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한국경제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 (1) 이 영 훈 오늘 저는 기쁜 마음으로 1시간 정도 한국경제사 연구의 최근 동향 가운데 특히 저 와 관련된 몇 가지 논점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세 가지를 이야기하겠습 니다. 첫째는 우리나라 18∼19세기 경제의 장기변동에 대해서입니다. 둘째는 우리나 라에서 언제부터 쿠즈네츠적인, 즉 근대적인 경제성장이 개시되었는가에 대해서입니 다. 세 번째는 오늘날 한국경제와 관련하여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흔히들 한국경제의 문제라 하면 재벌 또는 대기업집단의 폐단을 거론합니다만, 저는 그것보다 제일 밑바닥에서 대기업과 무관하게 적체하고 있는 영세 제조업체라고 생 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역사적인 현상입니다. 그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겠습 니다. 1. 18∼19세기 논농사의 생산성 아래 그림은 제가 17년 전부터 전국의, 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36개 마을 에 있는 양반가와 서원 등에서 발견한 秋收記에서 뽑은 것입니다. 논 1斗落에서 수취 한 지대량을 평균하여 나온 1685∼1945년간의 장기추세입니다. 1두락은 대체로 200 평 정도의 면적입니다. 租라는 것은 정미를 하기 전의 나락 상태의 벼를 말합니다. 斗는 조선시대의 용기인데, 오늘날의 대략 5ℓ에 해당합니다. 보시다시피 17세기말부터 두락 당 지대량이 15∼20두에서 19세기말의 5∼10두까 지 죽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890년대를 전환점으로 하여 다시 상승추세로 (1) 본고는 2014년 5월 28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 3차 경제학의 최근동향 세미나’에서 필자가 구 두로 발표한 것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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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1)...1.2 산림의 황폐 그렇다면 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했는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 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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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
한국경제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1)
이 영 훈
오늘 저는 기쁜 마음으로 1시간 정도 한국경제사 연구의 최근 동향 가운데 특히 저
와 관련된 몇 가지 논점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세 가지를 이야기하겠습
니다. 첫째는 우리나라 18∼19세기 경제의 장기변동에 대해서입니다. 둘째는 우리나
라에서 언제부터 쿠즈네츠적인, 즉 근대적인 경제성장이 개시되었는가에 대해서입니
다. 세 번째는 오늘날 한국경제와 관련하여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흔히들 한국경제의 문제라 하면 재벌 또는 대기업집단의 폐단을 거론합니다만, 저는
그것보다 제일 밑바닥에서 대기업과 무관하게 적체하고 있는 영세 제조업체라고 생
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역사적인 현상입니다. 그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겠습
니다.
1. 18∼19세기 논농사의 생산성
아래 그림은 제가 17년 전부터 전국의, 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36개 마을
에 있는 양반가와 서원 등에서 발견한 秋收記에서 뽑은 것입니다. 논 1斗落에서 수취
한 지대량을 평균하여 나온 1685∼1945년간의 장기추세입니다. 1두락은 대체로 200
평 정도의 면적입니다. 租라는 것은 정미를 하기 전의 나락 상태의 벼를 말합니다.
斗는 조선시대의 용기인데, 오늘날의 대략 5ℓ에 해당합니다.
보시다시피 17세기말부터 두락 당 지대량이 15∼20두에서 19세기말의 5∼10두까
지 죽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890년대를 전환점으로 하여 다시 상승추세로
(1) 본고는 2014년 5월 28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 3차 경제학의 최근동향 세미나’에서 필자가 구
두로 발표한 것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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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고 있습니다. 17년 전에 이러한 사례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믿을 수 없었습니
다. 그런데 이후 같은 사례가 쌓이고 쌓여 30개가 넘고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되
었습니다. “아, 역사의 실태가 이러했던가”하고 요사이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대량의 감소는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저는 당시의 지배적 산업이었던 水稻作의,
곧 논농사의 생산성이 이렇게나 많이 감소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 반론이 많이 있습니다. 생산성이 아니라 지대율이 감소
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살펴봐도 통상 50%에 해당하는 지대율
이 감소했다는 증거는 찾기 곤란합니다. 다른 한 가지 반론은 畓主가 국가에 대해 부
담하는 조세를 作人이 대신 부담하게 되어 작인으로부터 수취하는 지대량이 작아졌
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 사례를 세밀히 조사하면 18세기에는 오히려 작인이 조세
를 부담하다가 19세기가 되어서는 경제사정이 나빠지니까 거꾸로 답주가 부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됩니다. 즉 반론과는 반대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대량이 장기적으로 감소한 것은 생산량의 감소로 이해될 수밖에 없
다, 지배적 산업인 논농사에서 생산성의 감소는 경제 전반의 장기적 침체를 대변하
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 18∼19세기의 경제는 장기적으로
침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90년대에 반등하기 시작하는 것은 淸日戰爭 이후 일본
으로의 쌀 수출이 본격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침체를 거듭하던 경제
가 개방을 맞아 시장이 열리자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나
라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이 개시된 것은 1890년대부터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림 1> 논 1斗落當 地代量의 장기추세(租, 斗, 1685~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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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지대량의 장기추세에 대해 현대식 농법이 도입된 일제시기가 되어서도
17세기말보다 낮은 수준인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에 대해
말씀드리면 위는 어디까지나 36개의 사례를 단순 집계한 것이고, 그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생겼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17세기말부터 시작하는 사례는 경
상도 칠곡의 어느 마을인데요, 그것은 18세기말이면 시계열이 끝이 납니다. 반면에
1930년대까지 이어지는 시계열은 주로 전라도의 것들로서 19세기 전반부터 시계열
이 시작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 전라도 시계열을 중심으로 보면 1830년대와 1930년
대는 큰 차이가 없고, 원래 수준을 회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의 생산성은 지방
마다, 같은 지방이라도 장소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점을 무시하고, 한껏
모은다고 모았습니다만 불과 36개에 불과한 사례를 집계하니 위와 같은 결과가 나타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 그림에서 읽어야 할 것은 각 시기의 절대수준이 아니라 그
것들이 이어지는 장기추세라고 생각합니다. 위 그림은 결국 논농사의 생산성이 17세
기 말부터 19세기말까지는 줄곧 감소하는 추세였다가 이후 반등을 시작했다는 정도
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1.1 쌀의 상대가격
논농사의 생산성이 과연 감소했는가, 그런 일이 어찌 있었겠는가라는 회의가 여전
하기 때문에 좀 더 설득력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해 저는 양반가와 서원의 추수기 이
외에 奎章閣에 소장 중인 왕실의 재정기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왕실이
서울 시내에서 구입한 여러 재화의 가격이 나와 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진 것
은 다른 재화에 대비된 쌀의 상대가격입니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이미 논문의 형태
로 발표되었습니다만, 다른 모든 재화에 대비된 쌀의 상대가격은 상승하는 추세였습
니다.
특히 콩, 팥, 녹두, 꿀 등의 재화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들 재화는 쌀의 수요 증가
와 더불어 그 수요가 같이 증가하는 補完財 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쌀로 떡
을 만들어 먹으면 콩, 팥, 꿀 등의 소비도 증가합니다. 따라서 쌀의 수요가 늘어 쌀
가격이 상승하면 이들 보완재의 가격도 같은 정도로 상승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실
의 재정기록은 이들 모든 재화에 대비된 쌀의 상대가격이 19세기 내내 상승추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비싼 사치재라 할 수 있는 꿀과의 대비에서도 쌀의 상
대가격은 증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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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19세기에 걸쳐 서울시장에서 쌀의 공급이 상대적으로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무엇을 의미하기는 곤란할 정도로 전후 인과관계는 명확
하다고 하겠습니다. 서울시장이 이러할진대 농촌시장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별도로 경주 지방의 서원 기록을 분석한 성심여대 박기주 교수의 연
구가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쌀의 공급이 장기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음은, 다시
말해 논농사의 생산성이 장기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였음은, 지금까지 확보된 실증적
근거에 관한 한 부정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1.2 산림의 황폐
그렇다면 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했는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 가
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단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을 들자면 산림의 황폐라 하겠습니
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문명이 번성하다가 사라졌는데, 그 중요 원인의
하나는 자연 파괴였습니다. 중국 경제도 18세기 이후에 정체하였는데, 그 중요 원인
으로서 산림 황폐를 비롯한 생태계의 변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그 같은 環境史 연
구는 최근에 역사학의 새로운 개척 분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산림이 어느 정도 황폐했느냐. 그에 관해서는 1910년 8월 일제가 조
선을 병합하자마자 맨 먼저 시행한 朝鮮林績調査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에 나무가 왜 이렇게 없느냐, 조선 지배에서 제1의 우선과제는 산을 푸르게 하
는 식림사업이라는 문제의식에서였습니다. 조사의 결과 전국 임야의 32%가 成林地,
42%가 稚林地, 26%가 無立木地로 판명되었습니다. 성림지는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개마고원이나 태백산맥과 같은 깊은 산속에 있는 원시림을 말합니다. 치림지는 1헥
타르에 분포한 나무를 모두 잘라 쌓아도 10입방미터가 되지 않는, 나무가 무척 성근
상태를 말합니다. 무입목지는 나무가 하나도 없는, 완전히 발가벗은 상태를 말합니
다. 중부 이하의 산간지대와 남북부의 연안지대는 대개 치림지이거나 무입목지였습
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20세기 초 한반도 전체 산지의 70% 이상은 심하게 황폐해 있
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러했느냐. 대략 18세기부터 중엽부터라고 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8세기부터 호랑이의 폐해, 곧 虎患이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호환이 심각해
지는 것은 바로 산림의 황폐 때문입니다. 산림이 황폐하면 호랑이와 인간은 자주 접
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을 넘기면, 대략 1770년대 英祖 말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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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면, 호환은 거의 사라집니다. 한반도가 호랑이가 더 이상 살 수 없는 환경이 되
고 말았던 것입니다. 산림이 황폐하면 농업에 어떠한 치명적인 영향이 미쳐지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북한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하
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1.3 18∼19세기 경제의 정체
농업 이외에 상업, 수공업, 무역 등 살펴 볼 분야가 많습니다만, 지배적 산업이었던
논농사의 이 같은 실태를 볼 때 18∼19세기 경제가 정체한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지난 50년 간 한국의 역사학계는 조선왕조의 경제는 비록 달팽이 걸
음이나마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는데, 제국주의 침입을 맞아서 혼란과 파괴가 일어났
고, 수탈을 받아 왜곡되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겠습니
다. 엄밀히 말해 한 시대가 만들어낸 집단적 기대나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좋
을 것입니다.
18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경제의 안정성이 보존되었다고 봅니다. 인구가 증가하고
개간도 추진되어 비록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총생산량은 증가하였던 것이 아
닌가, 왕조의 재정상태도 건전하여 가난한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재분배경제도 효율적
으로 작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 점을 둘러싸고서는 경제사학자들 사이
에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오늘은 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
겠습니다.
그렇다가 19세기부터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1770년대를 넘기면서는 생산성은 물
론 총생산량 자체도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보입니다. 그 때부터는 심각한 위기였습니
다. 그에 관해 저는 농촌 장시의 감소, 지방 간 쌀 가격변동의 상관성의 하락 등 여러
가지 지표를 제시해 왔습니다. 위기가 가속화하자 양반관료를 위시한 지배층의 일반
농민에 대한 수탈도 강화되었습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시장이 폐
쇄된 경제에서 인구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면 자연에 대한 약탈, 곧 환경 파괴
에 이어,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약탈이 심화되는, 곧 사회와 정치의 통합이 해체
되고 갈등이 심화하는 일련의 과정은 거의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 문명이 해
체되는 과정의 전형을 저는 19세기 조선왕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
다. 저는 1910년 조선왕조의 패망을 그러한 문명사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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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대적 경제성장의 개시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들어가겠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18∼19세기에 걸쳐
장기적으로 침체하던 논농사의 생산성은 1890년대에 최저점을 찍고 반등하기 시작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청일전쟁 이후 일본으로 쌀 수출이 급증한 것이 그 원인
입니다. 시장이 열리자 사람들은 버려둔 토지를 개간하고, 망가진 수리시설을 복구
하고, 김매기에 더욱 큰 성의를 발하게 된 것입니다. 시장의 개방, 그에 따른 소득의
증가가 인간들의 경제 행동을 얼마나 크게 바꾸어 놓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
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이후 죽 그렇게 경제는 성장하는 추세였습니다. 다시 말
해 저는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쿠즈네츠적인, 곧 근대적인 경제성장이 개시되는 것은
1890년대부터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1910년 이전까지는 통계자
료가 부족하여 그렇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1910년 이후가 되면 이 땅을 그의 새로운 영토로 지배하기 시작한 일제에 의해 근
대적 형태의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합니다. 그 자료를 이용하여 1910년 이후에 나타
난 근대적 경제성장의 추세를 명확히 밝힌 것은 낙성대경제연구소에 모인 경제사 연
구자들에 의해서입니다. 동국대학교의 김낙년 교수가 그 방대하고 힘든 통계 작업을
선두 지휘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UN의 권고 하에 각국은 통일적 기준과 형
식으로 국민소득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농업, 공업, 서비스업 등 각 산업
별 생산 통계로부터 그 해에 창출된 새로운 부가가치를 추계하고, 거기에다 재정과
무역을 더하여 한 나라 경제가 연간 생산하거나 소비한 소득의 총액을 계산해 내는
것입니다. 이를 國民計定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부터 한국은행이 미
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1953년까지 소급하여 매년 국민계정을 작성해 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국민계정과 유사한 통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낙년 교수 팀이 총독
부가 작성한 각종 생산량 통계, 무역 통계, 재정 통계를 활용하여 오늘날 한국은행이
행하는 동일한 기법과 동일 수준의 국민계정을 1910년까지 소급하여 만들어 낸 것입
니다. 제가 보는 한, 그것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사회과학계가 거둔 최대의 성과물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아래 그림은 김낙년 교수 팀이 추계한 1910년부터 1970년까지 1인당 GDP의 장기
추세입니다. 2005년 가격이며, 단위는 10만 원입니다. 그리고 남한 만을 대상으로 하
고 있습니다. 해방 후에는 북한이 떨어져 나가니까 추계의 동질성을 위해 남한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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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를 보면 1910년의 1인당 GDP는 2005년 가격으로 877만원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1970년이 되면 1,918만 원 정도로 대략 2.2배 증가하였습니다.
그 사이 상당한 기복이 있었음을 위 표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해방 이전의 피크는
1941년의 1,657만 원입니다. 이후 태평양전쟁기에 감소하였으며, 해방에 따른 파국
으로 1947년에는 1911년보다 낮은 720만 원으로까지 하락합니다. 연후에 조금 회복
하다가 6·25전쟁을 맞아 다시 하락하였으며, 1941년 수준을 회복하는 것은 1968년
이 되어서였습니다.
2.1 허수열 교수의 비판
김낙년 교수 팀이 제시한 이러한 추세를 믿을 수 있느냐. 그에 대해 충남대학교 경
제학과의 허수열 교수가 맹렬하게 비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대략 20명 가까운 연
구자들이 공동으로 열심히 만든 통계를 허수열 교수는 혼자서 믿을 수 없다고 주장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국사학계는 큰 우군이라도 만난 듯이 반기고 있습니다. 국
사학계는 오래 전부터 식민지 경제는 수탈과 억압으로 정체하거나 왜곡되어 왔다
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역시 경험적 근거나 분석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당연히 그
러했을 것이라는 집단적 선입관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선입관은 1960년대부터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통해 국민의 상식으로 널리 보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김낙년 교수 팀이 엄밀한 통계작업으로 그것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결론을 내렸으니,
마음이 몹시 불편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허수열 교수가 그 통계를 비판하고 나섰
<그림 2> 남한 1인당 GDP의 장기추세(10만 원, 2005년 가격, 1911~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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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 큰 우군이라도 만난 기분이었겠지요.
허수열 교수의 비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1940년대 초반까지
경제가 조금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전쟁 덕분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해방과 6·25
전쟁 통에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김낙년 팀의 통계는 1910년대의 경제성장
을 과장하고 있다. 1910년대에 경제성장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시대의 통
계가 불완전한 데서 생긴 착시효과에 불과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경제에는 아무런 본질적 변화가 없었던 셈이다. 1930년대의 짧은 성장
은 찻잔 속의 폭풍에 불과한 것이다. 근대적 경제성장은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
다.
2.2 해방 후의 경제적 혼란
저는 해방 후의 경제적 혼란과 뒤이은 6·25전쟁으로 이전의 경제 발전이 무로 돌
아갔다는 식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해방은 일본이 중심이 되어 조선, 만주, 중
국, 대만, 남양주 등을 통합하여 구축한 거대한 경제권이 붕괴된 것을 말합니다. 게다
가 남북의 분단까지 덮쳤습니다. 남한의 경제가 이러한 정치적, 군사적 충격을 맞아
급속하게 위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인구요인도 컸습니다. 해방 당시 남
한의 인구는 대략 1,600만이었습니다. 그런데 1948년의 인구는 대략 1,900만으로 그
사이 무려 300만이나 늘었습니다. 일본·만주의 해외동포가 남한으로 몰려들고, 게
다가 북한에서 대략 100만의 인구가 공산주의세력을 피해 남으로 피난 왔기 때문입
니다. 이러한 시장의 파국과 인구요인이 겹쳐 1인당 GDP가 1910년대 이전 수준으로
까지 하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전 시대의 경제적 성과가 무로 돌아간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업가, 엔
지니어, 숙련노동자 등의 인적자본은 그대로 존속하였고, 오히려 귀환하거나 월남한
실업가들 덕분에 증가하였고, 사유재산제도와 회사·기업 등 온갖 시장경제체제의
기초는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해방과 전쟁 통에 파괴된 기계는, 방직업에 관한 사
례연구에 의하면, 전쟁 이후 대부분 복구되어 1957년 현재 가동 중인 방적기와 방직
기는 2/3 이상이 식민지기의 것들이었습니다. 공장에 따라서는 1980년대까지 그 기
계가 그대로 가동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요건에서 1960년대에 들어 한국경제에 비
교우위를 안기는 해외시장이 크게 열리니까 고도성장의 도약이 시작된 것입니다. 해
방과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는 허수열 교수의 비판은 지나치게 선동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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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겠습니다.
2.3 1910년대의 논농사
허수열 교수가 제기하는 또 하나의 논점은 1910년대의 논농사 생산성입니다. 1910
년대의 농업통계는 불완전하며, 그로 인해 생산성의 상승 정도가 과장되었다. 수리시
설이 복구되고, 비료의 투여가 증가하고, 개량종자가 보급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이 생산성 증대의 지속적 효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그리고 찻잔 속
의 폭풍과 같은 1930년대를 제외하면, 식민지기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있지 않았다는
것이 허수열 교수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허수열 교수는 저를 비판의 과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맨 처음
제시한 그림에서 두락당 지대량이 1910년대에 걸쳐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국사학자 김건태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여 18∼19세기
에 걸쳐 지대량이 감소한 것은 지대율이 감소했거나 작인이 답주를 대신해서 조세를
부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앞서 지적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저와 허수열 교수는 벌써 두 차례나 서로를 비판하고 반론하는 논문을 『경제사학』
에 싣고 있습니다. 저의 허수열 교수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0년
대 쌀 생산량에 관한 통계가 불완전하다고 하나 최초로 작성된 통계가 그러하였고,
총독부는 그 문제점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
된 뒤 기존 통계를 대대적으로 보정하였으며, 그 새로운 결과는 믿을 만하다. 그렇게
수정된 통계마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려면, 예컨대 1910년의 쌀 생산량이나 생산
성 통계가 과소평가된 것이라면, 그것을 확실히 입증할 벤치마킹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것 없이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식의 주관적 신념만을 자꾸 역사적
사실인양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반론을 펴면서 저는 허 교수가 왜 1910년대의 新聞, 農會報, 總督府調査月報
와 같은 당대의 기술 자료를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곤란하였습니다.
1910년대의 총독부조사월보는, 저는 1910∼1914년 것을 오래 전에 검토한 적이 있
는데, 해마다 가을 추수기에 올해는 작년에 비해 몇 % 增收 또는 減收라는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그것과 수정된 통계를 비교해 보면 그대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1918년 총독부의 농업기술자나 통계 관료들은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
― 110 ― 經 濟 論 集 第53卷 第1號 學術動向
토함으로써 기존의 잘못된 통계를 보정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선 나온 통계를 두고
후대의 어느 연구자가 무조건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제가 직접 1910년대 기술 자료를 망라하여 논농사의 생산성 추이에 관한 별도
의 논문을 작성해 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2.4 시장과 노동
개량종자가 보급되었지만, 생산은 증가하지 않았다는 허 교수의 주장도 이해가 어
렵습니다. 劣性變異 효과가 그 원인이라고 합니다. 개량종자라고 하나 기존의 토양이
나 농법에 맞지 않아서 생산성 증가의 효과가 곧바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
느 정도의 열변효과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
개량종자가 확대 보급되었다면, 증산의 효과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당초
개량종자가 보급된 것은 철도를 따라 분포한 일본인 농장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일
본인들이 아무 이익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 나라에서 개량종자를 도입했습니까.
아무 이익도 없는데, 총독부가 무엇 때문에 행정력을 발동하여 보급을 촉구했겠습니
까. 아무 이익도 없는데, 오히려 손해인데, 무엇 때문에 조선 농민들이 그토록 신속하
게 개량종자를 받아들였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아무 이익이 없는 일은 공권력이 아
무리 용을 써도 되지를 않는 법입니다.
제가 지적한 허 교수 논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인
노동의 투하량 변동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피를 뽑는 제
초노동의 횟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도 몇 10%의 증수는 충분히 가능하였습니다. 시장
이 열리고, 수리 등의 기반시설이 정비되고, 나아가 재산권제도가 정비되었던 1910
년대의 정치, 사회, 경제의 환경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몇 선구적인 연구에 의
하면 3·1운동조차 1910년대에 걸친 人權을 포함한 사회적, 문화적 성장이 초래한
정치적 변혁이었습니다.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1910년대는 조선인들이
오랜만에 맛본 平和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총독부의 수정통계대
로 논농사의 생산성이 연간 1.85% 증가한 것은 충분히 있고도 남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 ― 111 ―
3.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주제로서 오늘날 한국경제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
입니다. 다들 한국경제의 고질적 병폐라 하면 財閥을 떠올립니다만, 제 생각은 그렇
지 않습니다. 대기업이나 대기업집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전
자와 같은 세계 초일류 기업이 몇 개만 더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경제는 쉽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혼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삼성이라
는 대기업집단이 가지고 있는 자본력, 프로젝트수행능력이 장기간 뒷받침되어서 삼
성전자라는 초일류 기업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와 거꾸로 가고 있습
니다. 대기업의 수가 줄고 있습니다.
이 표는 통계청이 매년 행하는 전국사업체조사에서 뽑은 것으로서 제조업에 종사
하는 30만 개 이상 사업체의 종업원 규모별 분포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
습니다. 보다시피 300명 이상의 제조업 대기업이 1995∼2011년에 현저하게 줄었습
니다. 300∼999명의 기업을 중견기업이라 하는데, 2011년의 그 수는 1995년에 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