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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s Lives and Labor in Rural Area During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s (Korean)

Mar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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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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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Women's Lives and Labor in Rural Area During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s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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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年 11月 15日

<문화인류학과 현지답사 보고서>

지도 : 한건수 교수님

농촌여성의 삶과 노동

- 향석 1리 여성들의 구술생애사를 중심으로 -

6조(11명)

엄민아(09), 함준환(대학원), 김용호(07), 김민지(07),

이진수(07), 한진수(09), 이시원(10), 이원영(11),

조은빈(11), 최재덕(11), 이시원(11)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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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I. 서론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2. 연구방법 및 조사대상

3. 선행연구 분석

II. 본론

1. 향석 1리 개관

1) 세대 및 인구

2) 농가 및 농가인구

3) 농촌 근대화와 생계양식의 변화

2. 향석 1리 안동 권가 종손의 구술사 : 종가의 역사와 종손으로써의 삶

1) 고조부에 대한 기억

2) 미륵불의 유래

3) 토지와 생계

3. 향석 1리 여성의 구술생애사

1) 안동 권씨 일가 여성의 삶

2) 각성바지 가구 여성의 삶

4. 향석 1리 여성 구술 생애사의 맥락

1) 농촌사회와 여성의 삶

2) 계층과 여성의 삶

3) 세대와 여성의 삶

5. 근현대기 향석 1리 여성들의 노동변화

: 가족의 생존과 부양을 위한 지속적인 노동력 투여

III. 결론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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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향석 1리는 경북 예천시 용궁면에 소재한 농촌마을이다. 주민들 대부분이 전업농으로 마을의 주

요 소득원은 하우스 수박이고, 대부분의 하우스에서 삼모작하여 참깨, 콩, 배추 등도 함께 농가소

득에 기여하고 있다. 향석 1리는 임진왜란 이후 안동 권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안동

권씨 일가 후손들이 외지로 빠져나감에 따라 집성촌의 색깔은 남아있지 않고, 다양한 성씨를 가진

주민들이 함께 모여살고 있다. 용궁면은 소백산맥이 서남으로 이어져있어 영남 지방과 중부·호남

지방을 가르고,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금천이 남쪽과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지형 상

의 특징은 용궁면이 한국전쟁의 피해를 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교통발달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다.1) 전쟁으로 인한 궁핍함은 마을 여성들을 고된 농사일에 매달리게 하였고, 세대에 따라서

는 일제기와 한국전쟁기에 징병과 징집으로 인한 남편의 부재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한편 연구자

들은 조선시대에 향석리에 세워진 용궁향교와 매년 두차례 열리는 춘추향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향교와 유교적 의례가 마을에 미친 사회적 힘이 있었을거라 예상한 것이다. 연구자들에게는 향석

1리가 생계양식의 변화와 농촌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동안 여성들의 노동경험은 어떻게 변화해왔

을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궁핍하고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모두 경험한 마을의 여성들이 자신

들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써내려갈지가 주된 질문으로 떠올랐다. 연구자들은 향석 1리 여성들의

노동양상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빌어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한 농촌마을의 변모와, 역

사 속 주변인이 아닌 주체로써의 농촌 여성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및 조사대상

연구는 조사자들이 구술생애사라는 방법론을 이해하기위한 노력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조사자들

은 현지조사 이전에 함께 모여 몇가지 연구 자료들을 가지고 우리의 연구에 대하여 논의하는 시

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특히 지방사와 여성사 연구에 구술생애사라는 질적방법론을 도입하여

연구를 수행한 역사인류학회2)와 윤택림 선생님의 연구3)와 저서4)들이 조사의 틀을 잡고, 맥락을

짚어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예천군청에서 제공하는 통계연보는 마을의 인구와 농가의 규모,

연도별 추이를 연구의 바탕지식으로 이해하기위한 근거자료로 이용되었다.

현지조사는 2011년 9월 28일에서 10월 1일까지 3박 4일에 걸쳐 용궁면 향석 1리에서 11명의 팀

원들과 함께한 공동연구이다. 시간의 제약 때문에 이 기간동안 지도그리기와 생애사 인터뷰, 보충

을 위한 추가 인터뷰를 모두 수행하는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구술생애사라는 도구로 낯선

마을에서 이 연구주제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고, 인터뷰를 시도하는 것은 가장 큰 난관이었다.

제한된 시간 내에 효과적인 인터뷰를 수행하기 위하여 조사팀을 고학년 1명과 저학년 1명으로 구

1) 1리 주민인 윤성식(83세)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 인민군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며, 이 곳에 사람이 살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라 하였다. 그는 인근 유천면에 공군비행장(제16대 전투비행단)이 생긴 것도 이 일대 산맥이 깊어 적군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 설명하였다.

2) 유철인 外. 1996.「해방 이후 충남 서산 지역의 지방사 :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한국문화인류학』29-1 : 245~311,

함한희. 2000.「20세기 서산의 사회경제적 변화 : 지역민의 관점에서 쓴 역사」『진단학보』90 : 159-194

3) 윤택림. 1994.「기억에서 역사로-구술사의 이론적, 방법론적 쟁점들에 대한 고찰」『한국문화인류학』25 : 272-294

2001.「한국 근현대사 속의 농촌 여성의 삶과 역사 이해 : 충남 서산 대동리의 여성 구술 생애사를 중심으로」『사회와 역

사』59 : 207-234

4) 윤택림. 2004.『문화와 역사 연구를 위한 질적연구 방법론』아르케.

2010.『구술사, 기억으로 쓰는 역사』아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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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된 2인 1조로 나누었고, 사전에 인터뷰해야할 대상의 범주를 미리 구분하여 각 팀에게 배정하였

다.

현지조사 1일차에는 마을 지리를 익히고, 지도 그리기의 기본작업을 위하여 조원들이 모두 함께

향석 1리를 답사하였다. 농사일이 대부분 끝난 오후라 많은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마을회관

2층에 위치한 정보화 센터에서는 마을 지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날 방문하였

던 안동 권씨 안집(종택)에서는 안집의 5대 주인인 권순만(73)을 만나 행정개편에 따른 용궁면의

변화와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써의 향석리의 역사를 간략히 들을 수 있었는데, 이는 연구자들이 마

을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일차에는 본격적인 구술생애사 인터뷰가 각 조별로 진행되었다. 인터뷰는 전날 획득한 정보들

을 토대로 본 연구에 적합한 생애사 인터뷰 제공자를 선정하고, 사전에 전화통화를 시도하여 미리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주민들이 농사일을 위해 하우스나 밭으로 나가는 때는 인터뷰

시간을 조율하기 어려웠지만, 몇몇 조사자들은 농사 현장에 나가 인터뷰를 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3일차에는 전날 중간발표회에서 지적된 부분들을 중심으로 본래 연구주제에 무게를 실어 연구

내용을 보충하였다. 내용이 빈약한 생애사인터뷰에 대해서는 같은 범주에 있는 다른 대상을 찾아

추가 인터뷰하였고, 이 날은 조원들이 함께 수박 하우스로 찾아가 농사일 중인 주민으로부터 하우

스 수박이 도입된 계기와 그로인한 농가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3. 선행연구 분석

선행연구는 크게 농촌 여성의 삶과 농촌의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지역적인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예천군 또는 용궁면에 대한 별도의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연구자

들은 농촌의 근대화에 대한 선행연구를 예천군과 거의 유사한 농업형태를 보이는 경상북도 지역

으로 자료수집의 범위를 넓혔다.

농촌 여성의 삶에 대한 선행연구는 먼저 한국 근현대기 여성의 생활상과 노동상을 여성의 입장

에서 매우 면밀히 묘사한 전경옥의『한국여성문화사-1권』5)을 참고하였다. 전경옥은 [3장. 여성과

가정생활]에서 여성들이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국가와 현모양처 담론에 의해 그들의 행동을 통제,

종용당하였으며, 그 근거가 여성의 노동변화에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여성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영역은 가사일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 부문에서도 늘어갔

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종래의 두레와 같은 공동체적 농업 조직이 쇠퇴하여 때로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해야 하는 형편에서, 이러한 농업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기 위해 혹은 가장을 비롯한 청장년의 농촌에서

의 유출에 따른 노동력 손실을 채우기 위해 농촌 여성의 노동력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p.245>

위에서 연구자들은 농촌의 여성들은 가사노동의 전혀 줄지 않은 상태에서 농사일에 더욱 적극

적으로 노동력을 투입해야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으며, 시대의 변천에서 노동의 목적만이 조금씩

변화했을 뿐 여성에게 있어 노동의 역할과 정도는 늘 강조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우흐로 늙으신 부모님을 뫼시고, 아래로 아이들을 기르는, 살림살이에 몰두하는 가정의 주부로서, 날마

다 늣기는 감상이란게 별 것이 없고, 자고 나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늙으신 부모님을 잘 뫼실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남과 같이 잘 기르고 가르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p.279>

5) . 2004『한국여성문화사1』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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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인용된 이 여성의 말은 여성들이 늘 고된 노동때문에 고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의

삶보다 가족의 안위를 우선하고 있음을 느끼게하는데, 이러한 여성의 가치관이 가족의 생존을 위

해 투쟁해온 그들 삶을 설명한다.

조관일(2000)6)은 한국의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공업화·산업화를 통해 농촌의 구조가 바뀜에 따라

농촌여성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으며 그 변화를 가져온 요인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하

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농촌여성의 역할과 변화요인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져왔

다.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사회적 제도가 틀을 갖추면서 우리의 여성들은 점점 더 그 제도적·이념

적 틀에 얽매이게 되었으며, 늘 가난 속에서 지배층의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전쟁기의

농촌여성들은 가사라는 이름으로 생산노동에 매달려야 했다.

이옥희(2005)7)의 연구는 예천군이 속한 영남 상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농촌여성의 생산과 재

생산 노동에 주목하였다. 영남지역은 특히 토지를 중심으로 한 농업경제 기반이 핵심인데, 이 지

역 여성들의 농업생산에서 노동의 강도는 상업농이 확대된 80년대 이후부터 더욱 강화되어 왔다.

특히 비닐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특작물 재배는 여성노동의 강도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

다.8) 지역사회의 농업은 여전히 가족노동에 크게 의존하며, 농번기에 가족원의 노동만으로 부족할

시에는 전통적인 협동방법인 품앗이에 의하여 여러 농가가 노동력을 상호 교환하거나 품삯을 주

고 일꾼을 사기도 한다. 농촌에서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여성노동의 활용이 증가하게 되어 농업노

동력이 점차 여성화되고 있고 여성들이 농업에서 수행하는 농사활동도 다양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가족노동에 의존하는 농업생산구조에서 여성들의 노동참여 비중은 전통적으로 매우 높다.9) 농촌

여성들이 보여주는 농업노동에의 높은 참여는 농촌인구의 급격한 감소, 그 중에서도 젊은 남성노

동력의 부족을 여성들이 메우는 과정과 관련된다. 특히 경작규모가 작은 영세소농일수록, 비닐하

우스 등의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일수록 여성들의 농업참여비율이 높다.10)

이수자(1997)11)의 논문에서는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성별분업의 관계를 통하여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에게 어떤 책임과 의무가 주어졌는지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제대로 추진되면 봉

건적인 사회관계의 잔재는 사라진다는 추정이 일반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사회에서는 유교

적 인식과 성별관계가 산업화와 더불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주의에 의해 합법화된

사회적 인식과 전통적 관습이 지역에 사는 여성 개인의 정치적 ․ 사회적인 권리를 유보시켜왔고,

일상 속에서도 개인적인 삶이 이러한 환경에 귀속되는 한 여성들의 역할도 노동력 재생산 책임을

지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무임금 노동자 또는 저임금의 근로자에 제한 될 수 밖에 없다.12)

강유진(2002)13)은 여성 노인의 생애경험을 파악하여 이것을 현재의 노년기 적응과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연구자는 60대 후반에서 80대 후반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13명의 할머니를 심층면접을

하였는데, 그들의 생애사에서 나타난 특징은 ‘가족관계적 사고’였다. 면접노인들의 사고는 자식에

6) . 2000. “우리나라 농촌여성의 역할변화에 관한 사회경제적 연구”, 강원대학교 대학원 : 농업자원경제학과 박사학위 논문.

7) 이옥희. 2005. “농촌여성의 생산 및 재생산 노동에 대한 자기인식과 역할의 질적 접근 : 상주지역을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영남문화

연구원.

8) 이옥희(2005 : p.255-257)

9) 이옥희(2005 : p.273)

10) 이옥희(2005 : p.275)

11) 이수자. 1997.「한국의 산업화와 유교적 가부장주의」『한도사회과학논총』Vol.7 : 261-281

12) 이수자(1997 : p.274-275)

13) 강유진. 2001. “한국여성노인의 생애경험과 노년기 적응”, 서울대학교 대학원 : 소비자아동학과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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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어머니로서의 역할, 부모세대로서의 역할이 중심이었고, 특히 이들에게는 ‘어머니의 도리’라

는 도덕적 궤도를 이탈하지 않은 것이 과거와 현재의 삶에서 중심이되는 의미였다.

농촌의 근대화에 관하여서는 우선 그 시발점이 된 ‘농촌근대화촉진법’을 설명하는 자료를 참고

하였다. 전(前건)설교통부 장관 이환균은『농촌근대화 촉진법 해설』에서 1970년 1월 12일 공포된

이 법률이 시행된 분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첫째는 농지개량 사업으로 농업과 관련된 배수시설,

농업용도 등 기타 농지보전 및 이용에 필요한 시설과 새 농지 개간, 매립 및 간척을 통한 농지 생

산 계획 등을 포함하며, 둘째는 농업기계화 사업으로 농업용기계의 농가 보급을 지원하는 것이었

으며, 셋째로는 농가주택의 건설 불량주택의 지붕 개량 등을 지원하는 것이다.14)

이 사업으로 인하여 향석리 일대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구체적인 자료를 찾지 못

하였다. 다만 예천군 통계에 따르면 용궁면 경우 농업용 경운기와 트랙터는 1984년에 총합 258대

였으며, 2009년에는 경운기 6,567대, 트랙터 2,491대로 35배 가량 늘어났다.15)

예천군을 기준으로 주요 작물의 변화를 보면, 1978년에서 1984년까지 예천군의 농업은 식량작물

로는 미곡류가 가장 많은 약 11,000ha가량의 농지에서 꾸준히 재배되었으며 그 밖에 보리, 잡곡,

두류가 함께 주로 이모작으로 재배되어졌다. 2009년에는 미곡이 9,663ha의 면적에서 재배되고 있

는 것으로 집계되어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두류의 경지 면적은 2009년에는 659.2ha로

나타났으며, 채소류로는 80년대에 무와 배추가 가장 많았던 것이 2009년 들어서는 고추 다음으로

수박이 가장 넓은 112.2ha의 경지에서 4802.6kg 정도가 생산되었다.16)

II. 본론

1. 향석 1리 개관

1) 세대 및 인구

14) . 1970. 『농촌근대화 촉진법 해설』 大韓地方行政協會.

15) 예천군 통계연보 [VI. 농림수산업] <18. 농업용 기계보유> 1983(23회), 1984(24회), 2009(50회).

16) 예천군 통계연보 [VI. 농림수산업] <9. 식량작물 생산량)><10. 채소류 생산량><11.특용작물 생산량> 1984(24회), 2009(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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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의 인구는 1970년에 전체 147,285명으로 집계되었고, 가구당 평균인구는 5.6명이었다. 이

인구는 1980년에는 전체 120,196명, 가구당 4.8명으로, 그리고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1990년에는

총 79,167명에 세대 당 3.7명을 기록하였다. 2009년에는 전체 47,723명에 가구당 2.3명으로 나타났

다.17) 이러한 인구변화는 향석 1리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예천군 통계연보 [3. 리별 세

대 및 인구]에서는 2008년 향석 1리의 인구는 전체 312명, 가구당 평균 2.4명, 2009년에는 전체

293명, 가구당 2.2인으로 집계되었다.18) 인구변화의 주원인은 도시로의 인구 유출이다. 예천군 전

체의 세대 수는 크게 변하지 않는데 반해,19) 세대별 평균인구는는 1970년 5.6명에서 2009년 2.3인

으로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는 농촌의 인구유출이 가구단위가 아닌 개별단위로 이뤄지고 있다

는 것을 보여준다.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향석 1리의 가구는 대부분 자녀들이 외지로 전출

하고, 그 부모세대 2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2) 농가 및 농가인구

17) 통계연보 [III. 인구] <1. 인구추이> 2009(50회).

18) 예천군 통계연보 [III. 인구] <3. 리별 세대 및 인구> 2008(49회), 2009(50회).

19) 예천군의 세대수는 1970년 26,223세대, 1980년 24,917세대, 1990년 22,225세대, 2009년 21,200세대로 집계되었다. 향석리는

2008년과 2009년의 세대수가 132세대로 동일하고, 인구는 19명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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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자료에서 [농가 및 농가인구]를 살펴보면 2005년 이래로 예천군의 농가인구는 항상 여성

이 남성보다 많았다. 아직까지 남성과 여성의 대비가 크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는 남성이 여성

보다 일찍 사망함에 따라 농촌노동력이 여성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연령별 농가인구]는

농촌노동력의 고령화를 매우 잘 드러내고 있다. 통계를 바탕으로 계산하여 보면 50세 미만의 농가

인구는 7,354명, 50세 이상의 농가인구는 15,990이다.

3) 농촌 근대화와 생계양식의 변화

전업농 주민들로 이뤄진 향석 1리의 일제와 한국전쟁 전후의 주된 농가 소득원은 보리와 벼농

사였다. 이 당시에는 징병과 징집으로 끌려간 남성들을 대신하여 마을로 시집온 여성들이 주된 생

산자 역할을 맡았는데, 벼는 수확과 동시에 공출되었기에 농민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

였고, 보리농사는 소득원이라기보다는 거의 주식으로 이용되었다. 여성들은 틈틈이 임산물을 채취

하여 장사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에는 보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수확하여 억지로 쪄

서 먹을 정도로 대가족을 감당하기에 그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아이고 저 보리가 언제 날꼬. 한마디로 기양 벼 맹키로 뜯어가지고 쪄가지고 솥에 쪄가지고 그래가지고 방

앗간에다 넣고 껍데기가 있어도 맛이 좋더라고 목구녕이 꺼끌꺼끌해도. 그래 먹고살고. 다 익기도 전에 다

뜯어먹었어. 식구는 많지 뭐. 시누가 몇이라. 시누가 둘있재, 시동생 둘있재. 시아바시 시어머이. 그리고 우리

가 둘. 남은거 뜯어다가 보리죽 끓여먹고. 사는게 아휴.” <김경숙, 79세>

농지개혁 이전까지 향석리의 농토는 대부분 안동 권씨 일가 소유로 그 중 가장 소유면적이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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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한다. 토지를 소유한 안동 권씨들은 재지주(在地主)로 마을에 상주하면서 소작을 주지않은

일부 농토는 직접 경작하였다. 해방 이후 자기 토지를 갖지 못한 이들은 그들 밑에서 주로 보리와

벼를 소작하였고, 안동 권씨 일가라해도 친척 밑에서 소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마저 갖지

못한 가구에서는 남성은 외지로 막일을 나가고, 여성은 나물장사나 품팔이를 하여 살림을 유지해

야 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농지개혁으로 싼 값에 자기 농토를 소유하게 된 일부 가구들은 그

때부터 안정된 소득원을 가지고 살림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 향석 일대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던 안동 권씨 안집에서는 이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에 관하여

서는 2장에서 다시 언급된다.

농사형태는 농촌근대화촉진법과 박정희 정권기에 시행된 미곡증산정책으로 인해 밭농사가 거의

사라지고 논농사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나락(벼)’농사가 힘은 힘대로 들고, 돈은 되질

않아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소작료를 내고 빚을 갚고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고 회상하였다. 전국

적으로 시행된 새마을 운동과 농촌근대화사업은 향석 1리의 농가소득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

으나, 전체적으로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켰고, 무엇보다 배수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우기 때

하천이 자주 범람하여 농지와 자택에 수해를 입곤 했던 주민들에게 안정된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

었다. 또한 도로사정이 좋아지면서 가까운 도시로 전출하거나, 일부 가정에서는 남성이 예천읍과

점촌읍 등지로 나가 농사 외 소득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에도 마을의 여성들은 장을 보기위해

용궁장을 찾는 일 외에는 마을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향석 1리의 생계양식에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약 20년 전(현재 2011년 기준)에 마

을에 도입된 하우스 수박이었다. 현 향석 1리 이장 최상윤에 따르면 마을에 수박농사가 처음 시작

된 것은 경북 성주 출신의 도정호라는 이가 마을에 들어와 노지수박을 전파한 것이 그 계기라 한

다. 수박농사의 도입 초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재배방법을 잘 알지 못하였고, 노지수박이라는 것이

워낙 기후에 민감하였으므로 거의 소득을 올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를 시도하였던 농가에서는

오래 지나지않아 기존 재배 작물로 농사를 전환하거나, 이정실(55세)의 경우에는 노지수박 농사를

접고 축산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수박농사의 가능성을 긍정적

으로 예측한 마을 사람 몇몇이 모여 수박 작목반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군의 지원을 받아 다양한

시도와 경험을 거치면서 서서히 재배 노하우를 익히고, 수박의 품질을 높여나갔다. 특히 비가 많

이 내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들어 생산량이 떨어지고, 당도도 낮아져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단점들

을 보완하기 위하여 하우스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하우스 수박은 재배 과정에서 일손이 많이

요구되지 않고, 기존 작물에 비하여 훨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하우스 수박 농사가 안정

적으로 정착되자 이를 시작하는 농가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농민들은 삼모작으로 6월에 모든

수박이 수확되면 후작으로 강낭콩, 서리태, 배추 등을 재배한다. 최근들어서는 농촌진흥청이 하우

스 과채류의 후작으로 참깨가 매우 적절하다고 홍보함에 따라 그 재배면적이 확장되고 있다.20) 하

우스 수박은 수확까지 크게 다섯 개의 과정을 요구하는데, 하우스 설치, 물관리, 순치기, 수정, 수

확의 순이다. 하우스 설치는 남성의 몫인데, 혼자서 한 동을 짓는데 약 3일이 소요된다. 순치기와

수정은 여성들이 맡는다. 대략적으로 순치기는 4명, 수정에는 2명이 필요하다. 이 때에는 마을의

농가들이 거의 같은 작물을 재배하는 이점때문에 농가 간의 품앗이를 통해 노동력을 조달하고, 그

것이 아주 어려울 경우에만 인근에서 일용 인력을 구해온다.

20) “ 후작으로 참깨를 재배하면 앞 작물 재배에 사용한 하우스 시설과 비닐 등을 제거할 필요 없이 재활용이 가능하여 하우스

철거 및 물대기, 모내기 등 여러 가지 노력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량성도 노지 참깨 대비 두 배 이상 높고 소득

은 약 2.8배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농촌진흥일보>, 201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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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향석 1리 안동 권가 종손의 구술사 : 종가의 역사와 종손으로써의 삶

․권순만(73세) <조상을 잘 모시고, 흔적을 보존하는 것이 나의 사명>

- 안동 권씨 복야파 37대손, 향석 1리 안동 권씨 종택의 5대손

- 현재 안동 권씨 종택에 딸과 함께 거주

․ 1代 : 1850 - 1928, 1856 - 1921

․ 2代 : 1881 - 1964, 1887 - 1953

․ 3代 : 1903 - 1974, 1905 - 1987

․ 4代 : 1919 - 1974, 1921 - 2009

1) 고조부에 대한 기억

“내가 안동권씨 37대손인데, 우리집 앞 송덕각, 송덕비가 있어요. 이것은 우리 1대 고조부님께서

소작인들에게 아주 잘 해줘서, 돌아가신 1928년 그해에 소작인들이 장사를 돕고, 상의를 해서 송

덕비를 세우자고 했지. 그 내용인 즉 ‘겸손 순박하고, 절약 검소하니, 택성(살림살이)이 윤택해진

다. 후덕함을 강물같이 두터이 쌓으니, 마을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좋아한다. 능히 베푸시니, 덕을

칭송할 지어다.’ 이런거야.

큰 길가 도로변에 세워놨었는데 자랑이었지. 그 때는 비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죽

고 자식들도 서울 올라가고. 그렇게 있는데, 그것이 마을 애들 놀이터가 되가지고 내가 보기가 영

그래서 번쩍 들어서 집 앞에 놔뒀지. 이것도 기록에 있어. 1928년 3월에 산택리 황의동 국도변에

세웠다가 관리 보수에 어려움이 있어서 집 앞으로 옮겨 놓은 거라고.

집 앞에 자전차라고 비석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아버지 비석이야. 아버지가 불구라서 평생 자전

거를 의지해서 다니셨는데, 그때는 자동차가 없고 해서, 지금 자동차보다 귀했어, 그리고 이걸 시

로 지으신 거지. 아버지 자신이.

‘파각요령패기생’ 뿔을 잡고 요령을 울리니 패기가 생긴다.

‘구취숙골역도성’ 빨리 타고 가니깐 고을을 금방 벗어난다. 걸으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

‘차오행대차윤거 여울력’ 요행히 내가 자전차 바퀴의 힘을 입어서 나는 편리하였네.

우리 집 같은 부자는 이 주위에 김천부터 안동까지 수도 없이 많았어, 마을, 고을 마다 있었어.

그런데 우리 집 같이 송덕비가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었어. 저기 (송덕비에) 보면 양심당이라고

있어, 우리 고조부의 당호가 양심당이야. 저기 유물관도 사당 하는 걸 내가 현대적인 사당으로 바

꾼 거야. 자손들도 와서 계속 기리면 좋지 않겠느냐 하는 거야. 나는 우리 고조부터 해서 5대 종

손이고. 이런 것도 집안에 돈이 많아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경제력이 있어서 하는 거야. 집안에

서 내려온 돈은 없어. 우리 고조부가 돈이 아주 어렵게 살았고, 그분이 터를 가꿨어. 그리고 나서

는 대대로 잘사는 집안이야.

그리고 이 주변에 안동권씨는 다 복야파야, 이 사람들이 어떻게 오게 됐냐마는, 어떻게 온지는

모르겠는데, 임진왜란 때 주물러 앉아가지고 살게 돼서, 자손이 번지게 되서 시골 말고 도시까지

합치면 수백호가 돼. 그런 집에서 우리는 곁가지라는 거지. 우리집에서 있는 것은 고조부 때부터

야. 앞으로 우리 자손들이 더 오래 잘 모시는 게 내 소망이기도 하지.”

2) 미륵불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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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이 저 앞에 보면, 미륵불이 있는데, 거기에 조만한 3층각, 자세히 보면 5층, 그 석불

이 왜 저기 있냐 하면은 우리 마을이 풍수 때문에 배산임수에 맞춰서 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대부

분의 다른 동네는 좌청룡 우백호 한쪽에 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문제가 없는데, 이 동네는 좌청룡

우백호가 힘이 비등해가지고, 한쪽에서 사람이 죽으면, 반대쪽에도 죽고, 한쪽에 결혼을 하면 한

쪽에선 일이 나고 해서, 그것을 부처님의 자비로 함 하자고 해서 세워놓게 된 거야.”

3) 토지와 생계

“원래 거의 다 이 주변 그리고 밖에도 우리 땅이 많았어. 그것이 해방과 더불어서 그때 이승만

대통령과 농림부장관 조봉암, 조봉암 이 사람이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했어. 그래서 토지개혁 할

때 지주들은 땅이 다 풍비박살이 나게 됐었지. 그런데 그때 원래 나눠준 땅에서 조금씩 세금을 거

둬서 주기로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어. 옛날에는 대가족이었는데, 농사에 대한 인력이 부족해서

(땅을 팔고) 그런 것이 아니야.

나도 사실은 74년도 까지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회사(석탄공사), 한국화재. 그래 좀 다니다가 어

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 그래서 아버지가 하시던 용궁양조장을 맡았어, 그래서 운영도 하다가

(소작줘서) 농사도 좀 했어. 한 10년 농사 짓고 살다가, 대구에서 처는 약국을 하고 있었는데, 내

가 거기에서 컴퓨터 중앙 대리점을 차렸지. 30년 전에, 74년에 (종택에) 왔다가, 대구에 한 84년

에 나가서 그 일을 한 10년 했었어. 그 때쯤에 컴퓨터 장사하다가 집도 보전하고 살고 있어. 티비

에 나와 있는 양조장도 다 컴퓨터 할 때 정리한 거야. 여기서 농사지을 땐 (소작)일꾼 한 3~4명

데리고 있었어. 그 이후로는 그냥 농사도 접었어. 텃밭이나 주차장으로 만들어가지고 펜션 처럼하

고 있어.21)”

- 권순만은 종택을 지켜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종가에 대한 애착과 존경, 자부심도

강하였다. 비록 청년시절부터 40대 이전까지는 종택을 떠나 종손으로써라기보다는 개인의 삶을 살

았지만,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종택으로 돌아와 농사일과 양조장을 물려받았다. 딸을 제외한 다

른 가족들이 모두 대구에 거주하는데도, 권순만은 마을로 돌아온 이래로 직접 종택을 돌봐오고 있

다. 그는 방치되어있던 송덕비(頌德碑)를 종택 앞으로 옮겨와 그것들이 관리될 수 있도록 하고, 증

조부가 사용하던 아래의 별채는 민박집으로 만들어 계속해서 사람이 드나들어 집구실을 할 수있

게 만들어 두었다. 또한 농토를 모두 처분하고 남아있던 작은 땅을 역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달라

는 조건을 붙여 예천군에 희사하여 향석리 주민들이 쉴 수있는 공원22)을 조성하였다.

그가 이야기한 미륵불의 정식명칭은 석조여래좌상23)으로 고려말 죽산 부원군이었던 김원발이

만든 것이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다가, 마을 주민들이 1914년 보호각을 세우고 보광전이라 이름지

어 지금의 자리에 옮겨 놓은 것이다.24)

그는 토지개혁으로 인해 종가가 소유하였던 대부분의 토지를 부당하게 빼앗긴 것으로 이야기하

고 있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내 농토를 갖게된 집도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은 모아둔 돈이 없어

여전히 소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던 다른 주민들의 진술과는 대치된다. 마을 대부분의

소작농들이 자기 농지를 소유하게 된 때는 마을이 빈한에서 벗어나고, 권순만과 권일수가 농사를

접고, 규모를 축소하면서 농지를 처분하였던 1980년대였다.

21) 살던 별채는 오랫동안 비워둔 탓에 잡초가 무성하고, 사람이 살던 곳 같지가 않았다. 권수만은 이 종택 별채를 관광객들

에게 개방함으로써 본인의 사후에도 후손이라던지, 예천군에서라던지 누구라도 관리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2011.9.28 권순만과의 인터뷰)

22) 공원에는 축산에 원님으로 부임하였던 송강정철의 후손이 작사한 ‘축산별곡’의 시비가 놓여져 있다. 축산은 향석의 옛 이름이다.

23) 문화재자료 제147호

24) 출처 : 네이버 블로그(http://blog.naver.com/nocleaf/9002767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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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석시비공원>

출처 : 용궁향석안집 카페(http://cafe.daum.net/anjib/KJKz/5)

<안집 사랑채>

출처 : http://cafe.daum.net/anjib/KJKz/2

<선조 유물관>

출처 : http://cafe.daum.net/anjib/KJKz/4

하지만 그의 종가는 현재도 여전히 마을 사람들에게 ‘안집’으로 통용되며 존경받고, 서로간에 잦

은 왕래를 갖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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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나이) 고향 혼인연령시집살이

여부

친정의

생계양식

혼인

전직업

시댁의

생계양식

현재의

생계양식

1 송순자(86)* 사양면 19세 ○ 농사 - 채소장사 과수원, 하우스 수박

2 김경숙(79) 안동 18세 ○ 방앗간 - 소작농 국가유공자 연금

3 최귀매(74) 개포면 19(20)세 ○ 농사 - 소작농 하우스 수박

4 이옥경(71) 덕계리 18세 ○ 농사 -큰집살이,

술장사슈퍼, 부녀회, 현장식당

5 김향숙(62)* 유천면 24세 △ 공무원 - 자작농 하우스 수박

6 박영순(62)* 유천면 20세 ○ 농사 - 길쌈, 소작농 하우스 수박

7 정옥자(61) 점촌읍 24세 ○ 교육공무원 직장인 반자작농 하우스 수박

8 이순옥(58) 향석리 19세 ○ 농사 직장인 반자작농 하우스 수박, 축산

박휘정(55)* 영주 22세 ○ 개인사업 간호사 자작농 하우스 수박

이정실(55) ? 21세 ○ ? - 자작농 축산

- 성명의 *표시는 안동 권씨 집안의 며느리임을 나타낸다.

- 번호가 없는 이들은 인터뷰는 하였으나 그 내용이 보고서에 인용되지는 않았다.

- 김향숙(62)은 분가해 살았으나, 시댁 식구들이 같은 동네에 살고있어 두 집 살림을 모두 해야했다.

3. 향석 1리 여성의 구술생애사

1) 안동 권씨 일가의 여성의 삶

① 송순자(86세) <아이고 저집 4대 외동인데 죽었다고 8월달에 해방됐는데 그 다음해 5월 달에

왔으니까 죽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쑥덕쑥덕 댔지. 그러니 내가 4대 외동에

시집왔으니께 다른데로 시집갈 생각은 없고 시집왔으니 그냥 살아야 되는데>

“내가 시집오니까 4대 외동이라네. 그런 4대 외동을 (전쟁터에) 데리고 갔단말여. 해방되가지고

나왔지. 일본으로 넘어갔음 죽었어. 우리 신랑도 4대 외동이라도, 어디 딴데로 갔음 죽었어. 8월

달에 가가지고 날짜까지 여기 다 적혀있어. 그래가지고 일본군 탈출해 가지고 중국에 들어갔어.

그때 전쟁 한창이지. 해방되가지고도 못나왔어. 그래가지고 큰 동네 이런데 살았다고. 마을사람

다 쑥덕쑥덕 댔어. 아이고 저집 4대 외동인데 죽었다고 8월달에 해방됐는데 그 다음해 5월 달에

왔으니까 죽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쑥덕쑥덕 댔지. 그러니 내가 4대 외동에 시집왔으니께 다

른데로 시집갈 생각은 없고 시집왔으니 그냥 살아야 되는데, 신랑이 돌아 와가지고 내가 6남매를

낳았다고. 그 후로 내 여기 사는데 신랑이 환갑지내고 죽었지. 신랑 전쟁 나갔을 때는 뭐 땅도 없

고 일거리도 없어가지고 우리 시어머님 부모가 있었는데, 가만보니 시어머님하고 시아버님하고 나

하고 셋 뿐이거든. 항상 쌀이 (그 분들) 고향에 있어. 그래가지고 채소 장사를 했어. 그 때 촌에는

채소가 안됐거든. 그래 해방됐지. 나는 다른 마을에서 시집왔어. 나는 사양면에서 나가지고 용궁

면으로 시집왔지. 지금은 아들들 있어서 행복하다고. 우리 둘째아들이 바로 저 밑에 집에 살아.

6.25때는 피난을 거기로 가고, 우리 영감도 저기까지 갔다왔는걸. 개성까진 갔다왔는걸. 그 때도

시어머님, 시아버님 계셨지.

그땐 농사 지었지. 그리고 나무산을 얻어가지고 과수원을 했지. 복숭아나무 과수원을 했는데.

저 산이 부잣집 산인데 구두로 이거 니 해라 하고 줬다고. 복숭아 하나 팔아가지고 돈도 받고 쌀

도 받고 했었다고. 그때 고생 많이 했지. 80넘어서 까지 고생했어. 지금 86세야. 열 아홉에 시집

와가지고 스물둘에 첫 아들을 낳았다고. 우리 아들하고 며느리도 벌써 환갑다 지냈지. 우리 시어

머님 내 아들 낳았을 때 동네 난리였지. 딸 낳니까 우리딸 쳐다도 안보데. 처음에는 우리가 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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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집에 살았는데 그땐 제방이 없어서 집이 두번 물에 엎어졌어. 그래서 여기다 집을 지은거야. 그

때는 흙집이어 가지고 물이 들어오면 다 엎어졌다고. 그 때가 내 시집온지 얼마 안 됐을 때야. 시

집오기전에는 친정에서 그리 못사는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살았지. 배는 안곯고 살았어. 시집와서

도 배는 안 곯고 살았지. 나는 그냥 집에서 농사 짓고 그랬어. 시집살이는 그냥 힘들다고 하면 힘

들것이고 안 힘들다고 하면 안 힘든것 이지. 요즘에는 그냥 논농사 먹을 만치하고 특수작물 하고

있어. 고추, 수박. 고추 6동에 수박 2동하고 있다고.”

② 김향숙(62세) <하이구 겨울에도 놀 일이 없어. 수박 모종 키워야지. 수박 모종. 1월달 되면 또

수박 따가지고 접목하고. 또 저거 하고. 놀 새도 없었지 뭐.>

“나는 원래 이 근방, 예천. 똑같은 예천인데, 유천 알아요, 유천? 거기서 왔어요. 바람을 맞아가

지고 이래 들어앉았어. 시집은 스물 넷에 왔어. 지금은 육십 둘. 유천면에 살다가 이리로 시집 왔

는데 그 전에는 일 안 했어. 우리 친정에는 잘 살았어. 근데 못 사는데 (시집) 와가지고... 우리 친

정에는 일꾼두고 일했는걸. 중매 섰어. 중매쟁이가 거짓말 했지. 할아버지가 중매쟁이한테 거짓말

을 했는데, 왜 거짓말해서 장가 들었는지는 몰르지 뭐. 가난해서 그랬겠지 아마.25) 할아버지랑 나

이 차이 많이 안나, 4년. (할아버지) 형제는 3형제고. 시어른이랑 분가해서 살았지, 1년 있다가 애

를 낳았어. 세 남매. 올기(옳게) 다 살았어. 시어머니는 아직도 저 밑에 회관 옆에 살아계셔. 친정

에서는 시집오기 전에 일 안했었지만, 아이고, 여기와서 해았지. 구박은 그렇게 안 받았어. 구박은

그렇게 안 받구, 내 대로 사느라고 고생했지, 집에 와가지고. 아들 교육 시킬라네. 대학교 나와가

지고, 우리 아들은 삼성에 있고 맏사위는 고등학교 선생이고, 또 둘째 사우는 진흥청에 있고. 다

잘 됐어. 그래 뭐, 저들이 또 공부를 잘하니께. 여...여기, 고등학교까진 여기서 다녔어. 용고 댕겼

고. 대학교는 충북대 둘이 나오고, 하나는 대구 계명대 나오고. 그래, 내가 문제인데 이래 되가지

고... 마비가 왔는데, 그리고 또 하두 관절이 있어가지고. 수박 농사를 짓다분께 무릎이 닳아가지

고 관절이 다 와가지고 수술을 할라고 날을 또 잡아놨어. (오른쪽 무릎) 이 쪽으로 이 쪽 마디로

이러기 전에 이러기 전까지 농사 지었어. 요게 (풍이온지) 3년째걸랑. 갑자기 그래가지구 병원에

서울 아산 병원에 좀 있다가, 또 지방에 좀 있다가... 애들은 지대로 컸지 뭐. 난 농사 지으러 댕

겼고. 갓난쟁이들 들에 놓고, 들에 데려다 놓구, 그렇게 하죠 뭐. 밭매고 하다가 울면 젖주고. 요

새는 상상이 안되지?

하이구 겨울에도 놀 일이 없어. 수박 모종 키워야지. 수박 모종. 1월달 되면 또 수박 따가지고

접목하고. 또 저거 하고. 놀 새도 없었지 뭐. 수박 농사는 옛날부터 있었어 옛날부터. 벌이는 괘아

냈지. 아직까지도 괘안치. 아니면 그냥 취미 삼아 쉬엄 쉬엄하게. 또 놀면 뭐해요. 또 일해묵어야

살지. 아이구 우리 남(남편)두, 애물딱두 우리 아저씨가 아파갖고 몸이 안 좋아가지고. 우리 큰 딸

래미 대학교 1학년 때 저 수술해가지고 10년간 일을 못해가지고 내가 막 미친듯이 돌아대니고,

일해고. 그래가지고 아들 (장가) 보내고. 그래 지금은 내 몸만 아니면 아무 것이 걱정이 없는데 내

가 이래가지고... 그래 뭐. 농사 지어야 밥먹고 살라믄 해야지 뭐. 우린 꾸준히 농사지어서 이렇게

먹고 살만해졌지.

6․25는 안 겪었어. 6․25에 막 (태어)났지. 친정집엔 잘 안갔어. 내가 먹고 살기 바빴는데 뭐 어

딜가나. 에구 보긴 보지. 가까우니까. 이런 집에 시집올 때 화냈을거냐고? 뭐 화내. 또 내 팔자라

생각하이 내 팔자라며. 내 형제? 우리 친정 6남매. 나는 둘째. 언니 죽었어요. 다른 형제들은 다

객지에 살아. 연락은 다들 잘하구 살구. 내가 먹여살릴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였지. 힘들었지. 먹고

살다보이 일하는기.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홉시까지 일하고 들어오고 뭐. 때되면 들어가 밥해먹

25) 권일수에 따르면, 토지도 가지고 있었고, 그리 먹고살기 어려운 수준도 아니었으나, 미리 점찍어둔 신붓감(김향숙을 말함)의

집안이 공무원인 까닭에 반대할 것이 걱정되어 거짓말을 하게되었다 한다.(2011.9.29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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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우리아들 키울 때는 가마솥에다가 밥 해갖고. 근데 아침으로 도시락 6개 쌀라카면 힘을 빼

지.26) 두 개쓱 두 개쓱. 그리고선 뭐이 딴건 고생 안했어. 안동 권씨가 양반 가문이라고 편하게

산게 아이여. 먹고 살다보니 다 이렇게 됐지. 먹고 살다보니 어뜩하이. 이래 뭐, 시골에 사니까.

원래는 마을에 안동 권씨가 뭐 저 그렇게 많진 않아도, 지금은 그렇게 안 많지. 예전에는 예전에

좀 많았지. 권씨도 다 농사지어 촌에 있으니까는. ”

③ 박영순(62세) <옛날에는 나갈 줄도 모르지,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지금은 막상 시대가 좋아

서, 삶이 좋아 가정, 예전 겉지 안허여. 이제는 뭐 그러하니 잘 살어.>

“20살 때 결혼해가지고 (향석리로) 왔어. 그 당시에는 마을이 다 초가집이었고 상수도도 없었

어. 여기 상수도가 오기 전에는 여기 샘물 퍼가지고 그랬는데 지금은 상수도도 다 들어왔지. 2남1

녀, 큰아들은 검찰청에 있고, 서른 여덞. 우리 딸은 저 과천 청사에 있고, 막내는 삼성 에버랜드에

있고. 며느리도 검찰청에 있고. 다 결혼시키고, 웅 요 할미(시어머니) 하고 살아 (처음 시집 올 때

는) 5남매 맏이로 왔네, 그래가지고 난 세 명 밖에 안 낳았지. (다른 집이) 하도 많이 나서, 그래

도 뭐 촌에 살면 있지. 아이들 기를려면 돈도 들고, 이제는 편하지. 돈도 있고 허허, 길쌈도 하고

강남콩도 하고 벼농사도 하고 다하지 뭐. 이젠 마을에서도 살기 좋아서 나가고 안허고. 옛날에는

나갈 줄도 모르지,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지금은 막상 시대가 좋아서, 삶이 좋아 가정, 예전 겉지

안허여. 이제는 뭐 그러하니 잘 살어. 처음 결혼했을 때, 그 때는 시동생도 있고 시누이도 있고

서로 잘 도왔어. 반찬도 잘 주고. 옛날엔 저가 돈을 못 벌때 아니었나. 돈을 많이 못 벌고 농사짓

고 힘들었지 먹을 건 다 먹었어. 이제 (자식들 학교 뒷바라지도) 다 대어가지고 이 집도 다 샀지.

이젠 집도 촌집이고. 허허. 아이들은 국민학교 다니다, 어디 갔다 객지로 대학을 갔지 그 다음에.

[중략] 이제 살기 좋은 농촌이 되어가 이제 (계속) 살아야지. 춘추작물 많이 하고 나아졌지. 예

전에는 여도 춘추작물 안 할 때는 가난했지. 춘추작물은 그냥 수박. 수박하고 강남콩 하고, 한 20

년됐지. 우리 아들 키우고 밭일도 하고, 소기르기도 하고. 들어갔다 와서 밥하고 또 들어갔다 와

서 밥하고 자고. 애들은 할미(시어머니)도 보고 할아버지도 보고. 결혼 한 지 이제 사십년 정도.

시어머니랑 잘 지냈어. 옛날에는 괭이 가지고 호미 가지고 일했지. 이제는 기계로 하지만. 콩도

기계가 다 있어. 따는 건 손으로 하고 심는 건 기계로. 그리고 다 따다가 직판장에 갔다 노믄 가

져다가 탈곡장에서 다 알아서 허지. 옛날에는 시골에 다 따가지고 말려가지고, 도매로 갔다 넘기

고. 소매도 하고 도매도 하고. 하다, 이제는 잡목반에서 해주지. 예전에는 (농사가) 많이 안 되었

고 밭이 없고. 그래 새벽 일찍 일어나가지고 걸어서 4키로 갔다 오고. 지고 이고, 그래가지고 리

아카 끌고. 허허 우습제? 지금 다 메고 하면 잡목반와서 다 싣고 가고.

지금은 우리 여기서 메주를 여기서 담아 한 55kg담아, 그래가지고 내가 그 제, 시장에 갔다 용

궁에 팔기도 하고.. 6시 일어나서 밥하고 밭일하고, 밥하고 밭일하고 저녁에 와서 TV보다 자고.

옛날에는 TV 없다 나중에 와서 TV가 있게 되었어. 전기가 들어온지 한 40? 42년인가 41년 됐

을 기라. 라디오나 이런 거. 예전에 나가왔을 땐 다 있었어. 아침때는 나가고 우리 아저씨랑 같이

일했지 만날 같이 갔다 같이 오고 [중략] 촌에 이야기가 그렇지. 이제 강판으로 지붕 바꾼 지 한

30년 되었지.27) 옛날 초가집은 있지 촌에 가믄, 그니까 이다가 짚을 이고했지. 공기도 좋아. 이

앞에 내(川)가 다보이고, 날도 좋다하면 이 앞에 나갔다 돌아오고 차를 타고 올라가면 되지. 가을

동화도 찍고, 일박이일도 하고. (한 방을 손으로 가르키면서) 손자 다섯, 아들들 며느리, 손자 오

면 다 여기 살아.”

26) 모두 점촌 소재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통학함.

27) 향석 1리의 가옥들은 농촌근대화촉진사업에 맞춰 바뀌었다기보다는, 각 가구마다 자녀들의 교육 뒷바라지가 끝난 뒤에 모으기 시

작한 돈으로 새로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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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성바지 가구 여성의 삶

① 김경숙(79세) <아이고 일 못하고 아플 바에는 까이꺼 죽는게 났지 살면 뭐해. 산 사람 간장만

태우지. 밥이 맛이없어 억지로 먹어. 죽지 못해 살아 나는. 아무것도 희망이 없

어.>

“나는 고향이 안동. 다 돌아가셨어. 엄마아빠 다 돌아가시고 남동생. 친정이 뭐 그냥 밥해먹고

뭐, 농사는 일꾼들이 다했지, 밥만해먹었지 나는. 잘살았어 나는. 방아찧었어 아버지가. 열여덟 때

시집와가지고, 열아홉에 왔지 오기는. 중매결혼. 이모가 해가지고. 이모가 이모도 여 사는 곳이 아

이래. 시집을 딴데가 저 강경에 살았는데 하도 남편이 술을 많이 먹고 두드려패고 해가지고. 한

중매 걸었오. 새벽바람 찬바람에. 그래가 이 동네 왔오. 도망을 이까지 왔어. 그래서 나를 또 중매

를 해가지고 향석으로. 그래가지고 이모도 첫반째 오고하이 누가 잘사는둥 못사는둥도 모르고 속

있지 뭐. 속있어. 할아버지는 별명이 모개둥이였어. 모개. 모개가 뭔고 하면은 모과. 그래 못생겼

다고 동네사람들이. 우리영감은 농사졌지. 밭농사. 땅도 없었어. 벌어가지고, 보태가지고 (나중에야

샀지). 시집을 와서는 땅도 한마지기 없었는걸. 논도 한마지기 없고. 보리밥도 마이 먹고. 나물밥

도 마이 먹고. 무꾸밥도 마이 먹고. 무수밥 무수밥. 아이고. 무꾸밥 맛도 없어. 오죽했으면 내가

농사 질 때는 여와 시댁 식구들 모시고 살고, 겨울이랑 봄에는 입 하나라도 던다고 친정가 살았

지. (시집 올때는) 차도 없고 뭐 그래도 거까지는 타고 왔어. 거까진 차 있었지. 여까진 가마 타고

왔지. 학교를 못댕겼어. 하이고. 국민학교도 못댕기고. 답답해 답답해. 배워야대. 영감이 얼마나 무

시하는데 못배웠다고. 시댁식구들은 원체 없어가지고... 어디 가가놓으면 아이고 저 보리가 언제

날꼬. 한마디로 기양 벼 맹키로 뜯어가지고 쪄가지고 솥에 쪄가지고, 그래가지고 방앗간에다 넣

고. 껍데기가 있어도 맛이 좋더라고 목구녕이 꺼끌꺼끌해도. 그래 먹고살고. 다 익기도 전에 다

뜯어먹었어. 식구는 많지 뭐. 시누가 몇이라. 시누가 둘있재, 시동생 둘있재. 시아바시 시어머이.

그리고 우리가 둘. 남은거 뜯어다가 보리죽 끓여먹고. 사는게 아휴. 시누이들은 어리기만하지. 나

6․25 때 열여덟이었다. 그 해 결혼한것 같애 내가. 결혼하고 한 해먹어가지고 맞았지. 하이고 그때

피란갔어. 한 보름있다 왔지. 도양군이라는 동넨데. 산골. 한 열흘 있다 들어왔는데 집은 그냥 가

만 납두고 갔지 뭐. 보리 타죽도 해논거 소한테 끓어놔 주고, 돼지는 돼지대로 돌아다니고 뭐. 시

아바님 시어마님은 학교 못나오고, 우리 영감은 중학교까지는 나왔지. 힘들기는... 농일하는게 젤

힘들었지. 밭메고 뭐. 나물장사 하고. 나물장사 마이했어. 고개를 넘고, 또 넘고. 한 30년했나.

옛날 사람들 고생 안하고 큰 사람 하나도 없어. 시집가면 고생해도 그래도 결혼을 안하면은 한

심하고, 재미가 없어. 결혼은 해야지. 그때는 다 고생하고 컸지. 억울하기는 내 몸이 아프니까 그

런 생각도 안들어. 아휴, 죽는거밖엔 제일 속에 없어. 아이고 진짜 지금이라도 퍼컥 죽었으면 소

원이 없네. 세상만사 모르고. 할아버지는 뭐 또 장게가면 되지. 몸만 안아프면 되지. 아프니께네

일도 못하지, 영감 잔소리하지. 영감 저래뵈도 얼마나 꾀를 치는둥 몰라. 잔소리를 얼마나 한다고.

지금은 원망을 많이 하자네. 나한테 장게온걸 원망을 하자네. 안그래? 내가 하마 80인데 다 살았

지. 옛날같았음 고려장 다 해 치워버렸다. 할아버지 바람은 왜 안났어. 약먹고 죽을라그랬는데 동

네 사람들이 살려놨어. 그땐 내가 한 사십 났을기래. 그래서 살았지. 목숨은 길어. 폐수술했지, 암

수술했지, 자궁수술했지. 또 봐 십이지장인가 거도 했지. 돈 마이갔다 없앴소. 그러니 영감이 돈만

꺼내노면 없앤다고 죽으라다가 살으랬다가. 아휴.

애들 2남 4녀인데, 전부다 시집장게 다 보내 나갔지. 울산살고, 대구살고, 지금 점촌 살고. 대구

도 딸하나 아들하나 대구 살어. 큰 아들은 울산살고. 다 밥먹고 살아. 부모한테 안 폐끼치면 되지.

강해 우리딸이. 생활력이 강해. 우리 영감 닮아가지고. 우리 영감이 생활력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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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도 되가지고 돈 좀 나와요. 벌어논것도 좀 있지 뭐. 이래 먹고 살고. (영감이) 옛날에

일을 많이 했어. 노가다를 많이 댕겼어. 그래가 많이 벌었는데, 노가다도 했다가 저 나무 베고 옮

기고 하는것도 하고. 그래 닥치는대로 농사일이고 노가다일이고 하니까는 한푼 두푼 모아서 땅도

좀 사고. 반은 우리꺼, 반은 저 위에 권일수네꺼. 옛날에는 권가가 힘이 있었지만는 지금은 아마

(수는) 이가가 제일 많지. 영감이 열심히 일해서 늦게나마 돈을 마이 모았어. 근데 자꾸 내가 까먹

어가지고. 그래가 잘 살았는데 앞으로 사는게 걱정이다. 아이고 아프면 누가 좋다그래. 영감도 죽

으라하는데. 아들딸도 저들 다 시집장게가서 저 먹고 살아야되는데. 뭐 행사 다오면 명절 다오고

생일 다오면 (자식들) 오고, 나물도 가지러 오고 하지. 하마 손녀는 스물둘인둥 셋인둥. 지난해에

졸업했는데 아직 취직도 몬한것같애 꼬라지가. 눈이 높아가지고 저걸로 들어간다드만, 안내양(스

튜어디스) 들어간다드만 키가 작아가지고. 우리영감은 시집을 보내래 자꾸. 지금은 내 능력이 있

어야 시집을 가지. 같잖애 같잖애. 지금은 돈 벌어야 좋아하지. 세월이 같잖애. 젊은 사람들 사는

것도 고달파.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시대가 그르니. 세상은 좋아도 참말로. 지금은 잘 사

는 사람들만 잘 살고, 못 사는 사람들은 너무 못 살고. 힘들제. 세월이 무서운 세상이라. 툭하면

사람죽고, 하이고 아파트서 죽는 사람 얼마나 많노. 얼마나 답답하면 그래 죽노. 왜 그래 자살을

해시코. 독하지. 오죽하면 지 목숨 지가 끊노. 나도 그래. 목숨을 약을 먹고 죽을까. 그래도 그 맘

또 잠깐이고. 아플 때 생각하고 그러면 꼭 죽어야되는데. 들어마시면 죽지만은 그 참는 것도 괴로

와요. 아이고 일 못하고 아플 바에는 까이꺼 죽는게 났지 살면 뭐해. 산 사람 간장만 태우지. 밥

이 맛이없어 억지로 먹어. 죽지 못해 살아 나는. 아무것도 희망이 없어. 암것도 좋은 것도 없어.

재미나는 것도 없고. 아홉이래 아홉. 칠십아홉. 삐쩍 말라가지곤 옷태도 안나고. 할아버지는 저래

술을 자꾸 마시니께 삐짝 삐짝 마르고. 그래도 저래라도 술 마시고, 노인정 댕기고 하이께. 술안

먹음 같잖제.”

② 최귀매(74세) <남편이랑 싸우지도 않아보고, 맞지도 않고. 시집살이 너무 편해서 지금 몸이 아

파요.>

“예전에 먹고 살기 힘들었지, 옛날에는 보리도 하고 엄한 것도 하고.. 집에서 옛날에 뭐 고추하

고 농사하고 뭐 그랬죠. 수박농사도 하고. 여기서 살진 않고 어릴 때는 저 개포에서 시집오고 여

기서 살고 그랬어요. 할아버지는 돌아갔어요. 75살때. 그 때 시집은 열아홉, 스물에 오고했어요.

우리는 시집살이는 시어머니 시아버지 좋아서. 옛날 어른들이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지

만 우리는 좋은 사람이여서 그런 힘든 시집살이는 안했어요. 우리는 옛날에 먹고 살기 힘들어서

학교 교육 못 배웠어요. 댕기다 마다 그랬어요. 먹고 사는 것도 가난하고 이래가지고.. 학교도 못

댕기고. 옛날에는 중매로 많이 만났어요. 얼굴도 안보고 지금이야 다 보고 하는데 옛날에는 그냥.

남편이랑 싸우지도 않아보고, 맞지도 않고. 시집살이 너무 편해서 지금 몸이 아파요. (자녀는)아들

서이 딸 둘 5남매에요. 다 다른데 살고 있고. 근처에 사는 자식들은 없어요. 첫째는 22살에 낳았

어요. 그때도 쌀 같은 것도 잘 못 먹고 그랬어요. 육아가 힘들지는 않았어요. 남편이랑 시부모가

좋아서. 애들은 다 공부하고 그랬어요. 애기 때만 애 보면서 일하고 하다가 학교는 다 보냈어요.

수박은 지금은(9월말) 안하고 이제 배차(배추)하고. 겨울엔 좀 놀아요. 농사는 고추농사, 콩농사,

배차, 수박 같은거 해요. (용궁리가 예전이랑) 많이 변했죠. 옛날모습은 다 없고. 지금 있는데도

다 밭이고 논이고 그랬는데. 농사 크게 힘든 거는 못해도, 힘 안드는건 같이 협동으로 이래하고

저래하고. 여기 사람들이랑 다 친해요 한 가족 같아요. 장보러는 용궁리 뭐 맨날 가요. 오늘도 장

이에요. 저는 제가 직접 다 갔다 와요. 어릴 때는 걸어 댕겼어요. 먹고 사는 건 농사로 해요. 힘들

진 않아요. 옛날에는 이런 수박 같은거 안했어요. 옛날에는 보릿고개라고 해서 보리하고 뭐 벼농

사하고 그랬지요. 개포도 지금은 안해요. 어릴 때나 보리하고 벼농사하고. 지금은 다 고추농사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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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래요. 아주 옛날에는 수박 안했지만은, 내 올 때는 안하다가 오고 나서 몇 년 뒤에 했는데

하우스에 했어요. 수박도 인터넷에 팔고 해요. 직접 팔고 그러진 않아요. 장사꾼이 와서 다 거둬

가서 팔고 그래요.”

③ 이옥경(71) <큰집에 설움받은 건 말로 다 못해. 그 생각하면 정말 울고 싶어. 동생을 암만 좀

털린다해서 그렇게 혼내키고 일시키고. 일은 그 큰집 농사 다지었는데. 일꾼들 돈

주던거 나를 주고. >

“내가 칠십 하나니까 여기 열여덟살에 시집왔는데, 옛날엔 열다섯에도 오고 열여섯에도 오고 그

랬지. 그때 아저씨는 스물 두 살 이었고. 난 용궁면 덕계리라고 거기서 태어났어. 시집오는 건 속

아서 왔지. 옛날엔 속아서 오는 거라고. 요새는 서로 보고 이랬지만. 옛날엔 중간에 중신이라 하

잖아. 중신애미 뭐 이러잖아 노인네들. 중신애미가 이쪽에 최가에 같은 최가네 뜨럭인데 여기 와

서 이래저래 많이 묵고 일도 해주고 했나봐. 그 사람이 어떻게 그쪽(덕계) 동네에 와갖고. 고향은

참 덕계라도 사람들은 개포, 입암이라는 동네에 살았어. 그랬는데 거 와가지고는 “아이고. 아가씨

수더분한게 마음도 좋아 보이고, 부잣집이래. 여기가. 부잣집인데 형제뿐이라니 아들이.” 부잣집이

라하믄 되게 인제 잘 산당게라. 그렇게 속아서..옛날엔 하도 배가 고파가지고 굶었거든. 요새는 아

가씨들 잘 먹지만은 그 때는 한 끼 먹으면 두 끼 굶을 때 있고 두 끼 먹으면 한 끼 굶을 때 있고

이래가지고.. 부잣집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아이고 부잣집가면 배는 안 곪고 배부르게 잘

먹겠지.” 그 때는 배우는 것도 귀찮고 먹는 기라. 그 시절에는. 그래 하는 것이 (선을 보러) 와 보

니까, 시누가 넷이나 되는데 시누이 하나도 어따두고28) 중신이라는 사람이 형이 아들형제라케. 근

데 (친정)집은 옛날 집 치곤 큰 집에 잘 살았어. 뭐 일꾼도 두고, 그랬응께로. 엄마는 몰라가지고

그거를. 부잣집에서 인제 둘째 며느리로 시집가니께는 땅 좀 줄여라. 따로 살면. 그래 생각하고

와보니까, 시누이가 뭐 넷이나 되고, 아들은 또 큰집에 있다캐도 쪼금 털리고 이러니. 그리고 나

한테 외동이라고 우리 신랑이. 외동인데, 그러다보니까 (시)엄마는 뭐 조그만한 단지 하나놓고 그

릇 두 쌍 그거 가지고 술장사 하고 있어. 노인네가. 인제 우리 시어머니가 큰집 시어머니가 있고,

작은집 시어머니가 있어가지고 선볼 때 큰시어머니를 시어머니라더라고. 우리 진짜 시어머니는 인

제 작은집에 뭐 친척에 동서라 하고 이러거든. 그래서 오니까 뭐 고생고생해서 그렇게 살았지.

그러다보니까 한 2년있다 군에 갔지 아저씨가. 군에 가고 나서 또 하도 배고프고 해가지고 요

앞 큰 동네에 큰 부잣집이 있었어.29) 기와집. 거기 가니까 그 당시에 소고기 국이라 카면 놀라지.

그래 소고기국에 밥먹는게 좋아가지고 애들 걸레도 빨아주고 강가 가서 그래 빨아주고 이렇게 살

아오다가 이제 남편이 군에서 제대하고 둘이 힘을 모았지 뭐. 뭐 저런 하천 공사하는데 밥 다 해

주고, 도로, 이 길 (공사)하는데 밥 다해주고, 일하는 사람들 한 십리 오토바이로 실어다 주고. 그

래가지고 인제 밥을 좀 먹을라 하니께 인제 남편이 60에, 큰집에서 남의 집 살이 하잖아. 노상 고

생해가지고 따로 사니까 “야 나도 이제 내 맘대로 할 때 됐다.”싶어 맘놓고 술을 많이 드셨는기

라. 그래가지고 술로 인해서 60에 돌아가셨어. 그래가지고 내가 이래 살아오면서 조금씩 뭐 남들

따라 다 들락거리고 그래서 뭐 어디가도 내가 있는 자리는 즐거워. 허허. 그래 살아온 기라. 할아

버지 군대가고선 겨우 뭐 술장사 조금하고 또 뭐 강다구, 메밀묵 그거 한다고 그런 거 할 때 방아

찧는거 있어. 발로 이래해가지고 쿵덕쿵덕 이래 찧는 게 있어. 그거 빻아가지고 먹고 자면서 같이

해주거나 그러다보니, 여태까지 내가 시어머니 하는 걸 이어받아 하고 하다보니, 뭐 그런 식으로

생계했지. 했지만은 많이 고팠지 배가. 많이 굶어가믄서 허둥지둥 버티고 살다가 보니까 여태까지

살았지. 인제 지금은 남 주고 먹지. 실컷실컷 먹고 인제 잘살지 뭐 .

28) 이야기가 나오지만, 시누이 중 한 명은 큰집살이를 하느라 따로 살고 있었다.

29) 권순만의 종택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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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큰 부잣집에서 일 거들어 준 건 말 그대로 뭐 식모지 뭐 말하자면. 식모살이지. 군에

서 우리아저씨가 그 소문을 들었는가봐. 그 안됐잖아. “내 색시가 남의 집에 가서 그렇게 걸레 빨

아주고.. 거기서 그렇게 있으면 나는 제대 안한다.” 엄마한테 편지 썼는데. “왜 남의 집으로 돌게

하냐. 굶어도 같이 굶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집으로 오라캈지. 그 말이 좀 그렇잖아. 느낌

이. 아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갖고.

그리고 우리가 좋은 게 애들 4남매가(1남3녀) 잘살아. (사위는) 군 의원 몇 기를 했고, 경북 양

봉 협회 회장이고. 아들은 또 박근혜 있잖아 알지? 박근혜 뭐.. 회장 맡아보고. 또 예천군에서 청

년회 회장하고. 아버지(남편)가 그런거 못보고 간게 좀 아쉽지. 나는 괜찮아.

그리고 시집살이가 제일 힘들었었지. 시누들이 넷이나 되는데 나를 도와주지도 않았어. 저 강에

가 물 한번 안 길러주고. 저 큰 저쪽 동네하고 여기하고 거리가 한참 되잖아. 거기 가서 일일이

동아리로 물을 길어다 이고 다녔지. 저 냇가 물은 그땐 깨끗했었어. 지금은 오염이 됐지만은. 그

리고 두레박이라고 있었어. 그걸로 이래 퍼낼라 카면 세번이나 가야 얻어걸리고, 잠 좀 자다가 보

면 남이 다 퍼가고 없고 이랬었어. 떠낸 물을 지게로 그렇게 지고 오다가 너무 무거 워서 가다 자

빠진 적도 많았고. 그랬는데도 시누이들은 내가 퍼다 나른 물 그냥 쓰기만 하고. 큰 집한테 많이

설움 받았어. 그게 뼈저리게 느껴져.. 큰집한테 설움 받은 게. 일은 쌔빠지게 다 해주고. 그리고

뭐 농사도 지었지. 요샌 옛날과 달리 기계가 좋으니까 여자가 일해도 기계가 다하고 싹만 주면 되

는데 옛날엔 안 그래서 힘들었지. 옛날에는 보리고 뭐 이런 걸 재배했지. 지금은 뭐 여기에 특수

작물 하지마는.

우린 최가야. 우린 경주 최. 여기 성이 많아 서씨, 용, 고, 이도 있고. (숫자는) 거진 비슷해. 권

씨나 최가나. 이씨들하고. 처음에는 권씨가 힘을 좀 가지고 있었어. 뭐 전부 인척관계에 전부 높

은 사람만 있어가지고. 지금은 (권씨가) 행동할라 카면 타 성씨들이 각각 성이 있잖아. 그 사람들

이 응해주지를 않지 옛날처럼. 맞먹지 인제는. 옛날에만 권씨들이 힘을 좀 많이 샀지. 옛날에는

이장도 권씨네에서 여러 해 했어. 몇 십년 해오다가 인제는 타성씨들이 속이 상하잖아. 인제는 타

성씨들이 다 해. 선거를 하는데 동네에서 선거하면 타성씨 들이 다 점수가 나와. 그니까 이제 권

씨들 힘 못쓰지. 옛날에 힘썼지. 지금도 옛날 권씨 부잣집30)은 안집이라 해가지고 숙소 거 자는데

있어. 그 집만 인제 지키고 있지. 딴 데는 다 옛날만 못해. 지금 있는 그 집은 옛날엔 아주 떵떵

거렸지. 전부 뭔 박사, 국회의원, 전부 그런 사람들이야. 그래놓응께 그렇게 힘을 썼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을이나 집들이 숫자론 그 숫자지. 집이 좀 개량되었다 뿐이지. 우리 집은 옛날에 쪼만

한 집에 뒤에 냇물이 잘 들어오거든. 요새는 공사해서 안 들어오지. 집이 쪼그만했어. 쪼만한 오

막살이에 돌멩이를 칭글칭글 놔 가지고. 그런집에 이렇게 단지놓고 술그릇 두 쌍놓고 그래가지고

생활하더라고. 시누들하고 아들 하나하고. 그 시아버지는 큰집에 있으니까 큰집에서 자고. 작은

색시는 맨날 우리집에 오고. 밥은 또 큰집에 가 먹고 그랬었어. 나는 뭐 말도 못해. 고생한 건 말

도 못해.

용궁중학교도 용궁고등학교도 여기 용궁면에 있고. 근데 우리 큰딸 애는 다른데 여고 댕겼어.

그렇게 억지로 고등학교 시키니 이상해. 내가 살던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 나오고 중학교 나와도

잘 살았는데. 그때도 아저씨랑 니돈 내돈 했어. 큰돈 나 가는거는 아저씨(남편)가 주고, 뭐 공책사

니 연필사니 용돈같은 건 니 어머니한테 달라 그래라 이러고. 내 남편은 농사했지 머. 농군이지

뭐. 반장질도 하고 뭐. 그것도 뭐 한 달하면 한 달 월급주고 이렁께.

그리고 여기보면 개발 많이 됐지. 땅도 반듯반듯하게 해놨지. 제방공사는 몇 년전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내가 볼 때 세 번인가 했을껄. 길도 옛날길인데 이래 또 도로를 내 가지고 공사하고. 우

리 집에서 (일꾼들) 밥해주고 살았는기라. 거기 그런데서 고생하면서 지금 이만치 됐지. 내손으로

30)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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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다해줬어. 집안일도 다 하고, 따로 일도 다해서 힘들었어. 또 시어머니는 술만 좋아해지고 술

만 맨날 먹었어. 맨날 술마시고, 술취해가지고. 치매도 좀 있고. 80에 돌아가셨는데. 70넘어서는

맨날 나한테 욕만 해가지고. 욕해도 내가 쪼금 못된 거 같으면 내가 대들어 싸우지만 에휴.. 그래

도 남편은 속 안 썩혔어. 그리고 큰집에 설움받은 건 말로 다 못해. 그 생각하면 정말 울고 싶어.

동생을 암만 좀 털린다해서 그렇게 혼내키고 일시키고. 일은 그 큰집 농사 다지었는데. 일꾼들 돈

주던거 나를 주고.

내 형제자매는 언니가 80이고 오빠가 76이고. 1남 3녀야. 나 어릴 때는 고생스럽게 컸지, 뭐

알았나. 국민학교 때 산수공부는 뭐 머리 돌게 해가지고 잘 몰랐고 하하. 국어는 조금 취미가 있

었지. 그래도 뭐 3년 배웠는데. 학교에 들어가 가지고 좀 배우다가 국민 학교로 편입되어가지고 3

학년에 들어갔지.”

④ 정옥자(61세) <지금 세월이 제일 살기 좋은 세월이라. 우리 세월이 제일 지금 어려와 또. 어른

들 공경했지마는 지금 어른 대우를 못받는다고. 내가 자식들한테 잘 해야 어른대

우를 받지.>

“6․25는 네 살때 터졌는데 모르지 뭐. 옛날에는 다 그랬어. 우리 세대는 다 그렇지 뭐. 보리밥

먹고 보리떡해먹고. 방이찧고. 떡보리 모르제? 나는 그래도 읍에 살아기때민에 모르지만. 보리떡

이 뭔가하면 보리를 덜 익을거를 잘라가지고 솥에 삶아가지고 치에가 비벼가지고 그걸 해먹었다

니까. 그 세대도 큿는 과정이 다 다르거든요. 여 (아줌마)는 완전 시골에서 컸고, 나는 그나마 읍

내서 컸지. 요새로 말하면 시가 됐그든. 시집을 이래 촌으로 왔죠. 직장도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내삐리고 시집을 왔지. 시집은 전부다 경찰가족이야. 우리 아주바님부터 조카들까지 질서까지 질

녀 남편까지 전부다. 우리 할아버지는 농사도 짓고, 장비 사업도 하고. 권가나 딴데(각성)나 별 차

이 없어. 비슷비슷하게 같이 농사 짓고 뭐 그래 큿는거지 뭐. 특별히 어려웠던 거는 나무 떼고,

농사짓고.

요새는 어른들이 말하자믄 우리가 시어머니가 됐지마는 며느리를 그래 떠받치는 세월이 됐는데

바뀌가지고는. 우리때는 어른들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요거해라 저거해라 요카면 걸 시중을 다 들

어야됐지. 거북스러워도. 시집와가지고 한 4년을 같이 살았지. 여는(옆 할머니) 맏이래서 평생을

같이 살았고, 30년을. 요새는 남의 며느리 봐주면 “니 하고싶은대로 해라, 어~그러나” 이르케 하

고, 정 시킬거 있으면 “야야, 이것좀 하면 안될까?” 이카지 옛날에는 “이거 해!” 무조건 명령존

데. 그래도 못하면 혼나고 하지마는, 요새는 일못한다고 혼나기는. 밤에 잠깐 왔다가 이튿날이면

다시 돌아가는걸. 일을 안해보고 커가지고 시집을 오니까. 요새 스물넷에는 전부 시집도 안가는데

우리는 그때 그나마도 스물너이도 많이 먹었다했는데 (요새는) 얼라지.

나는 점촌에서 시집왔지. 거 읍에서 크고. 문경시도 촌이 있고, 시내 쪽이 있고. 시내 쪽에서 컸

그든.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고. (신랑쪽이) 직장있다, 시숙은 공무원이지 이러니까는 집안 괜찮다

이래서 (시집)온거지. 우리집은 그대로 그대로 잘 살았어요. 먹고살 걱정은 없이 잘 살았아요. 나

는 그때 사람치고는 많이 배웠지. 중학교 보다 쪼끔 더 배웠지. 고등학교. 내가 다닐때는 이런 촌

에서 암만 부유해도 중학교도 안보냈어. 우리 이모가 우리집보다 영 더 잘살았는데 완전히 시골이

거든. 도계면이라고. 거 딸이 달로 언닌데 나를 그렇게 부러워했어. 우리집은 지금도 박사가 서이

래 조카가. 부산에 여대에 교수로 하나있고, 인천 남부 보건소장 하나있고, 서울 불광동 인구연구

원에 질녀가 박사 연구원이 하나 있고. 4남맨데 하나만 이제 못했지. 친정은 탄탄한데 내가 이렇

지 뭐. 나름대로 또 살고 뭐 그래요. 그래 사는거지. 우리도 클 때는 고생길에 안컸는데 시집 와

가지고 완전 뭐뭐. 옛날에는 토지가 없고, 지금은 전기가 발달이 됐으니께 뭐라도 되지마는 그때

는 비료도 없고, 물도 없고. 농사를 못지으니까 나라도 돈이 없고. 그러니까 못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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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소유는 개인별로 조금조금 있긴 했는데. 권가가 마을에 편의시설도 만들어주고, 특히 대구

병원장 하시던 권가 집안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여기 농사 할 수 있기 상수도 다 놔줬어요. 그러

니 권가들이 힘이 있지. 그래가 권씨들이 계속 이장을 해왔는데, 전부다 외지로 나가버리고 세월

이 지나고 하니까는 다른 성씨들이 우리도 이장 시켜달라 뭐 그래가지고 한 10년 전부턴가는 그

래 돌아가며 하고있지.

학생들은 배고프면 라면 삶아먹지마는 그때는 쌀이 없으면 굶어야되잖아. 밥은 나는 저 보리밥

안먹어봤는데. 다른 집 며느리들은 손톱이 기를 새가 없어. 보리 치대느라고. 한번은 시어마이가

그걸 시켰는데, 처음에 그걸 할 줄을 몰라가지고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몰라. 큰기 (어린 시절에)

가정이 다 달라가지고 지금 사는 가정은 요 동네서 사니까 다 비슷비슷하게 사는데, 그때는 다 달

랐어. 스물너이면 이제는 대학교 졸업이지.

농사 짓다가 딸 둘 놓고 또 나가 살다가 신랑 직장 따라. 나가가지고 남의 셋방을 얻어 살았는

데, 저 영덕에. 거가 살았는데, 첨에는 잘 드갔는데 막 아도 봐주고 할매가 너무너무 좋았는데 이

할마이가 자기 얼라를 하나도 안나본기라. 그냥 양자를 하나 들여 사는데 아를 볼 줄을 모르는기

라. 아들이 어떻게 노는지 실정을 몰라요. 너무 까다롭게 구니까 살 수가 있어야지. 다시 와서 농

사짓고 아바이는 사업좀 하고. 우리는 수박하고 콩하고, 고추하고 나랏농사 짓고 하니까 그래 먹

고 사는거지요. 수박농사가 사람 고생이 얼마나 드는데, 돈은 되지만. 그래도 아들 다 키워놨으니

좀 덜해도 되지. 시집장게 다 보냈지 뭐. 그래그래 사는기예요. 아들은 중학교는 여기서 다녔는데

고등학교는 또 못다니거든. 상고는 여가 있는데, 용궁에, 공부시킬라면 인문계를 보내야되요. 대학

교 보낼라카믄. 점촌에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거든. 거가 우리 친정이잖아. 근데 우리 모친이 편찮

아가지고 친정집에 못갔다놓고 방을 얻어가지고 형제가 딸래미 둘이 거가서 다니다가. 막 달아올

라갔지. 큰 애 여덟살 때 동생 낳고 그 뒤로 한 살 터울이니까는. 지 언니가 대구로 가고, 지 동

생은 외갓집에 들어가서 일년 공부하고. 서울로 보낼라카다가 둘째가 공부를 좀 못해가지고. 그

둘은 대구 살고 하나는 점촌살고. 그래그래 사는거지 뭐.

지금 세월이 제일 살기 좋은 세월이라. 우리 세월이 제일 지금 어려와 또. 어른들 공경했지마는

지금 어른 대우를 못받는다고. 내가 자식들한테 잘 해야 어른대우를 받지, 며느리한테 잘항께 어

머님어머님 소리 듣지 그것도 안하면 대접도 못받을것같애. 세월이 요새 그런 세월이라고. 그렁께

아가씨 세월이 제일 좋은 세월이야. 어른들이 막 떠받춰 주제. 우리는 어중삔끼로 끼가지고 어른

들한테 애먹었제, 지금 며느리한테 애먹어야제. 억울한건 없지만 말이 그렇다 이거지. 우리 며느

리도 경북대학교 간호과 나왔는데 잘 해요. 젊은 사람들이 머리가 빨리 돌아가가지고 잘 하더라.

대학까지 나왔는데 못할게 뭐가 있어. 넉넉하게 사는거는 맨날 그렇지 뭐, 지금도 그렇고 허리 필

새도 없고 만날 그렇지. 죽어야 허리 피지. 촌에 사는 사람. 일거리 있는데 일 내팽개치고 안할

수도 없고. 먹고살기는 (농사) 안지고 먹고살수 있지마는 내 농토가 있고 하니까 또 촌에 살고하

니까 호부작 호부작하는거지요. 편하긴 편하죠. 요즘은 기계화가 됐으니까. 뭐도 전부다 기계로

짓고, 기계로 비고 하니까 편하데. 우리는 그때 머슴기때도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노파도 데리고

왔다가, 사람 돈주고 사러 다니면 새벽에 밥해줘야지, 요샌 기계라 그런게 없지. 밥 다 시켜다 먹

고. 그때는 사람 부리면 돈이 값어치가 있어가지고 삼천원씩 오천원씩 내 시집왔을 때 그래뿐이

안줬는교. 지금은 돈이 값어치가 없어가지고 학생도 돈 써봐서 알겠지만 오만원 들고 나가도 쓸게

없잖아 액수만 높지. 그만큼 인플리가 너무 많이 됐다 이기라. 살기는 좋지마는. 한 마디로 말하

면 돈은 벌기 쉬운데 쓸라카면 쓸게 없어요. 우리는 촌에 사이 옷도 그냥 이래 입지, 메이커 뭐

티 하나에도 9만원 10만원. 그 돈이면 나는 10개는 사입을텐데. 오천원짜리 만원짜리 티가 천진

데. 요새 젊은 사람들 전부다 메이커 입지 뭐. 며느리가 메이커 사다주면 “오야, 고맙다.” 하지만

촌사람들이 그게 뭐가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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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이순옥(58세) <그리 권리는, 아버님 어머님 권리를 다 행사하시고, 맏며느리 맏아들은 책임하

고 의무 뿐인거야. 제(祭)나 지내고. 그래도 부모와 자식이니깐 어떻게 부모 말

을 거역을 못하고 법으로 알고…>

“옛날에 내가 결혼당시엔 19살에 결혼했어. 아저씨는 24살 그때는 뭐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그

래. 우리 친정에도 우리가 7남매거든. 옛날에는 다 먹고살기 힘들었자나. 그러니깐 공부도 어치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 맞고, 뭐 객지 생활하고, 그래 살다 보니까 힘이들었어. 그래가지고 그냥

하두 힘이드니까 집에 왔는데, 어째 그래 한 마을에서 인연이 될라고 그랬는가. 또 이제 이 양반

하고 이제 저기 친하게 지내던, 그러니깐 우리 집안 먼 쪽 집안에 아지매 되시는 분이 이 양반을

소개를 시켜줬어. 그래가지고 만나게 되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우리 친청엄마는 어 저기뭐라, 막

내며느리로 가면 힘든다고 결혼을 반대를 했소. 그랬는데 우리 친정아버지가 곁으로 딸 보내고 사

위 보면 안만케도 같이 농사짓고 사니깐 든든한 사위가 있으만 이제 쫌 지원군이 되나 싶어가지

고. 그래인제 결혼을 하게됐지. 아버지가 하라그래니깐. 그래가지고 결혼 하게됐지. 결혼을 하고

딱 집에 시집이라고 오이, 시조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시누. 식구가 몇이야? 그렇게 많더

라고. 그래많은데, 19살에 뭐 뭘 알겠나.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그래 그냥 시집이라코 왔는데,

지금은 예식장에서 했지만, 그때도 예식장 식이 있었는데, 그냥 집에서 구원식으로 사모관대, 족

두리쓰고, 그래가지고 결혼을 했거든. 그리 결혼이라꼬 와서 딱 뭐 시즉 살림이랄것도 없고 아주.

지금 이거(집)는 내가 살다가 집, 지은지가 이게 우리가 20년이 넘었지? 82년도에 집 짓나? 92

년도에 짓나? 이 터에다가 그리 집은 짓는데, 내 결혼할 당시에는 초가집이었고 형편없었어. 그래

가지고 시조부, 시아버님, 시동생 이래 있느니까는 뭐, 집 그냥 조그만데다가 그냥 우리 둘이 자

는 방은 아주 둘이 여. 저 농짝하다 놓고 둘이 돌아눕지도 못했어. 그런 골방에서 살아았어. 살다

가 신혼살림이라꼬 하다마다가, 한 두 달, 석 달 살았나? 군대를 갔어. 군대에 가가지고, 그리 금

방 뭐 정들자 이별이라고 신랑보고 시집을왔는데, 금방 군대를 가이. 어떻게 해. 뭐 전부다 서먹

서먹하고 전부다. 그런데 그러니깐 (결혼생활을) 마치질 못하겠다 하이께는, (남편이) 그래도 자기

네 집에 살자는기라. 죽어도 자기네 집에 사이래요. 그이 신랑말을 법으로 알고 그래서 시집살이

가 된거지. 그래 지금은 군대가도, 휴대폰으로 다 연락 다하고 영상통화도하고 뭐 다하잖아. 그때

는 1년 6개월만에 휴가를 왔고, 6개월만에 처음으로 편지가오고 그랬어.

그동안에 시집살이 하는거는 말도 못하지. 결혼 하자마자 애기가 생겨가지고, 3개월 되는거, 뱃

속에 3개월 든거보고 (군대) 갔단말야. 식구가 많으니깐 애기 키우는거는 이제 시어머니도 봐주

고, 시누도 봐주고 하니까. 애기 키우는거는 뭐. 지금처럼 그렇게 애들 막 이렇게 이렇게 해서 못

키우자나. 그냥 때되만 젖맥여 놔노만, 할머니가 엎고 나가고, 고모가 엎고 나가고 이래가지고선,

애기키우는거는 내가 힘이 쪼금 덜들었었는데, 젤 이제 그, 시집살이 하는게 아무것도 할 줄 모르

는데 신랑도 없는 층층이 시하에서 시집살이 하기가 그게 젤 힘들었지. 그래 또 한마을에서 친정

이다 보니까 내가 잘못하면 또 친정엄마한테 또 응? 저거하잖나. 엄마가 딸래미 잘못 보내나놓고

맘고생하잖아. 그래서 그거 참아가면서, 그거 하느라고 진짜 힘들게 살았어. 내가 못하면 친정부

모님 욕 얻어 먹인다꼬. 에휴. 말도못해 우리어머님.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놀부

심보. 생기신것도 키도크고, 등치도 크시고, 그런데 욕심많고, 심술많고. 뭐 하여튼 변덕이 변덕스

럽기 말도못해. 그렇게 맞챠주는께로 하다보니께는, 내인생은 없는거지. 그래 살아살아가다 보니

께는 내 시조부한테 두드려 맞기도 맞았어. 우리 할아버지가 이렇게 이렇게 떠는병, 지금 뭐 모라

카노? 파킨스병이라카는거 있잖아. 그 병이 있어가지고 밥을 자기 서서 못잡으셨어. 그래 내가 신

랑은 군대가 없고, 할아버지 밥상을 이해 챙겨가면, 내 밥한그릇 여뜨고, 할아버지 밥 떠가져가서

인제 국에 말아주구. 이래 떠드리고, 내가 나 한 숟가락 먹고 또 나물이면 나물에 비비가지구 한

숫가락 드리고, 내가 한 숟가락 먹고. 일일이 물 떠드리야되고 담뱃불 옛날에 곰방 그거 담뱃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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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긴거. 거기다 또 담뱃불 피드려야지. 그 담뱃불 잘못 피드리면 고만 뱃고바리로 고만 두

드려패. 삘리안한다고. 아이구. 지금은 감자 깎는 칼도 좋은거 나왔잖아. 이렇게 쓱쓱 깎잖아. 옛

날에는 식구는 많고, 여름에 감자를 삶으라 그랴만, 감자를 우에든간에 이만큼 큰 방치기로 하나

씩 내놓네. 어머님이 긁어다 삶으라고. 옛날에는 놋숟가락으로 긁었어. 그기 미끌미끌 해가지고

칼날같이 나가질 않잖아. 그리 이리키 이리키 하다보면 이리 찔그랑 저리 찔그랑 이게 잘 안 깎아

지지. 그리하다보면 그게 한나절돼. 그게 깎다보면 늦다고 생난리나고, 시조부님은 빨리 삶아다

당신 줘야되는데, 빨리 안해준다고 난리가 나고.

아이구, 말도 하지마라. 내 살아온 얘기는 너들 몇 날, 몇 일 들어도 다 못들을 거다. 그래서 지

금 우리 딸래미가 올해 서른 두살 나거든. 결혼한지 인제 4년됐어. 딸래미도 그렇고, 아들도 그렇

고, 내가 너무 힘들게 살은것을 애들이 보고 커서, 그래인제 엄마 힘들다고 동서들 밑에 세명이

있는데 다 분가했지. 맏이라고 재산주고 그런 것도 엄써. 먼저나온게 죄랴. 죄랴. 그리 권리는, 아

버님 어머님 권리를 다 행사하시고, 맏며느리 맏아들은 책임하고 의무 뿐인거야. 제(祭)나 지내고.

그래도 부모와 자식이니깐 어떻게 부모 말을 거역을 못하고 법으로 알고, 그래가지고 살고..

우리친정은 그렇게 배곯고 그렇게 살지는 않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원채 술을 많이 좋아하셔가지

고 한 달 육장(場)을 안빠져. 한 달 육장을 자전거 몰고 가시만, 술채가지고 만날 곤드레 만드레 해

가지고. 거기다 자식들한테는 얼매나 엄한신지 말도 못했어. 우리아버지 성질이 그래가지고, 지금

내가 그리 살다가 너무너무 힘들 때는 가끔식 생각해본다. 그래도 친정아버지가 원채 나를 힘들게

엄하게 키왔기 때문에, 내가 이 힘든 시집살이도 견디고 살 수 있었다. 지금 너들처럼 한두 명씩

낳아가지고, 오야오야 공주과로 그랴 키워노으만, 힘든거 못벼텨. 우리 며느리들도 와서 “아이구

어머니. 어떻게 살았어요.” 그카는걸. 우리 딸래미도 “엄마처럼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 엄마 나도

엄마처럼 그렇게 상황이 되면, 나는 이혼한다.”고 그잖아. “만약에 내가 힘들었다고 너네들은 놔두

고 이혼을 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럼 너들이 우에 됐겠노.” 그래. 그 부분은 고맙다 카잖아. 너무

너무 엄마가 고맙고, 엄마 눈물, 피, 땀 그게 전부다 거름이 되서 오늘날 우리가 이러케 잘 살 수

있으니깐 엄마 고맙다 칸다고. 딸래미가 그칸다.

공부는 많이 못시켰어. 맏이는 2년제(대학) 나와가지고 먹고사는게 다 공부랑은 별로 상관없더라

고. 근데 일단은 인제 청소년기에 들면 첫째는 공부를 해야긴 해야지. 사회생활 해나갈라고 그라믄

은. 그런데 인제 우리 첫째는 서울에서 대여공전 나와가지고, 처음에는 뭐 대여건설 들어가서는 몇

년 다니다가, 지 막내삼촌이 서울에서 한약 건재상을 하거든. 그래인제 건설현장 댕겨봐야 만약에

결혼해가지고 나서 나중에 살림한다고 그래도 정착하기좋고 그라니깐 삼촌한테 가서 장사배울래

이러더라고. [중략] 그뭐 사는기 괜차네. 둘째는 또 금호공고를 나왔어. 구미. 옛날에 박정희대통령

이 시운 금호공고. 그 공고를 나와가지고 하사관으로 들어가가서리, 직업군인이야. 그래가지고 나

름대로 뭐 살고. 막내가 인자 딸래미인데 그기 뭐 회사원한테 그래 시집을 가가지고 별로 뭐. 그

월급받고 그래 사니까 크게 저게 없어. 그래 내가 아이고 “좀그래도 돈벌이 좀더 하는 사람이 돼야

돼는데...” 그카고. “엄마 사람은 괜찮은거 같애.” 사람 괜찮으면 고맙지만, 날 돈줄라꼬? 딸이 장남

한테 시집간다카면 반대, 절대 반대지. 그때 내가 아들한테도 큰아들 결혼할적에, 내가 걱정을 마

이 했었어 사실은.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부모님 살아 계시지, 뭐 시부모님, 시아버지에. 안만 따로

산다 그런 시대지마는, 결혼할 색시가 있을라 싶었는데, 그래도 우리 며느리가 어디서 그래도 인연

이 되가지고서는. 친정이 대전이거든. 그래 만나가지고, 얼마나 착하게 이쁘게 하는지몰라. 요즘사

람 같지 않애. 요즘애들은 막 되바래지고 그러잖나. 지꺼만 알고. 참 어른 알고 잘해. 얼마나 잘하

는지 이뻐. 자식보람으로 사는거야. 내가 너무너무 힘들어서 살다가 죽는게, 어디가서 사람이 힘들

만 이런저런 생각하게 되요. (남편이) 그래 젊었을 때, 당신이 처녀 때 고생한거 말년에 되가믄, 꼭

당신가튼 며느리 봐가지고 그러케 살자카면서, 그래 고생하고 살았어. 그래가지고 참 살다보니께

네, 며느리도 맏이는 맏이 나름대로 싹싹하고, 책임감 있고, 어른들 잘 받들고. 둘째는 신랑보다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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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위거든? 윈데도 또 말이 없어. 무던해. 그래가지고 또 그것도 수던분하이 그래가지고 잘 따라오

고. 그래서 내가 맏이로 살아온게 힘이들어서, 둘째 결혼시키고 신혼여행 갔다 와가지고서는 두 동

서 딱 안쳐놓고 그랫어. “둘째 너는 어떤일이 있어도 맏이 하는일에 대해서 절대로 반기들고 나서

지마라. 너네들이 봐서 아주 참 잘못되는 일인거 같으면 몰라도, 맏이는 우리가 나중에 살다가 언

제라도 이 세상에 없어질 때는, 맏이가 내 부모역할한다. 남보다는 낫다. 그래도 서로 의지하고 살

라. 그래만 맏이는 친동생거치 생각하고, 둘째는 맏이를 친언니겉이 그래 딸코, 절대로 잘허니 못

허니 그런일 있어가지고 절대로 안된다.” 그리 그케했어.

처음부터 농사졌어. 뭐 벼농사, 보리농사 그랬지. 팔아서 돈도 안됐지. 애들 공부 시킬때만 해도

소를 많이 맥이지는 않았고 한 세 마리, 네 마리 요정도 맥였어. 그래도 손이 많이가. 내 처음에

결혼했을 적에는 돼지도 맥였었어. 돼지도 하고 했었는데, 그리 이 양반 군대가고 뭐 이래는 바람

에 팔아 치와뿌써. 군대 갔다와가지고 이제 5년만인가? 수박농사. 그때 수박농사를 시작했지. 그때

서부터 수박을 지금까지 했는데, 그러니깐 수박농사를 한 30년 넘게했지. 힘들었어. 힘이 드나마나

그때는 뭐, 자식 키울 때는 뭐 진짜 어케 크는지도 모르고 그냥 건강하게 크만 크는가보다 이래 생

각했지. 그래 이제는 자식들 결혼 다 시키고. 이제 아직 아버님 요양원에 계셔. 그래가지고 다달이

또 요양비 내야돼. 그니깐 나는 자꾸 여기저기 아파. 당뇨도 있고. 저번 적에는 그런거 없었는데,

그러니 몸 자꾸 여기저기 아프고 이래가지고 힘이 드니깐 자꾸 짜증이나지. 그래가지구 신랑한테다

가 막 잔소리 막 깨재킨다. 그라믄 ‘어디 개가 짓노. 너는 떠들어라’ 그라카고선 자기 하는대로 하

고. 이 양반은 뭐 한마디로 성실 그 자체. 절대 한눈 안 팔고 젊었을때부터, 잘생긴거 얼굴값 안하

고 바람 안펴. 자기가 또 장남이고 하니깐 흐트러짐이 없서야되잖아. 밑에 동생들 책임 다 져야지

그러니깐. 우리 아버님, 어머님은 옛날 분들이래가지고 낮놓고 기억자도 모르시는 어른들이 돼가지

고, 그냥 날새만 눈버러지만 일하고, 그 당신 입에 들어가는 밥이나 그거 생각이나 하고 하지. 자

식들에 대한 앞날에 미래 뭐 이런거 이런 것들 절대로 몰라. 그냥 일하고 밥잡숫고 맛있는거 마이

잡숫고. 고만 그거밖에 없으셨어.

우리가 땅이... 원래 갖고 있었던거는 한 지금의 땅에 하나, 둘, 세군데 정도는 원래 땅이었고, 우

리 이제 마이 늘렸지. 그동안 결혼해가지고 수박농사 지가지고. 원래 아버님이 젊을 때 남의 집 머

습살이도 하고, 양조장에도 댕겨따카고. 그래가지고서는 그래 벌은 땅으로 가지고 땅 몇마지기 샀

다 그래. 여 회관앞에 한 두마지기 군데군데 고래 골라가지고. 지금 농사는 둘이가 하고, 일년에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지. 할머니들 많이 사고. 이 동네 사람들도 있고 다른 동네에서도 오고. 품앗

이(로)는 다 못하고. 우리는 일거리가 많기 때문에 품앗이를 다 못해. 처음부터도 우리는 녹을 많이

썼어. 그래니깐 평생 일바라지 하느냐고 죽을 고생했어. 일바라지가 너무너무 힘들어. 삼모작 하느

라고 바쁘지, 처음에 수박하고, 수박 보내고나만 6월 말이면 다끝나거든. 그거 끝나만 거기다 이모

작으로 참깨를 심어. 참깨를 심으만 참깨가 이제 그기서 8월 한 20일 정도되만 25일경 되만 이제

다 끝나. 참깨가 삼모작으로 김장배추 들어가고 식구들 먹는건 얼마안되지. 거의 다 해가지고 팔

지. 이 동네는 농사를 해가지고 다 사는거지. 이제 농사질 사람이 없어서 그게 앞으로 제일 문제

라. 지금 녹을 얻어가지고 하는 할머니덜도 칠팔십대 할머니들이거든. 그 할머니들 돌아가시고 나

면 사람없어. 그래가지고 만약에 우리 생각에, 서울은 굶어죽는 사람이 극히 다반사라고(해도) 촌으

로 내려오는 사람이 없어. 그래 정부에서 하다못해 좀 외국사람들이라도 젊은사람들 좀 내가지고서

는 농사를 질수 있는 방향을 해줘야하지. 이런식으로 간다그만 우리나라가 망해. 농사짓고 먹고살

게 없으면 망하지 뭐. [중략] 수박농사 짓고 더 힘들어. 일이 더 많아지가. 옛날에는 남자들이 바

깥에 가가지고 일을 마이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여자들이 바깥에가서 안하만 되지를 안하고. 그러

니깐 일이 너무 많아. 그래서 너무 힘들어. 할아버지가 뭐 일을 마이 하지마는 낮에 일은 여자들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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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향석 1리 여성 구술 생애사의 맥락

1) 농촌사회와 여성의 삶

현지조사 중에 듣게된 남성들의 기억들과는 달리 여성들의 생애사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매우

협소한 공간의 범위 안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다. 가까운 지역에 친정이 있었지만 출가외인이 된 여

성들에게서 혼인 이후의 친정식구들에 대한 내용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대신에 시댁식구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여성들은 집과 논과 밭, 넓게는 장사를 위해 5일마다 찾았던 용궁장까지를

자신들 생애의 범위로 한정짓고 있었다. <옛날에는 나갈 줄도 모르지,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라

는 박영순의 말처럼 농촌여성들의 생활영역은 자신으로부터 조차도 통제되고 있었다.

여성들은 남편보다 오히려 시댁식구에 훨씬 큰 비중을 두고 집안일을 기억하였는데, 이는 여성

들이 혼인 이후에 며느리에게 유교적 덕목과 가치규범을 강조하는 시댁식구들 하에서 전혀 새로

운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던데 대한 어려움의 기억들 때문으로 본다. 향석 리에는 일찍이 조선시대

때부터 향교가 세워졌고, 현재까지 그곳에서 매년 두차례 마을사람들이 춘추향제를 지내오고 있을

정도로 유교적 가치가 중시되어 왔다. 때문에 여성들은 혼인 이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농사일과 시

댁식구들의 살림살이를 도맡아야 했고, 출산을 의무가 있었다. 출산의 의무는 농촌에서는 대게 노

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요구였지만, 동시에 손(孫)을 잇기위한 남아 출산의 요구이기도 하였다. 후

자의 의무감은 안동 권가의 며느리들에게 훨씬 더 강조되었는데, 권가의 4대 외동에게 시집을 온

송순자가 <우리 시어머님 내 아들 낳았을 때 동네 난리였지. 딸 낳니까 우리딸 쳐다도 안보대.>

라고 말한데서도 그러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들이 농사일만큼이나 힘들어 했던 것은 어렵기

만한 시댁어른들을 모시는 일과, 남편의 형제들까지 줄줄이 딸린 대가족 집안에서 살림을 혼자 도

맡아야 했던 것이다. 비록 육아에 있어서는 집안에 시집가지 않은 시누이들과 시부모님이 아이를

돌아가며 봐주는 덕분에 거의 ‘힘 안들이고’ 키웠다지만, 열악한 농촌환경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대식구가 쓸 물을 길어나르는 일과, 없는 형편에 매 끼니때마다 식구들을 챙기는 일은 여성들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누이들은 같은 여자였지만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러오는 일은 언제

나 며느리의 몫이었다. 현지조사 중에 마을에서 만난 한 여성은 시집살이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

이 밥 짓는 일이었는데, 신혼 때에는 여덟 식구가 먹을 밥의 양을 맞추지 못해 식사 한번에 밥을

세 번이나 지은 적도 있다고 회상하였다.31) 시댁식구들에 비하여 여성들에게 남편이라는 존재는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이는 한국 근대기에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징병이나 징집을 가

야하는 피해자적 입장에 놓여있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그들이 생계유지에 있어서는 여성들만큼이

나 적극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본래 향석 1리는 임진왜란 이래 안동 권씨 집성촌었다. 현재는 그 가구가 30호 정도 밖에 되지

는 않지만 과거에는 마을의 절반 이상이 안동 권씨 문중일가였다. 때문에 며느리들은 같은 마을에

있는 시댁 친척들 중에 일손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농사일을 도와주거나, 때에 따라서는 식모노릇

을 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안동 권씨 집안 딸로 향석에서 태어나고 자라 같은 마을 남성에게 시집

을 온 이순옥의 경우에는 호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지만 자신이 잘못하거나 대들면 한 마을에

있는 친정부모와 친척들이 욕을 먹을까 걱정이 되어 꾹 참고 살았다고 술회하였다.

여성은 농사일과 가사노동을 병행하며 쉴 새없이 움직여야 했다. <조선 시대 집안에서 가장 늦게

31) . (2011.9.28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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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밤잠 없는 노인이 아니라 여성이었다..게다가 평상시에는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

고… 행상이라도 나가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했다…여성들은 평소에도…농사일을 하였지만 농번기에는 남자

들 일까지도 했다…여성들이 집에서 일터까지 점심과 참을 날라주었다.>32) 이러한 조선시대 여성의 모습

은 수백년을 지나 시대가 변하였는데도 근현대기를 지나고 있는 농촌 여성의 모습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여성은 논에서는 농사꾼으로, 논 밖에서는 행상으로, 집 안에서는 며느리, 아내, 어

머니, 일밥 짓는 사람이 되어 경계가 불분명한 역할을 가지고 계속해서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

다.

하우스 수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소득이 일정치 못하여 여성들은 임산물을 채취하

여 장사를 병행하기도 하였다. 교통수단이 마땅치않고 도로가 정비되기 이전에는 네 시간여를 걸

어야만 용궁장에 도착하였다. 당시에는 농사를 지어도 수확물을 가져가는 잡목반이 없어 많은 경

우에는 직접 도매상을 찾기 위하여 새벽부터 리어카를 끌고 시장까지 가야했다.

농촌 근대화의 일환으로 도로와 교통사정이 훨씬 좋아졌던 때에 남성들은 차를 타고 외지와 왕

래하는 일이 잦아졌고, 아예 맞벌이 형태로 아내에게 농사일을 맡기고 남편은 가까운 읍지에서 직

장일이나 사업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여성들은 기존의 생활권역을 거의 벗어

나지 못하고 농사일에만 매진하였다.

연구자들은 하우스 수박 농사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의견에서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성

의 경우에는 하우스 수박농사가 여름철 작업을 할 때 너무 더운 것만 뺀다면 이전 농사들에 비해

일은 쉽고 돈벌이로는 좋으며, 노동력도 절감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였다.33) 반면 여성들은 하우

스 수박농사가 돈벌이로는 좋지만 삼모작을 해야하기 때문에 연중 쉴 틈이 없고, 쪼그리고 앉아

작업을 해야하기 때문에 다들 관절이 나빠졌다고 말하였다. 남성이 이야기한 노동력 절감이라는

것은 하우스 농사로 전환하면서 농사면적이 줄어들고, 농사일을 하는 때가 단계적으로 거의 확실

히 정해져있는 탓에 일이 단순해 졌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많은 과정에서 섬세한 여성의 노동력이

더욱 중요해졌으며, 1년 단위로 계획된 농사 과정에서 마을 여성들은 품앗이 형태 등으로 서로 협

력하여 노동력을 충당하였다. 정 일손이 부족할 때에는 일용 일꾼을 불러왔다. 이렇게 불려오는

일꾼들 또한 여성으로, 대게는 나이가 많아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할머니들이었다. 일꾼을 부를

경우에 고용 여성은 농사일은 농사일대로하고, 일꾼들을 먹이는 ‘일바라지’까지 해야했다. 이순옥

은 농사일을 하는 세대가 너무 고령화되었고, 젊은 세대들은 밥벌이가 없다해도 농사일은 거부하

니,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외국인이라도 와주지 않으면 정말 어렵게된다며 우려하였다.

농촌마을로써 향석 1리의 여성들이 갖는 또하나의 특성은 자녀에 대한 높은 교육열이다. 근대기

대부분의 농촌 사회에서 초등학교가 미비하였던데 반하여 향석리는 1947년 용궁초등학교 향석분

교장이 설립되기 이전에도 용궁향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여 마을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여성들은

계층의 구분없이 자녀에 대해 높은 교육열을 드러냈고, 덕분에 대부분의 자녀들은 대학을 졸업하

기까지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수학할 수 있었다. 특히 학자나 공직에 몸담고 있는 자녀들이 적지

않았다. 자녀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에서 유학한 경우가 많았는데, 점촌읍으로 진학하는 경우

가 가장 많았고 멀리는 서울, 대구까지 가서 유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자녀가 자취

를 해야하고, 더욱이 사립고등학교인 경우에는 자녀를 유학시키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자녀

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여성들은 농사일을 계속하여 그 뒷바라지를 해야했다. 여성들은 평균

5남매를 낳았는데, 이들은 나이터울이 크지 않아 한꺼번에 대학에 진학하게 됐을 때에 뒷바라지를

하는데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고 한다.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줄곧 외지에서 직장생활

32) . 2004.「3. 여성과 가정생활」『한국여성문화사1』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p.250

33) 향석 1리 이장 최상윤과의 인터뷰(20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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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며 분가해 살고 있다.

하지만 자식들이 모두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해서 여성의 뒷바라지가 끝난 것은 아니다. 연로한

시부모님을 모셔야하기 때문이다. 이순옥의 경우에는 한 해전(2010)까지만 해도 돌아가신 시어머

니를 모시고 있었고, 현재(2011)는 요양원에 계신 시아버지의 요양비용으로 매달 집안에서 큰 돈

이 지출되고 있다. 김향숙의 경우에도 같은 마을에 살고있는 시어머니의 끼니를 챙기고 적은 액수

이지만 매달 생활비를 드리고 있다. 박영순은 현재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며, 이옥경의 경우에

는 시어머니가 여든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수 년간 그의 알콜중독과 치매로 인한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연구자들은 노인들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질병을 치료하거나 요양을 위한 시설들

이 도시 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보편적으로 갖춰지면서 농촌여성들의 부양의무가 시부모에서 자

녀로, 자녀에서 다시 시부모로 반복되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렇지. 죽어야 허리 피지. 촌에 사는 사람. 일거리 있는데 일 내팽개치고 안할 수도 없고. 먹

고살기는 (농사) 안지고 먹고살수 있지마는 내 농토가 있고 하니까 또 촌에 살고하니까 호부작 호

부작하는거지요.>라는 정옥자의 말은 여성들에게 지금의 농사일이 생계유지를 위함이라기 보다는

농민으로써 땅에 대해 갖는 애착과 수십년동안 농사일은 매달렸던 과거 삶의 연장선임을 생각케

한다. 또한 농사일은 그들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 능력을 마치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과 같이 생각하는 듯 하였다. 특히 건강

이 좋지 않은 김경숙과 김향숙은 신체의 불편함으로 인해 농사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무기력함을

느꼈고, 극단적으로는 자신이 더이상 삶을 이어가야할 이유가 없는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김경

숙은 자신이 건강 때문에 농사일도 못하면서 집안의 재산만 축내고 있다는 식으로 일종의 죄책감

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2) 계층과 여성의 삶

생애사에서는 토지 소유의 유무를 기준으로 자작농과 소작농으로 계층을 구분하였는데, 이들이

소유한 토지의 면적까지 조사하지 못한 탓에 이 두가지 구분만으로는 계층이 정확히 구분될 수

없다는 점은 조사가 갖는 한계점이다. 다만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향석 1리 대부분의 농지가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부분 안동 권씨 종가인 권순만 종가의 소유였다는 것이다. 조사 초기에

는 계층의 구분이 안동 권씨 일가와 각성 가구들로 나누어질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현지조사에서

안동 권씨 일가 중에도 친척들의 농지에서 소작하는 경우가 많았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 이후로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기 농지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알게됨으로써 그러한 구분이

향석 1리의 계층을 구분하는데 유용한 잣대로 적용될 수 없음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마을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안동 권가의 가옥이 대부분 높은 지대, 즉 마을의 윗쪽

에 모여있다는 점은 제방이 생기기 이전에 마을의 아랫쪽, 낮은 지대에 있던 가옥들은 침수피해를

입어야했다는 과거의 이야기에서 권가들이 마을에서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할 수 있을만한 권한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4) 이옥경과 정옥자에 따르면 안동 권씨 문중일가들은 권순

만의 종가를 주축으로 하여 마을에서 계속 이장자리를 독점해왔고, 마을의 대소사에서 큰 영향력

을 발휘했다. 이는 권가가 수적으로 다른 성씨들에 비해 우세했고, 많은 가구에게 있어 지주의 입

장이었으며, 가뭄 때는 곡식창고를 개방하여 식량을 나누고, 상수도나 공원 등 주민들을 위한 시

설을 마련해주는 등 마을을 위한 일에도 늘 앞장서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는 권씨

34) 남편에 따르면 1960년대 이전까지 대부분 흙집이었던 것이 호우 때마다 침수 피해로 집을 유실하니 돈이 있는 집안들은

언덕에 새 부지를 마련하고 양옥으로 개조하여 피해를 면했다 한다.(2011.9.10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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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들이 외지로 많이 빠져나가 가구수가 매우 줄었고, 향석리에 권가 소유의 땅이 줄어든 만큼

힘이 약해진 탓에 다른 성씨들이 더이상 그들이 추진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마을 이장직이 각 성씨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된 것은 그 결과 중 하나이다.

계층을 두고 향석 1리에서 발견된 특이점은 혼인 이전에 중상층의 가정에서 성장하였던 여성들

이 이 마을로 시집을 오면서 곧바로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계층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향석리가 고향인 이순옥을 제외하고는 여성들 모두가 가까운 외지에서 중매결혼을 통해 향석 1리

로 시집오게 되었는데, 시댁이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송순자, 김향숙 외에는 남의 땅에서 보리,

벼, 고추 따위를 소작하여 간신히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여성들은 ‘속아서’ 중매결혼했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해 김경숙의 남편 윤성식은 <혼기가 다 찼는데도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할

것이 걱정되었고, 군대에 가있는동안 부모님 끼니라도 챙겨줄 수 있는 색시를 앉혀놓아야 했다.>

고 말하였다.

계층별 경험의 차이는 여성들의 노동에서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시댁집안이 부유했던 송

순자와 그럭저럭 먹고살 정도였던 김향숙 외에는 시댁이 가난한 소작 빈농이었으므로 여성들은

배우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농사일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해 결손을 메꿔야 했고, 부

수적으로 나물장사나 큰집 권씨 일가에서의 식모살이와 농사일을 도와주며 생계를 유지했다.

토지 소유의 유무는 한동안 마을 내에서 가구들간의 계층분화를 심화시키다가35), 토지개혁과 마

을 주재지주들의 농가처분으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기땅’을 소유하게 되고, 하우스 주민들이 수

박농사로 큰 소득을 올리게 됨으로써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을 소작농들의 계층

상승이 여성의 지위도 상승시킨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소득은 높아졌으나, 삼모작을 하게됨에 따라

여성들은 거의 1년 내내 농사일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 일이 워낙 고되어 여성들마다 관절염과 허

리에 통증을 호소하였다. 특히 소규모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여성들의 경우에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부가적인 생계양식-예를들면 길쌈이나, 밭농사, 식모살이, 임산물 따위를 장에 내다파는 것

등-을 취해야 했으므로 그들 생애사에서는 고된 노동과 생계양식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강조되

었다.

3) 세대와 여성의 삶

향석 1리 여성들의 세대는 70~80대, 50∼60대로 구분하였다. 김경숙과 송순자, 최귀매, 이옥경

이 속하는 70~80대의 세대 범주는 그들이 혼인으로 향석 1리 주민이 된 이후에 징병, 징집으로

인한 남편의 부재를 경험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을 지닌다. 50∼60대의 범주에는 정옥자, 김향숙, 박

영순, 이순옥이 속하는데, 이들은 새마을운동과 농촌 근대화 사업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와 세대차

이를 강조하였다. 이들의 생애사에서는 며느리와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어 지금 세대들

이 ‘좋은 세월’에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세대간 공통점으로는 마을에서 만난 할아버지들이 일제시

대와 한국전쟁기, 토지개혁과 새마을 운동,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 등의 순으로 역사를 기억

한 반면, 여성들은 삶의 기억이 결혼, 출산, 시댁살이, 생계와 자녀의 출가와 같은 가족을 중심으

로 한 사건 단위로만 구분될 뿐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성들은 세대별로 혼인연령에서 확연한 구분을 나타내는데,

70~80대 세대는 모두 20살이 되기 이전에 조혼하였다. 표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20살 이전에 결

35) 쪽에는 늘 먹을 것이 있었다던 송순자와 입 하나라도 덜기위해 겨울철에는 친정에 머물렀다는 김경숙의 이야기는 극명

히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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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한 세대들은 초등교육이 학력의 전부이거나 그보다는 아예 받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김경숙

과 송순자는 한국전쟁으로, 최귀매, 이옥경, 이순옥은 징병으로 배우자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다.

일제 말과 한국전쟁 때까지는 아버지(남편)의 부재 속에 모중심 가족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한국

근대의 특수한 산물이다.36) 이순옥의 경우에는 층층시하의 낯선 시댁식구들 사이에서 신혼기를 혼

자 보내야했던 것이 외롭고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50~60대는 비교적 전쟁이 끝나고 안정된 시기에 결혼한 세대이다. 이 범주의 여성들은 이순옥

을 제외하고는 최소 초등교육까지는 마쳤으며, 이전 세대가 친정에서 살림이나 작은 소일거리만

하다가 시집온 것에 반해 이 세대에서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경험하였던

이도 여럿이다. 정옥자와 생애사가 인용되지 않은 박휘정, 이정실은 다른 세대가 농지 소유와 작

물을 중심으로 농사일을 설명한 것과는 달리 전기와 상수도 시설, 농기계 등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생기게된 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여성들에게는 노동의 편의성을 가져왔고, 특히

전기보급으로 인해 들어온 TV는 여성들의 여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향석 1리에서 40대 이하의 주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마을 자녀들은 고등학교부터

는 외지에서 유학하였는데, 70~80대의 자녀들은 용궁상고나 점촌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50~

60대의 자녀들의 경우에는 대구나 서울에서 유학한 경우도 많았다. 농촌출신 자녀들의 유학경험은

송도영이 그의 논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찍부터 그들이 고향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살도록

준비시키는 <주민진출>의 과정으로 연결되었고, 그들이 더 큰 도시의 주민으로 편입되어 가는 이

촌향도는 세대에 따라 단계적으로 준비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37) 연구에서 생애사를 인터뷰한 여

성들 가구 중 자녀세대가 향석에 함께 거주하는 경우는 송순자와 최귀매 뿐이었다. 송순자의 경우

는 둘째아들과 며느리가 같은 마을에 분가하여 살고있는데, 송순자의 남편이 4대 종손이었던 탓에

아들이 과수원과 농지를 물려받아 부모 곁에서 살고있다. 최귀매의 경우에는 둘째 아들 내외와 함

께 동거하는데, 두 내외모두 장애가 있는 특수한 경우이다.

모순적이게도 자녀들의 도시로의 전출은 그들이 부모에게 당장 경제적으로는 지원을 해주고 있

다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어머니가 노년에도 노동에 종속되어야 하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오늘날에는 여성이 농촌출신의 남성과 혼인했다하여도, 며느리라는 존재가 더이상 집안에 들어와

살림을 물려주고 농사일을 맡길 수 있는 이는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건강 상

의 이유 등으로 아주 일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지 않고는 혼인 이후 줄곧 해왔던 그대로 집안 살

림과 농사일에 전적으로 종사해야 한다. 농가의 부모들은 이제는 농사일을 몇째에게 물려줄 것인

가 하는 고민 대신에 농촌 노동력의 결손을 충당하기 위한 정책을 바라게 되었다.

5. 근현대기 향석 1리 여성들의 노동변화

: 가족의 생존과 부양을 위한 지속적인 노동력 투여

연구자들에게 생애사를 들려준 향석 1리 10명의 여성들은 단시간동안 가장 급진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한국 근현대사에서 농촌여성들이 생존을 위하여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혼인 이후 아내와 며느리, 엄마라는 이름을 얻음으로써 가족과 농사일에 있어 주요한 노동력이 되

었다. 남편이 부재한 시기에는 시댁 식구들과 자녀를 위해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36) . 1995.「가족생활의 변화와 여성의 성장」『한국문화인류학』p.458

37) 송도영. 2004.「생활공간과 교통」『인류학과 지방의 역사』역사인류학회. 아카넷.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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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 하에서 가장으로써의 권한은 거의 누리지 못하였으며, 많은 경우에는 고된 시집살이와 생

계유지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송순자는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와 가사노동 외에는 거의 일

을 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려야 했다. 보릿고개를 넘는 빈궁

한 시기에, 혼인하여 향석 1리로 오게된 이 여성들은 계층의 변화로 인한 혼란을 느낄 새도 없이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생계 전선에 곧바로 뛰어들어 온갖 굳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농촌여성

들에게 가족부양과 농사일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사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

는 것이었다. 농사일이 곧 가족을 위한 생산, 생계를 위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들의 또다

른 생산의무, 즉 출산은 농촌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부양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식구들이 배를 곪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끼니를 챙기는 것이었는데, 농지가 없는 경우에는 공출하고, 소작료를 내고나면 그마저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 지주가 같은 마을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잦은 왕래를 가진 안동 권씨 일가였다는

점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데 도움이 되었다. 향석 1리에서 지주와 소작의 관계는 이웃관계이자,

일부에게는 친척관계이기도 하였는데, 지주들이 인색하지 않았던 탓에 극심한 곤궁기에는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였고, 소작농들을 단순히 자신들의 재산을 불려주는 수단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

들의 토지가 계속해서 쓸모있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데에도 가치를 두었다.38)

여성들은 혼인 이후에는 철저히 출가외인이 되어 친정의 살림살이 정도와는 무관하게 시댁의

생활수준에 맞춰 살아야 했다.39) 여성들은 그 수준에 맞춰 생계양식을 계속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어려움에 대응해 왔는데, 농사를 주된 생계양식으로 두고, 농지 면적에 비례하는 생산량의 한계와

흉작에 대비하여 부업을 겸해야했다. 여기에는 길쌈, 식모살이, 부정기적으로 남의 농사일을 거들

거나 나물 등을 채취하여 용궁장에 판매하는 일 따위가 포함된다. 여성들은 교통사정이 열악했던

때에 밭에서 키운 작물이나 나물, 산에서 따온 열매 같은 것들을 한가득 짊어지고 새벽 일찍이 네

다섯시간씩 걸어 장에 나가는 일의 고단함을 기억한다. 70~80대 여성들의 경우에는 남편이 징병

이나 징집으로 부재했던 시기에 전적으로 생계 부양자의 역할과 농사일을 떠맡아야 했는데, 당시

여성들이 가사와 생계노동으로 고생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남편들이 집에 돌아온 이후에는

그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여성들은 시댁식구들에 대해서는 억압과 권위, 복종, 원망의 기억을 많

이 이야기한데 반하여 유독 배우자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호의적으로 이야기 하였는데, 이는 남성

들이 여성들만큼이나 가족들의 생계유지에 적극적이고, 성실하였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가족을 부양하는데 있어서 생계유지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가사노동이다. 이들이

기억하는 가사노동 중에는 식구들의 끼니를 챙기는 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보릿고개

시절에 배를 채우느라 보리로 죽을 쑤고, 보리떡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기도 하였

다. 이외에 우물에서 물을 길러오는 일, 빨래하는 일, 방아찧는 일, 제사를 지내는 일, 자녀들의 도

시락을 싸주는 일 등이 기억되고 있었다. 일꾼들의 일바라지 또한 힘든 노동의 하나로 기억되는

데, 가사와 농사일 간에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물을 깃는 일은 가장 힘든 가사노동 중 하나인데,

시동생들과 시누이가 몇이 되건 그 일은 늘 며느리의 몫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을 더욱 외롭고 힘

들게 하였다.

여성들은 자녀들이 교육을 마친 뒤나, 혼인 뒤에도 자신들의 생업인 농사일을 물려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여성들은 젊은 노동력이 농촌에

절실하다 하면서도 본인의 자녀들은 외지에서 출세하기를 바랬다. 할머니들은 종종 외지에서 직장

38) 인터뷰 <좁은 마을에서 다들 친척이고, 이웃이고 한데 나라가 다 어려운 때에 지역민들끼리 돕고 살아야 도리지. 또 고

조부때부터 내려온 집안 땅을 놀리지 않고 제 구실 해줄 수 있게 해주는게 소작농들인데, 내가 직접 농사를 못지으니까 그거는 감

사할 일이었지.> 2011.9.29

39) 유일하게 김경숙만이 혼인 이후에도 친정과 왕래하며 거주한 경험을 하였는데, 이는 건강이 위태로울 정도로 식구들이 먹을 식량

이 부족했던 때에 택했던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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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사는 평범한 수준의 자녀에 대해서도 과장된 자랑을 하였는데, 자식이

더 큰 도시에 살 수록, 또 더 좋은 직업과, 훌륭한 배우자를 가졌을 경우에 더 이야기가 길어졌다.

농촌사회에서 부모와 자녀가 갖는 출세의 욕구는 위 ‘세대와 여성의 삶’에서도 이야기되었듯이 결

국에는 농촌에서 부모세대의 여성들을 더욱 노동에 종속시키고 있다. 농사일을 저고 자녀들이 있

는 도시로 떠나기에는 이들이 거의 평생을 땅을 일구는 일에 종사하였던 농민으로써 땅에게 갖는

애착이 있고, 특히나 높은 부가가치로 농민들에게 효자노릇을 하고있는 하우스 수박은 삼모작으로

주민들의 살림살이에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농촌을 떠나는 일은 큰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여성들은 농지를 물려받아 농사를 계속해줄 이가 없는 것을 걱정하면서

도, 자녀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한편 생애사를 들려준 할머니들은 모두 시집살이를 경험하였는데, 50~60대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험과 현재 며느리에 대한 감정이 묘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정옥자는 먼저 시집살이의 어려웠던

점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요즘 시대에는 오히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잘 대접해야하는 세상이 되

었다며, 시부모에게 대접받지 못한 것을 며느리에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며느리를 잘 대우해주어

야한다는데 억울한 마음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며느리를 적극적으로 칭찬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시집살이를 경험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갖는 대접받는 것에 대한 은근한 기

대심과, 결혼을 위해 남성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이 더욱 많아진 사회에서 농촌에 거주하는 아들의

부모입장에서 갖는 염려가 중첩된 것이 아닐까 한다. 어찌되었든 여성들은 자녀들의 혼인과 분가

로 인해 그들의 뒷바라지를 위한 노동으로부터는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녀에게 집중되어 있

던 부양의 의무는 시부모가 살아계실 경우 다시 이들에 대한 것으로 돌아왔다. 연로한 시부모님을

부양하는데에는 ‘간병’이라는 특수한 노동을 발생시켰다. 정옥자의 말처럼 현대는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가장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며느리에게도 대접받지 못하고, 계속 농사일

을 도맡아야 하는 농촌 여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오히려 가장 살기 힘든 세상이기도 하다.

향석 1리 여성들은 다양한 이유로 근현대기 역사 내내 자신들의 노동력을 집 안팎으로 제공하

여왔다. 시집살이와 고된 농사일, 질병 등에 대한 여성들의 신세타령은 농촌 여성의 역사가 지니

는 고난과 굴곡을 대변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자신의 삶이 노동으로 희생되어 온 것에 대하여 원

망하거나, 그것이 부당하다고는 인식 하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노동의 의무라는 것은 가난한 시대

에 태어난 농촌의 여성, 한 가정에 소속된 여성으로써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마땅히 감당해야할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성들은 오히려 자신이 가족들을 위하여 감행해왔던 그 희생을 삶의 값

진 유물로 여기고 있다. 현재의 넉넉한 경제수준과 출가한 자녀들의 도시정착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희생의 댓가이자 표창이었다.

III. 결론

향석 1리 여성들은 혼인 이후 시부모 아래서 ‘현모양처’가 되기 위하여 내조에 힘쓰면서도, 가족

의 생존과 보다 안정된 경제수준을 갖추기 위하여 투쟁해왔다. 근현대기 역사 상 가장 곤궁했던

때에도 향석 1리 주민들이 가족의 해체를 경험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보다 안정되고 풍족한 생활

을 영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마을 여성들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들은 일제기에는

공출량을 채우기 위하여, 이후에는 가족의 식량을 마련하고, 가계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농사일에

노동력을 투입하였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현대에는 농촌 젊은이들의 인구유출로 인한 농촌 노동

력의 결손을 충당하기 위하여 또다시 농사일에 매어있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결코 농촌여성들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농사일을 단지 고된 것으로 여긴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농촌의 여성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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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경작하고 생산하는 일을 가치있게 여기고 있으며,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계층상승을 경험한

여성들의 경우에는 이제 자기 소유가 된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는데 보람을 느낄 것이다. 이들은

자녀에게 토지를 물려주기보다는, 자신들이 지켜왔거나 희생적인 노동으로 획득해온 토지를 놀리

지않고 계속해서 경작해 줄 이를 찾기를 원한다. 농촌여성들에게 땅이라는 것은 자신들이 제공한

노동의 가치를 생산물과 가족의 평안으로 보여주었던 삶의 근거지이다. 또한 생계부양자로써, 정

서적인 가장으로써 가족을 지키는데 전력투구한 여성들 삶의 역사는 그들에게 특별한 역할을 수

행한 것으로 인식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치있는 것이었고, 그러한 삶을 가족들이 인정해준다거

나, 자녀들이 잘 성장해주기만 한다면 여성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인 것이다.

향석 1리 여성들이 시대적 상황에 맞춰 생계양식과 노동의 변화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간 것은

그가 속한 사회가 안정을 찾고, 발전하는데 기여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성 자신의 지위가 함께 상

승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연구자들

은 농촌 여성들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자신의 삶과 노동력을 국가와 가족을 위해 희생해 온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해서 이 여성들을 역사의 피해자로 위치시키는 것은 오류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국가 전체사와 지방의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지방과 지방의 역사 또한

서로 다른 사건과 의미들로 구성되고,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가치가 부여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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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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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농업용 기계보유> 1983(23회), 1984(24회), 2009(50회).

<9. 식량작물 생산량(정곡)>

<10. 채소류 생산량>

<11.특용작물 생산량> 1984(24회), 2009(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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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문서>향석리 석조여래좌상 -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nocleaf/90027671325

<사진자료>용궁향석안집 인터넷카페 http://cafe.daum.net/anj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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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향석 1리 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