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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Oct 2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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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k Cha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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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age 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들출판사

Page 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차 례

최윤배 깔뱅의 과학(science) 이해 7

정기철 리쾨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41

최태영 불교의 방편개념의 이해와 기독교적 적용 72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 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03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 인지구조(認知構造): ‘신(神) 지식’

‘인간 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33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의 사역 163

배경식 칼빈의 교회론이한국교회에주는의미 193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 관한연구 227

Adams, Daniel J.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a Difference 257

Page 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깔뱅의‘과학’(science) 이해

최윤배(장로회신학대학교부교수)

I. 서론

국어사전에는“과학(科學)”(science; Wissenschaft; wetenschap;

scientia)이 몇 가지의미로 정의되어 있다.1) 또한기독교회사와 과학사

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2) 과학과 기독교 각각에 대한 성격 규정에 따

라, 양자 간의 관계 규정도 달라질 수 있다.3)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에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Vol. 26

Choi, yoon bae Calvin’s Understanding of Science

Chung, ki cherl Hermeneutische Kulturtheologie bei Paul Ricoeur

Choi, tae young The Application of the Buddhist Concept ‘U p a y a’ in

Christianity

Lee, seok gyu A Study on the cultural memory and it’s History of

political-theological Influence

Kim, jae jin Theological Recognizing System of J. Calvin

Kim, sung won 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 and Whitehead’s

Philosophy

Pae, kyung sik The meaning of the Ecclesiology of J. Calvin in

Reference to the Korean Church.

Kim, young seon Study on the Essence and Attribute of Gifts of the

Holy Spirit

Adams, Daniel J.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7-39

1) 국어사전은‘과학(科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① 철학을 전체적인 학(學)

으로 한 경우의 개별적인 분과(分科)의 여러 학(學). ② 구체적인 사상(事象)과 그것

을 통일하는 보편적인법칙에 관하여 객관적인진리를 인식하고, 또 그것을 응용하는

체계적인 학문. 대상(對象) 영역에따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음.

③ 좁은 뜻으로는 자연과학과 같은 뜻.”[국어국문학회 감수,『민중판 밀레니엄 새로

나온 국어대사전』(서울: 민중서관, 2007), 270]; “자연과학(自然科學)”은“자연에 속하

는 여러 대상을 다루어 그 법칙성을 밝히는 학문. 보통 천문학·물리학·화학·지

학·생물학등으로 분류함”으로 정의되어있다(상게서, 2069).

2 ) D. C. Lindberg/R. L. Numbers(ed.), God and Nature. Historical Essays on the

Encounter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이정배, 박우석 옮김,『神과 자연: 기독

교와과학, 그 만남의역사』상권/하권(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8/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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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본 제5회 한국조직신학자전국대회(2010년 4월 24일)에서주어

진 대주제인“신학과 과학”하에서“깔뱅과 과학”이라는 세부적인 주제

가 선택되었을지라도, 과학과 관련된 깔뱅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종교

개혁과 개신교 전통 속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이든지 간에,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지혜를 가져다 줄 것은

물론,“성서를 근거로 세상의 변화를 해석하고 비판하며 재구성하는 작

업”에,5) 그리고 간학문적인 대화(interdisciplinary dialogue)를 통해 신

학의학문성과6) 신학의 공공성에7) 기여할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는 본고에서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깔뱅

이“반과학적(反科學的)”이라는 오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고, 둘째는

과학에 대한깔뱅의 신학적 근거를 살펴보는 것이며, 셋째는 신학의 주

요 작업에 속했던 성서해석과 관련하여 깔뱅은 과학을 어떻게 취급했

는지‘하나님의 적응 이론’(the doctrine of divine accommodation;

accommodatio Dei)을 중심으로,8) 몇 가지 실례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다. 우리는 위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깔뱅의『기독교강요』(1559), 주

석서를 비롯한 제1차 자료들과, 국내외 관련 제2차 자료들을 사용할

것이다.9)

서, 우리는 과학을 지식, 학문, 인문과학, 자연과학, 자연철학 등을 지칭

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기독교를 종교, 신학, 자연신학, 신앙 등을 지칭

하는데 사용할 수도있을것이다.

깔뱅(Jean Calvin, 1509-1564)은 과학자가 아니라, 종교개혁자와 신

학자인 동시에16세기 지구촌 한 구석에 살았던 역사적 한 인물로서의

기독교적 인문주의자였다.4) 우리는 지금21세기에 깔뱅의“과학”이해를

살펴보려 한다. 이 같은 역사(歷史)의 큰 간격을 의식하면서, 16세기와

21세기를 연결시키기 위해 우리는 본고에서“과학”이라는 용어를 경직

되게 사용하지 않고, 유연성을 발휘하여, 때로는 일반적이고도 포괄적

인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때로는 구체적이고도 좁은 의미

에서“자연과학”(natural science)을 지칭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

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과학”용어에 대한 유연적인 사용이 가

져 오는문제점을결코모르는바가아니다.

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9

3) 김흡영,『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이정배,『종교와 과학

의 대화에 근거한 기독교 자연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15; 박찬호,“자연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맥그라스의 견해-도킨스의 무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비

판을중심으로,”한국기독교학회(편), 「한국기독교신학논총67」(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33-234; 신재식,“갈등에서 조화로: 기독교와 과학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시

론적 고찰,”호남신학대학교(편), 「신학이해」제17집(1999), 373-401; 오창희,“현대

과학철학과 기독교,”현요한 역음, 『기독교와 과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전통적 과학관에서는 과학을 합리적이며 엄밀하고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생

각한다. 그리고 과학자 개인의 선입관이나 일체의 형이상학적 전제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로부터 중립적이며, 또 누적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

다.”(175); “1962년 토마스 쿤의『과학혁명의 구조』가 출간되면서부터 이러한 전통적

과학관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쿤은 그의 과학사 연구를 통하여 실제로 진행되어

온 과학이 비합리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요소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주장했

다.…이러한입장을 일반적으로‘전통적 과학관’에 대비하여‘새로운 과학관’이라 부

르고 있다”(178);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과학의 성격을 어떤 것으로

보느냐 하는 것과 또 어떤 기독교적 입장을 취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각기 달라진

다.”(189)

4) 오형국, 『칼뱅의 신학과인문주의』(서울: 한국학술정보, 2006), 265ff.

5) 김균진·이정배·현요한·김영선,“한국조직신학논총9집을 내며: 과학과 신학의 대

화,”한국조직신학회(엮음), 「과학과 신학의 대화: 한국조직신학논총9집」(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2003), 3.

6) 최윤배(책임편집), 『21세기 신학의학문성』(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3).

7)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편),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서울: 북코리아, 2007); 장신근,

『공공실천신학과세계화시대의기독교교육』(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7).

8) 이 사상은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서“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자신을 계

시하신다”는 사상이다.

9) 안명준, 조덕영, 천사무엘 제 씨의 논문들과[안명준·조덕영,“칼빈의 과학관,”한국복음

주의조직신학회(편), 「조직신학연구」제4호( 2 0 0 4년 봄·여름호. 서울: 살림출판사,

2004, 193-208; 천사무엘.『성경과 과학의 대화』. 대전: 한남대학교출판부, 2008; 천사무

엘, “칼빈의 성서해석과 자연과학,”한국대학선교학회(편), 「대학과 선교」제11 집

(2006), 241-265.] 갬블(R. C. Gamble)이 편집한11편의논문들이[Richard C. Gamble

Page 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러므로 루터주의자들이 지동설을 정죄하고 있는 동안, 개신교회의

다른 지류들은(개혁파-필자 주) 뒤에 남아 있지 않았다. 깔뱅은 그

의『창세기 주석』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던

모든 사람들을 저주함으로써 앞장 섰다. 깔뱅은 시편93편 1절을 통

상적으로 참고하여 문제를 결론짓고,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누가

감히코페르니쿠스의권위를 성령의권위위에두려한단말인가?”11)

화이트의 깔뱅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를 반(反) 기독교적이었던 러셀

(B. Russel)은 그의『서양철학사』에 받아들여 깔뱅을 공격하는 데 사용

하였으며, 토마스 쿤(T. S. Kuhn)조차도 이 구절을 근거로 깔뱅을 공격

하는데 사용하였다.12)

그러나 게리쉬(B. A. Gerrish)는“(깔뱅의-필자 주)”『창세기 주석』

이나 시편93편에 대한 주해에서도 깔뱅의 질문이 발견될 수 없기 때

문에, 그렇다면 화이트 자신은 어디서 깔뱅의 질문을 발견하느냐?”고

역으로 질문한다.13) 게리쉬가 화이트의 깔뱅에 대한 잘못된 인용을 올

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깔뱅의『시편 주석』의 시편93편 1절에 대한 주

석에서 화이트가 인용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은 물론 지동설에 대한

깔뱅의 비판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다만천동설에 입각하여깔뱅이 하

나님의섭리의 역사를 감탄조로묘사하고있는내용이 발견될 뿐이다.

선지자가 여기서 가르치는 말씀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로부터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무시하시거나 포기하시

I I. 깔뱅이“반과학적(反科學的)”이라는오해

16세기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중세 천문학에 기초한 천동설

(天動說)을 지지했던 깔뱅은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

1473-1543)가 주장한 지동설(地動說)을 수용하지 않고, 천동설에 입각

하여성서도 해석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여호수아의 기도(祈禱) 시(時) 태양이 이틀 동안 여

전히 정지했다는 사실과(수 10:13), 히스기아 왕을 위하여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갔다는 사실을(왕하20:11) 읽을 때, 이 몇

가지기적들을 통하여 태양은 자연의 맹목적인본능에 의하여 매일

뜨고, 지는것이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부성적(父性的) 은혜

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태양

의 궤도(軌道)를 통치하신다는사실을 하나님께서증언하셨다.10)

일부 학자들은 천동설 지지자인 깔뱅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

쿠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그와 그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함으로

써 반과학적인 태도를 보여, 과학의 발전에 역행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코넬대학교의 초대 총장이었던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신

학과싸운과학의 전쟁역사』(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에서 깔뱅은 천동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저주하면서, 그들

은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령의 권위보다 우위에 둔다고 그들을 비

판했다는것이다.

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11

(ed.) Calvin and Science. New York & London: Carland Publishing, INC., 1992.]

본 논문작성을위하여 중요한제2차 자료가되었다.

10) John Calvin, 『기독교강요』(1559), I x v i 2, 참고, 칼빈은『여호수아서주석』에서여호

수아서 10:13-14절을 주석하는 가운데, 히스기아 왕 때의 기적을(사 38:5-8) 열거하

면서, 이 사건들의역사적확실성을거듭강조하고있다.

11) Andrew Dickson White,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New

York: Free Press, 1965), 123.

12) 안명준, 조덕영, “칼빈의과학관,”196.

13) B. A. Gerrish, “The Reformation and the Rise of Modern Science: Luther, Calvin

and Copernicus,” G. C. Gamble(ed.), Calvin and Science (New York & London:

Carland Publishing, INC., 1992), 7.

Page 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우리는 아주 완전히 미쳐 날뛰는 어떤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은 종교문제에서뿐만아니라 모든면에서 그들의 기괴한 본성

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태양이 움직이지 않고, 분발

하여 빙빙 도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미친 자들은 바로 자연

의 질서를 바꾸려 하고,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켜서 그들의 감각을

무디게 하려는 자들입니다.17)

스토페르의 위와 같은 주장에 반대하여, 카이저(C. B. Kaiser)는 깔

뱅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카스텔리오(Castellio)라고 주장하면서, 깔

뱅은 코페르니쿠스의“태양중심적인”(heliocentric) 사상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반지구역학적인”(antigeodynamic) 사상을 비판한 것이라고그

이유를 밝힌다.“깔뱅의 반지구역학적인 언급은 반 카스텔레오적(또는

반 벨리안적)이지만, 반 코페르니쿠스적인것은아니다.”18)

호이까스(R. Hooykaas)에 의하면, 깔뱅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며, 깔뱅이 말했다고 하는‘인용구’는 모두

가공의 인물을 가리킨다는 것이다.19) 또한스토페르의 주장에 반대하여,

호이까스는 깔뱅이 코페르니쿠스의이론을 반대한 것은분명하지만, 깔

뱅이 지동설을 반대한 이유는 그의 이론이 성서의 특별계시에 반대되

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질서의 일반계시에상충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논쟁이 되는구절에서 지동설이 깔뱅에 의해정죄된 이유

는 그것이 성서(‘특별계시’)와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사람들에게주어졌던감각들과이성(理性)의 증언안에서 주어

진 것으로서의‘일반 계시’에 반대되는것으로 간주되기때문이다.20)

지 않으실 것을 증명한다. 간단하게 세계를 살펴보는 것 자체만으

로도 하나님의 섭리를 입증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비록 하늘의 구

조는 거대하고, 그 회전 속도는 인식될 수 없으나, 하늘은 매일 회

전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움직임의 조화안에서 어떤 충격도, 다시

말하면 어떤 방해(교란, 혼란)도 경험하지 않는다. 매 자전(自轉)의

궤도(軌道)가 변할지라도, 태양은 동일한 점으로 매년 돌아온다. 행

성들은 떠돌아다닐지라도, 각자 자신들의 위치들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지구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떠받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

구가공중에 매달려있을수 있겠는가?14)

화이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는 로젠(R. Rogen)은 다음

과 같이수사학적으로강조한 결론까지내렸다.“그렇다면, 우리의 연구

끝에 우리가 질문할 수 있다면, 코페르니쿠스에대한 깔뱅의 태도는 무

엇이었는가? 깔뱅은 코페르니쿠스에대하여 결코들어보지 못했고, 그

에 대한어떤태도도가지지 않았다.”15)

리샤르 스토페르(Richard Stauffer)는16)“깔뱅과 코페르니쿠스”라는

연구에서 깔뱅은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반박했다고 주장했

다. 여기에 대한 증거는 고린도전서10-11장에 대한 깔뱅의 여덟 번째

설교이다. 여기서 깔뱅은 고린도전서10:19-24절을 주석하면서 우상을

숭배하지말 것을회중들에게강력하게호소한다.

모든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획책하고 자연의 질서를 곡해하는, 악

의에 찬 모순의 영을 가진, 이러한 미친 사람들처럼 되지 맙시다.

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13

14) John Calvin, 『시편주석』, 시 93:1.

1 5 ) Edward Rosen, “Calvin’s Attitude Toward Copernicus,” G. C. Gamble(ed.),

Calvin and Science, 27.

16) 스토페르는 종교개혁과 깔뱅 연구에 탁월한 프랑스 역사신학자로서그의 책이 한글

로 번역된 바 있다, 참고, Richard Stauffer, La Reforme(1517-1564), 박건택 옮김,

『종교개혁』(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17) 천사무엘, 『성경과과학의대화』(서울: 도서출판글누리, 2008), 114-116.

1 8 ) Christopher B. Kaiser, “Calvin, Copernicus, and Castellio,” G. C. Gamble(ed.),

Calvin and Science, 71.

1 9 ) R. Hooykaas, “Thomas Digges’ Puritanism,” Archives Internationale d’Histoire

des Sciences 8(1955), 151.

Page 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던 것은 충분히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23) 천동설을 받아들이고, 지동설

을 반대한16세기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 가운데 속했던 깔뱅의 과학

지식의 한계와 오류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그가반

과학적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깔뱅

은 소위 중세의 천문학과 과학에 근거하여 지동설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깔뱅이 지동설과,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비

판한 사실로부터 깔뱅은“반과학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깔뱅에 대한

오해일 것이다.“그는 자연과학의 활동과 업적을 중요시하고 그 필요성

을 잘 알고 있었으나 동시대에 출현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천체과

학을따르지는 않았다.”24)

I I I. 깔뱅의과학이해에대한신학적근거

1. 과학의계시론적근거: 자연의책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역사(歷史)에 대하여 개괄한 신재식은다음과

같은결론을 내렸다.

이상의 간략한 언급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전쟁’의 이미지

는 지난 수백 년간의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상호작용의 약사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

다.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를‘갈등’이나‘전쟁’의 이미지로 설

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적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백 년간 서

구 문화 속에서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지배적인

견해가운데하나가‘두권의책’(two books)이었다.25)

깔뱅이“반과학적”이라는 오해 문제는 끊임없이 깔뱅과 코페르니쿠

스의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현재까지 연구 결과로는 깔뱅

의 작품에서 천동설을 수용한 깔뱅이 지동설의 내용을 비판할 때조차

도, 코페르니쿠스라는이름을 직접사용하지않는다는사실이다.

깔뱅이 코페르니쿠스를 알았는지의여부와, 깔뱅이 익명적으로 코페

르니쿠스를 비판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 증명은 또 다른 과

제로 남기더라도,21) 여기에 대한 정확한 규정 자체는 과학에 대한 깔뱅

의 입장을 규명하는 데는결정적이지못할것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과

학 지식의 관점에서깔뱅이 지지한 천동설은틀리지만, 16세기당시깔

뱅이 지동설을 비판한 것은 그가 천문학을 포함한 과학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과학 이론들 중에서 자연질서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과

학 이론을 비판한 셈이된다.

천동설을 과학적 사실로 믿고 있던 깔뱅이 그의 당시 일반화되지

않았던 지동설을 수용하지 않고, 그것을 반대한 사실은 그가 반과학적

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가 당대의 과학 기

준에서 볼 때, 과학적이었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매우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졌고, 1600년까지

만 해도그의이론을 수용하는사람들은거의없었기때문이다.22)

깔뱅은 자연과학의 발전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새로 발견되어 전문

과학자들로서의 천문학자들에게도일반적으로 검증되어 수용되지 않았

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전문 과학자가 아닌 그가 수용하지 않았

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15

20) R. Hooykaas, “Calvin and Copernicus,” G. C. Gamble(ed.), Calvin and Science,

43.

21) Christopher B. Kaiser, “Calvin’s Understanding of Aristotelian Natural Philo-

sophy: Its Extent and Possible Origins,” G. C. Gamble(ed.), Calvin and Science,

144의 각주4:“깔뱅이코페르니쿠스의작품에 관심을갖고있었는지 심지어그것을

알고있었는지에대한증거를우리는 여전히 갖고있지않다.”

22) R. J. Blackwell, Galilleo, Bellarmine, and the Bible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1), 23.

23) 천사무엘, 『성경과과학의대화』, 117-118.

24) 이오갑, 『칼뱅의신과세계』, 239.

Page 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모든 것은 오직 세계의 가시적 형태에 관한 것뿐이다. 천문학과 다

른 어려운 예술(기술, 학문)을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가게 하라. 여기서 성령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를

원하시며,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가 거짓되게 그리고 쓸데없이 조

상(彫像)들과 회화(繪畵)들에게 경의(敬意)를 표하면서 선포하는

모든 것은 참으로 창조의 역사(歷史)에 적용시킬 수 있다. 다시 말

하면 그것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책이다. 그러므로 그가 관련시

키는 모든 것들은 그가 우리 앞에 놓아두는 저 극장의 장식물로서

사용된다.29)

천체(天體)를 연구하는 과학 또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천문학과 성서

에 대한 구별은 깔뱅의 창세기1장 16절 주석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

난다. 여기서 깔뱅은“하나님의 경탄할만한 지혜”를 포함하고 있는 천

문학의 유용성과천문학자의 영예를 말한다.

여기에 (모세의 말과 천문학자들의 말 사이에-필자 주) 차이가 있

다. 모세는 교육 받지 아니하고, 보통 지각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보통사람들이이해할 수 있는평범한문체로 사물들을기록하였지

만, 천문학자들은 인간 정신의 총명(聰明)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큰 수고를 가지고 연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

구는 책망 받아서도 안 되고, 이 과학은 저주받아서도 안 된다. 왜

냐하면 어떤미친사람들은자신들에게알려지지 않은 것은무엇이

든지 대담하게 거부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천문학은 즐거울 뿐만

아니라, 천문학이 알려지는 것은 매우 유용하기도 하다. 이런 학문

이 하나님의 경탄할만한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인되어

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관하여 유익한 수고를 하는 사

람들은 재능이 있는 사람들로서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가

그리고 신재식은 두 권의 책의 모델은 기독교와 과학의 상보적인

관계모델을 의미한다고주장했다.

이것은 중세시대에 하나님의 계시가 두 권의책,‘성서라는 책’(the

book of Bible)과‘자연이라는책’(the book of nature)에 의해드러

난다는 생각이다. 즉 신학과 과학은 모두 신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

기할 수 있는 것으로 서로 배척하거나 전쟁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이었음을의미한다.26)

깔뱅의 과학 이해를 설명하기 위해“두 권의책”이라는 모델을 사용

하여 깔뱅의 계시론을 논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27) 주지하다시피

중세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는 두 권의 책(two books), 즉 자연이라는

책과 성서라는 책에 의해읽힐 수 있고, 과학과 신학 모두는 신적인 것

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으며,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모두는 우리에

게 신에대한방향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지시한다.28)

깔뱅은 창세기1장 6절의‘궁창’에 대하여 주석할 때, 과학(천문학)의

책으로서의 자연과 이것과 구별되는 책으로서의 성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이것은 분명한 원리인데, 즉 여기서 취급되는

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 과학이해 17

25) 신재식,“갈등에서 조화로: 기독교와 과학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하나의 시론적 고

찰,”호남신학대학교출판부(편), 「신학이해」제17집( 1 9 9 9)(광주: 호남신학대학교출

판국, 1999), 378, 참고, 373-401.

26) 앞의책, 378-379의 각주 5.

27) 깔뱅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는 용어의 제한성을 위해 다음을

참고하시오, 이오갑, 『칼뱅의신과세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89-90.

28) 신재식,“갈등에서 조화로: 기독교와 과학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하나의 시론적 고

찰,”3 9 0의 각주 2 2를 참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두 언어 이론(the two-l a n g u a g e

theory)이나 두 세계(two worlds) 이론은 두 개의 다른 방향, 즉 신과 세계를 각각

지시한다. 29) John Calvin, 『창세기주석』, 창1:6.

Page 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게 한다. 깔뱅이 이해한 자연계시와 우리의 자연인식은 이 같은한

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계시는 분명히 하나님의 인식 방

법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깔뱅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

는 방법두 가지, 즉 자연과 성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말하고 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시키시기 위해

오실 때까지, 인류의 이 같은 타락으로 지금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

지나구원의창시자로 또는 어떤면에서 은혜로우신분으로 경험하

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사실이 있다-필자 주) 하

나는 우리의 창조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탱하

시며, 그의 섭리로 우리를 통치하시며, 그의 선으로 우리를 양육하

시며, 모든종류의 복들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다

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화목(해)의 은혜를 포

옹하는 것. 먼저 주님께서 세계의 창조 속에서(in mundi opificio)

그리고 성서의 일반적인 교리(교훈) 속에서 자신이 창조주이심을

보여주시며, 그 다음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자신을

주님으로 보여주신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이중지식이 생기

는 바, 우리는 지금 첫 번째 관점에 관하여 논의하고, 두 번째 관점

은 그것에대한적절한장소(위치)에서취급될 것이다.32)

깔뱅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고,

시현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영광은 하나님의 모

든 피조세계에 지금도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행복에 도달하는 데로부터 제외되지 않도록, 하

나님께서 우리가 이미 언급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그 종교의 씨앗

(religionis semen)을 뿌리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셨고, 전

시간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 같은 종류의 훈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30)

깔뱅은 창세기2장 3절의안식일 제정에 대한주석에서, 안식일 제정

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장엄한 극장”, 즉창조세계 안에서 그가어

떤 분이심을 관조(觀照)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연 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우리들에게 유익을 가져오는 차원을 훨씬 넘어 우리의 하나님 인식과

지식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할 수 있게 한다. 깔뱅에 의하면, 하

나님께서 우리가“장엄한 극장”안에서 이 일을 하도록 명령하셨기에,

우리는 이것을 훈련해야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을 지정하실 때 동일한 목적을 가지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사용을 위하여 나머지 날들로부터

선택된 하루를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축복은 엄숙한

성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엄숙한 성별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일곱째 날에 사람들의 묵상들과 일들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전(全) 생애 동안 수행해야할 고유한 일이다. 일생의

고유한 일을 수행할 때, 우리는 하늘과 땅의 이 장엄한 극장 안에

서 하나님의 무한(無限)한 선, 정의(공의), 능력, 그리고 지혜를 관조

하는데 스스로훈련해야 한다.31)

깔뱅에 의하면, 비록 자연 속에 지금도 객관적으로 나타나 있는 불

충분한 자연계시나 불충분한 자연계시가 나타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불충분한 자연인식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통하여 구속주 하

나님 지식을 얻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고, 다만 우리의 죄를 핑계치 못

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19

30) 앞의책, 창 1:16.

31) 앞의책, 창 2:3. 32) John Calvin, 『기독교강요』(1559), I i i 1.

Page 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 과학의성령론적인근거

조직신학적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앞에서 언급한 과학의 계시론적

근거와, 지금논의하고자하는과학의 성령론적근거는 계시론이라는한

범주에 넣을 수 있고, 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둘을 따

로 논의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두 가지 책’이라는 모델을

사용하기위하여 필자가 임의적으로구별해 보았다.

깔뱅은 과학을 성령론적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 또는 성령의 은사(恩賜)를

주심으로써 과학이 가능하다.35) 깔뱅은 성령을 하나님의선물의 기초와

원천과 저자인 동시에 진리의 원천으로 이해한다.“우리의 칭의는 성령

의 사역이다. 능력과 성화와 진리와 은혜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이 성령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선물(omne donorum

genus)은 한 성령으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이다.…왜냐하면 이것은 성

령을 기초 또는 원천과 저자로 만들기 때문이다.”36)“따라서 바울이 여

기서는 사람들에게 부인하는 그 무엇을 그가 기도하면서 다른 곳에서

는 오직 하나님께만 그 원인을 돌린다.‘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

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구하노라!’(엡 1:17). 지금 당신

은 모든 지혜와 계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듣는다.”37) 깔뱅이 이해한

성령의 선물로서의 과학은 소위‘자연은혜’(natural grace) 또는‘일반

은혜’(common grace) 차원에서이해될 수 있을것이다.

창세기4장 20절에대한 주석에서 깔뱅은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도

탁월하게 나타나는 제반 예술, 기술, 학문 등은 성령의 선물임을 강조

(全) 세계의 창조 안에(in toto mundi opificio) 자신을 시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영광이 하늘보다 더욱 밝게 빛

나기 때문에, 하늘은 가끔 하나님의 궁전으로 불린다(시 104:2). 그

러나무엇보다도먼저 당신이 눈을 펼치는 곳에는 어디든지 우주의

어떤 곳에도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을 발견할 수 없는 곳이

없을것이다.33)

그러므로 전문 자연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전문 과학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교육받지 못한 무지하고도 평범한 사람도 하늘과 땅 어디서

든지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깔뱅의 계시론적 입장에서 볼

때, 과학의 전공 여부와 기독교 신앙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은 전문

과학자 또는아마추어 과학자인 셈이다. 하물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평

범한 기독교인은 물론 전문 기독교 과학자나 전문 신학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과학을 탐구하고, 과학에 관심을 갖

고, 과학을 활용하여 하나님의“자연의 책”을 올바르게 읽고 이해하는

데 게을러서는안 될 것이다.

하늘과땅에하나님의놀라운 지혜를 선포하는수많은 증거들이있

다. 천문학(astrologia), 의학(medicina) 그리고 모든 자연과학(tota

physica scientia)을 통해면밀하게 탐구해야 알 수 있는 심오한 증

거들뿐만 아니라,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무식한 사람들도 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증거들이 무수히 많아 눈을 뜰 때마다

그것들을증거하지않을수 없다.34)

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21

33) 앞의책, I v 1.

34) 앞의책, I v 2.

35) W. Standford Reid, “Natural Science in Sixteenth-Centiry Calvinistic Thought,”

G. C. Gamble(ed.), Calvin and Science, 186-187.

36) John Calvin, 『기독교강요』(1559), I x i i i 14.

3 7 ) 앞의 책, I I i i 21, 참고, “Iam audis, omnem sapientiam et revelationem esse Dei

donum.”

Page 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깔뱅은 기독교 관련 여부와 관계없이 각

사람과 나라와 민족에게 주어진 이같은 성령의 선물들 중에 하나인 하

프라는 악기와 음악을 예를 들어, 이것을 하나님 경외와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사악한 유혹이나 어리석은 쾌락을 통한

탈선의행위를 정죄한다.

지금 하프와 음악의 유사한 악기들의 발명은 우리의 필요성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되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하물며 더욱 더 그 자체로서는 정죄 받아서

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인간 사회의 공익

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즐거움은 참으로 정죄받아야 한다. 그러나

음악의 성격은 종교의 직무들을 위해 채택될 수 있고, 인간들을 유

한다.

모세는 지금 어떤 선한 것들이 가인의 가계(家系)로부터 발생했던

악들과 뒤섞여졌다는사실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예술과, 생활의 일

상적 용도와 편의에 사용되는 다른 것들은 결코 무시되지 않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며, 칭찬할만한 능력이기 때문이다.…현재의 삶

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시대에 대한 경험들이 신적 광선들이 얼마

나 폭넓게 믿지 않는 나라들(민족들) 위에 비추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듯이, 현재도 우리는 영(성령)의 탁월한 선물들이 전

(全) 인류를 통해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과

과학은 이교도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졌다. 우리가 천문학과 철학의

다른 분야들과 의학과 시민정부의 질서를 이교도들로부터 받아들

였다는사실을 우리는 참으로인정하지않을수 없다.38)

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23

38) John Calvin, 『창세기 주석』, 창 4:20: “모세는 지금 어떤 선한 것들이 가인의 가계

(家系)로부터 발생했던 악들과 뒤섞여졌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예술(arts)

과생활의 일상적 용도와 편의에 사용되는다른것들은 결코 무시되지않아야 할 하

나님의 선물(a gift)이며, 칭찬할만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순전성(interity, 완전한 상

태)으로부터 가장 깊숙하게 타락했던 이 종족이 희귀한 재능들의 차원에서 아담 후

손 중에 다른 종족들보다 훨씬 탁월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예술이 가인의 가계 안에서 발명되어 왔던 것처럼, 모세는 예술과 관련하여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가인이 주님에 의해서 그

렇게 저주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가인의 후손 가운데 어떤탁월한 선

물들(gifts)을 뿌리기 원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모세의 진술 목적이었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의 비상한 재주가 활동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담의 아들

들 가운데 예술(arts)의 발명과 장려를실천했던 근면하고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있

었을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선한 것이 결핍되고, 불모지가

될 운명에 처했던 그 종족에게 남아 있는하나님의 복을 분명하게 축하한다. 가인의

아들들은 중생의 영은 빼앗겼을지라도, 그러나 야비하지 않는 일종의 선물들(gifts)

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자. 현재의 삶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시대에 대한

경험들이 신적 광선들이 얼마나 폭넓게 믿지 않는 나라들(nations, 민족들) 위에 비

추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듯이, 현재도 우리는 영(성령)의 탁월한 선물들

(gifts)이 전(全) 인류를 통해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liberal

arts)과 과학(science)은 이교도로부터우리에게 전해졌다. 우리가천문학과 철학의

다른 분야들과 의학과 시민정부의 질서를 이교도들로부터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우

리는참으로 인정하지않을수 없다. 그러므로하나님께서탁월한호의(은혜)들로이

교도들에게 관대할 정도로 풍성하게 채우심으로써 그들이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신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에게부여

하신 하나님의 호의의 풍성함을 우리가 찬탄(讚嘆)하는 한편,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

신의 선택된 자들을 자신에게로 성화시키는 중생의 은혜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돌

리자. 지금 하프와 음악의 유사한 악기들의 발명은 우리의 필요성보다는 차라리 우

리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되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하

물며더욱 더 그 자체로서는 정죄 받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

외와 인간사회의 공익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즐거움은 참으로 정죄 받아야 한다. 그

러나음악의 성격은 종교의 직무들을 위해 채택될 수 있고, 인간들을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그런 것이다. 만약그것이 사악한 유혹과 어리석은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때

만, 그런 것이다. 사악한 유혹과 어리석은 쾌락을 통해 그것은 사람들을 더 좋은 일

들로부터 유혹하여 쓸데없는 일에 종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프의 발

명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않는 다면, 목수의 기술(art)의 유용성이 어떻게 그렇게도

멀리 그리고 널리 잘 알려졌겠는가? 마지막으로 내 의견에 모세는 그 종족이 다양

하고도 탁월한 재능들로 번창했다는 사실을 가르치려 했다. 이 재능들은 변명의 여

지가 없게 만들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가장 탁월한 증거들로서 증명하는 것이

다.‘장막에 거하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주어졌는데, 그는그 후에 다

른 사람들이모방했던그 이기(利器)의 발명자였다.”

Page 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다음에는학예와 공예(artes tum liberales, tum manuariae)가 이어

진다. 우리 모두는 어떤 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배우

는데, 인간적 명민함의 능력도 나타난다. 배우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들이 적절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기술에 분명한 재능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

게 공통된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충분하다.”42)

깔뱅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도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를 불문하고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하

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생각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유익하게 활용할

것을우리에게 촉구한다.“한편 이러한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

로 있으므로각 사람은 마땅히 거기서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

아야할 것이다. 그런 능력이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차별 없이 베풀어져 있으니 이것도 자연 은사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옳을것이다.”43)

우리는 세속(비기독교-필자 주) 저술가들에게서 이런 문제들을 만

날 때마다 그들안에서 비치는 진리의 환한 빛을 보면서, 비록타락

하여 그 온전함에서 부패해 있는 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사람의 지

성이 과연 하나님의 탁월한 은사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는 것

을 배워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령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하고, 또 만약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면, 진리가 나타난 곳이어디든지 간에 우리는 그 진리 자체를 거부

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영의 선물들을 하찮게 여김으

로써우리는 성령자신을 경멸하고 비난하게되기때문이다.44)

익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악한 유혹과 어

리석은 쾌락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사악한 유혹

과 어리석은 쾌락을 통해 그것은 사람들을 더 좋은 일들로부터 유

혹하여 쓸데없는 일에 종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프

의 발명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목수의 기술의 유용성이

어떻게그렇게도멀리그리고널리잘 알려졌겠는가?39)

성령의 선물로서의 과학에 대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깔뱅은

『기독교 강요』(1559) 제2권 제2장 12절부터17절(I I i i 12-17)까지 제

반 문예, 기술, 학문 등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이성(ratio) 또는 지성

(intellectum, intelligentia)에 대하여 집중적으로논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자연은사’(naturalia dona )와‘초자연은사’

(supernaturalia dona)를 구별하여, 전자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 가운데

서도 훼손되었지만,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고, 후자는 완전히 상실되

었다고 주장했다. 깔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위의견해를 기꺼이 받아들

여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자연은사는 부패된 가운데서도 여전히 남

아 있다고주장한다.“그러므로 선과악을구별하고, 이해하고판단하는

이성(ratio)은 자연은사(naturale donum)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지

워질 수 없었고, 부분적으로 약해지고, 부분적으로 부패되어, 기형이 된

잔재(deformes ruinae)가 보인다.”40) 그러므로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이

성이나 지성을 사용하여 소위‘땅의 일’(res terrenarum )에 관한한, 탁

월성을 여전히 보여주지만, 소위‘하늘의 일’(res caelestes)에 대하여는

무능하다.“그러므로 정치(politia), 경제(oeconomia), 모든 기계적인 기

술들(artes omnes mechanicae), 그리고 문예들(disciplinaeque lib-

erales)은 땅의 일에 속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우리

가 우리의 삶을 그것에 따르도록 하는 규칙은 하늘의 일에 속한다.”41)

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25

39) John Calvin, 『창세기주석』, 창 4:20.

40) John Calvin, 『기독교강요』(1559), I Ii i 12.

41) 앞의책, I Ii i 13.

42) 앞의책, I Ii i 14.

43) 앞의책, I Ii i 14.

44) 앞의책, I i i 15.

Page 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나 전문 기독교 과학자와

신학자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과학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유익하게

적극적으로활용해야할 것이다.

성막을 짓는데 필요했던브사렐과 오홀리압의총명과 지식은 하나

님의성령께서 그들에게 부어주신 것이었다(출 31:2-11; 35:30-35)

그렇다면 인간 생활에서 가장 탁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이 하

나님의 영을통해서 우리에게전달된다고말하는 것도 전혀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는 불경건한 자들

이 대체 하나님의 영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식으로 질문하는 것

이 과연 타당하겠는가? 하나님의 영이 오직 신자들 속에만 거한다

는 진술(롬 8:9)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시는 성화의 영(de Spiritus sanctificationis, 고전3:16)을 지칭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동일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시고, 움직이시고, 또한 생기

를 불어넣으시며, 또한 자신의 창조의 법칙을 따라 각 종류에게 부

여하신 그 성격에 따라 그렇게 유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

리가 물리학, 변증학, 수학과 그 밖의 학문에서 불경건한 자들의 업

적과 활동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그런 도움을 받아들

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런 학문들에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

신 선물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의 나태함에 대하여 공의의 형벌을

받아마땅할것이다.48)

우리는 본 장의 논의로부터 깔뱅의 과학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계

시론적으로그리고 성령론적으로규정할 수 있을것이다.

깔뱅은 고대 입법자들의 법학, 철학자들의 자연이론, 의학, 수학, 제

반 학문은 미친 사람들의 허튼 소리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주장

하면서 제반학문들의가치를 경탄조로인정하고 있다.

아니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옛 사람들의 저작을 읽을 때마다 우리

는 깊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것들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인정하

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하여 경탄해 마지않는 것이다.

칭찬할 만하고 고귀한 것들을 바라보며 경탄해마지 않는데, 그것들

이 과연하나님께로부터온다는 것을인정하지않을수 있겠는가?45)

깔뱅은 우리가 받은 은사 자체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이 은

사의 목적에 맞게 인류의 공익을 위하여 사용할 것을 우리에게 권면한

다.

한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전(全) 인류의 공익을 위하여 분

배하시는 하나님의 영(divini Spiritus)의 탁월한 이 은혜들(bona)

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물리학(physi-

cis), 변증학(dialecticis), 수학(mathematicis)과 그 밖의 학문에서

불경건한 자들의 업적과 활동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그런도움을 받아들여사용해야할것이다.46)

깔뱅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공익을 추구하는 과학은 기독

교신앙 여부에 관계없이 성령께서 주시는 자연 은사에 속한다. 이것은

‘성화(성결)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구원과는 직결되는 것은 아니

지만,47) 우리가 이것을 무시할 경우, 이것을 가능케 하신 성령을 모독하

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27

45) 앞의책, I i i 15.

46) 앞의책, I i i 16.

47) 깔뱅이 이해한 성령의 두 가지 사역에 대하여 졸저를 참고하시오: 최윤배,『성령론

입문』(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0), 95. 48) John Calvin, 『기독교강요』(1559), I i i 16.

Page 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술하는 목적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이것 때문에 모세를 비난한

사람들을 반박한다. 곧 모세는 철학적 관점이나 별들의 관점에서가 아

니라, 우리를 위한관점에서,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우리에게대한적응

의 관점에서 성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달 스스로가 발광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현대과학적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지만, 그 당

시의 천문학 상식, 즉 과학상식을 이용하여 깔뱅은 태양과 비교하여

‘보다 작은빛’인 달에대하여 설명하고있다.

이것(창세기1장 15절인 이 문장-필자 주)은 내가 이미 앞에서 언

급했던 것을 다시 잘 반복할 수 있게 된다. 즉, 이것은 여기서 태양

이 하늘에서 얼마나 크며, 달이 얼마나 큰지 또는 얼마나 작은지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큰 빛이

우리에게 오는지에 대하여 논의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세는 여기서

우리가 향유해야 할 하나님의선물들에대한지식이미끄러지지않

도록 우리의 지각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의

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늘 위로 높이 치솟아 올라가는 것

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구 위에 불붙여 주신

이 빛을 응시하기 위하여 우리의 눈을 열기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내가 앞에서 이미 관찰했듯이) 보다 더 정확성을 가

지고 모세가말하지 않았다고책망하는이 사람들의부정직함은충

분하게 반박되었다. 왜냐하면 모세는 신학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별들에게보다는 차라리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달이

태양으로부터(빛을-필자 주) 빌려오지 않는다면, 참으로 모세는 달

이 지구를 비추는 충분한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무지하

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는 달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자라는 사실

을 우리 모두가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으

로 충분해 보였다. 천문학자들의 주장처럼 나는 달은 불투명한 물

체임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한편, 나는 달이 어두운 물체라는 사실

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첫째, 달은 불의 요소 위에 위치해야 하기

I V. 성서해석에서깔뱅은과학을어떻게취급했는가?

깔뱅의 성서해석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목적

이 아니다.49) 깔뱅이 사용하고 있는성서해석 방법들 중에하나인‘하나

님의 적응 이론’을 선택하여,50) 자연과학, 특히 천문학과 관련하여 실례

를 제시함으로써 깔뱅이 성서해석에서 과학을 취급하는 태도를 보여

주고자 한다.51)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처럼 많은깔뱅 연구가들은 깔뱅은 성

서해석에서 하나님의 적응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관련하여 맥그라스는 깔뱅은 과학 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자연의

과학적 탐구에 긍정적 공헌을 했고, 성서해석을 위하여 하나님의 적응

사상을 이용했다고높이평가했다.52)

『창세기주석』에서깔뱅이 수행하는 창세기1장 15절과16절에대한

주석에서 과학으로서의천문학에 대한 깔뱅의 지식과, 성서해석에서천

문학에 대한지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발견된다.

깔뱅은 창세기1장 15절 주석에서 성서의 기술 목적은 천문학을 기

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29

49) 깔뱅의 성서해석학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를 위하여 다음을 참고하시오: Myung Jun

Ahn, “Brevitas et Facilitas: A Study of a Vital Aspect in the Theological

Hermeneutics of John Calvin,”(Ph.D. Diss. University van Pretoria, 1998); 김문경,

“칼뱅의 고린도전서15장 주해에 관한 소고: 칼뱅의 성서해석 방법과 부활이해,”장

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편), 『개혁교회의부흥운동과성서해석』(서울: 장로회신학대학

교출판부, 2009), 197-216; 안명준, 『칼빈의 성서해석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천사무엘,『성경과 과학의 대화』, 71-104; 「요한칼빈탄생 500주년기념 학술

심포지엄‘칼빈과 한국교회’제2분과」에 실린 고광필, 이환봉, 한성진, 정기철, 김정

훈, 유상섭, 신현우, 조병수제 씨의논문들(2009. 6. 22, 서울교회).

50) 계시론과 관련하여 깔뱅의‘적응’개념에 대한연구를 위해 다음을 참고하시오, 이오

갑, 『칼뱅의신과세계』, 93-96, 225.

51) 성서해석을 중심한 깔뱅의 과학에 대한 태도는 또 하나의 전문적인 연구를 요하지

만, 우리는다만몇 가지실례만을보여주는 것에만족하기로한다.

52) Alister E. McGrath, Science & Religion(Oxford: Blackwell Pub., 1999), 10.

Page 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대담하게 거

부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천문학은 즐거울 뿐만 아니라, 천문학이

알려지는 것은 매우 유용하기도 하다. 이런 학문이 하나님의 경탄

할만한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인되어서는 안 된다. 그

러므로 이 주제에 관하여 유익한 수고를 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있

는 사람들로서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가 시간과 능력이 있

는 사람들은이 같은종류의 훈련을 무시해서는안 된다.54)

깔뱅은 시편136편 7절부터9절까지를 주석하면서 성령께서는 시편

기록에서 천문학을 기술하는 데 목적을 두시지 않고, 배우지 못한 평범

한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아이들처럼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달

이 토성보다 크다는 표현은 천문학적으로는 틀린 것이지만, 우리의 시

각으로 볼 때는옳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깔뱅은 하나님의 적응사상을

활용하여 과학으로서의 천문학과 성서를 구별하면서도 천문학을 성서

주석에서대립관계에 두지않고, 활용하기도한다.

모세는 태양과 달을 두 큰 빛들이라고 부른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동일한 어법을 차용(借用)한다. 말하자면별들에관해서 직접적으로

부언된 것은 다른 별들에게는 부속적이다. 다른 행성들이 달보다

더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가시적인 효과 때문에 달은 두 번

째로 기술되었다. 성령께서 천문학을 가르칠 의도를 갖지 않으신다.

제안하고 있는 교훈속에서 가장단순하고교육받지못한사람들에

게 공통적이게 할 의도로 성령께서 모세와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게 하셨다. 그 목적은 어떤 사람도 불명료하

다는 구실 아래 자신을 숨기기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왜냐하

면 심오하거나 난해한 어떤 것이 자신들에게 통고(通告)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해를 위한무능력을아주쉽사리 변명하는것을우리가

때문에, 달은 반드시 불타는 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달은 발

광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달은 우리에게 침투하기 위하여

충분한 빛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달은 모자라는 것을 태양으

로부터 빌려온다. 그래서 모세는 비교급으로달을‘보다 작은빛’이

라고부른다.53)

그의『창세기 주석』1장 16절에서 깔뱅은 성서 기술 방법과 천문학

기술 방법의 차이점을 하나님의 적응 이론을 통해서 지적하면서도, 오

늘날 현대 천문학의 관점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정확한 천문학 지식

을 가지고 태양계에 속한 토성(土星)을 설명한다. 그리고 깔뱅은 과학

으로서의 천문학은“하나님의 경탄할만한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고 그

가치를 높이평가하고, 아울러 천문학자들에대한존경심도표현한다.

이 말들안에서 보일수 있는 것처럼 모세는 여기서 철학자로서난

해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고 나는 말했다. 첫째, 모세는 행성들과

별들의 위치를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위치시키지만, 천문학자들은

천구(天球)들을 구별함과 동시에 고정된 별들은 창공 안에서 자신

들의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모세는 두 개의 큰

발광체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천문학자들은 결정적인 이유를 가

지고 먼 거리 때문에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작게 보이는 토성(土星)

이라는별은달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에 (모세의 말

과 천문학자들의말 사이에-필자주) 차이가 있다. 모세는 교육 받

지 아니하고, 보통 지각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보통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평범한 문체로 사물들을 기록하였지만, 천문학자들은

인간 정신의 총명(聰明)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큰 수

고를 가지고 연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는 책망 받아서

도 안 되고, 이 과학은 저주받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미친

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31

53) John Calvin, 『창세기주석』, 창 1:15. 54) 앞의책, 창1:16.

Page 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 깔뱅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했는지의 여부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여러학

자들의 의견을 소개하였다. 어떤학자들은 깔뱅이 코페르니쿠스의이름

을 직접거론함을 물론그와그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했다고주장하고,

어떤학자들은 깔뱅이 코페르니쿠스를전혀 알지못했고, 그와그의이

론을전혀 비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논쟁은 깔

뱅이 과학적이었는지 또는 반과학적이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못한다. 깔뱅은 코페르니쿠스와그의이론을 직접적으로든지간접

적으로든지 비판했는데, 이것은 그가당대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천

동설의 입장에서 새로운 특정한 과학 이론에 해당되는 지동설을 비판

한 것이기에, 오늘의 시각에서 그의 천문학 지식의 한계에 대하여 비판

받아야지, 깔뱅 자신이 반과학적이었다는 비판은 정당하지 않고 그에

대한오해이다.

둘째, 과학에 대한 깔뱅의 신학적 근거는 계시론적이며, 성령론적이

다. 과학에 대한 깔뱅의 신학적인 근거가 계시론적이라는 사실을 우리

는‘두 가지 책’이라는 모델의 도움을 받아 과학은‘자연의 책’에 대한

연구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에

대한 깔뱅의 신학적 근거는 성령론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령의 활

동과 은사론의 차원에서 검토해 보았다. 과학은 물론 제반 문예, 기술,

학술은 성령의 선물이며, 성령의 도움을 통해인간은 이성과 지성 등을

활용하여 밝혀낸 것이다. 깔뱅은 과학 전공 여부와 기독교 신앙여부를

떠나서 각 나라와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이 자연 은사 또는일반 은사로

서의 과학을 하나님 경외와 개인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그 가치를 높이평가한다.

셋째, 깔뱅은 하나님의 적응 사상이라는 성서해석학의 방법을 통해

성서와 과학(특히 천문학) 간의 관계를 갈등 관계를 벗어나 때로는 독

립 관계, 때로는상호도움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16

세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깔뱅의 과학 지식은 오늘의 과학 지식

종종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달보다도 훨씬 더 큰 토성(土星)

일지라도 그것의 더욱 먼 거리 때문에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므로, 성령께서 비천하고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도록 말씀하시기보다는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말씀하시기를 원하

셨다.…낮 동안 지구를 비추는 태양과 밤에 지구를 비추는 달과

별들은하나님께존경에 존경을 표시하고있다고들 한다.55)

창세기1장 15-16절과 시편136편 7-9절에 대한깔뱅의 주석으로부

터 다음과 같은결론을 내릴수 있을것이다. 첫째, 성서를 기록하는신

학자로서의모세와 천문을 연구하는천문학자는서로다르지만, 신학자

인 모세나 천문학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연구하는 자이다. 둘째, 신학자

인 모세는 하나님의 적응 원리에 의해 천문학자와 동일한 방법을 반드

시 구사할 필요가 없다. 셋째, 깔뱅이 수용한 당대의 천문학 지식은 현

대 천문학의 관점에서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불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넷째, 깔뱅의 주석에서 과학으로서의 천문학은 신학(성서주석)과 반드

시 갈등을빚는관계가 아니라, 때로는 상호독립적으로비켜가고, 때로

는 상호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보인다.

V. 결론

‘과학’에 대한 사전적 정의와 함께 본고에서 사용되는 과학에 대한

정의의 유연성을 확보하면서 본고를 시작하였다. 본 연구를 통한몇 가

지 목적달성을 염두에 두면서세 가지문제에 집중할 것을밝혔다.

첫째, 깔뱅이“반과학적”이라는 비판은 오해이다. 천동설을 주장한

깔뱅이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이론을 비판했다는 근거

로부터 깔뱅은 반과학적이며, 과학에 역행했다는비판이 종종제기되었

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33

55) John Calvin, 『시편주석』, 시 136:7-9.

Page 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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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볼 때, 분명하게 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뱅

의 과학에 대한 태도는 반과학적이지 않고, 도리어 과학적이었으며, 깔

뱅은 성서와 과학을 대립이나 갈등 관계로나 한 쪽을 완전히 무시하는

상호 종속이나 흡수 관계로 몰아가지 않고, 다 함께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기 위하여56) 때로는 독립 관계로, 때로는 상호 도움을 주는 관계

로 간주했다고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했던 루터와 멜랑흐톤으로

부터 종교개혁자들은 반과학적이라는 인상이 같은 종교개혁자인 깔뱅

에게나 후대개신교신학의과학에 대한입장에 대해 비판할 때, 유리하

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16세

기 깔뱅의 과학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21세기에도기독교와 과학의 관

계 규정이나 과학과 관련된 성서해석을 위하여 전체적인 틀 속에서 충

분히유익하게활용될 수 있을것으로 사료된다.

주제어

깔뱅, 과학, 성서, 자연, 계시, 성령

Calvin, science, Bible, nature, revelation, the Holy Spirit

접 수 일 2010년 4월 6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12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35

56) Jürgen, Moltmann, Wissenschaft und Weisheit, 김균진 옮김,『과학과 지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50: “자연과학과 신학을 공동의 삶의 컨텍스트 안에서 파악

하려는 최근의시도는 지혜의차원에서이루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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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 이해 37

Page 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Lastly, Calvin applied the theory of the divine accommodation

(accommodatio Dei) to interpret the creation in his commentaries. His

theo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liberated scientists from biblical

literalism and allowed for further scientific development. According

to Calvin, theology is not in competition with science. Theology and

science are both fields that enable people to know better wisdom

about God.

Calvin’s Understanding of Science

Choi, yoon bae

Professor

Hanil University &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Jeonbuk, Korea

Presbyterian College &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John Calvin’s thought on science in his

writings. This article will discuss three points.

First, was Calvin anti-science compared to Copernicus? Though

Calvin agreed with the cosmology represented by Aristotle and did

not accept the new astronomy of the Copernican theory, he did not

condemn Copernicus and his followers unlike Luther and Melan-

chthon. His rejection of the new astronomy of Copernican does not

result in him being anti-science.

Second, the theological ground of Calvin’s thought on science is

not only revelatory, but also pneumatological. Concerning God’s

revelation, Calvin has two books. One is the book of nature and the

other is the book of Bible. Science is related to the book of nature.

Calvin regards science as God’s gift. If one regards the Spirit of God

as the sole fountain of truth, one shall neither reject the truth, nor

despised it wherever it shall appear, unless one desires to dishonor the

Spirit of God. The ‘naturalia dona’ includes government, household

management, all kinds of mechanical skills, liberal arts, etc.

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윤배, 깔뱅의과학이해 39

Page 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리쾨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1)

정기철(호남신학대학교교수)

I. 들어가는말

이 글의 목적은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가 문화를“삼

위일체의 자취”(vestigium trinitatis)2)의 장소이면서 동시에“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인간 실존의 문제”3)로 본 것처럼, 필자는 프랑스의 철학

적 신학자인 폴 리쾨르(Paul Ricoeur)를 통해 기독교 문화가 하나님과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틀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가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은폐의 매체로 작

용하기도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해석학은‘이해’의 가능성과 필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41-71

1) 본 기고문은2009년 10월 16-17일 대전침례신학대학교에서 개최된 제38차 한국기

독교공동학회 한국조직신학회별 지정 주제 발표 시간에 발표된 논문이다. 그동안 제

목과 토론된 내용들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그리고 이 글의 근간은『문화와 해석학』

(2008)이므로자세한 내용은졸저를참고하기 바란다.

2) 칼 바르트/박순경 옮김, 『교회교의학I/1』(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433 이하.

3) 칼 바르트/전경연 옮김, 『휴머니즘과문화』(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76.

Page 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6:15)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

간으로 하여금 땅을 관리하게 하신다(창 1:28). 경작을 타락의 문화라

고 생각하는 전승보다 죄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문

화 신학적 사고가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하다. 동양적인 의미에서 문화

는『주역』에 따르면 천문을 보아 시대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문을 살펴

천하를 변화시키는, 즉 문(文)으로 다스리고 바르게 가르친다는 문치교

화로서의이상사회를만들어나가는행위로 기술되고 있다.

물질문명 또는 정신문화와는 다른 차원에서 문화를 정의하는 카시

러(Ernst Cassierer)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이해로 상징문화를 제창한

다.“인간은 더 이상 자연적인 보편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보편 속에 산다. 사물들 자체와 함께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

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과 함께 계속적으로 대화한다. 따라서 인간은

언어형식속에서 산다. 즉 중간 매개들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경

험할 수 없고 조망할 수 없는 예술 작품이나 신화적인 상징들, 그리고

종교적인수수께끼들속에서 산다.”5)

리쾨르 역시 카시러처럼 상징적 언어 행위를 문화행위로 이해한다.

리쾨르가 상징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종교언어가 상징 언어

라는이해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으로문화속에 오신로고스는 상징

이다. 이때 상징이란 리쾨르가 이해하기에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서 또

다른이차적 의미를 함축함을뜻한다. 다시말하면, 예수는 나사렛 출신

의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라는 신성을 동시에 가진다. 따라서 우

리는 상징 언어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행위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설명되어야 하는 문화 개념에는 사회적 창조에서 생겨

나고개인의 관습에 연루되며, 그리고 전통에 의해 전수되는모든 후천

연성 그리고 의미성을 논할뿐만 아니라 그것의 한계까지도 밝힌다. 따

라서 해석학에 기초해 현대문화를 신학적으로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지 검토하고자 한다. 필자가‘이해’의 문제를 문화의 관점으로 확대해

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해는 문화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문화 속에서 그 이해의 옳고 그름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현대문화를 문화 신학, 특히 그리스도론에기초한 십자가와 부

활의 신학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용서의 종말론에 기초

해 이해할 때의의미성과 장·단점을따져야 한다.

I I. 리쾨르의문화해석학

성서에는 문화에 해당하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고대 그리

스 철학에서는 플라톤(Platon)에 의해문화가‘인간에게 주어진 아레테

를 개발하는 활동’(hé pros aretén paideia)으로서 철학을 통한‘교육’4)

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키케로(Cicero)가 철학을‘정신의 문화’(cultura

animi philosophia est)라 한데서 보듯이 문화를 정신문화의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문화’라는 개념의 본래적 의미라

할 수 있는 라틴어(colore)는 농업(cultura agri)이라는 단어 속에사용

되는 경우에서 보듯이 땅을 일구는 경작으로 물질문화 차원에서 사용

되었다. 불란서 문화권이 문명(civilization) 개념으로 물질문화를 표현

한 것과는 달리, 독일은 문화(Kultur) 개념으로 정신문화의확장에 박차

를 가했다. 땅을 경작하는 물질적 차원의 문화의 경우를 창세기의보존

과 관리개념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문화가 사람을 사람 되게하는 예

비적 수단(propaideia)으로서의 정신문화의 경우를 지혜서나 또는 십

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고전1:30; 고후 5:17; 갈

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43

4) Platon, Protagoras, 320 c~322 e; Aristoteles, Politeia 1256 b 3~4.

5) Ernst Cassierer, Was ist der Mensch? Versuch einer Philosophie der menschlichen

Kultur, Kohlhammer, 1960, 39.

Page 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문화 상대성을 넘어 문화 보편주의를 지향한

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리쾨르는 문화보편주의가 기독교 진

리 주장을 담을 수 있는 틀이라는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종

말론적 진리가 기독교의 진리임을 밝힌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진리는

해석학의차원에서이해하자면해석학적진리외에다름이 아니다.

리쾨르는 의미의 보편성과 해석의 다양성을 해석학의 고유한 특성

이라보았기 때문에, 어떤문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의 보편성과

그 문화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 사이를 갈등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경쟁적인 해석들 간의 충돌”9)과 갈등을 정당한 것으로

이미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해석학사를 살펴보면

해석학적 진리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Schleiermacher)가 저자의 의도를 찾는해석의 작업을 해석

학의 과제로 설정하면서 그 작업이 개방성을 특성으로 하고 있음에 주

목했지만, 어떤해석자가 내린해석의 결론이나 의미결정이 너무 일방

적인 방식에서 해석자의 주관이나 심리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았는지

따져 보아야만 하고 따라서 잘못된 주관주의에 대한 대체가 필요하다

고 본 것에 대해, 딜타이(Wilhelm Dilthey)는 진리에의 개방성이 이해

자체의 완결이나 도달 불가능성을 함축한다고 보아 이해의 객관성을

보증하는 역사적 이해로 관심을 돌린다. 이러한 이해의 객관성에 반대

하면서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이해가 방법이 아니라 일어

나는 사건이고 역사성의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완결이 아닌 끊임없는

진리를 향한 개방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텍스트가 법전

이든 혹은 구속의 선포이든 간에-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새롭게 그

리고 다르게 이해되어야만 한다.-정신과학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역사

적이기 [때문에]-텍스트가 매번 다르게 이해되는 곳에서만 텍스트가

이해된다.”10)

적 지식, 즉 언어, 기술, 예술,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태도와 믿음이 내

포되어 있다. 리쾨르는 이러한 문화적 상징행위,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행위 모방이라고 한‘모방 세계를 문화적 세계’라 칭한다. 리쾨르는 창

조적 모방을 문화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상징 행위인 문

화행위도 유사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해되어야 한다.“인간의 행동은 유

사 텍스트”6)로“텍스트와 같이 열린 작품이며 그 의미는 보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행위는 그 의미를 결정하는 새로운 해석을 기

다리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읽을 수 있는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개방되

어 있다.”7)

문화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매체이듯이, 인간이 인간임

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한다. 하나님이 문화 속에서 현존하시기 때문

에 우리는 문화를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해

야 하듯이, 문화는 인간이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거울(Richard Rorty)

이다. 인간은 문화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창출한다. 문화의 이러

한 속성을 리쾨르는 상징 언어의 분절화라는 개념으로설명한다. 이 개

념에 따르면 문화행위는 언표되면서 동시에 창조적 해석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듯

인간은 언어를 통해상호이해를 수행한다. 그러나 로고스가 너희에게는

계시이지만, 저희에게는 은폐의 방식이듯이, 인간의 말 또한 상징적이

기 때문에 숨겨진 이차적 의미를 캐내는 창조적 해석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리쾨르는 인간의 문화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 해석학을 제

창한다.“나는 해석학이라는 단어의 기본 어의는 우리 문화 공동체의

문자화된 기록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규칙들을 다루는 것이라고 가정

한다.”8) 포스트모던 문화이론가들은 문화 공동체마다 고유한 해석체계

와 해석방식을 가지며, 이들해석들이 서로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음

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45

6) 폴 리쾨르/박병수, 남기영편역, 『텍스트에서행동으로』(서울: 아카넷, 2002), 214.

7) 위의책, 246.

8) 위의책, 225. 9) 위의책, 253.

Page 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크(Wolfhard Pannenberg)가 논증한 과학과 신학의 공명을 문화신학의

중심에 두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변화된 시대 상황 속에서도 틸리

히의생각에 공조하고있는사람이 바로리쾨르이다.

틸리히의 후임이며 틸리히와 함께 성경 모임과 신학 모임을 정기적

으로 가졌던 리쾨르는 틸리히와 같은 생각을 견지하여“종교를 문화의

산물”13)로 정의하면서, 유대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만남으로 서양문화가

형성되었음을근거로 들어 현대문화의 중심에 종교문화가 자리하고 있

음을 주지시키려고 애쓴다. 20세기 들어 서구문화의 기독교적 문화전

통의 쇠퇴와 거부를 정당한 것으로 보면서 신학의 자리매김을 자연과

학과 신학과의 대화에서 찾거나 생태학적 위기 극복과 대안으로 신학

의 본래적 임무를 만족하려는 경향에 반대하면서 리쾨르는 전통적인

문화신학의 이해방식인 그리스도론적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을 중심에

다시금 위치시키며, 종말론적하나님 나라와 용서의 종말론을 문화신학

의 내용과 과제로 설정하고있다.

1. 십자가와부활의신학

리쾨르는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을 문화신학의 중심에 재등장시킨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신학의 전통에서 십자가의 죽음의 신학과 부활의

영광의 신학의 논의 과정에서 제외되어 왔던 문제, 곧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문제는 다름 아닌 문화신학의 핵심 문제

라고생각했기때문이다. 리쾨르에게 십자가와부활은 하나님이문화로

현존하는 방식이다.“부활은 현 세상에 하나님이 현존하는 보증이 된

다. 문화로 현존하고 신비스런 현존이다.”14) 문화신학이 현금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으

이러한 해석학적 진리에 기초할 때 기독교 문화신학은 어떠해야 하

는가? 기독교 문화신학이 종말론적 진리임과 마찬가지로 해석학 역시

해석학적 진리를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의 문화신학에

대해살펴볼 차례이다.

I I I. 리쾨르의문화신학

리쾨르의 문화신학 내용은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용서의

종말론이바로리쾨르의문화신학내용이다.

우리에게 문화신학을 말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아준 사람은 폴 틸리

히(Paul Tillich)이다. 그는 인간의 여러 문화 활동의 다양하고도 특수

한 영역들, 예를 들면 예술,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과학 그리고 교육 속

에 나타나는 종교적 차원을 볼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

카 문화를 비교하거나 개신교와 유대교를 비교함으로써문화의 보편성

이라는 이념 속에 들어있는 정신적이며 지성적인 편협성을 지적하는

일을 잊지않는다. 그가보기에 종교는 궁극적 관심의 표현으로 그것은

문화의 틀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종교는 인간 정신생활의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그 모든 기능 속에 있는 심층의 차원이다.”11) 이러한 궁

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매체가 바로 문화이다.“종교는 문화의 실체이

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12) 그러면 틸리히의 이러한 문화 이해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오늘날도 종교가 문화의 핵심인가?

현금의 종교문화는 쇠퇴일로에 있고 과학문화가 더 큰 영향력을 확대

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틸리히가 촉진시킨 종교문화보다 판넨베르

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47

10) Hans-Georg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Tübingen 1972, 292.

11) 폴 틸리히/남정우옮김, 『문화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6.

12) 위의책, 52.

13) 폴 리쾨르/양명수 옮김, 『해석의갈등』(서울: 아카넷, 2001), 438.

14) 위의책, 442.

Page 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史實, Historie)이 아니라면 예수의 부활

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예수의 부활이 그

자체로 사실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면, 예수의 부활을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주장할 수 있는 어떤 정당한 근거도 없게 된다.”17) 이러한 판

넨베르크의 묵시문학적 부활의 사실성 주장과 달리, 몰트만( J ü r g e n

M o l t m a n n )은 메시아적 종말론적 약속에 근거하는 부활의 역사성

(Geschichtlichkeit)을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지금 할 일은 예수의 부활 논쟁에 다시금 뛰어드는

것이아니라, 부활이사실적이든또는역사적 사건이든 간에, 그것이 시

간 공간이라는 문화 안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우

리의 논의를 진척시키는 일이다. 즉 하나님은 부활하는 그리스도 안에

서 자신을 살아 계시는 분으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문화 없이는 우

리가부활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게된다는 점이다. 서구문화가 십자

가와 부활의 문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리쾨르의 지적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동양문화 특히한국문화 속에서는 쉽게 읽을수 없는 문화이해

이기때문이다. 문화를 하나님의 계시장소로 보는 문화와 그렇지 않는

문화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중요성이 도사리고 있다. 더구나 십자가

와 부활의 문화가 우리의 땅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이

유는 하나님이 문화를 떠나서 하나님이시기를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는 특히 한국의 문화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온전

히 드러내지못한다. 우리는 문화속에 계신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만큼, 문화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에대해서도알려고 해야한다. 그렇

지만 무엇보다도 리쾨르를 따라 문화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한국문화

속에서 어떻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문화는 바르트

의 말대로“삼위일체의자취”가 드러나는처소이기때문에 한국의 문화

로 계시하시기 때문이고,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하나님을 떠나 이해될

수 없으며 이해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문화는 하나님이 계시하시

는 장소이며,15)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theatrum gloriae Dei)라

는 신학적 명제는 문화신학의 공리가 되어야 한다. 문화는 십자가와 부

활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죽음 속에서도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 문화여

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20세기 신정통주의 신학이 새롭게 발견한 문화

의 시간이 리쾨르의 사고 속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

는 보게 된다. 그러면 신정통주의 신학은 문화의 시간을 어떻게 신학화

했는가?

우리는 리쾨르를 벗어나서 부활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문화 속에서

일어났다는 지적을 바르트의『교회교의학』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났

다. 문화신학은역사라는시간속에계시는 하나님을 읽어냈다.“그것도

대상적 의미를 가진 세계적 현실 사건으로서 인간적 공간과 인간적 시

간 안에 일어났다.…왜냐하면 그것은 구체적 대상들 가운데서 일반적

인간의 역사안의 특수역사로서시간한 가운데서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특수한 역사의 경과 중에예수그리스도는그의제자들에게나타난,

곧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분으로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어떤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시고(롬 6:10) 그러므로 오늘 어제와

같이 산 분이시다.”16) 우리는 바르트가‘하나님은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존재한다’는『로마서 강해』의 초월론적 하나님 이해를『교회교의

학』에서 교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즉 그는 역사와 시간 속에 현

존하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깊게 보지 못했다고 자기 비판한다. 특히

판넨베르크는 부활이 역사에서 실재하는 사건임을 주장함으로써 종말

론적 부활의 신학의 논쟁을 역사신학 안으로 전치시켰다. 그에 따르면

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49

15) 김영한,『한국기독교문화신학』(서울: 성광문화사, 1992), 5.

16)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IV-1,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7,

368.

17) Wolfahrt Pannenberg, Grundzuge der Christologie, Gütersloher Verlag: Gütersloh,

1964, 96.

Page 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었다면, 초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정의로운 사랑이라고 가르

친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와 사랑 사이에 있는 긴장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리쾨르에 따르면, 정의는 균등의 논리(logique d’équivalence)

에 기초하지만 사랑은 넘침의 윤리에 기반을 둔다. 정의로운사랑은 넘

침의논리를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런의미에서 사랑은 정의를 넘어서는

초윤리이다.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정의를 윤

리의 관점에서 체계화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이고 도덕

의 차원에서 정립한 사람이 칸트(Immanuel Kant)임을 잘 알고 있다.

칸트가 의무론적 도덕의 최고원리를 찾아내고자했다면 아리스토텔레

스는 잘 됨(euvdaimoniva, 행복)이라는 최고선, 곧 목적론적 최고 좋음

을 추구함으로써 두 사람이 서로 평행선의 논의를 진척시키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목적론적 윤리와 칸트의 의무

론적도덕을 변증법적으로통일하는 새로운 윤리상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정의로운 사랑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칸트를 떠나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안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칸트의 도덕이론이 인간의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삶

의 영역을 배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배려와 존중에 기반을 둔 사랑

을 포함하지 못하고 정의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리쾨

르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의와 사랑은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정의보다도 정의로운 사랑의 이념에 더 적합하다. 그 이유는 사

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른 e u v d a i m o n i v a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음이고

잘 됨이라고설명한 데서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그것을 존재론

의 차원에서 설명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보기에 심히 좋았

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곧 세상이 있음으로 행복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행복이고 좋음이다. 리쾨르는 아

리스토텔레스를 통해정의로운사랑이 이런존재론적 행복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았다.

를 십자가와 부활의 문화로변화시켜야한다.

그러면 한국의 문화를 십자가와 부활의 문화로 변화시킬 수 있는

타당한 모델이 있는가? 리쾨르의 제안을 올바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십

자가와 부활의 문화신학이어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부활의 문화로 바꾸어야 한다. 그 작업의 기초는 십자가의 정신에서 가

능하다. 십자가는 죽을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신 표상을 거부하고우리

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의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문화는 데리다가 폭로한 타자를 죽이는 로고스 중심주

의가 아니고 용서를 청함이며 죽음이 더 이상 승리하지 못했음이 드러

나는 순종의 문화이다.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가능하다. 영광의 부활

만을 바라는 승리주의는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지만,‘십자가의 결과는

부활이다’라는 문장이 기독교 문화의 결론이어야 한다. 부활을 소망하

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 땅에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전력 투

구해야 한다.

2. 하나님나라

리쾨르는독일어로처음 출간한『사랑과 정의』(1990)에서마태의 산

상설교와 누가의 평지설교에 근거해 황금률(‘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

접하라’)로 표현되는 정의와 사랑의 계명(‘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

랑하라’)을 매개하는“어려운 길”18)을 걷는다. 이 어려운 발걸음에서 도

출된 내용은‘사랑이 정의에 의해 매개된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

다. 필자는 이것을 정의로운 사랑 또는 사랑을 행하는 정의라 부르고

싶다. 그 이유는 리쾨르가 바울을 따라정의로운 사랑을 하나님 나라의

요소로 보기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그리

고 사랑이다(롬 14:17). 하나님 나라가 구약에서 샬롬의 문화로 선포되

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51

18) Paul Ricoeur, Liebe und Gerechtigkeit, Tübingen, 1990. 41.

Page 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은 정의의 궁극적 원인이기 때문에 정의가 없는 사랑은 등뼈가 없는

몸과같을 뿐이다. 사랑은 정의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정의의 근거요 목

표이다. 정의는 보편적 법칙의 요구와 특수한 상황의 요구가 다 같이

수락될 때에만 달성 가능하다. 정의는 사랑 때문에 정의가 되고정의로

하여금정의가 되게하는사랑은 정의에서드러난다.

정의로운 사랑은 리쾨르에게 두 가지로 전개된다. 칸트가 말한대로

이웃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즉 칸트가 황금률을‘다

른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로 바꾸듯이, 리쾨르도 황금

률을‘너의 실천적 목적이 기원하는 선이 황금률 속에 포함된 규범적

선과일치하도록행위하라’로 바꾼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말한대

로 경제·정치적 차원의 동등한 대우만이 아니라 인격을 포함한 그리

고 이웃을사랑하는 마음으로 존중하는것이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

스의 균등성을“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존중하는 것과 자기 자신

을 다른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은 균등하다”22)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

다음 이기적 사랑이라기보다 아가페 사랑의 정신이 자기희생을 통해

정의로운 사랑을 나타낸다. 이것은‘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

37)와‘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에서 보듯이‘사랑

하라’는 의무적인 사랑으로 나타난다.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에 따르면,“내가 의무를 지고 있는 상대방 바로 그 사람

이 내 이웃이고 내가 그에게 내 의무를 다할 때에 나는 내가 그에게

이웃이라는 것을입증한다. 그리스도께서는우리의이웃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느냐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은 어떤

존재이냐에 관하여 말씀하신다.”23) 정의로운 사랑은 용서로 표현된다.

정의로운사랑이라는하나님의나라는 용서의 종말론을꽃 피운다.

더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규범을 넘어‘좋은 삶’을 목적으로 하는

윤리 뿐 아니라, 초대교회가 공동체의 핵심원리로 제시한 균등하게 하

려 함이라는 경제적 정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는 아리스토텔레스의배분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풀

어준다.‘너는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어떤 몫을 차지하

고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몫을 돌려주어야만 할 사람에게

해당되는 배분적 정의이다. 배분적 정의의 상황에서 개인의 몫으로 되

는 것은 오로지 그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non id quod est propr-

ium), 모든 이들에게 속하는 것 중에서 자기 몫으로 배당되는 것이다

(id quod est commune).19)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적 정의를 신학에 적용한 사람이 문화신학자

틸리히이다. 틸리히도 리쾨르처럼 사랑과 정의의 상호관계성을 말한다.

그러나 틸리히는 리쾨르와 다르게 제3의 정의, 곧“창조적 정의”20)를

제안한다. 창조적 정의란 일정한 비율로 계산이 가능한 아리스토텔레스

가 말한 분배·경제적 정의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이

쌓아 올린 공적과 배당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비율 관계에 제약을 받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

해 표현되는 정의”로, 다시 말하면“분리된 자들을 재결합시키는 사랑

의 형태이다.”21) 틸리히가 체계화한 창조적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균등성으로서의 정의를 뛰어넘는 기독교의 정의이다. 즉 참 균등성의

뿌리는 비균등성도 포함하는 창세기1장 21절“각자 제 모양대로”와 창

세기 1장 27절“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심”속에 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표현되는 이 정의는 인간이 쌓아

올린공적과 배당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비율적 정의를 넘어 선다. 사랑

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53

19) 성 토마스아퀴나스, 『신학대전』본문I I의 제II부, 문제61, 1절 제5반부.

20) Paul Tillich, Love, Power and Justice(Oxford University Press, 1954), 64.

21) 위의책, 66.

22) Paul Ricoeur, Soi-meme comme un autre, Paris: Seuil, 2000, 226.

23) 키에르케고르/임춘갑 옮김, 『사랑의역사상』, 종로서적, 35.

Page 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꿇었다.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며,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속죄와 보상을 해야만 한다. 유태인 학살에 대

한 독일의 속죄는 좋은본보기가 된다. 반성과 사죄에는반드시 속죄의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용서와 화해는 국제법, 외교, 군사력, 돈 따위

의 인간의 힘만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작

용해야 비로소 가능한 인간 사회의‘신비’이다. 전쟁, 내전, 기아, 학살

등의 비참함은 무기에서 나오는 것이아니라 바로 그런 무기를 사용하

려고 하는 인간의 증오와 원한 그리고 탐욕과 권력욕에서 나온다는 사

실을올바로 깨달아야한다.

리쾨르가에필로그에서 말하고자 하는바의 핵심은‘선물과 용서’라

는 항목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의 중심은 다음이다.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에 적용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절대적이고 예외나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용서는 용서를 청함을 전

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곳에서만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만 된다는 사실을『기억, 역사, 망각』이라는 저서의‘어려

운 용서’라는항목의 제1장 마지막 구절을 통해듣는다.

용서는 바로 그것이 준칙에 따라서도, 규범에 맞게도 또는 준칙에

맞게이루어져서는안 되는바로그것이다.27)

우리는 용서의 사법적 책임에 대한 문제까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용서를 구하면 사법적 책임까지 면제되는가? 리쾨르가『기억, 역사, 망

각』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만델라(Nelson Mandela) 전 남아공 대통령의

다음의 말은우리의 질문의 어려움을 함축하고 있다.“참혹했던 과거를

수습할 수 있으려면반드시 그 과거를 기억해야만 한다. 용서가 필요하

3. 용서의종말론24)

카메룬의‘쿤자임’(Koonzime)어에는 용서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

한다.25) 그러기에 그들의 문화는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쿤자임’사람들은 돌이나 막대기에 표시를 하거나 노끈에 매듭

을 묶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저지른 잘못의 횟수를 정확하게 표시해

놓는다. 이것이 바로 소위 쿤자임식의‘악행 기록서’이다.‘비본’(Bea-

von) 선교사 부부는 바로이 쿤자임식“악행 기록서”를 통해용서의 개

념을설명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골로새서3장 13절을 다음과 같이 쿤자

임어로 옮긴다.‘하나님께서너희의 악행기록서를 도말하신 것처럼 너

희도 서로에 대한 악행 기록서를 제거하라.’복수를 가르치고 용서를

가르치지않는문화와 달리기독교 문화는 용서의 문화를 전파한다.

용서의 문화는 역사 속에서 벌어진 죄악 행위와의 화해라는 역사·

정치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전 독일

총리가1970년 12월 7일 [바르샤바 조약] 체결을 위해폴란드를 방문하

여 유대인 집단 수용소였던 나치 희생자 기념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의 잘못을 사죄했다 한다.“나는 독일 역사의 나락에서, 그리고 수

백만 희생자의 짐 아래에서, 인간이 말이 소용없을 때 행할수 있는것

을 했을 뿐이다.”26) 그날 현장에 있었던 슈피겔지 편집장 헨리 난넨

(Henri Nannen)은“수상이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무릎 꿇을 필요가 없는 그가 무릎 꿇을

필요가 있는, 그렇지만 무릎을 꿇지않은 모든사람들을 대신해 무릎을

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55

24)‘리쾨르의 문화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용서의 종말론이 무엇인지 리쾨르의 글

에 근거한 소개가 없다’는 한 심사자의 지적을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자 한다.‘용서

의 종말론’은 필자의2005년 조직신학논총 제14집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그것의 구체적인 한국 교회에의 적용도 논의되고 있다. 그리고 용서의 종말론은 리

쾨르의『기억, 역사, 망각』의 에필로그에서논의되고있다.

25) http://www.wycliffe.org/knam/Korean/bible_translation/

26) 그레고어쇨겐/김현성옮김,『빌리브란트』(서울: 빗살무늬, 2003). 27) Ricœur, La memoire, l’histoire, l’oubli, 607.

Page 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있음을 밝힌다.“문화의 기원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근거해 있으며,

인간사회의 초창기 제도들은 이 메커니즘에 대한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되풀이로 이루어져 있다.”28) 그는 희생양 제의가 서구문화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에는 희생양이나 희생물이 들어 있음을 주장한다. 모든 문화

의 핵심은 종교가 자리하고 있고 종교의 핵심에 희생양 메커니즘이 있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라르는“구약은「창세기」맨 처음부터 이[희

생양 메커니즘]를 담고 있다”고 하거나“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을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제시한다.29) 그러나 우리는 그가 희생양 메

커니즘으로 종교문화를 너무 단순화하고 있지 않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물론 그가“종교는 그 자체가 희생양 메커니즘에 따라 생겨난

것”30)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유태인 대학살도 희생 메커니즘의 틀 안에

서 보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다양한 이해나

접근을 포기해야 하는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이런 비판은 지라르의생

각을 폄하함으로써 나온 것이거나, 지라르의 관심사를 벗어날 때 던질

수 있는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지구상의모든문화가 희생양 제의양식

을 가진다는 것을 수긍하더라도 희생양 제의양식을 가지게 된 원인을

말하고 있지않다는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필자는 리쾨르에

게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즉 지라르는 희생양 제의 양식이 필연적 문화

양식이라고만 밝혔지, 그 문화양식이 가지는 내용과 의미성을 심층적으

로 말하지 않는데 반해, 우리는리쾨르에게서그것들을엿볼수 있다.

리쾨르도 지라르처럼 제의를“문화의 용기”31)라 한다. 리쾨르는 제의

문화를 악의 상징과 용서의 구원이 동시에 들어있는 창조신화 속에서

읽어낸다. 창조신화는 악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신화가 문화 전체에 상

면 용서해야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함으로써만이 재발을

막을 수 있다.”종교적인 용서와 실정법적 용서와의 올바른 관계 설정

도 필요하다. 은폐가 아닌 과거범죄에 대한 고백은 역사적 고백이지만

종교성을 띄고 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사면과 화해는 없기때문

에,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나 결코잊을수는없는 것이다. 용서받은 우

리가 할 일은 역사적 과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용서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서의 힘은 이제

우리의 일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암울했던 한국교회 과거사 청산의 문

제를 통해 이를 증명해야 한다. 신사참배와 같은 신앙적 죄를 시대 상

황의 불가피론을 들어 덮고 넘어가려 하거나, 부끄러운 한국교회사의

청산을 교회 분열이라는 이유로 회피하려는 기도는 본말이 전도된 잘

못된 일이다. 과오란 용서의 불가능성을 생각하는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과오를 고백하는 일이란 용서를 체험하고도 용서의 위대성을 간

과하는 우리의 습성, 태도,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할 줄 안다. 용서받은 만큼 용서한다. 용서를 못하는 것도 죄이지

만, 용서를 안 하는 것도 죄이다. 우리는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고, 용서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용서의 문화는 한국의 문화, 특히 한국 기독교에

가장필요한 사항이다.

I V. 현대문화의특징인죽음의문화를극복하기위한대안인

기독교생명의문화

필자는 기독교 문화의 핵심을 생명의 문화로 이해하고 있다. 생명의

문화는 죽음의 문화를 넘어선다. 이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모델로

제의문화를제시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문화의 기원』(L e s

origines de la culture)에서 문화의 기원을 제의라는 희생양 메커니즘

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57

28) René Girard, Les Origines de la culture, 김진석 옮김,『문화의 기원』(서울: 에크리,

2006), 83.

29) 위의책, 113과 119.

30) 위의책, 162.

31) 리쾨르, 『악의상징』, 101.

Page 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런 바르트의 촉구를 따르는 첫 걸음의 시도가 리쾨르에게는 아담

신화가 예언자들이 인간을 고발한 데서 생겼기 때문에 회개의 영성을

촉구한다36)는 사실을 명시할 때 드러난다. 하나님의 절대 완전성과 인간

의 악의 관계를 고발하면서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의 경건성은 개인의

죄뿐 아니라 공동체의 죄까지도 발견한다. 여기에서 존재론적인 죄 경

험의 보편성이 도출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계약 관계로 그려지

고 있다. 그 계약 관계의 상실이 바로 죄다. 죄를 표현하는 어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마르티아가 용서의 여지가 있는 잘못으로 책임 윤리

와 관련되어 있는‘신이 눈을 멀게 하다’의 의미를 가진다면, 휘브리스

는 파멸의 영, 곧 악한 의지의 근원으로 존재론적으로 이미 있는 악을

나타낸다. 리쾨르는 창조신화 안에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보는 관점, 신

의 드라마만이 아닌 인간의 드라마도 보게 만드는 역사적 관점 그리고

악을 인간의 것으로 보는 인간론적 관점이 들어 있음을 보고서“창조는

구원과 동일함”37)을 내포한다고 해석한다. 이는 타락과 죄의 결과인 죽

음의문화가 생명의 구원의문화와더불어논의되어야함을뜻한다.

우리 시대의 문화도 비록 그것이 죽음의 문화를 표방한다 해도 결국

은 생명의 문화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기독교 문화가 가지는 본

질이다. 우리 시대에 죽음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의 죽

음으로 말미암은 허무주의 문화일 것이다. 니체는 신이란 우리의 생각

이 만들어 낸 창작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인간이 신을 창조했다.”38)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적 신을 죽였다. 즉 신학이 제일 원인이나 필연

존재, 제일 능동인을 가치근거와 절대 선으로 삼는형이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하이데거가 사용한 존재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은 죽었

다.“이 옛 신은…근본적으로 죽었다.”39)“신은 죽었다라는 가장 위대

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32)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거룩

한 하나님을 문화속에 계시하심은동시에 문화속에 계시하실 수 없음

을 내포한다. 계시의 초월성과내재성은 성서가 가르치는사유구조이다.

이 점은 바르트의 생각과 비슷하다. 바르트도 구속의 왕국(regnum

gloriae)의 관점에서 볼 때 문화는 한계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리쾨르가

창조의 타락이 이미 종말론적구원을 내포하고 있었다는생각을 설명하

면서 창조신화가 다른 신화들처럼 신 발생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죄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밝혔다. 이런 도식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계신 분으로 약속의 성취를 이루시기

위해 임마누엘 하시고 모든 것을 종말론적으로 새롭게 하신다. 이런 생

각이 바르트의 신학의 기저를 형성하는데,“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영원히 자기 옆에 두시기 위해서, 자기와 화

해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불신실을 넘어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한

계이다.”33) 물론 바르트는 문화를 신앙의 순종 행위로 보고자 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교회와 문화와의 관계성을 살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기관이듯이“문화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세워진다.”34) 그래서 그는 문화의 문제가 바로 교회의 문제라고 보아 교

회가 올바로 설 때, 즉 교회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정도에 따라 문화

의 의미도 올바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문화를 초월해 있음

과 문화에 대립해 있음이 바로 교회의 비밀된 존재의 근거임을 지적하

는 일을 잊지 않는다.35) 더 나아가 그의 생각의 핵심은 모든 문화의 행

위에서 인간행위의 타락성에도불구하고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행

위를 교회가 계속해야 함을 지적하는데서 나타난다. 우리는 바르트의

경고를 좇아인간문화속에감추어진 신의흔적들을 찾아내야한다.

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59

32) 위의책, 192.

33) 칼 바르트, 전경연옮김, 『휴머니즘과문화』(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92.

34) 위의책, 78.

35) 위의책, 95.

36) 리쾨르, 『악의상징』, 227.

37) 위의 책, 168.

3 8 ) 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Nietzsche Werke VI-1, Berlin,

1968, 42.

Page 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및 이해 가능성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말 자체에 속하는 실존론적 가

능성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말 자체에 속하는 실존론적 가능성이란

‘들음’이다. 우리가‘옳게’듣지 못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들음이 말을 구성한다. 현존재는 이해하기 때문에

듣는다. 타자와 함께 이해하고 있는 세계 내 존재로서, 현존재는 공동

현존재 및 자기자신에게 귀를기울이고, 그처럼 귀를 기울이면서 공동

현존재와 자기 자신에게 귀속된다.”46) 이제 우리는 무신론의 죽음의 문

화에 하나님을 금지 명령만을 내리는 그리고 도덕 의무만을 요구하는

도덕 신으로가 아니라“도덕 신을 부수고, 말씀으로 탈윤리를 세우는”

하나님의 생명의 문화를 제시해야 한다.47) 그럴 때만이 존재 결핍 속에

서 존재를 긍정하고 확인하는 길이열리게 된다. 하이데거의이해에 따

르면 말은 살아 있고 힘 있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힘이 있다.“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마음의 생

각과 뜻을 감찰한다”(히 4:12). 그 힘은 명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들음 속에 있다. 이를 이어 받아 가다머는 진리를“말씀 안

에”48) 있다고 하면서 들음의 방식을 내가 원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고 보아,“원하든 원하지 않든 들어야만 하는”49) 존재론적 귀

속성의구조를 말한다.

한 새로운 사건은,…이미 유럽위로 그 첫 번째 발걸음을던지기시작

했다.”40) 니체의 눈에는 칸트에게서도 나타나는 양심의 명령을 하나님

의 명령으로 보는 도덕의 신은 죽었다.“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를 죽였다! 어떻게 모든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

리는 위로받을 수 있는가?… 이러한 행동의 크기는 우리에겐 너무 큰

것이아닌가?”41)

리쾨르의 지적에 따르면, 니체가 죽인 신은“도덕의 신으로…바로

그런 신이 죽은것이다.…도덕 신을 죽인자는 니체가 문화과정또는

허무주의 과정이라 부른 그것이다.”42) 그러면 니체의 문화 과정, 곧 허

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리쾨르는 하나의 가능한 길로

도덕의 신이 아닌 로고스에 의한‘존재 욕망의 윤리 또는 존재하려는

노력의 윤리’43)를 제안한다.

존재 욕망의 윤리는 무신론의 도전 앞에서 복음으로 하여금 어떤

길을 걷게 하는가? 무신론의 문화에 대답하기 위해 도덕의 신을 포기

해야 하는가? 그 대신에 리쾨르는“무신론에서 믿음으로 가는 멀고 긴

길”44)을 걷는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자적 선포와 신약의 바울을 통해

“로고스에 속하는 복 또는로고스인 존재에 속하는 복”에 해당한다. 인

간은 그가 말하기 때문에 인간이다.45) 하이데거도 니체의 무신론의 도

전 앞에서 로고스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말의사건 속에서 나는주인

이 아니고 내 관심을 넘어서서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는 그리하여 내

가 오히려 로고스에 속하는 존재임을 밝힌다. 그처럼 스스로 자신의 주

인이기를 멈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복종과 자유가 만난다.“말은 이해

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61

39) 위의책, 381.

40) Nietzsche, Nietzsche Werke V, 271.

41) 위의책, 163 이하.

42) 리쾨르, 『해석의 갈등』, 485.

43) 위의책, 491.

44) 위의책, 494.

45) 폴 리쾨르/박건택옮김, 『역사와진리』(서울: 솔로몬, 2006), 138.

46)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이기상 옮김, 『존재와시간』, 163.

47) 한 심사자가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의 문화가 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필자는 바르

트나 융엘이 십자가의 로고스를 생명의 로고스로 기술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필

자는지라르처럼 십자가의 죽음에서 종교의 양태만을 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의 생명관의 핵심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심사자가 질문한 구체적인 사례

를 설명하자면, 필자는 리쾨르가 제안했듯이, 십자가의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생명의 주인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고 보았다. 주의해야 할 것

은 생명의 문화라 했을 때의 생명 개념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 또는 생태학적인

생명개념이 아니라는사실이다.

48)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394.

49) 위의책, 438.

Page 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분리하여 설명하고 있지 않다. 판넨베르크는 교회를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의 임시 표식으로 보면서54)“인간의 사회·정치적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 역사에서 실현하게 되는 완전한 충족으로 구체화되지 않

는 한”55) 교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회를 통해이루어져 가는하나님

의 나라는 사회의 정치적 질서와 분리하여생각할 수 없다.

바르트는 사회변혁을 무시하거나 또는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

은 듯이 행동하는 모든 정치에 저항해야 한다고 교회의 책무56)를 강조

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정치적 자유와 평화를 위해 건설적 역할을 담

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57) 이런 생각을 더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몰트

만이다. 그의말에의하면,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나라를 선포

하되, 그것이 사회와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도록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

면 성경은 그런예로 출애굽 공동체를제시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

스도께서“세상을 해방시키기 위한 수단”58)이어야 하며 정치적 속박에

서부터해방을 추구해야한다.

교회가 사회와 국가, 곧 문화를 향한 책무를 다하지 못함으로 겪는

정체성 위기를 읽어야 한다. 한국교회사는 그런위기를 배양하고 있었

음을증명한다. 한국교회의 과거사가 청산되지 못한이유 중 하나는 친

일 행적 및 신사참배는 어려운 시대에 한국교회를 지키고 한계 상황

속에서도교회를 지속시키기 위한방편이었다는 불가피론이있었다. 이

만열교수가1996년에「바로잡아야할‘역사 바로세우기’」를 제안하면

서 한국교회가 과거사 청산 실패로 신앙순수성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

V. 현대문화속의한국교회50)

현대문화 속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매체로서 본령을 다하고

있는가? 아니면 중세 교회사에서 배웠듯이 악의 처소라 비난받고 있는

가? 중세 교회가 지도자의 타락과 정치 세력화 그리고 맘몬 신을 기독

교화시킨 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하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보여주었지 않는가? 우리는 역사 속에 보이는 교회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도 동시에 알고 있다. 현대 문화 속에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여러 이해와 규정이 가능하지만, 필자는 논의의 전체적인 의도에 맞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매체라는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

다. 그런다음교회의정체성의 위기의 한 예를제시하고자한다.

19세기에 종말론이 새롭게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신학은 교회와 국

가와의 대립이 아니라 교회의 국가에 대한책임을 강조하게 된다. 교회

를 하나님의 나라로 보든51)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52) 하나님의

나라의 목적지라 하든지 또는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의 결과로 교

회가 형성되었다고 말하든지53) 어떤 경우라도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63

50) 한 심사자의 다음과 같은 평이 있었다.‘한국 상황에 대한 비판에서는 앞의 논의들

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굳이 문화라는 범주나 해

석이라는 방법을 동원해야 할 필요성에 동의하기 쉽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상황에

대한 비판이 곁들여진 것으로 보인다.’‘문화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논

지에 근거해 문화상대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문화와 해석학』이라는

졸저에서 문화상대주의를무조건 수용하지도그렇다고반대하지도 않음을논증했다.

필자는 앞에서 한국의 문화, 특히 한국 교회를‘그리스도론에기초한 십자가와 부활

의 신학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용서의 종말론에 기초’하여 그 의미성

과 장·단점을따져 보겠다고언급했다.

51) Dietrich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1930), München, 1986, 162; F. Schleiermacher, D e r

christliche Glaube, Berlin, 1861, §117.

52) Barth, KD IV/2, 742 f.

53) Hans 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Studien zur Theologie des Lukas, Tübingen,

5. Auf. 1964, 431.

5 4 ) Wolfhard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I I I, Göttingen: Vandenhoeck &

Ruperecht, 1993, 44.

55) Wolfhard Pannenberg, Theologie und Reich Gottes, Gütersloh, 1972, 42.

56) Barth, KD IV/3. 2, 704-741, 849-859.

57) Barth, KD IV/2, 815-824.

5 8 ) J. 몰트만/박봉랑 외 옮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317.

Page 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책임의 소재로 일차적으로 죄를 지은 그 또는 그 공동체가 책임을 져

야 함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하도록 한 여러 가지 요인들도 따

져 보아야 한다. 망각 속에서 재생산된 불의에 기반을 둔 사회나 교회

는 안정될 수 없기때문이다.

V I. 나오는말

성서에는 문화에 해당하는 원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물질문화

나 정신문화에 해당하는 사상이 다 포함되어있다. 라틴어 시대가 문화

개념으로 사용한 경작문화의 이념은 창세기가 땅을 경작하고 보존 관

리하도록 하는 문화 창조의 소임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플라톤 시대

부터 사용되어 오던 철학적 교육의 의미인 정신문화의 이념이 그리스

도의 정신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교육시킨다는 사상 속에 내포되어 있

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리쾨르는 위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 문화의 본

질을 소개한다. 필자는 그것을 문화신학의 소임으로 이해했고, 문화신

학의내용으로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 나라그리고 용서의 종말론을소

개했다. 바르트가 문화를 삼위일체의 자취가 드러나는 처소로 의미 부

여했듯이, 리쾨르에 따르면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문화 속에 현존

하심을 논증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

이심을 증명하셨다. 우리는 문화 없이는 부활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

게 된다. 따라서 부활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문화를

십자가와부활의 문화로변형시켜야한다.59)

하고 교파주의, 권위주의, 도덕불감증, 물질만능주의 등을 낳았고 세속

성과 타협하여 국가 권력을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회의

어두운 과거사 청산은 정죄나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 정체성을 회

복하기 위해필요한 절차이다. 교회 안의 지연된 정의는 기독교의정의

를 하찮은 것으로 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정의에 기반한 화해의 장

소여야 할 교회가 정의가 없는 화해를 추구하는 곳으로 오해하게 만들

고 있다.

독일의 유대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1930년대독일사회를규정하

기 위해 사용한‘비동시성의 동시성’개념에 의하면, 한 공동체 안에 전

근대, 근대, 탈근대의 특징이 공존하는데, 교회 세습이 자행되는 한국교

회를 보면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승되지 말아야 할 과

거가 교회 안에서 재생산되고 있거나 새로움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인교

회가 새로움의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과거를 올바

로 청산할 수 있으려면 특히 교회 기득권 세력이 동참할 수 있는 방법

을 고안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과거의 만행을 어떤 식으로든 청산

하는 게 신앙의 관점에서나교회생활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에유리하다

는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일이고, 과거사 청산 없는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어려움이 더 크다는 것을역사의 사례를 통해설명하는것이다.

과거사 청산이 가지는 폐단으로 교회 분열을 우려하는 경향이 있는

데 그것은 교회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교회 분열은 존재하

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었다 사라지고 또다시 형성되는 것이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교회의 폐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새로운 교

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 교회 전체의 참여가 이루어

지도록 해야한다. 화해는 용서뿐만아니라 진실을 요구하고있다. 진실

은 고통을 거치지 않은 채로는 규명되지 않는다. 과거사 청산 문제는

죄나 피해의 책임을 밝히고 묻는 일도 포함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책임의 주체가 교회 혹은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책임의 유형에는 어떤

법적인 차원이나 신앙적인 차원그리고 도덕적인책임이 있을수 있다.

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65

59) 한 심사자가 이 문장이 애매하다고 지적하였다. 문화를 시간의 양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부활을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따라서‘한국

의 문화를 십자가와 부활의 문화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말은 구체적인 역사와 문화,

즉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사건을 이해하고자 하는 성경의 시간관을 한국에 사는 사

람으로서갖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시말하면, 영원을시간 속에서이해하는 서구

Page 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독교가 생명의 문화를 그 본질로 해야 하는지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제

시한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로고스가 내가 주인이 아니라 로고스에

속하는 존재임을 밝혀 로고스를 듣는 내맡김을 요구함으로써 니체의

허무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 주체상을 제시하듯이, 리쾨르는 로고

스의탈윤리에 의한 생명긍정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기

독교의 제의문화는생명문화를추구한다.

20세기 들어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20세기를 죽음의 세기라 불

렀다. 니체의 신의죽음과 그로 말미암은허무주의 도래는20세기가전

쟁의 세기였음을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한국의 현대사도 예외가 아니

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현대사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3·1절 독립운동

에 그리스도인들이 적극 참여하거나, 민주화 과정에 교회가 큰 역할을

한 것은 현대사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21세기를 들어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가 대형화를 추구하거

나 권력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는

현상들이나타나고있다. 교회는 더 이상십자가보다는 부활, 곧 고난보

다는승리의 신학에 익숙해 있다. 이것은 교회를 기복신앙의매체로 생

각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

한 문화 주체 이념으로 십자가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용서의

문화를 제창했다.

주제어

문화 해석학, 문화, 해석학, 문화신학, 리쾨르

Kulturhermeneutik, Kultur, Hermeneutik, Kulturtheologie, Paul Ricoeur

접 수 일 2010년 3월 4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13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또한 리쾨르는 바울이 말한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문화신학의 주제로 설정한다. 그는 황금률을 내용으로 하는 정

의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포함하는 사랑의 새 계명을 매개하는

정의로운 사랑을 문화 속에서 실현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리쾨르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 이해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위임된 문화사명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완성시켜 나가는 일이다. 경제적 배분

정의만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하수같이흐르고, 역사적·종말론적샬롬

의 공동체가 실현되는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이 이 땅에 함께 하는 하

나님나라가 한국땅에서 세워져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동시에 종말론적 용서로 이 세상을 거룩하

게 해야 한다. 리쾨르는 용서가 필요한 시대와 사람 그리고 공동체에게

용서의 종말론을 선포한다. 용서의 종말론이라 하면 십자가의 사랑을

지칭한다. 십자가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듯이, 십자가의 말씀은 용서

의 본성이 어떠함을 암시한다. 리쾨르는 이를 들음의 윤리학으로 설명

한다. 들음의 윤리학이란 선물을 주고받는 상호 관계성의 특징에서 들

어날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 인정에 기초한다. 용서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고 용서를 요구하는 사람은 용서

의 위대성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용서가

필요한 사람임이 바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임한 증거이다. 용

서를 구함은 구원의 은총의 값을 알기때문이다. 리쾨르는 이를 기독교

의 제의문화를통해설명한다.

문화인류학자인 지라르가제의문화를 문화의 기원으로 설정하듯이,

리쾨르 역시 제의문화가 창조문화 속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음

을 지적하면서 창조문화 속에깃들어 있는 생명의 문화와 죄의 죽음의

문화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그 좌표를 제시한다. 그는니체에 의

한 신의 죽음의 문화로 대표되는 허무주의 문화를 넘어서서 어떻게 기

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67

적인시간이해가우리에게도필요하다는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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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69

Page 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schen der sogenannten kulturellen Universalität und dem kulturellen

Relativismus. Riceour widerlegt das Schema, dass die kulturelle

Universalität der Rahmen für die Behauptung der Wahrheit ist. Die

christliche Behauptung der Wahrheit ist nicht kulturell allgemein,

sondern eschatologisch. Da die kulturelle Analytik die Offenheit nach

der eschatologischen Wahrheit als Eigenschaft besitzt, ist es nach der

analytischen Wahrheit zur Überwindung des Kon-fliktes der Analyse

zu streben. Wie die analytische Wahrheit die Grenze des mensch-

l ichen Verständnisses nicht verneint, ist die Offenheit des

Verständnisses von Gott das Wesen der eschato-logischen Wahrheit.

Aufgrund dessen konzentriert sich das Interesse des Verfassers, Gott

und Menschen durch die Kultur zu verstehen, auf die Aufklärung der

eschatologischen Wahrheit.

Hermeneutische Kulturtheologie bei Paul Ricoeur

Chung, Ki Cherl

Professor

Honam Theological University & Seminary

Kwangju, Korea

Der Verfasser versucht mit Hilfe von Riceour zu zeigen, dass die

christliche Kultur der Rahmen ist, Gott und Menschen richtig zu ver-

stehen. Riceour stellt drei Tehmen als Thema der Kulturtheologie

vor. Diese sind das auf Christologie basierte Kreuz und die Theologie

der Auferstehung, das eschatologische Reich Gottes und die Eschato-

logie der Vergebung. Der Gott hat bewiesen, in Kreuz und Auferste-

hung lebendig zu sein. Wir können den auferstehenden Gott ohne die

Kultur nicht als solchen erkennen. Ricoeur legt die Gerechtigkeit und

Liebe von Paulus und das friedliche Reich Gottes als Thema der

Kulturtheologie fest. Es soll ein Reich in Korea gegründet werden, in

dem nicht nur die Gerechtigkeit der ökonomischen Verteilung,

sondern auch die des Gottes wie das Wasser fließt, die Gemeinschaft

des historischen und eschatologischen Schaloms verwirklicht wird

und die Liebe des Kreuzes unter allen weilt.

Solches Reich Gottes muss gleichzeitig durch eschatologische

Vergebung diese Welt heilig machen. Mit eschatologischer Verge-

bung ist die Liebe des Kreuzes gemeint. Die Kulturtheologie hat viele

Debatten mit sich gebracht. Es gibt also Auseinandersetzung zwi-

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정기철, 리꾀르의해석학적문화신학 71

Page 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불교의방편개념의이해와기독교적적용

최태영(영남신학대학교교수)

I. 여는글

불교와 같은 이웃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바람직한 태도 가운데 하

나는 이웃 종교 속에 나타나 있는 개념들을 기독교 진리를 한층 더 쉽

고 깊고넓게 이해하는도구로 수용하는 것이다. 소위 동양종교에 있어

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불교 사상은 비교적 서양종교로 일컬

어지는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매우 귀중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1) 예를들어무아(無我), 연기(緣起), 공(空), 그리고 방편(方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73-102

1) 초심자로서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으로, 조계종에서 신도의 교재로 편찬

한『불교입문』(조계종출판사, 2008)과『불교의 이해와 신행』(조계종출판사, 2007), 불

교에 대한 간명하면서도 포괄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케네스 첸/길희성,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분도출판사, 1994), 기독교적 시각을 가지고 불교를 이해하려는 책으

로서 오강남,『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2006); 길희성,『보살예수』(2004); 유재신,『불

교와 기독교』(1998) 등이 있고, 한국교수불자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수협의회가 공저

한 것으로,『인류의스승으로서붓다와 예수』(2006), 『오늘의 우리에게구원과 해탈은

무엇인가?』(2007) 등을추천하고싶다.

Page 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I. 방편이란무엇인가?

불교 교리에서 방편의 위치는 거의 결정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방편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방편(up ya)은 대승불교에서 독창적

으로 제시한 개념이다.2)“대승불교의 방편사상에 의하면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도록도와주기 위한방편, 곧 일종의 수

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3)

방편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좋겠다. 오

강남에 의하면, 대승불교의 중심 개념인‘공’(空)조차도 방편으로 이해

된다. 종교의 본질이자기중심성극복이라볼 때, 공 개념은 존재론적인

진위및 인식론적유용성을떠나서‘자기중심’이라는 삶의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방편으로 작용한다. 보살(菩薩) 개념도 중요한 방편으

로 사용된다. 오강남은 남을 위한존재라 할 수 있는보살정신이야말로

참 종교가 이룰 수 있는 종교적 이상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상징이라

하였다.4) 그러므로 보살도 불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궁극적 진리 그 자

체가아니라 그 진리를 가리키는하나의 방편이라는것이다.

방편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다행스러운 것은 불교의 창시

자인붓다가 직접 방편 개념을 설명한 것이 매우 잘 남아 있다는 것이

다.『중아함경』에서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의 의미를 바로 전달하기 위

하여‘뗏목’을 비유로 설법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이 필요하지만, 일단 강을 건넜으면 그 뗏

목을버려야만 목적지에 들어갈 수 있다. 뗏목이 유용하다고하여 버리

지 않고 계속 가지고 가려 하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뗏목은 방편,

또는 수단(means)일뿐 목적이 아닌 것이다. 붓다는 가르치기를,‘너희

便) 등인데, 이 중에서 방편은 어떤 특정한 교리의 범주를 넘어서 기독

교 전체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개

념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이 연구를 통하여 불교에서 사용되는방편

개념을 파악하고, 그 개념이 기독교와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

는데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보여주려고한다.

불교의 경전 중『법화경』에는 방편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그

제2장의 제목이‘방편품’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방편 사상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방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법화경을 읽

어야한다. 그런데, 방편은동양불교에서보다도오히려 서구신학자 또

는 종교학자들에 의하여 더 많이 연구되었다. 그러므로 서구권의 방편

이해를 수합하여 그것이 학문적으로 어떻게 규명되어 왔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나는 방편에 대해 연구한 서구권 학자들 중에서 파이

(Pye), 존 힉(John Hick), 그리고 페더만(Federmann)의 주장을 이해하

고자 하였다. 파이는 법화경의 방편 개념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서구

신학 및 종교학계에 소개한 인물이다. 힉은 주로 파이의 책을 통하여

방편을 이해하고 기독교신학과의연관성 속에서 그것을 해석하였고, 페

더만은 힉의미진한 부분을 보완하여방편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서구 종교학자들이나 신학자들까지도 방편을 연구하되 불교

교리에 대한이해의 범주에서 연구한 것이대부분이며, 설령 그것을 기

독교와 연관시키더라도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이해하거나, 혹은단순

한 비교에 그쳤다고 보인다.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불교의 방

편 개념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나아가 방편개념을 기독

교 신학에적용해 보고자 시도한다.

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 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75

2) 오강남,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서울: 현암사, 2006), 137.

3) 앞의책, 139.

4) 앞의 책, 142.

Page 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레를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타는 집 대문밖으로 뛰어나온 아이들에

게 아버지는 진귀한 보배로 장식한 큰 수레들을똑 같이나누어주었다.

이 이야기 후에 세존은 사리불에게 묻는다.“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

냐? 이 장자가 아이들에게 진귀한 보배로 장식된 큰 수레를 똑같이 나

누어준 것이거짓말을한 것은아닌가?”사리불이대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장자는 오직 아이들을 불의 위험으로부터 건

지고, 목숨을 보존케 하여 주었을 뿐이니, 거짓말을 한 것은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방편에 의해 저 불붙는 집으로부터 구해 내지

않았습니까? 비록 이 장자가 가장 작은 수레 한 채도 주지 않았다

해도, 오히려 거짓말한 것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자는 애

당초에‘나는 방편에 의해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8)

방편을 쓰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법화경』은 그렇

지 않다는 대답을 제시한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거짓말이라 할 수 있으

나 내용상으로는 전혀그렇지 않고 오히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었다는 것이다.

『법화경』제4품은‘신해품’으로써 여기에 다른 비유가 등장한다. 이

것은세존이 하는 것이아니라 제자들의무리가 제공하는 비유다.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인데, 아들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 슬하에서 도망

쳐 나와타국으로 배회한다. 아버지는 그동안 엄청난 부자가되어 어느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생각하는 것은 잃은 지 50년이 지난 아들

을 찾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 아들을 찾아 상속

시켜 주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들은 이곳저

곳으로 배회하다가 드디어 아버지의 집 앞에이르렀다. 물론아들은 자

기 아버지를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이누추한 자신과는 전혀

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

였다.5)

방편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법화경』이 방편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

고 있는가를살펴보자. 제목이‘방편품’으로 되어있는제2품에서 세존

6)은 제자인 사리불에게 부처님들의 가르침은 그 의미를 깨닫기가 매

우 어려우므로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여 온갖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고 말한다. 또 세존은 부처님들의 방편을‘심히 심원하

고 미묘’,‘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리하여 사리불은

거기에 모인 모든 자들을 대신하여 세존에게 그 방편을 설해달라고 간

청하였으나, 세존은 거절하였다. 사리불이 세 번씩이나 간청하자 비로

소 설하기 시작한다.7)

제2품에서 방편의 중요성을 설한 다음에 제3품인‘비유품’에서 방

편이무엇인가를실례를 통해설한다. 불타는 집의비유가 그것이다. 한

장자의 오래된 큰 집이 불타기 시작했는데, 그 집에 장자의 어린 아들

들이놀고있었다. 아이들은놀이에 집착하여, 불타는 집의현실을 깨닫

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놀고만

있었다. 곧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인데도 걱정도 없이 불타고 있는 집

에서 나오려 하지않았다. 장자는 아이들을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이 좋아하는 진귀한 장난감이 가득 실린 세 가지수레를 주겠다

고 꾀었는데, 아이들은 수레를 얻고자 하여그동안 즐기던 놀이를 그만

두고 불타는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자는 아이들에게 세 가

지 수레보다 훨씬 더 좋은 수레를 주게 되지만 아이들은 세 가지 수레

를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타는 집에서 빠져 나오게 되었는데, 이 세

수레가 바로 아이들을 구원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장난감 가득한 수

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 기독교적적용 77

5) 앞의책, 80.

6)『법화경』에서는붓다에대한가장보편적인칭호가‘세존’이다.

7) 참조,『법화경』제2품 방편품. 법화경의 번역은 다음의 책을 주로 참고하였다. 홍정식

역해, 『반야심경/금강경/법화경/유마경』(서울: 동서문화사, 2009). 8) 홍정식, 164.

Page 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 석가여래자신이 방편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보여준다.

나는 멸도14)하는 일은 없으나‘장차 멸도하리라’고 설한다. 그것은

이 방편에 의해서 중생을 교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방편에 의해,‘부처님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만나기는 어렵

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비구들이여, 여래를 만나기

는 심히 어렵다’고 설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곧 여

래를 만나보기란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게 되어, 마음으로 부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여 선근을 심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여래는 실

은 멸도하는 일은없어도 멸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남자들이여,

모든부처님들의가르침은모두이와같이중생들을제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모두 진실이며허망한 것은 아닌것이다.15)

석가여래가 죽는 법은 없지만 죽는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그래야만

중생들이 가르침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때문이다. 여래가 죽는다는말은하나의 방편이었다. 이러한 가

르침의 예는제24품‘묘음보살품’에서도 이어진다.

만약 성문의 모습으로 제도하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성문의 모습으

로 나타나 설법해주고, 벽지불의 모습으로 제도하는 것이 좋은이에

게는 벽지불의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해주고, 보살의 모습으로 구하

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해주고, 부처님

의 모습으로 제도하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타

나 그들을 위해설법하였다. 이와 같이 제도해야 할 상대에 따라갖

가지 모습을 나타냈다. 심지어 멸도하는 모습을 보여 제도하는 것이

좋은 이에게는 멸도하는 모습도 나타냈다. 화덕이여, 묘음보살이 대

어울리지 않으므로 놀라서 도망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올 궁리를 하다가 드디어 한 가지 방편을 생각해 내

었다. 그것은 아들을 불러 자기 집 하인으로 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그 아들과 비슷한 복장으로 만나며 가까이 하기를20년을 하

였다. 이리하여 서로 마음이 통하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때, 마침내

부자지간임을 밝히게되고아들은 그것을 수용하게된다는 비유다.

『법화경』제7품‘화성유품’에는 진귀한 보배가 있는 성에 대한 비

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들이 그 성에 가려하는데 거기에 총명하고지혜

로운 지도자가 한 사람 있다. 가는 길이 험해서 사람들이 중도에서 지

친 나머지 지도자에게 그만 포기하고 되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이

지도자는 신통력을발휘하여전면에 도성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사람들

을 그 도성으로 인도하여 휴식을 취하게 했다.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

다. 잠시 후 사람들의 피로가 풀린 것을 알고 지도자는 신통력으로 만

든 도성을 없앤 다음, 사람들에게 말했다.“여러분 어서 갑시다. 보배가

있는 성은멀지 않소. 방금 머문성은 여러분을휴식시키고자 신통력으

로 만들어 낸 것이었소.”9) 사람들이 잠시 쉬었던 도성은 하나의 방편이

었던것이다.

제14품‘안락행품’중에“여래10)는 방편으로 상대편에 따라 설법한

다”11)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방편의 정의를 추리할 수 있는 바, 그것은

상대편의 눈높이에맞추어 행하는 가르침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제15품‘종지용출품’에서도“세존께서 상대에 따라 설법하는

것”12)으로 표현되었다. 또 제16품‘여래수량품’에서는“모두 분별하여

설법한 것이다…. 갖가지 방편으로 미묘한 설법을 한다”13)라고 표현하

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79

9) 앞의책, 188.

10)‘여래’는 붓다에대한또 다른 호칭이다.

11) 홍정식, 221.

12) 앞의책, 229.

13) 앞의책, 230.

14) 멸도(滅度), 즉 죽음을 뜻한다.

15) 홍정식, 232-233.

Page 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것은내용상의 새로움이아니라, 방법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다.20) 방편

이라는 주제를제외하면 특별한‘내용’은 사실상없다는것이다.

‘새로운’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아

주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한다는 데에 이 경전의 중요성이 있으며, 이

새로운 스타일은 불교 전체의 핵심에 관련된 것으로서, 그것은 무엇보

다도방편개념의 고안과 불가분적으로얽혀있다.21)

불교적 가르침과 실천의 전 범위에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이 방편으

로 서술될 수 있다…. 방편에 대한 가르침은 일반적 의미에서 아무

새로운‘내용’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실천의 본질, 목적, 방향 또는 스타일이다. 그것은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이다.22)

그래서 파이는“간단히 말하면 불교는 방편이다”23)라고 요약했다. 방

편 개념을 불교의 주된 가르침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불교 자

체를 방편으로 보았다. 불교를 그 껍질을 벗기며 해부해 보면 남는 것

은 아무것도없고단지방편뿐이라는뜻이다.

I I I. 방편에대한존 힉(John Hick)의 이해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힉은 불교의 방편에 관하여 “religion as

‘skillful means’”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을 썼다.24) 그는 upaya(방편)를

신통과 지혜의 힘을완성한 것은이와같이해서였다.16)

마이컬 파이(Michael Pye)는 불교 특히『법화경』과『유마경』의 방편

개념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실상 첫 번째 서구학자라 할 수 있다. 그

는 Skilful Means: A Concept in Mahayana Buddhism이란 저술을 통

하여 서구의 신학과 종교학계에 불교를 이해하는 깊이를 더했다고 평

가할 수 있다.17) 그에 의하면 방편이란 개념은 대승불교의 주도적 관념

중의 하나이며『법화경』등에서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대승

불교에서는 여러 형태의 불교 가르침과 실천이 잠정적 수단으로써, 깨

달음에 이르지 못한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붓다에 의해 교묘하게만들

어진것으로 주장된다.18)

파이에 의하면 방편은 불교의 근본적인 원리 중 하나임에도, 서구에

서는 열반, 보살, 공 등의 개념과는 다르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주

제로서 널리 연구되지 못했다. 동양에서조차도 방편에 대한 깊은 연구

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편은 불교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이므로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법화경』에서 최고의

방편과 달마(dharma, 진리) 사이의 깊은 연관을 발견한다.“법화경에서

붓다의 가르침의 주제는 방편인데, 그것은 그의 달마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19)『법화경』의 가르침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데, 새롭다

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81

16) 앞의책, 270.

17) 방편(upaya)을 마이컬 파이는‘skilful ‘means’로 번역했다. 산스크리트 용어인 우파

야(upaya)의 문자적 번역은‘수단’(means)이지‘오묘한 수단’(skilful means)이 아

니다. 우파야 또는 우파야 카우살야(upaya-kausalya)는 중국문화권에서는‘방편(方

便)’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어

권에서는 이것이 ‘means’, ‘skilful means’, 혹은 ‘expedient method’, ‘expedient

means’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방편은 한자어로는 방법이라는 뜻이지만, 불교에서는

단순한 방법의 의미를 넘어서서, 의미심장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용어로 사용한다.

Michael Pye, Skilful Means: A concept in Mahayana Buddhism (London: Duck-

worth, 1978), 10-13 참조.

18) Michael Pye, 1.

19) 앞의책, 20.

20) 앞의책.

21) 앞의책, 21.

22) 앞의책, 36.

23) 앞의책, 159.

24) John Hick, “Religion as ‘skilful means’: A hint from Buddhism,” International Journal

Page 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할 수 있다. 잠시 수용하되 더 깊은 차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야 하는 진리, 그것이 방편이다. 대승불교, 특히『법화경』은 이러한

의미의 방편론을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사실상 유일한 길로제시한다.

여기서 힉은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고(dukkha, 苦)와 열반

같은기본 개념들을 포함하는 사성제, 무상, 무아, 공(空) 등의 불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고,

단지 방편에 불과하다면, 모든 가르침(doctrine)이 방편이라는 가르침

(doctrine) 또한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은‘이

진술은 거짓이다’라는 진술과 유사한 논리적 모순에 이르는 것이 아닌

가 라는 것이다.27) 그래서 힉은 불교에서 방편이라는 견해에 한계가 있

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방편이라는 개념은 목적이라는 개념을 내

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교는 무슨 목적에 이르는 방편인가?

불교 신자들의 대답은 깨달음, 득도, 해탈, 열반 등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 자체가 또한 방편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수단 이외에

아무 것도 없이 남겨질 것이고, 그 수단이라는 것도 어떤 무엇에 이르

는 수단이 아닐 것이며, 그러면 모든 체계는 모순 속으로 와해된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힉은 하나의 대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불교가 그

것에 이르는 수단인 그 목적에 관한 가르침 자체는 또 다른 하나의 방

편이아니라, 비방편(non-upaya)으로의도된것으로 보는것이다.28)

이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방편에 속하는 것과 비방편에 속하는 요

소를 구별하는 선을 긋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 구별은 전적으로

방편적인 것, 전적으로 비방편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 방편성(upayity)의 정도에 속하는 구별이다.29) 즉, 방편의 정도

‘skillful means’로 번역한 파이(Michael Pye)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

는데, 그가말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방편에는 좁고 넓은 두 의미가 있는데, 좁은 의미의 방편은 다른 사

람에게 전달해 줄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 선생이 사용하는 하나의 장

치다. 붓다는 일반적 진리, 곧 어느 시대나 어떤 상황에서나 유효한 진

리들을 선포하는 대신에,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그들의 수준

이나 이해의 단계를 고려하여 적절하게 가르쳤다. 힉에의하면 이런의

미에서의 방편은 모든 종교전통의 선생들에 의해서 사용된다. 예를들

어 예수께서도 비유나 직유들을 사용하셨고, 유도 질문도 하셨다. 방편

은 모든 교육학에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런 좁은 의미에서의 방편은

이례적이거나 특기할만한것이아니다.25)

그러나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방편 개념은 불교의 본질 또는 종교

일반의 본질에 들어가는 어떤 심원한 통찰을 표현한다. 강을 건너는 데

소용되었던 뗏목을 버려야만 계속 나아갈 수 있듯이, 달마(dharma)는

넘어가기 위한 것이지, 보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Wit-

t g e n s t e i n )의 책(Tractatus Logico-P h i l o s o p h i c u s)의 끝( 6 . 5 4 )에 있는

진술과 유사하다.“나를 이해하는 사람, 즉 나의 명제들과 씨름하고 드

디어 그것을 통과한 사람들은 마침내 그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

식하게 될 것이다.”지붕에올라간후에는 사다리를버려야 한다.26)

힉에 의하면 좁은 의미의 방편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 교육학적 방

법론으로 어디에서나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방편은

방법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

장치, 방법이다. 그러나 심원한 의미에서 불교의 본질에 해당하는 방편

은 더 높은 단계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할 낮은 단계의 진리라

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 기독교적적용 83

for Philosophy of Religion, vol. 30, No. 3 (December 1991): 141-158.

25) 앞의논문, 141-42.

26) 앞의 논문, 142. 참조,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New

York: The Humanities Press, 1951): 189.

27) Hick, 143.

28) 앞의논문, 143. 이 점에서힉의방편이해의 한계를지적할 수 있다. 그는불교에 비

방편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으나, 파이가 이해했듯이 법화경이 말하는 바는 불교 자

체가곧 방편이며, 필자도 그렇게생각한다.

29) 앞의논문, 143.

Page 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우주의 구조(structure of the universe)에 관해서 말하는 불교의 언

어를 비실재론적으로(non-realist)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판적 실

재론적으로(critical realist)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힉

은 방편에 대한 좀 더 깊은 의미를 추구한다. 비실재론은 우주의 구조

를 우리 자신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본다. 반면 비판적

실재론은 그것을 우리자신을 넘어서 있는 실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

다. 그러나 그 실재들은 언제나 부적절하기는 하지만 인간적 개념들, 인

간적 사고양식과 언어를 통해서 파악되는 것으로 본다. 이 두 이해의

방법 중에서 힉은 후자를 취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방편은 단지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불과하고, 더 이상 실재를 가리키지

않음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이나 그 이후의 대부분의 불교의 가르침에

일치하지않는다고보기때문이다.35)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궁극적 실재 그 자체, 곧 붓다의 본질 혹은 법

신(Dharmakaya) 혹은 완전히 순수한 절대자(dharmadhatu)와 이것의

인간의식에의현시를 구분한다. 법신은 두 가지면에서 알려진다. 하나

는 완전히 무흠한 절대자로서, 다른 하나는 그것의 자연적 유출로서이

다. 법신의 이 두 가지면은 서로다르지만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하

나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궁극적 법신 곧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 자체(nirvana, 열반)는 자기 자신을 세상에 아미타불, 동정으로서의

법신(d h a r m a k a y a-a s-c o m p a s s i o n )으로 나타냄으로써 인간으로 하여

금 이해하게 한다. 이해할 수 없는궁극적 실재곧 법신과 그것의 인간

의식에의 현시들로 구별함으로써, 우리는 형체가 없는 형언할 수 없는

법신에 관한 부정적인 불교 언어가, 그 현시들에 관한 긍정적, 구체적,

섬세한 언어에 비해서 훨씬 덜 방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36) 궁극적

가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힉은

현대의 비평적 기독교 사상에서 사용되는 것과 유사한 구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종교 경험과 그 종교 경험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이론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적 경험 자체와 그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개념 및 언어로 구별하고, 후자를 전자

보다더 방편적인것으로 여기는 것이다.30)

힉은 여기서 불교적 경험에 속하는 것을 열거한다. 그에 의하면, 사

성제의 고, 집, 멸, 도(道), 열반 등은 모두 고타마31)가 경험한 불교적 경

험이다. 그것들은 이론이나 사색이라기보다는경험에 대한 보고(report)

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수준에서조차도 거기에는 항

상 해석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경험의 인식은

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개념의 사용을 내포한다. 인간의 개념체계

는 언어로 구현되고, 기술되는세계도 언어에 의해형성된다. 인간의 모

든 지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적 형태를 나타낸다. 그래서 보편에 대한직

관적 통찰은 인간의 의식 안에 나타나기보다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침묵을 요구하는 것이다.32) 그래서 붓다가 침묵을 깨고 진리를

세상에 전할 때 그는 방편을 사용하였다. 언어로서는 원칙적으로 파악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언어에 담아서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방편을 사

용한것이다.33)

방편성의 정도 또는 단계에 관해서 힉은, 예를 들어 사성제는 비교

적 낮은 단계의 방편성을 가진 반면, 연기(pratitya samutpada)는 사성

제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방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무상(anicca) 개념은 경험의 보고(report)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론으로

보았다.34)

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85

30) 앞의논문, 143.

31) 붓다의원래의 이름. 역사적 붓다를 가리킨다.

32) Hick, 145.

33) 앞의논문, 145.

34) 앞의논문, 145-47.

35) 앞의논문, 149-50.

36) 앞의논문, 150-51.

Page 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붓다의 삶에 관한 이전

의 모든 주장들도 방편으로 여겨졌다. 즉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공된

것이지 완전히 사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교육적인 허구로

서 선한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40)

교리는 목적을 가진 일종의 허구라는 생각이 방편의 개념에 나타난

다. 그것은 붓다에 의해 말해진 것은 다른 감추어진 의미를 가지고 있

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팔리 경전41)에는이런 구별이 없다. 팔리 경전에

서는 붓다의 말과 행위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붓다가 참으로 그

것을의미했다고 여겨진다. 거기에는 말 또는행위와 그것들의 의미사

이의 갭에 대한 인식이 없다. 예를 들어, 종교적 목표들이 다른 목표들

을 얻기 위해서만 주어졌다는 인식이 없다. 반면, 방편에 관한 초기 대

승의 가르침에는 붓다가 말하고 행한 것과 그 의미 사이에 갭이 인식

되고 있다. 그 경우, 붓다의 말은 문자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중지되고,

그것이 처음부터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텍스트 속에들어와 있는 것으

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대승불교학자들은 혁신적인 생각을 했

다. 즉 초기불교 가르침에서 문자적인 차원은 의도된 차원과 다르다는

것이다.42)

붓다가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전달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깨달음의 길에서 발전하도록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기술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붓다의 행위의 이러한 교육

적인 측면이 실제로 불교의 일부가 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방편을 가리키는 것이아니다. 방편은 초기 대승경전에

소개된 특별한 전문용어다. 대승경전에서방편이란용어는 대승이전의

불교에는실제로 없었던 새로운 인식을 가리킨다.43)

실재가 그 안에서 현시되는 모든 다른 양식들은 불교적 이해로 이끄는

방편의 양식들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불교의 신앙공동체들이 궁극적인

존재를 생각하고경험하는 길들이다.

방편이란 개념은 열반 경험의 우주적 의미가 여러 가지 길들로써 개

념화될 수 있으며, 그 모든길들은 그 경험의 중요성과유용성을 전달하

고 있으며, 그러나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그것을(열반 경험) 개념화 시

키는 유일한 올바른 길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다. 이

러한 사고의 체계들은 임시적이고 도구적이며, 그리고 마치 붓다의 비

유에서의 뗏목처럼그 기능을 완수한 후에는버려져야 될 것들이다.37)

I V. 방편에대한페더만(Asaf Federman)의 이해

불교학자요 심리학자인 페더만은 대승불교 경전에는 방편 개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반면, 대승불교 이전의 경전에는 거의 침묵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에 의하면 방편 개념은 대승불자들에 의해서 과격

한 해석학적 장치로 발전되었는데, 곧 텍스트가 문자적으로 말하는 것

과 그것의 숨은 의미 사이에 갭(gap)이 있음을 대승불교가 잘 인식하

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8) 그에 의하면 방편은 완전한 대승불교의 창안

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승불경에서 넓게 사용되었고, 특별하고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방편의 교육학적 의미에 새

롭고결정적인해석의 층을더해주었다.39)

방편은 하나의 해석의 방법인데, 그것은 사실(fact)을 교육적인 문학

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87

37) 앞의논문, 151-52.

38) Asaf Federman, “Literal means and hidden meanings: a new analysis of skillful

means,” Philosophy East & West, vol. 59, Number 2, April 2009 (Hawaii: Univer-

sity of Hawaii Press, 2009): 125.

39) 앞의논문, 125.

40) 앞의논문, 125.

41) 상좌불교의경전을 가리킨다.

42) Federman, 126.

43) 앞의논문, 126.

Page 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때문이다. 첫 단계에서 방편이란 용어는 단지 교육적 의미에서 사용된

다. 곧 붓다는 자기의 메시지를 가장적합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교묘한 방법을 사용했다. 목표에 도달했을 때 그 방법은 떼어 내야 한

다. 이것은 힉이“방편의 좁은 의미”라고 불렀던 그것이다. 이것이 말하

는 것은 가르침이 진리가 아니므로 그 가르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뗏목 비유에서 방편이란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비유

는 방편의 정신을 대체로 나타내 주고 있다. 곧, 가르침은 그것이 작동

할 동안에만간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그 개념이 명

시적으로사용된 것과는 전혀다르다.48)

제2단계에서 방편은 분명한 해석학적 도구가 된다. 그것은 분명히

말하기를, 붓다의 이전의 가르침은 방편 이외의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새 가르침으로 대체되거나 혹은 전적으로 폐기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힉은 이것을 방편의“넓은(comprehensive) 의미”라고 부르고 이전의

것과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49) 이처럼 그는 방편 개념에 있어서

대승사상과 대승 이전의 사상의 질적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법화경』의 메시지는매우 도전적이다. 그것은 말하기를, 붓다는 제자들

이 숨겨져 있던 목적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을 실제로 의도적으

로 속였다고 하였다. 붓다의 말뿐 아니라 그의 행동 및 전기( b i o-

graphy)도 단지목적에 이르는수단일 뿐이다.『법화경』은 그것들을실

제로 교육적 허구의 한 형태로 취급한다. 방편의 이런 의미는『법화경』

메시지의주요부분으로서, 초기불교경전에는나타나지않는다.50)

『법화경』2장에서 붓다는 말하기를, 자기의 지혜는 독각(p r a t y e k

페더만은『중아함경』에 나오는 뗏목 비유를 방편에 관한 단지 좁은

견해일 뿐, 대승의 견해와는 매우 다르다고 본다.44) 그 이유는 뗏목이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은 그래서 목적에 이르면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직 대승불교의 방편개념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

이다. 대승불교의 방편은 달마가 문자적 의미와 모순되는 숨겨진 의도

들과 함께 전달되었다고 말할 때 가능하다.45) 페더만은 이 점을 분명히

구분함으로써방편에 대한힉의 이해를 능가한다.『법화경』에서는 가르

침들이 방편 외에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46) 방편 그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뗏목 비유가 대승불교의 특유한 방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

로 사람을 목적지로 옮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 대승불교의 독

특한 방편은 단순한 수단 이외에는 목적과 연관하여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것이다. 그래서그것은 일종의 속임수로보일수 있을정도이다.

페더만은 다미엔 권(Damien Keown)의 논문 “Paternalism in the

Lotus Sutra”에서 자기의 주장에 대한 도움을 얻는다. 권은 방편의4단

계 진화형태를 말했는데, 거기서 팔리어 경전에 나타난 첫 단계와『법

화경』에 나타난 둘째 단계의 차이를 탐구했다. 그는『법화경』의 중요성

은 모든가르침은 잠정적이고 궁극적으로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

는데있다고 하였다.47)

제1단계와 제2단계 사이의 차이가 의미심장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대승불교가 이전의 불교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바로 그 점을 보여주기

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89

44) 앞의논문, 127.

45) 페더만은방편을숨겨진 의도를가진가르침으로이해한다.

46) Federman, 127. 방편의내용에서진리를 찾을수 없다는 뜻이다.

47) 앞의 논문, 127에서 재인용, Damien Keown, “Paternalism in the Lotus Sutra, ”

Journal of Buddhist Ethics(1998) 5: 202. 권에 의하면, 3단계는Vimalakirtinirdesa

Sutra(유마경)이고, 4번째 단계는 뛰어난 보살에 의해 수행된 논쟁의 여지가 있는

행동들이방편으로설명되고 규범적윤리로인정되는 단계이다.

48) Federman, 128.

49) 앞의 논문, 128. 1단계에서 방편은 교육적 내용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2단계에서 방편은 교육적 내용을 가지지 않는다. 수단과 목적과의 관계성에서 방편

은 단지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방편이 그 목적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 내용은일고의 가치도없어진다.

50) 앞의논문, 128.

Page 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르침들이 자기의 이해를 초월하는 무한한 지혜와 동정심의 원천으로부

터 나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실로, 보살들은‘믿음의 힘에 견고

히’서 있음으로써 파악 불가능한 달마를 이해할 수 있다. 사리불은 자

기와 다른 이들이 일심으로 붓다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들

었다. 나아가 그들이 이 경전을 이해할 수 있게된 것은그들자신의 어

떤 지혜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붓다의 말씀을 믿었기때문이라고한다.

이런 유의 방편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서, 방편으로 사용되는 이

야기의5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페더만에 의하면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리 곧 모든 것을 아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무지하다. 둘째, 경전의 독자, 청자인 우리는

모든 것을 아는 인물과 같은 견해를 공유한다. 셋째, 다른 사람들은 무

지, 두려움, 혹은 제한된 견해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이 때문에, 모든

것을 아는 인물은 온전한 진리를 드러내지 못하고 방편을 사용하게 된

다. 넷째, 방편을 사용하는 그의 동기는 자비이다. 그는 상황을 잘 알고

다른사람들의한계를 잘 알기때문에 지혜롭게 행동한다. 다섯째, 이야

기의 끝에서 진리는 드러나는데, 그와 함께 사용된 함정 혹은 방편의

완전한 정당성이드러난다.56)

『법화경』에서 모든 가르침들의 문자적인 이해는 직접적으로 비판된

다. 그 가르침들은 최소한의 능력을 가진제자들을 염두에 두고속임수

와 함정들로서 제공된 것으로 본다. 그것들은 방편으로 이해되어야 하

는데, 곧, 숨겨진, 파악하기 힘든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붓다는 이것을 말하지만 다른것을 의도했다고 보는것인데, 이런점에

서 이것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다.57) 방편은 옛 가르침들은 지혜가

결핍된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법화경은 높은 수준의 가르침으

로 본다. 이런 높은 수준의 가르침은 큰 믿음으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a b u d d h a s)이나 성문(s r a v a k a s)5 1 )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들은 궁극적 목적을 얻고 해방을 얻은 자들로 생각되어 왔으므로 이

것은 대단히 도전적인 발언이었다. 어째서 완전한 지혜를 얻은 것으로

여겨져 왔던 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인가? 붓다의 대답은 이러하

다. 그는 사람들이 고(suffering)에서 해탈(liberation)되도록 돕기 위해

오직 방편으로서만 독각이나 성문의 길을 가르친 바, 그것은 사실상 궁

극적목표가 아니라 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바는, 그들은 자기들이얻

었다고 생각한 것을실제로는 얻지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 가르

침과 새로운 주장의 관계는 무엇인가? 붓다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거짓을 말했는가? 실제로, 우리는 아라한(arhat)52)들이 모두 의심의 그

물에빠졌다는것을읽게된다.53)

붓다는 자기의 지혜가 너무 심오하여 제자들에 의해서는 통찰될 수

없다고 하였다.『법화경』2장은붓다와 다른청중들의 차이를 강조한다.

심지어 사리불(Sariputra)조차도54) 붓다가 깨달은 달마를 이해하지 못

한다. 왜냐하면 오직 붓다들만이55)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

약 붓다들만이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그 주장을 하는 바로

그 텍스트의 위치는 무엇인가? 이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방편의 표현인가? 다른 말로 하면,“아무도 이 문장을 이

해할수 없다”라는역설의 다른표현이 아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종교적 실천은 엄청난 양의 믿

음과 신념(faith and belief)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하는 것이다.

누구도 그 가르침들의 궁극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 가

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91

51) 성문이나 독각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소승불교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가리

킨다.

52) 소승불교에서수행을통해최고의 경지에이른사람.

53) Federman, 129.

54) 그는초기경전에서아라한으로여겨졌다.

55) 석가모니만 아니라 많은 붓다들이 있다. 단수로 사용될 때는일반적으로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56) Federman, 133.

57) 앞의논문, 135.

Page 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일 뿐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그 전체가 방편이라 할 수 있는데, 최고의

방편은『법화경』이 말하듯 진리와 불연속적인 방편이다. 즉, 불연속적일

수록 최고의 진리라는 입장이다. 방편으로 제시된 가르침과 그 가르침

이 목적하는 궁극적 진리 사이에는 논리로서는 연결되지 않는 큰 갭

(gap)이 놓여 있다. 그 갭을 건너가는 것 곧 궁극적 진리를 깨닫게 하

는 방편의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구도자가 믿음

으로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방편 개념은 기독교와기독교 신

학에어떤의미가 있을까?

첫째, 방편 개념은 어떤 기독교 교리 또는 신학도 절대적일 수 없고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정한 신학 혹은 교리는

일종의 방편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좁은 의미에서의 방

편 개념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원종교들에서도 발견된

다. 힉은 기독교의 교리의 발전에서 불교의 방편과의 평행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구원론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마귀의 힘으로부터 십자가

의 대속에 의하여 하나님과 하나 됨 혹은 평화를 얻었다고 하였다. 중

세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상처 입은 하나님의 위엄을 어루만지는 만

족으로 여겨짐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용서되고 회복되었다는 사상으

로 이동되었으며, 다시종교개혁시대에는십자가에서 예수는 우리대신

에 의로운 벌을 받으셨다는 사상으로 넘어갔다. 이것들은 모두 속죄에

대한기독교의교리들로서, 하나님께서그리스도의십자가를 통하여 어

떻게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받아들이셨는가를

설명한다. 이것들은 모두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구원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이었다. 이리하

여 그것들은 모두 각각 다른 사회 상황에서 방편으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61)

것이다.58)

방편은 붓다의 삶의 역사적 이야기 및 그의 가르침들에 관한 해석

학적 장치이다. 만일 우리가 옛 이야기를 텍스트라고 부른다면, 방편은

주석적 반응으로써, 곧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 곧 문자와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59) 방편은 진실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 실제로

진실이 아니며, 진실은 다른 어떤 것이며 늘 그래왔다는 것을 주장한

다. 그것은 새로운 갭을 가리키는 손가락(pointer)인데, 텍스트 상의 사

실들 곧 전기적이거나 교리적인 사실들과, 그것들의 숨겨진 다른 의미

사이에 인식되어온 갭을가리킨다.60)

V. 방편개념의기독교신학적적용

이제 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룰 시점이 되었다. 그것은

방편 개념을 기독교 신학에 적용할 수 있는지, 적용한다면 얼마나 그리

고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는 것이다. 먼저 지금까지 논구

한 방편 개념을 간략하게 정리한 다음, 그것이 기독교 신학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겠다.

대승불교가 말하는 방편에 두 종류가 있다. 곧 궁극적 진리와 연속

성을 갖는 방편과 불연속적인 방편이다. 중아함경의 뗏목 비유에서 발

견되는 방편은 전자에 속한다. 궁극적 진리는 뗏목과 다르지만 뗏목이

없으면 얻을 수 없다. 이 경우 방편은 궁극적 진리로 인도하는 과정,

길, 혹은안내자가 된다. 반면『법화경』에서의 방편은 후자에 속한다. 불

타는 집의 비유에서 세 가지 수레는 궁극적 진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를 궁극적 진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

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 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93

58) 앞의논문, 136.

59) 앞의논문, 136.

60) 앞의논문, 136. 61) Hick, 153.

Page 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마음조차도 초월한다”63)고 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말하기를,‘그무

한함에 의해서 신의 본질은 우리의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형태

를 능가한다’고 하였다.64) 힉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들은 명백히, 인간의

개념의 범위를 넘어 있는, 궁극적 현실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알려지고 묘사되는 하나님 사이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데, 곧 하나님 자

체(God a se)와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pro nobis) 사이의 구분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이러한 구분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노자

(老子)의 도덕경은 이렇게 시작된다.‘도라고 표현되는 도는 영원한 도

가 아니다.’65) 이와 같이 모든 대종교들은 불교의 방편과 같은 사상들

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궁극적 존재(하나님)에 이르게 하

는 방편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궁극적 존재는 인간의 말이나 개념으로

는 직접적으로, 완전하게표현될 수 없기때문이라말할수 있다.

셋째, 대승불교 법화경이 말하는 방편론을 기독교 신학과 성서해석

에 적용하면, 문자주의에서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방편은 궁극적 진

리가 문자를 통해서 표현되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교인

들 대부분이 닦는 참선수행으로 간화선(看話禪)이 있다. 일정한 화두

(話頭)를 보면서 하는 수행인데, 참선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논리

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두로 사용되는 문답 가운

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부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평범한 물음

에 대한답으로 제시되는것은엉뚱하게도‘삼베 세 근’,‘마른 똥 막대

여러 가지 기독교의 교리들은 각각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바, 그

것들은 절대적인 영원한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기독교

신학이나 교리로 하여금 다른 신학이나 교리, 혹은 다른 종교 사상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것이 절대적인

영원한 진리가 아닌 한, 자기 자신을 상대적인 진리로 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다른 교리나 신학개념에 대해서 열린 태도로 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주요주제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그리고 지역과 개인에 따라 달랐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학, 교

리 그리고 종교를 하나의 방편으로 봄으로써, 다른신학이나 교리그리

고 다른 종교에 대하여, 영원한 절대적 진리를 향하여 대화하고 함께

나아가는동반자로여기는 겸손하고 성실한 태도가요청된다.

둘째, 방편론은 기독교 신학으로 하여금 교리 또는 신학 개념의 한

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그것은 궁극적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사상은 궁극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대승불교의 방편론이 의도하는 핵

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꼭 불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

니고 기독교에서도 오래전부터 있었고, 그 외의 종교에서도 많이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숨어계시는 하나님 혹은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본질 내지 성품을 사랑, 거룩, 전

능 등등으로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언

어로 하나님을 다 알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숨어 계시는 하

나님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하나님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있을

뿐 아니라, 천사 및 모든 초현세적인 지성들의 범주를 넘어서 계시는,

생각할 수 없고말할 수 없는, 언어로서는 모든표현을 넘어있으며, 단

하나 그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모든 이름을 능가하는’이라

는 유일한 이름이 있을 뿐”62)이라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하나님은

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95

62) Gregory of Nyssa, Against Eunomius, I, 42,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2, vol. V, trans. P. Schaff and H. Wace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54), 99. Hick, 156에서재인용.

63) Augustinus, De Vera Religione, 36:67. Hick, 156에서재인용.

64) St Thomas Aquinas, Summa contra Gentiles, Bk., I, ch. 14, para.3. Hick, 156에서

재인용.

65)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여기서 상도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를 가리킨다.

참조, 정재욱 편, 『노자도덕경』(서울: 자유문고, 1989), 26.

Page 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종교인 기독교와 대비하여 자력종교로 이해하고 있으나, 불교 특히 대

승불교도궁극적으로는 타력종교임을시사한다.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방편론이 가르치기 때문이

다. 적어도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만큼은 기독교와 불교는 사실상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기독교에서도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

지만개인의 노력이 배제되는 것이 아닌것처럼, 불교에서도해탈이 개

인의노력에 달려있지만, 자기의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확실하

게 가르쳐 주는사상이 바로방편이다. 방편이 효력을 발휘하여 목적을

성취하려면 구도자가 붓다에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다가가야만 되기

때문이다.

방편 사상이 신앙의 필요성을 보장해 준다는 것과 연관하여 대승불

교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인 회향(回向)도 믿음을 중히 여기는 불교의

타력종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회향은 우주적 보살

들이 수많은 겁을 통해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여 쌓은 그 넘치는 공덕

을 다른불쌍한 중생에게 나누어 주는것을 가리킨다. 오강남에 의하면

이러한 회향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말하는 은총이나 은혜와 유사하다.

대승불교 중 정토신앙에 이르러서는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을 믿는 믿

음만으로 극락에 태어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69) 말하자면 대승불교

에서도 믿음에 의해 회향의 은혜를 입고 해탈 내지 구원에 이르는 진

리를가르치고 있는것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일종의 모험을 동반하듯이 불교의 방편론도 모험

을 요구한다. 끝을보지못하는 가운데 믿음으로투신하는모험이다. 방

편의 정당성은 믿음으로 투신한 후가 아니면 알 수 없다. 방편에 따라

믿음으로 투신한 뒤, 그 결과를 경험한 후에야 방편의 정당성이 확보되

는 것이다. 즉 방편의 정당성과 붓다에 대한 믿음은 서로 결부되어 있

다. 이 점에서도최소한 기독교와 불교는 공통성을가진다. 불교의 방편

기’,‘그대는 누구인가?’등이다.66) 이 화두를 풀기 위하여 구도자는 몇

달, 몇 년을 수행하는데, 불교 또는 방편 개념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참으로 해괴하기까지한 문답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화두를 붙

들고 수행하는 동안 문득 화두가 깨달아지면서 진리의 세계가 눈앞에

전개된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이 화두를 통해서 깨달은 진리가 무엇일

까? 두말할 것 없이그것은 언어로 표현되지않는세계에 속할것이다.

궁극적 진리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되

지 않는다는 것을생각하면, 성서의 문자들이 진리에 대한절대성을 가

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사실상 절대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다. 그리스

도가진리이고, 성령이 진리의 영이다. 그리스도또는성령은 성서의 문

자와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축자영감설적으로성서를 이해하는것은

위험성이 있다.67) 성서가 기록된 말씀이지만 계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칼 바르트의 견해는 불교의 방편론이 말하는 바와 상당히 통하는 바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에 의하면 성서가 인간의 언어임에도 하나님의 말

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계시에 대한증언이 되기때문이다.68)

넷째, 방편사상은 신앙의 필요성, 중요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불교와

기독교를 한층 가까운 종교로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흔히불교를 타력

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97

66) 김성철,『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논리에 의한 해탈』(서울: 불교시대사, 2006): 254-

255.

67) 경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기독교와 불교 간에 차이를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즉

기독교는 위경, 외경 등을 제외한 정경을 진리의 방편이 아니라 진리자체의 기록으

로 여김에 비해, 불교는 정경 개념이 없었으므로 모든 경, 론, 율을 수집하여 팔만대

장경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편 개념을 기독교에 적용할 경우 경전자체가

아니라 경전에 대한 해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옳다는 견해이다. 일리가

있지만 나는 바르트의 말씀론에 의거하여 정경조차도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이상

그 자체적으로영원한 절대적진리라고주장할 수는없다고 생각한다.

68) 참조,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2,§ 19. 457-537. 69) 오강남, 134.

Page 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데리고 가는 것인데, 대승불교는 이것을 방편이란 개념으로 가르쳤다.

구도자는 물가로 갔으나 물이 보이지 않으므로 방편 그 자체를 통해서

는 아직 물을 맛보지 못한다. 물이 어디 있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

나 방편을 통하여 이미 물 있는곳에는 왔다. 이제는 마시면 된다. 방편

이란보이지 않는물을마시게 하는가르침이라할 수 있다.

불교가 타종교나 사상에 대해서 비교적 유연하게 대응하게 되는 이

유는방편 사상에 있다. 불교는 특정한 개념이나 교리에 집착되지 않는

다. 궁극적 진리는 문자나 언어혹은 교리나 사상 체계로 표현할 수 없

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하나를 절대시하여 다른것을 정죄하는행태는

불교적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기독교를 이웃 종교로 어

렵지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도 방편으로서의불교를 잘

이해하면 불교를 이웃종교로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방편 개념이 그리스도인과 불교인이 건설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하나의 좋은접촉점 역할을 하게되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방편, 대승불교, 법화경, 궁극적 진리, 기독교와 불교.

upaya, Mahayana Buddhism, Lotus Sutra, Ultimate Truth, Christianity

and Buddhism.

접 수 일 2010년 3월 31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15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개념은 불교와 기독교가 외형상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알고보면서로

그렇게 멀리떨어져 있지않을수도있음을 암시한다.

V I. 닫는글

김경재 교수는 불교가 기독교를 풍성하게 해주는 위대한 이웃 종교

라고 하였다.70) 그는 기독교가 자신 안에 갖추고 있는 진리이면서도 지

금까지 보지 못한 것들을 불교를 통해 깨닫게 됨으로써 이전보다 성숙

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71)

방편은 불교의 진리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방편을 주제로 하고

있는『법화경』이 가르치는것은불교의 최고의 가르침이방편이며나아

가 불교자체가 방편이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진리

자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 자체는 언어로 서술될 수

없고, 다만 각자가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가르침이란각자의 깨달음을가장잘 도와주는방편일 뿐이다.

말이 물을 마시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방편은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가르침을 통해서는 말을물가로 데리

고 갈 수 있을 뿐이지 물을 마시는 것, 곧 진리 체득은 각자의 몫이다.

흥미로운 것은불교에서는 물 자체에 대한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

자면 물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를 체득한 자에게

는 물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물은 마실 때

존재한다. 마시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는다

는 것은 없는 물을 마시는 행위에 해당한다. 물은 없지만 마시면 있는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물가로

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99

70) 김경재,“기독교에서 본 붓다”, 한국교수불자연합회·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인류의

스승으로서붓다와예수』(서울: 동연, 2006), 75.

71) 앞의책, 76.

Page 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 Application of the Buddhist Concep ‘Upaya’ in Christianity

Choi, Tae Young

Professor

Youngnam Theological University and Seminary

Kyungsan, Korea

The Buddhist concept of upaya (skilful means) seems very useful

in understanding the Christian truth. Upaya generally teaches that, in

order to attain a higher realization of truth, a person must temporarily

hold then throw away lower level truths. There are many levels in the

category of upaya, but the highest is the thought to be in the Lotus

S u t r a, which declares that upaya is actually the only way to reach

ultimate truth in Mahayana Buddhism.

In Buddhism, the experience of ultimate truth is impossible to

express through human language. If one were to try and express it,

one could use u p a y a. However, the language of upaya is bound to

differ from the ultimate truth. Therefore, the meaning of u p a y a

should not be taken literally. If taken literally, it could seem like a

kind of trick or fabrication. Between the teachings of the upaya and

its purpose, ultimate truth, there is a deep gap that cannot be bridged

with logic. Faith is needed to cross the gap and to attain the ultimate

truth that is the intention of the upaya.

What the concept of u p a y a contributes to Christianity is as fol-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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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tgenstein, Ludwig.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New York: The

Humanities Press, 1951.

1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최태영, 불교의방편 개념의 이해와기독교적적용 101

Page 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문화적기억과그것의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이석규(서울신학대학교강사)

I. 서론: 목적과방법

역사와 문화적 기억의 문제는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에서 뿐만 아니

라, 세계의 역사적인정황가운데서화두로 등장하고있다. 이것을 통하

여 국민과 민족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문화가 건설되고 무엇보다도 개

인과 집단의 삶을 위한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고 있다. 본 연구는 여기

에 부응하여 기억과 문화적 기억이론을 발전시킨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고학자 아스만(J. Assmann)을 통해서 기억을 탐구한다. 아스만은 기

억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을 사회와 역사적인 차원에서 그 중요

성을 고찰하고 밝힌 공헌이 크다. 따라서 본 연구도 먼저 그의 연구방

lows: First, it shows that Christian doctrines or theologies cannot be

absolute and that they can change depending on circumstances.

Certain theologies or doctrines can be considered as types of upaya.

Second, the concept of u p a y a makes Christian theology plainly

acknowledge the limitations of doctrines or theological ideas. It

teaches that ultimate truth cannot be expressed through human

language, so any thought formed by human language cannot be ulti-

mate truth. Third, when we apply the concept of upaya to the inter-

pretation of the Bible and Christian theology, it can help us to be

liberated from literalism because it says that ultimate truth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Fourth, because the concept of u p a y a a l s o

affirms the necessity and importance of faith, it helps us understand

B u d-dhism and Christianity as religions that have some closeness

and commonality.

The concept of u p a y a in Buddhism is a hint that Buddhism and

Christianity are not so distant from each other though they seem very

different in outward appearances. The concept of u p a y a could be a

kind of meeting point for a constructive dialogue between Christianity

and Buddhism.

1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103-131

* 본 논고는2009년 봄 학기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관하는 정기 학술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이것이 재구성될 수 있도록 특히여

기에 참가했던 토론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논문 게재를 위하여 한국조직신학회

편집부 주관으로 본 논문을 익명으로 평가하게 해준 심사 선생님들에게도같이감사

드린다.

Page 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여 알브박스(Halbwachs)의‘집단회상’이론이 매우 중요하다. 알브박스

에 따르면“개인 단독으로 체험하고 목격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

실의 기억은 집단적이며 타자에 의해서 회상 속에 빠져든다. 그러므로

개인은 현실에서 단 한 번도 혼자가 아니다.”2) 알브박스는 회상의 이러

한 집단적인 구성을 발전시키되 예술사가인 바르부르크(A. Warburg)

를 의지한다. 바르부르크는 사회학자로서 자신의‘집단기억’이라는 개

념을 사회사적이고 사회전기적인 차원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회상이론

을 자신의『회상과 사회적 조건』(불어판, 1925; 독일어판, 1985)과『집

단적 회상』(1950)3)에서 발전시켰다. 그는 앙리 베르그송(H. Bergson)

에게서 핵심적인 주제 내용인“회상”이라는 개념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뒤르켐(Durkheim)에게서‘집단의식’에 관해서 더 연구하였다. 그

는 특히 베르그송의 회상의‘주관주의’를 극복하고‘사회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데 노력하였다.4) 그러므로 알브박스의 집단회상 개념은 기억

개념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알브박스의 이론은 간략하게 소개되겠고 그의 기억개념 발전에 결정적

인 영향을 받은아스만의 문화적 기억을 중심으로 회상 이론을 소개할

것이다.

(1) 개별적 그리고 집단적 회상

알브박스는 우선‘집단회상’을‘전기적인’차원으로부터‘문화적인’

차원으로이행한다.5) 그는집단회상을무엇보다도 인간사회와의관계에

법에 따라서 이 기억의 개인적, 집단적 그리고 사회적 의미와 영향을

밝히는데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연구의 토대를 가지고 신학적인 차원

에서 기억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신학적인 차원을 위해

서 독일의 가톨릭 기초신학자인 메츠(J. B. Metz)의“고난의 기억”이론

을 중심으로기억이론이전개될 것이다. 메츠에게서 특히아우슈비츠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고난에 관심하는 문화적인 기억의 핵심으로서

역사와 사회적인 차원에서 신앙을 통해 기억의 범주를 통하여 개인과

집단에서 자리매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신학은 이러한 고난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도전한다는 시대의 진단에 부

합하면서 기억은 곧 바로 기독교/신학/교회에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세

우고 곧 고난을 치유하는 역사와 사회적인 지평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기억은 단순한 과거와 트라우마의 상념을 넘어서 세계의

고통을 치유하는 범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분단의 고통의 한

가운데 살고 있는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는 이러한 치유하는 기억을 통

하여 역사와 사회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 되기를 전망하는 데 또한

본 논문의 목적이있다.

I I. 본론

1. 아스만(J. Assmann)의“문화적기억”이론

1) 알브박스(M. Halbwachs)의 회상이론1)

여기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려는 아스만의 회상이론을 이해하기 위하

1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05

1) 여기에서 나열되는 기억은 독일어 기억(Erinnerung)과 회상(Gedachtnis)의 차이를

단어적으로 메츠(J. B. Metz)의 주장에 따라서 저자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 그 이상으

로 개념적인 차이를 두지않겠다(메츠의Glaube in Geschichte und Gesellschaft, 179

면 이하). 즉 두 단어의 문자적인차이는원래기억의의미에서 해소될 수 있다.

2) Maurice Halbwachs, Das kollektive Gedachtnis, 1991, 2.

3) 발전된 연구를 위해서는. J. Assmann, “Das kulturelle Gedachtnis”; J. Assmann/T.

Holscher(Hrsg. l, Kultur und Gedachtnis, 1988) 70 이하를참조하라.

4) J. Assmann, “Das kulturelle Gedachtnis,” 34-35 und “kollektives Gedachtnis und

kulturelle Identitat,” in: J. Assmann/T. Holscher (Hrsg.), Kultur und Gedachtnis.

Fur eine Biographie der Schriften von Halbwachs, D. W. Bernsdorf (Hrsg.) Inter-

naionales Soziologen-Lexikon, Stuttgart, 1959, 204.

Page 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경우에 전자와 후자사이에는생동적인차이가 생긴다.”11)

알브박스는 생동감 있고 자연적인 영토를 배치하기 위해서‘서술된

역사’와‘경험된 역사’를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로

써‘집단회상’을 역사에힘입어서묘사하기도한다.

‘집단’회상은 역사와 곧바로 교체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다만

인간의 가장큰 회상의영역안에서 취해진기호일 뿐이다.12)

그는 이 흐름에서 역사를‘사건들의그림’그리고‘전통의 자리’로서

‘집단’회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역사를 자유롭게 가

로지르는 유목(遊牧)의 그림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유목으로 사회를 개

념화한다.13)‘개별적’이고‘집단적’인 회상은 서로 독단적으로 분리될

수 있어도, 공동으로 사회화의 생성 속에 살아 있다. 일자(一者)는 타자

(他者)에, 또는 타자는 일자에 서로 귀속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회상

은 시간적인 동시에 공간적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현재 안에서 과거

가 존재하고, 과거안에서 현재가 존재될 수 있다.”14)

(2) 비평과 전망

여기에서 아스만(J. Assmann)의 평가에 기대어서 알브박스의 회상

이론을 비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아스만에 따르면 알브박스는 베르

그송의‘마술언어’인“삶”과“현실”이라는 주제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알

브박스의 사회학적 지평은 생동감 있는 상호관계의 비밀을 폭로하는

서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자

신의 기억들을 고정시키고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이 관계 속에

서만 회상이 존재한다.”6) 여기에 힘입어 아스만(J. Assmann)도 인간의

회상을 사회화의과정/생성속에서 이루어짐을 역설하고있다.

회상은 항상 오로지 회상을‘소유’하는 단독자만의 것이다. 하지만

이 회상은 집단적으로 새겨진다. 개개인의 차이 나는기억들은 오로

지 의사소통과‘상호-행동’을 함으로써 사회적 무리의 영역안에서

발생한다. 회상과 기억의 주체는 항상개별자 인간에게머무른다. 하

지만주체는 자신의 기억을 구체화하는‘영역’에 속해있다.7)

개별기억은 집단적인 울타리의 경계 내부에 남는다. 왜냐하면 모든

개인의 회상은‘집단회상’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8) 따라서 기억은 늘

여러 가지 차이나는 집단적인 환경과의 관계성에서 생기는 변화를 가

져온다.9) 즉“기억들은 인간과 동아리를 만들 수도 있다. 전기적이고 역

사적인 회상은 여기서 더 논의될 수 있다.‘집단회상’은‘개인회상’을

포괄하지만, 그것을 자신 안에서 폐지시키려고 융합시킬 수는 없다. 왜

냐하면‘개인회상’은 완전히 고립될 수 없고그 자체로 종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10) 알브박스는 더 나아가‘개인’회상과‘사회’회상을 서로

구별하기도한다. 즉‘전기적’회상과‘역사적’회상의 차이를 다음과 같

이 설명한다.

곧“전자가 내면적이고 내부적이라면, 후자는 외부적이다. 이렇게 될

1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07

5) J. Assmann, “kollektives Gedachtnis und kulturelle IdentItat,” 9. in: Kultur und

Gedachtnis.

6) Halbwachs, Das Gedachtnis und sozialen Bedingungen, 121.

7) J. Assmann, “Das kulturelle Gedachtnis”, 36.

8) Halbwachs, Das kollektive Gedachtnis, 27, 31.

9) 같은책, 32.

10) 같은책, 35.

11) 같은책, 36.

12) 같은책, 66.

13) 같은책, 73 이하.

14) 같은책, 76-77.

Page 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야에서 더 확장/발전되었다. 물론아스만 부부는 회상 이론가로서 사실

사회사적이고 사회심리학적인 회상이론을 알브박스의 회상 이론에 의

지해서 발전시켰다. 그렇지만그들은 다른한편으로자신들의 이해지평

에서 그것을 넘어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알브박스와는 다르게 그

들은문화적 회상또는종교현상학과관련한‘기억의 문화’라는이해지

평 위에 서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집단기억’의 두 가지 형식과

상응하는 두 가지 회상의 영역이 존립한다. 첫 번째 것은‘의사소통회

상’이며, 두 번째것은‘문화회상’이다.19) 본 연구의 취지와 목적과 부합

하기 위해서 여기서는‘문화회상’곧 문화적 기억이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선“이끄는”개념으로서‘의사소통 회상’과

‘문화 회상’을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여기에 첨가해서‘기억의 문

화’의 동인(動因)으로서 문화에 대한언급도 있을것이다.

(1) 이끄는 개념으로서의사소통 회상

아스만에 따르면‘의사소통’회상은‘이끄는 개념’으로서 소개되고

“집단회상”이라는 개념 가운데서 회상의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할 수 있

다. 아스만 부부가 알브박스의 이론에 기대어“의사소통회상”이라는 개

념으로“집단회상”의 변주방식을 파악하고 있다. 이 변주 방식은 결과

적으로‘일상의 의사소통’에 근거하고 있다. 의사소통의 이 방식에서

회상은 독자적으로 형식을 갖게 되어서 매개되고 무리와 관계를 갖는

다. 따라서 모든‘개별’회상은 타자와의 의사소통으로 구성된다.20)‘구

전역사’(Oral History)가 실행됨으로써“집단회상”에 대한이 일상형식

의 독자적 방식이 이해된다. 아스만(J. Assmann)은 이 독자적인 방식

기술이 잠재되어 있다. 하지만 니체와 대조적으로알브박스는문화비평

가는 아니다. 그는분석적인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집단적 기억’

에 관한 그의 개념 논리는 사회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발전된다. 아스만

에 따르면 알브박스는 사회심리학자로서 집단의 경계에서 문화이론의

방향으로 자신의 회상이론을 일반화하지 못했다.‘문화적 진화’의 전망

도 그의 관심 밖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본구조

는 대체로 문화분석과 문화전승의 메커니즘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15) 알브박스는 회상을 사회심리학적인 현상에 적용하였다. 여기에

서 회상은 물론 용납될 수 없는“개인적 은유”이기에 거절된다. 만약

과거가 인간의 문화와 의사소통 안에 현존한다면 회상에 관한 은유적

인 적용으로 인해“사회”와“문화”안으로 확장된다.16) 알브박스에게‘집

단’회상이라는 개념은 곧 바로 직접적인 은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에게‘개별’기억은‘사회적인’현상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아스만은

알브박스의과거에 대한인식을“사회구조적”으로이해한다.17) 종합적으

로 그가 알브박스에 기대어 말한다면,“과거는 사회적인 구조이며 이것

의 성질은 모든 현재에서 기인하는 의미의 욕구와 관계영역에서 주어

진다. 과거는 뒤늦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동적인‘문화적인 창조’

이기에그렇다.18)

2) 기억의 문화의 상위개념으로서집단적 회상

알브박스가 기초한 회상이론은 얀 아스만(Jan Assmann)과 알라이

다 아스만(Aleida Assmann)에 의해서 발전된‘문화적 회상’이론의 분

1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09

15) J. Assmann, “Das kulturelle Gedachtnis,” 46 이하참조.

16) 같은 책 47; Vgl. H. Canick/ H. Mohr, “Erinnerung/Gedachtnis,” in: H a n d b u c h

religionswissenschaftlicher Grundbegrrffe 2, 299-323, 311.

17) J. Assmann, 같은책, 같은곳.

18) 같은책, 48.

19) “Das kulturelle Gedachtnis,” 49-50; Fur diese Unterscheidung, vgl. Schrift, Tradi-

tion und Kultur, in: Reible (Hrsg.), Zwischen Festtag und Alltag, Tübingen, 25-50.

20) J. Assmann, “Kollektives Gedachtnis und kulturelle Identitat,” 10, in: Kultur und

Gedachtnis (v. J. Assmann/T. Hblscher).

Page 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모습들은 구약시대의 족장역사, 출애굽, 광야생활, 영토화, 망명 그리고

그것에 관한 신화로 일컬을 수 있다.‘문화’회상은 사실의 역사로부터

기억됨으로써 신화안에서 변형된다. 신화는“근거를이루는”역사이며,

“이야기된”역사이기 때문에 근원에서 현재를 드러낸다.25) 아스만(J.)은

‘문화’회상을 분명하게 인식시키려고 우선‘문화’회상의 기호들을 발

전시킨다.

a) 문화회상의기호들

아스만은‘문화’회상 이론을 가지고 출현된 과거와의 회상과 사회

와 관련된 문화와 무리를 서로 관계시킨다. 이로써 그는‘문화’회상의

기호를 연출한다.26) 첫 기호에는“자기 확인의 구체성”또는“무리와의

관계성”이다. 사람들이‘집단회상’에 참여하면, 이로써 무리와의 관계

성을 갖는다. 그것은‘공간적’또는‘시간적’구체성일 뿐만 아니라, 정

체성의 구체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집단’회상은 결과적으로 현실적

이고 생동하는 무리의 지탱점에 관계하기 때문이다.27) 사회적 무리는

‘기억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이로써 무엇보다도 두 가지 주안점인 고

유성과 연속성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존한다. 그것은 시간을 거쳐서 자

신의 정체성의 의식존재를 철저히 건설한다. 이것으로 기억된 사실은

늘 상응점, 유사성 그리고 연속성을 갖으려 하고스스로 미래적으로된

다.28) 이러한 흐름에서‘문화’회상은 무리의 지식을 저장한다. 마찬가지

로‘문화’회상의 대상들은 일종의 자기 확인적인 점유성(占有性)을 통

해서긍정적인의미나 부정적인 의미로 표시된다. 그러한 자기동일성의

을“의사소통회상”이라고 호명(呼名)한다.21)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

는 기호(記號)는‘제한된 시간지평’이다. 이 지평은‘현재로 전진하는

정점’에서 더불어 순환한다.“의사소통회상”은 어떠한 결정점을 갖지

않는다. 그 이유는 결정점에서는한 가지 사실로만 전진하는현재와 더

불어 항상 더욱 확장하는 과거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22) 계보학은

한 가지 형식으로 현재와‘원초적 시간’사이를 넘나들게 하고 현재의

질서 즉 현재의 요청을 정당화한다. 그러면서‘이음새 없고’‘균열 없

이’근원적인 것에 봉합한다. 과거에 대한 목록은 두 가지 회상의 영역

과 상응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의사소통회상과 문화회상”이다.2 3 )

“의사소통회상”은 기억들을 포괄한다. 여기서 기억들은 새로운 또는

현존하는 과거이다. 인간은 그러한 기억들을 자신의 동시대에서 전유

(全有)한다.24)“집단적 회상”에 대한 이해와“문화적 회상”에 대한 인식

은“의사소통회상”으로하여금 중요한 역할을 맡게한다.

(2) 이끄는 개념으로서문화적 회상

“의사소통”회상이 이끄는 개념으로서“집단”회상으로서 형태를 가

지듯이,‘문화’회상도‘이끄는’개념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아스만(J.)에

기대어서‘문화’회상또는기억을 개념적으로이해할 수 있다.

“문화”회상은 과거에 머무르는 결정점(決定點)을 갖는다. 그런 회상

안에서 과거는 그 자체로 유지될 수 없다. 과거는 여기에서 상징적인

모습으로 고정되고, 기억은 이러한 모습에 결부(結付)된다. 예컨대 그런

1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11

21) Niethammer, L. (Hrsg.), Lebenserfahrung und kollektives Gedachtnis, “Die Praxis

der ‘Oral HIstory’”를 참조.

22) J. Assmann, 같은책, 11.

23) “Das kulturelle Gedachtnis,” 50; 이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J. Assmann, “Kollektives

Gedachtnis und kulturelle Identitat,” in: Kultur und Gedachtnis( Hrsg. v. J.

Assmannl T. Holscher).

24) 같은책.

25) 같은책, 52.

26) J. Assmann, “Kollektives GedachtniS und kulturelle Identita,” 13, in: J. Assmannl

T. Holscher ( Hrsg.), Kultur und Gedachtnis 참조.

27) J. Assmann, “Das kulturelle Gedachtnis,” 39.

28) 같은책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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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의미부여, 비평, 검열/확인, 통제, 호평 그리고“가설적”수용 등으로

나타난다. 그것은“사회체계의 자기 주제화”의 의미에서 무리의 자아상

을 성찰하게한다.33)

b) 문화회상 이론과 신학의 기억

문화회상 이론을 토대로 아스만(J.)은 레비 슈트라우스(L. Strauss,

야생의 사고“Das wilde Denken”)의“냉정한”문화와“온화한”문화기

억의 특성을 수용한다.“냉정한”이라는 수식어는 어떤것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성취이기도 하다. 곧“냉정한”문화란“온화한”

문화를 기억하는 어떤 망각의 삶이 아니다. 냉정한 문화는 또 다른 기

억 안에서의 삶이다.34) 이에 비교해서“온화한”사회는 단호하게‘역사

적 생성’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신화적인 시대와 관련

있지, 역사적인(historisch) 시대와는 그렇지 않게 된다. 내면화된 또는

기억된 과거는 이야기로 자신을 형식화한다. 이 이야기는 발전의 동인

이 되든지, 아니면 연속성의 근거가 된다. 여기서 비현실은신화로서그

리고역사로서의 실재와 대립한다. 그리고 신화로서의 목적은 회상으로

서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성에 대립한다.35) 아스만(J.)에 따르면

이 흐름에서 신화의 기능은“근거를 놓은 기억”이 되어서 현재는 역사

의 조명 아래있게 되고 신의 의지에 부합하며 의미가 넘치게 된다. 예

컨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출애급-전승, 골고다에 대한 기억이 그

렇다.36) 다른한편으로아스만(J.)에게기억은“대항적기억”으로서 현재

에 대한‘부조리-경험’에서출발하고과거를 부른다. 예컨대 초기로마

황제시대의 공화국에대한기억이 그렇다.37) 아스만(J.)은“대항적기억”

자기 확인에서 니체가“지평 만들기”라고 칭한 것이 결정된다.29) 두 번

째 기호는“재구성성”으로 표시된다. 그 이유는 과거란 회상 그 자체로

보존될 수 없다. 오히려“사회가 각각 시대에서 자신의 현재 관계영역

에 의해서 재구성할수 있는것”으로만 남는다.30)

‘문화’회상은 결국 재구성적으로 운동한다. 그것은 자신의 지식을

항상 실제적으로 현재의 상황과 관계시킨다. 문화회상은 한편으로 기

록과 수집된 텍스트의 전체지평과 잠재성의 양태, 그림과 행동 표본으

로서 실존한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객관화된 의미에 대한 실제적이

고 미래적 전망을 가진 요소로 실제성의 양태로 실존한다.31)‘문화’회

상은“형태의 위상”을 띤다. 이런 특성에서 의사소통의 의미와 집단적

으로 분리된 지식의 결정체에 관련된 대상화는 사회의 문화적 제도화

로 인한 연속적인 유산(遺産)에서 자신을 지속시키기 위한 앞선 조건

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조직성”과“지식의 결합성”은‘문화’회상의

기호들이다.32)

‘문화’회상의 마지막 기호는“성찰”의 특성을 가진다.‘문화’회상 안

에서 이 성찰은‘반성적-실천’이며‘자기-반성’적이며‘자아상-반성’

적이다.‘생동감 있는 실천’은 지혜서와 생활법칙 형식을 띤다.‘문화’

회상은 해석의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 예컨대 그것은 경계짓

1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13

29) 같은 책, 여기에 대해서는 A. Assmann, “Die Unfahigkeit zu vergessen: der

Historismus und die Krise deskuturellen Gedachtnisses”. 비교하라Elbl-Eibesfelft,

I. Krieg und Frieden aus der Sicht der Verhantensforschung; Gladigow, B., Zur

Struktur zeitlicher Deutungssysteme, in: Hellholm, D. (Hrsg.)/273-294, Apo-

calypticism In the Medlterranean World and the Near East; A. Assmann, DIe

Unfahigkeit zu vergessen: der Historismus und die Kriese des kuturellen Gedacht-

nisses, in: Assmann, A. und J. ; Mol, H. Identity and the Sacred.

30) “Das kulturelle Gedachtnis,” 40; 비교하라 Halbwachs, Das Gedachtnis und seine

sozialen Bedingungen, 390.

31) 같은책, 13.

32) 같은 책, 14; Luhmann N., “Selbstthematislerung des Gesellschaftssystems,” in:

Soziologische Aufklarung 2, Oplanden와 참조비교.

33) 피에르 부르디외(P. Bourdie)의 “Ethno-Theorien,” 1979를 참조.

34) J. Assmann, “Das kulturelle Gedachtnis,” 69.

35) 같은책, 75.

36) 같은책,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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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가보장된사회는 회상의 전복적인내용들의 힘에의해서 흔들릴

수 있다.…회상은 지나간 희망처럼 과거의 두려움을 기억으로 되

돌리며 소집한다.40)

이미 앞에서 아스만이 탐구한“문화적 회상”을 근거로 그리고 프랑

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아도로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강조하듯 기억

은 대항과 전복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성서에서 뒷받침하는

문화적인 힘을 통하여 신학적 차원을 전망하게 한다. 특히 정치신학자

메츠(J. B. Metz)에 의해 시작되고 발전된“고난의 기억”으로서 기억의

지평이해를 통해서 문화적 기억은 다음의 논의에서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것이다.

2. 정치신학에나타난기억이론과기억의문화의토대와전제들

메츠가 비록 아스만의 기억이론을 직접적으로 탐구하지 않았지만

정치신학의 영역에서“기억의 문화”라는 주제는 아스만의 기억 개념,

즉 기억의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 저항과 전복적인 힘

이 문화에 영향을 강력하게 미친다는 맥락과 상통된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그 개념은정치신학의범주에서“기억”이라는 개념의 전개를 위해

서 필요한 것이기도하다. 왜냐하면 기억개념을 문화라는 개념과 기억

의‘개인적’이고‘집단적’의미부여로 작동시키지 않고 있음에도 정치

신학의 영역에서 이미 이것은“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이며 반 역사적

인 차원에서 그 의미의 차용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메츠는“아남네

시스(재-기억) 이성”과 관련한“아남네시스 문화”라는 주제에서“아우

슈비츠”라는 시간적이고 공간적 의미의 문화를 기억과 관련해서 전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기억’을‘저항’으로 이해한다. 예컨대 구약성서

의 다니엘과 에스더의 이야기가 이 같은 주제를 다룬다. 이로써 역사에

대한 반(反) 역사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됨으로 역사의 과거를 지배당하

고 억압 받는 자의 시선으로 연출시키게 된다.38) 이렇게 되면 종교는

‘토대를 세우는 기억’을 가지게 되어서 문화적인 영역 안에서 종교의

과제를 상상할 수 있고이로인한시대의 비-동시성을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글에서도 설득력을갖는다.

일반적인 종교의 기능은 기억을 통해서 현재화와 반복 그리고 비

동시간성에개입한다.39)

이러한 위에서 인용된 기억의“비 동시성”의 특성을 가지고 아스만

(J.)은 곧 바로 기억을‘저항’의 행동으로 이해시키고 회상으로서 문화

의 즉‘문화’회상의 우주적 기능을 성취한다. 또한 그는 마르쿠제의 기

억의‘비판적’차원을 수용하여‘문화’회상의‘대항적’기능을 발전시킨

다. 즉 기억을 통해서 해방의 기능이 나타남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 사

실은 신학적인 차원에서 기억의‘위험스런’기능의 모습으로 등장함으

로 다음과 같이더 자세히 확인될 수도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위험스런 통찰을 가져오게 한다. 기득권의 미

1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 관한연구 115

37) 같은 책; 비교. G. Theissen, “Tradition und Entschuldigung. Der Beitrag des bibli-

schen Glaubens zum kulturellen Gedachtnis”, in: J. Assmann/ T. Holscher (Hrsg:),

170-196; H. CanickLindemaier/H. Canlck, “Zensur und Gedachtnis,” in: A. und J.

Assmann, Kanon und Zensur.

38) 아스만의 같은 책 83 이하. 아스만의 이러한 이해는 이미 신학적으로 유럽의 메츠를

통하여 한국의 민중신학(안병무, 서남동, 김용복 등), 그리고 북미와 유럽의 정치신학

(메츠와 몰트만) 그리고 남미와 아프리카 등의 토착화 해방신학(제임스 콘 등)에서

두드러지게잘 나타나 있다.

3 9 ) 같은 책 84; Canlck/Mohr, “Erinnerung/ Gedachtnis,” in: Handbuch religions-

wissensschaftlicher Grundbegriffe 2, 299-323: 311-313 참조비교.

40) 같은책 85 이하, H. Marcuse, Der eindimensionale Mensch, 117. 이러한 영향은 메

츠의정치신학에영향을 주고있다. 메츠의 Zur Theolgoie der Welt를 참조하라.

Page 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슈비츠’로 상징되는 인간의 고난사를 신학과 종교철학적인 주된 관심

분야로 승격시키면서 신학 특히 신정론 문제의 한 가운데로 이끌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이러한 세계역사의 도전들이 자연사

적인것으로 환원하는 운명론 대신, 이러한 우발적이지만 되돌릴 수 없

는 지구적이고 지역적 비참들이 결국 종교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정체

성 곧 교회의 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반복해서 책임적으로 묻고 응답하

도록하는데 충분한동인이 된다는 것이다.

1) 고난의 기억으로서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이후의 신학

(1) 기독교의위기의 기호로서아우슈비츠

기독교, 즉 유럽의 종교는 자신의 성서적 본질을 상실할 때마다, 늘

자기 확인의 위기에 직면해왔다. 성서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구체적인

내용들은 예컨대 특히 사랑, 정의, 봉사 그리고 평화 등이다. 당연히 구

약과 신약성서에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차이 나게 펼쳐져야 할 중요한

다른많은 중요한 사명들이 있음에 틀림없다. 성서의 사명이란 곧 하나

님의사명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선세계 안에서 경험되는역사의 하

나님이시다. 이 경우에 종교의 위기란 원래 제도적인 의미에서 기독교

의 종교의 위기로 관찰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이고 초

월적인 신앙의 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위기는 본래어디서

오는가? 여기서 의도하는 위기는 단지 종교 또는 교회에서만 발생되는

위기가 아니라, 이것의 관계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역사와 사회에서

오는위기도크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종교가 내부적 또는 외부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면, 근대

의 계몽주의의 종교비판과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의

해서 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받아왔다. 그러한 종교와 이

하고 있다. 알라이다 아스만도 요나단 베버(Jonathan Webber)의 말을

인용해서 아우슈비츠를 일반적인 장소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서“모

든 것이 하나로 녹아 있는 곳”으로서 규정하고 있다.41) 여기서 아우슈

비츠는‘기억된 고난의 역사’이면서‘아남네시스(재-기억) 문화’로 이

해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다루었던 영혼 우선의 영혼-

몸이라는 주객도식의‘아남네시스(재-기억)’이론과는 달리 물질/영혼

의 도식을 극복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메츠의‘아남네시

스(재-기억) 문화’는 구체적인역사적 사건인 아우슈비츠를“고난의기

억”으로서 표시하고 있다. 메츠는 이“고난의 기억”을 전통적인 헬라적

기억이론을 극복하는 것과 동시에 유대-기독교의 역사적 차원으로 승

화시키고 있다.“고난의 기억”은 따라서 특히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을

우한 정치신학의 중심적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아우슈비

츠”라는 고난사는“고난의 기억”으로서 상징되고 기호화될 수 있다. 이

런 흐름에서 아우슈비츠는‘기독교의 문화적 기억’의 반복적인 동인이

며 생산적 주제이다. 여기에 아우슈비츠는“하나님의 언표(言表)”로서

신학의 현재의 상황을 고발하는 신학적인 주제이며 담론이고 할 수 있

다. 여기에 상응해서“아우슈비츠 이후”라는 표시는 정치신학의 두 번

째 구도이기도 하다.42) 역사비평가와 문화비평가들이‘아우슈비츠’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상가들에

의해서 유사한 관심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기에 그 차이는 메츠의 정치

신학에서 근본적인 공통점, 즉 인간비참과 서양 사상의 전반적인전환

또는 회심이라는 측면에서 극복되며 승화되고 있다. 메츠는 특히‘아우

1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 연구 117

41) 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대구, 2002: 432-438 참조. Jonathan Webber의 The

future of Auschwitz. Some Personal Reflections, The first frank green Lecture,

Oxford Centre for Postgraduate Hebrew Studies(1992, 8) 참조.

42) 메츠의 정치신학의 구도 세 가지 패러다임들로 나타난다. 첫번 째는 계몽주의에 맞

선 변증/기초신학적인 전개이며, 두 번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유럽 정신사에 대한

신학의 재구성이며, 마지막으로는 제3세계와 연대하는 신학적 대안이다. 참조 메츠

의Glaube in Geschichte und Gesellschaft 서문참조.

Page 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록 한다.43) 만약 정신의 아남네시스(재-기억)의 심층구조가 상실됨으로

위기가 초래된다면,‘아우슈비츠’는‘아남네시스’는 재-기억이 되어야

하는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이 아우슈비츠와 같은인간 비참속에서 망

각되었다면 정치신학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고난사건과 역사를‘고난의

기억’또는‘위험스런 기억’(마르쿠제)으로서 재구성한다. 메츠의 이 기

억의 형식은 이른바 칸트의‘실천이성’에서‘실천’에 힘입은 것으로서

정치신학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아우슈비츠’는 바로 여기

에 결정적인 사건이며 개인적이며 동시에 집단적인 기억의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2) 고난의 기억으로서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의 고난의 경험자 엘리 위젤(E. Wiesel)에 따르면 아우

슈비츠는 유대민족과 민중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죽음을 의

미하기도 한다. 따라서‘아우슈비츠’라는 고유명사는 우리 모두에게 전

기적이며시대적인 훈계어/경고어(Mahnwort)이다. 이와같이 대학살로

서 아우슈비츠는 기존의 지배자의 역사를 넘어서는반(反) 역사로서역

사를만드는 상징어이고 신화로 탄생된다. 이렇게 됨으로 아우슈비츠는

기억된 인간의 고난사로 비추어진다. 따라서‘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은 세계의 고난사에 직면해서 하나님에 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질

문하게 한다. 메츠에 따르면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상황에서다음과 같

이 비판적인교정으로표상되어야한다:

아우슈비츠를 망각한 채로 변호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데올로기비판에서늘 문제시 되었던 내용은역사와 종교의 주체에

대한것이었다. 여기에 근대이후, 즉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그리고

산업혁명으로 탄생한‘시민’은 종교와 사회의 주체세력으로서 당시

종교와사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원래 성서의 사명은 기독교가 메시아적 종교임을 천명(天命)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유럽과 북미의 기독교

는 상대적으로 메시아적인 종교에서 이른바‘시민종교’로 왜곡되었다

는 것이다.‘시민종교’라는 차원에서 종교는 곧“사사로운 일”이 된 것

이다. 비록 계몽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도전이 항상 더욱 신학과 교회

와 관련하여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영향을 주고 재구성하도록도전했지

만, 기독교의정체성은치유되지못했다. 왜 그래야 했는가?

기독교의 위기는“아우슈비츠”와 유사한 반복적인 인간의 비참을 경

험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물음을 항상던지고 있다. 이 위기는

계몽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던진도전보다더욱 강하며 포괄적인 것이

다. 그것은 세계의 고난(전쟁, 기아, 자연재해 그리고 온갖 종류의 국가

적이며 제도적인 폭력 등)이 주는 지구적이고 지역적 위기이다. 메츠에

따르면 이 위기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인간의 이성 중심에서

세워진 정신과학의 위기로 표시된다. 다른 하나는 근대가 탄생시킨 계

몽주의 자체의 위기이다. 두 위기들은 유럽의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사상적인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는 유럽 정신

의 위기를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다. 메츠에 따르면“아남네시스(재-기

억) 이성”은 바로 이 위기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으로서 신학의 패

러다임을 제시하는 기억이론이다. 메츠가 새롭게 구상(構想)하는“아남

네시스(재-기억) 이성”은 이성으로 하여금 추상적 오성의 진보적인 망

각증세, 무한 투쟁의 진보를 추구하는 진보적 망각증세를 가로막고 중

지시키게 한다. 이“아남네시스(재-기억) 이성”은 계몽주의로 하여금

자신이 확보한 기존의 냉소적 판단을 다시 한 번 비판적으로 계몽하도

1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19

43) Metz, “Anamnetische Vernunft: Anmerkung eines Theologen zur Krise des Geistes

Wissenschaften,” 736, in: Zwischenbetrachtungen im Prozeß der Aufklarung:

Jurgen Habermas zum 60. Geburtstag. Hrsg. v. Axel Honneth 1989; 비교.

Dialektik der Aufklarung, Horkheimer und Adorno.

Page 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찰을 주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고통당하고 탄식하는 피조물과

연대하는’복음적이며 연대적인 노력을 지향하면서 성서적-메시아적

인 미래의 전망을 획득해야 한다.46) 아우슈비츠라는 고난과 사건에 직

면한 본질적인 질문이란 그러한 대참사가 어떻게 기억되며 전승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아우슈비츠를 고난의 기억으로 연출시

킴으로써 해소(解消)된다. 그러한 고난의 기억은 세상의 모든 불의한

고난역사 가운데서 위기를 극복하도록 아우슈비츠를 역사와 사회 속에

서 반복적으로 현재화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적-메시아적 종교를 재구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언제

어디서든아우슈비츠를만난다.

2) 기독교의 기억의 문화를 위한토대들

만약 유럽이라는 영토에서 문화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곳의 문화는

유럽-서양식의 문화이며 유대-헬라적인 전통을 동화한 것을 의미한

다. 하지만 이와 비교해서 만약 인간의 동등함을 토대로 한 문화에 관

해 말한다면, 그런 문화는 분리되고 선택된 엘리트와 예술가를 위하여

전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문화란 각자

사회에서 처한모든 이를위한평화정치의 계명이어야 한다. 이와같이

문화는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라도 사회적인 실체이다.47) 아스만에 따르

면 모든 문화는 연속적인 구조로 형성된다. 그것은 서로를 접촉하면서

결합하는 힘을 가진다. 그것은 시간의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공간

적인 차원도 형성한다. 그것은 인간을‘이웃의 존재’(Mitmensch)로 만

든다. 문화는 특히 경험과 기억을 연출하여 현재에 유지시키고 진보적

인 현재의 지평 속에서 표현과 역사를 여러 다른 시대에 결합하고 이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를 망각한 채로 구출할 수 있는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를 망각한 채로 기도드릴 수 있는

하나님도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를 망각한 채로 뒤 따를

수 있는 예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망각한

채로신뢰할 수 있는그리스도의영성도존재하지 않습니다.44)

아우슈비츠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규정된 기득권을 가진 제도적인

신학을 넘어서 있는 두려움이며 공포로 표시된다. 이 두려움과 공포는

모든 상황을 무시하는 하나님 언표를 텅 비우고 눈멀게 한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라는 상황의 의식적 존재로서 하나님-질문은 실존

주의적으로파악되는것이아니라, 확실히 종교이거나 정치적으로파악

되게 한다. 즉“하나님 언표는 타자들을 위한, 불의하게 고통당하는 자

들을 위한, 우리 시대와 역사의 희생자와패자들을 위한 구원과 치유의

외침”이 된다.45) 이 의미에서 하나님- 언표는‘고통을 깨닫는’하나님-

언표이며 기독교의 권위는 고통당하는 자의 권위 이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론의 지평에서 말하자면‘뒤 따름’의 메시아적 실천은

타자와 연대하는 자비다(본회퍼,‘그리스도 뒤 따름’). 그러므로 기독교

의 신앙은 단순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자비’의 믿음의 힘에

의해서‘행하는’것이된다.

메츠가 몰트만과 죌레 등과 함께 처음 구성한‘정치신학’은 따라서

플라톤과 어거스틴 그리고 헤겔의 관념주의 전통을 해체, 파괴하고 재

구성하여‘관념주의 이후’의 신학이다. 동시에 정치신학은 기독교의 신

학으로 하여금 아우슈비츠 등과 같은 대참사(大慘死)에 직면해서 하나

님언표를 재구성하도록 촉구한다.‘아우슈비츠 이후의 기독교 신학’은

한편으로 기독교인이 자신의 자기 확인을 충분히 구성할 수 있도록 통

1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21

44) Metz, Zum Begriff der neuen politischen Theologie, 96.

45) Metz, “Theodizee-Empfindliche Gottesrede,” 83, in: Landschaft aus Schreien: zur

Dramatik der Theodiezzefrage.

46) Concilium 20. 1984, 382-389과 비교.

47) Der Spiegel: der Ruckblick, 236-237. Jahres ChrOnik 98.

Page 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복되어야만 한다. 이로써 기존의 관념적이고 안정적인 문화는 전복될

수 있다. 메츠는 이 기억의 특징을 정치신학의 범주로 구성하면서 신학

의 도전과 과제를 위한대안을 마련하려는것이다.

(1) 문화기억의기초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수난, 죽음그리고 부활

의 기억

기독교 신학의 로고스는 원천적으로 이야기-아남네시스의 심층구

조를갖는다. 이 기억이론은메츠의 정치신학에서 분명하게나타난다.51)

여기에‘그리스도의 수난기억’은 정치신학이 강조하는 담론이기도 하

다. 또한 그러한 분명한 기억은 기독교의‘하나님-언표’와도 결합되어

있다. 성서적 전승들 안에는 기독교의‘하나님-언표’와 관련해서 보편

적이고 우주적 책임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가해자

를 편들 수 있는 인간의 죄의 보편주의만 주장되어서는 안 되고, 피해

자를편들 수 있는세상의 고통의 보편주의도 주장되어야 한다. 그러므

로 성서적 전승들에서‘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은 세계의고난의

기억의 지평에서 융합되고 현재화되며 잠재된 역능이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기억은 여기에서 핵심적으로 기억을 결정한다. 예수

의 시선의 윤리는 우선적으로 타자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타자의 고

통에 연대(連帶)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타자와 이웃

의 고통을 바라보는 예수“뒤 따름”을 실천하는 기억의 공동체이다. 물

론“낯설고 먼 이웃의 고통에 대한 연대는 더 위대한 문화를 경외해야

할 실천조건이다.”52)

것으로 희망과 기억을 촉발하기 때문에‘과거’를‘현재’에 부합(附合)

하게 한다.48) 문화에 대한 모든 연속적인 구조는‘반복’의 형식을 띤다.

여기서‘반복’과‘현재화’는 모든 문화에서 관계의 두 가지 근본적인

다양한 형태이기도하다.49)

기억은 이것이 가진 특별한 의미에서 본 논문의 흐름과 관계해서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화 또한 마찬가지로 이

러한 시각에서 관찰되고 경험될 수 있다. 플라톤이 주창(主唱)한‘아남

네시스(재-기억)’이후로 바로이러한 결정되고기억된 문화는‘기억의

문화’로 정의될 수 있으며, 곧 바로 세계의 고난사(아우슈비츠, 베트남,

소말리아, 유고슬라비아등 현재인간고난사)의 지평속에서 융합된다.

그래서 이 특정한 문화들은‘아남네시스(재-기억)’또는‘기억의 문화’

로 자리잡게 된다. 아스만과 더불어 특히 메츠는 이러한 세계의 고난사

라는 지평이해를 융합함으로써 아우슈비츠를‘기억된 역사’곧‘기억의

문화’로 연출한다. 아우슈비츠와같은비참의 사건은 따라서 고통을 통

해 훈계하고 경고하는‘기억의 문화’또는‘아남네시스 문화’로 표시된

다. 아도르노의 다음의 주장은 이러한 사실을지탱(支撑)한다.

아우슈비츠는단순히자기확인에관해연구하는철학을죽음의 학

문으로 간주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또는 이것을 망각하는) 모든

문화는…쓰레기에 불과하다.50)

아도르노도 주장하듯이‘아우슈비츠’는 단순한 문화도 아니고 기억

도 아니다. 그것은 망각되어서는 안 될‘운명의 기억’으로서‘아남네시

스 문화’로 생동적이면서‘위험스럽게’종교와 사회에 도전을 주고, 반

1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23

48) J. Assmann, “Das kulturelle Gedachtnls,” 16.

49) 같은책 17. 여기서 반복의의미는 특히키에르케고르와니체의 의미에서‘영원한 생

성’을 함축또는표현한다.

50) Adorno, Negative Dialektik, 354-361.

51) Metz, Gottesrede, 3; 특별히GGG und DPT를 참조할 것.

52) 같은책 13.

Page 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보편주의를 획득한다. 물론 기억의 이성은 고난의 기억, 구체적으로 낯

설고 먼 이웃의 고통의 기억을 문제 삼을 때에만 가능하다. 기억하는

이성은 우선적으로‘선험적 고통’에 의해서 구체화된다.54) 그렇게 될 경

우에 기억하는 이성은 모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정치문화의 토대로서

낯설고 먼 이웃의 고통의 형상에서 보편성을 갖는다.55) 이러한 기억하

는 이성은 기독교 신앙에 대립되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며 신앙 안에 기억을 통하여 고통의 현상들에 대한

치유의 역할을 만들고 기독교가 교회가 기억의 문화의 건설자이며 전

달자로서역할을더욱공고히 만든다.56)

I I I. 결론: 재구성적전망을위하여

지금까지 본 논자는 전반부에서 주로 아스만(J.)의“문화적 기억”이

론을 토대로 해서“개인적”이고“집단적인”기억과 회상을 고찰했고, 이

러한 기억과 회상의 사회적인 차원을 살펴보았다. 특히 기억과 회상의

여러 가지 차원과 지평은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그 의미들이

중요하게드러남을 알 수 있었다. 아스만(J.)의 문화적 기억과 회상에서

뿐만아니라, 결정적으로 후반부에서 주로메츠가 주도한 정치신학에서

도 문화적 기억과 회상으로서 아우슈비츠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고

이것을 가로지르는 인간 고난 역사의 담론으로서 자리잡는 데 그 가치

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디지털시대의 기억의 메카니즘이 인간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사실이지만57) 인간의 삶은여전히 인간과 환경에

(2) 기독교 기억의문화건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아스만을 통하여 기억의 문화적인 특성을 살펴

보았듯이 아우슈비츠가단순이 고난의 기억의 관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의 고통에 대한 기억의 문화를 세우는 담론이 되려면‘아남네시스(재-

기억) 문화’는 이것을 위한 동인(動因)으로 타당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아남네시스’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서‘재-기억’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개념이 몸-영혼의 주객도식으로 지배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현대의 정치신학은 이 개념의2분법을 유대-성서적인 전

통에 의해서 극복하려 했다. 따라서 정치신학적인 의미에서‘아남네시

스’는 더 이상 플라톤의 주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고통에 직

면한 피조물의 고난사에 대한 정해진 기억의 개념으로 재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아우슈비츠는 기독교/신학/교회의 문화를 건설하는

동인이 되어야 한다. 메츠는 다음과 같이이러한사실을 보장한다.

기독교는‘위험스런 기억’으로서 선지식(先知識)을 이끌고 이것을

근거로 하는 아남네시스(재-기억)의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시대의 기독교인이야말로 아남네시스(재-기억) 문화의 동역자

이며 전달자로서 부름받을 수 있는 인간 비참에 대한 기독교적 책

임적태도이다.53)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가 근대의 이성을“도구적 이성”으로

비판했다면, 정치신학은 이 이성을“아남네시스(재-기억) 이성”으로 승

화하고 재구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아남네시스(재-기억) 이

성’은 자신의 계몽주의적이고 근대적인 계약의 특성과 자신의 정당한

1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25

5 3 ) Metz, “Fur eine anamnetische Kultur”(Holocaust: Die Grenzen des Verstehens.

Hrsg. Hanno Loewy~ Eine Debatte uber die Besetzung der Geschichte, Frankfurt,

35-41).

5 4 ) Metz, “Religion und Politik auf dem Boden der Moderne. Versuch einer

Neubestimmung,” in: Krise der Immanenz. Religion an den Grenzen der Moderne,

271.

55) 같은책 274.

56) Metz, Zur Theologie der Welt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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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적인 혁명을 넘어서 외부적인 혁명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곧 고통

받는 제3세계와의 연대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또는 폭력

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든고통을 망각한 채로, 즉 현재형의 홀로코스트

를 망각한 채로 그리고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망각한 채로 어떤

신학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낯설고 먼 이웃의 고통에 연

대적으로참여하고, 우리의 오늘의 생활세계에서 희생자의개인적 집단

적 시선으로 자각하는 책임적인 태도는 확실히 기독교 기억문화를 건

설하는 길이다. 그러한 기독교 문화는‘기억을 생산하는’낯설고 먼 이

웃을 위한 문화이다.59) 그것은 그리스도론의 입장에서 고통당하는 십자

가의 신학으로서“아래로부터”그리고 영광을 받는 부활의 신학으로서

“위로부터”의, 초월과 내재의 그리고 신비와 정치의 합류를 통한 기독

교의 기억의 문화이다.60) 결론적으로 한국교회와 기독교 그리고 이것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훈련인 신학은 위에서 고찰된 문화적 기억의 지평

에서 오늘의 지역적이고 지구적인 고통의 한 가운데 처한 현실가운데

서 이것을 위기이자 기회로 받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원

과 치유의 역할에 매진하도록그 사명을 다 해야할 것이다.

주제어

문화적 기억, 얀 아스만, 아우슈비츠, 정치신학, 요한 밥티스트 메츠,

고통의 기억, 치유

Cultural memory, Jan Assmann, Aschwitz, Political Theology,

Johann Baptist Metz, memory of suffering, healing.

접 수 일 2010년 4월 23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20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의해서, 즉 아날로그적으로작동되고있는것이틀림없는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기독교인이 지배적이며 헤게모니적인‘시민종교’의

모습이 아닌, 메시아적 종교의 모습으로 기독교의 자기 확인을 찾으려

한다면, 지역적이고지구적인 지평에서 기독교의문화적 기억은 아우슈

비츠의 비참, 우리 시대의 무기 생산과 전쟁 확대로 인한 위기, 환경의

위기 예컨대 세계의 고난 역사에 직면해서 낯설고 먼 이웃의 고통에

대한 연대적인 참여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문화의 전달자는 우선적

으로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이 세상

의 고통과 이것을 생산하는 체제에 맞서고 극복하고 치유할 선교적 의

무가 있기때문이다. 이 문화적 기억의 전달자로 교회와 기독교는그렇

기 때문에 위기의 주체인 동시에‘인간학적 혁명’으로 탄생하는‘새로

운 주체’이기도 하다.58)

기독교는기억의 공동체로서성서적 전승, 교회에 그 근거를 가지며,

아우슈비츠/베트남/유고슬라비아/소말리아와 그리고 한반도의 분단의

고통과 같은 인간 고난사의 기억의‘위험스런 기억’의 전달자이다. 특

히 분단의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여기에 속한 교

회와 기독교에게 고난과 그것의 기억은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

기독교인은‘메시아적 종교’에서 탄생하는‘새로운 주체’로서 고난과

기억의 전달자이어야하며 고통에 연대적으로 참여하는 기독교의 문화

적 기억으로서‘기억의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 정치신학은 아우슈비츠

와 같은 인간의 비참을 기독교의 기억의 문화를 건설함으로써 제1세

계 중유럽과 북미 중심의 근대적 시민계급의 지배적 이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 대안으로서 기독교 시민의‘회심’(Umkehr)을 통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시도한다. 따라서 이 신학은 반드시“관념주의 이후의

신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신학은 더 나아가 이 시민 주체 자신의

1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27

57) 아스만(A.), 같은책, 534 이하참조.

58) Metz, Jenseits burgerlicher Religion, 94 -110면 참조.

5 9 ) “Von einer transzendentalen zu einer politischen Mystik des Christentums,” 96.

1982, in: zum Begriff.

60) “Anamnetische Kultur,”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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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29

Page 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rective function for the Christian church and theology, because they

can take the memory to the world for healing the social and historical

crisis and renewing their identity.

In conclusion, it is clear to present the memory of suffering as cul-

tural memory in order for it to be a healing category for overcoming

social and historical victims, and in this way the Christian church

plays the role as a messenger of redemption of such memory.

A Study on the cultural memory and it’s History of political-theological Influence

Lee, Seok-Gyu

Part time Lecturer at Seoul theologial Universtiy

Ludwig-Maximilians Universität München Th. D.

Buchon, Kyung gi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study Jan Assmann’s concepts on

memory and it’s history of influencing politics and theology. Accord-

ing to J. Assmann, memory can be defined not only as individual and

collective, but also as a social and historical construct. J. Assmann

intends to compare all these memory-terms in the cultural category in

order to recover a special meaning of memory. The cultural memory

can influence the individual and the collective, as well as the social

and historical dimensions.

Comparing with the memory theory of J. Assmann, Johann Baptist

Metz tries to make remarks about memory in the light of human his-

tory. For him, history is not merely a history, but a history of human

suffering. The history of human suffering let Christian theology and

church become aware of such sufferings themselves. The human

suffering also is something that should be remembered culturally in

society and history. Auschwitz or Vietnam as a human individual and

collective memory become a signal and event for such human suf-

fering and at the same time a cultural memory which must remember

in repetition. It will have a very important role especially as cor-

1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이석규, 문화적 기억과그것의 정치-신학적 영향사에관한연구 131

Page 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칼뱅의신학적認知構造1)

‘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김재진(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겸임교수)

I. 서론: 칼뱅에게는‘중심교리’도‘사유체계’도 없는가?

1909년 칼뱅(Calvin)의탄신 400주년을 기념해서 칼뱅의 신학 연구

가들은 그 당시까지의 칼뱅신학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고자 하였다. 그

후 10년 뒤 1929년에 칼뱅신학에 대한 연구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그

리고 1934년에는 페터 바르트(P. Barth)가 1909-1934년 사이에 있었

던 칼뱅신학 연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2) 그런데1929년에 나온

‘칼뱅 신학에 대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칼뱅의 신학방법과 사고방

식에는 독특한 난점(難點)이 있으며, 이에 대한 전반적 논술에 이르는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133-161

1) 본 논문은“요한 칼뱅의 탄생 50주년기념학술심포지엄”(2009. 6. 22)에서발표한것

을 보완한 것임.

2 ) P. Barth, “Funfundzwanzig Jahre Calvinforschung 1909 bis 1934,” T h e o l .

Rundschau, Neue Folge V I (1934), 162ff. 그러나 1909년 이래로 연구된 칼뱅의 신

학 연구서로서는Josef Borates, Calvin und das Recht, Feudingen: Verlagsanstalt,

1934를 참고하라.

Page 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면, 칼뱅의 신학에는‘하나님의 초월적 주권사상’과 같은‘신학사상’

내지(乃至)‘신학적 중심점’은 있으나, 그의신학전체를 아우르는 일관

(一貫)된‘신학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칼뱅에게 신학적 중심교

리가 없는 이유는, 바우케(H. Bauke)에 의하면, 칼뱅은 한-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 신학적 원리로‘사변적 신학’을 인출해 낸 체계론자가 아

니었기 때문이다.7) 다시 말하면, 칼뱅은 자신의 신학 전체를 구체적인

신학방법을 가지고 통일성 있게 체계적으로전개하지는않았지만, 적어

도 그 자신의‘이해방식’혹은신학적‘구상(構想) 방식’은 가지고 있었

다는것을암시해 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지금까지 칼뱅의 개별적인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적으로상당히 많이 되어 있으나, 그의 신학 전체

를 파악하고, 포괄할 수 있는‘신학방법’내지 신학적‘구상방식’에 대

한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8) 바꾸어 말하면, 칼뱅의

입문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3) 또한 니이젤(W. Niesel)에 의

하면, 1929년 칼뱅신학에 대한 연구 보고서가 나온 후 30년이 되도록

아직도‘칼뱅의 신학방법’에 대한 이렇다 할 연구 결과도 나오지 않았

다. 뿐만아니라, 지금까지도 니이젤의 학문적 판단에 대한별다른이견

異見이 제기되지 않고 있다.4) 따라서 지금까지의‘칼뱅신학에 대한 연

구 보고서’에 의하면, 칼뱅에게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신학방법’과‘사

유체계’가 없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칼뱅이 자신의 고유한‘신학방법’과‘사유체계’를 가지고 있

지 않다는 것은, 사실은 그의 신학에는‘중심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

다. 이와 상응하게 괼러(Alfred Göhler)는 아주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칼뱅의 신학에는 전체 교리를 아우르는‘중심 교리’는 없고,

단지 모든 교리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증언되는 방식으로 그 교리의 중

심을 파악하도록 한다는 점에서만 중심사상이 있다.”5) 예컨대 마르틴

루터(M. Luther)는‘義認論: Die Lehre von Rechtfertigung’ 을 출발점

으로 삼아 자신의 전체 신학적 주제를 전개하였지만, 칼뱅은, 루터처럼,

하나의 주제로 자신의 신학전체를 전개하지않았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뱅의『기독교 강요』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에서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발견되는 신학적‘중심점’은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하나님의 초월적 주권사상’이다.6) 더 자세히 말

1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 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35

3) Gustav Kruger, Evangelische Theologie. Ihre Phanomen und Aufgabe, Abschnit 3.

‘Kirchengeschichte’ I I, I, Halle, 1929, 27(W.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이종성

옮김, 『칼뱅의神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9에서재인용).

4) W. Niesel/李種聲 옮김, 『칼뱅의神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9.

5) Alfred Gohler, Calvins Lehre von der Heiligung, München: Kaiser Verlag, 1934,

81.

6) 아더C. 쿠스탕스Custance는 위필드Warfield의 해석을 근거로 하여 칼뱅의 중심 사

상을‘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이라고 특징짓는다: Arthur C. Custance, T h e

sovereignty of Grace , 한국칼뱅의주의연구원(편역), 『칼뱅의 교리신학』(서울: 기독교

문화협회 1986), 106: “만일 칼뱅의신학의 체계에있어서 하나의포괄적인주제가있

다면, 그것은 바로‘오직 하나님만으로(Solus Deus)’, 하나님만이 구원이시고, 하나님

만이 인간의 구세주이며, 개심의 행위는 인간의 행위인 것이다.”이를 위해서 그는워

필드를 인용한다.: “우리 이전의 신학자들이‘저항할 수 없는 은총’,‘효과적인 부르

심’으로 불렀던‘절대주권적monergistic’ 개심은 칼뱅의 구속론의 요체가 되었고(즉,

구원의 교리), 그것과 밀접히 관련된 다른 교리들보다 훨씬 더 그의 체계 속에 뿌리

를 내리고 있다”(Benamin B. Warfield, Calvin as a Theologian and Cavvinism

Today, London: Evangelical Press repint of 1909, 16f.). 그러나 혹자는 칼뱅의 신학

적 중심사상을‘성령론적 구원론’(한철하) 혹은‘섭리와 예정’(Kuyper, Boetner,

Doumergue) 혹은‘하나님의 영광Gloria Dei’(H. Weber, O. Ritschl) 혹은‘객관적 신

개념(Mulhaupt, K. Holl)이라고 본다. A. Kuyper, C a l v i n i s m , New York: Revell,

1908; L. Boe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Grand Papids, 1931;

Emile Doumergue, Jean Calvin, Les 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 4 Partie en

7 tomes, Laussane: Leuily-s u r-Seine, 1899-1927; K. Holl, Gesammelte Aufsatze

III.(Johannes Calvin), 1928.

7) Hermann Bauke, Die Probleme der Theologie Calvins, Leipzig, 1922, 31. 이하의

Bauke에 대한이해는Niesel의 책을참고하였음.

8) 참고. Donald K. Mckim(ed.),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이종태 옮김,『칼뱅의

신학의 이해』(서울: 생명의말씀사, 1991). 이 책에서 도날드는칼뱅의각 신학적주제

Page 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논증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성경의 증언을 절대적 권위로 인정한다는

것이다.9) 이러한 바우케의 해석은, 칼뱅의 신학 속에는-형식적(formal)

이건, 실질적(material)이건-신학방법’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

래서 최근 칼뱅의『기독교 강요』번역자이자, 칼뱅신학 연구가인 포드

배틀즈(Ford Lewis Battles)는 1559년 판『기독교 강요』의 구조는“대

조적구조”로 이해하였다.10)

우선 바우케는 칼뱅을 전형적인 프랑스인으로 간주하고, 그의 신학

방법을 프랑스인의 사유체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칼뱅은 프랑스 정신의 두드러진 대표자로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프

랑스 정신에 의하면, 생명은 형식 안에 그 특징을 나타낸다.”11) 이와상

응하게 니이젤도 칼뱅의 신학을“프랑스적인 것에 의해서 형성된 개혁

신학”이라고 특징짓는다.12) 즉 칼뱅의 신학은, 독일 정신의 토양에서 생

성된 이론적이며 논리적인 신학과는 다르게, 인간의 죄악된 현실을 염

두에 두고 있는 철저히 현실적 혹은 인간적 특성을 갖는다는 뜻이다.13)

신학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수미일관首尾一貫하고 통일된 신학방법,

혹은그가성경의 증언을이해하는‘인지구조’를 아직학자들이발견하

지 못했다고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칼뱅의 주저인『기독교 강요』(I n s t i t u t i o

Christianae Religionis)를 중심으로 그의‘신학방법’혹은‘인지구조’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어느 특정한 신학자의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신학체계’나‘사유체계’혹은 그

의‘인지구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신학자 자신의 신학

방법및 체계에서벗어난 해석은 바른해석이 될 수 없기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제II장에서는 우선 지금까지 칼뱅의‘신학방법’내지

‘신학체계’를 연구하였던 학자들의 선행 연구결과를 간략히 소개하면

서, 그 특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제 I II장에서는 그의 시대-정신

적 배경인‘라틴문화의 사유체계’에 대하여 알아보고, 제IV장에서는

칼뱅자신이 자신의『기독교강요』에서신학적 주제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그의‘신학방법’및‘인지구조’를 분석해 볼 것이다.

I I. ‘이율배반적복합’에 대한암시

일찍이 헤르만 바우케(H. Bauke)는 칼뱅의 신학적 교리 안에 있는

형식적인 구성 원리를 세 가지로 특징지어 구분하였다. 그것은 첫째,

‘합리주의’, 둘째‘대립의 복합(통합)’, 셋째,‘성경주의’이다. 그런데 바

우케가 말하는‘합리주의’적 특징이란, 변증법적 형식으로 신학 내용을

통제하는 것이고, 둘째,‘대립의 복합 내지 통합’이란, 상반되는 극단의

개념들을 종합하는 신학방법을 뜻한다. 그리고 셋째‘성경중심주의’란,

1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37

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편집하고 있다. 그러나 칼뱅의 신학방법에 대한 연

구 논문은게재되지 않았다.

9) H. Bauke, op. cit., 20.

1 0 ) Ford Lewis Battles, Calculus Fidei: Some Reminations on the Structure of the

Theology of John Calvin (Grand Rapids: Calvin Theological Semninary, 1979), 2.

11) H. Bauke, op. cit., 14.

12) W. Niesel/李種聲옮김, 『칼뱅의 神學』, 11.

13) 칼뱅의 전기를 쓴 장 카디에Jean Cadier는 자신의 책: Calvin, I’homme que Dieu a

dompte? 서문에서 칼뱅의인 한 말, 곧“나는 나의 마음을 죽여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를 근거로“그(= 칼뱅의)가 그처럼(종교개혁자로, 필자첨부) 승리할 수 있

었던 것은 그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꺾고 길들이신 주님의 능력에 의

해서였다”로 특징짓고 있다. 이것은 칼뱅의 신학이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암

시해준다.(Jean Cadier, Calvin, I’homme que Dieu a dompte, 이오갑 옮김,『칼뱅의,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3) 그리고 칼뱅의 지적 형성에

관한 연구: Jacques Pannier, Recherches sur la formation intellectuelle de Calvin,

Paris: Alcan, 1931, 55. 특히Pfisterer는 자신의 논문“Die rassische Zugehorigkeit

C a l v i n s ”에서, 칼뱅의 민족적 형통으로 볼 때, ‘북방민족’에 속한다고 한다( W .

Niesel/ 李種聲옮김, 『칼뱅의神學』, 제1장, 각주8.

Page 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토아 철학의 덕론 전체의 표어이다.”18)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격언(格

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도 스토아 철학의 윤리 덕목이었

기 때문이다.19) 따라서 우리는 라틴 전통의 스토아 사상의 특성이 칼뱅

의 신학에 실질적으로내재되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칼뱅의 신학을‘구조심리학적’으로 해석한 베버에 대하여 니

이젤은 반론을 제기한다. 니이젤은, 칼뱅의 신앙 체험은 내적‘자아(自

我)’에서유래한 것이아니라,‘자아’밖에서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칼뱅의 사유 체계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고 강조한다. 첫째는 목적론적 인과법칙(因果法則), 즉 모든 관계를 인

과율에 의해서 설명하고, 종속시키는 것이다. 니이젤에 의하면,“칼뱅은

윤리적으로 파악된 신(神) 개념에서 모든다른 개념들을 인과적으로끌

어낸다. 즉 신神의 영광이라는사상에서 그것을 인출해 내며, 동시에 그

것을 그 영광의 개념으로 환원시킨다.”20) 그리고 니이젤은 계속해서 말

하기를,“인과율적 사고가 가끔 가치화의 사고에로, 혹은 그 반대로 변

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특수하고 상호 모순되는 사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한다.21) 그래서 니이젤은 둘째로, 칼뱅의 신학방법의 특

성을“대립되는 것의 복합(complexio oppositorum)”, 즉‘사고의 대립’

으로 특징짓는다.22) 즉 더 자세히 말하면,“어떤 사고 내용이 의미하거

나 의도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오히려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다.23) 예컨대 의인(義認)혹은칭의(稱義)란, 신(神)의 공로에만 의존하나,

실제로는 항상 성화(聖化)와 경건의 자기 확신이 함께 따라온다는 것

그래서 베버(H. Weber)도,‘구조심리학적’전망에서, 칼뱅의 모든 사고

구조를 형성하고있는최상의 신학적 원리는 전혀“형식적인 것이아니

라, 영혼깊숙이 숨어 있는 체험, 곧神의 영광”이라고 해석하였다.14) 그

에 의하면, 칼뱅은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아(自我)

원리기준에 의해서사물의 의미를 해석하였다.15)

프랑스 사람인 칼뱅의 인간적 성품에 대한 베버Weber의 이러한 분

석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틴 전통의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는 칼뱅이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하여 참고하고 수용한

사상은, 바로다름 아닌‘스토아’학파와‘에피쿠로스(BC. 314-270)’ 학

파의 철학을 종합한‘라틴신학’의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354-430)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칼뱅이

젊었을 때 학문적으로 심취한 것은, 바‘스토아’학파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세네카( S e é n e è q u e ) ’의‘인문주의적 철학’이었기 때문이

다.16) 그리고 칼뱅의‘윤리학’은‘스토아’학파의‘존재윤리학’혹은‘심

정윤리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7) 그런데 히르쉬(Hirsch)는

‘스토아’철학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스토아 학도들은 현실주

의자이며, 실천적인 생활에서 중요한 것, 즉 세차게 일을 시작하고, 결

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 등을 알고있다. 그래서‘괴로움을 참고견디고,

쾌락을 버리라(ajnevcou kai; ajteccou: sustine et abstine!)’는 것이 스

1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39

14) Hermann Weber, Die Theologie Calvins. Ihre innere Systematik im Lichte struk-

turpsychologischer Forschungsmethode, Berlin: Elsner Verlag, 1930, 21.

15) Ibid., 18, 25.

16) 칼뱅의과 16세기 초 인문주의와의 관계에 대하여: J. Bohatec, Budeé und Calvin,

Graz, “1950년에. 그(= 칼뱅의)는 1 5 3 2년 세네카( S e é n e è q u e )의‘관용론: D e

Clementia’을 출간해서, 노용에 있는 자기 동창생 생에르와의 수사 클로드 드 앙제

스트에게헌정하였다”(J. Cadier/이오갑 옮김, 『칼뱅의, 하나님이길들인사람』, 36).

17) 이 점에 관하여: Joseph Haroutunian, Calvin Commentaries, 한국칼뱅의주의연구원

(편역), 『칼뱅의 조직신학해석』(서울: 기독교문화사, 1986), 403f.: “사회윤리.”

18) 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강성위 옮김,『서양 철학사』상

권·고대와중세(대구: 이문출판사, 1996), 323.

19) Ibid.

20) W. Niesel/李種聲옮김, 『칼뱅의 神學』, 12.

21) Ibid.

22) Op. cit., 11.

23) W. Niesel/李種聲옮김, 『칼뱅의 神學』, 12.

Page 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이율배반적 사유체계’이다. 그렇다면

‘이율배반적라틴적 사유체계’는 구체적으로어떠한 것인가?

I I I. ‘이념(理念)과 현실경험(現實經驗)의 이율배반적복합’

의 라틴문화의사유체계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 그리스어는 로마제국의‘일반 대

중어(koinhv diavlekto")’가 되었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는 서

방에서 고용어, 문학어, 민중어로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북아프리카는

전혀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원문들이2세기

말 아프리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예컨대「쉴이움의 순교자들의

행전, 180」28)이 바로 그것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작품은 그리스도교의

첫 라틴 문헌이다.29) 그런데“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처럼, 라

틴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도‘고전(이교인)’라틴어가 그리스도교의 주

제에 전혀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다.”30) 그래서, 드롭너R. Drobner에 의

하면,“그리스도교-라틴 특수어”가 생겨나게 되었다.31) 즉 사전적으로

이다. 그러나 이것은 라틴문화 속에있는 사람들에게는결코 모순이 아

니라, 오히려 로마 라틴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생활의 특성이라

고 한다. 즉 로마 라틴계 사람들에게는,“이념과 현실이 긴밀히 관련되

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 양자는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24) 따라서 니

이젤은, 칼뱅에게 있어서‘이념’과‘현실’은 서로‘변증법적’으로 종합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역설적’으로 종합되지도 않고, 항상‘이율배반

적’으로상존한다는암시를 주고있다.25)

이상 칼뱅의 신학방법에 대한 바우케, 배틀즈 그리고 니이젤의 선행

연구는, 칼뱅도-어떤 모양으로든-자신의 신학을 전개해 나아가는‘형

식적 혹은 실질적인’신학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아직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분

석해내지못하였을뿐만아니라, 그 방법을‘학문적전문용어(terminus

technicus)’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 단락에서 간단히 살

펴본 바와같이, 이미배틀즈(Ford Lewis Battles)는 1559년 판『기독교

강요』의 구조를‘대조적 구조’로 특징짓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대조적

구조’의 통합을 최근의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이해하면, 바로‘복합적

방법Method of Complex’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두 개의 명제가 서로

모순되면서도, 동시에 각각 진리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합리성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는신학은, 이러한‘복합적 방법’을‘이율

배반적 모순’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거부해 왔다.26) 그러나 사실상 라틴

1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41

24) Ibid., 13.

25) 칼뱅의 설교의‘양식구조’를 연구한 뮬하우프트E. Mulhaupt는“칼뱅에게는 불명료

성과 모순들이 허다하다”고 말한다(Erwin Mulhaupt, Die Predigt Calvins, ihre

Geschichte, ihre Form und ihre religiosen Grundgedanken, Berlin: de Gruyter

Verlag, 1931, X I V.). 그러나 이를 마티아스 시몬Matthias Simon은‘변증법’으로 이

해했다.“신은 우리에게는 필연코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대립되어 있는 것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이다.”(M. Simon, “Die Beziehung zwischen Altem

und Neuem Testament in der Schriftauslegung Calvin,” Ref. Kirchentag. 8, 1932,

34. [W. Niesel/李種聲옮김, 『칼뱅의神學』, 17에서재인용]).

26) 사실상 루터M. Luther의‘노예 의지론(De servo arbitrio)’ 과 에라스무스(Erasmus

Roterdamus의‘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은 루터의 칭의론이 가지고 있는‘이

율배반적논리’를 수용할 수 없어서 생긴논쟁이라고할 수 있다.

27) 라틴 문헌에 대한 연구는 Hubertus R.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 하성수

옮김, 『교부학』(왜관: 분도출판사, 2001), 233 이하를참조.

28) 이 문헌은 고대교회의 남아 있는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라틴어로 된 그리스도교

문헌’이다.

2 9 ) 참조. G. May, Lateinische Patristik. Hilfsmittel, Handbucher, Literatur-u n d

Auslegungsgeschichte, ThR 53(1988), 250-76. 어쨌든 적어도2세기 후반에북아프

리카에는 라틴어 번역성경들이 있었다. 그러던 중 4세기 히에로니무스의새 번역에

기초한‘일반 보급판「불가타」’가 다른번역들을압도하게되었다.

30) Hubertus R. Drobner/하성수 옮김, 『교부학』(왜관: 분도출판사, 2001), 233.

31) Cf. Ibid., 234.

Page 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어 말하면,‘역설적 방법’으로 전개하였다. 니이브(J. L. Neve)에 의하

면, 그는“신앙과지식이라는 일종의 이분법적”사유방식에서자신의신

학을 전개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스콜라주의에 전승되었고,

그리고프로테스탄트신학에까지영향을 주었다.36)

이상 간략히 개괄한 라틴신학의 창시자인 터툴리아누스의‘신학체

계’혹은 신학적‘인지구조’는 종교개혁자 루터뿐만 아니라, 특히 칼뱅

의 신학적 전거가 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d. 430)는 펠라기우스

(Pelagius, d. 418?)의 합리적 도덕주의를 거부하기 위하여‘인간 죄의

보편성’과 하나님의‘절대적 은총’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는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한다. 인간의 원죄 유전설, 더 자세히 말하

면,‘영혼의 유전설’을 주장한 터툴리아누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최

초 인간 아담(Adam)의 원죄 유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도 결국은 인간 의지의 행위라고 보았다.37) 여기

서 모순이 생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에서 어떻게 선한 의지

가 생길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는‘의지는마음을 다스리는능력’이라

고 주장하기때문이다.38) 아우구스티누스의‘이율배반적인지구조’는 그

의『자유의지론』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제1권‘인간과 자유

의지’에서 인간의“자유의지가〔죄〕악의 원천”이라고 규정한다.39) 즉“악

은 자유의지에서 옴이 입증된다”고 말한다.40)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는 새로운 낱말이 생성되고, 의미론적으로는‘전문용어’를 포함한 기독

교적 낱말의 의미를 확대하고축소하였으며, 문장론적으로는새로운 문

장의 구조 또는 낱말을 연결시키게 되었다.32) 이상의‘복합문화적’혹은

‘복합언어적’토양 속에서 카르타고의 터툴리아누스는 최초로 라틴신

학을정초하기시작하였다.

우선 터툴리아누스는, 신학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신학적 혹은철학

적 지식보다는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철학을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인도자로 간주하고,‘신앙의 표준’

에 기술된 교회의 가르침이 가지는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엄격한‘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33) 그는“‘신앙의 표

준’과 상충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않는 것이 곧, 모든 것

을 아는 것이다: adversus regulam nihil scire omnia scire est”라고 말

할 정도였다.34) 그래서 그는 신앙의 내용이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신

앙이란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의 신학방법은 자연히‘역설이론’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저 유명한 명제, 곧“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 est”라는말을남겼던 것이다.35) 이렇듯 그는, 그 어느교부보

다‘교회의권위’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신학을‘이율배반적 모순’, 바꾸

1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43

32) Cf. Ibid.

33) 그러나 니그렌(A. Nygrén)은 그의신학을다음과 같이 평가한다:“그는구약의 율법

주의( n o m i s m )와 로마의 도덕주의 및 법률학을 결합시켰다. 그 결과 공로신학

(theology of merit)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후세 기독교 역사에 미친 영향은 불행한

것이 되었다. …터툴리아누스에게서 나타난 노모스(Nomos)의 형태는 기독교 역사

에 있어서 다른 데서는 찾아볼수 없는것이다”(Nygrén, Agape and Eros, I I, vol. 1,

131ff. =J. L. Neve/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 159에서재인용).

34) Tertulliganus, De praescriptione, 14(J. L. Neve, A History of Chrisitan Thought,

서남동 옮김, 『기독교교리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5], 155에서재인용).

35) 그러나 이 말은 니이브에 의하면, 그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터툴리아누스의

신학에 대한평이라고 말한다(J. L. Neve/서남동옮김, 『기독교교리사』, ibid.).

36) 참조. J. L. Neve/서남동옮김, 『기독교교리사』, ibid.

37) A. Augustinus, De Spiritu, X, 11,17(J. L. Neve/ 서남동 역,『기독교 교리사』, 166에

서 재인용).

38) 참조, J. L. Neve/서남동 옮김,『기독교 교리사』, 166. 이러한‘이율배반적 인지구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정립한 보편적 교회의 신학은 결국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

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가 그토록 반대한-도나투스파의 공로신학을 전승한 중

세 스콜라 신학으로 변현되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는종교개혁 신학에도 영향을 주

었다.

39) A. Augusinus, De libero arbitrio, 성염역주(왜관: 분도출판사, 1998), 103ff.

Page 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없다”(I,1,2)라고 말한다.44) 이를 알기 쉽게 논리적 기호로 표시하면,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p’로 표시하고‘하나님 인식’을 ‘q’로 표시

하면,“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다”는

명제는‘~p →~q’가 된다. 그리고“하나님에 대한인식없이는 자기자

신에대한인식도 없다”는 명제는‘~q → ~p’가 된다. 여기서‘~p → ~q’

와 ‘~q → ~p’는 서로 이율배반적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두 명제가 모

두 진(眞)이 되려면, 두 번째 명제는“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자기 자신

에 대한 인식이다”가 되거나, 혹은“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곧 하나

님에 대한 인식이다”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형식논리(形式

論理)에 의하면, ‘p → q’가 참(眞)일 경우‘~q → ~p’ 첫 번째명제와 두

번째 명제가 대우 관계에 있어서 ‘~q → ~p’는 참(眞)이지만, 逆인 ‘~q

→ ~p’와 ‘p → q’는 참이아닐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

다”(I,1,1)와“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

다”(I,1,2)는 두 명제가 역설적으로 모두 참(眞)이 되려면,‘부정(否定)

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즉 어느하나가‘부정’되어야 한다. 즉“자

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와“하나님에 대한 인

식 없이는 자기에 대한 인식도 없다”가 되든지, 아니면“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다”와“하나님에 대한 인식

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두 명제가 서

로 부정관계에 있다는 것은 두 명제가 서로 역설 관계에 있든지, 아니

면 두 명제가 서로이율배반적(antinomy) 모순관계에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명제 사이의 역설 관계는 한 명제를 부정하면 종합 내지

통일이 되지만, 이율배반은 한 명제를 부정해도 종합이나 통일이 되지

제3권에서는“자유의지는, 인간의 선으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유래한다”

고 말한다.41) 여기서 우리는 당장 이율배반적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왜

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에서‘악’이 나올수 있고,‘선’이 나올수도있

기 때문이다. 이것을 병렬식 혹은 종속적으로 표현하면‘하나님으로부

터 유래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악을 배태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선한

하나님은‘악의 근원’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자유의지는 중간

선’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42)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이렇게

이율배반적 모순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그가 모든 현상을“이념과

경험(현실)의 두 차원”에서동시에 보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범죄하

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범죄 하지 않는 영혼’도 있다고 말한다.43) 예컨

대‘죄의 직접적인 원인은 곧 자유의지’라고말하면서, 동시에‘죄짓지

않을 의지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이율배반적 라틴적 사유체계’

가 칼뱅의『기독교강요』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고있는가?

IV. ‘인간의자기인식’과‘하나님인식’의 이율배반적복합

칼뱅은『기독교 강요』제1권의 제목을“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

(Inist. I)이라고 붙이고, 제1권 1장에서“하나님 인식과 우리 자신에 대

한 인식은 서로 연결(혹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연관성의본질이 여

기서제시될 것이다”(I,1)라고말한다. 그리고 곧 이어서 제1권 1장 1절

에서“자기 자신(= 인간 자신, 필자 주)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다”(I,1,1)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하나님

에 대한 인식 없이는 자기 자신(= 인간 자신, 필자 주)에 대한 인식도

1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45

40) Ibid., 121ff.

41) Ibid., 269ff.

42) Ibid., 295ff.

43) Ibid., 339ff.

44) 최근의 칼뱅의 이중적 신지식에 관하여: Edward A. Dowey, Jr.,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3rd. ed. (Grand Rapids: Erdmans, 1994); T. H. L.

Parker, Calvin’s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E d i n b u r gh: Oliver & Boye,

1969).

Page 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본능을‘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칼뱅은

두 명제의 형식 논리적 이율배반에 상응하게 내용면에서도 인간의‘종

교적본능’을, 더 자세히 말하면,‘우상숭배’를,‘하나님에대한 인식’으

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결국 칼뱅 자신의 주장에 따른다면, 일반 사람

들은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신을 찾고 섬기지만, 그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알지 못하는 신’이고,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 선천

적으로 주어진 하나님 지식은 결국‘우상숭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칼뱅은 제1권 4장에서“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지식은

(인간의, 필자 주) 무지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질식되고 부패되었다”(I,4)

고 말한다.46)

뿐만 아니라 칼뱅은 제1권 3장, 곧“하나님을아는 지식은 천성적으

로 인간의 마음속에 심겨져 있다”(I,3)는 명제에 상응하게 제5장에서

도,“하나님을 아는지식은 우주의 구조와 그 지속적인 통치 속에서 빛

난다”(I,5)고 말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피조물인 자연

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칼뱅은 또

한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운동원리’를‘하나님의 통치’로 신격화하

여 고양(高揚)시킨다. 왜냐하면 칼뱅은 자연을 일종에 하나님이 세워놓

으신 질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하나님의 자기증언의 명백성은 우

리에게서 모든 핑계를 제거한다”(I,5,1), “하나님의 지혜는 그 어느 누

구에게도 숨겨져 있지 않다”(I,5,2), “인간은 신적 지혜의 가장 훌륭한

피조물이다”(I,5,3), “그러나 인간은 곧바로 하나님께 대항하여 배움 망

덕하게 행하고 있다”(I,5,4), 그래서 인간은“창조주를 피조물과 바꾸고

있다”(I,5,5), “창조주는 창조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계시하신다”(I,5,6),

뿐만 아니라“하나님의 통치와 심판권”(I,5,7)을 계시하신다. 이렇듯 하

나님은“인간의 삶 속에서 당신의 자유로우시고 탁월한 통치”(I,5,8)를

않는다. 예컨대 역설은‘~(~p) = p’가 되지만, 이율배반은 한 쪽 명제를

부정(否定)한다고 해도 종합이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다(이 아니다)’와‘하

나님에 대한 인식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다(이 아니다)’가

되어도 두 명제가 종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칼뱅은“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다”(I,1,1) 그리고“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다”(I,1,2)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명제는 서로이율배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어느한쪽명제

를 부정한다고해서결코두 명제가 내용상 일치되지않기 때문이다. 다

시 말하면,“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없이는 하나님에 대한인식도 없다”

와“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가 일치하지 않

으며,“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와“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다”가 내용상 서로 일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식의 주체는 항상 자기, 곧 인간이고,

칼뱅에게서하나님과인간은 서로질적으로 다른존재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칼뱅은“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천성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심겨져 있다”(I,3)고 말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45) 그래서 그는 인간의 자기 자

신에 대한인식을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고양시키고있다. 그러나 칼

뱅 자신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 천성적으로 심겨진 하나님에 대한지

식은 결코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종

교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칼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1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 복합 147

45) 이러한 사고는 르네 데카르트(R. Descartes)가 신(神)을‘본유관념’, 곧‘선천적으로

주어진 관념’으로 규정하고 있는것과 같다:“내마음속에 외계의 사물에서 온 것도

아니요, 내 의지의 결정에 따라서 생긴 것도 아닌 바, 오직 나의 생각하는 능력에서

유래한 사상이 있음을 관찰했을 때, 이 사상들을나는 본유관념이라고 부른다. 그렇

게 부름으로써나는그것들을저 밖으로부터유래한 것 또는내 스스로가지어낸 관

념들과 구별한다”(E. S. Haldane & G. R. T. Ross [ed], The Philosophical Works of

Descartes[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11], I, 431ff).

4 6 ) 영어 번역본은‘부분적’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This Knowledge is either

smothered or corrupted, partly by Ignorance, partly by malice”(I,3).

Page 7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람이 의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47) 즉 아담의 원죄는 모든 인간에게 유

전되었다고한다. 칼뱅은 이점을 다음과 같이자세히 설명한다.

아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소멸되었고, 또 그가 자기를 장식

해 준 지혜, 힘, 성결, 진리, 의를 잃고 그 대신 무지, 무력, 불결, 공

허, 불의의 질병을 계승받은 것이다. 징벌은 그가 호롤 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그의 모든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그들

도 같은 비참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교부들이 원죄라고 일

컫는유전적부패이다(I I,1,5).

이에 덧붙여 칼뱅은,“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를

의미한다. 그것은 영혼의 모든 부분에 퍼졌으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

여 불쾌하게 생각하며, 우리 안에 성경이 이야기 하는‘육체의 일’(갈

5:19)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일으킨다”(I I,1,8)고 말한다. 결국 칼뱅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타락해 있다고, 주장한다. 즉“죄는 모든

인간을 파멸시키고 있다”(I I,1,9)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타락의 책임은

철저히 인간에게 있는것이지, 하나님에게있는것이아니라고, 그는강

변한다(I I,1,10). 그래서 칼뱅은 자신의 요한복음강해에서도“아담의영

적 생활이 그 창조주와합일함으로 성립된 것과같이, 그로부터의 분리

는 그의영혼의 죽음을 의미한다”48)고 말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칼뱅은 타락한 인간의‘하나님 형상’이 가지고

있는성품을 다음과같이묘사하고있다.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하나님의의에서멀리떨어져있으므로 그것

은 불경하고비열하고 불결하고흉악한것을품고욕구하고 행한다

는 사실이다. 또 그의 마음은 너무나 죄의 독소에 물들어서 부패한

행하신다. 그러므로“우리는 하나님을 창출해 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자신의 삶 속에서 경외해야 한다”(I,5,9).

이상 칼뱅에게 있어서의‘인간의 자기인식’과‘하나님 인식’을 검토

해 본 결과,‘인간의 자기 인식(지식)’과‘하나님 인식’은 서로 이율배

반적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인간의 자기 지식(인식)’이 곧‘하나님의

지식’이라면, 형식논리적으로 인간이 곧 하나님이되기때문이다. 따라

서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인간이 아니라면,“자기 자신(=

인간 자신, 필자 주)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다”

(I,1,1)는 명제는 서로 이율배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서로 복합(複合)되어 있

다고 밖에는 다르게 이해할 수 없다. 즉 두 명제는 서로 이율배반적이

지만,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타원형의 두 중심처럼, 하나

의 중심 없이는 나머지 다른 중심도 있을 수 없는 상호 복합관계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중심이 있음으로써 나머지 다른중심이 있을수

있는 관계이다. 명제로 설명하면,“자기 자신(= 인간 자신, 필자 주)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다”(I,1,1) 그리고“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는 자기 자신(= 인간 자신, 필자 주)에 대한 인식도 없

다”(I,1,2)는 것이다.

V. ‘인간의전적타락’과‘율법준수’의 이율배반의복합

칼뱅은「기독교 강요」제2권에서“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 하나

님에 대한 인식”으로 넘어간다. 이를 위해서 최초 인간 아담(Adam)의

죄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아담의 타락과 배교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고, 자신의 본래의 순결함을 잃어 버렸다”(I I,1)

그리고 칼뱅은 로마서5장 19절을 근거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말미암아 많은사

1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 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49

47) 롬 5:19: “한사람이 순종하지아니함으로많은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한 사람이 순

종하심으로많은사람이의인이되리라.”

48) Calvin, Commentary on John 3:3; Commentary on Romans 6:21; Inst., I I,1,5.

Page 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9절을근거로 그리스도께서우리삶의모본을보여주셨기 때문에, 우

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우리

가 하나님께 대하여 화목할 수 있게 한, 그리스도를 우리가 표본으로

보여주며, 따라서 우리의 생활에서 그의성품을 나타내야 한다는 권유

를 우리에게준다”(I I I,6,4)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칼뱅은“우리(= 그리스도인)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위하여 살고 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다. 그러므로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행동을 주장하도록 하자, 우리

는 하나님의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지향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합법

적 목적인 고로 우리의 생활의 모든 면에서 그에게 향하게 하자”(I I I,7,

1)고 권면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뱅은“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

에게 모든 행동에 있어서 자기의 소명을 깨달을 것을 명령하신다는것

에 주목하여야 한다”(I I I,10,6)고 말한다. 이러한 칼뱅의 증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 곧 그

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명령하신 것을-그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점

에서-어떤모양으로든실천해야하고그 명령에 순종해야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타락한 성품을 가진 인간’이,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형상이 파괴된 인간’이-그리스도인뿐만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도-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율배반적 복합을 또 다시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설사 우리가 칼뱅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곧‘신자의 생활’을

제3장 성령론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성령의 도움으로 신자는 그리

스도의 명령을 준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 성품

이 전적으로부패하고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능동적으로‘성령의인도’

를 수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 걸음양보하

여, 칼뱅이 아우구스투스(Augustinus)와 루터의‘노예 의지론De servo

aribtrio)’을 그대로 수용하여,‘만일 악마가 그리스도인의 등에 올라타

서 어리석고 난폭한 기사와 같이 길을 인도하면, 악한 행위를 할 수밖

에 없고, 만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등에올라타서 선한곳으로 인도하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산출할 수 없으며, 때로는 사람이 확실히 선

을 행한다 할지라도 마음은 언제든지 위선과 그릇된 부정에 잠겨

있으며, 그의 심령은 내적 도착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다(I I,

5,19).

이렇게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기에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율법의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고, 칼뱅은

강조한다.49)“만일 율법이 의義의 완성을 표시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것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되며, 그 안에서

사람은 하늘에 있는 법정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I I,7,3)고 말한다. 그래서 칼뱅은 로마서3:19를 인용하여, 율법이 주어

진 것은오히려“모든 일을막고온 세상으로 하나님의심판아래있게

하려 함”(롬 3:19)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율법에 주어진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

하지 않는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그들이 파멸하거나 멸망을 당케하시

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롬 11:

32)(I I,8,7)이라고 칼뱅은 강조한다.

따라서 칼뱅은 제3권 제6장‘신자의 생활’에서는 그리스도인은 거

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성경의 강령은 주로 두 부분으

로 구성된다. 첫째로 자연적 성품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의에대한 사

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며 들어오게 된다. 둘째로는 의(義)의 경

주에 있어서 무슨 사악한 발걸음으로 경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한 규칙을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이다”(I I I,6,2) 따라서 그는 레위기19

장 2절, 베드로전서1장 16절을 근거로“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6장 4절; 8장

1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51

49) 칼뱅은‘율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율법이란 말은 경건하고 의로운 생활의 법

칙을 명하는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세의 손을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종교의 형을 말

한다”(I I,7,1)

Page 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고만다. 즉 하나님 자신의 순환론적 자기활동 속에 그리스도인의행

동은 소멸(폐기)되고 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하나님 자신의Monodrama’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

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한 생활과 이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율법

역시 이율배반적 복합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서‘너희는’이라는 대화의 상대자가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

고 둘째는, 칼뱅은 여전히‘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야기 하면서,“그들

(=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멍에에서 자유롭게 된 자로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뜻에복종하는것”(I I I,19,4)이라고 말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이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인간적 객체가 없는 하나님

의 자신만의Monodrama’는 칼뱅의‘설교론’에서도 발견된다. 칼뱅은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의‘설교’사이의 관계도 이율배반적으로 연

관시켜 설명한다. 즉 어느때는 설교자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 하면서, 어느때는 설교자의 설교와 하나님의말씀을 예리하게 구별

한다. 왜냐하면 칼뱅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을 통해 말씀하신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하늘로부터공개적으로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다.52)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도움이나 도구 없이 스스로 혹은 천사들을 통해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을 통해하기를 더 좋아하신 많은이유가 있

다”53) 그래서 칼뱅은‘하나님은 성경의 기자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말씀

하셨을 뿐만아니라, 교회안에 사람들을 세워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게

하셨다’고 말한다. 칼뱅 자신의 말을 빌리면,“그(= 하나님)는 우리에게

우레를 발해 우리를 몰아내기보다는…오히려 해석자들을 통하여 인간

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더 좋아하신다.”54) 이러한 칼뱅

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설명한다면’(I I,4,1),50) 그리스인들이

행하는 선행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 되고

만다. 따라서 결국그리스도인의삶은없는것이된다.

그러나 반면(反面)에 성령의 인도함에 의한선행을 그리스도인자신

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적 모순의 복합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칼뱅은 아담이 가졌던 원자유와 타락한 인간의 자유와 성도

의 의지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51) 더 자세히 말하면, 최초 인간 아

담은 자유의지나 힘을 가지고 있어,‘죄짓지 않을 수 있었다(posse non

peccare)’.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죄짓지 않을 수가 없다(non posse

non peccare)’. 바꾸어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죄를 지을 수밖에 없

다.’그러나 성도(聖徒)는 성령의 불붙여진 후에 의지할 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죄지을 수 없다(non posse peccare)’라고 말하면

서,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칼뱅은 말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회복한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강조한다

(I I,3,13). 이 말은 사람의 선한 행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선행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II,3,11). 그래서 칼뱅은“은총만이 일체의 수행장”이

라고거듭강조한다(II,3,12).

결과적으로 칼뱅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

령을 그리스도인 자신들이 행하여야 할 말씀으로 해석하면,‘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성품’, 곧“죄 짓지 않을 수 없는”인간과‘하나님의 말

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으로 준행해야 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적 복합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

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준행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명령하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그 명령을 준행하는 결과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1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53

50) 루터는 자신의De servo arbitrio에서‘자유의지’를 주장하는 화란의 인문주의자 에

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7-1536)와 죄에 노예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논쟁하고있다.

51) 사실이러한 주장은아우구스투스의“타락과은총”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52) Comm. Isa 55,11. com X X X V I I, 291: “Nec enim loquitur palam e coelo Deus, sed

hominibus tanquam organis utitur, ut eorum ministerio voluntatem suam declaret.”

53) Inst., IV, 3, 1.

Page 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칼뱅에게 있어서 설

교자의‘설교’가 성령 하나님의 자신의 증언이라면, 설교는 성령 하나

님의 자기 증언, 곧‘하나님 말씀’의 자기 순환적Monodrama가 되고,

만일 설교자의‘설교’와‘하나님의 말씀’이 구별되면‘설교자의 설교’

와‘하나님의말씀’은 서로이율배반적복합관계가 성립된다.

V I. 결론: 라틴적인지구조에기초한이율배반적복합

배틀즈는“세네카의 클레멘트에 관한 것에 대한 칼뱅의 주해:

Calvin’s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에서 헬라와 로마의

고전 수사(修辭) 학자에 기원을 둔 칼뱅의 수사학에 관하여 연구하였

다. 그에의하면,“고대 수사학자들은 자신들이쓰고 말하는 것을적합

한 언어로 표현하고, 남들이 쓰고말하는 것을해설하는 기법과 관련된

여러원리를 발전시켰다. 이런것을 학교에서 훈련 받은칼뱅은 자신의

도제(徒弟) 기간에 세네카가 쓴‘클레멘트에 관하여(De Clementia)’라

는 고전 본문을 해설했다. 그러나 개종 이후 칼뱅은 고전 학식이 모두

뒤바뀌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는 인간의 수사학을 신의 수사학과

맞바꾼 셈이다(I,8,1 이하). 그는 더 이상신학자의 사명을 사변적인 것,

무엇보다도 철학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목회적 혹은 교육적으

로(『기독교 강요』I,14,4) 보면서 수사학을 사용하되, 삼가는 태도를 취

했다.”59)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삼위일체론

적 사역을 수사학적으로 통합 내지 복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래서 피터 바르트는“인간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경적인 전제가 칼뱅의『기독교 강요』의 고유한 생

의 진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다는신비주의자들을배척하는것이다.55)

뿐만 아니라, 칼뱅은 또한, 그리스도께서는“그들(= 설교자)의 입이

자기의 입으로 간주되고, 그들의 입술이 자기의 입술로 간주되기를 원

한다”고 말한다.56)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

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돕기위해서 해석자들과 교사들이 첨가되어 있

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한다.57) 그래서 칼뱅은 설교자의 직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많은 숭고한 은사들 중

에 독특한 특권은 그(= 하나님)가 사람들의 입과 혀를 자신을 위해서

성별하고 그것들 안에서 그 자신(= 하나님)의 음성을 울리게 한 것이

다.”58) 이렇듯 칼뱅은 설교자의 설교가 또한 성령 하나님 자신의 자기

증언이라고 말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설교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것이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성령의 역사가 하나님

의 말씀에 결합된다. 그러나 구별된다. 이는 외적 말씀은 성령의 힘에

의해서 생명이 불어 넣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는 무용하다는 사실을 우

리는 알게 하기 위함이다.”그렇다면 성령에 인도함을 받지 않는 설교

는 결국 참된 설교가 못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설교자는 성령

하나님 한 분 밖에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 또한 성령의 설교이외

1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55

54) Inst., IV, 3, 1.

55) 종교개혁 당시에도 재세례파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 계시는 조지 폭스George Fox(1624-1691)를 중심으

로 형성된 퀘이커 교도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성령을 강조하고,

구원의 내적 경험과 확신을 강조하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내적광명의 빛은성경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점에 관하여: R. A. Knox, Enthusiasm,

152.

56) Comm. Acts. 8:31.

57) Ibid. 여기서 말하는‘해석자’와‘교사’는 성령을의미한다.

58) Inst., I V, 1, 5.

5 9 ) Ford Lewis Battles,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인간의 한계에 맞춰 조정하셨다”,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ed. by Donald K. McKim, 김종태 역,『칼뱅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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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적 중추”라고까지 말한다.60) 따라서“칼뱅의교리에는 모든내용의 내

용인 살아계신 하나님이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려는 노력이 그의형식과 내용에 나타나 있다. 즉 교리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에게 장소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 필요할 때, 그

는 형식이나내용중 어느하나도 무관하게 사용하지 않았다”61)는 것이

다. 결국 타락한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전제하

고, 당신에 의해서 선택받은그리스도인들을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자

기 사역의 역사 속으로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는 과정 속에서

칼뱅은, 합리적 이성으로 보면분명히 논리적으로모순되는 이율배반을

-라틴 전통의 인지구조 속에서-초월자 하나님 안에서 복합하는 방식

으로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밀 두메르

그에 의하면, “그(= 칼뱅)는 모순들(contradictions), 이율배반들( c o n-

trarieéteeè), 파스칼의 용어로 말한다면, 상반대립들(antinomies)에 부

딪치게 된다.”그러나 이것은‘논리상의 모순이지, 내용상의 모순은 아

니다.’왜냐하면 논리상의 모순의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에 의해서 극복

되기때문이다. 이것이 칼뱅의 신학적 인지구조이다.

주제어

존 칼뱅, 신학적 인지구조, 이율배반적 복합이론, 라틴의 사유체계, 구조

심리학, 하나님의초월적주권

J. Calvin, theological recognizing system, theory of complexio opposi-

t o r u m , System of-Latin Culture, Psychology of structure, Initiative

sovereignty of God

접 수 일 2010년 4월 31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20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1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 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57

60) Peter Barth, Calvin, Zeitwende 7 I, 1931, 310.

61) W. Niesel / 李種聲 옮김, 『칼뱅의神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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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of J. Calvin is to characterize with

the theory of complexio oppositorum which heritages from recogniz-

ing system of Latin culture formed by Tertullianus and Augustine.

For this reason, theological recognizing system for J. Calvin has the

character of contradictions, contrariéteé, antinomies. However this is

not a material discrepancy, but only formal and logical. Since, as for

J. Calvin, formal and logical discrepancy is overcome by ‘initiative

sovereignty of God.’

Theological Recognizing System of J. Calvincomplex oppositorum between Knowledge of God and

Knowledge of Man

Kim, jae jin

Professor

Soongsil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Christian Studies

Seoul, Korea

In general, M. Luther begins the unfolding of his theology with the

theory of justification by faith. J. Calvin, not like M. Luther, unfolded

his theological thesis not from a theological perspective. His theo-

logical perspective varies much with theological main points such as

‘initiative sovereignty of God,’ ‘ethical perspective’ and ‘election

theory,’ but he has no concretive theological method managing his

whole theological theme.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method according to which J. Calvin is describing in his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Realizing this purpose, above all I

have accepted investigation results of the theological method for J.

Calvin by H. Bauke; Ford Lewis Battles; W. Niesel. On account of

their investigation, I have found the theological recognizing system

from the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of J. Calvin. This recogniz-

ing system however is based on the perspective of psychological

structure for H. Weber. Theological recognizing of the system of

1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재진, 칼뱅의 신학적 認知構造-‘신(神) 지식’‘인간지식’의 이율배반적복합 161

Page 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화이트헤드철학에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김성원(서울신학대학교교양학부전임강사)

들어가는말

20세기 오순절적 은사주의의 부흥을 통해 기독교회는 성령 하나님

의 현재적 역사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체험과 증언들을 얻게 되

었다. 이를통해서 교회는하나님의내재성에 관한확신을 가지고, 경험

주의가 지배하는21세기를 담대히 맞을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성령신학은 이러한 교회의 증거를 학문적으로 해명

하는 신학적 과제에 대해 아직도 많이 부족한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

이다. 성령님에 관한 수많은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산 지식들이

목회적 차원의 간증과 선포의 형식을 넘어서 성령신학적 교리로 발전

되고, 더 나아가서변증된다는 증거들은 여전히 미약한 실정이다.

물론, 우리는 성령신학의 이러한 미약함이 조지 헨드리( G e o r g e

Hendry)가 말한대로 본질적으로 개념화, 논리화하기 어려운 영(spirit)

의 속성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1) 더 나아가서, 우리는 헨드리와 함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163-191

1) 죠지헨드리/황승룡옮김, 『기독교신학과성령』(서울: 기독교문사, 199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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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철학적 유비로써 그의“신의 감성”(divine

feeling) 개념을 주목한다. 그의 신의 감성 개념은 성령님의 세계 내적

사역에 필적하는여러가지의미있는유사성을지니고 있기때문이다.

I. 근대과학에대한화이트헤드의비판과성령론의가능성

1925년 로웰 특강(Lowell Lecture)이었으며 그의 명저가 된『과학

과 근대세계』(Science and Modern World)에서화이트헤드는16세기에

시작되어20세기에 이른 근대과학이 그 발전 과정에서 드러낸 근본적

인 문제들에대하여 날카로운 분석과 비평을 가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역사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이 고찰을 통해 화이트헤드가 발견한 한 가

지는, 현대과학의 새로운 성과들은 더 이상 근대과학의 전제들과 일치

하지 않으며, 이 둘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점들이 드러난다는 사실이었

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이 시대는 물질적인 공간, 시간, 에너지에

관해너무도 많은 복잡한 발전이 있기때문에, 과거의 정통적인 전제들

이 가지고 있었던 단순한 안정감은 사라지게 되었다.”3)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정통적인 전제들이란 주로 뉴턴(Isaac Newton)의 우주론적 개

념들을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속성(qualification), 감각적 인식( s e n s e

perception), 텅 빈 공간(empty space), 운동(locomotion), 물질( m a t-

ter), 중력의 법칙(the law of gravitation), 단순한 위치(simple location)

와 외연적 관계(external relation) 등과같은뉴턴의 개념들은 현대과학

에서는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과학의 진보는 이제 하나의 전환점에 도달했

다. 물리학의 안정적인 기초가 와해된 것이다.”4) 과학은 이제 근본적인

께 성령님에 관한우리의 교리적 결핍은 자칫교리의 틀에갇히기 쉬운

기독교신학이 숨을 쉴 수 있는“숨 구멍”이라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주

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2) 기독교가 지닌 영적 차원의 신비는 자칫 합리

주의에 갇히기 쉬운신학을 겸손하게만드는것이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성령 체험과 성령신학 사이의 넓

고 깊은 간격을 볼 때, 여기에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감당해야할 과제와

책임들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령신학의 이러한 책임들 가운데 다음 두 가지 시급한 과제가 있

다. 첫째, 성령신학은 영(spirit)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배척하는 근대철

학의 잘못된 세계관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신학은 영이라는 것

을 존재의 타당한 범주로서 확립하며, 더 나아가 자연주의적, 논리적,

과학적 언어로써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설명하고 해명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는 성령신학을 체계적, 이론적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교회의 증거들이 학문의 장

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영이라고 하는 개

념 자체에 대해 학문의 영역에서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

적 어려움의 배후에는 영을 배제하는 근대과학과 철학의 사상적 편견

들이 있으므로 이러한 편견들을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필요한 구

체적 과제가 된다. 또 영의 범주가 어떻게 세계 내에서 작용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해명이 있을 때 비로소 성령신학의 학문성이 인정될 수

있을것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두 가지 과제의 수행을 위해서 현대철학자인 알

프레드 노스화이트헤드의철학을 주목한다. 이는화이트헤드가 근대과

학과 철학의 잘못된 전제들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분석하고 비판한 수

학자이며 철학자였으며, 또한잘못된 근대 세계관과 인식론을극복하는

새로운 유기체적 철학을 제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논

1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65

2) Ibid.

3) SMW, 113.

4) Ibid., 16.

Page 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근대과학적 유물론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주장한다.“만일 과학이 임시적인 전제들의 뒤범벅으로 전락하지 않으

려 한다면, 과학은 반드시 철학적으로 되어 과학 자신의 기초에 대한

철저한 비평을 가해야만 할 것이다.”9) 다시 말해서 그는 근대 과학의

잘못된 세계관의 전제들로 돌아가서 근원적 사실들에 관해 잘못된 과

학적, 철학적, 대중적 개념들을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근대과학 비평은 성령신학의 발전에 중요한

전기를 제공한다.‘영’이라는 개념 혹은 범주는 그동안 근대과학의 유

물론적 전제들에 의해서 원리적, 체계적으로 배척되었기 때문에, 영을

논하는 모든 담론들은 비과학적, 비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이

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근대과학의 근본 개념들과 원리들에 대하여,

특히 물질 개념에 대하여 행한 근원적 비판을 통해서, 이제 신학은 과

학과철학의 영역에서‘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능성을차단해 온 오

류의장벽을 효과적으로허물수 있게된 것이다.

I I. 근대과학에대한화이트헤드의철학적 대안, 신의감성

개념그리고 성령론의 가능성

화이트헤드는 근대과학의 잘못된 전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그치지 않고, 현대과학의 양자역학(quantum physics)의 발전에 상응하

는 새로운 형이상학과인식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체계를

그는 유기체철학(Organic Philosophy)이라고 불렀는데,10) 오늘에 와서

흔히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 과정사상(Process Thought) 혹은

패러다임의전환을 해야만 하는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또한 발견한 것은, 이처럼 현대에 와서 쓸모없

게 된 과학의 전제들이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영향력은 과학 뿐 아니라 철학에서도 동일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이었다. 그의『사유의방식들』(Modes of Thought)에서 화이트헤드는이

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묘사한다.“[근대과학의] 일반적인

결론들은 그 전체로 볼 때 완고하게 존속되고 있다. 그 결과는 과학과

철학적 우주론과인식론에 있어서의 완전한혼란이다.”5)

그런데 근대과학이 초래한 철학적, 인식론적 혼란보다 더욱 가공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근대과학이“과학적 유물론”이라고 하는

대중적인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사실이다.6) 과학

적 유물론이란 사람들이 근대과학의 전제들을 따라 가지게 된 자연의

질서에 관한대중적 세계관의 관점을 말한다. 예를들어, 과학적 유물론

은 질량(mass)이라는 개념을“단 하나의 최종적이고 지속적인 양(the

one final permanent quantity)” 이라고 믿는다.7)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과학적 유물론은 원자(atom)라고하는것을 영속적인하나의 존재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추상적인것들을 구체적인것으

로 믿는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8)를 범하고 있다.

질량이나 원자라는 개념들이 실제로는 추상적인 것으로, 이 개념들은

더욱 구체적인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가변적인

개념들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개념들을 근본적이며 구체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잘못

된 개념들이 여전히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1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67

5) MT, 132. [ ] 안의말 덧붙임.

6) SMW, 17.

7) Ibid., 102.

8) Ibid., 51. 오영환에 따르면“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로 번역된다.『과정과 실재』(서

울: 민음사, 2003), 78.

9) Ibid., 17.

10) PR, 20.

Page 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1. 화이트헤드의감성론

화이트헤드의 감성(feeling) 개념을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그가 근

대철학의 인식론적 개념들을 극복하려는 의도로 이 개념들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 좋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감성(feeling) 개념

을 또한 파악( p r e h e n s i o n )으로 부르는데, 파악( p r e h e n s i o n )은 이해

(apprehension)라고 하는 근대철학적 개념에서 인간 지성의 작용을 배

제한 것이다. 이해의 개념은 인간이 대상과 관계하는데 있어서 지성의

작용이 필요하며, 또한 언어적 상징작용이 필요하다는 인간중심적이고

이성주의적인관점을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모든존재자

들 사이의 관계적 작용전체를주목하고, 이들 관계들을 인식적 작용으

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괄적이며 좀 더 근본

적인 인식작용을 나타내는 전지성적( p r e-intellectual), 전언어적( p r e-

lingual), 전의식적( p r e-conscious) 개념으로 화이트헤드는 파악( p r e-

hension)이라고 하는개념을 제시한다.

파악은 그 작용에 따라 긍정적 파악(positive prehension)과 부정적

파악(negative prehension)으로 나눠지는데, 이것은 인식의 주체가 파

악하는 특정한 대상에 대해 맺는 관계성의 성격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

으로 나눠지게 된다.13) 즉, 인식의 대상을 인식 주체자가 자신의 형성과

정에서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이러한 인식작용은 긍정적 파악이

라 불리며, 불필요한 것으로 거부할 때 부정적 파악이 된다.14)

긍정적

파악을 화이트헤드는 또한감성 혹은느낌(feeling)으로부르기도한다.

감성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의할 점은 이 개념이 인간의 감

성(emotion)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악의 개념이 인간의 지성

적 인식 작용을 훨씬 넘어서서 존재자들 간의인과관계 전체를 포괄하

과정-관계론적 철학( P r o c e s s-Relational Philosophy)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과거 근대철학이 가지고 있는 존재자들의 근원적 고립성을 극

복하고 존재자 상호간에 근본적인 관계성(relationality)을 강조하는 것

이다.11)

본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적 개념들 가운데 중심적인 것이

면서 성령론에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개념으로“신의 감성(divine

feeling)”에 주목한다.12) 그런데, 신의 감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더욱 보

편적인 개념인 감성(feeling) 개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는화이트헤드의감성론을먼저들여다 보아야 한다.

1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69

11) Ibid., 7.

12) Whitehead 철학을 성령신학적으로다룬 소수의저작들이있다. 가장먼저이 주제를

다룬 저술로 Blair Reynolds의 Toward a Process Pneumatology ( S e l i n s g r o v e :

Susquehanna University Press, 1990)가 있다. 이 책에서Reynolds는 신의 결과적

본성(CNG)에 주목하여 이를 기독교 신학의 성령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과정신학자

John B. Cobb, Jr. 역시도 이러한 관점에서 과정신학적 성령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

러나 신의 결과적 본성은 세상의 창조에 있어서 관여할 수 없고, 또한 수동적인 세

계인식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Whitehead 철학에 대한 또 다른 성령론

적 시도로써 Marjorie Suchoki의 과정성령신학적 제안을 들 수 있다. Trinity in

Process(New York: Continuum, 1997)에서 Suchocki 교수는 John Cobb의 삼위일

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성령론의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

는데, 그것은피조물의주체적 목적(subjective aim)을 성령의 사역으로보는것이다.

Cobb과 함께Suchocki는 그리스도를 신의 주도적 목적(God’s Initial Aim)으로 이

해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성령을 신의 주도적 목적이 다른 존재자들의 주도적 목

적(initial aim)으로 나타나는 것을 성령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의 주도

적 목적 혹은 변혁적 요소인 그리스도가 피조물들 가운데서 이뤄질 때 그것은 성령

의 드러남이다. 그런데Suchocki의 제안은 성령의 존재와사역의 익명성을 과도하게

강조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성령은 피조물들의 자기 생성과정과 존재론적으로 구

별될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의 과정신학적 성령론의 문제점들

을 넘어서면서, 본 논문은 보다 보편적이고 역동적인 신의 감성의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13) Ibid., 23.

14) Ibid., 41

Page 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당한다.20) 파악의 작용이 모든 존재자들을 사회적 구성체로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우주는 그 존재자들의 자유와 무질서의 증가에도 불구하

고 지금까지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파악은 현실재의 발생과 형성과정에서 인과적인 힘을 발휘

한다. 파악은 하나의“현실적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그 자신을

구체화시키는 결과를 낳는 관계적 행위”이기 때문이다.21) 다시 말하자

면, 파악의 활동은 한 존재자가다른존재자들을 자신의 발생과정에사

용하는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파악의 활동이“객관성에서 주관

성으로의 전이”22)를 가져다주는 발생적, 창조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

다.23)

넷째로, 화이트헤드는 파악의 활동들이 주체와 주체의 발생과정 전

체에 종속된다고 말한다:“하나의 감성은 그것을 느끼는 현실재로부터

추상화될 수 없다. 이 현실재를 그 감성의 주체라고 한다.”24) 즉, 파악은

주체의 파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파악의 활동의 결과물이 주체이기도

하지만, 화이트헤드가또한 강조하는 것은파악의 활동과정에서발생하

는 주체의 지향(subjective aim)이 또한 자신의 존재를 완성해가는 과

정에서이러한 파악활동의주체가 된다는 것을또한지적하는것이다.

다섯째로, 파악활동/감성적 느낌들은 원소적인 개체가 아니다. 파악

활동은 그 수가 무한할 뿐 아니라, 하나하나가 나눠질 수 있고 다른파

는 관계성의 개념이듯, 그것의 별명으로써의 감성혹은느낌 역시도 인

간의감성적 작용을 훨씬넘어서는 근본적인관계개념이다.15)

파악, 혹은감성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사물의 본질에 있는 활동을

말한다. 사물의 근저에 있는 근원적 활동으로서의‘파악’은 현실재

(actual entities) 다음으로 두 번째로 제시되고 있을정도로 화이트헤드

철학의 핵심적인실존범주(category of existence)이다.16)

화이트헤드는파악혹은감성을 여러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파악은 현실재(actual entity)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인 구성

요소이다.17)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사물의 본질적 활동성이 실제성

(actuality)의 기준이기 때문에, 파악의 개념이 존재의 실존성을 가름하

는 기준이다. 현실재가 실제적 존재자라면, 파악은 그 실재를 실제적으

로 만드는 내적조건이 되는것이다. 즉, 파악혹은 감성이 없는존재는

실제성을 갖지 못한다. 또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의 실제성이란 파악의

활동의 총량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거꾸로 실제성은 파악의 요

소들로 분석된다고말할수 있는것이다.18)

둘째로, 파악은 관계적 활동이다. 화이트헤드는 파악을 일컬어“관계

성의 구체적 사실들”이라고 부른다.19) 보편적이고 관계적인 이 파악의

활동은 우주의 결속(solidarity of the universe)에 근원적인 역할을 감

1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71

15) 화이트헤드는 근대철학과 구별되는 다양한 개념들을 만들어 썼는데, 이 새로운 개념

들로 인해서 어려움과 혼란을 주기도 한다. 감성(feeling) 개념이 그 하나의 예인데,

자신의 포괄적인 개념정의와 달리 화이트헤드 자신이 그것을 인간의 감정을 의미하

는 것으로 사용하거나 감정적인 다른 용어들과 함께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

이다. 우리는 이러한화이트헤드의경향성을, 파악의 기능이 지성보다는감성적 기능

에 가깝다는것으로 해석하면좋을것이다.

16) Ibid., 22.

17) Ibid., 19. 오영환에 의하면actual entity는“현실적 존재”로 번역된다.『과정과 실재』

(서울: 민음사, 2003), 77.

18) Ibid., 235.

19) Ibid., 22, 290.

20) Ibid., 56.

21) Ibid., 52.

22) Ibid., 40.

23) 새로운 존재자가 창조되는 데는 다양한 동인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파악의 활동이

라면, 그 존재자의 가능성의 범위와 성격을 규정해 주는 신의 역할 또한 핵심적인

창조활동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창조의 인과성을 이러한 창조의 동인과동일시

하지않는다. 화이트헤드에게있어새로운 존재자의 창조는 단지생겨남이라고 하는

하나의 궁극적, 자연적 현상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따로 창조성의 원리라고 부른

다.

24) Ibid., 221.

Page 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파악/감성의 활동들은 그것들이 관계하는 대상 혹은 자료들의 종류

에 따라서 또한 분류될 수 있다. 만일 파악의 대상이 실제성을 지닌현

실재라면 그 파악은 물리적 파악(physical prehension)으로 불린다. 여

기서 물리적이라는 말은 실제성을 가지고 있는 파악이라는 뜻으로 이

해되어야한다. 만일파악의 활동이 실제성을 결여한 추상적 가능성, 즉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s)”29)과 관계한다면, 그 파악은 개념적 파악

(conceptual prehension)으로불린다.30) 여기서 개념적이라는 것은인간

지성의 개념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과 실제성을 결여하고

있는추상적이라는뜻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까지의 설명을 요약해보면, 우주라는 집의 벽돌에 해당하는 현

실재(actual entity)가 있고, 그것들을 서로연결하는근본적이고현실적

인 활동이 파악(prehension) 혹은 감성(feeling)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러한 근원적인 관계성의 범주를 통해서 이전의 철학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실재관을 극복하며, 우주의 불변성과 유동성 모두를 해명하는

형이상학의 역사적인 임무를 완수하고자 한 것이다.31) 우주가 개별자들

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시에 연합된 하나라는 사실이 이로써 해명되는

것이다.32)

2. 화이트헤드의신의감성론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론(theory of the divine feelings)을 이해함

에 있어서 출발점은 신의 감성론이 화이트헤드의 감성론 일반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신관을 생각해보면당연한

악활동과 합쳐질 수도 있다.25) 하나의 현실재는 그 현실재 이전에 있었

던 수많은 존재자들을 파악한 활동이 모여발생하게 되지만, 이러한 수

많은 파악 활동들은 새롭게 생성되는 존재자들의 주관에 의해 판단되

고 연합되어 각 존재자들의생성의 끝에는 만족(satisfaction)이라고 불

리는하나의 대표적인파악으로집약되는것이다.

이런 특성들로 인해서 파악/감성은 존재자를 물질(matter)과 실체

(substance), 원자(atom)라고 하는근대철학의 실재성 개념들과는 근본

적으로 다른 존재자를 만들어내게 된다. 파악의 개념을 통해서 보면

‘물질’이란더욱 근본적인 현실적 존재자들의 집합체이며, 따라서 물질

은 실재의 근본적인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

는 것이다. 마찬가지로,‘원자’라는 개념도 근본적인 현실재보다 훨씬

큰 집합적 개념일 뿐만아니라, 화이트헤드의현실재(actual entity)와는

달리 사물들의 본래적 관계성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차원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화이트헤드의 현실재 역시도 자기생성의 마지

막 단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원자성과 불연속성을 가지지만,26) 그것의 본

질을 구성하는 파악/감성의 활동들로 인해서 현실재는 본질적으로 관

계성과 연속성의 차원을 갖게 된다.‘원자’가 지니는 이러한 한계성은

‘실체’개념에서도 발견되는데, 자기-원인(self-causation)이라는 측면

에서 실체란 화이트헤드의 현실재와 유사하지만,27) 실체 역시도 근원적

인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와 같은 잘

못된존재론적 범주들을 따라간 근대철학이 수많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문제에 부딪쳤으며좌초한 것은이상한 일이아니다.28)

1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73

25) Ibid., 235.

26) Ibid., 19.

27) Ibid., 222.

28) 근대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와 화이트헤드 철학이 어떻게 그것들을 극복하

는지에 대해서는저자의 졸고, “A Theory of God-perception Found in Whitehead’s

Epistemology,” Korean Journal of Christian Studies, vol. 66, 132-52를 참조하라.

29) 오영환에 의하면eternal object는“영원한 객체”로 번역된다.『과정과 실재』(서울: 민

음사, 2003), 85.

30) PR, 23.

31) Ibid., 208-209.

32) MT, 50-51.

Page 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데, 이 통일된 감성을 만족(satisfact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각각

의 현실재는 각각 하나의 통일된 감성을 통해 차후에 발생하는 다른

존재자들에게 대상화되어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신의 경우에는 예

외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무한히 다양한 만족을 갖는다. 이것의 이유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신의 자기생성과정이 다른 존재자들과는 달리

우주자체의 생성과정과 동일하며, 시간성을 지속적으로 포괄하는 신은

모든 존재자들을 파악하여 자신의 감성을 끝없이 확대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다양한 물리적 감성(divine physical feelings)을 통해서

세상은 신의 본성 속에서 재현되며, 또한 신의 본성적인 조화 속에서

변화(transformation)되어 기억된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33)라고부른다.

넷째로,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신의 감성이 다시 세상으로 유입된다

고 주장한다. 신이파악하고또 신의본성속에서 이상화시킨 세계상은

그 다음 순간의 우주 속에 있는 존재자들에게 대상화되고 파악되어져

서 실제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이를 통해서 세상은 진정한 변화를 체

험하게 된다는 것이다.34)

3. 화이트헤드의신의감성과성령의사역

앞에서 본 화이트헤드의 감성론 일반과 신의 감성론을 통해서 발견

하는 한 가지는, 이 개념이 다음의 여러가지 점에서 성령 하나님의 사

역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이해와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령님

것인데, 그는 신을 존재론 일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앞에서 살펴본 화이트헤드의 감성론은 대체로 신의 감성에 모두

적용된다고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에서 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

지며 독특하게 이해되기 때문에, 신의 감성론도몇 가지 중요한 예외적

측면들을가지게 된다.

첫째로, 신은 세상을 파악함에 있어서 어느 한 존재자도 배제하거나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신에게는 부정적인 파악(negative prehension)

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가능성 혹은 영원한 대상자( e t e r n a l

objects)를 포괄하기 때문에, 영원한 대상의 조합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을 포괄할 수 있다고 보는것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긍정적 파

악(positive prehension)은 감성(feeling)으로 불리기도 하므로, 부정적

인 파악을 갖지 않은 신에게 있어서 파악은 곧 신의 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것이다.

둘째로, 신의감성은 다른존재자들의 감성과 다른 순서로 작용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은 그 파악/감성 활동이 과거의 존재자들에 관한

직접적인 물리적 파악(physical prehension)으로 시작되어, 차후에 발

생되는 주관의 자기자신에 대한 파악, 즉 정신적 파악(mental prehen-

sion)으로 발전하는 데 반해서, 신의 감성은 그와 반대로 정신적 감성

에서시작되어 세계에 대한물리적 감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화

이트헤드 철학에 있어서 독특한 신의역할로부터 비롯되는데, 신의1차

적 본성(primordial nature of God 혹은 PNG)이, 존재자들에게 이상적

인 실현 가능성을 부여하는 정신적인 기능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재들

의 발생과정에 있어서, 그 각각이 가질수 있는이상적인 실현가능성과

함께 궁극적인 가능성의 제약을 부여하는 것이 신의 우선적인 기능이

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의 감성은 피조물의 감성과 다르다. 각각의 존재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면서 그 결과로 하나의 통일된 감성을 가지게 되

1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75

33) PR, 351.

34) Ibid., 350-51.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현실재인 신에게 어떻게 다양한 만족이 발생가능한가, 또 더 나아가서 이러한 다양

한 만족들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 자신의 철학적 원리들에 대한 위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

한 철학적 부조화에 대해서는 긍정적해석도 가능하다. 본 논문의 3장:“화이트헤드

의 신적감성의신학적 문제점들”을 참고하라.

Page 8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우주의 조화와 결속의 바탕이 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주가 무한히 다

양한힘들의 집합체이며, 주체적 자유를 지닌 존재자들의 집합체임에도

불구하고 조화와 결속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신적작용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작용은신

의 감성이라고 하는활동을 통해서 존재자들을 내면으로부터 인도하는

것이다. 둘째로,“신의 만족(divine satisfaction)”이라는 감성을 통해서

도 신은 존재자들에게 본질적인 영향을 미친다.“초기의 지향(initial

aim)”으로서의신의 감성은 존재자의 형성가능성에 관한신의이상적

인 판단이기때문에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인 반면에, 신의만족은 각

각의존재자에 관한 신의 감성이 세상으로 다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

에 구체적이다.36) 즉, 신의 감성은 신의 만족의 기능을 통하여 세계와

존재자 속에 구체적으로 내재한다. 이러한 신의 감성의 내재적 기능들

은 고린도전서3:16절이말씀하는“우리 안에거하시는 성령하나님”의

내재적 경륜에 대한철학적 해명으로 사용될 수 있다.

2) 신의감성이 지니는 근원적 역동성

화이트헤드의 감성 개념은 존재의 활동성을 상징한다. 파악 혹은 감

성의 활동은 과정과 실재 전체의 기초가 되는 역동적인 활동이다.37) 이

활동을 통해서 존재자들은 생겨나게 되며 또한 실제성을 얻게 되는것

이다. 이것은 수면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창 1:2)의 경륜이 지닌근

원적이며역동적인성격을 잘 설명해 준다.

3) 신의감성의 관계적 성격

화이트헤드의 감성론은 파악/감성의 관계적 성격을 분명히 제시한

의 존재와 사역을 과학적, 철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가능

성을시사해 주는것이다.

1) 신의감성이 지니는 내재성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 개념이 지니는 근원적 중요성은, 그것의 자

연주의적 성격에 있다. 서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성령론 신학이 이론적

인 체계를 가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난점은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설

명할 수 있는 논리적, 과학적 개념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이러한 관점에서보면화이트헤드의유신론적철학체계와개념들은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신의존재와 작용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물론 그의 자연주의적 관점이 기독교 신론의 초월성을 해명하

는데 있어서는 어려움을안고있지만, 자연주의적유신론의 철학체계는

신의 내재성을 해명해주는 데 있어서 탁월한 면을지니고 있는것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이러한 강점은 성령론에 있어서 더 큰 장점으로 드

러나는데, 이것은 성령이 주도적으로세계 속에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

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화이트헤드 철학 일반과 특히 신의 감성

개념을 성령론적으로주목하는가장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신의 감성이 가지는 내재성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내재성일 뿐만

아니라, 존재자들을 내부로부터 형성하는 존재 내 내재성이다. 신의 감

성의 이러한 본유적 내재성은 모든 존재의 형성과정에 주도적으로 드

러나게 된다. 첫째로, 모든 존재자들은“초기의 지향(initial aim)”이라고

불리는 신의감성으로부터 그들의 존재형성을 시작하게 된다. 이 점에

서 신의초기의지향은 각각의 존재자들이가진주관성인“주체적지향

(subjective aim)”의 일부가 되어서 자기 형성의 과정을 주도하게 된

다.35) 각각의 존재자들에게 주어지는 신의 이러한 초기의 지향은 신의

본성 속에서 이뤄진 이상적인 예정조화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1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77

36) Ibid., 88. 이탤릭체를덧붙임.

37) SMW, 70.35) Ibid., 224.

Page 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다. 화이트헤드의 신적 감성은 우주적 교제를 이루시는 성령의 관계

적 사역을 잘 표현하고있는것이다.

4) 신의감성의창조성

화이트헤드의 감성 일반과 특히 신의 감성은 창조하는 감성이다. 그

의 감성론 일반은 감성이 창조하는 활동임을 잘 드러낸다. 화이트헤드

는 말한다:“하나의 감성은 다른 사물들이 융합 혹은 합생(concres-

cence)의 과정안에서 하나의 주관을 형성하는대리인이다. [여러] 감성

들은…우주를 통합시키는연쇄를 형성한다.”43) 여기에서 감성은 새로운

존재자와 존재의 연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분

명히드러나게 된다. 하나의 실제적 존재자들을 구성하는 것은다름아

니라 감성들이다. 순응적 감성(conformal feeling), 개념적 감성( c o n-

ceptual feeling), 비교적 감성(comparative feeling), 명제적 감성(pro-

positional feeling), 그리고 최종적으로 발생하는 만족(satisfaction) 등

다양한 단계와 종류의 감성들이 실제적 존재자들을 만들어 낸다. 이들

이 문자그대로 현실재를 창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들이 세상의 창조

의 대리자가되는것이다.

여기에서더 나아가서 신적감성은 신의초기의 감성(initial feeling)

을 통해서 존재자들의 형성에 관여한다. 앞에서 말한바와같이, 존재자

들의 처음 단계는 신의 초기의 감성, 즉 신의 지향(divine aim)에 대한

파악으로부터 시작한다.44) 그러므로 신의 초기의 지향(initial aim)은 새

로운실재의창조에 기여하는 창조적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창

조가 아니라 우주의 조화와 미적 가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합목적

적인 창조행위이다. 이러한 신의 감성의 창조성은 우리가 창세기1:2절

다. 감성은 존재자들의 사회적 관계성을 표상하며, 따라서 감성은 곧

“관계성에 관한 구체적 사실들(concrete facts of relatedness)” 이다.38)

감성의 관계성은 근원적인 것으로, 다양한 감성들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서로 간에 연관된다.39) 하나의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성취하는 과정

은 관련된 수많은 감성들이 서로 연관되어 하나의 연합된 감성으로 융

합되는 바로 그 과정이다.40) 심지어‘만족(satisfaction)’이라고 불리는

최종적 감성조차도 온전히 독립적이지 않은 것은, 만족이 미래를 내다

보는 예측(anticipation)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41) 감성은

또한 존재자의 주체적 지향성(subjective aim)의 영향을 받으며 현실재

의 주관의 일부가 된다.42) 이 모든 것이 감성의 본질적인 관계적 속성

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근원적인 관계성에 관한 이러한 통찰로 말미암

아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principle of relativity)를

관계성의 원리(principle of relationality)의 의미로 재정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의 감성의 관계적 속성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시간성

전체와 가능성 전체를 포괄하는 신의 감성은 유한한 다른 존재자들의

감성과 달리 세상의 모든 현실재들과 연관을 맺으며 영향을 주고받는

다. 그리고 신의 감성이 세상과 맺는 관계성은 더욱 깊은 차원에서 이

뤄지는데, 신적 지향성(initial aim)을 통해 존재자들에게 영향을 미치

며, 존재자들의 완성된 감성들을 인식하며, 더 나아가 신의 만족들

(divine satisfactions)로써 존재자들에게 변혁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

에 신적감성의 관계성의 파워는 다른것과비교할 수 없다.

이것은 고린도후서13:14절에 나타난 성령의 관계적 사역, 즉“성령

의 교통하심”에 관한 철학적 증언으로써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1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79

38) PR, 22.

39) Ibid., 235.

40) Ibid., 44.

41) Ibid., 278.

42) Ibid., 220.

43) Ibid., 231. [ ] 안의말 덧붙임

44) Ibid., 225.

Page 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가 이들존재자들에 대한판단을 수행하게 되고, 그러한 구체적 인식과

판단의 결과인 신의 만족들(divine satisfactions)은 세계 내 존재자들

에게 다시 부여되어 인식됨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적절한 새로운 목적

을 부여하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혁적 기능에 대해 화이트헤드는다

음과 같이 쓰고 있다:“[신의 본성에 의해] 완전하게 된 실제성은 다시

금 시간적 세계 속으로 돌아오게 되고 현실을 그 목적에 적합하게 만

들어가게 된다. 각각의 시간적인 실제성은 그것을 타당한 경험의 즉각

적인 사실로써 포용하게 된다.”48) 즉, 신은 세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변혁적 의지를 실행해 나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 신관

속에 나타난 신의 감성의 변혁적 성격은 누가복음24장 49절에 예수님

께서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하신“위로부터의 능력”을 연상케 하

기에충분하다.

7) 신적감성의 계시적활동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신적 감성의 활동은 또한 계시적 활동이다.

신의 초기의 본성(PNG)과 간주관적/대상적 본성(SNG)은 각각 신의

주관을 전달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신의 초기의 본성은 신이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전을 모든 존재자들에게 전달하는 감성의 활동이

다. 신의초기의본성이 전달하는 것은 신의원리적이고 보편적이고영

원한 비전이기 때문에 신의 법의 계시에 비견(比肩)할 수 있다. 한편

신의 대상적 본성은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신의 뜻을 존재자들에게 전

달한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시간적인 신의 의지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조명계시와 연관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감성은 신의 계시적 역할

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16장 13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

신 성령의 계시적 역할에 관한 철학적 증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에서발견하는성령의 창조행위에대해뛰어난철학적 설명이 된다.

5) 화이트헤드의신의감성의 심판과 구원활동

신의 감성은 초기의 지향(initial aim)을 통해서 존재자들의 생성에

관여할 뿐 아니라, 또한존재자들의심판과 구원에 기여한다. 앞의기능

이 신의 초기의 본성(primordial nature of God 혹은PNG)에 해당한다

면, 뒤의 기능은 신의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 of God 혹은

CNG)에 해당한다. 신의 결과적 본성이 행하는 감성적 활동이란, 신이

현실재들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 감성적 활동을 통해서 현실재들은 신

의 본성안에서“적절한 재현(adequate representation)”을 얻게 된다.45)

이렇게 신의 본성 속에서 재현된 존재자들은 신의 본성 안에서 살아

있고, 항상 현존하는 사실로써 진정한 불멸성을 얻는 것이다.46) 그러나,

이들은 우주 전체의 조화와 미적 목적을 지향하는 신의 이상적인 주체

적 지향(subjective aim)과 비교되는 과정을 피할수 없다. 이것은 기독

교적 심판의 과정에 해당한다. 신의 감성의 이러한 활동을 화이트헤드

는 자신도“세상에대한심판(judgment on the world)”이라고 부른다.47)

6) 화이트헤드의신의감성의변혁적 활동

신의 감성의 활동은 창조, 심판의 활동을 넘어서서, 또한 세상을 변

혁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이 신의 간주관적/대상적 본성(superjec-

tive nature of God 혹은 SNG)의 기능이다. 신의 결과적 본성(conse-

quent nature of God)이 존재자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수용적 행

위라면, 신의 주체적 지향(divine subjective aim)은 거기에서 더 나아

1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81

45) Ibid., 12-13.

46) Ibid., 347.

47) Ibid., 346. 48) Ibid., 351. [ ] 안의말 덧붙임.

Page 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찰들을 모두 포괄하는 형이상학을 정립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영적 세

계에대한이해의 결핍은 화이트헤드 철학의 약점이되는것이다.

둘째로, 화이트헤드의 철학체계 속에서 감성은 완전한 주관성이나

완전한 실제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또한 기독교 성령론의

관점에서 문제가 된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어떤 파

악[혹은 감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주체로부터 추상화시켜서 생각될

수 없다. 비록 그것 [파악의 활동]이 주체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도 그러하다.”49) 화이트헤드적 인식 속에서 파악 혹은 감성은 늘

누군가의 파악 혹은 감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써 파악과 감성은 주체

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화이트헤드는 파악/

감성 개념에게 전적인 실제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파악/감성의 활동들

이 가지는 근원적인 실제성을 생각해 볼 때 이것들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파악과 감성의 활동들은 다름 아닌 실제성의 조건이 되기 때

문이다. 다음 글에 보면 화이트헤드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고 있다:

“그것[파악/감성]은 온전한 실제일 수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불

완전함과 부분성으로 인해서 하나의 파악은 현실재에 종속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50)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감성은 근본적이지만 이와

같이주체성과 실제성에있어서 결여된 면을가지고 있는것이다.

이것은 성령론의 역사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성령이해를 연상하게

한다. 로마교회와 종교개혁신학의 전통 속에서, 또 전통적 삼위일체론

과 성령론 속에서 성령은 온전한 주체성이나 실제성을 갖지 못하고 종

속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다면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 개념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훌륭한 철학

적 유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동체적 삼위일체론

(social trinitarianism) 등 소위“성령님의 복권”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것이다.

지금까지 화이트헤드의 감성론과 신의 감성론을 살펴본 결과, 우리

는 그 개념이 기독교의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는 철학적 개념으로써 많

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의감성 개념은 근원적

역동성을지니며, 본질적으로관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신의감

성은 창조적 활동이며, 나아가 심판적 활동, 그리고 변혁적 활동이기도

하다. 동시에 신의 감성은 신의뜻을 계시하는 계시적 활동으로 나타나

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의감성은 신에관한 자연주의적철학의 체계의

일부로써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안에 존재하시며 역사하시는 성

령님의 사역을 해명하는 철학적 이론적 개념으로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주의 철학의 일부로써 제시된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

개념은 또한 기독교 성령론의 관점과는 다른 성격들을 가지고 있으므

로 우리는다음장에서 그것들을살펴볼 필요가 있다.

I I I. 화이트헤드의신의감성개념의성령신학적문제점들

우리가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화이트헤드의 신적 감성에서

발견하는성령론적문제점들은크게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영의 기능에 관한 많은유사성과 연관성과는 별개로, 화이트

헤드의 철학 속에는 영(spirit)의 범주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

이다. 비록유신론적철학을 전개하였지만 화이트헤드 자신은 성령론적

인식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않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의 철학은 성령

신학적인 정합성에 큰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적

사유의 결핍은 대부분의 철학에서 발견되는 것이기에 새로운 것은 아

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목표가 인간문명의 모든중요한 통

1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83

49) Ibid., 27. [ ] 안의말 덧붙임.

50) Ibid., 19. [ ] 안의말 덧붙임.

Page 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의 속성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상반된 관점을

발견하게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신론에 있어서 영적이거

나 인격적인범주를 가지고 있지않다는 명백한 원리적, 신학적 결함을

발견한다. 다른 한 편으로, 화이트헤드는 명백하게 인격적인 신론을 전

개하고 있으며, 신의 감성역시도 성령의 사역에 해당하는 다양한 기능

들을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우리는 발견하게되는것이다.

화이트헤드 체계 속에 있는 이러한 상반된 이해에 대해서 서로 다

른 해법들이 제기되었다. 합리주의적, 자연주의적, 교조적 해석자들은

화이트헤드에게서 발견되는 신학적 표현들을 무시하고, 화이트헤드 철

학체계의 논리적 완성을 지향한다. 그 결과 신의 다양한‘신학적’활동

들은어떤비유적인 표현들로 여겨지며, 화이트헤드는 자연주의적 과학

철학자로남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적, 자연주의적 해석이 화이트헤드에 대한

바른해석이라고 볼 수 없는이유들이있다. 첫째로, 화이트헤드의철학

전체를 통해서 그의 신관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의

초기철학에서 신은 단지하나의 논리적 필연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

나 후기 철학으로 가면서 그의 신 개념은 계속적으로 확장되고 보완되

었으며,『과정과 실재』에서 그의 신관은 매우 기독교적이며 인격적인

신 이해에 도달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책의 마지막 장들에 나타

난 화이트헤드의 신관을 읽어보면 그것이 화이트헤드의표현의 실수가

아니라 그가 새롭게 도달한 신론적 영감의 진지한 표현임을 공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세계와 신, 신과세계를 궁극적인대

비로써 제시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신관은 그가건축한 형이상학

과 우주론의체계를 넘어서고있는것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화이트헤드의 철학관 자체가 이것을 허용하고 있

다. 이것이 그에 관한 자연주의적, 교조적 해석에 관한 우리의 두 번째

반론이다. 즉, 화이트헤드는철학에 대한‘열린’견해를 가지고 있다. 화이

본다면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의 이러한 결핍은 전통적 성령론의 결

핍과함께극복되고수정되어야할 부분이라고할 수 있다.

셋째로,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의 또 다른 성령론적 문제점은 그것

의 비인격적인 본질에 있다. 주체성 자체를 결여한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은 명백하게 인격성을 가질수 없다. 더 나아가서 화이트헤드의유

신론 자체가 신의 인격성에 대해 진술하는 데 있어서 약점을 가지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신을 하나의 현실재(single actual entity)로 이해하

고 있는데, 이러한 하나의 현실재는 논리적으로 기독교 참된 인격성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에게서 인격성의 정의가 서

로 유전적인 관계로 연결되는 일련의 현실재들 속에서 발견되는 특성

이기때문이다.51)

그러나 이러한 인격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의 신은 인

격적인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으며, 화이트헤드 자신도 그것들을 인격적

인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의 마지막 장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는 신의 심판을 이야기하며,52) 신의 무한한 인내를 이야기 하며53) 진선

미의 비전으로 세계를 이끄는 세계시인으로서의 신을 말한다.54) 신의

인격적 기능에 관한 또 다른 예가 신의 간주관적/대상적 속성에 관한

설명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그것을“세상을 향한 신의 사랑,”55)“구체적

인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섭리”56)라 부르며, 신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함께아파하는위대한 동반자라고설명하고있다.57)

1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85

51) Ibid., 34-35.

52) Ibid., 346.

53) Ibid., 346.

54) Ibid.

55) Ibid., 351.

56) Ibid.

57) Ibid.

Page 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 놓았던 사실도 그의‘열린 철학’의 관점을 웅변해 준다.59) 이것은 기

독교 신학이 화이트헤드 철학과 대화할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제공해

준다. 원리적으로 그의 철학적 체계는 기독교 신학이 증언하는, 존재와

가치에 관한영감들에관하여 열려있는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신론 일반과 신의 감성 개념이 가지

고 있는 신학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기독교 신학의 성령의

사역을 철학적으로 잘 해명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성령님의존재와 사

역에 관한 기독교의 진리들을 반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을수 있다.

나가는말

이 논문의 서론에서 필자는 성령론의 두 가지 이론적 과제들을 제

시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영(spirit)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배척하는 근

대철학의 잘못된 세계관을 극복하고 영이라고 하는 것을 존재의 타당

한 범주로서 확립하는 과제이며, 둘째로는 자연주의적, 논리적, 과학적

언어로써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설명하고해명하는 과제이다.

그리고 이 논문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철학적 체

계로써 화이트헤드의 과학적 철학사상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화이트헤

드는 과학적 유물론이 지배하는 근대 세계관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형

성되었으며, 대중적 세계관을지배하게되었는지를명료하게 분석할 뿐

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주었기때

문에, 신학은 그와함께영의 범주를 체계적으로 배척하는 과학적 유물

론을 극복할 수 있다. 둘째로, 화이트헤드는 근대과학의 부당한 영향력

아래에서 잘못된 존재론과 인식론을 발전시켜온 근대철학을 극복할 과

트헤드는철학이 새로운 영감(insight)에 개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체계들은 오고 또 가는 것이다. 제한된 이

해를 지닌 하나하나의 방법들은 결국은 소진되고 만다. 그 전성기

에 있어서 각각의 체계는 영광스러운 성공일지라도, 그것의 쇠퇴기

에 있어서는 발전을 가로막는 하찮은 것이다. 이해의 새로운 과실

로 나아가는 것은상상력을 새롭게 하는영감(靈感)의 깊이에 기댐

으로써 이뤄진다. 결국-끝은 없는 것이지만-성취되는 것은 견해

의 폭이 넓어짐으로써 더 큰 기회들을 제공하는 것이다.…철학은

이제 그 최종적인 섬김을 행해야 한다. 철학은 널린 잔해들을 탈출

하여 단지 동물적인 만족을 넘어서는 가치들에 예민하도록 영감

(insight)을 찾아야 한다. 비록그것이희미할지라도.58)

여기에서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최종적인 임무는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참된 영감(insight)을 포착하는 것임을 밝히

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건축된 철학적 체계를 벗어나는 행위가 될지라

도, 그 체계가 미처 보지 못한 영감을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하

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이러한‘열린’견해는 그의

철학을 논리적 체계성에 집착하는 근대철학의 관점과 분명히 구분해주

는 것이다.

사실 그의 이러한 열린 관점은 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Modern World)』에서 근대과학을 비판할 때 그

는‘닫힌’체계의 수많은 문제점들을 비판하였고, 그가『과정과 실재』에

서 자신의 형이상학을 건축할 때 그는 그것을 우주론적 에세이로써 부

제목을 달았던 것이다. 또한, 그가 고대 희랍철학을 논하면서 체계성에

주력했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비록 체계성은 떨어지고 신화적 언어에

머물러 있었지만,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추구하였던 플라톤을 우위

1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87

58) AI, 159. 59) AI, 152ff.

Page 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헨드리, 죠지/황승룡역. 『기독교신학과성령』. 서울: 기독교문사, 1995.

화이트헤드, 알프레드노스/오영환 옮김. 『과정과실재』. 서울: 민음사, 2003.

Kim, Sungwon. “A Theory of God-perception Found in Whitehead’s

Epistemology.” Korean Journal of Christian Studies Vol. 66(2009).

Whitehead, Alfred North. Adventures of Ideas. New York, London: The Free

Press, Collier-MacMillan Limited, 1967.

. Modes of Thought. New York: The Free Press, 1968.

. Process and Reality-the Corrected Edition. New York: Free Press,

1978.

______. Science and the Modern World-Lowell Lectures,1925. New York:

MacMillan Company, 1950.

약 어

AI Adventures of Ideas

MT Modes of Thought

PR Process and Reality

SM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정-관계적 철학의 새로운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제시하였는데, 그의 이

러한 새로운 철학적 개념들 가운데“신의 감성(divine feeling)”은 그

기능에 있어서 근원적 역동성을 지니며, 본질적으로 관계적 성격을 가

지고 있다. 또한 신의 감성은 창조적 활동이며, 나아가 심판적 활동, 그

리고 변혁적 활동이기도 하다. 동시에 신의감성은 신의 뜻을계시하는

계시적 활동으로나타나고있다. 무엇보다도, 신의감성은 신에관한자

연주의적 철학의 체계의 일부로써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의 감성

개념은 세계 안에 존재하시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해명하는

철학적, 이론적 개념으로적합성과강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화이트헤드 철학이 가진, 철저한 자연주의적 철학으로써의 한

계와, 그의 신학적 관심과 영감의 부족으로 인해서“신의 감성”개념은

성령님의 사역과 존재에 관한 필요충분한 철학적 해명이 되기에는 부

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 철학체계가 가지고 있

는 근원적 개방성은이러한 성령론적영감을 향해또한개방되어있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신의 감성론이 성령님의 세계

내적 사역에 관해 강력한 과학적, 논리적, 자연주의적 해명을 제공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과학과 철학의 장에서 성령님의

경륜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사용할 또 하나의 개념을 여기에서 찾았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주제어

화이트헤드, 성령, 신의감성, 성령론, 근대과학

Whitehead, Holy Spirit, Divine Feeling, Pneumatology, Modern Science

접 수 일 2010년 3월 5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21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1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 하나님의사역 189

Page 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odern barrier to philosophical and scientific discourses of the spirit.

Based on his fundamental critique of Modern science and philos-

ophy, Whitehead presented new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called

“organic philosophy” or “process philosophy.” Among his new

philosophical concepts, this paper focuses on his concept of “divine

feeling.” Divine feeling for Whitehead has functions that are

analogous to the economy of the Holy Spirit in Christian theology

such as the Spirit’s immanence, dynamic activities, relationality, cre-

ativity, judging & saving work, transformative work and revelatory

work. In spite of its partial incompatibilities with Christian theology,

“divine feeling” still clarifie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well. Thus,

this paper concludes that “divine feeling” effectively witnesses the

economy of the Spirit in the realm of science and philosophy. This

answers the second task of pneumatology suggested in the paper.

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 and Whitehead’s

Philosophy

Kim, Sung won

Full-time Lecture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Bucheon, Korea

This paper addresses two pivotal tasks of contemporary pneuma-

tology. First, 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 should overcome the

wrongful world-view of Modern philosophy that systematically

excludes the concept of spirit. Second, pneumatology should also

establish “spirit” as an adequate category of being and explain the

economy of the Holy Spirit in naturalistic, logical and scientific

terms.

To do the tasks this paper focuses on the philosophy of Alfred

North Whitehead. In Science and Modern World, Whitehead traced

the development of Modern science and its powerful influences on

the popular minds and philosophies. He discovered that the presup-

positions of Modern science shaped a world-view called Scientific

Materialism. However, the problem is that it contradicts the evi-

dences of contemporary science such as Quantum physics. There-

fore, Whitehead calls for a fundamental critique of Modern Scientific

Materialism and modern philosophy. Here theology finds an

important pneumatological clue. With Whitehead’s essential critique

on materialism, Christian theology can effectively dismantle the

1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성원, 화이트헤드철학에 비춰본성령하나님의사역 191

Page 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칼빈의교회론이한국교회에주는의미

배경식(한일장신대학교교수)

들어가는말

칼빈의『기독 교강요』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개신교 신앙의 근본

내용인 신앙이나 성경, 창조, 교회, 성찬 등을 설명할 때 다양한 자연적

인 것들을 예로 드는 것을보게 된다. 이는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

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예화를 드신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렇게 한 것은 가톨릭과 다른 것이라고 지적을 받던 개신교의 교리를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쉽게하려는 시도였을것이다.

그동안 한국칼빈학회를 통해 칼빈의 교회론에 관한 여러 편의 글들

이 발표되었다. 논문의 내용은 교회론의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교회일

치와 목회사역, 정치 그리고 사회복지와 경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1)『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론을 분석한 논문들을 보면 대개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193-226

1) 위의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황정욱,‘교회론’,『칼빈신학 해설』(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이오갑,‘교회론’,『칼빈신학과목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배경식,‘교

회정치’, 『최근의 칼빈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최윤배, ‘깔뱅의 교회직분

Page 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관한 내용들을 인용하면서 칼빈이 말하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논의해

보려한다.

I. 성도들의거룩한모임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원리 중 하나인‘코람 데오’(Coram Deo)는‘하

나님 앞에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죄인 된 인

간의 구원사역과 은총에 대한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현

인 두려움과존경심을 갖는 것을말한다. 초대교회는 이 거룩하고 장엄

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

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기초로 하여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정치

조직에 맞서당시의 교회제도와 기독교 문화를변혁시켰다.

오늘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이 거룩한

두려움과존경심이다. 특히21세기에 진입한 한국교회는교단을 대표하

는 상당수 목회자와 장로 등 교회 지도자급들이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

려버려 하나님을 향한두려움과 존경심을 잊은 채 자신이 속한 개교회

와 집단의 이익을 채우려는 교회정치에 안주하고 있는형편이다.

개신교회의 교회 수는 증가하였으나 오히려 교인수가 감소했다는

것은분명히 한국 교회는1990년대이후부터 성장둔화의 단계에 들어

있으며 여기에서 오는위기 의식과 허탈감으로 인해교회 내에 존재하

는 목회자와 장로의 눈에 보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은 심각한 상태에

있다. 이 결과로 나타나는 교회의 부패와 신앙의 세속화는 교회안팎으

로부터 지적과 큰 도전을 받고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의

중심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 내에서와 그 주변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못하는 교회론의위기가 존재하고있다고 보인다.

최근 필자가 신학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사회

적인 지탄에 대한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학생들이 지적한 한국교회

칼빈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과 기능, 직제 등이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교회의 본질로는구조적인 본질과 차원적인 본질로 나누

어서 전자는 신자들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선택받은 하나님

의 백성을 다루었고 후자는 교회의 유일성과 거룩성 그리고 세계성을

다루었다.2)

교회의 기능으로서는 목회와 선교적 기능을 강조하고 봉사와 진리,

사랑과 성장의 공동체로3) 표현되기도 하였다. 교회의 직제로는 만인 사

제직과 사역의 직무를 나누어서 전자는 평신도에 관한 것을 다루었고

후자는 개혁교회의 삼중직무인 목사와 장로 집사를 다루는 것이 일반

적인것이었다.

본 논문은 칼빈이 말한 교회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교회의

참된 표지에 비추어 한국교회를 살펴보며 칼빈이 오늘 한국교회에 주

려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대안적인 비판과 함께 제안을

하려한다.

본 논문에서는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면서 교회 본질에 치중되었던

칼빈의 교회론 해석을 되새겨 봄으로써, 그동안 교회의 외적인 성장과

부흥에만 관심을 갖던 한국교회 본질의 훼손과 교회다움의 변질을 회

복해야 한다는것에중점을 두는교회의 참 의미를 되새겨 보려한다.

이런 면에서 본 논문은 칼빈의「교회개혁의 필요성」이라는 제하의

문서와『기독교 강요』제IV권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교회론을 중심으

로 살펴보면서 칼빈의『기독교 강요』의 각 권에 스며들어 있는 교회에

1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195

과 교회권위에 관한 연구’,『칼빈연구』제4집(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안은찬,

‘칼뱅의 교회훈련에 대한 목회신학적 고찰’,『칼빈연구』제6집(서울: 한국장로교출판

사, 2009), 박경수,‘칼빈과 교회일치’,『칼빈 그후 500년』(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 등이다.

2) 박근원,‘칼빈의 교회론’, 한국신학대학출판부,『칼빈신학의 현대적 이해』(서울: 기독

교서회, 1978), 167.

3) 황대우,‘칼빈의 교회론’, 한국칼빈학회,『칼빈1: 칼빈신학 개요』(서울: 두란노아카데

미, 2009), 145ff.

Page 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큰 교회에 가면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다. 이렇게 사람들이 큰 교회로 몰려 작은 개척교회는 문 닫는 시대가

왔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위기 상황에서 개혁의 불길을 지폈던 종교

개혁자들이 꿈꾸고 있었던 참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

해서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성도들의 모임’(The communion of the

saints)5)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타락했다면 그것은 건물이나

제도가 썩었다는 말이 아니라 곧 교회의 지체이자 구성원인 우리 자신

들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말이다. 이를 정리하면 교회 안에 바른 신학

이 없음으로 인해 실질적인 기능을 갖는직분의 개념이 약화내지는 부

재하며 교회의 본질(本質)보다 기능(機能)에 치중하는 오류 내지는 본

질에만 매달려 생명 없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지적하신 회칠한 바리새적이며 사두개적인

외식적 신앙생활을한국교회가하고있다는말이된다(마 23:25-28).

오늘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보수

주의와 자유주의의 입장이다. 전자는 종교개혁전통에 충실하여성경의

의 문제점들로는1) 대형화된 기업교회, 2) 프로그램에 물든 기독교, 3)

가진 자들을 위한 교회, 4) 축복신앙 강조, 5) 치리의 부재, 6) 무분별한

신학생 배출등을들었다. 이러한 결과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한국교회

는‘하나님의 말씀전파와 구언사역의요람’이라는 본질에서 떠나기업

화가되어가고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들로는1) 말씀

과 삶의 불일치, 2)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3) 소음공해의 종교, 4) 너무

많은 모임과 예배의 강요, 5) 개교회 중심주의를 들었다. 한국사회가 기

대하는 교회로부터의 기대치는 버림 받은 자와 소외된 자들의 영혼의

안식처일 텐데 한국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

기도하다.

위의 결과에서 보듯이 교회의 대형화가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지탄

의 대상으로 주목받는다는 것은 교회가 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

형교회를 통해 배출되는 성도들의 관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지만 그들의 삶속에는 전혀 십자가와 고난, 희생과

헌신의 개념이 없다는 점을 든다. 익명의 기독교인이 되어서 신앙생활

을 편안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경건의 모습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믿지 않는비 그리스

도인들로부터 지탄의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 유지를 위한 강력한 헌금의 강요이다. 신앙이 자라고 신앙을

통해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동하여 내는 헌금이 아닌 직분에 맞는 헌

금을내야 하는 맞춤형 헌금을 원하기 때문에 교회를 안식처라 생각하

지 못하고 돈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선입견까지 생긴 상

태이다.4) 일부의 사람들은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여

1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197

물에는 체육관과 카페, 레스토랑, 콘서트 홀, 결혼 채플, 광장, 120여 개의 소그룹 룸

등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이 돈은 교인들이 헌금한 돈이며 교인들이5만 명이라

고 가정하면 한 사람당400-500만원의 건축헌금을 해야 해결되는 액수이다. 교회당

을 새로 짓는다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지난70년대부터 깡통교회

로 알려진 전주 안디옥 교회의 참신한 일화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너무나 난다. 그

교회는 지금도 미군들이 쓰던 둥근 콘세트 건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교회 교인들

은 그런 불편한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에 대해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한

국의 여러 도시에서 대형 교회당을 크게 짓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으나 저출산 여파

로 2018년부터 우리나라의 인구가 감소세로 돌아서서2018년에는 전체 인구에서65

세 이상 노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14% 이상 되는 고령사회가 되는 추세에서 교

인들에게건축헌금강요라는부담을주는대형교회당건축은바람직하지않다.

5) 존 칼빈/편집부 번역,『영한 기독교 강요』(서울: 성문출판사1993), 제4권 1장 3절, 15

이하; 이후인용은 Institutes, I V, 1. 3, 15라고명명함.

4) 최근한국보수교회를대표하는서울의 모교회가현재있는교회당이 비좁아 더 이상

교인들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2,000-2,500억 원을 들여 교회당을 짓겠다는 발표

이후 여러 가지 긍정과 부정의 목소리들이 높다. 인터넷에 올라온 그 교회 조감도를

보면12-13층 건물에 예배당은지하에건축되며6,000석 규모로 만들어진다. 신축건

Page 1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었고 후자는 자신의 교회론을 통해‘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 있는 교회

가 참된 교회’라는 말로 개신교회를 변호했으며개신교회를 위한 이론

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라는 칭

호를받는다.8) 이런 면에서 칼빈의 교회론은 자신의 종교개혁이 분파적

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 참된 교회를 회복하려는 것임

을 보여주는변증적인성격을 가진다.

칼빈의『기독교강요』를 변증적인 책으로 이해하려면 프란시스1세에

게 보내는 헌사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헌사에는『기독교 강요』의

저술배경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주의자들의 탄원서가들어있다. 가톨

릭교회의 개신교인들을 향한 무자비한 횡포들인 투옥과 추방, 재산 몰

수, 화형, 방화, 협박, 공포심 조성 등이다. 헌사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관

습과 교회에 관한 잘못된 오류들을 지적하였으며 동시에 프란시스1세

왕을통한 하나님의 변호를 기다린다는 것으로 끝을맺고 있다. 개신교

가 추구하는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며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

다. 가톨릭교회의가시적인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인 신비스러운미사와

성자숭배를단호히 거부하는 그 이유를 들고있다.9)

칼빈의「교회개혁의 필요성」이라는 제하의 문서는「기독교 고전문서

시리즈 X X I I」권, 『칼빈 : 신학적 협정문들』(Calvin: Theological

Trearies) 안에 게재되어 있는데 이 문서는 최근 발간된 칼빈연구 제7

집에서‘교회개혁의 필요성과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함께 담보하는 것

이라는 주제로 발표되었다.10)

이 논문은 칼빈을 제2세대 종교개혁자로 전제하고서 개혁의 한 세

권위와 근원의 필요성 및 복음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입

장이다. 후자는 이러한 보수주의적인전통적인 구원관을 비난하면서 교

회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세속적인 사명에 참여하는데서 비로소

완성된다고말하며, 「교회를 세상속으로」이끌려는 입장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을 보더라도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교회의 본질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교회의 기능을 소홀히 다루었고, 자유주의 신학에

서는 기능으로서 교회의 역할에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중요한 본

질적 원리를 간과하고 말았다. 교회의 본질과 기능이라는 두 부분이 모

두 교회론에 필요 불가결적인 요소로서 효과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

다. 이런 면에서 칼빈의 교회론을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칼빈에게

보수와 진보라는극단적인 말이없다.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은 불가시적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

아가 불가시적 교회는 가시적 교회를 통하여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가시적 교회는 제도로서의 외형적인 교회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로 집행되는 그리스도

의 몸”6)으로 이해된다. 그리고“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권징이 신실하게시행되는 곳”이어야 한다.

I I. 개혁하는교회(Ecclesia reformanda)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교회의 회복과 건설’로 이해하였기 때

문에‘교회의 사람들’,‘교회의 신학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

다.7) 루터와 칼빈의 차이라면 전자는‘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

아 구원을 받는다’(justification through faith by grace)에 강조점을 두

1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199

6) Institutes, I V, 1. 9, 34.

7) 황대우,“칼빈의 교회론”, 한국칼빈학회,『칼빈 신학개요』I, 칼빈탄생 500주년 기념(서

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8) 박경수, 『교회의신학자칼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65f.

9) 배경식,‘칼빈의「기독교 강요」에서 보여지는 변증적 성격’, 한국칼빈학회,『칼빈연구

창간호』(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255f.

10) 박경수,“칼뱅의「교회개혁의필요성」에 나타난 종교개혁의 정당성에 관한 연구”, 한

국칼빈학회, 칼빈연구제7집』(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0), 29-44.

Page 1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리가우선이라는것도분명히 하였다.

칼빈의 이 문서는 카알5세로 하여금 국가 주도회의 공의회를 약속

하였으며 교황 바오로 3세의 1 5 4 4년‘아버지로서의 충고’(P a t e r n a l

Admonition)라는 교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칼빈의 교회론은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의 개신교회를 향한 비난에 대한 의미 있는 변론

인 동시에 개신교회를 위한 경고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당대의 가장

강력하고중요한 저술이 되었다는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I I I. 신앙생활의학교

칼빈은『기독교 강요』최종판 제IV권의 제목을‘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그 안에서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

혜의 수단’이라고 하였다. 제IV권의1장 서두에서 교회의 필요성에 대

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우

리의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부에참

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나아가려면 무지하고 태만한우리에게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들을 더해 주셨

다. 그리고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무지와 태만과 나약함 때문에 외적인 보

조수단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구속활동을 하신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적합하도록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

여주신 곳이 교회이다. 교회가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은 교회가 단순히

외형적인제도를 갖는사람들의모임이아니라는것을의미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신앙생활의 학교이다.“연약한 우리는 일평

대가 지나면서 개신교회가 로마교회로 부터의 분리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을 때 독자적인 교회론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칼빈이 직접

개혁의 정당성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를 포함한 귀족들과

이 회의에 참여하는사람들로하여금 알게하는일종의 개신교‘변증적

협정문서’(Apologetic treatise)라고규정하였다.

이러한 일을 하게 된 배후에는 슈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 마르틴 부

처(M. Bucer)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부처는1543년 10월에 보낸 편

지를 통해 칼빈이 직접1544년 2월에 열릴 슈파이어(Speyer) 종교회의

에서“개신교의 종교개혁은 분파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

를 둔 참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것을 밝히도록 권고하

였다. 그 회의에서 칼빈은 개신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영주들이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종교개혁을 지

지해 달라는 교회 정치적인 희망을 담은 이 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1)

이 문서에서 보여지는 가톨릭 교회의 교회개혁의 필요성들로는 첫

째 하나님 대신 마리아나 성인들 심지어 성물들까지를 숭상하는 타락

한 예배, 둘째 구원 교리에 있어서 이신칭의와는 달리 인간의 선행은

영원한 구원을 위한 공덕으로 생각하는 왜곡된 내용, 셋째 그리스도께

서 제정하신 세례와 성만찬 이외의 성례들을 거부하고, 넷째 가톨릭 교

회의 성직 매매나 사제들의 타락, 잘못된 교회정치, 성직자 독신 제도

등을통해보이는 영혼에 대한폭정을 심각하게 다루었다.12)

이러한 해악들에 대해 칼빈이 제시하는 치료책들은 하나님의 말씀

과 초대교회의 신앙적 관습과 표준에 근거한 것이었다.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에 합당한 경외를 표하는 것이다. 교황주

의 자들이 주장하는 사도들의 권위 계승에 관해서는 사도적 신앙과 진

2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01

11) 상게서, 29f.

12) J. K. S. Reid, Calvin Theollogical Treatises Vol. X X I I, The Library of Christian

Calssics(London: SCM Press LTD, 1954), 188ff. 13) Institutes, IV, 1. 1, 9.

Page 10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는데 하나님을아는참된신앙은 무엇인가에대한답을“우리를향하

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고한 인식”17)이라고 간략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과 대속적인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스러운 영생의 확

신과소망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자연을 통해서 알리신다.“모든 인류가 동

일한 죄 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피조물 가운데 자신의 임재를 예외

없이 나타내 보이신다.”18) 하지만 이러한 창조 속에 나타난 자연계시는

하나님에대한참된 지식으로는 불충분하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빛을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하신다. 인간의 마음은

그 연약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한 도움과 뒷받침이

없는한 도저히 하나님께다가올 수 없다.19)

이 말씀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성령은 복음

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신다. 칼빈은 성령과

그리스도, 성령과 설교 말씀 그리고 성령과 기록된 말씀 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성령을 통하여 심령 속에 감동을 주고 또 우리

에게그리스도를 제시해 줄 때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요, 영혼을 소생케

하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만드는 말씀인 것이다(시 19:7).20) 그러므로

칼빈은 말씀을‘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의 빛을 주시는 도구’라고

생 교회에서 생도로 지내는 동안 이 학교로부터 떠나는 것을허락받을

수 없다.…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어떠한 구원도 바랄 수

가 없다.”14) 여기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교회 자체가 구원

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 구원

이 없다는 뜻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두 가지 표지는 말씀과 성

례이다. 그의1559년 최종판『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포되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이

지켜질 때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

다”15)고 말한다. 그러나 변증적인 성격을 갖는 그의 교회론을 한국교회

와 연결시켜 볼 때 그가 한 장을 할애하여 강조한‘견책과 출교’라고

명시되는‘권징의신실한 시행’은 오늘의 한국교회를참된교회로 회복

시키는 한 요소가 될 것이다.16)

칼빈이 교회를 신앙생활의 학교가 행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1. 말씀의 바른 전파와 2. 성례의 정당한 집행 그리고 3. 권징

의 신실한 시행등이다.

1. 말씀의바른전파

칼빈은 교회를 성도들의 신앙학교 내지는 훈련장이라고 언급하고

2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03

14) Institutes, I V, 1. 4, 19. 칼빈은 그 증거로 이사야(사 37:32)와 요엘(욜 2:32), 에스겔

(겔 13:9)을 인용한다.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생명에서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

성의반열에가입되지 못할것이라고한다(겔 13:9).

15) Institutes, I V, 1. 12, 37.

16) 참고; Institutes, I V, 1. 9, 33. AugsburgConfession. art. 여기서는‘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치며 성례전을 올바르게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라고 정의한다. 칼빈은 교회의

권징을 중요시하지만 교회를인식케하는표지라고는하지않는다.

17) 존 칼빈/한인수 옮김, 『깔뱅의요리문답』(서울: 도서출판경건, 1995), 134.

18) Institutes, I, 6. 1, 129; Instutites, I. 5. 14, 127; 사도바울이하나님을 알만한 것이세

계 창조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고(롬 1:19) 말한 것은 인간의 식별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그러한 계시를의미한 것이아니라인간들이 핑계할수 없을정도의 계시를 말

하는것이다. 이런면에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라고까지칼빈은말한다.

19) Institutes, I, 6. 4, 139. 모든 인류는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 없이

하나님을찾았기때문에 허망과오류속에서헤맬수밖에 없었다.

20) Institutes, I, 9. 3. 181; 하나님께서는 효율적인 말씀의 확증에 의해 그의 사역을 완

성하시기위해그의능력을 그의말씀에부여한 동일한성령을보내셨다는것이다.

Page 1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배의 중심이 예전인데 반하여 개신교에서는

설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

하는 것은 곧 구원을 얻는 신앙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

편이라는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말씀을 들음에서오기때문이다.

칼빈은 교회의 사역자에 대해 말을 할 때“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

서 떠나지 아니 하리라”(사 59:21)는 말씀을 든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

의 선포는 목사와 교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그들없이는“교회가유지

될 수 없다”고 말한다.25) 전자는 말씀 전파와 제자 훈련, 성례 집행, 경

고와 권면을 하도록 했으며 후자인 교사들은성경 해석을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교리를 온전하고순수하게 유지하도록 하였다. 칼빈의 교회관

에 있어서 순수한 교리의 유지는 매우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 말씀을 당신의 종을 통

하여 전달되게 하시며 그 말씀에 우리가 복종할 수 있도록 그의 말씀

이 계속 선포되게 하셨다. 그리하여“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순수하고 신실하게 선포되는 곳”이다.26) 하나님은 교회

를 그의말씀으로 다스리시고 지배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하여 사

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며 절망한 사람을 소망으로 이끄신다. 그러므

로 말씀의 선포를 위임받은 설교자의 중요성은 그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사역은 신자들을 묶어 한 몸

을 이루게 하는 주된 근육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

해 사용하시는 가장중요한 힘이된다.27)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있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판단이나 사제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교훈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

도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지배하신다.21) 교회를‘진리의 기둥과 터’요

‘하나님의 집’이라고(딤전 3:15) 부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진리가 이 세상에서없어지지않도록 하기위한‘진리

의 신실한 파수꾼’이라불린다. 하나님께서는교회의 사역과 수고에 의

해서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셨고, 영적 양식과 구원에 유익

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친히 한 가족의 아버지이심을보이

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로부터 분리되는것은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되며 독생자께서 우리와 맺어주신 혼인(엡 5:23-32)을

깨트리는무서운 죄악이다.22)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나님

만이 교회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와 우월한 지위

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 행사되어야 한

다.”23) 하나님이 교회의 권위를 행사하시는 방법은 말씀 선포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입인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인 봉사

자들을 세우셔서 이들의 입을 통해자신의 사업을 이루신다. 이는마치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그리스도

안’에(빌 2:1, 5) 있는 혹은‘그리스도를 본받는’(롬 15:5) 이 말씀을 통

하여건전한 교리의 일치를 이루며 형제애의교통을유지한다.24)

2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05

21) Institutes, I V, 2. 4, 79.

22) Institutes, I V, 1. 10, 35f.

23) Institutes, I V, 3. 1, 93f.

24) Institutes, I V, 2. 5, 79f;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이단과 분파의 구별을 한다. 이

단은 거짓된 교리로 진실한 믿음을 부패시키지만 분리론자들은 간혹 같은 믿음을 가

졌으면서도 친교를 깨트리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칼빈이 말하고 싶은 것은 가톨

릭교회는 이단이며혹 가톨릭교회가이단이아니라면 개신교회와의친교를 깨트릴수

없다는 논리적인 말이다. 주의 말씀을 떠나서는 신자간의 일치가 있을 수 없고 파당

만이있다는 말이다. 교회와의연합을강조하는 엡4:5 말씀이 근거가 된다.

25) Institutes, I V, 3. 4, 101.

26) 이장식, 『기독교사상사』제2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3), 231.

27) Institutes, I V, 3. 2, 97. 하나님께서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위탁하시고 직무를 수행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며 그들을 통해 은사를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의 이 제도

안에서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친히임재하신다는것을보여주신다. 이로써

Page 10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개신교의 성경적인 성례에 관하여 논한 후 18-19장에서는 로마 가

톨릭의 미사와 다섯 가지의식을 논박한다. 칼빈이 말하는 성경적인성

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을 돕는 또 하나의 수단

이며그리스도의복음전파를 위한또 하나의 방편이다.30)

성례는 우리 신앙의 약함을 도와주기 위해 주께서 우리를 향한 그

의 선한 약속들을 우리 양심에 인치시는 외적 표시이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는 주님과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에대한 우리의 경건

을 증거하는 것이다.31) 이처럼 성례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약속들

을 외형적인 표로써 확증시키는 역할을 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더욱확실하게만드는 역할을 한다.

칼빈은 성례를 문서에 찍힌 인장에 비유하였다.“문서가 그냥백지일

경우에 인장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나 문서인 경우 인장이 있어야

거기에 쓰인 내용을 확증하는 것이 된다.”32) 칼빈은 로마서4장 11절의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의롭다함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믿

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받았다는그 믿음의 언약에 날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례는 말씀과 언약의 첨가된 것이어서 성례 그 자체로는 아

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믿는 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의 약속을‘언약’이라고 부르고

성례는‘언약의 표’라고 부르신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

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예식이다. 지도 교사

가 어린아이들의손을잡아 친절하게인도하듯이성례도 우리의 우둔한

이같이 설교자의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칼빈은 말씀이 효과를 갖

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성령이 역사하시면

인간의 말은 생명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설교자에게서 분리하면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단순한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성령의 역사 모두불완전하다고 말한다. 성령은 말씀의 터

위에서만 교회를 바른길로 인도한다. 성령은“교회의 안내자이다”(요

16:7, 13), 성령은“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요 14:26), “하나

님의말씀을 살아있게한다.”

그러면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성경은‘예수 그

리스도를 드러낸다’고 칼빈은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하

나님께 이르게 한 구속자이다.28) 하나님은 그의 유일한 빛이요, 지혜요,

진리이신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인류에게 계시하지 않으셨다.29)

이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의 능력에 맞게 낮추시는 일 중에서

도 최고의 겸비이다. 구약과 신약이 여러 가지면에서 차이점이있음에

도 불구하고 양자가 다같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

일하다. 인간의 약함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성경이 예수그리스도

들 증거하듯이 외적 도움으로 주어진 교회에서의 설교도 예수 그리스

도를증거하는것이다.

2. 성례의정당한집행

칼빈은『기독교 강요』I V권에서5장을 할애하여14장에서17장까지

2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07

그리스도의몸이세워지며(엡 4:12), 범사에 머리이신그리스도에게까지자라며(엡 4:

15) 그리스도와의연합을 이룬다.

28) Wilhelm. Niesel, The Gospel and The Churches, 이종성, 김항만 옮김,『비교교회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101.

29) Ibid., 32.

30) Institutes, I V, 14. 1, 539.

31) Ibid., 541. 참조: 각주 2. Fuhrmann은 표징(sign), 표지(mark), 인(seal), 표(token)

(라틴어의tessera)에 대한 칼빈의 사용을 설명하면서 이런 단어들이 상징(symbol)

으로번역되는 것은 잘못이며, 칼빈은 성례에 대해 상징이란 말을거의 사용하지 않

았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상징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에

의해나타내는 일이나 대상을 말하는 데 대표적인 것은‘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

는 말이다.

32) Institutes, I V, 14. 5, 547.

Page 1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혜를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

아들일 수 있게만드는 것은성령이시다.36)

성례(Sacrament)라는 말은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확실하게 믿도록

하시기 위한 자연적인 것들이나 기적 등의 표징들을 포함한다. 여기에

서 칼빈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성례가 있다. 칼빈이 말하는 넓은 의미

에서의 성례는 무엇을 의미할까? 칼빈은 하나님이 자기의 약속을 확증

하기위해 제시한 모든표지들을 성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그는 구약

시대에도성례가 있었다고본다. 아담과 하와에게는생명나무가있어서

그 열매를 먹는 동안 영생을 확신했으며(창 2:9; 3:22) 노아와 그 후손

들에게는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표징으로

삼으셨다. 이러한 것들이 성례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약한 믿음을 붙

들어주며 강화하기 위해사용하신 것들은 성례전이다. 이는마치 은덩

어리를 관인을 찍어 은전을 만들면 다른 가치를 지니는 것과도 같다고

말한다.37)

성례는 주께서 자신의 신실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각 시대에 맞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행하셨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으며(창 17:10), 이후 모세의 율법에서는 성결 예식들과(레 11-

15장) 희생제사와 다른 의식들을 더 하셨다. 이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오

시기전 유대인들의 성례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이것들이폐

지되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오늘 그리스도

의 교회가 사용하고있다(마 28:19; 26:26-28).38)

구약시대의 성례는 신약시대의 성례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에 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례는 어거스틴이 말

한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들을그림으로 그려보여주며 사실적인 형상으

로 묘사해서우리의 눈앞에 보여주는‘보이는말씀’이다.33)

칼빈이 성례를 비유한 또 다른 한 가지는 거울이다. 성례는 말씀의

확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 굳세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주님은 육신의 일에 집착해 있는나약한 인간들을 인

도하시기 위해자신을 낮추시고 이 땅에 속한 요소들을 사용하여 자신

에게 인도하시는 데 성례는 우리 앞에 놓이는 영적인 축복들의 거울이

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그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34)

칼빈은 성례에 대해서 다른 비유를 들어서 더 분명하게 말한다. 성

례는‘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본 것이다. 믿음의 집을 진다고 가정

할 때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받쳐져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그 위에

서 있으며, 성례가 기둥이 되어 믿음을 바치게 되어 더욱 튼튼하게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35) 말씀에 기초를 둔 믿음의 집의 든든한 기둥은

성례이다.

우리는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확증하며 우리의 믿음을 지

탱하고 자라게 하며 성장시킨다. 이러한 성례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기 위해서 칼빈은 먼저 내적 교사인 성령이 오셔야 한다

고 말한다. 그리고 칼빈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에는 말씀과 성

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고 주장한다. 믿음의 집에서 필요한 요소들이

말씀과 성례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성례를 믿음으로받지 않으면 그

것은 마치 받을 그릇의 뚜껑을 열지 않고서 포도주나 액체를 붓는 것

과 같다. 성례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내적인 은

2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09

33) Institutes, I V, 14. 6, 549.

34) Institutes, I V, 14. 3, 543.

35) Ibid.

36) Institutes, I V, 14. 17, 571f.

37) Institutes, I V, 14. 18, 575f. 여기에서 칼빈은 구약에서 다른 종류의 성례의 예들을

아브라함이 연기나는풀무속에서 타는횃불을본 것(창 15:17),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실 때 보여주신 젖은 양털과 마른 양털의 기적(삿 6:37-40), 히스기야 에게

건강회복을약속하살 때 해 그림자가10도 물러가게하신것등을든다.

38) Institutes, I V, 14. 20, 579.

Page 1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만이 이 일을깨닫는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

에 대한 증거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

리의믿음을 지탱하고자라게 하며강화하고증진시킨다.

셋째로, 성례는 우리 신앙의 약함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기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위해서 필요하다.

성례라는 은혜의 약속을 깨닫기 위해서는 믿음이 전제해야 한다고

할 때, 칼빈은 성례가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선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례의 말씀을 들을 때 목사가 분명한 음성으로 선포하

는 그 약속이 신자들의 손을 잡고 표징을 가리키며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40)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실체와 표

징을 겸해서 가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

해해야 한다.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눠 가짐으로써 우리는 유익

을 얻으며따라서 그만큼 성례에서유익을 얻는것이다.41)

넷째로, 성례전은 내적 스승인 성령이 같이 계실 때 비로소 그의 임

무를 행할 수 있다.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키지만, 이 믿음은 성령의 고

유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

시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의 힘이없으면 성례는 아무 유익도 주지못하며, 이 교사

의 가르침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성례가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

지양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성례는 통일성을 갖는

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약의 교회를 위해서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표지를 주심으로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우리 마음에 언약을 인

치셔서 우리신앙이 연약할 때 보호하신다고말한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

한 그의선하신 뜻의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외형적인표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

께 대한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것이다.

칼빈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수단의 하나로서 성례

전을 언급하면서 성례전에서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성령은 성례전

을 통하여 어떤 신비스러운 것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

리스도를 계시하여 준다. 설교 말씀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성

례전의 본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신자들은 이 성례전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와그의은혜를 더욱풍성히 받게된다.

칼빈이 말하는 성례전을종합하여요약하면다음과 같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성례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새로운 성례를 정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일이다. 칼빈에게 있

어서 성례는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성례의 본체나

실체는‘그리스도’라고 대답한다.39) 주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해

서 그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성례전은 그리스

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증가시키며 그리스도를 좀 더 충만히 소유하게

되며그의풍부한 축복을 누리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을 누구나 누리는 것은 아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2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11

39) Institutes, I V, 14. 16, 569.

40) Institutes, I V, 14. 4, 546f. 칼빈은 이를 통해 교황의 압제 하에서 행해진 사제들의

축성문(the formula of consecreation)을 비판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배우지 못한

신자들에게 쉰 목소리가 섞인 라틴어로 함으로써 마술사의 주문 같은 신비감을 갖

게 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해‘성례에 사용되는 표징에 말씀을 첨가하라’고 했다.

말씀의선포가 아니라믿어지는 말씀을(롬10:8) 의미한다.

41) Institutes, I V, 14. 15, 567f. 성례의 내용과 형식이 성례에 포함되어 두 가지가 긴밀

하게결합되어 서로분리할 수 없으며 항상본체를 표징과 구별하여한쪽에속한것

을 다른쪽으로옮겨서는안 됨을의미한다.

Page 1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욱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을 얻

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은 씻음을, 피는 속죄를 나타낸다. 물과 피는

깨끗하게 하며구속하는 증거다. 그러나 가장중요한 증거인 성령은 이

런 증거를 우리가 확신하게 만드신다.46)

3. 권징의신실한시행

칼빈은『기독교강요』제V I권 12장에서‘교회의 권징’을 다루고 있는

데, 주로 견책과 출교로 한정하고 있다. 칼빈은 교회 안에서 권징의 필

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사회나 조그마한 가정도 권징이

없이는 올바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면 가장 잘 통제되어야 할 교회

에서는 더욱더 권징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훈이 생

명인 것 같이 권징은 그 근육이며 이 근육을 통해 몸의지체들이 서로

결합되고각각자신의 위치에 있을수 있다.”47)

칼빈은 권징의 필요성을 논하기 전에 군주들이 권위를 가지고 국가

의 강제력을 통해 교회 문제에 간섭하는 예를 들면서 그것이 교회의

질서를 보존하며 확립하는 것이라면 그 개입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

한다. 법률과 칙령과 재판으로 종교를 유지·존속하게 하는 것은 경건

한 군주들의 의무라고까지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48) 그는 권징의 종류

는 것을아무 것도 막을수 없다. 성령과 성례를 구분하여 역사하는 힘

은 전자에만 있고 그 임무는 후자에 돌린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성

례는 실속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역사하고 힘을 나타날 때

는 위대한효력을 발휘한다.42)

다섯째로, 주께서 성례를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다. 이 표징들

은 위에서 주로부터 오는 은혜와 구원의 증거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우

리 쪽에서는 고백의 표,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43) 하나님과 인

간의 신앙적 관계를 의미하는 진정한 경건을 위한보조 수단이다. 이런

면에서 칼빈이 이해한 성만찬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그리스도의 실재

적 임재로 파악된다. 그것은 설교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

의 형식이다.44)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성례는 하나님의 도구

일뿐 그 자체에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관용하심과

자비로 우리가 쓰도록 마련해 주신 다른 피조물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

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

에 옮겨서는 안 된다.45)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계시될수록 성례는 더

2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13

42) Institutes, I V, 14. 9, 555. 성령이 없다는 것을칼빈은 어두운 눈에비치는 태양의 빛

이나막힌귀에울리는음성과같이아무런 효과가없다고 한다.

43) Institutes, I V, 14. 19, 883ff.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참종교이든 거짓 종교이든 사

람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가시적 성례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서

로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종들을 위해 성례를 제정하

셨다고 한다. 그 후에 사탄은 이것을 사악하고 미신적인 행위로 변질시켜 타락시켰

다고 한다.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기 원하시

는 계약(covenants)으로서하나님께서그의백성들을훈련시키고자하시는 것이다.

44) 정승훈, 『종교개혁과칼빈의 영성』(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21.

45) Institutes, I V, 14. 12, 561. 칼빈은 성찬이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

에 성찬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통해가톨릭교회의화체설을반대한다. 성례의기능은 하나님의약속을 우리의

눈앞에놓고바라볼수 있게함으로써약속의 보증이되는것이다.

46) Institutes, I V, 14. 22, 583.

47) Institutes, I V, 12. 1, 445f.

48) Institutes, I V, 11. 16, 444f. 구체적인 실례로 경건한 마리우스 황제가 야만족으로부

터 내어쫓긴 감독을 받아들이라고 다른 감독들에게 명령을 했을 때 교황 그레고리

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감독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을 했으며, 또한 콘스탄티

노플의 요한 감독과 화해하라고 했을 때는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대로 복종하겠

다고 한 것을 들었다. 동시에 그는 이런 명령은 경건한 군주로서 합당한 처사라는

것이다.

Page 1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지키도록명령하는 것이그들의 관습이었다. 고대교회에서는이 권징에

서 아무도 제외되지않아서 군주나 평민이나동등하게적용되었다.

칼빈은 교회가 권징을 행함에 있어‘온유한 심령’(갈 6:1)을 갖는것

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바울이 지시한대로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야

한다(고후2:8). 또한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것을잊

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교회에서 출교를 행함에 있어서도 출교당하

는 사람을 영원한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교정 수단으

로 행하는 것이다.「출교와저주」는 다르다. 저주는 죄의용서를 거부하

고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 정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교는 단지 그의

도덕적 행위를 처벌하며 징계하는 것이다. 출교도 벌을 주는 것이지만

장차 정죄를 받으리란 것을 미리 경고함으로서 사람을 불러 돌이켜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52) 징계 대상자를 온유하고 아버지 같은 태

도로 대하며 참회자가 교회가 만족할 정도의 의식을 지키면 안수함으

로써은혜안으로 받아들이는화목을 우선으로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권징에 의해서 완전한 교회의 정화를 기대하지는 않

았다. 다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최대한 단일성을 유지하도록 권징

을 사용할 것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권징을 통해서 분리를 추

구하는 것이아니라 하나됨을기대하는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교회의 권징’에 관해 기술하기를“과오

를 범한 형제를 교정하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53)고 전제한

다.“다른 사람들이 같은 과오를 범하는 것을 방지하며 많은 사람들에

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지 모르는 누룩을 없애 버리고 그리스도의 명

예와 복음의 거룩한 직업을 옹호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데 필요하

를 일반 권징과 특별 권징으로 나누고서 전자는 모든 사람들이 복종해

야 될 것으로후자는 성직자에게해당되는것을말한다.

칼빈은 권징의 목적을 세 가지로구분하였다.49)

첫째는,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

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불명예스러운 생

활을 보내는 자가 하나님께 모욕을 끼치며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엡 5:

25)를 사악하고 음모단체인 사람들의 소굴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

이라말할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선량한 사람이 악한 사람들과 교제함으로 말미암아 타락되

는 일이없게하기위함이다.

셋째는, 자신의 추악함에 대한 부끄러움에 스스로 회개하도록 하고

자 함이다.50)

자기의 악행에 대한 징벌을 받고 매를 맞아 각성하며 유익을 얻도

록 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이 의도하는 참 교회는 권징이 바르게

시행되는 교회이다. 신자들이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신앙의 표준

이 있어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하는 도덕적, 윤리적 행위의 표

준도 있어야 함을 보여 준다. 이에 교회는 교리의 혼란과 회원들의 건

덕상의 추문이 있을 때에만 말씀의 순결함과 성도들의 성화의 생활을

보존하는수단으로권징을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51)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말로 견책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추방했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를 오래 묵인한 것을 책망하였다(고

전 5:1-7). 고대교회는 범죄하여 교회에 누를 끼치는 일이 발생하면 우

선 그런 사람을 성찬에 참가하는 것을 금하고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교회 앞에서 회개한 증거를 보이도록 명령했다.

그뿐만 아니라 실수한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표시로서 엄숙한 의식을

2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15

49) Institutes, I V, 12. 5, 451ff.

50) Institutes, I V, 12. 5. 451ff.

51) 신복윤, “칼빈의교회관”, 『신학 정론』제6권 1호, 39.

52) Institutes, I V, 12. 8, 459f. 칼빈은 고대교회가 행한엄격한참회와 친교정지를3년, 4

년, 7년 혹은 종신토록 강요한 과격한 엄격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의 명

령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예를들어 어거스틴이도나투스파를 회개한

즉시받아들였다고강조한다.

53)『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헌법』(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125.

Page 1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는 하나님 대신 마리아나 성인들 심지어 성물들까지를 숭상하는 타

락한 예배를 지적하면서 비성경적인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관과 가

톨릭교회의 인위적인 성례전 비판, 나아가서는 성직매매와잘못된 교

회정치 등 신앙의 해악들에 대해지적하였다. 이에 대한칼빈이 제시하

는 치료책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신앙적 관습과 표준에 근

거한것이었다.

칼빈은 교회를 신앙생활의 학교라고 전제하고 교회의 필요성을 인

간의 무지와 태만과 나약함 때문에 외적인 보조수단으로 교회를 세우

시고 교회를 통해 구속 활동을 하신다고 말한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합하도록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신 곳이

바로신앙생활의학교인 교회이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학교에서 행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1. 말씀

의 바른 전파와 2. 성례의 정당한 집행 그리고 3. 권징의 신실한 시행

이다.

칼빈은 교회를 성도들의 신앙학교 내지는 훈련장이라고 언급하면서

하나님을아는참된신앙은‘우리를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분명

하고도 확고한 인식’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과 대속적인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스러

운 영생의 확신과 소망을 아는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판단이나 사제직에 있는 것이아니라 사도들

과 예언자들의 교훈에 있다. 그래서 설교자의 위치가 중요하며 말씀이

효과를 갖기위해서는성령의 역사가 중요하다고말한다.

칼빈이 말하는 성경적인 성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을 돕는 또 하나의 수단이며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이다. 성례는 우리신앙의 약함을 도와주기 위해주께서 우

리를 향한 그의 선한 약속들을 우리 양심에 인치시는 외적 표시이며

문서에 찍힌 인장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또한 성례는 믿음의 집을 건축할 때 말씀에 기초를 둔 기둥으로 비유

다”54)고 언급하고 있다. 이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충고로부터 시작하여 얼마동안 주의 만찬에 대한 배석을 정지하고 범

죄의 성격과 본인의 과실에 따라서는(살전5:12, 살후3:6, 14-15, 고전

5:4-5, 13; 마 18:17; 딛 3:10). 교회에서 제명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55)

나오는말

칼빈은 자신의 주저서인『기독교 강요』를 서술할 때 많은 자연적인

예들을 들면서 신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설명한다. 이는 독자들이 이미

가톨릭 신앙에 물들여져 성경에 무지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로 하여금

개신교 신앙을 더 잘 이해하도록하기위함이었을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꿈꾸고 있었던 참 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다시 말

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성도들의 모임’(The communion of

the saints)이었다.

칼빈의 교회론을 교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하나님의 말씀이 올바

로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로 집행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규정하면 되

지만 그의 교회론이 변증적인 모습을 가지려면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

과 견주어 볼 때‘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권징이 신실하

게 시행되는 곳’이어야 한다.

칼빈이 말하는‘개혁하는교회’(Ecclesia reformanda)란 1544년 2월

에 열린 슈파이어(Speyer) 종교회의에서‘가톨릭 교회로부터의 분파적

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 참된 교회를 회복하려는 것’

임을 보여준 변증적인 성격을 가진다. 여기에서그는 가톨릭 교회가 행

2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17

54) 상게서.

55) 참조: 상게서.

Page 1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다. 2. 교회 내에서 철저한 신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

다. 심지어 교회에서 학습이라는 과정이 없이세례를 베푸는 것은 시정

되어야 한다.56) 3. 교회의 성장을 질보다 양으로 평가하여 외형적인 것

에 치중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4. 교회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보다 이벤트성 행사에 치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5. 교인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삶보다 목회자에게 인정받으려는신앙생활을한다.

왜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는가? 1. 교회 내에서와

교파간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2.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리

에 갇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3.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섬기지 않는

다. 4. 대형교회들의 교회 문턱이 너무 높다. 5. 국가의 권위나 제도에

순종하지않고여행자제지역에선교를 강행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10년간 가톨릭이 부흥하고 불교 역시 신도수가 증가하고 있는

데 개신교는 교인수가 줄고 있다는 결과를 보면서 개신교 자체내부에

산적한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는 점을인지하는 것이필요하다. 그 이유

로는 개신교의 교단 난립과 자격이 미비한 교역자들의 양산과 경쟁적

인 선교 그리고 교회 내부의 지도자들의 갈등 등이 주된 원인들이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가 해야 할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비본질적인 것들의 포로가 되어서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된다. 성례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기 위해서 칼빈은 먼

저 내적교사인 성령이 오셔야한다고 말한다.

칼빈이 말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성례는 하나님이 자기의 약속을 확

증하기 위해 제시한 모든 표지들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생명나

무,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는 무지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는 할례

등등 각 시대에 맞도록 여러가지 방법으로시행하셨다. 이것들이그리

스도께서 오시기 전 유대인들의 성례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오

늘 그리스도의교회가 사용하고있다.

칼빈이 말하는 성례전을 종합하여 보면1. 성례의 주인은 하나님이

시며, 2. 성례의 본체나 실체는 그리스도이시고, 3. 성례는 우리 신앙의

약함을 도와주기 위한 것, 4. 성례전은 내적 스승인 성령이 같이 계실

때 비로소 그의 임무를 행한다. 5.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

지며한 믿음을 고백하도록장려하시려는것이다.

칼빈은 권징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경건한 군주들이 권위를 가지고

국가의 강제력을 통해 교회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교회의 질서를 보존

하며 확립하는 것이라면 그 개입을 허용하였다. 칼빈이 말하는 권징의

목적은 무엇인가? 1.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

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 2. 선량한 사람이 악한 사람들과

교제함으로 말미암아 타락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 3. 자신의 추악함

에 대한 부끄러움에 스스로 회개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교회가 권징을 행함에 있어‘온유한심령’(갈 6:1)을 갖는것이합

당하다고 말한다. 징계 대상자를 온유하고 아버지 같은 태도로 대하며

참회자가 교회가 만족할 정도의 의식을 지키면 안수함으로써 은혜 안

으로 받아들이는 화목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권징을 통해

서 분리를 추구하는것이아니라 하나됨을기대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론에 비추어서 보이는 한국교회의 문제점들로는

1. 주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며 공의를 말하지 않음으로 죄에 무디어져

2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19

56) 배경식,『종리교회백년사』(전주: 집현전, 2007), 1907년에 설립된 전북완주 종리교

회의 당회록(1907-1936)에 의하면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이 정확하게6개월을 주기

로 당시 선교사이던 마로덕(L. O. McCutchen) 당회장의 주도로 시간과 장소, 배석

자가 4-5명이 있는 가운데 실시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시 학습, 세례 시에 알아야

될 내용들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은 기본으로 알아야 하며 주일성수와 조

상숭배 문제, 십일조, 주초와 부도덕한 생활 등을 자세히 묻고 대답을 했다. 학습은

최소 교회생활을 모범적으로 6개월을 해야 하며 세례는 학습 후 다시6개월 후에

세례를 받게 하였다. 가톨릭은 이이들이 개신교이 세례에 준하는 견신례를 행할 때

1년 이상 가톨릭의 교리를 교육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개신교회의 신앙적 각성이

요구된다.

Page 1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들의애절한 기도가 상달되어오늘의 한국교회를살지게 하고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거대한 대형교회

보다는 신앙의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말씀에 충실한 소규모의 교회들이

들어찰 것으로 예상된다. 그곳에서 칼빈이 말한1. 말씀의 바른전파와

2. 성례의 정당한 집행 그리고 3.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제대로 이루어

져 교회다움을 추구하는 교회가 이루어진다면 교회 구성원들은 신앙적

으로 만족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기뻐하시고 한국교회를 바

로 세워주시며축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들이소수이지만

한국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 도처에 남아 있기에 정치적으로나 자원

적으로 빈약하며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이지만 세계에 당당히 한국이

라는이름을 드높이며기독교선교대국으로존재하는것이다.

주제어

교회론, 성도들의교제, 성례전, 권징, 개혁하는 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

회, 조상숭배

Ecclesiology, the communion of the saints, the Sacraments, discipline,

Ecclesia reformanda, the Vatican Synod I I, ancestor worship.

접 수 일 2010년 3월 29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26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교회는 구원의 바른 안내자이다. 조상숭배를 한국의 전통 미풍양식

이라고 하면서 조상제사 유교식 장례예식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가지

며 타종교와 삼보일배를 하는 가톨릭의 태도는 성경을 거스른 우상숭

배에 동참하는 것으로서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기독

교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57) 또한 여기에 동조하여 한국 개신교회 내

에서조차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 이외에는 조상숭배를 받아들이는 입

장이다. 교리에 어긋나지않는다면 타종교의신앙적인 태도를 배려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특히 조상숭배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말씀과 거리가

먼 이 어중간한 입장을 따르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이며 그들에게도

구원의 확신이 있을까?

개신교회가 지역사회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내부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다툼으로 인해 몸살을 앓으며, 외부적으로는 개신교

교회와 기관 내의 갈등과 문제로 인해서 세상적인 법정공방을 하고 있

는 경우로 인해 예수의 지상명령인 선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

하고 있는 실정들이다. 그래서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진통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따라 이농 현상에 의한 농촌교회는 텅 비어 있

다. 도시교회는 대형교회로 변모해 가고 있고 개척교회는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교회는 수평이동을 통해 교인들은 자신들의 입

맛에 맞는 교회들을 찾아 헤맨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남은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며 이

2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21

57)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59 이하. 서학과의 접촉을

통해 전래된 가톨릭 교회가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그들의 기독교 신

앙을 보수한다고 해서 제사를 폐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는 사건이 생겨나자 조

야는 이를 패륜 외도로 규정하고 멸기난상의 죄목으로 이들을 참형하는1801년 신

유교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가톨릭교회는 1839년 기해 대교난, 1846년 병오,

1866년 병인교난을거치기까지반세기가 넘도록수십만의 교인들이옥에갇히고 귀

향을가고심지어단두대의처형을 받았다.

Page 1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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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 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23

Page 1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 Holy Spirit is evident.

What is said by Calvin regarding the sacraments? It is one way to

address our ignorance and dullness and another way to preach the

Gospel of Jesus Christ. It is an outward sign by which the Lord seals

on our consciences the promises of his good will toward us, seal in

the writing on our hearts and reflected in the mirror of our lives in

which we see the abundant grace of God in order to sustain the weak-

ness of our faith.

Calvin believed that regular discipline sustained the life of the

church, just as it is needed also in the society, in the family and in the

school. What is the purpose of the discipline? 1. Those who lead a

filthy and infamous life may not be called Christians 2. The good are

to separate themselves from the wicked, so as not to be corrupted by

the constant company of the wicked, as commonly happens 3. Those

overcome by shame for their baseness begin to repent. And he said

that such severity as is joined with a ‘sprit of gentleness’(Gal. 6:1)

befits the church.

The problems of the Korean church, reflected in the view of

Calvin, are: 1.the Korean church’s emphasis on love rather than

justice means it becomes insensitive to sin 2. Christians are not well

educated in the church. They are baptized without pre-formation 3.

Churches are evaluated by quantity rather than quality 4. churches

focus on trends and special events rather than worship in the church

5. church congregations seek to live Christian lives to gain recogni-

tion from the pastors rather than from God.

When we establish the Korean church on Calvin’s ecclesiology,

where: 1. God’s word is preached rightly 2. the Sacraments are

performed correctly as the body of Christ and 3. the performance of

The meaning of the Ecclesiology of J. Calvin in Reference to the Korean Church

Pae, Kyung Sik

professor

Hanil University &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Wanju, Korea

The ecclesiology of Calvin, in its doctrinal aspect, is ‘the place

where God’s word is preached rightly, where the Sacraments are

performed correctly as the body of Christ. But when his ecclesiology

is regarded as apologetic, the church should be the place where

discipline is carried out in a trustworthy and sincere way.

Here Calvin criticized the Mass, which in the Catholic church was

focused on man’s worship of Mary, the Saints and even on holy

treasures instead of God. He pointed out the unbiblical theory of

salvation through the merit of the human being. He also criticized the

seven Sacraments, the clergy’s selling of indulgences, and the false

church politics and said they were harmful for the Christian faith.

The remedies, presented by Calvin were rooted in God’s Word and

on the habits and the standards of the early church. The foundation of

the church is the Word of God. The ground of the church is based not

on human judgment, the authority of the pastor, but on the apostles

and the instruction of the prophets. But the position of the preacher is

important: when the Word of God is preached effectively, the role of

2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배경식, 칼빈의교회론이 한국교회에주는의미 225

Page 1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령은사의본질과속성에관한연구

김영선(협성대학교교수)

I. 서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축과 확장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활용하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많은 혼란을 겪기도 한다. 어떤 교회는 은사에 치

중하여 신비적 경향으로 빠지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은사를 무시하여

생명력 있는신앙생활을 경험하지 못한다. 어떤 교회는 누가성령의 은

사를 받았다고 하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은사를

억제할 수 없는 감정적 폭발로 이해하고 은사 받은 자들을 교회의 평

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자들로 보고 이들을 경계하고 억압하려는 교회

지도자들도나타나는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은 은사에 대한 바른 가르침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은사론에 대한 연구는 거의 빈약한 수준에

머물렀다.1) 이런 이유 중에 하나는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성령의 은사에 대한 관심을

discipline is done sincerely, then church members will be satisfied in

their Christian lives and God will be pleased with this and He will

raise up the Korean church rightly and bless it without ceasing.

2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227-255

Page 1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접어두고 다만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조명, 즉 성령의 은사

그 자체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이해를 고찰하고자 한다.

I I. 성령은사의의미와본질

1. 성령은사를표현하는단어들

성령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

세,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이 위대한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그러나

신약시대 직전까지 거의 아무도 성령의 은사 현현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각 나라들을 향한 효과적인 전도가 없었

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4) 기적적인 신유도 흔

하지않았고(물론 엘리야나 엘리사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했지만), 예언

도 일부 선지자들에게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실 것을 이렇게 말하였다.“내가 내 신을만민에

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부어줄것”(욜 2:8-29)이다.

이와 같은 요엘의 예언은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능력으로 가르쳤고(눅 4:15-22), 귀

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셨다(눅 4:31-41). 예수의 말씀대로(행 1:

8)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였을 때,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

을 깨닫고“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라”(행 2:16)고 말하

였다. 오순절 때에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과거의 사역을 배경으

크게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

인들이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은사의 보편성에 대한이해와 함

께,2) 그리고 교회 내의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 운동의 영향으로 성령

의 은사에 대한관심이 크게증진되어,3) 모든교인이 은사사역에 동참

해야한다는 것을가르치고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하지만 언

제나 시험적이고 서투르기 때문에, 그들은 늘 자신의 감성뿐만 아니라,

지성으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 따라서 오

늘날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바르

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교회의 이런 필요성에 부응하여 성

령 은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은사의 속성과 특

성을 따라서, 성령 은사들의 경중(輕重)을 따라서, 은사의 나열에 따라

서 또는 은사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서 달리 연구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성령의 은사를 논함에 있어서, 성령 은사의 본질과 속성, 예언,

방언, 신유에 대한 은사, 그리고 그 이외의 은사들에 신학적 이해에 관

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 은사들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는

2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29

1) 성령의 은사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1679년과1680년 청교도 존 오언에 의해 영

국에서 저술된 것만 보아도 그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제임스 파커/홍종락 옮김,『성

령을 아는 지식』(서울: 홍성사, 2005), 37). 한국 신학계도 이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보이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전문학술지「한국기독교신학논총」에서도 이 주

제에대한연구논문은 찾아보기힘들다.

2)“은사는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임하는 것이다”(존 쾨니히/

고종혁옮김, 『성서적 관점에서본 교회를 세우는 은사』(서울: 성광문화사, 2007), 62.

3)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Nottingham: IVP, 2007), 1016. 최근에 와서

“모든 은사들을 교회의 유익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회구조와 예

배 형태를 변화시켜 보려는 전례 없던시도가 곳곳에서 자발적으로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혹여 기존의 예배 방법과 교회 체제가 은사 사용을 가로막아 성령을 소멸하

고 있는 건 아닌지를 점검하려는 진지함도 새롭게 나타났다”(제임스 파커,『성령을

아는지식』(2005), 39).

4) 구약에서의 유일한 사건은 다윗이 사울 왕을 위해 수금을 연주할 때, 사울에게서 악

신이 떠나갔다. 그러나 사울왕은마귀의 역사로부터 영구적으로해방되지 못했다(cf.

삼상 16:23).

Page 1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의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10) 왜냐하면 우리에게 은혜가 임할 때

반드시 감정, 특히 기쁨과 감사의 감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로부터 오는 은혜(charis)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eucharisia)의 수직적

인 흐름이 바울에게나타난다:“말할 수 없는그의은사(dorea)로 말미

암아 하나님께 감사(charis)하노라”(고후9:15).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사람들을 사로잡고기쁨과 감사를거쳐하나님께로돌아간다.11)

2. 은사의정의

카리스마(charisma) 또는 카리스마타(charismata)는 은사를 뜻하는

말이다.1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를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

다.13) 카리스마는 로마서12장 6절과 고린도전서12장 4절 이하에 나타

나고 있는데, 여기서 이 단어는 교회의 회중 속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구체적인 은사들을가리킨다.14)

개핀(Richard B. Gaffin, Jr.)은“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들을 도구로 삼아 하나님께 봉사하게 하는 모든 방면을 다 포함

하는 것”15)으로 본다. 은사는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과 재능을 모두 포

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핀은 이렇게 말한다.“신자의 능력은 어떤 능

로 하여능력으로복음을 전파하였고, 귀신을 쫓아내었으며, 병을고쳤

으며, 예언을 하였다. 이와같이성령은사들의현현은 사도교회의특징

이라할 수 있다.

교회에서의 성령 은사의 현현은 초대 교회 당시부터 세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되었다. 초대 교회당시 성령의 은사는 어떻게 표현되었을

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이 성령의 은사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5) 일반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표현하는 단어는 카리스마(charisma)이다. 그러나 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단어들이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쁨

(chara), 환희(chairo), 감사(eucharistia), 은혜(charis) 등이 그것이다.6)

일반적으로 이 단어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인간에게 부어주

신 어떤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헬라어 단어들 모두가‘카’(char)를 어근으로 하고있다는

것이다. 은사를 뜻하는 단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charisma’도 바로

이 어근에서 파생되었다.7) 신약에서가끔 기쁨과 감사의 경우가 정확하

게 일치하는 것은 아마도 기쁨과 감사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들이 같은

어근(char)에서나왔기 때문일 것이다.8)

신약에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카리스(charis), 즉 은혜이다.9) 은혜는 기쁨과 감

2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31

5) 은사에 관한 헬라어 단어들을 모두 찾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성서 주석

학적큰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다만은사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단어들의특성을

통하여은사는 은혜, 기쁨그리고감사와 연관되어 있다는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6) 이와 더불어 도마(doma), 도시스(dosis), 도레이(dorea), 도레마(dorema), 도론(doron)

과 같은헬라어단어들도은사들을표현하는데자주사용되었다.

7) 존 쾨니히, 『성서적관점에서본 교회를세우는 은사』(2007), 75.

8) 앞의책, 78-79.

9) 구약성경70인역은 가끔 은혜를 종종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하는 하나님의 호의란 뜻으로 사용하였으며, 신약에서도 은혜를 하나님 편에서 그의

백성에게호의를베풀려는 경향으로표현하였다(존 쾨니히, 『성서적관점에서 본 교

회를세우는 은사』(2007), 80, 86).

10) 그러나 기쁨과 감사도 순전히 감정적인 반응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의지의 요소

를 포함한다(존 쾨니히, 『성서적관점에서본 교회를 세우는은사』(2007), 80-82.

11)“바울은 은혜와감사를 순환하는 한 주기의 두 부분으로 보았다”(존 쾨니히,『성서적

관점에서본 교회를세우는 은사』(2007), 81).

12) 카리스마타는 헬라어 명사 카리스마의 복수형이다. 리차드 개핀은 사도 바울이 이

말을신학적용어로 만든최초의 인물이라고본다(리차드 개핀,『성령 은사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99), 55).

13) 존 쾨니히, 『성서적관점에서본 교회를 세우는은사』(2007), 21.

14)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55.

15) 앞의책, 57.

Page 1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카리스마를‘영생’(롬 6:23)과 같은 우주적인 어떤 것으로, 또한독신과

같은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고전 7:7)이나, 감옥에서의 석방(고후1:8-

11)과 같이 역사적으로 제한된 어떤 것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여러번‘카리스’를 예루살렘의신자들을위해모금한 헌금과 연관시킨

다. 한 번은 돈 자체를‘카리스’라고 하기도 했다(고전16:3).21) 다른 곳

에서는 이 단어는 헌금 과정이나(고후8:1; 9:8, 14), 돕기 위한 연보의

동기를 가리킨다.22)

이처럼 은사는 신축성이 있는 용어로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의미가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 여러 가지

의미의 밑바닥을 흐르면서 그 의미들을 통합함으로써 이 용어에 신축

성을부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사

에 대한 이런 광의적 의미 속에서 발견되는 본질적 요소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특정한 은혜를 꼭 맞게 주셨다는 것을 신자들이 의식

하는 것이다. 때때로 은사가 임하였을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특징적으로 은사는 그것을 받는 사람을 사역으로 이

끈다. 따라서 은사는 광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사역으로 이끄

시는모든것이라고할 수 있다.

3. 은사의본질

1) 자연적·초자연적능력을 초월하는은사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연적인 재능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성령의 제은사(諸恩賜)를 받을 수 없다. 성령의

력이든 간에 중생 이전의 재능까지 포함하여 하나님 은혜의 통제력 하

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기능을 발휘하게 될 때 그것은 모두 신령한

은사이다.”16) 하지만 개핀은 좀 더 나아가서“영적 은사는 우리가 생각

하는 힘과 재질,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혹은 받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우리

를 통해서 일하시는바로그것”이라고 하였다.17)

파커(J. I. Packer)는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일하기 위해서 주신 것을

은사로 본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은사란“우리의 말과 행동과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표현하고 전달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

고 세우기 위해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역량이다.”18)

쾨니히(John T. Koenig)는 은사를“특정하게 현현하는 성령 자체와

물질적인 조건, 감정적인 상태, 기질의 변화, 평범한 달란트와 비상한

달란트를 포함하는”19) 것으로 본다. 쾨니히에게 물질적인 대상 그 자체

는 은사가 될 수 없다. 즉 돈을 모금하고 나누는 능력이 은사일 수는

있지만 돈 자체와 그 소유가 은사는 아니다. 쾨니히에 의하면 은사는

하나님 은혜를 통해 신자들에 의해 내면화되는 힘이나 가능성으로 나

타나는 것이다. 만약은사자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보

지 못하는 한, 어떠한 선물도 은사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은사자는

단순히 은사로 포장한 상품이나 객관적인 물건을 받는것이 아니라, 주

시는분과새로운 관계를 받는것이기 때문이다.20)

존 쾨니히는 은사에 대한 이해를 보다 광의적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에대한타당성을바울에게서 찾고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카리

스마라는 단어를 유연하고 개방적으로 사용하고있기때문이다. 바울은

2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속성에관한연구 233

16) 앞의책, 57.

17) 앞의책, 65.

18) 제임스파커, 『성령을아는지식』(2005), 36.

19) 존 쾨니히, 『성서적관점에서본 교회를세우는 은사』(2007), 177.

20) 앞의책, 177-178.

21) 그러나 돈보다는“감사제물”이란번역이 더 좋은번역일것이다.

22) 존 쾨니히,『성서적 관점에서 본 교회를 세우는 은사』(2007), 86.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연보(바울은 이 연보를 종종 은혜라 부른다)를 마지 못해 하

려는고린도 교인들에게끝까지 잘 하라고 강권한다.

Page 1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다. 성령의 은사에는 자연적 기능과 관계된 은사들(교수 능력, 구제,

행정 능력, 음악적 재능 등)도 있고, 기적적인 것으로 보이는 은사들(예

언, 신유, 영 분별 등)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재능이나 능력을 모두 은사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성령의 은

사들은 성령으로부터 수여되어야 하고(고전12:11), 여러 사람의 유익

을 위해 주어져야 하고(고전12:7), 교회에 덕을 세우고 교회를 유익하

게 하는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14:26). 자연적인 은사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와 능력을 나타내게 된

다. 일반적으로 목사가 설교할 때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에 의한설교와

성령의 능력으로 한 설교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은사는 자연적,

초자연적 능력이나 힘 또는 자질이라는 구분을 떠나있다. 은사는 자연

적, 초자연적 차원의 것에국한되거나 매여 있지않고그것들을 초월하

는 속성이 있다. 실제로 은사는 자연적, 초자연적것의경계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은혜로서수여되는은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창설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

는 은사의 공동체이다.28) 신앙생활은 은혜로 되는 것이며(엡 2:8), 신앙

생활 전체가 은사적이다. 따라서“모든 은사는 은혜의 현현이며 은혜의

현현은 어느것이나은사라 할 수 있다.”29)

“은사는 돈으로나 공로로 획득할 수 없다.”30) 은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수여되는 것이다. 혹자는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은사가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아도

은사는 자연적인 선물을 초월한 것이다.23)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

는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인지에관심을 갖고 있다. 영국 오순절 운동의

지도자인 도날드 지(Donald Gee)는 은사는 언제나 자연적인 재능에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덧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Gee)에 의하면

지식이나 지혜 같은 은사들은 때때로 정규적인 설교나 개인의 가르침

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은 보통인간의 의지로 시작

하고 어느 정도 인간의 능력을 훈련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으로 나타

나기도 한다. 또 연구나 명상 같은 의지적인 행동을 하는 동안에 성령

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24) 여기서 주목될 사항은“성령의 은사란 사람들

이 생각하는 것만큼 신비적이고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은사

들 중 많은 것이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

고도로 계발되거나극대화된것이다.”25)

성령의 은사를 이렇게 이해할 때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분하는 경계가 흐릿해진다. 바울은 우리의 은사가 자연적인가 또는

초자연적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인식하고 인정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다. 자연적인 은사와 초자연적인

은사를 구분하는 문제점을 인식한 독일의 신오순절파의 학자 아놀드

비트링거(Arnold Bittlinger)는 바울은 그 양자를 구분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비트링거에게 은사는“성령께서 자유롭게 하신 나의 타고

난 천부의 재능이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고 그의 교회를 세우는데 꽃필

때 드러난다”26)고 하였다.27)

성령의 은사란 교회에서의 사역을 위해 성령에 의해 부여되는 능력

2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김영선, 성령은사의 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35

23) 사무엘챠드윅/한모길 옮김, 『성령을믿느냐』(서울: 성광문화사, 1976), 171-172.

24) Gee, Spiritual Gifts in the Work of the Ministry Today, 18.

25)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25.

26) Arnold Bittlinger, Gifts and Grace: a commentary on I Corinthians 12-14; trans-

lation from German by Herbert Klassen and supervised by the Rev. Michael

Harper (London: Hodder & Stoughton, 1967), 72.

27) 존 쾨니히, 『성서적관점에서본 교회를세우는 은사』(2007), 151.

28) 한스 큉은 아예 교회를 은사 공동체로 본다(참고. Hans Küng, The Church (Surrey:

Search Press, 1968), 393, 398).

29)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1999), 56.

30) 사무엘 챠드윅, 『성령을믿느냐』(1976), 55.

Page 1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고전12:11)이라고 하였다.33)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

시는 것이다(롬 12:3-4). 고린도전서12장 8-11절에서 여러 가지 은사

를 말할 때마다“성령으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따라, 같은 성령으로”

등의 표현을 사용함으로 각양 은사가 성령을 통하여 주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은사 수여에 대한 보다 중요한 그리고 핵심적 관점은 하나

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우

리가 어떤 은사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수 있고, 또한 받은 은사도 성

령의뜻에 따라주관되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자기 마음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은사의 기초는

성령의 조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 받은 은사는 반드시 성령의 뜻

에 따라 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은 그의 은사를 주관할 때 절대

로 우리를 기계처럼사용하지않는다.

은사의 부음에 대한 문제는 누구도 저항하거나, 빠르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 국면이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그리스

도를 충격적으로 만난 다음에,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박해자를 치유하고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나니아는 이 부르심에 저항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임

무를 수행한다(행 9:7-19). 이처럼 은사는 성령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

부어지고 또한주관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은사는 우리의 권리나 노

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다. 결국 은사는 하나님 백성을 위한 하나

님의선물이다. 따라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경외와 겸손으로은사를 주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37

33) 바울은 성령과 연관하여 은사라는 명사를 쓰지 않지만 성령을 은사로 받는다고 분

명히 생각했다. 바울은 하나님이“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2, 5:5)고 말한다. 성령을 은사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성령

의 활동을통해다른모든은사가흘러나온다.

은사가 나타날 수 있으며 사용될 수 있다. 은사가 반드시 성령 충만으

로부터 나온다면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은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많았던 사울 왕도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하였다

(삼상10:9-13). 사도베드로도 외식함에 대하여 바울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갈 2:11-14). 사도 바울 역시 선교여행을 갈 때 바나바와 심히 다

투어 갈라섰다(행 15:36-41). 사도들의 이러한 사실은 성령이 충만하지

않아도 은사가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행위가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만이 은사를 받는다면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는 주님의 은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와 성

품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은사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

다.31)

어느 개인, 즉 목사나 감독, 교황 또는 어느은사자도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자격이 없다.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노력으로 받을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

다.32) 여기서 우리는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는 은혜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곧 은사의

본질을 구성한다.

3) 성령에 의해주관되는은사

은사의 수여와 은사를 주관하는 주체는 성령이다. 바울은“이 모든

2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31) 김창용,『나에게도 은사가 있는가?』(서울: 도서출판 영문, 2003), 274-275. 바울은

모든 사람이 모든 은사를 가진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한 은사를 가진 것도 아님

을 상기시킨다.“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방

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은사는 보편성을 지

니고 있다. 바울은 모든그리스도인들이적어도 인격화된은사들(카리스마타) 가운데

하나를 받았다고보았다(고전7:7).

32) 은사는 인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

어지는 것이다(Hans Küng, The Church (Surrey: Search Press, 1968), 427).

Page 1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Samuel Chadwick)에 이에대해서 말한다.

은사는 과실이 아니다. 은사는 영성(靈性)을 떠나서도 존재한다. 고

린도교회의 사람들은 은사에는 풍요했지만 과실은 빈약했다.…주

의 은사는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 성령의 열매는 특별

한 배려에 의하여 성립된다. 은사는 천부의 재능이라고 하는 기초

에 따르지만과실은 마음과 생명에 있어서 은총의완성으로서나타

난다. 과실에서 떠난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다. 은

사에 의해서 영광을 나타낼 수는 없으나 과실은 모든 것에 영광을

초래한다. 하나님은열매에의해서 영광을 나타내신다.37)

챠드윅의 성령의 은사와 성령 열매에 대한 이러한 구분에 대하여

개핀은 성령의 열매도 성령의 은사에 해당하는 것이며,“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를 구분하여 성령의 열매는 은사가 아닌것처럼 보는 것은

바울신학에 위배되는”38) 것으로 본다. 챠드윅은성령의 열매와 은사와의

다른 특성을 들어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다른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은

사의또 다른본질적속성, 즉 자연적·초자연적능력을 초월하는속성,

하나님의 은혜로서 수여되는 속성 그리고 성령에 의해 주관되는 속성

을 고려할 때 개핀의 주장과 같이,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에 해당

하는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I I I. 은사의종류

1. 은사목록

일반적으로 은사에 대한 신약성경의 대표적 기록은 고린도전서12-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39

37) 앞의책, 167.

38) 리차드 개핀, 『성령 은사론』(1999), 57.

시는분께나의주님이라고말하게 된다.34)

4) 성령의열매로서의은사

성령은 우리에게 선물을 수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사랑, 희락, 화

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이다. 각 사람은 각

기 다른 선물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성령의 선물들은 성령의 뜻에 따라 수여된다. 성

령의 열매를 맺는 조건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관계를 성령의 열매라는 말로 정

리했다. 성령의 열매는 영적 정신의 특질로부터 시작하여 인격적 특질,

사회적미덕, 실천적 행위로 진전해 간다. 열매는 인간의 노동과 기술을

요구하고는 있어도 그것으로 꽃을 생성할 수 없고 열매를 맺게 할 수

도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행위는

시작되고생명은 성장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로서 그리

스도인의 품성을 나타낸다. 성령의 열매는 결코 인간의 소산은 아니다.

그것들은 육의 성질이나 토양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열매는

가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에 있는생명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고통의 과정을 거치게 된

다. 신자가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면 그는 봉사에 대단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이 그러한 힘을 발휘하도록 변했다는것은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다.35) 그러한 결실또는열매는 하나님의일이다.36) 따라서

성령의 열매 역시 은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는 그 성격과 특징으로 볼 때 약간의 구분이 있다. 사무엘 챠드윅

2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34) 존 쾨니히, 『성서적 관점에서본 교회를세우는 은사』(2007), 179.

35) 사무엘챠드윅, 『성령을믿느냐』(1976), 165-167.

36) 앞의책, 161-165.

Page 1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있음을 다음과 같이밝혀주고있다.44)

고린도전서12:28

1. 사도, 2. 선지자, 3. 교사, 4. 능력, 5. 병 고치는은사,

6. 서로 돕는것, 7. 다스리는것(행정), 8. 방언

고린도전서12:8-10

9. 지혜의 말씀, 10. 지식의 말씀, 11. 믿음, (5) 병 고치는은사,

(4) 능력, (2) 예언, 12. 영 분별, (8) 방언, 13. 방언통역

에베소서 4:11

(1) 사도, (2) 선지자, 14. 전도자, 15. 목사-교사

로마서 12:6-8

(2) 예언, 16. 섬기는일, (3) 가르침, 17. 권위하는 일,

18. 구제하는일, 19. 다스리는자, 20. 긍휼을 베푸는일

고린도전서7:7

21. 결혼, 22. 독신

상술된 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곳에 열거된 은사들 중에는 중

복된 것들이 있다. 은사들이 중복되거나 유사한 은사들이 함께 기록된

이유는 로마서나 고린도서 그리고 에베소서는 한 저자인 바울 사도의

기록일지라도 이 책들을 받는대상들이 각각다르기 때문이다. 만약바

울이원했다면 더 많은은사들을 나열했을 수도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은사들은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

기 때문이다. 어떤사람은 지혜로운조언으로, 어떤사람들은요리를 함

으로,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이나 노인들을 돌봄으로, 어떤 사람들은 법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41

44)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20. 그루뎀은 에베소서의 은사를 4

개로 나열했다. 왜냐하면 목사와 교사를 같은 은사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분리시키면23개가된다. 이 중에 중복되는은사가7개가 된다. ( ) 안에있는

은사들은 중복되는 은사들을 가리킨다. 사도, 선지자, 병 고치는 은사, 능력, 방언, 가

르침의은사는 각각1번 중복되고, 예언은2번 중복된다.

14장, 로마서12장 6-8절, 에베소서4장 7-12절, 베드로전서4장 10-11

절, 이 네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보다 구체적으

로 은사들을언급한 곳은고린도전서12장, 로마서12장, 그리고 에베소

서 4장이라 할 수 있다.39)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고린도전서12:4, 8-

10에는 9가지 은사가 기록되어 있고,40) 고린도전서12장 28절에는8가

지 은사가41) 로마서12:6-8에는 7가지 은사가,42) 에베소서4:11-12절에

는 5가지은사가 기록되어있다.43)

신약성경에서 은사들을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고린도

전서12-14장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12-14장을규범적으로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로마서12장 6절 이하에서 바울은 섬

기는 것, 위로, 구제, 다스리고 긍휼을 베푸는 것들도 은사로 이해하고

있기때문이다. 여기에 열거된 은사목록은 모든은사를 모두 열거한 완

전한목록이 아니고대표적인은사만을선택해서 열거한 목록이다.

2. 은사의다양성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대표적 은사목록(고전 7:7; 12:8-

10, 28; 엡 4:11; 롬 12:6-8)에 열거된 은사들이모두22개(또는23개)가

2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39) 한스큉은 은사목록으로고전 12:28-31, 롬 12:6-8에 4:11을 거명한다(Hans Küng,

The Church(Surrey: Search Press, 1968), 395).

40) 1. 지혜의 말씀의 은사 2. 지식의 말씀의 은사, 3. 믿음의 은사, 4. 병 고침의 은사, 5.

능력 행함의 은사, 6. 예언의 은사, 7. 영을 분별하는 은사, 8. 각종 방언 말함의 은사.

9. 방언들 통역의은사.

41) 1. 사도직의 은사, 2. 선지자직의 은사, 3. 교사직의 은사, 4 능력의 은사, 5. 병 고치는

은사, 6. 서로돕는은사, 7. 다스리는 은사, 8. 각종방언의은사.

42) 1. 예언의 은사, 2. 섬기는 은사, 3. 가르치는 은사, 4. 권위하는 은사, 5. 구제의 은사,

6. 다스리는 은사, 7. 긍휼을베푸는 은사.

43) 1. 사도직의 은사, 2. 선지자직의 은사, 3. 복음전하는 은사, 4. 목사직의 은사, 5. 교사

직의은사.

Page 1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46)

2) 데이비드 피치스(David pyches)의 구분: 계시의 은사, 능력의

은사, 전달의 은사

헬라어의 용례(用例)에 따라데이비드피치스는 신약에 나타난 은사

들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성령의 나타남’(고전12:

8-10)을 뜻하는 파네로시스(Phanerosis),47) 성령의 사역(고전12:28)을

뜻하는 디아코니아(D i a k o n i a) ,4 8 )‘은혜대로 받은 은사’(롬 1 2 : 3-8 )를

뜻하는 카리스마타(Charismata),49)‘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자들’(엡 4:

8-14)을 뜻하는 도마타(Domata)50)가 그것이다.51)

피치스는 파네로시스를 다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한다.

(1) 계시의 은사,52) (2) 능력의 은사,53) (3) 메시지 전달의 은사.54) 파네로

시스에 속한“은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일 때에, 즉 하나님

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인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43

45)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1999), 62-63.

46) 이 구절은 신약성경의 은사론을 전체적으로 간추려 요약하는 구절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은사의 다양성,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적인 현현으로서의 은사, 은

사의봉사적 성격등을잘 드러내고있기때문이다.

47) 지식의 말씀, 지혜의말씀,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등.

48) 사도, 선지자, 교사, 기적, 치유, 서로돕는일, 행정, 방언등.

49)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50)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등.

51) 데이비드피치스/이재범 옮김, 『능력은사』(서울: 나단출판사, 1991), 85-86.

52) 지혜의 말씀의은사, 지식의 말씀의은사, 영분별의은사.

53) 믿음의 은사, 치유의은사, 기적을행하는 은사.

54) 예언의 은사, 방언의은사, 방언통역의 은사.

적인 조언이나 의학적인 도움으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전도로, 어떤 사

람들은 큰 집회나 대중집회로,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그리고 문자 메시지를 통한 전도로 그들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은사들을 세분해서 열거한다면 보다 많은 수의 은사들

을 나열할 수 있을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에 다양한 은사들을 주셨다. 이 다양한 은사들은 하나

님의 다양한 은혜의 증표(cf. 벧전4:10)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와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인식하고 은사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받은 은사들의 우열을 가려서는 안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나타나는 은사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왜

냐하면 모든다양한 은사들은교회의 유익에공헌하기때문이다.

3. 은사의구분

다양한 은사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은사목록에 나타

난 은사들을 종합하여 은사들을 분류하거나구별하는시도들이있었다.

이러한 분류나구분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1)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의 구분: 말씀은사와 행위은사

물론 은사목록에 나타난 많은 은사들을 칼로 두부 베듯 딱 갈라놓

을 수는없다. 가령“지혜의 말씀”과“지식의 말씀”을,“병 고치는 은사”

와“능력 행함”을,“가르치는 일”과“권위하는 일”을 예리하게 구분하기

가 어렵다. 은사목록은 언뜻 보기에는 되는 대로 열거되어 있는 것 같

아도 신학적 안목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리차드 개핀은 말씀 은사

(word-charismata)와 행위 은사(deed-charismata)로 구분한다. 개핀은

은사목록을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만한 근거를 베드로전서4:10-11절

에서 찾는다.45)“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

2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5) 신동혁의 구분: 전도와 관련된 은사, 교육과 관련된 은사, 봉사와

관련된 은사

아가페 선교회장과 한국복음 선교회 이사장을 역임한 신동혁 목사

는 교회의 네 가지 대표적인 직무인 예배, 전도, 교육, 봉사에서 예배를

제외한 나머지 시각을 가지고은사들을다음과 같이구분하였다.

전도와 관련된 은사: 사도직의 은사(고전 12:28; 엡 4:11), 선지자 직의

은사(고전 12:28, 엡 4:11), 복음 전하는자의은사, 방언의 은사

교육과 관련된은사: 교사직의은사, 가르치는은사

봉사와 관련된은사: 구제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봉사의 은사.58)

어떤사람들은 은사를 선지자적 은사(가르침, 권면, 권고, 책망등), 제

사장적 은사(구제, 서로 돕는 일,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드리는 일 등),

왕적 은사(교회 정치나 행정과 관련된 은사들)로 분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식의 은사(영 분별,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능력의 은사

(신유, 기적, 믿음), 말씀의은사(방언, 통역, 예언)로 나누기도한다.59)

지금까지 살펴본 은사 구분을 보면 그 구분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

는 것을 알 수 있다.60) 이처럼“은사를 구분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

은 가르침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은사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다

양한 방법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특정

한 구분방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

김영선, 성령 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45

57) 조용기, 『성령론』(서울: 영산출판사, 1978), 203-250.

58) 신동혁, 『성령론』(1979), 144-172.

5 9 ) Dennis and Rita Bennett, The Holy Spirit and You (N.J.: Logos International,

1971), 83.

60) 이 외에도 한스 큉 같은 신학자는‘사적인 은사’(권면, 위로, 믿음, 지혜의 말씀, 영

분별 등)와‘공적인 은사’(사도, 선지자, 전도자, 집사, 관리자, 감독, 목자 등)로 구분

하기도한다(Hans Küng, The Church(Surrey: Search Press, 1968), 394).

받아사용할 수 있는것이다.”55)

3) 존 윌블드(John T. Walvoord)의 구분: 항구적인은사와 임시적

은사

존 윌블드는 바울이 지적한 은사들을 불변하는 특성을 가진 항구적

인 은사와 가변성을 가진 임시적 은사로 구분하고 있다. 불변하는특성

을 가진 항구적인 은사에는 사도, 선지자, 교사(고전12:28), 복음 전하

는 자(엡 3:11; 딤후 4:3), 목사(엡 4:11), 권유하는 자(롬12:8), 주는자

(롬 12:8) 자비를 나타냄(롬 12:8) 믿음의 은사(고전 12:8-10)가 있고,

가변성을가진임시적 은사에는능력, 병고침, 각종방언등이있다.56)

4) 조용기의구분: 계시의 은사, 발성의 은사, 권능의 은사

한국의 은사운동을 주도한 순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한 조용기

목사는 은사를 계시의 은사, 발성의 은사, 권능의 은사로 구분하여설명

한다.57) 계시의 은사에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가 속해 있고, 발성의 은사에는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가 속해 있으며, 권능의 은사에는 믿음의 은사, 병 고

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가 속해 있다. 조용기 목사의 은사 구분은

피치스의 파네로시스의 은사 구분과 유사하다. 계시의 은사는 내용과

명칭이 일치하고, 능력의 은사와 전달의 은사는 그 내용은 일치하나, 명

칭이각각권능의 은사, 발성의 은사로 표현되었다.

2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55) 데이비드피치스, 『능력은사』(1991), 87.

56) 신동혁, 『성령론』(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79), 138-139.

Page 1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루뎀(Wayne Grudem)은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은사들의 잠정성

을 소개한다.63)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예언과 방언과 지식과

같은 은사들은 폐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13:10).64) 고린도전서

13장 8-13절에서 바울은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불완전한 것으로 말한

다음불완전한 것은폐하리라고 하였다. 우리의 현재지식과 예언은 부

분적이고불완전하지만 언젠가는 완전해지고 직접적이될 것이다. 고린

도전서13장 8-13절은현재 우리가 소유하고있는 성령의 은사들은모

두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지만 주님이 오실 때에는 모두 무용지물이

될 것으로 표현한다. 고린도전서13장 8-13절의 전반적인 역할은 은사

들은사라질 잠정적인것으로 보고있다.

개핀(Richard Gaffin)도 그루뎀과유사하게은사들의 잠정성에 대해

서 말한다. 개핀에 의하면 은사들 중에서도 예언과 방언은 잠정적

(provisional), 반잠정적(subeschatological), 부분적 특성을 가지고 있

다.65) 예언과 방언은 믿음, 소망, 사랑처럼 항상계속되는 성령의 역사들

(고전 13:13)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 지나가 버리게 되는 은사인 것이

다(고전13:8-9). 다양하게 분배되는 성령의 은사들은 잠정적이다. 성령

은사는 지나가는“이 세상의 형적”(고전7:31)의 여건 때문에 필요하게

된, 그 여건과 관련된 그리고 그 여건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가 지나가는 것(고전 13:8-10)이다.66) 은사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도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주신 것으

로 보인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 등은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만 필요하

고 그 이후에는쓸모없는것으로 본다(고전13:8-13).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 연구 247

62) 앞의책, 1031.

63) 앞의책, 1032-1038.

64) 12절의“그때에는”은 10절의“온전한 것이 올 때”를 가리킨다. 12절을 통해서 볼 때

온전한것이오는때는곧 주님이재림하실 때를말하고있다.

65)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1999), 52.

66) 앞의 책, 54.

은 어느특정한 방법을 말하고 있지않기때문이다.”61)

I V. 은사의잠정성과지속성

성령의 은사는 한번 주어지면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잠정성이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성령

의 은사는 특별히 사도시대에 한정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영구적으로

하나님이 교회에 허락한 것이라는 두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은

사 중단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는 단 일회적인 사

건인바 성령의 은사는 단지초대교회에만 있다고 보는것이다. 즉 성령

의 은사에 관하여 냉담한 사람들은 은사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사도시

대 이후로 폐지된 것으로 본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순절

운동이나 카리스마 운동을 부정적으로 본다. 두 번째 견해는 성령의 은

사의 지속성을 말하는 견해이다. 성령의 은사는 지금도 교회에서 일어

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주로 오수절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주

장한다.

1. 은사의잠정성

은사 중단론자들은 신약 성경에 언급된 어떤 은사들은 오늘날의 교

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기적적인 은사들(예언, 방

언, 통역, 혹은 신유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 등)은 복음전파의 초창기에

사도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표시로서 사도 시대에만 주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한 은사는 사도 시대 말엽, 아마1세기 말이나2세기 중엽에

중단되었을것이라고주장한다.62)

2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61)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22.

Page 1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갖는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선지자이고, 어떤 사람은 교사이고(고전

12:29), 또 어떤 사람은 전도자(엡 4:11)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이한 일이 벌어져 이런 직분 기능의 은사를 빼앗지 않는 한 그

사람들이 예언과 가르침과 전도의 은사를 영구히 소유할 것이라고 기

대한다. 바울이“내게 예언하는 능이 있어”(고전13:2)라고 한 말도 성

령의은사가 영구적임을암시한다.

은사의 지속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은사 중단론자들에게 이의를 제

기한다. 이들에게 역사적인 근거에서 볼 때 중단론자들이 내세운 전제

는 대단히 의심스러워 보인다. 이들은 성령의 은사의 현현은 사도시대

와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 은사들은 교회사의 모든

시대에 나타났다고 믿는다. 오늘도 신앙과 교회의 필요에 따라 나타나

는 여러 가지 은사가 바로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러한 은사

의 현현이 금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아무데도없다. 오늘날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오히려 이 은사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68)

그루뎀은이 필요를 이렇게 표현한다.

오늘날 기적이 신약시대에 나타났던기적만큼 강한가 하는질문이

과연 중요한 문제인가? 오늘날 기적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만큼 강

하지않다고말함으로써얻고자 하는유익은 무엇인가도생각해봐

야 한다.…우리는 은사는 그 능력에 있어 다양하며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완벽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만일 양적으로 신약

성경의 시대보다 못하다면 주님께 더욱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요 그렇다고 은사들을 사용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용을 반대하

는 것은합당치 않아보인다.69)

성령의 은사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시대 전반에 걸쳐 지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49

68) 사무엘 챠드윅, 『성령을믿느냐』(1976), 177.

69)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58.

바울은 결혼이나 독신과 같은 은사들을 잠정적인 은사들로 본다(고

전 7:7). 우리는 결혼할 때도 있고 결혼하지 않을 때도 있어서 어느 한

상태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신유 은사의 경우, 신유 은사의 효력은

신유를 위한기도에응답하시는하나님의주권에 달려있다.

예언의 은사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즉각적인 계시(고전14:30)에

달려 있어서, 사람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도 마

찬가지다. 결국 중생시키고 믿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전도자는

기도하며 말씀을 전할 뿐이요 영혼을 추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어

떤 경우에는 특별한 은사가 한 가지 특별한 사건이나 필요를 위해 주

어질수도있다.

삼손의 생애 마지막에 그에게 돌아온 힘은(삿 16:28) 그의 삶의 마지

막 순간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스데반이“성령이 충만하여 하

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행 7:55)을 보았던하늘의 놀라운 계시도 그 순간에 그에게 주신성

령의 역사였다. 은사가 영구적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만일 어떤 사

람이 그의 은사를 무시하여 성령을 근심케 하거나 심각한 교리적, 도덕

적 오류를범할경우(구약에서의삼손처럼) 은사가 그칠수 있다는 것이

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네 속에 있는 은사를 조심 없게 말라”(딤전

4:14)고 경고했다. 은사를 분배하는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 분은 성령이

다:“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11). 성령은 임의로 얼마 동안 은사를 거두어 가실

수도있고그 은사를 강하게혹은약하게하실수도있다.67)

2. 은사의지속성

바울은 한편으로는 은사의 잠정성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사

의 지속성을 말하기도 한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지속성을 가진 은사를

2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67)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25-1026.

Page 1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잠정성과지속성을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V.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성

령은사의현현에 대한인식은 사도시대부터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사도시대 당시의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일

반적으로 은혜와 축복, 기쁨과 감사 등을 그 중심적 의미로 하고 있는

카리스마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카리스마로 표현된 은사는 하나님이그

의 사역을 위해은혜로 주시는 모든것, 즉 내면화 되는힘이나 가능성,

능력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은사는 자연

적·초자연적 능력의 구분을 초월하며, 인간의 다른 어떤 수단으로 획

득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철두철미 성령의 뜻에

따라주관된다. 성령의 열매 역시성령의 은사와 구분되는 특성이 있지

만 본질상 성령의 은사에 해당하는것으로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 열거된 은사는 대표적 은사일 뿐이지 모든 은사를 다

열거한 것 아니다. 은사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다양

한 은사들을 이해하기 위해 은사들은 신학적 입장이나 가르침의 목적

이나 그 이외의 또 다른 인식을 가지고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으나 특

정한구분방법을 제시하는 데는한계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들은 일시적일 수 있고 또한 평생 유지될 수

도 있다. 모든 은사들은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주어졌다가 사라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잠정적이지만 어떤

은사들은 일평생 유지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지속성을 띠고있다. 은사

는 본질적으로 잠정성과 지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은사의

속성과 본질을 올바로 인식하여 교회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은사

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일소시키고 바람직하게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51

속되며 교회의 유익을 위한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특히 사랑은 주님의

재림 후에도 계속 있을 것이다. 사랑은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너무 근본적이기 때문에 이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저

세대로 넘어간 후에도 계속지속될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특수한 사명

에 따라특수한 시기를 갖는다. 은사는 나타났다가사라지기도 한다. 또

한 일평생 지속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하여 성령의 은사가 어느 경우에

는 나타나고 다른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이유가 없

다.70)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주관되기 때문이다. 우리

는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성령의 은사가 사도시대나 교부들의 시대에

끝났다고가르친 것을찾아볼 수 없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은사들은 일시적일 수 있고, 또한 평생유지될 수

도 있다. 어떤은사들(선지자, 교사, 전도자 등)은 지속성을가지고 있지

만 어떤 은사들(예언, 방언, 신유, 특별하기는 하지만 독신, 결혼 등)은

잠정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은사의 잠정성과지속성을 말할 때 주의

해야 할 것이 있다. 은사의 잠정성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볼 수 있다.

광의적 의미의 은사의 잠정성은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만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래서 무한정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

컫는 의미이다. 협의적 의미에서의 은사의 잠정성은 주어진 은사들은

각각의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은사의 지속성은 사도시대 이후 다양한

은사들이 역사하는 강도에 차이가 있었지만(사도시대에는 기적적인 은

사의 발생으로그 강도가 높다고 볼 수 있지만) 오늘날에도 그 같은은

사들이 교회에서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속성도 주님재림시까지만유효하다. 이런의미에서 지속성은 잠정적

인 것이지 영구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은사는 잠정적일 수 있지

만, 어떤 은사는 지속적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은사는 본질적으로

2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70) 사무엘챠드윅, 『성령을믿느냐』(1976), 177.

Page 1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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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from German by Herbert Klassen and supervised by the

Rev. Michael Harper. London: Hodder & Stoughton,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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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e, Donald. Spiritual Gifts in the Work of the Ministry Today. Springfield,

Mo.: Gospel Pub. House, 1963.

Küng. Hans. The Church. Surrey: Search Press, 1968.

김영선, 성령은사의본질과 속성에관한연구 253

의 유익과 성장에 기여하도록해야할 것이다.

주제어

성령의 은사, 은사의 다양성, 은사의 구분, 은사의 잠정성, 은사의 지속

성, 성령의열매.

Gifts of the Holy Spirit, Diversity of gifts, Classification of gifts,

Temporality of gifts, Permanence of gifts, Fruits of the Holy Spirit.

접 수 일 2010년 3월 30일

심사(수정일) 2010년 5월 29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2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have a character of diversity. We can classify diversely to rightly

understand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for the purpose of theological

view or teaching, etc. Yet it is not easy to set a specific way of classi-

fication.

The gifts given for us can not only be temporary but also perma-

nent. All gifts are temporary in their being effective only before the

time of Jesus’ coming again and that gifts of the Holy Spirit can dis-

appear after appearing, but in the side of that some gifts can be

sustained throughout all one’s life, we can say some gifts are perma-

nent. Gifts include essentially both temporality and permanence. We

have to understand rightly the essence and attribute of gifts of the

Holy Spirit. Through this right understanding, we have to sweep

away misunderstanding of the gifts of the Spirit which can be hap-

pened in the church community and contribute for growth and virtues

of the church by well usage of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김영선, 성령은사의 본질과속성에 관한연구 255

Study on the Essence and Attribute of Gifts of the Holy Spirit

Kim, Young Seon

Professor

Hyupsung University

Whasung, Korea

This article seeks to rightly understanding theologically the

essence and attribute of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The study of the

essence and attribute of gifts of the Holy Spirit leads to the discussion

of three main subjects, such as the meaning and essence of gifts of the

Holy Spirit, types of gifts, and the temporality and permanence of

gifts.

We can recognize the appearance of gifts of the Holy Spirit

remarkably from the period of apostles. The gift(c h a r i s m a) can be

defined as all things that may indicate ability, power and possibility

given by God’s grace for His work. Gifts transcend the classification

of natural and supernatural ability. It can be only obtained by the

Holy Spirit’s grace but not by efforts or means of human, so that it is

managed only by the will of the Holy Spirit. The fruits of the Spirit

have a character related with gifts of the Spirit, but essentially comes

from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The New Testament did not record all gifts of the Spirit. The gifts

described in the New Testament are only representative gifts. Gifts

2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Adams, Daniel J. (한일장신대학교교수)

In 1995 I wrote an essay entitled Premodern, Modern, Post-

modern-What Is the Difference? which focused on contemporary art

found in the sculpture garden of the DeCordova Museum in Lincoln,

M a s s a c h u s e t t s .1 ) The main argument of the essay was that the

postmodern period gives us, as Christians, one more opportunity to

tell the truth. Fifteen years have passed since that original essay was

published and much has happened in the interim. Since the events of

September 11, 1991 there has been a war in Afghanistan which

continues, another war in Iraq which also continues, a global war on

terror with an accompanying restriction on civil liberties, and terrorist

attacks throughout much of the world including Madrid, London, and

Istanbul.

In light of what has taken place during the past fifteen years, a

discussion of contemporary art in the sculpture garden of a peaceful

art museum seems almost quaint and perhaps even nave. What in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257-294

1) Daniel J. Adams, Premodern, Modern, Postmodern--What is the Difference, Theo-

logy and Society, Vol. 11 (1997), 161-176. It has been revised and appears in Daniel

J. Adams, Doing Theology in Postmodern Times (Jeonju: Hanil University Press,

2006), 61-75.

Page 1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hardly be imagined in 1995.

It should be added that normally an address given by the Pope is of

little interest to most Protestants, especially to Protestants in Korea.

After all, following the Reformation the papacy became largely

irrelevant to most Protestants, especially to those living outside the

areas of Europe that have traditionally been Roman Catholic. The

address given by Pope Benedict X V I at the University of Regensburg

is different, however, for the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who have

been affected by the violent response to the Pope’s address are mem-

bers of the church catholic. Furthermore, most of these Christians are

not Roman Catholic but Eastern Orthodox, Coptic, and Protestant.

While some of the Protestants became Christian through of the

endeavors of Presbyterian missionaries in th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the majority of these Christians trace their origins

to the earliest beginnings of the faith.3 ) In the uncertainties of the

postmodern era, these Christians are struggling for survival in an area

of the world where the pre-modern, the modern, and postmodern

maintain an uneasy coexistence.

As we seek to reconsider the pre-modern, the modern, and the

p o s t-modern in 2010 let us turn our attention to Manuel I I P a l a e o-

logusa-pre-modern emperor, Benedict X V I-a modern pope, and the

Islamic responsea-postmodern difference. All three came together

on that fateful day in September when the Pope addressed a group of

scholars at the University of Regensburg.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59

3) Erin Dunigan, The Forgotten Faithful, Presbyterian Outlook, Vol. 189. No. 1

(January 1/8, 2007), 9. Dunigan points out that most Christians of the Middle East

trace their religious heritage back a full five hundred years prior to the Great Schism

of 1054.

1995 seemed to be a subject for academic discussion and speculation

has now become a matter of life and death. What in 1995 was

presented as a possible range of options has now evolved into a dead-

ly clash of cultural values, and some would even say a clash of civi-

lizations.2) Telling the truth today is, at times impossible, for such an

act can lead to unpredictable outcomes.

One of the reasons for this state of affairs is the difficulty in defin-

ing just what the truth is. Another difficulty is the vast array of per-

ceptions that surround the person who is telling the truth. Different

people perceive that person and what he or she represents in widely

differing ways. And finally there is the postmodern reality of the plu-

rality of truths. What is truth to one person is falsehood to another.

Truth claims are no longer considered to be absolute and universal.

The difference between the pre-modern, the modern, and the

postmodern was discovered by none other than Pope Benedict X V I

when he gave an academic address at the University of Regensburg in

Germany on September 12, 2006. Normally academic addresses

given at universities are of little interest outside academia. But within

hours this particular address became worldwide news and the politi-

cal and social repercussions reverberated around the world. Riots

broke out, ambassadors were recalled, churches were attacked, a nun

was brutally murdered, and a climate of fear settled in among the

Christian communities of the Middle East. Clearly the issues of the

differences between the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are

back in the first decade of the new millennium in a way that could

2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2) See Samuel P.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New York: Simon & Schuster, 1996). When Huntington first proposed his

clash of civilizations analysis, he was strongly criticized by many religious leaders

and theologians as being overly pessimistic. There was the belief that good will on

the part of religious leaders could avoid such a clash. Now, in 2006, such a view

appears to have been incredibly nave in the eyes of many observers.

Page 1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Byzantine territory and who was humiliated by being thrown into a

debtors’ prison in Venice while on a trip to western Europe to seek

support for his rapidly declining empire. To make matters worse, the

Byzantine Empire had to pay tribute to the Turks in order to maintain

its survival. Manuel’s father, John V was deposed twice and follow-

ing the second deposition, Manuel was personally responsible for

placing his father back on the throne for the last time.

Manuel’s experience with the Turks was, therefore, anything but

positive as he saw his father humiliated, the Byzantine Empire

shrinking in size, and his own fortunes rapidly dimming. When his

father John V wished to rebuild the walls surrounding the city of

Constantinople the sultan threatened to blind Manuel, and forced him

to put an end to the fortification works. 5) As a condition for the acces-

sion of his father to the throne for the last time Manuel had to reside

at the sultan’s court and as an obedient vassal accept any humiliation.

There he met again with his nephew John V I I, who had fled to the

same place and both of them had to support the Turks, who raised the

tribute.6) Following his father’s death, Manuel fled from the sultan’s

camp, and went to the capital Constantinople where he married a

Serbian princess and was crowned emperor of the Byzantine Empire

in an impressive ceremony.

Manuel could see, however, that the aim of the Turks was the

eventual destruction of the Byzantine Empire which by now had

shrunk in size to the city of Constantinople and a few surrounding

cities and some islands in the Aegean Sea and a small territory in the

Peloponnesus in Greece. He continued to rule only because the Turks

were otherwise occupied with expanding their empire elsewhere, and

because he was forced to pay an increasingly high tribute. Even after

his enthronement as emperor, Manuel was forced to serve in the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61

5) Ibid., 2.

6) Ibid.

Manuel I I Paleologus-A Pre-modern Emperor

It is probably a fair assumption that most people, outside of a small

number of Byzantine scholars, had never heard of Manuel I I Paleo-

logus before September 12, 2006. It is probably also a fair assump-

tion that, following the initial news reports, most people promptly

forgot about Manuel I I Paleologus. Those with a theological interest

may have filed away somewhere in their memories that he was the

author of an obscure fourteenth-century document quoted by the

Pope in his address. Beyond this, however, little is known of Manuel

I I Paleologus, and the vast majority of people are not interested

enough to probe deeper into who this man was and why his views

concerning Islam and the prophet Muhammad were so extreme. One

cannot understand the Pope’s remarks nor the Islamic response,

however, unless one first goes back and examines the life of this pre-

modern emperor of Byzantium.4)

Manuel I I was born in 1391 into the royal house of Paleologoi of

Byzantium and died in 1425. He was one of the last emperors of the

Byzantine Empire which at that time was threatened with invasion

and extinction by the expanding empire of the Ottoman Turks. What

once had been a vast Byzantine empire was now reduced to a small

state almost completely surrounded by the hostile Turks, and it was

obvious that its days were numbered. Manuel’s father, John V

Paleologus was a weak emperor who saw the Turks conquer more

2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4) An excellent resource for introducing the life of Manuel I I Paleologus is the D e

Imperatoribus Romanis: An Online Encyclopedia of Roman Emperors. See Wilhelm

Baum, Manuel I I P a l a i o l o g u s ( 1 3 9 1-1425 A.D.) at [http://www.roman-e m p e r o r s .

org/manual2.htm]. Baum i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Graz in Austria. His

article contains an extensive bibliography on the life and writings of Manuel I I

Paleologus. It should be noted that the family name Paleologus has several variant

spellings.

Page 1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Henry I V of England, Adam of Usk, a lawyer said, How grievous it

was that this great Christian prince would be driven by the Saracens

from the furthest East to the furthest western islands to seek aid

against them. (. . .) O God, what dost thou now, ancient glory of

R o m e ?9 ) Well, in short, Rome and the rest of Western Europe did

nothing and Manuel returned to Constantinople empty handed.

By now the situation had become so serious, and the eventual

outcome so obvious and inevitable that all Manual could do was pray.

It is said that each morning the emperor prayed the following prayer:

O Lord Jesus Christ, let it not come about that the great multitude of

Christian peoples should hear it said that it was during the days of the

Emperor Manuel Palaeologus that the City with all its holy and

venerable monuments of the Faith, was delivered to the Infidel.1 0 )

Manuel’s prayer was answered, for the fall of Byzantium came, not

during his rule, but during the reign of his successors. Following a

paralyzing stroke on October 1, 1422, Manuel appointed his son to

succeed him and three years later he died in Constantinople on July

21, 1425. He was buried in a monastic church but his grave was later

destroyed by the Turks, just like all the other graves of the house of

the Palaiologoi.11)

Fortunately for historians, a number of Manuel’s writings have

been preserved and one of the most well-known is the work Twenty-

six Dialogues with a Persian which is a record of conversations

between Manuel and the Muderris held in Ankara from October to

December 1391. 12) A Muslim born of Christian parents served as the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63

9) Steven Runciman,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Cambridge Uni-

versity Press, 1965), 1.

10) John Julius Norwich, Byzantium: The Decline and Fall (London: Penguin, 1996),

357.

11) Baum, Manuel I IPalaiologos (1391-1425 A.D.), 8.

12) Stephen W. Reinhert, Manuel I I Paleologus and his Muderris, in The Twilight of

sultan’s army and actually participate in the Turkish conquest of a

part of the Byzantine territory. Surrounded by the Ottoman Turks,

Manuel had no choice but to mount an appeal for help in Western

Europe. His father before him and made such an appeal and even

gone so far as to make personal obeisance to Rome.7)

It was Manuel’s hope that somehow a reunion between the church

of the Latin West (Roman Catholic) and the church of Greek East

(Eastern Orthodox) could be brought about. If this could be done, he

reasoned, the united front of a powerful European empire would deter

the Ottoman Turks from any further westward movement. This would

not only save Western Europe from falling to the Turks, but more

importantly save the Byzantine Empire from complete destruction. It

was Manuel’s firm belief that this would avoid any further fighting

and would bring peace and stability to the region. To Manuel the

realization of this proposal would be the most reasonable solution to

what appeared to be an intractable problem.

With this in mind Manuel embarked on a three-year journey to

Western Europe which was a last-ditch attempt to impress upon the

western monarchs that his empire was on the point of falling to the

Infidel. Surely they could see that once Constantinople was taken it

was only a matter of time before the Turks swarmed their way across

into western Europe. They were already in the Balkans so it could not

be long.8) Manuel and his entourage made an impressive sight as they

visited European capitals and they were the talk of the social scene.

They were treated to lavish dinners and luncheons, and given audi-

ences with royalty. Extensive negotiations were carried on with the

Vatican concerning a possible reunion of the Western Church and the

Eastern Church. Following one lavish luncheon hosted by King

2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7) Virginia Clark, Why Angels Fall: A Journey Through Orthodox Europe from

Byzantium to Kosovo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0), 31.

8) Ibid.

Page 1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 Eastern Orthodox Ecumenical Patriarch and a now unused theo-

logical seminary on the island of Heybal Ada in the Sea of Marmara,

both a part of modern Turkey.

Benedict X V I-A Modern Pope

Born in 1927 in the German state of Bavaria, Joseph Ratzinger

was to experience a rapid advancement in both power and prestige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From 1959-1977 he served as a pro-

fessor of theology in the universities of Bonn, Munster, Tubingen,

and Regensburg. He was an advisor at Vatican Council I I from 1962-

1965 where he gained the reputation of being progressive in views.

As a result of the student movement of the 1960s he took a turn to the

right and became a conservative. Following an illustrious academic

career, he was appointed as Archbishop of Munich and Freising in

May of 1977, and was elevated to the position of cardinal in June of

that same year. From 1981-2005 he was Prefect of the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CDF), and thus the second most

powerful man in the Vatican. From 2002-2005 he served as Dean of

the College of Cardinals, and in April of 2005 he was elected pope

following the death of Pope John Paul I I. He took the papal name of

Benedict X V I.

Unlike many popes, Benedict X V I was a world renowned figure

prior to his papal election. He is known throughout Europe as an

astute theologian and is a member of numerous academies of science,

the recipient of no less than seven honorary doctorates, and the author

of fifty books including revisions and translations. As the Prefect of

the CDF-the successor to the Holy Office and the Inquisition-h e

became known for his conservative views, and a number of his deci-

sions were both controversial and unpopular.15) As he ascended to the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65

interpreter. Apparently Manuel took notes of these conversations and

put them into manuscript form sometime between 1392 and 1394.

The final edited version appeared in 1399. Scholars are divided, how-

ever, concerning just how much of these dialogues are fact and how

much is fiction. What is known is that they were written against a

background of strong anti-Muslim feelings due to Manuel’s personal

experiences as well as his serving as the emperor of a rapidly declin-

ing empire. Islam was perceived as the Infidel from a Christian per-

spective, and as the enemy from Byzantium’s perspective. Manuel’s

viewpoint reflected the strong anti-Muslim polemic of the times,

which was perhaps understandable, given the fact that the Turks

would soon bring the glory of Byzantium to an end and convert the

great church of Haghia Sophia into a mosque.13)

Whatever else may be said, Manuel’s attitude toward Islam was

thoroughly pre-modern.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 were a

time when there really was a clash of civilizations with the Latin

Roman Catholic West, the Greek Orthodox East, and the Asian

Muslim Turks fighting each other for control of the Middle East,

much of Eastern Europe, and what is now the modern Turkish

Republic. This was neither a time of religious tolerance nor a time

when religious affiliation could be divorced from nationalistic ambi-

tions. The Byzantine Empire, with its capital Constantinople, some-

times referred to as the second Rome, fell to the Turks and was

renamed Istanbul. 1 4 ) Eventually all that was to remain of the

Byzantine Empire in its former capital was a small enclave housing

2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Byzantium: Aspects of Cultural and Religious History in the Late Byzantine Empir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39-51.

13) In 1932, under the direction of Mustafa Kemal Ataturk the first president of the

Turkish Republic, Haghia Sophia was secularized and turned into a museum.

Today both the features of the church and the mosque are preserved.

14) Moscow was known as the Third Rome.

Page 1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articularly moved by the liturgy of the Church and he wrote that it

was like one’s home and was an inexhaustible reality that has accom-

panied him throughout his entire life.18) This devotion to the Church

stayed with him and was strengthened during his years of theological

study in Munich. He cites the example of a professor of theology who

strongly opposed the doctrine of Mary’s bodily assumption into

heaven, yet when the doctrine became part of the official teaching of

the Church, this professor was able to say that the Church is wiser

than I and that I must trust her more than my own erudition.19) It was

during this time that Ratzinger came to understand tradition as more

than received doctrines and texts, but also as continual guidance by

the Holy Spirit into new revelation given to the Church, a kind of

disclosure of that which was previously unknown.20) Furthermore, the

biblicism of Protestantism is rejected as it has scarcely anything to do

with the Catholic understanding, according to which the Bible must

be read within the Church and her faith. 2 1 ) Ratzinger has never

doubted his devotion to the Roman Catholic Church; he was and is, in

every sense of the word, a loyal son of the Church. Indeed, H. J.

Fischer asserts that Ratzinger seemed to enjoy perfect harmony with

regard to everything Catholic.22)

Because of this, Ratzinger took as his episcopal motto the words

C o-worker of the Truth from 3 John 8. He writes concerning this

choice, And, because in today’s work the theme of truth has all but

disappeared, because truth appears to be too great for man and yet

everything falls apart if there is no truth, for these reasons this motto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67

18) Joseph Cardinal Ratzinger, Milestones: Memoirs 1927-1977, trans. Erasmo Leiva-

Merikakis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98), 20.

19) Ibid., 59.

20) Ibid.

21) Ratzinger with Messori, The Ratzinger Report, 146.

22) Fischer, Pope Benedict X V I: A Personal Portrait, 30.

throne of St. Peter, Ratzinger brought with him a lifetime of theo-

logical opinion that left little doubt as to where he stands on the

issues of the day.16)

While some have asserted that Benedict is anti-modern, a reading

of his autobiography and public interviews reveals that he strongly

believes in two of the most significant characteristics of modernity.17)

The first of these characteristics is a belief in the metanarrative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s the source of divine truth. This is signifi-

cant on two counts; first, the Roman Catholic Church is the western

Latin Church and thus identified with the West, and second, truth is

absolute and universal and can be known.

Joseph Ratzinger was raised in a deeply Catholic family in a part

of Germany that was equally deeply Catholic. As a child he was

2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15) Veteran Vatican journalist H. J. Fischer lists twenty-two such statements issued by

then Cardinal Ratzinger during his tenure at the CDF. See Heinz-Joachim Fischer,

Pope Benedict X V I: A Personal Portrait, trans. Brian McNeil(New York: Cros-

sroad Publishing Co., 2005), 46-47. Most observers, as well as Benedict himself,

cite the radical student movements of 1968 as the turning point in his views.

16) See Joseph Cardinal Ratzinger with Vittorio Messori, The Ratzinger Report: An

Exclusive Interview on the State of the Church, trans. Salvator Attanasio &

Graham Harrison(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5) and Aidan Nichols, T h e

Thought of Pope Benedict X V I: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Joseph

Ratzinger(London: Burns & Oates, 2005). For a thorough, but somewhat critical

examination of Benedict X V I and his thought, see John L. Allen, Jr., C a r d i n a l

Ratzinger: The Vatican’s Enforcer of the Faith(New York and London: Continu-

um, 2000). This book was revised and updated and reissued as Pope Benedict X V I

(New York and London: Continuum, 2005). I will refer to the pope as Ratzinger

prior to his election, and as Benedict following his papal election.

17) See David Gibson, The Rule of Benedict: Pope Benedict X V I and His Battle with

the Modern World(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6). While Gibson

asserts that Benedict XVI opposed the modern world, I would say that he opposed

certain tendencies and movements within modernity which he saw a threat to the

truth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s he understands it.

Page 1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specially while serving on the faculty of the University of Regens-

burg. He writes of those years, We soon had once again the exchange

of ideas so desirable at a university and so important for me and my

work. There was no lack of controversies, but we had the funda-

mental respect for one another that is so important for fruitful work.27)

While he had a reputation as a strict enforcer of doctrinal orthodoxy

within the Church, he was known as a scholar with both an open

mind and a willingness to listen to opposing arguments outside the

Church. Not only were a number of Protestant theologians among his

personal friends, but Ratzinger was also known for his openness to

dialogue with those of other religions. His views on this latter point

are well worth quoting.

I need to be willing to allow my narrow understanding of truth to

be broken down. I shall learn my own truth better if I understand the

other persons and allow myself to be moved along the road to the

God who is ever greater, certain that I never hold the whole truth

about God in my own hands but am always a learner, on pilgrimage

toward it, on a path that has no end.

Second, if this is the case, if I must always look for what is posi-

tive in the other’s beliefs-and in this way he becomes a help to me in

searching for the truth-the critical element can and may not be

missing; in fact it is needed. (. . .) We may find it relatively easy to

criticize the religion of others, but we must be ready to accept criti-

cism of ourselves and of our own religion.28)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69

27) Ratzinger, Milestones, 141.

28) Joseph Cardinal Ratzinger, Many Religions- -One Covenant: Israel, the Church,

and the World, trans. Graham Harrison(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99), 110,

111.

also seemed timely in the good sense of the word.23) One finds that a

devotion to truth (as understood by the Roman Catholic Church) is a

common theme in Ratzinger’s writings and statements during his

years as Prefect of the CDF. In his view the greatest enemy of that

truth is relativism, and he sought to fight against it wherever, and in

whomever, he thought it was present. 24) Clearly Benedict believes in a

version of the grand metanarrative of the West, in this case the very

western Roman Catholic Church.25)

Does this mean, therefore, that Benedict X V I is really premodern

in his views? Is this not another version of the theologia perennis of

the Middle Ages? At first glance this would seem to be the case, until

we remember that he is a firm believer in two significant character-

istics of modernity. The second of these characteristics is what the

philosopher Jurgen Habermas refers to as rational and enlightened

consensus within the community.26) This kind of rational consensus of

discourse Ratzinger found during his years as a professor of theology,

2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23) Ratzinger, Milestones, 153.

24) See John L. Allen, Jr., The Rise of Benedict X V I: The Inside Story of How the Pope

was Elected and Where He Will Take the Catholic Church (New York: Doubleday,

2005), 165-98. This chapter of Allen’s book is entitled Battling a ‘Dictatorship of

Relativism’.

25) Ibid., 184, where Allen states the following concerning Benedict X V I’s views on

human sexuality: These truths, he believes, are not just ‘Catholic,’ but objectively

valid for all times and all cultures.

26) Jürgen Habermas, “Wahreitstheorien,” Wirklichkeit und Reflexion: Walter Schulz

Zum 60. Geburstag(Pfulligen: Neske, 1973, 255-256; cited and translated by

Alessandro Ferrara in A Critique of Habermas’s Consensus Theory of Truth,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Vol. 3, No. 1 (1987), 39-67. See also Adams,

Doing Theology in Postmodern Times, 43-60. On January 19, 2004 Habermas and

Ratzinger met for the first time and engaged in just such a rational and enlightened

dialogue; see Jurgen Habermas and Joseph Ratzinger, The Dialectics of Secula-

rization: On Reason and Religion, ed. Florian Schuller, tr. Brian McNeil(San

Francisco: Ignatius Press, 2006).

Page 1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however, that one gives up one’s understanding of truth. Indeed, one

may vigorously argue for the truth, but within the parameters of

rational discourse. Universities are, obviously, where this kind of

rational discourse can take place unimpeded, for it assumed that all of

the participants in such a discourse are operating from the same

reasoned and rational presuppositions. The university is where the

various truth claims of modern western society can be presented,

argued, and defended.

It was clearly with this modern post-Enlightenment worldview in

mind, that Pope Benedict X V I delivered his lecture at the University

of Regensburg on September 12, 2006. Indeed the first lengthy para-

graph of the lecture confirms this when in reference to his years of

university teaching he mentions that despite our specializations which

at times make it difficult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we made

up a whole, working in everything on the basis of a single rationality

with its various aspects and sharing responsibility for the right use of

reason-this reality became a lived experience.30) The main argument

of Benedict’s lecture was that violence between the religions can best

be avoided by bringing reason and faith together. His lecture was a

densely reasoned argument in favor of including theology in the uni-

versity curriculum as an inquiry into the rationality of faith for only

thus do we become capable of that genuine dialogue of cultures and

religions so urgently needed today.31)

As a background to his argument, Benedict cited the words of

Emperor Manuel I I Paleologus in the seventh of his dialogues with

the Muderris, concerning the violence of Islam. Benedict was careful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71

30) Pope Benedict X V I, Faith, Reason and the University: Memories and Reflections,

lecture delivered at the University of Regensburg, Tuesday, 12 September 2006.

1. This lecture may be accessed at: [www.vatican.va/holy_father/benedict_xvi/

speeches/2006/September/documents/hf_...].

31) Ibid., 6.

Remarkably, even Benedict’s strongest critics are all agreed con-

cerning his ability to listen to opposing points of view, amend his

own positions in response to superior and well reasoned arguments,

and engage in actions of warmth and generosity toward those with

whom he is in disagreement.

Three such examples serve to illustrate this. During the funeral

mass for Pope John Paul I I, he personally gave communion to Brother

Roger of the Taize Community even though Brother Roger was a

Protestant and member of the Reformed Church. Following the

murder of Brother Roger by a mentally deranged woman, Benedict

X V I gave special permission for communion to be given to all,

Catholics and Protestants alike, who were present at Brother Roger’s

funeral which was held in the chapel of the Taize Community.

Finally, one of his first acts as pope was to invite his former colleague

and now theological opponent Hans Küng to the Vatican for a day of

conversation and reconciliation.

What are we to make of these two seemingly contradictory sides of

Benedict X V I-a commitment to universal truth on the one hand, and

a willingness to be in dialogue with others who hold to a different

view of the truth on the other hand? Both are, I believe, character-

istics of modernity. The former is that of a western metanarrative that

is universally true; the latter is that of a post-Enlightenment com-

mitment to reason and rational discourse, especially within the

framework of an academic context. This can perhaps be seen in the

title of one of his books, Truth and Tolerance: Christian Belief and

World Religions. 29) Christians believe that they have the truth, but at

the same time, Christians are tolerant of the world religions which

have a different view of the truth. This tolerance does not mean,

2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29) Joseph Cardinal Ratzinger, Truth and Tolerance: Christian Belief and World

Religions, trans. Henry Taylor(San Francisco: Ignatius Press, 2004).

Page 1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e Islamic Response-A Postmodern Difference

What made this lecture different, of course, was that Professor

Ratzinger was now Pope Benedict X V I. He was not only head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but he was also a head of state, the Holy See

or the Vatican. His visit to Germany was not only a pastoral visit, but

perhaps more importantly, a state visit, and the media were out in

force to catch every word spoken by this pope. It was still unclear as

to the directions his papacy would go. Would Benedict be the harsh

conservative critic as shown during his years as Prefect of the CDF,

or would he surprise everyone by showing a progressive side as

evidenced during his years as an advisor at Vatican Council I I? Or

perhaps he would be a scholarly, yet mellow and reconciling pope, as

his actions toward Brother Roger of the Taize Community and Hans

Kung would seem to suggest?

As Benedict opened his lecture with the words, It is a moving

experience for me to be back again in the university and to be able

once again to give a lecture at this podium, he launched into a care-

fully reasoned critique of the de-hellenization of western culture

beginning with the scholastic thought of the Middle Ages, moving on

through the Reformation, and finally culminating in modern theology,

both Protestant and Catholic. The lecture was clearly, to all who gave

it a careful reading, not a critique of Islam, but rather, a critique of

contemporary western European culture for its abandonment of

reason in its relationship with other religions and cultures. He

concluded his lecture with these words:

The West has long been endangered by this aversion to the ques-

tions which underlie its rationality, and can only suffer great harm

thereby. The courage to engage the whole breadth of reason, and not

the denial of its grandeur-this is the programme with which a theo-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73

to provide a context for the argument. He cited the Qur’an, surah 2:

246 which reads, There is no compulsion in religion, and he clearly

stated that the Emperor’s brusqueness was a brusqueness that we find

unacceptable.32) He went on to carefully quote Theodore Khoury, the

editor of the Conversations with a Persian, concerning the Muslim

view of reason. In short, he took great pains to point out that the main

issue in his lecture was the role of reason in Greek thought and how

this differed from Islamic thought. It was Benedict’s view that

because of Greek thought, western civilization could, through the

responsible use of reason, avoid religious violence. At no point in his

lecture did Benedict state that he was in agreement with Manuel I I

Paleologus’s views concerning violence and Islam. This was a lecture

delivered to a university audience in Germany, and the pope just

assumed that everyone present was operating according to the rules of

rational discourse. On that fateful day in September 2006 Benedict

X V I was a thoroughly modern pope speaking to a thoroughly modern

audience of western Europeans who shared his basic assumptions

concerning the nature of truth and the nature of tolerance. Indeed, he

was among academic friends at the very same university where he

spent what were perhaps some of the happiest years of his life.33)

2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32) Ibid., 2.

33) In his Milestones, Ratzinger writes, The Regensburg years, I must say, were a time

of fruitful theological work for me (149). Also, The feeling of acquiring a theo-

logical vision that was ever more clearly my own was the most wonderful experi-

ence of the Regensburg years. I had been able to build a small house with a garden

that became a real home for my sister and me and to which my brother always

liked to return. We were once again at home together. For my brother, too, these

were blessed years(150). And again, I knew I was called to a scholar’s life and

never considered anything else(151).

Page 1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mage by satellite, the Muslim world was largely convinced that Pope

Benedict XVI had slandered the prophet Mohammed and unfairly

criticized the religion of Islam. Very few people-in either the

Muslim world or the western world-bothered to read the full text of

the pope’s speech, even though it was quickly posted on the Vatican’s

website. The pope, meanwhile, could not understand what had

happened, and like the good scholar that he was, protested that he had

been misunder-stood and was sorry for any misunderstandings that

his use of this quote may have caused. This was, of course, far from

the full apology that many Muslims felt was required.

This incident serves to underscore the difference between the print

media, which invites understanding and reflection and tends to focus

on reason, and the digital media, which invites more of an emotional

response and tends to focus on immediate action. The print media is

more a characteristic of modernity; the digital media is more a

characteristic of postmodernity. The former seeks analysis and

critical reflection and takes a certain amount of time. The latter seeks

an immediate response and comes in short bits of information that

make analysis impossible. In the postmodern world of globalized

media, the truth becomes a matter of perception even as the period of

time given to make that perception becomes ever shorter.

A second, and perhaps even more profound difference, is that the

relativism against with Cardinal Ratzinger, now Pope Benedict X V I,

has struggled for most of his career, is in fact very much a post-

modern reality. The western metanarrative of absolute truth and the

use of reason as mediated by Greek thought is no longer self-evident

to much, if not most, of the world’s population. The pope’s speech

seemed to imply that western civilization was more reasonable, and

thus less prone to violence, than were other civilizations such as

Islamic civilization. In response to this seeming superiority of the

West, the Turkish Imam Ali Riza Demircan replied: How can he (...)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75

logy grounded in Biblical faith enters into the debates of our time.

Not to act reasonably, not to act with logos, is contrary to the nature

of God, said Manuel II, according to his understanding of God, in

response to his Persian interlocutor. It is to this great logos, to this

breadth of reason, that we invite our partners in the dialogue of cul-

tures. To rediscover it constantly is the great task of the university.34)

Benedict had, he believed, issued a clarion call for reason in a

world, which it seemed, was all too prone to emotional outbursts of

violence.

Such an appeal would have undoubtedly been acceptable in the

world of modernity, but in the postmodern world in which we now

live, there were two factors that made a difference-the role of the

media and the reality of relativism coupled with a rejection of the

western metanarrative of truth. Concerning the former, Patrick

Sabatier suggested that the clashes between the West and Islam are to

some extent a toxic byproduct of a globalized media system. Instant

information and misinformation, through satellite TV and the inter-

net, tend to obscure complex issues, feed on widespread ignorance on

both sides and pour oil on long-simmering fires of historical resent-

ment, economic frustration, and political conflict.35)

The media were quick to pick up on the pope’s quote from Manuel

I I Paleologus which was highly critical of Mohammed and Islam.

“The pope quoted (. . .)” very quickly became “The pope said (. . .) ”

which in turn was transformed into The pope believes (...)” This all

took place within the space of only a few minutes, and within the

time it takes to click a mouse, make a cell phone call, and transmit an

2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34) Pope Benedict X V I, Faith, Reason and the University: Memories and Reflections,

6.

35) Patrick Sabatier, A clash of civilization in Europe? Korea Herald(October 13,

2006), 18.

Page 1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hought of other civilizations and cultures. The digitalized media that

so quickly delegitimized Pope Benedict’s University of Regensberg

lecture, is the same media that is delegitimizing traditional Islamic

dress codes for women and Confucian respect for the elders.

Ironically it is this same media that is also responsible in large part

for the globalization of terrorist movements. The media, particularly

in its digitalized forms, has truly created an intellectual and religious

marketplace.38) This, when coupled with relativistic pluralism, makes

it almost impossible to speak of the truth in an absolute sense.

As pointed out in my original 1995 article, this postmodern turn in

intellectual thinking provides Christians with a unique opportunity to

speak the truth within this intellectual marketplace of relativistic

pluralism. However, it also provides the opportunity for other reli-

gions to also speak the truth and directly challenge the Christian

version (or versions) of truth. Herein lies an almost intractable pro-

blem about which we should all be concerned.

Why Postmodernism Matters

The immediate reactions to Pope Benedict’s lecture revealed a

deep fracture point between the cultures of post-Renaissance Europe

and the Islamic world. While the Islamic world reacted angrily to the

pope’s lecture, many Europeans were equally angry at what they

perceived to be the failure of Muslims living in Europe to adopt con-

temporary European values concerning freedom of expression, the

social emancipation of women, and the renunciation of terrorist

movements. Much of the anger expressed on both sides was largely

emotional and based upon media reports, rather than upon a carefully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77

38) See Brenda E. Brasher, Give Me That Online Religion (San Francisco: Jossey-

Bass, 2001).

accuse Muslims of believing in the sword when World War I, World

War I I, Iraq and Afghanistan were all started by Christian countries?36)

While this may be a somewhat simplistic view of things, especially in

terms of the first war in Iraq and the ongoing war in Afghanistan, the

fact remains that the West’s record concerning violence in the

modern world is not an enviable one.3 7 ) That Muslims, as well as

others such as the Chinese, are now standing up to the West and in

effect saying, We too have our narratives and self-definitions of truth

is only half of the equation. The other half is that they are also saying,

Our narratives and self-definitions of truth are as true as yours, and

perhaps even truer than yours. This is the reality of postmodern

relativism.

The world today is different from the world of twenty or even ten

years ago. It is neither pre-modern, as in the days of Manuel I I Paleo-

logus, nor is it modern, as during the career of Professor, then Bishop,

and finally Cardinal Joseph Ratzinger. When Ratzinger, now Pope

Benedict X V I, spoke of absolute truth subsisting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asserted that Greek thought enabled western

civilization to be more reasonable than other civilizations such as

Islamic civilization, he found that the intellectual ground for making

such assertions had shifted out from under him.

Postmodern thinkers are quick to point out this shift insofar as it

applies to western thought, and particularly as it apples to western

religious thought. What is often overlooked is that this postmodern

turn also applies to Islamic thought, Confucian thought, and the

2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36) Quoted by Mark Mardell, Europe diary: Turkish tensions, BBC News, 30

November 2006.[http://newsvote.bbc.co.uk/mpapps.pagetools/print/news.bbc.

co.uk/2/hi/Europe/6195574.stm]

37) For a profound—and disturbinganalysis of the western involvement in modern

violence see Zygmunt Bauman, Modernity and the Holocaust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9, 1991).

Page 1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wars and to the victor belonged the spoils. In modern times the West

dominated through colonial power, military might, and economic

strength. Western values were held to be norm. But now in the age of

postmodernity religious wars such as the Crusades and the might of

the expanding Ottoman Empire are no longer considered to be

realistic options. At the same time the metanarratives of the West

have been challenged and even delegitimated by the metanarratives

of the Other. What is best is up for open discussion as different con-

cepts of truth and different versions of truth jostle against one another

like individuals in a large crowd.

There are, however, two difficulties which arise from this post-

modern pluralism and relativism. The first is that the freedom of

expression which forms an essential element of post-E n l i g h t e n m e n t

thought is under attack. Dramatic examples such as The Satanic

Verses, the Danish cartoons, and the murder of the Dutch film

director are well-known, but what is not so well-known are the

attempts by various religious groups to influence academic appoint-

ments in secular universities, to silence critics of conservative reli-

gious views, and even to instill fear through the use of Internet blog-

ging and death threats. Recent cases have been documented involving

not only Muslims, but also Jews, Mormons, Roman Catholics, and

Southern Baptists.4 0 ) In each of these cases, religious groups have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79

40) See Spotlight on Teaching, Religious Studies News, Vol. 21, No. 4 (October 2006),

special insert, i-x i i, and in the same issue of RSN, Focus on Academic Freedom,

25-32. These two series of articles document a number of cases where academic

freedom and the free expression of ideas have been stifled by religious groups at

American universities. Groups of legislators representing a particular religious

denomination have threatened to block funding for university religion departments

unless critical views are suppressed. Another religious denomination has formed a

lobbying group which puts pressure on university boards of directors to terminate

liberal faculty members. In another instance members of a religious group have

taken to the Internet to criticize and actually threaten faculty members who have

reasoned consideration of the arguments presented. We find,

therefore, that postmodernism presents us with the challenge of living

in an increasingly digital age where opinions are shaped by the

media.

The media have, however, brought into the open for discussion in

the public square the deep fracture point between post-Enlightenment

Europe and much of the Islamic world. This has become obvious in

such controversies as Salmon Rushdie’s book The Satanic Verses, the

affair of the cartoons published in Danish newspapers, the wearing of

head scarves by Muslim school girls in France, and the murder of a

Dutch film maker whose film criticized Islam’s treatment of women.

In the West one of the most basic human rights is the freedom of

expression, especially in the artistic and intellectual spheres. This

includes the right to criticize and even ridicule religion and religious

personalities. Coupled with this is a strong belief in the secular state

where there is complete freedom of religion as well as freedom from

religion. Overt expressions of religious belief and practice in the

public sphere (such as education) are viewed with suspicion and

strongly discouraged. In much of the Islamic world the exact opposite

holds true. Freedom of expression does not include the right to

criticize or ridicule religion; such acts can result in imprisonment or

even death. The idea of the secular state is foreign to Islamic belief

and practice, for one cannot separate sugar from sweetness.39)

When post-Enlightenment western values and Islamic values are

found in the same place at the same time a certain degree of conflict

is virtually inevitable. In pre-modern times, the Roman Catholic West

and the Islamic East fought against each other in a series of bloody

2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39) Cited by Sadayandy Batumalai, A Malaysian Theology of Muhibbah: A Theology

for A Christian Witnessing in Malaysia (Kuala Lumpur: S. Batumalai, 1990), 73.

The comparison between sugar and sweetness is taken from a well-known Islamic

proverb in Malaysia.

Page 1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worked out manageable living arrangements with their majority

Muslim neighbors. While the establishment of modern secular states

in the region has enhanced the position of the Christian minorities,

the tradition of coexistence goes back much earlier. One of the prized

possessions of the Monastery of St. Catherine in the Sinai of Egypt, is

the copy of a document with the hand print of Mohammed guarantee-

ing the security of a Christian presence at the monastery.42)

Toleration of religious differences is fast disappearing with the

advent of postmodernity. Islamist extremists have torched churches,

murdered priests, attacked Christian schools, and destroyed busines-

ses owned by Christians.4 3 ) In Europe groups of youths have made

similar attacks upon mosques, damaged businesses owned by Musl-

ims, and harassed Muslim women. Extremist calls have even been

made for the expulsion of Muslims from Western Europe. Clearly

there is in Europe a reassessment of those who are immi-grants yet at

the same time reject many of the post-Enlightenment cultural values

of Europe today.44)

When these religious differences are mixed with political and

social inequalities-both real and imagined-the result is all too often

expressed in acts of violence against those of the other religion. One

of the results of this heightened postmodern tension is that nearly

everywhere in Muslim lands, Christian populations are in decline.4 5 )

In Palestine, the birthplace of Christianity, the Christian population is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81

42) Athanasios Paliouras, The Monastery of St. Catherine on Mount Sinai (Sinai: St.

Catherine’s Monastery, 1985), 12, 16, 149. St. Catherine’s Monastery is probably

the only Christian monastery in the world which has a mosque adjacent to its

chapel within the monastery walls.

43) This has resulted in an alarming exodus of Christians from the Middle East. See

Don Belt, The Forgotten Faithful: Arab Christians,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251, No. 6 (June 2009), 78-97.

44) Dan Bilefsky & Ian Fisher, Across Europe, Worries on Islam Spread to Center,

New York Times, October 11, 2006.

attempted not only to be certain that their own views are heard in the

public square, but they have attempted to silence other views from

being expressed which they consider to be heretical, liberal, or anti-

S e m i t i c .4 1 ) A climate of fear is slowly but surely settling in among

members of academia and the artistic community as various religious

groups assert themselves in an increasingly forceful and intolerant

manner. So-called political correctness is increasingly stifling intel-

lectual inquiry and debate. In its rejection of the western metanar-

ratives, postmodernism has unleashed forces that threaten to undo the

positive gains of the Enlightenment such as academic freedom and

artistic freedom of expression. Those of us in the academic and artis-

tic communities need to be vigilant in this era of postmodernity lest

we lose those values which we so deeply cherish.

A second difficulty arising from postmodern pluralism and relativ-

ism, is the erosion of the tolerance of differing religious traditions.

This is especially true in the Middle East where Judaism, Christianity,

and Islam have co-existed for centuries. Most of the Islamic countries

of the Middle East have sizable Christian popula-tions which have

2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resented views opposing this religious group’s political actions. In still another

instance, an academic group doing critical textual studies on a religious text must

do so in secret in the face credible death threats. Many faculty members of

American universities are now practicing self censorship to save their jobs,

maintain funding for their departments, and in some cases, to quite literally save

their lives.

41) It must be noted that those carrying out these actions do not necessarily represent

all, or even the majority, of those affiliated with these religious groups. History

does bear out, however, that churches and religious organizations are characterized

by a strong and persistent authoritarian streak which has sought to suppress

dissent. It was C. S. Lewis who said that Of all bad men religious bad men are the

worst. Of all created beings the wickedest is the one who originally stood in the

immediate presence of God. See C. S. Lewis, Reflections on the Psalms ( N e w

York: Harcourt, Brace, 1958), 32.

Page 1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question posed by C. S. Song takes on increasing significance: Is it

any wonder that theology has once again become serious business, a

business conducted not only in the secluded community of Christians

but in the wide world, where people struggle to live with meaning

and hope?49)

Postmodernity is, of course, a temporary condition that will be

followed by that which is as yet unknown. In a similar manner,

postmodernism is a movement in contemporary thought and culture

that will eventually be supplanted by other such movements. For

those of us living in 2010, however, postmodernity and postmod-

ernism are realities which in part define the world in which we live.

In 2009 and 2010 three actions in Europe serve to underscore this

fact-the banning of the construction of minarets in Switzerland, the

recommendation of a parliamentary committee that the wearing of

full veils be banned in France, and the comments by former Archbi-

shop of Canterbury Lord Carey that the sheer numbers of migrants

from within Europe and elsewhere (. . .) threaten the very ethos or

DNA of our nation. 5 0 ) Three of the most traditionally tolerant

countries in Europe either have or are considering placing restrictions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83

49) C. S. Song, The Believing Heart: An Invitation to Story Theology ( M i n n e a p o l i s :

Fortress Press, 1999), 30.

50) Former Anglican leader sparks row with comments on migrants, P r e s b y t e r i a n

Outlook, Vol. 192, No. 4 (Feb. 2010), 7-8. See also Banning the ‘Burqa’ —

France’s Quest to Maintain its Secular Identity, Spiegel Online, (1/27/2010).

[ h t t p : / / w w w . s p i e g e l . d e / i n t e r n a t i o n a l / E u r o p e / 0 , 1 5 1 8 , d r u c k-6 7 4 3 9 0 , 0 0 . h t m l ] ,

accessed 1/28/2010. The tiles of other recent articles at the same URL serve to

give one a sense of the debate as it is being carried on in Europe: We Are Not

Really Germans: New Study Looks at Challenges Faced by Germany’s Muslims

(1/26/2010), After Attack on Danish Cartoonist: The West Is Choked by Fear

(1/4/2010), Fears of Eurabia: How Much Allah Can the Old Continent Bear?

(12/11/2009), Muslim Reactions to Swiss Vote: Turkey’s Erdogan Says Minaret

Ban is Sign of Fascism (12/1/2009), and How the Right Is Wrong: The Bizarre

in such rapid decline that the steady flight of the tiny Palestinian

Christian minority (. . .) could lead, some predict, to the faith being

vir-tually extinct in its birthplace within several generations-a trend

mirrored in many dwindling pockets of Christianity across the

Islamic world.46) Pope Benedict X V I is pushing for reciprocity on the

part of Muslim governments. If Muslims wish to be accepted in

Europe, then Christians must also be accepted in the Islamic world.

He asserts that Christians and Muslims must work together to turn

back the wave of cruel fanaticism that endangers the lives of so many

people and hinders progress toward world peace.4 7 ) According to

Vatican correspondent John Allen, Through his statements and those

of his proxies, Benedict clearly hopes to stimulate Islamic leaders to

express their faith effectively in a pluralistic world. The big question

is whether it will be received that way, or whether it simply rein-

forces the conviction of jihadists about eternal struggle with the

Christian West.48)

The rise of postmodernism has unleashed religious extremists

giving them both political power and an international voice which

instills fear in their opponents. Those of us in the religious commu-

nity, and especially those of us who are Christians, cannot help but be

worried concerning these developments. If we believe that our faith is

summed up in the commandments to love God and to love our

neighbor as ourselves, then the religious violence which is plaguing

our world today flies in the face of everything that we believe. The

2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45) Christian population falls in Holy Land, Korea Herald, November 13, 2006.

46) Ibid.

47) John L. Allen, Jr., A Challenge, Not a Crusade, New York Times, September 19,

2006.

48) Ibid. See also Edward McGlynn Gaffney, Jr. Benedict’s Blunder: Ground rules for

Muslim-Christian conversation, Christian Century, Vol. 123, No. 22 (October 31,

2006), 24-26.

Page 1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To Korea’s east-across the Pacific and the Atlantic Oceans-lies the

post-Enlightenment world of North America and Europe. To Korea’s

w e s t-across the harsh deserts and high mountain ranges of central

A s i a-lies the Islamic world of western Asia and the Middle East.

Historically, via the Silk Road and ancient sea lanes, Korea had ties

with the Islamic world, and more recently via the sea routes of the

Pacific and Southeast Asia, relations with western countries have

been established. Today Korea has diplomatic and trade relations

with both worlds and Koreans have generally been free to travel in

both directions.5 2 ) Historically Korea has not been associated with

western colonialism or imperialism and therefore the Islamic world

does not see Korea as a threat to its cultural and social values. Geo-

graphy is an important factor in theology that is often overlooked.53)

The fact that Christianity arose at the confluence of Europe, Asia, and

Africa has been of crucial significance in its development. Surely

geography will continue to play a significant role in the future shap-

ing of theological thought.

Equally significant is that those countries shaped by the Confucian

worldview-China, Korea, Japan, and Vietnam-occupy this creative

geographical space. While Confucianism has been subject to intense

criticism due to its inherent conservatism, tendency toward total-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85

52) Unfortunately this has changed in recent years due to Korea’s military alignments

with U.S. foreign policy toward the Islamic world. The result has been the tragic

deaths of Koreans in Iraq, Afghanistan, and Yemen. In spite of these exceptions,

Koreans are generally welcome in Islamic countries including Turkey, Syria, and

Iran.

53) Two examples serve to illustrate the importance of geography in the theological

enterprise. The first is the strategic position of ancient Turkey and the early church

councils in defining of Christological doctrine. The second is the isolation of North

America due to the Pacific and Atlantic Oceans and the often insular positions

taken by American theologians concerning global affairs.

upon Muslims within their borders.

Intolerance appears to be spreading as postmodernity brings out

the fear, mistrust, and outright hatred of the Other which lurks within

humankind. The Enlightenment tradition of reasoned consensus and

toleration is being eroded so that the Christian West is becoming a

mirror image of the Islamic East which it so fears. Perhaps this is the

underside side of postmodernity and postmodernism-the intellectual

marketplace of intolerance, hatred, and fear.

As Christians, and as theologians, the values which we cherish and

the tenants of the faith which we believe must be defended and

practiced with integrity, tolerance, and understanding. Song is quite

correct when he asserts that theology is serious business. In 1995 it

was true that postmodernism gave Christians another chance to tell

the truth. In 2010 we still have that chance, only now it has become

an imperative. It may well be that Christians in Korea-as heirs to the

Confucian and Neo-Confucian worldview-are in a unique position

to serve as mediators between the post-Enlightenment West and the

Islamic East.51) This certainly provides a creative space in which to do

theology in these troubling times.

Doing Theology in These Troubling Times

Christians in Korea are in a unique position to do theology in these

troubling times due to the fact that quite literally Korea occupies a

creative space midway between the two great power blocs of

p o s t m o d e r n i t y-the post-Enlightenment West and the Islamic East.

2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Logic Behind the Swiss Minaret Ban (12/3/2009).

51) See Daniel J. Adams, Between Heaven and Earth: Living Faithfully in an

Unfaithful Age (Jeonju: Hanil University Press, 2009), 286-328, Chapter 13 The

Confucian Worldview: A Third Way Between Democracy and Extremism.

Page 1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when the Catholics came to Korea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they

were ruthlessly persecuted. Even in the midst of this intolerance there

were those who continued to uphold the positive values of the

Confucian tradition.

Perhaps the most notable was the philosopher Yi T’oegye who

championed the practice of free inquiry among his students and

focused on the cultivation of the human person. His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 quickly became a classic and when all was said and

done his tolerance and faithfulness to the best in Confucianism

eventually won the day.57)

While the post-Enlightenment West exhibits a triumphalism that

sometimes borders on arrogance and the Islamic East often presents a

face of intolerance that borders on fanatical hatred, the Confucian

world (not to be confused with the communist political systems of

several Confucian countries) is inspired by a dynamic conception of

the transformative power of self-cultivation, looking outward and

upward from self and family through the universal state and even to

the universe itself. 58) Surely this is a world view that merits consider-

ation by Christian theologians.

It is an established fact that the geographical center of Christianity

has moved from the West to the so-called Global South which

includes Africa and Asia. Within Asia there can be no doubt that

Adams,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287

sity and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and Wm. Theodore de Bary & JaHyun

Kim Haboush, eds., The Rise of Neo-Confucianism in Kore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5) for accounts of how the Confucian tradition was

transformed as it moved from China into Korea. See also James B. Palais,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ongwan and the Late Choson

Dynasty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6).

57) See Michael C. Kalton, ed./tr., To Become a Sage: The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 by Yi T’oegy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58) Tu Wei-ming, Centrality and Commonality: An Essay on Confucian Religiousness

(Albany: SUNY Press, 1988), 115-116.

itarian political structures, overt sexism and repression of women,

and in its Neo-Confucian forms a rigidity that often resists change,

the fact remains that it is one of the oldest continuing social systems

in the world.5 4 ) A full quarter of the world’s population is living in

Confucian societies. The values espoused by Confucianism include

the cultivation of the human person, filial piety, social harmony and

order, the rectification of names, and the doctrine of the mean with its

stress upon seeking the middle way between extremes.55) Two unique

elements in Confucianism which have special significance for

theology are the essentially secular nature of the Confucian world-

view and Confucianism’s ability to make room for various religious

traditions such as Buddhism, Taoism, Islam, and even Christianity.

Confucianism at its best practices a tolerance toward religion that is

most remarkable. Of all the Confucian societies of East Asia modern

Korea-the Republic of Korea-exemplifies this tolerance more than

any other nation in the region.

This was not always the case, however, as an examination of the

Neo-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will attest.56) Shamanism was

looked upon with distain and Buddhism was totally suppressed, and

2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54) See Wm. Theodore de Bary, The Trouble with Confucianism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1).

55) For excerpts from the Analects of Confucius as well as comments upon the devel-

opment of Confucianism as a philosophy see Wing-tsit Chan, trans. & compiler,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3).

An excellent summary of Neo-Confucian thought can be found in Reflections on

Things at Hand: The Neo-Confucian Anthology Compiled by Chu Hsi and Liu

T s u-Ch’ien, trans. with notes by Wing-tsit Chan (New York: Columbia Uni-

versity Press, 1967). A useful contemporary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can

be found in Tu Wei-ming, Humanity and Self-Cultivation: Essays in Confucian

Thought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79).

56) See Martina Deuchler,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Cambridge, MA: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Harvard Univer-

Page 1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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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has moved to the fore both theologically and missiologically.

Perhaps the time has come for theologians living and working in

Korea to appropriate their Confucian and Neo-Confucian heritage in

an attempt to mediate between the extremes of both the post-

Enlightenment West and the radical Islamic East.5 9 ) As the West

increasingly begins to mirror the intolerance of the Islamic East,

Christians are being given still another chance to speak the truth in

love. It may well be that the Confucian tradition with its heritage of

humanistic values coupled with its tolerance can provide the context

for doing theology in these troubling times.

주제어

P r e-modern, Modern, Postmodern, Digitalized media, Intolerance,

Post-Enlightenment, Confucianism, Neo-Confucianism.

접 수 일 2010년 4월 1일

심사(수정일) 2010년 6월 7일

게제 확정일 2010년 6월 8일

2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59) Two attempts in this direction are Kim Heup Young’s essay Imago Dei and T’ien-

ming: John Calvin Meets Yi T’oegye in his book Christ and the Tao (Hong Kong: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2003), 89-120) and Daniel J. Adams, B e t w e e n

Heaven and Earth: Living Faithfully in an Unfaithful Age (Jeonju: Hanil Univer-

sity Press, 2009), especially The Love of Learning in John Calvin and Yi Toegye,

213-240 and The Confucian Worldview: A Third Way Between Democracy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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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회칙

제1조 명칭

본 회는“한국조직신학회(Korean Society of Systematic Theology)”라 칭한

다.

제2조 목적

본 회는 회원 상호간의 학문적 교류와 공동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조직신학

을 정립 발전시킴으로써 한국과 세계의 교회와 신학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사무실

본 회의 사무실은회장이 임직하고있는학교나 근무지에두는 것을원칙으

로 한다.

제4조 사업

본 회의 목적 수행을 위하여 연구발표 및 학술대회, 학회지 출판 및 기타

사업을한다.

제5조 회원의 자격

본 회의 회원은다음과같다.

1. 정회원: 본 회의 정회원은 조직신학 및 인접 학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거나 또는 대학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

고 있는자로한다.

2. 준회원: 준회원은 조직신학 및 인접 학문 분야에서 박사학위 취득 과정

에 있는자로한다.

3. 특별회원: 특별회원은 임원회의제청에 의해서 총회에서 허락을 받은자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95

Premodern, Modern, and Postmodern Redux and Why It Makes a Difference

Adams, Daniel J.

Professor

Hanil University &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Wanju, Korea

In 1995 the differences between the pre-modern, the modern, and the

postmodern were presented through contemporary art. Today, however, these

differences have been intensified through a clash of cultural values which has

resulted in deadly acts of terrorism and a climate of fear in many circles.

These differences came together in the address given by Pope Benedict X V I

at the University of Regensberg in September of 2006. There were the pre-

modern anti-Islamic views of Manuel II Paleologus one of the last emperors

of the Byzantine Empire, the modern view of Pope Benedict X V I based upon

p o s t-Enlightenment reasoned discourse, and the strong Islamic postmodern

response which both questioned the superiority of the West and made use of

the digitalized media.

Postmodernity and postmodernism matter today because of the misunder-

standings among Muslims due to their fear of the West, and among western

Europeans because of their fear of Islam. Both sides are becoming increas-

ingly intolerant and thus are mirror images of the other. It is obvious that

theology is important today if the Christian message of love is to be commu-

nicated in this climate of intolerance. Korean theologians, being heirs of the

Confucian and Neo-Confucian tradition, are in a unique position to mediate

between the Islamic East and the post-Enlightenment West in this age of

postmodernity.

2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2조 임원회

임원회는 회장이 필요시 수시로 소집하고, 총회에서 위임된 업무를 처리한

다.

제13조 편집위원회

편집 위원회는본 회의 학술지간행및 출판 사업을주관하며 편집위원회에

관한규정은 따로둔다.

제14조 재정

본 회의 재정은 회원의 입회비와 연회비, 찬조금 그리고 기타 수익금으로

한다.

제15조 부칙

1. 본회의회칙은통과일로부터시행된다.

2. 회칙은 정기 총회에서 출석회원 2/3 이상의 찬성에 의해서 수정할 수 있

다.

3. 본 회칙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 정기총회 및 임원회의의결과 통상관

례에따른다.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97

로 한다.

제6조 회원의 가입

제5조의자격을 갖춘 자로서 본 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소정의 입회원

서를 제출하여총회의 허입을받아야한다.

제7조 회원의권리

본 회의 정회원은 의결권,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지며 본 회의 각종 학술

활동에 참여할수 있다.

제8조 회원의의무

본 회의 회원은 회칙을 준수하고 소정의 회비를 납부해야 하며 본 회가 주

최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고학회지에 기고해야한다.

제9조 임원

본 회는 학회운영을 위하여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대외협력부장, 편

집부장, 감사 각 1인의임원을 둔다. 필요시 학문적 교류를 위하여 지회와 지회

임원을 둘 수 있다.

제10조 선거와임기

본 회의 임원은 총회에서 2인 이상의 추천과 최다수 득표로 선출하고 임원

의 임기는 2년으로하되, 회장과부회장임기는 각각 1년으로한다.

제11조 총회

본 회의 정기총회는 매 년마다 회장이‘한국기독교공동학회’기간 중 소집

하고 회칙 수정, 임원 선거, 사업 및 예결산 승인, 회비 결정, 회원 허입, 특별회

원 추대 등의 회무를 처리한다. 임시총회는 회장이 학회 운영을 위하여 불가피

하다고 판단되었을 때에임원회의결의에 따라소집한다.

2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5조 업무

편집위원회에서는 한국조직신학회 정기학술대회 주제에 대한 논문 기고자

를 위촉하고, 논문 심사위원 선정 및 우수논문을 심사하며, 한국조직신학회의

모든출판업무를 주관한다.

제6조 학술지 명칭

본회가 편집 출판하는 학술지는「한국조직신학논총」(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이라칭한다.

제7조 학술지 발간

「한국조직신학논총」은 매년 3회( 6월 3 0일, 9월 3 0일, 12월 3 0일) 발간함을

원칙으로한다.

제8조 학술지편집

논문은 투고순서에 따라 심사에 회부하며, 책의 구성 및 편집에 관한 모든

사항은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9조 통보

편집위원회는 투고논문의 접수, 심사 및 게재 여부에 관련된 사항을 투고자

에게통보한다.

제10조 원고료및 게재료

편집위원회는 학술대회를 위하여 채택한 특별한 주제에 관해 연구 위촉한

논문에 대하여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불하고, 외부 연구비 지원에 따른 연구 결

과물게재시 편집위원회에서정하는 소정의게재료를납부해야한다.

제11조 학술지 배포

본회 학술지는 연회비를 납부한 한국조직신학회회원에게 무료로 배부하며,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299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제1조 명칭과사무실

본회는 한국조직신학회 회칙 제13조에 따라 한국조직신학회 편집위원회라

칭하며, 사무실은 편집위원장이 소속된 학교나 근무지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조 목적

본회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에 소속된 회원들의 학문적 교류를 원활히

하고자 회원들의 연구결과를 수록한 조직신학 전공 학술지를출판하는데 있다.

또한 이러한출판 사업을통해회원들의연구업적이 소속기관및 학계에서공

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받도록협조하는데있다.

제3조 위원구성임기

본회의 위원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추천한 약간 명으로 구성된다.

위원장은 본 학회 편집부장이 담당하며, 편집위원은 국내외 대학에서 조직신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일 전공분야에서5년 이상 연구활동을 계속한

자로 연구 및 학술 실적이 우수한 자여야 한다. 편집위원의 임기는2년으로 한

다.

제4조 회의소집

편집위원회는 편집위원장이 소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시 인터넷

상에서 회의할 수 있다. 또한 편집위원 과반 수 이상의 요청으로 회의를 소집

할 수 있다.

2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고자 하는 자가

준수해야할 사항을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 자격

본회 회원으로서 정기적으로 본회 소정의 연회비를 납부하는 자는 누구든

지 투고할 수 있다. 본회 회원이 아니라도 편집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투고할

수 있다.

제3조 투고 신청서양식

투고자는 본회‘논문투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투고신청서 양식

(양식1)은 조직신학회홈페이지에서다운받아사용할 수 있다.

제4조 구성 요소

투고논문은 다음의 5가지 구성요소를 갖춰야 한다. 1. 논문 2. 각주 및 참고

문헌목록 3. 외국어 초록(abstract) 4. 한국어 주제어 5. 외국어 주제어( k e y

word)

제5조 논문

1. 모든 논문은 한글 혹은 외국어로 된 다른 학술지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

어야한다.

2. 본회학술대회발표원고도규정에따라 투고해야한다.

3. 「한국조직신학논총」과「한국기독교신학논총」등 학술지에 관련된 선행

논문들이 있을 경우, 이를 참고하여 인용하고, 각주, 참고문헌에 그 사실

을 표기한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01

도서관 및 학문 연구를 위하여 구입을 희망하는 자에게는 회비에 상당하는 후

원금을 받고배부한다.

제12조 발행및 인쇄

본회 학술지의 발행인은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으로 하고, 인쇄 출판 및 배부

에 관한세부사항은 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13조 판권

본회에서 출판된 모든 글의 판권은 저자가 소유한다. 단, 인터넷 출판의 경

우 학회가그 판권을 소유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기타자세한 사항은관례에 따른다.

2. 본 규정은 편집위원2/3 이상의 찬성으로개정할 수 있다.

3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9조 원고 분량

투고 논문(본문 10p, 각주 9p, 바탕체, 줄 간격 160)은 A4용지15매 이내로

작성한다.

제10조 제출 방법

투고자는‘논문투고 신청서’(양식1)와 함께 논문을 E-mail로 제출함을 원

칙으로한다.

제11조 제출 기한

원고 마감은출판 3개월전으로 하고, 제출된 원고는반송하지않는다.

제12조 게재 논문제한

논문은 연속으로게재되지않는것을원칙으로한다.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 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03

4. 고전어(히브리어, 헬라어)는 원어 사용을 원칙으로 하되, 음역할 수도 있

다.

5. 내용 구분은I, I I → 1, 2 → 1), 2) → (1), (2) → a), b) → (a), (b)의 순으로

한다.

제6조 각주와참고문헌

1. 논문은 각주를 사용해야 한다. 각주 및 참고문헌의 양식은 표 1을 참조

한다.

2. 논문에서언급된것만을참고문헌목록에포함한다.

제7조 외국어초록

1. 내용

논문의 목적, 연구방법론, 연구내용및 연구성과 등 제시

2. 분량

A4 1매 이내 혹은외국어 300단어내외

3. 제목및 인적사항

논문제목, 성명, 학위, 직위, 소속, 소재지를기재

예) Kyun-Jin Kim, Dr. Theol.

Professor, College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비전임의경우직위를Lecturer로 표기함

제8조 주제어

한국어와외국어 주제어를각각 5개 이내로작성한다.

3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2) 저서 인용의경우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I』(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135.

Peter C. Hodgson,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67.

3) 편·역서 인용의경우

위르겐몰트만/이신건옮김, 『희망의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4) 학위논문인용의경우

김철수,“우리말 사도신경에 삭제된‘음부에 내려 가사’에 대한 연구,”(계명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2-23.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참고문헌 작성법

1) 전체 구조는 한국어 자료를 앞 쪽에 배치하고, 그 뒤에 외국어 자료를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05

「한국조직신학논총」각주및 참고문헌작성법 (투고규정표 1)

*각주 및 참고문헌에서의 영문 표기는“시카고 스타일”을 따른다.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th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각주 및 참고문헌 작성에 있어서의“시카고 스

타일”의 대한 간단한 용례(Chicago-Style Citation Quick Guide)는

다음을 참고할 것: http://www. chicagomanualofstyle.org/tools_

citationguide. html

I. 한국어 학술지

1. 각주표기 원칙

·논문의 제목은 쌍 따옴표(“ ”)로, 학술지나 정기간행물 이름은 외 꺽쇠

괄호(「 」)로, 한국어 도서의 경우는 쌍 꺽쇠괄호(『 』)로 표기한다. 단,

외국어 책 제목과학술지 제목은모두이탤릭체로표기한다.

·동일한 논문이나 책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경우: 앞의 논문(또는

앞의책), 30.

·동일 저자의 논문이나 저서를 각주 한 개 이상 건너 뛰어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인용의경우

황승룡,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 위치,”「조직신학논총」6

(2001), 101-119.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 n t e r-

3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

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I I. 외국어 학술지

1. 각주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동일한 페이지에 있는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다른 페이지에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34.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글을 각주 1개 이상 지나서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학위논문의경우: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nter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저서/편 역서의경우: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307

배치하는것으로하되, 반드시 각주에서사용된 자료만을제시한다.

2) 국문 자료의 경우 저자의 성명에 따라 가, 나, 다 순으로, 영문 및 외국

자료의 경우는알파벳순으로제시한다.

3) 저자 및 책명에는 마침표를 붙이고, 출판지, 출판사, 출판 연도를 표기함

에 있어서는괄호를삭제한다.

4) 외국인 이름 혹은 한국인의 영어명은 성, 즉 가족명(family name)을 앞

에 쓰고 이름을뒤에쓰며 그 사이를콤마로구분한다.

5) 동일한 필자에 의해 쓰인 논문/저서는 아래 하이픈( 하이픈을 6

번 누름)을 써서 동일 필자에 의한 논문/저서임을 밝히되, 최근에 출판된

것부터 먼저제시한다.

6) 논문명 혹은 책명이 길어서 둘째 줄까지 사용하게 될 때는 저자명이 잘

드러나게9칸 들여서글을 쓴다.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 『기독교조직신학I』.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김철수.“우리말사도신경에삭제된‘음부에내려가사’에 대한연구.”계명대학

교 박사학위 논문, 2004.

몰트만, 위르겐/이신건 옮김. 『희망의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황승룡.“폴틸리히의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위치.”「조직신학논총」6(2001):

101-119.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3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학술지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에 관한 제

반 사항을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에서발송의과정

편집위원회는아래와같은 일을수행한다.

1. 논문투고안내를 학회홈페이지및 회원들에게E-mail로 공지한다.

2. 투고된 논문의 구성요소(투고 규정4조 참조)들이 미비할 경우 투고자의

수정을거친후, 논문접수를통보한다.

3. 편집위원회의에서 익명으로 처리된 각 논문에3인의 심사위원을 배정한

다.

4. 심사결과를 종합하여 편집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게재여부를 결정하며, 1

주일이내에심사결과를투고자에게 통보한다.

5. 게재 논문은1, 2차 교정을 거쳐 인쇄하며, 인쇄된 학술지는 모든 회원에

게 발송한다.

제3조 심사위원자격

본회는 논문심사를 위해 국내외 대학에서 해당 전공분야의 박사학위를 취

득한 후 5년 이상 전공 관련 주제에 관한 강의 또는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온

자 가운데 편집위원회에서 의뢰한다(양식2 논문심사 의뢰서). 심사의뢰 시 소

정의심사료를지불한다.

제4조 심사기준

심사위원은 아래의 심사기준에 따라서 기일 내에‘논문 심사결과서’(양식

3)를 제출하여야한다.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309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2. 참고문헌작성법

*위에서 제시한한국어 논문작성법용례의 경우와동일하다.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3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 결과는 필자 이외에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심사위원은 심사대상, 내용

및 결과와관련된 모든정보를 타인에게누설하지 않는다.

제7조 심사결과통보

투고자에게심사결과를 즉시통보한다.

제8조 재심 신청

심사위원3분의2 이상으로부터‘수정 후 재심’판정을 받은 논문 제출자는

지적 사항을 수정한 후 재심을 신청할 수 있으며, 재심을 포기할 경우는 게재

불가로 판정한다. 재심을 청구할 경우 동일 심사위원의 재심을 통과해야 차호

에 게재할수 있으며논문재심 신청은1회에한 한다.

▣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 임원회에서 승인 즉시 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 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311

1. 논문형식심사

투고된논문의 구성요소들이미비되었을경우수정을 요청한다.

2. 논문내용심사

1) 논문구성의완성도(20점)

논문의 구성상 목차와 내용 전개가 논리적이며 참고문헌 및 문장은 적

절한가?

2) 연구주제의 타당성및 심도(20점)

주제에 관한연구가타당하며, 충실하고심도 있게이루어졌는가?

3) 학문적 독창성(20점)

주제의 선정과내용전개 및 결론제시가독창적인가?

4) 학문적 공헌도및 적용성(20점)

주제에 관한 연구가 국내외적으로 학문적 공헌도가 있으며, 교회와 사회

에 적용성이있는가?

5) 연구방법, 선행연구및 통합학문적지향(20점)

연구방법은 타당하며, 선행연구의 검토와 통합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는

가?

제5조 심사판정

1. 제출 논문은 관련 전공자인3인의 심사위원에게심사를 위촉한다. 심사점

수가 90점 이상‘게재가,’89-80점‘수정 후 게재,’79-70점‘수정 후 재심,’

69점 이하‘게재불가’로 판정한다.

2. 심사위원2/3 이상이‘게재 가’또는‘수정 후 게재’(즉 80점 이상)이면

‘게재가’로 판정하고 투고자에게 수정 부분을 고치게 한 후 게재한다. 심사위

원 2/3 이상이‘수정 후 재심’또는‘개재 불가’(즉 79점 이하)이면‘게재 불가’

로 판정한다.

제6조 비밀유지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이나 논문 제출자는 모두 익명으로 하여야 하며, 심

3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Page 1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①연구윤리확립에 관한사항

②연구부정행위의 예방, 조사에관한사항

③제보자 보호와비밀유지에관한사항

④연구윤리위반검증, 검증결과처리와후속조치에관한사항

⑤피조사자명예회복 조치에관한사항

⑥기타 위원회위원장이부의하는사항

제5조(구성)

위원회의 구성은 위원장을 포함하여 총 5명으로 한다. 회장이 위원장 및

위원을임명하고, 이 중 1명을택하여 필요한행정업무를 관장하게한다.

제6조(임기)

위원의임기는 해당사건의종결 시까지이다.

제7조(회의)

①위원장은위원회의 회의를소집하고 그 의장이되며, 회의를 주재한다.

② 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이상의 찬성으

로 의결한다. 단, 징계 판정에서 제17조의 ④-⑥에 해당하는 의결은

재적위원 3분의 2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

결한다.

③위원회의 회의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필요에 따라 관계자의 출석

을 요구하여의견을청취할 수 있다.

제8조(권한과 책무)

① 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출석

과 자료 제출을요구할 수 있다.

②피조사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 또는 자료 제출을 거부할 경우에는

혐의 사실을인정한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③위원회는 연구기록이나증거의 멸실, 파손, 은닉또는 변조 등을 방지하

기 위하여 그에상당한 조치를취할수 있다.

④위원회 위원은 심의와 관련된 제반 사항에 대하여 비밀을 준수하여야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313

한국조직신학회 연구윤리 규정

제1조(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연구자의 연구윤리와 부정행위의 규제에 관한 제반 사

항을 정하는데 있다.

제2조(적용대상)

본 규정은 본 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으로서 한국조직신학회가간행하

는 학술지나저서에 기고하는자에한하여 적용한다.

제3조(연구부정행위의범위)

연구에서의 부정행위는 연구의 제안과 수행, 연구결과의 보고 및 발표 등

에서 행해진다음각 호의행위에해당한다.

① 존재하지않는데이터 또는연구결과 등을허위로만들어 내는행위

② 다른 사람의 독창적인 연구내용과 결과를 정당한 승인 또는 인용에 대

한 정확한정보의 기재없이표절하는행위

③연구 내용 및 연구 결과에 공헌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논문저

자/역자의 자격을 표시하지 않는 경우, 반대로 아무런 공헌이 없는 자

에게 감사 또는 예우를 목적으로 부당하게 논문저자/역자를 표시하는

행위

④ 동일 논문을 반복하여 게재하거나 이미 발표된 자신의 논문과 현저하

게 유사한논문을 이중으로발표하는자기표절행위

⑤ 학계에서 통상적으로 허용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난 부정행위로 위

원회의자체적인조사가필요하다고판단되는부정 행위

제4조(연구윤리위원회의설치와운영)

제3조의 부정행위를규제 및 조치하기 위한 연구윤리위원회(이하 위원회)

를 두며, 이 위원회는 연구윤리와관련된 다음각 호의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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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조(기피, 제척, 회피)

①위원에게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경우에 제보자 또는

피조사자는그 이유를 밝혀 기피를 신청할 수 있다. 기피신청이 인정된

경우에 기피신청된위원은 당해조사와관련하여배제된다.

②당해 조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안건의 심의, 의결, 조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제15조(이의제기및 소명기회의 보장)

위원회는 제보자와 피조사자에게 의견 진술, 이의 제기 및 변론의 권리와

소명의기회를 충분히보장해야할의무를갖는다.

제16조(조사, 심의 및 판정기간)

①위원회는 부정행위에 관한제보가 접수된 날로부터 6개월이내에 조사,

심의 및 판정을내려야 한다.

②제보의 접수일로부터 역산하여 만 5년이 경과된 부정행위는 원칙적으

로 처리하지않는다.

제17조(징계판정)

심의결과 부정행위로판정될 경우아래의징계들을판정할수 있다.

①경고

②논문 불인정

③일정기간논문투고금지

④제명

⑤일정 기간재가입 불허

⑥해당 기관장에게 통보

제18조(결과의 통지)

위원장은 조사결과에 대한위원회의 결정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지체 없이

제보자및 피조사자등 관련자에게이를통지해야 한다.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315

한다.

제9조(부정행위제보 및 접수)

제보자는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 및 편집위원회에직접 또는서면, 전자우

편 등으로 제보하되 논문명(또는 연구과제명)과 구체적인 부정행위의 내용과

증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제10조(부정행위의조사)

위원회는 구체적인 제보가 있거나 상당한 의혹이 있을 경우에는부정행위

의 존재여부를조사하여야한다.

제11조(출석및 자료제출 요구)

①위원회는 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 대하여 진술을 위한 출석을

요구할수 있으며, 이 경우피조사자는이에반드시응해야 한다.

② 위원회는 피조사자에게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으며, 증거자료의

보전을 위하여 해당 연구기관장의 승인을 얻어 부정행위 관련자에 대

한 해당연구자료의압수, 보관등을 할 수 있다.

제12조(제보자의권리 보호)

①위원회는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니며, 제보자의 실명은

공개되지않도록 해야한다.

②제보 내용이 허위임을 알고도 이를 신고한 제보자에 대해서는 신원보

호의 의무가 요구되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관련사실을 해당 소속기관

에 통보할수 있다.

제13조(피조사자의권리 보호)

위원회는 부정행위에 대한 사실규명의 조사가 종료될 때까지 피조사자의

명예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무혐의로 판명될 경우 피조사자의

명예회복을위해노력하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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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명단

회장 서창원 (감리교신학대학교)

부회장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총무 정홍열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서기 이승갑 (장로회신학대학교)

회계 황돈형 (중앙신학교)

편집부장 이세형 (협성대학교)

대외협력부장 김성원 (나사렛대학교)

미디어부장 최광진 (호서대학교)

감 사 구춘서 (한일장신대학교)

편집위원

편집위원장 이세형 (협성대학교)

편집위원

신옥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장윤재 (이화여자대학교)

신재식 (호남신학대학교) 전현식 (연세대학교)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교)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이상직 (호서대학교) 허호익 (대전신학대학교)

이오갑 (그리스도대학교) 황재범 (계명대학교)

제19조(재심의)

판정에 대한 재심의 요청의 경우, 판정 이후 3개월 이내에 해야 하며, 재

심의 요청이있을경우 위원회는6개월이내 재심의하여결정을 내려야한다.

제20조(비밀엄수

위원회는 제보, 조사, 심의, 판정, 재심의 및 건의조치와 관련된 일체의 사

항에 대해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으며, 여기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자

역시도 모든정보에 대하여비밀을지켜야 한다.

제21조(기록의 보관및 공개)

① 조사와 관련된 기록은 조사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5년간 보관하여야

한다.

②판정이 끝난 이후의결과는 학회 상임이사회에보고 해야하며, 제보자,

조사위원, 증인, 참고인, 자문에 참여한 자의 명단 등 신원과 관련된 정

보에 대해서는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위원회

의 결의로공개대상에서제외할 수 있다.

제22조(운영예산)

위원회 운영 및 조사와 관련하여 필요한 예산은 별도로 책정하여 지급할

수 있다.

▣ 부 칙

1. 이 규정은 2008 년 12월 19일부터 시행한다.

2. 이 규정은윤리위원회의결의로개정할 수 있다.

3. 이 규정은학회임원회의승인하에효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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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직신학논총제26집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2010년 6월 25일 인쇄

2010년 6월 30일 발행

편집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

발행 한국조직신학회

주소 경기도 화성시봉담읍상리 14-1

전화 (031) 299-0814

Email: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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