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7 古典의 숲속으로 | 소장 희귀본 동쪽 나라에서 발간한 세계적인 의서 <동의보감>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있던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허준에게 의학서적을 편찬하라는 명을 내렸다. 전란 통에 죽거나 다치는 백성이 많아진 데다 전염병까지 겹쳐 의원과 약재가 너무나 부 족했기에, 경험이 많지 않은 의원이나 선비들도 손쉽게 활용할 종합적이면서도 간편한 의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선조실록>에는 이 날의 이야기가 실리지 않았지만, 이 책이 완성되자 대제학 이정귀가 <동의보감> 머리말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선왕께서) 병신년(1596)에 태의(太醫) 허준을 불러 하교하셨다. ‘요즘 중국의 방서(方書)를 보니 모두 베껴 모은 것들이라 자질구레해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그대가 여러 학자들의 의술을 두루 모아 하나의 책을 편집하도록 하라. 사람의 질병은 모두 조섭을 잘하지 못한 데서 생기니, 섭생(攝生)이 먼저이고 약석(藥 石)은 그 다음이다. 제가의 의술은 매우 넓고 번잡하니, 모쪼록 긴요한 부분을 가려 모으라. 외진 시골에는 의약(醫藥)이 없어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에는 향약(鄕藥)이 많이 생산되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는 약 초를 분류하면서 우리말 이름을 함께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조선시대에는 약재 값이 비싼데다 의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의료혜택을 받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의원이 많지 않은 지방에서 는 선비들이 의서를 참조해 증세에 적합한 처방을 선택해야 했는데, 조선 실정 과 맞지 않는 의서가 많아서 의원들도 적합한 처방을 찾기가 어려웠다. 방대한 처방을 찾아보기 쉽게 만든 책 선조의 첫째 요청은 ‘중국 의서를 베껴 모으지 말라’는 것이다. 허준 이전의 조 선 의학은 중국 금원(金元) 4대가의 의학을 받아들여 정리하는 수준이었는데, 가능하면 많은 의서를 수집하다 보니 세종이 편찬케 했던 <의방유취(醫方類 聚)>는 365권이나 되어 의원들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성종 때에 266권으로 줄여 개정판을 내기는 했지만, 의료현장에서 활용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금원 4대가의 의학을 정리한 <의학정전(醫學正傳)>을 바탕으로 허준의 스승인 양예수가 중국의 풍부한 임상경험과 의학이론에 조선의 약재를 보완해 <의림촬 요(醫林撮要)>를 출판했다. 이 책으로 의학을 배운 허준이 중국의 의서에 바탕 한 것은 사실이나, 수많은 책을 참조하면서도 나름의 철학과 우주관으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선조의 두 번째 요청은 ‘섭생(攝生)이 먼저고, 약석(藥石)은 그 다음’이라는 것 이다. 병에 걸린 뒤에 약을 쓰기보다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소개하라는 것인 데, 약재가 부족한 시대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허준은 이에 제1부 「내경편(內景篇)」에서 도가적(道家的) 양생론(養生論)을 펼치면서 풍부한 임상 경험과 의학이론을 조화시켰다.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과 땅, 사람을 하나의 우주로 상정하여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를 그리고 책머리에 편집했는데, 천원 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맞게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는 둥글게, 땅을 나타내 는 몸은 평평하게 그리고, 척추로 연결시켰다. 오장 육부가 머리와 연결된 것이 서양의 해부도와 다른 점이다. 선조의 세 번째 요청은 ‘번잡한 의술을 긴요하게 가려 모으라’는 점이다. 이정귀 는 “서적이 많아질수록 의술은 더욱 어두워져 <영추(靈樞)>의 본지(本旨)와 크 게 어긋나지 않는 의서가 드물게 되었다. 평범한 의원들은 의술의 이치를 깊이 알지 못해 의경(醫經)의 뜻을 벗어나 자신의 견해만 고집하거나, 기존의 방법에 만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른다. 어느 약,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혼자서는 판단하 지 못하고 병세에 맞는 의술의 열쇠를 찾아내지 못해, 사람을 살리려 하다 도리 어 죽이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개탄하였다. 그래서 허준은 시골 의원들도 증세 에 맞는 처방을 선택하기 쉽도록 체계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의서를 만들어냈다. 이정귀가 “이 책은 고금의 서적을 포괄하고 제가(諸家)의 의술을 절충하여 본 원(本源)을 깊이 궁구(窮究)하고 요긴한 강령 을 제시하여, 그 내용이 상세하되 지리한 데 이르지 않고 간추리되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 습니다.”라고 칭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조의 네 번째 요청은 ‘시골에 의약이 없으 니, 약초의 이름을 우리말로 써서 백성들이 알 수 있게 하라’는 점이다. ‘의약’은 ‘의원과 약재’이니, 의원이 없거나 비싼 약재를 살 수 없는 경우에도 시골에 흔한 약초를 구해 치료 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허준은 시골 의원 보물 제1085-1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동의보감에 <1614년 2월 오대산사고에 내린다>는 내사기와 좌승지의 수결이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동의보감 언해본은 궁체로 쓰였다. 동의보감 첫머리에 실린 신형장부도 허준 초상(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동의보감 표지
2
Embed
동쪽 나라에서 - nl.go.kr · 8 9 글. 허경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자를 공동 문자로 사용하던 전근대 동아시아 각국의 문화 교
This document is posted to help you gain knowledge. Please leave a comment to let me know what you think about it! Share it to your friends and learn new things tog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