 이제 문자적으로 해석될 것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다 정신적이고 도덕적이고 영

적인 것으로 고양되어야 한다. 육체적 장애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정신

적이고 영적인 부정이야말로 교회의 지도자에게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다.

3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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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n the ancient Israelite society, but even as that, it is not a complete

list prescribed by the society. It is just a sample, and compared to

today’s list of disabilities, there is a considerable difference.

Thirdly, in Leviticus, the word “defect” from the text has negative

nuances like guilt, sin, and uncleanness, but unlike these, the word

“defect” has a relatively neutral connotation. Guilt, sin and unclean-

ness can be cleansed by a sacrifice, but a defect is only a state of

existence that can never be cleansed. Therefore, the priests who had

physical defects were allowed to eat the holy things of God.

Fourthly, what is important from the text is the fact that the priests

with physical defects were allowed to eat the holy things of God.

Though their right to offer sacrifice is being limited because of

physical disabilities, their rights to live and to own property are being

guaranteed. The duty of a priest is being prohibited, but the position

of a priest is being preserved.

Fifthly, it is true, none the less, that the text gives a negative image

to a person with disability. It is because of the underlying distinction

between the holy and unholy and between pure and impure in not

only the Leviticus but the whole Bible. The distinction between pure

and impure is the essence of religion. The problems here are its

expression and imagery. In the ancient Israel, the physical wholeness

was used as an outward expression of ritualistic holiness. In today’s

world, where society and culture have changed, it needs to be reinter-

preted and reapplied.

Sixthly, through Jesus Christ, sacrifice has been replaced by

worship. The qualifications of a priest should also be changed to the

qualifications of a worshipper. According to the Reformers, everyone

became priests through Jesus Christ. Whatever it may be, an extrinsic

feature can no longer be a qualification of a worshipper.

Seventhly, the physical defect in the text, therefore, should not be

interpreted literally now but should be elevated, through Jesus Christ,

최대열, 장애인의 제사장직제외규정에대한재해석 361

Reinterpreting the Exclusion of the Personwith Disability from the Priesthood

A Treatise of Disability Theology on Leviticus 21:16-24

Choi, Dai-Yeol

Associate Pastor

MyungSung Presbyterian Church

Seoul, Korea

Leviticus 21:16-24 is a text in the Bible which deals with the

exclusion of the person with disability from the priesthood, and it is

one of the biggest stumbling blocks for a person with disability. This

text has discouraged disabled people who wanted to become a clergy

and hindered the disabled people from approaching the church. How

should we understand the text?

The reason this text has had such effects is because of the

hermeneutics based on extreme literalism. Disability is just a disabil-

ity. Disability is not evil or good. Disability is a state of existence that

could happen to anybody. The problems are the socio-cultural frame

of understanding that interprets disability and the metaphor and

imagery that express and transmit that understanding.

First, the reason this text cannot be literally applied to priesthood

is that to follow all the verses of Leviticus literally, all the Christian

clergy today should be the descendants of Aaron from the tribe of

Judah. It is a serious error to interpret only the disability literally

while taking the lineage and all other requirements as exceptions.

Secondly, the list of physical “defects” in the text is not identical

to the list of disabilities today. The text’s list is the list of disabilities

3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정의와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1)의

생명삼위일체론

이세형

(협성대학교, 교수)

I. 서론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신학은 삼위일

체 하나님에 대한 성찰이다.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우리의 신앙의

근간이 된다. 이점에서 보프의 삼위일체에대한 연구는 그의신앙과 신

학을 살피는 중심 과제다. 보프의 삼위일체론은 그의『삼위일체와 사

회』2)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보프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의 빛에서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63-391

as having more mental, ethical and spiritual aspects. It is not the

physical disabilities but ethical, mental, and spiritual impurities that

must be eliminated from the church leadership.

In conclusion, today’s Christian church should not expel those

with physical disability from priesthood but instead, elect to the

church leadership those who love the people with disability and are

able to embrace them. The qualifications for a church leader should

not be about physical wholeness but about having the love of Christ,

ethical living, and spiritual gifts that understand and embrace

disability.

3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 1938년 브라질 산타 카타리나의 콘커디아에서 태어났다. 1959년 프란시스코회에 입

문하였고 1970년 독일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부터85년까지 신학

과 해방 총서의 출판과 융 전집의 편집하였다. 1984년 Church: Charism and Power

에 쓰여진 해방신학과 관련해1985년 바티칸으로부터침묵을 명받았다. 1992년 바티

칸에 저항하여 사제직을 버리고 평신도 신분을 택하였고, 계속해서 해방신학자요 저

술가이며 교수로 활동하였다. 1993년에는 리오데자네이로주립대학교의 윤리학과 종

교철학 교수가 되었고 그동안 해방신학과 생태 영성, 철학, 인간학, 신비주의 영성과

관련하여6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삶의

공로로 인정받아1993년에는 스웨덴 정부로부터“Right Livelihood Award”를 수상

하기도 하였다.

Page 1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모델로 비쳐지기때문이다.7)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보프는 남아메리카와 제3 세계에 속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의존의 굴레에서 살아온 불평등의 역사였던 점에 주

목하였다.“먼저는 제국주의적식민지 통치권력에 의해, 다음은확장주

의에 혈안이 된 유럽의 자본주의에 의해, 마지막으로는 다국적 자본주

의에의한굴레였다.”8) 의존의 역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 개발과 저개발

이라는 이원론적인 불평등의 구조를 만들어 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의존하는 삶의구조를 낳았다.

의존은 경제 질서, 사회의 노동 계층, 사회-문화적 환경, 정치적 영

역과 종교적 영역같은 모든 현장에서 끊임없는 계급투쟁과 사회의 소

요를 일으키는 문제의 갈등으로 인해 사회 계층 간 분리를 낳게 되었

다. 결국 의존은 분리를 낳고 분리는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낳았

다.9) 보프는 사회와 교회의 영역에서 현존하는 가난과 억압과 불평등의

현실은 기독교 신학의 군주적 유일신론과 가부장제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때문에 보프는 연합과 참여와 평등에 기초하여 상호침투를

통해 일치를 추구하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가난과 억압과 불평등의 구

조에서 고통당하는사람들에게생명과해방의 길을제시한다고 보았다.

보프는 인간은 이기주의라는 기계론에서 벗어나 연합의 소명을 이루도

록 부름받고 있는바, 삼위일체는 이에 대한이상과 모델을 제시한다고

보았고,10) 또한“하나님의 형상”이 삼위일체의 동등성, 상호성, 비이기성

을 드러낸다는 점에서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보았다.

보프의 삼위일체는 생명의 하나님께서 삼위의 연합과 일치, 역사와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65

7) 앞의책, 32-34, 215-222.

8) 앞의책, 32; 레오나르도 보프/ 김수복 옮김,『하나님은 선교사보다 먼저오신다』, 35-

40, “사회적 생태학: 가난과 비참,”세계의 신학 1997. 겨울, 243-261.

9) 가난한 사람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인종차별에 시달

리는 흑인들, 천대받는 아메리카 원주민들, 억압당한 여성들, 사회-경제적인 구조에

서 착취당한가난한사람들, 농민들, 노인등이그들이다. 『삼위일체와사회』, 33.

10) 앞의책, 336.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나타난 삼위일체 신학을 탐구한 후 현대적 상황

과 공동체를 위한 변증으로서 자신의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한다. 이런

점에서 보프의 삼위일체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맥락에서 구성된

토착적 삼위일체신학3)이라고 할 수 있다.

보프는 세 가지물음으로부터 삼위일체 신앙을 탐구한다. 첫째, 연합4)

안에서 세 위격들인 하나님이 어떻게 한 분 유일한 하나님을 구성하는

가? 둘째,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연합의 신비 안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의 소명과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셋째, 우리는 어떤유형의 사회가 하

나님의 계획과 일치하는가?5) 이 물음 앞에서 보프는 삼위일체, 페리코

레시스의 신비, 삼위일체적 연합과 신적 사회의 신비에 주목한다.6) 그

이유는 삼위일체가 정의롭고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평등한 사회 조직의

3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 이 책은 총 15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1장에서5장까지는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삼위

일체 논의를 정리해 주고 있고, 6장과 7장은 라틴 아메리카 상황에서의 삼위일체가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한다. 그리고8장에서11장까지는 송영의 형식에 따라 아들, 아

버지, 성령을 가난한 자와여성의 해방을 위한신학으로서 삼위일체를 새롭게 해석하

고, 12장과 13장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를14장은 창조 안에 삼위일

체와삼위일체 안에창조를 다룬다. 마지막15장은 지금까지탐구한 자신의 삼위일체

를 정리해준다. 보프의『삼위일체와 사회』는 1986년 브라질에서 포루트칼어로 처음

출판되었고, 1988년 Orbis에서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필자가

번역하여 2011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되었다.; 레오나르도 보프/ 이세형 옮김,

『삼위일체와사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1.

3) 보프에게 있어서 신학은 토착화 신학이다. 보프에 따르면 모든 신학은 문화의 옷을

입게 되며 문화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하신다. 때문에 역사와 문화와 세계와 우

주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이다. 이점에서 토착적 신학은 삼위일체적 범례

를 따라 전개되는데, 여기서 삼위일체적 범례라 함은 위격과 위격이 주체와 주체로

만나듯이 문화와 문화가 주체와 주체로 만나는 신학을 말한다.; 레오나르도 보프/ 김

수복 옮김,『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왜관: 분도출판사, 1993), 52, 55, 56,

66, 74, 93, 121쪽을참조할것.

4) communion에 대한 한국어 번역이 쉽지 않다. 교제라 번역되기도 하는데, 필자는 구

분된세 위격이함께있음이란의미의communion을 연합이라번역하여사용한다.

5) 레오나르도보프/ 이세형옮김, 『삼위일체와사회』, 31.

6) 앞의책, 31.

Page 1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합, 타자를 향한자기존재의 전개를 포함한다.”16)

생명이“실존의 자기-실현의 과정”이라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은 영원한 실존의 자기-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17) 기독교 신앙은 원초

적 실재가 미분화된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터져나오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고백함으로써시작한다. 아버지와 아들

과 성령은 모두 살아 있는 존재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 있어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각은 다른 두 위격을 향해

자기를 쏟아내고, 쉼 없이 다른 두 위격들과 구분되는 실-존의 존재됨

을 제외하고는 자기의 모든것을타자에게수여한다.

구분된 세 위격각각은 타자를 위해, 타자를 통해, 타자와 더불어, 타

자 안에 존재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자기를 위해 자기 안에 존

재하지 않는다. 세 위격은“자기 안에 있는 존재”로서“타자를 위한 존

재”이다. 삼위일체의 자기-실현의 과정은 타자와 자신의 삶을 공유하

는 영원한 연합의 역동성, 세 위격의 상호 침투와 상호 내재로 이루어

져 있다. 따라서 아버지는 온전히 아들과 성령 안에 존재하고, 아들은

온전히 아버지와 성령안에 존재하고, 성령은 온전히 아버지와 아들안

에 존재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동일하게 영원하며 무한하

고 사랑으로연합한다.18)

연합-안에-다양성(diversity- in-communion)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근원-실재(source- reality)이다. 하나님의 일치는 다양한 위격의 일치

이다. 하나님의 일치는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과 연합을 이루고 다

른 두 위격들의 삶 속에 자신의 삶을 나누는 과정의 현실화이다. 삼위

일체에서자기-실현의 과정은 위격각각이 타자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세 위격이 상호 침투와 상호 내재를 통해 영원히 관계함으로

써 하나님의 일치를 구성한다. 정리한다면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67

16)『앞의책, 185-86.

17)『앞의책, 186-87.

18)『앞의책.

우주의 진화과정에 하나님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기-현실화 과정이

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페리코레시스 연합 모델에 기초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명의 실존적 현실화로 풀면서 역사 안의 정의와 평화의 기

반이 됨을 보았던 보프의 생명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명과 정의와 평화

를 희구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과제에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 찾아

보고자 한다.

I I. 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보프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신 생명의 하나님이다. 생명의 하나님은

압제 당한 사람들의 외침을 듣고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생명과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풍성하게 함으로

써 역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세워가는 분이다.11) 보프는 자

신의삼위일체를전개함에 있어서 생명에 대한정의로 시작한다.

생명은“자발성의 신비이며, 내적 관계로부터 고갈될 수 없는 발전

과정이고 스스로를 내어주는 신비”12)이다. 생명의 존재는 유기체, 자기

기능, 구조상의 전체성, 재생산을 포함하며,13) 생명은“실-존(ex-istent)

의 자기-실현(self-realization)”14)이란 과정을 갖는다. 여기서 자기라

함은 살아 있는 존재의 내면에 있는 자발성의 원리와 활동을 뜻하며,

실현이라 함은 가능태를 실재로 현실-화(real-ze)하고 변화시키는 행

위를 뜻하고, 실-존이라 함은 타자와 관계하면서 연합과 관계를 이루

는 존재의 속성을 뜻한다.15)“그러므로 생명은 연합, 참여, 타자와의 종

3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1) 앞의책, 182.

12) 앞의책, 184.

13) 앞의책, 184-85.

14) 앞의책, 185.

15) 앞의책.

Page 1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것을견지하면서동시에 삼위일체안에하나됨을표현하였다.

보프에 의하면, 페리코레시스-연합 모델24)에는 네 가지 특성이 있

다. 첫째, 기독교인은 신앙의고백과 예전과 일상의 영적삶에서 아버지

와 아들과 성령을 하나님으로 경배한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다를뿐 아니라 서로에게환원될 수 있는 것도아니다. 셋째, 다르

고 환원할 수 없는세 위격들은영원한 연합 속에존재한다. 넷째, 위격

들의 관계는 질서를 갖는다. 아버지가 먼저이고, 아버지에 의해 출생한

아들이 다음이며, 발현하고 사랑 가운데 연합하는 성령이 그 다음이다.

이 네 가지 특성을 부분적으로 강조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삼위일체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 번째 요소와 두 번째 요소인 세 위격들의 존재와

이들의 환원불가능성을 받아 들이다면, 삼신론에 빠지게 되어 서로 간

에 연합이 없이 분리된 세 신들이 될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제3의

특성 곧 셋이 연합하는 관계에 집중하게 된다면, 삼위일체안의 관계를

하나님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상응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인간학적

구조의 표상으로서만 봄으로써 양태론의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셋

이 인간 안에는 존재하겠지만, 언제나 단일하고 하나이며 고유한 하나

님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관계의 질서 중에 네 번째 특성

에 거한다면, 아버지만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보는 종속론에 빠지게 된

다. 아들과 성령은 종속적인 차원에서 또는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진

(양자론) 지고의피조물의 형태로서하나님이 될 것이다.25)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69

24) 보프에게서 삼위(삶)는 연합으로 관계하고 그 관계하는 방식이 페리코레시스이다.

페레코레시스는삼위사이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사이에, 삼위일체 하나님과피

조물 사이에 작용한다. 연합과페리코레시스가상호교환하여 사용되기도 하지만, 연

합이 삼위에 국한되고 페리코레시스는 삼위의 관계를 넘어서 더 넓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보프의 삼위일체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필자는“페리코레시스-연합 모델”이

란 이름으로명명하여사용한다.

25) 앞의책, 205-06.

들이존재하며, 한 생명(life) 안에살아있는세 삶(living)이 존재한다.

보프는 삶(living)을 연합(communion)으로 이해한다. 삶은 언제나

타자와 더불어, 타자를 위해, 타자의 현존 안에 있는 삶이며 존재이다.

여기서 연합이란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이다. 연합의 관계는 서로

에게 현존하며, 상호적이고, 친밀하며 공동체적인 특성을 갖는다.19) 철

학적 관점에서 보면, 존재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방성-안에 있

는-존재( b e i n g- i n-o p e n n e s s )이며, 초월성-안에 있는-존재( b e i n g-

i n- t r a n s c e n d e n c e )이고, 우리-존재( b e i n g-u s )이다.2 0 ) 그런데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존재의 양식과 가치의 궁극이 하나님과 관계되며“하나

님은 절대적 개방성, 지고의 현존, 온전한 친밀감, 영원한 초월, 무한한

연합”21)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표상이 창조 안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적 계시 속에서 참된 형식으로 인식된다. 구약의 하나님

은 자기 백성과 계약을 맺는 하나님으로 계시되고, 신약성서는 하나님

을 연합으로 표현한다.22)

보프는 기독교 신학이 생명과 연합을 표현하기 위해 페리코레시스

(perechoresis)23)라는용어를 사용했던 점에주목한다. 신학자들은헬라

어 페리코레시스를 사용함으로써 한 위격에 두 위격들이 상호 침투되

어 있음을 표현하였다. 곧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3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9) 앞의책, 189-90.

20) 앞의책, 191.

21) 앞의책, 192

22) 사도 바울은 믿음을 통해 부활한 주와(롬 6:6; 고후7:3; 갈 2:19) 연합하며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고전 10:16-18; 롬 12:5) 연합한다고 보았다. 사도 요한은 아

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연합을 우리 모두의 연합으로 해석한다(요일1:1-3). 그리고

사도행전은성도의연합으로 표현한다.

23) 페리코레시스 위-키릴루스(Pseudo-Cyril)가 6세기 처음 사용하였고, 요한 다마스커

스(St. John Damascene)는 키릴루스의 용례를 차용하여 삼위일체의 사유의 자료로

삼았다. 페리코레시스는 라틴어 c i r c u m i n s s e s i o (상호내재)와 c i r c u m i n c e s s i o (상호내

재 혹은 상호침투)라는 두 의미로번역된 바, 정태적 의미와 활동적 의미를 모두 포

함한다. 레오나르도보프/ 이세형 옮김, 『삼위일체와사회』, 197-98.

Page 1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위일체적 일치가 된다. 세 위격은 그 내면의 역동성으로 인해 스스로를

밖으로 흘러보냄으로써 다양한 사물과 (우주와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존재를 창조하여 이들이 소통적인 사랑의 그릇이 되고 삼위일체적 삶

의 무한한 대양이 되게한다.

보프는 일치와 삼위일체의 균형을 이루는 일에 또한 세 위격들 사

이의 동등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던 세 입장이 기독교 전통에서 나타

난다고 본다. 곧 종속론과 양태론과 삼신론이다.30) 이러한 경향성은 동

방,31) 서방,32) 현대적 흐름33)이라는 세 흐름에서도 나타난다. 보프는 삼신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71

30) 종속론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 아버지만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아들과 성령은 아버

지로부터 하나님의 실체를 받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종속적인 성격을 띤다. 또한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동일 실체가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을 공유하기 위해 양자

로 채택된 피조물이다 이 해석은(이라우스주의) 아들과 성령이 온전히 하나님이 아

니라는 이유로 세 위격의 동등성을 거부한다. 양태론이라 함은 아버지, 아들, 성령은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이거나 동일한 하나님의 실체의 표상에 대한 세

양태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만 셋이 된다.

이 해석은(사벨리우스주의) 일치는 지켜주지만, 삼위는 폐기한다. 삼신론은 세 신이

영원히 분리되고 구분된 채 존재한다고 고백한다. 이 해석은 삼위는 지켜주지만, 중

대한철학적 오류와 함께일치를 파괴한다. 『삼위일체와사회』, 329.

삼신론은 종종 종교적으로 아버지 중심, 아들 중심, 성령 중심이란 일신론적 입장으

로 전개되며,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가부장주의, 영웅주의, 무정부주의로 표출된다고

본다. 보프에 따르면 이들 중심주의는 사회의 결속력이 부족하여 삼위일체 기독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의 수직관계, 아들의 수평

관계, 성령의 내적 관계는 병렬관계가 아니라 함께 존재한다고 가르친다.『삼위일체

와 사회』, 34-36.

31) 동방의 전통은 철학적으로 헬라의 유산과 연관된다. 우주의 조화와 질서에 모든 신

성의근거와 기원이 되는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출생하고 성

령이 발현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전체 실체를 아들 그리고 성령과 소통한다. 그러므

로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동일 실체가 되며 동일하게 하나님이다. 아버지 또한 영

원한과정 속에서 아들과 성령의 위격들을 구성한다. 보프는 이 전통이 종속론에 빠

질 위험을갖는다고평가한다. 『삼위일체와사회』, 79-81, 126-129.

32) 서방의 전통은 세 위격들 안에서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내적인 역동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절대적인영은아버지이고, 이해는 아들이며, 의지는 성령이다. 세 위격은구분된 양

서방 신학자들은 위격들의 상호 순환의 기초가 신성의 일치에 있다

고 보았고, 동방 신학자들은 위격들의 관계의 시원이 아버지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보프는 시작도 없이 동시적이면서도 똑같이 영원한 하

나님의 위격들이 무한한 상호연합 안에서 상호침투를 통해혼돈 없이

하나이며 한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26)“하나님은 사랑의 연합 안에

서 셋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사랑의 연합을 통해 세 위격의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 된다.”27) 예컨대 보프에게는 영원한 페리코레시스 안에

아버지와아들과 성령 곧 삼위일체가 출발점이 된다. 세 위격은 영원부

터 기원을 갖기 때문에 어느 위격도 다른 위격보다 선재하지 않는다.

위격들의 관계는 본체적 파생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참여의 관계이며,

생산과 발현의 관계가 아니고 상호 관계와 연합의 관계이다. 위격들은

본래 본질적 연합으로서 그 자체가 위격들이다. 따라서 보프가 이해한

기독교 하나님은 삼중적이다. 말하자면“하나님은 아버지로부터

(Patreque), 아들로부터(Filioque), 그리고 성령으로부터(Spirituque)이

다.”28) 따라서 위격 각각은 모든 것을 다른 두 위격으로부터 받으며 동

시에 모든 것을다른 두 위격에게 준다. 세 위격은 세 고유한 자리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이위일체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29) 다만 소통과

연합이라는 삼중적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세 위격은 영원히 셋으로 존

재하며 지고의 연합 안에 영원히 얽히고 수렴되어 동일하고유일한 삼

3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6) 앞의책, 210.

27) 앞의책, 211.

28) 앞의책, 213.

29) 이점에서 보프의 삼위일체는 재미 한국인 신학자 이정용이『동양적 관점에서 본 삼

위일체』(The Trinity in Asian Perspective)에서 펼친 음-양-관계의 구조로 전개한

이위일체적 삼위일체와 구별된다. 둘은 삼위일체를 삼중적으로 보아 아버지로부터,

아들로부터, 성령으로부터를 평등한 구조에서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하지만 이

정용은 음-양의 이위일체적 구조에서 사이를 관계 원리로 제시함으로써 이위일체

적 삼위일체를 전개한다. Jung Young Lee, The Trinity in Asian Perspective (Nash-

ville: Abingdon Press, 1996).

Page 1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은 아들의 인격 안에 공존하며 일치된

다. 두 본성이 인격 안에서 너무도 깊이 하나가 되기때문에 한 본성의

속성들은다른본성이 속성들과상호교환될 수 있다.37)

보프는 삼위일체적 일치의 삶은 신약 성서 안에 사도 요한이 기록

한 예수의 삶과기도에서(요17:21),38) 사도바울의 메시지에서(갈 3:28;

롬 10:12),39) 초대교회의 모습에서(행 4:31-35)40) 나타난다고 본다. 또한

사도바울이 말한대로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하나님께

서 만유의 주님으로 군림하기까지”(고전 15:28)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한 내용에서 미래적 운동의 성격

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연합과 상호 침투를 통한 삼위일체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73

마리아에게 임한다”(『삼위일체와 사회』, 304). 보프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세적 삼

위일체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한 라너의 규정은 수육을 통해 나타난 아들의 활

동과 의로운 자들과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의 활동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본다. 삼위

일체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계시되기 때문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세적 삼위일체와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보프는 이 상관관계가시간과 영원의

차이를 넘어 환원적 방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자

기 수여는시공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며죄의 어두운 세력으로왜곡되고피조된 인

식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영원한 삼위일체는 우리의 범주를 넘어서고, 영원한

생명의 축복속에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지만, 온전하게 계시하지 않는 헤아릴

수 없는신비 안에 존재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인간에게 계시된 삼위일체 그 이상

이다. 따라서 보프는 내재적 삼위일체 자체가 경세적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

37) 앞의책, 199.

38)“아버지, 아버지께서는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과같이, 그들도 하

나가되어서 우리 안에있게 하여 주십시오.”통합적이고 포용적인 삼위일체적 일치

의 목적은 병든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며, 하나님의 연합을 거스른

자에게 용서를 베푸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 돌리게 될 온전

한 영광이다.

39) 삼위일체 안에 나타난 통합은 역사 안에 나타나야 한다. 이럴 때에 유대인과 이방인,

헬라인과야만인, 노예와 주인, 남자와 여자사이에생겨난 공동체의분열이 극복된다.

40) 성령의 임재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초대 교회는 궁핍한 사람들이 나

눔의경제를 통해넉넉해지며마음과 영혼이연합한 공동체였다.

론의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은 현대 신학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변증한다. 그 이유는 첫째, 아버지, 아들, 성령의 존재가 구분되

지만연합되어 있다는기반때문이고, 둘째, 피조물의상호침투를 통해

서 우주와 인간사회를 소통, 연합, 하나됨의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보프는 이 해석이 압제 당한 자들이 스스로를 해방시

키기 위해 더 큰 나눔과 연합이 가능한 일치를 강화시켜준다고 생각한

다.34)

페리코레시스가 삼위일체안에 위격들의 상호침투를 위해 사용된 경

우 외에 신학에서 사용된 영역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와 관련해

서, 또 다른 경우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와 관련해서 사용되었

다.35) 하나님은세계안에존재하며, 하나님의현존, 활동, 섭리가 세계에

배어든다. 그러나 물질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고하나님 안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 상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

에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 페리코레시스는 완전하지 않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여 보프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세적 삼위일체일수는 있어도 경

세적 삼위일체가 곧 내재적 삼위일체가 될 수 없다고 정리한다.36) 예수

3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태로 동일한 본성을 점유한다. 곧 아버지는 시작이 없이 존재하며,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출생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내쉰다. 세 위격은 동일한 본성 안에 동일

실체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한분 하나님이다. 보프는 서방의 전통은 양태론으로

해석될 위험이있다고 평가한다. 『삼위일체와사회』, 78-79, 122-126.

33) 보프에 따르면 현대신학은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들로 구성된 삼위일체로시작한

다고 본다. 그러나 이 세 위격들이 영원한 상호침투 안에 산다. 말하자면, 한 위격은

두 위격들 안에 두 위격들을 통해서, 두 위격들과 더불어, 두 위격들을 위해 존재한

다. 삼위의 일치는 위격들의 상호 침투와 영원한 연합을 통해 세 위격이 하나를 이

룸을 뜻한다. 여기서 하나 됨은 영원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삼신론으로 비쳐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 보프의 평가다.『삼

위일체와사회』, 81-83, 129-131.

34) 앞의책, 330-331.

35) 앞의책, 199.

36) 앞의 책, 306. 보프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하며 구원한다.“아버

지는세계의신비로 계시하고, 아들은 수육하며, 성령은우리의 마음에부은바되고

Page 1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해방의 영감을 제시한다.“교회는 성령 안에서 수육한 아들을 통해

아버지와 연합을 이룬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믿는 자들 사이에 또한

믿는 자들과 지도자들 사이에 연합을 이룬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다.”45)

또한 교회의 연합은 삼위일체 연합을 표현한다. 삼위일체가 담고 있는

교회 모델은 모든 이의 선을 위해 모든 이가 연합하게 함께 참여하도

록 한다. 따라서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하나를 이룬 백성이어

야 한다.

보프는 불평등한 구조로 구성된 사회는 삼위일체를 거스르는 것이

라 보았으며, 사람들 사이의 나눔과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모든사람들

을 위한 정의와 평등의 구조로 구성된 사회는 삼위일체를 존중하는 사

회라고 보았다.46) 특별히“교회가 삼위일체적 공동체의 성례전이 될수

록, 기독교인들 사이에 그리고 교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모양의 목회

들 사이에 불평등이 사라지게 되며, 다양성 안에 상호 존재하는 통일

성을더욱더 이해하고 실천하게 된다”47)고 보았다. 또한보프는 궁극적

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창조 그 자체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불평등

은 구원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될 때 인류와 모든 피조물

이“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교제 속에 참여하도록”변화할 것이라고

제시한다. 따라서 우주는“하나님의 몸”이 되며, 내재적 삼위일체를 특

징짓는 이상세계의 실재는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특징짓는다. 따라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75

45) 앞의책, 221.

46) 스택하우스(Max I. Stackhouse)는 삼위일체 흔적의 개념을 받아들여 보프의 삼위일

체를 반-위계적이고 반-가부장적이며 결정적으로는 인격론적이며 공동체적이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보프는“지구적 이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뿐 아니라 심리학, 사회주

의, 신정통주의의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교회일치의 정신을 가진프로테스탄트교회

들”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Max L. Stackhouse, “The Trinity as Public

Theology: Its Truth and Justice for Free-Church, Noncredal Communities,” in

Faith to Creed: Ecumenical Perspectives on the Affirmation of the Apostolic Faith

in the Fourth Century, ed. S. Mark Heim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91), 186.

47) 앞의 책, 333-34.

적 일치는 창조의 세계가 세 위격의 연합속으로 통합되기까지 미래를

제시한다.

보프는 삼위일체적 연합의 빛에서 볼 때 현대의 사회주의와41) 자본

주의는42) 이상적인 공동체로부터 이탈한 공동체라고 평가한다. 삼위일

체의 일치는 연합 안에서 차이를 상호 용납함으로 가능하다.“삼위일

체 안에는 일방적인 지배란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 수용과 내어줌 안

에서 세 위격의 수용이 존재한다. 세 위격은 서로 다르지만 우열이나

선후의 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연합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사회는 계급의 차이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43)

보프에게 삼위일체적 연합의 신비는 인간 역사에서 해방을 가져오

는 영감이다.“연합, 참여, 평등은 억압당하고 영구히 소외당한 다수의

사람들에게거부되기 때문에, 해방의 과정은 억압당한사람들 자신들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억눌린 기독교인들은 해방의 영감을 자신들의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이 해방은 참여와 연합을 가져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인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44) 같은 맥

락에서 삼위일체적 연합의 신비는 군주적이며 가부장적인 교회의 구조

3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1)“사회주의 사회는 사회를 위한 사회적 요소의 기본적 타당성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적 요인을 개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또한 공동체 사이의 차이

를 인정하지 않은 채 집단적으로 이해하고 수행한다.…사회적 차원을 관료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다름을 존중하는 동등성의 사회가아니라 대중화의 요소를 지닌 집단

적 사회를 만들어낸다.”『삼위일체와사회』, 218-218.

42) 개인 혹은 기업의 이윤 창출을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인종들, 남성과 여성 사이를 심각하게 분리시켰다. 또한 모든 시장을 동일하

게 하면서 몇몇 엘리트를 위해대부분의 사람들을 주변화시켰다. 이점에서 자본주의

는 세속화와 더불어 하나에 기초된 지배를 구현하고 강조한다. 하나의 우두머리, 하

나의 시장, 하나의 소비자 세상, 하나의 적절한 세계관, 자연과 관계하는 하나의 방

법, 절대자를만나는하나의 길 등이다. 『삼위일체와사회』, 217.

43) 앞의책, 218.

44) 앞의책, 219.

Page 18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회의위계적인모델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보기때문이다. 보프는

기독교 서구사회에 나타난“절대주의”(Absolutism), “전체주의”(Totali-

tariansm), “가부장제”(Patriarchalism)는 모두 군주적이며 유일신론적

하나님 개념의 지지를 받은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비평적 분석에서 볼

때, 하나님 개념은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구성되었다. 예를들

면, 신의 군주 개념은 황제들, 왕들, 독재자들이 온 세계를 통치하고 남

자들이 가족 안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지배하는 인간 사회의 위계적 개

념들을 정당화하기위한것이었다.

때문에 보프는‘아래로부터’의 사회에 대한 재-정위가 필요하며 지

배와 압제보다는 성례전과 참여의 관계에 기초한 평등한 형제와 자매

의 공동체로서 인간 사회의 평등한 이상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하나님

의 비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보프에게 사회에 대한 기독교 사회주의

적 이상은“삼위일체의 신비에 이르는 도상에 있는 안내자이다. 그러나

계시로부터 우리가 인식 하는바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회적 삶과 그 원

형을 향한 안내자이다.”51) 보프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온전히 구별

된 인격적 현존들을 간과하지 않았다. 또한 삼위일체 위격들을 단순히

(바르트의) 존재의 양식들이나 (라너의) 현존들로 환원시키지도 않았다.

보프는 반-삼위일체적 군주적 유일신론은 교회와 사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도구가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보프는 사회를 하나님의 존재유비로 이해하였다. 보프에게

인간사회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리키는 이정표다. 삼위일체의신비는

사회적 삶과 본래적 모습의 근거가 되며“인간 사회는 삼위일체가‘하

나님의 사회’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흔적을 갖는다.”52) 하나님의 원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77

51) 앞의책, 174-177.

52) 앞의 책, 175. 보프의 이러한 주장은 타이만스(F. Taymans d’Eypernon)과 그랙(A.

Greck)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F. Taymans d’Eypernon, Le mystère pri-mordial: La

trinité dans sa vivante image (Paris, 1950), 56-62; Grom and Guer-rero, El

anuncio, 36, 99-106; A. Greck, “Socialtheologie”, Lexikon für Theolgie und

Kirche 9, 925 이하에서재인용함.

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류의 압제를 상징하는 암흑세계를 폐기함

으로써 이상 세계로 접근하게 하는 모든 가능한 일을 하도록 부름받

고 있다고 보았다.

I I I. 보프의삼위일체신학에대한비평적평가

보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과세 위격의 관계를 생명(life)과

삶(living)의 관계로 풀었다. 보프에게 생명은“실존의 자기-실현의 과

정”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은 영원한 실존의 자기-

실현의 과정을 갖는다. 하나님의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요청된 것이“페

리코레시스-연합 모델”이다. 보프는 페리코레시스-연합 모델을 통해

위격의 연합,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하나님과 피조물의 연합

을 말할수 있는이론적 근거를제시한다.

보프는 페리코레시스-연합모델을 통해자신의 삼위일체신학을 전

개함에 있어서 성찰로서의 삼위일체 신학보다는 고백과 경험에 우선권

을 두며48) 송영이 신학에 앞선다고 한다.“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

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며, 하나님이 하나의 본성과 세 위격들이라

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해설(신학)이다.”49) 이 구분을 통해서 보프는 자

신의 신학적 과제가 신앙의 진정한 표현을 회복키위한것이라고 보며,

삼위일체신학은 삼위일체 신앙을 탐구하는것이라고보았다.50)

보프가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사색적 신학과 경험적 신

앙을 구분하는 것은 사색에 기초한 고전적 삼위일체 신학이 사회와 교

3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8)『앞의 책, 17-27.

49) 앞의책, 18.

50) 보프는 a. 연합 안에 세 위격들인 하나님이 어떻게 한분 유일한 하나님을 구성하는

지? b.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소명과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c. 어떤 유형의 사회가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는지? 라는 세 가

지 중요한 동기를갖고삼위일체신앙을 탐구한다. 『삼위일체와사회』, 30-31.

Page 1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여기서 보프의 논증은 분명하지 않다. 아버지의 시간적 우선성을 포

기하지만, 보프는 여전히 제2 위격과 3 위격의 신성이1 위격에 의존한

다고 본다. 때문에 제1 위격은 다른 두 위격과 독립적인 관계를 갖는

다. 이 논리는 사랑에도 적용된다. 이점에서 스스로 반대하였던 동방의

종속론적 군주제로 회귀했다는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내재적 삼위

일체의 영원성을 강조한 보프는 경세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

지만 내재적 삼위일체의 전체는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고전적 입장을

고수하는 쪽으로 나아간다.56) 따라서 보프는 삼위일체가 영원한 신비에

감추어지기 때문에, 창조를 뛰어 넘어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지고의

삼위일체를고백하는쪽으로 후퇴한다.

보프가 지향한 또 다른 평등의 관계는 성차별주의를 뛰어 넘는 양

성 평등의 세계였다. 보프는 하나님의 삶 안에서 성의 상징적 의미를

묻는다.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아버지는 성을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의 상징적 의미는 사회적인 연관을 갖는다. 하나님이 인간

아버지와 동일시 될 때, 아버지가 자녀와 부인과 여성에 대해 군림하는

것을정당화할 수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보프는 양성으로 표현된 하나

님은 위격 중 하나가 여성인 것이 아니라 세 위격 각각 안에 남성의

성향과 여성의 성향이 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보프는675년 톨레도

회의에서사용되었던“아버지의자궁”(the Womb of the Father)이란표

현을 즐겨 인용하여 하나님을“모성적 아버지”와“부성적 어머니”57)로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79

55) 앞의책, 211-214.

56) 앞의 책, 167-171. 여기서 보프는 삼위일체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송영적 접근과 역

사적접근과 변증법적 접근을 소개한다. 그의 논리라면 변증법적 접근을 발전시켜야

하지만, 놀랍게도 송영적 접근으로 회귀해 버린다. 이는 이후 송영을 다루는 영역에

서 보프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철저한 불신을 고백하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대면

하게 될 때 이성은 작업을 멈추고 노래하고 찬양하게 된다고 한다.『삼위일체와 사

회』, 308.

57) 앞의 책, 178-80. J. Moltmann, “The Motherly Father,” Concilium 143 (1981), 51-

56; “Ich glaube an Gott der Vater”, Evangelish Theologie 43 (1983), 397-4 1 5 ;

Mary Daly, Beyond God the Father (Boston, 1973)를 참조할 것.

형상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연합을 통해 이루는 공동체(사회)다.

삼위일체적 공동체는“정의롭고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평등한 사회 조

직의 모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신앙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들은삼

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 사회를 요구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들로 구성된 삼위일체 신앙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잠을 깨워 참여,

평등, 연합을 요구하게된다. 따라서 삼위일체신앙은 생명과 자유에 기

초하여 지배나 억압의 사회를 거부하고 평등한 관계로의 해방을 가져

오는평화와 정의의 사회를 희망하게한다.

앞서 보프가 삼위일체 신학을 위해 사용한 페리코레시스-연합의 모

델의 네 가지 특성을 소개한 바 있다.53) 여기서 보프는 내재적 삼위일

체 안에 위격들의 관계가 갖는 질서를 견지한다.“아버지가 먼저이고,

아버지에 의해 출생한 아들이 다음이며, 발현하고 사랑 가운데 연합하

는 성령이 그 다음이다.”54) 이 입장은 아버지가 군주가 되어 하나님의

위계질서라는 종속론에빠진다. 이점을 잘 알고있었던 보프는 두 가지

방향에서 종속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위격들의 관계가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또한 사랑을“서로를 위한,

서로에 의한, 서로와 더불어, 서로 안에 있는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보

프는 어느 한 위격을 다른 두 위격위에 둘 수 없다고 보았다. 둘째는

위격의 연합의 관계가 영원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종속론을 피할 수 있

다고 보았다. 이 관계는 시작이 없고 아버지가 시간적 우선권을 갖지

않는다고 보았다. 때문에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에게 종속되지않는다고

주장한다.55)

3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53) 첫째, 기독교인은 신앙의 고백과 예전과 일상의 영적 삶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을 하나님으로경배한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다를뿐 아니라서로에

게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셋째, 다르고 환원할 수 없는 세 위격들은 영원한

연합 속에 존재한다. 넷째, 위격들의 관계는 질서를 갖는다. 아버지가 먼저이고, 아버

지에 의해 출생한 아들이 다음이며, 발현하고 사랑 가운데 연합하는 성령이 그 다음

이다. 『삼위일체와사회』, 204-206.

54) 앞의책, 205.

Page 1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간의 성은신적인 영역이 아니고 철저하게 인간의 현상이다. 곧 성은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질서에 속한다. 보프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연

합과 사랑은 동등하고 똑같이 영원한 것들 사이의 연합이요 사랑이라

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다른 존재들을 위해서는 아직

사랑과 연합이 아니라고본다.“삼위일체적관점에서보면, 하나님이아

닌,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피조물에게는 창조란 삼위일체적 사랑과 연

합의 표상일 뿐이다.”63) 이 말은 앞서 말한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세적

삼위일체이지만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일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성령의 수육으로서 마리아의 기능을 말하는 대

목에서는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과 끝이 없이

연합한다고한다.64) 이 모순적 표현을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또한 보프는 예수가 인성 안에 아들이 남성성을 입었듯이 성령께서

명시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여성성을 입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적 구원의 균형을 담는다고 주장한다.65) 아들의 고유한 사역의 한

정이예수에게서 나타나듯이, 성령의 고유한 사역의한정이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66)“성령은 아들이 예수 안에서 육체를 입은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마리아 안에인격적으로 현존하기 위해서 실제적이고

도 분별 가능한 방식으로 마리아 안에서 현존한다.”67) 예컨대 아들이

인격적이고 세밀한 방식으로 나사렛 예수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자

기의 거처를 삼아 인간의 모양을 입었듯이(요 1:18) 성령도 마리아 안

에서인간을 입었고, 또한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이 마리아를영적 존재

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68)

보프의 이러한 주장 또한 자신의 논리에 모순됨을 보여준다. 보프의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81

63) 앞의책, 313.

64) 앞의책, 296.

65) 앞의책, 300-301.

66) 앞의책, 299.

67) 앞의 책, 301.

68) 앞의책, 300.

표현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생산 활동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모습과

남성의 모습 둘 다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58) 아들도 여성이 보여주는

사랑과 돌봄을보여주고있기때문에 남성성과여성성을가지며,59) 성령

또한 위로와 위안의 사역 때문에 여성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60) 보프는

세 위격의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에 관심함으로써 양성평등한 정

의로운 사회의 신학적근거가 삼위일체신학이라고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보프가 이 논의를 할 때 테드 피터스의 지적처럼61)

자기-모순에 스스로 빠져 있다는 점이다. 다음의 내용에 그 예가 나타

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을 뛰어 넘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St. Gregory of Nazianzen)가 말했듯이, 하

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원형이 하나님 안

에 있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인간의 본성을 결정하는 뿌리이다. 남성이

든 여성이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 안에 인간의 기

본적인 가치를 갖고있다.…위격 각각이 남성의 차원과 여성의 차원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삼위일체 신비에 성의 특성을 부여하거나 삼

위일체 신비 안에서성의 특성을 찾아보려는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려

는 것은 삼위일체가 남성과 여성의 모양으로 인간에게 부여한 궁극적

인 가치를분별해 내는것이다.62)

보프는 한편에서 인간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원형이 하나님 안에 있

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성을 뛰어 넘는

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남성성과 여성성의 원형은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성을넘어서고 성에관한한 하나님의 원형이 없다면

3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58) 앞의책, 246-48.

59) 앞의책, 263-64.

60) 앞의책, 281-84.

61) 테드피터스, 『삼위일체하나님』, 194-95.

62) 레오나르도보프, 『삼위일체와사회』, 283.

Page 1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V. 결론

보프는 페리코레시스-연합의 모델을 통해 생명의 하나님께서 자신

의 영원한 실존을 어떻게 구현해 가는지 자신의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보프는 연합 안에서 세 위격 하나님이 어떻게

한 분 유일한 한분 하나님을 구성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아울러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에서 해방신학의 정치적 기획으로서 삼위일체 신학의

실천적 과제를 제시한다. 보프의 정치적 의도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양

성 평등의 사회였고, 둘째는 가난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평등한

구조를 지닌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보프는 삼위일체

가 정의롭고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평등한 사회 조직의 모델이라고 보

았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뿌리를 둔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의 형

상과 모양을 지닌 사회를 요구하는 바,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들로

구성된 삼위일체 신앙은 억압당한자들의 잠을깨우는 참여, 평등, 연합

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보프는 삼위일체 신앙은

사회와 교회에 낮은 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배타적 사회를 거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과제를 위해서 보프는 유일신론이 사회와 교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분석하였다. 보프에 따르면 유일신론은초기교회에서 다신론과

직면하여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유대교로부터 빌려온 것이

었다. 그 후 유일신론은 철학적인 헬라 사유의 일자개념을 통해 공고

해졌으며 근대의 무신론과 대항하면서 더욱 견고하게 기독교 전통 안

에 자리를 잡게되었다. 유일신론은절대주의와전체주의와가부장제를

정당화하였고, 사회와 교회에 억압과 소외를 낳았다. 이제 보프는 삼위

일체신앙을 회복함으로 사회와 교회가 나눔과 연합을 택하며, 모든사

람을 위한 평등의 구조에 기초한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희망하였다. 또한피조세계와 우주세계에 까지페리코레시스연

합의 구조를 확장하여 종말론적 완성에서 우주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83

삼위일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 하나님이 동등한 관계 속에서

연합과 참여를 통해 일치를 이루는 사회적 삼위일체이다. 그런데 아버

지께서 남성과 여성의 고유성을 지닌 채 삼위일체의 연합 속으로 인간

을 인도하기 위해 아들과 성령을 예수와 마리아의 모습으로 수육하게

하였다는 보프의 신학서설은 한편에서는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어

떻게 조화가 되는지 의문이다. 또 다른한편예수와마리아라는이중수

육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등한 자리라는 정식과도 맞지 않는다. 영

원한 삼위일체하나님이 역사에 동등한 구조로 나타났다면예수와 마리

아 외에 아버지에 상응하는 역사적 현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프에

게는 아버지는 역사적 현존을 가지지 않은 채 아들과 성령을 역사속에

예수와 마리아로 내 보낸다. 보프는 종속론을 피하고, 동방의 전통을 극

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와 마리아의 이중 수육은 형식에 있어서

동방의 종속론적 구조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성

평등을 지나치게 주장한 나머지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넘어 양성

수육을 주장한다. 영원한 삼위일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각각이

양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경세적

삼위일체 영역인 역사적 현존에와서는그 균형이 깨어지고 있다.

보프는 계급이 없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신적 사회의 상관관

계를 통해서 이 땅에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보프가 생각한 신적 사

회는 하나의 군주제였고, 군주제 또한 우리가 사는시간의 영역과 상관

없는 영원한 신비 속에 감추어 둠으로써 인간 사회와 진정한 상관관계

를 이루는데 거리를 느끼게 한다. 이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평등한

구조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희망한 보프의 꿈은 하나의 이상적

제시로 끝나버릴수밖에 없지않는가라는의문이 남는다.

3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지닌한 인격으로영원의 관계망 속에서 활동하게된다.70)

또한 상호 수용과 내어줌 안에서 세 위격의 수용을 말하는 삼위일

체의 연합에서 볼 때 계급적 차이에 기초한 지배적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프에게 교회는 아버지께서 메시아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보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성례전이다. 따라서 교회는삼위일

체의 왕권을 중심으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계급과 중앙집권적인제도

를 통한 권력의 집중을 갖고는 더 이상 온전한 기능을 감당할 수 없다

고 본다.71) 삼위일체적 연합(trinitarian Koinonia)이 있듯이 교회적 연

합(ecclesial koinonia)이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성령 안에 수육한

아들을 통해아버지와 연합을 이룬 믿는자들의 공동체이며, 믿는 자들

사이에 또한 믿는 자들과 지도자들 사이에 연합을 이룬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다.72)

마지막으로 보프의 생명의 삼위일체는 새로운 생태 신학을 가능하

게 한다. 생태적 차원에서 보프는 삼위일체적 범-재신론적 입장에 선

다. 보프는 최근에 일어난 생태학 담론이 우리에게 세 위격들의 연합으

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목소리의 가능성과 신빙성을 제공해준다

고 본다. 생태학적 담론은 우리의 우주를 지탱하고 수성하는상호 의존

들과 내포들 안에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구조화된다. 일치와 함께(즉,

하나의 우주, 하나의 행성 지구, 하나의 인류, 그리고 기타 등등) 다양성

또한 넘쳐난다.(즉, 은하 운석들, 태양계, 생물다양성, 그리고 인종의 복

잡성, 문화들, 그리고 개인주의들) 이러한 공존은 일치와 다양성 사이에

서 삼위일체와 연합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우리의 다양성의 이해를 생

각할 수 있는 영역으로 열려있다.73) 상호침투적 연합은 위격들 안에 그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85

령의 연합 안에 참여하게 되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될 때 삼위

일체는 모든것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되고, 언제나 이해를 뛰어 넘

는 성만찬적 신비가 될 것이라고희망하였다.69)

그러나 보프가 희망한 인간적이고, 개방적이고, 평등한 구조안에 정

의와 평화가 넘치는 삼위일체 사회는 그의 신학이 지닌 논리적 모순

속에서 힘을 잃게 된다. 보프는 종속론과 양태론과 삼신론을 극복하고

자 했다. 그런데 역사 과정에서 전개된 그의 삼위일체 해석은 동방의

군주론적 종속론으로 회귀하고 있고,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

체를 구분함으로써 삼위일체적 삶의 철저한 구현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서나 가능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진다. 이점에서 보프의 삼위일체는

삼신론적인 경향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세 위격의 평등한 구조에서

시작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내재적 삼위일체에서는 지켜졌는지 모르지

만 정작 그가 기도했던 정치적 기획의 영역인 역사적 현실의 세계와

경세적 삼위일체에서는이상으로 제시되고 있을뿐이다. 이점에서보프

의 사회적 삼위일체는 기획의 의도와 실현 사이에 큰 간격을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보프가 의도했던 사회적 혹은 정치적 기강으로서의 삼위

일체 신학은 동방의 군주론에 입각한 내재적 삼위일체로 회귀함으로써

그 논리적 기반을 상실하고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보프가 제시한 생명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정의와 평화를

희구하는 인류에게 인간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생태이슈에 대해 새로

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보프는 인간을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

존재로 이해함으로써 언제나 타자와의 열린 관계를 지닌 존재로 이해

한다. 타자와 관계하고, 타자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며, 타자를 통한 존재

로 자신을 본다. 이점에서 개체 인간은 삼위와 같이 소통 불가능한 자

기의 영역을 지니지만 동시에 타자와의 연합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따

라서 삼위일체의 빛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위격들의 형상과 모양을

3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69) 앞의책, 333-34.

70) 앞의책, 216-217.

71) Leonardo Boff, 김쾌상 옮김, 『교회: 카리스마와권력』(서울: 일월서각, 1986), 78-80.

72) 보프, 『삼위일체와사회』, 221.

73) Leonardo Boff, Cry of the Earth, Cry of th Poor (NY:Orbis Books, Maryknoll,

1997), 154.

Page 1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고 제3세계인 남미의 현실에서 신학하는 과정에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생명의 운동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기초하고 있음을 제시하

였다. 보프의 삼위일체에 나타나는 신학적 논리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와 생태세계에서 사회적 생명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을 읽어냄으로써 연합을 전제한 일치를 제시할 수 있었고, 평등과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세계가 생명의 하나님의 과제이며 동시에 하나

님의 부름 받은 우리의 과제임을 페리코레시스 연합의 구조 속에 제시

할 수 있었다. 또한 온전한 연합안에 일치와 일치안에 연합이 삼위일

체의 신비이며, 이 신비로의 회귀를 제시함으로써 해방을 가져오는 정

의와 평화의 실현이 곧 우리의 종말론적인 현재적 과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주제어

사회적 삼위일체, 생명, 평화, 정의, 연합과 일치, 삼신론, 양태론, 종속론.

Social Trinity, Life, Peace, Justice, Communion and Unity, Tri-

theism, Modalism, Subordinationism

접 수 일 2011년 7월 1일

심사(수정)일 2011년 8월 13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87

리고 위격들을 위한 존재로서 위격들의 결과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

위에서 관계함으로 시작된다. 이 때 각 위격들은 동시적이며 시원적이

다. 그들은 연합하는-위격들(communion-Persons)이다. 그래서 한 위

격들의 연합인하나님(God-communion-of-Persons)이 된다.74)

현대의 생태학자들은 관계가 우주의 생성의 기본적 논리를 구성하

므로 관계적 상호작용을 좀 더 강하게 표현한다. 만약하나님이 연합과

관계라면, 우리가 반복해서 강조해왔듯이, 우주 전체는 관계 속에 산다

고 할 수 있다.75) 다른 말로 표현하면“우주는 이러한 다양성과 이러한

연합의 복사판”76)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매 지점들과 모

든 순간들의 모든것과 함께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하

나님을 신비로 이해하는 오늘의 해석에 있어서 우주의 신비의 가장 적

절한 표현으로 부각된다. 이러한 하나님은 그의 삼위일체의 표현대로

한분 그리고 고유한 신비는 아버지, 아들그리고 성령을 주어진 관계와

연합의 실체로 존재한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우주론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게다가, 삼위일체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열려 있고 전진적인

실체인 하나님의 연합의 형상과 유사성을 이뤄야 하기 때문에 모든분

야들에서 모든닫힌체계에 대한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삼위일

체는 우주의 미래를 위한 약속으로 부각된다.77) 생태계와 조화롭게 살

아가는 삶이바로하나이고 동시에 다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신비78)

에 참여하는 일이다.

2013년 10월 제10차 WCC 부산총회의 주제가“생명의하나님! 우

리를 평화와 정의로 인도하소서”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반생명적

이고 평화가 정의가 깨어진 세계이다. 보프는1 세계에서 신학을 훈련

3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74) 앞의책, 155.

75) 앞의책.

76) Leonardo Boff, 『생태신학』, 55.

77) Cry of the Earth, Cry of th Poor, 155-156.

78) Leonardo Boff, 『생태신학』, 56.

Page 1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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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삼위일체론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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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Boff, Leonardo. “Trinitarian Community and Social Liberation.” C r o s s

Currents. Fall (1988): 289-308.

3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society, for he believes that trinity serves as a basis for a just and

equal society.

Through his study, Boff points out that the unequal, poor society is

linked closely with the monotheism and patriarchism of Christian

theology. On the contrary, Boff believes that the trinitarian mystery

which brings forth the perichoretic unity of communion, participa-

tion, and equality, suggests a way of life and liberation to those who

are suffering in the social structure of poverty, oppression, and

unequality. In the sense that “the image of God” shows the equality,

reciprocity, and un-selfishness of trinity, trinity gives us a political

mission which challenges us to achieve the society of justice and

peace in the life of the triune God.

이세형, 정의와 평화를지향하는레오나르도보프의생명 삼위일체론 391

Leonardo Boff’s Life Trinity towardthe Society of Justice and Peace

Lee, Se Hyoung

Professor

Hyupsung University

Hwasung, Korea

Boff’s trinity is the process of God’s self-realization in the

evolutionary process of history and the cosmos, in which the God of

life participates in triune communion and unity. For this reason, his

truine God is the foundation of justice and peace in history and

society. Therefore, the writer suggests that Boff’s doctrine of trinity

can be a way for Korean Christianity to find justice and peace in the

God of life.

B o f f’s trinity is the focus of his book Trinity and Society. Boff

develops his trinity theology in the light of Latin American liberation

theology after exploring the traditional argument of trinity in the

Bible and church history.

Boff explores the trinitarian faith with three questions: 1) How is

the triune God made of one unique God? 2) What is the mission and

meaning of life for us, who are participating in the mystery of the

trinitarian communion? 3) What kind of society is identified with

God’s plan? For these questions, Boff explores trinity, the peri-

choretic mystery, trinitarian communion, and the mystery of divine

3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1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종교적상징과해석의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임형모

(침례신학대학교, 강사)

I. 들어가는말

본 논문은 폴 틸리히(Paul Tillich)와 폴 리쾨르(Paul Ricoeur)를 중

심으로 신앙에 있어서 종교언어의 상징과 해석의 문제를 고찰하는데

있다. 이 주제에 나타난 종교언어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논쟁적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 입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부정적인 측면은 과거 어떤 시대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종교철학과 신학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혼동되어 있고 역사 실

증적인 언어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언어들이 사용된 본래

의 의미와 전달하려고 했던 내용을 더 이상 포착하지 못할 뿐만 아니

라 진리에 대한 왜곡을 심화시키는 현상이 지배적이다. 둘째, 긍정적인

측면은 종교언어분야에 대한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

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인식 범주와는 상당히 다른 실재의 차원들이

있고 이러한 다른 차원들은 다른 접근방식과 다른 언어를 요구한다는

점이받아들여지고있다.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93-424

Page 1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종교적 언어의 상징과 해석에 나타나는 의미재고를통해서 상징의 정당

성과 해석의 합리성을 논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틸리히를 중

심으로 상징언어의 의미와 성례, 그리고 종교적 상징과신의 관계를 고

찰할 것이다. 그리고 상징의 진리 적절성의 문제를 담보하고 상징 해석

의 가능성을 리쾨르의상징이론과해석이론을중심으로 짚어보고자 한

다.

I I. 상징의의미와상징너머의하나님

1. 상징의의미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는 종교언어가 가지는 상징적 본질에 관한 이

해이다. 먼저 상징이 언어 이외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으나 언

어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본 논문은 상징을 언어의 한 양태로 간

주할 것이다.“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은 단지 상징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삶은 상징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

다”3)는 것이상징의 대전제다.

상징은 한마디로‘에워싸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암호’와 같다.

상징의 의도는 상징 그 자체를 보다 깊고 넓게 만드는 데 있다.4) 여기

에 종교적 상징과 해석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런데 상징이 그것자체가

지시하는 바로 그 실재를 포함하고 또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완결된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 까닭에 상징의 이해 원

리는 상징을 보다 넓은 상황 가운데 둠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해

임형모, 종교적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395

상징이론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근대이후 인간의 정서와 의미를 중

시한미학의 부상과 언어이론이 철학과 종교에 등장함으로써 가능하였

다. 상징은 인간의경험구조와맥을같이한다. 특히심층심리학의무의

식의 영역과 종교의 실재에 대한 차원은 종교언어인 상징으로 표현된

다. 예를 들어 융(C. G. Jung)은 무의식에 나타난 자기실현과 개성화의

표상을 상징으로 이해하였으며 엘리아데(M. Eliade) 또한 종교에서 성

스러운 것(the Holy)은 상징으로나타난다고보았다.

상징 개념은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틸리히와 리쾨르 사상에서 인

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1) 틸리히의 신학사상에서 상징은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언어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은

상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 속하는 유한한 실재가 그 실

재를 무한히 초월하는 궁극자를 직접 표현할 수 없음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성서해석학자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리쾨르는 현대사회가 망각

해버린 중요한 의미들을 상징 언어 해석을 통해 다시 일깨울 수 있다

고 보았다. 그의 상징해석학의 모토인“상징은 생각을 일으킨다”2)는 상

징이주는의미의 잉여를 반성적으로해석하는의미를 함축한다.

이렇게 계시의 수용과 전달을 매개하는 종교적 언어에 대한 분석과

의미 규명작업은 틸리히의 상징이론과 리쾨르의 상징해석학에서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상징이론을 강조한 것은

우리 시대에 그 의미를 상실했거나 문자주의로 그 의미가 왜곡되어 우

상화로 치닫는 상징의 언어의미 문제를 동시대적 상황 속에서 바로 이

해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신앙의 경험 속에 있는 모든 것

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로 포착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3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 Charles W. Kegley and Rovert W. Bretall, eds., The Theology of Paul Tillich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9), 333; Dynamics of Faith (New York:

Harper & Row, 1957); Paul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Boston: Beacon Press,

1969); 『해석의갈등』, 양명수 역(서울: 아카넷, 2001).

2) Paul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Boston: Beacon Press, 1969), 19, 348.

3)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 (New York: Harper & Row, 1957), 41.

4) D. Mackenzie Brown, Ultimate Concern: Tillich in Dialogue (New York, Evanston:

Harper & Row, 1956), 14; Louis K. Dupré, 『종교에서 상징과 신화』, 권수경 역(서

울: 서광사, 1996), 58: Karl Jaspers, Truth and Symbol, trans. Jean T. Wilde and

others (New York: Twayne Publishers, 1959), 53.

Page 1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둘째, 상징의‘참여성’이다. 상징은 지시하는 것에 참여한다. 이것이

기호와의 두드러진 차이다. 기호는 지시하는 것의 실재와 힘에 참여하

지 않는 반면에 상징은 비록 상징화하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고 할지

라도 그 의미와 힘에 참여한다.9) 상징은 상징화된 실재에 참여하는 까

닭에 상징을 성격 짓는다.10) 한 나라의 국기는 그 국가의 힘과 권위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국기는 그것이 상징하는 나라의 실재가 바뀌는 역

사적인 대재앙이 아니고서는 대치될 수 없다. 만일 국기가 하나의 상징

으로서 그것이 상징하는 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기에 대한 공격은

모독으로 느껴지지 않을것이다. 이처럼 상징은 일상적인 삶에어떤영

향을 미치는 절대적인‘힘’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종교적 상징은 실존

의 기능을 통하여 인간에게 어떤 삶의‘의미’를 제공하는 원천의 구실

을 한다.

셋째, 상징의 개방성이다. 상징은 우리에게 닫혀있는 실재의 수준을

완전히 개방한다.11) 여기에서 상징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

고 그 의미와 힘에 참여하는 어떤 것을 대표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

다. 예술 작품에 나타난 모든 상징들은 비상징적인 말로서는 표현하기

가 부적합한 실재의 차원을‘개방’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

가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하면서 적절히 언급하듯이,“상징

의 표상 기능은 단순히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

라 실제로 현존하는 어떤 것의 실재(the presence)를 나타낸다.”12) 모든

예술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실재의 수준을 위해서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397

1993), 34.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 구조가 지니는 양극적 관계는 그의 존재론의 양극

성의구조와 맥락을같이한다.

9) Tillich, Dynamics of Faith, 42; “Religious Symbols and Our Knowledge of God

(1955),” Main Works/Hauptwerke, 396.

10) Paul Tillich, Theology of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9), 54.

11) Tillich, Theology of Culture, 56; Dynamics of Faith, 42.

12) Hans-Georg Gadamer, Truth and Method, trans. Joel Weinsheimer and Donald G.

Marshall (New York: Continuum, 1994), 146-147.

야 한다. 리쾨르는 상징을“원초적인 신비를 존중하는 해석”으로 이해

한다. 그러한 해석의 길은“상징이 제공하는 선물 곧 의미의 충격에 충

실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의 서약 곧 일관된 이해에 충실하여야

한다.”5)

상징의 본질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첫째, 상징의 지시성이다.

언어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의미의 문제이기 때문에 상징과 기호의 의

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상징이 기호라는 말과 혼동되어사용

되고 있어서 그 의미의 애매성은 늘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상징

과 기호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의 특징은 그들 모두‘자신을 넘어 다른

어떤것을지시’한다는 점이다.6)

리쾨르는특별히 말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언어에서 말(parole)은 표

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위한 기호들이다. 기호가 의미를 전달하는 표시

물일지라도 그 의미는 말을 매개로 무언가 뜻하려는 의도에서 생긴다.

말은 기호들로서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함축적인 의미를 얻는 순간에

상징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징이 되는 것은 말을 통해서 가능하

다. 그런데 상징은 그 자체를 넘어서서 상징하고자 하는 어떤 실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문자적 의미에서는 자신을 부정하지만 상징의 자

기초월적 의미에서는 자신을 긍정한다.”7) 다시 말하면 상징은 자기 부

정성과 자기긍정성의변증법적상관관계에있다.8)

3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5)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348.

6 ) Tillich, Dynamics of Faith, 41; “Religious Symbols and Our Knowledge of God

(1955),” Main Works/Hauptwerke, 4 vols. ed. John Clayton (Berlin, 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7), 395.

7 )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 I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9.

8) 드라이스바흐(Donald F. Dreisbach)는 틸리히의 상징이론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

다. 첫째는 참여개념이며 둘째는 투명성의 은유이며셋째는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이

다. 이것들은 실제로 동일한 이론의 다른 양상이다. Donald F. Dreisbach, Symbols

and Salvation: Paul Tillich’s Doctrine of Religious Symbols and his Interpretation

of the Symbols of the Christian Tradition (New York: University Press of America,

Page 2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상황이 변할때 죽는다. 상징이 사멸하는것은 과학적이고 실제적 비판

때문에 죽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

꾸어 말하면 상징은 근본적으로 표현을 발견하는 공동체 속에서 더 이

상 반응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 상징의 진정성이 인간의 문

화적 창조성의 여러 국면에서 창조적 행위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상

징의 창조성은 상징으로부터 의미를 형성하는 사고활동이라는 측면에

서 상징해석학의중요한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틸리히와 리쾨르는 상징의 본질을 말하면서 공히 상징과 기호의 구

분을의미 있는작업으로 보았다. 그런데 상징의 의미는 기호의 단일성

이 아닌 다의성의 차원이다. 이제 상징은 그 자신의 고유한 규칙과 특

성을가진 언어현상의 현현으로서 신앙 언어 안에 독특한 계기를 형성

한다. 그러한 상징은 자연과 역사적 사건이 갖는은총의 형식인 성례와

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2. 상징과성례

틸리히의 성례주의는 그의 상징주의와 상관적이다. 그의 상징주의에

따르면 모든 종교적 실재는 상징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성례는 성령의

임재가 표현하는 상징이다. 다시 말하면 성례는 어떤 사물을 담지자로

하는 성령의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틸리히는 실재적 성례성을 회복

하기 위하여 성례에 관한 상징주의 해석을 주장한다. 틸리히의 존재론

적 신학 구조에서 종교적 상징은 두 가지 근본적인 차원이 있다. 하나

는 우리가 만나는 경험적인 실재를 넘어서는‘초월적인 차원’과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실재와의 만남 안에서 발견하는‘내재적인 차원’이다.17)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399

Press, 1951), 239. 틸리히는“Symbol and Knowledge”에서 상징의 내용과 상징 표

현 간의공통성이전제되어있을때 비로소‘상황’(context)은 상징체험에 중요한요

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Tillich, “The Religious Symbol/Symbol and Know-

ledge (1940-1941)”, Main Works/Hauptwerke, 274-275.

상징들을창조한 것처럼 보인다.

틸리히의 상징이론에서‘개방’은 상관적이다. 하나의 면은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의실재에 대한 개방이고, 다른 하나의 면은특별한 차원

에서의 인간 영혼에 대한 개방이다.13) 실재 차원의 개방은 접근할 수

없도록 남아 있는 실재의 차원들과 요소들을 열어 보일 뿐만 아니라

실재의 차원들과 요소들에 일치하는 우리 영혼의 차원들과 요소가 개

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상징의 기능이라면 상징들이 다른 상징들로 대

치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모든 상징은 바로 그 자체이며

다소 적합한 다른 상징들로 대치될 수 없는 하나의 특수한 기능을 가

지고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상징의 사회성이다. 상징은 개인 또는 집단무의식으로부터 성

장하고 우리 존재의 무의식적 차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고서는

작용할 수 없다.14) 틸리히는 어떤 모태로부터 상징들이 태어나는가를

물으면서 융의용어를 빌어‘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

고 지적한다. 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접근에서 상징들의 본성이나 기원

은 개별적이지 않고 집단적이다.15) 따라서 특별히 사회적 기능을 갖는

상징은 정치적 종교적 상징처럼 그것이 나타난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

에 의하여 창조되거나적어도 받아들여진다고말할수 있을것 같다.

다섯째, 상징의 창조성이다. 상징은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성장하고

사멸한다. 틸리히가주장한 것처럼,“기호는 편의상 요구에 따라서 임으

로 바뀔 수 있지만 상징은 그것에 의해서 상징되는 것과 그것을 상징

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에 따라서 자라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16) 상징은 상황이 그것을 위하여 성숙했을 때 성장하고

3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3) Tillich, Theology of Culture, 57-58; “Religious Symbols and Our Knowledge of

God (1955),” Main Works/Hauptwerke, 397.

14) Tillich, Dynamics of Faith, 43.

15) Carl Jung, “Approaching the Unconscious,” Man and his Symbols, ed. Jung (New

York: Dell Publishing Co., 1964), 41.

1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age 2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미와 힘의 발현’이다.19) 역사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루터(Luther)의

공제설이 성례전적 요소들의 상징적 성격을 나타낸다면 쯔빙글리

(Zwingli)의 상징설은‘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쯔빙

글리에게 성례전적 재료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가리키는‘단지 기호일

뿐’이며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있다. 그러나 틸리히의 새로운 실재론은

성례가 단지 성령의 임재를 설명하는 물질적 변환이나 의미추구에 있

는 것이 아니고 성례적 연합을 가능케 하는 질적 변환을 의미한다는

차원이다.

신들이 초월적인 존재가 되면 될수록 초월적인 요소의 강화와 함께

발전되는 신의 소격성(remoteness)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격적 또는성

례전적 성격을 가진 성육신이 더욱 요청된다.20) 종교적 상징의 내재적

차원을 성례로서 시간과 공간에 나타난 신의 현현으로 말해볼 수 있다

면, 그것은 거룩한 것들과 대상들 속에 신의 육화들, 궁극적인 실재 속

에 신의현현들의 영역이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모습으로나타난 신

의 성육신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신그리스도를성례의 보편성이라고말

할 수 있다.

틸리히의 새로운 실재론은 자연의 깊이와 자연의 합리적 구조를 분

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합리적 구조 안에서 자연의 깊이와 자연

의 의미가 막힘없이 표현되고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21) 새로

운 실재론 안에서 자연의 힘은 완전히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역동적인 영향력의 현세적 확인

이고생명력 있는관계성들의 유기체이다. 참다운 프로테스탄트의성례

관은 자연과 독립된 변수로서 따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

난“새로운 존재,”곧 구원사라는 대 드라마의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01

19) Paul Tillich, The Protestant Era, trans. J. Luther Adam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99.

20) Tillich, Biblical Religion and the Search for Ultimate Reality, 64.

21) 김경재, 『폴틸리히의생애와사상』(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179.

초월적인 상징의 주된차원은 직접적으로지시대상을가리킨다. 초월적

인 차원에 대한 기본적인 상징은 신 자신을 말한다. 그러나“신은 하나

의 상징이다”라고 단순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무조건적인 것

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상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8) 그런

데 이러한 궁극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상징화하고 상징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신과의 소통을 위함이다.

인격이신 신과의 만남은 틸리히의 어법으로 말한다면 모든 인격적

인 것의근원이면서도그 자체는 인격이 아닌신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신과인간의 만남의 인격적 요소와 비인격적 요

소 사이의 긴장을 나타낸다. 신은‘영원한 당신’으로서 우리와 같은 인

격을 지닌 최고의 존재(the highest)가 된다. 이런 면에서 최고의 존재

의 신은 너와 나의 관계의 요소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인 요소가 동일하

게 보존된다.

틸리히의 생각 속에서 모든 현실은 존재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잠재적으로신적인 계시가 가능한 대상이고 성례적이다. 틸리히

의 상징적 성례주의는 자연 자체가 그의 새로운 실재론(new realism)

의 본질이다. 다시 말하면 구체적인 자연과 그 표현으로서의 성례는

4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1 7 ) Tillich, “Religious Symbols and Our Knowledge of God (1955),” Main Works/

H a u p t w e r k e, 399-401; “The Meaning and Justification of Religious Symbols

(1961),” Main Works/Hauptwerke, 4 vols. ed. John Clayton (Berlin, 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7), 418-419. 틸리히는 1 9 6 1년에 “The Meaning and

Justification of Religious Symbols”에서 1955년과는 달리 종교적 상징을 일차적 상

징과 이차적 상징으로만 구분하고 있다.‘일차적 상징’은 모든 종교적 상징들의 초월

적 존재의 근거를 직접 지시하는 것으로서 종교적 상징의 두 가지 차원을 포함한다.

그러나‘이차적 상징’은 일차적 상징과 연관하여서 간접적인 지시성격을 갖는다. 여

기에는 시적 언어들인 은유적 표현이 해당된다. 이러한 구분은 리쾨르가『해석 이론』

(Interpretation Theory)에서 상징 언어가 갖는 외재적 복합성을 명료화하는 작업으

로 은유이론(metaphor theory)을 통해상징을설명하는 것과유사한 것 같다.

18) Paul Tillich, Biblical Religion and the Search for Ultimate Reality ( C h i c a g 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83-84.

Page 20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것을 적당하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종교적으로 신은자기자

신의 이름을 초월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신의 이름에 대한 사용이

쉽게 남용되고 모욕되는 이유이다. 어떠한 다른 방법으로 신앙이 그것

자체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신앙 언어는 상징적으로 표현

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25) 틸리히가 주장하듯이, 신앙 언어는 결코‘단

지 상징’(only a symbol)으로 말해서는 안 되고‘적어도 상징’(not less

than a symbol)으로 말해야 한다.26) 역설적으로 모든 상징 언어는 신앙

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궁극적 관심을 갖는 신

앙은상징들보다다른어떤언어를 갖지않는다고 말할수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근본적인 상징은 신(God)이다. 궁극적

인 관심은 궁극적인 것으로서 그것의 특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의

미에서 무신론은 단지 어떤 궁극적 관심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간주

된다. 틸리히의 용법으로 볼 때 궁극적 관심의 문제로서 유신론의 하나

님을 부정한 사람이 만일 그 사람의 관심 안에 궁극성을 내포하고 있

다면 그는 신을 긍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유신론의 하나님“너

머의 하나님”을 말함이다. 틸리히의 생각 속에 신은 단지 상징이 아니

다. 이것은 신의개념에서직접적인경험의 문제이다. 다시말하면 이것

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이지 않는 궁극성의 요소와 우리의 통상적인 경

험으로부터 취하여진다. 그러므로우리는 상징적으로 신께적용된 구체

성의요소를 구별해야한다.27)

여기서 주의할 문제는 궁극성의 어떤 상징이 악마적인 요소 없이

궁극적인 것을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의 원시 수준들에 있어서

는 참된 실재, 즉 참으로 존재의 힘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성스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03

25) Peter Munz, Problems of Religious Knowledge (London: SCM Press, 1959), 53-

55; Auguste Sabatier, Outlines of the Philosophy of Religion (New York: Harper &

Brothers, 1957), 321.

26) Tillich, Dynamics of Faith, 45.

27) 앞의책, 46.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연의 실재는 초월적

신적의미에로승화된다.22)

틸리히의 상징이론에서 언급되는 참여성(participation)은 바로 그리

스도의 몸을 통해 완전히 시간적 공간적 존재로 표현된다. 만일 신의

자기 현현이‘말씀’(the Word)으로 일컬어진다면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신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의 표현으로서 모든 말씀

(all words)의 거룩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23)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에 있어서“새로운 존재”라는 실재론적 시각에서 만나

지 않고 그의 윤리적 교훈과 행태 속에서 만날 때 그리스도교는 인간

을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 곧 생명 전체를 온전히 구원해 주는힘을 잃

고 교회의식과윤리및 행동주의에 머무르게된다.

3. 상징너머의하나님

인간은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된다. 이것은 마치 인간은 언제나 무한

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과 상통한다. 무한을 생각하는 존

재인 인간은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틸리히는 유신론의 하나님

을 궁극적인 것, 무조건적인 것, 또는 존재 자체 등으로 불렀다. 그래서

종교를 틸리히의 용어로표현하면, 종교란 궁극적이거나무조건적인 것

을 향한 관심이다.24) 그런데 이러한 무조건적 관심의 문제가 모든것을

어떤신(god)으로만든다고볼 수 있다.

궁극적 관심에 대한 상징 개념들이 우상적 상징들로 변형되는 것은

신앙의 본성과 궁극성의 특성에서 비롯한다. 참된 궁극적인 것은 유한

한 실재의 영역을 무한으로 초월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유한한 실재도

4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2) Tillich, The Protestant Era, 97.

23)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 240-241.

24) D. Mackenzie Brown, Ultimate Concern: Tillich in Dialogue (New York,

Evanston: Harper and Row, 1956) 2; Tillich, Theology of Culture, 7-8.

Page 2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며 따라서 다른 단계들 곁에 있는 하나의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이며 모든 다른 차원보다 아래에 있는 차원이며 그것은 존재자체

의 차원이며또는존재의 궁극적인힘이다.32)

종교적 상징의 역할은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개방되지 않고 감추어

져 있는 실재의 차원을 개방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심층

차원의 경험이다. 엘리아데는 이 기능을“종교적 상징주의의 실존적 가

치”로 불렀는데 상징은 항상 인간 실존이 거기에 관계되어 있는 상황

또는실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33) 인간의 궁극적 관심 안에서 궁

극적인 것으로서의신은어떤다른확실성보다더욱확실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과 신의 실존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다. 따라서

신의 형상(figure)으로 상징화된 신은 대담한 신앙의 문제이며 용기와

모험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신에게 능력, 사랑, 정의 등을 돌리는

모든 특성들을 유한한 경험들로부터 취하며 그리고 유한과 무한을 넘

어 존재하는 그분께 상징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신이신앙

의 기본적인상징이지만유일한상징은 아니다”34)고 말할수 있다.

예컨대 신앙이 신을‘전능자’로 부른다면 그것은 신앙의 무한한 관

심의내용을 상징화하기 위하여 능력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사용한 것

이다. 이처럼 신에 관한 모든 것들은 우리 일상 경험으로부터 취해진

상징들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옛적에 신이 행한 것에 대한 정보

도 아니고 미래에 어떤 것을 행할것도 아니다. 결국 신앙은 그러한 이

야기들의 신념이 아니라 신의 행동들에 관하여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

을 표현한 상징들의 수용이다. 정리하자면, 거룩한 것의 차원은 궁극적

인 실재의 차원이다. 이러한 실재를 지시하는 종교적 상징은 무한한 것

을 유한성으로 내려오게 하며유한한 것은 무한성으로 끌어올린다. 결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05

32) Tillich, Theology of Culture, 60.

33) Eliade, “Methodological Remarks on the Study of Religious Symbolism,” 102.

34) Tillich, Theology of Culture, 47.

러운 것’(the Sacred)과 동등하게 여겨진다.28) 오늘날 상징은 그 실재의

의미와 힘에 참여한다.29) 따라서 종교적 상징은 거룩한 것의 신성함에

참여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 참여는 일치가 아니다. 전적 초월자

는 거룩한 것의 모든 상징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적 상징은 그것 자

체가거룩한 것은아니다.

종교적 상징은 경험된 실재가 주는 자료의 무한성으로부터 취한 것

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의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30) 그

러한 종교적 상징은 인간의 정신 속에서 항상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대치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그것스스로 궁극적인 것이되려는 경

향을 갖고 있다.31) 종교의 치명적인 위험은 거룩한 것이 나타나는 구체

적인대상을 스스로 거룩한 것 자체와 혼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상징은 거룩한 것 자체가 갖는 무조건적이며 궁극적인 성격으로 고양

되는그 순간에 우상숭배가되고악마적인것이된다.

거룩한 사태들이 자체로 거룩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넘어 궁극적인 관심이 속한모든거룩

함의 근원을 가리킨다.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은 궁극적으로 상징 너머

의 하나님을 지시한다.

종교적 상징은 모든 다른 차원과 모든 다른 심층의 기반이 되는 차원

4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28) Mircea Eliade, “Methodological Remarks on the Study of Religious Symbolism,”

The History of Religions: Essays in Methodology, eds. Mircea Eliade and Joseph

M. Kitagawa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9), 98-

99.

29) 실재에 참여하는 상징의 애매성에 대한 논쟁은 Lewis Ford, “The Three Strands of

T i l l i c h’s Theology of Religious Symbols,” Journal of Religion, vol. 46, no. 2

(April 1966): 104-130; William L. Rowe, Religious Symbols and God: A

Philosophical Study of Tillich’s Theolog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68),

111-126을 참조하라.

30) Tillich, Theology of Culture, 59.

31) Paul Tillich, 『문화와종교』, 이계준역(서울: 전망사, 1984), 51.

Page 20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라서 신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의 매체가 되고 있는 유한한 실재의 단

편은 부정됨과 동시에 긍정된다.36) 이러한 긍정은 상징적인 표현에 자

신을넘어서있는것을지시할 수 있는정당성을 부여한다.

신학은 신에 관한 진리를 말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신학은 엄

밀히 말해서 신에 관해서 말하는 방식은 규정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진

리 주장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전혀 확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언어이고 신학은 단지 규정적인 문법일 뿐이다. 후기 자유주의 신학자

린드백(George A. Lindbeck)은 신학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 내적

인 측면들을 표현하고 탐구하는 일로 보았다.37) 그는 후기 자유주의 신

학의 가능성에서 종교경험을 한마디로 문화-언어적 진리라고 주장한

다. 이것은 문화와 언어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진 것이듯이

종교도 선험적으로우리의 삶과의미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삶과 사상 전부를 형성하는 일종의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인

틀 또는 매체로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종교는 실재에 대한 서술과 신

념의 진술, 그리고 느낌과 감정 같은 내적 태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

는‘관용어’(idiom)에 가깝다. 그렇다면 후기 자유주의 진리는 문화적

이고 언어적인 삶 속에서 정해지는 종교경험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

다. 그러나 이것은 교리에 대한 문화-언어적 접근법이 그리스도교적

관용어가 외부의 지시대상(reference)을 갖는지의 여부에 대한질문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38) 스타이버(Dan Stiver)가 지적

하듯이,“린드백의 접근은 프라이와 마찬가지로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진리와 지시 대상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39)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07

36)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I, 9.

37) George A.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Philadelphia: Westminster, 1984), 7, 33.

38) 후기자유주의에 대한 복음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언어외적이고 체계외적인

실재에 대한 헌신에 대한 부적절성이다. 자세한 것은Alister E. Mcgrath, A Passion

for Truth: The Intellectual Coherence of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6), 114-159를 참조하라.

론적으로 종교적 상징은 인간을 향하여는 신을 개방하고 신을 향하여

는 인간을 개방하는해석학적차원이 요청된다고말할수 있다.

I I I. 상징의진리적절성과상징해석의가능성

1. 상징의진리적절성

틸리히의 생각 속에서 신은 존재자체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의 존재

신학에서 존재자의 모든 것은 존재자체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제한다면‘존재의유비’는 신을지시하는 긍정적인 신학적 도구임이틀

림없다.‘존재의 유비’가 없다면 어떤 것도 신에 대해서 말해질 수 없

다.35) 이러한 면에서 틸리히의‘존재의 유비’는 바르트(K. Barth)의‘신

앙의 유비’(analogia fidei)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본 반면에 틸리히는 신의 생명의 성격이 계시 속에서 나타

난다는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신을 표현함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 재

료에의한형식이 불가피함을말하고 있기때문이다.

존재신학은 존재의 유비를 통해 그 임무를 수행하는 신학이다. 존재

신학의 주제는 유비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물음이다. 우리가 유비를

통해 드러난 존재를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

다. 상징적인 표현이란 지시대상의 문자적 의미는 부정되고 상징이 지

시하는 것은그것이 지시하고 있는것에 의해서 긍정됨을 일컫는다. 따

4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5)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 131. 우르반(Wilbur M. Urban)은 “A Critique

of Professor Tillich’s Theology of the Religious Symbol”에서 틸리히의‘존재의 유

비’가 변증법적 신학에 적합한 상징(symbolism)의 이론과 부정신학의 극단적인 형

태라고 비난한다. Paul Tillich, “The Religious Symbol/Symbol and Knowledge

(1940-1941),” Main Works/ Hauptwerke, 4 vols. ed. John Clayton (Berlin, 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7), 270.

Page 2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교적 상징에 나타나는 언어의 신비는“신적인 것을 지시하고 있는 상

징이오직지시하고있는신적인 것의힘에참여하는것”42)과 무관하지

않다. 이상과 같이종교적 상징의 진리는 상징적 언어의미를통하여 경

험된다.

2. 상징과비신화화

신화는 간단하게‘신들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상징의 이야기 형태

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신의 형상들과 행동들을 통해서 상징화되었

다고 보면 신화는 사람과 성스러운 것과의 관계를 내포한다. 결국“신

화란 신과 인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에서 결합된 신앙의 상징들이

다.”43) 종교의 내용은 신화적이다. 신화의 언어는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

만이 종교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고 신화들은 항상 신앙의 모든 행위

안에나타난다고볼 수 있다.

“상징은 신화보다 훨씬 근본적이다.”44) 리쾨르는 그의『악의 상징』

(The Symbolism of Evil)에서 원시상징이 나타나는 세 차원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성스러움이드러나면서생기는 우주 상징, 밤에꿈을만들

어 내는 상징 그리고 시어가 만들어 내는 상징이다.45) 그리고 그는 전

체적인 맥락에서 일차 상징과 이차 상징으로 나눈다. 신화는 이차 상징

으로서 일차 상징이 고백하는 체험을 내러티브(narrative)로 구성한 것

이다. 특별히 그는악에나타난 체험들을상징으로간주한다. 그가상징

으로 악의 문제를 택한 것은 악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체험으로 보

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유이전에 체험한 원초적인 소리는 고백언어 속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09

42)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 239.

43) Tillich, Dynamics of Faith, 49.

44)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18.

45) 앞의 책, 10, 14-18; 정기철,『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서울: 문예출판사, 2002),

52.

교의 진리는 언어게임 바깥의 실재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게임의 적

합성모두를 지녀야 한다.

진리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그리고 해석학적 요소를 갖는다. 진리는

대상과 해석의 주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적 사유는 상징

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상징의 적절성은 진리의 적절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종교적 진리의 요건은 계시와 인간실존의 종교

상황과의 상관관계에서주어진다. 종교적 상징의 진리는 상징이 실재의

한 차원과 그에 상응하는 인간 영혼의 깊이를 열어 주듯이 상징이 지

시하는 궁극적인 실재와 이 실재를 상징으로 받아들인 인간집단의 내

면의 상황사이의상관관계 속에 놓여있다. 틸리히가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상징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계시’

에 적절하다는 것이고 어떤 상징이 진리이라는 것은 그것이 참된‘계

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40) 따라서 그 종교적 상징이 어떤 사람

이 관여하고 있는‘계시’의 상관관계를 적절하게 담아내면 그것은 진

리를소유하고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종교적 상징의 적절성 기준은 상징의 진정성에 의한 적합성과 자기

부정에 의한신뢰성에 바탕을 둔다. 반복해서 말하지만“종교적상징의

진리는 그 상징들이 생겨난 종교적 상황에 대한 적합성이다.”41) 물론

다른 상황에서 그 종교적 상징들의부적합성은 비진리라고 말할 수 있

다.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실재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상징은

그것에 의해서 상징되는 것과 그것을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에의해서 의미의 지속여부가 결정된다. 상징의 의미는

기호학적 의미 이상의 것으로서 상징에는 언어의 신비가 있다. 참된종

4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39) Dan Stiver, The Philosophy of Religious Language: Sign, Symbol, and Story

(Cambridge: Blackwell Publishers, 1996), 147.

40)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 240.

41) Tillich, Theology of Culture, 66; Dynamics of Faith, 96; “The Meaning and

Justification of Religious Symbols (1961),” 419.

Page 2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는 신화에서 어떤 최초 사실에 대한 설명을 캐보려는 의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복음서의 문학적 특징들을 벗겨냄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복음으로 성서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이

러한 차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는‘탈이야기화’(denarrativization)라

고 간주된다.49) 이러한 성서 서사성의 상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종교

적인 언어가 상징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또는 신화를 괄호치고 받아

들여서는안 되고그 언어상징의미로재해석해야한다는 것이다.

단일신론적인 신화의 경우에 있어서‘비신화화’가 절대로 필요하다

는 것이 틸리히의 입장이다.“신과 인간의 상호 역할을 이야기하는 모

든 것들은 성격상 신화적이기 때문에 비신화화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

은 옳다.”50) 이것은 비신화화도 종교적 상징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라

는 측면에서의미가 있다. 하지만 틸리히는 신화가 궁극적인실재를 지

시하는 상징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신화를 제거하는 일은 종교적인

언어로부터 그 실체를 제거하는 행위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탈문자

화’(deliteralization)를 주장한다.51)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11

48) Ricoeur, 『해석의갈등』, 363-4.

49) Kevin J. Vanhoozer, Biblical Narrative in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A Study

in Hermeneutics and Theolog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131.

50) Tillich, Dynamics of Faith, 50. 비신화화는 신약 그리고 구약 성경의 이야기들과 상

징들 안에 있는 정교한 신화적 요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틸리히는 신과 인간

의 상호 작용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의 많은이야기들은 신화적인 성격을 가진 것들

이면서동시에 비신화화의 대상들이라고주장한다.

51) Rudolf Bultmann,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ed. Hans Werner

Bartsch (New York and Evanston: Harper & Row, 1961), 9-16; Karl Jaspers and

Rudolf Bultmann, Myth and Christianity: An Inquiry into the Possibility of

Religion without Myth, trans. Norbert Guterman (New York: The Noonday Press,

1958), 57-71; Tillich, Dynamics of Faith , 50. 에이어스는 틸리히가 창세기에 나타

난 타락의 이야기를 우주적 인간 이야기로 변형시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는‘새로운존재’를 실존적존재론적용어로 묘사할 때에그의탈문자화는비신화화

와 거의다르지않다고지적한다. Robert H. Ayers, “Religious Discourse and

으로들어와서상징언어를 형성한다.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기호와 상징을 구분한 리쾨르는 기호가 단일

한 지향성을 갖는 반면에 상징은 이중적인 지향성을 지닌다고 주장한

다.46) 상징의 이중적 지향성이란 문자적인 것과 상징적인 언급 대상 모

두를 포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리쾨르가 이야기하는

일차 상징 중 흠(stain)은 정신적으로 더렵혀졌다는 느낌을 추상적이고

도 불명료하게 표현한 말인데, 이것은 문자적인흠을 통해알려지고 구

성된다. 흠(stain), 죄(sin) 그리고 허물(guilt)과 같은 일차 상징의 체험

은 상징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징 언어의 도움 없는 경

험은 벙어리이며 그 안에 갖가지 모순들 속에 갇혀 있게 된다.47) 그것

은 상징의 역할이 폐쇄되고 숨겨진 채 남아 있을 경험의 차원을 열어

놓고드러내 보인다는말이다.

상징과 신화는 인간의 존재상황을 말하는 방식이다. 일차 상징이 악

의 유형들이라면 이차 상징은 신화이다. 신화는 일차 상징인 상징언어

의 해석이다. 신화는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시간과 장소를 무대로 이루

어진 이야기 형태의 상징이다. 예를 들어 추방은 인간 소외의 일차 상

징이다. 그런데 그 소외가 에덴 추방이라는 공상 이야기로 엮일 때, 즉

언제 그런 일이있었다고 이야기 될 때 그 이야기는 신화가 된다. 따라

서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를 시간과 공간을 넘는 궁극적인 성질의 것일

지라도 시간과 공간의 틀에 둔다. 그래서 우리가 신에 대해서 말할 때

완전한‘비신화화’는 불가능한것처럼 보인다.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성경의 내러티브 양식이 케리그마가

요구하는 실존적 전유(appropriation)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

는 성경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주장한다.48) 비신화화의 주

4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46) Paul Ricoeur, 『해석의 갈등』, 양명수 역(서울: 아카넷, 2001), 312-314: The Rule of

Metaphor; Multi-Disciplinary Studies of the Creation of Meaning in Language,

trans. Robert Czerny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7), 45.

47)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161.

Page 2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조건적으로 굴복할 의무를 지고 있는교회와 성경 같은 신성한 속성들

을 가진인정된 권위이다. 따라서 신화의 상징적 이해에 대한 스캔들은

자연적 문자주의가 아니라 자율적 생각을 향한 공격과 억압을 가진의

식의반동적 문자주의라고할 수 있다.

문자주의는 성서해석학 측면에서 린드백이 말하는 종교의 관용어와

유사한 것 같다. 린드백이 주장하는 종교는 본래 진리와 선, 또는 느낌

과 감정 같은 근원적 태도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에 관한 신념들을

나열해 놓은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나 언어처럼 종교는 원래개인의

주관성에 대한 표명이라기보다는그러한 주관성을 형성해 주는공동체

적 현상이다.54) 그러나 이러한 린드백의 주장이 일부 그럴듯한 면이 있

다 할지라도 상징이 역사성과 전통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틸리히는 신화가 일반적으로 자연적인 것과 연관을 짓고 있다고 하

더라도 역사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만약창조의 신이모든역사를 초

월한 종말을 향한 역사를 통하여 한 나라를 선택하고 인도한다면 이것

은 역사적 신화이다. 만약 초월적이고 신적인 존재인 그리스도가 충만

한 때에 나타나고, 살고, 죽고, 부활했다면 이것 역시 역사적 신화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역사적 신화는 자연적 신화에 매여 있는 대부

분의 종교들보다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모든 다른 종교처럼 신화적 언어로 표현된다. 그것은‘깨

어진 신화’이지만 신화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는 궁극적

인 관심에 대한 표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신화는 인간의 순

진무구함과 타락 등에 대한 경험을 규정함으로써 인간존재의 신비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렇게 신화는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상징해석을 위한

하나의 문맥을 제시하고있다.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13

54)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33.

그는 신화에 대한 분석에서‘깨진 신화’(broken myth)와‘깨지지 않

은 신화’(unbroken myth)로 구분한다.52) 깨진신화는 긍정적의미로 신

화를 신화로서 본다. 그것은 제거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깨지지 않은

신화는 부정적 의미로 문자적으로 직역된 신화다. 그리스도교는 그 본

질상‘깨지지 않은 신화’를 거부한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반면에‘깨진 신화’는 지시하고자 하는 궁

극적인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그러

나 만일 이‘깨진 신화’자체의 의미가 어떤 궁극성을 띠게 된다면, 그

것은‘깨지지 않은신화’로 변질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징과 신화는 제거될 수 없다. 항상 현존하는

인간의식의 형태는 상징과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신화를 다른 신화로 대체할 수 있으나 인간의 영적인 삶으로부터 신화

를 제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화는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상징들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서와 교리와 기도서의 모든

신화적 요소들은 신화적으로인식되어야한다. 그러한 요소들은 상징적

형태로 보존되어야하고 과학적 대체물로 대신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모두신앙의 언어들로이해된다.

자연히 틸리히는 성서 문자주의를 강하게 반발한다. 그는 문자주의

에 대한 분석에서 구체적으로‘자연적 단계’(natural stage)와‘반동적

단계’(reactive stage)로 구분한다.5 3 ) 문자주의의 자연적인 단계에서는

신화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화적 환상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때가 온다. 여기서 자연적 단계

에 역행하는 문자주의의 두 번째단계인‘반동적 단계’가 나타난다. 신

화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억압하는 단계이다. 억압의 도구는 무

4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Myth,” Religious Language and Knowledge, eds. Robert H. Ayers and William T.

Blackstone (Athens: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72), 87.

52) Tillich, Dynamics of Faith, 50.

53) 앞의책, 52-54.

Page 2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통해서만 믿어진다. 신화를 그 자체가 아닌다른것으로 이해하려고하

지 않고 부정적인 판단을 보류함으로써 신화에 대한 좀 더 타당한 진

술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주장을 기꺼이 용납할 수 있다면 더욱 신뢰할

만한 해석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종교적 성찰에 있

어서 더 이상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 수단이 된다. 리쾨르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비신화화는 신화적 상징 자체보다 깊은 의미를 간직하기 위

해 꼭 필요하다고보았다.58)

그런데 비신화화에서 신화라는 바로 그 말은 신화가 지시하는 의미

또는 실재의 상실을 가리킨다.59) 그래서 침례교 신학자 헨리(Carl F. H.

Henry)는 불트만의 비신화화 과정은 불가피하게‘신의 상실’로 이끌었

다고 주장한다.60) 그러나 비신화화는 뮈토스에서 끊임없이 로고스를 찾

아내는 작업이다. 비신화화가궁극적으로는 종교적 상징들의 특정속성

을 파괴하는 것이긴 해도 비신화화를 추구하는 신앙은 지속적이고 필

연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신화는 합리적인 주석을 요청하면서도 각

해석들 하나하나 또는그 전부의 결합을 넘어서는초월성을 완전히 견

지한다. 그러므로 신화의 다의적 풍성함은 계속해서 종교적 성찰을 살

찌우게 한다. 이런 면에서 상징의 한 형태인 신화는 신앙의 역동성을

제공한다.

상징의 다의성은 항상 언어적 요소들을 다른 어떤 것에 귀착시킨다.

리쾨르가 주장하듯이 상징은 언어가 갖는 외재적 복합성을 명료화하는

작업으로 은유이론(metaphor theory)을 통해 설명된다.61) 먼저 모든 상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15

57)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350. 리쾨르의 상징 해석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기철,『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서울: 문예출판사, 2002), 31-57; 김종걸,『리꾀

르의해석학적 철학』(서울: 한들출판사, 2003), 79-171을 참조하라.

58) 앞의책, 352.

59) Thomas Altizer, “The Religious Meaning of Myth and Symbol,” Truth, Myth and

Symbol, ed. Thomas Altizer and the others (Englewood Cliffs: Prentice-Hall,

1962), 91.

60) Carl F. H.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I (Waco: Word Books, 1976), 61.

3. 상징해석학의가능성

상징과 신화를 성스러운 현상이 의식의 차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

각할 수 있다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이러한 상징체계를 해석하

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해석에 앞선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해석의 원칙은‘종교적인 형태는 종교적인 형태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의 구조에 알맞은 해석학적 수단을 사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엘리아데의 해석학에서 상징 해석에 대한 중요

한 원리들을 도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엘리아데는 해석에서 환원

주의를 초래하는 이론을 거부하면서 거룩한 것과의 만남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해석학을상정하고자 했다. 여기서 환원주의란 어떤형태로든

연구 대상을 교묘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 설명하고자 하는 경향을 말한

다. 그리고 그는 해석이론에서 현상학적인 동기와 구조적인 동기를 종

합한 해석을 발전시켰다.55) 엘리아데의 해석학에서는 성의 환원불가능

성과 성속의 변증법 원리가 성현(hierophany)에 대한 조건으로 설정된

다. 성의 환원불가능성의원리는 상상력을 통해성의 출현에 대한조건

을 재창조하려는 시도로 이끈다. 그리고 성속의 변증법적 원리는 성의

출현이 지니는 복합성을변증법적으로받아들임으로써가능하다.56)

리쾨르는 상징이 현대인들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함으로

써 신화가 신화에 대한‘설명’을 통하여 결코 고갈시키지 않는 해석을

끊임없이 요구한다고 말한다.57) 신화는 새롭게 변한다. 신화는 신화를

4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55) 참고로 현상학적 단계인 종교현상학에서상징이해에 사용하는4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징의 다양한 가치들을 상호교환 가능한 가치들로 묶어 체계적으로 이

해하는 방법. 둘째, 한 상징을 연구하고 이해한 후 지향성 분석을 확대하여 비슷한

다른 상징들도이해하는 방법. 셋째, 제의나 신화를 통해 성스런 존재를 표현하는 형

태들로 상징을 이해하는 방법. 넷째, 똑같은 상징을 여러 차원의 경험과 표상(밖과

안, 삶과 생각 같은)으로 묶어보는 방법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 상

징현상학은나름대로일관된 무엇을보여주며상징체계같은것을밝힌다.

56) D. M. Rasmussen, 『상징과 해석』, 장석만 역(서울: 서광사, 1991), 51-58.

Page 2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은유가 갖는‘의미의 잉여’(the surplus of meaning)는‘충분성의 원

리’(principle of plenitude)로 이해된다. 그것은 하나의 텍스트가 그것

이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65) 그러므로 한편으로 볼 때 상

징보다 은유에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은유가

상징의 암시적 의미론을 언어화하고현실화한다는 뜻에서 상징보다 은

유가 더 풍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은유는 상징의 다발”이라는 말에

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은유보다 상징에 더 많은 것이들어있다. 상징은

은유가 속박되지 않는방식으로 속박되어 있다. 다시말하면 상징은 삶

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면 은유는 단지 상징의 언어적인 외피일 뿐

이다.

언어가 인간경험의 심연에서 의미론적 표면과 전-의미론적표면을

관련시키는 힘은 바로 상징의 이차원적 구조에서 나온다.66) 리쾨르가

상징해석학에서‘상징이 생각을 일으킨다’고 지적한 의미는“1차 지향

성이 유비를 통해 2차 의미를 주기 때문에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키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67) 리쾨르의 생각속에서 상징은 문자적인1차

의미의 운동이며 그 1차 의미는 유비를 통해 우리를 잠재의미로 끌어

들여 상징된 것과 하나가 되게 한다. 이것은 상징으로부터‘생각하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상징은 형식화에만 머물지 않고 내용이 깊

어지는 사유를 제공한다.

‘생각하는 사유’의 단계는 상징을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단계이다.68)

리쾨르는 이 단계에서 두 가지 위험성을 경고한다. 하나는 상징과 그

해석 사이 알레고리적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상징을 합리적으로만 수

용하려는 경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징의 본래 깊이를 존중하며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17

65) Dan R.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New Directions in Hermeneutical Theolog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94-97.

66) Ricoeur, Interpretation Theology, 69.

67)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16.

68) Ricoeur, 『해석의갈등』, 323.

징이 아무리 다를지라도 은유적 발화에서 작동하는 의미 구조를 기반

으로 해서그 특징적인 의미론적 핵심을 확인하는것이 가능하다. 그리

고 언어의 은유적 기능을 통해서 대비(contrast)의 방법을 사용하여 상

징의비언어적층위나 그 분산의 원리를 분리해 낸다.

상징이 우주에 묶여있다면 은유는 담화의 자유로운 발명품이다.62) 상

징과 은유가 동일하게‘실재’를 지시하는 기호라는 측면은 동일하지만

은유는 상상력에 의해서 의미를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니체

(Nietzsche)는 은유를 회의적으로 인간이 세계 안에서 의미를 창조해

내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진단한다. 진리는 권력의 의지이다. 니체의

생각 속에서 진리는 은유의 기동력 있는 군대(mobile army)일 뿐이

다.63)

반면에 리쾨르는 은유를 존재에 이르는 길로 본다. 그런데 이 길은

간접적이다. 그는 텍스트를 통해 존재에 간접적으로 도달하는 우회로

(detour) 중 하나를 은유로 보면서 은유 문장의 근본 구조는 의미와 지

시를 동시에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요소를 포함하는

곳은 낱말 자체도 문장 자체도 아니라 오히려 문장과 낱말 사이에서

은유가 자리한다.64) 이들은 각각 단어와 문장과 이야기를 포함한다. 언

어에서 상징이‘참여’에 의한힘이라는기능이라면 은유는 관계성에의

한‘해석’의 기능이라고말할수 있다.

4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61) Paul Ricoeur, Interpretation Theory: Discourse and the Surplus of Meaning (Fort

Worth: The Texas Christian University Press, 1976), 54.

62) 앞의책, 61.

63) Kevin J. Vanhoozer, 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 the Bible, the Reader, and

the Morality of Literary Knowledge (Grand Rapids: Zondervan, 1998), 130.

64) Ricoeur, The Rule of Metaphor, 1 2 5-133; Essays on Biblical Interpretation, ed.

Lewis S. Mudg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 26. 리쾨르는 텍스트를 설명

할 때 상징, 은유, 내러티브 같은 매개공간을 우회로 삼아간접적 정립의 길을 상정

하였다. Kevin J. Vanhoozer, Biblical Narrative in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A Study in Hermeneutics and Theolog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7-10.

Page 2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상징은 이중성을 품고 있어서 해석이 필요하고 직접적으로 나타내

는 것을 뛰어넘어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이중 언어이다. 상징

언어는 기호보다는 암호를 통해서 소통되는 의도적인 모호함을 지닌

언어이다. 따라서 상징언어의 특징적 성격은 구체화의 과정과 그 사용

에서 언어의 지향하는 바가 명백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상징 언어가 지향하는 바는 다의적으로 실재의 여러 수준을 결합함

으로써 독특한 의미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 이러한 상징 언어가 갖는

다의성은 상징 해석이 문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의 적절성을 염두에 두고 상징의 적절성의

차원에서해석해야만한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종교적 진리의 요건은 계시와 인간 실존의 종교

상황과의 상관관계에서 주어졌다. 따라서 상징이 말하는 것은 삶의 터

인 존재 한가운데 처한 인간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점이다. 계시와

실존의 종교상황과 관련된 문제에서 종교언어와 의식과 경험의 우선순

위에대한 다툼이 있다. 종교언어와 의식은 계시의 경험에 의존하지않

고 형성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경험 또한 종교언어와

의식에 의존하지않고서는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경험이란‘홀로의 깊숙한 대면 또는 초월성의 직접적인 인

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상징과 관련하여 경험의 신학적

중요성은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을 이원화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상징의 언어의미에서 보았듯이 둘 모두를 공유하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앙 경험은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로써 상징과 신화로

표현되었다. 틸리히의 탈문자화와 리쾨르의 비신화화는 궁극적으로 종

교적상징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작업이 자

칫 성서의 서사성의상실로 나아가지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상징과 신화를 그것들의 의미와 힘이 없이 사용하는 공동체는 신앙

뿐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관심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결국 상징과 신

화를잃어버린 신앙생활은 이성주의에 입각한 인본주의에 머무르게 됨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19

그 상징이 제시하는 말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징과 생각의 투

쟁이라는현장에서생각은 반성과 사변사이의 대화를 찾는다.

이상에서 상징해석은 상징이 주는 의미의 잉여를 창조적으로 해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상징과 생각은 순환

관계에 있다. 상징해석학은‘생각나는 생각’과‘생각하는 생각’을 구분

함과 동시에 연결시킨다. 상징이 불러일으키는 생각은 창조적 해석을

통한 의미의 풍부함을 살려낸다. 그러므로 상징해석학은교회와 신학의

언어에서상징의 본래의미를 되살리고상실된 믿음을 회복시킨다.

I V. 나가는말

언어의 기능이 최소화되고 그 의미에 대해 회의감으로 충만한 오늘

의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실제적으로 신학적 언어를 살려내는 것은 신

학자들의 당면과제일 것이다. 상징 언어는 인간의 삶과 불가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상

징은 그리스도교 신학만의 배타적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공통

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종교적 의식에 관여한다. 특별히 신앙의 역동성

은 종교적 상징과 해석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

의 역할은 더없이 강조된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복음을 변증하는 것에 최고의 주안점은 둔다.

그리스도교 변증신학은 성경 외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외적인 것을 가

지고복음을 변호하지않는다. 복음과 문화는 서로상관관계에 있다. 엄

밀히 말하면 문화는 복음의 중재적 입장에 있다. 따라서 변증신학은 그

리스도의 복음이 공통된 인간의 경험과 의미를 함의한다는 차원에서

중재하는 신학이다. 신앙과 신학은 상징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진

다. 상징은 적절한 해석을 통해 상징 너머의 실재에 참여한다. 해석은

우회의 길이다. 따라서 신앙은 상징이 제공하는의미에 충실해야 한다.

4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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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ule of Metaphor; Multi-Disciplinary Studies of the Creation of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21

으로써 신앙의 역동성을 질식시키는 현상을 야기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교회와 신학의 관심사는 성서 언어의 복권에 맞추어야 한다.

성스러운 것을 망각한 현대인들에게 틸리히의 상징 이론과 리쾨르의

상징해석학은 종교적 상징의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서 상징에 감추어진

본래의 의미를 도출하고 신앙의 잃어버린 것을되찾게 해줄 것이다. 신

앙 운동은 경험과 기대에 의한 종교적 상징과 신화를 설명하고 해석하

여 삶을변혁시킴으로서가능해질수 있다.

주제어

폴 틸리히, 폴 리쾨르, 종교적 상징, 상징과 신화, 비신화화, 해석.

Paul Tillich, Paul Ricoeur, Religious Symbol, Symbol and Myth,

Demythologization, Interpretation.

접 수 일 2011년 7월 4일

심사(수정)일 2011년 7월 31일

게재 확정일 2011년 9월 1일

4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 Study of the Religious Symbol andInterpretation

Centering around Paul Tillich and Paul Ricoeur

Yim, Hyung-Mo

Lecturer

Korea Baptist Theological University/Seminary

Daejeon, Korea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evelop a possibility of the reli-

gious symbol and interpretation with Paul Tillich and Paul Ricoeur as

the central figure. Tillich and Ricoeur insist that this meaning of

symbol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dynamics of the history reli-

gion, and it is also the basic problem in the most refined discussions

of faith.

Man’s ultimate concern must be expressed symbolically, because

symbolic language alone is able to express the ultimate. This state-

ment about symbolic language demands explanation in several

respects. First, the symbol has one characteristic in common with sign

and it points beyond itself to something else. Second, it participates in

the reality of that for which it stands. Third, it opens up levels of real-

ity which otherwise are closed for us. Fourth, it has a sociality that

the symbol cannot be produced intentionally. Fifth, it has a creativity

that a symbol grows and dies like living beings.

Tillich regards a myth as a species of a symbol, as a symbol devel-

oped in the form of narrations. It needs, as one says today, “demy-

thologization” which is a recharging of thought with the aid of sym-

임형모, 종교적 상징과해석의 문제연구: 폴 틸리히와 폴 리쾨르를중심으로 423

Meaning in Language. trans. Robert Czerny.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7.

. Interpretation Theory: Discourse and the Surplus of Meaning. Fort

Worth: TheTexas Christian University Press, 1976.

. 『해석의갈등』. 양명수 역. 서울: 아카넷, 2001.

Rowe, William L. Religious Symbols and God: A Philosophical Study of

Tillich’s Theolog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68.

Stiver, Dan. The Philosophy of Religious Language: Sign, Symbol, and Story.

Cambridge: Blackwell Publishers, 1996.

. Theology after Ricoeur: New Directions in Hermeneutical Theolog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I, I I, I I I,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1957, 1963.

. The Protestant Era. trans. J. Luther Adam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 Biblical Religion and the Search for Ultimate Reality. C h i c a g 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 Dynamics of Faith. New York: Harper & Row, 1957.

. Theology of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9.

. 『문화와종교』. 이계준 역. 서울: 전망사, 1984.

. “Religious Symbols and Our Knowledge of God (1955).” M a i n

W o r k s / H a u p t w e r k e. 4 vols. Berlin, New York:Walter de Gruyter,

1987.

Vanhoozer, Kevin J. 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 the Bible, the Reader,

and the Morality of Literary Knowledge. Grand Rapids: Zondervan,

1998.

. Biblical Narrative in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A Study in

Hermeneutics and Theolog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4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회칙

제1조 명칭

본 회는“한국조직신학회(Korean Society of Systematic Theology)”라 칭한

다.

제2조 목적

본 회는 회원 상호간의 학문적 교류와 공동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조직신학

을 정립 발전시킴으로써 한국과 세계의 교회와 신학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사무실

본 회의 사무실은회장이 임직하고있는학교나 근무지에두는 것을원칙으

로 한다.

제4조 사업

본 회의 목적 수행을 위하여 연구발표 및 학술대회, 학회지 출판 및 기타

사업을한다.

제5조 회원의 자격

본 회의 회원은다음과같다.

1. 정회원: 본 회의 정회원은 조직신학 및 인접 학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거나 또는 대학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

고 있는자로한다.

2. 준회원: 준회원은조직신학및 인접학문분야에서 박사학위취득 과정에

있는자로한다.

한국조직신학회회칙 425

bol. A myth which is understood as a myth, but not removed or

replaced, can be called a “broken myth.” The resistance against

demythologization express itself in “literalism.” The symbols and

myths are understood in their immediate meaning. Literalism

deprives God of his ultimacy and, religiously speaking, of his

majesty. But Christianity speaks the mythological language like every

other religion. It is a broken myth, but it is a myth; otherwise

Christianity would not be an expression of ultimate concern.

Ricoeur insists that symbols are more radical than myths. The

motto of his symbolic hermeneutics is that “the symbol gives rise to

thought.” In other words, what the symbol gives rise to thinking. The

aphorism suggests that everything has already been said enigmati-

cally and yet that it is always necessary to begin everything and to

begin it again in the dimension of thinking. What we need is an inter-

pretation that respects the original enigma of the symbols, that lets

itself be taught by them, but that, beginning from there, promotes the

meaning, forms the meaning in the full responsibility of autonomous

thought.

Finally, the theory of symbol and interpretation theory are circled

to each other. We should be likely to say that a creative interpretation

endeavors to promote the meaning, to form it from the symbols.

4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2조 임원회

임원회는 회장이 필요시 수시로 소집하고, 총회에서 위임된 업무를 처리한

다.

제13조 편집위원회

편집 위원회는 본 회의 학술지 간행 및 출판사업을 주관하며 편집위원회에

관한규정은 따로둔다.

제14조 재정

본 회의 재정은 회원의 입회비와 연회비, 찬조금 그리고 기타 수익금으로

한다.

제15조 부칙

1. 본회의회칙은통과일로부터시행된다.

2. 회칙은 정기 총회에서 출석회원 2/3 이상의 찬성에 의해서 수정할 수 있

다.

3. 본 회칙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 정기총회 및 임원회의의결과 통상관

례에따른다.

한국조직신학회회칙 427

3. 특별회원: 특별회원은임원회의제청에 의해서 총회에서허락을 받은 자

로 한다.

제6조 회원의 가입

제5조의자격을 갖춘 자로서 본 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소정의 입회원

서를 제출하여총회의 허입을받아야한다.

제7조 회원의권리

본 회의 정회원은 의결권,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지며 본 회의 각종 학술

활동에 참여할수 있다.

제8조 회원의의무

본 회의 회원은 회칙을 준수하고 소정의 회비를 납부해야 하며 본 회가 주

최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고학회지에 기고해야한다.

제9조 임원

본 회는 학회운영을 위하여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대외협력부장, 편

집부장, 감사 각 1인의임원을 둔다. 필요시 학문적 교류를 위하여 지회와 지회

임원을 둘 수 있다.

제10조 선거와임기

본 회의 임원은 총회에서 2인 이상의 추천과 최다수 득표로 선출하고 임원

의 임기는 2년으로하되, 회장과부회장임기는 각각 1년으로한다.

제11조 총회

본 회의 정기총회는 매 년마다 회장이‘한국기독교공동학회’기간 중 소집

하고 회칙 수정, 임원 선거, 사업 및 예, 결산 승인, 회비 결정, 회원 허입, 특별

회원 추대 등의 회무를 처리한다. 임시 총회는 회장이 학회 운영을 위하여 불

가피하다고판단되었을때에임원회의 결의에따라소집한다.

4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5조 업무

편집위원회에서는 한국조직신학회 정기학술대회 주제에 대한 논문 기고자

를 위촉하고, 논문 심사위원 선정 및 우수논문을 심사하며, 한국조직신학회의

모든출판업무를 주관한다.

제6조 학술지 명칭

본회가 편집 출판하는 학술지는「한국조직신학논총」(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이라칭한다.

제7조 학술지 발간

「한국조직신학논총」은 매년 3회( 6월 3 0일, 9월 3 0일, 12월 3 0일) 발간함을

원칙으로한다.

제8조 학술지편집

논문은 투고순서에 따라 심사에 회부하며, 책의 구성 및 편집에 관한 모든

사항은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9조 통보

편집위원회는 투고논문의 접수, 심사 및 게재 여부에 관련된 사항을 투고자

에게통보한다.

제10조 원고료및 게재료

편집위원회는 학술대회를 위하여 채택한 특별한 주제에 관해 연구 위촉한

논문에 대하여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불하고, 외부 연구비 지원에 따른 연구 결

과물게재시 편집위원회에서정하는 소정의게재료를납부해야한다.

제11조 학술지 배포

본회 학술지는 연회비를 납부한 한국조직신학회회원에게 무료로 배부하며,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429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제1조 명칭과사무실

본회는 한국조직신학회 회칙 제13조에 따라 한국조직신학회 편집위원회라

칭하며, 사무실은 편집위원장이 소속된 학교나 근무지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조 목적

본회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에 소속된 회원들의 학문적 교류를 원활히

하고자 회원들의 연구결과를 수록한 조직신학 전공 학술지를출판하는데 있다.

또한 이러한출판 사업을통해회원들의연구업적이 소속기관및 학계에서공

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받도록협조하는데있다.

제3조 위원구성임기

본회의 위원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추천한 약간 명으로 구성된다.

위원장은 본 학회 편집부장이 담당하며, 편집위원은 국내외 대학에서 조직신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일 전공분야에서5년 이상 연구활동을 계속한

자로 연구 및 학술 실적이 우수한 자여야 한다. 편집위원의 임기는2년으로 한

다.

제4조 회의소집

편집위원회는 편집위원장이 소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시 인터넷

상에서 회의할 수 있다. 또한 편집위원 과반 수 이상의 요청으로 회의를 소집

할 수 있다.

4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고자 하는 자가

준수해야할 사항을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 자격

본회 회원으로서 정기적으로 본회 소정의 연회비를 납부하는 자는 누구든

지 투고할 수 있다. 본회 회원이 아니라도 편집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투고할

수 있다.

제3조 투고 신청서양식

투고자는 본회‘논문투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투고신청서 양식

(양식1)은 조직신학회홈페이지에서다운받아사용할 수 있다.

제4조 구성 요소

투고논문은 다음의 5가지 구성요소를 갖춰야 한다. 1. 논문 2. 각주 및 참고

문헌목록 3. 외국어 초록(abstract) 4. 한국어 주제어 5. 외국어 주제어( k e y

word)

제5조 논문

1. 모든 논문은 한글 혹은 외국어로 된 다른 학술지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

어야한다.

2. 본회학술대회발표 원고도규정에따라 투고해야한다.

3. 「한국조직신학논총」과「한국기독교신학논총」등 학술지에 관련된 선행

논문들이 있을 경우, 이를 참고하여 인용하고, 각주, 참고문헌에 그 사실

을 표기한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431

도서관 및 학문 연구를 위하여 구입을 희망하는 자에게는 회비에 상당하는 후

원금을 받고배부한다.

제12조 발행및 인쇄

본회 학술지의 발행인은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으로 하고, 인쇄 출판 및 배부

에 관한세부사항은 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13조 판권

본회에서 출판된 모든 글의 판권은 저자가 소유한다. 단, 인터넷 출판의 경

우 학회가그 판권을 소유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기타자세한 사항은관례에 따른다.

2. 본 규정은 편집위원2/3 이상의 찬성으로개정할 수 있다.

4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투고 논문(본문 10p, 각주 9p, 바탕체, 줄 간격 160)은 A4용지15매 이내로

작성한다.

제10조 제출 방법

투고자는‘논문투고 신청서’(양식1)와 함께 논문을 E-mail로 제출함을 원

칙으로한다.

제11조 제출 기한

원고 마감은출판 3개월전으로 하고, 제출된 원고는반송하지않는다.

제12조 게재 논문제한

논문은 연속으로게재되지않는것을원칙으로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 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 규정 433

4. 고전어(히브리어, 헬라어)는 원어 사용을 원칙으로 하되, 음역할 수도 있

다.

5. 내용 구분은I, I I → 1, 2 → 1), 2) → (1), (2) → a), b) → (a), (b)의 순으로

한다.

제6조 각주와참고문헌

1. 논문은 각주를 사용해야 한다. 각주 및 참고문헌의 양식은 표 1을 참조

한다.

2. 논문에서언급된것만을참고문헌목록에포함한다.

제7조 외국어초록

1. 내용

논문의 목적, 연구방법론, 연구내용및 연구성과 등 제시

2. 분량

A4 1매 이내 혹은외국어 300단어내외

3. 제목및 인적사항

논문제목, 성명, 학위, 직위, 소속, 소재지를기재

예) Kyun-Jin Kim, Dr. Theol.

Professor, College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비전임의경우직위를Lecturer로 표기함

제8조 주제어

한국어와외국어 주제어를각각 5개 이내로작성한다.

제9조 원고분량

4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2) 저서 인용의경우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I』(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135.

Peter C. Hodgson,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67.

3) 편·역서 인용의경우

위르겐몰트만/이신건옮김, 『희망의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4) 학위논문인용의경우

김철수,“우리말 사도신경에 삭제된‘음부에 내려 가사’에 대한 연구,”(계명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2-23.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참고문헌 작성법

1) 전체 구조는 한국어 자료를 앞 쪽에 배치하고, 그 뒤에 외국어 자료를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435

「한국조직신학논총」각주및 참고문헌작성법 (투고규정표 1)

*각주 및 참고문헌에서의 영문 표기는“시카고 스타일”을 따른다.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th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각주 및 참고문헌 작성에 있어서의“시카고 스

타일”의 대한 간단한 용례(Chicago-Style Citation Quick Guide)는

다음을 참고할 것: http://www. chicagomanualofstyle.org/tools_

citationguide. html

I. 한국어학술지

1. 각주표기 원칙

·논문의 제목은 쌍 따옴표(“ ”)로, 학술지나 정기간행물 이름은 외꺽쇠

괄호(「 」)로, 한국어 도서의 경우는 쌍 꺽쇠괄호(『 』)로 표기한다. 단,

외국어 책 제목과학술지 제목은모두이탤릭체로표기한다.

·동일한 논문이나 책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경우: 앞의 논문(또는

앞의책), 30.

·동일 저자의 논문이나 저서를 각주 한 개 이상 건너 뛰어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인용의경우

황승룡,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 위치,”「조직신학논총」6

(2001), 101-119.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 n t e r-

4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

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I I. 외국어 학술지

1. 각주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동일한 페이지에 있는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다른 페이지에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34.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글을 각주 1개 이상 지나서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학위논문의경우: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 n t e r-

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저서/편 역서의경우: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437

배치하는것으로하되, 반드시 각주에서사용된 자료만을제시한다.

2) 국문 자료의 경우 저자의 성명에 따라 가, 나, 다 순으로, 영문 및 외국

자료의 경우는알파벳순으로제시한다.

3) 저자 및 책명에는 마침표를 붙이고, 출판지, 출판사, 출판 연도를 표기함

에 있어서는괄호를삭제한다.

4) 외국인 이름 혹은 한국인의 영어명은 성, 즉 가족명(family name)을 앞

에 쓰고 이름을뒤에쓰며 그 사이를콤마로구분한다.

5) 동일한 필자에 의해 쓰인 논문/저서는 아래 하이픈( 하이픈을 6

번 누름)을 써서 동일 필자에 의한 논문/저서임을 밝히되, 최근에 출판된

것부터 먼저제시한다.

6) 논문명 혹은 책명이 길어서 둘째 줄까지 사용하게 될 때는 저자명이 잘

드러나게9칸 들여서글을 쓴다.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 『기독교조직신학I』.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김철수.“우리말사도신경에삭제된‘음부에내려가사’에 대한연구.”계명대학

교 박사학위 논문, 2004.

몰트만, 위르겐/이신건 옮김. 『희망의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황승룡.“폴틸리히의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위치.”「조직신학논총」6(2001):

101-119.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4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학술지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에 관한 제

반 사항을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에서발송의과정

편집위원회는아래와같은 일을수행한다.

1. 논문투고안내를 학회홈페이지및 회원들에게E-mail로 공지한다.

2. 투고된 논문의 구성요소(투고 규정4조 참조)들이 미비할 경우 투고자의

수정을거친후, 논문접수를통보한다.

3. 편집위원회의에서 익명으로 처리된 각 논문에3인의 심사위원을 배정한

다.

4. 심사결과를 종합하여 편집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게재여부를 결정하며, 1

주일이내에심사결과를투고자에게 통보한다.

5. 게재 논문은1, 2차 교정을 거쳐 인쇄하며, 인쇄된 학술지는 모든 회원에

게 발송한다.

제3조 심사위원자격

본회는 논문심사를 위해 국내외 대학에서 해당 전공분야의 박사학위를 취

득한 후 5년 이상 전공 관련 주제에 관한 강의 또는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온

자 가운데 편집위원회에서 의뢰한다(양식2 논문심사 의뢰서). 심사의뢰 시 소

정의심사료를지불한다.

제4조 심사기준

심사위원은 아래의 심사기준에 따라서 기일 내에‘논문 심사결과서’(양식

3)를 제출하여야한다.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439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2. 참고문헌작성법

*위에서 제시한한국어 논문작성법용례의 경우와동일하다.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 결과는 필자 이외에 타인에게 공개하지않는다. 심사위원은 심사 대상, 내용

및 결과와관련된 모든정보를 타인에게누설하지 않는다.

제7조 심사결과통보

투고자에게심사결과를 즉시통보한다.

제8조 재심 신청

심사위원3분의2 이상으로부터‘수정 후 재심’판정을 받은 논문 제출자는

지적 사항을 수정한 후 재심을 신청할 수 있으며, 재심을 포기할 경우는 게재

불가로 판정한다. 재심을 청구할 경우 동일 심사위원의 재심을 통과해야 차호

에 게재할수 있으며논문재심 신청은1회에한 한다.

▣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 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441

1. 논문형식심사

투고된논문의 구성요소들이미비되었을경우수정을 요청한다.

2. 논문내용심사

1) 논문구성의완성도(20점)

논문의 구성상 목차와 내용 전개가 논리적이며 참고문헌 및 문장은 적

절한가?

2) 연구주제의 타당성및 심도(20점)

주제에 관한연구가타당하며, 충실하고심도 있게이루어졌는가?

3) 학문적 독창성(20점)

주제의 선정과내용전개 및 결론제시가독창적인가?

4) 학문적 공헌도및 적용성(20점)

주제에 관한 연구가 국내외적으로 학문적 공헌도가 있으며, 교회와 사회

에 적용성이있는가?

5) 연구방법, 선행연구및 통합학문적지향(20점)

연구방법은 타당하며, 선행연구의 검토와 통합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는

가?

제5조 심사판정

1. 제출 논문은 관련 전공자인3인의 심사위원에게심사를 위촉한다. 심사점

수가 90점 이상‘게재가,’89-80점‘수정 후 게재,’79-70점‘수정 후 재심,’

69점 이하‘게재불가’로 판정한다.

2. 심사위원2/3 이상이‘게재 가’또는‘수정 후 게재’(즉 80점 이상)이면

‘게재가’로 판정하고 투고자에게 수정 부분을 고치게 한 후 게재한다. 심사위

원 2/3 이상이‘수정 후 재심’또는‘개재 불가’(즉 79점 이하)이면‘게재 불가’

로 판정한다.

제6조 비밀유지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이나 논문 제출자는 모두 익명으로 하여야 하며, 심

4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①연구윤리확립에 관한사항

②연구부정행위의 예방, 조사에관한사항

③제보자 보호와비밀유지에관한사항

④연구윤리위반검증, 검증결과처리와후속조치에관한사항

⑤피조사자명예회복 조치에관한사항

⑥기타 위원회위원장이부의하는사항

제5조(구성)

위원회의 구성은 위원장을 포함하여 총 5명으로 한다. 회장이 위원장 및

위원을임명하고, 이 중 1명을택하여 필요한행정업무를 관장하게한다.

제6조(임기)

위원의임기는 해당사건의종결 시까지이다.

제7조(회의)

①위원장은위원회의 회의를소집하고 그 의장이되며, 회의를 주재한다.

② 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이상의 찬성으

로 의결한다. 단, 징계 판정에서 제17조의 ④- ⑥에 해당하는 의결은

재적위원 3분의 2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

결한다.

③위원회의 회의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필요에 따라 관계자의 출석

을 요구하여의견을청취할 수 있다.

제8조(권한과 책무)

① 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출석

과 자료 제출을요구할 수 있다.

②피조사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 또는 자료 제출을 거부할 경우에는

혐의 사실을인정한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③위원회는 연구기록이나증거의 멸실, 파손, 은닉또는 변조 등을 방지하

기 위하여 그에상당한 조치를취할수 있다.

④위원회 위원은 심의와 관련된 제반 사항에 대하여 비밀을 준수하여야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443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제1조(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연구자의 연구윤리와 부정행위의 규제에 관한 제반 사

항을 정하는데 있다.

제2조(적용대상)

본 규정은 본 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으로서 한국조직신학회가간행하

는 학술지나저서에 기고하는자에한하여 적용한다.

제3조(연구부정행위의 범위)

연구에서의 부정 행위는 연구의 제안과 수행, 연구 결과의 보고 및 발표

등에서 행해진다음 각 호의행위에해당한다.

① 존재하지않는데이터 또는연구결과 등을허위로만들어 내는행위

② 다른 사람의 독창적인 연구내용과 결과를 정당한 승인 또는 인용에 대

한 정확한정보의 기재없이표절하는행위

③연구 내용 및 연구 결과에 공헌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논문저

자/역자의 자격을 표시하지 않는 경우, 반대로 아무런 공헌이 없는 자

에게 감사 또는 예우를 목적으로 부당하게 논문저자/역자를 표시하는

행위

④ 동일 논문을 반복하여 게재하거나 이미 발표된 자신의 논문과 현저하

게 유사한논문을 이중으로발표하는자기표절행위

⑤ 학계에서 통상적으로 허용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난 부정행위로 위

원회의자체적인조사가필요하다고판단되는부정 행위

제4조(연구윤리위원회의설치와운영)

제3조의 부정행위를규제 및 조치하기 위한 연구윤리위원회(이하 위원회)

를 두며, 이 위원회는 연구윤리와관련된 다음각 호의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4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4조(기피, 제척, 회피)

①위원에게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경우에 제보자 또는

피조사자는그 이유를 밝혀 기피를 신청할 수 있다. 기피신청이 인정된

경우에 기피신청된위원은 당해조사와관련하여배제된다.

②당해 조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안건의 심의, 의결, 조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제15조(이의제기및 소명기회의 보장)

위원회는 제보자와 피조사자에게 의견 진술, 이의 제기 및 변론의 권리와

소명의기회를 충분히보장해야할의무를갖는다.

제16조(조사, 심의 및 판정기간)

①위원회는 부정행위에 관한 제보가 접수된 날로부터6개월 이내에 조사,

심의 및 판정을내려야 한다.

② 제보의 접수일로부터 역산하여 만 5년이 경과된 부정행위는 원칙적으

로 처리하지않는다.

제17조(징계판정)

심의결과 부정행위로판정될 경우아래의징계들을판정할수 있다.

①경고

②논문 불인정

③일정기간논문투고 금지

④제명

⑤일정 기간재가입 불허

⑥해당 기관장에게 통보

제18조(결과의 통지)

위원장은 조사결과에 대한위원회의 결정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지체 없이

제보자및 피조사자등 관련자에게이를통지해야 한다.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445

한다.

제9조(부정행위제보 및 접수)

제보자는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 및 편집위원회에직접 또는서면, 전자우

편 등으로 제보하되 논문 명(또는 연구 과제명)과 구체적인 부정 행위의 내용

과 증거를제시하여야한다.

제10조(부정행위의조사)

위원회는 구체적인 제보가 있거나 상당한 의혹이 있을 경우에는부정행위

의 존재여부를조사하여야한다.

제11조(출석및 자료제출 요구)

①위원회는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진술을 위한 출석을

요구할수 있으며, 이 경우피조사자는이에반드시응해야 한다.

② 위원회는 피조사자에게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으며, 증거자료의

보전을 위하여 해당 연구기관장의 승인을 얻어 부정행위 관련자에 대

한 해당연구자료의압수, 보관등을 할 수 있다.

제12조(제보자의권리 보호)

①위원회는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니며, 제보자의 실명은

공개되지않도록 해야한다.

②제보 내용이 허위임을 알고도 이를 신고한 제보자에 대해서는 신원보

호의 의무가 요구되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관련사실을 해당 소속기관

에 통보할수 있다.

제13조(피조사자의권리 보호)

위원회는 부정행위에 대한 사실규명의 조사가 종료될 때까지 피조사자의

명예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무혐의로 판명될 경우 피조사자의

명예회복을위해노력하여야한다.

4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임원명단

회 장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부 회 장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총 무 정홍열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서 기 황민효 (호남신학대학교)

회 계 황돈형 (중앙신학교) 편집부장 유장환 (목원대학교)

대외협력 김성원 (나사렛대학교) 미 디 어 최광진 (호서대학교)

부 장 부 장

감 사 구춘서 (한일장신대학교)

편집위원

편집위원장 유장환(목원대학교)

편집위원

신옥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장윤재 (이화여자대학교)

신재식 (호남신학대학교) 전현식 (연세대학교)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교)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이오갑 (그리스도대학교) 허호익 (대전신학대학교)

임 걸 (연세대원주캠퍼스) 황재범 (계명대학교)

전영호 (Saint Paul School of Theology)

447

제19조(재심의)

판정에대한 재심의 요청의 경우, 판정 이후3개월 이내에해야 하며, 재심

의 요청이있을경우 위원회는6개월이내 재심의하여결정을 내려야한다.

제20조(비밀엄수

위원회는 제보, 조사, 심의, 판정, 재심의 및 건의 조치와 관련된 일체의 사

항에 대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으며,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자

역시도 모든정보에 대하여비밀을지켜야 한다.

제21조(기록의 보관및 공개)

①조사와 관련된기록은조사 종료시점을기준으로5년간보관하여야한

다.

②판정이 끝난 이후의결과는 학회 상임이사회에보고 해야하며, 제보자,

조사위원, 증인, 참고인, 자문에 참여한 자의 명단 등 신원과 관련된 정

보에 대해서는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위원회

의 결의로공개대상에서제외할 수 있다.

제22조(운영예산)

위원회 운영 및 조사와 관련하여 필요한 예산은 별도로 책정하여 지급할

수 있다.

▣ 부 칙

1. 이 규정은 2008년 12월 19일부터 시행한다.

2. 이 규정은윤리위원회의결의로개정할 수 있다.

3. 이 규정은학회임원회의승인하에효력을 갖는다.

4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

Page 2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논총제30집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2011년 9월 23일 인쇄

2011년 9월 30일 발행

편집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

발행 한국조직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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