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슬래그(slag) 배수정 #1 “여기는 멕시코의 메리다이다.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가면 웃스말이라는 마야유적지가 있고 동쪽으로 가면 세계 제 7 대 불가사의인 치첸이트사가 있다. 치첸이트사에서 고대 마야인들은 중앙아메리카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다. 신들의 집합 장소라고 부르는 오디와간이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건물의 배치는 고도의 천문학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행성배치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천문학과 기하학에 큰 자료가 되어 주는 구 마야인은 9C 중반 뚜렷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지구 상에서 감쪽같이 없어졌다. 우리가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남기고간 마야의 유적과 달력 때문이다. 그 달력은 BC3114 년 8 월 12 일에 만들어졌고 학자들의 달력 계산에 따르면 2012 년 12 월 23 일에 지구가 멸망 할 것이라는 해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번 주에 소개할 곳은 9C 이후에 다시 생겨나서 신 마야문명을 꽃 피우다가 다시 15C 에 사라져버린 마야인의 유적지인 치첸이트사이다.” “컷, 여기까지 하고 내일 치첸이트사에 가서 이어서 찍기로 하지.” 강 피디가 이렇게 말하고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발길을 돌려서 혼자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강 피디는 이곳에 온 뒤로 부쩍 말이 없다. 물론 내 탓도 있지만 그의 본래 가지고 있던 성격마저 이곳에 있을 법한 마야인들의 영혼에 의해 퇴색되어져 버린 것인지 시종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술 한 잔 하러 가는 걸 겁니다. 이곳에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모르셨죠?” 내가 한참동안 강 피디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박 작가가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했다. 그래. 나는 얼마 전까지 사귀던 남자의 친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서 그와 헤어졌어. 나도 알고 있다고. 이렇게 뭐라고 하지도 않은 박 작가에게 자격지심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당홍씨도 우리 스텝들이랑 한잔하죠? 내일은 빡세게 일할 것 같으니 비행기를 타고 온 여독도 좀 풀고요. 어때요?” 박 작가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하자 조연출인 사락씨가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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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슬래그(slag)
배수정
#1
“여기는 멕시코의 메리다이다.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가면 웃스말이라는 마야유적지가 있고
동쪽으로 가면 세계 제 7 대 불가사의인 치첸이트사가 있다. 치첸이트사에서 고대 마야인들은
중앙아메리카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다. 신들의 집합 장소라고 부르는 오디와간이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건물의 배치는 고도의 천문학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행성배치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천문학과 기하학에 큰 자료가 되어 주는 구 마야인은 9C 중반 뚜렷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지구 상에서 감쪽같이 없어졌다.
우리가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남기고간 마야의 유적과 달력 때문이다.
그 달력은 BC3114 년 8 월 12 일에 만들어졌고 학자들의 달력 계산에 따르면 2012 년 12 월
23 일에 지구가 멸망 할 것이라는 해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번 주에 소개할 곳은 9C 이후에 다시 생겨나서 신 마야문명을 꽃 피우다가 다시 15C 에
사라져버린 마야인의 유적지인 치첸이트사이다.”
“컷, 여기까지 하고 내일 치첸이트사에 가서 이어서 찍기로 하지.”
강 피디가 이렇게 말하고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발길을 돌려서 혼자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강 피디는 이곳에 온 뒤로 부쩍 말이 없다. 물론 내 탓도 있지만 그의
본래 가지고 있던 성격마저 이곳에 있을 법한 마야인들의 영혼에 의해 퇴색되어져 버린 것인지
시종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술 한 잔 하러 가는 걸 겁니다. 이곳에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모르셨죠?”
내가 한참동안 강 피디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박 작가가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했다.
그래. 나는 얼마 전까지 사귀던 남자의 친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서 그와 헤어졌어. 나도 알고 있다고. 이렇게 뭐라고 하지도 않은 박 작가에게
자격지심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당홍씨도 우리 스텝들이랑 한잔하죠? 내일은 빡세게 일할 것 같으니 비행기를
타고 온 여독도 좀 풀고요. 어때요?”
박 작가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하자 조연출인 사락씨가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우리는 호텔 바에 가려다가 이곳의 경치도 구경할 겸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을 쪽에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술집들이 많았는데 관광객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생겨난 시설들 같았다.
파란색의 등 아래 빛나는 술집의 간판은 ‘Slag’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정말 지구에 종말이 올까요?”
순식간에 맥주 500CC 두 잔을 비운 사락씨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술집 안을 지배하듯
비추는 파란색 형광등으로 인해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박 작가는 빛나는 푸른색 옷이 되었고
사락씨의 눈은 고양이의 눈처럼 반짝거렸다.
“취재하다보면 우리도 뭔가 깨달은 바가 있겠지. 요즘 하도 2012 년 지구멸망에 대해서
얘기하다보니 우리 방송국도 이런 취재를 오게 된 것 아냐. 그죠. 당홍씨. 당홍씨도 요즘 그런
얘기들 때문에 책을 썼던 것 아니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박 작가의 말에는 나의 소설을 요즘 시류에 맞춰서 내는 속물들 속에
넣으려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어서 동의하기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가 나를 부를 때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는 의도도 마음에 안 들었다. 사실 박 작가는 케이블 TV 의
구성작가를 몇 년 동안 했으나 이렇다 할 책을 쓴 적도 없었고 본인 스스로 창작을 해서 방송을
만든 것도 없었다. 그저 작가라는 이름만 가지고 방송국에 출근하는 여느 샐러리맨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붙이는 박 작가라는 직함은 사실 내가 더 붙이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지금은 2011 년 10 월. 아직 지구가 멸망이 되려면 1 년도 더 남았잖아요. 걱정은 나중에 하고
내일 치첸이트사에 갈 걱정이나 해야겠습니다. 빡센 하루가 되겠으니…….”
사락씨가 종업원이 새로 가지고 온 맥주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무슨 걱정은? 나는 재미있기만 하겠는걸. 세계 7 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야유적을 직접 이
두 눈으로 본다고 하니 흥분돼서 잠도 안 오겠어.”
평소에 감동을 잘 받지 않는 성격의 박 작가가 웬일인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멕시코는 사계절이 없다. 일 년 내내 더운 날씨를 유지한다. 이런 곳에서 마야인들은 어떤 것을
발견했을까? 박작가도 그렇지만 나 역시 뛰어난 문명을 가졌던 그리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마야인들이 궁금했다. 어쩌다보니 멕시코까지 왔지만 이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어젯밤에 호텔에 들어 올 때까지 보이지 않던 강 피디가 조식을 먹는
테이블에 먼저 와있는 모습이 보였다. 테이블에는 호텔 측에서 차려놓은 뷔페식 음식들은 하나도
가져오지 않고 달랑 토스트 한조각과 블랙커피 한잔만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피디님은 아메리칸 스탈인가 봅니다. 난 맛있는 음식을 가져 올까나.”
이렇게 말한 박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뷔페식으로 차려놓은 중앙 테이블 쪽으로 갔다.
“박 작가는 어제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아침에 저런 기름진 게 들어가나 봅니다.”
이렇게 말한 사락씨도 어제 과음을 해서인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오늘 촬영 있는데 어제 너무 마신 거 아냐? 날씨도 더운데 숙취면 더 힘들 텐데. 얼굴색이
진짜 안 좋아.”
강 피디가 나지막이 말했다.
“뭐, 화면에도 안 나올 얼굴, 젊은 혈기로 하면 되죠. 얼굴색 좋아야할 사람은 윤 작가님이어야
하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강 피디에게 자기도 술을 먹어서 얼굴색이 안 좋으면서라고 묻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나오는
질문을 참았다.
“와, 여기 좋은 호텔인가 봅니다. 조식이 이렇게 푸짐하게 나오고. 근데 피디님 어제
과음하셨습니까? 얼굴색이 영 안 좋은데요?”
박 작가는 내가 참았던 질문을 너무나 쉽게 하고는 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접시 위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은 나와 사락씨였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묵었던 메리다는 멕시코의 가장 끝에 있는 유카탄반도에 있다. 올 때는 힘들게 왔지만
그 만큼 치첸이트사가 가까워서 오늘의 이동은 부담되지 않았다.
“이곳은 건조한 석회암지대에 있고 유적은 석회암, 회 반죽한 흙 그리고 목재로 되어 있다.
이트사족에 의한 최초의 취락건설은 530 년 이전의 일이며 7C 에 잠시 포기를 한 후에 10C 에
재건을 했다. 그리하여 11C 이후 마야 신제국이 꽃을 피웠다. 마야문명의 태양은 다음날을 위해
날마다 밤과 싸워야 했다. 그런 태양에게 힘을 주기위해서 마야인들은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쳐야한다고 믿었다. 태양을 향한 절대 숭배. 마야인들은 태양과 가장 가깝게 지내면서 독수리의
심장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태양을 정확히 읽었고 기억했던 민족이었다.
마야인들은 천문학과 기하학에 뛰어나서 태양의 미세한 변화를 읽고 계산했다. 그것이 바로
태양력이다. 그 증거로 이 치첸이트사에는 카스티요라는 쿠클칸의 신전으로 불리는 피라미드가
있는데 피라미드의 높이는 250m. 이곳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나를 따라오는 사락씨의 카메라가 숨 가쁘게 느껴지면서 거대한 카스티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에서 요동치는 불안감은 너무도 큰 건축에 대한 위화감인 것인지
나를 뚫어져라 보는 강 피디의 눈빛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피라미드의 4 개의 사면마다 가운데에는 계단이 있다. 한 면의 계단 수는 90 개. 총 계단 수는
꼭대기 제단 5 개까지 합쳐서 365 를 완성한다. 바로 인간의 일 년 365 일이다. 이 피라미드는
동서남북 기준에서 17 도 북동쪽으로 살짝 틀어져있다. 춘분이나 추분 때는 북쪽 사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한다. 그들은 낮과 밤이 같은 춘분과 추분에 농사를 시작하고 거둬들이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계단 앞에서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박수 소리가 공명을 해서 새소리를 내는 것을
경험하고픈 관광객들이었다.
“컷!”
경쾌한 소리로 컷을 외친 강 피디는 건너편에 있는 폭탁폭경기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강 피디 언제부터 저렇게 동작이 빨랐지? 연장가지고 다니는 나도 좀 생각해야할 것 아냐.”
사락씨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락씨는 조연출이지만 예산이 넉넉지 않은 케이블 TV 의 사정
때문에 이번에 여행 오는 멤버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해서 카메라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 방송국에서 내가 낸 마야문명과 지구 종말에 관한 책에 관한 것을 특집
방송으로 내 보내준다는 제의가 고마울 뿐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단출하게 내레이터를 하는 나와
박 작가, 강미루 피디와 이사락 조연출 이렇게 넷이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여기는 왠지 으스스하군.”
강 피디가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사랑했었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울림이 있는 음성. 하지만 내가 사랑한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신기하게도 목소리만 좋아하게 된 사람이 있었고 더 신기하게도
목소리만 좋아서 사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는 저 제단에 죽은 자의 목을 올려놓았기 때문일 거야. 아직도 마야인들의 영혼이 저 곳에
있을지 모르지.”
이것이 내가 멕시코에 와서 처음으로 그에게 건넨 말일 것이다.
폭탁폭경기장은 마야의 게임 폭탁폭이 열리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승부를 가리고 이긴
자들은 신에게 목숨을 바치는 영광으로 목을 내 놓았다. 경기장 앞의 제단벽면에는 온통 해골이
새겨져있었는데 바로 희생된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제단에 있는 차크몰 신상은 접시모양의
바위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저 접시위에 살아있는 자의 심장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여기에 있던 후기 마야인들은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다가 1500 년에 갑자기 유적을 그대로
놔둔 채 이곳을 떠나버렸고 그들의 흔적은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피난을 가더라도
가재도구라도 챙기는 법인데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왜 이곳을 떠났고
어디로 갔을까?”
나의 내레이션은 이렇게 끝났다.
“저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을 때 외계인이 도와줬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 얘기는 방송에 안 넣을
건가요?”
사락씨가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말했다. 강 피디가 그저 멀뚱히 쳐다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사락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락씨 건너편의 창 밖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창 밖을 보니 뜨거운 태양아래 파스텔 톤 벽 앞에 어떤 여자가
부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그 부자연스럽다고 이유는 서 자세도 그렇지만 더운 바깥의 공기와
다르게 두꺼운 옷을 입고 인도여자처럼 사리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 피디는 고개를 돌리다가 나의 눈과 마주치자 의자 깊숙이 앉은 채 눈을
감아 버렸다. 내가 다시 창 밖을 쳐다보았을 때는 그 미스터리한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2
2012 년 겨울이 시작 되었다.
“지금 세계 곳곳은 유래 없는 지독한 한파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저도 지금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인터넷방송을 하는 중인데요. 이것 보십시오! 집안에도 고드름이 얼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 밖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가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니
조심하십시오.”
TV 방송의 채널들이 하나, 둘씩 꺼져가고 있었다. 그나마 방송을 보낼 수 있는 일부 채널만이
날씨에 관한 뉴스만 반복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저거 보니까 예전에 본 종말영화 2012 라고 있잖아. 존쿠삭 나오는 거. 거기에 나온 미친 기자
같다.”
유리가 TV 를 보면서 말했다.
“사실은 그 기자가 제일 미치지 않은 거 아니었나? 지구 종말이 사실이었잖아. 그런데 그거
끝에 어떻게 끝났지? 주인공들 모두 죽었나?”
내가 이렇게 묻자 유리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로 오래되지 않은
영화인데도 결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나름 충격적이라 생각하며 보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도 그렇다.
“밖에 있던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들은 다 얼어 죽었겠지?”
유리는 컴퓨터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처럼 지내던
친구로 3 년 전부터 함께 살고 있었다.
“이러다가 전기와 물이 끊기면 어쩌지? 난방은 또 어떻고 지금 바깥기온이 영하 40 도라잖아.
아마도 집안도 영화 20 도는 족히 넘을 것 같지 않냐? 남극도 이 정도 될까? 예전에
남극일기라는 영화를 봤는데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어.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우리는 이미 집안에서 내복에 오리털 파카까지 껴입은 상태였다.
“글쎄다. 내가 한번 검색해볼까? 음…….”
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바짝 대고 모니터를 보았다. 유리는 원래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져서 안경이 깨지고 다리를 접질렸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회사를 결근한 날부터 몰아닥친 한파로 그녀는 그 후로 밖에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은 안경만 있다면 출근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지만 이렇게 무기한 집에
있어야만 했다.
한파는 갑자기 몰아닥친 쓰나미처럼 짧은 시간에 세상을 얼려버렸고 여행을 갔던 사람, 야근을
했던 사람, 밤새 술을 마셔서 집에 귀가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무기한 집에 가지 못하게 하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얼려버리거나 실내에 가두어 버렸다.
나는 그날 유리가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일찍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하얀 회오리 같은 바람을 보았다. 바람이 보인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불어 닥친 바람은 신호를 기다리느라 잠시 정지된 버스를 흔들었다. 마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지진이라는 것이 이것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버스에 탄 사람들은 불안한 듯
웅성거렸다. 1 분정도 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무섭게 흔들어서 버스를 뒤집어 놓을 것
같은 바람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그 고요함이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버스는 출발하고 집 앞
정거장에 멈췄다. 버스에서 내리자 조금 전에 불어 닥친 하얀 회오리바람 때문에 굉장히 추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전혀 춥지 않았다. 분명 겨울이다. 추운 것이 당연한 계절인데 추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했다. 게다가 낮에 비해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야 마땅한 겨울밤이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어귀와 계단은 유난히 인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늘 내 시야에 어른거리던 두세
마리의 낯익은 길고양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빨리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에 발생했던 일련의 일들이 좋지 않은 예감을 만들었다. 사실
퇴근하면서 슈퍼에 들러서 집에 얼마 남지 않은 라면과 생수를 사갈 계획을 접게 만드는 이상한
날씨가 내 발길을 재촉했다. 발끝이 조급함으로 힘이 들어가서 저리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빠르게 하고 빌라의 현관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현관이 다시
가볍게 닫히자마자 유리문 밖을 보았다.
내가 들어오기가 무섭게 버스에서 보았던 하얀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천지를 흔들 것
같은 바람으로 요동을 쳤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육중한 빌라의 건물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오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밖의 광경을 보았다. 한참 동안 미치도록 불어 댄
바람이 얼음처럼 멈췄다. 순식간에 바깥의 풍경이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경치들이 급속
냉동된 듯 반짝 거렸다. 유리로 된 현관도 얼어붙어서 내가 손을 대면 산산조각 나거나 손이
붙어서 함께 얼려버릴 것 같았다.
만약, 내가 5 분만 아니 1 분 늦게 들어왔다면 어쩌면 나도 저 풍경과 함께 얼어버렸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계단을 올라와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유리는 발에 붕대를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바람소리가 심하게 나서 걱정했다고 하면서. 괜히 자기가 빨리 오라고 해서
위험하게 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유리가 나를 빨리 오게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원히
이 집에 못 올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후로 이어지는 내려가기만 하는 기온과
최악의 한파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한 동안 누구도 외출을 하지 않는다. 만약 외출을 한다면 온몸이 냉동이 되어서 죽을 각오로
나갔다 와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일주일째 우리는 바깥출입을 한 발자국도 하지 못한 채 집에
갇혀 버린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이층이었다. 지난 번 멕시코 치첸이트사에 다녀온 후에 유리를 설득해서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예전의 집은 아래쪽에 있어서 대문 밖을 나가면 사람들이 많았고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곳은 왠지 안전할 것 같은 지형에 위치한 집이었다. 조용하고 견고한
적당히 오래된 건축으로 되어있어서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곳은 강
피디와의 추억도 없을뿐더러 그가 알지 못하는 장소였다.
“남극은 매일 영하 55 도 체감온도 영하 60 도로 시야거리가 30m 도 안될 정도로 화이트
아웃으로 세상이 하얗게 보인다는군.”
유리가 모니터를 읽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추워졌으니 남극은 그에 비례해서 더 내려갔을 걸. 우리도 지금 밖이
화이트 아웃이야. 넌 직접 안 봐서 몰라. 그날 나 들어올 때 죽을 뻔 했다고.”
“그래? 아쉽다. 방송에서 나온 것은 현실감이 없어서 직접 봤어야 했는데”
유리가 이중으로 굳게 닫히고 두꺼운 커튼까지 쳐진 창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그 단순무식한 호기심으로 창문을 열어볼 생각이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걸. 열자마자
네 얼굴은 날아가 버리고 나도 어딘가에 처박혀서 추위에 떨며 열린 창문을 다신 닫지 못하는
상황이 올지 모를 테니까”
내가 강한 단어만을 골라 말하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좁은 공간 안에 할 일도 없이 며칠 동안 있다 보니 너무도 무료하고 심심했다. 바깥은
내다본지 오래라서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나 간혹 방송으로 나오는 용감한 기자의 셀카를 통해서
얼어붙은 도시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집에 있던 읽지 못한 소설들을 음식처럼 읽어치웠고 유리는 병적으로 그나마 나오는
인터넷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후 이주일이 더 지났다. 유리의 예상대로 인터넷이 끊기고 휴대전화가 불통이 되었다.
하지만 재난영화처럼 아직까지는 먹을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 가스도 나왔다.
재난영화를 보면 어찌나 빨리 식량이 떨어지는지……. 영화 속의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가지러 밖으로 나가고는 했다. 우리는 지금 라면은 떨어졌지만 얼마 전에 쌀 20Kg 을 사놓았고
김치와 반찬거리도 충분했다. 그러나 가스가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밥을 미리 좀 해 놓을까?”
“할일도 없는데 하지 뭐. 반찬이나 국도 해 놓자.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빨리 상하지는 않겠지.
나중에 혹시 추위에 덜덜 떨며 생쌀을 씹어 먹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우리는 TV 에서 본 재난영화처럼 앞으로 전기가 끊기고 수돗물이 끊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래도 밖에 나가면 좀비들이 득실대지는 않을 것 아냐? 그저 좀 춥다는 거뿐이지?”
유리는 마치 자신에게 묻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가스와 수돗물이 끊긴 것은 이틀쯤이었고 다행히 일주일 뒤 거짓말처럼 한파는 사라졌고
우리는 만들어 놓은 음식을 빨리 처리해야했다.
한파가 끝나자 그 동안 지구 안에 있었던 소식이 TV 건 인터넷이건 혹은 스마트폰의 SNS 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파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 특히 뜨거운 여름만이 오로지
존재하는 아프리카까지도 꽁꽁 얼려버렸고 지금은 다시 녹이느라 홍수로 난리가 났다고 했다.
겨울을 한 번도 본적도, 겪은 적도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전원 사망하고 우리나라에도 그날
미쳐 칼바람을 피하지 못하거나 화이트아웃이 되어버린 도시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실종되거나
죽었다고 했다. 이렇게 지구의 인구가 반 이상이 불과 한 달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에 있던 길고양이나 유기견들은 이후로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쥐도 개미도 바퀴벌레,
거미도 바깥에 다니는 인간을 뺀 모든 생명체들이 사라졌다.
방송에서는 먀야인들이 예언한 극이동 설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박사들이 나와서 토론을
했다.
“ 프린스턴 대학의 지구 학자 아담 멀 루프는 호주에서 채취한 바위의 자기장 방위와 예전에
채취한 노르웨이 표본을 비교했습니다. 결과로 지구의 지각과 맨틀 전체가 이동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이동이 8 억 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구
초기에 엄청난 대이동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정말 극이동이라면
지금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대화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인류가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렸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테지요. 그러니 극이동 설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TV 에 보이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나오는 어느 미국의 박사가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했다. 우리는 이제 지구 종말론에 면역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은 2012 년이 시작 되면서
홍수처럼 남발하는 지구 종말론에 관한 프로들을 지겨워했다.
“정말 이상하지? 주위에 돌아다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볼 수가 없어. 심지어는 비둘기나
참새까지도……. 그 말이 사실인가?”
유리가 퇴근길에 시장을 본 쇼핑봉투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 기온으로 변종되어버린 인간들이 있다고 하잖아. 그들이 길거리에 있던 동물들을 모두
잡아먹었다는 거야.”
“그거 괴담이야?”
“괴담이 아니고 진짜야. 너는 밤에 골목길로 들어설 때 뒤통수가 따갑다는 생각 안 들었어?
아마 그 변종인간일거야. 지금은 길거리 동물들을 잡아먹지만 그게 다 없어지면 인간을 노리겠지.”
“유리. 너 공포영화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내 말에 유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욕실로 들어가자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인기검색어 중에 좀비인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2010 년에 구제역과 AI 그리고 조류독감이라는 전염병에 걸린 살아있는 소와 돼지, 닭의 살
처분을 하던 사람들 중에서 살 처분 트라우마로 고생하다가 변종된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일을
하면서 AI 병원균과 구제역의 병원균에 노출이 많았고 살아 있는 동물을 산 매장하려니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요즘, 길거리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다가 잡힌 사람들의
경력을 보면 모두 지난 구제역 살 처분현장에 동원된 사람들로 이번 한파가 끝나면서부터 급격히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들을 일컬어 좀비인간이라고 한다.
참……. 인간은 무엇이든지 정의하려하는 습성이 있다. 좀비인간에게 직접 물어본 것도
아니면서 어찌 이렇게 잘 알지. 신기하기만하다. 이렇게 정의해 놓으면 우리는 그저 아,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