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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27 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최은경** 1. 서론 2. 개화기 이전 ‘勞3. 개항기와 대한제국시기의 ‘결핵’의 발견 4. 결론 의사학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012년 8월 Korean J Med Hist 21 ː227-250 Aug. 2012 http://medihist.kams.or.kr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1. 서론 1882년 코흐의 결핵균 발견은 결핵의 원인을 규명하고 세균이론을 공식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조선이 개항 후 서양의학을 도입 한 시기와 겹친다. 세균이론으로 상징되는 서양의학이 당시 조선 사회의 질 병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은 다수의 연구가 밝힌 바 있다. 1) 균학은 질병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케 한 상징으로 이해되었고 세 균설에 입각한 위생활동은 서양의학을 전파, 수용하게 만드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무수한 서양의학의 질병 개념이 번역 되었으며, 용어 또한 새로이 번역^정의되었다. 개항기 서양의학의 도입은 한 편으로는 서양의학의 번역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논문은 2010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 구임(NRF-2010-371-E00002)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1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이메일: [email protected] ⓒ 대한의사학회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1) 신동원, 조선말의 콜레라 유행, 1821-1910, 한국과학사학회지11-1, 1989; 신동원, 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서울:역사비평사, 2004); 박윤재, 한국근대의학의 기원(서울:혜 안, 2005).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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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 2015. 12. 10. · 최은경 : 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제21권 제2호(통권

Mar 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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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27

    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최은경**

    1. 서론

    2. 개화기 이전 ‘勞瘵’3. 개항기와 대한제국시기의 ‘결핵’의 발견

    4. 결론

    의사학�제21권�제2호(통권�제41호)�2012년�8월� Korean�J�Med�Hist�21�ː227-250�Aug.�2012http://medihist.kams.or.kr� pISSN�1225-505X,�eISSN�2093-5609

    1. 서론

    1882년 코흐의 결핵균 발견은 결핵의 원인을 규명하고 세균이론을 공식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조선이 개항 후 서양의학을 도입

    한 시기와 겹친다. 세균이론으로 상징되는 서양의학이 당시 조선 사회의 질

    병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은 다수의 연구가 밝힌 바 있다.1) 세

    균학은 질병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케 한 상징으로 이해되었고 세

    균설에 입각한 위생활동은 서양의학을 전파, 수용하게 만드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무수한 서양의학의 질병 개념이 번역

    되었으며, 용어 또한 새로이 번역^정의되었다. 개항기 서양의학의 도입은 한

    편으로는 서양의학의 번역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논문은 2010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

    구임(NRF-2010-371-E00002)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1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이메일: [email protected]ⓒ 대한의사학회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1) 신동원, 「조선말의 콜레라 유행, 1821-1910」, 『한국과학사학회지』 11-1, 1989; 신동원, 『호

    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서울:역사비평사, 2004); 박윤재, 『한국근대의학의 기원』 (서울:혜

    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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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OI Eun Kyung :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and Change of Term of ‘Tuberculosi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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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서양의학 도입기에 의학 개념을 번역^수용하면서 만들어진 개념

    이 완전히 기존의 개념을 대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질병명은 번역하

    는 과정에서 해당 질병에 관한 이해를 둘러싼 많은 차이를 반영하고 내포하

    게 된다. 같은 질병이라 하더라도 서양의학 도입 이전 질병명과 이후 질병명

    은 차이가 있다. 특히 질병에 대한 정의, 원인 등 다른 이론적 배경으로 말미

    암아 같은 질병명이라 하더라도 다른 의미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한 질병

    명이 다른 질병명의 의미를 차용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본 질병명과 조금

    은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본 논문은 개항기 서양의학 도입 전후 질병명 변화의 한 예로 결핵에 주목

    하고자 한다. 결핵은 개항기 조선 사회에서 서양의학적/과학적 질병명이 한

    의학적/민속적/비과학적 질병명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었던 예 중 하나이다.

    결핵에 관하여 개항 당시 병리학적 개념인 ‘tuberculosis’와 증상에 초점을 둔

    ‘phthisis’의 질병명이 공존하였다. 오늘날 결핵과 유사한 질병명으로 쓰이는

    한의학의 ‘勞瘵’는 증상에 초점을 둔 ‘phthisis’와 유사한 개념으로 해석되었

    다. 질병명 번역에서 병리적 원인보다는 증상에 초점을 두기 쉬웠다는 점, 그

    리고 서양의학 내에서도 과학적 질병명이 우위에 있지 않았던 점 등은 개항기

    조선 사회 내 결핵이란 질병명이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게끔 하였다. 본 논문

    은 서양의학 도입 전후 결핵 질병명의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개항기 조선사회

    내에서 다양한 질병명 번역 과정을 유추하고자 한다.

    2. 개화기 이전 ‘勞瘵’

    1)�‘傳尸’와�‘蟲’�개념

    기원전 460년,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날 결핵으로 이해되는 ‘phthisis’ 라는

    질병에 관해 이미 기술한 바 있다. 그리스어로 ‘phthisis’는 ‘소모하다’, ‘쇠락하

    다’라는 의미를 지칭하고 있었고 이것이 이후 영어 ‘consumption’으로 번역된

  • 최은경 : 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29

    다. 히포크라테스는 ‘Aphorism’에서 “18세와 35세 사이에 보통 일어난다. …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역한 냄새의 객담을 내뱉으며 기침을 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치명적이 된다.” 라고 기록을 남긴 바 있다.2)

    히포크라테스가 일컬은 phthisis와 같은 질병이 고대 동북아시아, 특히 한

    반도에서 유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결핵과 유사한 질병이 기

    원전 1세기-0세기에 한반도에서도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연구로

    최근 사천 지방 늑도(勒島)에서 기원전 1세기-0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척

    추 결핵 유골이 발견되었고, 현재 한반도 내 최초의 결핵 증거로 간주되고 있

    다.3) 유사하게 일본에서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에 기원전 454년에서 기원후

    124년 사이로 추정되는 척추 결핵의 흔적을 보이는 유골이 출토된 적 있고,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 한반도로부터 이동한 원주민에 의해 결핵이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최초로 중국에서 서한 시대(기

    원전 202년-기원후 2년) 결핵에 걸린 여성 미라가 출토되었음을 감안해 보면,

    적어도 한반도에서도 동북아 지방의 인구 이동과 함께 기원전 1세기-0세기 사

    이 결핵이 유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된다.

    서양 의학 고전들에서 쉽사리 결핵 혹은 phthisis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통상 중국 의서에서는 결핵과 유사한 증상을 가리켜 虛勞, 肺癆,

    骨蒸, 傳尸, 勞瘵 등의 명칭을 사용했으며 오늘날에는 이들을 결핵에 관한 지

    칭으로 이해하는 편이다. 이들 명칭이 오늘날 사용하는 결핵과 어떻게 유사

    한 의미라고 여겨지는 걸까? 동북아시아 의서들의 결핵에 관한 기록에 대해 『

    日本醫學史』(富士川遊 著)는 다음과 같이 초기 기록을 정리하고 있다. “張仲

    景의 金匱方論에 처음으로 虛勞라는 症이 실렸지만 후세에 말하는 肺勞와 꼭

    2) Hippocrates, Aphorism. Section V. translated by Francis Adams.

    3) Suzuki T, Fujita H, Choi JG, “Brief communication: new evidence of tuberculosis from

    prehistoric Korea-Population movement and early evidence of tuberculosis in far East

    Asia”, American journal of physical anthropology 136(3), 2008, pp. 357-60.4) Suzuki T, Inoue T, “Earliest evidence of spinal tuberculosis from the Aneolithic Yayoi

    period in Japan” International Journal of Osteoarchaeology 17(4), 2007, pp. 39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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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는 것은 아니다. 病原候論에 이르러 五勞의 항목을 두고 … 별도로 五臟의

    勞가 있어서 호흡이 가쁘고 얼굴이 부으며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을 肺

    癆의 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중

    국에서는 肺結核이 隋^唐 시대부터 나타났지만 당시의 諸家들은 이것을 虛

    勞라고 하였으며, 金^元 이후에는 「이 病은 七情과 六慾의 火가 내부에서 요

    동하고 과도한 음식과 勞惓이 자주 신체를 손상시켜 차츰 眞水가 고갈되고 陰

    火가 上炎함으로써 발생한다」라고 설명하거나 「虛勞病 가운데 傳尸라는 하나

    의 證이 있으니 尸는 三尸蟲으로 사람의 뱃속에서 藏腑를 갉아먹는 蟲이며 한

    사람이 癆瘵에 걸리면 가까이 지내던 친척에게까지 전염되어 一家가 모두 사

    망하는 症이다」라고 설명하였다.”5)

    이들 개념과 증상이 곧 현대의 결핵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

    나 오늘날 결핵에 대한 이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증후, 유행 양상, 원인의 개

    념에서 유사한 지점이 발견된다. 병의 증후로는 “숨소리가 급박하면서 기침

    을 하고 … 차츰 몸이 야위어 마치 물이 말라 가는 것 같지만 죽는 것을 느끼

    지 못한다.”를 지칭하고 있고 병의 유행양상으로 “무릇 서로 剋하면서 발생되

    니 먼저 내부로 毒氣를 전달하여 五臟에 두루 번짐으로써 점차 야위다가 사망

    하게 되고 사망하면 다시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에게 옮기므로 傳尸라

    고 하며 또한 傳注라고도 한다. … 치료하지 못하면 집안이 몰살하게 된다.”6)

    라는 설이 결합되어 있다. 특히 『醫學正傳』에서는 “옆에서 모시고 있는 친밀

    한 사람이나 혹은 친족들이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여 그 나쁜 기운을 받음으

    로써 대부분 전염되니 … 처음 한 사람에게 발생했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후

    에는 수천 수백 명에게 옮겨가며 심지어 집안이 몰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병

    의 가장 나쁜 것은 그 熱毒이 오래도록 울체되고 누적되면 異物과 惡蟲이 생

    겨 인체 臟腑의 精華를 갉아먹음으로써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게 되

    5) 박경, 이상권 譯, 富士川遊, 『日本醫學史』 (서울: 法仁文化社, 2006), 720-724쪽.

    6) 『外臺秘要方』, 富士川遊, 앞의 책, 2006에서 재인용; 『蘇遊論』, 富士川遊, 앞의 책, 2006에

    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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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진실로 두렵고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어 결핵과 유사하다고 생각되

    는 증상이 타인에게 옮을 수 있다는 개념과 결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신체의 장부를 갉아먹는 것으로 표현되는 ‘(惡)蟲’은 오늘날 결

    핵과 유사하게 소위 ‘傳尸’에서 세균의 개념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주목

    된다. 물론 ‘蟲’이 전파되는 기생충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냥 벌레를 의미하

    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蟲’이 신체로부터 외재(外在)한다고 생각했

    는지도 분명치 않다. 또한, 원래 道家에서 일컫는 ‘蟲’ 자체는 사람이 수양

    을 게을리 하면 경신일에 하늘로 올라가 죄를 고해 바쳐 수명을 단축시킨

    다는 등 미신적 요소가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프라카스토로

    (Girolamo Fracastoro,1483-1553)가 『De contagione』(1546)에서 ‘phthiasis’

    가 ‘seminaria’라는 보이지 않는 물질을 매개하여 전파된다고 주장하기 이전

    까지 결핵과 전염 개념을 연결시킨 주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결핵이 ‘전염’

    혹은 ‘전파’된다는 개념은 한의학이 좀 더 빨리 가졌을지도 모른다. 柳存仁 등

    은 이와 같은 ‘傳尸’에 관한 지식과 처방, 도가의 삼시충(三尸蟲) 개념을 원용

    하며 12세기 중국의 도가(道家) 기록들 속에서 서양보다 2세기 빠른 결핵에

    관한 세균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7)

    2)�한의학(韓醫學)의�‘勞瘵’

    한의학 의서에서도 ‘蟲’과 오늘날 결핵으로 여겨지는 ‘勞瘵’와의 관계를 발

    견할 수 있다.8) 미키 사카에(三木榮)는 『朝鮮醫學史及疾病史(1965)』에서 향

    약집성방과 동의보감의 ‘勞瘵’를 폐결핵(phthisis pulmonum)으로 보고 인용

    7) L.T.-yan(柳存仁), The Taoists’ Knowledge of Tuberculosis in the Twelfth Century. T’oung Pao 57, 1971, pp. 285-301. 도가(道家)에서는 사람이 수련하는 것을 방해하는 3종류의 蟲이 있다고 인식하였는데, 이 3종류의 곤충을 말한다. 『중황경(中黃經)』에는 “첫째는 상충(上蟲)

    으로 뇌 속에서 살고, 둘째는 중충(中蟲)으로 명당(明堂)에서 살고, 셋째는 하충(下蟲)으로

    뱃속에 사니, 이름하여 팽거(彭琚), 팽질(彭質), 팽교(彭矯)라고 한다.”고 하고 있다.8) ‘勞瘵’의 ‘勞’는 ‘癆’의 음원으로서 ‘아프다, 쇠약해지다’의 뜻을 갖고 있고 ‘瘵’는 ‘앓다’의 의미

    를 지니고 있어 서양의 ‘phthisis’의 의미와 유사한 단어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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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있다.9) 향약집성방에서는 『醫方集成』을 인용하면서 “시작은 체질이 허

    약하고 과로, 심신이 상한 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다. … 또 몸을 잘 보양하지

    못하고 성생활을 지나치게 하거나 음식물에 상한 것이 오래 되어 생기는 경우

    도 있다.”고 원인을 설명하고 증상으로 “살이 여위고 피부가 마르는 것, 식은

    땀, 뱃속에 덩어리진 것이 생기고 뒷머리의 양쪽에 작은 멍울(小結核)이 몰렸

    다 없어졌다 한다. 또는 기침이 나고 담증(痰涎)이 나오며, 혹은 기침할 때 피

    고름이 섞인 가래를 뱉는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증상의 특징으로

    “蟲이 심폐 사이를 파먹는다. … 이 증상은 서로 전염하고 본래 치료하는 법

    이 없으나 다만 환자가 죽기 전에 다른 데로 피해 전염을 막는 수가 있다.”라

    고 하여 간단하게나마 전염성과 蟲, 덩어리(小結核)의 관계를 아울러 사고하

    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勞瘵’에 관해 ‘蟲’ 항목에서 따로 길고 상세하게 다루고 있

    는데, “소년시기 혈기가 왕성하기 전에 주색(酒色)에 상하면 열독이 몰리고

    뭉쳐서 蟲이 생긴다.”고 보고 “환자나 의복, 음식을 통해서 전염되며 한 사람

    이 죽은 다음에는 가까이 있던 또 다른 사람에게 감염이 되어 결국은 한 집안

    이 모두 죽게 된다. … 그러므로 기가 허하고 배가 고플 때 勞瘵를 앓는 집에

    병문안을 가거나 조상(弔喪)을 가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증상으로 “추웠다가 열이 나고 식은땀이 나며, 聳 혹은 腹 중 덩어리 혹은 뒷

    머리의 양 쪽에 덩어리(小結核)가 생긴다”10)고 보아 오늘날 결핵의 증상과 유

    사한 설명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의 ‘勞瘵’의 원인이나 증상, 특징에서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동의보감은 ‘蟲’을 따로 독립적으로 다루고 이를 「내경편(內

    景篇)」 하위 항목에 위치시켜 오장육부와 동일한 身의 구성물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동의보감은 ‘勞瘵’와 ‘結核’을 상호 별개의 증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앞서 인용한 구절과 같이 ‘勞瘵’에 ‘結核’이 동반된다고 보고

    9)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大阪: 工甑, 1963), 219-31쪽.

    10) 『東醫寶鑑』 內景篇之三,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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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어 둘을 연결된 증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동의보감 발간 시기

    (1610)와 유사하게 발간된 일본 의서 『啓迪集』(曲直瀬道三 著, 1574)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啓迪集』에서 曲直瀬道三는 다른 질병 에 걸린 후 회복되지

    않거나 주색(酒色) 등으로 몸이 상하면 ‘勞瘵’가 발생할 수 있으며 ‘勞瘵’의 외

    부 증상으로 ‘結核’이 동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의보감 이후 한의서에서 언급되는 ‘勞瘵’가 동의보감과 유사한 개

    념으로 활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부분 동의보감을 인용한 의서들이 동

    의보감의 병인론보다 응급처방과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치료를 우선적

    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동의보감 이후 의서들 중 ‘勞瘵’가 독립된 항목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은 『

    醫門寶鑑』(1724), 『本草類涵要領』(1833), 『附方便覽』(1855), 『壽民妙詮』, 『醫

    鑑抄集』 등이다. 이 중 『醫門寶鑑』(1724)의 내용이 가장 자세한데, 기침, 오

    한, 객혈 등의 증상과 蟲에 대한 언급, 사람에게 전염된다는 기록은 나오나 동

    의보감처럼 자세한 전파 경로를 묘사하지 않고 악귀에 의해 전파된다는 내용

    만이 언급되어 있다. 『本草類涵要領』(1833)은 鬱積이 蟲으로 변해 사람을 갉

    아 먹고 집, 음식, 옷에 의해 전파된다고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附方便

    覽』(1855)은 여러 객혈, 토혈을 분류하면서 ‘勞瘵’라는 명칭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19세기 중반으로 갈수록 ‘勞瘵’에 관해 전염 혹은 전파의 특성보다는

    기침, 血의 배출, 객담, 기력이 쇠해지는 것 등과 같은 증상의 하나로 설명되

    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동의보감 이후 특별히 ‘勞瘵’에 관한 병인론을 발전시키거나 자세

    하게 다루지 않는 부분은 일본의 상황과는 다른 것이었다. 19세기 초 일본의

    난학자들은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아 ‘勞瘵’의 병인론을 발전시켜 병독과 신체

    를 분리시키고 병독이 병의 원인이며 병의 발생은 신체 조건에 따라 좌우된다

    고 사고하기에 이르렀다. 혹은 ‘結核’과 ‘勞瘵’ 둘 다 병독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거나 나쁜 환경과 영양 결핍, 심지어 작업 유해 물질도 병의 원인이 될 수

  • CHOI Eun Kyung :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and Change of Term of ‘Tuberculosis’ in Korea

    │ 醫史學234

    있다고 생각하였다.11) ‘勞瘵’가 꼭 결핵이었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이

    러한 일본 난학자들의 ‘勞瘵’에 대한 사고는 결핵이 독립된 질병 체계로 이해

    되기 전 서양의학의 ‘phthisis’에 관한 사고와 많이 유사한 것이었다.

    3)�서양의학�‘phthisis’�개념의�번역

    서양의학의 개념들이 조선에 최초로 수용된 것은 최한기가 중국의료선교

    사 벤쟈민 홉슨(Benjamine Hobson)이 중국어로 낸 5종 의서를 편수한 『身

    機踐驗』(1866)이다. 최한기가 편수한 홉슨의 의서들은 서양의학 개념을 거의

    최초로 본격적으로 한문으로 번역한 책이기도 하다. 홉슨은 1850년대 중국인

    동료 陳修堂, 管茂材의 도움을 얻어 『全體新論』, 『博物新編』, 『西醫略論』, 『婦

    嬰新說』, 『內科新說』 등 5종의 의서를 발간하였고 1858년 최초의 중서의학사

    전인 『醫學英華字譯』을 출간하였다. 이들 의서와 사전은 서양의학 개념들이

    어떻게 중국어로 차용^번역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렇다면 홉슨은 서양의학 상 개념인 ‘phthisis’, 혹은 ‘consumption’을 어

    떻게 한문으로 번역했을까? 우선 실험실 의학이 등장하기 이전 당시 서양의

    학 또한 증상과 경과를 위주로 질병을 구분했다는 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초 라에넥(Laënnec)이 ‘phthisis’로 사망한 환자들을 부검하고 다양한

    증상 소견과 연결시켜 ‘Tuberculosis’가 하나의 특정한 원인을 지니는 질병 개

    체라는 이론을 제시하기 이전까지 서양의학의 ‘phthisis’는 ‘勞瘵’처럼 다양한

    병인론을 지니는 괴이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이었다.12) 한 가족 내에서

    잘 발병하는 특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유전성적 소인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보

    11) Johnston W.,“A Genealogy of Tubercular Diseases in Japan”, Social History of Medicine 7(2), 1994, pp. 247-267.

    12) 서양의사들의 사고 속에 어떻게 결핵에 관한 이론과 개념이 변천해 왔는지는 King L.,

    Medical thinking : a historical prefac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2); Shryock R., National Tuberculosis Association: 1904-1954 a study of the voluntary health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New York: National Tuberculosis Association,1957). 등에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 최은경 : 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35

    이지 않는 미생물(animalculae) 때문에 생긴다는 주장도 많았다.13) 그리고 부

    검의 발달로 결핵(tubercule)의 소견과 객혈, 객담 등 일반적인 ‘phthisis’의 임

    상 증상을 함께 관찰할 수 있게 되었으나 둘을 연결 짓기는 어려웠다. 더군다

    나 지나치게 다양한 임상 소견들과 체액 이론들이 뒤섞여 있었던 탓에 하나의

    특정한 분류 체계를 지니는 것이 불가능했다.

    홉슨은 영국 런던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의사였고 당시 서양의학이 한의학

    보다 해부학 등에서 앞서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해부학 등 기

    초의학에 대한 지식은 『全體新論』에서 폐장 등 신체기관의 해부구조를 묘사

    할 때에는 유용하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해부학적 구조만이 아닌 질병 및 치

    료를 다룰 때에는 질병 개념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더 고심할 수밖에 없었

    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양의사로서 그가 다루는 질병이 기존 한의학에서 지

    칭하는 질병의 증상과 어느 정도 부합하고 현지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선

    교 및 치료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에 온 서양선교의사들 또한 특별

    한 병인론을 알지 못하는 질병에 대해 일정 정도 기존 한의학적 용어를 빌려

    쓰는 것을 반대하기 어려웠다.14)

    『醫學英華字譯』에서 홉슨은 ‘consumption, pulmonary of’를 ‘肺勞症’으로

    표현하였다.15) 이는 기존 한의학 개념인 ‘虛勞’, ‘勞瘵’ 등에서 쓰인 ‘소모하다’

    로 해석되는 ‘勞’ 자를 빌려 서양의학 상 개념인 ‘phthisis’ 혹은 ‘consumption’

    을 표현한 것이다.16) 홉슨 등 중국의 서양 의사들이 이 ‘勞’를 ‘病’ 자와 결

    13) 벤자민 마텐(Benjamin Marten)이 대표적이다. Marten B., A new theory of consumptions : more especially of a phthisis, or consumption of the lungs, (London, 1720).

    14) 『萬國藥方總錄』를 저술한 서양선교사 Hunter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서양의 명칭

    과 유사하게 쓰이는 중국 본래의 명칭이 존재한다면 이를 수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선호된다. 어디서든 본래의 명칭을 더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본래의 명칭이 명료하지 않

    더라도 정의와 설명을 통해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 Hunter S, Medical nomenclature : a paper read before the Medical Missionary Conference in Andrews BJ, “tuberculosis and the assimilation of germ theory in China, 1895-1937” Journal of the history of medicine and allied sciences 52(1), 1997, pp.114-57.

    15) Hobson B, A medical vocabulary in English and Chinese, (Shanghae Mission Press, 1858), p. 34.

    16) 한의학에서‘勞瘵’와‘虛勞’는 상호 구분되는 질병명이었고 동일하게 취급되지는 않았다. 그

  • CHOI Eun Kyung :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and Change of Term of ‘Tuberculosis’ in Korea

    │ 醫史學236

    합시켜 ‘勞病’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때 기존 한의학에서 쓰였던 ‘勞病’보

    다 말 그대로 ‘소모성 질환(wasting disease)’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홉슨이

    ‘tubercle’17)을 번역하고자 했을 때 한의학에 있던 ‘結核’ 등의 용어를 사용하

    지 않고 한문을 음차하여 ‘都比迦力’로 표현하였다.18) 왜 홉슨이 ‘tubercle’을

    한문용어로 개념을 빌리지 않은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해부병리적 용어

    같은 경우는 기존 한의학에서는 개념화되어 있지 않다고 여기고 서양의학용

    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기는 방식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부병리적 용어

    를 번역할 때에는 ‘勞’와 같은 증상과 질병을 표현하는 용어를 번역할 때보다

    더 엄밀하고자 했을 수 있다.

    홉슨의 『西醫略論』에 나오는 ‘勞症’에 관한 설명에서도 유사한 특징을 발

    견할 수 있다.19) ‘勞病’ 항목에서 “勞病은 폐에 생기는 모래 같은 견고한 알맹

    이로 인해 생긴다. 이는 嘟吡叻라 부른다.(勞病因肺體生堅粒如沙。番名嘟吡

    叻。)”라고 ‘tubercle’을 소개하고 이것이 점점 커지면서 병이 생긴다고 설명

    하고 있다. 한편 증상에 대해서는 “사레들린 피가 나온다. 점차 기가 단축된

    다. 호흡이 빠르게 변한다.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진다. 수족이 수척하고 허

    약해진다. 목이 길고 가늘게 변한다. 흉곽이 좁게 변한다. 흉곽을 움직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음식을 소화할 수 없다. 옆으로 누

    울 때 불안해진다. 맥이 미세하나 빨라진다. 심박이 빨라지고 담이 많아진다.

    혹은 기침할 때 피가 섞인다. 흉곽에 통증이 생긴다. 흉부음이 맑지 못하다.

    러나 Hobson은 둘 중 명확하게 한 쪽을 염두에 두고‘勞’개념을 사용한 것 같진 않다. 적어

    도 Hobson이‘肺勞’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때 이는 한의학에서‘虛勞’의 증상 중 하나인 ‘肺勞’

    와는 다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7) 서양의학에서‘tubercle’은 1689년 리차드 모튼(Richard Morton)이‘Phthisiologia’에서 처음

    언급하였다. 그는‘phthisis’에 관해 논하면서 이것이 기존‘scrofula’병변과 같은 유사한 일종

    의‘tubercle’을 폐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18) Hobson B, ibid., 1858, p. 40. 한의학에서의 結核은 ‘살갗 속에 멍울이 생기는 병’으로 보

    통 일컬어진다. 『千金要方』 제23권에서“이런 증상은 살갗 속 근막(筋膜)의 바깥에 생기는

    것으로 멍울이 맺히고 단단하지만 아프지는 않다.”라고 하고 있다. (출처: 「한의학지식정

    보자원」 http://jisik.kiom.re.kr/)

    19) 최한기는 『身機踐驗』(1866)에 이를‘勞病’으로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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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37

    낮지만 쉰 목소리가 나온다.(血嗆出。漸至氣短促。行動呼吸更促。困倦無精

    神。手足疲軟羸瘦。頸變細長。胸膈變窄。操作辛苦則。汗出瀉泄。食物不

    消化。夜臥不安。脈微細而數。心跳多痰。或欬血。胸膈時痛。聲音不淸。

    久聲低而啞。)”라고 설명한다. 자세한 진단학적 내용이 추가되어 있지만 목

    이 쉬고, 마르고, 기침과 객혈, 오한 등은 ‘勞瘵’의 증상에 관한 한의학적 설명

    과 상당히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홉슨이 설명한 ‘勞病’은 질병의 경과나 예후 등에 관해 자세하게 기술

    하고 ‘氣’나 ‘蟲’과 같이 서양선교사들이 보기에 미신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등

    기존의 한의학적 설명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勞瘵’와 비교

    했을 때 증상 설명이 유사했고 병의 원인에 대해서 크게 다른 설명을 제공하

    지 않았다. 특히 당시 서양의학은 세균이론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

    문에 전염 등의 성격보다 기후, 유전, 습도, 성교를 포함한 과도한 일 등의 요

    소를 강조하였고 중국 사람들에게 ‘phthisis’는 ‘勞瘵’를 연상시키는 ‘勞病’으

    로 크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20)

    3. 개항기와 대한제국시기의 ‘결핵’의 발견

    『身機踐驗』(1866)은 최초로 국내에서 서양의학의 개념들을 자세하게 도입

    한 기념비적 저작이지만 당시 국내에서의 영향력은 미비했다. 1876년 개항

    20) 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부모로부터 누적된 것일 수도 있다. 병

    의 성질이 서로 교환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혹은 신체가 허약해서일 수 있다. 습지에 거

    주하고 의복이 얇고 냉풍이 엄습해서이다. 혹은 기후의 춥고 더움이 갑자기 변화해서일 수

    있다. 혹은 더운 지방 사람이 추운 지방으로 옮겨서일 수 있다. 혹은 음식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혹은 실내가 지나치게 혼탁해서일 수도 있다. 바람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고

    생스럽게 노동하고 지쳐서일 수도 있다. 혹은 성교와 수음 때문일 수 있다. 부인의 경우 血

    崩(월경 외 대량 출혈) 때문일 수 있다. 혹은 갓난아기에게 수유를 지나치게 오래해서일 수

    있다. (病原或因父母延累。性質易患此證。或因身虛。居處濕地。衣服單薄。冷風吹襲。

    或天時寒熱驟變。或熱地人。遷居冷地。或食物不足。或屋內臭濁。不通風氣。或辛苦勞

    倦。或房勞手淫。婦人或血崩。或乳哺嬰兒太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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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38

    후 국내에서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시술되기 시작하면서 결핵 또한 서양의

    학의 개념 하에 설명되고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 조선

    사회 내 결핵에 대해 발견하고 치료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서양선교의사들 혹

    은 일본에서 서양의학을 수련 받고 조선으로 건너 온 일본의사들이었다. 그

    리고 이 시기는 코흐의 결핵균 발견(1882년)으로 서양의학 내 결핵에 대한 개

    념도 큰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 내 서양의학 시술자

    들의 결핵에 대한 인식과 치료 행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1)�서양의학�시술자들이�본�조선�내�‘최초’의�‘결핵’

    일본 의사든 서양 선교의사든 각국에서 결핵에 관한 경험들을 많이 갖고

    있었으며, 조선에 도착하고 본격적으로 의술을 펼친 이후에도 조선 내 결핵

    이 얼마나 많은지 등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조선 땅에 결핵

    이 많은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 예를 들어 부산 제생병원 원장을

    지낸 일본 육군 군의관 고이케 마사나오(小池正直)가 쓴 『鷄林醫事』(1887)는

    ‘조선에서는 폐결핵이 적은 편이고 주로 腺病이 많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21) 서양 선교의사들은 보고서 통계를 통해 phthisis(consumption)가 많은 것

    으로 적고 있다.22) J. Hunter Wells는 조선에 “scrofula와 tuberculosis는 매

    우 유사하고 흔하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한 바 있다.23) 특히 1년 차로 씌여진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1886)과 『鷄林

    醫事』(1887)는 서로 결핵에 대한 통계나 인상이 달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우선 알렌(H.N. Allen)과 헤론(J.W. Heron)이 미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제

    출한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1886)는 현

    재로서 찾아낼 수 있는 서양의사들이 관찰한 조선 내 결핵에 관한 최초의 기

    21) 小池正直, 『鷄林醫事』, 1887, 下篇, 第四章

    22) Allen and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Avison, Annual Report of Imperial Korean Hospital. (Seoul, 1901).

    23) Wells,“Medical Impression”, Korean Repository. 1896. Wells는 1895년 6월 평안도 지역에 도착하여 의료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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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39

    록이다. 여기서 알렌은 병원을 방문한 외래환자 통계에서 총 476건의 호흡기

    계통 질환자 중 50건의 ‘phthisis’(10.5%)가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외래환

    자 분류에만 ‘phthisis’가 표기되어 있고 입원환자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기 때

    문에 대다수 결핵(phthisis) 환자들을 간단한 외래 치료 외에는 돌려보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선교의사들이 낸 두 번째 통계 기록은 에비슨(O.R. Avison)

    이 출간한 『Annual Report of Imperial Korean Hospital』인데, 총 80건의 호

    흡기계통 질환자 중 ‘phthisis(consumption)’이 20건(25.0%)이라고 통계내고

    있다. 그리고 어떤 치료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명의 ‘phthisis’를 입원시킨

    것으로 통계에 나와 있다.

    알렌은 진단 과정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phthisis’ 분류 과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보고서에 알렌은 ‘우리는 현미

    경도 없고 사후부검도 할 수 없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건데 아마 기본적인

    증상에 기반을 두어 판단했으되 청진기, 타진 등의 도움을 얻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반면 Avison은 보고서에 특별히 결핵(tuberculosis)에 관한 주석을

    달았는데, “누군가는 조선에 결핵이 없다고 하지만 여기 적힌 거의 모든 사례

    는 객담에서 특정 균을 검출한 것이다.”라고 이들 환자를 객담 균을 통해 확

    진했음을 밝히고 있다.

    반면 『鷄林醫事(1887)』에서 고이케는 조선의 내과계 질환 중 제1위를 소화

    기병, 제3위를 호흡기병으로 꼽으면서 ‘호흡기병 중 肺勞症이 가장 적다.’라

    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肺勞’ 및 ‘腺病’에 대해 ‘환자표에 明治 13년(1880년)

    7월 중 肺癆 1인이 있고 明治 14년(1881년) 2월부터 매월 1-2명의 폐환이 기

    록되나 明治 15년(1882년) 9월까지이며 明治 15년(1882년) 10월부터 다음 해

    3월에 이르기까지 1인의 환자도 없고 明治 16년(1883년) 4월 즉 내가 담당한

    후부터 明治 17년(1884년) 3월에 이르기까지여 이를 목격하는 것도 어려웠

    다.’라고 하고 있다. 고이케는 기생충질환에 대한 기록도 남겼기 때문에 현미

    경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구체적으로 객담 내에서 결핵균을 검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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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40

    병의 분류가 다르고 진단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아 실제로 당시 조

    선 내 결핵이 많았을지 아닐지를 이들 보고서를 보고 추론하기는 힘들다. 진

    단 방식의 차이로 결핵 유병률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24)

    유병률 차이에 대한 미심쩍음이 있지만, 서양의학 시술자들은 ‘phthisis’, ‘肺

    勞症’ 등의 언어를 사용하여 조선 내 결핵 유병률을 파악하였다.

    24) 그러나 이들 보고서들 간에 더욱 두드러지는 차이는 서양의학 시술자들이 조선인 환자

    중 객혈 환자를 비롯한 호흡기 환자에 대해 의심한 질병의 차이이다. 적어도 서양 선교

    의사들은 객혈의 증상이 있을 때‘distoma’를 먼저 의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알렌은 92

    건의‘Haemoptysis’은 분류 3(순환계통질환) 하에 넣고, 18세기 중반부터 이미 객혈

    (Hemoptysis)은 폐와 호흡기계통에서 나오는 피로 정의되어 있었다. 알렌(혹은 헤론)이

    왜 객혈을 순환계통 질환 하에 분류했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선 간단하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알렌(혹은 헤론)이 여러 가지 이유로 토혈과 객혈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

    였지만 디스토마를 포함한 호흡기질환을 강하게 의심하면서 이렇게 분류했을 가능성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수의 distoma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에비슨은

    결핵(tuberculosis)에 대한 주석에서 결핵에 관한 이야기보다 폐 디스토마에 관한 사항을 더

    많이 서술하면서 디스토마를 ‘endemic haemoptysis’라고 표기하고 있다.

    서양선교의사들과 달리 일본인 의사 고이케는 『鷄林醫事(1887년)』에서 우선 조선에 디스

    토마가 있는 것은 보았지만 약 천 여명의 환자를 보았음에도 이 병을 가진 환자는 적었다

    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디스토마가 일본의 의식주 등 생활환경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자신

    의 스승 바엘즈의 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의학계에 최초로 폐 디스토마를

    보고한 사람은‘열대의학’의 창시자인 패트릭 맨슨(Patrick Manson)으로써, 당시 동경대에

    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에윈 바엘즈(Erwin Baelz)와 함께 1882년 Distoma ringeris 발견

    을 보고하였다. ‘풍토성 객혈(endemic haemoptysis)’라고 지칭한 것 역시 맨슨이었다. 맨

    슨은 이 병이 디스토마에 의해 유발되며, 동아시아라는 특정 지역에만 분포하나 중국 본토

    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일본, 대만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흥미로운 지역적 한정성을 보인

    다.’ 라고 보고하였다. 즉, 이 질병은 중국 본토에는 없으나 일본, 대만 등 열도에는 분포하

    는 중간 숙주에 의해 유발된다고 보았고 이것이 위도나 온도보다는 일본이나 대만 등지의

    토양이나 기후와 관계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맨슨은 이것이 일본과 대만의 급수 위생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은사 바엘즈의 말에 수긍하였지만 지금은 조금 깨달은 것이 있다. 그러

    나 이 설의 맞고 틀림을 증명하는 것은 먼저 외부인의 의식주과 체력을 검사한 연후에 이를

    우리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小池正直. 앞의 책, 1887, 下篇, 第四章.)

    즉, 서양 선교의사들은 객혈 등의 증상에 대해 디스토마 등의 풍토병의 가능성을 항상 염

    두에 두고 있었으며, 알렌 같은 경우에는 현미경으로 확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를 강

    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고이케 같은 일본 의사들은 서양 선교의사들과 달리

    폐 디스토마 같은 질환이 동아시아, 특히 일본 등지에만 존재하고 생활환경과 관련이 있다

    는 말을 인정하기 어려워하거나 달리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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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41

    2)�‘부족증’과�‘해소병’으로의�번역

    개항 후 1885년 제중원 설립, 1897년 종두의 양성소 설립, 1899년 의학교

    의 설립 등으로 조선 내에서도 자체적으로 빠르게 서양의학이 수용되기 시작

    하였다. 이 중 의학교나 제중원 의학교는 본격적으로 결핵 등에 관한 서양의

    학적 지식들이 학습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의학교는 민간의 근

    대의료인력 양성기관 설립 청원 운동에 힘입어 설립된 의학교육기관으로서

    그 의의가 컸다. 1899년 7월 7일 제정된 을 보면 의학교의 수학

    (修學) 과목으로 동물, 식물, 화학, 물리, 해부, 생리, 약물, 진단, 내과, 외과,

    안과, 부영, 위생, 법의, 종두, 체조 등을 배워야 했다고 규정하고 있다.25) 이

    들 과목명만으로 결핵에 관한 내용이 교육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의학교

    의 일본인 교사 후루시로 우메타니(古城梅溪), 고다케 다케시(小竹武次), 그

    리고 일본에서 의학을 수학한 후 의학교 교사로 부임한 김익남(金益南), 안상

    호(安商浩) 등이 일본 현지에서 결핵 환자를 자주 경험했을 것이고 이들의 경

    험이 교육에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된다.26)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당시 발행된 결핵에 관한 지식이 담겨진 국문 서양의

    학 교과서는 각각 1906년과 1910년에 제중원(1910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에

    서 출판한 『외과총론』과 『진단학』이다.27) 이 책은 에비슨의 주도 하에 세브란

    스의학교 1회 졸업생 중 한 명인 김필순 및 홍석후에 의해 번역된 것으로써,28)

    『외과총론』의 제3장 ‘창상전염병론’ 중 ‘전염성육아종양’이란 분류 하에 결핵

    25) 『大韓帝國官報』. 1899.7.7.

    26) 김익남(金益南:1899년 졸업), 안창호(安商浩:1902년 졸업)이 졸업한 동경자혜의원의학

    교(東京慈恵医院医学校)는 사립학교로서 동경자혜의원(東京慈恵医院) 부속 학교였다. 동경자혜의원(東京慈恵医院)은 1902년 경에 이미 입원환자 수가 實人員 387명, 延人員 13,511명에 달하는 동경 내 큰 병원이었다.済生会, 大日本施藥院小史(東京:済生会, 1911), pp.127-38. 그리고 東京은 1908년에 이미 폐결핵 환자 사망자 수가 인구 1만 당 24.06명,

    총 사망자 수 1천 명 당 160.34명에 달해 있었다. 東京市統計図表(東京:東京市, 1914) 第十三.

    27) 어비신^김필순 역, 『외과총론』 (황성:세브란스의학교, 1910): 어비신^홍석후 역, 『진단학』

    (황성:제중원, 1906).

    28) 여인석, 「서양의학의 토착화와 제중원의학교」, 『延世醫史學』, 11-1, 2008, 2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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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42

    (結核)이라는 항목이 설명되어 있다. 『진단학』에서는 ‘급성속립결핵증’의 객

    담을 감별하는 법을 싣고 있고 ‘미균(黴菌)’ 항목에 결핵균의 현미경적 검사에

    관해 적고 있다. 『외과총론』과 『진단학』의 원본이 무엇인지는 현재까지는 알

    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번역된 총 30종의 교과서 중 상당수가 일본책을 원본

    으로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 두 교과서 또한 그러하리라 짐작된다.

    이를 통해 볼 때 결핵균에 관한, 그리고 결핵의 병리학적^진단학적 특징

    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풀이된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적어

    도 1900년경부터 일본의학용어로부터 결핵(結核)이란 단어를 빌어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서양의학 교과서의 국문 번역 과정에서도 활용했다는 점이

    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인 지식인 사회에서 빠르게 결핵이란 병명을 사용하

    기 시작한 것에서 나타난다. 현재까지 조선말 개화기 자료 중 결핵(結核)이란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899년 11월 25일 독립신문의 「우육검사」라는

    기사이다.29) ‘폐결핵(結核)증’이 있는 소의 고기를 먹으면 사람에게 전염됨을

    경고하는 기사로서, 당시 중요한 우육 위생에 관한 지식과 더불어 ‘병든 소고

    기’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기사이다. 『외과총론』과 『진단학』, 그리고 신문 기

    사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서양 의학을 접하면서 결핵(結核)이란 단어가 이 무

    렵부터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병리학적

    개념인 결핵(結核)이 쉽게 대중적이거나 임상적인 병명이 되기는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1861년부터 결핵 환자에게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병변에 대

    해 결핵(結核: tubercle)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30) 그러나 이는 결핵

    이란 질환 전체를 지칭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라에넥의 이론 이후에도 일본

    의 병리학자 및 의사들은 상당 기간 동안 ‘결핵(結核:tubercle)’과 ‘폐로(‘肺癆’:

    consumption)’가 서로 구분되는 증상이며, ‘결핵(結核)성 조직 변화’는 여러

    종류의 질병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31) 실제로 코흐에 의해

    29) 「우육검사」, 『독립신문』, 1899년 11월 25일.

    30) Karl Wunderlich, “肺病論[On Consumption]” (1861), trans. Sato Shochu: Johnston W,

    ibid, 1994.에서 재인용

    31) 桑田衡平 譯, 『病理新説』,(東京:島村利助等, 1876), 제11권.

  • 최은경 : 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43

    결핵균이 발견되고 나서야 결핵(結核)이란 용어가 이 병 전체를 지칭하는 용

    어가 될 수 있었지만, 한동안 임상적으로는 혼동된 채 사용되었다.

    일반인들이나 지식인들에게도 ‘결핵(結核)’이란 단어 그대로 사용되기는

    어려웠다. ‘결핵(結核)’은 병의 원인과 증상을 연결하는 병리학적 개념에 가까

    웠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애국계몽지식인들은 ‘결핵’이란 병명보다 ‘폐병’, ‘부족증’, ‘뇌점충병’이란 단

    어를 더 선호하였다.32) 개화기 이후 강조된 이 질병의 무서움은 ‘점점 마르면

    서 죽어간다’는 의미를 지니는 ‘phthisis(소모증) 혹은 consumption’이라는 병

    명 자체에 있었다. ‘부족증’은 『독립신문』에 1887년 6월 17일부터 7월 24일까

    지 연속으로 개제한 동물에 관한 논설 중 7월 22일자에 처음으로 등장한다.33)

    7월 22일자 논설은 견갑류, 문어와 더불어 미생물을 다루는 논설이다. 이 논

    설에서 미생물의 전염성을 다루면서 이 병에 의해 전염되는 병들은 “담병과

    림질과 력질과 괴질과 염병과 운긔와 부하 병과 부죡증과 리질과 모든 학질과

    기외 다른 병들”이라고 적고 있다. 1909년 3월 16일자 신한국보 기사 「의학회

    의 설명서」에는 좀더 자세한 병에 관한 설명이 나와 있다.34)

    “근래 호놀룰루에 부족증으로 매년에 죽는 사람이 많으니 이 병

    은 부모의 혈육에서 전하여 오는 병이 아니라 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 독한 충이 서로 전염되어 퍼지게 하는 것이라. 여러 명의

    의 말에 부족증(혹은 해소병)은 이 병든 사람이 만일 병이 깊어지

    기 전에 조심하여 이 아래 방법대로 행하면 고치기가 어렵지 아니

    하다 하니 조심하여 볼 지로다.

    이같은 부족증은 흔히 그 앓은 자의 침과 가래(담)에서 전염되

    는 것이니 이 병든 자가 마땅히 기침하여 올라온 침이나 가래침은

    다시 삼키지 말고 곧 모아 종이에 싸서 불살라 버릴 것이오. 또 이

    러한 침과 담을 방바닥에나 행길에 뱉지 말지니 이러한 침 한 방울

    32) 「一日부터 實施된 肺結核豫防法」, 『每日申報』, 1918년 3월 6일.

    33) 「논설」, 『독립신문』, 1897년 7월 22일. 부족증이란 단어는 일본 의학자들도 조선에서 쓰이

    는 명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大澤勝,「朝鮮ニ於ケル結核(內科的 方面)」, 『朝鮮醫學會雜

    誌』 (37호, 1922), 1-34쪽

    34) 「뇌점충병(부족증) 토멸하는 방법」, 『신한국보』, 1909년 3월 16일

  • CHOI Eun Kyung :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and Change of Term of ‘Tuberculosis’ in Korea

    │ 醫史學244

    이 땅에 떨어져 말라 먼지가 되어 다른 사람의 폐경에 들어가 능히

    수십인을 상할 터이니라.”

    이 기사에서 「의학회의 설명서」는 호놀룰루 학생의원이 출간한 것으로 되

    어 있다. 즉, 호놀롤루의 미국 의학생들이 출간한 의학 관련 계몽서 중 일부

    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유추하건데, ‘부족증’이란 단어 역시 ‘consumption’

    의 ‘소모하다’라는 의미를 그대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1910년대 재외 한인

    들 또한 부족증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에는 ‘부족증’에 걸

    린 한인학생 김와실리씨가 러시아 지방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김씨의 병을 구

    원할 목적으로 권업회 종람소에서 연극회를 열였다는 기사가 실린 바 있다.35)

    이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재외 한인, 주로 지식인들 사이에

    서는 이 병에 관해 세간의 관심을 갖고 작지만 상호 부조 활동을 벌일 만큼 질

    병에 대한 경각심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부족증’, ‘뇌점충병’ 외에도 ‘해소병’이란 단어도 많이 쓰였다.36) 해소병은

    서양 선교사들이 ‘consumption’을 번역한 단어이다. 당시 서양선교사들은 서

    양의학을 시술하거나 선교활동을 펼칠 목적으로 질병 명칭 등을 적당한 용

    어로 번역하였다. 게일(James Scarth Gale)이 1897년 펴낸 ‘Korean-English

    Dictionary:한영자뎐’을 보면 콜레라를 ‘회통(回痛)’, ‘곽긔(癨氣)’, ‘곽란(癨

    亂)’, ‘괴질(怪疾)’, ‘쥐통’ 등으로, 두창을 ‘시두(時痘)’, ‘두역’ 등으로, 매독을 ‘

    창병(瘡病)’, 혹은 ‘창질(瘡疾)’로 번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37)

    마찬가지로 이 사전에는 결핵(consumption)을 ‘해소(咳嗽)’ 혹은 ‘해소병

    (咳嗽病)’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결핵의 증상 중 하나인 기침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엄밀한 의학적 용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게일 등은 당시 조선에서

    증상을 표현하는 언어를 주로 병명으로 활용하였고 결핵 역시 정확한 의학

    35) 「김씨를 위하는 연극」. 『권업신문』. 1913년 11월 23일

    36) 신한국보, 앞의 기사. 1909년 3월 16일. 이 기사를 보면 뇌점충병=부족증=해소병이라고

    나와 있다.

    37) Gale, James Scarth. 한영[자]뎐. Yokohama: Kelly & Co.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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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45

    적 정의보다는 증상을 통해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단어를 썼을 것으로 생각된

    다.38) 그 이후에도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결핵을 ‘해소병’이라 불렀으며,

    1912년 무렵에는 ‘Consumption; It’s Prevention and Cure; 해소병 고치는 법

    (A.H.Norton 著)’라는 책도 출판하였다.39)

    ‘부족증’ 혹은 ‘해소병’ 등의 단어는 일제강점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적어도 1920년대 이전까지 조선 내 지식인, 일반인들은 ‘부족증’이란 단어와

    결핵이란 단어를 병용해서 사용하였다. 1920년대 이후 조선에서 발행된 『조

    선일보』, 『동아일보』 등에는 대다수 ‘폐병’, ‘結核’을 사용하여 조선인 지식인

    사회에서는 본 용어가 정착됨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정석태처럼 이들 속명

    이 문명이 미개한 상태에서 나온 ‘무식한 용어’라고 질타의 대상이 되었던 점

    도 한 몫 하였다.40)

    그러나 1930년대에도 조선 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부족증이란 단어가 성

    행했으며, 이는 김동익(金東益)의 기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41) 그는 ‘폐결핵

    에 대한 조선 속명’이란 제목 아래 “폐결핵을 조선 속명으로 번역하면 부족증

    (不足症)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재래로 가정에서 말삼하시기를 부족증은 남자

    에게만 있는 병으로서 그 원인이 과색(過色)을 하기 때문에 몸에 수긔가 말라

    서 음허화동(陰虛火動)이라 하였고 만일 여자에게 이와 가튼 병이 생기면 부

    족증이라 아니 하고 『로점』이라고 일러왔습니다. 그런데 여러 환자를 진찰한

    결과로 미루어 보면 가정에서 말삼하시는 남자의 부족증은 확실히 이 폐결핵

    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폐결핵은 부족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자

    가 폐결핵에 걸려도 역시 부족증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하필 따로

    38) 게일(Gale)은 한영 번역과정에서 여러 질병의 증상을 나타내는 민간 용어를 병명으로 번역

    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른‘demon’,‘spirit’등의 단어를 많이 활용하였다. Gale의 관심

    사는 정확한 질병 개념을 번역하기보다는 민간의 용어를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

    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39) 『Korean Mission Field』. 1912년 9월호. 광고 282쪽

    40) 鄭錫泰,「肺結核病과 人生觀」, 『每日申報』, 1927년 2월 16일

    41) 金東益, 「요사이 꼿철에 더욱 만흔 폐병 증세, 예방 치료 근년에 와서는 해마다 폐병자가 늘

    어간다(二)」, 『동아일보』, 1932년 5월 15일

  • CHOI Eun Kyung :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and Change of Term of ‘Tuberculosis’ in Korea

    │ 醫史學246

    히 『로점』이라고 할 필요가 없는 줄로 생각하야 일로부터는 남녀를 물론하고

    폐결핵을 부족증이라고 번역하겠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42) ‘해소병’ 역시

    단순한 기침 증상을 의미하는 것부터 결핵에 대한 지칭까지 광범위하게 사용

    되었다. ‘결핵’이란 질병명 대신 이러한 속명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점은

    상대적으로 개항 후부터 일제강점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일반인들에게 ‘결핵’

    이란 질병명이 쉽게 확산되기 어려웠음을 보여 준다. 일본인들과 지식인들은

    이들 속명의 사용을 미개한 것으로 여기거나 적어도 이들 속명의 사용으로 인

    해 결핵의 정확한 통계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4. 결론

    결핵(tuberculosis)이란 병리학적 개념이 전체 질병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

    용된 것은 19세기 말 병리학의 발전, 결핵균의 발견에 힘입은 것이다. 개항

    이후 서양 의학을 접하고 그 지식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회는 결핵이

    란 질병의 개념을 새로 도입하는 한편 과거의 개념과 단절하였다. 과거에

    ‘phthisis’와 유사한 질병을 지칭한다고 여겨졌던 ‘勞瘵’는 서양의학을 접하면

    서 한의학적 개념으로 국한되었으며, ‘phthisis’와 ‘tuberculosis’를 번역한 용

    어들이 새로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된 질병명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다양했다. 새로

    42)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부족증(不足症)이란 단어가 또한 이 병명이 과거 한의학의 勞

    瘵와 유사한 병인론, 즉 과로한 성행위 등을 내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족증(不足症)이 과도한 성행위로 발생한다는 개념은 이 병이 남녀 간에 특징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

    여졌다. 여성의‘로점’이‘결핵’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병인론의 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리고 적어도 일반 조선인들 사이에서 결핵은 친숙한 단어가 아니었고 보다 대중적인 속명

    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동익(金東益) 또한 부족증이란 단어를 모

    조리 부정할 수 없었고 폐결핵과 유사한 개념으로 동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술과 과도한

    성관계가 결핵에 대한 저항력을 약하게 할 수 있어 피해야 한다는 견해는 1930년대 서양의

    학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金東益, 앞의 기사, 『동아일보』, 1932년 5월 15일.

  • 최은경 : 개항 후 서양의학 도입과 ‘결핵’ 용어의 변천

    제21권 제2호(통권 제41호) 227-250, 2012년 8월 │247

    이 번역된 질병명들은 주로 ‘결핵’의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었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서양의학 시술자들이 조선 사회에 들어와서 ‘결핵’을 발견

    하고 치료하기 시작했을 때 세균 이론과 가장 최신 의학적 지식을 내포하는

    ‘tuberculosis’를 번역한 용어는 ‘결핵’이었다. 하지만 기침과 같은 증상에 주

    안점을 둔 ‘해소병’이나 ‘phthisis’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에 주안점을 둔 ‘부족

    증’ 또한 널리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다. 비록 서양의학 시술자들은 결핵균의

    발견으로 결핵의 원인 및 진단에 있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조선

    사회에서 결핵이란 질병에 대한 용어를 통일하지는 못했다.

    일제강점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는 일본의 병리학 용어인 ‘결핵’으로 정리되

    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부족증’과 ‘해소병’ 또한 널리 쓰이는 단어였다. ‘勞

    瘵’나 ‘勞症’ 또한 한의학적 개념이었으나 ‘phthisis’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

    되어 계속 사용되었다. 이러한 단어 활용은 일제강점 이후에도 결핵 유행에

    관한 기본적인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색인어: 결핵, 서양의학의 도입, 부족증, 해소병, 노채, 질병명

    투고일 2012. 7. 2 심사일 2012. 7. 17 게재확정일 201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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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醫史學250

    -Abstract-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and Change of Term of

    ‘Tuberculosis’ in KoreaCHOI Eun Kyung*43)

    Institute of Medical History and Cul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Seoul, KOREA

    In this article, I figured out ‘tuberculosis’ as prominent example of

    relationship between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and change of

    disease term. Tuberculosis is one of the examples of incomplete substitution

    of oriental/lay/non-scientific disease term by western/scientific disease

    term in colonial society.

    Western medicine practitioner in Korea had started to find and treat

    tuberculosis right after Koch’s discovery of the tubercule bacillus(1882).

    It was ‘kyulhak(결핵)’ that includes germ theory and the newest medical

    knowledge, but ‘heasobyun(해소병)’ which means coughing disease, and

    ‘bujockjung(부족증)’ which means consumptive disease were also newly

    introduced as lay term. There also had been traditional term ‘nochae(노채,

    勞瘵)’, which already recognized as similar term of phthisis, redefined as only oriental medicine term after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Despite

    of reception of the term ‘kyulhak(결핵)’ in Korean society, these terms

    were widely used instead of ‘kyulhak(결핵)’ during the colonial period.

    Keywords : tuberculosis,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bujockjung’, ‘hea-

    sobyun’, ‘nochae’, disease term

    *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 (NRF-2010-371-E00002)

    * Corresponding author: CHOI Eun Kyung

    Institute of Medical History and Cul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101 Daehak-ro,

    Jongno-gu, Seoul 110-744, KOREA

    E-mail: [email protected]

    Recived: Jul. 2, 2012; Reviewed: Jul. 17, 2012; Accepted: Jul. 31, 2012

    Korean�J�Med�Hist�21�ː227-250�Aug.�2012� pISSN�1225-505X,�eISSN�2093-5609

    ⓒ The�Korean�Society�for�the�History�of�Medicine� http://medihist.kam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