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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비지정문화재 1. 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 1) 고고분야(考古分野) 1) (1) 고분유적(古墳遺蹟) 일반적으로 고분(古墳)이라고 하면 모든 옛 무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며, 때 로는 “고려장”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고분은 입지?외형?규모 및 시설, 그리고 내부구조와 피장자(被葬者)?부장품(副葬品) 등 많은 요소들이 서로 결합되어 존재하고 있다. 울진에서도 원삼국시대의 유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죽변등대(竹邊燈臺)가 있는 해 안돌출구릉상(海岸突出丘陵上)에 이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패총이 있으며, 극히 소수이나 적색연질토기편(赤色軟質土器片)과 고식와질토기편(古式瓦質土器片)이 흩어져 있다. 따라서 분묘유적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청동기시대 이래로 토착민이 계속해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문헌에 나타나는 예(濊)와 관계있는 지역사회의 문화가 아닌가 생각 된다. 울진군의 고분은 그 분포상황으로 보아 지금의 울진만(蔚珍?)과 평해만(平海?), 그리고 이 곳에 유입되는 하천유역에 주로 토착집단사회가 형성되었으며, 그 배경에는 하천유역의 평 지에서 생산되는 농경작물과 근해에서의 어로에 의존한 생활이었다고 추측된다. 울진군 내 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삼국시대의 고분유적은 3개소였다. 이들 고분의 구조는 대체로 석곽 분(石槨墳)?수혈식석실분(竪穴式石室墳)?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이들 3개소의 고분군(古墳群)은 다음과 같다. ① 북면 덕천동(德川洞) 고분군 죽변에서 국도를 따라 3㎞가량 북상하면 신화?고목 쪽에서 바다로 유입되는 하구의 넓은 평지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구국도와 신국도가 갈라지는 지점에 이르면서 곧 구릉이 앞 을 가리고 있다. 신국도는 덕천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구도로가 폐쇄되고 이들 대신해 서 신설된 것이다. 이 신도로는 현재 하천을 따라 구릉의 우측을 돌아 북상하고 있다. 덕천동 고분군은 산과 구국도 사이에 형성된 넓은 구릉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구릉 의 북반은 원자력발전소가 자리하고 있어서 알 수 없으나 발전소 건설 이전에는 고분이 분 포하고 있었으며 분포상태는 남쪽으로 올수록 그 수가 많은 듯이 보였다. 신국도를 개설할 때의 구릉 삭토작업에서 많은 석곽유구(石槨遺構)가 파괴되었고, 또 지 금도 제거된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민들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는 발전소에 접근하지 못하고 구국도에서 덕천마을로 들어가는 동구에 유존하는 고분군만을 답사하였다. 마을 동구(洞口)에는 원래 어느 정도의 고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8기만이 확인 되었다. 이 8기는 모두 석실이 노출되거나 붕괴된 폐고분(廢古墳)이었다. 이 가운데서 덕천 동 전(田) 148~1번지에 위치하는 고분은 그나마 봉분이 조금 남아 있다. 고분 외형상의 흔적만으로는 그 구조를 알기 어렵고, 또 일괄 출토유물도 정확하게 보고 된 바가 없으므로 부장품의 내용이나 고분의 연대구명은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덕천마을 뒷산에 노출되어 있는 소형의 고분은 석곽분(石槨墳)이고,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인 덕천동 148번지의 고분은 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횡구식석실분의 출현은 빠르면 6세기 후반부터이고 늦은 곳이라 하더라도 7세기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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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비지정문화재 1. 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 · 제3절 비지정문화재 1. 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 1) 고고분야(考古分野)1) (1) 고분유적(古墳遺蹟)

Jan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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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절 비지정문화재

    1. 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

    1) 고고분야(考古分野)1)

    (1) 고분유적(古墳遺蹟)

      일반적으로 고분(古墳)이라고 하면 모든 옛 무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며, 때

    로는 “고려장”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고분은 입지?외형?규모 및 시설, 그리고 내부구조와

    피장자(被葬者)?부장품(副葬品) 등 많은 요소들이 서로 결합되어 존재하고 있다.

      울진에서도 원삼국시대의 유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죽변등대(竹邊燈臺)가 있는 해

    안돌출구릉상(海岸突出丘陵上)에 이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패총이 있으며, 극히 소수이나

    적색연질토기편(赤色軟質土器片)과 고식와질토기편(古式瓦質土器片)이 흩어져 있다. 따라서

    분묘유적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청동기시대 이래로 토착민이 계속해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문헌에 나타나는 예(濊)와 관계있는 지역사회의 문화가 아닌가 생각

    된다.

      울진군의 고분은 그 분포상황으로 보아 지금의 울진만(蔚珍?)과 평해만(平海?), 그리고 이

    곳에 유입되는 하천유역에 주로 토착집단사회가 형성되었으며, 그 배경에는 하천유역의 평

    지에서 생산되는 농경작물과 근해에서의 어로에 의존한 생활이었다고 추측된다. 울진군 내

    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삼국시대의 고분유적은 3개소였다. 이들 고분의 구조는 대체로 석곽

    분(石槨墳)?수혈식석실분(竪穴式石室墳)?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이들 3개소의 고분군(古墳群)은 다음과 같다.

    ① 북면 덕천동(德川洞) 고분군

      죽변에서 국도를 따라 3㎞가량 북상하면 신화?고목 쪽에서 바다로 유입되는 하구의 넓은

    평지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구국도와 신국도가 갈라지는 지점에 이르면서 곧 구릉이 앞

    을 가리고 있다. 신국도는 덕천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구도로가 폐쇄되고 이들 대신해

    서 신설된 것이다. 이 신도로는 현재 하천을 따라 구릉의 우측을 돌아 북상하고 있다.

      덕천동 고분군은 산과 구국도 사이에 형성된 넓은 구릉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구릉

    의 북반은 원자력발전소가 자리하고 있어서 알 수 없으나 발전소 건설 이전에는 고분이 분

    포하고 있었으며 분포상태는 남쪽으로 올수록 그 수가 많은 듯이 보였다.

      신국도를 개설할 때의 구릉 삭토작업에서 많은 석곽유구(石槨遺構)가 파괴되었고, 또 지

    금도 제거된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민들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는 발전소에

    접근하지 못하고 구국도에서 덕천마을로 들어가는 동구에 유존하는 고분군만을 답사하였다.

    마을 동구(洞口)에는 원래 어느 정도의 고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8기만이 확인

    되었다. 이 8기는 모두 석실이 노출되거나 붕괴된 폐고분(廢古墳)이었다. 이 가운데서 덕천

    동 전(田) 148~1번지에 위치하는 고분은 그나마 봉분이 조금 남아 있다.

      고분 외형상의 흔적만으로는 그 구조를 알기 어렵고, 또 일괄 출토유물도 정확하게 보고

    된 바가 없으므로 부장품의 내용이나 고분의 연대구명은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덕천마을

    뒷산에 노출되어 있는 소형의 고분은 석곽분(石槨墳)이고,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인 덕천동

    148번지의 고분은 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횡구식석실분의 출현은 빠르면 6세기 후반부터이고 늦은 곳이라 하더라도 7세기에 들어

  • 서면 일반화되었다. 즉 횡구식석실이 그 지역에 있다는 것은 수혈식석실분의 축조 이후에도

    지역집단 내에 토착의 지배층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1980년대에 국립경

    주박물관에 덕천리 출토품으로 신고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

      덕천리 고분 출토유물

      이 가운데 부가구연(附加口緣)의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3037)?단경호(短徑壺)(3037)?고

    배개(高杯蓋)(3039)는 형식적인 편년상 6세기 후반이라는 비슷한 시기이고 출토지점도 동일

    한 것으로 보아 일괄유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고배(高杯)(3297)?단경호(短頸壺)(3293)?완

    (?) 2점(3296)은 형식학적으로 볼 때 7세기 초의 것으로 판단되나 같은 출토지로 되어 있는

    광구장경호(廣口長頸壺)(3294)와 개부합(蓋附盒)(3295)은 통일신라기의 것이다. 이러한 점으

    로 보아 이 덕천동 일대에는 시기를 달리하는 다수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

    된다.

    ② 울진읍 읍남 1리 고분군

      울진읍 시가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산 아래에 토일마을이 있고, 이 토일

    마을 서쪽의 뒷산에는 능선상에 150m가량에 걸쳐 크고 작은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정상

    쪽으로 올라가면서 대형분(大形墳)이 많고 아래쪽에는 소형분(小形墳)이 많은데 파괴가 심하

    다. 정확한 수량은 알 수 없으나 외견상 30기 이상인 듯 하다. 정상부에 위치하는 고분 중

    에는 봉분의 크기가 저경(底徑) 20m, 높이 5m인 것도 있다. 거의 대부분 도굴되었다. 외견

    상 저경(底徑) 10m가량의 고분에 노출되어 있는 석곽(石槨)의 크기는 길이 3m, 폭 1m, 높

    이 1m이며 뚜껑은 판석으로 덮었다. 북면 덕천리 고분군과 비교해 보면 분포면적과 기수

    (基數)는 적으나 개개 고분의 규모는 이곳 읍남 고분군 쪽에 더 큰 것이 많다.

    출      토     지 유  물  명 규    격(cm)   비 고 (유물번호)

    북면 덕천리 산 17-1

             〃

             〃

    북면 덕천리 19-1

              〃

     

             〃

     

             〃

             〃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단경호(短頸壺)

    고배개(高杯蓋)

    단경호(短頸壺)

      고배(高杯)

     

    소완(小?)(2점)

     

    광구장경호(廣口長頸壺)

    개부합(蓋附盒)

    고 34, 구경 19.5

    고 14.5, 구경 11.5

    고 4.8, 구경 10.2

    고 14.5, 구경 12.5

    현 고 7.5

    현구경 7.2

    고 4.7, 구경 8

    고 4,   구경 9.5

    고 14, 구경 10.5

    전고 11, 구경 7

    경주 3037

    경주 3038

    경주 3039

    경주 3293

       경주 3297

     

    경주 3296

     

    경주 3294

    경주 3295

  •                   

      기성면 마산동 고분

      완형(完形)의 토기는 볼 수 없었으나 산재하는 토기편으로 보아서는 덕천리 고분 출토의

    고식(古式)과 비슷하며, 기벽(器壁)의 두께가 1.5cm가량 되는 대옹편(大甕片)도 많이 확산되

    었다. 고배개(高杯蓋)의 꼭지는 신라계에서 흔히 보이는 대각축소형(臺脚縮小形)의 것이 아

    니고 가야계라 여겨지는 단추모양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정식으로 발굴조사를 거친 후에야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으나 현재 산재하는 토기편만으로 볼 때 이 곳 고분군의 문화는

    낙동강 상류의 고분토기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이 고분군은 울진만과 정명천(正明川)

    유역의 생산물을 배경으로 정착했던 고대 울진 지배층의 공동묘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③ 기성면 마산동(麻山洞) 고분군

      이 고분군은 해안 가까이에 위치하는 북면 덕천리 고분군이나 울진읍 읍남 고분군과는 달

    리 해안에서 좀 떨어진 산간지로서 기성리에서 동해로 유입되는 정명천의 한 지류의 상류

    오지(奧地)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은 지금의 교통편으로 동해 고속도로상에 있는 사동 1리

    학골재〔鶴谷峴〕를 넘어서 마산마을로 가는 계곡 우측 야산에 1군(群)이 분포하고, 또 다

    른 1군은 좀 더 안으로 들어간 마산마을인 삼산((三山) 1리 동편 야산에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입지상으로 볼 때 하천 상류의 좁은 계곡을 따라 들어간 오지에 있고, 가까운 주

    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넓은 평야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봉분은 거의 없고, 노출되어 있는 석곽의 경우 할석(割石)이나 천석(川石)을 이용해서 장

    방형의 석곽을 쌓았으며 개석(蓋石)은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석곽의 크기는

    길이 2m 내외, 폭과 높이는 각각 50cm의 것이 많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토기편 가운데

    고배편(高杯片)은 거의 보이지 않고 호편(壺片)이 많았다. 고배개(高杯蓋)의 꼭지는 덕천리

    의 고분이나 읍남리 고분에서 볼 수 있는 단추형 꼭지이다.

    ④ 죽변 봉평리(鳳坪里) 출토유물

      이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것들이다. 1990년 당시 조사에서는 이

    지역 주변에서 고분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다음의 유물들을 통해 볼 때 이 일대에

    고분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   봉평리 고분출토 유물

      이 외에도 금동환(金銅環) 3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유물들은 대체적인 편년상으로는 6세

    기 중엽 또는 후반에 해당된다고 생각되며, 적어도 이 지역에 시기를 달리하는 수기(數基)

    의 고분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⑤ 평해읍 거일리(巨逸里) 출토유물

      아래 표에 나온 유물은 1980년대 후반에 국립경주박물관에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유물이

    다. 1990년대 조사에서 고분의 존재를 확인하지는 못하였으나 고분이 존재하였던 것은 분

    명하다.

      거일리 고분 출토유물

      이 유물들은 고고학적인 편년상 6세기나 7세기 초가 아니면 통일신라 등 시기적으로 다

    양함을 보이고 있어 동일유구(同一遺構)에서의 일괄유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비록 한

    출토지로 명기되어 있기는 하나 이 지역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시기를 달리하는 다수의 고

    출  토  지 유  물  명 규  격 (㎝) 비고(유물번호)

    죽변면 봉평리 116

    양이부호(兩耳附壺)

    원저단경호(圓底短頸

    壺)

    대부장경호(臺附長頸

    壺)

    무개고배(無蓋高杯)

    고배(高杯)

    대부완(臺附?)

    고배개(高杯蓋)

    고21.5, 구경 17.5

    고28.0, 구경 18.0

    현고 28.5, 현구경18.0

    고 9.3, 구경 11.7

    고 8.2, 구경 9.3

    고 9.0, 구경 16.5

    고 5.5, 구경 11.8

    경주 4532

    경주 4533

    경주 4534

    경주 4535

    경주 4536

    경주 4537

    경주 4538

    출     토      지 유 물 명       규               격(cm) 비고(유물번호)

    평해읍 거일리 83-4 대부호(臺附壺) 고 13.6 구경 8.0 경주 4173

             〃 고배(高杯) 4점

    고 12.3, 구경 11.6, 고 11.7, 구

    경 11.6

    고 12.4, 구경 12.1, 고 12.6, 구

    경 9.4

    경주 4174

             〃 고배개(高杯蓋) 4점

    고 6.2, 구경 13.6, 고 4.9, 구경

    13.2

    고 4.4, 구경 12, 고 4.5, 구경

    12.

    경주 4175

             〃 토기개(土器蓋) 2점고 6   구경 11

    고 4.5  구경 7.3경주 4176

             〃 무개고배(無蓋高杯) 고 6.0  구경 10.0 경주 4230

             〃 토기개(土器蓋) 고 5.1  구경 14.5 경주 4231

             〃 파수부배(把手附杯) 고 12.2 구경 11.5 경주 4294

  • 분이 영조(營造)되었으리라 추측된다.

    (2) 봉 수(烽 燧)

      봉수(烽燧)는 횃불[烽] 과 연기[燧]로서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정보나 소식을 급히 전달

    하는 전근대의 통신수단이다. 우리 나라에서 군사적?정치적 목적의 봉수제(烽燧制)가 기록

    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중기부터 이다. 그리고 고려 의종(毅宗) 때에 비로서 봉수의 격

    식이 정해졌다. 전달수단을 야화(夜火)와 주인(書烟)으로 구분하고 적과 접경하는 변방이나

    해안지방에서 거(炬)의 회수를 정하여 중앙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즉 변경과 해안지방의 주

    민이 평상시 큰 사건없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는 1거를 하고,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게

    되면 2거를 올리고, 적이 침입하면 3거를, 그리고 적과 접전하여 위급하면 4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 이르면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규식을 새로 정하여 제도연변

    (諸道沿邊)에 각 연대(烟臺)를 새로 축조하고 전국에 봉수선로를 확정하는 등 면모를 일신시

    켰다. 그리고 전국의 봉수는 연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내

    지봉수(內地烽燧)로 나누고, 시설과 봉화군의 정원, 처벌규정도 달랐다. 경봉수는 전국의 봉

    수가 집결하는 서울 목멱산(木覓山)의 남산봉수(南山烽燧)를 말하며, 연변봉수는 해륙변경

    (海陸邊境)의 일선(一線)에 설치되는 봉수로서 연대(沿坮)라고도 하는데 임무수행이 가장 어

    려웠다. 내륙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를 총칭하는 것으로, 내륙 각지

    에 설치되어 있었다.

      봉수대의 시설은 횃불과 연기로서 먼 거리까지 통신해야 하기 때문에 후망(?望)에 편리한

    고산(高山)에 위치한다는 불가변적인 자연조건으로 말미암아 산봉(山峰)에 설치되었다. 그리

    고 변방일선(邊方一線)의 연변봉수는 단순히 봉수대로서의 역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침을 당했을 때 자체적으로 응전하고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봉수는 통신기능 뿐만 아니라

    요색적(要塞的)인 시설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세종조(世宗朝)에는 연대를 쌓되 높이

    25척(尺), 둘레 70척, 대하(臺下) 4면(面)의 넓이는 각 30척으로 하였다. 그 바깥에는 깊이

    와 넓이가 각 10척인 해자(亥子)를 파고 다시 그 외주(外周)에 길이 3척의 뾰족한 말뚝 밭

    을 폭 10척이 되도록 설치하였다. 이에 비해 내지봉수는 위험도가 적으므로 연대를 쌓지 않

    고 아궁이〔烟?〕만을 설치하도록 하고, 아주 위험한 곳에만 연대를 쌓도록 하였다. 아궁이

    는 위가 좁고 아래가 크게 네모 또는 둥근 모양으로 만들되 높이는 10척을 넘지 않게 하였

    고, 위험한 짐승이 침범할 우려가 있는 곳에는 담장을 쌓게 하였다.

      육?해변일선에서 서울 남산의 목멱산 봉수대로 전달되는 선로는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으

    나 조선시대는 그 대간(大幹)이 세종조에 획정(劃定)되었고, 그 후 조금의 변동이 있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봉수망을 보면 봉수를 직선봉수(直線烽燧)와 간선봉수(間

    線烽燧)로 나누었다.2) 이상의 5노선 외의 봉수대는 간선봉수로서 직선봉수를 보조하거나 지

    역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갖는다. 현재 울진군 내에서는 아래와 같이 7개소의 봉수대지(烽

    燧臺址)가 확인되고 있다.

  •   울진관내 봉수현황

                         

                                        죽변곶 봉수

      이들 봉수는 모두 해안에 위치하여 연변봉수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륙의

    경우는 봉수대간(烽燧臺間)의 거리가 비교적 긴데 비해서 해안봉수대의 서로간의 거리는 비

    교적 짧다. 또 군내의 연대는 남쪽의 영해(寧海) 대소산(大所山)과 북쪽의 삼척(三陟) 가곡

    산(可谷山)봉수 사이에 설치되어 있어서 연대이면서 간선봉수의 역할을 하였다. 연대의 시

    설은 변방일선의 연대이면서 간선봉수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인지 연변봉수의 시설기준에

    따르지 아니하고 내륙과의 중간 절충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 울진 봉수의 운영체계에

    대해서는 역사편 조선전기의 울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3) 성지(城址)

      기록상으로나 혹은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울진군 내의 성지(城址)는 다음과 같다.3)

      울진관내 성지 현황

    봉    수    명 위         치 비           고

    후리산봉수(厚理山烽燧) 후포면 후포리 남응 영해 대소산,  북응 표산

    표산봉수(表山烽燧) 기성면 봉산리 남응 후리산,  북응 사동산

    사동산봉수(沙銅山烽燧) 기성면 사동리 남응 표산,  북응 전반인산

    전반인산봉수(全反仁山烽燧) 근남면 진복리 남응 사동산,  북응 죽진산

    죽진산봉수(竹津山烽燧) 울진읍 연지리 남응 전반인산,  북응 죽변곶

    죽변곶봉수(竹邊串烽燧) 죽변면 죽변리 남응 죽진산,  북응 항출도산

    항출도산봉수(恒出道山烽燧) 북 면  나곡리 남응 죽변곶,  북응 삼척 가곡산

    번호 성  지  명 위         치 비          고

    1   죽변성(竹邊城) 죽변면 죽변리 성현 토축,  해안방어용

    2 장산성(長山城) 죽변면 후정리 장평토축,  삼국시대(신라),  읍

    성3 산내성(山內城) 죽변면 화성리 성내동 토축,  고려시대,  읍성

  •   위에 열거되어 있는 울진군 내의 성지를 보면 축성(築城)의 목적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거주주체(居住主體)가 군현주민(郡縣住民)의 보호와 행정?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전히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성된 것이다. 전자

    는 읍성(邑城)이 그 대표적인 형태이고, 후자는 산성(山城)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연해지대는 외침(外侵)의 일차적 방어지이므로 불시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하여 평지

    가 아닌 넓은 구릉을 이용한 성곽을 많이 축조하였다. 울진군의 경우도 읍성을 여러 번 옮

    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지(立地)는 모두 방어가 용이한 높은 언덕을 이용하였다. 앞에서

    언급된 성지 가운데 장산성?산내성?고현성?고읍성?고산성?평해읍성?기성읍성 등은 읍성으

    로 축조된 성(城)이고 고모산성?백암산성?왕피성?안일왕성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된 성

    곽이다.4)

    ① 죽변성(죽변면 죽변리 산 3-1 일대)

      죽변성에 관련된 기록은 지지(地誌) 등에는 남아 있지 않고, 군지(郡誌)에 극히 간략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전하는 기록 역시 읍치소(邑治所)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장산성에서 바

    다쪽 왜구의 방어목적으로 수군을 배치한 일종의 군사적인 전초기지의 의미가 강한 수군 주

    둔지로 이용되었다고 판단되며, 봉수(烽燧)의 중계지로서 성이 활용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토성의 잔흔을 거의 확인할 수 없고 성안으로 추정되는 일대는 대나무 밭으로 변해 버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의 제보와 지형을 참조하여 성의 추정선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의 죽변 등대 동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는 자연절벽의 상태다. 절벽의 안쪽으로 회

    곽도(廻郭道)가 마련되어 있고 일부 토성의 잔흔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의 추정선은 해발

    25m의 등고를 쫓아 자연지형대로 돌아가고 있다. 성의 흔적은 남서쪽에 이르러 마을로 들

    어오는 도로에 의해 일단 끊겨지고 다시 서쪽으로 민가의 담을 넘어 북진하고 있다. 성의

    형태는 각 부분의 모를 둥글게 말아들인 말각방형(抹角方形)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성안으

    로는 매우 평탄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북동쪽으로는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성 안쪽으로 토

    단(土壇)을 높게 쌓아 올렸으며, 서쪽의 민가부분에는 석축(石築)의 일부도 확인할 수 있으

    4 고현성(古縣城) 울진읍 현내동 토축,  고려시대,  읍성

    5 고읍성(古邑城) 울진읍 읍내리 토축,  고려말,   읍성

    6    고산성(古山城) 울진읍 고성리 토축,  조선초,   읍성

    7    안일왕성(安逸王城) 서면 소광리 세덕산 상 석축, 둘레길이753척, 산성

    8 왕피성(王避城) 서면  옥피리 석축,  산성

    9 성산성(城山城) 근남면 구산리 성산동 석축

    10  기성읍성(箕城邑城) 기성면 척산리 토축,  읍성

    11   평해읍성(平海邑城) 평해읍 평해리 석축,  읍성

    12 백암산성(白岩山城) 온정면 조금리 석축,  산성

    13 고모산성(姑母山城) 온정면 조금리 석축,  산성

    14  월송만호진(月松萬戶鎭) 평해읍 월송리  

    울진포영(蔚珍浦營) 울진읍 연지리  

  • 나 본 죽변성과 관련 있는 유지(遺址)인지는 확실치 않다. 추정되는 성의 둘레는 780m이며,

    성안의 면적은 30,060㎡이다.

    ② 장산성(죽변면 후정 1리 산 45 일대)

      죽변면(竹邊面) 후정(後亭) 1리 서편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이 ‘장평들’로서 이곳 들판 일

    대는 삼국시대 전후의 ‘우진읍성(于珍邑城)’ 구지(舊址)로 전해져 오는 곳이다. 신라말 국력

    이 쇠잔해졌을 때 왜적이 죽변항의 방비가 소홀함을 보고 죽변항을 거쳐 이 성으로 내침하

    여 함락시켰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로 넘어가면서 읍치소(邑治所)를 울진읍 고현성(古縣城)

    으로 이읍(移邑)하였고, 이곳 장산성(長山城)을 수축치 못하다가 지금은 대부분 농경지로 변

    하여 ‘장평들’이 형성되게 되었다. ‘장평들’은 현재의 후정 1리 ‘신마재’마을 남쪽이며, ‘장

    평들’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곧게 뻗은 7번 국도가 신설되어 있다. ‘장평들’의 서쪽으로는 후

    정 2리에 속하며 ‘막살골’을 감싸안고 반원상의 능선이 돌아가고 있다. 능선의 남서쪽 ‘작은

    소정골’에는 관아지로 전해져 오는 구지(舊址)가 있다.

      죽변과 삼척을 연결하는 구 7번 국도변에 후정리 ‘신마재’마을이 있다. ‘신마재’에서 남쪽

    으로 난 작은 농로로 접어들면 성황당이 길 옆에 있고 이 일대에 토성의 흔적이 극히 일부

    남아 있었다. 토성벽(土城壁)의 폭은 240cm, 현고(現高)는 100cm에 불과할 정도로 삭평(削

    平) 및 유실이 많이 되어 있었다. 토성의 흔적은 남서쪽을 향하여 원만하게 흘러내리고 있

    는데 오랜 경작 등에 의해 대부분 논밭으로 변해 버리고 야트막한 토단(土壇)의 흔적만이

    어렵게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그 토흔(土痕)을 어렵게 확인할 수 있을 뿐 확연하지는 않다. 다만 성세로 보아

    2개의 성벽선(城壁線)를 비정할 수 있다. 하나는 해발 75.4m 고지에서 북쪽을 향하여 뻗어

    내린 산록을 타고 흘러내리는 선이고, 또 다른 하나는 75.4m 고지에서 계속 서진(西進)하여

    90.1m 고지와 82.6m 고지를 돌아 다시 ‘신매리’로 돌아오는 선이다. 그 중에서 90.1m 고

    지의 서남쪽으로 개설된 산로를 따라 ‘작은소정골’에 접어들면 옛날 현터로 비정되는 아늑

    한 분지가 나타난다. 현재 이곳에는 농가 3채가 있으며 이들 현터 안은 동?

    서?북쪽의 능선에 의해 양팔로 감싸안긴 아늑한 지형을 하고 있다. 현터를 감싸고 있는 능

    선은 자연지형에다 인공적인 토축을 보축(補築)하였으며, 토축의 상단 폭은 340cm, 현터

    안쪽의 높이는 240cm, 현터 밖의 높이는 150cm이다.

      성의 총 길이는 2,200m, 성안 면적은 약 389,950㎡에 이르는 장성(長城)으로서, 현터의

    구지(舊址)는 그나마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데 길이 약 520m이고, 현터 안의 면적은 약

    24,500㎡이다. 현터 내에는 건물지가 있었다고 판단되며, 성안에는 3개의 아주 큰 못이 있

    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1개의 못만이 있을 뿐이다. 현터로 전해지는 소정동 일대는 고려때

    현령(縣令)이 난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관아(官衙)와 창고를 짓고 한동안 현민(縣民)을 다스

    렸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                               

      산내성 토성벽

    ③ 산내성(죽변면 화성 4리 415 일대)

      죽변면 죽변항에서 서쪽으로 개설된 울진과 죽변을 연결하는 920번 도로를 따라 3.9㎞

    가다보면 화성(花城) 1리 ‘성내(城內)’마을이 나온다. 다시 ‘성내’마을에서 길을 따라 400여

    미터 가다보면 길 옆에 화성초등학교가 있다. 화성초교를 감싸고 있는 야트막한 구릉성 분

    지가 산내성(山內城)이다. 산내성 안의 ‘성안’마을에는 8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토성의 북쪽면이 920번 도로 개설에 의해 일부 망실(亡失)되었을 뿐이고 기타 토성의 흔적

    은 아주 잘 남아 있다. 920번 지방도로에서 성안 남쪽으로 개설된 소로를 따라 200여 미터

    내려오면 3가구의 농가가 있다.5) 이 농가의 동쪽에 성벽이 남아 있다. 성벽은 토석혼축(土

    石混築)이나 흙을 더 많이 이용하였고 군데군데 돌로서 보축(補築)하였다. 토성은 오랜 세월

    을 견뎌 오면서 많이 유실되었지만 토성의 상면 폭 230m, 성 안쪽 높이 200cm, 성 바깥쪽

    높이 80cm 정도의 흔적이 완연하게 잔존하고 있다.

      성의 길이는 도로에 의해 잘려 나간 부분과 남쪽의 무성(無城)구간까지 포함하여 약

    1,000m〔현존부 624m, 망실부 140m〕이며 성안 면적은 63,000㎡에 이르는 매우 아늑하

    고 안정적인 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와편이 채집되었으나 시대를 가늠할 수 없

    는 무문(無文)의 평와편(平瓦片)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중 기와 내?외면에 문양이 베풀어진

    2점의 와편과 성안에서 채집된 3~4점의 자기편이 있다. 사료상 고려초에 축조된 성지였다

    고 하나 고려초와 관련있는 유물의 채집은 성안 전체가 경작지여서 확인할 수 없다.

    ④ 고현성(울진읍 연지 1리 산 67 일대)

      울진읍에서 동쪽 해변을 향해 약 1.4㎞ 동진하면 동해에 인접하여 있는 연지(蓮池) 1리

    ‘현내(縣內)’에 이르게 된다. 마을 지명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곳은 울진현의 옛 치소(治所)

    로서 기록에 의하면 ‘산내성(山內城)’이 폐지되고 이곳으로 현을 옮겼다고 되어 있다. ‘고현

    성(古縣城)’의 구지(舊址)로 추정되는 ‘현내’ 마을의 북쪽 능선 일대로서 바다로 벌려진 삼태

    기모양의 능선 상에 성지(城址)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이곳 ‘일암’바위에서 북서쪽의 능선 척추부를 따라 올라가면 성벽의 상면 폭이 380cm,

    성 안쪽 높이 300cm, 성밖 높이 550cm의 토루(土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암’바

    위에서 해발 42m 지점까지의 거리는 약 50m로서 이 구간의 토성 흔적은 능선의 척추부를

    따라 지형?지세대로 형성되어 있다. 해발 42m 지점부터 서쪽으로 자연스럽게 반원을 그리

    며 해발 60m 정상을 향해 성이 돌아가고 있는데, 일부 구간에는 석축의 흔적도 발견되나

    대부분 토축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판단되어 진다. 이들 토성벽의 밖으로는 높이

    140cm, 폭 370cm의 외부 회곽도(廻郭道)가 1단 턱을 지고 마련되어 있다.

  •   이곳 60m 지점부터 능선은 다시 낮아지기 시작하는데 토성은 남쪽을 향해 내려오다가 연

    지리(蓮池里) 57~1번지인 수답(水畓) 일대에 이르러 높이 4m의 정연한 토성벽의 흔적이

    나타난다. 일부 구간의 유실(遺失)된 토성벽과 그 추정 연장선을 연결하여 보면 고현성의

    총 길이는 약 400m이며, 성안의 면적은 26,950㎡이다. 성과 관련있는 문지(門址)?망루(望

    樓) 등의 유지(遺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지형과 지세로 보아 현재 ‘현내’마을을 관통하

    여 ‘짐승들’을 가로지르는 요형(凹型)의 중심부에 주 출입구를 두었다고 판단된다. 성내 ?외

    에서 고현성과 관련이 있는 특기할 만한 유물의 채집은 없었다. 지금은 개간에 의해 대부분

    평탄하게 들판이 펼쳐져 있어 우거지고 험함이 없고 다만 그 이름만이 전해져 올 뿐이다.

    ⑤ 고읍성(울진읍 읍내리 산 653 일대)

      고읍성으로 비정되는 곳은 현재의 울진초등학교 서쪽 능선 일대로서, 고현성에서 서쪽으

    로 직선거리 약 1.5㎞ 지점에 해당한다. 현재 성의 남쪽자락에는 울진향교가 있고 향교를

    돌아 북동쪽으로 난 산로(山路)를 따라 올라가면 해발 57.8m 지점에 충혼탑이 건립되어져

    있으며, 등산로 일부분은 고읍성의 성벽 일부와 중복되어 있다. 충혼탑을 지나 북쪽의 약간

    평탄한 산 정상에는 ‘울진 상수도수원지’가 설치되어 있어 성의 연장선을 잃어버리고 있어

    성벽의 흔적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남서쪽은 남대천(南大川)에 연접하고, 북쪽과 서쪽은 반원형의 형

    태를 가진 야트막한 능선에 둘러 쌓여 있는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 향교?충혼탑?상수도

    수원지?소라아파트 등의 건립으로 인하여 원형의 상당부분이 훼손?망실되었다고 판단되며,

    읍치의 중심부는 현재의 울진초등학교 일대로 추정된다.

      충혼탑의 북편 공터 상에서 집중적으로 와편이 채집되었는데 이 일대에 산성과 관련있는

    건물지가 남아 있었다고 판단된다. 채집되는 와편은 대부분 어골문계(魚骨文系)의 평와(平

    瓦)들로서 명문와나 막새류가 없어 정확한 시대를 편년할 수는 없지만, 고려~조선에 걸친

    와류(瓦類)로 생각된다. 와편이 집중적으로 노출되는 이곳은 토성벽 연장선상에서는 다소

    평탄한 곳이어서 건물이 입지하기 좋은 지형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울진읍내에서는 가장 높

    은 해발을 가지고 있고, 가까운 거리여서 이곳을 수원지로 선정하였다고 보여지나, 여러 문

    헌상 이미 이 일대가 고읍성의 구지(舊址)로 전해져 오고 있던 터였다.

      토성의 현 잔존길이는 550m이며 성안의 면적은 50,975㎡이다. 성의 형태는 울진군내 토

    읍성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반원상의 구릉을 이용한 삼태기형이다. 읍성의 서쪽은 남대천

    에 접한 절벽을 이용한 자연지형이며, 토성벽은 능선의 척추부를 따라 축조하였는데 토석혼

    축성(土石混築城)으로 판단된다. 일부 구간에서는 내부 회곽도를 마련해 놓았고, 성벽 상층

    에서 와편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성과 관련된 건물지가 남아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

    다.

      고읍성의 중심지였던 옥숙리(玉淑里)는 현재의 울진초등학교와 향교 일대이다. 고을 원의

    관사와 문사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그 앞으로 흐르는 시내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렀다

    고 하여 ‘옥숙’?‘옥싯골’?‘옥계(玉溪)’라고 하였다. 읍성의 토성벽이 돌아가고 있는 산을 ‘팔

    도산’이라 하고, 산이 높아 먼 곳을 바라 볼 수 있어서 ‘망향대’라고도 하며, 달맞이 하였다

    고 하여 ‘월송대(月松臺)’라는 명칭도 지니고 있다. 이 월송대를 해방 후에 월송공원으로 개

    발하였고, 산 정상에 광복기념비를 건립하여 민족정기를 배양하는 장소로 이용하던 중인

    1978년 선열의 유덕을 추모하는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 ⑥ 고산성(울진읍 고성리 산 3-2 일대)

      울진읍 소재지에서 남대천을 따라 북측으로 약 1.5㎞ 정도 거슬러 올라가다 산성교를 지

    나 ‘불목이골’로 접어 들어가면 해발 100m 정도의 산정에 마름모꼴의 산 능선이 연결되

      고산성 평면도6)

     

    어 있고,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나, 1992년경에 북쪽에서 산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

    는 포장도로를 개설하였다. 편리를 위해 개설한 도로인데 그 덕분에 북쪽 성벽의 일부가 훼

    손되었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오각형에 가까운 다각형이며, 해발 136.4m, 90.2m, 92.8m의

    3개의 봉우리를 감싸안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남대천에 연접하고 있어 자연지형을 그대

      예전에는 ‘성밑’마을에서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나, 1992년경에 북쪽에서 산성 안으

    로 진입할 수 있는 포장도로를 개설하였다. 편리를 위해 개설한 도로인데 그 덕분에 북쪽

    성벽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오각형에 가까운 다각형이며, 해발 136.4m,

    90.2m, 92.8m의 3개의 봉우리를 감싸안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남대천에 연접하고 있어 자

    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방어상의 편리를 겸하고 있다. 성안은 매우 평탄하며 성내에 우

    물이 있어 유사시 장기간 입보항쟁(入堡抗爭)할 수 있는  군사적인 측면도 갖추고 있다. 남

    쪽으로는 두 개의 능선이 마주하여 모여 들어와 요형(凹型)의 형태를 하고 있어 ‘성밑’마을

    로 연결되도록 트여져 있는 형상이다.

  •   고산성의 현존 길이는 약 1,150m, 망실부는 50m 이며 성안의 면적은 약 3만평이다.

    1997년의 조사에서 1개소의 유존(遺存)하는 문지인 서문지와 2개소의 추정 문지인 북문지?

    남문지가 발견되었으며, 2개의 망루지와 1개의 장대(將臺), 1개소의 치성(雉城)도 조사되었

    다. 성의 평면형태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3개의 봉우리를        

                                                  안일왕산성 성벽 잔존 상태

    경작에 의해 별도의 건물지 유구가 지표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으나, 다수의 와편이 채집되

    고 있어 주요 건물지가 지하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토

    기편 일부도 채집되고 있어 산성으로 이용되기 이전부터 생활하던 원주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⑦ 안일왕산성(서면 소광리 세덕산 일대)

      불영사계곡의 불영사를 뒤로 하고 10여분 가면 세덕산(細德山) 아래에 서면 소재지인 하

    원리(下院里) ‘수평’마을에 이른다. 이 곳에서 서진하면 약 500m 거리에 있는 ‘광천교’에서

    북쪽의 비포장 산길을 따라 세덕산을 오른쪽에 두고 계속 나아가면 약 3.5㎞ 거리에 ‘솔평

    지〔松坪地〕’마을이 있고 ‘솔평지’를 거쳐 몇 개의 계곡을 가로질러 올라가면 산은 점점 깊

    어지고 계곡의 수량도 많아진다. ‘솔평지’에서 북쪽 1.2㎞지점의 계곡가에는 바위를 철책으

    로 둘러 놓았다. 이곳은 ‘장군터’라 불리우는 곳으로서 몇 년 전에 바위에서 안일왕산성과

    관련된 음각된 명문7)이 발견되어 학계의 깊은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장군터’의 명문 바위를 거쳐 다시 북쪽으로 2㎞ 쯤 올라가면 ‘대광천’이 있다. 이곳에서

    북쪽 ‘십이령(十二嶺)’을 향해 1시간 40여분 걸어서 올라가면 얼마 전에 산불이 나서 온 산

    을 까맣게 태워버린 일대가 나타난다. 여기서 한 개의 고개를 넘으면 석축의 돌무지가 눈앞

    에 나타나는데 이 곳이 안일왕산성이다. 성 위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멀리 동해 바다가 나

    타나고 이 일대가 능히 사방으로 조망(眺望)할 수 있는 천혜의 산성지임을 알 수 있다.

      일부 성벽의 유실을 감안하면  안일왕산성의 둘레는 약 1.1㎞이다.  성벽은 편축법을 이

    용하여 축조한 토석혼축의 성벽과 협축법을 이용하여 축조한 석축성이 혼재하고 있으며 2

    개의 망루지와 2개의 문지가 확인되었다.  성안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수풀이 너무 우

    거져 확인할 수 없었다.  성내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산재하고 있는 곳은 서문지 부근이다.

    이 일대에 다수의 와편이 나뒹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문지의 상면에는 약식적이지만 문루

  • 를 가진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와편 중에서 명문와는 지표 채집 감싸안고 있

    는 다각형의 형태이며 성안은 평탄하고 아늑하여 입보항쟁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성안에는 현재 1개의 우물지가 남아 있는데, 내직경(內直徑)이 87cm이고 외직경(外

    直徑)이 130cm로서 석축이며, 수출구(水出口)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수심은 현재 90cm로

    서 수량도 풍부하고 맑아, 현재 성안 농민이 그대로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성안에서는 오

    랜되지 않았고, 또한 막새류나 등무늬가 선명히 베풀어진 평와류(平瓦類)도 없어 정확한 연

    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와편으로 판단된다.  아마 이들 기와는 임시 피난처인

    안일왕산성을 위해 이 일대의 어느 곳에서 급히 조와(造瓦)된 중하품(中下品)의 것들로 생각

    된다.

      성내에서 채집된 유물 중 극히 작은 편들이지만 삼국시대에서 고려초에 걸친 회청색 경질

    (硬質)의 토기편들이 지표상에서 유리되어 떠돌아 다니고 있다. 이들 채집된 편들이 극히

    소수여서 기형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 시기에 이미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의미해 주는 것이다. 즉 안일왕산성의 초축(初築) 시기를 삼국시대까지 올려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지만 확실한 근거의 제시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채집품들이 있어야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⑧ 왕피산성(서면 왕피리 641 일대)

      울진에 왕피산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최근의 읍지나 군지에 “왕피성(王

    避城)은 석축성이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 형태가 불분명하다. 다만 부근의 마을 이름이

    당시 군영(軍營)의 부서단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아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전란을 피하여 군병을 인솔하고 안동과 영양을 거쳐 내왕하였는데

    병위(兵衛)?포전(飽田)?거리고(巨里庫)?한천(寒川) 등의 마을이 군영의 부서단지와 동일함을

    알 수 있고, 이곳을 흐르는 하천 이름도 왕피천(王避川)이라 하여 “피난의 슬픔을 말없이

    안고 흘러내린다” 라고 기록된 자료가 고작이다. 이 곳에 오래 거주하여 통고산 일대는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할 정도의 주민들도 왕의 피난처였다는 사실은 구전(口傳)으로 들어 알고

    있었으나 석성(石城)이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새터’에서 ‘정토’?‘곡내(谷內)’를 구비 돌아오는 동안 2채의 민가만이 눈에 뛸 뿐이다. 해

    발 466m 고지의 동쪽은 ‘톱거리’로 향하고 남쪽은 ‘거리고(巨里庫)’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

    다. 우선 왕피천을 따라 ‘톱거리’로 향하면 이때부터 강을 끼고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이 여

    기저기 모여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렇게 깊고 깊은 오지에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

    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형이 있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들 마을들은

    최근에 다시 형성된 마을로서 왕피성과 관련있는 임광?속사?병위?거리고 등의 옛 마을터에

    뜻있는 사람끼리 무리를 지어 새롭게 마을을 형성하여 삶을 개척하고 있다.

      왕피성의 군영지(軍營址)와 관련이 있는 마을들은 개간 등에 의해 옛 모습은 아무 곳에서

    도 찾을 수 없고 다만 구전(口傳)으로만 그 전설을 간직한 채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톱거리’에서 남쪽으로 갈라진 왕피분교(王避分校)가 있는 ‘거리고(巨里庫)’로 들어가

    면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리고에 있는 왕피분교 북쪽의 산기슭

    에 김재복정효각(金在福旌孝閣)이 있다. 정효각은 단칸의 맛배지붕 와가(瓦家)이며 1803년

    건립되었다. 이 정효각 북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이 있고 이 구릉너머는 왕피천이 흐르

    는 깎아지른 듯한 계곡이 있다. 왕피성은 어효각 북쪽의 구릉성산지 척추부를 따라 가며 일

  • 부 잔존하고 있다.

      성벽은 토석혼축으로 성의 상면 폭은 380cm, 높이는 약 2~2.5m이지만 대부분 망실되어

    총 길이 약 330m 중 약 60m 정도만 잔존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

    면 토루(土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잔존상태가 극히 불량하다. 성벽 상면에서 성

    안을 바라보면 양팔로 감싸안은 아늑한 지형을 하고 있어 군사적인 방어지 혹은 피난처로서

    최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는 토석혼축의 성벽이 있고 성벽 너머는 절벽이며

    그 절벽 아래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있다. 성의 동서로는 자연적으로 돌출한 구릉성 산지가

    성과 연이어져 자연 방책(防柵)을 만들고 있으며, 성안은 매우 평탄하여 진(陣)을 치고 한동

    안 농경을 경영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가 있다. 주 출입구는 성안 마을의 서남쪽인데 일찌

    감치 ‘톱거리’일대에서 적을 일단 차단하거나 기습할 수 있는 최적의 방어요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피성과 관련있는 여러 마을에서 특기할 만한 유물의 채집은 없었다. 개간 및 형질 변경

    등의 이유가 가장 크다고 보여진다. 강안(江岸)에 마을들이 모여 살았던 관계로 범람 및 산

    사태에 따라 유적 및 유구 등의 유실도 상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피성으로 비정되는

    성벽의 일부와 성안마을로 추정되는 유구가 있는 거리고 일대에서도 특이할 만한 와편 등의

    채집은 없고 다만 조선시대 이후의 것으로 판단되는 생활자기편들이 표토상에서 유리되어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⑨ 성산성(근남면 구산리 산 54 일대)

      울진읍에서 남쪽으로 개설된 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근남면과 원남면 경계의 구산교에

    서 서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구산리로 접어들면 넓게 펼쳐진 ‘뱃들’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

    봉산이 우뚝 솟아 있다. ‘뱃들’의 서편으로는 중등산으로 불리는 해발 118m인 구릉성 산지

    가 요형(凹型)으로 솟아 있다. 중등산의 동쪽 산기슭은 구산 2리로서 마을에서는 ‘외성산동’

    혹은 ‘바깥잘미’로 부르고 있는데 80여 가구가 모여 있다. ‘외성산동’에서 중등산을 돌아 북

    서로 난 길로 나아가면 ‘안늪들’로 불리는 들판이 있다. 북쪽의 신봉산 기슭은 구산 4리로

    서 마을에서는 ‘내성산동’ 혹은 ‘안잘미’로 부르는데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들 2개 마을

    의 서쪽으로는 왕피천이 북류(北流)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해발 437m의 남수산이 가로막

    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이곳은 천혜의 요새로 보인다. 즉 동쪽으로는 남수산과 신봉산의 줄

    기가 서로 엇갈리게 마을의 입구를 지키고 있고 북쪽의 신봉산, 남쪽의 남수산과 서쪽의 왕

    피천은 자연적으로 이 마을을 보호하는 지세이다.

      이 성산성(城山城)은 문헌의 기록이나 마을주민의 탐문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산성이

    다. 다만 현존하는 마을명인 ‘외성산동’?‘내성산동’을 근거로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을 가

    진 성지(城址)로 판단되며, 내성산을 감싸안고 있는 신봉산과 외성산을 휘어 감고있는 중등

    산에서 성터 흔적의 일부를 추정할 수 있다.

      성의 잔존상태가 극히 미흡하여 축조상태와 구조?시기 등을 가늠하기 어려우나, 지형의

    형국을 이용하여 살펴보면 외성의 총 길이는 약 1,130m이며, 내성의 총 길이는 약 1,470m

    에 이른다. 외성의 각 끝 지점을 경계로 성안 마을의 형국은 2개의 넓은 들인 ‘두문내들’과

    ‘안늪들’이 있고 1개의 실개천이 흐르며, ‘내성산동’에 속하는 취락이 모여 있는데, 이들의

    성안 총 면적은 약 603,200㎡이다.

      지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는 풍부한 수량의 강물이 흐르

  • 며, 성안에는 넓고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어 성지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생

    활하기 편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을 주민 대

    부분은 그냥 이 마을 어딘가에 성이 있었다고만 전해지고 있을 뿐 위치나 규모에 대해서는

    본 바도 전해들은 바도 없다고 한다. 다만 성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중등산 일대에서 장

    군의 투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곳이 산성과 같은 자연스러운 주변 지형에서 기

    인한 명칭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지 않나 의구심이 든다.

    ⑩ 기성읍성(기성면 척산리 산 52 일대)

    동해 바닷가를 달리는 7번 국도를 따라 영덕에서 울진을 향해 가다 보면 기성면 척산리에

    이른다. 서쪽에서 동해로 흐르는 ‘정명천(正明川)’을 가로지르는 기성교를 지나면 곧 바로

    나타나는 첫 동네가 척산리의 ‘척산(尺山)’마을로, 동해바닷가에서 서쪽으로 800m의 거리에

    불과한 해안읍성(海岸邑城)이다. 이 읍성은 ‘척산’마을을 서?북?동쪽에서 마치 양팔로 감싸

    안은 것과 같은 지형인데, 동쪽으로는 ‘기성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정명천이

    흘러가고 있다. 북쪽은 또 하나의 돌출된 능선과 연이어져 있고 북동쪽에는 기성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남쪽의 평해읍성(平海邑城)과는 7.5㎞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척산마을을 삼태기형태로 감싸안고 있는 반원상의 능선이 있는데, 능선 척추부를 따라 잔

    존하고 있는 토성의 유지(遺址)가 기성읍지(箕城邑城)이다. 성의 현존 길이는 약 700m이며,

    성안의 면적은 52,000㎡이다. 성안에 ‘현터’로 전해져 오는 구지(舊址)가 있으나, 지금은 대

    밭이 무성하여 별도의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만 그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성읍성과

    관련된 전설은 별로 전해지고 있지 않다. 평해의 구호(舊?)는 기성이며, 기성현(箕城縣)의

    ‘현터’가 성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대나무가 너무 빽빽하여 구지를 확인할 수

    없다.

    ⑪ 평해읍성 (평해읍 평해리 922 일대)

      평해 읍내의 자연부락 지명 중 ‘상성리(上城里)’?‘하성리(下城里)’?‘성안’ 등의 지명이 보

    이고 있어 이 일대에 성(城)과 관련있는 유지(遺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해읍내를

    가로질러 평해 읍사무소를 중심으로 서편의 농협창고와 동편의 평해향교를 감싸안고 있는

    반원형의 구릉이 있다. 읍성의 평면형태는 울진군 내의 여러 읍성에서 볼 수 있는 앞쪽이

    터진 요형(凹形)의 삼태기 형태를 하고 있는데, 군내에서 조사?확인된 여러 읍성지(邑城址)

    중에서 유존(遺存) 상태가 가장 양호한 편이다.

      읍사무소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긴 타원형을 이룬 평산성(平山城)이다. 남쪽으로는 넒

    은 ‘평해들’이 펼쳐져 있고 서에서 동으로 관류하여 흐르는 대명천이 있다. 읍성은 농협창고

    서편에서 시작하여 향교 담을 거쳐 평해 2리 900-9번지에서 일단 끝나게 되고, 나머지 읍

    성의 연장선은 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래도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벽은 다른 읍성지나 산성지에 비하여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잔존 길이는 약 810m

    이며, 성안의 면적은 약 55,350㎡이다.

      당시 동헌의 주초석 위에 그대로 현재의 가옥을 올렸다 하여 주초석의 주간(柱間) 거리를

    계측하였다. 건물은 정남향이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주간(柱間) 거리는 정면 칸

    이 서쪽에서부터 291cm?291cm?345cm?306cm이며, 측면 칸은 남쪽에 있는데

    241cm?246cm이다. 주초석은 원형의 돌출된 형식으로 원주(圓柱)를 떠받게끔 되어 있는데

    직경 44cm, 높이 13cm이다. 지표조사에서 선사시대의 유물 편은 채집되지 않았으나 삼국

  • 시대의 토기편 들만 일부 확인되고 있어 더 많은 시간을 두고 정밀하게 조사하면 기성읍성

    과 같이 청동기시대 전후의 유물편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⑫ 백암산성(온정면 조금리 백암산 일대)

      ‘제2온정교’에서 서쪽으로 비포장의 산길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20여가구가 모여 사는

    ‘양냄이’마을이 나온다.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의 백암산(白巖山) 정상을 향하여 가파른 산길

    을 따라 올라가면 1시간 30여분 거리의 산 중턱에 석성(石城)의 유지가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백암산성(白巖山城)이다. 이 산성은 울진군 내에서 가장 잘 남은 석성지

               

      백암산성 성벽

    (石城址)로서 많은 향토사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산성은 평해군의 서 20~40리에 있으며, 성의 높이는 3~5척이고 둘레는 591보에 해

    당하는 2,560척이며 돌로 쌓았다. 성내에는 3개의 정천(井泉)이 있었고, 내성(內城)의 총 길

    이는 약 1.4㎞였다. 성의 초입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원만하게 퍼진 장방형 석축(石築) 유

    구(遺構)가 있다. 이 구조물은 본성(本城)의 외성(外城)으로 본성으로 올라오는 적들을 일단

    제지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주 출입구인 동쪽의 성체를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축조된

    것 같다. 본성의 동쪽에는 잘 축조된 성벽(城壁)이 남아 있다. 이곳을 시작점으로 동쪽의 성

    벽 즉, 주 왕래를 하였다고 보이는 이 일대는 백암산성지에서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부

    분이다.

      내성은 편축법과 협축법을 구간마다 지형에 맞추어 축조한 석성으로 4개의 문지와 2개소

    의 추정 망루지, 1개소의 추정 수구문지를 갖추고 있는 포곡식(包谷式山城)이다. 성안으로는

    그리 평탄한 대지가 없어 유사시만 인근 주민을 대피시켜 입보농성(入堡籠城)할 수 있는 순

    수한 군사적인 목적의 성이다. 본성의 동벽에서 동쪽으로 길게 돌출한 다소 완만한 능선이

    있다. 동벽의 북쪽과 남쪽에 연이어진 능선을 따라 석축의 외성이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대부분 유실되어 버리고 외성의 북쪽은 성체에서 무너진 성돌이 길게 능선을 따라 퇴적되어

    있어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외성의 길이는 타원형으로 장축 118m이며, 단

    축은 30m로서 총 길이는 260m에 이른다. 따라서 성의 총 길이는 내성이 약 1,200m, 외성

    이 약 260m이며, 내성의 면적은 약 76,370㎡이다.

    ⑬ 고모산성(온정면 조금리 백암산 일대)

      제2온정교에서 서쪽의 ‘양냄이’마을로 들어가면 백암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계속하여

  • 비포장길을 4㎞ 가다보면 온정면 조금리(操琴里)의 ‘하조금’에 이르게 된다. 마을에서 서쪽

    으로 난 산로를 따라 1.7㎞까지는 차량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데 이 곳에는 아직 석회석 광

    산이 운영되고 있다. 석회석 광산에 일단 차량을 멈추고 남서쪽의 개울을 건너면 일정하게

    폭을 가진 다소 평탄한 산길이 있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광산으로 가는 길이였다고 한

    다. 석회석 광산에서 40여분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는 폭포가 있는 ‘금곡’이라는 계곡이 있

    고, 북서쪽으로는 멀리 고모산성이 보인다. 이쯤에서 ‘금곡’을 건너 조금 가파른 산길로 30

    여분 정도의 오르막 길에  석성이 무너진 유지(遺址)가 있다. 이곳에서 정북쪽으로는 백암

    산성이 있고 5°정도 서쪽 방향에 백암산이 있으며 서쪽에는 영양군 수비면 일대의 산악이

    모두 조망될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하조금’에서 광산길을 거쳐 백수산(柏樹山)으로 들어가면 성의 초입에 바로 문지

    가 있다. 서쪽으로 트여져 있어 서문지(西門址)라고 명명할 수 있는데 문지 아래에는

    60cm×50cm 크기의 문둔테석이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문둔테석 상면에는 직경 11cm, 깊

    이 6cm의 공이 뚫여 있다. 이는 문비(門扉)의 문둔테 구멍으로 추정된다. 문비를 삽입하였

    던 두 개의 석공간(石孔間)의 거리가 165cm인데, 양쪽 다 구멍이 뚫려 있어 2개의 문을 달

    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지(門址) 좌우로는 석 성벽에 연이어 장방형의 적석단(積石壇)이

    무너진 채로 있는데 문지를 구축하였던 육축부(陸築部)로 판단된다. 북측의 육축부는 단축

    210cm, 장축 400cm, 현고(現高) 180cm이며, 남측의 육축부는 단축 330cm, 장축 442cm,

    현고 150cm이다.

      문지에서 남쪽으로 연이어진 성벽이 있다. 이 성벽은 내탁법(內託法)을 이용하여 축조하

    였으며, 성 밖으로는 경사가 급한 형국으로 외부의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성 안쪽으로는 폭 3~4m의 내부회곽도가 마련되어 있다. 망루지에서 성 밖으로는 매우 급

    한 경사의 지형을 하고 있고 그 아래로는 ‘하조금’마을이 있으며 그 경사가 매우 급하다. 따

    라서 이 산성은 북쪽으로 직선거리 4㎞ 지점에 있는 백암산성의 전초기지로서 모성(母城)인

    백암산성의 자성(子城) 역할이 더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고모산성 정상에서 관측하여

    동쪽의 적군을 신속히 모성인 백암산성에 연락을 취한다던가 본성과 연계하여 주성(主城)인

    백암산성을 공격하는 적들을 사이에서 협공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형과 지세를 지니고 있는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 내의 서문지 주위에 다수의 와편(瓦片)이 산재하고 있다. 이는 서문지 상부로 문루(門

    樓)를 얹었거나 성문을 지키는 간단한 초소용 건물지가 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와편은 시대를 알 수 있는 명문와(銘文瓦)나 등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와류(瓦類)가

    아닌 무문(無文)의 종류들이어서 제작시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이전의

    것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성의 초축(初築) 연대를 추정하여 볼 수 있는 조선 선조(宣祖)

    30년 이후 판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이 산성을 ‘할미산성’이라 고도 부른다.

    ⑭ 월송만호진(평해읍 월송리 303~3 일대)과 울진포영(蔚珍浦營)

      평해읍에서 7번국도를 따라 울진읍 쪽으로 약 2㎞ 거리에 평해읍 월송리(月松里) ‘달효

    (達孝)’마을이 있다. 달효마을 동편으로 개설되어 있는 포장된 소로를 따라가면 신혼예식장

    이 있는데, 이 신혼예식장 일대가 조선시대의 수군(水軍) 병영진(兵營鎭)이었던 월송만호진

    (越松萬戶鎭)의 구지(舊址)이다. 월송진에서 동쪽 해안까지는 불과 500m 미만의 거리이며,

    평해읍성은 남쪽으로 2㎞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예식장건물이 월송만호 터의 대

  • 부분에 자리해 있고 성벽 바깥으로는 몇 집의 가옥이 성벽에 붙어 있어 원래의 형태를 구하

    여 볼 수 없는 실정이나 예식장의 식당 동편으로 옛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20년 전 신혼예식장 신축시 대부분의 성벽이 유실되었고 지금은 예식장의 식당 동쪽에

    일부 성벽이 유존(遺存)하고 있다. 성벽은 매우 잘 다듬은 돌로서 현재 4~5단 쌓여져 있는

    데 장방형(長方形)의 석재 1변의 길이는 80cm 전후이며, 높이는 50cm 전후이다. 석성벽은

    협축법으로 축조하였는데 상면 폭은 2m이며 성벽의 잔존하는 높이는 1.8m이다. 현존하는

    성벽의 길이는 불과 30m 밖에 되지 않으며 성 밖으로는 3채의 민가가 성벽에 붙어 있다.

    현존하는 성벽의 상태가 극히 일부분이어서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성안에는 5가구가 살고 있었다. ‘월송만호(越松萬戶)’라는 현판을 단

    아주 오래된 건물지가 303-9번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성은 아주 튼튼한 돌로서 높게 쌓

    여 있었다. 출입은 613-9번지 일대인 남쪽으로 난 성문으로 드나들었던 것 같다. 성문 위

    에도 기와집이 올라가 있었다. 옛날에는 성 앞까지 물이 들어 왔다고 한다. 성의 동남쪽에

    연접하여 큰 호수가 있었다. 성 앞을 지나는 제방의 강 물줄기는 곧바로 바다로 연결되었으

    며, 지금의 예식장 자리 서편에 연접하여 원래의 ‘월송정(越松亭)’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은 월송정을 보다 해변에 가까운 362-6 솔밭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성벽은 20년 전 예식

    장 신축시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일부 성 돌을 정원석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성지(城址)

    내외(內外)에서 특기할 만한 유물은 채집되지 않았다.

      울진포영(蔚珍浦營)은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배치되었고, 1512년(중종 7년)에 둘레

    750척(尺), 높이 11척(尺)인 석축(石築)이었다.8)울진포진(蔚珍浦鎭)이나 고현포(古縣浦)라고

    도 하였으며 동남(東南) 10리(里)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현성(古縣城)과 깊은 관련이 있

    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관동읍지》와 《여지도서》 등의 지리지에 진보(鎭堡)라는

    항목만 있고 그 내용이 없다고 하거나 전혀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옛날에수군만호가 있

    었다”라는 표현9)으로 보아 임란 이후에 기능이 약화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 울진군, 1991,《울진의 문화재》양지상사, 21~41쪽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2)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봉수의 명칭과 운영체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잘 서술되어 있다.3)  울진군, 1991,《울진의 문화재》양지상사, 45쪽에 나오는 표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4) 이들 성지의 위치나 규모?형태 등에 대해서는 울진군지나 지방지에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98년 울

    진군에서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나온 경상북도 울진군?대구대학교 박물관, 1998,《울진군 성지유

    적 지표조사보고서》태양기획에 상세히 조사되어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본 군지에서는 성지(城址)의 위

    치와 크기만을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5) 화성리(花城里) 382~2번지이다6)  고산성 평면도는 경상북도 울진군·대구대학교 박물관, 1998《울진군 성지유적 지표조사 보고

    서》태양기획, 112쪽에서 재인용하였다. 7) 그 내용에 대해서는 경상북도 울진군?대구대학교 박물관,《앞의 책》139~141쪽에 잘 분석되어 있다.8) 《신증동국여지승람》권45, 강원도 울진현, 관방(關防)9)  김정호(金正浩),《대동여지도(大東地志)》강원도, 울진, 진보(鎭堡)

  • 2.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1) 사 원(寺 院)1)

    (1) 불영사(佛影寺)

      이 절은 울진군 서면 하원리에 있으며 군 관내에서 가장 크고 유래가 깊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가 많아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651년인 진덕여왕(眞德

    女王) 5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백암산 아래 단하동(丹霞洞)과 해봉(海峰)에 올라가서 북

    쪽을 보니 서역(西域)의 천축(天竺)과 같은 명산이 바라 보임으로 산마루를 타고 그 곳에 당

    도하니 산세의 묘(妙)함이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여 산 이름을 천축산이라고 하였

    다. 전면의 큰 못〔池〕에는 아홉 마리의 용(龍)이 있으므로 주문(呪文)으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 절의 정서

    편(正西便) 산에 있는 부처님과 같은 바위의 그림자가 못에 항상 비춰짐으로 절 이름을 다

    시 불영사(佛影寺)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사(大師)가 서산으로 들어가 영주 부석사

    (浮石寺)와 봉화 각화사(覺華寺)를 창건하고 15년 동안 돌아다니시다가 다시 불영사로 돌아

    오니 이 마을의 한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셨다”고 하여 백암산 불귀

    사(佛歸寺)라고도 하였다. 

      현재 이 절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10동의 크고 작은 와가건물들이 있는데 창건

    당시의 건물은 하나도 없고 조선시대에 와서 중수한 것으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 또는 보수하여 왔으며

    1977년에 절 입구 도로를 차도(車道)로 확장하였고 구동교(九動橋)?불영교(佛影橋)도 가설

    하였다. 조선 고종 36년에 설치한 범종루(梵鐘樓)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풍우로 훼손되어

    중수하였고 종각은 범종각(梵鐘閣)에 괘종병용(掛鐘?用)하던 것을 다시 종각을 신축하였고

    대종(大鐘)도 달고 1978년 9월 19일에 타종식을 하였다.

      응진전(應眞殿)은 1578년인 선조 11년에 건립한 건물로 불영사의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으며 통일신라 말의 선종(禪宗) 9산문(山門) 가운데 하나인 도굴산파(?堀山派)의 개조

    (開祖)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초상화인 탱화〔幀畵〕를 봉안한 곳이다. 이 전각은 구조법도

    (構造法度)가 연구자료로 되어 1973년 2월 문화재관리국 조사반장 정영호(鄭永鎬)교수 일행

    일련번호 사 원 명 일련번호 사 원 명 일련번호 사 원 명

    1 불영사(佛影寺) 11 진광사(眞光寺) 21 월궁사(月宮寺)

    2 동림사(東林寺) 12 검산사(劒山寺)  22 광대사(廣大寺)

    3 보광사(普光寺) 13 정림사(淨林寺) 23 배잠사(盃岑寺)

    4 수진사(修眞寺) 14 성류사(聖留寺) 24 장재사(長在寺)

    5 광도사(廣度寺) 15 백암사(白巖寺) 25 월출암(月出菴)

    6 대흥사(大興寺) 16 선암사(禪巖寺) 26 대천사(大川寺)

    7 신흥사(新興寺) 17 광흥사(廣興寺) 27 청암사(靑巖寺)

    8성조암(聖祖菴)과

    성조사(聖祖寺)18 심수사(深水寺) 28 통제암(痛濟菴)

    9 옥정사(玉亭寺) 19 계조암(繼祖菴) 29 덕정사(德亭寺)

    10 천양암(天糧菴) 20 봉화사(峯華寺)  

  • 에 의하여 동산문화재와 함께 85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편액

    (扁額)은 몽천서원(蒙泉書院)에 배향된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 선생의 친필이다. 이 절

    창건 당시의 유적인 3층 무영탑과 대웅전 축대 밑에 있는 거북돌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참

    배객으로 하여금 이 절의 장구한 역사를 연상케 한다. 절 서편에는 불영암이 높이 서 있고

    동남쪽에는 구룡대가 반석(盤石)이 되어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향로봉(香

    爐峰)이 높이 솟아 있어 금강산의 곤로봉(昆爐峰)을 방불케 한다.

      향로봉과 구룡대(九龍臺)의 반석 가운데로 흘러 떨어지는 16척 높이의 백운(白雲) 같은

    폭포와 청신한 공기가 감도는 고요함 속의 묵직한 분위기는 사찰 고유의 장엄한 위용을 느

    끼게 한다. 산세 또한 태극(太極)과 같이 굽이쳐 흐르는 듯하므로 산태극(山太極)?수태극(水

    太極)이라 전하고 있으며 울창한 수림(樹林) 속에 특이하게 의상대사가 심은 굴참나무는 수

    령이 1천년이나 되고 그 외 소나무도 수백 년 생이 허다하다. 불영사의 농토는 원래 전답이

    수백 두락이었으나 해방 이후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현재는 전(田)이 2만평, 답(畓)이 30두

    락으로 근근이 공양미에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절의 창건(創建)과 중수(重修)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으나 1397년(태조 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500년

    인 (연산군 6년)에 양성법사(養性法師)가 선당(禪堂)을 중건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병화(兵火)를 당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원년)에 성원법사(性元法師)가 영산전(靈山殿)

    을 재건하였고 1688년(숙종 27년)에 진성법사(眞性法師)가 수선(修繕)하였으며 1725년(영조

    원년)에 천왕법사(天王法師)가 재건하였고 1899년(고종 36년) 설운법사(雪雲法師)가 중수하

    였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건물은 대웅보전(大雄寶殿)?관음전(觀音殿)?응진전(應眞殿)?응향각(凝

    香閣)?황화실(黃華室)?설선당(說禪堂)?범종루(梵鐘樓)?칠성각(七星閣)?산령각(山靈閣)?무영탑

    (無影塔) 등이 있으며 칠성각은 1950년에 지방 신도로 구성된 칠성계에서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1696년(숙종 22년)에 인현왕후 민씨가 추방을 당하게 되어 자진(自盡)하려 하였는데

    꿈에 한 중이 와서 “소승(小僧)은 천축산 사람이다. 왕후는 자진하지 마시고 이틀만 더 기

    다리라”고 하였다. 과연 이틀 후에 환궁하시라는 왕명을 받았으므로 그 후 왕후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절 부근의 사산십리(四山十里)를 절에 주고 축원당(祝願堂)도 새로

    건축하였다.

      또한 조선 선조 때에 천문학 교수인 격암 남사고(格菴 南師古) 선생이 수도한 곳이었고

    한말인 1905~1906년에 울진의병(蔚珍義兵)의 사령부였으며 임시 의병훈련장이 되어 구국

    (救國)의 현장으로도 그 이름이 높았다. 고적소지(古跡小志)에 실린 학사(學士) 유백유(柳伯

    儒)의 기(記)에 의하면 의상(義湘)이 절터를 처음에 용소(龍湫)에 정하려고 용(龍)에게 청

    (請)하니 용이 듣지 아니하여 곧 금강(金剛)에 달려가서 주문(呪文)을 큰 소리로 읽으니 용

    이 굴을 뚫고 산을 넘어 달아났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또 옛날 절 서쪽편 부용

    성(芙蓉城)에 쌍학(雙鶴)이 새집을 짓고 절로 내려오며, 1592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절 남

    쪽 뜰 앞에 있는 소나무 숲 위에서 주둥이가 창날처럼 길게 생긴 새가 울고, 절간 소반 위

    에 물그릇들이 상천(上天)하며, 우물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붉게 흐려서 석달 동안 물을 마

    시지 못하더니 그 해 임란병화(壬亂兵火)로 절이 전부 불에 타고 서편 영산전(靈山殿)만 홀

    로 남아 있었다.

  •   승(僧) 성원(性元)이 법당(法堂) 중건과 동서선당(東西禪堂)을 세우는데 정휘(正煇)?지순

    (智淳)과 더불어 노력하였다. 기상공(奇相公) 자헌(自獻)이 스스로 헌신하여 재물을 베풀어

    의상전(義湘殿)을 세우고 용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며 건물 중방 문 위에 가로로 쓴 글로 대

    시주의정부기공(大施主議政府奇公)이라 쓴 편액을 걸어 놓았다2)고 한다.

    (2) 동림사(東林寺)

      울진읍 읍내리 월변동에 있다. 1952년에 당시의 불영사 주지 김용호(金龍浩)가 포교(布

    敎)를 목적으로 신도 김용식(金容湜)의 기재(寄財)를 희사받아 민가를 구입 개수하여 포교당

    (布敎堂)을 만들고 해인사(海印寺)의 영암(暎岩) 박기종(朴淇宗)을 포교사로 취임케 하여 불

    영사(佛影寺)의 포교당으로 출발하였다. 차츰 신도가 많아지자 1953년 10월 5일에 독립하

    여 사찰 승격인가를 얻어 강원도 월정사(月精寺) 관할 하의 동림사(東林寺)로 개칭하였다.

    1963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편입됨에 따라 경주 불국사(佛國寺) 관

    할로 되었다. 대웅전(大雄殿)은 원래 울진읍 대흥리에 있던 대흥사(大興寺)의 대웅전으로

    1681년(숙종 7년 )에 창건된 것인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노후되어 붕괴 직전에 있던 것

    을 1963년 3월에 울진읍 읍내리 월변동에 거주하는 신도 장상진(張相軫)의 사재(私財)로 이

    건(移建)한 것이며 현재 신도 수는 100여명에 달한다. 그 후 대한불교 조계종정(曹溪宗正)

    이효봉과 제11교구 본사 채벽암(蔡碧菴) 주지(住持)가 장상진(張相軫)에게 그 공을 찬양하여

    감사장을 수여하였다.

    (3) 보광사(普光寺)

      울진읍 읍남리 하토일(下吐日)에 있으며 1931년 보화(普化)스님이 이 절을 창건하고 보광

    사(普光寺)라 하였다. 이 절은 사방으로 송림이 울창하고 공기 또한 맑고 깨끗하며 주민의

    소요지(逍遼地)이기도 하여 내방객(來訪客)이 많다.

    (4) 수진사(修眞寺)

      평해읍 오곡리 천축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의 자세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신문왕 때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대웅전 안에는 후불탱화 1점이 있는데 하단에 가

    경(嘉慶) 3년(1798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후불탱화는 2점을 한 쌍으로 하기 때문에 이

    절이 임진왜란 때에 병화로 서적과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때에 1점이

    소실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웅전 앞 동구에 부도(浮屠) 2점이 있는데 무위선사

    지부도(無爲禪師之浮屠) 몽현선사(夢現禪師)라고 적혀 있다.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 와가로서 1969년 3월에 중수했다고 하며 산신각과 요사 2동이 있다. 해월(海月) 황여

    일(黃汝一)과 권계(權啓)?선세휘(宣世徽)의 시(詩)가 전해지고 있다.3)

    (5) 광도사(廣度寺)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 537번지에 있다. 1952년 5월에 주지 김봉호(金鳳浩)가 창건하고

    1955년 5월에 서면 하원리 불영사에서 관음불상을 모셔와 봉안(奉安)하였다. 대세지불상은

    그 후 일본에서 모셔와 봉불(奉佛)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각 와가(瓦家)이다.

    (6) 대흥사(大興寺)

      울진읍 대흥리 태백산(太白山) 정봉(鼎峯) 밑에 있었다. 이 절은 신라 때에 의상대사(義湘

    大師)가 창건하였는데 그후 고려 때에 어떤 스님이 수즙(修葺)하였다. 1802년(순조 2년) 예

    조완문(禮曹完文)에 사산경계(寺山境界)에 표식(標識)을 하여 절을 수호토록 하였으나 오랜

  • 세월로 무너져 없어졌고 법당(法堂)만 남아 있던 것을 1963년에 울진읍 읍내리 동림사(東林

    寺) 법당으로 옮겨 지어졌으므로 절은 없어져 버렸다.

    (7) 신흥사(新興寺)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에 원남면 신흥리 항곡동(項谷洞)에 창건되었다. 그 때에 의상법사

    (義湘法師)가 비둘기 3마리를 날렸더니 그 중 한 마리가 이 절에 날아왔고 또 한 마리는 대

    흥사(大興寺)에 앉았으며 나머지 한 마리는 불영사(佛影寺)에 날아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절은 없어졌고 절터는 농경지가 되어 있다.

    (8) 성조암(聖祖菴)과 성조사(聖祖寺)

      북면 주인리 면전동(綿田洞) 뒷산인 각구산 밑에 있던 암자로, 조선 숙종 때에 한 노승이

    초가집을 지어 목불(木佛)을 안치하고 수도하던 곳이었는데, 사찰에 입적되지 않아 자연보

    호법에 의거 1979년에 철거되어 북면 주인 3리인 대수동 각구산 기슭에 다시 신축하였다.

    그러나 이 곳이 울진원자력발전소 건설 부지로 편입되어 또 다시 1981년에 철거되어 북면

    주인 1리에 암자를 신축하였다. 그후 신도들이 늘어나 수용이 어렵게 되자 1994년에 북면

    부구 3리인 방화동 1308번지에 사찰을 지어 성조사(聖祖寺)라 하고 성조암(聖祖菴)은 그대

    로 존속하였다.

    (9) 옥정사(玉亭寺)

      북면 고목리 지장동 가치산(迦治山) 아래 불믿골〔佛信谷〕에 있는 절로 대각(大覺)스님

    서순석(徐順石)이 지방 신도 남재칠(南載七) 외 수인(數人)과 더불어 1954년 5월 16일에 칠

    성각(七星閣)을 창건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다음 해에 신도들이 법당(法堂)과 객사(客舍) 2

    동을 세워 대각(大覺)스님이 염불(念佛)에 정진(精進)하던 중 사망되어 그의 아들 승윤(乘潤)

    스님인 서창원(徐蒼圓)이 취임하여 수행(修行) 10년 후에 신도들의 뜻을 모아 1997년 4월

    16일에 기존의 법당과 칠성각?객사 등 모두 철거하고 절터를 확장하여 대웅전 중창(重創)과

    산신각?요사(寮舍)?부속사 등 5동을 신축하여 준공하였으며 협소한 진입로를 확장하고 포장

    하여 1998년 3월 15일에 준공함으로써 차도(車道)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신도는 북면 지

    역은 물론 죽변에도 많이 있다.

    (10) 천량암(天糧菴) 

    이 암자는 근남면 행곡리의 암벽 사이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 암

    자에 머물 때에 곁에 있는 암석 구멍에서 쌀[白米]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1) 진광사(眞光寺)

      울진읍 읍내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잔존하지 않는다.

    (12) 검산사(劒山寺)

      근남면 행곡리 검산 중허리에 있었고 신라 때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13) 정림사(淨林寺)

      울진읍 정림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잔존하지 않는다.

    (14) 성류사(聖留寺)

      성류사는 근남면 구산리 성류굴 앞에 있던 절로서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의 보천태자

    (寶川太子)가 성류굴에서 수도한 후에 창건하였다. 그 후 김시습(金時習)이 이 절에서 일박

    (一泊)한 일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 절은 잔존하지 않는다.

    (15) 백암사(白巖寺)

  •   온정면 온정리에 있던 절로 신미선사(信尾禪師)가 창건하였으나 지금은 폐사되었고 옛시

    [古詩]가 남아 있다.4)

    (16) 선암사(禪巖寺)

                               

      광흥사 부도

      이 절은 온정면 단하동(丹霞洞)에 세워져 있었으나 절은 없어지고 황중윤(黃中允)의 시

    (詩)만 전해오고 있다.

    (17) 광흥사(廣興寺)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1135번지에 있었는데 자세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흥덕

    왕(興德王) 때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약 300년 전에는 사세(寺勢)가 번창하였고 덕산리의

    전답과 임야의 대부분이 사찰 소유였는데 이 지역 주민들 거의가 불도(佛徒)로서 소작농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 절은 없어지고 황중윤(黃中允)의 시(詩)가 남아

    있다.

    (18) 심수사(深水寺)

      이 절은 온정면 다호천(多呼川)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잔존하지 않는다.

    (19) 계조암(繼祖菴)

      이 절은 온정면 단하동(丹霞洞)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잔존하지 않는다.

    (20) 봉화사(峯華寺)

      1945년 5월 단오날에 대한불교 천태종(天台宗)이 단양(丹陽) 구인사(救仁寺)를 창건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에 천태종 울진군지부가 1967년 5월 16일 울진읍 고성리 산성동에서

    첫 법회(法會)를 시작함으로써 발족되었다. 그후 1974년 8월 16일에 울진읍 고성리 성저동

    장복근(張福根)씨 댁으로 이전하여 상월(上月) 원각대조사(圓覺大祖師)의 진영(眞影)을 모셨

    다. 그리고 1979년 3월 30일에 불상(佛像)을 봉안하여 오다가 1984년 7월 18일에 울진읍

    읍내 3리인 월변의 삼봉산(三峯山) 기슭에 법당(法堂)과 기도실?사무실?요사채 2동을 지어

    봉화사(峯華寺)라 하였다. 현재의 신도 수는 1,000여명에 달하며 보경(寶慶)스님이신 박승근

    (朴承根)주지가 있다.

    (21) 월궁사(月宮寺)

  •                     

                                                     배잠사 당간지주

      평해읍 월송리 28번지에 있다. 1953년에 창건되었는데 온정면 고모산성(姑母山城) 석굴

    속에 약 500년간 방치되어온 석불이 현몽하였기에 평해읍 월송리에 월궁사를 건립하여 석

    불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22) 광대사(廣大寺)

      고려시대에 원남면 길곡리 광대골〔廣大谷〕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지금 절은 없고 당시

    축조(築造)했던 탑(塔)만 남아 있다.

    (23) 배잠사(盃岑寺)

      근남면 구산리 바깥잘미〔外城山〕에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잔존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축

    조한 소형의 3층 석탑(石塔)이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24) 장재사(長在寺)

      고려시대에 북면 주인 3리인 면전동(綿田洞)에 절이 창건되었다 하나 지금은 잔존하지 않

    고 그 당시의 탑(塔)만 남아 있다.

     

    (25) 월출암(月出菴)

      근남면 행곡리 서쪽 금산에 있던 암자로 창해가 바라보이고 해와 달이 솟아오를 때의 정

    상(情狀)이 절경이라 하여 월출암이라 하였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잔존하지 않고 그 터전도

    알 수 없다.

    (26) 대천사(大川寺)

      근남면 노음 2리인 오로동(五老洞) 탑평에 있던 절로 탑(塔)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에

    울진읍 월변리 동림사(東林寺)로 옮겼다. 이 절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라 전해진다.

    (27) 청암사(靑巖寺)

  •   근남면 구산리 탑평동에 있던 절로 고려 때에 창건되었으나 없어졌고, 3층 석탑이 남아

    있는데 1969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498호로 지정되어 있다.

    (28) 통제암(痛濟菴)

      온정면 백암온천 부근에 있었던 암자였으나 지금은 잔존하지 않는다.

    (29) 덕정사(德亭寺)

      고려 때에 죽변면 화성1리 화방동 절골에 창건된 절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잔존

    하지 않고, 사지(寺址)는 논〔沓〕으로 변했으며 그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공석과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2) 서 원(書 院)

    (1) 옥동서원(玉洞書院)

      이 서원(書院)은 조선 선조(宣祖) 때 천문학교수(天文學敎授)였던 유현(儒賢)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先生)을 배향(配享)한 곳으로 울진읍 읍내리 옥계동(玉溪洞)에 있었으며

    고호(古號)를 옥계서원(玉溪書院)이라고 하였다. 1574년(선조 7년)에 현령 정구수(丁龜壽)가

    향인(鄕人)과 더불어 원사(院祠)를 세웠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에 소

    실(燒失)되었으며 그후 광해군(光海君) 13년에 몽천사(蒙泉祠)에 옮겨 향사(享祠)하였다.

    (2) 고산서원(孤山書院)

      이 서원은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 유후(有後) 임만휴(任萬休)와 서파(西坡) 오도일

    (吳道一) 선생 등을 병향(?享)한 서원으로 근남면 행곡리(杏谷里) 구미동(龜尾洞)에 위치하

    고 있다. 인조 6년(1928년)에 만휴공(萬休公)이 고산(孤山)에 정사(精舍)를 신축(新築)하였고

    현종 14년(1673년)에 고산사를 창건하여 임유휴를 봉안하였다. 숙종 2년(1686년)에는 김시

    습을 봉안(奉安)하고 1709년(숙종 35년)에 오도일(吳道一)을 병향(?享)하니 이로부터 세 선

    생을 배향(配享)하였고 1715년(숙종 41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1868년(고종 5년)

    에 철폐되고 유허비를 세웠으나 강당 및 유허비는 현존하고 있다.

    (3) 옥계서원(玉溪書院)

      이 서원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만은(晩隱) 전선(田銑)의

    세 선생(先生)을 병향(?享)하였다. 영조(英祖) 16년에 읍내리 옥계동(玉溪洞)에 창건(創建)하

    여 우암선생진상(尤庵先生眞像)을 봉안하였다. 그 후 정조(正祖) 원년에 초평(草坪)에 이건

    (移建)하여 경본(京本)을 개모(改模)하고 영당(影堂)이라 하다가 순조(純祖) 29년에 선생신판

    (先生神板)을 봉안(奉安)하였고 옥계서원(玉溪書院)이라 편액(扁額)하였으며 순조(純祖) 32년

    용장(龍場)에 이건(移建)하여 김상정(金相定)을 본원(本院)에 종향(從享)하고 철종(哲宗) 8년

    에 전선(田銑)을 별묘(別廟)에 추철(追?)하였으나 고종(高宗) 5년(1868년)에 철폐(撤廢)되었

    고 1872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가 4년 후에 북면 고목리(古木里) 기곡(基谷)에 이수

    (移竪)하고 강당(講堂)을 겸축(兼築)하였다.

    (4) 신계서원(新溪書院)

      이 서원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계산(溪山)김수근(金洙根) 양 선생(先生)을 배향(配

    일련번호 서  원  명 일련번호 서  원  명 일련번호 서  원  명

    1 옥동서원(玉洞書院) 4 신계서원(新溪書院) 7 명계서원(明溪書院)

    2 고산서원(孤山書院) 5 몽천서원(蒙泉書院) 8 노동서원(魯東書院)

    3 옥계서원(玉溪書院) 6 월계서원(月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