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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거대기업 탐구 6 2015년 10월 28일 <32> 엄마의 마음으로… 세계1위 식품기업 네슬레 편 네슬레는 식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 이다. 지구상의 식품기업 중 가장 큰 회사다. 세계 2위인 네덜란드의 유니 레버와 3위인 미국의 크래프트 그리 고 4위인 프랑스의 다논 등을 매출과 자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크게 앞서고 있다. 2015년 포춘 글로벌500 랭킹에 서 세계 70위다. 비행기를 만드는 보 잉이나 컴퓨터 원조인 IBM보다 매출 규모가 더 크다. 독일에서 스위스로 이민한 네슬레 라는 약사가 1867년 세운 기업이다. 영유아들이 엄마젖 대신 먹을 수 있는 분유를 만든 것이 첫 사업이다. 창업 주 네슬레는 1875년에 현지의 정치인 이었던 줄스 몬느레이에게 팔고 떠난 다. 중시조 격인 몬느레이는 회사 이 름을 ‘페린락테 앙리 네슬레’에서 ‘네 슬레 컴퍼니’로 바꾸었다. 그런 다음 바로 증시에 상장했다. 이 과정을 거 치면서 네슬레는 특정인의 지배가 아 닌 스위스의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네스카페로 최고 반열… 식품 브랜드만 1만여개 보유 시대에 맞게 지속적으로 첨단 신제품 지속 개발 존재하지 않았던 식품 만든 인류 먹거리 파수꾼 네슬레라는 회사는 앙리 네슬레가 창업했다. 앙리 네슬레(Henri Nestle) 는 1814년생이다. 독일의 프랑크푸르 트에서 태어났다. 대를 이어 유리세 공사로 살아온 요한 네슬레(Johann Nestle)의 14명의 자녀 중에서 11번째 다. 네슬레 가문은 원래 독일의 남부 슈바벤에서 발원했다. 슈바벤 말로 네 슬레란 작은 새의 둥지라는 뜻이다. 앙리 네슬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사 교육을 받았다. 당시의 교육은 대 부분 도제식으로 운영됐다. 전문가 밑 에 들어가 직접 보고 배우는 방식이 다. 앙리는 스타인이란 약사가 운영 하던 약국에서 4년간 도제 교육을 받 았다. 이 이력을 토대로 스위스로 건 너가 정식으로 약사가 됐다. 왜 스위 스로 이민을 갔는지에 관해서는 기록 이 남아있지 않다. 이민 후 스위스 베 베이(Vevey)에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 ‘하인리히’라는 독일식 이름을 버리고 대신 불어식의 앙리로 바꾸었다. 베베 이에 프랑스 사람이 많아 불어 이름이 더 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앙리 네슬레는 약을 제조하는 능력 이 뛰어났다. 신비한 약을 많이 개발 하여 인기를 끌었다. 약사로 번 돈으 로 사업을 벌이 기도 했다. 유채 꽃으로 평지 씨 를 만들어내는 공장을 운영하 면서 큰돈을 벌 었다. 레모네이 드와 탄산음료 그리고 심지어는 술과 비료까지 만들 어 팔았다. 가스라이터와 비료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860년 46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부인은 안나 클레멘타인 이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네슬레 부부는 대신 다른 집의 아이 들을 많이 돌봤다. 그 과정에서 많은 유아들이 엄마 젖을 제때 충분하게 먹 지 못해 죽거나 영양실조에 빠지고 있 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출산을 해도 젖이 충분하게 나오지 않는 산모 가 의외로 많았다. 생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 몸에 잘 맞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운반이 어렵고 곧 상해버려 아기에게 먹이기가 쉽지 않았다. 네슬레는 물만 있으면 언제든지 타 먹일 수 있는 마른 우유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젖 부족으로 죽어가는 유아들 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약사로서의 소 명이라고 생각했다. 당대 최고의 화학 자이자 유기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비그 박사를 찾아가 사사를 하면서 분유제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실 험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분유를 제조 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인류역사상 최 초의 아기 분유는 유아의 생명을 지키 기 위한 한 약사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그때가 1867년이다. 연구는 꼬박 3년이 걸렸다. 이 분유는 소젖과 곡물 그리고 설탕을 절묘하게 조합해서 만든 것이다. 황금의 비율은 비밀이다. 유아들의 소화를 위해 특 수기법을 동원해 산과 녹말은 제거했 다. 당대 최고 석학인 리비그 박사의 유아용 스프보다 품질이 훨씬 앞섰다. 이 제품의 이름을 처음에는 킨들멜 (Kindermehl)이라고 지었다. 어린이 맛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인공모유라 는 의미의 ‘페린락테’로 바꾸었다. 네슬레는 그 분유를 본격적으로 제 조• 판매하기 위해 회사를 차렸다. 회 사 이름은 ‘페린락테 앙리네슬러’이 다. 이것이 네슬레의 모태다. 페린락 테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네슬레의 인공모유로 유아들의 건강이 한결 좋 아졌다. 인공모유 덕에 엄마 젖을 못 구해 죽어나가는 유아가 없어졌다. 몸 에 젖이 충분해도 미용 상의 이유로 수 유를 중단하고 인공모유로 대체하는 일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당시 그가 만든 회사 로고는 1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해온다. 네슬레 는 자신의 이름 인 ‘Nestle’를 약간 변 형하여 로고를 만들었다. 즉 ‘Nestle’ 를 둥지 또는 보금자리라는 뜻의 ‘Nest’로 환치한 것이다. 그 둥지 속에 어미 새 한 마리와 새끼 새 두마리를 같이 넣은 다음 어미가 새끼를 기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새 가족과 둥지’ 는 안전, 모성애, 애정, 자연, 가족 그 리고 전통을 상징한다. 어미가 새끼를 기르는 그 마음과 정성이 바로 네슬레 의 기업정신이다. 만 61세가 되던 1875년 네슬레는 회 사를 전격 매각해버렸다. 스위스 베베 이의 세도가였던 줄스 몬느레트(Jules Monnesrat)에게 팔았다. 자식이 한명 도 없던 네슬레로서는 가업의 승계 따 위는 애당초 별 의미가 없었다. 골치 아픈 회사 경영에 얽매이기보다는 부 인과 함께 멋있는 노년을 보냈다. 74 세 되던 189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재희 기자 ● 네슬레 창업주 앙리 네슬레는 누구인가? ● 네슬레가 아기를 죽이고 있다? 10년 불매운동의 교훈 식품기업에 이미지 손상은 치명타 1974년 느닷없이 영국 런던의 거리 에 ‘유아 살인자’라는 팸플릿이 등장했 다. 영어로는 ‘The Baby Killer’다. 가 난과의 전쟁이라는 영국의 한 사회단 체가 만든 것이다. 그 단체의 영문이 름은 ‘War on Want’이다. 가난구제를 목표로 만들어진 이 기 구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 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단체는 28페 이지짜리로 만든 전단에서 네슬레가 무리한 유아 분유 판촉으로 유아들을 죽이고 있다고 고발했다. 네슬레는 ‘말도 안된다’며 아예 무시 해버렸다. 1년쯤 참고 지나자 이번에 는 독일에서 또 문제가 터졌다. ‘The 3rd World’라는 독일의 한 제3세계 지 원단체가 그 비방전단을 독일어로 번 역하여 뿌리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사 용하는 나라로 확산됐다. 네슬레 본사 가 있던 스위스에도 전해졌다. 참다못 한 네슬레는 급기야 이 두 단체를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이 단체들이 지적한 네슬레의 살인 혐의는 무려 10가지가 넘는다. 그중에 서도 가장 크게 문제가 됐던 것은 아 프리카 지역에서의 산모들에 대한 분 유샘플 제공이다. 네슬레는 당시 아프 리카 시장을 개척한다면서 병원을 돌 아다니며 갓 출산한 산모들에게 분유 를 공짜로 제공했다. 그러다가 보름쯤 후에 공급을 중단했다. 출산 후 수유 를 중단하면 이내 어머니의 젖줄이 끊 긴다. 젖줄이 막힌 후에 공짜 분유 배 급을 끊음으로써 무조건 사먹도록 강 요한 것이다. 분유를 살 돈이 없는 산 모들로서는 아이를 굶겨야 하는 상황 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사회단체들은 네슬레의 이러한 행위를 살인이라고 본 것이다. 분유를 타는 방법도 문제였다. 현지 말로 안내가 이루어지지 않아 너무 많 이 먹이거나 너무 적게 먹여 죽는 아이 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 단체의 지적 이다. 오염된 물로 분유를 타 먹이는 바람에 죽어간 유아들도 줄을 이었다. 2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내려진 네슬 레는 가까스로 승소했다. 그렇다고 완 벽한 승리도 아니었다. 살인에 대해서 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판매방식 에는 문제가 있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 법원은 분유가 모유보다 더 나은 것 처럼 홍보하는 것 등에 대해 시정명령 을 내렸다. 재판을 통해 네슬레가 거 둔 이득은 별로 없었다. 오랜 법정투쟁을 거치면서 회사에 대한 이미지만 크게 나빠졌다. 급기 야 1977년에 이르러서는 미국 등 9개 의 나라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2 년 후인 1979년에는 불매운동에 참여 한 사회 및 종교단체의 수가 500여개 로 늘어갔다. 네스카페를 비롯한 네슬 레의 제품들이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는 잇달아 철수되는 사태에까지 이르 렀다. 네슬레는 억울하다며 항변을 했 다. 불매운동의 불법성과 잘못을 규탄 하는 광고도 마구 냈다. 불매 운동에 나서는 성직자들에게 100만 통 이상의 편지를 보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 다. 그래도 소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네슬레는 결국 1984년 여론에 무릎 을 꿇는다. 모유 대체재인 분유 선전 을 중단키로 하는 등 불매운동단체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 것이다. 런던에서 시작된 불매운동은 네슬레가 백기투 항한 뒤 장장 10년 만에 종식됐다. 김윤식 기자 분유개발로 떼돈 벌어 가난한 이웃 구제에 전념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경제연구소 소장(경제학 박사) 국민기업으로 커갔다. 지금도 노바티 스와 로슈 그리고 UBS와 함께 스위스 의 자존심이 되어있다. 초기에는 미국인 조지 페이지와 찰 스 페이지 형제가 만든 앵글로 스위스 연유회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러다가 1905년 이 두 회사가 하나로 뭉 쳤다. 이 통합이 네슬레의 든든한 기 초를 다지는 초석이 됐다. 합병 후 회 사 이름은 네슬레&앵글로 스위스 연 유 컴퍼니로 정했다. 1914년 2차 대전이 터졌다. 전쟁으로 목숨이 오가는 판국에 액체로 된 우유 를 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럽 각국 정부는 우유 대신 분유와 연 유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분유와 연 유를 제대로 공급할 회사는 네슬레뿐 이었다. 불티나게 팔렸다. 모자라는 분유와 연유를 생산하기 위해 라틴 아 메리카 등 전 세계에 80개의 공장을 지 었다. 이것이 패착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모두들 분유 대신 우유로 회귀해 버렸 다. 생산시설이 감자기 남아돌았다. 그 바람에 당시 돈으로 1억 스위스 프랑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큰 위기였다. 네슬레는 이 난국을 새 상품 개발로 극복해갔다. 새 상품을 잇달아 개발하 여 놀고 있는 시설을 다시 돌린 것이 다. 초콜릿이 그 대표적인 상품이다. 초콜릿 파우더 음료인 마일로와 엘리 든, 맥아와 우유를 혼합한 맥아유 버 트밀크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1938년에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인스 턴트 커피인 ‘네스카페’를 개발했다. 당시 브라질에는 커피원두가 넘쳐나 고 있었다. 너무 많은 커피나무를 심 었기 때문이다. 가격이 폭락하면서 많 은 농장주들이 파산했다. 은행에는 파 산 농장부의 빚 대신 잡힌 커피원두가 넘쳐났다. 네슬레는 이 처치 곤란의 커피원두를 싸게 들여다 오랫동안 보 관이 가능한 마른 커피로 만들어냈다. 그것이 인스턴트 커피의 시작이었다. 개발에 무려 8년간이 소요됐다. 그 직후 2차 대전이 터졌다. 미국이 이 인스턴트커피를 군인들의 필수 식 량으로 지정했다. 전 세계의 전쟁터로 퍼져나갔다. 전쟁 후에도 퇴역군인들 이 자기 고향으로 가 네스카페를 알렸 다 . 전쟁을 회사 도약의 발판으로 승 화시킨 것이다. 이 네스카페는 네슬레 가 세계 최고의 반열로 올라서는 데 결 정적인 효자품목이 됐다. 커피 원액을 캡슐에 넣어 진공 포장 한 것도 네슬레의 아이디어다. 이 캡 슐을 기계에 돌려 가정에서도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그 기계 도 물론 네슬레가 처음 만들었다. 네슬레의 가장 큰 강점은 시대에 맞 게 지속적으로 첨단의 신제품을 만들 어냈다는 사실이다. 이유식에서부터 유제품 그리고 초콜릿, 과자, 아이스 크림, 다이어트 식품, 양념소스, 커 피, 가공식, 미네랄생수 그리고 심지 어는 동물사료에 이르기까지 가장 앞 선 제품을 선보여 왔다. 네슬레가 보 유하고 있는 브랜드는 1만여 개다. 아 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식품을 가장 많 이 개발한 곳도 단연 네슬레다. 창업 주 네슬레가 인공모유로 젖이 모자라 는 영아들을 구해냈다면 그 후예인 오 늘날의 네슬레 맨들은 건강식품으로 전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겠다는 포부 로 지금 이 순간에도 기술과 과학을 앞 세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앙리 네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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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카페로 최고 반열… 식품 브랜드만 1만여개 보유nimage.globaleconomic.co.kr/phpwas/pdffile.php?sp=... · 를 둥지 또는 보금자리라는 뜻의 ‘Nest’로

Oct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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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거대기업 탐구6 2015년 10월 28일

<32> 엄마의 마음으로… 세계1위 식품기업 네슬레 편

네슬레는 식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

이다. 지구상의 식품기업 중 가장 큰

회사다. 세계 2위인 네덜란드의 유니

레버와 3위인 미국의 크래프트 그리

고 4위인 프랑스의 다논 등을 매출과

자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크게 앞서고

있다. 2015년 포춘 글로벌500 랭킹에

서 세계 70위다. 비행기를 만드는 보

잉이나 컴퓨터 원조인 IBM보다 매출

규모가 더 크다.

독일에서 스위스로 이민한 네슬레

라는 약사가 1867년 세운 기업이다.

영유아들이 엄마젖 대신 먹을 수 있는

분유를 만든 것이 첫 사업이다. 창업

주 네슬레는 1875년에 현지의 정치인

이었던 줄스 몬느레이에게 팔고 떠난

다. 중시조 격인 몬느레이는 회사 이

름을 ‘페린락테 앙리 네슬레’에서 ‘네

슬레 컴퍼니’로 바꾸었다. 그런 다음

바로 증시에 상장했다. 이 과정을 거

치면서 네슬레는 특정인의 지배가 아

닌 스위스의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네스카페로 최고 반열… 식품 브랜드만 1만여개 보유 시대에 맞게 지속적으로 첨단 신제품 지속 개발

존재하지 않았던 식품 만든 인류 먹거리 파수꾼

네슬레라는 회사는 앙리 네슬레가

창업했다. 앙리 네슬레(Henri Nestle)

는 1814년생이다. 독일의 프랑크푸르

트에서 태어났다. 대를 이어 유리세

공사로 살아온 요한 네슬레(Johann

Nestle)의 14명의 자녀 중에서 11번째

다. 네슬레 가문은 원래 독일의 남부

슈바벤에서 발원했다. 슈바벤 말로 네

슬레란 작은 새의 둥지라는 뜻이다.

앙리 네슬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사 교육을 받았다. 당시의 교육은 대

부분 도제식으로 운영됐다. 전문가 밑

에 들어가 직접 보고 배우는 방식이

다. 앙리는 스타인이란 약사가 운영

하던 약국에서 4년간 도제 교육을 받

았다. 이 이력을 토대로 스위스로 건

너가 정식으로 약사가 됐다. 왜 스위

스로 이민을 갔는지에 관해서는 기록

이 남아있지 않다. 이민 후 스위스 베

베이(Vevey)에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

‘하인리히’라는 독일식 이름을 버리고

대신 불어식의 앙리로 바꾸었다. 베베

이에 프랑스 사람이 많아 불어 이름이

더 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앙리 네슬레는 약을 제조하는 능력

이 뛰어났다. 신비한 약을 많이 개발

하여 인기를 끌었다. 약사로 번 돈으

로 사업을 벌이

기도 했다. 유채

꽃으로 평지 씨

를 만들어내는

공장을 운영하

면서 큰돈을 벌

었다. 레모네이

드 와 탄 산 음 료

그리고 심지어는 술과 비료까지 만들

어 팔았다. 가스라이터와 비료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860년 46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부인은 안나 클레멘타인

이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네슬레 부부는 대신 다른 집의 아이

들을 많이 돌봤다. 그 과정에서 많은

유아들이 엄마 젖을 제때 충분하게 먹

지 못해 죽거나 영양실조에 빠지고 있

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출산을

해도 젖이 충분하게 나오지 않는 산모

가 의외로 많았다. 생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 몸에 잘 맞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운반이 어렵고 곧 상해버려

아기에게 먹이기가 쉽지 않았다.

네슬레는 물만 있으면 언제든지 타

먹일 수 있는 마른 우유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젖 부족으로 죽어가는 유아들

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약사로서의 소

명이라고 생각했다. 당대 최고의 화학

자이자 유기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비그 박사를 찾아가 사사를 하면서

분유제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실

험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분유를 제조

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인류역사상 최

초의 아기 분유는 유아의 생명을 지키

기 위한 한 약사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그때가 1867년이다.

연구는 꼬박 3년이 걸렸다. 이 분유는

소젖과 곡물 그리고 설탕을 절묘하게

조합해서 만든 것이다. 황금의 비율은

비밀이다. 유아들의 소화를 위해 특

수기법을 동원해 산과 녹말은 제거했

다. 당대 최고 석학인 리비그 박사의

유아용 스프보다 품질이 훨씬 앞섰다.

이 제품의 이름을 처음에는 킨들멜

(Kindermehl)이라고 지었다. 어린이

맛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인공모유라

는 의미의 ‘페린락테’로 바꾸었다.

네슬레는 그 분유를 본격적으로 제

조• 판매하기 위해 회사를 차렸다. 회

사 이름은 ‘페린락테 앙리네슬러’이

다. 이것이 네슬레의 모태다. 페린락

테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네슬레의

인공모유로 유아들의 건강이 한결 좋

아졌다. 인공모유 덕에 엄마 젖을 못

구해 죽어나가는 유아가 없어졌다. 몸

에 젖이 충분해도 미용 상의 이유로 수

유를 중단하고 인공모유로 대체하는

일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당시 그가 만든 회사 로고는 1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해온다. 네슬레

는 자신의 이름 인 ‘Nestle’를 약간 변

형하여 로고를 만들었다. 즉 ‘Nestle’

를 둥지 또는 보금자리라는 뜻의

‘Nest’로 환치한 것이다. 그 둥지 속에

어미 새 한 마리와 새끼 새 두마리를

같이 넣은 다음 어미가 새끼를 기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새 가족과 둥지’

는 안전, 모성애, 애정, 자연, 가족 그

리고 전통을 상징한다. 어미가 새끼를

기르는 그 마음과 정성이 바로 네슬레

의 기업정신이다.

만 61세가 되던 1875년 네슬레는 회

사를 전격 매각해버렸다. 스위스 베베

이의 세도가였던 줄스 몬느레트(Jules

Monnesrat)에게 팔았다. 자식이 한명

도 없던 네슬레로서는 가업의 승계 따

위는 애당초 별 의미가 없었다. 골치

아픈 회사 경영에 얽매이기보다는 부

인과 함께 멋있는 노년을 보냈다. 74

세 되던 189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재희 기자

● 네슬레 창업주 앙리 네슬레는 누구인가?

● 네슬레가 아기를 죽이고 있다? 10년 불매운동의 교훈

식품기업에 이미지 손상은 치명타

1974년 느닷없이 영국 런던의 거리

에 ‘유아 살인자’라는 팸플릿이 등장했

다. 영어로는 ‘The Baby Killer’다. 가

난과의 전쟁이라는 영국의 한 사회단

체가 만든 것이다. 그 단체의 영문이

름은 ‘War on Want’이다.

가난구제를 목표로 만들어진 이 기

구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

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단체는 28페

이지짜리로 만든 전단에서 네슬레가

무리한 유아 분유 판촉으로 유아들을

죽이고 있다고 고발했다.

네슬레는 ‘말도 안된다’며 아예 무시

해버렸다. 1년쯤 참고 지나자 이번에

는 독일에서 또 문제가 터졌다. ‘The

3rd World’라는 독일의 한 제3세계 지

원단체가 그 비방전단을 독일어로 번

역하여 뿌리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사

용하는 나라로 확산됐다. 네슬레 본사

가 있던 스위스에도 전해졌다. 참다못

한 네슬레는 급기야 이 두 단체를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이 단체들이 지적한 네슬레의 살인

혐의는 무려 10가지가 넘는다. 그중에

서도 가장 크게 문제가 됐던 것은 아

프리카 지역에서의 산모들에 대한 분

유샘플 제공이다. 네슬레는 당시 아프

리카 시장을 개척한다면서 병원을 돌

아다니며 갓 출산한 산모들에게 분유

를 공짜로 제공했다. 그러다가 보름쯤

후에 공급을 중단했다. 출산 후 수유

를 중단하면 이내 어머니의 젖줄이 끊

긴다. 젖줄이 막힌 후에 공짜 분유 배

급을 끊음으로써 무조건 사먹도록 강

요한 것이다. 분유를 살 돈이 없는 산

모들로서는 아이를 굶겨야 하는 상황

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사회단체들은

네슬레의 이러한 행위를 살인이라고

본 것이다.

분유를 타는 방법도 문제였다. 현지

말로 안내가 이루어지지 않아 너무 많

이 먹이거나 너무 적게 먹여 죽는 아이

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 단체의 지적

이다. 오염된 물로 분유를 타 먹이는

바람에 죽어간 유아들도 줄을 이었다.

2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내려진 네슬

레는 가까스로 승소했다. 그렇다고 완

벽한 승리도 아니었다. 살인에 대해서

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판매방식

에는 문제가 있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 법원은 분유가 모유보다 더 나은 것

처럼 홍보하는 것 등에 대해 시정명령

을 내렸다. 재판을 통해 네슬레가 거

둔 이득은 별로 없었다.

오랜 법정투쟁을 거치면서 회사에

대한 이미지만 크게 나빠졌다. 급기

야 1977년에 이르러서는 미국 등 9개

의 나라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2

년 후인 1979년에는 불매운동에 참여

한 사회 및 종교단체의 수가 500여개

로 늘어갔다. 네스카페를 비롯한 네슬

레의 제품들이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는 잇달아 철수되는 사태에까지 이르

렀다. 네슬레는 억울하다며 항변을 했

다. 불매운동의 불법성과 잘못을 규탄

하는 광고도 마구 냈다. 불매 운동에

나서는 성직자들에게 100만 통 이상의

편지를 보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

다. 그래도 소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네슬레는 결국 1984년 여론에 무릎

을 꿇는다. 모유 대체재인 분유 선전

을 중단키로 하는 등 불매운동단체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 것이다. 런던에서

시작된 불매운동은 네슬레가 백기투

항한 뒤 장장 10년 만에 종식됐다.

김윤식 기자

분유개발로 떼돈 벌어 가난한 이웃 구제에 전념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경제연구소 소장(경제학 박사)

국민기업으로 커갔다. 지금도 노바티

스와 로슈 그리고 UBS와 함께 스위스

의 자존심이 되어있다.

초기에는 미국인 조지 페이지와 찰

스 페이지 형제가 만든 앵글로 스위스

연유회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러다가 1905년 이 두 회사가 하나로 뭉

쳤다. 이 통합이 네슬레의 든든한 기

초를 다지는 초석이 됐다. 합병 후 회

사 이름은 네슬레&앵글로 스위스 연

유 컴퍼니로 정했다.

1914년 2차 대전이 터졌다. 전쟁으로

목숨이 오가는 판국에 액체로 된 우유

를 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럽 각국 정부는 우유 대신 분유와 연

유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분유와 연

유를 제대로 공급할 회사는 네슬레뿐

이었다. 불티나게 팔렸다. 모자라는

분유와 연유를 생산하기 위해 라틴 아

메리카 등 전 세계에 80개의 공장을 지

었다.

이것이 패착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모두들 분유 대신 우유로 회귀해 버렸

다. 생산시설이 감자기 남아돌았다. 그

바람에 당시 돈으로 1억 스위스 프랑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큰 위기였다.

네슬레는 이 난국을 새 상품 개발로

극복해갔다. 새 상품을 잇달아 개발하

여 놀고 있는 시설을 다시 돌린 것이

다. 초콜릿이 그 대표적인 상품이다.

초콜릿 파우더 음료인 마일로와 엘리

든, 맥아와 우유를 혼합한 맥아유 버

트밀크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1938년에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인스

턴트 커피인 ‘네스카페’를 개발했다.

당시 브라질에는 커피원두가 넘쳐나

고 있었다. 너무 많은 커피나무를 심

었기 때문이다. 가격이 폭락하면서 많

은 농장주들이 파산했다. 은행에는 파

산 농장부의 빚 대신 잡힌 커피원두가

넘쳐났다. 네슬레는 이 처치 곤란의

커피원두를 싸게 들여다 오랫동안 보

관이 가능한 마른 커피로 만들어냈다.

그것이 인스턴트 커피의 시작이었다.

개발에 무려 8년간이 소요됐다.

그 직후 2차 대전이 터졌다. 미국이

이 인스턴트커피를 군인들의 필수 식

량으로 지정했다. 전 세계의 전쟁터로

퍼져나갔다. 전쟁 후에도 퇴역군인들

이 자기 고향으로 가 네스카페를 알렸

다 . 전쟁을 회사 도약의 발판으로 승

화시킨 것이다. 이 네스카페는 네슬레

가 세계 최고의 반열로 올라서는 데 결

정적인 효자품목이 됐다.

커피 원액을 캡슐에 넣어 진공 포장

한 것도 네슬레의 아이디어다. 이 캡

슐을 기계에 돌려 가정에서도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그 기계

도 물론 네슬레가 처음 만들었다.

네슬레의 가장 큰 강점은 시대에 맞

게 지속적으로 첨단의 신제품을 만들

어냈다는 사실이다. 이유식에서부터

유제품 그리고 초콜릿, 과자, 아이스

크림, 다이어트 식품, 양념소스, 커

피, 가공식, 미네랄생수 그리고 심지

어는 동물사료에 이르기까지 가장 앞

선 제품을 선보여 왔다. 네슬레가 보

유하고 있는 브랜드는 1만여 개다. 아

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식품을 가장 많

이 개발한 곳도 단연 네슬레다. 창업

주 네슬레가 인공모유로 젖이 모자라

는 영아들을 구해냈다면 그 후예인 오

늘날의 네슬레 맨들은 건강식품으로

전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겠다는 포부

로 지금 이 순간에도 기술과 과학을 앞

세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앙리 네슬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