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 속 새로운 우주, 여럿webzine.kps.or.kr/contents/data/webzine/webzine/147620875610.pdf이렇듯 창발 하나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 그런데 물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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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첨단기술 JULY/AUGUST 2015 37
모래알 속 새로운 우주, 여럿
정 민 기
저자약력
정민기 박사는 POSTECH 신소재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KAIST
에서 물성실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CNRS/파리 11대학과 그레
노블 국립고자기장연구소(LNCMI)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스위스 로잔연방공
대(EPFL)에서 EPFL Fellow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전문분야는 극
저온 자기공명을 이용한 양자스핀계 연구다.
세상 모든 물질은 결국 원자들의 모임이다. 돌멩이, 금덩어
리, 플라스틱, 풀 한 포기 할 것 없이 모두 말이다. 서로 다른
물질이란 다른 종류 원자들의 모임이거나, 같은 원자들이 다르
게 모여있을 뿐이다. 무수한 원자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한
데 모여 물질로서 형태를 유지하는 건, 그들이 전자를 주고받
으며 결속을 다지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 사는 세상에서 노동
과 가치를 주고받으며 사회가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
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물질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큰 그림은 원
자와 전자가 발견되던 때부터 준비돼 있던 셈이다. 그들이 따
르는 근본적인 물리법칙 역시 비슷한 시기, 백 년 가까이 전에
이미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물리학적 관점에
서 물질을 연구한다는 건 준비된 밑그림에 색을 칠한다거나
규칙을 잘 아는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정도의 소일거리처럼 들
릴 수도 있겠다. 과연 그럴까?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선 이렇게 반론해 볼 수 있다.
화가들은 고작 몇 가지 물감으로 캔버스 위에 무한한 색감을
펼칠 수 있고, 음악가는 여든여덟 개의 피아노 건반만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축구며 바둑이며
규칙이야 정해져 있다지만, 어떤 경기와 대국이 펼쳐질지는 지
나봐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기율표에 오른 백여 가지 원
자들을 섞어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물질이란 끝도 없는 게 당
연하다.그림과 음악에 화풍과 장르가 생겨나듯, 또 축구와 바둑에서
전술과 기풍이 생겨나듯, 새로 물질을 만들면 전에 보지 못한
성질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사전에 새로운 단어를 추가하
며 달리 편찬하는 것처럼, 새로 만들고 발견하는 물질들을 올
바로 분류해가는 게 하나의 과제일 테다. 그러면, 물질을 탐구
한다는 게 단지 조합을 통해 생겨나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살
피는 일에 불과한 걸까?여기서 다시 한 번 원자와 물질을 각각 사람과 사회에 비유
해 생각해 보면 조금은 색다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물질이
상호 작용하는 무수한 원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처럼, 사회는 서
로 향을 주고받는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생겨난다. 사람 사이
에 서로 작용이 없는 사회란 더는 사회가 아닐 테다. 그런데
요즘 도시처럼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면, 사람들 각자
에게 돌릴 수 없는 사회 전체로서의 새로운 개념과 성질과 현
상들이 생겨난다. 윤리, 문화, 법, 시민의식 같은 것들 말이다. 바로 한동안 매체에 자주 오르내리던 ‘창발(創發; emergence)’ 또는 ‘떠오름 현상’이다.
창발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흰개미들이 흙과 나무를 뭉쳐 함께 만들어내는 거대한 탑은
높이가 수 미터에 이를 뿐 아니라 일종의 냉난방 같은 기능도
가진다고 한다. 이를 두고 개미 한 마리 한 마리가 목적을 가
지고 움직 다거나,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 행동했다고 생각하
기는 어렵다. 그 대신에 소위 떼 지능(swarm intelligence)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꿀벌들이 꿀이 있는 꽃의 위치를 동료에
게 알리기 위해 함께 추는 8자 모양의 춤(waggle dance)에서
도 볼 수 있다. 사실 앞서 언급한 그림의 화풍이며 음악의 장
르가 생겨나는 것도 일종의 창발이라 할 수 있는데, 그림의 아
름다움이나 예술적 가치는 사용된 물감들 각각의 색깔이나 분
자구조를 이해한다고 깨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원자들이 만들어낸 사회라 할 수 있는 물질에서
도 창발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게 전기
저항이 완벽히 사라지는 초전도(superconductivity) 현상이다. 보통 금속물질 내에서 전자의 흐름은 불순물이나 결함에 방해
를 받을 뿐 아니라, 전자들끼리 서로 밀어내는 상호작용 또한
전기 저항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데 초전도 상태에서 전자들
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행동하며 불순물과 결함
의 역할을 무력화한다. 게다가 이 속에서 전자들은 더는 서로
를 밀쳐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짝을 이뤄가며 움직인다. 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초전도 상태에서 전자들은 소위 짝짓기(pairing)를 한다. 두
전자가 서로 찰싹 달라붙는 건 아니지만, 멀찌감치서 서로를
의식하며 함께 움직임을 만들어 나간다. 게다가, 수많은 전자
가 수시로 서로의 짝을 바꾸는데, 그 집단적 움직임에 한 치
흐트러짐이 없다. 이를 두고 거대한 파티장에서 사람들이 상대
를 바꿔가며 왈츠를 추는 모습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애
당초 서로를 밀쳐낼 줄만 알던 전자들이 짝짓기하게 된 건 어
찌 된 일인가?물질 속에서 원자들은, 누구 하나 남다를 이유가 없기에, 서
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배열한다. 이들은 하나의
물리학과 첨단기술 JULY/AUGUST 201538
사회를 이룬지라, 주어지는 자극에 전체로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열(heat)이 침투해서 원자들을 흔들어대려
하면, 일부 원자들만 격렬히 흔들리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모
든 원자가 조금씩 움직임을 희생하며 전체로서 하나의 파동, 결 맞는 떨림을 만들어낸다.
초전도 상태에서 전자들은 이러한 원자들의 떨림을 주고받으
며 짝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공유를 통해 결속을 다지는 또 하
나의 예가 되는 셈이다. 주고받는 떨림이 원자들 모두로부터
한꺼번에 떠오른 현상이듯, 전자들의 짝짓기도 모두가 참여해
이뤄내는 현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렇게 하나 된 상태는 어
지간한 불순물이나 결함 따위에 결속이 흐트러지지 않기에, 결
과적으로 저항 없는 전류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창발 하나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런데 물질에
서 나타나는 창발에는 다른 데서 찾기 힘든 특별한 구석이 하
나 더 있다. 바로 심오하기로 소문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와의 만남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원자 수준의
작은 세상에서는 관심 있는 대상의 위치와 운동을 한꺼번에
정확히 짚어낼 수 없다. 이를 두고 대상이 입자성을 지니는지
파동성을 지니는지 잘라 말하기 어렵다며 입자-파동 이중성
(duality)을 말하기도 하고, 자연에는 근본적으로 없앨 수 없는
양자요동(quantum fluctuations)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깊은 의미만큼이나 여러 관점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게 불
확정성 원리다. 그리고 이 덕에 물질에서 나타나는 창발은 더
욱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게 된다.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먼저 누구나 아는 금속을 들
여다보자. 금속에서 하나의 전자가 움직이려 하면 수많은 다른
모든 전자가 그에 대응하는 작용을 하려 든다. 다시 말해 모두
가 모두에게 향을 주는 아주 복잡한 상황이 생기는 거다. 하
지만 정작 창발하는 사회 현상은 이 모든 복잡한 상호작용을
깡그리 잊기로 하는 것이다. 단, 이제부터 움직이는 전자는 기
본입자(elementary particle)로서 전자가 가지는 고유한 질량과
는 다른 질량 값을 부여받는다. 그러니 더는 전자라 부를 수
없어 준입자(quasi-particle)라 달리 부른다. 조금 의아할 수는
있어도 여기까진 그런가 보다 한다.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전자는 쪼갤 수 없는 기본입자로서
고유한 질량, 전기적 성질에 관련된 전하, 그리고 자기적 성질
에 관련된 스핀을 가진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물리학자들
이 도대체 기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적 혼란을 겪게 한
실험이 있다. 이차원 형태로 아주 얇게 만든 반도체를 강한 자
석 가까이에 가져가 보니, 움직이는 입자들의 전하가 전자 고
유 전하량의 1/3, 2/5, 3/7 등 분수 값을 가지는 것이었다. 마치 전자가 여러 개로 쪼개진 것처럼 말이다!
비슷한 쪼개짐(fractionalization) 현상은 이뿐만이 아니다.
물질을 아주 가느다란 일차원 선처럼 만들어 들여다보면 더는
전자는커녕 준입자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보이는 입자 중
어느 것들은 전하가 없고 나머지 것들은 스핀이 없다. 마치 하
나의 전자가 성질머리 하나씩 부족한 두 종류의 다른 입자들
로 쪼개져 나간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각각 스피논(spinon)과
홀론(holon)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일차원 물질에선 어엿한
대표 입자 노릇을 한다.흔히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얘기를 한다. 앞서 두 예
시를 보면, ‘많으면 다르다(More is different)’는 문구가 더 적
절해 보인다. 집단행동을 통해 원래 구성요소인 전자보다 더
작은 요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나 더, 기묘한 현상들은
낮은 차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원자나 전자를 낮은 차
원에 가둬서 위치를 한정 지으려 하면 불확정성 원리를 따라
그 움직임의 불확정성, 또는 양자 요동이 커지기 때문이다. 어
찌 보면 물질에서 차원(수준) 높은 현상은 낮은 차원에서 벌어
지는 셈이다.새로 떠오르는 입자들은 준입자, 스피논, 홀론뿐만이 아니다.
초전도체를 다루며 얘기했던 원자들의 결 맞는 떨림, 즉 파동
은 이중성의 비호 아래 입자로 치환될 수 있는데 이를 포논
(phonon)이라 부른다. 비슷하게 전자들의 집단적인 스핀 떨림
은 마그논(magnon)이라는 입자로 치환된다. 이 외에도 엑시톤, 폴라론, 플라즈몬, 오비톤, 로톤, 챠존, 비존 등등 새로운 입자
들의 명단은 끊임없이 늘어난다. 물질 속 모습은 우리가 짐작
하던 것보다 훨씬 더 풍요하고 다채로운 세상이었다.누군가는 지금 실험실에서 새로운 물질을 만드느라 바쁘다.
지구 위에 처음 존재를 드러내는 물질이라면 적은 양의 가루
또는 작은 크기의 결정(crystal)으로 얻어내는 게 보통이다. 간
신히 길러낸 결정이 겨우 모래알 크기만 한 경우도 드물지 않
다. 그렇지만 이 모래알만 한 결정 속에는 지구 위에 널려있는
모든 모래알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원자와 그보다도 많은 전
자가 담겨있다. 이 무수한 원자와 전자들은 자신들의 개별성은
드러내지 않고 뒤로 미뤄둔 채, 하나의 사회로서 집단행동을
통해 전에 없던 새로운 입자들을 탄생시켜 앞으로 내세운다. 이렇게 태어난 입자들은 다시 상호 작용하고, 소멸하고, 또
다시 생성된다. 모래알만 한 공간 속에 작은 우주가 새로 펼쳐
진 셈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물리학자들이 눈을 반짝이는 이유
가 여기에 있다.
*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목표로 한 <크로스로드>는 과학 특집, 과학 에세이, 과학 유머, 과학 소설, 과학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과학 글을 통해 미래의 과학적 비전을 보여주고자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에서 창간한 과학 웹 저널입니다.
http://crossroads.apctp.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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