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신앙세미나 • 일시 : 2011년 10월 24일(월) 오후 7시~9시 • 장소 : 신반포중앙교회 대예배실(3층) • 주제 : WCC에 대한 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 강사 : 김성욱, 최병규, 이승구, 김성봉 교수 한 국 성 경 신 학 회 T he K orea R esearch C enter of R eformed B iblical T heology W.C.C W.C.C W.C.C W.C.C W.C.C W.C.C W.C.C W.C.C W.C.C W.C.C 에 에 에 에 에 에 에 에 에 에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W.C.C에 대한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입장 입장 입장 입장 입장 입장 입장 입장 입장 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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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에 대한 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 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김성욱 박사11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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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성 경 신 학 회The Korea Research Center of Reformed Biblical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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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3차 로잔 대회(the Third Lausanne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22)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대표로 참석했던 이
종윤 목사님은 2011년 한국장로교연합회 학술대회의 개회예배에서 로잔대회의 진행
과 느낌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세계를 자신에게 화해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고후 5:19, God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이라는 주제로 열린 대회였다. 세계 각국에서 4000명(주
최측 발표로는 4500명)이 넘는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진
영에 주는 시대의 메세지를 담아내는 대회로, 각국의 지도자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23) 외형적으로도 규모적으로도 대단하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였으니 놀라운 대회로 평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긍정적이며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귀한 행사임에도 이종윤 목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기독교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 중 하나가 예배이다. 또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에 대한 경배(praise God)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잔
대회에서 진행된 예배에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에
집중되었다고 이종윤 목사는 지적하였다. 물론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신학과 신앙적
인 배경을 가진 지도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배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
도,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이지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우리는 희망이 있다(We have a hope)"는 노래만 수없이 제
창하였던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WCC 제10차 총회를 2년 앞둔 한국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인 차이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하나가 되기 어렵다면, 한국교
회의 하나됨과 기독교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WCC가 그 동안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 곧 대표적으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
활’ 등의 주제를 채택하여 영영혼구원에 기초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도록 제안
22) 제1차 대회 1974년의 스위스 로잔대회, 1989년 마닐라 2차 대회, 그리고 21년 후인 2010년 10월16
일~25일까지 남아공 케이프 타운에서 열렸다.23) 당시 이 대회에 2번째로 큰 규모의 대표단을 파견하는 중국의 200명 이상의 참가자들이 중국 정부
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다. 중국교회를 염려하는 의미로 모임의 앞자리에 그들을 위한 빈자리를 마련하였고,
또한 성경을 읽을 때에도 중국어로 읽기도 하였다.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김성욱 박사 2525252525252525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주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보하도록
다방면에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더 적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계획과 준비들을 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한국의 대
학에서 다양한 선교단체들이 복음을 전했듯이, WCC로 각국의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복음을 소개해야 할 것이다. 만약 교회와 신학교들이
이러한 준비를 게을리하면, WCC는 예전과 같이 혹은 예전보다 더 다원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활동이라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WCC를 반대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복음을 소개하거나 복음이 WCC
총회의 중요한 주제가 되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 일에 기도로 준비하며
서신이나 의견을 결집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며 이를 위한 시간과 정성 그
리고 물질이 필요하다. 그리고 WCC총회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교회의 지도자들
을 대접하는 일에 관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그들을 잘 대접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에게 강단을 주어 설교를 맡기는 것은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세계의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총회를 한국교회의 모습
과 신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규모가 큰 교회에서 인사
치레를 하기보다는 십자가의 복음이 분명하게 선포되는 교회로 초청하여 함께 예배
드리며, 심지어 구역모임이나 기도모임에도 참석하여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21세기에 한국교회를 들어 사용하시는 것을 분명
하게 각인시켜야 할 것이다.
그 동안의 WCC가 십자가와 부활, 구속이 빠지고 대신 사회운동이나 정의나 평화
혹은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는 흐름의 결과를 이미 유럽교회들을 통하여 분명
하게 보았으니, 이제는 복음의 본질로 그 논의를 전개해야 할 것으로 요청하는 서신
을 보내야 할 것이다. 세계 각국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부산을 방문하고 한국교회를
찾아 진정한 회심을 얻는 중요한 계기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며, 이를 위하
여 다양한 준비를 하는 것이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될 것이다. 그들에 의하여 한국교
회의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복음적 설교와 교회의 모습을 체
험하는 역사의 장이 되기를 발전적으로 제안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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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6262626262626 첫 번째, WCC의 역사와 그 문제점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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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WCCWCCWCCWCCWCCWCC의 의 의 의 의 의 Missio Missio Missio Missio Missio Missio Dei Dei Dei Dei Dei Dei 사상에 사상에 사상에 사상에 사상에 사상에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대한 WCC의 Missio Dei 사상에 대한
개혁신학적 개혁신학적 개혁신학적 개혁신학적 개혁신학적 개혁신학적 평가평가평가평가평가평가개혁신학적 평가
2011년 9월 11일에 '911 희생자들'을 위해서 WCC총무 Dr Olav Fykse Tveit는 평화를 강조하고 여러 신앙을
지닌 사람들 속에서 대화를 위한 교회의 헌신을 재확인하기도 했는데, 이 성명서에서 이상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생명과 정의와 평화가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것들이라고 강조하고 있고, 또 그는 모든
선한의지를 지닌 각 종교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인간의 존엄과 상호 존중에 기반을 둔 더 견고한 관계를 형성
해갈 수 있도록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WCC는 2013년 제10차 대회의 회의 주제를 기도형태로 만들었는데,
그것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해주소서"이다.4) 한국에서는 감리교, 성결교, 장로교, 침례교에 속한 30여 교단 단체가 WCC 총회 참여할 것으로 알
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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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WCC가 지향해 온 바 선교개념인 Missio Dei에 대하여 고찰해보고,
그것을 수행해 오기 위하여 어떤 수단(means)을 사용했는지, 그리고 Missio Dei를 감
행해오면서 어떤 결과에 봉착하게 되었는지를 고찰한 후에, 개혁주의 신학적인 입장에
서 평가해보려 한다.
1.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란 무엇인가?
Missio Dei란‘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를 의미하는 라틴어 신학술어이다.
1934년 독일 선교학자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이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의 강
조점인 action Dei("the action of God", 하나님의 행위)에 응답하여 만든 술어로 전해진다.
Hartenstein은 빌링겐IMC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하여 선교의 근원과 목적에 대
해서 처음으로 'the missio Dei'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선교는
인간의 활동이나 조직이 아니고, ‘그것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다.’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만유를 화해시키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선교의 근본이자 목적이
다. 오직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Dei')’만이 ‘교회의 선교’(the 'Missio
ecclesiae')가 된다.”6)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그분의 특별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의 선교에 있어서 시작자(initiator)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이 술어
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David Bosch, Lesslie Newbigin, Darrell Guder, Steve
Taylor, Alan Hirsh, Tim Keller, Ed Stetzer 등등에 의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Bosch
에 의하면 선교란 단지 교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 of God)이었고, 하
나님은 선교사 하나님(God is a missionary God)이었다.7)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라는 용어는, WCC 초기의 몇몇 대회를
통하여‘개념의 변천’을 경험하면서, 정통교회의 선교개념으로부터 멀어져, WCC 고
5) 대부분은 WCC 비판가들은 이러한 측면들을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6)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In Mission zwischen Gestern und Morgen.
Walter Freytag ed. John G. Flett trans. (Germany: Evang. Missionsverlag, 1952), p. 62. 정승현, "하나
님의 선교와 선교적인 교회", 『선교와 신학 20집』, p. 192에서 재인용. 7)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Maryknoll: Orbis Books, 1996, p.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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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2323232323232 두 번째, WCC의 Missio Dei 사상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유의 선교개념으로 고착화되어왔다. 이 개념이 WCC 회의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독일 빌링겐(Willengen)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서부터였다.8) 그 회의는 현대선교신학의 분기점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 그 대회 이후 WCC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 연합과 일치 사업을 주도해 온
흐름(교회협의회 선교신학; the conciliar theology of mission)과 거기에 반발하여 형성된 복음
주의적 선교신학,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The Vatical II)를 계기로 확립된 카톨릭교
회의 선교신학 등의 흐름들로 발전되어 왔다고 이용원 교수는 평가한다.9) 그 대회는
‘교회의 선교적 의무’를 주요 과제로 삼았는데, 당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화란선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의 총무를 역임하고 당시 WCC의 전도부
총무로 재임했던 호켄다이크(Johannes C. Hoekendijk)였다.
Hoekendijk는 선교의 목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오시면 이루시리라고
대망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바로 '이 땅 위의 샬롬(shalom)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샬롬'이란 단순이 개인이 구원받는 것보다는 훨씬 폭 넓은 개념으로 온전
한 복음전도에서 선포되고 삶으로 옮겨져서 실증되어야 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평화,
온전함, 조화, 정의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러한 사상에 기초하여 빌링겐대회는‘하나
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새로운 선교신학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발전시켰
다.10)
보쉬(David J. Bosch)에 의하면, 종래의 선교개념은 주로 구원론적 관점에서 해석하
여 영원한 정죄로부터 사람을 구원해내는 교회의 활동으로 이해하거나 문화적인 관점
에서 지구의 동쪽과 남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서방의 기독교 세계가 누리고 있는
축복과 특권을 알려주는 교회의 활동으로 이해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32년에
열린 선교대회인 The Brandenburg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
는 선교를“하나님 자신의 행위(and activity of God Himself)”라고 밝힘으로써 현대 선교
8) 박윤만,“WCC의 선교관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 WCC대책위원회 편,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
가?』(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11), p. 255(이하, 박윤만,“WCC의 선교관”). 빌링겐 IMC의 가장 주된 목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20세기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교회가 선교해야 하는가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Norman Goodall ed., Missions under the Cross(London: Edinburgh House Press, 1953), p.
187. 정승현,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인 교회" , p. 191. 9)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선교와 신학」, 이용원, "빌링겐에서 나이로비까지", pp. 68-73.10) 이용원, "나이로비", pp. 25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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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서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
년 후인 탐바람 대회에서도 일부 대표가 그것을 주장했으며, 빌링겐대회에서의 선교에
대한 이미지(Willingen's image of mission)는 보내시는 하나님(the sending of God=하나님의 선
교)에 참여하는 것으로서의 선교였다고 한다.11)
사실 호켄다이크는 "Notes on the Meaning of Mission(-ary)"에서, (당시) 개신교
(the Protestants)는 선교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로부터 그다지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그 고전적인 정의의 대표적인 경우로 1890년대의 구스타브 바르넥(Gustav
Warneck)의 견해를 소개 하고 있다. 바르넥의 선교에 대한 정의는“비기독교인들 가운
데 교회를 개척하고 조직하는 기독교의 총체적 활동”(the total activity of Christendom(=all
true believers) to plant and organize the Church among Non-Christians)이었다는 것이다.12) 그
이후에도 그러한 선교개념에 대하여 조금씩 재고해 오기는 했다고 얘기한다.
이렇게 논하고 난 호켄다이크는‘기본적인 문제들(II. Basis Issues)’을 다루면서 오
늘날(-당시-)에는 본래적이며 전통적인 어휘(terminology) 속에서‘선교’를 재발견해야
했는데, 한다고 하며, 그의 생각으로 선교란 ‘오직 메시아적인 형태(Messianic
Pattern)’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즉 선교란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행위로서 구
원하는(redeeming) 일을 수행하는 것은‘메시아의 일(the business of the Messiah)’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평화와 구원’의 문제를 논한다.13)
그런데 호켄다이크는 새 질서의 내적인 역동성으로서, 선교는 종교 저 너머(beyond
religion)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논의를 전개하는데, 그에 의하
면, 선교의 목적(the purpose of the Mission)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함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종교적 범주(all religious categories)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말
하는 메시아적 패턴(messianic pattern)의 핵심 용어는 ‘샬롬’(shalom)이라고 한다. 그리
고 ‘샬롬’이라는 것은 메시아적 시대의 모든 은사들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도 충만
한(충분한) 개요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샬롬은 객관화되어지거나 따로 분리되어
질 수 있는 어떤 것이나,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섬길 수 있는 어떤 이점(plus)도
11) Transforming Mission, p. 389. 12) J. C. Hoekendijk, "Notes on the Meaning of Mission(-ary)", Thomas Wieser ed., Planing for
Mission(New York: The U.S. Conference for WCC, 1966), pp. 39-40. 13) Hoekendijk, "Notes on the Meaning of Mission",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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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4343434343434 두 번째, WCC의 Missio Dei 사상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아니고, 인간 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고 또 co-humanity를 경험함으로써 일
어나게 되는‘하나의 사회적 사건(a social happening)’이라고 한다.14)
그러다가 1961년에 개최된 제3차 WCC회의인 뉴델리(New Delhi) 총회에서는 WCC
의 선교신학이 좀 더 정립되었는데, 그 회의에서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선교신학의 한
주제로 삼았다. WCC측에서는 설명하기를, 뉴델리의 주제는 다시‘그리스도 중심적
(Christocentric)’이 되었지만, 타 종교(other world religions)들의 문제를 포함했다고 한
다.15) 그 회의에서는 종교적 자유(religious liberty)에 대한 입장을 새롭게 했고, 국제적
인 위기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했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세계 도처에 있
는 난민들과 피해자들에 대한 점증되는 의무를 진다고 했다.
그리고 1963년 12월 8-19일까지 멕시코시티(Mexico City)에서 ‘6대륙에서 선
교’(Witness in Six Continents)라는 주제로 회의가 열렸는데, 박윤만 교수는 그때에는 빌
링겐에서 제기되었던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고 한다.16)
즉 기독교인은“하나님께서 교회 밖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록된 기독교의 순종이 어떤 것인지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17) "하나님은 피
조 세계의 주가 되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교회를 부르셔서 인간의
구속사역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은 교회 밖에서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18) 박윤
만 교수는 말하기를, 이 멕시코대회를 통하여 WCC의 선교관이 ‘하나님의 선교’라
는 명목 하에 서서히 '사회운동적인 성격'으로 변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19)
스웨덴 웁살라(Uppsala)에서 개최된 WCC 제4차 총회(1968.7.4-7.20)는“보라, 내가 만
물을 새롭게 하노라(Behold, I Make All Things New)”는 주제로 모였다. 235개의 회원 교
14) Hoekendijk, "Notes on the Meaning of Mission", p. 43. 15) WCC Assembly. New Delhi 1961(http://archives.oikoumene.org/query/detail.aspx?ID=40915)16) 박윤만,“WCC의 선교관”, p. 256. 17) Rolald K. Orchard, ed., Witness in Six Continents. Records of the Meeting of the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held in Mexico City
8-19 December 1963(London: Edinburgh House Press, 1964), p. 174. 이용원, "나이로비", p. 86에서 재인
용. 18) 이용원, "나이로비", p. 86. 19) Cf, 박윤만,“WCC의 선교관”, 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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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들에서 704명의 총대가 파송된 그 모임은, WCC의 총회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정치 지향적인 대회였다(WCC's most activist and politically oriented assembly).20) 사실 그
대회에서는 참된 인간화 혹은 새로운 인간성의 회복을 선교의 목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를 놓고 정치경제적인 토의를 했다. 개발도상국을 돕자고
하는 논의도 나왔다.
1973년에 모인 방콕대회에서는‘구원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문제가 논해졌다.
물론“그들이 복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의미를 추구한다고 해서 개인구원과 구원
의 영원한 면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구원
을 삶을 새롭게 하는 것(newness of life), 곧 하나님의 충만하심 가운데 참된 인간성이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구원은 몸과 영혼의 구원이고 개인과 사회의 구원이며
인간과 탄식하는 피조물의 구원이기 때문에,‘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땅 위에서의 해
방으로서의 구원도 중시된다는 것’이다.”21)
그 이후 1975년에 WCC의 제5차 회의로 모였던 나이로비 총회(Nairobi, 1975. 285 교
회들에서 676명의 총대 참석)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함께‘사회-정치적 참
여(socio-political engagement)’,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개종과 ‘변화하는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적극적 참여’(active participation in changing economic and social structures)를 선포
했다.22) 그리고 논쟁적인 의논 가운에는 종교간 대화(interfaith dialogue) 문제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나이로비총회가 비록 복음적인 노력을 하는 것 같았지만,‘사회-정치적
참여’와‘경제적 사회적 구조’의 변화를 이해 참여할 것을 표방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1982년의 기념비적인 WCC의 문서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111에는23) 성만찬(eucharist)은 삶의 모든 측면을 포용한다고 하
20) WCC Assembly. Uppsala 1968. Cf.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2nd edition,
2002. WCC Publications, Geneva21)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선교와 신학」, 이용원, 빌링겐에서 나이로비까지", pp. 92-93(이하. 이
4040404040404040 두 번째, WCC의 Missio Dei 사상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들의 그룹들에만 국한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
므로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활 속에
서 이웃 종교(our neighbours of other faiths)의 사람들과 조우하게도 하실 그 가능성에 대
하여‘우리의 개방성’(our openness)을 확언해야 한다고 한다.35)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
“우리가 구원(salvation)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외적이며 인격적인 헌신이라고 한정
하는 신학 저 너머로(beyond a theology) 옮겨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36)
그러면서 Baar 선언문은 하나님의 그의 정사를 지구 위에 펴시며, 그분의 통치는
어느 한 커뮤니티나 문화에 제한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예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집 밖의 사람에게도 이 우주적인 지배를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들은 요
4:7-24의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들고 있다. 그리고 마 8:5-11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이 경탄하셨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또 마 15:21-18절의 수
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도 소개한다. 그들은 마 10:23에 근거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지상 사역 가운데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구원의 능력이 어떤 의미에서는 제한적이었
다 하더라도,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서는 이러한 제한들(these
limits)이 초월되었다고 한다.
이런 전개를 거치면서, 결국 Baar 선언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성령과 타 종교들’에 관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창조하기 위하여, 부양하고, 도전
하고, 새롭게 하고 유지시키기 위하여 지면을 운행하셨고 또 하신다(who moved and still
moves over the face of the earth)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요 3:8절 즉“바람이 임의
로 불매(as the wind blos where it wills)”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Baar
선언문은 온 세계 내에서 성령님의 경륜(economy)에 대하여 경탄하게 되고, 또 희망과
기대에 부풀게 된다고 한다.
여기까지를 언급한 Baar선언문은 이제 한층 더 비약한다. 즉 사랑과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양선, 충성, 온유, 절제에 속한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로 간주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갈 5:22-23; cf. 롬 14:17). 그래서 그들 모두가 명백하게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35) CWME Report, San Antonio 1989, para. 29을 인용함. 36) 이러한 사상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며, 비성경적, 반기독교적이다.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최병규 박사 4141414141414141
Stanley Samartha
Wesley Ariarajah
살아있는 신앙의 사람들의 삶과 전통 속에서 일해 오셨다고(has been at work) 확언한다
는 것이었다.
이처럼 Baar 선언문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기독교 내에 뿐만 아니라 타 종교 속
에서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Missio Dei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 종교 간의 대화 강조 37)
사마르타(Stanley Samartha)는 1968년부터 1982년까지 13년 동
안 WCC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 안의“살아 있는 신앙과 이데
올로기를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 분과”책임자였다. 그는 제네바에
있는 WCC 본부에서 근무하면서 ‘타종교와의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사마르타의 사상의 핵심은 계시의 상대성이다. 기독
교를 포함하는 모든 종교들은 ‘계시’를 가지고 있고, 그것들은
상대적인 가치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마르타의 주장은“바아르선언문”과 기타 WCC 문
서에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었다. 이처럼 WCC의 에큐메니칼 신
학을 통제하는 것은 상대주의 진리관-인식방법이다. WCC는 성
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 진리의 말씀이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확
신을 져버렸다.
아리아라자(Wesley Ariarajah)는 사마르타가 맡았던 WCC의 세
계선교와 전도위원회의 ‘살아 있는 종교 간의 대화 분과’위원
장직을 승계했다.38) 아리아라자의 종교간 대화 및 종교다원주의적인 성향은 그의 생
37)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한국기독교WCC대책위원회 편, 「세계교회협의회 무엇이 문제인
가?」에 나타난 저자의 견해를 참조하라. 38) 아리아라자는 타 종교와의 대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책들을 썼다: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Geneva: WCC Publications, 1985/ Hindus and Christians : A Century of Protestant
Thought, Grand Rapids: Eerdmans, 1991/ Gosel and Culture, An Ongoing Discuss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Geneva: WCC, 1994/ Did I Betray the Gospel? The Letters of Paul and the
Place of Women , Geneva: WCC, 1996/ Not Without My Neighbor- Issues in Inter-religious
한국성경신학회
신앙세미나
4242424242424242 두 번째, WCC의 Missio Dei 사상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애를 두고 발전해 온 듯하다. 그가 인구의 0.4%만이 기독교인이었던 나라에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친구들과 지내오면서 느낀 경험에 기초하여 점점 종교다원주의적 성
향을 발전시킨 듯하다. 그는 자신의 종교(기독교)가 너무 폭이 좁으며, 자신의 하나님도
너무 작게 보였고, 또 타 종교적인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절해온 것들에 대하
여 논하면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ty)는 아리아자라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에 세
워진 몇몇 가정들에 대하여 재고(re-look)하도록 도전을 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39)
제네바 본부에 근무하면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WCC의 타종교와의 대화와 그
것을 위한 대화의 신학을 계발하는 일을 주도했다. 제네바의 WCC 출판부가 출간한
『성경과 타종교와 대화』(1985)는“바아르선언문”(1990)의 신학 배경인 종교 간의 ‘대
화’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리아라자의 종교대화 신학의 핵심은 '상대주의
진리관에 근거한 종교다원주의 그 자체'이다. 그는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참된 종교로
선포하고 타종교를 오류투성이며 ‘악마의 자식’으로 간주하는 차별적인 태도를 지
탄한다. 아리아라자는“기독교의 하나님, 힌두교의 하나님, 이슬람교의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 힌두교의 이해,
이슬람교의 이해가 있을 뿐이다”40)라고 한다.
아라아라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전도’에 가장 큰 방해거리라고
한다.“만일 당신이 나에게 참된 증거에 가장 큰 방해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요인을
골라내라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절대적 신앙이라고 말할 것이
다”41)라고 말한다.
4. Missio Dei 수행의 결과: 종교혼합주의로 기울어짐 42)
Relations, Geneva: WCC, 1999. 39) Wesley Ariarajah, "What Difference does Religious Plurality
Make?"(http://www.wcc-coe.org/wcc/what/interreligious/cd34-02.html).40) 한국기독교WCC대책위원회 편, 「세계교회협의회 무엇이 문제인가?」, p. 27. 웨슬리 아라아라자,
『성서와 종교간의 대화』, 김덕순 역, 변선환 감수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1992), 32-33. 41) 한국기독교WCC대책위원회 편, 「세계교회협의회 무엇이 문제인가?」, Wesley Ariarajah,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 (Geneva, WCC, 1987 second printing), 53.42) 한국기독교WCC대책위원회 편, 「세계교회협의회 무엇이 문제인가?」, p. 35. 정현경,“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기독교사상 (1991.4.), 94-95에 실린 번역문을 보라. 필자의 인용문은 영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최병규 박사 4343434343434343
WCC는 종교혼합주의를 용인하며 지향한다. WCC의 종교혼합주의적 성향이 가장
짙게 드러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모인 WCC 제7차 총회(1991)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캔버라에서 열린 그 대회는43) ‘구천을 떠도는 혼
령(魂靈)’을 불러들이는 정현경 교수(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의 초혼제(招魂祭)로
시작했다.44) 성령을 우주 만물에 내재하는 에네르기와 동일시하고 성령을 물활론(物活
論)적으로 해석하는 이론과 주장들을 용인했다. 종교혼합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대회 동안에 정 교수는 기독교의 성령을 무속신앙이 말하는 죽은 자들의 영,
한국에서 흔히 혼, 귀신이라고 일컫는, 동양 사상 또는 무속신앙의 영을 동일시하면서
퍼포먼스를 하고, 다음과 같이 초혼(招魂)했다.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검둥
이 여종,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 그의 아내 밧세바에 대한 다윗 왕의 욕정 때문에 다윗에 의하여 전쟁터로
보내져 죽임을 당한 충성스런 군인, 우리아의 영이여. (중략)
오소서, 나치 대학살 기간 독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태인들의 영이여.
오소서, 수소폭탄에 의해 죽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이여.
오소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신대에 끌려가 폭력에 굶주린 군인들에 의해 상처입고
죽어간 한국인 여성들의 영이여. (중략)
오소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우리의 해방자, 우리의 형제 예수45)
어로 작성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다.43) 서철원,“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변천 개관”, 총회신학부 편, 『WCC 어떻게 할 것인가?』(대한예수
교장로회총회교육진흥원, 2010), pp. 52-53. 여기서 서 교수는 캔버라 총회가 ‘오소서 성령이여 - 만물을 새
롭게 하소서’(Come, Holy Sprit-Renew the Whole Creation)라는 주제 하에 개최되었으며, 그 총회의 특징
은 ‘성령’을 강조하여 환경보존에 강조점을 둔 것이었으며, 호주 원주민들에게 본래의 땅을 되돌려 주어야
하고, 살아있는 신앙들과의 대화가 WCC의 사역이라고 정하고 종교 간의 대화를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한 점들
을 잘 소개하고 있다. 44) 정현경 교수는 1993년 11월 미국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서 보였던 WCC대회에서도 성령을 고
대 아시아의 신들(ancient Asian deities)과 동일시했고, 2,000여 명의 여성 청중들에게 "나의 내장(bowel)은
불교의 내장이요, 나의 심장(heart)도 불교도의 심장이며, 나의 오른쪽 두뇌(brain)는 유교도의 두뇌이고, 나의
왼쪽 두뇌는 크리스천의 두뇌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조영엽, 『WCC의 정체』(CLC, 2011), p. 167.)45) 정현경은 1998년 12월 짐바브웨의 하라레(Harare)에서 열린 WCC 제8차 총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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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4444444444444 두 번째, WCC의 Missio Dei 사상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의 영이여.
그 대회에서는 정현경의 프레젠테이션 이후에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들을 통하여(through other ways) 하나님(God)을 알아간다’는
것 역시 인정했고, 또 다른 사람들(타종교인들)이 경험했던 진리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
의 증언(other people's witness)에 대하여 열린 상태로 있다(remain open)고 함으로써, 종교
다원주의적 색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본다.46)
5. 평가
1. WCC의 Missio Dei의 공헌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의 주체를 삼위 하나님으로
보았다는 것이다.47)
2. WCC가 타 종교와 연대하여 사회정의 및 인류 평화 증진에 공동행동을 취하자
고 한 노력은 공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48)
3. 그러나 WCC가 인류애를 가지고 사회구조를 변혁시킴으로써 '샬롬'을 가져오려
는 것을 선교의 목적으로 삼고, 사회 정치적 해방을 '구원'으로 간주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전도/선교의 정통적인 개념을 경시하거나 포기하고, 사회구원을 하나님께서 바라
시는 '선교'라고 정의해서는 안 될 것이다. John Stott가 잘 설명했듯이, 적어도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했다. WCC도 1973년 1월 방곡
신 요 14:6의 내용으로 "그리스도가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 교수는 "예수님
이 실수한 것이다(Jesus has mistaken)"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조영엽, 『WCC의 정체』(CLC, 2011), p. 167.)46) Israel Selvanayagam, "Interfaith Dialogue", in John Briggs, Mercy Amba Oduyoye and
Georges Tsetsis ed.,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Vol.3. 1968-2000(WCC, 2004), pp.
158-159. 47) 박윤만,“WCC의 선교관”, p. 277. 48) 황봉안,“WCC 사회참여”, p.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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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규 박사 4545454545454545
에서 열린 CWME(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에서‘오늘날의 구원
(Salvation Today)’이라는 제하에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언급도 했지만, 구원을 정치 경
제적인 해방(political and economic liberation)과 동등하다(equate)고 강조했다. 그래서 복음
주의 계열은 그것을 거부했는데, 그거이 성경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49)
4. WCC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방법/도구'로써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고, 결국은 종교혼
합주의적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5. WCC가 추구해 온 연합/일치운동은 '진리'를 떠난 것이었다.
심창섭 교수도 칼빈의 교회일치운동에 대하여 잘 설명했듯이,50) 적어도 칼빈의 교
회일치에 대한 열망은 '진리'를 떠나지 않는 태두리 내에서 추구한 것이었다. 우리의
연합과 일치, 사회와 국가에 대한 봉사, 그리고 모든 것들은 '진리 안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진리를 양보하는 연합은 결국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여, 이교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결 론
우리는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WCC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강조해왔지만,
결국 그들은 '인간의 축제의 장'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을 망각하는 상황에 직면했
다고 볼 수 있다. WCC는 Missio Dei사상을 '비성경적으로' 전개했다. 그래서 결국은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적인 색체를 띠게 되었다. 그들이 정치 경제적인 해방을
구원과 동등하다고 강조해온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로잔언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
49) "The Lausanne Covenant", John Stott ed.,Making Christ Known(Wm. B. Eerdmans
봉사와 섬김을 위한 교회들의 교제”를 지향한다는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1)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현재 이에 동참하고 있는 주된 인물들의 신
학적 사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그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의 증언을 위해 같이 있
고 또 그렇게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 1차 총회에서부터 1991년 호주에서 열린 총회까지의 역사를
볼 때 분명히 나타난다. 이 WCC 운동에 한국 교회가 과연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
냐 하는 것이 적어도 외적으로는 한국 장로교회의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 원인이
(또한 성결교의 분열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WCC가 많이 바뀌어서 원래
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던 통합측의 WCC 총회 유치 성공을 보수적
인 교단들이 국가적이고, 한국 교회적인 경사로 알고 축하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WCC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보수 교단들도 그 신학과 입장이 많이 바뀌어서
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일까? 이런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1차 총회부터 근자까지의 WCC 운동과
그 신학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이미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많이 내었으므로,2)
1) 이는 WCC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시하는 내용이다. Cf. http://www.oikoumene.org/en/home.html.2) 그 대표적인 예들로 다음 글들을 보라: Ernest W. Lefevre, 암스테르담에서 나이로비 대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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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0505050505050 세 번째, WCC의 문제점에 대한 한 고찰
이 짧은 글에서는 WCC에서 최근에 낸 문서들에는 어떤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1.“의심의 해석학”과 모든 것의 상대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는 WCC는 결국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해석
학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WCC는“하나됨[정합성]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coherence)과 함께“의심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suspicion)도 존중한
다고 밝힌다. 이를 하나로 묶은 것을“책임 있는 에큐메니칼적 해석학”(a responsible
ecumenical hermeneutics)이라고 하면서 이런“계속되는 과정인 책임 있는 에큐메니칼적
해석학은 의심에 의해 깨어서 항상 하나됨(정합성, coherence)을 추구하면서 진리를 섬
기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3) 이런“에큐메니칼적 해석학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적인 작업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교회적 행위이므로 항상 기도
의 맥락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4) 이와 같이 성령에 의존하여 기도
하면서 하나 됨을 추구하면서 진리를 섬기려 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없
전호진 역 (서울: 한국 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idem, 나이로비에서 뱅쿠버까지, 전호진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Robert Rapp, 세계교회협회(WCC) 1981년 현재: WCC의 최근 동향 (서울: 장로교 신학교,
1981); 전호진,“The Religious Freedom and the Religious Pluralism of WCC," 「성경과 신학」 29 (2001); 최덕성,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본문과 현장 사이, 2005). 또한 이형기 교수께서 제공하시는 WCC 자
료와 그 신학의 해석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말린 벤엘데렌,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이형기 역 [서울: 한국
장로교출판사, 1993]; 이형기, WCC의 연구 자료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0, 1993]; 루카스 피셔, 에큐
메니칼 신학의 발전사 1 , 이형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귄터 가스만, 에큐메니칼 신학의 발전
사 2 , 이형기 역 [서울: 한국 장로교출판사, 1998); 이형기 에큐메니칼 운동사 [서울: 기독교서회, 2002])
성경적 관점에서 잘 살펴보면 에큐메니칼 운동이 과연 무엇을 지향해 가고 있는 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3)“A Treasure in Earthen Vessels: An Instrument for an Ecumenical Reflection on
Hermeneutics,”section A, 1, Paragraph 6, available at:
-instrument-for-an-ecumenical-reflection-on-hermeneutics.html#c10594. 또한 같은 문서의 Section B.
2, Paragraph 28도 보라.4)“A Treasure in Earthen Vessels,”Section B, 4, Paragraph 32:“Ecumenical hermeneutics is
not an unaided human enterprise. It is an ecclesial act led by the Spirit and therefore it should be
carried out in a setting of prayer.”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이승구 박사 5151515151515151
지만 그들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의심의 해석학으로 인해 항상 모호한 것일 수밖
에 없다. 이 분들은 대개 성경에 명백히 있는 것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려고 하
지 않고, 그것도 우리가 해석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분들이 말하는 하나 됨의 해석학은 결국 다양한 기독교 전통의 긍정적 상보성
(positive complementarity)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Section B, 2, Paragraph 28).
교회는 해석학적 공동체(a hermeneutical community)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제시
하는 것은 좋고, 그것을 설명할 때 그 안에서 주어진 본문들이나 상징들이나 실천들
을 새롭게 탐구하고 해석하려는 헌신이 있는 공동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있을 수도
있지만,5) 다른 상징이나 실천들에 대해서는 전혀 반론의 여지가 없고 동의할 수 있
지만, 이 분들이 아주 분명히 포함시키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도 새롭게 탐구하고 해
석하려고 해야 한다(Section A, 1, Paragraph 7; Section B, 3, Paragraph 28)고 할 때에 그 성
경에 대한 태도와 방향이 우리를 상당히 불안하게 만든다.
2. 기본적으로 바르트주의적 성경 이해
해석학적 문제를 깊이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WCC는 1963년 카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제4차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세계 회의에서 제시한 하나의 전통에 대한
여러 전통들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를 다시 제시한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의 전통은
“복음 자체”,“교회의 삶 가운데 제시된 그리스도 자신”,6)“복음의 전승”(the
paradosis of the kerygma),7)“한 복음, 즉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8) 또는“교회의 삶
5)“A Treasure in Earthen Vessels,”Section A, 1, Paragraph 7:“The Church is called to be a
hermeneutical community, that is, a community within which there is a commitment to explore and
interpret anew the given texts, symbols and practices.”또한“The Church as an Hermeneutical
Community"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Section D 전체(Paragraphs 49-66); 그리고 Section E, 68도 보라.6)“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Section 2, Paragraph 39, in P. C. Rodger and Lucas
Vischer, eds., The Fourth 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 Montreal 1963, Faith and Order
Paper No.42, London: SCM Press, 1964).7)“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Section 2, Paragraph 45.8)“A Treasure in Earthen Vessels”Section B, 1, Paragraph 18:“the one Gospel, the living
Word of God.”이하 이 section에서 이 문서로부터의 인용은 별 언급이 없는 한 그 section과 문단 번호만을
밝히고 본문에 삽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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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2525252525252 세 번째, WCC의 문제점에 대한 한 고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속 전달되기를 의도하신 전통”을 뜻한다(Section B, 1, Paragraph
18). 그들은 이를“그리스도인 하나의 진리요 실재”라고도 표현하고,9)“부활하신 그
리스도의 구속적 현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Section B, 4, Paragraph 32). 그런데 그들은
이것이“성경 가운데서 증언되고 있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
여 전달된 것”이라고 한다.10) 다른 곳에서는“성경은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므로, 성경은 그 특정 상황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적 현존을 증언한다”고
말하기도 한다.11) 그렇기에 성경은 진리와 오늘날의 인간적 이야기들의 의미를 판단
할 수 있는 기준(a measure for the truth and meaning of human stories today)을 제공한다고
한다는 것이다(Section B, 2, Paragraph 24).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이 성경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을 형성하는 일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에 동의할 뿐(Section B, 2, Paragraph 27)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해석
의 과정에서 성경의 본문이 근본적 규범과 시금석(the primary norm and criterion)이 된
다고는 말하고(Section B, 2, Paragraph 27) 성경 자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하에서 살아
있는 한 전승(the Tradition)을 언급한다고는 말하지만 이분들은 성경의 본문 자체를 그
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분들이 말하는 그 하나의
전통,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현존에서 계시되는 그 진리는“종국적
언어적 정의(定意)나 개념적 논의의 시도를 모두 거부하는, 살아 있는 종말론적 실
재”(a living, eschatological reality, eluding all attempts at a final linguistic definition and
conceptual disclosure)이기 때문이다(Section B, 4, Paragraph 37). 따라서 이 분들은 성경 본
문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사용하는 상징들이나 예전이나 다른 전통이나 경험들과 마
찬가지로 상대성(the relative weight)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Section B,
3, Paragraph 31).“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에 대한 모든 표현들을 초월한다”는(Section B,
4, Paragraph 32) 말로 다시 요약할 수 있는 이런 태도는 결국 칼 바르트(Karl Barth)가
9)“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Section 2, Paragraph 47 & 48.10)“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Section 2, Paragraph 45. 또한“A Treasure in Earthen
Vessels: An Instrument for an Ecumenical Reflection on Hermeneutics,”Section B, 1, Paragraph 16:
"... the one Tradition is witnessed to in Scripture and transmitted by the Holy Spirit through the
Church."(강조점은 필자가 붙인 것임). 11)“A Treasure in Earthen Vessels,”Section B, 2, Paragraph 24:“Because the biblical texts
originated in concrete historical situations, they witness to the salvific presence of the Triune God
in those particular circumsta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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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성경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 분들은 바르트의 통찰을 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도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성
령께서는 각 교회들을 영감하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교회의 통일성 안에서 그 한
전통(the one Tradition)을 구현하기를 항상 목적하면서 다른 교회들과의 대화 가운데서
자신들의 전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해석하는 데로 이끌어 가신다.”12)
성경을“영감”하시는 성령님의 사역과 이 본문에서 말하는 각 교회를“영감”하시는
방식의 차이나 관계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아주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전반적 기조로 볼 때 이 분들은 본질적으로 그 차이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WCC와 관련하여 말하고 활동하는 이 분들은 성경 자체를 계시하고 단언하기는 어
려워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13) 이분들은 성경의 이런 성격 때문에 오늘날에 성
경의 뜻을 드러내려면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천주교
의 언표를 의도적으로 인용하면서 공언한다.14) 이를 강조하기 위해 현재까지는 아직
도 WCC에 공식적으로 참여 하고 있지 않은 천주교 인사들의 논의를 끌어 들이고 있
다는 것이 흥미롭다. 더 나아가서 WCC는 역사 비평적 방법뿐만 아니라, 좀더 전통
적 해석과 좀더 최근의 해석 노력들도 다 포괄한다고 공언한다(Section B, 2, Par.
22). 즉, 본문에 대한 교부적 접근, 예전적 접근, 설교적 접근, 교의적 접근, 심지어
알레고리적 접근까지를 역사 비평적 방법과 같이 연관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며,
또한 근자의 사회학적 해석과 사회과학적 해석, 문예적 특성을 살피는 접근들, 독자-
반응 비평, 여성주의적 해석, 해방주의적 해석들을 모두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
12)“A Treasure in Earthen Vessels,”Section B, 4, Paragraph 32:“The Holy Spirit inspires and
leads the churches each to rethink and reinterpret their tradition in conversation with each other,
always aiming to embody the one Tradition in the unity of God's Church.”13) WCC의 성경관을 잘 드러내고 있는 다음 문서도 보라:“The Authority of the Bible, Louvain,
1971,”in 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ed. Ellen
Flesseman-van Leer, Faith and Order Paper No. 99, 2nd edition (Geneva: WCC, 1983), 42-57. 14)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 (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 1993),
128-29를 인용하고 있는“A Treasure in Earthen Vessels,”Section B, 1, Paragraph 21을 보라:“The very
nature of biblical texts means that interpreting them will require continued use of the
historical-critical method,...[since] the Bible does not present itself as a direct revelation of timeless
truths, but as the written testimony to a series of interventions in which God reveals himself in
human history"(emphasis is given).
한국성경신학회
신앙세미나
5454545454545454 세 번째, WCC의 문제점에 대한 한 고찰
이다. 다시 말해서,“에큐메니칼적 해석학은 이렇게 넓은 근거를 지닌 성경적 성찰들
에서 기원한 통찰의 다양성을 환영한다”고 말한다(Section B, Par. 26). 이런 해석들이
상호 대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의식하면서 표현하면서도,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
인지에 대해서는 별 논의를 하지 않고 있는 점에서 어떤 점에서 무책임하게 과거부
터 현대까지 제시되는 모든 해석 방법을 다 허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른 대화 상대자가 어떤 구체적 해석을 특정한 신앙과 실천 문제에 대해 적절성
을 가지지 않는다고 여긴다고 할지라도 본문의 적용성을 배제되지 않는다”고(Section
B, 2, Par. 26) 말하는 데서도 이런 허용성만이 강하게 나타날 뿐이다. 여기서 배제되는
해석은 선택적이고(selective) 편견에 찬(prejudicial) 해석들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남
아공에서 인종 차별(Apartheid) 정책을 정당화하던 해석 같은(Section B, 3, Par. 28;
Section C, 1, Par. 40)“각 상황 가운데서 생명을 부인하는 결과를 내는 해석들과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Section D, 1, Par. 52). 그와는 대조되는 성경의 더 넓은 증언과 억
압 받는 자들의 경험을 중시하는 해석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인류의 공
평성이라는 가치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 좋은 해석이라고 미리 규정되어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의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3. 종교 개혁의 근거를 무너뜨림(1):“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버림
그러므로 WCC 활동을 하시는 분들에 의하면 개혁파 전통을 포함한 교회사의 다양
한 여러 전통들은(traditions) 이 하나의 전통(the Tradition)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나, 이
것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15) 이와 같이 이해하므로 그들은 몬트리
올 회의의 이런 이해와 표현이 우리들로 하여금“오직 성경”과“성경과 전통들”이라
는 이전의 대조를 극복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강하게 말한다.16) 그러므로 이
들에 의하면 이제는 더 이상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 된다. 따
라서 그들은 아직은 공식적으로 WCC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으나 계속 대표자들을 보
15)“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Section 2, Paragraph 47.16)“A Treasure in Earthen Vessels,”Section B, 1, Paragraph 16.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이승구 박사 5555555555555555
내서 대화하고 여러 위원회에서는 같이 활동하기도 하는 천주교회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천주교회를 포함하여“기독교 공동
체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모두 다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한다
(Section C, 2, Par. 43). 이와 같이 하여 WCC의 주장자들은 종교 개혁의 형식적 원리인
26) 최영실,“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성찰”, 12.27) 최영실,“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성찰”, 13.28) 최영실,“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성찰”, 15f.,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을 밝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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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0606060606060 세 번째, WCC의 문제점에 대한 한 고찰
이와 같은 입장도 충분히 용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넓은 것이라는 것은 부
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7. 마치는 말
물론 WCC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동방 정교회에 속한 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고전적 신학의 내용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면도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분들이 주장하는 신학과 종교 개혁적 신학의 심각한 차이, 특히 동방 정교회의 교회적 실천과
종교개혁적 교회의 실천 사이의 상당한 차이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WCC
의 전반적 분위기를 한국의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더구나 개혁파적 교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먼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매우 힘들다. (WCC에 적극적 으로 참여하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
가하시는 분들도 많이 인정하듯이) 호주 캔버라에서 열렸던 WCC 총회에서 한국의 여성신학
자 정현경이 한풀이 굿을 선보였던 것은 아주 극단적이고 지나친 예의 하나라고 할 수
도 있지만,29) 한국에서 KNCC에 참여하는 분들의 성경 해석이나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논의들에서 보여 주는 모습은 그에 못지않은 지나친 예를 잘 나타내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013년도 WCC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도록 유치하게 되
었다는 것은 WCC의 신학적 입장에 공감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의미 있는 것으로 받
아들여질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 WCC의 주장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런 교회들
로서는 이 세상에 기독교가 성경과 복음에 충실하지 않은 왜곡된 모습으로 전달될 수
있는 기회가 또 하나 주어진 것임을 생각하면서 심각한 우려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면
WCC 총회의 한국 유치와 같은 것은 복음의 왜곡이나 다른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고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9) 2009년 가을 한국개혁신학회 정기 심포지움에서 한신대학교의 오영석 교수님께서 그와 같은 입장을
강하게 천명하신 바 있다.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김성봉 박사 6161616161616161
네 번째
WCCWCCWCCWCCWCCWCC적 적 적 적 적 적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목회적 목회적 목회적 목회적 목회적 목회적 문제점과 문제점과 문제점과 문제점과 문제점과 문제점과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회적 문제점과
성경적 성경적 성경적 성경적 성경적 성경적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운동의 중요성중요성중요성중요성중요성중요성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6262626262626262 네 번째,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회적 문제점과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 김성봉 박사 약력
서울대 철학과 졸업(B. 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M. Div.)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M. 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 졸업(Dr. Theol.)
독일 부퍼탈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 역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교수 역임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및 신학대학원장 역임
나누며 섬기는 교회 당회장 역임
현, 대신총회신학교수, 신반포중앙교회 담임목사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김성봉 박사 6363636363636363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회적 문제점과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김성봉 박사
(대신총회신학연구원 교수부장/ 신반포중앙교회 담임목사)
서론: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WCC 제 10차 총회(2013년) 부산 벡스코 유치를 계기로 이 같은 주제로 우리의 입
장을 개진하게 된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 주제를 살핌에 있어서 최근
한국기독교 WCC 반대대책위원회에서 발간한 「WCC 무엇이 문제인가?」1)라는 책
자와 정두영의“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개혁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2)이라는
소논문이 도움이 되었다. 이와 아울러 이형기 교수가 쓴“교회성장과 선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3) 일본인인 小谷 紀子가 쓴“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연구
”,4) 강희찬의 박사학위 논문인“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평신도에 대한 연구”5)
등이 도움이 되었다.
1) 한국기독교WCC반대대책위원회(ed.), WCC 무엇이 문제인가?, (서울: 총회출판국, 2010),2) 정두영,“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개혁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 in 「고신선교」 No.2 (부산:
고신대학교 선교연구소, 2002),3) 이형기,“교회성장과 선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in 「선교와 신학」 Vol.3 No. -[1999] 4) 小谷 紀子,“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연구”, in 선문대학교 신학대학논문집, [2001],5) 강희찬,“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평신도에 대한 연구”- 역대 WCC 회의를 중심으로, 게명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2005년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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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4646464646464 네 번째,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회적 문제점과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에규메니칼(ecumenical)이라는 말은 헬라어 오이쿠메네(οικουμηνη)에서 왔으며“사람
나 신학적 다원주의 내지 종교적 다원주의로 이끌게 된다.11) 정두영, op.cit., 203-08.12) Ibid.,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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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6666666666666 네 번째,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회적 문제점과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전 정도로 여기거나 신정통주의 영향 하에 성경은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경전으
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여기거나 다원주의 영향 하에 성경도 나름대로
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여기거나 신해석학의 영향 하에 성경과 연관하여 중요한 것
은 독자의 이해라든가 하는 입장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 카
톨릭과 쟁론이 있었던 권위의 근거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성경의 유일 권위인가,
아니면 교회의 전통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2) 우리 신앙에 있어서 교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경관과 연관하여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교리문제이다. 교리란 우리가 믿는 바 도
리이며 그 출처가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근거한 우리가 믿는 도리가 바로
교리이다. 교리는 교회를 분열시키기 때문에 교리는 덮어두고 의식으로 하나 되자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내용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처사이다. 교리와
신앙고백의 일치를 외면한 채 의식의 일치만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의식을 욕되
게 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일이다.
3) 기독교인으로서 타종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종교 자체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몸부림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원에의 몸부림에는 무관심한 채 스스로의 조직 강화에만 마음 쓰는
종교는 일단 부패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부패한 종교에서는 생명을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이 기독교라 할지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일반은총으로서의 종교는
인정할 수 있겠으나 구원의 또 다른 방도로서의 종교는 인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의 배타성을 포기하도록 하는 종교다원주의나 종교혼합주의는 용납
할 수 없다.
4)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전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는 복음전도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만큼 복음전도는 기독교에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기독교에로의 개종을 권하는 복음전도의 후진성과 시대착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김성봉 박사 6767676767676767
오성을 말하면서 개종을 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WCC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
렵다.
정두영은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이러한 WCC 에큐메
니칼 운동은 에큐메네 즉 사람이 거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운동이고, 교회보다는 세
상에 관심을 가지므로 순수한 교회연합이 아니고 교회를 갱신, 사회화, 세속화, 정치
화하므로써, 교회를 수단으로 삼아 세상을 위한 교회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
력”이라고 하였다.13)
2.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서론에서도 보았듯이 에큐메니칼은 WCC 진영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 정신은 본래
성경으로부터이다. 신약은 기독교인들의 일치에 대하여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
히 요한복음 17장 20-26절은 기독교인들의 일치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변증적인 역
할을 하게 할 것이라는 우리 주님의 기도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즐겨 애용하는
구절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했는데,
바로 이 정의가 오늘날 에큐메니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말하고, 다음으로 세상이 믿도록 하기 위한 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말하며, 마지막으로 선교사역을 위한 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연합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서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라는 것이다.1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개
념과 동일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신약 성경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는데(고전 12:27; 엡 1:23, 4:12), 이 칭
13) Ibid.,208.14) H.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75),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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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8686868686868 네 번째,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회적 문제점과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호는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같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강조
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간의 연합에 대한 강조를 나타낸다.15) 로마서에서는 교회를
몸이라고 하는 묘사가 사용될 때 교회의 본질적인 통일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으
며, 고린도전서 12;12-31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로마서 12:4-5의 내용을 확대
한 개념으로서 교회의 단일성을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에
서 굳이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은 분리되어 있는 고린도 교회(고전 1:12)의 통일성
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16)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이것은 지체상호간의 관계보다 오히려 몸과 머
리와의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데, 머리 없이 몸이 있을 수 없듯
이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으며, 교회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을 가
질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17)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은 그리스도 자신
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즉 머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듯이, 스스로 완전하실 수 있으신 분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함께 완전하게 되시기를 원하신 셈이다.18)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개념은 교회
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개념과 만나며, 교회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배와 다스
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로마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이 말한 것처럼 머리
가 몸을 지배하는 것이지, 머리를 몸의 지체 중 하나로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19)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몸된 교회의 구주이시며(엡 5:23), 교회는 그리스도
에게 예속되어 있다. 몸은 머리의 계획과 결정을 실천하는 도구이며, 머리의 대리자
이다. 따라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과 계획이 실천되는 도구, 대리자, 무기,
기관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진 필수불가결한 도구라는 데 교
15) G. E.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545. 16) L. Welch, The Reality of the Church,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149.17) G. Aulen, 「조직신학개론」, 김관석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2), 284. 18) J. F. Balchin, What the Bible teaches about the Church, (Illinois: Tyndale House, 1979),
30. 19) H. Kueng, The Church, trans. Ray and Rosaleen, (London:Search Press, 1971), 239.
WCC에 대한한국성경신학회의 입장
김성봉 박사 6969696969696969
회의 영광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τω)라는 개념과
만난다.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무려 164회나 쓰고 있다.20)“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는 말씀은“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
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는 말씀과 함께 해석되어
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뉘어지지 않으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
도들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듯의 상징으로서 많은 지체를 가진
몸의 일치를 말하고 있다.21)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는 그를 믿는 모든 자들
이 한 몸인 것을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홀로 있을 수
없으며,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연합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머리
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므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2) 세상이 믿도록 하기 위한 교회의 연합
요한복음 17:11-23에 나타난 대로 교회는 세상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하나됨을 이루어야 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
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하는데, 여기서 하나됨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교회간의
참된 연합은 진리(성경말씀) 안에서의 일치이다. 아울러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
님께서“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기서 참된 선교의 정신을 보게 된다. 선교란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
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연합의 목적에 대하여서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세상
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게”(17:21) 하기 위한 것이며,“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17:23) 하기 위한 것이다.
20) A. Deissmann, Paul: A Study in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ers, 1957), 140. 21) J. A. Fitzmyer, Pauline Theology, (New Jersey: Prentice hall, 1967),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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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0707070707070 네 번째,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회적 문제점과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
3) 선교사역을 위한 교회의 연합
허버트 케인에 의하면“우리 시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19세기 선교사역의 직접적
인 소산”22)이라고 한다.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선교현장에서 선교를 위하여 상호협
력적인 선교대회들이 열렸으며, 이 선교대회들을 통하여 순수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났다.23) 1910년 6월 에딘버러에서 개최되었던 세계선교대회는 선교를 위한 교회
의 연합을 역설한 복음적인 선교대회였고,“19세가와 20세기를 가르는 세계교회사의
분수령”24)이었으며,“19세기 선교 및 연합 운동의 총결산이요 20세기 선교 및 연합
운동의 시발점”25)이었다. 전호진에 의하면 이 선교대회가“개신교의 조직적인 에큐
메니칼 운동의 시작”26)이다. ‘비기독교 세계에 복음 전달’을 주제로 다룬 제 1 분
과위원회의 보고서는 범세계적인 선교를 위해 협동과 연합이 절실히 필요함을 역설
하였다. 그에 따라 1921년에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창립되었
Verzeichnis der gedruckten Werke von Heinrich Bullinger, bearb. Joachim Staedtke, Bd. 1‐3, Zuerich: TVZ, 1972 (이하 HBBibl I), 624‐650; 취리히 중앙 도서관: Sign. D 263 / III N 157 / Ms. S 71.); Jean
Crespin에 의해 인쇄된 제네바 문서 (제네바 중앙 도서관: Sign. Bc 888); 칼뱅의 비서인 Charles de
Joinvillier에 의해 필사된 문서 (제네바 중앙 도서관: Sign. Ms. Fr. 145, S. 87r‐94r); 편집된 문서들: CO.
VII, 733‐748; Joannis Calvini opera selecta, hg. Peter Barth, Wilhelm Niesel und Dora Scheuner,
Muenschen: Chr. Kaiser, 1926‐1959, 2, 246‐258; Régistre de la 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ève au
temps de Calvin 1546‐1533, Bd. 1, hg. von Jean‐François Bergier, Genève: Droz, 1962, 64‐72; Calvin‐Studiengabe, hg. Eberhard Busch u.a., Bd. 4,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2002 (이하 CStA.), 12‐16; Reformierte Bekenntnisschriften, hg. im Auftrag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 von
Heinrich Faulenbach und Eberhard Busch, Bd. 1/2 (1535‐1549),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2006
(이하 Bekenntnisschriften 1/2), 481‐490; Mueller E. F. Karl, Die Bekenntnischriften der reformier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