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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 1장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 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되는 서론구인 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 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 역(LXX)의 총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 작'(* ,'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 심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 ,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 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바로 앞에 나오는 단어 '예수 그리스도'(* , 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3:11;5:7;9:7;12:6;13:32;14:36,61;15:39).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p.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 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 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켰으나, 고 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 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 시된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 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 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 등의 헬 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 ()를 밝히며 인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 사 '크리오'(*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 )에서 '메시야'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 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 성 및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 조).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 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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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Aug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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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마가복음�제� 1장

=====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 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局限)되는� 서론구인지� 분명치는� � 않으나� 아마도�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세례로부터'라는� 표현

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

역(LXX)의� 총�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 � � � � � � � � � � � �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

작'(*� � � � � � � � � � ,'아르케')이라는�말로� 본서� 기록의� � 출발점으로�삼은�것은� 적어도�예수� 그리스도를�중

심한�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 시작됨을� 알리기�위한� 의도적인�표현이라�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 � 하나님의� 아들(*� � � � � � � � � � � � � � � � � ,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 사본

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 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 � 크다.� � � (3)� � � '하나님의� � � 아들'은� � � 마가복음의� � � 주요� � � 주제로� � �

등장한다(1:11;3:11;5:7;9:7;12:6;13:32;14:36,61;15:39).�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

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 되는� �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p.120).� 실로� 이� � 칭호는� � 본서의�서두와� 마지막�부분(15:39)을� 장식

하는�대� 주제�가운데�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 아들'이란� 마가가�구약� 신학적�배경과�당시� 로마� 문화

적� 배경을� 절묘하게� �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 동시적으로� �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

존재(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켰으나,� 고

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

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 한편� �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 �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

시된� '예수� 그리스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예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 오히려� � 주격으로� �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

다.� 왜냐하면� 여기서� �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

그� � 복음의�근원이�바로� 예수의�생애와�관련된�사건들에�있다는�것을�선포하고자�했던�것으로� � 추정되

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은연중에� 나타나고�있다.� 여하튼�위의� 사실의�결론으로�본� �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 � � � � � � � � � ),'예수아'(*� � � � � � � � )� 등의� 헬

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

(要諦)를� �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 일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 � � � � � � � � � � � � ,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

사� '크리오'(*� � � � � � � �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 받은� �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 � � � � � � � � � )에서� '메시야'가� �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호칭이� 아

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조).� � � 복음� -� 여기서�먼저� '복음'(*� � � � � � � � � � � � � � � � � � � � � � � ,유앙겔리온)이란�원래� '좋은� 소식을�전하

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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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내용이� '케뤼그마'(*� � � � � � � � � � � � � � ,'선포')적� 성

격을� � 지니고�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마가의� 저술이�그리스도의� 복된� 소식

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 복음서(a� �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한다

(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 �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 제시되고� �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 문구인� � 창� � 1:1의� '태초에'(*� � � � � � � �

� � � � �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 � � � � � � � )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

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 '아르케'(*� � � � � � � � � )에는� � 관사가� � 없으나� � 영역(英譯)� � 성경에는� �관사� � 'the'(즉� �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 한층� � 부

각시켜� 주고� 있다.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시작에�동참한�예수께서�구속사적인� � 관점에서�복음으로�말미암아�새� 시대를�시작하

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 이� �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

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 구원을�위한� 하나님의�신시대가�시작되었다는�사실을�암중(暗中)� 강조하고�있는�것이다.

=====1:2� 선지자�이사야의�글에� -� 저자� 마가는�우리에게� '선지자�이사야의�글'을�인용한다고하였지만�

사실은� 먼저� 출� 23:20과� 말� 3:1을� 인용하고� 난� 다음에,� 3절에서� 비로소� 70인역(LXX)에� 의해� 사�

40:3을� 인용하였다.� 이처럼�마가가�모세나�말라기의�이름을�언급하는�대신�단지� 선지자�이사야만을�거

론한� 것은� 마가의� 구약에� 대한� 이해가� � 부족해서가아니라� 상세한� 기술을� 피하고자� 하는� 마가의� 저작�

의도에� 따라�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사야의� 이름만을� 언급했다고� 본다.� 두� 구절은,� 2절의� 사자가� 구체

적으로� 세례� � 요한의예수에� 대한� 임무를� 말했다면,� 3절의� '소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 보다� � 강조

점을둔� 것으로서,� 서로� 상관되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한� 구약의� � 예언적� � 문구이다.� 한편� 마

가는� 이처럼� 복음서� 초두에� 구약�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사역과� � 본질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

서는� 구약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히브리어� 성경�

말� 3:1에서� 인용되었으나,� 히브리어� � 성경과70인역은� '네� 길을'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강조하는� '내� 앞에서� � 길을'이라고�되어� 있다.� 그런데�이� 부분의�메시야적�특성을�고려한다면�이런� � 의

도적� � 변용(變用)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랍비들도� 말� 3:1의� 엘리야와� 출� � 23:20의사자(使者)를동일시하여� 이� 두� 부분을� 비슷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 �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이는� 고대� 근동에서� 군주

가� 행차할� 때� 도중의� 일반� 백성들에대한� 교육,� 군지� 숙식을� 준비하던� 풍습� 등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구야과� 신약의� 분기점이� 되시는� 예수의� 등장에� 앞서� 지금껏� 진행되어� 온�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 민

족의심령을� 먼저� 준비시키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완벽히� 예언된�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

예비하리라'는� 뜻의� 헬라어� '카타스큐아조'(*� � � � � � � � � � � � � � � � � � � )는� � '준비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돌

이키다'는� 뜻도� 함의(含意)하고� 있다.� 따라서� 세례� � 요한의� 메시야� 도래를� 위한� 준비� 사역중� 사람들의�타락하고� 부패한�심령을�돌이켜�오실� 예수를�영접하도록�하는�회개에의�사역에�가장� 큰� 비중이�주어짐

을�시사한다(마� 3:1-12,주제강해� '세례요한의�인물�연구'� 참조).

=====1:3� 본� 절은� 사� 40:3의� 70인역의� 인용으로서,� 70인역과� 본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70인역

의� '우리� 하나님의'라는� 말� 대신� 여기서는� '그의'라는� 말이� 사용된� 점이다.� � 이는마가의� 의도적� 변용일�

수도� 있고,� 마가가� 참조한� 사본의� 원문이� 이미� � 그러한� � 변화를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편� 여기서� '그의'라는� 말의� 선행사는� '주'(*� � � � � � � ,� 퀴리오스)가� 되는데,� 이� 칭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 부르던� 것이므로� 본� 구절은� 분명� 주� 예수에� 대한� 기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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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에� -� 여기서� '광야'(*� � � � � � � � � � � � ,� 에레모스)란� 문자적으로� 반드시� � 건조하고메마른� 땅을� 가리

키지�않고,� 사람이�살지� 않는� 지역,� 버려지고�황량한�처소라는� � 의미를�지닌다.� 즉� 이곳은�개간되어�사

람들의�주거지역으로�활용되는�곳과는�정반대의� � 개념이다.� 한편� 마� 3:1에서는�이것을� '유대� 광야'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유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광야지역은�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복이� 심한� 황폐하고� 메마른� � 불모지대로서� 여기저

기� 뱀들이� 기어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곳� 부근에는� 쿰란(Qumran)� 공동체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 그렇다면� � 쿰란공동체의� 영향력이� 요한에게� 어떤� 양상으로�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 금욕생활과엄격한� 자제력� 등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사역이나� 복음� 전파� � 내용과� 종말론적� 사고� 등에� 관해� 전반적인� ,� 영향력

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눅� 3:1-20� 주제� 강해,� '세례요한의� 세례'� 참조).� 그런데세례요

한의� 활동무대는� 이곳� 유대� 광야� 지역뿐� 아니라� 요단강� 동편� 지역에까지� 확장되었던� 사실이� 마� 3:5에

서� 분명히�밝혀진다(요� 1:28� 주석� 참조).� 한편� � 출애굽� � 당시(출23:20)� 하나님께서는�이스라엘�백성들

이� 광야를� 통과할� 때� 사자(使者)를� 앞서� � 보내심으로�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받게� 하셨다.�본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 2의출애굽� 때에� 다른� 한� 사자(즉� 세례� 요한)을� 광야에� 앞서� 보내시고� 하

나님께서� � 그리스도를�통해�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전파하고�예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신령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눅� 7:24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셨다.� 광야는� � 외롭고� � 쓸쓸하고무서운� 곳이다.� 실로�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참� 진리되신� �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행복을� 구가(謳歌)할�수� 있을�것이다.� � � 예비하라(* ,� 헤토이마사테)� -� 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예비'하는� 그� 행위의�긴급성을�강조해�주고� 있다.� 즉� 듣는� 즉시� 지체하지� � 말고� � 곧바로예비하라는�것

이다.� � � 첩경�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유데이아스...타스� 트리부스'(*� � � � � � � � � � � � � � � � � ... � � �

)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말로서� 고대� 페르시아나� � 로마에서� 왕들과� 그의� 측근들을� 위해� 건

설해� 놓은� 특별한� 도로망을� 의미한다.� 즉� 주의� �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죄악으로�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심령들이� 회개함으로� 그들� 속에� 쉽게� � 들어오시도록� � 예비하는� �

것을� � 의미한다(마3:2,� 3;눅� 3:8).� � � 기록된� 것과� 같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 문장이� 2절� 초두에� 제시

되어� 2,� 3절에� � 언급된�선지자�이사야의�글을�포괄하고�있다.� 문장�어순이�다른�한글� 개역�성경은� � 이

를무시하고� 3절� 하반부에� 서술적� 형태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록된'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

그라프타이'(*� � � � � � � � � � � � � � � � � )는� 완료형� 시제로서� 어떤� 행위가� � 과거에�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

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기록되어� 현재도�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은� 성경의� � 변함없는� 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신념을� 내비치기� 위해� 구

약을� 이용할� 경우� � 이러한어법(語法)을� 자주� 사용한다.� 한편�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 전파하게� 된� 것은� 요한� 자신만의� 어떤� 깨달음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이� 반영된� 행위가� 아니라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 강조하는� � 표현이다.이는� 또한� 앞으로� 전

개될� 예수의� 구속� 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 전개

되는� 것임을� 암중�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특히�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한다(마� 2:5;4:4;11:10�

등).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 마가는�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 행적만을�말하나,�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요� 1:6에서� �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주어졌던� 예언을� � 언급함으로써(눅� 1:76,� 77)� 앞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명의신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미� 1장에서부터� 마가

복음은� 예수시대의� 배경이나� 그시대의� 사실보다� 시대� 자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마가�

복음의� 특징이다.� 이에� 많은� 주경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단순� 명료하게,� 즉� 주관적� 가감(加減)없이�예수�사건을�전달하고�있다고�전제하고�있다.� � � 죄� 사함을�받게� 하는(* � � �

� ,�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 이� 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죄� 사함에� 관련된'이라고� 되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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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바로� 그런� 취지에서� 흠정역에서는� � 이것을� '죄� 사함을� 위한'(for� � the� � remission� � ofsins)이라고�

번역하고�있다.� 그런데�여기에서�문제는� '에이스'(*� � � � � )의� 용법에�관한것인데,� 이는� � 대부분이 목

적격으로� � 사용되고� � 있지만� � 여기서는 전후� � 문맥상� � 마10:41;12:41� 등에서와� 같이� 그러한� 개

념으로�사용되지�않고,� � 단지 '...에� � 관련된','...때문에'(because� of)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

하면�다음에�연이어� � 나오는� � '세례'자체가�죄를� 사해주는�수단이�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요한

의� 세례는� � 회개를�통해� 사죄를�받기� 위한� 하나의� 공식적이고�의식적인� 행위에�지나지� 않는다.� � � 회개

의�세례(* � � � ,� 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 이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

여� 베풀어지는�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회개'(*� � � � � � � ,메타노이아)란� 어원적으로� 마음의� 변화

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 이보다� 더� 깊은� 의미로� 사용되어� 생각과� 의지와� 인격의� 변화,� 곧� 전

인적이고� 본질적인� � 변화를�의미한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신중한� 전환'이라고�규정하였다.� 그

리고이� 진실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은� 죄사함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죄사함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즉� 세례� � 요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

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 일깨워� � 주고그들의�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 그들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

상에� 온� 것이다.� 이러한� � 의미에서�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8절� 주석� 참조,� 행� 1:4,�

5;19:2에서� � 각각'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주제� 강해를� 다루기로� 한다)는�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의� 긍휼을얻을� 단계로�

진일보(進一步)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 � � � � � � � � � � � � � ,� � 밥티조)는'물� 속에� 잠기다'는� 의미로서�일종의� 침례� 예식을� 뜻한다(마� 3:6� 주석� 참조).� � 그런데이� 세례는� 기독교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의식

이라기� 보다�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정착(定着)되어� 온� 것이다(G.� F.�Moore).� 그러나�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통적,� 의식적으로� 내려왔던� 그� 세례

와는� � 본질적으로� 차이가�난다.� 즉� 요한의�세례는� 회개와�죄의� 고백에� 관한� 기본� 원리에� 그� 근거를�두

고� 있으며,� 바울이� 나중에� 롬� 6:4에서� 설명한�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

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 이� � 의식은일찍이� 헬레니즘(Eleusinian� cult),� 이

시스� 숭배(Isis� worship)� 등� 여러� � 밀의� (密意)종교들� 가운데서도�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이� � 아닌� 유대인들을� 회개하고� 죄를� 자복함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일종의� 이교

도들로� � 다루고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베풀어진� 요한의� 세례는� 유대� 민족들에� 대한� 일종의� � 도전

행위로� 그들에게�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나중에� 체포되어� � 죽음을당하게� 되지만�

그가� 외친� '회개의�세례'에� 대한� 음성은�오늘날까지�살아�역사하고� � 있다.� 이와� 같이� 세례는�단순히�의

식적이고�형식적인데�국한되지�않아야�한다.� 어떤� � 교의(dogma)에� 의해� 세례� 의식에�참여하는�것만으

로써� 교인(church� man)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신자(christian)는� 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중심의�회개,� � 즉세례�요한이�강조하였던� '회개의�세례'에� 있다.

=====1:5<요단강� 세례터>�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 설교

에� � 거족적(擧族的)이고� 대대적인� 호응이�있었음을� 간단히�언급하고�있었지만� 마태와�누가는� � 이들� 무리들에�대해�보다� 상세하게�밝히고�있다(마� 3:1-12;죽� 3:7-14).� 즉� 그들� � 중에는형식과�의식을�중요시

하는� 오만한�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 자유주의� � 신학자들이되어버린�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일반� 민중들을� � 노략하고� 약탈하는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착취

하다가� 경멸받고� 증오받던� 세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있는� 설교

(즉� 회개에� � 대한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본�

구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all)란� 표현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 이가세례� 요한의� 메

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미친�영향력이�얼마나� 컸던가�하는� � 사실을�강하게� � 시사해� 준다.� �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이전에� �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

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 말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야로� 생각할� 수

도� 있었을�것이다(눅� 3:15).� 특히� 그가�전파했던�메시지의�내용이�메시야의�임박한 도래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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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사람들은�흥분의�도가니로�휩쓸렸을�것이�자명하다.� � � 나아가(* ,� 엑세포류

에토)� -� 원문상� 미완료� 시제로서� � 백성들이� 요한에게� '계속해서� 나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마가의�

이같은� 보고는� 조금� 과장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로도� � 세례� 요한의� 선포가� 전국민의� � 관심을� 불러� � 일

으키고,나아가�상당한�기대와�동요(動搖)를� 초래한�것만은�사실이었다.

=====1:6� � 약대털을�입고...가죽띠를�띠고� -� 이는� 마태와�마가,� 두� 기자가 동시적으로� � 밝혀주

고�있는�부분으로서�세례�요한의�의식주�생활이�어떠했는가를�구체적으로 암 시 하 고 있 다 ( 마�

3:4).�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의식주� 생활은� 단순,� 소박,� 그리고� 청빈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입고'에� 해

당하는� 헬라어� � '엔데뒤메노스'(*� � � � � � � � � � � � � � � � � � ,havingbeen� clothed� with� )는� 아직도� 그� 옷을�

입고�있는� 현재의�상태를�나타내고�있는� � 말로서�기자는�요한이�줄곧�그�약대� 털옷을�입고� 생활했음을�

보여� 준다.� 성화(聖畵)를� � 그리는� 화가들은� 종종� 요한의� 광야� 생활을� 나타내고� 그림으로� 요한의� 옷을�약대� � 가죽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옷은� 길게� 축� 늘어진� 약대털로� 짠� 볼품없는� 옷으로� � 가난

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입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한� 옷에는� 자연히� 허리에� 가죽띠를� 맬� 수� 밖에�

없었다.� 이� 허리띠는�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급히� 달려갈� 때에도� 옷이펄럭거리지않게� 하는� 역할을� 함으

로써� 특히� 활동성이� 요구될� 때에� 필요한� 유대인� 의상의� 필수품이었다.� 한편�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

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 때로� 털옷을� 입었는데� 이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신의� 감정을�

강력히� 상징하기� � 위해서였으며� 심지어는� 거짓� 선지자까지도� 자신을� 참� 선지자로� 가장(假裝)하기� 위하여� � 이털옷을� 입었다고� 하였다(슥� 13:4).그리고�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이� 왕에게� 엘리야를� 설명할� 때

(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라고� 보고하였다.이와� 같이�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주된� � 관심인의식주� 생활에서� 과감히� 탈피(脫皮)하여�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 가르쳐� 주려고� 그들� 자신이� 청빈한� 삶을� 하나님� 말씀의� '소

리'가� 되기에� 필요� 충분� 조건이� 될� 수� 있었다.� � � 메뚜기� -� 철저히� 율법에� 입각한� 경건주의자였던� 요한

은� 레� � 11:22에서� � 하나님께서먹으라고� 허용하신� 곤충� 중의� 하나인� 메뚜기를� 먹었다.� 이� 메뚜기는� 고

대� 근동� 지방에서� 사용했던� 평범한� 음식이었다고는� 하나�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 � 재해로� � 인해

소출(所出)이� 줄어든� 해에� 먹는� 일종의� 대용� 식품이었으나� 이� 메뚜기는� 특별히� 봄철에많이� 생겼으며�때때로� 큰� 떼로� 몰려다니곤�했었다(출� 10장;욜� 1:1-12).� 오늘날에도�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것의�다리와�

날개는� 잘라버린� 뒤에� 굽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소금에절여� 두어� 저장�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은�원래� 제사장의�아들로서부요한�자였지만�스스로� 가난한�자가� 되어� 가난한� 자가� 먹는� 음식

을� 먹음으로� � 생명을부지해� 나갔다.� � � 석청� -� 어떤� 주경학자는� 이� 석청을� 그곳에서� 서식하던� 여러� 나

무들에서� 채취(採取)한� 수액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 말의� 헬라어� '멜리'(*� � � � � � � )는� � 야생의� � 벌꿀을의미한다.� 팔레스틴� 중에서도� 특히� 이� 광야에서의� 야생의� 꿀은� 달기로� 유명한� � 것이었다.� 이상에

서� 살펴본� 대로� 세례� 요한의� 생활� 양식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 지향하는� 나실인(Nazirite)으로�

특징지어진다(민� 6:8;삿� 16:17� 주석� 참조;눅� 1:15).� � 실로그는� 오직� 회개의� 세례와� 임박한�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육적인� 욕망을� 절제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식주� 생활에서의�

극기의�삶은� � 오늘날� � 모든사역자들의�귀감(龜鑑)이� 된다.

=====1:7�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오시나니� -� 마가는�여기에서�매우� � 장엄하고도� � 위엄에찬�동사�

'오사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케타이'(*� � � � � � � � � � � � � � )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그� 당시�

극도로� 고조되고� 있던� 유대인의� 메시야� 대망� 사상에� � 부합하는� 전형적인� 표현� 양식이다.� 이런� 표현� 양

식은� 창� 49:10에서� � '실로가� � 오시기까지'란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基盤)으로� 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동사� '에르케타이'는� �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그분이� 지금� 막� 오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세례� 요한의� 시각은�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종말적� 역사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

다.� 이처럼� 마가는� 이� 동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위치시킴으로써� 메시야� 오심의� �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하지만�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어법상� 문장� 끝에� � 나와� � 있음).이� '오실'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설명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는� � 것인데,� � 이는그분의� 전지� 전능성에� 비추어� 볼� 때,� 요한� 자신은�

그분의� 종의� 종이� 되기에도� � 부족한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광야에� 모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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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백성들� 사이에는� 요한이� '능력� 많은� 자'(the� mighty� man)란� 소문이� 만연되어� 있었을� � 것이며,� �

혹시이� 자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에(요� 1:19,� 20;3:25-36),� 이러한� 그릇된�

오해를� 간단한� 이� 한� 마디� 말로써�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 뒤에� � 오셨다(눅� 1:26,36).� 하지만� 그리스도와� 세례� 요

한� 사이에는�무한과�유한,� 영원과�순간,� � 그리고�태양의�원(源)� 빛과� 달의� 반사광이라는�본질적인�차이가� 있었다(요� 1:15-17).� � �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 세례� 요한은�자신과� 곧� 임하실� '능력이� � 많으

신� � 이'사이의� 강한� 대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들� 중에서� 한� � 가지� 실례

를�사용하고�있다.� 그� 당시에는�주인이�여행에서�지친�몸으로� � 집에 돌아오면종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먼지로� 더러워진�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신을� 벗기고� 물을� � 떠다가� 발을� 씻겨� 주는� 것이었다.� 마

태는� 단지� 신의� 끈(영어의� 'latchet'는� 오늘날의� 구두끈에� 해당하는� 말임)을� 푸는� 데만� 관련하여� 기록

하고� 있지만(마� 3:11),� 마가는� 이것을� 풀기� 위하여서� 굽히는� 행위까지를� 첨가하여�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임하실� � 메시야의� 위대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세례� 요한은� 가까운�

미래에� 임하실� 그분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오실� � 메시야는� � 영원전부터�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역사속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 영원히찬송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조금도� � 자기비하나� 미사� 여구(美辭麗句)나� 과장이� 없는�것이며�오직� 성령�충만한� � 한� � 선지자로서절대�불변한�진리를�사실� 그대로�나타낸�것에� 불과하다.

=====1:8� �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성령으로...세례를� 주시리라� -� 여기에서� '물'과� � '성령'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즉� 요한은� � 외적이며� 성례전적� 측면에

서� 그리고� 성령� 세례의� 예비적� 단계로서� 물을� 통한� 세례를� �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적이며�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정결과� 중생과사죄의� 은총을� 가능케하는� 구속의� 완성적� 측면에서� 성령

을� 통해� 각자의� 심령에�세례를베푸시는� 것이다.� 한편� 물과� 불,� 이� 두� 단어�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엔'(*� �

� )은� � 도구격� 조사'...로서'로� 번역되지만� 분명히�유의해야�할� 점이� 있다.� 즉� 성령은�마치� � 물과같이� 세

례에� 대한�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엔'을사용한� 것은� 두� 종류의�

세례가� 지니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와� 그� � 각각의� � 효능을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세례의� 의미가�본질적으로�같을�수는� 없다.� 그래서�마태는� � 여기에다가�흔히�성경� 문학적으로�볼� 때� 정화,� 정결,� 심판�

등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불'이란� 대칭�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령� 그�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더� 큰� 비중을두고� 본�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마� 3:11).� 실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 역사는� � 불과같

은� 뜨겁고� 강렬한� 역사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내적인�성결과� 열정을� 제공하였고� 불신자들에게는�종말적

으로� 임할� 심판을� 예고하였다(행� 2:3).� 어쨌든� 메시야의� 선구자로서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은� 단순

히� 거룩한� 예식의� 측면에서� 물을� 통한� 세례를� � 집례(執禮)했지만� 신적� 권위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는�성령을� 통해� 각� 심령에� 당신의� 내밀하고도� 뜨거운� 불� 세례를� 집례하셨다(Lenski).� 이� 같은� 성령� 세례

는� 예수의� 승천� 이후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공적으로� 활발히�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 세례요

한이베푼� 세례를� 성령� 세례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단순히� 물로써만의� 형식적� 예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 요한의� 세례는� 예수의� 불� 세례를� 준비케� 하는� 예비적� 단계로

서,� 이� 역시� 성령의� 확실한� 조명과� � 후원을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에� 따른� 불� 세례가� 있기전에도� 성령께서는� 인간� 구원과� 진리�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그� 일에� 부름받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깊이� 개입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또한� 한� 가지� 사실은� 요

한이� 무리들에게� 표현한� 바�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시제와� 관계된� 부분이다.� 요한� 자신의�

세례에� 대해� '세례를� 주었거니와'(*� � � � � � � � � � � � � � � ,에밥티사)인부정과거형으로� 언급한� 데� 비해,� 예수

의�세례에�대해서는� '세례를�주시리라'(* � � ,밥티세이)인� 미래형으로� 언급하였다.� 이말에� 대해� 예

수께서도� 요한은� 물로세례를�베풀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받으리라고� 재차�확증해�

주셨다(행� 1:5).� 이로써� 우리는� 인간� 세례� 요한의� 단회성과� 불완전성� � 및� � 한시성(限時性)그리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 세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 예수의� 이와� 같은� 신령한� 세례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성령을� 끊임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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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7;행� 2장).

=====1:9<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어부>그때에� -� 이� 말에� 대한� 문자대로의� 번역은� '그� 날들에'이

다.� 이는� � 분명한� � 시기곧� 앞에서� 계속� 언급되어왔던� 세례� 요한의� 회개에의� 세례� 사역이� 박진감� 넘치

게� � 진행되고�있던� 그� 기간을� 지칭한다.� 더욱이�이� 표현은� 역사상에� 위대한�한� 사건이� � 나타날�것이라

는� 데� 주의를� 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유대� 백성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이�진행되고�있던� 때라는�배경적�설명을�한다는�것은� 적어도그� 배경적인�내용보다� 더� 중요하고� 심

대한�사건이나�인물의�등장을 암시하는� � 것이라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이� 예고하고� 그�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던� 분은� �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실로� 예수는� 갈릴

리� 나사렛에서� � 30여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신� 것을� 청산하시고� 이제� 곧�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는�

시기를� 맞고� 계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는� 세례� � 요한의� � 사역에관해�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즉시� 오시지� 않고�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실� 바로� '그� 때'는� 새로운� 역사

의� 시작을�예고해� 주는� 장중한� 포고령이요� 대서사시의� � 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다.� � � 갈릴리�나

사렛� -� 이곳은�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신� 후� � 다시귀국하여� 정착하고� 유아기부

터� 청년기를� 거치면서� 계속� 살아오셨던� 예수의� 실제적인고향으로서(마� 2:23;눅� 4:16� 주석� 참조)� 예루

살렘� 북방� 약� 120km� 지점에� 위치한� � 해발약� 488m의� 구릉지의� 분지이다.� 이곳은�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과� 더불어� 기독교의고향으로� 여겨지는� 매우� 뜻깊은� 곳이다(마� 2:23� ;� 3:13� 주석� 참조).� 한편�

마가는� � '나사렛'이란� 지명을� 첨가시킴으로써� 이방인� 독자들에게� 그곳의� 지리를� 보다� � 구체적으로제시

해� 주고� 있다.� 이에� 비해� 누가는� 이� 지명을� 아예� 생략했으며� 마태는� � '갈리리로서요단강에� 이르러'(마�

3:13)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수만리�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신자들�곧� 예수에�대해� 소문으로만�들어

오던�바로�그들에게�예수에� 대한� 역사성을� � 입증해� 주기� 위한� 마가의� 노력의�한� 표현이다.� � � 요단강에

서� -� 헬라어�원문에�제시된�본문의�전치사(* � ,� � 에이스)는� � '안에서','안으로'(in,� into)란� 뜻으로� 예수

의� 수세(受洗)가� 요단강� 안에서� 베풀어졌음을� � 암시한다.� 특히� 이� 표현은� 다음에� 언급될� '세례'라는� 어의(語義)와� 10절의� � '물에서� � 올라오다'는� 말과� 조화를� 이뤄� 예수의� 수세� 방법이� 침례(侵禮)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세� 방법의� 절대적� 원칙을� 고수하는� 일은� 또하나의� 독선이� �

될가능성이�있다.� � � 세례를�받으시고(* � � � � � ,에밥티스데)� -� 이� 단어의�원형� '세례를�주다'(*

,밥티조)라는�말은� '물에� 잠그다'(70인역-왕하� 5:14;� 시� 68:23),� '물로� 씻는다'(7:4;눅� 11:38;

딛� 3:5)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미루어�볼� 때,� 이� 단어는� '세례'혹은� '침례'로도�

이해할�수� 있다.� 특히� 이� 세례가� � 그리스도와의�연합이라는�측면에서는� '물에� 잠그다'는� 침례적인�의미

를�강하게�내포하고� � 있고,� 구약�율법의�제사�제도에서�볼�수�있듯이�속죄를�위한� 뿌림(레

14:7;16:14,15)등의� 관점에서(민� 8:7)� 정결례로� 볼� 때는� '물로� 씻는다'는� 세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세례와� 침례의� 효력과� 그� 중요성은� 거의� 같은� � 가치를지닌다고� 생각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혹은� 침례라는� 그� 외적� 형식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다� 중

요한� 것은� 그� 의식이� 의도하고� 있는� 바� � 구원의� � 확신과그�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

중심을�떠난� 의식만을 제기한다는� � 것은사변적인�논쟁에�빠질� 우려가�있다.

=====1:10� 곧(*� � � ,� 유뒤스)� -� '곧바로',� '당장에'라는� 긴급성을� 강조한� 부사로서� 이부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지니는� 한� 특징인데(약� 41회).� 이� 단어는마가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박진감을� 더해�준다.� � � 물에서� 올라오실새� -� '...에서'를� 뜻하는�원어� '아포'(*� � � � � )는� '완전히�잠

긴� � 물속에서부터'라는� 의미이기� 보다� 오히려� 신체� 어느� 부분에� 적용되는� 단지� '물� � 안에서'라는� 의미

로�이해해야�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의�세례의�형식(세례,� 침례)에� 관심을�둔� 것이기�보다� 세례� 예

식이�모두� 종결되고�예수께서�육지로� 발을� 내디디시는� 순간을�강조하는�말로�볼� 수� 있다.� � � 하늘이�갈

라짐� -�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 내려오시는'� 장면을� 본� 사람이� 오

직� 예수뿐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 초점이� 예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 요한에� 대

해� 말하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서� 마가는� 하늘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하늘이� 갈라지

다'(*� � � � � � � � � � � ,스키조,'찢다'는� 뜻)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기록� 방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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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매우� 차분한� 용어인� '아노이고'(*� � � � ,� '열다')를� 사

용하고� 있다.� 어쨌든� 하늘이� 갈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대우주적� � 전기(轉期)를� 맞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제� 인류는� 절망의� 하늘을� '찢고'� 새�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사� 64:1의'원컨대� 주는� 하늘을�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진동하

기를'을� � 반영하고있다고�본다.� � � 성령이�비둘기같이...내려오심을� -� 초대� 교회� 이단자들은�영원한� 그리

스도가� � 인간예수에게� 인격적으로� 잠시� 거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본� 사건을그�

논거로� 채택하였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 주의'<Gnosticism>� 참조).� 후에도성서� 비평가들은� 예

수의� 영원한� 신성(神性)과� 더불어� 예수의� 역사적인� 성육신(Incanation)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를�반박하기� 위하여� 이들의� 견해를� 인용하곤� 하였다.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세례시에� 그에게� 성령께서� 내

려오셨다가�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실� 때�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영원한� 그리스도에게� 본문에서� 특별히� 가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은� 대신지자로

서의권위와� 직무의� 전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확증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는� � 성령께서� 예수에

게�임하신�것은�요한의�세례를�통하여�되어진�것이� 아니라�하나님의� � 아들의�복종과�기도를�통해서�이

루어진�것임을� 밝히고�있다(눅� 3:21).� 한편� 본문에서�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했는데(요� 1:32)�

이는� 성령의� 순결하고도� 온유한� � 통치와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사실은�공생애시작에�앞서�당신의�거룩한�사역을�위한� 기름� 부음을�앞서� 당신의�거룩한�사역

을� 위한기름� 부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 '주의� 성령

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친히� 이� 기름� 부음에� 관한� 사실을� 주장하셨기� 때문이다(눅�

4:18).� 특별히� 본문의� 이� 같은� 장면은� 구약� 시� 45:7;사� 61:1� 등에서� 이미� 예언된� 바� 있는� 것으로� 예

수께� 대한� 성령의� 영원한� 은사� 부여를� 보여� 주고� 있다.� � � 보시더니� -�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 곧�

기도하셨는�데(눅� 3:21)� 바로 그� � 순간하늘의�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이때�

이� 기이한�현상은 자연계에나타난� 초자연적� 현상(supernatural� appearance)으로서� 그곳에� 모인� 우리

들이�함께�목격했음에는�의심의�여지가�없다.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 이는� 분명� 말라기� 선지자� 이후� 단절되었던� 계시의� � 맥을잇고

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뜻한다.� 랍비들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말씀하실� 때� '그분의�

목소리의� 울림',� 곧�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 특히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는� 구

별되는� '소리의�딸'이라는�하급� 계시가� � 말라기선지자�이후에도� 계속� 전해져�오고� 있다고�믿고� 있었다.� �

물론� 본문의� '하늘로서의� 소리'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마� 3:17� 주석� 참조).� 한

편� 하늘에서들려진� 소리는�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의� 즉위� 개념(시� 2:6)과� 고난받는� 주의� 종의� 개념(사�

42:1)이� 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마� 3:17� 주석� 참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늘� 소리가� 강조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가장� 사랑받는� 독생자가� 되신다는사실이다.� 실로� 마가는� 그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 바있다(1: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당신의� 아들

이라고� 밝히고� 계신� � 것이다.� � 즉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당신의� 아들됨을� � 증거하는� � 증인이� � 되신다.�

한편� � 레인(Lane,William� L.�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 58)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언하

신� 말씀의� 첫� 구절("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은�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 영원하고� 필

연적인� 관계성을� 보여� 주며,� 둘째� 구절("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은� 부정과거직설법으로�되어� 있어� 역사

상의� 어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에� 선택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 � 내� 사랑하는�아들

(* � � � � � � ,� 호� 휘오스� 무� � 호아가페토스).�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나의� 그� 사랑하는� 그� 아들'� 이라고� � 되어야한다.� 여기에서는� 정관사� '그'가� 명사와� 형용사에�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 그� � 어의(語義)를� 점차로� 높이며� 강조하는� 수사법이� 쓰이고� 있다.� 이렇듯�성부� 하나님께서부터성자� 하나님에게� 명명된� 이� 사랑은� 일시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완전� 무궁한� 사랑,�

영원지고한�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 '사랑하는'에� 해당하는�아가페토스(*� � � � )는� 사랑의�최고� 형식

을� 지시하는� 말로서(Lenski)�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악취나는�

이� 세상을� 아가페의� � 사랑으로� 사랑하시고자� 도성� 인신(道成人身)하신� 것이다(요� 1:1,14).� � � 너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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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하노라� -� 이� 말은� 앞에서� 언급된� '사랑하는'이란� 말의� 이유도� 아니며� � 귀결이나� 결론적인� 말도� 아니

다.� 왜냐하면�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 헬라어� '유도메사'(* � � � � )는� � 부정� 과거형으로서�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역성경의� '내가� 그를� 아주� 까뻐하노라(KJV,� in�

whom� I� am� well� � pleased)란� 번역이나�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되엇다.� 물론�

이러한� 문법구조가� 영원한� 현재에� 관려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헬라어� � 본문에서는�단순히과거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과거의� 시상은� � 요단강변에서� 성육신하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선포의�증거로서�예수�위에아버지의� � 성령께서�강림하신�것이다.

=====1:12� 성령이...몰아내신지라� -� 공관� 복음의� 세� 기자들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후� 성령의인도하

심을� 받아� 광야로� 나갔음에� 대하여� 모두� 기록하고� 있다(마� 4:1;눅� 4:1).� 여기서'광야'란� 성경� 문학적으

로� 타인과�완전히� 결별된�곳,� 또는� 귀신들의� 활동과�밀접한� 관련이�있는� 지역으로�생각된다(사� 13:21;

마� 12:43;계� 18:2).� 그런데� 당시� 예수께서� � 실제로� 금식하셨던� 광야가� 과연� 어디였던가에� 대해서� 의

견이�구구하다.� 즉� 혹자(Alford)는� 모세와�엘리야의�금식�장소였던�호렙산으로,� 또는� 외경 '히브리인의� �

복음'에서는다볼산으로,� 그리고�또� 다른이는(De�Wette)여리고�근처의�한� 곳으로�보기도�한다.� � 그중에

서� 이곳이� 세례받으신� 곳과�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제일� � 마지막� � 견해를가장� 타당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을� 확증하기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을� '콰란타니아'(Quarantania),� 곧�

예수의� 40일� 금식장소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 한편마가는� 예수의� 세례와� 시험� 사건� 사이에� 깊은� 연관

성을�강조하기�위해�그의 특징적인표현인� '유뒤스'(*� � � � � � � � � ,� '즉시')를� 사용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의� 겸손하고도강한� 인류애의� 마음을,� 전혀� 죄가� 없으신� 그분이� 죄인된� 자로서의� 세례에� � 자발적으

로동참하신�것과� 사단의� 시험을�한시적으로나마�인정하신� 이� 두� 가지� 연속된� 사건으로써표출시키고� 있

다.� 한편� 본서의� 강한� 이미지에� 비해� 마태와� 누가는� 완곡한� 동사를� 사용하였다.� 즉� 그들은� 이� 시험� 사

건을� 보고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에� � '이끌려서'(was� � ledby� the� Spirit� '성령에� 인도되어서',� NIV)� 광야

로� 나아갔음을�묘사한� 것에� 비해� � 마가는�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에크발에이'(*� � � � � � � � � � � � � � � � ,� '내

쫓다'는� � 뜻이� � 강하게내포됨)를� 사용해서�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이� 기록은� 전자의� 두� 기록보다� 더욱� 역동적이며� 생생한� 현장감(現場感)을� 나타내� 주고있다.� 물론� 이것은�예수의�의지와는�전혀�상관없는�협박과�강압으로써가�아니라� � 오히려� 성령의�역동적인�이끄

심에� 대해� 예수께서� 적극적인� 의지로써� 호응하신�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예수의� 뜻과� 성령의� 뜻

이� 완전히� 합치되어� 있었으므로� 장차� 40일� � 금식� 동안� 사단과� 더불어� 싸울때의� 승리를� 예상할� 수� 있

게� 해준다(마� 4:1-11;눅� 4:1-13)

=====1:13� 사십� 일을� 계셔서� -� 마가는� 단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 계신� 것에� 대해� � 기록하고�

있으나� 마태는� 이� 기간� 동안� 금식하셨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마4:2).� 그리고� 마가에�

있어서는� 시험의� 종류도� 언급되지� 않고� 사단을� 물리치고� � 승리하신� 기사도� 없다.� 아마� 그� 이유는� 예수

의� 사역� 전체가� 사단과의� 대립으로� 일관된� � 것이지,� 40일간의� 광야� 생활에서� 있었던� 단� 몇� 가지� 시험

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마가가� 강조하기� 원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마가의� 복음서� 전체에

서�마가는�이� 계속적인�싸움을�생생하게�묘사하고�있음을�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언급된�이

'40일'에는� 상징적인�의미가�있다.� 즉� 이� 40일은� 구약에서�모세가�시내산에서� � 십계명을� � 받을때�그곳

에서� 유한� 기일이며(출� 34:28),�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아� 광야를� 유랑한� 기간이다(왕상� 19:8).� 또� 신약

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의� 시일도� 40일이었다(행� 1:3).� 위에서� 언급한� 모세나�

엘리야의� 경우� 40일의� 기간은� 그들의� 사명� � 수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광야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40일'� � 기간의� 전후(前後)를� 한결같이� 광야의� 연단과� 위험� 속에� 살아�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또� 시험받으셨던� 이� '40일간'의� 의미는� 그의� 공생애� 시작

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 사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일종의� 연단의� � 기간이자� 공적� 사역의�

준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 시험을� 받으시며� -� 이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 � � � � � � � �

� � � � )는� '시도하다',� � '시험하다',� � '증거를� � 진술하다'라는� � 뜻으로서� � 인간을� � 실족케� � 하는� � �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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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tation)과 인간을� 더욱� 성숙케하는� 하나님의� 연단(test)이라는� � 이중적� � 의미를갖고� 있다.� 그런

데� 본문에� 제시된� 이� '시험'은� 그� 양자의� 뜻을� 모두� � 함축하고� � 있다.실로� 이� 시험은� 예수의� 메시야성

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집요한� 유혹인� 동시에,� � 예수께서� 시험과� 고난받는� 온� 인류의� 모범이시자� 우

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실� � 대제사장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이시며� 또한� 그� 같은� 자격을� 공적으로� 선언하

시기� 위한� 일종의� � 하나님의� 뜻에� 따른� 연단이었던� 것이다(히� 2:18;4:15).� 이� 시험에� 대한� 더� 자세한� �

내용은마� 4:1-11;눅� 4:1-13을� 참조하라.� � �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 이는� 단적으로� 영전(靈戰)을� 치르고�계신� � 예수께서� � 모든인간�관계를�단절하신�채� 철저히�홀로되셔서�고독에�찬� 역경을�감래하고�계셨

음을� �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당시� 유대� 광야� 지역에는� 뱀,� 이리,� 표범,� 여우,� 멧돼지,� � 하이에나� 등이�

이따금씩� 출몰했다고� 한다.� 진정� 예수는� 내적이고� 외적인� 공포와� 고독� 그리고사나운� 야생� 동물들을� 대

하심으로� 더욱� 큰� 시험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받으신� 장소는� 첫� 사람� 아담

이� 시험받은� 낙원(창� 3장)과� 정반대가� 되는� 위험� 천만스러운� 현장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날� 이스

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함으로� 징벌과� 사망을� 받았던� 바로� 이� 광야에서� 예수는� 하나

님께� 순종함으로승리를� 거두셨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기� 위한� � 공생애� � 사역을

시작하신다.� � �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모든� 천사들의� 주된� 임무는� 예수와� 구원얻을� � 모든� � 자들을섬기

는데� 있다(히� 1:14).� 이� 천사들이� 예수께� 수종든� 때에� 관해서는� 마� 4:11에� 나와있는� 대로� 예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후였다.� 성경상에서는�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종들었는지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하늘로부터� � 전해진� 영적� 위로를� 전달하고� 또� 40일� 동안� 금식하시

느라고� 주리신� 예수께� 육적인� � 양식을공급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단의� 시험을� 물리쳐�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의� 떡(마� 4:3)� 대신에� 천사가� 공급하는� 음식으로� � 배를� � 채우셨고� � 그릇된� � 공명

심(마4:5,� 6)� 대신에� 영광스런� 영적� 존재들의� 보필을� 받으셨으며� 또� 헛된� � 영광(마� � 4:8,9)대신에� 하

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며�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게� 되셨던� 것이다.� � 그리하여� 이제부터� 천국� 복음

을� 전파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사단의� 왕국을� 파멸시키는�

실제적인�사역을�시작할�수�있으셨다.� � 마가복음의�중요한�부분� 중� 하나가�여기서�일단락된다.

=====1:14� � 요한이� 잡힌� 후� -� '잡힌'에� 해당하는� '파라도데나이'(*� � � � � � � � � � � � � � � � � � � � � � � )는제� 1�

과거� 수동형으로� '넘겨졌다',� '양도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세례� 요한이� 그를� 시기하던� 종교� 지도

자들과� 헤롯의� 군병들에� 의해� 무참히� � 체포되었음을� � 암시한다.그런데� 만일� 마가가� 어떤� 역사적� 순서

보다�신학적인�면에�좀더� 큰� 관심을�보이고�있었다면(사실�마가는� 6장에�이르러서야�비로소�요한의�죽

음을� 자세히� 언급한다).� � 여기서의� '잡힌'것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

가는�요한의� � 죽음과� 예수의�죽음에� 든든한�고리를� 엮어두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두� 사람은� 모두� 불의

한� 자의� 손에� 의해� 죽음으로써� 그� 최후를� 맞는다.� 따라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막� 시작되는� 것과� 동

시에� 십자가의� 짙은� 피내음이� 풍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 의로운�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분

명히� 당시의� 불의(不義)한� 시대상을� 반영해� 준다.� � 예수는� 나중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위대한�자가� 바로� 그라고�평하셨다(마� 11:11).� 그러나�요한은�메시야의� 선구자적�사명을�다�

하기� 위해� 이� 땅에� 온것이지� 그의� 위대성을� 인정받고� 들림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메시야의�

오시는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마친� 후�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 이런� � 점에서공관� 복음

서� 기자들은� 공히� 예수의� 공생야� 시작은� 세례� 요한의� 투옥과� 관련된� � 것으로보고� 있다(마� 4:12;눅�

3:19,� 20).� 즉�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 요한의� � 사역이종결된� 후� 당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마가는� 선구자� � 요한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임무를� 완수했다는� 사

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 � 분명하다.� 그리고�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생애에� 있어서� 공생애� 초기

의� � 많은� � 부분을생략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본서의� 기자� 마가의� 시각은� 그리스도의� 전

체적� 생애를� 설명적으로�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날까지� 인간들

을� 위해� 어떻게� 사역해� 오셨는가를� 부각시켜� 종으로서의� 예수의� � 진면목을� 밝히려는데� 집중되고� 있었

다.� 따라서� 이처럼� 공생애� 초기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을� 생략하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저작� 의도에�

따른�결과라�할� � 것이다(본서 서론� � 참조).� 한편� 광야 시험과 요한의 잡힌� � 사건� � 중간에� �

발생한� � 내용에� � 대해서는� � 요1:35-4:42를� 참조하라.� � �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 그리스도께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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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떠나�갈릴리로�오신� � 때는� � 세례요한이� 잡힌� 사건과�관련이�있다(요� 4:1-3,� 43� 주석� 참조).�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 사실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임을� 알게� � 되

셨을때,�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셨다(특히� 가버나움을� 중심함,� � 마� � 4:13).예수께서는�

자신이�유대지방에서�그처럼�크게�알려진다면�그것이�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강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급

기야는�그들의�증오심으로�말미암아�시기적으로� 너무�이른� 위기를�초래하게�될� 것이라는�사실을�잘� 알

고� 계셨다.즉�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적절(適切)한� 죽음의� 순간이� 오는� 즉시� 자기� 목숨을� 버리실� � 준비를� � 갖추고� � 계셨지만(요10:11,15,18;13:1)� 아직�그�때(* � � � � � � ,� 호� 카이로스)는� 오지�

않았던� � 것이다.� 더욱이� 갈릴리� 지방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우리(cage)� 안으로� 인도해� 들여야� 할� 잃은�

양들이� 많이� 있었다(요� 10:16).� � �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내내� 전파하신�

메시지의� 주내용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다른� 사본에는� � 이를� � '천국� � 복음'이라� � 일컫기도� � 한다(마

4:23).� 여기서� '전파하여'에�해당하는�헬라어� '케뤼쏜'(*� � � � � � � � � � � � � � � )은� 현재� � 능동태�분사형을�취

하고�있어� 그� 행위가�끊임없이�지속되고�있음을�암시한다. 한편� � 이표현을� 통해� 하나님은� 복음의�

원천(주어소유격)이시며� 더불어� 복음의� 대상(목적� � 소유격)이심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의� 기원은� 하나

님이시며,� 또� 이� 복음은� 하나님에� � 관한것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복음은� '좋은� 소식'� 곧� 인류가� 들어볼� �

최고의� � 메시지이다.왜냐하면� 복음은� 곧� 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과� 구원� 및� 영원한� 복락을� 그� � 주내용

으로하고�있기�때문이다(고후� 5:17).

=====1:15�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 시사해준

다(갈� 4:4;엘�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 � � � � � � � � � � ,카이로스)라는� 말은� �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

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 � � � � )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R.C.� Trench).� 예수께서는�드디어�구원의�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

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특히� 본문의� 이� 표현은� 사� 9:1,2의� 말씀이� 성취될� 시간이� 이르렀음

을� 알리는� 엄숙한� 포고령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 '하나님의� 나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단적으로�하나님의� 절대적인�통치와�초월

적인� 주권을� � 가리킨다.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한

편�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과� 외경에는� 직접� 쓰이고� 있지� 않으나� 그� 사상은� 풍부하게소개되

고�있다(출� 15:18� ;시� 29:10� ;사� 43:15).� 이런� 사상들을�면밀히� 검토해�보면� 하나님의�왕권은�현재적�

실재이면서(하나님은� 현재� 당신의� 주권으로� � 통치하심)� � 더불어종말적� 완성임을� (하나님은� 최후의� 날�

당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 것이다)�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소

개하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그�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가� 상존함을� 보게� 된다.� 즉� 예수께서� 갈릴

리� � 사역� � 초두에그� 나라가� '가까왔다'(15절)고� 선포한� 데� 대해� 바알세불� 논쟁시에는�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마� 12:28;눅� 11:20)� 말씀하신� 바� 있다.� 즉� 예수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지배가� 이� 땅에� 임

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에서는� 그� 나라가� 여전히미래적인� 것임을� 보게� 된다(마�

8:11;20:21).� 실로� 하나님�나라의�현재성과�미래성� � 사이의�긴장(tension)� 관계의�해소는�어느� 한쪽을�

거부함으로써� 이뤄지지는� 않는다.� � 사실� 그에� 대한� 양극단의� 논리인� 실현된� 종말론은� 그� 나라의� 미래

성을,� � 철저 종말론은그� 나라의� 현재성을� 각각�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

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함축한� 개념이다(� Bruce� Metzger,� The� New� Testament,� p.� 148� ).� 어쨌든�

본절에서는�그� 나라의�도래가� 대단히�강조되어� 있다.� 즉� 그� 나라는�공간적으로� (예수� 안에서),� 또� 시간

적으로(그� 나라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가까이� 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 안에

서� 가까와진� � 하나님� � 나라를� � 대면하고� � 있는� � 것이다(Lane).� 한편� 마태복음에는� 일반적으로� '천국'

으로� 되어� 있으나(마� 3:2;4:17;5:3,� 10,19,� 20등)�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 사실에(4:11,�

26,� 30;9:1,� 47등)� � 주의할�필요가� 있다.� 의미상으로는� 양자가�근본적으로�동일하지만�예수께서� '하나

님�나라'라고�말씀하신�것은�사람들의�마음과�생활� 속에� 하나님의�통치가�이전� 어느 때보다도강

하게�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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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개념들에� 주목할� 필여가� 있다.� (1)하나님의� � 왕권,� � 통치권혹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이라는� 개념이다(마� 6:10;눅� 17:21).(2)� 완전한� 구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에� � 순종함으로� 비롯되는� 모든� 영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개념이다(눅�

18:30).� (3)교회,�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로� 사용될� 때� �

하나님나라와� 교회는�거의� 동일한�것이다(마� 16:18,� 19).� (4)� 구속받은�우주,� 곧� 모든� � 영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다.� 이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며� 하나님의� � 구원계획의� 최종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의미한다(마� 25:34).� 좀더� 자세한� � 내용은본장�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 � 회개하고�

복음을�믿으라� -� 이는� 세례�요한이�광야에서�전파한�메시지의�내용과� � 동일하다(4절;마� 3:2).�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의� 복음은� 동일한� 것이었으며,� 이러한의미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길� 예비자였다.� 여기서� � '회개'와� �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자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이

자� 구원의�핵심적�요소이다.� 특히� 이� 중에서� '회개'는� 성부� 하나님과의�단절되었던�관계를� 회복하는�일

이요,'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성자� 예수와의� 긴밀한� 신뢰�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이� 양자중�

어느� 하나의�결핍은� 온전한�신앙� 인격으로� 나아가지�못하게� 한다.� 한편� � 우리말의� '회개하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 헬라어� � '메타노에이테'(*� � � � � � � � � � � � � � � � � � � )는� 2인칭� 복수� 현

재� 명령형으로서� 과거에� 저지른� 모든� 악한일에� 대하여는� 슬퍼하는� 한편,� 앞을� 바라볼� 것도� 의미하고�

있다.� 즉� � 그것은� � '변하여새� 사람이� 될� 것',� '마음과� 생활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완전한� 생활로의� �

전환'까지를� 모두� 내포한� 포괄적� 의미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고� 덧붙이신� 그리스도의� � 말씀에서�

회개의�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즉� '믿으라'는� � 단어에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

메테'(*� � � � � � � � � � � � � � � � � )는� 앞에� 나온� '메타노에이테'와� 동시적으로� 작용을� 하며� 함께� 역사한다

(Lenski).� 즉� 진정한�회개에는 신앙이 뒤따르게마련이다.� 본문에� 나타난� 두� 동사는� 미완료� 동사

로서�계속적인�현재를�의미하며,� 전자가�계속될�때� 후자로�계속됨을�나타낸다.

=====1:16� � 갈릴리� 해변� -� 갈릴리� 바다는� 보통의� 담수호(淡水湖)� 중의� 하나이지만� � 성경에서는흔히�바다로�불리우고�있다.� 이는� 다른�곳에서� '게네사렛�호수'(눅� 5:1)� 또는� '디베랴바다'(요� 6:1,� 23;21:1)

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아름� 다운� 바다는� 길이� 약� 20km,� 너비약� 10km,� 수면은� 해발-240m정도이

며,� 가장� 깊은� 곳이� 약� 50m가량� 된다고� 한다.� 이� � 곳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

으며,� 그로� 인해�어업이�번창했다.� � 그리고�이� 바다� 서쪽과�북쪽� 해변에는�많은 읍과� � 어촌들이 밀

집해 있었다(Josephus,Wars.� III,� x).� � � 시몬과�그� 형제� 안드레� -� 예수께서는� 갈릴리�전도에�있어서�

최초로� 이� 어촌을� � '지나가시다가'(따라� 걸어� 가시다가)� 갈릴리� 어부� 출신� 형제인� 시몬과� � 안드레를� �

부르셨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부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형제들이� 예수

를� 메시야로�믿고�따라다니기�시작한�것은� 요단강에서� 이� 제자들에게�예수께서�바로�이� 메시야라고� 가

르쳐� 준�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요� 1:35-39).� �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모세와� 선

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 이스라엘의왕이라고� 소개하였다(요� 1:29).� 따라서� 그들� 두� 형제는�

그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녔으며인격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인격적� 관심의� 결과는� 그들은� 사도

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받게�된다(3:13;마� 10:1� 등).� � 그물� 던지는�것을� 보시고� -� 먼저� 여기� 제시

된� '그물'(*� � � � � � � � � � � � � � � � � � � � � � � ,� 암피블레스트론)은� 예수께서� 비유� 중에� 흔히� 거론하셨던� 큰� 그

물,� 즉� '예인망'(*� � � � � ,� 사게네)이� 아니라� 손� 그물,� 즉� '투망'(投網)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 안드레형제의� 모습을� 매우� 생동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이� 손� 그물로� 생업에� � 열중하고� � 있는도중에� 예수께�

사람�낚는� 어부로�부름받은�사실을�현장감�있게� 긴박감을�더하여� � 기술해�주고�있다.

=====1:17� 나를� 따라� 오너라(* � ,� 듀테�오피소 무)� � - 원문에서'오

너라'(듀테)는�말앞에� '이리로...'� 또는� '다라'(오피스)라는�부사어가�첨가되어�있는�점에�유의해�볼�필요

가�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러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 예수� 자신이� 지

금� 가고� 있는� '이리로'� 혹은� '이� 새로운� 방향으로'�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calling)에는� '...되게하리라'(*� � � � � � � � � � � � � ,� 포이에소)는� 목적이� 수반되어� 있다.� � 즉� 그분의�

부르심은� 허황되고�맹목적인� 것이�아니라� 부르신�그들에게� �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대한�주역의�역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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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기시리라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 따라서� 이제�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그들은� 복음� 전파

와� 구원� 사역의� 위업을�맡게� 될� 것이었다.� � � 사람을� 낚는� 어부� -� 주님의� 부르심은� 부름받은�그들� 자신

을� 위한� 것이기� 보다� 오히려�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이었다.� 실로� 예수

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들을�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해내어야� 하는� 긴급한� 임무를� 맡기시기� 위

함이었으며�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즉각적인� 순종이� � 요구되는� � 것이다.구약에서도� 심판과� 관

련해서� '낚는다'는� 말이� 사용된� 경우를� 볼� 수� � 있다(렘� � 16:16겔29:4,� 5;38:4;암� 4:2).� 한편� 본문의� '

사람'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단수형으로� � 나와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나� 흠정역에서는�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 그러므로� � '사람들'(*� � � � � � � � � � � � � � ,� 안드로포이)이란� 이� 말은� 단순히� 갈릴리� 주변�

사람들이나� �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범�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

다(Lenski).

=====1:18� 곧� 그물을�버려� 두고� -� 여기에서� '곧'(*� � � � � � � � � � ,� 유뒤스)이란� 마가의�표현은� 긴급하고

도� 생생한� 장면을� 강조하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시몬과� � 그형제� 안드레를� 부르셨

을� 때에는� 종말론적인� 긴박성(緊迫性)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모든� 삶을� 과감히�청산(淸算)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진정� 어부들에게� 있어서� '그물'은� 배와� 더불어� 그들의� 생존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버리는� 데에는� 과감한� 의지적� 결단이� 요구되었을� 것

이다.� 한편� � 두제자의� 이� 같은� 즉각적� 순종의� 배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것은� 예수의� 절대적� 능력과� 권위이다.� 실로� 그� 분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은� � 순종할수밖에� 없는� 것

이다(빌� 2:10).� � � 좇으니라� -� 헬라어� '아콜루데인'(*� � � � � � � � � � � � � � � � � � � )은�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

고� 있으며,� 의미상으로는� (1)예수를� 따르는� 것,� (2)예수의� 부르심에� 자원하여� � 순복하는� 것,� (3)예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뜻한다(8:34;마� 4:25;9:38� 등).� 이� 말에� 대한문자적인� 뜻을� 세분하여� 살펴보자

면� '아콜루데인'은� 접두어� '아'(*� � ,� � 여기서는� � '일치',� '닮음'이란� 의미)와� '길'이란� 뜻의� '켈류도스'(*� �

� � � � � � � � � � � � )의� � 합성어로서,'같은� 길을� 함께� 가다'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은�즉시� � 하나님의�나라가�가까왔다고�하는�선포에�대한� 증인으로서�주님의�동반자가�된� 것이다.

=====1:19� � 조금�더(* � � � � � � � ,� 올리곤)� -� 이� 부사는�마가의�세밀하고도�정확한�사건� � 묘사기법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요한� -�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 다음으로� 중요한�

제자들로서� 이들의� 어머니는� 살로메였다(마� 10:2� 참조).� 한편� 여기� � '야고보와� � 요한'이라는이름의� 서

열상에� 있어서� 야고보가� 언제나�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형으로� � 보인다.� 후에� 그는� 12사도� 가

운데�최초로� 순교하게�되는데(행� 12:2),� 이에� 비해� 요한은�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교

회를� 파수(把守)하고� 요한복음과� � 요한계시록등� 여러�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한편� 이들은�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각적으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에� 들어갔으며� 사도로서의� 훈

련을 받게� � 된것이다.� 사실� 이들이�주님의�부르심에�회의적인�반응을�보일� � 소지(素地)는 얼

마든지있었다.� 즉� 그들은� 마� 13:55;요� 6:42� 등의� 경우처럼� 그들도� "이는�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아들

이� 아닌가� ?� 왜� 우리는� 이� 사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거부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을�

더� 큰� � 근거가� � 될� 수� 있었다(요� 19:25).� 실로� 예수와� 이종� 사촌간이었던�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구심을�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예수의� 형제와� 친척들은� 심지어� 예수

를�보고� '미쳤다'고� 하지�않았던가(3:21).� 이러한�불리한�가정적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위엄

과� 능력과� 사랑의� 부르심에� 조금도� 주저않고� 따라나섰다.� � � 그물을� 깁는데� -� 베도로와� 안드레가� 호수

에서�그물을�던져� 고기를�잡던� 와중에� � 부름받은�것과� 짝을� 이루기나�하듯이�야고보와�요한은�다음�출

어(出漁)를� � 위해� � 그물을수선(修繕)하고� 있던� 상황에서� 부름을� 받는다.� 실로� 이것이�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마가의� 묘사� 기법이다.� 즉� 그들은� 어떤� 종교적� 분위기나� 헌신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생업에� 충실하고�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저녁� 이후시

간에�고기를� 잡고� 낮에는�그물� 수선을�하는� 것으로� � 알려져� � 있다.� 따라서�본문을� 베드로�형제의� 소명

받음이�있은지�얼마간의�시간이�흐른�후로� 보아야�한다고�생각하기도�한다(Bultman).

Page 14: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1:20� � 곧� 부르시니(* � � � � � ,카이유데오스에칼레센)� -� 예수께

서는� 마치� 단거리� 육상� 선수의� 그것처럼�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긴급하게� 두� � 제자를� 부르셨다.� 실로�

예수의� 선교사역은� 이처럼� 신속하고도� 민첩하게� 진행되었는데,� � 이는� 당신께서� 항상� 다가올� 종말에� 대

한� 기대와� 예비를� 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 � 삯군들과� 함께...버려두고� -� '삯군들'에� 대한� 언급은� 마

가복음에만�나오는� � 것으로서� '삯군'(*� � � � � � � � � � � � � � ,미스디오스)이란�임금(賃金)을� 받고�고용된�일꾼들을� � � 가리킨다.� 적어도�이러한�삯군들을�고용하기�위해서는�상당한�재력이 뒷받침되어야� � 했다.�

따라서� 세베대의� 가정이� 비교적�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삯군들이� 있었기에� � 야고보와� 요한은� 주저함

없이� 그들에게� 아버지� 돕는� 일을� 맡기고� 예수를� 따라갔다.� � 그들은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이전�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온전한� 헌신의� 길에� 나섰음에� � 틀림없다.� 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기� 위해서

는� 무엇보다� 이� 떠남의�결단이� 요구된다(창� 12:1-3).� 이�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만날�수�있기� 때문이다(마� 19:29).

=====1: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 '저희'라는� 말이� 원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 '들어가니

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이스포류온타이'(*� � � � � � � � � � � � � � � � � � � � � � � � � )가� � 삼인칭�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에서�비롯된�것이며,� 이들은�예수와�예수께�선택된 처음� � 네제자를� 가리킨다(29절).� 한편� '나훔의�

동네'란� 뜻을� 지닌� '가버나움'은� 호수가에� 위치해� 있었고,� 제자들이� 부름받은� 갈릴리� 호수에서� 그리� 멀

지� 않은� 곳에� 있었다.� 특히� 이곳은� 다메섹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要地)이자� 세관이� 있던� 곳으로서(2:14)군사,� �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이곳은� 오늘날� 갈릴리� 해안� 서북쪽에� 있는� 텔� 훔

(TellHum)으로� 확인되고� 있다(마� 4:13� 주석� 참조).� 그리고� � 예수께서� 이곳을� 공생애� 사역의주활동� 무

대로�삼으신�것�가운데�한� 이유는�바로� � 이곳이�세리� 마태를�위시한�다섯� 제자들의�고향이었기�때문이

다.� � � 안식일에� -�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 바로이때� 안식일�

예배� 중� 첫번째� 예배가� 진행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때� 안식일이� 되기전� 금요일에� 이미� 회당� 안으

로� 들어가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 � 회당에...가르치시매� -� 예수의� 공생애사역의� 시초가� 가버나움� 회당

에서�일어났다는것은�기념비적인�사건이다.여기� '회당'(Synagogue)이라는�말은� 한�지방에�모인�회중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이들� 회중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회당의� � 기원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을� 연구하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회당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유대인이� 살던� 곳이면� 헬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회당은� 유대교를� 가장� 오랫동안� 지속시켜� 준� 제도가� 되었으며� 기독교� 초창기에� 복음

도� 이� 회당을� � 근거지로� 삼아� 전파되어� 나갔다(마� 4:23;눅� 4:16-30� 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 회당에� 들어가시자마자�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하는� '에디

다스켄'(*� � � � � � � � � � � � � � � � � )은� 미완료�동사로서� 매� � 안식일이면� � 예수께서이곳에� 나오셔서� 가르쳤음

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당시� 가버나움� � 회당은� � 활짝개방되어�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곳을�

초창기�복음� 전파의�근거지로�삼고 계속적으로� 가르치셨다.� 물론� 이때� '회당의� 자유'는� 회당� 지도자들

이� 인정하는� 방문� 교사들� 또는� 권위� 있는� 선생들에게� 허용되는데,� 그들은� 주로� 그� 회당에서� 율법이나�

선지서를� 읽으며� 그� 읽은� 바를� 풀이하고� 설교하기도� 했다.� 한편� 그때� 회당에서� 이루어지던� 의식은오늘

날의� 예배�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서� 기도,� 찬양,� 성경� 봉독,� 그리고� 랍비(Rabbi)나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사람에�의한�설교� 등의� 순서로�진행되었다.

=====1:22� � 뭇� 사람이�그의� 교훈에�놀라니� -� '놀라니'에� 해당하는� '엑세플레쏜토'(* � � � � � � � )는�

'밖으로'를� 뜻하는� '에크'(*� � � )와� '친다'를�뜻하는� '플레쏘'(* � � � � )의� 합성어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를�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는�

그들이� � 순간적으로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맥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도� 이렇게� 표현되었다(마� 7:28).� 한편청중들� 편에

서� 볼�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놀랍게� 하였던가?� 이에� 대해� � 마가는� 그� '교훈'(*� � � � � � � � � � � �

,디다케)에� 놀랐다고�보고한다.� 이� '교훈'은� 능동적� � 측면에서�가르치시는� 행위�또는� 방법을,� 수동적�측

면에서�가르치는�내용을�각각 의미하는데,� 본문은�이�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실로� 목수� 출신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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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그가(6:3)� 어떻게� 그러한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까하는� 것이� 그들의� 깊은� 의문점이었으리라.�

이러한� � 의구심에� 대해� 마가는� '교훈'이란� 말에� 덧붙여� 특별한� 이유,� 곧�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

세있는�자와� � 같고 서기관들과� � 같지� � 아니함일러라"하는� � 설명구를� � 달았다(마7:28,29).� 다음

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방법과� 내용및� 서기관들의� 가르치는� � 방법과내용� 사이의� 차이점들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진리를�말씀하신�것에(요� � 14:6;18:37)반해� 서기관들의�설교는�대부분이�와전(訛傳)된�것이었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思辯的)인� 것들이었다.� (2)그리스도께서는� 중대한� 의미가� 담긴� 문제들,� 곧� � 생명과사망� 그리고�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셨지만� 서기관들은� 하찮은� 문제들을� �

가지고시간을� 낭비하였다(마� 23:23;눅� 11:42).� (3)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내용에는� 체계가서� 있었

다.� 그러나� 그들의� 탈무드(Talmud)경이� 그렇듯이� 서기관들은� 자주� 중언부언(重言復言)하였다(마� 6:7).�(4)그리스도께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례들을� � 사용하심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

셨지만� 서기관들의� 설교는� 고류하고� 형식적인데만� 얽매여� 있었으므로� 메마른� 심령들의� 갈급함을� 채워

줄�수� 없었다.� � (5)그리스도께서는�사람들을�사랑하시는�자요,� 그들의�영원한�축복에�관심을�갖고� 계시

는자로서� � 말씀하셨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다.� � 하지만� � 서기관들은가

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6)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본� 구절에진술되어� 있는� 바

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 전하시는�메시지가� 바로� 하나님�아버

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실행� � 능력을� 겸비한� 탁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요� 8:26).� 그

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곧� � 아버지의� 메시지요,� 성경의� 메시지다.� 그러나� 서기관들이� 전하는� 메

시지는�대부분� � 그들의�스승들의�유전에서�온� 것으로서�고작� 스승들의�교훈을�인용하는�정도에�그쳤던� �

것이었다(7:8,13;마� 15:2,3).� 그들은� 마치� 깨어진� 물통에서� 물을� 퍼내려고� 헛되이� � 노력하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생수의�근원'(렘� 2:13)이� � 되시어� � 자신으로부터물을� 공급하셨다.� 이상에서�살펴

본�대로�그리스도의�기르침과�당시 종교지도자를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상이(相異)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었는지도�모른다.

=====1:23� 마침(* � � � ,유뒤스)� -� 긴박감을� 더해� 주는� 마가의� 표현� 기법이다.� 곧� 예수께서� 가

르치신� 교훈으로� 회당�내(內)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 '그� � 시점'에라는�뜻이다.� � � 더러운�귀신(* � � � � ,� 프뉴마티� 아카다르토)� -� � 본서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 '다이모니온'(*� � � � � � � � � � � � � � � � � )을� 부가

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 4:33;8:27;10:17등),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

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갈

릴리�사역�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진리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돌진해�온� 자는� 더러운�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

질러'(*� � � � � � � � � � � � � � � ,� � 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가진�어떤� 사람이�정서적�불안� 상태에서�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이상자와�간질병자의�경우로�나타

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 한다.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도전하고� � 그리스도의�일을�방해하며�사람들에게�극한�공포심을�안겨주는�것이다(벧전� 5:8).

=====1:24� � 나사렛� 예수여� -� 문자적으로� '나사렛� 사람'� 혹은�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서,� 회

당에�들어왔던� 귀신은�예수에�대하여� '나사렛�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큰� 소리로�떠들어� 대었다.� 그

것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 따라서� � 천한� � 신분을가졌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術策)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통념�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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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나사렛'이라고� 하면� � 경멸의� 뜻으로� 인식되어졌다.� 왜냐하면� 그곳은� 종교,� 문화적으로� 선민적� 특권

을� 누리던� 예루살렘� 및� 유대� 지경과는� 동떨어진� 이방의� 초라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사� 9:1,2).� 이런�

관점에서� 심지어�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 언급하셨던� � 나다나엘까지도'나사렛에서� 무슨� 선

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였던� 것이다(요� 1:46,47).� � �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 무엇입니까?'이다.� 이� 말은� 귀신이� 그� 사로잡은�자의� 성대(聲帶)와�입술을� 사용하여� 한� 말로서� 의미상으로는� '당신이� 왜� 우리를� 괴롭히려� 합니까'라는� 뜻이다(마� 8:29).�

여기에서귀신이� 말한� '우리'란� 복수형의�칭호에�대해� (1)말하는�사람과�귀신을�함께� 일컫는�이중인격을�

함의한� 말로� 보는� 학자도� 있고(Robertson),� (2)이� 사람의� 입을� 빌어� � 말하는그의� 나머지� 동료� 귀신들

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W.� W.� Wessel).� 이중� 예수의� 신성을� 직시하고� 또� 그분에� 대한� 두려움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더� 적절할� 것이다.� 실로� 이� 귀신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서� 지금� 자신에게� 닥칠� 일이� � 다른� 귀신들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였던� 것이다.� 즉�

더러운� 귀신은� 예수의� 일을� 방해하려� 했으나� 예수� 앞에서� 예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 귀신은� � 자

기뿐� 아니라� 악령의� 세계� 전체에� 닥친� 파멸과� 심판의� 위기를� 직감하고� 공포와�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

다.� � � 하나님의�거룩한�자(*� � � � � � ,� 호하기오스� 투� 데우)� -� � 이는� 23절에� 나

오는� '더러운� 귀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프뉴마티� � 아카다르토)과� 대조되는� 말로

서� 원래는� 하나님께� 구별된� 일꾼들,� 선지자들을� 가리켰으나본문에서는�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메시야성

을� 가리킨다.� 이와� 함께� 예수에� 대한� � 귀신들의� 표현을� 살펴보면� 마� 8:2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the� Most� High� God)로�

나타나는데,� � 이것이� 모두� 귀신이� 어떻게든�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보겠다는� 자기

방어적� 측면에서� 한� 고백으로서� 그� 모두가� 진실한� 진술이었다는� 데� 주목을� 끌게� 한다.이� 귀신은� 예수

의� '거룩한'(*� � � � � � � � � � � � � � ,� 호� � 하기오스)신성을� � 이해했기� � 때문에'불결한'(혹은� '더러운)(*� � � � � � �

� � � � � � � � � ,� 아카다르토)� 본성을� 갖고� 있는� � 자신들은그� 앞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여기

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에� 의해� � 이러한� 용어가� 무의식� 중에� 실토(實吐)되고� 만� 것이다(34절� 주석� 참조).

=====1: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 예수께서� 귀신을� 상대하시는� 유일한� � 방법은� � '꾸짖는� 것'이

다.� 이� '꾸짖다'(*� � � � � � � � � � � � � � � � ,에피티마오)는� 말은� '말로써� 엄하게� � 경고하다'는� 뜻� 외에� '벌하다

','책망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그� 꾸짖음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실로� 귀신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

법은� 타협이나� 회유(懷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다.� � � 잠잠하고...나오라� -� 예수께서는� 완전히� 타락한� 귀신에게서� 자신의� 메시야직에� � 대한� 증거를� 용납하지� 않으셨

다.� 귀신과� 사단은� 이� 거룩한� 증거에� 끼어들� � 자격이� � 없기� 때문이다.� '잠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

피모데티'(*� � � � � � � � � � � � � � � � )는� � '피모오'(*� � � � � � � � � � )의� 부정� 과거� 2인칭� 단수� 명령형으로�원뜻은�

'입에� 자갈을� � 물리라'로서� 더� 이상� 소리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인�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

(Robertson)는� � '소에게처럼� 입에� 망을� 덧씌울� 것이라'는� 말로서� 번역하여� 더욱� 실감있게� � 묘사하고� �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오라'는� 명령� 역시� 더� 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적으로� 그� � 사람에게서� 떠나라

는�거부할�수� 없는� 엄한�명령인�것이다.

=====1:26� � 경련을�일으키게�하고(* � � � � � � ,� 스파락산� 아우톤)� -� � 이것은�

마치� 위경련을� 일으키듯이� '발작하며� 몸부림을�치게�하고'라는� 보다� � 강한� � 의미로해석하는� 것이� 좋다.�

흠정역(KJV)에서는� 이� 구절을� '그� 때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상하게� 하고'(And� when� the�

unclean� spirit� had� torn� him)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이� 번역은,�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눅� 4:35)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원문에� 있는� 경련으로� 보아야� 할� 간질병(마� 17:15)에� 대한� 언급도�

없음으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의� 의미에� 보다�

근접해�있다.어쨌든�귀신(사단)도� 천지� 만물을�창조하시고�지배하시는�하나님의�거룩한�아들의� �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신은� 마지막� 쫓겨나가는� 순간까지도�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

다.� 이것이� 마귀의� 본성인� 것이다.� � �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큰� 소리'(*�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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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네� � 메갈레)란� 어떤� 크나큰� 충격에� 의해� 강렬한� 음성으로� 내뱉는� 비명을� 가리킨다.� 이는� 그� � 사

람이� 받는� 고통이기� 이전에�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만� 하는� 귀신의� 최후의� 일성(一聲)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이로써�그� 귀신은�그�사람의�인격과�영원히�결별하게 된� �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

서� 가운데� 귀신� 축출(exorcism)� 기사를� 첫번째로� � 기록하였다.� 이� 이적의� 기록은� 마가의� 복음서� 기록�

의도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예수의� 교훈(22절)과� 이적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 인류의� � 구원자이심을밝히는�가장�확실한�증거로�제시했던�것이다.� 한편� 교회사가�하르낙(Harnack)

은� 이� 귀신�축출이� A.D.3C까지�초대�교회� 발전에�지대한�공헌을�했다고�주장하면서�한� � 개인의치유뿐�

아니라� 사귀(邪鬼)로� 인한� 공포에� 휩싸였던� 한� 사회를� 치유하는� 크나큰� 역할을했다고� 전한다.� 진정� 이것은� 귀신의� 왕국을� 멸절하시고�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예수의� 권능에� 찬� 역사의� 단면이�

아닌가(9:14-29,� 주제� 강해� '귀신들림과� � 축사'참조).

=====1:27� � 다� 놀라� -� 마가는� 회당에서� 일어난� 생생한� 모습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또� 하나의�

극적인� 동사를� 사용하였다.� '다� 놀라',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담베데산'(*� � � � � � � � � � � � � � � � � � � � � � �

� )은� 수동형이지만� 능동의� 뜻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매우� 충격적으로�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놀란� 이유는� 그들� 모두� 이제까지� 경험해� 왔던� 교훈� 및� 이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22절에서� '뭇� 사람들이� 놀란'것은� 종래의� 서기관들의� 틀에� 박힌� 고루한� 가르침과는� 판이한�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가르치심으로� 인한� 것이었고,� 본� 구절에서� '다� 놀란'것은�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명령에� 귀신

이� 즉시� 쫓겨난� 사실로� 인한� 것이었다.� � � 서로� 물어� 가로되...어찜이뇨� -� 차분한� 어조로� '서로� 말하여'

(눅� 4:36)라고� 기록한� 누가의� 보고보다는� 좀더� 긴장되고� 호기심이� 충천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 하는� �

어구(語句)이다.� � � 새� 교훈(*� � � � � � � � � � � � � � � � � � � � � � � ,디다케�카이네)� -� 주님의�새로운�가르치심과�그로� 인한� 뭇� 사람들의� 놀라움은� 계속� 되었다.� 실로� 예수의� 가르침은� � 진부하고� � 장황한� 랍비의� 교훈과

는�완전히� 판이한�것이었으며,� 이는� 마치� 새봄의� � 꽃내음처럼� � 신선하고� '새로운'(*� � � � � � � � � � ,카이네)�

가르치심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 '새로운'(*� � � � � � � � � ,네오스)�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을� 말한�

것으로� 결국� 예수의� '새� 교훈'은� 고루한� 가르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내용

으로� 다가왔음을� � 연상케� 한다.� 특히� 이� '새� 교훈'은� '권세있는'(*� � � � � � � � � � � � � � � � � � � � � � � ,카트� � 엑

수시안)� 교훈으로서� 사람들의� 심령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창을� 열어� 진리를� 발견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교훈이었다.� 한편� 보통� 대부분의� � 독법(讀法)에서는� '권위있는'이라는�말을�생략하고�읽는다.

=====1:28� �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예수� 사역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

에� 가버나움을� 뛰어� 넘어� 갈릴리� 온�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누가의� 보고와� � 관련시켜� 본� 장명을� 연상한

다면�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도처'로� � 이해해야� � 할� � 것이다(눅� 4:37� 주석� 참조).� 한편� 여기� 제시된�

'갈릴리� 사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 '텐� � 페리코론� 테스� 갈릴라이아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 대해서� '갈릴리'가� 소유격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비단� 갈릴리� � 지역뿐만� 아니라� 고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William� � L.Lane)고� �

보는� 이도있다(마� 4:24).� 이처럼� 예수의� 소문은� 가히� 폭발적일� 만큼� 갈릴리� 전역에� � 퍼져나갔음에는�

의심할�여지가�없다.

=====1:29� � 회당에서� 나와� -� 앞� 사건과의� 연속성과� 예수� 사역의� 생동감� 넘치는� 지속성을� � 강조한�

마가의� 표현� 기법� 중� 하나이다.� � � 시몬과� 안드레의� 집� -� 예수와�그의� 네� 제자들은� 회당에서�나와� 시몬

과� 안드레의� 집으로� 직행했다(마� 8:14;눅� 4:38).� 베드로는�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30절;고전� 9:5)� � 그

의�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가는� 그� 집을�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라고� � 말하고� 있다.� 그렇

다면� 분명히� 시몬의� 형제� 안드레도� 베드로와� 같은� 집에� 함께� 기거했을것이다.� 한편� 이� 집에� 초청을� 받

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야고보와� � 요한뿐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이� 초청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아마도�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열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았다.�

이쨌든�이곳은� � 예수의�갈릴리�사역� 중�매우� 중요한�역할을�했던� 곳으로�예수께서�선교�여행을�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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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이곳으로�돌아오셨던�것이다.

=====1:30� 시몬의� 장모� -�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그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 것은� � 그가분명코�

결혼했음을�지적해� 주고� 있는� 말이다.� 고전� 9:5은� 베드로의� 부인이� 그� 당시� 살아있어서�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동행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베드로가� 독신이었음을� 강

조함은�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 보아� � 인정할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제들의� 독신주의

(celibacy)는� 베드로가 독신이었음을� 가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하나님의�창조� 섭

리에도� 어긋날� 뿐만아니라(창� 1:27)� 너무� 인위적인� 독신주의를� 고집함으로� 인해� 또다른� 우월� � 의식과� �

비신앙적인� 편협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초대� 교회� 시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 클레멘트

(Clement)는� 베드로와�빌립이�자녀를�낳았다고�전하고�있으며,� � 특히 베드로가전도할� 때에는� 항상�

그의� 아내를� 대동(帶同)했다고� 한다.� 그리고�베드로와� 마찬가지로그의� 아내도�순교당하였는데,� 그� 아내가� 베드로가�지켜보는� 앞에서�죽어갔을�때� � 베드로는�아내를� 향해� 오직� 주님만을�생각하라고� 권면했다

고� � 전한다(Clement� � of� � Alex.,Storm.� 3:6).그리고� 또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의� 아내의� 이름은� 컨콜

디아(Concordia)또는� 페페튜아(Perpetua)라고� 전한다.� � �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 마가는� 단지� 시몬의�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는� 사실만을� 언급하지만� 의사� 출신이었던� 누가는� 그녀가� '중한� 열병'(눅� 4:38)으

로� 고통받고� � 있었음을지적한다.� 그녀의� 병명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습한� 기후의� 갈릴리� 호수를� 끼고� �

있는그� 지방에서� 흔히� 발병하던� 풍토병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 그리고� � '누웠는지라'에해당하는� 헬

라어� '카테케이토'(*� � � � � � � � � � � � � � � � � � )가� 과거� 미완료형으로�사용된� � 것으로�보아� 그� 병이� 장기적으

로� 오래� 지속된� 만성적� 질병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하지만그녀의� 열병이� 아무리� 장기적이었고� 또� 극심

했다고�할지라도�만병의�대�의사이신�예수께서�못�고치실리가�없으셨을�것이다.

=====1:31� �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예수께서� 병을� 치유하실� 때� 취하시는� � 특징적인�

행동으로서(41절;5:41)� 환자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한편� 누가는� 이� 장

면을� '열병을�꾸짖으신대'라고�기록하고�있는데(눅� 4:39),� 이는� � 의사� 출신인�누가가�그� 열병의� 원인을�

사단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눅� 13:16)� � � 열병이� 떠나고...수종드니라� -� '떠나고'에� 해당하

는� '아페켄'(*� � � � � � � � � � � )은� � 부정� 과거형으로서�이는� 베드로�장모의� 열병이�즉각적으로�단번에� 나은� �

사실을� � 가리키고,� '수종드니라'에� 해당하는� '디에코네이'(*� � � � � � � � � � � � � � � � )는� 미완료� � 과거형으로서�

계속하여� 수종드는� 현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같은� 확실한� 구원의� 확증을� � 받은자에게는� 주님을� 위

하여�충성하고자�하는�마음과�행위가�뒤따르기�마련이다.

=====1:32� � 저물어� 해� 질� 때에� -�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 토요일� � 오후,�

곧� 안식일이� 끝나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운반해� 와� 예수께� 고침받기를� 원하였다.� 유대인의� 안

식일은�금요일�해질� 때부터�토요일�해질�때까지였으며,이� � 시간내에서는� 일체의� 노동�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렘� 17:21).� 특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정신은� 배격(排擊)한� 채�그� 율법의� � 조목만을 지키도록강요하였으며,� 그리하여� 백성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든� 삶을� 그

대로� 유지한� 채� � 살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

인과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 � 모든� 병자...데려오니� -� 폭발적인�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져나가자� '모든(각양)� �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인� 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 특별히� 본문의�

'데려오니'(*� � � � � � ,� 에페론)는� 미완료� 시제로서� 병자들을� 계속�연이어서�데려왔음을� � 보여� � 준다.한편�

마가는� 누가의� 경유처럼� 각� 환자들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다만� '모든'(많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그� 어떤� 질병도,� 또� 아무리� 많은� 환자라도� 다�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은연중�강조하고�있다.

=====1:33� � 온� 동네가...모였더라� -� 마태와� 누가는� 병자들의� 큰� 무리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 있지만

(마� 8:16;눅� 4:40),� 마가는� 온� 동네,� 즉� 가버나움� 지역의� 무리들에� 대해� 보다� �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시간은� 대충� 안식일이� 끝나는� 일몰� 직후(日沒直後)라고� 보아야� 한다.� 그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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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에서� 귀신들린�자를�이적으로� � 고치신� � 사실이소문으로�신속히� 퍼져� 군중들은�환자들을�많이�데리

고� 예수� 계신� 곳으로� 왔다.� 이러한맥락에서� 볼� 때에� 33절은� 특별히� 생동감을� 더해� 주며,� 이� 동사의� �

시제가� � 계속적으로사람들의� 수효(數爻)가� 늘어가고� 있음을� 일러� 준다.� 한편� 본문의� '문� 앞'이란� � 베드로의�집� 문� 앞을� 가리키며� 바로�이� 문을� 통과한� 자들,� 곧� 문을� 통과하여� 예수를�만난� 자들은�하나같이�

회복과�생명의�기적을�체험하게�되었다.

=====1:34� � 각색� 병든� 많은� 사람� -� 이는� 예수께� 나아온� 병자들의� 양상을� 보여� 주는� 말로써� � 그병증

이�매우�다양했음을�알려주며,� 더불어�수많은�사람들이�예수께 나아왔음을� �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예수

께서� 베푸신� 이적을� 대별(大別)하면� 귀신� 축출,� 질병� 치유,� 죽은자를� 살림,� 피조계(被造界)를� 당신의�의지로� 다스림� 등이� 있으나� 특히� 마가가� � 관심을가진� 부분은� 바로� 귀신� 축출이었다.� � �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 유대� 종교�지도자들을�위시한�대부분의 사람들은� � 예수가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영적� 감지력(感知力)이� 뛰어난� � 귀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익히� 알고� 있었다(눅� 4:41).사실� 귀신들은지적인�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 신성과(마� 1:24),� 자신의�

운명(마� 8:29)� 그리고� 구원의� 계획(약� 2:19)� 등을� 알았으며,� � 그들� 나름대로� 잘� 발달된� 지적�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딤전� 4:1-3).� 이� 사실은� 이미� � 24절에서도� 잠깐� 밝힌� 바� 있다.� � �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자신이� � 하나님의� � 아들이라는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실

로� 귀신들도�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 존재이다.� 그런� 관점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침묵을�명하신� 것이� � 아니고'귀신'에게� 말을� 못하게� 했음을�강조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귀신의�말을�

허용� 혹은묵과하셨다면�상황은�어떠했겠는가?� 아마도�그들은� 24절에서와�같이�당신은� '하나님의거룩한�

자'라고� 서슴없이� 외쳐대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자신의� 신적인� � 존재에� 대해� 인지(認知)하였다는�사실을�알고� 계셨으나�그� 사실을�사람들에게 공포하는것을�금지시키셨다.� 실로� 예수께서는�자

신이�사악한�존재에�의해� 그� 신분이 밝혀지기전에� 먼저�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의� 메시야인

가를,� 즉� 당시� 사람들이� 갖고있던� 메시야�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메시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 또한예수께서는� 오직� 구원받은� 자기의� 백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온� 천하에� � 전파되

기를� 원하셨다(16:15;행� 1:8).�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아직� 당신의� 존재를� � 공개하실� 때가� 이르

지�않았기�때문에�더욱� 침묵을�요구하셨던�것이다.

=====1:35� � 새벽� 오히려� 미명에� -�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교훈과� 치유� 사역으로� 몸이� 퍽� � 고단하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집에� 머무시다가� '아직� 날이� � 채� � 새기도� � 전에'(눅4:42)일어나셔서� 한적

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 말에� 해당하는� � 헬라어� � '프로이엔뉘카� 리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을� 흠정역에서는� '날이� 밝기� � 이전'(agreat� while� before� day)이라� 하였고,� NIV역에서는� '

아직� 어두울� � 때'(while� � it� � wasstill� dark)로� 번역하고� 있다.� 이때는� 아마도� 오늘날의� 새벽� 3-4시경

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나가셨을� 뿐� 아

니라� � 그성읍에서도� 나가셔서� 갈릴리� 가버나움� 교외의� 광야� 지대로� 추정되는� '한적한� � 곳'으로발길을�

옮기셨던�것이다.� 본서에는�이곳�외에도�두� 번� 정도�더�같은� 상황을 발견하게되는데,� 그때마다� 예

수는�당신의�사역� 중� 매우� 중대한�일을� 눈� 앞에� 두었음을� � 볼� � 수있다.� 지금� 예수는�갈릴리�전역에�선

교� 여행을�떠나기�전으로서�그� 어떤� 준비보다� � 하나님�아버지와의�내밀한�교제를�통한� 영적� 준비가�필

요했기� 때문에� 이� � 한적한� � 곳에,이른� 시간에� 홀로� 나아오셨던� 것이다.� � � 기도하시더니� -� 이� 말에� 해

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토'(*� � � � � � � � � � � � � � � � � � )는� 미완료� 시제로서� 예수께서� 기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열심히� � 기도하셨음을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맡은�

인류� 구속� 사역,�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완수해야만� 하는� 갈릴리� 사역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아버지

로부터� �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요구하셨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기도의모본

(模本)을� 통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는� 세례받으실� 때(눅� 3:21),� 열� 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눅� 6:12),� 오병� 이어의� 이적을� � 베푸실� � 때와그� 일� 후에(6:41,46),� 제자들에게�중

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에(눅� 9:18),� � 변화산에� 계실� 때에(눅� 9: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아� 다� 내게도� 오라"고� 하신� � 사랑의� 초청� 직전에(마� 11:25-30),�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 부인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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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 위하여서(눅22:32),�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날� 밤에(요� 1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14:32,� �

35,36,� 39),� 십자가� 위에서(눅� 23:34),� 그리고� 그의� 부활� 후(눅� 24:30)에� 기도하셨다.� 위의� 기도의�

경우들은�예수의�기도� 생활이�얼마나�진지했으며�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실로�기도는�그분이�지니신�능력의�원천이요�또한�영적� � 양식이었던�것이다.

=====1:36� � 뒤를� 따라가�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디옥산'(*� � � � � � � � � � � � � � � � � � � � � � � � )은�

단순히� 추종(追從)하는� 것이� 아닌�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샅샅이� 뒤지고� 성가실� � 정도로� 찾고� 또� 찾는�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 순수한열정을� 증거해�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다.� 한편� 여기서� � 마가가� '제자들'(*� � � � � � � � � � � � � ,� 마데타이)이란� 말를� 쓰지� 않고� '시몬과� 및� 그와� �

함께있는� 자들'이라� 묘사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제자들처럼� 행동치� 못하고� 단지� 무지한� 인간적� 수준에�

머물러�있었기�때문이었을�것이다.

=====1:37� �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베드로의� 집� 앞에� � 모여있었던� 무

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를� 찾아� � 뵙기를� � 원하였다.� 이들은� 아직� 예수를� 구주로� 깨닫

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예수의� 외적인능력,� 곧� 병� 고치는� 능력에� 혹(惑)하여� 열광적으로�예수를� 찾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한편� 이� 말을� 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기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실로� 그들은� 아직� � 온전한� � 메시야

관을확립하지� 못한� 채� 정치적이고� 인기에� 영합(迎合)하는� 그릇된� 메시야관(8:27-9:1)에� 집착했음이� 분명하다.

=====1:38� �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 이제부터� 주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각� 동리와� � 마을들로�

다니시며�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하시고자� 결단하신다.� 여기서� � 주님은� � 일반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이적이나� 일으켜� 군중들에게� 인기나� 얻고� 세상적인� 부귀� 영화나누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셨다(마� 4:6-10).� 그의� 목적은, 비록� � 이세상에서는� 머리� 들곳조차� 없을지언정(마� 8:20;

눅� 9:58)� 고난의�길을� 택하시고�그� � 고난을�통하여�영원한�천국� 복음을�전하시기�위한�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마을들'(* ,� 코모폴레이스)이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규모를� 갖춘� � 마을을가리키

는� 말일� 것이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면� 그� 당시� 갈릴리상류� 지역에는� 수천명

을� 군락(郡落)으로� 하는� 약� 200여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예수는� 이� 200여개의� 마을을�다�돌아다니시고자�하셨다기� � 보다 가버나움근방의� 여러� 마을들을�돌으시며�전도하고자� 하셨

던� 것� 같다.� � � 전도하리니�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 예수께서�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고난을�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지� 단지�기적이나� 베풀어�인기를�

누리기� 위해서� 오시지는� 않았다.� 물론� 병고침과� 귀신� 축출은� 중요한� 일이지만(39절)� 그것들은� 예수께

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야� 했다.� 실로� 마가가� 그의�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

수를�기적� 베푸는�자로서만� � 지나치게� � 강조하는�이단적�기독론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면�

분명히� 본문의� � 말씀은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왔노라'(*� � � � � � � � � � � � � � � � ,� �

엑세르돈)는� 말은� '...에서� 나아왔다'는� 뜻으로서� 베드로의� 집에서� 기도하러� 광야로� � 나아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하고(Mayer),� 하늘에�계신� 아버지에게서� � 나아왔다는� � 의미로해석되기도�한다(Bengel).� 그

런데�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4:43)와� 조화를� 이루기� � 위해서는� 이� 땅에�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

나님�아버지의�품을�떠나� 세상에�왔노라고해석하는�것이�더욱� 적합할�것이다.

=====1:39� �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 이는�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전도� 여행을� � 요약한� � 말이다.� 사

실� 마가의� '온� 갈릴리'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기보다� 매우� 방대한� 지역을� � 활보(闊步)하였음을� 강조하는�말로서,예수의� 전도� 여행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 보여주고� 있다.� � � � 여러� 회당� -� 그� 역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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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포로� 시대로� 믿어지는� 이� 회당은(21절� � 주석� � 참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 백성들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는� 매우� 긴요(緊要)한� 역할을� 했을� � 것이다.� � 예루살렘� � 탈무드(The� � Jerusalem� Talmud)의� 한� 구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멸망� 때(A.D.70)에� 팔레스틴에

는� 480여개의� � 회당이� 산재(散在)해� 있었다고� 한다.� 예수의� 초창기� 사역도� 이� 회당과� 밀접한� 관계가�있다(눅� 4:16-30,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여러� � 회당'에서� 설교하

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현재� 남

아있는� 회당들의� 옛� 터를� 보면�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갈릴리� 지방의� 회당들은� 남쪽을,예루살

렘� 남쪽의� 회당들은� 북쪽을,예루살렘� � 서편의� 회당들은� 동편을� 각각� 향하고� 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

서� 이� 사실은� 그가� � 어느� 회당에� 들어가시든지� 간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동안에는� 항상� 자신이�

장차�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계셨을� 것이다.� 주님은� 늘� 예루살렘에서의� � 십자가를�

염두에�두시고�사역을�감당하셨던�것이다(빌� 2:8).

=====1:40� 먼저� 본문� 이하부분(40-45절)과� 바로� 앞� 부분의� 기사는� 접속사� '카이'(*� � � � ,� � '그리고')

로� 연결되었으며,� 또� 뒤따라� 나오는� 기사(2:1-3:6)� 역시� '카이'로� 연결되고� � 있다.� 따라서� 40-45절� 부

분은� 1:21-39과� 2:1-3:6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데,� � 이는마가복음에서� 이� 부분이� 하나로� 간주

될� 수� 있는� 단위임이� 틀림없음을� 보여준다.� � 그렇다면� 본문은� 갈릴리� 전도� 여행� 도중에� 발생한� 것임이�

분명하다.� � � 문둥병자� -� 문둥병(혹은� 나병)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 질병으로서,�

그� 환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박탈당한� 채� 그들의� � 공동체� � 밖으로소외되었다.� 한편� 성경에

서의�문둥병이라는�말은�문둥병(leprocy)을� 비롯한 광범위한유형의� 심한� 피부병을� 지칭하는� 병명으

로� 쓰였다.� 이는� 흔히� 의학� 용어로� � 한센씨� � 병(Hansen� disease)이라� 일컬어지는� 나병에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니라� 피부와� 모발의� 이상� 등에도� 사용되던� 피부� 질환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종

류의� � 피부병이든간에� 그것이� 일단� 문둥병으로� 단정지어지면� 그� 사람은� 이후부터� 매우� 고통스러운� 생

활을� 해야만� 한다.� 율법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

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

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여� 육체적� 고통과� 함께� 대사회적� 고통까지� 함께� 받아야만� 했던� 무서

운�질병이다.� � � 예수께�와서� 꿇어� 엎드리어� -� 율법에�의하면�사회� 활동이나�대인�접촉이 금지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한� 문둥병자는� 율법의� 고리를� 깨치고� 예수께� 나아왔다.� 실로� �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주

께� 나아오는� 자의� 담대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께� 나아가� 그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

를� 갖추고� ('끓어� 엎드리어')예수께� 경배했다.� � 이에대해� 누가는� '엎드려'(눅� 5:12)라고� 했으며,� 마태는�

'절하고'(마� 8:2)라고� 각각� � 묘사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진정�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치� 자신의� � 전부를� 예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한� 몸가짐으로� � 경의(敬意)를� � 표했던� � 것이다(시10:17;약� 4:6).� � �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문둥병자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능히� � 고

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바는� 예수께서� 과연� 자기의� 치유를� � 원하시는가� 하는� 것

이다.� 실로� 그� 문둥병자의� 예수께� 대한� 신앙� 지식(전지� 전능하신� � 분으로서� 무엇이든� 원하시기만� 한다

면�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는� 사실)을� 가히� 초월적이리만큼� 놀라왔다.� 주께� 모두� 맡기는� 것이야말로� 간

구자의� 참된� 자세일� 것이다.� 한편� 그� 문둥병자는� 예수께� '고침'을� 바라기보다� '깨꿋케� 됨'을� 바랐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선민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둥병은� 의학상의� 문제이기� �

이전에의식법상의�문제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레� 13:1-3).

=====1:41� 민망히�여기사(* � � � � � � � ,� � 스플랑크니조마

이;filled� with� compassion,NIV)� -� 그�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될� 수밖에�없었던� 근본� 동인(動因)이� 묘사되고� 있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 '간절히� 열망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예수의� 문둥병자를� 향하신� 긍

휼과� 사랑과� 동정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 이는곧� 그가� 받는� 모든� 고통을� 목격하고� 더불어� 그�

고통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일� 것

이다(히� 4:15).� 한편� 본문의� '민망히� 여기사'라는�독법(讀法)을� 일부� 사본들에서는� '분하게�여기사'라는�의미의� '오르기스데이스'(*� � � � � � � � � � � � � � � � � � � � )로� 읽기도� 한다.� 이러한� 변용에� 대해� � 혹자(W.�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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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sel)는�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말을� 쓰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 서기관에� 의해� '오르기스데이스'� 독법�

대신에�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독법을� 취했다고� 설명한다.그러나� 만일� '오르기스데이스'독법을� 취하게�

된다해도� 그� 더러운� 병이� 마귀의� � 것이라는� 사실이� 예수로하여금� 분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으

로� 이에�대한� 답변을� 삼을수�있다.� 즉� 예수의�분냄은� 병자나�그가� 앓고� 있는� 병을� 겨냥한�것이� 아니라�

그를� � 파멸로� 이끈� 사단에게� 겨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와� 사단은� 또� 한번의� 충돌을하고� 있

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가의�복음서가� 관심을�기울이는� 한� 가지� � 사안이다.그러나� 비록� '오르기스데

이스'� 독법을� 취한다하더라도� 그� 병자에� 대한� 예수의� � 뜨거운연민의� 정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

� 손을� 내밀어� -� 예수께서는�부정한�문둥병자에게�손을�내밀어�그의� � 몸을 만지셨는데,� 이는� 모

세법에� 근거해� 볼� 때� 부정을� 자초(自招)하는� 일이었다(레� 13:45,� 46).� � 사실� 유대인들은� 문둥병� 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는� 경우�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看做)할� 만큼� 의식법에� 철저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 행위는� 초월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정�

예수는� 인류� 구속의� � 메시지를� 단지� 입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이시고,� 인간들에게� 내재해� 있

는� 두려움과그릇된� 관념을� 실현해� 보이셨다.� 실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은� 의식법의� 부정이� 지닌� 힘보다�

더� 강하고�탁월한�것이었다.� 한편� 복음서의�많은�구절들에서�예수께서 병자들에게� � 친히� � 그� � 손을� �

대시며� � 병을� � � 고쳐주셨던사실이 � 나타나� � � 있다(마� � � 8:3,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그리고�때로는�병자들이�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대기도� 하였다

(3:10;5:27-31;6:56).� 이처럼� 어느� 편에서� � 손을� � 대었든지간에모두� 병이� 낳았다.� 즉� 분명히� 그와� 같

은� 신체적인� 접촉으로� 인하여� 치료의� 능력이� � 구주에게서� 나와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하

여졌던� 것이다(5:30;눅� 8:46).�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떤� 마술이� 아니었다.� 또한� 그치료의� 능력은� 결코�

주님의�손가락이나�옷자락에서�나온�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은�참� 하나님이시며�동시에� � 참 인

간이신예수�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의지와� 죄인을�불쌍히� 여기시는�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것이었

다.� 주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히� 4:15)� 그� � 손으로� 병자를� 만지실� 때� 치료

의� 능력은� 발하여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다.� 이� 불쌍한� 병자의� 간절한� 소원과� 믿음은� 즉시� 그를� 간절한� 마음으

로�돕고자�하시는 구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이처럼� 신속한� 응답은� 주님의� 의지와� 능력과� 사랑이� 하

나로� 뭉쳐진결과로� 이뤄진것이었다.� �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에게� 향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응답이었다(원하시면� -� 원하노니,�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깨끗함을�

받으라.)� 사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너무도� 적절한� 응답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그� � 문둥병자에게� '더� 큰�

믿음과�온전한�영혼'까지� 덧붙여�응답해�주신�것이다.

=====1:42� 곧...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 문둥병� 증세가� 약간의� 차도(差度)가� � 생긴� � 것도,일시적인� 회복도� 아닌� 영원히� 그� 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이적이� � 순간적으로일어났다.� 한편� 복음서

의� 각� 평행구� 중에� 마� 8:3은� � '문둥병이� � 깨끗하여진지라',� � 눅5:13은� '문둥병이� 곧� 떠나가니라'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곧� 문둥병이...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두� 가지� 면을� 다�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는� � 즉각적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장모는� 앓던� 열병이� 완전히� 회복되는

데� 다음날까지기다릴� 필요가�전혀� 없었다(마� 8:14,� 15).� 중풍병자는�즉시�자리에서�일어나�그의� � 침상

를� 들고� 걸어� 나갔다(눅� 5:24,� 25).� 한편� 손� 마른� 사람도� 그� 자리에서� 즉시� � 회복되었다(3:1-5).� 이처

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41절)와� 그� 목적� 하신� 바의� � 성취(42절)는절대적으로� 일치한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전능성과�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본� 이적은� 표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식법

을�범하신�사건이었으나�내면적으로는� '생명의�성령의�승리'였던� 것이다(롬� 8:2).

=====1:43� � 엄히� 경계하사�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 � � � )는� 원래� '말처럼� 코

를� 푸르릉거리다',� '콧소리를� 씩씩내며� 분노를� 터뜨리다'로서매우� 격분한� 상태를� 나타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경계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 성냄과분개(憤慨)의�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처럼� 분노하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부하신� 말씀(44절)을� 그� 사람이�

불순종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예수는� '다시는� �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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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게� � 되었던� � 것이다(45절).� 진정예수는�

사람들에게�당신이�그들의� 호기심을�만족시키는� '이적� 행하는� � 자'로알려지기를�원하셨던�것이다.� � � 곧�

보내시며(* � ,� 유뒤스� 엑세발렌)�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체없이� 억지

로� 쫓아� 보내시며'가� 된다(12절).� 이는� 앞의� '엄히� 경계하사'라는� 말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의� 격렬한�

감정을�분명히�노출시키고�있다.

=====1:44� �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 예수께서는� 간곡한� 어조로� 본� � 치유� � 이적을타인

에게� 발설하지� 않기를� 그� 문둥병자에게� 당부하셨다(3:12;마� � 12:16;16:20;27:9;눅8:56).�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신통력있는� 자',� '기적을� 베푸는� 자'라는� � 명성을� 얻게� 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

문이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

고� 있었던� 터인지라� 여차하면� � 능력많으신� 예수께� 몰려와� 그러한� 능력으로� 세상� 권력을� 장악해� 줄� 것

을� 요구할 것이뻔한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당신의� 사역의� 본질적인� 목적(복음� 전파와� 인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하

다.� 더욱이� 그� 문둥병자는� 제사장앞에서� 깨끗함의� 선언을� 얻기� 전까지는� 대사회적으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고� 또� 자신의� 몸이� 공식적으로� 완쾌되었음을� 확정짓지도� 못할� 것이다.� � �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

이고� -� 문둥병자에서� 고침받은� 이�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깨끗케� 된� 것을� 보임으로� 정결� 의식을� 행

하고�그� 깨끗케�됨을� 제사장에�의해�공식적으로�선포받아야�했다(레� 14:1-20).� 그런데�여기� 정결� 판정

을� 내리는� 제사장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제사장� 그룹에서� 가장� 우두머리격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형식적이나마� 정결� 선포� 권한을� 제사장이�가졌다고�인정하신�것은� 지금껏� 진행되었던�

율법� 제사의� 유효성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와� 더불어�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 그문둥병이� 율법의� 교

훈에� 따라� 치유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신� � 예수의� � 사랑과능력에� 찬� 역사(役事)로� 이뤄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 �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 문둥병을� 치료받은� 자에

게� 요구되는� 모세의� 명령(레� � 13,14장)은� (1)제사장에게� 판정을� 받고(레� 13:16,17),� (2)산� 새� 두마리

(two� clean� livingbirds)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드리고(레� 14:4),� (3)8일후� 재차� � 흠없는� � 어

린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드리는� 것(레� 14:10)으로� 이뤄진다.� 이처럼� 예수는� 모세의� � 명한것,� 즉� 율법

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조언을� 완수하고서야� 비로소� 문둥병자였던� 그� 사람은� 법

적으로� 회복되어� 자유인이� 되고� 성전� 예배� 등이� � 가능한종교적� 사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 아니고� 완전케� 하실려고� 오신것임이� 명백하에� 입증되었다(마�

5:17).� � � 저희에게� 증거하라� -� 모세의� 명령한� 것을� 드리는� 것은� 결국� '증거를� 위한'� � 것이었다.� 즉� 제

사장과� 사람들에게� 병고친�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그� 명한� 것을� � 행해야했던� 것이다.� 실로� 당시�

백성들에게�이스라엘�종교의�책임자인�제사장의�치유� � 판결보다�더욱�확정적인�판정은�없었다.

=====1:45� � 그러나�그� 사람이...전파하여� -� 예수께서�아주� 엄격하게�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그�

사람'은� 인간의� 본성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사실� 인간적� 측면에서� 그가� 지금껏� 억압받고� 있던� 문둥병

으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을� 억제하고� 끝내�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솟구치는� 생

명에의� 환희에� 도취되어� 자신에게� � 일어난� � 변화의조목조목을� '많이'('크게'란� 뜻),� 더욱� 열정적으로� 사

방에� 퍼뜨리고� 말았다.� 결국� � 이는� 예수의� 복음� 사역에� 크나큰� 장해(障害)� 요인이� 되고� 말았다.� 실로�복음의참� 일꾼이되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감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절제,� 인내의� 덕� 및�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것이다.� � � 다시

는...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 여기서� 문둥병자가� 병고침을� 받은� 이후의� 실수가� 나타난다.� 그는� 예

수의� 침묵에의�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비한� 체험에� � 집착한나머지� 예수의� 사역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즉� 그는� 예수로� 인한� 자신의� � 치유� 사실을� 가는� 곳곳마다� 소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극

도로� 흥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예수께서는� 공공연히� 마을에� 들어가셔서� 사역의� 주된� 목표인� '말씀�

전파'를� 못하게되셨던� 것이다.� 즉� 이제� 사람들은� 오진� 신비한� 이적에� 온� 정신이� 빼앗김으로써� 예수의

전하는� 메시지에는� 귀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그릇된� � 메시야관을� 고치시

기� 위하여�동네에�들어가지�아니하시고�바깥�한적한�곳에� 머무신� 것이다.� 여기서� '바깥� 한적한�곳'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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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동네� 바깥이나� 광야� 지역� 같은� 곳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한동안� 흥분한� 그들

로� 하여금�냉정을� 기하게�하셨으며,수일�후에� 가버나움�동리로� 들어가셔서� 말씀을�전파하신다(2:1).� 한

편� 바로� 그런� 이유에서� 본문의� '다시는...들어가지� 못하시고'라는� 말이� 지닌� 의미에� 의구심이� � 생길� �

수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해결하자면� 원문이� 의미하는� 바를� 새롭게� 해석할� � 필요가� 있다.� 즉� '

다시는...못하다'(*� � � � � � � � � � � � ,� 메케티)란� 그� 이후� � 영원히� � 못하다는뜻이기� 보다� 오히려� '더� 이상�

계속해서� 못하다'(no� longer),� 즉� 복음� 전파� 사역을� � 지속적으로� 계속하지� 못하고� 잠시나마� 중단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처럼� 침묵,� 은신하시고�

계신때에도�사람들의�마음�속에서는�예수에�대한� 새로운�인식과�기대가�점차� 넓혀지며� 커져만�가고� 있

었다.� � � 사방에서...나아오더라� -� 여기서� '나아오더라'(*� � � � � � ,� 에르콘토)는� 미완료� � 시제로서� 갈릴리�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음을� � 암시해� � 준다.� 실로� 생명은� 강한� 흡입력

이�있어서�뭇� 심령들을�끊임없이�움직이게�한다.� � � � 마가복음�제� 2장

=====2:1� � 수일� 후에(* � � � � � � � ,� 디� 헤메론)� -� 이는�정확한�날들의� � 수를 지시하는말

이기� 보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셨을� 때와� 돌아오셨을� 때� 사이의� 빈� � 기간을지칭하는� 표현이

다.� � � 다시� 가버나움에...소문이� 들린지라� -�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신� 뒤에� � 갈릴리의� 여러� 지방

을�두루�다니셨다.� 앞서� 이야기된�바에�따르면(1:21)�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은� 갈릴리에서의�

선교� 활동을� 위해서였으나� 치유받은� 문둥병자의� � 인간적인� 열성에� 의해� 잠시� 그곳을� 떠나셨다가� 다시�

팔레스틴� 북쪽� 지역,� 특히� 갈릴리� � 사역의� 활동�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 간혹� '다시',� 즉� 헬라어로� '파린'(*� � � � � � � � � )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미� 보도한�

상황과� 지금부터� 전개될� 상황과의� 긴밀한� 연관성을(13절;3:1,� 20;4:1;5:21;7:14,� 31)� 보여주려는데�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난� '집'은� 1:29에� 나타난� '시몬과� �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할� 수

가� 있다.�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 오시자� 그� 소문은� � 곧� � 인근각처에� 퍼지게� 되었다.� 예수에� 관한� 이야

기가�소문으로�퍼진다는�것은�마가의� � 전형적인�표현이다(3:8,� 21;5:27).

=====2:2� � 많은�사람이�모여서...도를� 말씀하시더니� -� 1:33에서� 이미� 주어진�인상이�보다� � 확대된다.�

즉� 예수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한번� 만나보기� 위해� 베드로의집� 앞에� 인산� 인해(人山人海)를� 이뤘던� 것이다.� 이러한�장면에� 대해� 특별히� 마가는� 그집� 문� 주변이� 거의� 통행� 불능� 상태에�이르렀음을�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더욱� 현장감있게� 묘사했다.� 한편� 예수는� 이런� 상황에� 처하여� 그

들이� 기대하는� 바� 이적을� 행치않으시고� 오직� 천국�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셨다.� 그런데�

마가는� � 예수께서� 말을� 전하심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도(� � � � � � � � � � � � � � � � � � ,� 톤� 로곤)를� 말

씀하시더니'라고�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마가는� 4:14-20에서도� 다시� 한� � 번� � 구체적인설명�없이� '말씀

'을� 전하신� 것을� 담백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도'(道)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성경에서는�흔히�이� 말이� '구원의� � 메시지',� � '복된소식',� '복음'� 등의� 의미로�사용되었으며(Lane),� 특별

히� � '하나님� � 나라의� � 비밀'(thesecret� of� the� Kingdom,� 4:11)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실로� 예수께

서는� 자신의� � 인기에� 영합한� 일시적� 문제� 해결로서의�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

해결해�주시기�위해� 참생명의�진리를�가르치셨던�것이다.

=====2:3� � 한 중풍병자를� � 네 사람에게� � 메워 � -� � � 중풍(paralysis)은 � 뇌일혈

(cerebralhemorrhage)�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 없게�

되는� 병이다.� 그래서� 중풍� 환자는� 말하는� 것을�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사용할� 수도� 없었기

에�타인의�도움에�의존할�수밖에�없었다.� 한편� 여기� 등장하는� � '네사람'에�대해� 그� 환자의�친구인�상전

의� 명령을� 받은� 종들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 그환자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쨋든�

이� 네� 사람은� 그� 환자를� 위해� 아낌� 없는� 헌신을� 다하는� 참된� 의미의� 동료요� 형제요� 친구였다.� 누가의� �

보고에� � 따르면이때� 네� 사람은� 환자를� 침상에� 뉘고� 그� 침상의� 네� 모퉁이를� 네� 사람이� 메고� 왔음을� 곧

알� 수� 있다(눅� 5:18).� 실로� 침상을� 운반하는� 일에� 적극� 동참한� 자들의� 예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협

력과�진취적�노력및�아름다운�협동은�그리스도께�넉넉히�인정받을�만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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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무리를� 인하여...데레갈� 수� 없으므로� -� 헌신적인� 4명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 병자가예수께

서� 계신� 집에� 당도했으나� 수많은�군중들이� 입추(立秋)의� 여지도� 없이� 그� 문� � 앞에� 둘러서� 있었기�때문에� 정작� 만나� 뵈어야� 할� 예수께는� 도무지� 다다를� 수가� 없었다.� � �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달아내리

니� -� 4명의� 동료들은�포기하지�않고� 모든�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들은�우회하는�방법이지만� 가장� 적극

적인� 행동을� 취했다.� 즉� � 바깥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환자를� 메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가�

있는� 곳으로� 환자를� 달아내렸다.� 한편�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

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이다.� 그리고� 바깥은지붕으로�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 되어있다.� 가끔�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으로� 덮기도� 했다(2:1-28� � 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참조).� 따라서�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올려� � 온사람들은�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내고(이때� 분명히�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막� 드러난� 들보(the� now� exposed� beams)� 안으로� � 그환자를� 달

아내렸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상'(*� � � � � � � � � � � � � � � � � ,� 크라밭톤)은� � 일반서민들의� 짚으로� 만든� 자

리나�담요� 같은� 누울�것을� 가리킨다.

=====2:5�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기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현명함과� 또� 열심있는� 믿음을� 보셨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란� 단지� 침구

를� 메고� 온� 4명의� 동료만이� 아니라� 중풍병자까지를� 포함한� � 5명을� 함께� 지칭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

이다(Cranfield,� Robertson).� 사실� � 본� � 사건을통해� 중풍병자의� 믿음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예

수께서� 바로� 그� � 환자에게� � '죄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 �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

라� -� 예수는�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대신� 그� � 사람의죄를� 용서해� 주셨다.우리는� 여기서� 그� 환자가� 필

요로� 했던� 바가� 죄의� � 용서가� � 아니라바로� 중풍병의� 치료였다고� 피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 환자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던� 것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환자의� 경우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

하나님으로부터�분리되었다는�사실이�더욱� 분명해지고�또한�모든� 고통은�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떠남으

로�기인되었다는(사� 59:1,� 2)� 구약성경에서�반복적으로 나타나는� � 진리가예증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병을� 고쳐� 증거할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뚜렷한이적에� 관한� 내용으로�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Schweizer).� 어쨌든� 예수께서� � 육신의� 병을� 고치러� 온� 자에게� 영혼의� 죄까지� 사해� 주신� 사실을� 통해�

(1)� 육신의�병고침은한시적(限時的)인� 것이지만�영혼의�죄사함은�영원하며,� (2)� 육신의 질병이 직

접적인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인류� 최초� 범죄� 이후� 병과�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본질적� � 측면에서� 볼� 때�

육신의� 질병보다� 그� 본질적인� 원인인�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며,� (3)� � 전자는� 부분적이요� 조건적이고�

후자는� 전체적이요� 절대적이고,� (4)� 전자는� 인간의� � 방법으로도� 가능할지� 모르나� 후자는� 오직� 예수� 당

신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본문의� '소자야'(*� � � � � � � � � � � ,� 테크논)란� 말은� 흔히� 랍

비들이� 제자들을� 향해� 쓰는호칭인� 동시에� 친근한� 손아래� 사람에게� 칭하던� 매우� 부드럽고� � 따사로운� �

호칭이다(마9:2).

=====2:6� � 서기관들이...마음에� 의논하기를� -� 저자� 마가는� 이미� 1:22에서� '서기관들'을� � 언급한� 바�

있다.� 눅� 5:17에서는�그들이� '갈릴리�각�촌과� 유대와�예루살렘에서�왔다'고� � 기록하고�있다.� 그런데�그

들이� 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이유가� � 있었음이� � 분명했다.� 즉� 그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

를� 어떻게든� 책(責)잡기� 위해서� � 왔던� �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수의�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있었으며�그� 마음은�예리한�칼날같이�모든� 상황을�점검하며�서로

의� 의견을� �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생각했다.

=====2:7� � 이� 사람이...참람하도다� -� 전통주의적이요�사변적인�비평가들의 판단은 명백하게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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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속성과� 메시야의� 특질이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야조차도죄를� 사할� 수� 없었고� 오직� 야웨� 한�

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 그들은야웨와� 메시야의� 일체성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 땅에메시야로� 강림하신� 예수께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하나님의�

아들(聖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 행하시는� 바는� 다른�두� 위격이� 행하시는� 바와� 함께�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서로

가� 매우�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세� 위격은� 홀로� 또는� 서로가� � 독특한� � 일을행한다고� 할� 수� 있다.� 동

시에� 세� 위격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세위격� 중� 어떤� 한� 위격이� 행하는� 바는� 불

가분적으로� 다른� 두� 위격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창� 1:1,� 2을�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성령,�

두� 위격이� 창조� 역사를� � 주도하신� 것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창� 1:3� 및� 요� 1:3에� 비추

어� � 볼때� � 세상이하나님의� 말씀,� 곧� 성자� 예수에� 의해서도�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다.� 이� 내용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각각� 다른� � 위격의� 입장에서�

형성된� 진리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 중풍병자에게� � 사죄의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 구

별되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聖父)의� 능력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온전히� 거룩하셨다.� � 그러나� � 그의거룩한� 본성은� 그가� 자원함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요� 1:14;

빌� 2:5-8;요일 4:2,� � 3)인간� 본성의� 한계� 내에서� 국한되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께서� 행하

셨던� 능력있는� 사역은�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아버지� � 하나님의� � 능력으로� � 이루어진� � 것이다

(NIV,Disciple's� Bible).� � � 참람하도다(*� ,� 블라스페메이)� -� 이� 말은�인간 관계에 있

어서는주제넘고� 건방지며� 사악하게� 타인을� 비방,� 중상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 신의� 특권을�

탈취하거나�그분을�불경스럽게�모독한다는�뜻이다.� 한편� 율법(레 24:16)에서는� 참람죄를� 범한�

사람은� 예외없이�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다.� 사실,� 후에� � 스데반은�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

해� 돌에� 맞아� 죽게� 된다(행� 7:54-60).� 따라서� �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갈릴리� 목수� 출신

에� 불과한� 예수의� 사죄� 선포는� � 분명� 참람한(blasphemous)�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이� 생각

한� 대로� 만약�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에� 불과했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

옳았을�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움에� 거하던� 자들로서�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비춰졌지만� 감

히�그것을�깨닫지�못하는�불행에�처하고�말았다(요� 1:5).

=====2:8� � 속으로...의논하는� 줄을...곧� 중심에� 아시고� -� 서기관들은� 예수의� 행동에� 관한� � 그들의� 오

해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마가는� 단지� '그들은� 마음에� � 의논하였다'고� 했다.� 실로�

그들의� 마음의� 표정은� 얼굴과� 분위기로써� 넉넉히� � 표출될� � 수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

의� 내면의� 요동을� '중심에� 아시고',� 즉� � '당신의� 영으로� 감지(感知)하시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셨다(마� 9:4;눅� 5:22).� 이처럼� � 예수께서� 그�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은� 분명� 직관적으로� 상대의� 심령을� 읽어

내시는� � 당신의초자연적인� 능력에� 연유한� 것으로서,�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그리스도론적� 사고에� 있어

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이시며(롬� 9:14;빌� 2:6;딛� 2:13)�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계� 19:16)로서� � 전능하시며(마� 28:18)� 전지하시고

(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 신적� 속성을� � 지니셨으며,� 창조(요� 1:3)와� 보존(골� 1:17),� 죄의�

용서(눅� 7:48)와� 심판(요� 5:27)의� 신적� 사역� 및� 성령을� 보내시고(요� 15:26)�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요�

5:25)� 완전한� 신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와� 함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을� � 뿐만� �

아니라(마11:27;요� 17:1),�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셨다(요� 5:18,� 21;12:44,� 45)� 따라서�

학자들은�이것을�신적� 인간�개념(* � � � � � � -� � � � � � � � -conception,� � 데이오스-아네르-컨셉숀)과� 결부시

켰다.� 즉,�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표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인간이어야했으며,� 구속자가� 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했다.� 참� 신성과� 참� 인성을� 동시에� 가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이었

으나� 통일된� 인격을� 가지셨다.한편� 이러한� 신적� 능력을� 행하시는� 행위자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

서� 그분의� 신적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시

는'� 분이시고(왕상� 8:39),�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삼상� 16:7;시� 7:9;렘� 11:20)분,� 그분이� 바로� 전

능하신�하나님이시라는�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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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중풍병자에게...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 단지구두(口頭)로써의�사죄� 선언과� 현상적으로써의� 완전한�치유� 이적�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으로� 그들의�답변을�구하셨다.� 물론� 예수께서�말씀하신�의미로는,� 그� 질문중�어느� 것도� 더� 쉽다고�답할� 수� 없다.� 사

람들에게는� 두� 가지� 모두가� 똑같이� 불가능한일이며,�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이다.� 아마도� 서기관

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죄� 사함의� 성취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죄� 사함에� 관한� 말이� 더� 쉽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실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더� 어렵게생각

되었을�것이다.

=====2:10� � 인자가� 땅에서...알게� 하려� 하노라� -� 서기관들은� 9절에서� 예수께서� 제시한� � 선택적질문

에� 어느� 한� 쪽도� 무책임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에서도� � 같은결과가� 나타나는� 말

씀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신(神)의� 관점에서� 더� 어려운�편,� 곧� 그들이�볼� 수� 없었던�죄 사함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죄를� 사하는� 권리

와�권능을�갖고� 계실�뿐�아니라�그것을�행사하신다(Robertson).� � � 인자(*

� � � � ,� 호� 휘오스�투� 안드로푸)� - 직역하면'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그리스도

께서�즐겨�사용하신�자기�자신에�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타인으로부터�쉽게�공격을�받지� 않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표현이다(눅� 5:24� 주제� 강해� '인자'참조).�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

(authority)와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마가가�

즐겨� 사용한� 메시야� 칭호이다.� 그런데� 이� � 호칭은� � 구약성경과경외전(經外典)인�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示文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어로서,� � 특히� 구약에서는� 주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8:4;겔� � 2:1,� � 3,� � 6,� � 8;단7:13,� 14).� 그리고� 묵시� 문학에서는� 주로� 여호와의� 날� 곧� 종말에� 천군� 천

사들을� � 대동하고�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메시야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Taylor,� Grant).� � 그런

데�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바� 이� '인자'�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란� 의미와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지금� 용납하시고�그�죄를� 지금� �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로�

이해하고�있다(2:28;14:62).� 즉� 그분은�심판의� � 시점까지�기다리시지�않고�지금� 여기에서�당신의�직권

(職權)으로 죄를� � 용서하시는� � 것이다(Robertson).� � �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 이� 구절의� 첫�

부분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부분은� 이제� � 서기관들이아니라�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삽입구가� 된

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의� 대상이� 바뀌는�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 설명

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어떤� 몸의� 동작� 변화로� 이야기의� 대상을바꾸었을� 것이다.� 한편�

달리�생각해�볼�수�있는� 것은� 본�사건의�종합적인�상황을�알고있던�저자�마가가�상황의�급격스런�변화

라는� 어색한� 표현� 기법을� 사용해서라도� 독자들에게� 본� 사건의�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와� 같이�

진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자연스럽지� 못한� 문제로� 해결이� 된다(Wessel).�

예수께서는� � 처음부터�서기관들의�태도에는�관심이�없었고�중풍병자에게�관심이�집중되어�있었다.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 � � � � � ,� 소이� 레고)� -� 이는� 예수가� 지니신� 신적� � 권위를� 대변하는�

말이다(마� 5:22,� 28).� 즉� 이는� 의학적� 기술이나� 귀신들의� 힘을� � 빌리는무술적(巫術的)� 치유와는� 달리�예수� 자신이�죄의� 결과인�질병에�대한� � 지배력을� � 갖고있는�하나님이심을� 공언하시는�절대�권위자로서

의� 선언이다.� � � 일어나...집으로� 가라� -� 동료� 4명의� 도움에�의해� 들것에� 실려왔던� 그� 환자에� � 대한완전

한� 치료를� 선언하시는� 3중적� 명령(일어나,� 가지고,� 가라)이다.� 실로� 예수의� � 권위에�찬� 명령은� 그� 자체�

내에� 역동적� 능력이� 있어� 그� 명령하신� 바가� 그대로� � 성취되도록한다(12절).� 한편� 이러한� 완전한� 치료

는� 바로� 죄� 사함을� 입증했다.� 예수께서� �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분명히� 병� 고침이� 일어난� 것처

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말씀의� 결과로� 이제� 죄� 사함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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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Hunte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이� 볼� 수� 없는� 다른� 일도� 자신이� 행하셨다

는사실을�그들이�알도록�하기� 위해,� 그들이�볼� 수� 있는�이적을�또한�베푸셨다.'

=====2:12� 그가� 일어나� 곧...나가거늘� -� 중풍병자에게는� '곧'(*� � � � � � � � � � � � ,� 유뒤스)� 반응이일어났

다.� 실로�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특히� '모든� 사람앞에서',� 즉� 모든� 무리와� � 죄를사하시는� 예수의� 권위에�

대항했던� 서기관들� 앞에서� 그는� 일어나� 상을� 가지고� � 나갔다.이에� 대해�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먼

저는� 상이� 그를� 들고� 왔으나� 이제는� 그가� 상을들고� 간다'는� 말로써� 엄청난� 그� 변화를� 회화적으로� 묘사

하였다.� 이로써� 예수는� 서기관들에게� 항변� 없이도� 그들의� 비뚤어진� 심사(7절)에� 일침(一針)을� 가하신�것이다.� � 그리고�진실의�확증을�위해� 필요한� 2,� 3인의� 증인보다� 더� 많은� 증인들이�예수의�탁월한�능력

을� 확신함으로써�더� 이상의� 변론이�아무런� 가치가�없게� 되었다.� � �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하나님께�돌

리며� -� 먼저� '놀라다'(*� � � � � � � � � � � � � � � ,� � 엑시크테미)는� 말은� '이탈하다',� '제� 정신을� 잃다'는� 뜻으로�

그� 충격의� 여파가� 매우� � 큼을보여� 준다.� 한편� 예수의�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의� 반응에� 대해� 각� 복음서�

기자들은� � 무리들이� '두려워하며'(마� 9:8),� 또는�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 표현으로� 그�

상황을� 푹넓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이는� 그� 무리들이� 크나큰� 충격� 앞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게� 되었

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충격과� 공포는�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께� 대한� 경

외심을�느끼게�되었음을�말해�주는� 동시에� � 자신들의�본원적인�죄의식이�싹트기� 시작했음을�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사� 6:5).� 그러한� 사실은�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 '영광을� �

하나님께� � 돌렸다',� 실로�이�송영(頌榮)은� 그들이�마침내�그들� 앞에�계신� 예수가�바로� 하나님이�보내신�자,� 곧� 하나님의� 능력을� 대변하는� 자,� 다시� 말하면� 메시야로� 믿게� � 되었음을� � 보여주는� 간접적인� 모습

이다.� � �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 누가의� 평행구(눅� 5:26)에서는�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묘

사함으로써� 표현상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근본� 의도는� 그들이� 과거에� 이런� 일을� 전혀� 보지� 못

했지만�이제�처음으로�이런�일을� 본다는�것이다. 실로� � 이중풍병자의� 치유는� 그야말로� � 잠자던� �

유대인들의 심령에 들어닥친� � 하나님의� � 기습(attack)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기사의� 중요성은�

예수께서� 절망에� 빠진� 불구자를� � 긍휼히� 여겨� 그의� 중풍병을� 고치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의�강조점은바로�죄�사함에�있는�것이다.� 중풍병자가�지닌�문제의�근원은�바로� 죄였다. 예

수께서주로� 관심을� 기울이신�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죄� 사함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나

라가�사람들�사이에�임했음을�선포하셨던�것이다.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 본문� 이하는� 예수께서� 다섯� 번에� 걸친� 종교� 지도자

들과의� 충동� 사건� 중� 두번째로� 해당한다.� 특히� 본� 사건은�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였던� 세리� 레위(마

태)를� 부르시는�내용이다.� 그런데�마가는� 본� 구절의� � 연결어로� � '다시'(*� � � � � � � � � ,� 팔린)라는� 말을� 쓰

고� 있는데,� 이는� 본� 사건이� 독립된� 단위의� � 전승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시간상으로는� 독립된� 구절

이라� 보지만� 내용상으로는� 최초� 4제자를� 부르시는� 1:16� 이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사건의� 장소는� � 갈리리� 해변,� 곧�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해변� 지역으로� 추정된다.� � � 예수

께서...가르치시니라� -� 여기서�그� 가르치심에�대해�미완료� � 시제인� � '에디다스켄'(*� � � � � � � � � � � � � � � � � )

을�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이� 지속적(持續的)으로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탁월하고� 중심되는� 것은� 이진리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바닷가에서� 가르치

시는� 장면은� 4:1에서도� 반복된다.� 바닷가에서의� 설교가� 예수에게� 고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

쨌든 예수께서교육의� 장(場)으로� 바닷가� 주변의� 지방을� 상당히� 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실이나� 주간� 계획표에� 따른� 정확한� 교육� � 시간에� � 한정되기보다는어떠한� 장소,�

어느�시간에도�항상�이뤄져야�하는�전인적이고�전(全)� 공간적인� � 것이어야�한다.

=====2:14� � 또� 지나가시다가(* � ,� 카이� 파라곤)� -� 이� 말의� � 원어는� � 1인칭주격�

현재� 분사로서� 예수의� 활발하고도� 능동적인�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이때� �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 지

역에서의� 가르치심을� 마치고�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그� 행보를� 옮기고� 계셨을� 것이다.� � �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 여기서의� 레위는� 일반적으로� 마태와� � 동일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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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마� 9:9의� 동일� 사건에서� 그를� 마태라는� 이름으로� �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레위'는�

그의� 본명(本名)이고,� � '마태'('하나님의� � 선물'이란� 뜻)는� 그의� 사도명(使徒名)일� 것이다.� 그는� 갈릴리�분봉왕이던� � 헤롯� � 안디바(Herod� Antipas)에� 의해� 세리로� 고용되었다.� 그런데� 마태가� 거주하던� 가버

나움� 근교의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다메섹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큰� 도로와� 메소포타미아� �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행하던� 대로가� 서로� 만나는� 교차로� 근처에� 위치하여� 정치,� � 경제적으로상당히�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Donald� W.� Burdick).� 특히� 이곳은� � 헤롯� � 빌립의관할지인� 데가볼리로부터� 오는� 여

행자들이� 안디바� 관할�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곳,즉� 가버나움을� 통해서� 갈릴리와� 유대� 지역으로� 들

어갈� 수� 있게� 된� 곳이었다.� 한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

세를� 징수하는� � 곳에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신분이� 세리였음을� 단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유대

인의자료에� 의하면� 이� 세리는� 두� 계층의� 세무� 관리로� 구별된다고� 한다.� 즉� 수입세와� � 인두세를� 걷어들

이는� 관리와�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인데,� 후자가� 더� 증오의� 대상이� 되었

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세금� 부과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관

에�앉아� 있는� 레위는� � 아마도� � 다메섹에서가버나움을�거쳐�지중해�해변� 쪽으로�가는� 노상에�위치한�통

행료를 징수하던� � 곳에서일하였던� 듯하다.� 실로�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

는� � 죄인의그룹에�속했던�자였다고�볼� 수� 있다.� � � 나를�좇으라(* � ,� 아코루데

이� 모이)� -� 이� 명령은� 현재� � 미완료형으로서� 단� 한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좇을� 것을� 명령한� 제자에의� 부름이다.� 더욱이� 이� 명령은� 레위가� 현재까지� 수행하고있

던�직업을�완전히�포기하고�질적으로�새로운�직업(사람낚는�어부)를� 선택하라는� � 생(生)의� 변화에의�요구이기도� 하다(1:16,� 17).� 한편� 경제.� 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득권을가진� 레위가� 예수의� 부르심을� 순응

하는� 데는� 주저할� 요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어부는� 쉽게�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몇몇� �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레위로서는� 그의� 직업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 가능성이란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비록� 인격적,� 도

덕적으로는비난을�받던� 직업이지만�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유망(有望)한� 직종으로서� 많은� � 사람들의�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고� 한다(W.� W.� Wessel).�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위대한� 결단을� 함으

로써� 영원한� 생명에의� 유업과� 더불어� 예수의� 위대한� � 복음� � 선교의동역자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편� 이때�마태는�일반적으로� 12제자�중� 가장�나중에예수의�부름을�받은� 것으로�여겨지고�있다(Lenski).

=====2:15� �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 먼저� 여기서� '앉아'(*� � � � � � � � � � � � � � � � � � � � � ,� � 카타케이

스다이)란� '기대다',� '식사� 자세를� 취하다'는� 뜻으로� 유대� 전통에� 따라� 기대어� 눕다시피한� 자세를� 가리

킨다.� 그런데� 레위의� 집에서� 가졌던� 식사는� 레위가� 예수의� 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이제� 집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베풀어진� � 송별회였을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레위가� 자기� 친구들에게도� 예

수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 제공키� 위해� 베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 �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

와...함께� 앉았으니� -� 여기서� '예수와� 함께� 앉았으니'를� 뜻하는� 헬라어� '쉬나네케인토� 토� 예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라는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음식을� 들고� 있었음

을�뜻하는 것으로 여기서의주인역은� 레위가� 아니라� 예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동� 식사는� 인습적인�장벽을� 허무시고� 죄인들과� 교제하기�원하시는�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사랑이�

담긴� 뜻깊은� 자리였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혹자(Lane)는� 이� 구절의� � 주석을� � 다음과같이� 한다.� "

이� 구절의� 관심은� 메시야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는� 것이� � 무엇을의미하는가에� 집중된다.� 예수

께서� 그� 나라로�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17절의� 말씀과� 관련지어� 보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는�메시야의�죄� 사함인�것이며,� � 또한식사�자체도�메시야적�잔치를�암시하는�것이다."� � � 세리� -� 세

리들은�특히� 지배자로부터�세금�징수를�청부받아�이미 백성들의� � 고혈을짜고� 온갖� 수탈(收奪)을� 일삼던� 자를� 가리킨다.� 레위와� 같은� 경우�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로마� � 제국의� � 모든지방은� 각기� 로마� 정부의� 비호� 아래� 고유한� 관세� 구역을� 이루

었다.� 특히� 로마� � 정부에의해� 인정된� 피지배인� 단체들과� 피지배� 국가들도� 징세권을� 행사했다.� 한편� �

조세(tax)와는� 달리� 관세(customs)의� 수입은�황제의� 국고가� 아니라�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 갈릴리에

서는� 헤롯� 안디바의� 금고로� 들어갔다.� 그런데� 관세의� 징수는� 국가� 관리가� � 아니라� 세금� 청부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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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icani)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년� 동안의� 일정한� 세금액을정해서� 일정한� 지역의� 관세를� 청

부� 맡았다.� 그리하여� 여분은� 그들이� 가질� 수� � 있었고,대신� 모자라는� 부분은� 보충해야� 했다.� 따라서� 그

들은� 당연히� 부하들의� 징세를� � 독촉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일반� 백성에게� 부과될� 세

금액이�거의 정해지지않았기� 때문에� 남용하거나� 문란하게� 될� 소지가� 매우� 컸다.� 아니나� 다를까�

탐욕스런� 세리들은� 세액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멋대로� 이용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마구� � 짜내어�

갔던� 것이다(Gnilka).� � � 죄인들� -� 이� 말은� 모세의� 율법과�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의� 해석대로� 따르지� 않

은� �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도덕률을� 범한� 자들'이라고� � 하는일반적� 통

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마가가� 그것을� 의도하였다고� � 하면� � '세리와� 또� 다른� 죄인

들'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낱말은� �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자기들의� 서기관

적� 전통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므로� 천민들이라고� 비하하여� 가리키는� 사람들의� 계층적� 통칭인�

전문어이다(요� 9:24;Lane).� 예수께서� 자신의� 핵심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평판이� 좋지� 않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포함시킨� 것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고대� � 사회에서는�

친분을� 나타내는� 표시)은� '서기관들'이�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 것이었다(16절).� � � 저희

가� 많이...예수를� 좇음이러라� -� 세리와� 죄인들은� 그의� 동료� 레위가� 초대한� � 식사에� 기꺼이� 응했을� 뿐�

아니라�레위의�앞선� 바대로�그들도�예수의�가르침과 친화력에쉽게� 동조되었다.� 실로�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써�영혼의�의사요,� � 친구요,진리되신예수를�쉽게�받아들였던�것이다.

=====2:16� 바리새인의�서기관들이(* � � � � � � � ,호

이� 그람마� 테이스� 톤� 파리사이온)� -�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바리새파에� � 속하는서기관들'이� 된다.�

이� 바리새파�사람들은�평민�계층의�종교� 집단으로서�율법과�유전에있어서�철저한�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이며,� 특히� 그들은� 의식법에� 강조점을� 두었다(Donald� W.� Burdick).�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 들지� 않는� 자들에� � 대해서는� 극히� 배타적이었고� 정죄하기� 일쑤였다(요� 7:49).� 한편� 이�

종파의�기원이나� � 선조에�대해서는�별반�알려진� � 것이� � 없다. 아마도 그들은 마카비 시대에 맛

다디아(Mattathias)와� 그의� 아들들과� 힘을� 같이� 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인� � 하시딤(Hasidim)의후예였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한� 뒤에,� 그들은� 정치적� 독립도� 요구하면서� 대부분� 마카비� 일가를�

떠났다.� 바리새는�히브리어� '파라쉬'(*� � � � � )에서� 유래한�것으로�보이며� 그� 뜻은� '분리'를� 나타낸다.� 따

라서� 그들은� 흔히� '분리주의자'로� � 취급되었다.� 한편� 그들이� '바리새인'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하스모니안� 왕조의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하던� 때로� 여겨진다(B.C.� 135-104).� 유

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바래새인들이란�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종교적� 항목들을�

준수함에� 있어�자신의� 나라의�다른� 사람들에�비해�탁월하다는�평판을�듣고� � 있는한�무리들의� 유대인들

'이라고� 했다(Jos.,� Wars� I.� 110V.� 2).� 실로� 그들중에� 많은� 사람들은� 경건하고� 믿음이� 깊었지만,� 예수

와� 충돌을� 일으켰던� 자들은� 전통적� 종교의� � 가장나쁜� 요소들,� 예컨대� 시기,� 위선� 및� 종교적� 형식주의�

등에�집착(執着)한� 그릇된� � 종교관을�보여� 주었다.� 이에� 대해� 메츠거(Metzeger)는� 이야기하기를� '바리새주의는� 종교의존재의� 의의를� 율법에� 일치시키는� 것으로� 보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행하는� 자

들에게만� 약속된다는� 식의� 종교� 개념을� 가질� 때�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이다'라고� 했다.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가장� 격렬한� 논쟁의� 초점은� 죄의� � 정의에� 관한� 것에� 모아졌다.� 바리

새인들은� 자신들의� 정의에� 따라� 예수가� 계율에� 정한� 바죄인들과의� 교제� 금지를� 무시했기에� 그가� 바로�

죄인이며,� '죄인'이기� � 때문에� � 예수의메시야되심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르게� 죄

를� 정의했다.� � 예수는가르치시길� 비록� 인습적으로� 죄인의� 부류에� 속한� 자이지만� 겸손히� 자신의� � 무가

치함을인정하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예수의� 초대에� 응한� 자는� 더� 이상� 죄인으로� � 남아� 있지�

않고� '용서받은� 죄인',� '구주� 예수와� 친구된� 자'로� 그� 존재가� 변하였다고� � 하셨다.� 이에� 덧붙여� 예수께

서는�바리새인들을�가리켜,� 사역을�통해서�나타난 하나님의역사와�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에� 대해서�

눈먼�자들이라고�말씀하시면서�오히려� � 그들의외식을�정죄하셨다.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 이는�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행하던� � 격언으로

서,� 예수께서는�당신의�성육신(Incarnation)� 목적을�이�격언을 통해� � 단정적으로선언하셨다.� 한편�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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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건강한� 자'란� 타인에게� 그�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느끼는� 일종의� 종교적� 교만자를� 빗댄�

말이다.� 특히� 치료자되신� 예수의� 치유� 은혜를(출15:26)� 거부하는� 자,� 그는� 자칭� 건강한� 자인� 것이다.�

실로�예수께서는�자기 의(義)를추구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절실히�필요로� 하고� 특히�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말� 4:2)의� 치유사역에� 자신의�온� 인격을� 내놓을�수� 있는� 병든�

자,곧�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진정� 예수의� 부르심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 그분의� 초청은�

죽음에서�생명으로의�부르심이요(요� 5:24),� 절망에서�소망에로의� � 부르심이며,� 죄인에서�의인에로의�부

르심이다(사� 1:18).� 그런데�이� 일에�가담하기위해서는무엇보다� 병자� 의식(病者意識),� 곧� 자신이� 결함이�있는�자로서�반드시�치료 받아야만할� 존재라는� 자기� 존재의�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눅�

18:13).� 실로� 예수의� 이� 말씀은�복음의� 본질을�나타낸� 것이라해도� 틀림이�없을� 것이다.� 하나님이�죄인

을 구하신다는� 교리는� 기독교에서� 새로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어떤� 유대인도� 이것을� � 부인하지

는않았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죄인됨을진솔히� 고백하

는�자를�기쁘게�받으신다.� 그리고�하나님은�그들이�죄인임에도�사랑하시고�구원하신다"는� 주장이다.� 이

는� 어느�시대에�있어서도�참된�기독교의�진정하고�영광된�교리이다(Hunter).

=====2:18� � 요한의� 제자들...금식하고� 있는지라� -� 먼저� 본� 금식� 논쟁이� 발생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

면� 앞절에� 베풀어진� 세리� 레위의� 잔치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 금식일에� 베풀어짐으로써�

일어났던� 것으로�보인다.� 한편� 여기� 언급된� '요한의� 제자들'은� � 율법의�준수와� 전통의�고수라는� 점에서�

바래시인들과�그� 정신을�같이� 한� 것을 보게� � 된다.� 즉� 그들은�유대�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두� 번

씩(둘째� 날과� 다섯째� 날)� � 금식을� � 한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때� 세례� 요한은� 헤롯의� 궁이� 있던� � '

마케루스'(Machaerus)에서� 감금� 생활을� 하는� 상태였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부재� 중에도� 금식을� 계

속� � 실천해�온� 것은� 결국� 세례� 요한의�평소� 가르침의� 결실이라�할� 수� 있다.� � 어쨌든� � 분명한것은�세례�

요한의� 금식은� 그야말로� 참경건과� 금욕과� 절제� 생활에� 근거한� 것이지만� � 바리새인들은� 오직� 형식주의

적인� 입장에서� 금식을� 한� 것이다.� 한편� 구약성경에� 보면� � 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규정이� 나타난다(레�

16:29,� 31;23:27-32;민� 29:7).� 그러나� �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부림절(Purim),�

예루살렘� 함락일� 같은� 날� 등� 매년네� 번의� 금식을� 지키는� 전통(傳統)을� 세웠음을� 볼� 수� 있다(슥�7:5;8:19).�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엄격한� 바래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눅� 18:12)� �

금식을행했다.� 어떻게� 이� 매주� 2회의� 금식이� 전통이� 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 아마도이것은� 경

건과� 자기� 헌신의� 표현으로� 행하는� 것인� 듯하다.� 본문이� 전하는�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에�

관한� 기사는� 추측컨대� 앞서� 이야기한� 자기� 경건과� 자기� 헌신의� 외적인� 표시로서� 행한� 것인� 듯하다

(Lane).� � � 바리새인의� 제자들� -�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경우이다.� � 원래바리새인

들은� 교사가� 아니므로� 제자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다소� � 어색한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서기관� 계열에� 소속되어� 나름대로의�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또한� 이� 용어

가�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의식에� � 영향을� � 받은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전문적인� 용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 그러므로� � '바리새인의제자들'이란� 표현은� 후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Wessel).� � � 금

식하는데� -� � 왜� 이� 두� 무리들이� 금식하는지�그� 이유에�대해서는� 저자� 마가는� �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

마도� 요한으로부터� 철저한� 경건(敬虔)� 생활을� 교육받았던� 요한의제자들의� 경우는� 그� 당시� 요한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금식을� 했거나,� � 또는� � 메시야시대를� 기다리는� 의미에서(Lane)� 금식했을� 수도� 있다.�

또한� 바리새인의� � 제자들은� � 그날이� 그들이� 일� 주일에� 두� 번� 지키는� 금식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 금

식했을� � 것이다.여하튼� 두� 경우� 다� 그들은� 금식을� 해야� 참된� 경건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

라서� '혹이'(마태는� 마� 9:14에서� 이때� 질문자가� 요한의� 제자들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예수께서� 와서�

왜� 예수의�제자들은�금식을�통하여�참된�종교적�경건을�보여� 주지�않느냐고�질문하고�있다.

=====2:19� � 혼인집�손님들이...금식할�수� 없나니� -� 예수께서는�그릇된�금식관에�집착하고�있는자들을�

향하여� 비유로� 답변하신다.� 본� 비유의� 강조점은� 예수와� 함께� 있을� 때� 누릴� � 수있는� 기쁨에� 있다.� � 따

라서� � 자기� � 절제와� � 슬픔의� � 표시인� � 금식은(삼상� � 31:13;삼하12:11-23;눅� 5:35).� 예수와� 함께� 있

을� 때는� 부적절한� 것이다.� 유대인의� 혼인식은� 특히경사스런� 행사였다.� 손님들은� 때로는� 한주간이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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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다.그처럼� 즐거운� 잔치� 중에�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다.� 오직� 그날은� �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극락(極樂)의� 시간들로서� 심지어� 율법에서조차� 혼인식� 전후에는�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 보게된다(신�

20:7).� 한편� 본문의�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 '혼인집� 아들들'로서� 신랑의� 친구들� 및� 신랑을� 축

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통칭한다� 하겠다.� 본절에서는� 특히� 그들을� 예수의� 제자들� 및� 예수와� 함께�

천국� 잔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고� 있는� � 구속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는� 스스로� 그� 잔치의�

주역인�신랑으로 자처하신다(호� 2:19,� 20).� 실로� 그� 잔치의�주역인�예수가�그들과�함께� 있는 동

안에는� � 그들이기뻐하며�금식하지�않을�것이다.� 그러나�그를� 빼앗길�때에는�금식이�어울릴�것이다.

=====2:20� 신랑을�빼앗길�날...그� 날에는� -� 이� 말씀의�근본� 의도는� 미구(未久)에� 닥쳐올�예수의�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암시하려는� 데� 있다.� 사실�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 제자들을� 떠나가신� 이후부

터� 제자들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며,� 또� 금식을� 하기도� 했다.한편� 본문의� '빼앗길� 날'에서� '날'(*� � � � �

� � � � � � ,� 헤메라이)은� 복수인데� 반해,� '그� 날에는'의� '날'(*� � � � � � � � � ,� 헤메라)은� 단수인� 것을� 보게� 된

다.� 이에� 대해� 예수의� � 고난과�십자가의� 날은�여러� 날에� 해당하나�그의�죽음� 이후로부터� 있게� 될� 종말

의� 날은� � 확실히� 한� 단위로� 취급되어야� 했기� 때문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이� '날'의� � 변화는�

곧� 닥쳐올�종말의�때를� 예언,� 강조하기�위한� 표현법에�해당한다고�보겠다.� � � 빼앗길(* � � � � � � ,� 아

파르데)� -� 이� 단어는� 원형� '아파이로'(*� � � � � � � � � � � � )에서온�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과� � 마태

복음과� � 누가복음의� � 평행� � 구절에서만(마9:15;눅� 5:35)� 나타난다.� 그� 의미는� (매우� 격렬하게)� '빼앗다

',� '제거하다'로서� � 어떤고통스럽고�미어지는�듯한�이별의�장면을 연상케 한다.� � 이에� � 대해� �

혹자(Bracher,Nida)는� '이와� 같은� 동사는� 그� 뺏앗음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인지� 혹은� 돌발적이거나억

지에� 의한� 것인지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이는� 슬픔을� 유발시키는� 억지에�

의한� 빼앗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시초부터� � 그의죽음에� 직면했다.� 예수의� 제자들

의�삶은�바로�이� 같은� 예수를�중심으로�하여�형성되었다.� 실로� 예수의�공생애� 3년간의�모습은�바로�그

들� 제자들이� 지니는� 기쁨의� 이유이다.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해야� 할� 이유

가� 된다.� 어쨌든� � 자신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진� 예수의� 사역은� 모든� 죽어� 있는� 종교와� 심령들에게� �

새로운진실과�생명력을�불어�넣고�있다'고�한다.

=====2:21� � 생베� 조각을...더하게� 되느니라� -� 예수께서� 도래하심으로써� 시작된� � 새로운� � 진리,새로운�

교훈,� 새로운� 삶의� 자세는� 결코� 옛� 형식들안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비유이다.� 여기서� 예수께

서� 가르치신� 새로운� 복음을� 상징하는� '생베� � 조각'은� � 헬라어로'라쿠스� 아그나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라� 하여� '표백� 처리하지�않고,� 재단하지�않은� 천',� 즉� 새로� 짠� 천,� 사람의� 손을� 거치기�전

의� 올을� 촘촘히� 한� 천을� 뜻한다.� 이에� 비해� 옛� 율법주의� 구조와� 낡은� 형식� 위주의� 유대주의를� 상징하

는� '낡은� � 옷'은� 거의� 헤어져�조그마한�자극에도�찢어져�버릴� 참으로�생명력이�결여된�천을� � 가리킨다.�

이러한� 생명력이� 결여된� 것들에�생베� 조각처럼� 그� 활동력과� 생명력이� � 왕성(旺盛)한� 예수의� 새로운�교훈과� 복음을� 붙이려고� 하면� 그� 헤어짐이� 더하게� � 되는� � 것이다(마9:16).� 따라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 새로운� 교훈과� 은혜의� 복음� 및� 생명의� � 진리는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하지만� 형식적이고,� 바리새주

의적인� 옛� 율법주의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는� 것이다(Lenski).� 오직� 새로운� 진리에는� 새로운� 가치관

과�새로운� � 형식이요구될�뿐이다.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고대,� 특히� 유목� 생활을� 하던� 팔레스틴에서는� � 물이나�

포도주를� 염소� 가죽� 부대에� 보관하여� 이동� 중에� 취식했었다.� 그런데� 이때� 새� � 가죽은� 부드럽고� 유연해

서� 비록� 발효가� 덜� 된� 포도주를� 담더라도� 신축성� 있게� 그� 변화에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축

성을� 잃고� 늘어난� 낡은� 가죽� 부대는� 유연성이� � 없기� 때문에� 터뜨려지기� 쉬웠다.� 즉� 포도주가� 발효하면

서� 생긴� 가스가� 낡은� 가죽� 부대를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포도주를�

낡은�가죽� � 부대에�넣는�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어리석은�경우이다.� 마찬가지로�옛 유대주의에� �

물든사고와�생활� 양식에다가�무한한� 생명력과� 폭발적� 운동력이� 깃든�예수의� 복음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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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다.� � �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본문은� 5,� 6C의� 것으로� 추정되는�

베자� 사본과� 옛� 라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간혹� 본문은� 눅� 5:38에� 있는� 원문을� 후기에� �

인용삽입한�것으로�보기도�한다.� 그러나�대부분의�권위�있는� 사본들에는�본문이 언급되어있으므로� 특

별히� 본문의� 후기� 첨가설을� 인정할� 만한� 이유가� 없다.� 한편� � 본문에� � 두번언급된� '새'라는� 말� 중� 첫번

째� '새'(*� � � � � � � ,�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두번째� '새'(*� � � � � � � � � � � ,� 카이노스)는� 본질적

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 이는� � 가장'최근에'� 만들어진� 포도주는� 전혀� 이상이� 없이� 탄탄하고� 실한�

'최상의'� � 가죽� � 부대에담아야�한다는�사실을�깨우치기�위함이라고�할� 수� 있다.� 실로� 근본적으로� � 변화

된� � 새심령과� 삶에� 구약� 율법의� 완성이요,� 형식적� 율법주의를� 능가(凌駕)하는� 새� 시대의� � 새진리가� 결합되는�것이�가장�이상적이다.

=====2:23� � 안식일에...밑발� 사이로� 지나가실새� -� 먼저� '밀'(*� � � � � � � � � � � ,� 스타퀴스)이란� � 밀이외에�

보리,� 옥수수� 등을� 통틀어� 일컫는� '곡식'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 있다.� � 따라서본� 사건은� 유월절(4월에�

해당)과� 밀� 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5-6월에� 해당)� 사이에�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한� 마가는� 예수와� 그� 일행의� 모습을� � 더욱� 박진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즉� 본문의� '지나가실� 새'(*� �

� � ,� 파라포류에스다이)는� 마치� 밀밭� 가장자리에� 있던� 예수� 일행이� 밀밭� 중심으로� 들어가서� 계속� 지나

가고�있었음을�보여�준다.� � � 길을� 열며� 이삭을�자르시� -� 여기서� '길을� 열며'(*� � � � � � � � � � � � � � � � � � � � � ,�

호돈� � 포이에인)란� (1)� 단순히� '길을� 가다'는� 관용적� 표현이기도� 하고,� (2)� 마치� 귀빈의� � 행차를� 위해�

도로를� 정비하던� 고대� 세계의� 풍습처럼� 예수가� 지나가시기� 편리하도록� 제자들이� 길을� 여는� 장면을� 묘

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2)의� 견해를� 취한다면� �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자른� 것이기�

보다� 오히려� 길을� 만들기� 위해� 이삭을� 잘랐다고하는,� 마태의� 보고와는(마� 12:1)� 다른�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전체� 문맥을� � 살펴보면�분명�제자들은�먹기�위해� 이삭을�잘랐음을�알게�된다.� 한편 예

수의 제자들이행한� 일은� 율법에는� 분명히� 허용되고� 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 때에� � 네

가손으로� 그� 이삭을�따도� 가하니라"(신� 23:25).� 굶주린�이웃이�타인의� 곡식� 밭에� 들어가서�그� 주린� 배

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 은혜로운� 규정이다.� 그러나� 아울러�

율법은� 땀흘려� 농사� 지운� 타인의� 소유가� 지나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굶주림을� 채우는� 것�

이상의� 반출(搬出)이나� 절취는� 엄격히� � 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공의가�충만한 그야말로조화롭고� 온전한� 생활� 규범이다.� 즉� 하나님을� 더불어� 사는� 삶을� 살도록� 배

려하셨고�모두의�권리를�인정하고�공익을�보호하시려고�하셨다.� 여하튼�이러한 은혜로운� � 규범에따

라� 마침� 시장했던� 제자들이� 타인의�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않았다.� 문제는� 제

자들이�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비어� 먹은(눅� 6:1)� 그때가� 바로� � 안식일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는�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이된다.� 첫째,� 이삭을� 잘랐으니� 이는� 안식일에� 추수

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 된다.� � 둘째,� 자른� 이삭을� 손으로� 비볐으니� 이는� 안식일에� 타작한� 결과가�

되므로� � 죄악이� � 되는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힐델� 학파와� 샴마이� 학파간에는� 다소� 의견

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교내에서는� 안식이에� 지켜야� 할� 조항을� 39개로� � 규정해� 놓고�

있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이날�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의식적� 율법� � 준수를� 가장� 중요시하는� 바리

새인들이�보기에는�도무지�용납할�수�없는 일로� � 받아들여졌다.

=====2:24� 바리새인들이...못할� 일을� 하나이까� -� 제자들의�행동이�바리새인들의�비판적� � 시비에�걸려

든� 까닭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 행동이� 안식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

은� 이삭을� 자르는� 동작을� 일종의� 곡식을� 거두어� � 들이는� � 추수작업이라고,� 또� 누가의� 보고에서� 보듯이

(눅� 6:1)�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타작하는행위로� 해석하였으며,� 제자들의� 단순한� 그� 행위를� 안식

일의� 규례를� 깨는� 불경건한� � 노동� 행위라고� 본� 것이다(출� 20:10).� 사실� 율법은� 안식일에� 곡식� 거두는�

일을 공적으로금지하고� 있다(출� 34:21).� 그리고� '미쉬나'에� 보면(M.� Sabbath� 7:2)� 안식일의� 금지�

사항� 39개� 항목� 중에�세번째로�금하고�있는�것이� 곡식의�수확� 행위이다.� 한편 서기관들의� 견해에�

따르면� 제자들의� 불미스러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선생에게�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

수께� 직접� 항의하였다.� 저희들은� 법적으로� 무엇이� 허용되고무엇이� 금지되고� 있는가의� 할라카(Halak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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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제를�들고� 나왔다. 짐작컨대� � 그들이이처럼� 예수께� 분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안식일을� 범한� 사

실에� 대한� 처벌에� 앞서서� 법적으로� 반드시� 경고해야� 한다고� 하는� 조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Lane).

=====2:25� 예수께서�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반대로� 질문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처하셨다.�

여기서� 예수의� 질문은� 그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하시려� � 한� � 것이다.그가� 언급하신� 사건은�

삼상� 21:1-6에� 기록된� 것이다.� � � 다윗이...핍절(乏絶)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 다윗과� 그� 무리들은�사울왕의� � 살해� 위협에� 쫓기며� 핍절하고� 시장할� 때에� 진설병,� 곧� 고운� 가루로� 구원� 성결한� 상� 위에두�

줄로�진설한� 12덩이의�떡을�먹었었다.� 본래� 율법에는�매안식일에�새로운�떡을�성소에�들임으로써�이전

것과� 교체하였으며� 교체된� 떡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되어� 있었다(출25:30;35:13;39:36;레�

24:5-9;Jos.,� Antiq.� III.� 255-56.� X.� 7).� 따라서�다윗의� � 행동은�엄연히� 율법에�반(反)한� 것이었다.� 그러나�그는� 이� 일로� 인해�구약� 어느 곳에서도정죄받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안식법에�

위반된� 것이� 아니라는� � 주장이� 아니고� 하나님� 시각에서는� 그러한� 위반도� 용납되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좀� 더� �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법률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핍절과�

배고픔은� 종교의� 의식주의보다� 상위(上位)의� 법에� � 해당한다'(Earle)는� � 사실이다.진정� 예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원초적인� 필요가� 단순한� 모든� 의식� 규범과� � 형식적�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

을�선언하고�계신�것이다(Donald� W.� Burdick).� � � 읽지� 못하였느냐(* � � �

� � , 우데포네� � 아네그노테)� � -'읽다'에� 해당하는� '아네그노테'는� 원형� '아나기노스코'(*� � � � � � � � � � �

� � � � � � � � )의� � 제2� 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다시',� '새로운'등의� 뜻을� � 나타내는'

아나'(*� � � � � )와� '배우다',� '알게� 되다'� 등의� 뜻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 � � �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정확히� � 알다',� � '이해하다','구별하다'� 등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구약에� 기록된� 바� 다윗의� � 일을� � 읽고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느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2:26� 아비아달�대제사장�때(* � � � � � ,� 에피� 아비아

다르�아르키에레오스)� -� 앞서� 이야기했듯이�이� 내용은� 삼상� 21:1-6에� � 기록된� �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기록된�내용에는�대제사장의�이름이� � 아비아달로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아히멜렉으로� 나

오는�것이다.� 이� 사건이�일어났을�때는�아비아달의� � 부친인�아히멜렉(아비멜렉)이� 대제사장이었고�다윗

이� 진설병(陳設餠,� 거룩한� 떡)을� 얻었던것도� 아히멜렉에게서� 였다.� 이� 구절과� 평행되는� 마태복음이나�누가복음에서는�이� 말이기록되지�않았고�또�상당수의�사본에도�발견되지�않는다는�사실은�어려움을 더

해� � 준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제사장� 직무에� 임했기�

때문에(Grotius),�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혼용되는� 경우가� 있었기� � 때문에등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여기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 것이다.� � 즉브루스(Bruce)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데,� 아비멜렉의� 아들

은� 두� 가지� 이름� 곧� 아비멜렉과� 아비아달로� 혼용하고� 있다(삼상� 22:20;삼하� 8:17;대상� 18:16;24:3,�

6,� 31).� 그리고� 또� 다른� 추론을� 해� 본다면�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아비아달� 부자가� 함께� 그곳에�있었고,�

또한� 함께� 다윗의� 무리를� 돌보아� 주었다.� 그후�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울의� 손에� 죽고� 아들� 아비아달이�

그� 대(代)를� 이어� 대제사장이�되었다(R.� C.� H. Lenski).� � 따라서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

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 � 하나

님의� 전� -� 직역하면� '하나님의� 집'으로서� 예루살렘� 근처� 놉에� 있던� � 성막,� � 곧회막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명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라는� 의미에서� 신.구약을� 통틀어� 자주� 사용되던� 용어이다(대

하� 5:14;딤전� 3:15).� � � 진설병을� 먹고� -�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사울을� 피하여� 놉에� 갔을� 때� 매

우� 굶주려�진설병을�먹었었다.� 진설병은�문자적으로� '그� 얼굴(앞에�놓여진)의�떡'(* � � ,� 레헴�판

님)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처소인� 성소에� 진설되는� 떡� 곧� 제단의�

떡을�말한다(출� 25:30;35:13).� 이는� 곧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헌상(獻上)하는� � 예물로서� � 궁극적으로생명의� 떡(요� 6:35)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상징한다.�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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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는� � 금으로� � 입힌탁자� 위에� 새로� 구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을� 두� 줄로� 매� 안식일마다� 진열하도록� �

율법에� 규정하고� 있다.� 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은� 향과� 함께� 봉헌되고,� 그� 다음� 주의� 진설병이� 제단에�

놓여질�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놓아� 둔다.� 다시� 새로� 구운� 진설병을� 바꾸어� 놓고,� 먼저� 봉헌했던� 진설

병은� � 성소에서� � 물려� � 제사장들이� � 먹는다(출 25:30;레24:5-9).� 따라서� 이러한� 이유에서� 진설

병을�먹는�것� 자체는�위법이�아니다.예수께서주안점을� 두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령을�

닮은� 인간인�다윗이�기근으로심한�고통을� 받을� 때� 그는� 제사장에게� 도움을�청하여�하나님께�드려진� 진

설병을� � 얻었다.� 사실� 속인들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레� 24:9).� 그러나� 하나님에게바

치는� 거룩한� 떡을� 먹어서라도�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당시� 다윗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꺼이� 용인(容認)해� 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실증법이었던� 율법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의� 자연법이� 바르게� 적용된� 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에서,� 아니� 그� 이상의� 이유로� 예

수와�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 자르는것은�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인� 일이며,� 그들이� 손으로� 비비어� 먹

은� 그� 곡식�낟알은� � 그들의�배고픔을�충족시켜�생명을�보호해�주는데�참으로�필요했던�것이다.

=====2:27� � 또� 가라사대� -� 마가는� 예수의� 독립적인� 말씀을� 어떤� 주제와� � 관련시켜� � 삽입하고자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4:2,� 11,� 21,� 24,� 26;6:10;7:9� 등).� 여기서의� � 진술도� 그런� 방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 본구절의� 배경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그�

내용의� 방향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곳의� 논쟁� � 기사에는� 특별히�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 � 안식일은� 사

람을� 위하여� 있는� 것� -�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

님의� 선물임을� 밝히셨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

이다.� 즉�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함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

당시로서� 그렇게� � 과격한� 표현은� 아니었다.� 예컨대� 랍비� 시므온� 벤� 메나샤(Simeon� ben� Menasya)도�

'안식일이너희에게� 맡겨진� 것이지� 너희가� � 안식일에� � 구속되는� � 것이� � 아니다'고� � 했다

(MelkitaShabbata� I;출� 31:14).� 한편� 이� 교훈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 안식일이란� � 부차적(副次的)인�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안식일의� 완전한� 휴식이� 사람에게� 오히려� 피해와� 상처를� 입힌다면� 새

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생명과� 구

원에� 크나큰� 촉매제가� 된다면� 차라리� 휴식을� � 포기하고� 소매를� 걷어붙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 휴식� �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삭을� 비비

어� 거두어� � 들이는일종의� 작은� 노동을� 용인하시고� 묵허하셨던� 것이다.� 실로� 사람이� � 안식일만을� � 위하

다멸망하는� 것보다는� 생명� 보존과� 새� 생명� 탄생을� 위해� 안식일� 굴레를� 벗는� � 것이� � 나을것이다.� 이처

럼� 율법의� 멍에는� 인간을� 법조문에� 찌들게� 하지만� 예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며,� 또� 궁극적으로� 생명

과�환희를�맛보게�한다(마� 11:30).

=====2:28� �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먼저� '이러므로'란� 안식일� 논쟁의� � 비약적� 결

론구를� 제시하기� 위한� 접속어라� 할� 수� 있다.� 실로� 예수는� 당신이� 가르치시는� � 진리에� 대해� 단정적이고�

선언적으로�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 � 보이신다.� 유대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는�노력에�인간의� 전생활�영역을�안식일� � 규정으로�얽매어�놓았으며�그렇게� 함으로써�편협한�율법

주의에� 빠져들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안식일� 관행은� 이

제� 당신의� � 뜻과목적에� 따라� 새롭게� 규명(糾明)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특히� 이� 같은� 선언은� � 예수께서� 안식일�규정을�마음대로�뜯어�고치시겠다는�자기�고집에서가�아니라�그� 규정을� � 새롭고도� 온전하게�

주석하시고� 설명하실� 수� 있는� 당신의� 자격과� 신분을� 선언하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한편� 본

문의� '인자'� 선언은� 마가가� 관심을� 가진� 바� '인자� � 기독론'에�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를� 통해(10절� 주석� 참조)� 드러난� 바� � 영광스런� 하늘의� 인자는� 지금� 바로� 이곳에� 나타나셔서� 죄� 사함

의�권세를�행사하실�뿐� 아니라�특히� 안식일�논쟁의�결론을 내리시는� � 권위를� � 가지고� � 계심을� �

강조하고� � 있다(Grant,� Taylor).� 자세한�것은� 눅� 1:3-5� 주제� 강해� '안식일과�예수님과의�관계'를� � 참조

하라.� � � � � 마가복음�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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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 이는� 연속적으로� 기록된� 다섯� 번의� 충돌� � 기사중� 마

지막�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마가는� 시기(時期)나� 지리적� �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에� 대한� � 예수의� � 입장을밝히기� 위해서� 사용된� 또� 하나의� 사

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란� 2장의� 직접적인반복을� 일컫지� 않는다.� 다만� 내용의� 연속성을� 강조하

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 붙인연결구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구절은� 1:21,� 39에서와� 같이� 예수가�

회당에� � 들어가셨음을�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묘사를� 통해� 본구절은� 예수가� 자주� �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는� 분이심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본문은� 어떤�

안식일에� 만난� 특별한�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 것이라보아야� 옳을� 것이다(눅�

4:16� 주석�참조).� � �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 여기서�손�마른� 상태를�묘사한�헬라어� '엑세람메넨'(*

� � )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는� 그의� 신체� 장애가� 선천적인� 것이기보다� 후천적인� 것으

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묘사

한� 것이다(Robertson,� Vincent).� 한편� � 누가는힘의� 상징인� 그의� 오른� 손이� 마른� 것이라� 표현함으로써

(눅� 6:6)� 그 처지가 절박했던사실을� 더욱� 세밀히� 묘사해� 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중풍병이라�

보기도�한다(DonaldW.� Burdick).� 어쨌든�말라�비틀어진�이� � 손은� � 결국� � 그의 삶의� � 위축과� � 장애� �

상태(Gebrauchsun� fahigkeit)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제롬

(Jerome)이� 언급한� 바,� 나사렛파(the� Nazarenes)와� 에비온파(the� Ebionites)에서� 쓰는� 묵시� 복음서

(Apocryphal� Gospel)와� 외경� 히브리� 복음서(Hebraerevangelium)에는� 이병자가� 미장이로서�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 있다.� � 그래서그는� 예수를�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걸

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병자의� 처지가� 그렇

게�다급한 것으로 묘사되고있지는� 않다.� 단지�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안식

일�개념이�과연� 어떠한�것인가에�대해서�더�깊은� 관심을�보이고�있을�뿐이다.

=====3: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마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반대편� 사람들의� 신분을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가� 막연하게�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 정체는� 분명하다.� 6절에서

는� 바리새인들이� 언급되고,� 평행� 구절인� 눅� 6:7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이미� 율법주의자들의� 관점에서� � 보았을� 때� 비정통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고,� 특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매우� 위험한� � 교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번� 안식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었으므로�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데� 이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직접� 파기하기� 직전� 상황에�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 바리새인들은� 온� 촉

각을� 곤두세우고� 예수의� 행동� 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 것이다.한편� 마가는� 예수의� 허물을� 찾으

려고� 눈에� 빛을� 내고� 있던� 그들의� 목적� � 의식에� � 대해'송사하려� 하여'(a� reason� to� accuse,� � NIV)라

는� � 말로� � 묘사하고� � 있다(마� � 12:10;눅6:7).� 이는� 결국� 그� 적대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로� 이미� 작정

하고�있었음을 보여� � 준다.� 사실� 그� 당시� 회당은� � 지방� � 법정� � 역할까지도� � 수행하던� � 곳이었다는� �

점에서(마12:10)� 예수의� 회당� 안(內)� 치유� 사역은� 어쩌면�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 � 안식일에...고치시는가� 엿보거늘� -� '엿보거늘'(*� � � � � � � � � � � � � � � � � � � ,� 파레테룬)은'지켜보다',� '주시하다'는� 뜻

인� '파라테레오'(*� � � � � � � � � � � � � � � � � )의� 미완료� 과거� � 시제로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

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적의에� 찬� 눈으로� 면밀(綿密)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준다(눅� 14:1;20:20).� 사실당시�안식일�규정에는�매우�세밀한�조항까지�만들어�가며�안식일�준수를�강

조하고� � 있던� 터였다.� 한� 가지� 실례로써� 어떤�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경우� 생명이� 위협을�받으므로�구

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그� '손� 마른� 자'는� 긴급한� 생명� 구조

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 예수의� � 치유사역은� 부당한� 것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안식일에� 그� 사람을� � 고치시는가� 엿보거늘'이란� 말씀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능력을� 가지셨음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고� '할� 것

인가'에� 있었다(Gnil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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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예수께서...일어서라� 하시고� -� 예수께서는� 마치� 적대자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 하듯이� 병

자에게�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주위에� 앉은� 모든� 사

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실로�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찬� 창조� 사역을�

기리고� 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 날이다(창� 2:2;출� 16:23;20:8-11).� 바로� 이날에� 지금껏�

하나님의� 창조�원형에서� � 어그러진� 불구의�몸으로�고생하며�참평안을�몰랐던�손� 마른� 사람에게�온전한�

몸으로� � 되돌려주는�것처럼�안식일을�참되게�보내는�것은� 없을�것이다.� 특별히�본기적의 시 위 적 인

(demonstrative)� 성격은� 2:1-12에� 제시된� 중풍병자� 치유� 사역을�연상시켜� 주며,� � 동시에�은연중에� 예

수의�안식을�규정� 파기를�기대하며� 촉각을�곤두세웠던� 적대자들의�악의에� 찬� 행동에�크나큰�충격을� 가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가만히� 엿보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손� 마

른� 자를� 일으켜서� 한� 가운데� 나가게� 하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초월적인� 권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심으

로써�당신이야말로� � 참된� 의원이요�오실�메시야이심을�강력히�내비치셨다.

=====3:4� � 안식일에...어느� 것이� 옳으냐� -� 당신의�고소를�전제한� 적대자들의� � 예민한� � 촉각을향해�예

수께서는� 병행� 구조로� 된� 이중적인� 질문으로� 그들의� 불타오르는� 적개심에� 오히려� 도전하셨다.� 한편� 이�

같은� 예수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 요청되는가에� 대한� 필요성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

(Donald� W.� Burdick).� 실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일은� 그것

이� 곧� 최상의� 선(Summum� bonum)이요,� 타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더� 나아가� 법조문에� 얽매여�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것이� 곧� 악(惡)인� 것이다.� 실로� � 예수께서는다른�사람을�돕는�선한� 행위를�생명을�구하는�것과� 동일하게� � 여기심으로써 안식일에그

러한� 일들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 것은오히려� 생명을� 죽

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간주하심으로써� � 적대자들의� � 견해를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인간

을� 위해� 정열적으로� 나서는�예수� 그리스도의� � 진지한노력을� 단순히�도덕적인� 선행으로�평가�절하(平價切下)해서는� 안� 된다.� � 진정� � 예수의이� 같은� 노력은�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고� 인생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허락하시기�위한신적(神的)인� 사랑의�행위인�것이다.� 한편� 본문에�제시된�반립(反立)명제를 요

약하면(1)� 살인� 행위와� 곤궁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행위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볼� 수� 있

다(Calvin).� 실로�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살인과� 같은� 악행을� 간접� � 조장하는� 것이다(약� 4:17).� (2)�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구하는� 것,� 즉� 건강을� 회복시키는� � 것이지� 6절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살인� 음모

를�꾸미려는�것이�아니다. 사실� � 예수께서는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간파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수도� 있다.� (3)� 여기에는�사단의�음모를� 멸하시는�예수의� 사명(使命)이� 암시되어�있는�것� 같다.�병과� 상처는궁극적으로� 사단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멸하러� 오셨다.� 한편� 사단은� 1주일� � 내내악을�

행하기� 때문에� 다른� 엿새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에도� 사단과의� 싸움은� � 계속되어야한다(T.� W.�

Manson).� � � 저희가�잠잠하거늘(* � � � � � � � ,� 호이� 데� 에시오폰)� -� 이는� � 3인칭미완

료� 시상으로� 예수의�적대자들이� 아무런�답변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머뭇거리고� � 있었음을�보여� 준다(욥�

5:16;시� 63:11;행� 4:14;딛� 2:8;벧전� 2:15).� 실로� 그들은� � 자신들이� 지닌� 형식주의적� 율법관에도� 자신

이�없었을�뿐� 아니라�참�진리에�대해서도� � 자신이없는�무기력한�종교인들이었던�것이다.

=====3:5� 저희�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근심하사� -� 여기서� '완악함'(*� � � � � � � � � � � � � ,� � 포로세이)이란�마치� 대리석처럼�단단히�굳어버린�완고한�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진정� 유대인의�개념으로�볼� 때� '마음'

은� 인간의�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의� 좌소로서� � 마음이� 굳어버리면� 예수가� 전하고� 보여� 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행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

시고� � '근심하셨다'.� � 여기'근심하사'(*� � � � � � � � � � � � � � � � � � � � � � � � � � ,� � 쉴뤼푸메노스)란� � '함께'란� � 뜻

의� � '쉰'(*� � � � � � )과� '걱정하다'는� 뜻의� '뤼페오'(*� � � � � � � � � )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함

께� 염려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뤼페오'는� 현재� 시상을이루고� 있어� 예수의� 근심하시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한� 무지(無知)를� 애끓는� 심령으로� 바라보시는� 예수의� 이� 같은� 모습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 위해� 이� 땅에� 오셔

서� 죄인들의� 한계와� 아픔에� 함께동참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뜨거운� 인간애(人間愛)를� 보여�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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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심으로...둘러보시고� -� 여기� '노하심으로'(*� � � � � � � � � � � � � � � � ,� 메트� 오르게스)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한다.� 이것이� 바로� 마가의� 복음서가� 지닌� 특징이다.� 즉� 마가

는� 전혀� 숨김� 없이� 예수의�감정을�그대로� � 표현해주고� 있는�것이다(10:14).� 사실� 예수께서�노하셨다는�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 힘들다(1:41).� 그런데� 그가� 노하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

의� 감정에� �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표현된� 적은� 결코� 없다.� 이� '분노'는� 곧�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 곧� 의분(義憤)으로서�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본� 덕목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조화를� 이룬다(Grant).� 실로�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지닌� 그릇된� 마음,� � 죄악에가득찬� 눈길에� 분노를� 터뜨리셨

지만� 그� 영혼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근심해� 주셨던� 것이다.� 한편� '둘러� 보시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페리블렙사메노스)는주로� 많은� 목격자들이� 있음을� 보여� 줄� 때� 사용된� � 용어로(34

절;5:32;9:8;10:23;11:11)순간적으로� 쭉� 한번� 둘러보셨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 분노

의� � 대상이주위�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간접� 시사해� 주고� 있다.� � � 네� 손을� 내밀라...회복되었더라� -� 예수

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고자� � 하셨다(4절).그리하여� 병자에게� 명령하셨고� 그� 병자는� 즉시� 순종함으로

써� 완전한� 회복을� 체험할� 수있었다.� 이때� 예수는� 오직� '말씀'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셨다.� 이� '말씀'은�

곧� � 당신께서� 친히� 태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그� 능력과� 동일한� � 능력을� � 지닌� � 것이다(요

1:1-3).� 따라서� 예수의� 그� 말씀� 한마디는� 그� 어떤� 비뚤어지고�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능히� 원래의� 모

습으로� 온전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 능력은예수의� 명령에� 오직� 순종으로,�

오직�신앙으로�대답하는�자에게만�창조�원형으로의� � 완전함을�제공한다.

=====3:6� 바리새인들이...헤롯당과� 함께� -� 병고침의� 결과는� 놀람도� 환호도� 아니고� 오히려� 적대감을�

증대시켰을�뿐이다(H.� Van� der� Loos,� The� Miracle� of� Jesus,� p.� 438).� � 바리새인들은�이제�헤롯당과�

함께�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했다.� 헤롯당은� 종교적� 집단이기보다� 해롯가문에� 정치적으로� 봉

사하는�정치적�당파였다.� 즉� 헤롯당은 갈릴리를관할하던� 헤롯� 안디바를� 중심으로� 하여� 헤롯� 왕

가의� 부흥을� 꾀한� 집단으로서� 사회.� 종교적� 기존� 질서와� 법률의� 고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Grant,�

Taylor).� 그리고� �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로마� 제국의� 지배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

던� 소위민족적으로� 비애국적� 집단이었다.� 이에� 비해� 철저한� 애국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 외세를� 철

저히�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인� 관계로,� 헤롯당과는� 평소에도� 원수처럼� � 지내던사이로서� 양자간의� 동맹

(同盟)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위험성이� 다분한�예수� 제거에�있어서만은� 생각이�일치함으로써�참으로�어색한�동맹� 관계를�맺게� 된� 것

이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추종자

들과의� � 제휴를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 �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 바리새인들은� 조금�

전� '생명을� 구하는� � 것과� � 죽이는것'에� 대한� 예수의� 질문에� 대해� 예수를� 안식일� 파기자(破棄者)로� 단죄하고(출� � 31:14)'어떻게� 죽일꼬'하는� 사악한� 답변을� 세속적� 집단(헤롯당)과� 함께� � 진지하게� � 의논하

고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때� 생겨나는� 필연적인� 발상이다.� 실로� � 참진리에� 대한� 세

속� 집단의� 반응은� 이처럼� 항상� 진리� 파괴적� 성향을� 띠지만� 겸손한� 영혼의반응은� 항상� 자기� 파괴(자기�

부인)적� 경향을� 띠게� 된다(행� 2:37).� 어쨌든� 이로써� 예수의� 적대� 세력은� 노골적으로� 예수를� 처형키� 위

한� 계획에�박차를�가하게�된다.

=====3:7� � 예수께서...바다로� 물러가시니� -� 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는가� ?� � 마가는� 그�

이유에�대하여�특별히�언급하고�있지�않으나�마� 12:15에� 헬라어� '그누스'(*� � � � � � � ,� '아시고',� 즉� 예수

께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대하여� 아시고)라는� 말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예수께서� 계셨던� 곳

(가버나움)에서� 떠나신� 이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을� 아셨기� 때문

이라고� 생각해�볼� � 수� � 있다.즉� 죽음의�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기�때문에� 예수께서는�갈릴리� 바다� 어느�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던� 것이다(6:31,� 46;7:24,� 31;9:2;10:1;14:32).� 그러나� 거기서� 예수께서는또�

다시�무리들을�만나게�되었다.

=====3:8� � 유대와...시돈� 근처에서...나아오는지라� -� 예수께서� 몰려들었던� 무리들은� 가버나움근방에서

Page 39: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뿐� 아니라� 남쪽� 지방(예루살렘,� 이두매),� 동쪽� 지방(요단강� 건너편),� � 북서쪽지방(두로와� 시돈)� 등� 온�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마가가� 여러� 지방� 이름을� 여기서� 언급한� 것은� 팔레스틴� 전역에서� 무리들이� 예수

께� 나아왔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이에� �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예수께서� 활동하신� 곳이� 갈릴

리(1-6장),� 두로,� 시돈,� 데가볼리(7장)�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으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마가

복음의� 지리적� 범위의� 윤곽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여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 활동하시지않은�

유일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두매� 곧� 헤브론� 남쪽� 지역이다.� 이곳에� � 언급되어� 있는� 지명� 가운

데� 몇몇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이두매� 지역은� 유대�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이두매'(*� � �

� � � � � � � � � � � � � � � � )는� 구약� '에돔'(*� � � � � � � � )의헬라� 음역이다.� 에돔은� 본래� 요단.아르바의� 동쪽� 모압�

남쪽의� 산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이후� 광야의� 아랍족속의� 세력에� 눌려� 서

쪽으로 이동하게되었다.� 이� 후자의� 지역이� '이두매'란� 이름으로� 알려지게�되었다.� 유다� 마카비는� 이두

매인들을� 공략하여� 여러�번� 성공하였다.� 그� 후�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 통치할� 무렵에�이두

매인들은� 유대교(Judaism)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 당시에는� 헤브론� 주변�

지역을� 모두� 이두매에� 포함시켰다.� 헤롯� 대왕이� 바로� 이이두매� 출신이었는데(마� 2:1),� 그의� 여러� 아들

들은� 유대의�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이었다.� 한편�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명은� 사

실상� 팔레스틴의� 북서쪽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요단� 건너편'이라는� 말은� 갈릴리와� 같이� 헤

롯� 안디바의� 통치름� 받던� 베레아와� 데가볼리� 지방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Wessel).� � � 그의� 하신� 큰�

일을�듣고� -� 여기서� � '그의� 하신'에� � 해당하는� � 원어� � � '에포이에이'(* � � � � � )는� 미완료� 능동태로서�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수� 많은� 이적과� � 사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듣고'의� 원어� '아쿠온테스

'(*� � � � � � � � � � � � � � � � � )는� 현재� 분사� 능동태로서�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

수께� 모여든� � 무리들은� 예수의� 신비한� 사역을� 수없이� 들어왔으며� 그� 소문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였던� �

것이다.� 이것이�바로�복음이�지니는�역동적(力動的)� 특성이다.� 복음의�소문은�인습의�장벽과�지역의�장벽을�넘고� 또� 인간의� 의지를� � 움직이는� � 능력이� � 있다(롬� � 10:15-18;히4:12).� 한편� 이때� 예수께� 모여

든� 무리들은�어느�한정된�시점에�급히� 모여� � 들었다기보다�오히려�꾸준히� 오래도록�지속적으로�모여들

었다고�보는�것이�좋다.

=====3:9� � 예수께서...면키� 위하여� -� 오직� 마가만이�예수께서�배에�오르신 이유를 상세하게설

명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 배에� 오르신� 목적은� 무리들에게� 밀리는� 것을� 면키� 위함이었다.� 실로� 예수

를� 향하여� 육신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성치는� 무리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 접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1차원적인� 무리들의� 심성에도� 구애치�

않으시고�당신의 복음을 전하셨을뿐�아니라� 그들의�필요도�만족시켜�주셨다(마� 4:23).� 즉� 예수는� 무

리들의�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기� �

위하여� 본문과� 같은� 이러한� 방법을� 취하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주� 이� 방법을사용하셨다

(마� 14:22;요� 6:15-25).� � � 작은� 배를� 등대(等待)하도록(* � � � ,� 히나� 프로이아리온� 프로스카르테

레�아우토)� -� 먼저� '작은� 배'란� � 몇명밖에�탈�수�없는� 조그마한�보트를�가리킨다.� 그리고 '등대하도록

'에� � 해당하는� � 헬라어'프로스카르테레'는� '꾸준히� 시중들다',� '충성하다'는� 뜻의� 원형� � '프로스카르테레

오'(* � )의� 가정법�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을� 위해� 항상� � 대기하다',� '집착하

다',� '지속적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표현은� 제자들의� 성실하고도� 발� 빠

른� 헌신과� 봉사를� 예감케� 해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를� 갖

추고� 그� 준비한� 배를� 해변� 가까이� 놓아� 두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들의�능수� 능란한�준비� 작업을�짐작할�수� 있을�것이다.

=====3:10� �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 당시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는� 행위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으려고� 너도나도� 그를� 만지고자� 밀어댔다.� 마치� 그� 무리들은�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 은혜를� 베풀어� 그들� 가운데� 많은� 사

람을�고쳐� 주셨다(마� 9:20-22;14:34-36;눅� 6:19).� � � 병에� 고생하는�자들이(*

,� 호소이� � 에이콘마스티가스)� -� '병'(diseases,� NIV)에� 해당하는� '마스티가스'는� 원형�

Page 40: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마스틱스'(* � � )의� 복수� 목적격의� 형태로� 사용되었으며,� '채찍',� '고문'� 등의� � 뜻을� � 갖고있다.�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 특별히� � 하나님의� � 채찍질(욥� � 21:9)이나� � 징벌(시89:32)을� 가리킬� 때� 사

용되는데,� 비유적인� 용법으로� '병'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병'이� 하나님의� 채찍

을� 맞거나� 징벌을� 받아� 생긴다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비유적인� 용법으로� 본� 구절의� 이� 단어

는� 예수께서� 고쳐� 주신� � 여러병들로� 특별히� 매우� 만성적이거나� 치명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눅� 7:21).�

5:29,� � 34에서도�혈루병�걸린� 여인의�특수한�상태를�가리킬�때� 사용되었다.� 한편�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병을�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 귀신의� 권세가� � 활동하고� 있다고� 보

며,� 또� 간혹� 죄와� 병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마� 12:22).� 그러나인과� 응보(因果應報)를� 초월하시는� 예수께서는� 그� 병의� 원인이� 어떠하든간에� 그� � 모든소원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용서를� 베푸셨다.� 실

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자요� 의원으로서� 병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병을� 치료하신다.� � � 핍

근(逼近)히� 함이더라(* � � � ,� 에피피프테인� 아우토)� -� � '핍근히'를� 뜻하는� '에피피

프테인'은� '...에� 떨어지다',� '몸을� 던지다',� '달려들다'� 등의뜻인� 원형� '에피피프토'(*� � � � � � � � � � � � � � � )

의� 부정사� 현재형으로서� � 저돌적(猪突的)으로� 달려드는� 무리들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병자들이� 위험한� � 정도로� 예수에게� 몸을� 던지고,� 달려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 적

의가� � 있었던것은� 아니고,� 단지� 각자가� 자신의� 병� 때문에� 예수의� 치료를� 받고자� 맹렬하게� 애쓸� � 뿐이

었다.

=====3:11� � 더러운�귀신들도...하나님의�아들이니이다�하니� -� 여기서�예수는�또다시 귀신들린자

들과� 마주친다(1:23,� 24,� 34).� 그� 무리들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귀신들은� 예수가� � 누구인지� 알았다.�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 주석� 참조).� 즉� 예수의� 메시야성을� 알고� 소리친� 귀신들의� 외침은� '

자신들을� 해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 호소'(Wessel)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덧붙여� 생

각해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 누구인지� 알아� 본� 귀신들의�이러한� 외침은� '어떤� 사람에�대하여� 그의� 정

확한� 이름이나� � 인격을� 잘� 아는�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볼� 때(Lane),� 자기들

을�능히�제어하실�수�었는� 그분의�능력을�어떻게든�없애보자는�의도에서나온� � 외침이라고볼� 수도� 있

다.� 한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다는� 이�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중요하다.� 첫째,� 당시� 사람

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어도� 영적� 존재인� 귀신들이� 예수를알아� 보았으니�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

들이었다(1:24;마� 8:29;눅� 4:41;행� � 19:15).둘째,� 그러나�귀신들이�예수를�알았다고�해서� 그들이�구원

받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왜냐하면� 그들은� 사단의� 수하(手下)로서� 끊임없이� 성도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다가�장차멸망의�심판을�당할� 것이기�때문이다(마� 25:41;계� 20:10).

=====3:12� � 예수께서...많이� 경계하시니라� -� 본문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많이'(*� � � � � � � � � ,폴라)

란� 부사는� 예수의� 꾸짖음이� 지닌� 엄중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 예수께서는� 귀신들을� 대

하실� 때마다� 예외없이� 타협이나� 부드러운� 청원의� 입장에서가� � 아니라� 꾸짖고� 징책(懲責)하시는� 입장에서� 그들을� 상대하신다.� 한편� 위의� 구절에서� � '하나님의� 아들'(1:1)이라는� 표현은� 비록� 예수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는� 원수인� � 귀신들에의하여� 고백되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께� 주어진� 매우� 정확한� 이름

이다.� 그러나� � 예수께서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야� 할�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귀신들이� � 자

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의� 외침을� 저지하였던것이다(1:43�

주석�참조).

=====3:13� 산에� 오르사(* � � � � � � � ,� 아나바이네이�에이스� � 토오로

스)� -� 원문을� 볼� 때� 예수께서� 산에(갈릴리� 호수� 근방의� 구릉지대로� 추정)� � 오르시는� 장면을� 현재� 직설

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 특유의� 생동감과� 역사성이� 넘치는�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

다.� 한편� � 전승에� � 의하면� � 이곳은� � '하텐산'(Mt.Hatten)이라고도� 하고� 가버나움� 북부� 지역의� 벌판을�

가리킨다고도� 하나� 어느� 산인지는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모세의� 시내� 산� 사건(출� 19:20),� 구약의� 시온

(호렙)� 산에� 대한빈번한�언급(왕상� 19:8),� 산상� 수훈,� 변화산�사건� 등� 중요한�성경적�사건이�산에서�일

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산이� 인간에게� 엄숙하고� � 고요한� � 심성을마련해� 주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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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에� 대한� 외경을� 일깨워� 주는� 영성(靈性)의� � 훌륭한� � 매개체였기때문이다.� 누가는� 이때� 예수께서�산에�오르신�이유를�기도하려� � 오르셨다고 함으로써(눅� 6:12)� 이� 같은� 사상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

다.� � � 자기의�원하는�자들� -� 예수께서는�사람들의�외적�조건이나�그들 각자의 열정적인자원� 의사에�

따라� 당신의�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이�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획에� � 따라� � 그들을� � 선택하

여� � 부르신� � 것이다. 이는� � � 예정� � � 교리(doctrine� � � ofpredestination),� 선택� 교리의�근간이�되

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 원하시는� 그분의� 의지에� 따라� 되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

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 주권적인� 소명에는� 인간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동의가� 요청되기는� 하나� 그

것은 부차적인조건에� 불과하다.� � �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 눅� 6:12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예

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즉� 하나님과의� 대화를� �

통해� 해결하셨다(14:32).� 한편� 예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주저없이� � 즉각적으로순응하였다

(1:18,� 20;2:14).� 이제�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관심과� 소망을� 접어두고� 오직� 예수의� 삶과� 뜻을�

절대�헌신의�길에�들어선�것이다.

=====3:14,15� �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신학적인�의미를� 지니고� � 있다는사

실에�대해서는� 의심할�여지가�없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아니라�궁극적으로�하나님의�백성�

이스라엘을�상징하는� 것이�분명하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에서� 그들� 12명의�제자들은�새� 이스

라엘의� 보좌에� 오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 얻었음이� 분명하다(계� 21:14,� 15).� 사실� 앗시리아(B.C.�

722)와� 바벨론(B.C.� 586)에� 의해�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래� 현재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 � 만 구성되어있다.� 그런�점에서�특히� 이� 12제자� 선택은�이스라엘이�종말의�때� 곧� 메시야�

시대에� 열두� 지파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완성되리라는� 예언서와� 묵시�문학에� 터잡은� 기대와� 관련되었다

고�볼� 수� 있다(사� 11:11,� 16;27:12;35:8-10;49:22;60:4,� � 9;66:20;겔 39:27;미7:12� 등).� 그렇다면�

열� 두� 제자는�전체�이스라엘에�대한�예수의�요구를�상징할�뿐� � 아니라�이스라엘의�종말론적�구원에�대

한� 그의� 약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가는� 열� 둘의종말론적� 기능을� 역사적인� 과제로� 확대시킴으로써� 그

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과제는� 분명히� 예수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이지만,� 열� 둘이� 구분에� 의

해� 파송되고� 또한예수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일과� � 구별

된다(Gnilka).�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 제자들을� � 대개� � '열� � 둘'이라� � 칭한데� � 비해(16

절;4:10;6:7;9:35-헬라어� 원문에는� '열� 둘'로� 묘사되었으나� 개역� 성경은� 이를� '열� � 두제자'로� � 번역하

였다.)� � 마태는� � '열� � 두� � 사도'(마� � 10:2)� � 또는� � '열� � 두� � 제자'(마10:1;11:1;20:17)로� 표현하였다.�

여하튼�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칭호를� 통해� 그들을단순히�예수를�좇는� 무리들과�구분하고� 있다.� 그런

데�본문의� '세우셨으니'(* ,� 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 '창조

하셨으니'로� 번역하기도�한다(Lohmeyer).� 즉� 이� 12제자� 선택은�예수의�구속사적� � 관점에서�새로운� 역

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Taylor,� Grant).� 물론� � 나름대로� 의미있는� 번역이기는� 하

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로� 번역하여� 예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

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 열� 두� 제자

가� � 세워진목적은�세�가지였다.� 특별히�본문에서�목적�의식을�분명히 드러내는� � 헬라어� � 접속사'히

나'(*� � � � � � ,� '...하기� 위해')의� 2회� 반복적� 사용은� 12제자�선택에� 있어서� � 예수께서� 확실한� 목적을�두

시고� 행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

며',� 세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 있게� � 하려하실'� 목적이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했다.� 즉�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며� 그에게� �

배워야� � 했다.마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 끝나지� � 않았다.그들은� 보냄을� 받아

야� 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 � � � � � � ,� 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

해야�했다.� 또한 제자들의� � 사역은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께서�지니신� � 권능으로서(1:26)� 이제� 사단의�왕국을�몰아내고�당신의�나라를�건설하기�위해 부

름받은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이다(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귀신을�쫓는� 일은�서로� 밀접하게�연관되어�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 하시는구원은� 사단과�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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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들을�멸하시고�당신과�구원받은�자들과의�다함없는�교제를�완성하시는�것이다.

=====3:16� �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데는� 본문� � 이외에세�

곳이�더� 있다(마� 10:2-4;눅� 6:14-16;행� 1:13).� 여기에�나타나�있는� 12제자의� � 이름들은�대부분�네� 부

분으로� 나눠진다.� 즉� 첫번째� 부분은� 베드로가� 예외� 없이� 맨�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에서는�

빌립이,� 세번째� 부분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 야고보가� 다른� 제자들� 앞에� 등장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유

다의�이름이�등장한다(사도행전에는그가�이미�자살한�것으로�묘사되어�그� 이름이�생략됨).� 한편� 마가는�

각자의� 이름� 앞에접속사� '카이'(*� � � � � ,� '그리고')를� 삽입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이러한� 네� 부분의� � 구별

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상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마� 10:2-4� 주석� 및� 강해� 그리고� 본장�

13-19절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 � 시몬에게는� 베드로� -� 이� 부분에서는� 베드로(반석)란� 별명을� 얻은�

시몬이� 맨� 처음에언급된다(마� 16:18).� 여기서� '베드로'(*� � � � � � � � � � � )란� 이름은� 헬라명이며,� 요� 1:42

에나오듯이� '게바'(*� � � � � � � � � )는� 아람명으로서� 그� 의미는� '반석'이다.� 이는� 그의� � 성품의� 강직성(强直性)에서라기보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그가� 수행해� 가야� 할� 사명과� � 연관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의� 복음서에는� 어떤� 점에서� 시몬이� 반석의� 역할을� 한� 것으로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도� 베

드로가� 비록� 굳건하지� � 못하고� � 연약한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미래에� 사역하게� 될�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일할� 수� � 있는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실로� 그

는� 예수생전에는� 과격하고� 또� 비겁한� 좌충� 우돌형의� 미성숙한� 인격자에� 불과했으나� 예수의� 부활과� 오

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초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의� 탁월한� � 사명을� � 완수한반석같은� 일꾼이었다(행�

2:14).�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그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그의� 역할은� 첫� 제자로�

부름을�받은� 데서�시작하여무덤에서� � 천사의위탁(委託)을� 받는데까지� 이른다(16:7).� 한편� 위에서� 보듯이� 그가� 문자적으로� � 반석이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하고(고전� 15:5)� 그분에게서�

사명을� � 새롭게� 부여� 받은� 후(요� 21장)�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서부터일� 것이다(행� 2장).� � 어쨌

든�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리고� 위에� 서술한� 그들의� 과제(14,� � 15절)에� � 있어서모범적인� 위치를�

점하게�된다.

=====3:17�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 요한보다� � 야고보가� 항

상�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인� 것� 같다.� 그렇지만� �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당했기� 때문에(행� 12:2)� 그의� 형제� 요한보다�큰� � 업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어부�세베대의�아들이었는데,� 세베대는� � 사업이번창하여�삯꾼들을�고용할�정도였으며(1:20),� 그의� 부인�

또한� 예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마� 27:55,� 56;눅� 8:3).� 열� 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

곁에서� � 있을수� 있었던� 것이나,� 세배대의� 가족이�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 것(요

18:15,� 16)은� 아마도� 세배대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야고보와� 요한의� � 어머니는� 살로메로�

추정되는데(15:40;16:1),� 예수를� 섬기는� 그녀의�동기가� 순수한� � 것만은아니었다(마� 20:20,� 21).� 한편,�

이들이� 얻은� 이름은� '보아너게'라는� 이름으로� � 헬라어로는� '보아네르게스'(*� � � � � � � � � � � � � � � � � )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이들� 형제의� 별명이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분명치� 않으나�히브리어� � '브네� � 레게쉬'(*� � � � � � � � � � � � � ,� '우뢰처럼� 쉴새없이� 시끄럽게� 하는� 아들들')에서� 온� 것� 같

다.� 이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의� 성급하고도� � 직선적인� � 성격때문에

(9:38;10:35-37;눅� 9:54)� 얻게� 된� 듯하다.

=====3:18� � 안드레� -� '남자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서(요� 1:40,� 41)갈릴

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다(1:16-18;마� 4:18-18;요� 1:44).�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

가(요� 1:35,� 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 된다(마4:19,� 20).�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은� 안드레의� 행동은� 세례� 요한에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세례� 요한의� 진리는� 곧� 예

수� 그리스도를�앞서�증거하는�진리였기에� 스승을�버리는�것이� 아니라�더� 큰� 진리에로의�발전이며�본래�

추구하던� 진리를� 좇은� 것이었다.�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를� 인도하고도� 이름의� 기록은� 베드로가� 항상�

앞서는데(요� 1:44),� 그는� 이에� 대해� 하등의� 시기심이나�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안드레는� � 함께� 동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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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량을� 가진� 형제애의� 진수를� 보여� 주며� 지극히� � 개인적이고� � 체험적으로복음을� 전했다.� � � 빌립� -� '말

(馬)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빌립은� 갈릴리� 벳새다� � 출신(요� 1:44-51;12:21)으로� 안드레와� 나다나엘의� 친구였다.� 그는� 예수께� 발견되어� 제자에의� 부르심을� 받은� 즉시로� 그를� 따르게� 된다

(요� 1:43,� 44).� 그는� 예수를�만난� 후� � 나다나엘을�찾아가서�그를�주께로�인도한다(요� 1:45,� 46).� 그리

고�그는 12사도로� � 부름을받은� 후에� 오병이어(요� 6:8-13)의� 기적에� 앞서서� 주께� 시험을� 받는다(요�

6:1-7).� 그후예루살렘� � 입성 때� �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 매개 역할을 하기도 �

한다(요12:20-22).� 또한�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아버지(하나님)를� 보여� 달라고� 주께� 요청하기도�

했다(요� 14:7-12).� 전승에� 의하면� 히에라� 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 � 바돌로매� -� '톨마이의� 아들

'(Son� of� Tolmai)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아마� 개인적인� 다른�

이름이� 따로�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 그런데� 요� 1:46에� 등장한� 나다나엘(Nathanael)과�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는데,� 그럴만한� 적절한� 이유는� (1)� 나다나엘은� 12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며(요�

21:2),� � (2)빌립이� 그를� 찾아서� 예수께� 인도했기� 때문이다(요� 1:43-46).� (3)� 공관� 복음에서� � 빌립과�

바돌로매는�사도들의�명단에�항상�함께� 열거되는�것을�볼� 수� 있다.� 그의 출생지가역시� 갈릴리의� 가나

(Cana)라는�것은� 같은� 결론을�뒷받침한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베드로를� 지칭하는� � 시몬(Simon)이란� 이름과� 바요나(Bar-Jona)란� 의미의� 경우

와�마찬가지로,� 바돌로매와�깊은 연관성을갖는다고� 할� 수� 있다(The� Pulpit� Commentary).� 어쨌든�

교회의� 한� 전승에� 따르면� � 그는애굽,� 인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끝내� 순교했다

고� 전한다.� � � 마태� -� 그는� 분명� 레위와� 이명� 동인(異名同人)이로서(2:14)� 마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편� 마� 10:3에서� 마태는� 사도들의� 명단에� 있는� 자신의� � 이름앞에� '세리'라는� 형용

어구를� 덧붙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옛날에� 온� 백성으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결코� 숨김없이�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 이것이� 용사받은� 죄인의� 떳떳함이요,� 일꾼된� 자의� 진실과�

겸손이다.� 한편� � 마태라는� � 말은'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의미의� '맛다디아'(Mattathias)의� 준말로서,� 헬

라어로는� '데오도르'(Theodore)가� 된다(Gesenius).� � � 도마� -� 도마는� '디두모'(요� 21:2)라고도� 불리우

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 � '쌍둥이'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이름� 때문에� 알려지기도� 했지만� 또한� 그의�

용기(요 11:16)나그의�의미� 깊은� 고백(요� 20:28)으로써�더� 알려졌다.� 실로� 그는� 의심하는�자의� � 대명

사인� 동시에(요� 20:25)� 예수를� 가장�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알기를� 소원했던� 이성적인� � 신앙인의� 대명

사이기도�하다.� 어떤� 전승에�의하면�그는� 인도에�선교사로�가서일하다가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 '작은� � 야고보'로도� 불리어졌다

(15:40;마� 27:56).� 이는� 아마도� 세배대의� 아들� 곧� � 요한의� � 형제인야고보� 보다� 그가� 늦게� 부름받았거

나� 나이가� 연소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 것이다.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글로바(Cleophas)

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되며(15:40;요� 19:25),� 그의� 부인�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

한의� 어머니� 마리아와친� 자매간으로� 여겨진다(Jerome).� � � 다대오� -� 어떤� 사본에는(Diatessaron�

Version)� '렙바이오스'(*� � � � � � � � � � � � � � � � )와'다대오'가� 함께� 불려지고� 있다(Origen).� 이� 다대오는� 아

마도�누가복음의� 명단에� 나와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그의� 본명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눅� � 6:16;행1:13).� 한편� '렙바이오스'와� '다대오'는� 어휘상�유사성을�갖고�있다.� 즉� '렙바이오스'는� '심

장� 깊은� 곳',� '다대오'는� '가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러한� 이름은� 아마� � 그를배신자�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 � 가나안인� 시몬� -� 시몬은� '열심당'(the� Zealot)이

라� 불리어졌다.� 이러한� 별칭은� � 단지� 그의� 종교적인� 열성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그가� 예수의제자로�부름받기�전에�광적인�국수주의자�그룹인�셀롯당(열심당)의 일 원 임 을� �

밝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좋다.� 열심당은�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에� � 폭력으로� 대항

하여�싸웠던�유대인들의�애굽�집단이었다.

=====3:19� � 가룟� 유다� -� 유다의� 성은� '가룟'(Iscariot)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마� � '가룟

(Karioth)이라� 불리우는� 지방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 것이다.� � 가룟(Karioth)지방은� 헤브론에

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케리옷� 헤즈론'(Kerioth� Hezron)� 지방(수� 15:25)이거나� 모압� 땅�

케리옷(Kerioth)� 지방과�동일시�될� 수 있다(렘� � 48:24).따라서� 그는� 12제자� 중� 유일하게�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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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의� 제자였다고� 보겠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로서� 성경에� 나타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분명하

게� 알� 수� 없다.� � 성경에는� � 단지제자들의� 돈궤를� 맡아� 회계(會計)를� 보고� 베다니에서의� 향유� 사건을�시작으로� 하여�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하는� 것으로만� 유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 � 주께

서당신의� 제자들로� 선택하신� 12명의� 사람들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 공헌을� � 했던복음의� 밑거

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4명은� 어부였고,� 또� 한� 명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던� 세리요,� 또� 한� 사람은� 과

격한�독립� 운동을�벌이던� 열심당원이었다.� 나머지� 6명� � 제자들에�대해서는�사실상�아무것도�알려진�바

가� 없다.� 그� 열� 두� 제자들은�모두� � 평범한인물들이었다.� 즉� 그들� 가운데는�설교가도,� 성경에�대한� 전문

가도� 없었다.� 그러나� �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였던� 사람들이� 바

로� 이�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2� 사도의� 명단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위대성이나� � 탁월한봉사에�

주목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그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고� 세계� 복음화를� 주도해� 가시는� 예수의� 초

월적인�권능을�바라보아야�할� 것이다.

=====3:20� � � 집에� 들어가시니...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 예수는� 다시� 무리들에게� 둘러싸였다.예수

께서� 들어가셨던� 집은� 1:29과� 2:1에서� 언급된�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의집으로� 추정되며� 그�

집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 본부� 역할을� 하였다.� 그� 집에는� � 예수의관심을� 얻고� 또� 예수의� 이적을� 체험

코자하는� 무리들이� 수없이� 몰리는� � 바람에� � 예수와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2:2;5:24;눅�

5:1;8:19,� 45).� 이는� 다음� 절에� � 이어지는�예수의� 친속의�힐난(詰難)에� 대한� 배경� 역할을�한다는�점에서�적어도�무리들의예수께�대한�열심있는�신앙을�은연중에�강조한�것이라�본다.

=====3:21� � 예수의�친속(親屬)들이� 듣고...미쳤다함일러라� -� 여기서� '친속들'(* � � ,� 호이� 파르� 아우

투)이란� 문자적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 '그� � 곁에서� � 난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어떻게� 보면� '그의� 친

구들'� 또는� '그의� 제자들'로도� 이해할� 수있다.� 그러나� 31-35절과� 연결시켜� 볼� 때� 이는� 분명� 예수의� '

가족들'이다.� � 즉� � 예수의쉴새없는� 활동을� 심히� 염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나사렛의� � 어머니와� � 형

제들이었다(Donald� W.� Burdick).�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의� 많은� 능력을� 인하여� 크게� 소문이� 나� 식사

할� 겨를도�없다는� 소식을�들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예수께� 와서� 그를� � 붙들려했다.� 이것은� 아마

도�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다시� 나사렛에� 억지로� 데려가고자� � 했다는사실을�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즉�

그들은�예수를�육적� 양식과�영적� 양식을�얻기� 위하여�몰려드는�사람들로부터�빼앗아�갈� 의도였던�듯하

다.� � 특히� � '붙들러'(take� � chargeof,� NIV)의� 헬라어� '크라테사이'(*� � � � � � � � � � � � � � � )라는� 동사는� 어

떤� 사람을� 체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본문의� 긴장스런� 장면을� 더욱� 고조시켜� 준다

(6:17;12:12;14:1).� 한편�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께�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예수가� 과로로� 인하여� �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것,� 즉� 그가� 미쳤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 여기서� � '미쳤다함일러라'(*� �

� � � � � � � � � ...*� � � � � � � � � � � � ,� 엘레곤...엑세스테)란� 문자적으로� � '정신이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

다'는� 뜻으로� 결국� 비정상적� 정신� 상태,� 불안한� 정신� 상태를� 지적한� 말이다.� 한편� 본문은� 주격이� 없는�

제� 2단순� 과거� 3인칭�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미친� 상태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라볼수�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당신의� 적극적인� 헌신� 때문에� 오

히려� � 가족� 내의� 긴장에� 직면했다.� 심지어� 그분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조차� 자신의� � 아들은특별한�

소명을� 위해� 운명지워졌다고� 익히� 들어온� 바였음에도� � 불구하고(눅� � 1:26-38),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정신적� � 상태를의심했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

심지어� � 예수의� � 형제들은� � 그를� � 비웃었다(요7:2-5).� 이것은� 분명� 예수의� 실체를� 철저히� 오해한� 가족

들의� 관심의� 수준을� 대변해� 줄뿐� 아니라(C.� L.� Mitton),� 근본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 대한� 그들의�

불신앙을� � 반증해� 준다(요� 7:5).� 이처럼� 불신앙은� 진리를� 왜곡,� 오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진리를� � 훼

방하고�말살하려�들기까지�한다.

=====3:22� �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 공회에서�

예수의� 언행을� 세밀히� 살펴� 그� 범법(犯法)� 여부를� 알아� 보도록� 보내진� 일종의� 종교감시단이었을� 것이다(7:1;마� 15:1).� 한편� 여기서� '내려온'이라고� 기록한� 것은� �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내에서� 종교적,�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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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 예루살렘은� 예수를� 핍박하고� 처형한� 참으로� 적대적인�

도시였다.� 그러한� 예루살렘에서� 급파된� 서기관들(7:1� 주석� 참조)은� 그야말로� 극악한� 무리로� 받아들여

질� 수밖에� 없는� �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은,� 예수의� 소문이� 유대� � 온� � 전

역에파다하게� 퍼져� 급기야는�중앙에�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 �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 적대자들의�

비난은�친속들의�언급에서�어느�정도�암시되었지만�그것과는�엄연히�구별된다. 실로� � 적대자들은공

개적인� 공격을� 가하며� 예수를� 모독했다.� 그들의� 첫번째� 비난은� � 예수가� � 바알세불을'지폈다'(is�

possessed� by,� NiV)는� 것이다(요� 10:20).� '바알세불'은� 헬라어로는� '베엘제불'(*� � � � � � � � � � � � � � � � � � �

)로� 표기되며,� NIV와� KJV는� '베엘제붑'(Beelzebub)이라� 표기한다.� '베엘제붑'은� 라틴어� 성경(Latin�

Vulgate)의� 표기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 것이다.� 헬라어� '베엘제불'은� '바알� 왕자'� 또는� '고귀한� 존재�

바알'이라는� 의미를� � 나타내는� 가나안� 신의� 이름인� 셈족어� '바알제불'(Baal-Zebul)의� 음역이다.� 한편�

이� 말은� '집주인',� '파리들의� 주(主)'라는� 뜻으로서� 모두� 제의적(祭儀的)인� � 의미를� � 지닌다.� � 즉'집� 주인'이란� 제전(祭典)의� 주인을,� '파리들의� 주'란� 귀신의� 격하된� 신분을� 지칭하는용어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시기� 적절하게� 사단에� 대한� 동의어로서� 그� 이름을� � 사용했다.� 즉� 유대인들은� 이� '바알세불'을�

귀신들의� 왕� 곧� 사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거의고정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곧� 예수

가� 사단이라는� 엄청난� 모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비난은� '귀신의� 왕을� 힘입는다'는� 것이었다.� '

귀신의� � 왕'(the� prince� of� demons,� NIV)은� 어둠의�세력� 가운데�최강자,� 또는� 마귀들의 통치자란의

미로서� 결국� 사단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과� � 귀신'� � 참조).� 한편� 바알세

불이� 귀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는� 사실은� 정통� 유대교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까닭

은�선.악을� 무론하고�하나님이�모든�세계를 통치하고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욥�

1:6-12).� 그런데�간혹 구약의 위경이나쿰란� 공동체의� 기록들에� 따르면� 선.악의� 세계가� 확실히�

구분된다는 사실이 발견되곤한다.� 더욱이�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

문화와� 교류했기� � 때문에� 이� 같은� 이원론적� 사고를� 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Grant,� � Taylor).� �

특히당시� 유대에는� 이방에서� 주입된� 유사치료적� 마술(homoopathisch)이� 있었는데,� 이� 마술에서는� 귀

신� 축출자가� 자기에게� 예속된� 귀신들의� 힘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바로� � 이런점에서� 예수는� 새로운� 교

훈과�지금까지�듣고�보지� 못했던�이적을�행하심으로�마치� � 유사치료적�마술의�전문가인�것처럼�주술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Gnilka).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는� 백성을� 미혹하는� 자로� �

오해받을� � 수밖에� � 없었다(요7:20,� 21;8:48;10:20).� 어쨌든� 예루살렘에� 급파된� 종교� 지도자들은� 성령

의�능력과� � 하나님의�인도로써�역사하시는�예수를�오히려�성령의�능력과�완전히�반대되는 바알세불과�

사귀(邪鬼)와� 결탁한� 자로� 매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 통해� � 그들은(1)� 예수의� 메시야직을�모르고�죄를�짓기도�하였지만� (2)� 예수의� � 가르침의 순수성과순결성을� 알고도� 자기들의� 사

악한� 정치,� 경제적� 이권이� 침해당할까하여� 예수를� 고의적으로� 배척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

사역의� 동기와� 목적,� � 능력의� � 근원까지를고의적으로� 모독함으로써� 구원의� 유일한� 성령의� 사역을� 부인

한� � 셈이므로� � 결과적으로구원의�길을�영원히�스스로�막은� 셈이� 된� 것이었다(마� 9:1-34;15:14).

=====3:23� � 예수께서...불러다가�비유로�말씀하시되� -� 예수께서는�당신을� � 비난하는 자들에게감

정을� 폭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불러모으시고� 대면하신� 채로� 비유를� 들어� 그들의� 그릇된� 생각

을� 하나하나� 깨우치셨다.� 한편� 여기서� '비유'(Parable)란� 예수의� � 교수법� 가운데� 두드러진� 한� 특징으로

서�심오한�진리�옆에� 평범하고�친숙한�상황을� � 나란히�놓음으로써�듣는�이로� 하여금�이해에�도움을�주

게� 하는� 것이다.� 실로� 비유는� � 하늘의� 의미를� 지닌� 땅의� 이야기로서� 비록� 이야기의� 내용이� 땅에� 뿌리

를�박았으나� � 하늘을향해�열려진�창을� 가진� 집의�역할을�하는� 것이다(마� 13장�주제� 강해� '예수의�비유

'� 참조).� � �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 어둠의� 세력� 가운데� 가장� � 탁월한� � 존재인사단은�

그의� 휘하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활약하는� 마귀들을� � 쫓아내지� � 않는다.� 사단이� 사단을� 쫓아

내는� 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망하게� 하는� 일이된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사단이나� 바알세불과는� 적대� 관계에� 있으며(창� 3:15),�

또한� 그들보다� 더� 강력(强力)하시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는� 귀신들을� 만나실� 때마다� 두려워하거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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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함� 없이� � 책망하셨다.�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권능은� 특별히� 그의� 치유� 역사�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드

러났다.� 각� 복음서들에서� 보듯이� 그러한� 치료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 건설하고� 계시는�

것으로� 항상� 묘사되었다.� 그러기에� 진정� 사단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러� 가

지� 파괴와� 고통과�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우리의� 삶과� 세상의� 악의� 근원이� 되기도� 한

다.� 하지만� 그의� 패배는� 너무도� �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세력을�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 공생애�기간� 중� 이미� 책망하시고�몰아내셨을�뿐� 아니라�십자가상에서�그� 목덜미를� �

짓이겨놓으셨기�때문이다.

=====3:24� 만일� 나라가...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예수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확

실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실례를� 사용하신다.� 분쟁하는� 나라는� 멸망할� 수� � 밖에없다는� 사실은� 극히�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 상식에도� 못� � 미치는� 발상으로� 예수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본문의� '나라'(*� � � � � � � � � � � � � � � � ,바실레이아)는�흔히� '왕국'으로�번역하는데,� 실로�이�왕

국이� 건실히� 유지되기� � 위해서는� 그� 왕과� 신하된� 백성이� 혼연� 일체(渾然一體)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자명한� 일이다.어느� 한� 쪽이� 불신하고� 파괴적� 성향을� 띠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 실례에서

예수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들에게� � 적용되는� 진리요,� 예

외없이� � 사단의� � 나라에도� � 적용되는� � 진리인� � 것이다(눅� � 11:17;고전1:10;3:3;11:18).

=====3:25� �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설� 수� 없고� -� 예수의� 보편� 타당한� 논리는� 좀더� 구체적이고도� 실

감있게� 적용된다.� 그것은�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집안의� 분란(紛亂)에� 대한비유이다.� 여기서� '집'(*� � � � � � � � � ,� 오이키아)이란� 어떤� 건축� 구조물을� � 뜻하지� � 않고혈연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집합체로서

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나라'라는� 집합체보다� 더� 결속력과� 동질성� 면에서� 뛰어나다�

할� 것이다.� 실로� 이� 두번째� � 비유는� 결국� 사단의� 왕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에� 적용

되는�것이다.� 즉어떤�단체로�그� 자체� 내에서�분쟁이�있으면�스스로�망하고�만다(Lenski).

=====3:26�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망하느니라� -� 24,� 25절의� 결론구에� 해당한다.� 요약하면� 사단의�

왕국도� 역시� 분쟁하면�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사단의� 왕국은� 스스로의� 내분으

로�인해�멸망할�조짐은�없었고�성경에�기록된�바대로�최후의� � 심판� 때까지�그� 왕국이�지속될�것이었다

(요� 12:30,� 31;살후� 2:8).� 바로� 그런� 이유로� � 예수의�귀신� 축출은�사단의� 내분으로�단정할� 수� 없으며,�

오직�사단의�적대자요�심판주로서의�권세있는�사역에�해당하는�것이다(요� 14:30;요일� 3:8;계� 20:10).

=====3:27� 강한� 자를� 결박지�않고는...늑탈(勒奪)치� 못하리니� -� 더� 자세한 내용으로� � 엮어져있

는�눅� 11:21,� 22과�평행을�이루는�본문은�사� 49:24,� 25의� 사상을�반영하고�있다.� 여기서� '강한�자'란�

막강한� 힘을� 소유한� 약탈자나� 도적의� 이미지(image)를� 제공하는� � 자로서� 본문에서는� 사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마� 12:29).� 그렇다면� '강한� 자의� 세간'은� 사단이� 소유하고� 관할하는� 그� 휘하의� 마귀들내

지는� 사단에게�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존재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그리고� '강한� 자의�

결박'이란� 사단과� 그휘하의� 마귀들을� 축출하는� 일과� 사단의� 왕국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

이같은� 강한� 자� 결박� 장면은� 유대� 문헌들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계� 20:2;외경� � 에녹서10:4,� 5;레위

의� 유훈� 18:12)� 악의� 최후� 멸망을� 기대하게� 한다.� � 한편� � 본문에� � 암시된'그� 강한� 자를� 결박할� 자'는�

사단의� 왕국을� 괴멸(壞滅)하시고� 당신의� � 나라를� � 건설키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다.� 실로� 예수는� 사단을� 결박시키고� 그� � 사단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

며,� 병고침과� 귀신� 축출� 등을통해� 이미� 점진적으로� 사단의� 세간을� 늑탈해� 가고� 계신� 것이다.� 물론� 비

록� 사단이� � 결박�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긴� 사슬에� 묶은채� 최후의� � 발악을� � 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강조하신� 바는� (1)� 당신은� 사단과� 결코� 동맹� 관계가아니라는� 사실과�

(2)� 당신은� 현실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파괴해� 가고� 계시며,� 그렇기에당신은� 사단보다� 더� 강한� 분이시

라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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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 내가�진실로�너희에게�이르노니(* � � � � � � � ,� 아멘� 레고� 휘민)-� '

아멘'(진실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진실하신� 품성과� 약속을� 보증으로� 말씀하

시는� 공식적이고도�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하실� � 때마다� � 특징적으로사용하신� 권위문(權威文)이다(마태복음� 31회,� 누가복음� 6회,� 요한복음� 25회,� 본서에는13회� 기록됨-8:12;9:1,� 41;10:15,�

29;11:23;12:43;13:30;14:9,� 18,� 25,� 30).� � � 사람의� 모든� 죄...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여기서� '사람

'에� 해당하는� 원문은� '사람들의� 아들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토이스�

휘오이스� � 톤안드르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인자'(人子)에� 대한� � 내용을� � 수록하고� � 있는� � 마12:32와� 그� 언어적�유사성을�보여�주고�있다.� 한편�여기서� '모든� 죄'(*� � � � � � � � � ...

,� 판타...타� 아마르테마타)는� 문자적으로� '모든� � 죄악된� � 행위'를� 뜻하며,� '훼방'(*� � � � � � � � � � � �

� � � � � � � � ,� 블라스페미아미)은� '모든� 죄'의� 한� �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상대방의�

일에� 적극적인� 장애� 역할을� 하는행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개

개의� 죄악� � 행위조차� 궁극적으로는� 용서를�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이� 미래� 시상임에� 유의)� � 받을� �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이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으로서� 예수는� 모든� �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과�또� 모든� 죄를�사하시는�능력을�지니신�인류의�유일한 구속자이시다.

=====3:29� �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영원한� 죄에� -�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성경의�전체적인�맥락을�통해� 인간의�모든� 죄는� 예수의�십자가�아래서용서받을�수� 있다고� 선

언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그럼에도� 본문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통해이� 난해를� 극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모든� 죄는�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인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결

국� 삼위� 일체되신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2)� 성부는� 구원을� 계

획하시고� 성자는� 구속� 사업을� 실현하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 적용하신다.� � 따라서인간은� 성령의�

감동� 감화를� 통해� 구원받는데,� 이를� 부인하면�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이� 영원히� 막히게� 된다.� 즉� '인

자'는� 모르고� 부인할� 수� 있을지라도� 성령의� 사역을� � 부인하는� 것은� 고의적(故意的)인� 일이고� � 또� � 회개를� � 거부하는� � 일이� � 되는� � 것이다(사63:10;행� 5:3;엡� 4:30;살전� 5:19).�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2:31,� 32� 주석� 및�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해진다는� 이� 말씀은� �

교회� � 역사상크나큰� 불안과� 고통을� 야기시켜� 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

였는지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해왔다.� 실로� 예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고자� 한� 것은� 그죄의� 일시적� 경향

이�아니라�반복� 지속적이고�고의적인�죄악의�행위로� � 인해 발생하는고질적이고� 뿌리깊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 없다면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된� 성품을� 가지고� 계

시기�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마음의완악함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은혜를 비난하기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라일(Ryle)의� 다음과�

같은� � 말은�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가� 분명� 있다.� 그러나� � 그러한� � 죄로인해� 마

음의� 가책을� 받는� 자들은� 결코� 그� 같은� � 죄를� � 범하지� � 않는다'(J.� � C.� � Ryle,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2:59).� 반면에� 실제로� 그� 같은� 죄를� 범하는� � 자들은� 완악한� 심령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그� 같은� 범죄자요�또� 미래에까지 용서받지못할�죄인이라는�사실조차�알지�못한다.

=====3:30� �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본절에� 언급된� 서기관들의� 말� 자체가� 위에� � 언급한�

영영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직접적인� 원인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 성경은어떤� 범죄라� 할지라

도� 회개가� 있고� 돌이킴이� 있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의� 용서가� � 따를것임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만� 본절에서�문제가�되는�것은� 선행에�대한� 예수의교훈과�또� 사단의�왕국이�분열할�때� 그� 왕국이�패망

하리라는� 사려깊은� 예수의� � 설명을듣고서도� 오히려�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성령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

이적을� � 모독(冒瀆)한� 것이� 곧�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 편견이없는�보통�사람이라면�그� 누구나� '선한� 일'이라고�인정할�수� 있는� � 일들을� � 행하셨다.그는�불행한�사람

들을� 악의� 세력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셨다(마� 12:22;눅� � 11:14).예수께서는� 그� 일을� 성령의� 능력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통하여� 행하셨으나서기관들은� 그것을� 사단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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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했던�것이다.� 어쨌든�영원히� � 용서받지�못할� 죄는� 그� 사람의� 행동의�근거가� 되는� 심령의� 자세에�의

해� 판가름� 나는� 것이다.즉� 예수의� 진리에로의� 인도와� 성령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커녕� 깊은� 적

의와� � 거듭되는�의지적�반항을�함으로써�성령을� � 훼방하는 치명적인� � 범죄자가� � 되는� � 것이다

(Donald� W.� Burdick).� 이에� 대해� 미톤(C.L.� Mitton)은� 말하기를� '당신이�선이라고� � 분명히�알고� 있는�

데도�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편견과� 악에� 사로잡혀� � 있다는� 것을� 자인한� 까닭에,� 모든�

죄� 중에서�가장� 악한�죄를� 범하는� � 것이다. 사람들은마음의� 완악함(3:5)� 때문에� 이와� 같은� 죄악을� 범

한다'고� 했다.

=====3:31� 예수의�모친과�동생들이...예수를�부르니� -� 마가는�다시� 21절과 연결하여� � 예수의가

족에� 대하여�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가는�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 논쟁에� 관한� 기사를� 삽

입시킴으로써� 위기감(危機感)을� 고조시키고� 더불어� 예수의� 가족들이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 오는데�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암시하고� � 있다.가족들이� 예수께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그들

은� 그가� 계신� 곳으로� � 들어가지� � 못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다.� 특히�

형제들과�그� � 모친이언급되어�있으나(본복음서에서는�예수의�어머니에�대한�언급이�이� 구절� � 한 군

데밖에없다)� 요셉은�언급되어�있지�않은� 점이� 이채롭다.� 아마� 그는� 이미� 세상을�떠났었던�것같다.� 한편�

'동생들'에� 관해서는� 6:3� 주석을�참조하라.

=====3:32� � 무리가...어짜오되...밖에서� 찾나이다� -� 예수께서� 들어가� 계신� 집은� � 입추(立錐)의여지없이�사람들로�가득�메워져�있었다.� 무리들은�제자들과�더불어 예수를 중심으로빽빽이� 둘러� 앉아� 있

었다.� 한편� � 본문과� � 평행을� � 이루는� � 마태의� � 기록에� � 따르면(마12:47)� 본문의� '무리'� 대신� 어떤� 한�

사람이� 예수께� 이야기했다고� 기술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마�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을� 지켜

보던�한� 사람이�바깥� 사정을�전해듣고(31절)� 무리를�헤집고�들어와서�예수께�이르러�이야기를�전한�것

을� � 의미할� � 것이다.� 이러한� 두� 복음서� 간의� 차이� 이외에도� 마가는�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 밖에

서찾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는�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마� 12:47)라고� � 전하고,� 누가는� '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눅� 8:20)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각� 기자의� 관

심사가� 달랐을�뿐� 아니라�각� 기자들이�지닌�독특한� � 기록� 방법� 때문일�것이다.� 그러나�분명한� 것은� 각�

기자들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 함께보완적으로� 조화롭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본� 구절에

서는� 가족들이� 현장에나타나� 예수를� 계속� 찾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명확히� 알고� 계신가

의� � 여부가� 표면상� 드러나� 있지� 않다.� 측측하건대� 예수께서는� 그의� 동생들의� 불신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은� 다음� 절에서� 보듯이� 예수의� 영적� 가족에� 관한� 가르침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

기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순종하기� 위해� 때로는� � 가족과의� 관계도�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

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실로� 이것은� � 예수께서�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친

히� 집이나� 가족까지� 버리는� 복음에� 대한� 절대� 순종을� 주저없이� 말씀하시게� 된다(10:28-30).� 어쨌든�

본문에서� 예수가가족들의� 면회� 요청에� 즉각� 응하지� 못하셨던�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Lane).� 한편

본절에� 언급된� '누이들'이란� 용어는� 여러�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 바티칸,� � 에브라임등)에는� 빠져� 있

다.� 아마도� 31절과,� 본문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마태복음,� 누가복음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생략된�

듯하다.� 그러나�이� 용어가�생략된다�해도�큰� 무리는�없을� 것이다.

=====3:33� �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근본� � 의도는인간�

관계를� 전면� 부정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바로� 이� 기회를� 통해� 영적� 관계의� � 중요성을� 가르치시고자� 하

셨을� 뿐이다.� 실로� 예수께서� 평가하셨듯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성(복음을� 전하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일등)이� 지상에� 계시는�어머니와의� 관계성(인간적� 교제)보다�더욱� 중요한� 것이었다(마�

6:33).� 따라서� � 예수는� � 비록사랑하는�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들이� 당신을� 혈연으로서의� 끈으로� 연결코

자� 노력하였으나,� 당신은� 하늘의� 영적� 관계성으로� 대답하셨던� 것이다.� 이는� 반인륜적(反人倫的)� � 처사이기�보다� 초인륜적(超人倫的)�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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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둘러보시며...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 여기서도� 세밀하고도� � 생동적인� � 문장기법을�

사용하는� 마가의� 특징이� 돋보인다.� 예수께서는�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 이들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내밀한� 감격의� 음성으로� '내모친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추측컨대� 이들은� 예수의� 12제자일� 것이다

(마� 12:49).� 특히� 이들을� 지칭한� � 것은� � 넓은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와� 함께�

있는(14절)� 자의� 각별한� � 위치를� 뜻할� 것이다.� 진정� 그들은� 세상에�존재하는�어떤�기준과� 제약에도� 구

애됨�없이� � 먼저� 하나님의� 뜻을�따르는� 자로� 인정된�것이다.� 즉� 그들은�하나님이�보내신� 아들을� � 믿고�

따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 예수와의� � 그깊은� 영적� 가족� 관

계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 보내� � 주신당신의� 행위에� 대한� 저들의� 공개적�

결단을� 기뻐하시고� 육친적� 관계(肉親的關係)� � 이상으로� 저들을� 예수와� 결속시켜� 주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들에서� 혈연적� 가족들을� 제외시켰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들

도� '하나님의� � 뜻을따를�때'� 예수와�성(聖)� 가족이�되는� 것이다.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 예수의� 참된� 가족은� 비단열� 두�

제자만� 아니라� '누구든지'(whoever,� NIV)될� 수� 있었다.� 이는� � 구원의� � 개방성과영적� 가족의� 보편성을�

일깨워�준다.� 그러나�이러한�개방은�한�가지 필연적인� � 조건을충족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하

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즉� � 예수와� � 친속관계를� 맺게� 해주는� 핵심� 요소는� 바로� � 하나님의� � 뜻을� �

행하는� � 것이다(마12:50;눅8:21).� 한편�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하신�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

되어야�할� 한가지�사실은� '하나님의�뜻대로�하는�자'란� 과연�어떤� 사람인가� ?� 라는� 점이다.� 그것은다름

아니라�하나님이�보내신�아들을�믿고,� 그분의�말씀을�전폭적으로� � 듣고 받아들이며,� 또한� 그분의� 명령

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요� 1:21).� 이것을� 다른� 말로� � 표현하면� 예수의�인격으로�도래한� 하나님� 나

라의� 요구에� 대한� 전폭적(全幅的)� � 순종이라� � 할수� 있다.� 실로� 예수와� 더불어�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인간에게� 돌연� 나타나고� 그� �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순종에� 대한� 요구에� 그� 긴박성이� 더해진� �

것이다(Lane).� � 이땅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면서부터� 존재하게� 된� 새가족에게는� � 마

땅히�예수께서�아버지께�순종함으로�보이신�하나님을�향한�절대� 순종과� � 그리고� � 예수의제자들이�주의�

부르심에서�보여준�그러한�철저한�순종이�요청되고�있다.� � � � 마가복음�제� 4장

=====4:1� 다시(* � � � � � � ,� 파린)� -� 이는� 마가의�현장감�넘치는�문장 비법이 돋보이는표

현이다.� 헬라어� '파린'은� '간다',� '보낸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하여� 다시� 그� 행위를� 반복한다는� 뜻이

다.� 또� 과거의�어떤�사건이�다시�반복하여�일어날� � 때를 가리키는말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

서는� 다음에� 이어� 나오는� '바닷가'라는� � 말과� � 연결하여생각할� 때� 바닷가에서� 설교하는� 것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2:13에� 보면� � '바닷가'에서� 무리에게� 설교하신� 적이� 있고,� 3:7에는� 바다로� 물

러갔다가� 다시� 산으로� � 올라갔다는�것으로� 묘사되고�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2:13의� 가르침에�이어� '다

시'� � 바닷가에서� 가르치신다는�뜻이다.� 3:7의� 경우는� 가르친다는�말이� 없고� 단순히� '바다'로� 물러간� 것

이기�때문에�이� 사건과는�관계가�없는� 것으로�보아도�된다. 그러나 예수께서활동하신� 현장� 묘사

라는� 점에서는� 3:7과� 도� 깊은� 관계가� 있다.� � 한편� � 여기서� � 말하는'바다'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 �

큰� 무리가�모여들거늘� -� 여기서�예수의�가르침을�듣는�청중을� '큰� 무리'(* � � � � ,� 오클로스� 폴뤼

스),� 곧�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라� � 표현함으로써� 그� 당시의� 매우� 혼잡했던�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과� � 새� � 번역에서는"군중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라고� 번역되어� 있

다.� 이것은� � 단순히� � '큰무리'라고� 한� 개역성경의� 표현보다� 상황� 묘사가� 더� 실감� 있다.즉� � 예수께서는� �

수많은청중들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배에� 오르셨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 본장에서� 다

루는�여러� 비유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의� 많음을�통해� 당시� 예수의말씀의� 권위(權爲)와� 그분의� 영적� 영향력� 등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 것으로,� � 이처럼참� 생명과�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흡입력이� 있다.� � � 바다에� 떠� 앉으시고� -� �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올라� 앉으

시고'(마� 13:2)라고� 표현한다.� 공동번역� 역시�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신'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표

현이�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3:9)� 위에� 올라� 거기� 앉으시고� 해변가에�

모인�무리들을�바라보시면서�강론을�시작하셨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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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예수께서...가르치시니(* � ,� 에디다스켄� � 아우투스)-� 이

는� 미완료�과거� 시상으로서�예수께서�무리들에게�계속적으로� � 가르치고 계셨음을보여� 준다.� � � 여러가

지를�비유로� -� 여기서는�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쳤음을� � 밝히고� � 있다.이절을� 장소적�상황� 묘사라

고� 한다면� 여기서의� 표현읕� 방법론적� 설명이다.� 즉� � 이때까지의� 가르침은� 주로� 직설적인� 표현�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비해� 여기서는�우회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진리를�제시하는�비유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

었던� 것이다.� 사실� � 본장과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에서는� 7개의� 비유가� 사용되었지만� 본장에서는�

등불의� � 비유(21절;눅� 8:16)와�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가� 더� 있어� 9개의� 비유가� 사용된다.� 더욱

이� 마가는� 본장� 후반부에� "비유가� 아니면�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라는� 말을� � 덧붙임으로써� 본장이�

다루고�있는� 비유�이외에도�상당수의�비유들을�계속해서 말씀하셨음을� 시사한다.� � � 가르치시는�

중에(* � � � � � ,� 엔� 테� 디다케)� -� 직역하면� '그� 가르침� 가운데서'라는� 뜻이다.따라서�

이제� 예수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서� 몇가지를� 소개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바로�

앞에서도�언급했듯이�여기 소개되지않은�비유도�있을� 가능성이�암시되어�있다.

=====4:3� � 들으라(* � � � � � � � ,� 아쿠에테)� -� 이� 말은� '듣는다'(hear),� � '순종한다'(obey),�

'말을� 듣는다'(listen),� '깨닫는다'(understand)의� 뜻인� � 헬라어� � '아쿠오'(* � � � )의�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의미상� '깨닫는다'의� 뜻으로�이해하여� � '깨달을지어다'라는� 의미로�이해하면�된다.이러한�표현

은� 미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문형이다.이러한� 어법은� (1)비유의� 내용

을� 올바르게� 이해하라는간청을� 위엄� 있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이제까지� 가르쳐온� 방식과는�

다른� 비유적� � 방법이기� 때문에� � 주의를� 환기시켜� 잘못된� 이해가�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알� � 수�

있다.� (3)이러한� 경고형의� 명령형은� 이제까지� 가르쳐� 온�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청중들의� 이해가� 부족했

던� 점이� 암시된다.따라서�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 경고(警告)일� � 수도있다.이� 말은� 9절의� 표현,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표현과� 함께� 이경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 씨를� 뿌리는� 자�

-� 여기서부터�시작되는�비유의�소재가�씨뿌리는�농부로부터�얻어졌음을�보여�준다.� 이러한�형식,� 즉� 씨

뿌리는� 자를� 소재로� 한� 문구는� 구약성경에서도� 많이� 발견된다(욥� 4:8;시� 126:5;잠� 22:8;사� 61:3;호�

8:7;10:12).� 한편� 여기서 씨뿌리는자(farmer,� NIV)는� 예수�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비

유의�동기는� � 당신의말씀을�잘� 이해하지�못하거나�잘못�받아들이는� 사람들에�대한�경고와�훈계를�위한� �

것임을� 알� 수� 있고� 더불어� 그� 훈계의� 주체자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게� 된다.� 물론� � 본문의� '씨뿌리

는�자'를� 오늘에�재해석하면�곧� 예수의�복음을�전파하는� � 모든� � 사람으로확대�해석할�수� 있을�것이다.

=====4:4� 뿌릴새� 더러는� -� 본문은� 팔레스틴� 농부들의� 파종(播種)� 장면을� 연상케� 하는� 구절로농부들은� 보통�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10,� 11월에� 비가� 온뒤� 밭을� 갈게� 된다.� � 그런후나귀등에� 씨를� 담은�큰� 자루를� 싣고� 밭에� 나아가,� 그� 씨를� 다시� 허리춤에� 찰� 수� � 있도록� 만든� 가죽� 주머니에� 적당히� 옮긴

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이미� 기경해� 놓은� 밭� 이랑을� 돌면서� 그� 씨를� 손으로� 여기저기� 흩뿌리면� 다른�

사람이� 그의� 뒤를� � 따르며� � 쟁기로흙을� 덮음으로써� 파종을� 마치게�된다(Fred� H.� Wight).� 따라서� 여기

서� '뿌릴새'란� 정확히�표현하면� '흩뿌리새'가�된다(창� 26:12;레� 25:3).� � � 길가(* � � � ,� 텐호

돈)� -� 길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 삶의� 자세로서의� 행동� 양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

이� 자주� 다녀� 단단히� 굳어진� � 길을가리킨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요즈음과� 같은� 넓고� 곧은� 도로가� 드물

었고� 대개가� � 여행자나� 나귀� 등이� 자주� 다님으로써� 생겨난� 자연적인� 오솔길� 정도에� 그쳤다.� � 그런데� �

이오솔길은�공유(公有)� 개념이� 있었기�때문에�자기� 밭� 주위나�혹은� 그� 밭을� � 가로질러길이� 날� 경우� 그�밭주인은� 그� 길을� 남겨두고� 개간해야만� 했다(2:23;마� 12:1;눅� 6:1).� 한편� 말씀이나� 교훈을� 듣는� 사람

의� 자세에� 대한� 비유� 중� 첫번째가� '길'과� � 같은� � 마음을소유한� 사람이다.� 사실� 길은� 땅이� 굳고� 통행인

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 싹틔어� � 열매를맺도록�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땅이다.�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눅� 8:5)이러한� 점을� 좀더� 강조하기� 위해� '밟히며'가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즉� 길에� 떨어진� 씨앗은�

밟히어못쓰게� 된다는� 말이다.� � �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길가에� 떨어진� 씨는� 흙으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방임되기� 때문에�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고� 만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새의� 먹이가� �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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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그� 씨�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그� 씨를� 담고� 있는� 땅의� 상태가�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아무에게나� 무조건� 전한다고� 해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에게�복음을�뿌리면�도리어�사단의�좋은� � 먹이감이�되고� 또� 복음이�밝히어�모욕을�당하게�된다.

=====4:5,6� � 흙이� 얇은� 돌밭에...말랐고� -� 여기서도� 마태복음과는� 평행구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만

(마� 13:5)� 누가복음에서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눅� 8:6)라고� 전혀�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

과� 누가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 왜냐하면� 본문의� '흙이� 얇은� 돌밭'이란� 돌이�

약간� 섞여� 있는� 농토가�아니라� 거의� 돌로� � 이뤄진� 밭에� 흙이� 얇게� 덮여이는�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토

양은�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곳은� 수분을� 쉽게� 취할� 수� 있고� 마치� 온실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빨리� 싹이� 트게� 된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연한� 뿌리는� 더� 이상� 깊게� �

박히지� 못하고� 거의� 지면에� 노출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열에� 견디지� 못하여� 곧� 말라� 죽고� 만다.� 여기

에�대해�누가는� '습기가�없어�말랐고'라는�표현을�통해� � 태양열로� � 인한고사(枯死)를� 말한�본문과�적절한�조화를�이루고�있다.

=====4:7� � 가시떨기(* � � � � � � ,� 타스� 아칸다스)� -� 이� 말은� � '첨단',� � '뾰족나온�

끝'(apoint)이라는� 의미도�있으나�여기서는�가시가�돋은� 나무(thorn� plant)를� 가리키는�말이다.� 새번역

과� 공동번역에서는� '가시덤불'로� 번역되어� 있는데� 본문의� �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이같은� 번역

이� 어울릴� 것이다.� 팔레스틴에는� 밭주위에� � 이러한� 가시덤불이� 많이� 자라며� 때로는� 곡식과� 함께� 자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 적당한� 시기에� 이� 가시떨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주변� 곡식은� 더이상� 성장

하지� 못하고� � 만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가시떨기� '위에'로(마� 13:7),� � 누가복

음은� '...속에'로(눅� 8:7)� 각각�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각각� 다른� 상황을� � 표현하기보다가시� 덤불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땅에� 씨앗이� 뿌려지는� 상황을� 일컫는� � 것이라� � 본다.사실�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의� 토양

자체는� 어쩌면� 매우� 기름진� 곳인지� 모른다.� � 그러나문제는� 그곳에� 가시덤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다.� � � 기운(氣運)을� 막으므로(* � � � � � � ,� 쉬네프닢산)� -� 이� 말은� '함께'라는뜻의� 헬라어� '

쉰'(*� � � � � � )이라는�말과� '질식시키다',� '억누르다'는�뜻의� '프니고'(* � � � )라는� 말이� 결합된� 합성어

이다.� 따라서�직역하면� '함께� � 억눌렀기� � 때문에질식하였다'라고�표현할�수�있다.� 공동번역에서는� '숨이�

막혀'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함께� 억눌렀다'는� 뜻은� 가시나무의� 여러� 줄기들이� 힘차게� 자라나므로�

그� 속에� � 뿌려진�씨는�공기나�햇빛을�적당하게�받아들일�수도�없고� 잎이나�가지가�뻗어� 나갈�수도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숨이� 막혀'라는� 표현으로� 적절히� �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현

상은�가시덤불에만�있는�것이� 아니라�모든� 식물의�경우에도�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특별히� 가시덤불

을� 소재로� 택한� 것은� 상징적으로� 씨앗이� � 자라날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 � 결실치�

못하였고� -� 마태복음과�누가복음에는�이� 구절이�없다.� 이� 비유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있는� 점,�

즉� 첫째는� 씨앗이� 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어� 쓸모없게� 된� � 점,둘째는� 싹은� 틔었으나� 뿌리를� 못내린�

점,� 세째는�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점으로� 보아� 다음절(8절)� '결실하였으니'� 라는� 말과�

대조되면서도�문맥상�잘� � 어울리는�구절로서�열매�맺지� 못하는�신앙의�무가치함을�잘�가르치고�있다.

=====4:8� �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여기서� '좋은� 땅'은� 위의� 세� 경우의�흠이� 모두� 제외된,� 농부가�정성

껏� 경작한� 옥토를� 가리킨다.� 이� 땅은� 씨앗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며� 열매를� � 잘맺게� 한다.� � � 결실하였

으니(* � � � � � � � ,� 에디두카르폰)� -� 이는� 미완료� � 능동태를�취하고�있어� 계속해서�열

매를� 맺고� 있음을� 현장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에서�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은� 본� 비유가� 강조하는� � 바는,� � 씨가뿌려진� 땅의� 종류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때� 일

어나는� � 다양한� � 반응을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Lane).� � 비록� 온갖� 역경이�복음과� 하나님의�나라를� 막아선다�하더라도�그것은� 기필코�자라서� � 궁극적

으로�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 생각되어야할� 점이다.� 한편� 여

기서� '30배,� 60배,� 100배'라는� 숫자의� 점진적� 증가는� 옥토를� � 만난씨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능동적이고�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해� � 주고� � 있다.특별히� 고대� 팔레스틴의� 농사법이� 상당히� 미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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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점에서�이러한�양의� 결실은�매우감격적일�만큼�풍성한�결실인�것이다.

=====4: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비유를� 시작할� 때� '들으라'라는� 경고적� 어투로� 했던것처럼�

비유를� 마치면서도� 시작� 때처럼� 경고적� 어투이면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공관

복음에서� 여러� 번� 사용된다(23절;마� 11:15;� 눅� 14:35).� 이� � 경고적� 어투는,� 비유를� 통한� 예수의� 가르

침에�대하여�어떤� 이는� 이해하지� � 못하고� � 어떤이는�오해하며�잘못�알아듣는�현실을�이미� 전제하고�있

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 의미에서� 이� 경고가� 주는� 의미는,� 첫째�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 달라는�

촉구이다.� 둘째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 대한� 경멸적� 의미가� � 담겨있다.� 결국� 이� 두� 가지� � 의미

모두�듣는� 사람의�자세에�대한�경고라�할� 수� 있다.

=====4:10� � 홀로� 계실� 때� -� 이� 표현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 그런데� � 본절의상황�

설명은� 1절의�상황� 묘사와는�전혀�다르다.� 즉� 비유를�가르치기�시작할�때는� 사람이�너무� 많아� 배� 위로�

올라가야�할� 정도였는데�여기서는�예수께서� � 홀로� 있음을� � 말하고�있다.� 따라서�이� '때'는� 비유를�통한�

설교를� 마친� 후� 군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라고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장소는� 같은� 장소,� 즉� 배� 위가�

틀림없다(36절� 주석� 참조).� � �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들로� 더불어� -� 비유에� 관하여� 질문하는� 사람

들을� � 가리킨다.� 그런데� 미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만� 언급하여(마� 13:10;눅� 8:9)� 진리� 탐

구에�대한� 제자들의�열의를�은연중에�나타내�주는� 동시에�제자들이� 자신들의� � 영적� 무지를�타인들에게�

드러내지�않고자�하는� 소극적일면을�보여�주고�있다.� 이와는�달리� 마가복음에서만�제자들의�수가� 12명

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외에� 비유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비유에� 대하여� 질

문하고�있음을� � � 나타내� � 보이고있다.� 이는� 예수의�가르침이�편협하게도� 12제자에게만�국한된�것이아

니라는� � 사실을지적해�주기�위한� 본서� 기자�마가의�진지한�노력을�넌지시�보여�준 표현이라할� �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에서나� 볼� 수� 있는� 폐쇄성을� 거부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기� 원하셨다.� � � 비유들을� 묻자오니� -� 여기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난� 후에� 질문을� 하고� � 있지만'비유들'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본� 비유� 이외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 언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2절� 주석� 참조).� 한편� 이� 질문의� 내용에� 있어서� 마태복음

에서는� �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비유의� 뜻을� 묻는다.�

그리고� 본� 마가복음은� 이� 양자� 모두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것은� 제자뿐만� 아니라� 다른� 청중

들까지� 모두�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기록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비유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본격적으로�비유만을� � 통한� 진리�교육이�예수께서�이제까지�가르쳐왔던�방법과는�전혀�다른 형

태의 설교였기때문에�생소하게�느꼈을�것이다(2절� 주석�참조).

=====4:11� �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 '비밀'(*� � � � � � � � � � � � � � � � � � � � � � � ,뮈스테

리온)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는� 바로� 여기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서만사용된� 말이다(마�

13:11;� 눅� 8:10).� 이에� 비해�바울서신에는�무려� 21번이나 나타나며계시록에는� 4번� 쓰였다(계�

1:20;10:7;17:5,7).� 이� 말은� '전수받은�자'란�뜻을� 가진� 헬라어� � '뮈스테스'(*� � � � � � � � � � � � � � � )와� � '폐

쇄시키다'라는� � 뜻을� � � 가진� � � '뮈에오'(* )로부터� 파생된� 말로서� '알려지고� 전수되는� 것이� 폐쇄된'

것을� 의미한다.� 한편이� 용어는� � 당시� 흥행하던� 밀의� � 종교(mystery� religion)내에서� 외부로� 전혀� 노출

되지않는� 어떤� 의식을� 통하여� 그들만의� 비밀한� 가르침을� 전수하던�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Donald�

W.� Burdick).� � 그러나� � 신약성경에서� 이� '비밀'은� 단지� 허락된� 몇몇� 사람만을위한� � 그� 무엇이� 아니었

다.� 오히려� 이� 비밀은�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점

을� 두고� 있다.즉�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선포된다.� 그러나� 그� 비밀을�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오직� 신앙을 가진� � 자들이다.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더불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이에� 관히� 래드(G.� E.� Ladd)는�

말하기를� '이� 비밀은� 다니엘서에� 예언된다(단� 2:44;12:12,13)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세상에� 도

래하여� 사람들� 가운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바,� 숨겨진� 형태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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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logy� of� the� N.T.� p.� 94).한편� 본문의� '하나님� 나라'에� � 대해서는� 1:15� 주석을� 참조하라.� � � 외인

(外人)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 이� 구절을� 12절에� 붙여�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말은� 본절에서� 지칭하는� '너희들'� 즉� 질문한� � 사람들이�아닌� 다른� 사람들로서�불신앙의�완악

(玩惡)한� 마음을� 지닌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여기서� '모든�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 함축하고�있는�모든� 의미를,� '비유'(* � ,� 파라볼레)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로서� '풀리지� � 않는� � 의

문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말은� 비밀을� 알게� 했다는� 말과� 대칭을� 이루어� 천국에� 대한비밀이� 풀리지�

않는�의문점으로�계속�남아�있게� 했다는�말이� 된다.

=====4:12� 이는� 저희로...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70인역(LXX)에� 의한� 사� 6:9,� 10의� 자유스런인용

이다.� 그런데�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는� 사� 6:9,� 10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의아하게� 생각할� 필

요는�없다.� 왜냐하면�셈어에�있어서�명령형은�곧�결과를 표현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

다.� 한편� 70인역에서� 이사야의� 글과� 마가가� 여기에� 인용한구절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

난다.� 즉� 마가는�본문에서�보고�아는� � 것을먼저�그리고�듣고� 깨닫는�것을� 나중에�배치시키지만�사� 6:9

은� 듣고� 깨닫지�못하리라는사실이� 먼저� 언급된다.� 또한� 사� 6:10의� 첫� 부분과�같은� 강한� 표현인� '이� 백

성의� �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70인역의� 본문에� 대해서도� � 침묵하

고� 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문구를� 변형시켜� 단순히� '돌이

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카이� 이아소마이� � 아우투스),�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카이� 아페데� 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하

는데� 있어서� 마가는� 아람어의� 역본인� 탈굼역(The� Targum)을� 따르고�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신빙성을�

보증해� 준다.� � 한편예수의� 이� 말씀은� 비유의� 목적이� 믿지� 않는� 자들(외인)은� 진리를� 받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이� 신학적으로� 매우� 난해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이� 내용을� 기록한� 각� 복음서간의� 차이� � 때문이다.� � 다시말하면� 마태는� 본문� 초두에�

사용된� 접속사� '히나'(*� � � � � � ,� '하기� 위하여',� NIV성경은모호하게� '히나'를� '이는'<so� that>이라고� 번

역함)� 대신에� '호티'(*� � � � � � ,� '그결과')라고� 표현하고�있으며,� 누가는� '메포테'(*� � � � � � � � � � � � � � ,� '...하

지� 않도록')라고� �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접속사� '히나'의� 뜻과� 관련하여� 본� 구절은� � 여러� � 가

지로해석이�분분하다.� (1)� '히나'는� 문법상� 목적을�나타내는�접속사로서� '...하기�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

데,� 이는� 마가가� 나름대로� 목적어적� 용법으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해� 놓았을� 때의� 경우이다.� 이에� 따르

면� 이� 비유의�목적이� '외인들을�구원받지�못하도록� �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마가가�원래의� 아

람말� '데'(*� � � )를� 오역하여� '히나'로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 '데'는� '...하기� 위하여'� (in� order�

that)를� �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자'(who)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즉� '하나님� � 나라의� � 비

밀이너희에게는� 주어졌으나�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외인에게는� ...모든� � 것을� � 비유로하나니'라고�

해석되어야�한다(W.� W.� Wessel).� (3)'히나'는�마태복음의� '호티'(*� � � � � )� 와� 같은� 의미로�사용된�것으

로�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는� 비유의� 목적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비유의� 결과를� 나타내고자� 하

신� 것이다.� 따라서� '히나'는� '...때문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게� 될� 때� 본문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

고� � 보아도� � 알지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상의� 해석� 모두� � 존중되어야� �

한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을� 통합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외인들이� 알아듣지못하도로� 비유

로� 말하고� 그� 비유를� 알아보고� 듣기만� 하면�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 것'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시

험을� 치르고� 용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쨌든� 본절말씀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그저� 단순하게�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한� 가지� � 이유가� 진리를� '외인(완고한� 불신자)에게는'� 감추는� 것이었다고� 이

해하는� 것이다.� � 그리고좀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마샬(Marshall)이�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비유로� �

가르치시는�방법을�통하여�그의� 청중들로� 하여금�표면적인�이야기를�뚫고� 들어와�그� � 실제적인�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하셨으며,� 동시에� 어두운� 눈과� 둔한� 귀를� 가진� 자가� 돌이켜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기

회를� 제공한� 것이다'� (Commentary� on� the� Luke,� p.� 323)라는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표면적으

로는� '돌이켜�죄사함을�얻지�못하게�하느� 것',� 즉완악한�맹목성과�복음의�거부에�관한� 정죄� 및� 그로�인

한� 그들의�비극적�운명을�선포한것(Robertson)으로�이해할�수� 있다.� 하지만�비록� 완고한�불신자에게는�

비유가� � 심판을지향하는� 가리워진� 비밀에� 속하나�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 그같은� � 심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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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의�메시지를�제공하심으로써�오히려�그러한�충격을�통해� 그들로�하여금 깨달음과회개를� 촉구

하시고자�하셨던�것이다.� � 한편� � 본문에� � 대한 좀더� � 상세한� � 설명은� � 마13:11-15주석을� 참조

하라.

=====4:13� 너희가...알지� 못할진대� -�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제자들

의� 무지를� 가볍게� 책망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이미� � 입문한(11절)� 제자들에게� '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의미가� 명백하여� 깨달음이� 있는� � 자면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지� 않은

가?�만일� 이것조차�이해하지�못한다면 어찌� � 더어려운� 비유들을�이해할� 수� 있겠는가?'하고� 실망

섞인� 책망을� 하신� 것이다.� 한편� � 이같은� 사실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덮여� 있는�

어두움은� � 보편적인것이어서�제자들도�예외일�수는� 없었다'고�했다.

=====4:14� � 여기서부터는� 3-8절까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 의미가�

해석된다.� � � 뿌리는� 자� -� 이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지만� � 그는� 분

명� 말씀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 �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 마태복음에서는� 간접적으로� '씨'가� '천국� 말씀'임을� � 밝히고� 있는데(마� 13:19)� 비해� 누가� 복

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 서술한다(눅� 8:11).�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이� '뿌

린� 씨는� 하늘나라에�관한� 말씀'이라고�번역되어�있다.� 이로써�분명한� 것은� 비유의� '씨'는� '말씀'을� 의미

하며� � 그� � 말씀은'하나님의�말씀',� '하나님이�주신� 메시지',� '하나님�나라의�말씀',� 곧� 예수의� � 인격과그

의�사역을�통해� 하나님�나라가�이미� 도래하였다는�확실한�소식인�것이다. 사실� � 이비유가� 하나

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11절)� 이러한� 해석은� 적절하다.한편� 본� 비유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말씀을� 뿌리는� 일'(the� sowing� of� the� Word)이었으나� 그� 해석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말씀

을� 받아들이는� � 일'(the� � reception� � of� � theWord)임에� 유의해아� 한다(15-20절).� 이러한� 사실은� 예

수의� 사역에� 있어서� � 그� � 비유의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사실� 예수는� 이미� 당신의� '말씀

을�뿌리는�일'에대한�사람들의� '말씀을�받아들이는�일'의� 부정적�측면을�경험하신�바�있다(2,� 3장).

=====4:15�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 본문은� 4절의� 중복으로서� 매사를� 신중하고� �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는� 마가� 기록의�특징이다.� 물론� 여기서� '길가'란� 자신의� 능력과�경험과�선입관과�주의�주장

으로� 인해� 굳어질대로� 굳어진� 완악한� 심령을� 가리킨다.� � 이들에게는� 어떤� 영적� 감화나� 감동도� 일어나

지�않는다.� � � 이들이니(* � � � � � � ,� 후토이� 데� 에이신)� -� 이를� 좀더� 상세히�

번역하면� '이를테면,� 이� 사람들은� 다음에� 나오는� 종류의� � 사람들이다'라는� � 뜻이다.� 길바닥에� 씨앗이�

뿌려진� 것에� 비유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으나� 자기의� 것이� 되지못하고� 사단에게� 빼앗기는� 사람이다.� �

� 사단이�즉시� 와서� -� 여기서� '사단'(� � � � � � � � � � � � � � ,� 사타나스)이란�인간의� � 내면에흩뿌려진�말씀의�씨

앗을� 빼앗아가는� 악의� 실체로서,� 4절에� 언급된� '새들'을� 이� 사단으로� 보기도� 하고(Lenski)� 또� 사단의�

하수인으로�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한편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단'이라는� 말� 대신� 사단의�

별칭(別稱)이라� 할� � 수� � 있는� � '악한자'(*� � � � � � � � � � � � � � � � � � ,� 호� 포네로스)로� 묘사하고(마� 13:19)� 누가복음에서는� '마귀'(* � ,� 호디아볼로스)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초점은�

누가� 어떻게� 빼앗아� 가느냐에� 있지� 않다.� 핵심은� 자기에게� 들려진�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소유하지� 못하

는�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천국의� 비밀이� 자신에게� � 주어졌어도� 자기의� 영혼의� 양식과�

신령한� 지혜로� 만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 대한� � 비유이다.� 이� 의미는� 말씀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알

았으면서도�즉시�자기�삶으로�옮겨� � 천국을�이루어가지�못하면�그� 말씀은�남의�것이� 되고� 만다는�뜻이

다.� 특히� 자기� 삶으로� 옮기는� 결단과� 실천성을� 강조하는� 말이� '즉시'이다.� 말씀을� 내면� 깊숙이� 뿌리박

지� � 못하면� '즉시'� 사단이� '와서'� 빼앗아� 간다.� � �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 -� 여기서� '저희에게� 뿌리운'은�

원어로� 완료� 수동태� 분사형을취한� 단어로서� 그들에게� 넉넉하고� 적절히� 뿌려져�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본문과� �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그� 마음에� 뿌리운'(마� 13:19)으로� 묘사하여� 그� 씨앗이� � 단지�

주변에�뿌려진�것이� 아니라�내면� 깊숙이�뿌려졌음을�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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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 본절은�돌밭에�뿌리워진�씨앗에�대한(5절)� 해설이다.� � � 말씀을�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 15절과의� 차이점이� 있다.� 15절에서는� 말씀을� 들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직접� 묘사되지� 않았

다.� 그러나� 본절은� 15절의� 상태보다좀더� 발전된�모습을� 보이고�있는데,� 말씀을� 들었고�그� 말씀을� 기쁨

으로� � 수용(受容)하였음을� 밝힌다.� 15절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 � 비유는� �비록순간적이라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나� 진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는� 사람을� 묘사한� 것이

다.� 이는� 일시적이나마� 신앙� 생활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교회생활에� �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

다.

=====4:17� �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 뿌리가� 성장할� 수� 없는� 돌밭에� 뿌리워진� � 씨앗을�

'그� 속에� 뿌리가� 없어'로� 묘사하고� 있다.� 실로� 이런� 자들은� 그� 마음속에� � 말씀의씨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그� 말씀이�지속적인�생명력으로�커가�끝내� 열매맺을�수� � 있도록�하는� 원천인�뿌리가�없는� 상태이

다.� 따라서� 그들의� 생명력은� 일시적이요� 그� 본질은� 경박하고� 유약하다.� � �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

박이�일어나는�때� -� 6절에� � 언급된� � 태양열이 여기서는'환난'(*� � � � � � � � � � � � � ,� 드립시스)과� '

핍박'(*� � � � � � � � � � � � � � � ,디오그모스)으로� � 묘사되었다.� 먼저� 헬라어� '드립시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짓누르는� 압박'을,� � '디오그모스'는� '뒤에서� 바짝� 추격하는� 듯한� 위협'을� 의미한다.� 결국� 이� 양자는� 외

부로부터� � 오는�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가리킨다.� 실로�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따라� 살고� 진리를� � 따라�

살때,� 외부로부터나�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여러� 가지� 갈등과� 유혹이� � 있게� � 마련이다.� 또� 불의한� 세력

들이� 진리와� 정의를� 파괴하려고� � 하면서� � 공격해� � 오기도� � 한다(롬1:25;2:8;약� 3:14;벧후� 2:2).� 15절

의� '사단'을� 마태복음에서� '악인들'로� 묘사한� � 것은이러한� 의미에서� 일치된다.� 사단은� 천국을� 파괴하려

는� 세력이다.� 이러한� 환난이나� � 핍박을� 견디어�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 � 가지� � 놀라운사실은� 6절에� 언급된� '태양'은� 이처럼� 뿌리가� 없는� 식물에게는� � 생장(生長)의� � 크나큰장애물로�대두된다.� 그러나�좋은� 땅에� 뿌리워진� '씨'에게� 있어서는� 그� 생장에� � 있어서습기�만큼�중요

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태양의� 빛과� 열기없이는� � '씨'는� 결코� 푸르게� 성장하여�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즉� 그� '씨'는� � '말씀을� � 인하여'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핍박과� 환난('태양')없

이는� 결단코� 풍성한� � 말씀의� � 결실을맺지� 못한다(Lenski).� � � 곧� 넘어지는� 자요� -� 여기서� '넘어진다'로�

번역된�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 � � � � � )는� 원형� '스칸달론'(*� � � � � � � � � � � � � � � � � � ,� '동물들

을� 잡기� � 위해� 설치한� 덫에� 있는�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지칭)에서� 유래한� 현재� 시상의� � 단어로서결국�

계속� 그� 함정에� 빠져�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실로�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식물은� 아무리� 그�

외모가�화려하고�푸르르다�하더라도�강렬한�태양� 앞에� 쉬� 쓰러지고� 말듯이�신앙에�깊은� 뿌리를�내리지�

못한� 심령은�환난과�핍박에�견디지� 못하고�마치사냥꾼의�올무에�걸려� 더� 이상� 활동력을�상실한�짐승처

럼� 죄의� 올무,� � 절망과� � 좌절의올무,� 온갖� 고통의� 올무에� 걸린� 채� 더� 이상의�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될� � 것이다(딤전� 3:7;6:9).

=====4:18,19� 가시떨기에...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 -� 가시덤불에서� 싹을� 틔웠으나� 가시덤불�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의� 비유이다.� 앞절과의� 차이점은,� 17절에서는� 뿌리가� 없어환난과� 핍박이� 일어

나면� 넘어지는� 자,� 곧� 배반자를� 말하나(눅� 8:13)� 여기서는� 비록� 뿌리(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실성

과� 이해력)은� 있으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 욕심으로�인해� 끝내� 결실치� 못하는�자를� 묘사하고�있는� 점

이다.� 그러나�결과적� 측면에서� � 17절의� 경우와�동일하다고� 본다.� 실로� 가시떨기가� 자라는�땅은� 길가나�

돌밭보다� 훨씬� 뛰어난� 옥토임에� 분명하다(7절).� 따라서� 이곳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그� 씨앗은� 뿌리

를깊게� 내리게� 되고� 또� 싹이� 돋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장의� 어느� 시점에� � 이르러� 가시로�

인해� 방해를� 받다가� 종내� 결실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이� � 가시를� 세경우로� 묘사하고� 있다.�

(1)'세상의�염려'이다.� 여기� '세상'(*� � � ,� 투� 아이오노스)은� 문자적으로� '그� 시대'로서� 일정한�기간� 내지

는� 인간에게� � 부과된� 한� 세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염려'란� 인간의� 생명이� 끝내� � 종말을� � 고하

게될�현세대에�국한된�근심(Lenski),� 현세상의�욕심을� � 채우기� � 위한 열심과 걱정거리(Dona l d�

W.� Burdick),� 세상을� � 살아가면서� � 때때로� � 일어나는� � 불안(Taylor)등이다(마6:25,� 31;눅�

8:14;21:34;고전� 7:33).(2)'재리(財利)의� 유혹'이다.� 재리와� 가시를� 연결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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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 되기� 때문이다(The� � Pulpit� � Commentary� � ,�

딤전� 6:10).� 이� '재리의� 유혹'은� 재물이� � 지닌� 기만성,� 곧�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 소유자와� 기대자로� 하여금� � 허무한� � 절망에� � 빠뜨리게� � 하는� � 것을� � 강조한� � 것

이다(Taylor,Lenski,� Burdick,� 마� 11:21-23).(3)'기타� 욕심'이다.� '씨'(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 하고� 질

식시켜� 그� 기운을� 막는� 모든� 장애� 요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 혹자(Robertson)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과� � 평행을� 이루는� 눅� 8:14에는� 이� 말� 대신

에� '이� 생의...일락(逸樂)'이라� 표현함으로써� �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 관능적인� 관심과�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진정� 이같은� 욕망들은� 마치� 기

운찬� � 가시떨기처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의� 성장을� 철저히� 제어해� �

버린다.

=====4:20� � 말씀을� 듣고� 받아...결실을� 하는� 자� -� 이� 비유가� 지향하는� 최고의� � 가치의� � 경우를언급

한� 것으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결실'에� 관한� 내용이다.� 실로� � '씨'(말씀)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

은� 인간의� 심령에� 그� 씨가� 뿌려져� 그� 인간의� 온� 인격과� 삶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다.� 이같

은� 결실을� 맺는�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 문을� 활짝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즉� 그는� 말씀을� 경

시하지도,�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도,�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주어지는� 말씀을�

듣고,� � 이해하고,실행하며,� 온전히� 간직하는� 데� 힘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나� 커다란� 결실,� 곧� 진리와� 은혜와� 덕이� 충만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한가지� 특이

한� 사실은� '듣고'(*� � � � � � � � � � � � � � � � � � � � ,� 아쿠우신,� '순종하다','깨닫다','이해하다'는� 뜻도� � 지님)와� �

'받아'(*� � � � � � � � � � � � � � � � � � � � � � � � � � ,파라데콘타이,'영접하다',� '승인하다',� '인정하다'는� 뜻도� 지님)� 그

리고� '결실을�하는'(* ,� 카르포포루신)이라는� 말이� 모두� 현재� 시제를� 취하고� � 있다는� �

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또� 계속적으로� 그� 말씀을� � 받아들여� 계속적

으로� 결실을� 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앞에� 언급된(15-19절)� 세� 종류의� 밭에� 비유되는� 사람들

이� 듣고� 인정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한� � 것과는� � 대조적으로'좋은� 땅'의� 사람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 착념함으로써� 끝내� 많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마� 13:23;눅�

8:15).� 여기서� 한� 가지� � 주목할� 것은� 그� 결실이� 30배,� 60배,� 100배�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 점

이다.� � 이러한소출은�그� 밭(사람)의� 능력보다�오히려�그�씨(말씀)가� 지닌�역동적 생명력을� � 강조한것

이라� 본다.� 실로� 한� 인간에게� 뿌려진� 씨는� 그� 내부에서� 풍성한� 성장을� 함으로써� � 회개와� 겸손과� 온유

함� 등의� 심령의� 변화를�가져오며�그러한�변화는� 그� 속에서만� � 머무는것이� 아니라�점진적으로� 타인에게

도� 옮아가는�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마태복음의� � 달란트�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마� 25:14-30).� 즉�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 등의� 다양한� 숫자� 나열을� 통해� 그� 결실의� 종류가� 다양함을� 암시해�

준다.� 이는� 주의� 말씀을� 실천하여� 천국을� 이루어� 갈� 때� 각�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열매를� � 맺는다는� �

것을암시하고�있다.� 따라서�다양한�결실� 각각을�존중해야�한다.

=====4:21�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21-25절은� 두가지� 내용이(21-23,� 24-25절)� 한� 데� 어우러진일

종의� 삽화� 형식의� 메시지로서� 예수께서� 여러� 기회들을� 통해� � 말씀하신� � 내용들이다.특히� 누가복음은�

본문과�거의� 동일한�형태를�이루고� 있으며(눅� 8:16-18),� � 마태복음은산상수훈을�근간으로� 본문과�연결

되고�있다(21절-마� 15:15;23절-마 11:15;13:9,43;24절-마� 7:2;25절-마� 25:29등).� 여기서� 특히� 강

조되는� 바는� 예수의� 가르침에� 접한� � 자의책임성(責任性)이다.� 즉� 빛을� 받은� 자는� 그� 빛을� 타인에게도�전해야�한다는�것이다.� � � 사람이�등불을�가져�오는� 것은� -� 다른�복음서의�평행구와는� � 달리� � 오직 마

가만이'등불'(*� � � � � � � � � � � � � � � ,� 호뤼크노스)을� '가져� 온다'(*� � � � � � � � � � � � � � ,� � 에르케타이)라고� 기록

하고� 있으며� 등불�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본� � 비유를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

다.� 즉� 등불�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그� 등불'� 곧� � 세상에유일� 무이한� 등불이신� '오신'� 예수를� 지칭하

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가져� 온다'는� 말은� 종말론적� 사상을� 함축한� 표현이다.� 즉� 지금까지� 감춰

져� 왔던� � 계시를� � 종말의시점에� 이른� 이제� 만인에게� 알리고�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앞에�언급된� '하나님�나라의�비밀'(11절)� 개념과�적절한�조화를�이룬다(Taylor).� � 한편� � 본문에언급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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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토기로� 된� 납작한� 등잔으로서� 그� 속에는� 감람유(olive)가� 채워지며� 그� 기

름에� 심지를� 넣고� 불을� 켜게� 된다.� 이� 등잔은� 주인이나� 종에의해� 방� 안으로� 옮겨지며� 옮거진� 등잔은�

주로� 기다란� 등대� 위에� 안치되어� 주위를� 밝게한다.� � � 말� 아래...두려� 함이냐� -�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

는� 헬라어� � '메티'(*� � � � � � � � � )로시작되는� 본문은� 결단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간접적인� 명령이기

도� � 하다.� � 여기서말은� 가루나� 곡식을� 되는� 도량형기구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뒷박'이라고� 번역하며� �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8:16)는� 등불을� 덮는� '그릇'으로� 묘사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등불을� 켜지� 않을�

때� 이� 그릇으로� 등잔을�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그� 등잔을� 내려놓는다고한다.� 어쨌든� 이� '말'(bushel)

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 단절시키게� � 만드는� 세상적인� 부와� 이익을� 암시한다.� 그리고� 평

상은�침상(공동번역)을� 뜻하며�상징적으로는�세상이�제공하는� 평온함과�쾌락을�가리킨다고�볼� 수� 있다.�

실로� � 이처럼� � '말'과'평상'으로써� '등불'을� 가리우듯이� 주께로� 받은� 복음� 곧� 빛나는� 그� 계시를� 결코� �

세상의� 유익과� 쾌락으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 �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

냐� -� 여기서� '등경'은� 등잔을� 올려� 놓는� 받침대로서� 가난한�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이것� 대신� 흙으로� 된�

바람벽에� 돌출구를� 만들어� 그곳에� � 등잔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본� 구절의� 의도는,�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집� 안을� 환하게� � 밝히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마� 5:15� 주석� 참조)� 빛이� 가장� 잘� 퍼져나갈� 수� 있

는� � 장소인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등경은� 상징적으로� 복음의� 빛을� 세상에� 널리전파

해야�할�사명을�맡은�교회를�상징한다고�본다(계� 1:20).� 여기서�등불을 두� � 가지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죄악과� 어둠을몰아내시고� 진리의� 세계를� 건설키� 위

해� 이� 땅에� 오신� 참� 빛� 곧� 세상의� 유일한� � 빛이시다(요� 1:9).� 둘째로� 복음이다.� 그� 복음의� 빛이� 세상

을� 속속히�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는복음을� 이� 세상� 한� 가운데� 선포하여야� 한다(대상� 16:23;시� 66:16;

행� 20:24;롬� � 15:19;골� 1:23).

=====4:22� � 드러내려�하지� 않고는�숨긴�것이� 없고� -� 이� 구절을�번역하기란�매우�어렵다.� � 그리고�이

와� 비슷한�구절이�마� 10:26과� 눅� 12:2에도� 나오지만�본문과� � 평행을� � 이루는� � 눅8:17이�가장� 적절히�

본뜻을� 밝혀주고� 있다고� 본다.� 이� 비유는� '숨긴� 것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는� 뜻의� 속담과� 그� 맥

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 아래� 모든� � 사물이� � 밝히드러난다는� 경험적� 상식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의미는� 21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즉� (1)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이나� 부정직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한

다.따라서� 정직한�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2)심판� 사상과� � 연결된� � 것으로볼� 수� 있다.�

즉� 최후심판의� 때에는� 모든� � 감추어졌던� � 사실들이� � 다� � 드러나므로(고후5:10)�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

기의� 죄를�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회개하는� �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5:31-46).� (3)'천국의� 비밀'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있다.� 즉� 비유가� 천국의� 비밀에� 관한� 것이라면(11

절� 주석� 참조)� 그� 천국의� 비밀은� � 감추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암

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천국의� 비밀은� 언젠가는� 모두� 밝혀질� 것이라는� 말이다.� (4)'메시야� � 비밀'� � 사

상과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의� 활동이� 메시야적인� 것이었지만� 현재� � 그� � 사실을숨기려� 한�

의도(9:9)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비밀이� 현재는� 숨겨져� 있으나언젠가는� 밝히� 드러� 날것이

라는� 암시와�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된� 사건에서� 그분의� 메시야

성이�밝히�드러났다.� � 특별히� � 하나님께서는예수�재림(* � � � )시에� 모든� 영광으로� 예수

를�밝히�드러내실�것이다.

=====4:23�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와� 똑같은� 구절이� 이미� 9절에서� 언급되었고� 같은�의미의�

서두가� 3절에서도� 언급되었다(3,9절� 주석� 참조).� 여기서도� 역시� '내� 말은� 중요한말이니� 더욱� 마음을�

써서� 그� 의미를� 깊게� 되새겨� 보라'는�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적� � 문구로� 생각하면� 된다(마� 11:15;13:9;

눅� 14:35).

=====4:24� �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너희가� 어떻게� � 듣는가'

(눅� 8:18)로� 표현한다.� 새번역에서는� '너희는� 조심하여� 들으라'로� � 번역되어� � 있고공동번역되어� 있다.�

Page 58: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이� 말은� 23절의� 격언구와� 비슷하게� 반복하여� 사용한� 경고적� � 어투로� 보면� 된다.� 즉� 똑바로� 들어� 비밀

을� 깨달으라는� 촉구이다.� � �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또� 더� 받으리니� -� 이와� 비슷한� 문구가� 마� �

7:2과눅� 6:38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구절들에서는� 주로� 타인을� 비방하는� 일을� 삼가하라는� 의미

로� 사용되었는데� 반해,� 21절부터� 이어지는�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복음을� 수용하는� 마음� 자세(그릇)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된다.� 즉� 복음을� 들을� 때� 깊고� 넓은� � 영적� 통찰력으로써� 받아들인다면� 그� 마음� 그

릇에� 풍족히� 채워질� 정도로� � 이해될� � 것이고계속해서� 더� 크게� 이해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한편� 본� 구

절을� 단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너희가� 남을� 재는� 그� 그릇의� 크기로� 너희의� 크기가� 측정될� 것이다'이

다.� 공동번역에서는�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 얹어� � 받을것

이다'로� 번역되어�있다.� 전체적인�의미는�남에게�행한� 것에� 따라� � 보상되는� � 응보의개념,� 즉�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갈� 6:7;고후� 9:6).� 그러나�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본문은� 사람이� 영적�

지각력을� 갖고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더욱더� 예수에� 관한� 진리를� 밝히� 알게� 된다는� 사실에�

역점을�두고� 있다.� 실로� � 각자가지닌� 각각의�그릇(이해력,� 지각력�등)에� 따라� 예수의�생명력�넘치는� 말

씀을� 많이도� 받고� 적게도� 받을� 것이다(고후� 9:6).�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복음을� � 수

용하는� 데� 따른� 보상적� 응보는� 대등한� 보상이� 아니라� '더� 받으리'라는� 표현을� � 덧붙여보상의� 풍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영적� 세계에서의� 영적� 빈익빈� � 부익부� � 현상(現狀)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마�13:12).

=====4:25� �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격언구로� 보인다.� � 누가복

음의�평행구(눅� 8:18)외에도�여러� 곳에서�이런� 구절이� 발견된다(마� � 13:12;25:29;눅� 19:26).� 이� 의미

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할� 수� 있다.� 첫째는� 천국의� 비밀과� 관련시켜� 해석할� 수� 있다.� 즉� 천국의�

비밀을�알려고�노력하며�애쓰는�자는� 더� 많은�비밀을�알게�될것이고�관심을�갖지� 않고� 듣지도�않는�사

람은� 알고� 있는� 것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는� 남에게� 베푸는� 사람을� 베풀수록� 더� 많이

보상받고� � 덤까지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

다.� � 이것은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세째는� 많은� � 열매를� � 맺게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지만�나쁜� 땅의� � 씨앗은� 열매를� 못맺는�것

처럼� 겸손하고� 말씀에� 성실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풍성한� � 말씀의� 열매를� 맺어� 기쁨을� 누리지만� 반

대로�편견과�비뚤어진� 마음과�생각을�소유한� � 자는오히려�현재�지니고�있는� 조그마한�행복까지�빼앗긴

다는� 심판적� 의미로� 생각할� 수� � 있다(사� 3:10;� 렘� 32:19).� 물론� 본문에서는� 천국� 복음과� 진리에� 대한�

빈익빈�부익부� � 현상을�의미하는�첫번째�견해가�적절하다.

=====4:26� � 하나님의� 나라는...뿌림과� 같으니� -� 여기서� 또다른� 비유가� 시작되는데� � 본� � 비유는마가

만이�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그� 강조점에� 있어서� 3-8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는� 다르다.�

즉� 씨뿌리는�자의�비유는�씨의� 성장에�좋은� 토질과�풍성한�수확이�강조되었으나� 본� 비유에서는�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하는� � 신비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으며� � 특히� �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한편� 이� 비유의� 제목을� 붙이

는� 데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즉�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 비유'등이다.�

공통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는� 씨앗을� 소재로� 택하여� 인간의� 시각에� 구체적으로� 드러

나� 보이지는않으나� 그� 역동적� 활동력으로� 인해� 조용히,� 점진적으로성장해� 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

련시키고� 있는� 점이다.� 한편� 이� 하나님� 나라는� � 철저히� 현재적이고� 영적이라는� 데� 본� 비유의� 주안점이�

있다.� 그리고�그� � 나라는� � 말씀의씨를�뿌림으로써�시작되고�성장한다(Donald� W.� Burdick).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시간의� 흐름을�자연스럽게� � 나타내는� � 표현이다.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씨앗을� 뿌린� 농부가� 씨앗의� � 성장에� 대하여� 아무런� 일

도� 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단지� � 알맞은� 장소에� 씨를� 뿌리는� 일� 뿐이다.�

그는� 결코� 씨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농부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등의� 일은�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씨앗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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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틔우고� 자라게하는�것은�사람의�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전적으로�땅과�비와� 공기와�해를� 주관하시

는�하나님에게�맡겨진�일이라는�점이다(고전� 3:6).� 둘째,� 씨뿌린�농부가�땅에� � 대하여믿음을�갖고�있다

는� 점이다.� 씨앗을� 뿌려놓고� 농부는� 전적으로� 그� 소출을� 하나님께� 맡긴다.� � � 씨가� 나서� 자라되...알지�

못하느니라� -�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 � 원인적이유나� 과정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무

지� 때문에� 씨의� 성장이� 방해받는� 것은� � 아니다.� 다만� 대자연의� 생명력과� 내밀한� 성장� 과정은� 우리� 인

간이� 알지� � 못하는� � 순간에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성장� 과정은� 신비한� 것이다.� 하나님� 나

라도� � 역시그� 과정이� 신비한� 비밀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원인적� 힘을� 발견하지� � 못한다고�

하여도� 농부가� 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추수를� 기다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 � 역시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확신(確信)을� 가져야�한다(15:43).

=====4:28� 땅이� 스스로�열매를�맺되� -� 여기서� 열매를�맺게� 하는� 주체가� 땅임을�말하고� � 있다.그러나�

본문이�의도하는�바는� 본질적으로�땅�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기보다�그땅과�생명있는�씨앗의� 절

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능력'을� 암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땅이�

스스로'란� 표현은� 곧� 농부의� 힘을� 철저히� � 배제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서� '스스로'(*� � � � � � � � � � � � �

� � � � � ,아우토마테)란� � '자동적'이라는� 뜻이다.� 즉� 열매맺는� 것은� 농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땅에�

의해� 저절로이루어지는�것이다.� 이� 의미를� 26절에서�씨뿌리는�자를� '사람'(� � � � � � � � � � � � � � � � ,� � 안드로

포스)이라고� 밝힌� 점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확산되는� 것이아님을� 암시하고� 있

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사람의힘이�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사

실이다.� 다만� 인간에� 의해� 김을� 매거나� 경작하는일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씨앗을� 결실케� 하

는� 결정적�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잊지�말아야� 한다.� 이� 같은� 점을� 구원의�의미에서� 볼� 때� 구원은�사

람의� � 힘으로� � 되는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다(엡� 2:8).� 그러나� 사람의� 노력이�

전혀배제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나� 구원의� 성취는� 오직� �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른� 것으로,�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것이� 중요하다(요� 6:28,� 29;

히� 11:6;요일� 3:23).� � � 처음에는�싹이요...충실한�곡식이라� -� 씨앗이�자라나는�과정을�그림처럼 그

려주고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그�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자연의� 법칙처럼� 사람이�

모르는�사이에도�천국은�완성을� 향해� 나아가고�있다.� 따라서�지금� 나타나는미완성� 단계의�과정,� 즉� '싹

'이나� '이삭'은� '충실한� 열매'가� 되기� � 위한� � 가능태이다.하지만� 그� 가능태는� 완성의� 현재적� 모습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 나라는� � 미래에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현재에� 실현되

고� 있는� 가능태를� � 관찰할� 수� 있다면� 장차� 올� 완성의� 하나님� 나라도� 확신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혹자(J.� Jeremias)는� 말하기를,� '열매는� � 씨의� � 결과이다.� 즉�

마지막이�처음�속에� 내포되어�있는�것이다.� 무한하게�큰� 것은� � 이미 무한하게작은� 것� 속에서� 활동

하고� 있다.� 진실로� 현재는�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도록� 허락된� 사람

들은(11절)� 이미� 보잘것없이� 보이는� 시작에서� �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본다'(The� parables� of�

Jesus,� pp� 152-153)라고� 하였다.� � 한편� 본문의� 이러한� 비유는�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불

신이� 팽배해� 있었던� 것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또�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

불신앙적� 사람들에게�이� 교훈은�사람의�힘이� 아니라�철두� 철미� 하나님의�능력에� � 의존해야함을�가르치

고�있다(창� 18:14;신� 10:17;� 시� 24:8;눅� 1:49).

=====4:29� � 열매가� 익으면...추수때� -� 이� 구절은� 욜� 3:13의� 인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 완성된� 때�

곧� 세상의� 종말이� 이르는� 때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익으면'(*� � � � � � � � � � � � ,파라도)은� 제2단순� 과

거� 가정법�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열매가� '스스로� 영글어� 익어갈� 때면'으로서� 결실의�

상황을� 가정한� 단순한� 설명적� � 해석이다.� � 이는분명� 하나님의� 통치가� 스스로(28절)�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의�영적� 열매들이�완전히�영글었을�때를�의미한다.� 이는� 앞절의� '충실한�열매'와� 같이� 긍정적인�완

성에� 대한� 그림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8절의� 표현과� 함께� 생각하여� 미세한� 하나의� 씨앗

이� 뿌려져서� 충실한� 곡식이� 되고� 그것이� 익어지는� 신비한�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 씨뿌릴� 때� 과연� 이�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하는� 의아심� 혹은� 확실성이� 없는� � 기대가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

Page 60: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실이다.� 진정� 씨앗을� 뿌린� 뒤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 곡식이� 결실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은�모호하고�숨겨져� � 있으나� � 영광스럽게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Cranfield).� � 즉� � 하나님의� 나

라는�아주 작은� � 것에서부터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른다.� 그런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

인� 것이면서� 현재적과정이다.� � � 낫을� 대나니...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 이는� 종말적� 최후� 심판을�

표현한다.� 이처럼� 종말적�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는� 것은� � 성경에서� � 자주� � 사용되는� � 방법이다(잠

25:13;렘� 5:24;51:33;욜� 3:13;마� 3:12;13:30;눅� 3:17;계� � 14:14-16).� � 특별히� � 여기서'낫을� 댄다'는�

것은� '낫을� 가져� 간다'는� 뜻으로� 씨를� 뿌린� 후� 자기� 일에� 열중하던� � 농부가� (27절)� 추수의� 시점에� 이

르러� 다시� 그� 밭에� 보내지는� 광경을� � 묘사한� � 것으로(요4:38)� 무서운�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한

다.� 실로� 이� '낫'은� 개인적� 종말과� � 우주적� 종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 한� �

환유적(換喩的)표현이다.한편� 여기서� 추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추수를� 하는� 것은� � 사람이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농부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적� � 심판의� 때

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추수의� � 기쁨을� 맛보는� 것은� 사람

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 것은� �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씨를� 뿌리는�사람이라는�점이다. 그러므로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위해� 준

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 둘째,� � 추수의주체자는� 하나님이다.� 즉�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며� 추수에� 투

입되지만� 그�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하고� 잘� 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 곧� 신비한� 자연의� � 힘

이다(하나님의� 이면적인� 섭리).�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 일하는� 것

은�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모든� 영광은� 하나

님께� 돌려져야� 한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 두� 가지� � 의미가� 빠지는� 일이� 없이� 해석되어야� 한

다.

=====4:30� 여기서�또�다른� 비유가�시작된다.� 주제는�앞에� 나오는�비유에�이어� 계속�하나님�나라이며�

소재는� 겨자씨이다.� 역시� 청중과� 장소변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 � 한편� � 본문과평행을� 이루는� 마�

13:31,� 32과� 눅� 13:18,� 19에는� 공히� 바로� 이어서� 누룩� 비유를� � 첨가하고� 있으나� 본문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어쨌든�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 사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고� 보잘것없으나� 그것이�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크게� 나타날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 이� 비유의� 시작은� 다른� 비유와� � 달리� � 어떻게,�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하는� 이중

적�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로� 히브리인들이즐겨� 쓰는� 수사법으로서� 생생한� 물음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깊은� 관심과�주의를�환기시키고�생각할�여유를�갖게�한다.

=====4:31� 겨자씨� 한� 알� -� 겨자씨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이며,'사람

이� � 땅에� � 심는� 가장� 작은� 씨앗'(the� � smallest� � seed� you� plant� in� the� ground)으로� 알려져� 있었

다.� 더욱이� 아주� 작은� 씨앗으로� 비유되는� 겨자씨를� '한� 알'이라� 한정함으로� 그� 작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는� 설명구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같은� 표현은� 조금� 과장된� 듯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의� 실체는� 마치�

겨자씨의� 성장� 과정과� 같다는� 사실이다.� 즉� 천국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작아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미한� 시초성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

나� 이같은� 미미함은� 능력있고� 흥왕한� 모습으로서의� 천국의�미래성을�내포한다는� 점에서� 겨자씨의� 생명

력� 넘치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실로� 가장� 작은� 것� 속에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

이다.

=====4:32� � 자라서...큰� 가지를� 내니� -� 이� 구절은� '가장� 작은� 것'을� 강조한� 31절과� 큰� � 대조를� 이룬

다.� 그� 구체적� 표현을� 살펴보면�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새들이...깃들일� 만큼'이라는� 비교� 문구를� 각

각� 사용한다.� 여기서� '모든� 나물'을� 공동번역에는� � '어떤� � 푸성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겨자씨의�

본질(나물)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변화(나무로서의)를� 암시한� 것이라� 본다.� 즉�

겨자씨는,� 그� 실제는� '나물'(푸성귀)이지만,� 그� 키가� 3-4m(심어어� 7m까지�자라는�경우도�있다고�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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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성장하며� 그� 줄기의� 굵기가�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라므로(Donad� W.� Burdick)가히� '나무'라� � 봄직

하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 없을� � 만큼의� 변화와� 성장

을� 이뤄놓는� 것이다.� 실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확장성과� 현재와� 미래의� 대조적인� 모습

을�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 가장� 큰�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된�

천국� 비밀처럼(26-29절)� 지금은� 보이지� 않는듯�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그� 작은� 것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며� 반드시� � 완성된�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가능태이다(29절).� 따라서� 천

국을� � 대망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어야� 하며(Nineham)� 보이지� 않는� 것� � 속에

서� 완성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 이러한� � 의미를� 생각할� 때�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 창대하리라"는� � 말씀과� 마� 25:21,� 23의�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를� 생각나게� 한다.� � � �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 여기서� '공중의� 새'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기� 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

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마� 13:31).� 혹자는� 성경에서� 흔히� '새'

가� 사단의�대리인들로� 묘사되고�있다는�점을� 들어� 확장되어가는�하나님�나라를�해치기� 위해� 힘쓰는� 존

재들로� 이해하기도� 하나� 본� 문맥에서는� 적합치� 못한� � 해석이라�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영적으로� 이� '공

중의� 새'는�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 이방인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여기서� '깃들인다'(*� � � � � � � � � � � � �

� � � � � � � � � � ,� 카타스케눈)는� 말은� 단순히�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

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 도처에� � 있는� 수

많은�영혼들이�평안히�그리고�영원히�깃들일�수� 있는�보금자리인�것이다.�

=====4:33� 비유로...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 비유들은� 예수께서� �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을�통해� 계시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용하신�방법� 중� 가장� 탁월한�교

수법이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 진리를� 비유로� 말씀함으로써� 무리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다.� 즉� 비유

(parable)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예로� 들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것으

로,� 그것을� 듣는� � 자들의� � 사고를자극하고� 영적� 지각력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진리�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 이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알아들을�수� 있는� 대로',� 즉� 듣는� 이의� 영적� � 감지력과

진리에�대한�이해력�여부에�따라� 쉽게� 또는�어렵게�여겨질�수� 있는� 것이다.

=====4:34� �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 이� 말은� 비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않았

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은� 반

드시�비유를�통해� 가르쳤다는�말이다.� 그� 이유는� 11,12절� � 주석을참조하라.� � � 혼자� 계실때에...모든� 것

을� 해석하시더라� -� 이� 문구는� 10절의� 시작과� 비슷하다.� 다만� 질문을� 했다는� 언급이� 없고� 10절에서는�

청중이�제자들과�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다.� 결국은�

앞에서�가르친�여러가지의�비유들은�일반� 청중을�상대로�한� 것이고� 그� 비유에�대한� 해석을�제자들에게� �

하고� � 있는것이라는�뜻이�된다.� 이것은�비유가� 인간의�이성으로�쉽게�이해할� 수� 있는� 것이� � 아님을�암

시하고�있다(13,33절� 주석� 참조).� � 사실� 예수의�비유를�이해하기�위해서는� � 제자들조차로�예수의�거듭

되는� 설명과� 상세한� 해설이� 필요했었다.� 사실� 본문의� � '해석하시더라'(*� � � � � � � � � � � � � � � ,� 에페뤼엔)가�

미완료� 시상으로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 설명해�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정� 예수께서는� '알아들

을� 수� 있는� 대로'(33절)� � 진지하고도� 쉽게� 가르쳤지만�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여전히� 어렵게만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고적� � 격언구와

내용의� 일치를� 갖는다(3,� 9,� 23절�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은� � 물론이고� 제자들조

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들은� 예수를� 배신하거

나�십자가�처형에�침묵으로써�간접 동조했던� � 것이다(114:50).�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

활함으로써� 사람들은� 예수를� 비로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쪽의�잘못이다.� 이것에�대한� 상징적�비유가� '씨뿌리는�자의� 비유'라� 할� 수� 있다(3-20절).

=====4:35� � 그� 날� 저물� 때에� -� 이렇게� 자세한� 시간적� 묘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없다.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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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앞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시간과� 공백을� 두지� 않고� 있다.� � 즉� � '그날� 저녁때'라고� 명시

하여�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많은� 양의� 활동을� 하신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는� '배에� 오르시매'라는�표현을�사용하여�이� 비유를� 베푸신�날과� 전혀� 다른� 사건으로�다룬다(마� 8:23).�

누가복음� 역시� � '하루는'이라는(눅� 8:22)� 단어를� 사용하여� 막연한� 어떤� 날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

는� 1절에서� � 묘사된� 바닷가� 풍경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매사를� � 예민

하고�세밀하게�취급하고자�하는�마가의� 특징적인� 문장� 기법에�의한� 결과로�볼� � 수� � 있다.� 어쨌든� 예수

께서는� 계속� 갈릴리� 바다� 곁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것은� 36절의'배에�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에

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여기서� '그� 날'은� � 분명바닷가에서� 많은� 비유들을� 가르치신� 날이다.� � �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이� 제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바쁜� 일과

로� 인해� 피곤하셨기� 때문에� 모인� 무리들을� 피하여� 잠시나마� 휴식을취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셨을� 것이

다.� 한편� '저편'은� 배를� 타고� 가야할� 목적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의미

한다.� 5:1의� � 사건과� � 연결시킨다면이곳은� '거라사인의�지방'일� 것이다.

=====4: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일행이� 제자들과� 예수뿐임을� � 암시하고�

있다.� � �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 1절에서� 시작했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직후� � 곧바로� 일어

난� 일임을� 보여주고�있다.� 한편� '배에� 계신� 그대로'란� '떠난�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채로'(Bengel),� '해

변에� 내려가지� 않고'(W.� W.� Wessel)라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올라� 앉으셨던�

바로� 그� 배를� 타고� 지체없이� 건너편으로� 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어부� 출신�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행이� � 뒤따랐음이분명하다.� 이것은� 생동감과� 현장감� 넘치는� 마가의� 문장� 표현법에� 의해� 눈에�

선명히� 다가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 묘사가� 없다.� � �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이는� 마가만의�특종�기사이다.� 여기서� '다른� 배'란� � 예수와�제자들이�탄배�이외에�다른� 사람들이�탄�배

를� 말하는� 데� 이� 배가� 어디로� 갔는지,또� 왜� 함께�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체� 상황

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있을� 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날� 저

물� � 때에(35절)� 같이� 출발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일행이� 만났던� 풍랑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10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 제자들외에�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대한� 관심은� 낮이나� 밤(35절),� 그리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를�가리지�않고� 끊임없이�지속되었다.

=====4:37� � 큰� 광풍이� 일어나며(*,�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마네무)� -� 회오리처럼� 밀어닥치는� 바

람을� 최대한� 확대� 표현한� 말로서� 현장감과� 긴박감을� 더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다.� 갈릴리� 바다는� � 대

체로고요하고� 음산한� 기후를� 이루고� 있는데,�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난다.� � 즉� � 지중해수면보다� 약�

2oom아래� 위치하고�있기�때문에�헤르몬� 산에서�요단� 계곡� 쪽으로� � 이상기류가�흐를�때� 그� 기류가�깊

은� 웅덩이와�같은�갈릴리�바다로�급하게�내려와� 회오리같은바람을�일으키며�이� 때� 물이� 요동하여�무서

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 마가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걸맞게�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긴박하고� � 급격한� 상황� 변화를� 묘사해� 주고� 있다.� � � �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 여기

서� '부딪혀'(*� � � � � � � � � � � � � � � � � � ,� 에페발렌)는미완료� 시제로� '물결'(*� � � � � � � � � � � � ,� 퀴마타,� '큰� 파도

')이� 배를� 계속해서�때려�정신없는�상태가�진행되고�있음을�생생하게�보여준다.� 이같은�위험� 상황은�극

에� 달하여� 물이� '배에� 가득하게'되는� 절명의� 순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물결이� �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4),�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 되어� � 위태한� � 지라"(눅8:23)고� 기술하여�

한결같이�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침몰�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 한편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 있다.즉� 첫째는� 집단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약A.D.� 70)�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이러한� � 비유적해석은�적절하다고�본다.� 둘째는�개인의�삶과�신앙의�위기로�해석할�수�있다.

=====4:38�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섬세한� 표

현으로� 37절에서� 묘사된� 급격한� 상황� 변동과�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 예수께서� '고물'(*�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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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프륌나,�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신다는� 묘사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상황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한편� � 혹자(Lange)에� 따르면� '당시� 배들안에는� 신분이� 높은� 손

님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여� 고물에� 작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양탄자나� 베개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고했다.� 어쨌든� 이� '베개'(*� � � � � � � � � � � � � � � � � � � � � � � � � � ,� � 프로스케파라이온)라는� � 단

어앞에�정관사(* � ,� 토)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그� 배에는� 단� 한개의� 베개만이� � 있었음이� 분명하며� 예

수께서는� 이� 베개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 예수께서는풍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온

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잠이�든� � 이유는�물론� 밤에� 수면을� 하는� 일상의� 습관� 때문

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낮� 동안� 내내� � 무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깊이� 잠드셨을�것이다.� 이러한�사실은�예수께서도�역시�우리와�같은� 성정(性情)을� 지니신�참인간이심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잠드신� 본� 장면은� 침몰� 직전에� 있는� 배� 안팎의� 혼란

상과� 대비하여�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 이같은안정성은� 우주� 만물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근본으로� 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8:39).� 한편� 앞절(37절)에서� 침몰하는�배를� � 교회나�개인의�삶과� 신앙의�위기로�상징한다면�예수의�평

온한� 모습은� 교회와� 개인의� � 위기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자로서의� 모습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은� 광경을� 소개하면서� 교회와� 개인의� 이같은� 일시적� 혼란은� 예수에게로� �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요� 14:1).� � � 제자들이� 깨우며� -� 여기서� '깨

우며'에� 해당하는�원어� '에게이루신'(* )은� 현재� 시제를� 취하여�매우� 다급한� 모습을�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 � 있다.마태의� 현장성(現場性)� 짙은� 기술� 특징이� 돋보인다.� � �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원망섞인� � 어투로� 예수를� 불러� 깨운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

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치�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유의�주재이신�하나님의�아들을�향해서� 원망섞인�볼멘�소리를�한다는�것은� 참으로�무례한�일이� 아닐�

수� � 없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주여'

라고� 부름).� 이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

과�제자의�관계로�묘사함으로써�그들이 무례하게� � 예수를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보겠다.� 실로� 우리가� 예수를� 향하여� 어떤� 호칭으로,� 어떤� 외침을� 부르짖는가에� 따라� 우리� 신앙

의�수준이�간접� 평가될�수� � 있을� 것이다.

=====4:39� � 바람을� 꾸짖으시며...이르시되� -� 여기서는� 37,� 38절에서� 묘사되었던� 대혼란과� 대조되는�

아주� 평온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진� � 것이다.그� 이유는� 예수께서�

바람을�꾸짖고�바다를�타일렀기�때문이다.� 한편� 여기서�특이한�사실은 ' 꾸 짖 으 시 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페티메센)와� � � � '그치고'(* � � ,� 에코파센)등이� 부정� 과거시제를� 이

루고� 있는데,� 이는� 즉각적이고단� 일회적인� � 사실을� 암시하고�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권위에� 찬� 음성

으로�한� 번� 꾸짖으셨고�이에� � 견주어�더� 이상의�반복이�필요� 없을�정도로�풍랑이�잔잔하여진�상태를생

생하게� �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 잠잠하라� 고요하라� -� 문자적으로� '침묵하라'(조용하라),� '말하지� 말라

'(재갈을� � 물어라)는� 뜻이다.� 특별히� '잠잠하라'(*� � � � � � � � � � ,� 시오파)는� 바람을� 향한�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그치라'는� 의미로�해석할�수� 있으며,� '고요하라'(* � � � � � � � ,� 페피모소)

는�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이상의� � 활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 상태로� 조용히� 있으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 자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

에� 대한� 절대적인� �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 �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문자적으로�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는� 뜻으로� 마치� � 언제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

실로 피조물에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것이다.

=====4:40� 어찌하여...무서워� 하느냐...어찌� 믿음이� 없느냐� -�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면�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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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언행(38절)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 하기� 전에� 나온다(마� 8:26).� 즉� 먼저� 제자

들을� 꾸짖고� 바람을� 꾸짖는다.� 아마도� � 마태는'풍랑'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일에� 관심을� 기울

였던� 듯하다.� � 그러나� � 마가는제자들의� '믿음'이� 결여된� 것에� 대한� 꾸짖음에�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에� 이같은� �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편�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본문이� 권위� 있는� � 사본들(시내,베

자,� 바티칸)에는� '아직까지'(*� � � � � � � ,� 우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이에� � 근거해공동번역에서는� '아

직도...'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 번역이라� � 할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로� 이�

꾸짖음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풍랑이� � 일어났을� 때의� 지나간� 일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즉� 위

기에� 처했을� 때� 예수에� 대하여� � 원망어린� 말투로�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한� 책망일�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 바다를잔잔하게한� 기적을� 보여준� 후� '아직도� 두려운가?'하고� 반문하는� 어투와� '아

직도� � 믿음이� 없는가?'하고� 반문하는� 형태의�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믿음

을� 굳게� 가지라는� 의미로� 예수의� 꾸지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말

한다.� 예수께는�제자들의�몰이해와�믿음의� � 결여에� � � 대해� � � 여러� � � 번 책망하셨는데, 여기� � � 기

록된 것이� � � 최초의 사건이다(7:18;8:17,18,21,33;� 9:19).

=====4:41� �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 문자적으로� '크나큰� 두려움으로� � 두려워한다'는� � 뜻으로히브

리인들의� 강조적�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대하

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 놀라움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강조하

기� 위한� 것이다.� 실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 예수의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키는� 말이다.� 즉� 하

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 제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 반문하는� 형식의� 문구이다.� 즉�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 �

질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 읽고� � 듣는� � 사람들에게� � 암시적� � 해답을� � 요구하고� � 있다(시

89:9;107:25-30).� 그� 대답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렇게� 하신다'일� � 것이다.따라서� 이� 물음

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논한� 것으로� 예수께� 대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실로� 마가는�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한편� 박해와� 순교의� 현장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과

연�어떤�영향을� � 미쳤는지에�대해서�가히� 상상할�만하다.� 이� 사건은�시련과�박해의�풍랑� � 속에서도 하

나님의아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 평안을� � 갖게� � 해주었을� � 것이다(사� � 63:9;벧전5:7).� � � � �

마가복음�제� 5장

=====5:1바다�건너편� .---� 이� 말은� 4:35에서� 예수께서�언급한� “저편으로�건너가자”를� 받고� 있는�말이

다.� 여기서� “건너편”이란� 호수� 동쪽편을� 가리킨다고�본다.� 예수와�제자들은�항해� 도중� 한� 차례� 큰� 풍랑

을� 통해�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뒤� 예정했던�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거라사인� 지방에.� ----� 여

기서� “거라사”는� 지명에� 대한� 논란이� 많다.� 실제로� 거라<거라사� 지역>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방은�

갈릴리� 호수에서� 약� 30마일�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 땅이기� 때문에� 과연� 예수께서� 그곳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의� 성읍이� 아닌� 갈릴리� 호수� 가까이에� 있는� 한� 작

은� 지방(地方)으로� 이해할� 수� 있다(Donald� W.� Burdick).� 더욱이� 이곳은� 호수� 근처의� “가다라”� 지방을�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곳을� “가다라”지방이ㅣ라고�

펴기한다(마� 8ㅣ28).� 한편� 이� 지역의� 지명에� 대해서는� 세� 종류의� 이름들이� 발견된다.� 즉� 마가의� 기록

대로� “거라사”(게라세논),� 그리고� 마태의� 기록대로� “가다라”(가다레논),� 또� 오리겐(Origen)이� 주장한대

로� “걸게사”(게르게세논)가� 있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말하기를� “이처럼� 지명상의� 차이점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거라사(갈릴리� 동남쪽으로� 48km� 지점)와� 가다라(갈릴리� 동남쪽으로� 9.6km� 지점)가�

갈릴리�호수에서�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이며�깎아지른� 산들이�갈릴리�호수로�이어져�있다는�기록� 때문

이다”고� 했다.� 그러나� 마가는� 이곳을� 분명히� “가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못박고� 있으며,� 이것은� 그� 도시

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미치는�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마� 8:28의� “가다라”지방이라는� 말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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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이해할�수� 있음).� 그리고�또� 다른� 한� 가능성은� “거라사”라는�지명이�갈릴리�동쪽� 해변에�위치하고�

있는� 마을,� 즉� “케르사”(Kersa)와� 동일� 지역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40km� 높이� 정도의� 절벽과� 옛� 무덤들이� 있다고� 한다(W.� W.� Wessel).� 어쨌든� 이� 지방은�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20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분� 아니라� 많은� 이방

인들이�함께�살았던�곳이었음이�분명하다.

=====5: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 무덤� 사에에서�나와.� ---� 배가� 도착하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

리자�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가� 도착한� 장소가� 무덤� 가까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무덤� 사이에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서� 막� 만나는� 장면처럼� 느껴진

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가� 닿

은� 곳이� 무덤� 근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편� 4:35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날이� 저물

었을� 때였으므로� 호수를� 횡단(橫斷)한� 후�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두음이� 짙게� 깔려� 있던� 때였음이� 분명하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여기서�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

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

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

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

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눅�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

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한�사람은�여기�소개된�자의�휘하에�있었던�것으로�보인다(Lenski).

=====5:3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 3-5절은� 귀신들린� 자의� 현상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팔

레스틴에서는� 죽은� 자의� 무덤으로� 자연� 동굴이나� 석회암을� 깎아� 만든� 무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마음

에� 거리낌만� 없다면� 이곳을� 거처로� 삼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더구나� 공동� 무덤은� 귀신들이� 좋아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볼� 때�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는� 안성� 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때� 귀신들린�

자는� 아마도� 동네에서� 쫓겨나� 절대적인� 고독과� 죽음과� 같은� 극악한� 환경에� 처하면서� 내.외적인� 괴로움

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같다.� 특히� “(거처)하는데”(에이켄)와� 뒤에� 나오는�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에뒤나토)라는� 말이� 모두�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그의� 최악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아무나.......� 맬� 수� 없게� 되었으니.� -----� 사람들은� 그� 광인을�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묶어두

기� 위해� 쇠사슬까지� 동원하였다.� 즉�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 광인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무지� 거친� 그를� 부드럽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그의� 파괴적이고�무진장한�힘을�제어하지�못했다.� 한편� 여기� 사용된� “쇠사슬”은� 일종의�수갑� 내

지는� 쇠고랑과� 같은� 것으로� 보통� 사람이� 풀� 수� 없는� 매우� 단단한� 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광인은�

이러한�결박을� 떨쳐버릴�정도로� 괴력을�지니고�있었기� 때문에� “아무나”(우데이스)� 그를� 제어할�수� 없었

다.� 이러한� 사실을� 묘사함� 헬라어� 본문에는� 세� 개의� 부정어(2개의� ou와� 1개의� a가� 소개됨)가� 들어� 있

어� 그� 어려운�상황을�더욱� 적나라하게�나타내�보이고�있다.

=====5:4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 “여러� 번� ....매였어도”(폴라키스....데데스다이)는� 완

료� 수동태� 부정사� 구조로� 되어� 있어� 그가� 과거에� 완벽한� 상태로� 붂여져� 있었던� 것이(Robertson)� 사실

이었다는� 것과� 동시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암시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고랑”(페다이스)은� 발을� 의

미하는� “폐자”에서� 유래한� 말로서� 발을� 옭암배는� 형구(形具)를� 의미한다.� 실로� 그� 광인은� 이같이� 발에�붂인�사슬과�손에� 묶인� 사슬을�모두� 끊어버릴�정도로�강했기�째문에�그� 어느� 누구도�감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그의� 처지에�대해� 혹자(Jdhnson)는� “조울병� 환자의�조증(躁症)의� 상태를�생생하게�표현해� 준�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끊고....깨뜨렸음이러라.� ----� 여기서� “끊고”(디에스파스다이)란� 문자적

으로� “당기다”는� 뜻의� “스파오”와� “둘”이란� 뜻의� “디아”의� 합성어로서� 잡아뜯어� 두조각� 내버린� 상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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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깨뜨렸음이러라”(쉰테트리프다이)는� 말은� “비벼서� 부수어버리다”는� 뜻이다.� 결

국� 이� 두� 표현은� 그� 광인의� 행동이� 얼마나� 거칠고� 무지막지했는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아무도� ....� 제

어할�힘이� 없는지라.� ----� 3절에� 이어� 거듭� 그의� 괴력에� 대해� 강조하고�있다.� 마치� 그는� 야생의� 포악한�

짐승처럼� 흉포하게� 굴었끼� 때문에� 인간적인� 힘으로는� 그를� 꺾을� 만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실로� 그는�

예수가�오시기�전까지�가장�무서운�괴력을�발휘하고�있었던�것이다.

=====5:5밤낮� 무덤....� 산에서나.� ----� 광인(狂人)의� 발작은� “시간”(밤낮)과� 장소(무덤,� 산)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여기서� “밤낮”이라� 한� 것은� 단지� ㅇ시간으로� 특정할� 수� 없는� 길고� 긴�

하루들의� 연속을� 암시하며,� “무덤”과� “산”은� 그의� 비정상적인�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는� 정신� 분열증적� 증세로서� 뜻�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계속� 고함쳐댔으며(미완료� 능동태� 분사),�

또� “제몸을상하고� 있었다”(카타코르톤� 헤아우톤� 리도이스)� 여기서� “상하다”는� 말은� 완료적� 의미로� 사용

되어�마치�부숴지게라도�하듯�자기를�짓이겨�깊은�상처를�입혔음을�보여�준다.

=====5:6멀리서�예수를� 보고� 달려와�절하며.� � ----� 광인은�예수를�최초� 목격했을�때� 거의� 발작적으로�

적의를� 품고� 예수께로� 질주해� 왔을� 것이다(눅� 8:27).� 그러나� 그가� 예수께� 당도했을� 때� 직감적으로� 그

분의� 초월적� 권능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절하며”

란� 엄밀히� 따져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그� 귀신은� 자기� 앞에� 서신� 이

가� 자기보다� 더� 탁월한� 분이심을� 알아보고� 경읠글� 표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앙적� 경배가� 아니라� 단

지� 지적인� 굴종에� 불과하다(약� 2:19).� 이로써� 예수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4:35-41)�

당신의�권위로�영계(靈界)도� 능히� 지배하시는�초월자이심을�드러내�보이셨다.

=====5:7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 예수께� 접근?는� 귀신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1:23).� 지극

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귀신은� 예수의� 신성을� 믿는� 신앙� 고백으로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를� 자기와� 떼어� 놓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의� 저의(底意)가�불순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로� 확신한� 것은� 그의� 영적� 감지력이� 상당

히� 탁월했음을� 보여� 준다(1:24� 주석� 참조).� 한편� 겨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극존칭을� 사용

하는� 것은� 하나같이� 절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이다(눅� 1:32,� 35,� 76� ;� 행� 7:48� ;� 16:17�

;� 히� 7:1).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티� 에모이� 카이소이).� -----� 히브리인들이� 대인� 관계에서�

흔히�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으로서� “나를� 버려두고� 네� 일에나� 신경쓰라”는� 뜻이다(1:24).� 이에� 대해� 공

동번역에서는�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라고�번역되어�있다.� 이같은�표현은� 귀신이�예수에게� 간청하는�부

르짖음이다.� 그� 간청은� 귀신이� 예수� 앞에� 굴복하는� 모습이다.� 귀신은� 이미� 예수께서� 자기를� 위협하고�

압도하는� 무서운� 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귀신

의� 간청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 여기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할� 때� 쓰던� 표현으로� “하나님을�의지하고�바라오니”라는�뜻이다.� 그런제�이것이�귀신을�내어쫓을�때� 사

용하는� 말이라는� 점을� 들어� 귀신이� 예수를� 조롱하는�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귀신의� 이� 말

은� 조롱을�위한� 조롱이�아니라�예수의�등장으로� 파멸의�위리글�인식한�자신이�절망적�패배감으로�하는�

발악적� 부르짖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귀신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사람을�

괴롭히고� 파괴하며�무서운�힘으로�다른� 사람까지�위협하던�존재가�이제는� 예수� 앞에� 파멸적�위기를� 맞

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가�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은� 귀신이� 자기� 생활의� 안전을� 극

도로�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편행� 구절인� 마� 8:29에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

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로,� 눅� 8:31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지금� 귀신들이� 받을� 괴로움은� 종말적� 심판날에� 있을� 징계를� 의미하며,� 바로� 그� 순

간이�이를� 때까지�그�귀신들은�무저갱�행(行)에� 처해지지�않기를�소원하고�있는�것이다.

=====5:8� 예수께서� 이미....� 이르시기를� .----� 본절은� 7절의� 상황에� 대한� 마가의� 보충� 설명이다.� 즉�

귀신이� 예수� 앞에� 절망적� 부르짖음으로� 간청하는� 이유가� 예수께서� 이미�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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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라고�하였기�때문이라는�설명이다.� 이것으로�미루어�보아� 6절과� 7절� 사이에�귀신돠�예수의�만남에�

대한� 상황� 묘사가� 행략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이미....이르시기를”(에레겐)은�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예수께서� 이미�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의� 명령은� 즉각적으로� 시

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지연은� 그� 귀신의� 항거라고� 볼� 수도� 있으나(마� 8:29-31)�

오히려� “당신의� 때”를� 정확히� 맞추어� 행하시고자� 하는� 예수의� 주권적인� 섭리로� 인한� 지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더러운� 귀신아.....나오라.� ----� 예수께서� 귀신� 축출� 선언은� 곧� 인간� 해방� 선언이다.� 사실� 귀

신은� 지금껏� 그가� 차지하고� 있던� 그�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떠나� 나오라�명령하신�것은�그� 사람의�본래적�품성과�인격으로의�회복을�원하시는� 당

신의� 지극한� 사랑과,� 그� 모든� 회복을� 홀로� 주관.� 명령하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함께� 보여� 준� 것

이라�할� 수� 있다(욥� 24:22).� 실로� 예수의�주권이�인정되�그분의�영광이�드러나는�그�현장에는�항상�하

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으나� 사단의� 권세로� 그� 형상을� 손상입은� 영혼들의� 건강하고도� 완전한� 회

복이�뒤따르게�된다.

=====5:9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 말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러한� 귀신과

의� 대화는� 고대�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대� 전쟁사를� 통해� 볼� 수� 있

듯이� 적운의� 장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준비� 요건� 중에� 하나로� 간주되었다.�

본절도� 귀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귀신의� 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주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

다.� -----� 귀신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앞에서는� “나”라는� 단수�

인칭을�사용한�데� 비해� 뒤에서는� “우리”라는� 복수�인칭으로�말하여�어법이�모순된�것처럼�보인다.� 그러

나� 이� 차이는� 귀신� 중� 우두머리가� 대표로� 예수와� 대화했디� 때문에� 생겨났을� 뿐이다.� 귀신의� 이름은�

“군대”이다.� “군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레기온”인데,� 이것은� 로마� 군대의� 군사� 용어로서� 6,000명으로�

구성된� 1개� 군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사� 용어로서� “레기온”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

유를� “귀신의�수가� 많기�때문”이라고�맑히고�있기�때문이다.� 따라서�한� 사람에게�들어간�귀신의�수효가�

많이� 있는� 집단적(集團的)� 의미로서� 표현하기� 위해� “레기온”이라는� 집단적�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그� 광인에게� 침입한� 귀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고� 파괴적이었을까�

하는�사실을� 족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귀신을�죽은� 뒤에� 안식을�얻지� 못하는� 원한

을� 갖고� 있는� 영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배경� 설명으로� 귀신이� 무덤� 사이에서� 살았

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집단적인�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한� 점으로� 보아� 로마와� 투쟁하며� 저

항하다� 죽어간� 희생자들의� 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지

만� 설득력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사건들은� 결국� 귀신들을� 몰사시키는� 것인데(13절)� 그렇

다면� 로마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저주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은� 매

우� 많은� 숫자를� 가진� 집단으로서� 하나의� 집합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실

로� 사단은� 한� 사람의� 건강한� 영혼을� 지배하기� 위하여� 수많은� 자신의� 부하� 귀신들을� 동원하는� 집념과�

무자비함이�있다(마� 12:45� ;� 눅� 8:2).

=====5:10이� 지방에서�내어�보내지�마시기를�간절히.� ----� 여기서�귀신이�예수께서�다시�간청을�하고�

있다.� 마가는� “간절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간청하는� 귀신의� 자세가� 7절의� 모습과는� 다름을� 보여� 준

다.� 즉� 귀신의� 자세는� 그� 기세가� 모두� 꺾인� 모습이다.� 귀신의� 요구는� 자신을� 이� 지방으로부터� 추방하

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 제안은� 7절의� 반항,� 즉� 간섭하지� 말라는� 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 지방에만은�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부터는� 나오겠다는� 말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예수에게� 항

복하는� 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방”이� 과연� 어디냐는� 점이다.� 이는� 분명� 거라사라는� 특정한� 장

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런제�

누가복음에서는� 귀신이� “무저갱”(無低坑)으로� 보내지� 말라고� 간청한� 것으로� 묘사한다(눅� 8:31).� “이� 지방”에� 무물기를� 원한다는� 뜻이기� 보다� “다른� 지방”� 곧� 자신들이� 최후� 심판� 전에� 감금당하는� 무저갱에

로� 쫓겨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실로� 귀신은� 최후의� 순간이� 이르기� 전까지� 계속하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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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장소를�필요로�하고� 있다.

=====5:11마침....돼지의� 큰� 떼가.----� 이� 절은� 삽화적이다.� 즉� 배경� 그림같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가�

내리신� 호수� 가까이에� 산이� 있고� 무덤도� 있으며� 많은� 돼지를� 방목시키는� 비탈진� 넓은� 곳이�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기� 때문에(1,20절� 주석� 참조)� 돼지를� 많이�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여� 먹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으므로(레� 11:7�

;� 신� 14:8)� 좨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돼지의� 주인은� 이방인일� 것으로� 추정된

다.� 그러나� 그� 주인이� 로마인들(로마� 군대)을� 위해� 돼지를� 사육하는� 불경스런�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

=====5:12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11절에서� 돼지떼에� 대한� 풍경� 묘사를� 한� 이유가� 밝혀진다.�

귀신은� 이� 지방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간청과� 함께� 사람으로부터� 나오겠다는� 생각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들은� 돼지� 무리에게로� 옮겨� 갈� 것을� 예수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허락을�

간청하고� 있은� 것이다.� 그래서� “보내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돼지에게� 들어가고� 안� 들어감도� 예수께�

그� 권한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귀신들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귀신들은� 그� 사

람을�파괴할�수� 없데�되자� 이제� 돼지�때를� 파괴하고자�한다.

=====5:13허락하신대.� ---� 귀신들이� 돼지에게� 자신들이� 들어가게� 해주면� 계속� 활동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예수께� 간청한� 부탁을� 예수께서� 들어� 주셨다.� 이로� 보건대� 돼지의� 몰사� 사건의�

원인자가� 외관상으로는� 그� 군대� 귀신들이었음과�돼지� 몰사� 사건의� 궁극적� 결정자는� 예수�그리스도이셨

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재물을� 고의로� 손상시킨� 예수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

이다.� 물론� 그� 소유주가� 유대인어었다면� 그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파렴치한이었기� 때문에� 그를� 징책

(懲責)할� 목적으로� 이� 같은� 큰� 손해를�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유주가� 이방인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돼지� 떼를� 몰살시킨� 주� 원

인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 군대� 귀신이었음을� 보게� 된다.� 즉� 예수는� 적극적� 요구를� “허락”하신� 것이었

다.� 따라서� 예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이외에� 또�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는� 마�

8:32�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예수이� “허락”이� 지닌� 재산상의� 피해보다� 그� 피해를�

딛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計劃)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러한� 재산상의� 피해를� 통해� 영적,� 정신적,� 사회적� 회복과� 건강을� 허락하셨던� 것이다(15,� 19,� 20절).�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경륜은� 동방의� 의인� 욥에게서도(욥� 1,� 2장)� 발견된다(Dona;d� W.� Burdick).�

한편� 예수께서� 귀신을� 돼지� 떼로� 옮기게� 허락한� 사실에서� 두�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사람의� 존귀성� 문제이다.� 예수는� 사람과� 돼지를� 두고� 사람� 안에서� 귀신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권위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8절� 주석� 참조)� 사람을� 높이셨다.� 반대로� 돼지� 떼에게는�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하락함으로써� 그�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강조하셨다.� 둘째는� 돼지에게� 귀

신들이� 들어가게� 허락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귀신의� 활동� 영역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다.� 사실� 당시에

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었다(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예

수께서� 허락하심으로써� 귀신의� 활동� 장소가� 부정한� 곳으로� 한정됨을� 보여� 주고� 있다.� 귀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부정한� 곳이다(벧후� 2:22).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사람의� 온� 인격을� 지배하던� 귀

신들이� 영혼� 없는� 돼지에게로� 들어가� 그들을� 조정한다는� 사실은�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실

로� 귀신은� 생명� 있는� 것들에�대해� 항상� 부정적인�영향력을�직.� 간접� 행사한다.� 이천� 마리� 죄는� 떼가....�

바다에서�몰사하거늘.-----� 이� 장면은�매우� 드라마틱(dramaric)하다.� 파괴자�사단의�사자인�귀신들은�자

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인� 돼지� 떼를� 죽음에로� 질주하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의� 급받함은�

“비탈길을� 내리달아� 갔다”는� 펴현과� 2,000마리나� 되는� 돼지의� 숫자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 실로� 귀신

으� 2,000마리나� 되는� 돼지에게�각각� 그�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거의� 발작적으로� 행동하게� 했고� 곧

장� 몰사시킴으로써� 그� 사악한� 위력을� 과시했다.� 실로� 예수는� 그� 시점에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귀신의�

최후� 목적이� 인간과� 자연� 파괴라는� 엄숙한� 진리르� 암묵적으로� 보여� 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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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沒死)하거늘”(에프니곤토)이란� 말은� 미완료시상을� 취하고� 있어� 2,000마리의� 돼지� 떼가� 계속해서� 물속으로�빠져들어�죽어가는�장면을�더욱�생생하게�묘사해�주고�있다.

=====5: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 여기서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돼지� 몰사� 사건”에� 대한� 반응

들을� 묘사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경험한� 돼지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

다.� 그들은� 현장에서� “도망”하였다고� 묘사한다.� 이� 말은� 당시에� 벌어진� 사건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고� 상

상을� 초월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주채할� 수� 없는� 놀라움을� 묘사하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도

망”했다는� 말은� 무서워서� 달아났다기� 보다는� 놀라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급히� 달려간� 사실을� 긴박(緊迫)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읍내와� 촌.� ---� 여기서� “읍내”(폴리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가리키며(히� 12:22),� 대체로� 발달된� 도시,� 변화한� 마을� 정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촌”(아그로스)

이란� 원래� “들”,� “밭”(fiekl)등으로� 이해되나� 흔히� 시골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양자를� 합하여�

“도시와� 시골”이라는� 말로� 이해할� 때� “돼지� 몰사� 사건”이� 그� 지방� 전역에� 알려졌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온� 시내”(마� 8:34)로� 언급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삽시간에� 여러� 곳으로� 퍼져갔고� 그� 소

문을�듣고� 많은� 사람들이�현장으로�모여들었음을�알� 수� 있다.

=====5:15예수께� 이르러...보고� 두려워하더라.� ----여기서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바라보는�

현장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가는� “이르러”와� “보고”라는� 말을� 현재형으로� 기술함으로써� 그� 현장성

과�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좨지� 묘사� 사건을� 듣고서는� 지체없이� 이곳에� 달려와서� 뚫어지

게� 그� 상황을� 확인하며� 여러� 관점에서�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장면은� 13� ,� 14절에서�

나타난� 연속적인� 사건의� 급박성과�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5절에서�

험악하게� 묘사되었던�귀신들린�사람이�정신을�되찾고�예수�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은�폭풍우가�걷힌�다음�

쏟아지는� 햇살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옷을� 입고”,� “앉은� 것”이란� 표현은� 그의� 상태가� 건강한� 정상인

으로� 되돌아왔음을� 확증케� 하는� 외적인� 증표이다.� 실로� 그는� 오랫동안� 옷을� 벗어� 던진채(눅� 8:27)� 무

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등의� 극히� 불안정한� 심적� 상태를� 유지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려� 인간성을� 상실했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한� 제정신으로� 회복되었다(고

후� 5:13),� 여기� "정신이� 온전하여“(소프로니조)란� 건전한� 마음과� 올바른� 자각� 및� 바른� 판단� 등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면을� 면밀히� 검토한� 사람들은� 그� 귀신들렸던� 자가� 그� 처절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기

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였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표현은� 사건의� 놀라움에� 대한� 강조적� 묘사인� 동

시에� 이� 사건의� 궁극적인� 주체자인� 예수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온전한� 신앙� 상태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의� 본질적� 특성(공의와� 사랑의� 주)을� 이해한�

자는� 감정적으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데서� 해방되어� 그분의� 사랑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요

일� 4:18).

=====5:16-17이에� 귀신들렸던......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다른� 목격자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현장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은� 예수에

게� 이�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심히� 두려워했기� 때

문이다(15절).� 즉� 그들은� 자기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감히� 지신들로서는� 제어할� 수도� 없는�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좨지� 2.000마리를� 몰사시키셨다면� 다음에� 그

보다� 더� 심각하고� 두려운� 일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능�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무지와� 경

제적� 이기심�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떠나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미신적� 상상력과�

물질적� 욕심� 때문에� 생명의� 주를� 거부(拒否)하고� 말았던� 것이다(4: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원대로�그곳을�떠나시게�된다.� 진정� 그분은�당신을�원치�않는� 곳에� 오래�머물지�않으신다.

=====5: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 예수는� 배를� 타시고� 동쪽� 지경에� 오셨다가(2절)� 이제�

다시� 뱃머리를� 돌려� 자신의� 곳으로� 돌아가시려� 한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지방을� 떠나라고� 하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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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제안을� 즉각(卽刻)� 받아들인�것으로�보인다.함께�있기를�간구하였으나.� ----� 이에� 대해� 새번역�성서에서는� “함께� 가기를”원했다로,� 공동번역� 성서에도� 역시� 예수를� “따라� 다니게”해� 달라고� 간청한� 것

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함께� 있기를”� 간구한� 것은� 그곳에� 머물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

가� 구원받고�새로운�생명을� 얻게� 된� 감사의�표현이라고�할� 수� 있다(Bengel).� 사실� 예수를� 따라� 나서겠

다는�고백은�제자가�되어�주님의�길을� 같이� 가겠다는�뜻이고�자기� 몸을� 다� 바쳐� 주님을�섬기겠다는�표

현이다.� 또� 그� 자신이� 따라� 나서겠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마을에서� 자기를� 용납해� 주지� 않을�

것같기� 때문일� 것이라고,� 또는� 다시� 귀신이� 자기를� 억누를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

장도� 많지만� 그보다는� 진실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장면은� 17절에서�

보여� 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자신을� 구원해� 주고�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허

락한�분에게는�타산적인�생각이�개입될�수� 없다.� 다만� 전적인�헌신이�있을�뿐이다.

=====5:19집으로� 돌아가.......네� 친속에게� 고하라.� ----� 귀신들렸던� 사람의� 간청은� 예수로부터� 거절당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새� 삶을� 시작해야� 되기� 때문이고,� 둘째,� 이와� 같

은� 구원� 사건을�가족들에게�알려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1:44에서� 문둥병자에게�침묵을�명하신�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아마도� 이번의� 사건은� 이방� 지역에서� 일어났기� 째문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람

들에게� 전파한다� 하더라도� 무방했기에� 그렇게� 한� 것같다.� 사실� 유대� 지경에서� 예수� 자신의� 메시야� 주

장은� 아직까지�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히� 큰�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명령은� 곧� 당신의� 귀신� 축출에� 대한� 깊은� 의미를� 알게� 한다.� 첫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한� 인간의�인간성이�철저히�파괴되었다가� 다시�본래의� 모습을�되찾는�구원이�한� 개인의�사건으로�끝나

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귀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람은� 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째문에� 다시� 그러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둘째는� 기적적인� 놀라운� 구원�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정과� 사회,� 즉� 삶의� 현장(現場)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삶의� 현장과� 가정� 안에서� 구원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과제이다.� 즉�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

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속�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속� 사회� 안에서� 주님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한편� 마

가는� 이� 일을� 행하신� 분을� “주님”(퀴리오스)으로� 표현한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눅� 8:39)으로�

표현한다.

=====5:20제가볼리에� 전파하니.� -----� 예수는�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제가볼리� 전역에�

알리게� 된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가에� 인접한� 10개� 도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10

개� 도시란�거라사(Gerasa)� 와� 가다라(Gadara)� 및� 다메섹(Damascu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스구

도볼리쓰(Scythopolis),� 힙보스(Hippos),� 벨라(Pella),� 라바나(Raphana),� 디오스(Dios),� 가다나

(Kathana)� 등이다.이중� 스구도볼리쓰만은� 요단� 서편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들은� 자치적인� 연맹� 도시

였다.� � 1절에서�언급한� “거라사”도� 이� 10개� 연맹�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도시들은� B.� C.� 3세기경�

수리아의� 셀류시드(Seleucid)의� 통치� 기간에� 헬라화� 정책의� 시험� 도시들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유대�

마카비� 시대에� 이르러� 하스몬(Hasmonian)� 왕조� 때� 힐카누스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로마의� 폼페이

(Pompey)� 장군에�의해� 로마� 관할로�편입되었?ㅏ.� 이와� 같이� 광역� 도시에�예수께서�행하신� “미친� 돼지�

몰사� 사건”과�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 사건”이� 퍼져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여기서� 예수의� 선교�

활동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진행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체험(體驗)으로� 그리고� 거듭난� 한� 인간이� 자기� 사건을� 전한으로써� 10개� 도시의� 넓은� 지역에�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파되는�드라마틱한�장면이다.

=====5:21다시� 저편으로�건너�가시매.� ----� 돼지� 몰사� 사건이�발생했던�위치가�갈릴리�호수�동편이므

로� 건너편이라고� 할� 때� 서쪽� 해안� 곧� 가버나움� 지경으로� 추측된다(마� 9:1).� 이곳은� 바로� 갈릴리�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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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전진� 기지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 표현은� 4:1의� 표현과� 비슷하다.� 그리고�

“거라사”지방과는� 대조적이다.� 즉� 거라사� 지방에서는�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의� 인기를� 보증해� 준다.� 바닷가에� 계시더니.� ------� 이� 표현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과� 22절에�나오는�다음�사건이�발생한�시각에�간격이�있음을�암시하고�있다.� 예수께서는�바닷가가�

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용이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육의� 장(場)으로�활용하셨다.

=====5:22회당장�중�하나.� -----� 이는� “한� 회당장”으로�번역될�수�있다.� 따라서�그는� 가버나움에�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

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

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

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

기도�하였다.� 따라서�이들은�당시� 대중들로부터�상당한�존경의�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

데는� 의심할� 바� 없다.� 야이로.� ---� 이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

일”의� 헬라식�발음으로�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예수를�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발� 아래� 엎

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일반적으로�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사람으로�평가받고�있던� 터였기�때문에�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

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

의� 존경받는�회당장이� 기적을�요청한�사실은�예수의�이적� 행위에�대한� 공적인�신뢰감을�증명하는�것이

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대한� 믿음이�뒷받침되지�않고는�불가능했을�것이다.

=====5:23많이� 간구하여.� ---�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내� 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이란� 조그

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끙ㅎ는� 심정

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

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

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

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더욱�고조시키고�있다.� 즉� 마가와�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마태복음은�이미�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

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손을� 얹으사.� ---�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

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회당장의�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예수의�능력과�권위를�온전히�인정하는�것이ㅣ며�그의�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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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

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 (소조)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

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

을�회복하여� (계속)� 살게�하소서”가� 된다.

=====5:24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에워싸.� ----�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출발하

는� 장면� 묘사이다.� 여기서� “가실새”(아펠덴)란� 부정� 과거� 시제를� 취하여� 예수께서� 곧바로� 출발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는� 즉각적� 응답으로써� 그의� 간청에� 호응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급히� 이동하자� 바

닷가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이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의� 행동을�

표현한�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는� 표현은� 각각� 미완료시제를� 사용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계

속해서� 예수를� 좇으며,� 더욱이� 예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딪히는� 혼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장면은� 그� 당시� 예수를� 중심한� 분위기가� 매우� 열기가� 있음을� 보여� 주며,� 따라서� 예수의�

명성과�인기가�대단한�것이었음을�알�수�있다.

=====5:25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여기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야이로� 회단장의� 이야기에서� 갑

자기� 12년동안� 혈루증(血漏症)을� 앓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서� 혈루증(subject� to� bleeeding,� NIV)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이� 아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남자에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

은� 만성� 하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궁(uterus)�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틱적으로�피가� 흐르는�중세일�것이로�간주했다(레� 15:25).� 따라서�종교� 생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이� 여인의� 병이� 12년(“12”는�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계회과� 성취를�

나타내는� 수로� 상징됨)이나된�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병이�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 이� 여인이� 병으로� 받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참(悽慘)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은� 25절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역사가� 유세비우스

(Eusebius)는� 그녀가� 파네아스� 출신의� 이방인� 베로니카(Veronica)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

는�발견되지�않았다.

=====5:26많은� 의원에게�많은�괴로움을�받았고.� ----� 혈루증을�앓는� 이� 여인은�많은� 의사를�찾아다니

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적� 노력을� 더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의원들은� 그녀에게� 더� 심한�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해� 의사� 출신인�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눅� 8:43)는� 말로써� 동료� 의사들의� 한계� 상황을� 깊이� 배려하며�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Robertson).� 한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

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재산

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는� 묘사

는�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①� 병의� 불치성과� ②� 의술의� 무력함을� 나타내�

보이고� ③�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 갔다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와� ④�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절박(切迫)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

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

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장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2-5절의�

귀신들린� 사람과� 2,23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서� 번정한� 구원자� 예수를� 찾게�

된� 것이다.

=====5:27소문을�듣고....� 옷에� 손을�대니.� ---� 절망의�벽에�부딪힌�이�여인은�예수의�치병� 기적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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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문을� 상세하게�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

유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23절)� 언급된� 야이로� 회당장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

야이로의� 믿음처럼� 예수께서� 주체가� 되어�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가� 예수에게� 접촉

을�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형태는� 3:10� ;� 6:56에서도� 나타난다.� 즉� 예수를�

만지게�해� 달라거나�옷에라도�손을� 대게� 해� 달라는�간청은�예수에게�치유의�능력이�충만하다는�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치유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을� 강조하는� 점이

다.�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무리� 가운

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를� 만지게� 되는데,� 이� 같으� ㄴ사실은� 그녀의� 담대함(간절함)과� 겸손함을� 대변

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수� 없는(접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께� 접근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고� 자신의� 병을� 가만히�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의�

“뒤로”� 온� 것이다.� 한편� 마태는� 그녀가� 예수의� “겉옷� 가”(the� edge� of� his� cloak,� NIV)를� 만졌다고� 기

록하고� 있다(마� 9:20).� 즉� 그녀는� 예수와� 접촉함으로써� 율법적으로는� 예수를� 부정케� 만든� 결과가� 되었

다(레� 15:19-27).� 그러나�생명의�주께서는�이� 모든� 의식적�부정을�초월(超越)하여� 그녀의�믿음을�받아�들이셨다.

=====5:28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얻으리라� 함일러라.� ----�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그녀의� 이� 같은� 심정에는� 미신적(superstitious)�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이

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함일러라”(엘레겐)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되뇌이고�또� 되뇌였음을�보여�준다.

=====5:29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 여인의� 믿음대로� 병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증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이� 상황을� 공동번역은� “출혈이� 그치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특히� “혈루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병의� 치

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치료의� 즉각성과� 피

료의� 완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의�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해결된� 것이다.� 이러한� 치

료는� 예수와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접촉(교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병이� 나았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근절되자� 곧� 자신의�

치유를� 자각(自覺)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즉각적이고� 근원적인� 치유� 기적이� 발생한� 놀라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27절에서� 묘사된� 여인의� 행동이다.� 그녀는� 환자의� 연약한� 몸과� 여자라는� 핸디캡

(handicap)을� 갖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겨우� 예수의� 뒤쪽에서� 손을� 옷에� 대었다.� 간청을� 한� 적도� 없

고� 믿음을�예수께�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기적이� 발생한�것이다.� 이� 사실은�이�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이미� 숨겨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한다(히�

11:6).� 실로� 예수는� 인간의�심령을�살피는� 분으로서�그� 소원의�깊이를� 조용히�알아보고� 계셨던�것이다

(마� 6:6).

=====5:30능력이......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 치유� 기적이� 예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

을� 댄�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사실� 그� 치료받은� 여인은� 모든� 것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마저� 모

르게� 해결하고자(27절)� 했었다.� 물론�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겸손하

고도� 조용한�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는� 사람들이� 혼잡한� 다운데서도(31절)� 당신

의� 전지성(全知性)으로써�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것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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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것이다.� 여기� “스스로� 아시고”(에피그누스� 엔헤아우토)란� 완전하고도� 초월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그리고�당신의�능력이�나간� 줄� 아신� 것이� 수동적인�의미에서의�지식이�아니라�곧� 그� 여인이�치료된�사

실을� 예수께서� 뒤늦게� 아신�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예수께서� 그� 치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능동적인�

깨달음,� 곧� 당신이� 그� 능력을� 능동적으로� 계획하셨고� 또한� 발휘하셨음을� 보여� 준다.� 누가� 내� 옷에� 손

을� 대었느냐.� ----� 예수께서� 그� 간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

다.� 예수는� 내밀한� 이적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시기� 위해� 이� 같은� 빌문을� 의도적으로� 하셨

을� 것이다(Calvin� Donald� W.� Burdick).� 그와� 더불어� 생각되는� 바는� 33,� 34절의� 내용으로� 보아� 치료

받은� 사람과� 인격적(人格的)인� 관계를� 뱆기� 위함인� 것으로도� 보인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치료만이� 완전� 치유가� 아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지� 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

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졍을� 고침받은� 것이� 미신적� 신

앙� 때문에서가�아니라� 진정한�신앙� 때문이라는�사실을� 그녀가�손으로�당신의�옷자락만� 잡기보다�그� 영

(靈)으로�당신의�거룩한�인격을�잡기를�바라셨던�것이다.

=====5:31제자들이� 여짜오되.....물으셨나이까.�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

는� 것에� 대하여� 불만� 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고,� 또� 사람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의� 반문이다.� 이� 사실은� 혈루증을� 치유

한� 사실이� 예수와� 환자� 자신밖에� 므른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영적� 무지(육체적� 접촉만� 생각하고� 영적�

교감(靈的交感을� 도외시함)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치유받은� 여인은� 즉각� 나타나� 고백하지� 않고� 있음을�알�수�있다.� 따라서�이� 여인은�자신의�행위에�대해� 상당히�큰� 두려움을�갖고�있음을�보게� 된다.

=====5:32-33예수께서......둘러� 보시니.....여자가.....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는� 바로�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신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 보는� 치유받은� 여인은� 더� 이산� 사실을� 숨긴�

채� 있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몹시� 뚜려워하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한다.� 여기서� 두� 가지�

강조점을� 결견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여인을� 찾으시는� 행위이다.� 제자들의� 충명스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유된� 여인을� 찾고� 있는� 장면(“둘러� 보시니”는� 미완요시제)은� 치유받은� 자로부터� 감사

의� 인사를� 받기� 위힘도� 아니고� 치유를� 확이니하기� 위한도� 아니다.� 오직� 치유받은� 사람과의� 인격적� 만

남을�통해� 그녀로�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끔�하기� 위힌� 것이다(30절� 주석� 참조).� 이것은� 예수께서� 고

난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 및� 다함� 없는� 연민을� 갖고� 있음이� 암시된다.�

둘째는� 치유받은� 여인의� 행위이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 하고� 있었다.� 이유는� ①�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

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여들였다는� 것을� 공개하기에

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②� 또�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③�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를� 예수

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을� 가졌을� 것이다.� 즉� 그녀는예수� 몰래�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④�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경외감(敬畏感)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여인이�예수� 앞에� 엎드린� 모급은� 22절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즉�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은� 예수에� 대

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예수의� 강권적인� 요구로(내밀한� 요구였음)� 자신의� 만성적인� 몹쓸� 질병과� 그� 기적

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무리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위� 신앙간증오로서,� 결과

적으로� 예수의� 크나큰� 은혜에� 부응하여� 그분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

가�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다.� 실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주어진�것이다.

=====5:34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예수께서� 치유받은�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린� 구

원� 선언이다.� 여기서� “딸아”(뒤가테르)란� 성숙한� 여자나� 소녀를� 향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친밀히� 부르

는� 호칭으로서(23절)� 예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곳은� 복음서� 가운제� 본문이�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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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떼문에� 완전한� 회복(구원)을� 얻은� 것임을� 주지시키셨다.� 그� “믿음”은�

그녀가�예수에게�치유의�능력이�충만함을� 확신한�것이다(27,� 28절� 주석� 참조).� 그리고�그� 믿음을�행위

로� 옮겼을� 때� 이� 여인의�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이� 완전히� 치유된� 것이다.� 여기서� “구원하였으

니”(세소켄)란� 완료시제를� 취하고� 있어� 그� 구원이� 이미� 그녀에게� 확실히� 주어졌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원은� 현상적으로는�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다

(2:1-12).� 따라서� 이� 치유의�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

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25절� 주석� 참조).�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는�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

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이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한� 다음“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히� 가라”(Go� in�

pease,� NIV)는� 문자적로� “평화를� 향하여� 가라”는� 뜻보다�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로� 보는� 것이� 좋

다.� 즉�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이다.� 이� 평안은� 히브리

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이다(요� 14:27).� 이� “평안”에� 대해� 혹자(Anderson)는� 말하기를� “여기서� 꼭� 내적인� 고뇌로부터의� 해

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의� 완전함을� 의미한

다”고� 했다.� 여하틈� 모든� 인류가� 이와� 같이� 평화로운� 은총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이다.� 이러한� 구원� 선언은� 눅� 7:50� ;� 17:19� ;� 18:42� 등에도� 나타난다.� 이렇듯� 예수의� 병치유의� 기

적은� 내면적인� 구원� 문제와� 연결된다.� 따라서� 치유의� 목적이� 단순한� 병치유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구원과�관계된�것으로�이해되어야�한다.

=====5:35아직� 말씀하실�때에.� ---� 마다의�현장감�넘치는�서술� 기법이�또�한�번�돋보인다.� 여기서�이

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

부터� 전강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

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

음이�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더� 이상� 손� 쓸� 필요가�없다는� 암시

를� 주고� 있다.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

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

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

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 (스퀼로)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

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

나�마음에�부담을�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요청으로�볼� 수� 있다.

=====5:36곁에서� 들으시고.� ---�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심

부름꾼이� 야이로에게� 하는� 말을� “엿들으셨다”(파라쿠사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충성하게� 하시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두

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메� 포부� 모논� 피스튜에).� ------�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

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

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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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5:37베드

로와� 야고보와...요한.� ---� 여기서부터� 예수의� 동행인이� 제한된다.� 즉� 베드로아�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예수와� 동행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곧� 일어나게� 될� 생명의� 이적을� 직접� 확인하고� 후세에� 전할� 증거자

로� 3인의� 가장� 친밀한�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다(신� 19:15).� 이� 외에도� 변화산� 사건� 때에도� 이� 세� 제자

가� 언급되었고(9:2� ;� 마� 17:1� ;� 눅� 9:28),�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세� 제자의� 이름이�

거론된다(14:33� ;� 마� 26:37).� 이� 사실로� 미루어� 예수는� 제자들� 중에� 이� 세� 제자를� 가장� 신뢰한� 것으

로� 보인다.� 한편� 예수께서� 이� 세� 사람� 외에� 다른� 여타의� 사람을� 물리신�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당신의� 사역의� 진지함을� 더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거나(구경거리로� 삼게�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방해�

요인을�제거하기�위해서�였을� 것이다.� 혹자(Robertson)는� 야이로�가정의�주택� 구조가�작았기�때문이라

고� 하는� 재미있는� 이유를� 제시하기도� 하나� 당시� 야이로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주택이�내우� 협소했다는�것은�설득력이�없는�주장이다.

=====5:38훤화함과.....울며.....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

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

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

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

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

은� 주로� 여인드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

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졋다.� 한편� 사ㅚ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세�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

일로�집안에�궁극적인�평안을�제공하지는�못했던�것이다.

=====5:39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리를� 극적으로� 전환시키

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람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Olshausen).� 그러나� 누가

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표현에서�보듯이�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

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

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

(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

이�아닐�수�없다(욥� 19:25-27).

=====5:40저희가� 비웃더라.� ----�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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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

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는� 말은� 강압적으로�몰아내셨다는�뜻으로�위엄에� 찬� 예수의�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ㅇ하고� 희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향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

로�있는�가정은�곧� 생명의�기적을�맛볼� 수� 있는� 특권이�주어질�것이다.

=====5:41아이의� 손을� 잡고.� ----�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

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

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

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

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달리다굼(탈리타� 쿰).� ----� 이� 말은� 예수� 당시� 팔레스틴

에서�통용되던� 아람어�탈리타� 쿰에서�유래한� 말로서� “탈리다”(소녀야란� 뜻)와� “쿰”(일어나라는� 뜻)의� 합

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

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

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

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

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일어나라(토� 코

라시온.....에게이레).------�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

하고도� 권위에�찬� 예수의�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언급했듯이�해가� 뜨는� 아침

에�부모가�아이를�사랑스러운�어조로�깨울� 때�흔히� 쓰던� 말이었다는�점에서�본�장면은�새� 아침의�환희

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마면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5:42소녀가�곧� 일어나서� 걸으니.� ----� 여기서는�치유의� 결과가�즉각적으로�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동작

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

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

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

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때문이었을�것이다.� 그런데�소녀의�나이가� 12살이라는�사실을�누가복음에서는�이� 이야기의�첫� 부

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

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

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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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것이다.� 그� 중� 누가의�기록에�의하면�그� 부모가�가장� 큰� 충격을�맏

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

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넔이� 나간� 상태에ㅔ�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둔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

리고�몇�명�안되는�목겨자만�있는�은밀한�곳에서�조용하게�일어난�점이� 특징적이다.

=====5:43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

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

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이� 같은� 행위는�메시야의�자기�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언제나� 그

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

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마� 9:26).�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 ----�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

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

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구원을�받았고� 혈루증�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육체적�고통과�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

두� 해결되었다(34절� 주석� 참조).� 아야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

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말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

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동안�매우� 굶주려�있었을�것이라는�사실을�아시고�그� 아이에게�자상하게�먹을것까지� 제

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

신의�문제까지도�해결하시는�궁극적인�해결자이셨던�것이다.� � � � � 마가복음�제� 6장

=====6:1-6갈릴리에서의� 설교와� 치병� 기적을� 통한� 예수의� 분주했던� 활동(제� 2차� 갈릴리� 사역,� 마�

8:5-13:58)은� 갈릴리를� 떠나�고향으로� 돌아옵으로써�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이유는� 선교� 사역의� 연장� 선상에서� 또는� 휴식� 시간을� 갖고자� 하는� 의도에서라는� 등의� 여러� 주장들이�

있다.� 어쨌든� 예수의� 활동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다.� 예수가� 고향에� 돌라왔을� 때�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받고� 있는� 장면은� 평행구인� 마� 13:53-5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예수는� 가

버나움� 중심의� 갈릴리� 사역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이방인의� 거주지를� 위시한� 각�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선교하시는�제� 3차� 갈릴리� 전도� 사역의� 계기를� 마련하신다.====6:1거기를� 떠나서.� ----� “거기”라는� 말

은�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이야기를� 옮겨갈� 때� 사용?는� 장소적� 부사로서� 7:24� ;9:30� ;� 10:1에서

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가리키는� “거기”는� 가버나움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5장의� 이야기와� 전혀� 무리없이� 본� 사건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고향으로� 가시니.� ----�

예수의� 고향은� 나사렛이다(1:9,� 24� ;� 요� 1:46).� 이곳은� 가버나움의� 남서쪽에� 있는� 한적한� 지방이다(마�

2:23� 주석� 참조).� 한편� “고향”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트리스”는� 원래� “조상으로부터� 살아온� 곳”,� “자기

의� 원(原)� 출생지”등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나사렛이란� 장소가� 예수의� 출생지(베들레헴)는� 아니라�해도� 이곳� 나사렛에서� 30여년� 간� 자라났으며� 또�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고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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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누가는� 예수가� 자라난� 곳은� 나사렛이라고� 장소명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눅� 4:16).� 여기서�

예수가�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처음인가� 아니면� 두� 번째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예수의�계속되는�박해� 장면이�공생애�기간� 내내� 있었던�관계로�각� 복음서� 기자들이�자신의�편집의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하였기� 때문에� 본� 사건은� 눅� 4:16� 이하� 기사는� 분명�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사역� 중

에� 발생했던� 것이며� 그� 방문� 내용도� 본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예수는� 공생애� 후기

에� 제� 2차� 고향� 방문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맥상으로� 보나� 전체적인� 예수의� 활동상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마태의� 기록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제자들도� 좇으니라.� ----� 예수의� 고

향� 방문이� 단순한� 휴가나� 가족� 상봉만을� 목적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즉� 예수는� 일종의� 랍

비(Rabbi)로서� 당신의� 제자들을� 대동하고� 고향� 방문길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사실을� 다루

지� 않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제자들의�수행�장면을�분명히�기록함으로써�제자들이�예수를�좇으면서� 계

속�제자로서�필요한�훈련을�받고� 있었음을�넌지시�보여주고�있다(Cranfield).

=====6: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예수는�회당에서�설교할�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당

시에는� 회당을� 방문한� 선생에게� 회당장이(5:22)� 성경을� 강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편� 예수는�

이� 회당을� 통한� 선교� 사역에� 매우� 익숙했었다(1:21).� 따라서� 누가는� “규례대로”라는� 말로� 예수의� 가르

침이� 지극히� 상례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가� 읽은� 성경의� 내용까지� 밝히고� 있다.�

그� 성경은� 사� 61:1,� 2이었다.� 그런데� 본문의� 회당� 설교� 이후� 예수의� 회당을� 통한� 선교는� 큰� 어려움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어찌됨이뇨.� ---�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반응이다.� 우선� 청중들은�예수의�가르침에�매우�큰� 충격을�받은� 것� 같다.� 그래서�그들은� “이� 사람의�

받은� 지혜....어찌됨이뇨”하며�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의� 30여� 년� 성

장� 과정을� 줄곧� 지켜보아왔던� 터라� 예수의� 탁월한� 성경� 교수를� 경악스러움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천박한� 시기심과� 질투심의�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권능의� 근원은� 무엇인

가?”� “그것이�과연� 하나님께로서냐� 사단에게로서냐?”하는� 의심에�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이다.� 즉� 예수의� 초월적� 권능에� 대해� 신앙인은� “무릎”으로,� 비신앙인은� “놀람과�

의심”으로�맞아들인다.

=====6: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 청중들의� 입을� 통해� 예수의� 신원이� 밝혀지고�

있다.� 물론� 이� 말의� 저의는� “이�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신분이� 아니냐?”� 또는� “이� 자가� 랍비라� 칭하면서� 이적을� 행하고� 돌아다니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라는�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다.� 이쨌든�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언급이� 없고� 족보에� 대

한� 언급도� 없다.� 여기서� 비로소� 예수의� 신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진다.� 즉� 예수에게�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목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목수의� 아들”로� 언급되고(13“55),�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요셉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4:22).� 즉� 목

수라는� 직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쨌든� 마가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소

시민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아들임을� 밝힌� 것은� 예수� 탄생� 설화,� 즉� 처녀� 탄생과� 간접적으로�

연결지으려는� 마가의� 의도에서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즉� 유대인의� 전통적� 관습에� 의하면� 비록� 아버지가� 생존하지� 않은� 때에라� 하더라도� 그� 자녀를� 그의� 어

머니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이� 용인(容認)되지� 않았다(Taylor).� 따라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에�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호칭하는� 것으로써� 사생아를� 지칭하는� 경멸적� 표현

이라는� 점을� 들어� 예수를� 경멸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Orgen).� dl� 주장은� 당시� 나사렛� 사람

들이�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잔제한다면� 충분

히� 타당한� 이야기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들은� 이와� 같이� 존경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때�

비록� 예수의� 설교와� 능력이� 놀랄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용납하지� 못했으리라는� 추측은�충분히�

가능하다.� 특별히� 그들의� 말투(”아니냐.....아니냐...아니하냐“)로� 볼� 때� 그들은� 고의적이고도� 맹목적으로�

그리고� 천박한� 시기심에� 따라� 예수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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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보와� 요셉과...그누이들.� ----� � 이들은� 예수의� 사촌(Jerome)이나�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다

른� 여인과� 결혼하여� 낳았던� 자녀들(Epiphanius)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예수의� 친� 형제요� 자매들이다.�

사실� 제롬과�에피파니우스의�견해는�모두� 마리아가� 죽기까지�순결(virginity)을� 지켰다는�로마�카톨릭의�

교리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더욱이� 제롬의� 견해는� 심지어� 요셉의� 동정성(童貞性)까지�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위의� 두� 견해는�성경적�근거를�갖지� 못한� 그릇된�가설에�불과하다.� 실로� 여기� 언급된�형제.�

자매들은�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출산� 후,�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자연스런� 성관계로� 인해� 출생한� 예

수의� 친동생들인� 것이다(Helvidiys).여기서� “야고보”는� 예수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여겨지며,� 초대교회

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행� 12:17� ;� 15:13� ;� 21:18� ;� 고전� 15:7�

;� 갈� 1:19� ;� 2:9,� 12)�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약� 1:1)/� 그는� 유대사가�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의하면� 변사(變死)한� 것으로� 나온다.� 한편� “유다”는� 공동� 서신� 가운데�유다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요셉과� 시몬� 및� 기타� 자매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예수

의� 부활,� 승천� 이후� 회심하여� 초대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ㅣ었던� 것으로� 보인다(행� 1:14).�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 먼저� 여기서� “배척하다”는� 뜻은� “넘어지다”는� 의미의� 헬라

어� “스칸달리조마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이� 뿐� 아니라� “배척당하다”,� “....

와� 말다툼하다”,� “...을� 공격하다”� 등� 다양하다.� 어쨌든� 본문을�직역하면� “그에게� 걸려� 넘어지다”는� 뜻이

다.� 즉� 마치� 그들이� 덫에� 걸리듯� ㅇ례수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는� 의미이다.� 실로� 그들은� 예수를� 현상

적,� 육신적,� 신적�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불신앙함으로써)� 결국� 그분을� 통해� 실족하고� 또

한�그분을�배척하게�된� 것이다.

=====6:4선지자가...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 이� 구절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대한� 예수의� 반

응으로서� 당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격언구를� 인용한� 것이다.� 속담형의� 이� 인용구는� 유대,� 헬라� 문

헌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철학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어렵게� 산다”� 또는� “침밀함은�

오히려� 경멸을� 낳는다”는� 등의� 격언구들이� 있다.� 그러나� 유대� 및� 헬라� 문헌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

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가� “”선자자“(영감받은� 선생� 정도로� 이해됨)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

실� 이� ”선지자“라는� 말은� 유대� 및� 이교도들의� 속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전정�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수� 의� 평범한� 모습,� 곧�

자신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본문에

서� 마가는� ”친척“과� ”자기� 집“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가족까지� 예수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

신앙자로� 묘사한다.� 당시� 예수� 추종자들도� 많았지만� 반대자들도� 많았음을� 상기한다면,�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까지�예수를� 이해하지�못하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의�활동에� 대한�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위협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마가는� 이와� 같이� 고조된� 긴장을�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고독성과� 당시� 사람들의� 부

신앙을�극적으로�강조하고�있다.

=====6:5거기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사할� 수� 없어.� -----�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표현은� 예수의� 능력

과� 권위에� 대한� 치명적� 표현이라고� 몰� 수� 잇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한계성(限界性)을� 강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능동적인� 절제를� 이끌어낸� 근본적인� 원인을� 은연중에� 시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에� 대해� 평행구인� 마� 13:58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가� 의지에� 따라�

행치� 않으셨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행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 예수의� 능력� 결여� 때문

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인� 것으로� 암시되고� 있다.� 즉� 예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권

능을� 행할� 수� 없었던� 상황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

론은� 권능이� 일어날� 수� 있는� 큰� 변수가� 청중의�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즉� 당신에게� 치유의� 은총을� 덧입

고자� 하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실로� 사람의� 믿음� 없이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

는� 법이다.� 예수의� 권능과� 사람의� 믿음이� 서로� 만나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마� 8:5-13).� 따라서�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라는표현은� 고향에� 예수를� 신뢰하는� 믿음을� 가

진� 자가� 극소수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마가는� 이와� 같은� 묘사를� 통해� 예수의� 권위를� 궁지로� 몰아넣

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만나는� 신앙인의� 책임있는� 자세를� 강조하려� 한� 것이다.� 진정� 예수의�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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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①� 당신의� 백성에게� 확고한� 사랑의� 증거를� 제공하고� ②� 신앙인의�

최종적�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능의� 발현에� 앞서� 무엇보다� 그� 대상인�

인간의�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권능� 베푸실� 구속론적인� 근거를� 스스로� 거부한� 자들에

게는�그�어떤� 은혜의�시여도�불가능하다고�본다.

=====6:6저희의�믿지� 않음을� 이상히�여기더라� .----� 이� 묘사는� 고향� 사람들의�배척을� 옛수는�전혀� 예

측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또한� 무척�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고향과�

자기� 집이라는� 친근한� 의미와� 기대는� 그들의� 골� 깊은� 불신앙으로� 인해�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이러

한� 실망은� 4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반응과� 연관지어� 본다면� 회당� 안에서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

으로� 인한� 실망보다는� 권능을� 행하지� 못한� 실망감이� 훨씬�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4절에서는�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로�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실망

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이� 마� 8:10에� 나온다.� 즉�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로마� 백부장의� 진실한� 믿

음을�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기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경탄하는� 장면이다.�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의� 거부로� 인해� 오히려�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극적인� 장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역시� 전폭적

인� 신뢰와� 믿음의� 중요성이다.� 또� 한� 가지� 이� 두� 사겅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사실은,� 예수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로� 당황하는� 제한적인� 인간성을� 지닌� 철저한� 인간이시라는� 점이다(Robertson).� 물론� 이같은�

모습이� 예수의� 거룩한� 신성(神性)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실로�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이신� 예수께서는�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빌� 2:6)� 놀라기도� 하시고�울기도� 하신� 완전한� 인간의�모습을� 지

니시었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 다시� 예수는� 전도� 여행을� 떠나고� 있다.� 결

국� 이� 장면은� 고향에서� 예수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고� 고향을� 떠나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특별히�

“두루� 다니시며”란� 미완료� 시상을� 지니고� 있어� 예수의� “가르치시는”사역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

고� 있다.� 이러한� 지속적� 가르치심의� 대상인� “모든� 촌”이� 구체적으로� 어디�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지

만� 갈릴리� 지방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문은�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 기간의(6:66-9:50)� 실질

적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예수는� 제자� 훈련에� 박차를� 가하셨으며,�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관한� 비밀을� 서서히� 공개� 하시게� 된다.===6:7-13이제� 새로운� 형태의� 활동이� 시작된다.� 12제자의� 파

송은� ①� 예수의� 선교� 활동이� 조직화,� 저변화되어감을� 보여� 주며� ②� 그� 활동영역이� 확장되고� 장기화됨

을�보여�준다.� 따라서�본문� 이하에서부터�예수의�선교� 활동은�새로운�국면을�맞게� 됨을�알�수�있다.

=====6:7열� 두� 제자를� 부르사.� ---� 예수는� 제자� 파송� 직전에� 그들에게� 선교에� 관련된� 유의� 사항을�

설교하시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다.� 평행� 구절인� 마� 10:1ff.에서는� 이같은� 표현에� 좀더� 보충적� 설명이�

가해지고� 있다.� 예수는� 이미� 3:14에서� 12제자를� 선택하신�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선택된� 원래�

목적(3:14,� 15)을� 실현키� 위해� 그들을� 파견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둘씩� 둘씩� 보내시며.� -----� 예수께서�

당신이� 훈련한� 사람들을� 똑립적으로� 파송한� 첫� 번째� 경우이다.� 한편� 눅� 10:1에서� 70명을� 불러� 파송할�

때도� 둘씩� 둘씩� 짝지어�파송한� 이유는� 유대인의� 풍습� 때문인� 것으로�보인다(11:1� ;� 14:13� ;� 행� 13:2,�

4� ;� 16:40).� 즉� 이것은� 신� 17:6에� 나타난� 바와� 같이� 증인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세우라는� 관습에�

근겋산� 것으로서� 예수도� 역시� 천국� 복음� 전파� 활동에� 관한�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 이와� 같은�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6싸의� 제자들은� 갈릴리� 전역에� 여섯� 방향으로� 산개(散開)되어� 천국� 확장� 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보내시며”(아포스텔레인)란� 말� 속에는� “보내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대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신� 후� 파

송하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보냄받은� 자로서� 예수의� 권위에� 힘입어� 그분의� 거룩한� 뜻만을�

각� 지역에� 펴야� 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 이� 구절은�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주

는� 직무이다.� 평행� 본문인� 눅� 9:1에서는� 병고치는� 능력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파송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다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준� 것은� 12,� 13절의� 내용을� 미루어� 보

아� 복음� 전파와� 병의� 치유를� 위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실로� 사단의� 권세가� 정복되는� 그곳에� 주의�

복음이� 생명력� 넘치게� 자라나며� 모든� 부정하고� 파괴적인� 것들이� 소멸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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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되는�것이다.

=====6:8-9� 이� 구절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는� 여행� 지침이다.�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

나.....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 평행� 본문인� 마� 10:10,� 눅� 9:3에서는� 지팡이도� 가

지지� 말라고� 명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지팡이는� 보호를� 목적으로� 한�

복자들이� 소지하는� 몽둥이고� 마가복음의� 지팡이는� 보행에� 도움을� 주는� 여행용� 지팡이라고� 보면서,� 보

행에� 도움을� 주는� 것만� 허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구애됨� 없이도� 예수의�

의도는�계속� 이어지는�명령들에서�분명히�확인할�수�있다.� 한편�본문의� “양식”은� 어떤� 종류의�음식이든�

다� 포함되며,� “주머니”는� 양식이나� 생필품을� 넣고� 다니는� 여행� 가방을,� “전대”는� 일종의� 허리띠로서� 동

전� 등을�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돈”(칼로스)은� 로마와� 헬라에서� 통용되던� 작은� 구리� 동전으로

서� 소량의� 잔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은� 일종의� 샌달(sandal)� 같은� 매우� 간편한� 여행용� 신발

을� 가리킨다.� “두� 벌� 옷”은� “여벌의� 옷”이라는� 뜻으로� 이� 같은� 여분의� 옷은� 여행자가� 노숙(露宿)할� 때�밤의� 한� 기운을� 막아주는데� 매우� 요긴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조차� 금하셨다.� 한편� 지팡이와� 신을� 신

는� 것만� 허용된�것이� 출� 12:11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출애굽과� 광야에로의� 여행을�앞두고� 내려졌던�

명령과� 일치시켜� 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출애굽적인� 긴박감과�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ㅣ

존하는� 출애굽� 신앙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U.� Mauser).� 이� 주장은� 앞에서� 두�

사람씩� 짝지어� 보내는� 전통과� 더불어� 가치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명령을�

이해하면�①� 먼저� 자신들이�전파하는�복음에�깊은� 관심을�두고� 자기� 신변에�대한� 염려는�일체� 하지�말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②� 제자들이� 매일�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의� 도우심에� 대해�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③� 복음� 전파나� 병자� 치유를�

위해� 부름� 받은� 전도자는� 청빈(淸貧)해야� 한다는� 규범적�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절대� 의존할� 수� 있도록,� 즉� 자기소유에ㅔ� 의존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명령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에�대한� 전폭적인� 믿음으로부터�출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무엇보다�당신이� 12제자들에게�위임하

려는�사명이�매우�긴박하다는�사실을�주지시키기�이해서일�것이다.

=====6:10뉘� 집에� 들어가거든....거기� 유하라.� ----� 평행� 본문� 마� 10:11에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곳에� 유(留)”하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세를� 질� 만한� 집을� 찾으라는� 말인데,� 그� 조건은� 아마도� 경제적� 여건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해야�했을� 것이다.� � 이렇게�거처할� 집을� 정하면�떠날� 때까지�옮기지� 말고� 한� 집에� 머물

라는� 이유는� 제자들의� 행동이� 주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최초� 거주지에�

만족치�못하고�더� 편한� 안식처를�찾아�여러� 집으로�옮겨� 다니게�되면�주민들�간에�불화를�조성하고�또�

좋지� 않은� 소문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여러�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 주민들에게� 폐를�

많이� 끼치게� 됨으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배려(配慮)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한� 집을� 정했으면� 많은� 불편이� 있다� 해도� 참고� 떠날때까지� 거처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의� 안락을� 버리

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명자의� 태도인� 동시에� 이웃에게� 선한� 이미지(image)를� 제공함으로

써�결국�그리스도께�영광돌려야�하는�그리스도인의�아름다운�태도인�것이다.

=====6:11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듣지도� 아니하거든.� ----� 이� 구절은�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제자들에게� 전도� 활동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암시를� 주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암시는�

심지어� 당신의� 고향에서조차� 배척받은� 바� 있는� 예수� 자신의� 경혐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

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복음� 증거자로서� 배척당하게� 될� 상황에서�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

를� 가르치고� 계신다.�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으라.� ----�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생활�

습관� 중의� 하나이다.� 즉�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밟거나� 여행하고� 돌아올� 때는� 발과� 옷에� 묻은�

이방� 땅의� 먼지를� 모두� 떨어내는� 관례가�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신� 것은�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은� 마치� 이방인� 지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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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멸망의� 자리에� 놓이게� 됨을� 알리고� 또�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에� 대하여� 분명히� 책임

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즉� 어떤� 의식주의(儀式主義)를� 고수하거나� 편당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하는� 경멸적� 행위를� 유대인들에게� 함으로써� 반대자들에게� 복음

을� 거부(拒否)하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잘못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 같은� 행동을�명하신�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진리

를� 선명하게�밝히기�위한� 상징적�행위로서�그들이�급기야�구원의�가능성에서�단절됨을� 선언하는�한� 증

거이다.� 이는� 개인적� 원한�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복음과� 그�

권위를� 거부했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6:12회개하라� 전파하고.� ----제자들의� 선교� 주제가�

스승인� 예수의� 선교� 주제와� 일치하고� 있다.� 즉� 예수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

으라”고� 외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1:15).� 다른� 평행� 본문에는� 이런� 묘사가� 없으나� 마가는� 예수와� 제

자들의� 선교,�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선교� 메시지를� 일치시킴으로써� 천국� 복음� 전파의� 대주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1:4).� 그리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의� 활동까지� “회개”라는� 말로� 묶어� 일관

성을� 유지하고� 있다.� 실로� 천국� 입성의� 전제� 조건은� 과거의� 죄악된� 삶의� 길과� 방식을� 전격적으로� 하나

님께로� 돌이키는� 참된�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 “회개”와� “믿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병

행된다.

=====6:13귀신을� 쫓아내며....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의� 복음� 전파와� 병행되는� 정신적(영

적),� 육체적� 치유� 사역의� 대표적� 행위가� 각각�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치유� 이적은� 복음의� 진실

을� 확증하고�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한� 궁극적� 목적하에� 이뤄졌다.� 한편� 이를� 통

해� 볼� 때�제자들의�활동이�설교내용만�일치하는�것이�아니라�치병� 기적까지�일치되고�있음을�알� 수�있

다.� 이처럼� 예수의� 활동이나� 제자들의� 활동은� 주� 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즉� 하나는� 복음� 선포�

즉� 설교와� 가르침을� 통한� 진리� 선포이다.� 다른� 하나는� 치병� 활동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참으로� 온전한� 인간� 구원은� 사람의� 영과� 육이� 모두� 구원을� 얻는� 전

인적인� 구원임을� 보게� 된다.� 결국� 지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선교� 활동은� 인간의� 영.� 육�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 됨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들의� 치료� 방법은� 예수의� 방법과� 차

이점이� 있다.� 즉� 기름을� 발라� 치유한� 점이다.� 이러한� 치유� 방법은� 복음서� 중� 이곳과� 눅� 10:34�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치유� 방법은� 당시� 유대교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사용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당시�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 같은� 방법의� 치유�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같은� 기름� 바름은� 단지� 그것이� 치료� 효과가� 있다는� 의학적� 측면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약� 5:14,� 15에서� 나타난�바와� 같이� 병자에게�주는�하나님의� 도움�곧� 신유의�은혜와� 그� 능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하여� 로마� 카톨릭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에서� 도유

(Unction)라는� 성례전을� 제정하여�환자에게� 기름� 바름을� 통한� 죄사함과� 병나음을� 소원하게� 했다.� 이것

이� 발전하여� 9세기� 카톨릭� 개혁� 시대에는� 병든� 자가� 아니더라도� 죽음에� 직면한� 자에게� 교회가� 베풀�

수� 있는� 최종� 예식으로� 이� 도유를� 행하게하여� 그로� 하여금� 죽음을� 예비하게� 했다.� 흔히� 이것을� 부유식

(傅油式)� 또는� 종유식(Extreme� Unction)이라� 부른다.

=====6:14-29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하는� 선

교� 활동(6:13� ;� 30-45절)� 사이에� 삽입된� 일종의� 중간� 삽화이다(마� 14:1-12� ;� 눅� 9:7-9),� 따라서� 13

절과� 30절을� 곧바로� 연결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마가는� 예수의� 활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아� 성공적인�

성과를� 올릴� 때에� 이� 삽화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죽음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게하여� 예수의� 본질과� 그�

사역의�혼동을�불식시키고�메시야의�선구자에�불과한�세례� 요한과�메시야� 되신� 예수� 사이에�엄격한� 구

분을�증명해�보이고자�한� 것으로�보인다.

=====6:14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 13절의� 내용과� 무난하게� 연결되는� 듯하다.� 즉� 제자

들의� 활동을� 통해� 예수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문은�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 중간에�발생한� 일로� 볼� 수� 있다.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 헤롯대제(Herod�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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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와� 부인� 말타스(Malthace)� 사이에� 태어난� 헤롯� 안티파스(Herod� � Antipas)를� 가리킨다.� 그는�

헤롯� 대제� 사후� 분봉왕으로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한� 나라의� 1/4� 영주)이� 되었다.� 그는� 왕의� 신

분을� 얻지� 못한� 군주였는데� 로마의� 칼리굴라(Galigula)� 황제� 시절에� 로마로부터� 왕의� 신분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하여� A.� D.� 39년에� 실각(失脚)하였다.� 그럼에도� 여기서� 왕이라는� 칭호를� 쓴� 것으로� 보아�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헤롯을� 왕이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마가가� 역설적인�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한� 것� 같다(Taylor).� 어쨌든� 헤롯은� 아버지보다� 유능하지� 못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는� 아

라비아� 왕인� 아레타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먄� 자신의� 동생� 처인� 헤로디아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

였다.� 그� 때문에� 본처는� 친정으로� 가버리고� 이에� 불만을� 품은� 아라비아는� 전쟁을� 일으켜� 헤롯을� 패전

시켯다.� 한편� 당시� 헤롯이� “들은”것은� 12제자들의� 전도� 사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

자들이� 갈릴리� 호수의� 남서쪽� 해변� 위에� 있는� 디베랴(Tiberias)까지� 먼� 전도� 여행을� 했는데,� 이� 디베랴

는�헤롯이�그의� 수도를�세운� 곳으로�당시의�로마� 황제인�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따서� 디베랴로�

부른�곳이기�때문이다.� 그러나�당시� 헤롯이� “들은”것은�이러한�제자들의�활동�이상으로�예수의�권능� 있

는� 사역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오히려� 앞의� 견해보다� 이� 견해가� 더욱�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14-16절의� 주된� 관심이�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기� 때문이다.세례� 요한이.......� 살았났도

다.----� 헤롯은� 자신의� 비윤리적� 행동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늘�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있던� 중�

예수의� 활동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 예수� 안에서� 되살아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로� 범

죄자는� 심리� 상태가� 늘� 불안하며� 항상� 피해� 의식�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과� 결부

시켜� 생각하거나� 큰�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 이는�

헤롯의� 종교관을� 반영한� 말로서� 헤롯은� 세례� 요한이� 살아� 생전에는� 이적을� 행하지� 못했으나(요�

10:41)� 그가� 부활함으로써� 이제� 이적을� 행하게� 되었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능력”(에

네르구신)이란� “활동적인� 능력”,� “힘찬� 역사”� 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당시�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

가� 헤롯에게� 얼마나� 큰� 이미지(image)로� 다가갔는지를� 예상케� 한다.� 여하튼� 헤롯이� 이� 미신적인� 발상

은� 결국� 예수의� 활동� 자체가� 자신에게�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안겨� 줄� 것이라는� 불길(不吉)한� 예감을�느겼음을�반영�하는� 것이라�본다.

=====6:15어떤이는� ....� 엘리야라� 하고......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아마도� 헤롯의� 신하가�

헤롯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세례� 요한이� 되살아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엘리야나� 아니면� 선지자로�

여긴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로� 보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활동을� 선지자의� 활동이나� 엘

리야가� 와서� 활동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들이�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한� 것은� 유대

인들의� 신앙� 중의� 하나가� 여호와께서� 심판의� 날에� 앞서� 엘리야를� 보낼� 것이라는� 약속(말� 4:5)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바� 있는� “오실� 이”(1:7)가� 엘리야� 이외에� 다른�

특정� 인물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예수의� 활동이� 당시� 유대인들이� 설화를� 통해� 알고�

있는� 엘리야의� 활동과�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되는� “선지자”는� 신� 18:15-19에�

예언된� “그� 선지자”(the� prophet)와� 같은� 어떤� 특정한� 선지자가� 아니라� 조상들의� 시대에� 활동하였던�

많은�예언자들과�같은�반응들을�살펴�볼� 때� 당시�부활� 사상이�보편적으로�자리잡고�있었음을�알� 수�있

다.� 특히�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다른� 사람의� 몸� 속에서� 활동한다는� 헤롯의� 말은� 매우� 흥미있다.� 이것

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윤희설과� 비슷하다.� 이로� 보건대� 당시에는� 영혼� 불멸� 사상에� 대한� 다양한� 형

태의�이야기들이�많았던�것으로�보인다.

=====6:16내가� 목배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 여기서� 헤롯의� 불안한� 마음이� 간접적으로� 강하게� 표

출된다.� 신하들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만� 헤롯은� 틀림없이� 예수의� 활동이� 죽은� 세례� 요한의� 활동이라

고� 본다.� 여기서는� 자신이� 직접� “내가� 목베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적인� 책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복수하러�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

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예수가� 부활한�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단정했

음을�알�수�있다.

Page 85: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6:17-18전에� 헤롯이� ...�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여기ㅣ서부터�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4-16절은� 이�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세례� 요한을� 헤롯

이� 직접� 목을� 베었다는�언급과�세례� 요한의�부활이라는�생각으로�두려워하는�헤롯의�모습은�그�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 의문을� 겨기서� 밝히고� 있다.� 이제� 이야ㅑ기는� 14-16절의� 시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가는� “전에”라는� 시간부사를� 사용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이

유는� 헤롯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헤롯이�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들은� 것이� 비판의�이유이다.� 그� 행위는� 출� 20:14,� 17의� 간음� 금지와� 동생의�아내와� 결혼하는� 근친�상

간(레� 20:21)� 금지를� 범한� 것이다.� 사실� 헤롯� 가문의� 가계는�왕위� 계승을� 둘러싼�살인과� 치정(癡情)이�뒤엉킨� 참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볼로스(Aristobolos)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Herod�

Philip)의� 아내� 였으나�그� 남편을�버리고�남편의�형제이자�자신의�이복� 삼촌인�헤롯� 안티파스와�재혼하

였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지도자의� 범죄로� 보고� 과거의� 예언자들처럼�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즉� 다윗

왕의� 간음에� 대해� 나단이� 비판하였던� 것처럼(삼하� 12:1-15)� 또� 지도자들의� 죄악을� 무섭게� 비판했던�

엘리야처럼(왕상� 18:1-15� ;� 21:17-29� ;� 왕하� 1:1-16� ;� 대하� 21:12-15)� 세례� 요한� 역시� 그렇게�했다.�

특히� 18절의� “말하되”(엘레겐)는� 미완료� 시상으로� 세례� 요한이� 거듭해서� 헤롯의� 불의를� 직고했음을� 보

여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불의에� 대해서는� 권력의� 힘도� 개의치� 않고� 직언(直言)과�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이것은�그의� 소명� 의식에서�발동된�것이라고�본다(1:3).� 이러한�세례� 요한의�행동에�대한� 헤롯의�

첫� 반응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의� 투옥처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유

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요한이� 베레아� 지방에� 속하며,� 사해� 동쪽에� 위치한� 요새� 마케루스

(Machaerus)� 산성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의� 투옥� 이유가� “그� 여자”를� 위

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즉� 헤롯이� 헤로디아를� 위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

도�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24절에서� 헤로디아가� 요한의� 목을� 요구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죽이고자� 마음� 먹었음을�

밝히고�있고� 20절에서는�역시�요한을�죽이는�것에�헤롯이�반대하였음을�시사하고�있다.� 따라서�헤로디

아의� 요구에� 의해�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음이� 분명하다.� 한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의� 투옥�

이유� 가운데� 또다른� 이유는� 그가� 민중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이� 정적(政敵)을�이찌감치� 제거할� 목적으로� 투옥시켰다고� 전한다.� 어찌되었든� 세례� 요한은� 경건하고� 의로운� 메시야의�

선구자이자�그�시대� 정신으로서�끝내�불의한�정치�집단의�희생양이�되고�말았다.

=====6:19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 문자적으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계속(미완료�

시제)� 품고� 있었다.”� 더나아가서� “헤로디아가� 반드시� 그를� 처벌받게� 할� 것이다”� 등의� 뜻으로� 헤로디아

의� 깊디깊은� 적의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깊은� 죄악(살인)을� 도모하고�

있었던�것이다.

=====6:20헤롯이.....두려워하여� 보호하며.......달게� 들음이러라.� -----�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20절에서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 곧�

아무런�범죄를�저지른�일이� 없는� 사람으로�여기고�요한을� “보호하려는”(미완료�시제로�계속적인�헤로디

아의� 간청에� 대해� 헤롯이� 거듭하여� 요한의� 신변을� 보호해왔음을� 암시)� 사람으로� 묘사되어� 두� 사람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헤로디아를� 상대적으로� 매우� 악한� 여자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묘사가� 평행� 구절인� 마� 14:5에서는� 없고� 다만�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했다고만�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

는� 오히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의� 비판을� 긍정하면서(“달게� 들음이라”)� 내적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매우� 심약하고� 우유� 부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가는� 이와� 같이� 헤로디아와� 헤롯의�

극적인�대비를�통해� 헤로디아의�악함을�말하려는�것이� 아니며�또한� 헤롯의�선함을�말하려는�것도�아니

다.� 오히려� 세례� 요한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요한으로부터� 공격받은� 헤롯이� 직접�

요한을�가리켜� “의롭고�거룩한�사람”이라고�고백함으로써�요한의�의로움이�크게�강조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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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잔치� 할새.-----� 이� 구절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헤로디아

임을� 암시한다.� 즉� “기회� 좋은� 날”이란� 헤롯의� 보호� 장벽을� 뛰어넘어� 세례�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날이

라는� 것이� 문맥상� 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좋아할� 사람은� 헤로디아가� 된다.� 헤로디아가� 왜� 좋아했는지는�

24절에� 나오고� 있다.� 그것은� 요한을� 죽이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거절할� 수� 없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었

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좋은� 날”은� 헤롯의� 생일이다.� 그날은� 매우� 큰� 기념� 잔치로서� 대연(大宴)을� 베푼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교적� 관습으로� 치부하여� 이� 생일� 지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

데도�헤롯은�자기� 생일에�이교도들� 보다�더� 어마어마하게�생일�잔치를�펼치고�있으니�이것이� 문제였다

(Lenski).� 한편� 본문의� “잔치”(데이프논)는� 가장� 친근하고�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큰� 만찬(晩餐)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이� 생일에� 초대되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그� 첫째가� “대신

들”이다.� 대신들은� 헬라어로� “메기스타네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위대한”,� “큰”(great,� large),� “중요

한”(important)의� 뜻을�가진� “메가스”에서�유래된�말이다.� 따라서�고위�관리자나�유력자에게�붙이는�호

칭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봉와� 아래에� 있는� 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직속� 고위� 관료로� 부는� 것이� 타당

하다.� 두� 번째로� “천부장”들이다.� 이들은�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교로서� 군사적으로� 고위� 계층

의� 인물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갈릴리의� 귀인들,� 즉� 갈릴리� 지방의� 유지� 및� 상류�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나열한� 사람들의� 성격을� 보아� 헤롯의� 권세가�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지위

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비판(20절)과� 요한의� 능력에� 찬� 활동(14-16절)을�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을� 통

해� 마가는� 비록� 세례� 요한이� 그의�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에게� 대한� 요한의� 심대한� 힘을� 은연중

에�나타내�보이고�있다.

=====6:22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 헤로디아와� 그의� 전남편� 빌립� 사이에서� 태어난� 여아로

서� 이름은� “살로매”라고� 하였다(Josephus).� 그� 당시� 그녀의� 아니는� 14-15세� 또는� 17세� 아니면� 20세�

이하� 정도였을� 것으로�보는� 견해들이�있다.� 그� 이유는�마가가� 사용한� “그� 여아”를� 뜻하는� 헬라어� “코라

시온”이라는� 말이� 이제� 막� 어린� 소녀� 티를� 벗어나� 결혼기에� 이른� 처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살로

매가�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게� 된다.� 아마� 그녀가� 자청해서라기� 보다� 그녀의� 어미� 헤로디아의� 지시로�

연석에� 앉은� 손님들이� 어느� 정도� 취기가� 돌았을� 때에� 무대로� 나아갔을� 것이다(Marrher).� 한편� 본문의�

정황,� 곧� 모두가� 흡족했던� 것으로� 보아� 춤솜씨가� 매우�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봉왕의�딸이면�공주라고�부를�수� 있는데�과연� 그런� 신분으로� 연회장에서�춤을�추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술자리에서� 춤추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용된� 무희들(일종의� 위안부)로서�

대개� 천한� 심분�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더욱이� 당시� 연회석상에서� 추던� 춤은� 노출이� 심한� 옷에�

매우� 외설적이고� 음란한� 몸짓으로� 남성들의� 말초�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춤이었던� 관계로� 감히� 왕족

의ㅣ�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런� 춤을� 춤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헤롯� 궁전의� 도덕이� 땅에� 떨어질� 만큼� 문란(紊亂)하고� 퇴폐적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녀의� 음란한� 몸짓은� 능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헤로디아와� 그의� 딸을� 아주� 부정한� 자로� 강조하고� 있는� 마가

의� 의도대로라면� 헤로디아는� 요한이� 비판했던� 부도덕한� 결혼의� 책임을� 져야� 하는� 간교하고� 음란한� 여

자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런� 여자라면� 자기의� 딸을� 공중의� 눈요기감으로� 능히� 춤추게�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무엇이든지.....내가� 주리라.� -----� 당시� 특권� 계급의�專橫)과� 무소� 불위(無所不爲)한� 그들의� 횡포� 및�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헤이한� 기풍을� 감지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매우�충동적이고�즉흥적이며�자기�과시적인�헤롯의�인간성을�넌지시�보여주고�있다.

=====6:23맹세하되.----� 이는� 구두로� 제시된� 왕의� 인준� 및� 서약으로서� 결코� 변경ㅇ할� 수� 없는� 절대�

약속인� 것이다.� 따라서� 헤롯은� 그�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한편� 율법

에는� 이� 같은� 맹세의� 불변성이� 강조되고� 있다(민� 5:21).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헤

롯은� 딸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고� 있다.� 즉�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땅의� 절반을� 딸에게� 주겠다는� 것이

다.� 물론�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무엇인가를� 후히� 주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

종의� 속담과� 같은� 말이다(왕상� 13:8� ;� 에� 5:3� ;� 7:2).� 사실� 이러한� 약속은� 헤롯의� 신분으로는� 전혀� 불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헤롯은� 자기� 영토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주권을� 지닌� 통치자가� 아니라�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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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명령을� 받는� 하급� 군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솜씨가� 너무� 매혹

적이어서� 허풍스럽고도� 과장된� 반응을� 표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자기� 맹세의� 올무에� 걸려들고�

말았다.

=====6:24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여기서� 헤로디아의� 음모(陰謀)가� 드러난다.� 그런데� 헤로디아와� 그의� 딸이� 공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

두� 가정할� 수� 있다.� 먼저� 공모했을� 가능성은� 딸이� 어머니에게� 찾아와서� 무엇을� 구하면� 좋겠느냐고� 물

었을� 때� 어머니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는� 대답에� 조금도� 놀라는� 기색도� 없이� 돌아가� 덧붘여� 요한

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은� 충분히� 사전모의를� 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

러나� 반대로� 사전� 모의를� 했으면� 왜� 그� 어미에게로� 찾아가� 무었겠는가� 하는� 점이� 의문시� 된다.� 따라서�

딸은� 어머니와의� 사전� 모의� 없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가능성을� 포함할� 수� 있는�

제� 3의� 가정은� 모의는� 하되� 헤로디아의� 결정적인� 문제,� 즉�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은� 헤로디아� 혼자

만의�생각이었을�것으로�볼�수�있다.�

=====6:25저가곧....급히� 들어가.-----� 헤로디아의� 딸은� 헤롯의� 약속� 의지가� 옅어지기� 전에� 그리고� 그�

고조된� 분위기가� 식기� 전에� 잽싸게� 자신들의� 음모를� 수행할� 생각으로� “곧”,� “급히”� 헤롯에게� 달려가� 소

청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세례� 요한의� 최후가� 심히� 비극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짐작케�하는�소름끼치는�요구이다.� 여기� “소반”은� 대형� 접시(charger)를� 가리킨다(마� 14:8).

=====6:26왕이.....자기의� 맹세한� 것.� ---� 헤롯은� 자기가� 한� 맹세에� 대해서� 몹시� 후회하고� 있다.� 여기

서� 특히� “맹세”(디아� 투스� 호르쿠스)란� 복수로� 표기되어� 있어� 그의� 맹세가(23)� 한� 번에� 그친� 것이� 아

니라� 여러� 번� 반복,�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같은� 맹세가� 잔치에� 참속한� 많은� 사람들� 앞에

서� 공개적으로� 한� 것이라서� 자신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진퇴� 양난에� 빠지게� 됐다.� 그

리고� 20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헤롯이� 요한을� 지금껏� 계속해서� 두둔해왔기� 때문에� 헤롯의� 딜레마

(dilemma)는� 더욱�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체면� 유지는� 한� 사람의� 의로운� 자를� 보호해

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보다� 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22,� 23절에� 이미� 묘사된�

바� 있듯이� 헤롯이� 치밀하지� 못하여� 지도자로서� 판단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무능하고� 마음이�

여린� 것으로� 비춰진다.� 물론� 이� 같은� 기질은� 그의� 심성� 자체가� 온유해서라기보다� 그가� 진리와� 정의에�

대해� 용기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결국� 그는� 간교한� 헤로디아의� 올무에� 꼼짝없이�

걸려들게�되었다.

=====6:27시위병(스페쿨라토라).� -----� 라틴어� “스빼꿀라또르”(speculator)에� 해당하는� 말로서� “정탐

꾼”,� “정찰병”,� “감시자”� 혹은� “사형� 집행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시위병� 곧�

궁을� 지키며� 왕의� 신변� 경호를� 위해� 있는� 병사를� 가리킨다.� 한편� 이때� 헤롯은� 마케루스� 궁� 안에� 머물

렀으며�그� 사형� 집행�장소는�그곳에서�그리�멀지� 않은� 곳이었을�것이다.

=====6:28그� 머리를� 소반에�담아다가....주니.� ---� 시위병이� 명령에�따라� 요한의�목을� 베어� 소반에�담

아� 오는� 동안� 헤로디아의� 딸은� 침착하게� 그� 연회� 석상에서� 기다렸던� 것� 같다.� 참수된� 요한의� 머리는�

그� 냉혈적(冷血的)인� 딸에게� 주어졌고� 그� 딸은� 다시� 어미에게� 그것을� 건네� 주었다.� 여기서� 헤로디아의�악마성이� 부각된다.� 살인을� 공모.� 교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러미를� 직접� 받아들고� 있는� 모습은� 참

으로�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어떤� 전승에� 따르면� 이때� 요한의� 머리을� 전해� 받은�

헤로디아는� 그의� 머리� 핀� 끝으로� 진실과� 정의를� 부르짖었던� 세례� 요한의� 혀를� 찔러보고� 또� 그의� 혀를�

뽑아�내기까지�했다고�전한다(마� 14:10,� 11).

=====6:29요한의� 제자들이....장사하니라.� ---�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마무리된다.� 당시� 요

한과� 긴밀히� 소식을� 교환하고� 있었던� 그의� 제자들은(마� 11:2)� 스승의� 죽음을� 전해듣고� 살의(殺意)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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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가라낮지� 않은� 마케루스� 성에� 찾아가� 담대히� 스승의� 목없는� 시신을� 요구했던� 것이다.� 한편� 요한의�

죽음으로� 헤롯은� 자기와� 요한과의� 관계가� 모두� 끝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같은� 헤롯의� 만행을� 깊이�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A.� D.� 30년� 나바티아� 족(Nabataeans)과의� 전투에서�

참패했을� 때� 그것이�헤롯에�대한� 하나님의�엄중한�징벌이었다고�단정할�만큼� 헤롯과�그� 가족의�만행을�

두고두고� 되새기고� 있었다.� 한편� 마태는� 본� 사건을� 기술하면서� 요한의� 제자들이� 장사(葬事)를� 마친� 후�그� 모든� 일을� 예수께� 고했다고� 전한다(마� 14:12).� 이로써� 결국�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 이야

기의� 배경� 역할을� 하게� 된다.� 실로� 세례� 요한이� 생존시� 고백했듯이� 그� 자신은� 쇠하여야� 하겠고� 오실�

그분,� 곧� 예수는�흥하여야�했던�것이다(요� 3:30).

=====6:30-44이� 사건을� 오병� 이어(五餠二漁)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평행� 본문은� 마� 14:13-21과� 눅� 9:10-17에� 있다.� 정소는�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 지대일� 것이다.� 마가의� 기록에서� 특징적인�

것은�서론이�치밀하게�구성되어�있고�사천� 명을� 먹이신�일을(8:1-10)� 그� 후편으로�다루고�있으며�제자

들과의� 대화가� 좀더� 많은� 점이� 돋보인다.� 또� 삽화로� 나온� 헤롯의� 잔치� 곧� 헤롯� 궁전의� 현란하고� 호화

로운�분위기와�예수가� 일개� 서민의� 주식에�불과한�음식으로�배부르게�해야�했던� 일반� 백성들의�궁핍한�

형편을� 극적으로� 잘� 대비시키고� 있다(Lane).� 한편� 본� 이적은� 사복음서(요� 6:1-15)� 모두가� 소개� 되는�

유일한�기사라는�점에서도�그� 의미를�더해주고�있다.

=====6: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고하니.---� 이� 구절은� 13절에� 이어지는� 것이다.� 즉� 제자들이� 파송

받아� 복음� 전파와� 치병� 기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활동� 기간이나� 그� 활동� 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예수

의� 위임을� 받아� 갈릴리� 전역에� 흩어져� 선교� 사명을� 완수하고� 동아온�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

기서�마가는� “모여”라는� 말을�현재� 시제로�묘사함으로써�그�장면에�생동감을�더하고�있다.� 그리고�제자

들이라는� 말� 대싱에� “사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마가는� 본절에서만� 유일하게�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토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특수한� 사명을� 띠고� 파송받은� 사

신”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복음� 전파와� 치병� 활동을� 위해� 특별히� 파송받은�

것이므로� 적절한� 단어�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Gould).� 어쨌든� 예수께서는� 그들이� 감격어린� 음성으로�

전하는�모든� 선교�활동의�보고를�하나하나�귀담아�들으시는�성실함을�보이셨다(눅� 9:10).

=====6:31따로� 한적한� 곳에...쉬어라.� ---� 제자들의� 활동� 보고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상당히� 피로해� 있었다는� 반증이기

도� 하며� 제자들을� 아끼는� 스승으로서의� 애틋한� 마음의� 펴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휴식은�

새로운� 내일을� 위한� 영.� 육의� 재충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생각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께서� 말씀

하신� 바� “쉬어라”(아나파우사스데)는� 말은� 중간태� 명령형으로서� “충분히� 휴식을� 회복하라”는� 의미도� 있

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장소가� 매우� 분주한� 장소인�

것으로� 보여진다.� 즉�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

은� 마가의�전형적인�묘사법으로서�예수가� 가는� 곳에는� 항상� 둔중이� 쉴새� 없이� 모여들고�있는� 생동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이와� 같은� 장면� 연출을� 통해� 예수� 활동을� 극적으로� 고조시키려�

하고� 있다.� 즉�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분주하게� 활동하는� 예수의� 열정적� 모습과� 그를� 좇는� 수많은� 무리

들을� 통해� 당시� 예수의� 영향력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모여든� 꾼중들중에는� 유월절

이� 다가와�예루살렘으로�여행하는�사람들도�있었을�것이고�또� 예수와�제자들의�활동을� 통해� 그� 명성을�

듣고� 모여든� 주총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한적한� 곳”(에레모스)이란� 외롭고� 적막한� “광야”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성경에� ?주� 등장하는� “광야에서의� 휴

식”이란� 주제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셨

던� 곳이� 광야였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선지자� 이사야(사� 63:14)와� 예레미야(렘� 31:2)� 때에� 이르

러,� 하나님의� 새� 백성이� 제� 2의� 출애굽� 때에� 받기로� 약속된� 제� 2의� 휴식(a� seoind� rest)에� 대한� 모형

으로� 발전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성취했다.� 왜냐하면�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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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예수가� 곧� 하나님의� 임재이며,� 만나� 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떡,� 곧� 생명

의�양식이�되셨기�때문이다.

=====6:32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예수와� 제자들이� 무리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육지에

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아마도� 그들은� 호수� 북동쪽으로� 갔을� 것이다.� 이때� 예

수를� 좇던� 무리들은� 황급히� 요단강� 본류에서� 갈릴리� 호수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얕은� 곳을� 따라� 요단

강을� 횡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한적한� 곳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호숫가에서�배를�이용하여�다른�호숫가로�이ㅣ동하는�점이다.� 그러나�눅� 9:10을� 참고하면�행선지는�이

름이� “어촌”이라는� 뜻을� 지닌� “벳새다”라� 하는� 광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5절에서� 예수는� 제자들

에게� “건너편�벳새다”로�가라고�지시한다.� 그렇다면� 33절에서의�도착�지점은� “베새다”가� 아니라는�말이�

된다.� 하지만� 이같은� 모순은� 갈릴리� 해변에는� 이� 지명을� 지닌� 곳이� 두� 곳(갈릴리� 북동쪽과� 갈릴리� 서

안쪽)이었다고� 봄으로써� 어느� 정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갈릴리� 북동쪽� 벳새?는� 헤롯�

빌립이� 도시(city)로� 승격시키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스(Julias)의� 이름을� 따서� 그곳

에�명명함으로써�벳새다�율리아스라는�이름이�붙게� 되었다.

=====6:33많은� 사람이� 저희인중� 안지라.� ----� 이� 구절로� 보아� 군중들이� 배가� 떠난� 뒤� 뒤늦게� 야� 배

에� 탄� 자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문맥상� 적절치� 못하다.� 호히려�

배를�타고� 가는�것을� 보고� 예수의�일행이라는�사실을�안� 사람들은�호수�주면에�있는� 여러� 마을에�살고�

있는� 주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마을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배를� 보고(아마�

당시� 역풍으로�인해�배의� 진행이�지체된� 듯함)� 그� 배에� 탄� 사람들이�예수의� 일행임을� 알아보았을�것이

다.� 따라서� 호숫가에� 위치한� 여러� 마을� 사람들이� 멀리서도� 예수의� 일행을� 알아보았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에� 대한� 명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로� 보여진다.�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 곧이어

진다.�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徒步)로....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휴식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예수의� 일행과� 그� 일행을� 따라� 달리는�

군중들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즉� 부정적� 시각에서� 보면�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시

달리며� 피곤해� 하는� 예수의� 일행을�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휴식하러� 떠나는� 예수의� 일행을�

조보(徒步)로� 좇아가는� 군중들의� 열성을� 생각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 대한� 기대로� 충만했던� 무리들의�열정은� 대?했다.� 그들은� 수십km가�넘는(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는� 약� 30km)� 먼거리를� 지칠� 줄� 모르

고� 걸어� 예수의� 일행보다� 먼저� 당도했던� 것이다.� 예수께� 대한� 무리들의� 기댜� 심리는� 이제� 최고조에� 달

했음을�알게�한다.

=====6: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앞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ㅇ이� 군중들이� 예수가� 탄�

배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 예수� 일행이� 도착하기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

는� 곳에� 예수는�배를� 대고� 배에서�내려오는�장면이다.� 이것� 역시� 마가의�특유한�묘사이다.� 항상� 배,� 바

다,� 군중이� 함께� 증장한다(3:7-9� ;� 4:1,36� ;� 5:2,� 21).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

자신을� 만나려고� 모여드는� 군중들을� 보고� 예수는� 휴식의� 장(場)을� 빼앗긴데� 대한� 불쾌한�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와� 제자들의� 피곤함을� 모두� 잊고�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강하게� 느끼셨다.�

실로� 예수의� 이�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야말로� 모든� 구원과�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마�

14:14�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이같은�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목자없는� 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는� 민� 27:17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간혹� 사용하신� 표현이다(마� 9:36).� 이� 말은� 먼저� 자

기� 의무를� 잊은� 거짓� 목자에� 대한� 비판적� 이해할� 수� 있다(왕하� 22:17� ;� 겔� 34:5).� 왜냐하면� 당시� 율

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 증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무리들이� 예수를� 이렇게� 열성적으로� 따르

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 행위가� 당시� 종교�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무리들에게� 진리를� 공급해주지� 않았음으

로� 무리들은� 진리에� 심히� 굶주려�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반대로� 예수� 자신이�

지금부터� 민중의� 새로운� 목자로� 나선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가� 배에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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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자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며� 여러� 가지로� 가르친다고� 표현하였다.� 사실� 양보다� 더�

그의� 인도자를� 필요로�하는� 짐승은�없을� 것이?.� 목자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도,� 꼴ㄷ,� 안식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처럼� 그의� 백성을� 인

도하며(사� 40:11),� 다윗처럼� 그들에게� 휴식을(겔� 34:23-25)� 제공하심으로(Lane� Mauer)� 그들� 이스라

엘의� 참� 목자가� 되셨던� 것이다(요� 10:1ff).�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무리들과� 굶주려� 있는� 무리들

을� 향한� 예수의� 인간애는� 애절한� 것이었다.� 8:2에� 나오는� 4.000명� 급식� 이적에서� 보여준� 예수의� 감정

은� 무리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아니라� 육체적� 굶주림까지� 걱정하며� 애통해�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

의� 인간� 사랑은� 인간의� 영.� 육� 구원,� 즉� 전인(全人)� 구원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뒤에� 나오는� 급식� 이적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이� 그

르침의� 주� 내용은� 천국� 복음일�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다(눅�

9:11).� 그리고� 마태와� 누가는� 각각� 병고치시는� 장면을� 더불어� 기록하고� 있다(마� 14:14� ;� 눅� 9:11).�

이로� 보건대� 예수는�모인� 무리들의� 모든� 필요(영.� 육간)을� 채워� 주셨음을� 보게� 된다.� 진정� 그� 무리들에

게�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주어진�것이다(시� 23:1).

=====6:35-36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 급식� 이적의� 치밀한� 도입부를(30-34)� 거쳐� 이제� 본

론부에� 들어선다.�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언제쯤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동안� 예수가� 가르쳤는

지� 알� 수� 없지만�지금의� 시각은�일반적으로�저녁�먹을� 시간� 곧� 초저녁�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가르치느라고� 시간이� 지난� 것을� 못느끼는� 듯하며� 그� 시간의� 경과를� 제자들이� 예수에게� 보고하며� 제안

하고� 있다.� 그� 제안은�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해산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이� “빈들”�

곧� 보통� 때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광야이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

한�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베새다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이었따는� 사실이다.� 많은� 사

람들은�이곳을�벳새다�남쪽의� “엘바디하”� 평야가�동쪽으로�뻗어�있는�구릉의�중간� 지역이라고�한다.� 여

하튼� 실로� 현상적으로� 볼� 때에� 시간적,� 장소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

은� 가까운� 마을로� 나가� 각자�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

을� 통해� 예수와� � 제자들의� 활동이� 31절의� 묘사와� 같이�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열정적(熱情的_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래� 준다.� 그리고� 식사� 시간을� 지나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청중들의�태도가� 진지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설교� 현장은� 빈� 들이었지만� 그들의� 진지함과� 열정은� 빈� 들을� 채우

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촌”(아그루스)은� 들판에� 자연� 발생적으로� 이뤄진� 조그마한�

촌락을,� “마을”(코마스)은� 조금�발달된�소읍을�가리킨다.

=====6:37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예수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

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여� 청중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

는� 강조적�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너희가”(훼메이스)� 먹을� 것을� 주라�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

자들의�능력을�과시한� 명령이기�보다�오히려�제자들의� 절대적�무능을�일깨우고�또� 그들의�당신께�대한�

영적�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라� 본다.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

이리이까.� ---�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의� 명령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리

들을�먹이기�위해서는�자신들이�감당할�수� 없을� 만큼� 큰� 액수가�필요하다는�조로�예수께�반문을�한�것

이다.� 제자들은� 청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파악한� 청중의� 숫자를� 통해� 식사에�

필요한� 예산을�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데나리온은� 당시�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경우� 한� 사람이� 약� 8개월� 정도� 벌�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혹자(Bruce)의� 주장대로� 당시� 제자들에

게� 이만한� 돈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제자들에게는� 매우� 큰� 돈이었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요� 6:7에

서� 빌립이� 200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 부족하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제자들의� 능력으

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계산에� 밝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불합리하

게� 보이는�명령을�내리고�계신� 그분의�뜻과� 그분의�초합리적이고�초자연적인�능력에�대해서는�전혀� 무

지(無知)했다는�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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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너희에게� � 떡� 몇� 개나� 있느냐.� ---� 예수는� 직접� 문제� 해결에� 참여한다.� 먼저� 예수는� 즉시�

구할� 수� 있는� 떡이� 몇� 개인지� 제자들에게� 알아보라고� 명한다.� 제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

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같은� 말씀을� 하신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①�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상황을� 판단하지�말고�자신의�상황을�깊이� 이해하고� 계신�예수께로�시선을�돌리는�것이�

중요하다.� 즉�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예수께� 전적인� 의뢰를� 하는� 참� 믿음의� 자세가� 필

요하다.� ②� 비록� 하찮은� 존재이나� 예수의� 도구로� 사용� 되기만� 하면� 위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

냐하면�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요(롬� 4:17),�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27).�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

리� 뿐이었다.� 떡과� 물고기의� 숫자는� 4복음서� 모두� 동일하다.� 다만� 요한� 복음에서는� 떡이� 구체적으로�

보리떡이고� 소유자가� 어린� 아이임을� 덧붙이고� 있다(요� 6:9).� 이� 음식의� 양은� 37절에서� 제자가� 어림잡

아� 산출한� 예산과� 대비되어� 엄청나게� 부족한� 것임을� 강조한다.� 거기� 모인� 5,000명� 이상의� 군중에� 비

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양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처럼�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

고� 더군다나� 어린� 아이가� 먹으려고� 소유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한� 사람의� 식사� 양으로� 충분한� 것이�

못되었을� 것이다(마� 14:17� ;� 요� 6:9,� 13� 주석� 참조).� 이로� 보건대� 마가는� 아주� 적은� 양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사실에� 강조점을� 두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밝힌� 음식의� 양은� 기적의� 효

과를�고무시키기�위한�배경이�된다.

=====6:39-40명하사....떼를� 지어...앉게� 하시니....앉은지라.� ----� 예수의� 행동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나아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청중즐을� 무리지어� 앉게� 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데를� 지

어”(쉼포시아� 쉼포시아)란� 마치� 집안에서� 식탁� 주위에� 앉은� 것처럼(주로U자형으로� 앉음)� 옹기� 종기� 모

여� 앉은� 상태를�일컫는다.� 그렇게� 모여� 앉은� 한� 때가� 50명� 혹은� 100명씩�되는� 규모였다.� 한편� 마가는�

그들이� 앉은� 장소가� “푸른� 잔디”위임을�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50명씩� 앉게� 하라

고� 명하나(눅� 9:14)� 푸른� 잔디라는� 말은� 없다.� 마태와� 함께� “푸른� 잔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다.� 먼저� 35절에서� 언급한� “빈들”이�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들판임을� 암시해� 줌으로써� 식사를� 위한� 준비와� 함께� 한층� 더� 희망적인� 분위기를� 창출한

다.� 또� “푸른� 잔디”에� 앉게� 하는� 예수의� 지시는� 시� 23편을� 연상케� 한다.� 즉� 목자가� 양떼들을� 푸른� 초

장으로� 인도하는� 듯한� 모습을� 이� 구절에서� 보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설교도� 하시고� 푸른� 초장� 위에서�

음식까지� 먹임으로써� 민중의� 손색없는� 목자가� 된다.� 이는�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탄식과� 잘� 어울린다.�

또� “푸른� 잔디”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편히� “쉼”과� 평화로운� 풍경이다.� 참으로� 예수� 앞에서� 쉼과� 평

화가�이루어지는�장면을�마가는�그려내고�있다.� 그와� 더불어� “푸른� 잔디”는� 그�때가� 팔레스틴의�우기가�

막� 끝난� 후인� 3,4월경이었음을� 보여준다(마� 14:19).� 특히� 요한은� 이� 때를� 유월절이� 가까운� 때(니산월�

14일,� 태양력으로� 3,� 4월경)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요� 6:4).� 그렇다면� 이때는� 예수께서� 마지막� 유

월절� 양으로� 잡하시기� 만� 1년� 전의� 사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0명� 또는� 100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앉는� 것은� 식사와� 교제를� 위한�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의� 야영(野營)생활을� 연상케� 한다(출� 18:21).�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와� 더불어� 제� 2의�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새� 공동체를� 경험?게�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급식� 기적의� 최고점이

라고� 할� 수� 있는� 41-44절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이끌어들인다.� 한편� 40절에� 언급된� 바� 있는� “떼로”

(프라시아이� 프라시아이)에서� “프라시아이”란� “작은� 정원”,� “꽃밭”이나� “정원”같은� 인상을� 주었음을� 짐작

케� 해준다.� 아마� 이러한� 인상은� 무리들이� 매우� 질서있게� 앉아� 있었고,� 또� 그들이� 입은� 옷들의� 색깔이�

매우�다양했음을�은연중에�나타내�주고� 있다� 할� 것이다(Donald� W.� Burdick).

=====6:41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제자들에게� 주어.� ----� 예수는� 유대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 관

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의� 위치에서� 그리고� 그� 모인� 무리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고� 먼저� 하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한다.� 특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상징한다(요� 11:41� ;�

17:1).� 그리고� 이때� 드리는� 기도의� 형식은� “찬송하리로다!� 땅에서� 양식을� 내신� 만유의� 왕이신�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예수의�행위를�성만찬과�연결시키는�해석들도�있지만�적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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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다.� 여기서는� 포도주도� 없고� 또한� 성만찬에는� 없는� 물고기가�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동� 식사

의� 전통적� 관습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한� 다음,� 직접� 떡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 사

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고� 또�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다.� 이것� 역시� 유대� 공동� 식사의� 관습� 곧� 가장�

또는� 그� 식탁의� 주빈이� 음식을� 떼어� 나누어주는� 전통적� 관례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떼어”(카테크라센)란� 직설법� 부정� 과거� 시상으로서� 그� 행위의� 사실성돠� 장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

고� 뒤어어� 언급된� “주어”(에디두)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눠주어� 분

배케� 하셨음을� 암시한다.� 실로� 그� 떡은� 떼시는� 예수의� 손� 안에서� 계속� 커져서� 예수께서� 무리들을� 모두�

먹이실� 때까지� 불어났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이적� 사역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 아직�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이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단어는� 기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

는� 모든� 사람들에게� 떡과�물고기가�골고루� 돌아갔음을� 밝힘으로써� 창조의� 능력으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예수의�초월적(超越的)인� 군능을�단적으로�묘사해주고�있다.

=====6:42다� 배불리� 먹고.� ---� 이� 표현은� 매우� 함축적� 의미를� 시사한다.� 우선� 이제까지� 진행되어온�

이야기를� 총� 마감하고� 있다.� 즉�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사실상� 불가능했던� 환경,� 그리고�

궁여� 지책(窮餘之策)으로� 등장한� 아주� 작은� 양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38정� 주석� 참조)의� 빈약함에� 대조되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되었다는� 말로� 기적을� 완결짓는다.� 또� 다른� 의미는�

배부르다는� 말은� 충분히� 만족해� 하는� 표현이다.� 즉� 더� 이상�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충분한� 식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식사가� 공동체� 안에서� 교제의� 장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50명,� 100명� 단위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더불어� 나눔을� 뜻하고� 모두� 하나됨을� 뜻한

다.� 그들� 모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주� 마리로� 큰� 이적을� 이루신� 예수를� 중심으로하여� 모두가� 함께�

배불리었으므로� 하나의� 공동� 식사를� 한� 셈이다(40절� 주석� 참조).� 마지막으로� 모두가� 배불리었으니� 풍

요와� 여유가� 있고� 따라서� 공동체�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 장면은� 31절의� 분주함이나� 33절의� 군중�

이동과� 같은�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휴식을� 연상케� 한다(39절� 주석� 참조).� 따라서� 마가가� 묘사

하는� 기적의� 장면은� 이� 이야기의� 서론부에서� 표현된� 상식� 밖의� 기대와는� 달리� 소박(素朴)하게� 처리된다.� 그� 기적에� 대해� 놀라거나�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사의� 평화로움이� 깃드는� 조용한� 잔치로�

인상지워진다.� 이것은� 마가가� 표현한� 예수의� 이상적�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참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6:43남은� 떡� 조각.....� 열� 두� 바구니에� 차게.----앞절에서� 밝힌� 기적의�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즉� 모두가� 배불럿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았다는� 말은(그것도� 최초의� 음식� 양

보다� 훨씬� 많게)� 넉넉한� 공동� 식사였음을� 확인해� 준다.� 여기서� 남은� 떡과� 물고기를� 거두어� 담은� “바구

니”(코피노스)는� 유대� 사람들이� 평소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으로서�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휴대용� 작은�

바구니이다.� 요즈음으로� 말한다면� 손가방� 정도일�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스스로�

더럽히는�일이�없도록�하기� 위하여�이� 바구니에�점심�식사와�몇� 가지�생필품을�넣어�가지고�여행을�했

다고� 한다(W.� W.� Wessel).� 한편� 남은� 떡과� 물고기를� 담은� 바구니가� 12개인� 것은� 제자들의� 수가� 12

명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음식을� 각� 사람에게� 날라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남은� 음식을� 거둔� 사람도� 제자들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특히� 요� 6:12에서는�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거두라고�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수가� “12명”이었으므로� 떡과� 물고

기를� 담은� 수효는� 12� 바구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한편� 이러한� “12”란� 숫자는�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남은것”은� 구약에서�누누이�강조해온� “남은� 자”� 사상(스� 9:8)을� 은연중에�암시�한

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Talor� Grant).� 더욱이�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생명의� 떡으로� 오신� 당신이�

기갈(飢渴)� 중에� 있는� 뭇심령들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셨을�것이다(요� 10:10).

=====6:44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 식사가� 끝났을� 때� 군중의� 수효가� 밝혀진다.� 아마도� 5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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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100명씩� 모여� 앉았었꼬� 식사�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천� 명의� 수를� 셀�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런데� 마가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마� 14:21에서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

자만� 오천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으로� 그들은� 남자�

장정만을� 공식적인� 통계에� 넣는다(민� 1:3).� 따라서� 본문에서� 가리킨� “남자”는� 청중이�모두� 남자로만� 구

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남녀로� 구성된� 청중� 중� 남자만� 수효를� 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급식� 대상

이� 된� 사람의� 수효는� 약� 2만� 명� 정도로� 훨씬� 불어나게� 될� 것이다.� 마가는� 이러한� 암시를� 통해� 독다로�

하여금� 예수의� 권능이� 얼마나� 탁월하고� 놀아운� 것인지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물온� 이� 이적은� 단

지� “떡”이나� “오천� 명”이라는� 현상적�사실에만�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의� “인

류� 구원”이라는�궁극적�목적에로�모든�독자들의�눈길을�이끈다.

=====6:45-52예수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의� 평행� 본문은� 마� 14:22-33� ;� 요� 6:16-21에� 나타난다.� 그

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평행� 본문이� 없다.� 이� 기적� 사건은� 앞서� 급식� 기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

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52절에서� 급식� 이적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

다.� 한편� 물� 위에서� 일어난� 기적이� 본문� 이외에� 4:35-41에서� 나오는데� 그� 기적의� 주제는� 자연� 현상까

지� 제압(制壓)하는� 예수의� 권위를�강조하기�위함이었다.� 여기서도�같은�주제로�설명될�수� 있다.� 그러나�분명한� 차이점은� 4:35-41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예수가� 자발적으로� 제자들과� 합유하기� 위해�

취하신�행동이었다.

=====6:45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급식� 기적� 직후� 예수는� 친히� 무리들을� 서둘러서� 해산시키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배로� 떠나보내고� 있다(32절� 주석� 참조).� 그� 상황은� 매우� 급한� 것처럼� 비춰진다.�

특히� 본문에서� “즉시”(유데오스)와� “재촉하사”(에나그카센,� ‘억누르다’,� ‘강권하다’,� 강요하다‘는� 뜻)란� 말

은� 예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몰아세우셨는지를� 짐작케�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

금� 전까지�고조되었던� 급식�기적의� 분위기와는�달리�서둘러�군중을� 해산시키고�장소를� 옮기려�한� 까닭

이다.� 마가는� 그�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요� 6:14,� 15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급식�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그� 선지자”곧� 메시야라고� 하면

서� 그분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비록� 당신을� 메시

야로� 알되� 인간들의� 궁극적인� 구원자로� 알기� 보다� 정치적(政治的)� 성격의� 메시야로� 호해함으로써� 극도의� 흥분� 상태로� 이끌리던� 무리들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 위해,� 예수는� 그들과의� 교제를� 잠시� 중

단하기를� 원하셨다.�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 ---제자들에게� 가라고� 지시한� 장소는� “벳새다”이다.�

평행� 본문� 마� 14:22-33에서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물� 위의� 기적� 직후� 닿은� 곳이� “게네사

렛”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요� 6:17에서는� 가버나움을� 향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기적을� 언급

하고� 있는� 3복음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행서지가� “벳새다”,� “가버나움”,� “게네사렛”� 등

으로� 나타나는� 것은� 서로� 비슷한� 방향에� 위치하기� 때문에� 나타난� 착오�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도착한�

곳과,� 육지� 도착� 후� 다시� 재개된� 사건과� 그� 발생한� 곳이� 각� 복음서간에�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

안한다면� 이러한� 불일치는� 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 엄급된� “벳새다”는� 32절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급식� 기적� 사건이� 일어났던�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ias,� 눅� 9:10)가� 아

니라� 갈릴리� 서안의� 가버나움� 근처에� 위치한� 또� 하나의� 벳새다일�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 선교의� 활발한� 전개를� 위해서� 뿐� 아닐라� 무지한� 민중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훼파(毁破)하기� 위해� 갈릴리� 해안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의� 목적을� 수행해� 가셨다.� 진정�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가장� 많이�

모여� 당신께� 가장� 극진한� 칭송을� 할� 때가� 바로� 당신께� 가장� 위험한� 위기적� 상황임을� 자각하셨던� 것이

다.

=====6:46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예수는� 군중들을� 다� 해산시키고,� 제자들을� 떠나� 보낸� 수� 혼자�

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들어간다.� 문자적으로� 볼� 때� 예수는� 기도하실� 목적으로� “산속으로”� 들어가신� 것

이다.� 단순히� 외견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예수� 자신에게� 삼한� 갈등이나,� 고민� 또는� 밀려오는� 고독감

을� 이기지� 못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요� 6:14,� 15에서의� 보고(報告)처럼� 그때�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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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31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 곧� 고

통과� 배척당함과,� 죽임당해야� 할� 사명� 완수를� 방해하는� 바로� 이� 같은�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들의� 무지

에� 대한� 염려를� 해결하시기� 위ㅣ해� 산속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가� 함

께� 예수께서는� 헤롯왕의� 박해가� 임박해옴을� 예감하시어�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혼자� 조용히� 하나님과의�

깊으� 영교(靈交)를� 하시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예수가� 활동� 초기에� 지신의� 기적� 사건을� 비밀에�부치도록� 지시했던� 사실과(1:44),� 지금의� 공개된� 대규모� 대중� 집회를� 서둘러� 해산시킨� 점,� 그리고�

6:14에서� 묘사된� 헤롯의� 불안을� 종합해보면� 헤롯의� 공격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로� 예수

는�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이와� 같이� 큰� 사건을� 전후하여� 혼자� 기도하는�

경우가� 어려� 번� 있었다(1:35� ;� 14:32-36� ;� 눅� 3:21� ;� 5:16� ;� 6:12� ;� 9:18,� 28� ;� 11:1� ;� 22:41,�

44).� 이렇듯� 어려운� 일,� 위험하고� 힘든�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분이� 지니신� 능력과� 권

위와� 지혜가� 과연� 더디에서부터� 출발하는가를� 조용히� 증거해� 주고� 있다.� 실로� 혼잡한� 곳을� 피하여� 오

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산”)에서� 그분과� 속깊은� 영적� 교제를� 하신� 예수에게� 그� 어떤�

어려운�난관도�더�이상� 문제가�될�수�없었다.

=====6:47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뭍에� 계시다가.� � ----�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 묘사로,� 본� 사건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급식� 이적이� 있었을� 때� 이미� 저

녁� 때가� 되었으므로(35절)� 날이� 저물어�어두워졌다는�것은�아주� 긴� 시간이�아닌�약간의�시간이�경과했

음을� 보여준다.� 이때의� 시간은� 계절적으로� 본� 사건이� 유월절� 기간에� 있었던� 것으로� 단정한다면(31절)�

오후� 6시가� 넘어가는�늦은�저녁으로�본다.� 그렇지만�유월절의� 보름달�아래서�해변에� 있는� 사람은�능히�

호수� 한� 가운데� 있는� 배를�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지금� 기도하러� 들어가셨

던� 산에서� 내려오셔서� 해변의� 평지에� 계신다.� 즉� 예수는� “산”(오로스)에� 계신� 것이� 아니라� “뭍”(게),� 곧�

바다에� 대칭되는� 육지� 위에� 계신� 것이다.� 그리고� 배의� 위치는� 갈릴리� 바다의� 가운데이다.� 이것은� 예수

가�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이� 얕은� 곳을� 걸어� 온� 것이� 아니라� 깊으� 곳을� 그것도� 한� 가운데까지� 걸어왔음

을� 암시해준다.� 또� 예수가� 뭍에� 서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가� 뭍에서부터� 바다� 가운데까지� 걸

어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 설정(設定)이� 될� 수� 있다.� 마가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예수의� 기적에�대한�신빙성을�높이려�하고�있다.

=====6:48바람이� 거스리므로,� ----� 갈릴리�바다는� 지중해보다� 200m� 아래에� 위치하여� 주변의� 협곡을�

통해� 회오리같은� 바람이� 가끔� 불어와�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4:37� 주석� 참조).� 이� 바람은� 제자들이�

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오는� 역풍(逆風)으로,� 배를� 복적지에서� 자꾸만� 이탈시켜� 항진하는데� 어려움을�겪게� 하고� 있었던� 것같다.� � 이� 묘사는� 첫� 번째� 바다� 위의� 기적에서� 묘사된(4:37)� “광풍”과는� 성격이�

다른� 은근하고도� 끈덕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 먼

저� “괴로이”(바사니조메누스)란� “시험하다”,� “고문하다”,� “지치게� 하다”는� 뜻을� 지닌� 수동태� 현재� 분사로

서� 비록� 제자들� 중에� 어부� 출신들이� 많앗다� 하더라도� 그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을� 느끼고� 심히� 고통�

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뒤이어� 나오는� “보시고”(이돈)는� “주목하다”는� 뜻인� “호라오”의� 제� 2

과거형� 분사로서� 예수께서� 그� 광경을� 지속적으로� 예의� 주시하셨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갈릴리� 바다의�

폭이� 약� 10km� 라고� 할� 때� 배의� 위치가�바다� 한가운제이므로�뭍으로부터�약� 5km� 정도� 떨어진�거리였

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과연� 뭍에서� 먼� 거리에� 있는� 제자들의� 노젓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겠는

가� 하는� 문제가� 된다.� 적어도� 보통� 사람의� 시야밖에� 있었거나� 조그마한� 형체로서� 사람을� 구분할� 수� 없

을� 정도였을�것이다.� 또� 날이� 저물어�어두워진� 상태에서�식별(識別)이� 더욱� 불가능했을�것이다.� 그러나�반대의� 추측도� 가능하다.� 예수는� 이미� 배를� 타고� 떠나는� 제자들을� 보았을� 것이고� 조그마한� 점같은� 물

체만� 보아도� 제자들이� 탄� 배로�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 유월절� 즈음이었다면� 비록� 바람이�

세차게� 물었다� 하더라도� 보름달이� 호수� 전체를� 비추고� 있었을� 것이므로� 시야가� 그렇게� 흐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바람이� 불고� 있었으므로� 멀리서도� 항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직하는� 것

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부정한다� 하더라도� 예수는� 여전히� 제자즐의�

현재�당하고�있는� 고초를�신적인�직관(intuition)으로� 조용히�응시하고�계셨을�것이다.� 밤� 사경�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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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의� 시간� 구분법으로는� 밤을� 3등분하는� 것이(초경-해질때부터� 오후� 10시까지,� 이경-오후�

10시부터� 오전� 2시까지,� 삼경� 곧� 새벽-오전� 2시부터� 해� 뜰때까지)� 상례였으나� 그들이� 로마� 통치하에�

편입됨으로써� 밤을� 4등분하는(일경-오후� 6시에서� 9시,� 이경-오후� 9시에서� 12시,� 삼경-새벽� 12시에서�

2시,� 사경-새벽� 3시에서� 6시)� 관례가� 생겨났다.� 마가는� 바로� 이� 로마인의� 시간� 부분법에� 맞추러� 본� 사

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 예수는� 제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갔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처럼� 보인다.� 여기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는� 그들의� 곁을�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가� 된다.�

이� 말은� 예수의�의도를�표현한�것이기보다�그�순간� 막� 일어나려는�일을�목격한�사람이�받은� 독특한�인

상을� 표현한�것이라� 볼� 수� 있다(W.� W.� Wessel).�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자신을� 향해� 소

리치지� 않았다면� 곧장� 지나치기라도� 할� 듯이� 그� 배를� 향해� 곧장� 걸으신�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스치듯�

걸어가셨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이� 구절은� 결코� 예수께서� 그들의� 고난을� 간과하고자� 하심

이� 아니요�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이� 당신을� 향한� 믿음을� 보일� 때�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이다.� 예

수는�제자들이�자기들� 배로� 초청하여�자신들의�고통을� 호소하며�예수를�향한� 전적인�신뢰를�보일� 것을�

원하신� 것이다(히� 11:6).� 즉�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에� 근거한� 초청(招請)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Lenski).

=====6:49유령인가하여�소리� 지르니.� ---� 제자들은�물� 위로� 걸어온�예수를�보면서�놀라고�있다.� 특히�

“소리지르니”(아네크랔산)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거함치며� 두려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제자

들의� 심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모습을실체가� 없는� 환영으로� 보았던� 것이다

(마� 14:26� 주석� 참조).� 여기서� “....인가� 하여”(에돜산)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내린� 자연적인�

결론으로� 이해된다(Robertson).� 즉�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경험에만� 따른�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한계(限界)였다.� 한편� 이� 장면은� 당시� 유령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민담�형식으로� 널리� 소개되어� 있었던� 것임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인상은� tladgl� 두려운� 존재

로� 퍼져�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제�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그분의� 실체로� 여기지� 못한� 것은� 너

무나� 뜻밖의� 상황,� 즉�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던� 예수가� 갑자기� 시.� 공을� 넘어� 물위로� 나타

난�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4:35-41에서� 광풍� 제압� 기적을� 경험한� 제자라면� 적어도�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 침착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는� 바람불고� 혼란

스런� 밤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얼굴을� 분명히� 식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해� 유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심�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체온으로�느끼고�있었을�것이다.

=====6:50안심하라(다르세이테).�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는� 뜻의� 2인칭� 복수� 현

재� 명령형으로� 용기와� 위로를� 더하는� 강한� 명령이다.� 그들은� 이제(현재형)� 더� 이상� 바람과� 유령의� 악

몽에� 짓눌리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담대히� 떨쳐�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위로의� 말은� 치유� 이

야기� 속에서도� 자주� 나온다(10:49� ;� 마� 9:2,� 22).� 따라서� 이� 단어의� 사용� 의미는� 분명�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의미의� 문제� 해결을�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는� 바람으로� 인해� 향해

가� 곤란한� 상황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니�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키고� 있다.� 여기서� “내니”(에고� 에이미,� It� is� I)라는� 말은� 마치� 출애굽� 당시� 하나

님이�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의� 표현인�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라는� 표현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출� 3:14).� 따라서� 예수의� “나”� 선언은� 곧� 신의�

현현(theophany)으로서의� 당신의� 존재� 계시로� 이해된다(요� 8:58).� 이러한� 예수의� 자계시(自啓示)는�심한� 두려움에� 놓여있던� 제자들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즉� 바람과� 풍랑과� 지구의�

중력까지도� 정복하시고� 바다� 위에� 우뚝� 서� 계신,� 그분이� 바로� 제자들이� 믿고� 따른� 자신들의� 스승일� 뿐

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모든� 공포와� 유혹을� 물리쳐주실� 수� 있는� 만유의� 주이심을� “내니”라는� 그� 한�

마디를� 통해� 전달하신� 것이다.� 한편� “두려워� 말라”(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

장� 그� 무서워하는� 상태를� 중단하라(stop� fearing)는� 참으로� 단호한� 명령이다.� 이제� 나� 예수가� 너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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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께서� 그� 험한� 바다� 위를� 친히� 걸어오신� 이유이며� 목적

이었다.

=====6:51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의� 기적이� 물� 위로� 걷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바람을� 잠재우

는� 권능까지�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는� 무언의� 명령으로서� 바람의� 기운을� 지치게� 만드셨던� 것이다.� 결

국� 이� 기적의� 주제는� 자연을�다스리는� 신적(神的)� 권위가� 예수에게� 있음과� 그러한� 권능의�모든� 귀결점은� 바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마가

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 사실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마� 14:28-31).� 이는� 아마

도� 마가에게� 예수의� 행적에� 관한�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베드로가� 자신의� 철없이� 날뛰던� 모습을�

통한히� 여긴� 나머지� 물에� 뛰어든� 장면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음에� 심

히� 놀라니.� ----� 이� 말은� 내색하지� 않고� 놀란다는� 말인데� 예수가� 물� 위로� 걸어오심과� 당신께서� 배위로�

오르시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잠잠해진� 사실을� 보고� 놀라와하는� 표현이다.� 평행� 본문� 마� 14:33에서는�

제자들이� 그들� 앞에� 서신� 예수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신적� 권위를� 느끼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마태의� 장면에� 비하여� 마가의� 묘사는� 제자들이� 기적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

하고� 놀라기만� 하는� 것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차이는� 마태가� 제자들의� 외면적� 행동에� 그� 초점을� 맞추

어� 기술한데� 비해� 마가는� 제자들의� 숨겨진� 내면적� 상황을� 주시했던� 데서� 비롯된다.� 즉� 마가는� 비록� 제

자들이� 예수께�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마음속� 깊이에서

는� 여전히�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잠재해� 있었음을여실히� 노출시켜내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제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뒤이어� 일관된� 표현�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영적� 감각

이�무디고�현명치�못한� 것으로�제자들의�실체를�묘사하고�있자.

=====6:52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가는� 물� 위에서� 일어난� 두�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깨

닫지� 못하고� 놀란� 일을� 제자들이� 급식�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만약� 그들이�

앞선� 오병이어의� 이적의� 의미,� 곧� 우주의� 주관자와� 참�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이�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

을�깨닫기만�했다고�한다면�그들은�예수가�물�위로� 걸으실�뿐� 아니라�물결을�잠재우신�것을�보고� 그렇

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로� 그들의� 가장� 큰� 과오는� 험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지혜가� 없어서

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누구이신지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기족론적� 지식(知識)의� 결핍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마� 14:33� ;� 16:16� ;� 요� 6:68,� 69)� 등에서� 자신들의�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할� 수

는� 있었지만�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삶에서� 구체적으로� 이해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모히

려� “마음이�둔하여져”� 있었던�것이다.

=====6:53-56게네사렛에서의� 활동을� 요약하여� 치병� 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평행� 본문은� 마�

14:34-36에만� 나온다.� 내용도�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두� 본문� 모두� 의도적으로� 압축된� 묘사를� 하고�

있다.� 즉� 본문은� 수많은� 사건을� 요약한� 일종의� 삽화로서� “치료자”되신� 그분의� 이미지를� 강렬히� 부각시

키고�있다.

=====6:53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 이야기가� 앞절과� 무리없이�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52절에� 이어� 계속�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 문제가� 생긴다.� 즉� 출발할� 때�

“벳새다”를� 향하라고�예수가� 지시한�것으로� 45절에� 언급되었었는데� 그렇다면�예정지와는�다른� 곳에� 도

착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45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 예수의� 일행의� 운� 목적지는� 갈릴리� 서

안의�벳새다였으나�온� 밤� 동안의�심한� 바람� 때문에�그� 벳새다에서�몇� km� 떨어진�게네사렛에�도착했다

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본문� 이하� 내용은� 바람을�잠잠케� 하신� 이적과� 약간의�시차를� 둔� 독립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 일행은� 호수� 건너� 게네사렛에� 도착하셨는데� 그곳은� 호수� 서쪽

에� 위치한� 막달라(Magdala)� 북쪽의�광야이든지� 아니면� 광야에�있는� 한� 도시였을� 것이다(Dalman).� 게

네사렛은� 한� 도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갈릴리� 서안의� 한� 평야지대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게

네사렛� 평야의� 토양이�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많은� 촌락들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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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s)는� 이곳에� 대해� “이곳은� 자연의� 야심작(野心作)이라� 불리울� 수� 있다.� 그�까닭은� 이곳이�근본적으로� 서로� 섞여� 살� 수� 없는� 식물들까지도�함께� 섞여�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다.

=====6:54-55예수신줄을� 알고...달려� 돌아다니며.� ----� 예수� 일행이� 도착한� 시간이� 언제인지는� 밝히

지� 않고� 있지만� 낮� 시간일�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뭍에� 나와� 있었고� 사람들은� 곧� 예수라는� 사실을�

알아�본다� 그� 사람들은�그� 지역� 여러� 곳에�다니며�소식을�알리고�그� 이야기를�들은�사람들은�환자들을�

메고�예수� 앞으로�달려오는�장면을� 마가� 특유의� 분주하고�생동적이며�긴박감�있는� 묘사로�처리하고� 있

다.� 특히� 2:4에서도� 한� 번� 언급된� 바� 있는� “침상”의� 이동� 장면은� 가히� 예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를� 짐작케� 해준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예수에� 대한� 명성이� “게네사렛”에서� 아주좋게,� 특히� 병고치는�

기적으로� 신뢰있게�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장면을� 급식� 기적의� 결과와� 함께(45절� 주석�

참조)� 생각해보면� 예수의� 인기와� 명성,� 그리고� 영향력은� 마치� 어떤� 크나큰� 변화를� 예감케라도� 하듯이�

민중들� 사이에� 놀랍게� 퍼져가고,�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정치가들에게도(헤롯처럼)� 유대� 종교� 지도

자들에게도�큰� 관심의�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결국� 더욱� 짙게� 다가오는�핍박(逼迫)의� 그림자를�예감케�한다.

=====6:56마을이나�도시나�촌에서� 병자를�시장에�두고.----� 예수의� 열정적�활동과�사람들의�열관적인�

추종을� 생생하게�묘사하고�있다.� 먼저� 이� 구절을�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활동� 영역이� 어느�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조그마한� “마을”이나� 잘� 발달되고� 붐비는� “도시”나� 한적한� 들판� 위에� 세워진�

“촌”이나를�불문하고�당신을�필요로�하는� 곳이면�그� 어디나�선교의�발길을�멈추지�않았다는�것이다.� 특

히� 본문에서� 보호자들이� 환자들을� “시장”에� 두고�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예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인� 시장을� 당신의� 복음전파� 대상지로� 택했던� 것� 같다.� 이� “시장”(아고라)은�

한� 마을� 어귀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 이곳에는� 마을� 법정과� 공공� 기관이� 형성되며,� 또� 사람들의� 상거래

와� 교제의� 장소로� 활용된다.� 이러한� 분주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에서� 예수의� 선교�

사역이�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손을� 대게.� -----� 먼저� “옷가”란� “옷가에� 다느� 술”(5:27)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

찬가지로� 율법이� 명한� 바에� 따라(민� 15:37-39� ;� 신� 22:12)� 옷가에� 술을� 달고� 다니셨던� 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기라도� 허락할� 것을� 바라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간구하니”(파레칼룬)

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무리들의� 간곡한� 요청이� 거듭거듭�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믿음이었다.� 이와� 같은� 장면이� 혈루증� 여인�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5:27).� 마가는� 이

와� 같은� 열광적이고� 열정적이며� 생동감있는� 예수의� 치병� 활동을�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는� 말로� 끝맺는다.� 물론� 사람들이� 완전한� 치유의� 은총을� 입은� 것은� 그들이� 예수의� 옷가를� 만졌기� 때문

은� 아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 근저에는� 당시� 팽배(膨湃)해� 있던� 미신적� 의도가� 곁들여져� 있었다고� 할망정,� 예수가� 그들을� 치유하신� 것은� 분명� 예수의� 옷가라도� 만지기를� 열망했던� 그들의� 순수한� 믿음� 때

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법이다(히� 11:6).� 여하튼� 본문의� 마지막� 글귀는� 예수의� 활동은� 성공적이었

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열기가� 높아짐을� 느끼게� 하며� 갈릴리� 사역이� 거의� 절정에� 다다랐다는� 조용한�

암시를�남기고�있다.� � � � 마가복음�제� 7장

=====7:1� 바리새인들...예루살렘에서� 와서� -� 본절은� 시간.� 장소의� 배경� 설명에� 충실한� � 마가의� 독특

한� 문장� 기법과는� 조금� 예외적으로� 전장(6장)과의� 아무런� � 관련성도� �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또� 이야

기의� 배경인� 장소에� 대한� 언급도� 없다.� � 다만� �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중앙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들� 중� 몇� 사람이� 예수를� 찾아옴으로써� � 본� � 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여기서� 장소는�

갈릴리의� 가버나옴지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곳이� 예수의� 주(主)활동� 무대였고�또�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은� � 갈릴

리선교� 기간� 중에� 발생한�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 중앙에서�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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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예수를� 찾아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1)� 중앙에서� 그들이� � 내려온� 것은� 지방의� 율법학자

들이� 요청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유는� 예수의� 열성적인� 활동과�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높아가는� 예수의� 인기에� 대한� � 불안� � 때문에� 중앙의� 권위� 있는� 학자들을� 초청해� 예수에� 대한� 열기를�

식혀� 보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의� 활동은� 사회� .�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굉장한�파문을�일으키고�있었고�특히� 기적의�행위나�죄사함을�선언하는�행위는�종교적� 전통에�대한� 중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 소문으로� 전해오는� 예수의� 도전적�

행위를� 직접� 살피고� 확인하여�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 몇� 사람의� 대표를�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앞에� 언급한� 두� 가지의� 가능성� 모두� 수용하는� 것이다.� 즉�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의�

활동에� 대한� 파문이� 그들의전통과� 종교적� 질서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그� 대책으로서� 증앙의� 권위�

있는� 학자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예수와의� 직접적인� 논쟁을� 통해� 파문을� 진정시키려�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증앙에서� 파견된� � 그들의� � 소임은� 단순히� 예수의� 활

동에� 대한� 피상적인� 조사였다기� 보다� 오히려� 예수의� � 권위와� � 인기를� 일구에� 무너뜨릴� 수� 있는� 모함

(謀陷)의�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사실� � 당시�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예수� 사이에는� 심각한�갈등�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 따라서� 본문의� 조사� 단원들은� 편견과� 적의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와�

그�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숨죽여�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상황은� 3:22에서� 이미�

한� 번� 발생한�적이�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2� � 부정한� 손...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 예수에게�

온� 뒤�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것� 같다.� 왜냐하면� 앞� 절에서� '모였다가'로� � 문장이� 끝나� 시간� 차의� 여운

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 활동을� 관찰하다가� 문제가� 될� 수� 있는� 결

정적� 증거를� 이제� 포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문제의� 초점은�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행위'였다.� 여기서� '부정한� 손'� 과� '씻지� 않은� 손'이� 동등한� 의미로서� 표현되고� 있는데,� 후자

는� 전자의� 설명적� 첨가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방인(로마)를�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던� 마가의� 독자들

에� 대한� 친절한� 배려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부정하다'라는� 말은� � 종교적인� � 의미에서� 의식적(意識的)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이고� '씻지� 않은� 손'은� 그� 부정한� 이유를� �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 조상이� 정한�결례� 의식을� 거치지�않아� 성결에�이르지못한� '부정한'(� *� � � � � � � � � � � � � � ,� 코이나이스,� '보통',� '일반'을�

의미)� 일반� 세상의� � 손을� � 가리킨다.� 사실� 중근동� 지방의� 식사� 예법은� 주로� 손사용하며�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 손을씻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 백성으로� � 부름

받은�이스라엘에서는�이� 손� 씻는� 일이� 단지� 위생적�측면에서�보다�오히려�의식적� � 측면에서�더욱� 강조

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에� 있어서� 위생적� 부결이� 종교적� 부정으로� 공식� � 율법화된� 것은� 출애굽� 당시의�

일이었다('월경하는� � 여인'.� � 레� � 15:19-31;'시체를� � 만지는� 것',레� 21:11;민� 19:13;'문등병자',� 레�

13:3,� 44-46;14:44-57� 등).� 이와� 같은� � 구분은사람,� 짐숭,� 물건,� 일� 등에있어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종교� 의식� 속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 관습은� 모세의� 율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제사장의� 제의적� 관례로부

터� � 유래된� � 것으로� � 보인다.� � 어쨌든� � 미쉬나(Mishnah)의� � 한부분� � 전체가(Tohoroth,� 'cleanness')�

바로� 이� '정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음을� 볼� 때� 유대인들의� 의식적� � 정결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

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결례를� 행하지� 않고� 식사를� 한� 것을� � 가만히� 주시하면서� 그들을� 부정한� 자로� 단죄한� 것이었다.� � 한편� �

혹자(Swete)에� � 따르면� � 이때� 제자들이� 먹었던� 음식은� 지난� 번� 벱새다� 율리아스에서� 5병� 2어의� 기적

후에� � 거둬들인� 12광주리에�담겨�있었던�것이라는�재미있는�견해를�제시하고�있다.

=====7:3� 괄호안에� 묶여� 있는� 3,� 4절은�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례에� 전혀� 생소한� 이방� � 독자들의� 이

해를� 돕기� 위해� 마가가� 친절히� 설명해� 놓은� 해설구이다.� � �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 여기서� 먼

저� '모든� 유대인들'이란� 특정� 계층의�종교� 지도자들을�제외한�일반� 유대� 백성들을�가리킨다.� 한편� 종교

걱� 특권을� 누리며� 남다른�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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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준수와� 각종� 규제� 조항들을� 가르치며,� 지키게� 하는등의� 상당한� � 영향력을� � 행사하였었다.� � � 장로

들의� 유전(遺傳)� -� 마가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않고� 식사하는� 것이� � 왜� �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그것이�유대적� 전통� 속에서� 전승되어온� 것이기� � 때문이라고� � 설명하고� 있다.� � 여기서� 언급된� '장로'� 혤라어로�

'프레스뷔테로스'(*� � � � � � � � � � � � � � � � � � � � � � )인데,� '나이� 많은� 사람'� 또는� '조상'� 등의� 의미와� 함께� 당

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 지방의회� 의원(눅� 7:3)이나� '산헤드린'이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 최고회의�

회원을� � 지칭하는�뚱으로�사용되기도�하고�또는� 권위� 있는�율법교사와�종교� � 지도자를� � 지칭하기도�했

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 '조상'으로� � 번역하여� 이해하는� 것이� 문

맥상� 적절하다고� 본다.� 그리고� '유전'(*� � � � � � � � � � � � � � � � � � � � � � � � � � ,텐� 파라도)이란� 말은� '...로부터�

손으로�건네주다'는� 뜻의� '파라디도미'(*� � � � � � � � � � � � � � � � � � � � � � � � � � � )에서� 유래한�말이다.� 이는� 출애

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 성문� � 율법(토라)뿐� 아니라� 구전� 율법을� 함께� 전해� 주셨는데,� 그� 구전�

율법이� � 하나님에게서� � 모세,� 그리고� 아론,� 기타� 자손들에게� 순서대로� 전해졌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

신앙을� � 반영한�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유전'은� 유대인들의� 조상� 때부터� 구두로� 전승되어온� 행위법� 내

지는� 각종� 판례법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사실� 유대인들의� 관습은� � 이러한� � 구전율법과� 긴밀한� 관계� 속

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조상의� 전통에� 관한� 깊은� 관심과� 구체적인� 체계화� 작업은� 바벧론� � 포로� � 시

대를� � 거치면서� � 산헤드린의� � 모체였던� � 대� � 회당(Great� Synagogue)과� 더불어� 점차�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통들은�후대에�서기관들에� � 의해서�법적인�권위로� 높여졌고� '구전� 율법'이라는�말처럼�성

문화된� 율법의� 권위와�맞먹을� 정도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강조되었다.� 이것은� A.D.� 200년� 경에� 일차�

집대성� � 작업이� 이뤄졌으며� 그러한� 작업은� A.D.� 800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작업은�

B.C.� 300-A.D.� 800년� 사이의� 긴� 기간이� 소요됨).� 따라서� 예수� 당시에는� 이러한� 유전들이� 대개� 구전

의� 형태로� 존속되어오고� 있었다.� 이� 유전의� 목적은� 인간� � 생활의� � 유익에� 관심두기보다는� 인간을� 규

제,� 억압하는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실로� 성문� 율법은� � 원칙론적� 입장에� 서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

서는� 침묵하는� 듯하지만� 유전은� �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들에게까지�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그리

고� 위대한� 랍비들이� 만들어� 반포했던� 수많은� 유전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서� 더� 큰� 권

위와� 함께� 좀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고� 심지어는�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

로들의� 유전'에� 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 '탈무드의� 이해'란과� 마� � 15� :2의� 주석을� 참

조하라.� � �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여기서� '부지런히'라는� � 말은� � 휄라어� '퓌그메

'(*� � � � � � � � � � )의� 번역인데�해석하기�매우�어려워�어떤� 영역본(RSV)에서는� � 번역하지�않고� 있다.� 이에�

대한� 번역으로서� '꼭� 쥔주먹'.� '팔뚝까지의� 손으로',� '펼쳤다� 접었다� 하는� � 손',� '물을� 손으로� 잔뜩� 움켜

쥔�상태'� 등의� 다양한�견해가� � 있다.� � 뿐만� 아니라� 본문의�읽기를�아예� '퓌크나'(*� � � � � � � � � � � )� 또는� '

퓌크노스'(*� � � � � � � � � � � � � )� 둥으로� 변경하며� '가끔',� '더� 자주'란� 뚱으로� 이해하기도� � 한다.� � 사실� � 라

틴� � 벌게잇(Vulgate)역에서� 이러한� 변형을� 따르고� 있다(crebro,'빈번히'란� 뜻).�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글� 개역성경의� 번역과� 같이� � '부지런히'로� � 해석한� � 데도� � 있다(Syriac� � Peshito� Version).� 어째든� 이

러한� 여러� 견해들을� 통해� 추론해� 볼� 때� 유대인들의� 결례로서� 행하는� 손씻음은� 양손을� 주먹으로� 꽉� 뀌

었다� 폈다� 하면서� 팔꿈치까지를� � 물로� � 씻어내거나� 양손을� 부지런히� 잽싼� 동작으로� 부벼대어� 씻는� 장

면을� 연상할� 수� 있다.� � 특히� � 주먹을� 꽉� 쥐는� 행위는� 어떤� 굳은� 의지와� 힘과� 활발함올� 암시하고� 있다

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Pulpit� Commentary).� 실로� 그들에게는� 식사� 때마다� 꼬박꼬박� � 부지런

히� � 씻되� 매우� 깨끗하게� 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음을� 볼� 수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 '먹지� 아니

하며'라는�말로� 보아� 그들이�얼마나�그�관습을�철저하게�지켰는지�알� 수� 있다.� � � �

=====7:4�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 여기서는� 그들의� 생활� 습관� 속에� 있는� 정결에� 관한� 의식(儀式)을�보여� 주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시장'은� 부정한�곳으로� � 이해되고� �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시장이�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고� 혼잡한� 곳에서� � 부정한� 여러� 사람들과� 접촉� 가능한� 대중적� 장

소이기� 때문에� 불결해지기� 쉽다는� � 이유� �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인들� 시장에서� 이방인들이나�

심지어는�율법� � 규정을� � 준수하지�않은�유대인들과�흑시�접촉했을�수도�있다는�사실을�염두에�두고�의

식적� 정결에� � 힘썼던� 것이다.� � � � 물을� 뿌리지� 않으면� -� 이� 말은� '배티손타이'(*� � � � � � � � � � � � � � � � � � � � �

)라는� � 훼라어의�번역인데,� '씻다',� '적시다'라는� 뜻인� '배티조'(*� � � � � � � � � � � � � � )의� 복수� 3인칭� 중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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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번역하면� '그들� 자신을� 씻다'가� 된다.� 때문에� '물을� 뿌린다'는� 것을� � 목욕을� 하거나� 물에� 몸을� 잠

그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즉� '배티조'(*� � � � � � � � � � � � � � � )는� � 물에� 담그고� 적신다는� 뜻과� 씻는다는� 뜻

을� 갖고� 있으므로� 오히려� 목욕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 물론� 이것을� 세례와� 침례

의� 차이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혹자(Meyer)는� 본문의� 점층법적� 표현

을� 강조하면서� � '유대인은� 먹기� 전에� 항상� 손을� 씻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먹기� 전에

는� � 항상� 몸을� 씻었다'고� 그� 의미를� 명확히� 표현했다.� � 물론� 이� 모든� 행위늘� 그들이� � 종교적� 부정을�

탈피하기위한� 의식적� 행동이었다.� 실로� 그들은� 전인격적인� 거듭남이나� � 내면적� 자기� 성찰보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적� 정결에� 더� 큰� 종교적�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 � 잔과� 주발(周鉢)과� 놋그룻을� 씻음이러라� -� 마간는�음식먹을�때� 사용하는� � 식기들까지� 씻는�철거한� 관습을�소개하면서� 그들의�정결� 관

습에� 대한� 철저성을� 부각시키고� � 있다.� 여기서� '잔'(*� � � � � � � � � � � � � � � � ,� 포테리온)은� 음료를� 마시는�

그릇을,� '주발'(*� � � � � � � � � � � � � � � � � � � � ,� 크세테스)이란� 로마인들의� 액체를� 재는� 도구� 또는� 작은� 그릇,�

항아리� � 등을� � 뜻하며,'놋그릇'(*� � � � � � � � � � � � � � ,� 칼키온)은� 구리로� 제작된� 각종� 용기들로서� 주로� 취

사� 도구를� 가리킨다.� 그런데�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이러한� 도구들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구입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결례가� 요구된다고� 한다.� 한편� 수리아사본� 등에서는� 위의� 세� 종류� 이외에� '침상

'(*� � � � � � � � � � � � ,� 클리논)이라는�말을� � 첨가하고� � 있다.� 만약� 이러한� 첨가가�마가의� 본� 의도를� 그르치

기� 않는다면� '씻는다'는� 뜻의� 훼라어� '배티스무스'(*� � � � � � � � � � � � � � � � � � � � )의� 활용도는� 상당히� 광범위

하게� 된다.� 즉� 여기� � '씻는다'는� 말은� 물에� 완전히� 잠그다는� 뜻� 외에� 단순히� 잠그지� 않고� � '씻어낸다',� �

'닦는다'는� 등의� 의미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유대인들의�정결례는� 다양하게� � 이뤄졌음을� � 짐작해�볼

수�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5� � 예수께� 묻되� -�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문제의� � 내용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 즉� 조상들의� 전통에� 따른� 정결례를� � 어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

이� 묻는� 것은� 이유를� 알고� 싶어� 묻는� 것이� 아니고� 이미� � 제자들의� � 행위가� 중대한� 잘못을� 범했다는�

전제아래� 제자들의� 행위에� 대혜� 정죄하고� � 그� � 책임을� 예수에게� 추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첫째� 바리새인들과� � 서기관들은� 정결� 관습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자부심과� 아울러� 자신들이� 그�

전통적� 관례의� 파수꾼임을� 자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예수를� 집중� 공격함으로,� 제자들의� 부정

한� 행위가� 종교적이건� 비종교적이건� 모두� 스승에게� 그� 책임이� 물어져야� 함을� 암시해� 주는� � 것이다.� 사

실� 그들은� 제자들을� 책잡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 스승인� � 예수를� 종교,� 정치적으로� 매장

시키기�위해�보내졌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6�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잘� 예언하였도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

하여� 예수의� 첫번째� 응답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사� � 29:13).� � 실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일행을� 책잡기� 위해� 그들의� 전통적� 유전을� 세웠지만� 비수는� �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응대하셨다.�

따라서� 이러한� 응대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도외시하는� 그들� 유대� 지도사들에� 대한� 정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들을� 향해� '외식(外食)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외식한다는� 말은� 예수가� 자주�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하여� 부르는� 말로서� 마� 23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 뜻은�

원래� 휄라어� '휘포크리테스'(*� � � � � � � � � � � � � � � � � � � )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신의� �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무대에� 서는� '연극� 배우'라는뜻으로� 결국�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또는� 위선자란� 의미이

다.�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고있는� 주장과� 현실적� 행동� � 사이에� 있는� 객관적� 불일치를� 비판하는� 말이다.�

그리고� 본문의� � '잘� � 예언하였도다'에서� '잘'(*� � � � � � � � � � ,� 칼로스)이란'적확하다',� '우수하다'는� 뜻으로

서,� � 9절에서도� � 한번� 언급되는데,� 그곳에서는� 일종의� 비아냥거림조로� 사용되고� 있다.� � � 이� 백성이...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예수께서� 인용하신� 사� 29:13은� 70인역(LXX)의� 기계적� 인용이� 아니라� 당신의�

의도에� 따라� 선별한� 자의적� 인용이다.� 따라서� 희브리� 본문(맛소라� 사본)과는� 그� 의미상�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나� 본질적으로는� 그� 의미하는� 바가� 동일하다.� 즉� 그들은� 비록� 각종유전들과� 전통들을� 철저

히� 고수하지만� 실은� 진실과� 경건의� 내적� 눙력이� 결여된� 위선자들이었다(딤후� 3:5).� 실로� 그들의� 외적

인� 경건은� 거짓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종교적� 경건의� 진정한� 대상이신� � 분에게� � 그들의� 삶� 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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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온전히�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Anderson).� 실로� 그들은� 형식적� 신앙� 생활로� 인해� B.C.� 7C경� 이

사야에게서� 책망받았던� 그들� 조상처럼� 입술만의� 신앙� 고백과� � 위선적인� 생활� 및� 참� 경건의� 능력을� 상

실한� 채� 거듭거듭� 수행하던� 형식� 위주의� 예배� � 의식� 등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멀어져� 갔던� 것이다.�

한편�예수의�이� 말씀은�이사야가�원래�그의�글을� 기록할�때� A.D.� 1C에� 존재할�서기관들과�바리새인들

을� 염두에� �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사야의� 비판이�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해당된다는�의미이다(마� 15:7� 주석� 참조).� � � � � � � � � � � � � � � � � � � � � � �

=====7:7� � 사람의� 계명으로�교훈을�삼아� -� 여기서�예수는�소위� '구전� 율법'이라고�하는� '장로들의�유

전'을� 사람이�만든�계명이라고�규정한다.� 이'사람의�게명'은� 8절에서도� � '하나님의�계명'과� 대조를�이루

어� 강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사람이�

작위적(作爲的)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 � 권위에� 절대성이� 없음을� 선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장로들의� 유전이�생겨난� � 이유는�성경에�기록된� 율법만으로는�방대하고�복잡한�인생� 제반사에�대한� 구

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 목적과� 계명의� � 핵심에

서� 이탈된� 개개의� 구체적인� 규범들은�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는� 허망한� 것으로� 변질될� 소지가� 다분하였

으며,� 특별히� 조상들의� 권위와� 민족적� 우월감에� � 도취되었던� 유대인들의� 심성으로는� 그러한� 위험에� 필

연적으로� 빠질� 수밖예�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 사람의� 계명은�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라는�말에�의해� � 그� � 권위가� 완전히�부정된다.� 즉� 예수께서는�그들이� 율법처럼� 믿고� 지켜� 왔

던� 정결� � 의식이� � 결국�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헛된� 것이� 되었다는� 것을� � 말함으로

써(마� � 15� :9참조)� 그것을� 지키며� 자랑하거나,� 그것을� 지킴으로써� 거록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 그릇된�

자만심을� 철저히� 해부(解剖)하셨던� 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그러한� � 자만심을� 가지고,� 정결� 의식을�지키지�못하는�사람들에�대한�우월감을�느끼며�또� 지키지�못하는�사람들을�죄인� 취급하던�종교�지도자

들의� 행동과� 그� 권위� 및� 그� 가르침의� � 내욤� � 등을� 모조이� 무시하고� 거부하신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 하나님에대한� � 경배가� 보이는� 사람의� 규범에� 의해� 무시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

니라� 사람� 자신의� 위선적인� 종고� 형태를� 찬양하는� 지도자에� 대한� 예수의� 준엄한� 심판이라� 할� 수� 있다.� �

� � �

=====7:8�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 앞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계명'과� 대조되고� 있으며,� '버리고'와�

다음에� 나오는� '지키느니라'가� 대비를� 이루어� 예수의� 비판을� � 명료하게� � 보여� 준다.� 예수가� 말하는� 하

나님의� 계명이란� 인간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로서,� 이� 메시지는� 인간의� 그� 어떤� 인위

적� 규범보다� 우위에서며� 또� 모든� 인간� � 활동은� 그� 메시지에� 온전히� 귀결(歸結)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관계를� 무시한� 일체의� � 규범과� 판단은� 철저히� 인간�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형식과� 위선만이� 남을� 뿐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19:18과� 신� 6:5� 등에서� 가

장� 잘�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은� '네� 마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뚱을� 다하여� � 주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고� 네� 이웃을�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12:28-34).� 결국� 예수는� 바리새인들과�서기관들이� 하나

님� 사랑과�이웃사랑을� 배척한�것으로� � 천명하면서� � 오히려�그들이�종교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법을� 어

긴� 자들임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당시� � 그들이� 갖고있던� 철저한� 하나님� 신앙과� 종교적� 율법이� 지배하

는� 사회에서는� 이� 같은� � 표현이� 체제� 도전적인� 발언으로� 들려지기에� 충분할�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예

수는� � 단순한�체제�도전적인�저항을�하신� 것이� 아니라�모든� 율법적인�관습이�하나님사랑과� � 이웃� 사랑

을� 위한� 봉사가� 되어야�함을� 천명하심과�아울러� 그러한�관습이나�율법들이�도리어�하나님에�대한�배신

이나�이웃에� 대한� 고통으로� 나타날�때에는� 단호하게� 도전하고�맞서� 싸운� 것이다.� � � � 사람의� 유전을�지

키느니라� -� 앞에서�말한� 하나님의�게명을� '버리고'와� 대립되어�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

보다� 인간의� 계명을� 더� 중요하게� 여김을� � 비판하고� 있다.� 즉�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못하고� 오직� 인간의� 말과� � 인간의� 칭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9� �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 여기서는� 앞절에서� 언급된� 문장의� � 어순을� � 바꾸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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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그들이� 중요시하는� 정결� 관습이� 사람이만든� 것,� 곧�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

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구속력을� 가질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과� 대

립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의� 유전은� 원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침해하지� 못하

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에워싸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전이� 도리어� 율법

을� � 왜곡하고,� � 경화(硬化)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이� 구절은� �9-13절에서� 말하고� 있는� 유전들과�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는� 구체적� 예증� 제시를� 위한� � 문제제기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단정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의� 계명을� 버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 � 잘� 저버리는도다� -� 이� 구절은� 6절에서� 언급된� '잘� 예언하

였도다'와� 대응되는� � 표현으로서� 그릇된� 종교라서� 집착해�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을� 비웃는� � 독설

적� � 발언이다.� 즉� 이말은� 그들이� 너무� 쉽게,� 간단히� 하나님의� 게명을� 포기향다는� � 뜻이다.� � 사실� 그들

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거침없이� �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

고� 사람의�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 피해가는� 수단으로서� 사람의� 전통이� 동원

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 앞에� � 경건해지려는� 위선자들의� 특징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10� � 모세는�네�부모를�공경하라�하고� -� 예수는�앞절에서�언급한내용,� 즉사람의� � 전통을� � � 따

르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언행을� 구체적� 예증을� 통해서� 반박

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믿고� 있는� 모세의� 계명을� � 예로� 들고� 있다.� 즉� 예수는� 그들의�

주장에�내적� 모순이�있음을�증명하기�위해�그들의�말과� 그들의�믿음을�대비시키는�방법을�사용하고� 있

는� 것이다.� 이� � 구절은� � 출� � 20:12과� � � 신� 5:16에� 나오는� 십계명의� 제� 5계명으로서� 예수는� 70인역

(LXX)과� 히브리성경을� � 거의� 그대로�인용하고�있다.� 이는� 바로뒤에�이어지는�내용과�동일한� � 강조점을� �

두고있으나� 후자가� 효(孝)에� 대한� 소극적.강압적� � 명령이라면� 본문은� 적극적이고� 당위적인� 명령이라�할� 수� 있다.� 한편�마태의�기록에�의하면� '하나님이�이르셨으되'(마� � 15:4)라고� � 본� 내용의�초두를�장식

하고� 있어� 본문의� '모세는...하라하고'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차이는� 원저자(하나님)와�

그� 저자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반포한� � 기자(모세)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두� 표현은� 공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 신적� 권위를� 내포한� 말이라� 할수� 있다.� � �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 이� 구절은� 제� 5계명(출� � 20:12)을보충� 설명한� 규례로서� 출� 21:17에� 나오는� '효'를�

주제로� 한� 저주문이다.� 이는� � 맛소라� 사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본문은� 앞에서� 언급

한� 부모� � 공경에� � 대한� 계명과�부모에� 대한� 불공경의� 대가를�극명하게�대조시켜� 강조하고� 있다.� 즉� 비

록� 부모를� '훼방'(욕하고� 저주하는� 것)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며� 심지어� � 사형까지� 시

키도록� 명하셨다는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 범법이� �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전을� � 통한불효롤(11-13절)� 죄로� 평가하고� 있다.� 사

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7:11� �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 그무엇'이란�

뜻이다.� 즉� 자식이�부모에게�봉양하고자�할� 때� 그것이�그� 부모에게�상당한� �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선

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말은�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고르반(*� � � � �

� � � � � � � ,� 코르반).�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 � � � � � � � � � � � � � � � � � )의� 음역(音譯)으로서� 구약� 시대의�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

리키는� 매우� 신앙적� � 의미였었다(레� 2:1,� 4,� 12).�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음역과� �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 � � � �

� � � � � ),� 즉'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또�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

골당(納骨堂)의� 비문(碑文)에서� 같은� 형태의� � 용법이� � 발견되었다.� 즉�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표현이다(J.A.� Fitzmyer,� Derrett).� 물론� �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

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의무를� �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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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드림이�되었다고�말하기만�하면�더� 이상� � 부모에게� � 할� 의무가�없어진다

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 책임을� � 회피하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 할� �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그� 물건에� � 대한� 소유권을�부모를�위시한�모든� 타인으로부터�제한시킬�수가� 있

었다.� 이� '고르반'� �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부모� 공경� 둥)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

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

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기만적인�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

반을� � 빌미로�부모� 공양을� 등한히해서는안� 된다고�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 아직� � 그� 조항

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고르반의�폐단을�계속�고집하였다고�한다.�

=====7:12� � 제� 아비나�어미에게...아무� 것이라도�하여� 드리기를� -� 이� 구절은� 10절에서� � 언급된�계명

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모두가� 꼭�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했을� 때,� 11절의� � 논증을� � 통해� 그들이� 모세가� 준� 계명을� 어겼음이�

명백함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돌아갈� 대가는� 10절에서� 언급한바처럼� 반드시� 죽게� 될� 것� 뿐

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 여기서� 먼저� '폐하며'(*� � � � � � � � � � � � � � �

� � � � � � � ,� 아퀴룬테스)란� 9절에� 언급된� '저버리다'는� 뜻보다� 그� 의미가� 더욱� 강하며� � '파기하다'.� '아예�

무시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실로� 예수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시키

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그들의� � 언행에� � 대한� 결정적� 모순을� 지적하는� 말인데,� 즉�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 충성을� � 위해� 만들어내고�지킨�율법적�관습이� 결과적으로는� 10-12절에서�논증

된� 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여� 파기시킨�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

과� � 서기관들은� 율법이�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 뭇했고� � 하나님의� � 뜻이� � 사람에� � � � 대한�

사랑에� 있음을� 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실로� 사람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

시� 분명해지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 사랑.봉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

이다.� 예수가� 율법주의자들의� 언행을� 비판한� �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오늘날에도� 교회� 전통이

나� 교리� 그리고� 권위에� 집착하여� 교회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 사람에대한� 봉사와� 세상에� 대한� 봉사

를� 소홀히� 하거나관심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교회들은�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 이같

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위선되고� 거짓된� 종교� 형태가�단지� 부모� 공경에� 관

한� 제� 5계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고� 밝히신다.� 특히� '행하느니

라'(*� � � � � � � � � � � � � � ,� 포이에이테)는� 말은� � 능동태�현재� 시상으로서�그들의�행동이�습성화되고�중복되

고� 있음을,� 즉� 그들의� 그릇된� 신앙� 행위가� 거듭� 노출되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 여기서� 이야기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즉� 1-13절까지는� 제

자들의� 식사� 현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논박(論駁)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부터는� 더이상� 바리새인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 예수는� 다시�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있

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정결에� 관한� 주제가� 계속되고� 있으므로(5절에� 제시된�

바리새인들의�질문이� 15절에� � 직접�답변되어짐)� 연속적인�이야기로�보아도�좋다.� � � 너희는�다� 내�말을�

듣고� 깨달으라� -� 이� 말은� 예언자적� 발언으로서� 각성을� 촉구하는호소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논증된� 바처럼�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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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올바른� 신앙� 실천을� 촉구하는� 호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

의� 시작을� � 알리는� 예고문일� 수도있다.� 즉� 이제까지는� 잘못된� 관습에� 대한� � 비판이었지만� � 지금부터는�

그� 비판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신의� 이야

기� 곧� 내적� 성결이라는� 대주제를� 설파하기� 위해� � 경청하라고� � 요청하는�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15,16�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여기서� 언급되는� 두� 절은� 원래� 한� 절로� 구성된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즉� NIV에서는� 16절이없고� 15절의� 하반부에� 16절이� 포함되어� � 있다.� 이것은� 알렉

산드리아� 사본에서� 16절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본에는(모스코,베자� 등)� 16절에� '들

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필사자들이� 4:9이나� 4:23의� 모형에� 따라�

인용하여� 첨가시킨�것으로도�이해할� � 수� 있다(Metzger,� Textual� Commentary,� p.95).� 공동� 번역에서

는� 전자의것을� 선택하여� � 16절을� 생략하고� 16절의� 내용은� 15절에� 통합시키고� 주(主)를� 달아� 후자에서� 언급한� 첨가문을� 소개한다.� 한편� 여기서는� 1-23절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참으로� 부정(不淨)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표현기법은� 물질적� 부정과� 도덕적� 부정을� � 날카롭게대조시키는� 대구

법(對句法)형태로서� 마가� 특유의� 어휘력이� 구사되고� 있다(V.� �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 343).� 즉� 사람밖에� 있는� 어떤� 것(물질)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과� 사람안에서� 나

오는� 것(심성을� 대변하는� 말,� � 생각,� � 의지,� 영적� 반응�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 날카롭게� 대

비되면서� 딴절에서� � 다시� 언급되는� 것처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참으로� 부정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표현은�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키던� 정결� 예식을� � 모조리� 부

인하는�결과적� 의미를�갖는다.� 왜냐하면�부정한� 음식,� 부정한�물건,� 또는� 부정한�짐숭에�의해서�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들이� � 지키는� � 정결� 예식은� 소용없게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레위기�법전(레� 11-15장)이� 명하는�바� 정� .부정의�규례에�대한� � 새로운�해석,� 곧� 그� 영적� 중요

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진정� 예수가� 말하는� 참으로� 부정한것은,� 물로도� 씻을� 수� 없는� 부정의� 근

본� 원인이되는� 사람의� 마음이다.� 따라서� 참으로� 부정한것은� 자기� 안에� 있으며,� 부정한� 것이� 밖에� 있는�

양� 정결� 예법에만�관심하면서�자기가�갖고� 있는� 부정한�것을� 은폐시키려하는�모든�위선적인�정결�예법

은� 부정한� 것이다.� 실로� 예수는� 여기서� 철저한� 자기� 변혁,� � 자기� �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결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의식(儀式)으로� 되는� 것이� � 아니라� 속� 사람� 곧� 그사람의� 인격과� 양심과� 영혼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되는� 것이기� � 때문이다(마� 15:11� 주석� 참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17� � 무리를� 떠나...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 여기서도� 역시� 이야기의� 장소적� � 배경이�

바뀌고� 있다.� 이야기를� 듣던� 청중들과� 헤어지고� 제자들과� 예수가� 한� 자리에� 있을� 때(가버나움의� 베드

로� 집으로� 추정)� 제자들이� 15,� 16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 질문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가� 즐

겨� 쓰는� 묘사법으로서� 마치� 4:10의� 장면을� 보는� � 듯하다.� 여기서는� '제자들'이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

는데,�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 � 베드로가� 질문한� 것으로� 나온다(마� 15:15).� 마태는� 특정한� 제자� 곧� 베

드로를� 자주� � 내세워� 부각시키는� 반면� 마가는� 전체� 제자를� 등장시키면서� 제자들의� 무지를� � 강조하고� �

있다.� � 여기서도� 제자들이�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쩌면� � 마가는� 자신

의� 복음서를� 기록하는데� 중요한� 증인� 역할을� 했던� 베드로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간과해� 버렸는지모른

다.� � 한편� 여기서�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비유'에� � 대한� � 것이었는데,� 예수가� 한� 이야기는'비유''라기� 보

다는�오히려�격언적인�이야기라고�볼�수�있다.� �

=====7:18� � 너희도� 이떻게� 깨달음이� 없느냐� -� 이와� 같은� 표현은� 마가의� 특징적� 의도와� � 결부되어있

다.� 즉�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8:17에서도� 같은� � 형태의� 말로�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함'을� 꾸짖고있다.� 그� 외에� 간접적으로� � 제자들의� 무지를� 꾸짖는� 경우로는� 씨뿌

리는�자의�비유(4:13),� 물위를�걸으신�기적(6:52)� ,� 부활�예고에�대한의문(9:10)� 등이�있다.� 여기서�예

수의� 말� 뜻을� 제자들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반� 청중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너희도'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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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즉� 청중도� 제자들도� 모두� 예수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몰이해에� 대한� 예수의� 실망감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함을� � 모르느냐'고� 반문하

면서�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특히� 제자들에� 대한� 실망의� � 표시이다.� 이와� 같이� 청중과� 제

자들이�예수의�가르침이�비유와�같은� 것이� 아님에도�불구하고�이해할�수� 없었던�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의� 모든� 배경을� 생각할때� 너무나� 과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너무� 뜻밖의� 신인이기� 때문에� 고정�

관념을� 벗어나� � 이해하기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인간을� 더럽게� 하는� 본질적(本質的)인� 원인이� '밖에서�들어가는�것'� 곧� '식물'이�아님을�역설적으로�강조하셨다.� � � � � � � � � � � � � � � � � �

=====7:19�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 예수는� 먹어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 것이사람

을� 더럽히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먹은�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아니라� '위'와� '

창자'로� 소화되어� 베설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이� 먹어서� 들어간� 것은� 배를� 통해� 다시� 배설됨

으로써� 마음과는� 아무관계가� 없다는�말이다.� � 여기서� '마음'은� 인간활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지.정.

의'의� 좌소(坐所)이며� � 비물질적인� 내면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배'는� 순수히� 물질적� 개념을�나타내며,� 또� 인간� 육체의� 신진� 대사를� 이루게하는� 전과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현상적으로� 볼� 때에

도� '마음'은� 물질적인�것과는� 무관하며�도덕적,� 영적� 측면에서만�더럽혀질� 수� 있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소화� 기능을� 적나라하게� 설명하심으로써� 음식과� 인간� 부정� 문제와는�

아무런�관련이�없음을�천명하셨다.� 이로써� � 예수는�레� 11장,� 신14장� 등에�언급된�식물의�정.부정� 관계

법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시고�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계신다.� � �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하

셨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모든� 식물을� 깨끗이하면서'이다.� 이� 구절은� 예수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마

가가� 첨가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In� saying� this,� Jesus� declared� all� foods�

"clean",� NIV).� 즉� 예수의� 말을� 종합하여� 결론적인� 해석을� 언급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음식의� 정

결에� 관한� 논쟁이� 많았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인의� 관습과� 이방인들의� 식사� 관

습과의� 차이에� 상호충돌이� 생겼기� 때문이다(롬� 14장;� 고전� 8,� 10장;� 갈� 2:11;� 골� � 2� :16).� 특히� 이방�

선교를� 한� 바울은� 이� 같은� 문제에�부딪혀� 그의� 서신을� 통해여러�차례� 언급하고�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한� 것� 때문에� � 위신적� 행동을� 취하다가� 바울에게� 책망받은� 적이� 있다

(갈� 2:11-14).� 이러한� 논쟁에� 결정적� 쐐기를� 박는� 사건이� 베드로의� 욥바� 체험이다.� 즉� 베드로는� 욥바

에서� 환상중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 말라'하는� � 하나님의� � 음성을� � 듣거� �

된다(행� 10:1-16).� 그리고� 곧�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

어� 이방인의삶과�구원에� 대하여�긍정적� 판단을�하게� 된다.� 아마도� � 마가� � 역시�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정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결론적� � 핵심어로� '식물은� 깨끗하다'는� 선언을� 한� 것

으로� 보인다.� 바울도� 롬� 14:13-17에서� � 무엇이든� 더러운� 것은� 없고� 더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문제이

며,� 음식� 문제로� 사람을� 괴롭히지말라고� 말하고� 있으며,� 롬� 14:6에서� 먹는� 것도� 주를� 위해� 먹으며� 먹

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입장은� 정결에� 관한� � 유대� � 전

통을� 거부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허식에� 짖눌려� 있던� 유대인과� 더불어� 이제� 막� 복음의� � 문을� 들어선�

이방인들에게�주어진�자유의�현장이�아닐� 수� 없다(Martin).� � � � � � � � � � � � � � � � �

=====7:20-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 청중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말,� 즉�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더럽히고,� 또� � 더럽히는� �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 또는� '사람� � 속'이라는� 말은� 곧'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음이란�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생각� � 등의� 근저(近著)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하는� 인격의� 중심부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 나오는� � 것의� � 대표격으로� �

악한� � 생각생각(evil� thoughts)을지칭하신다.� 여기� '악한� 생각'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악한� 사상과� � 음

모가곁들여진� 의지적인� 생각으로서� 행동화된� 죄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바로� � 이것이� 사람을� 더

럽게�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 구체적으로�어떠한� 것인지를� � 12가지로�나누어� 설명하는데,� 이

와� 비슷한�언급이�롬� 1:29-31;갈� 5:19-21에서도�나온다.� � 평행�본문인�마� 15:19에서는� 6가지만�언급

되고� 있는데,� 십게명의� 제6.� 7.� 8.� 9계명의�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반면� 마가는� 그러한� 전통� 계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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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와는� 무관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를� 재구성하여� 살펴보면� 음란,� 간음,� 음탕이다.� 이� 세� 종류는� 서

로� � 비슷한내용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상당하는� 죄악이다.� 한편� 그� 각각의� � 차이

점을� 살펴보면� '음란'(*� � � � � � � � � � � � � � � � ,� 포르네이아이)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게를� 뜻하는� 말로

서�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고,� '간음'(*� � � � � � � � � � � � � � � ,� � 모이케이아이)은� 기혼자와� 관계되는� 성범죄이

며,� '음탕'(*� � � � � � � � � � � � � � � � ,� 아셀게이아)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성적� 본능을� 자제없이� 노출시키는�

공개적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 성범죄를� 말한다.�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狂悖).� 이러한� � 것들은� �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 6계명이� 상관되는� '살인'이라는� �

말로� 압축시킬� 수있다.� 여기서� '악독'(*� � � � � � � � � � � � � � � � ,� 포네리아이)이란� 말은� 노동,� � 아픔,� 고통이

란� 뜻의� '포노스'(*� � � � � � � � � )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되고�아프게� 하는� 요인이� 될� 행위를�말한다.� '흘

기는� 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오프달모스� 포네로스)은� 악의적인� 비읏음과� 빈정거림

으로� 응시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시기한다는� 셈어적� 표현이다.� '훼방'(*� � � � � � � � � � � � � � � � � ,� 블라스페미

아)은� 신성모독적인�욕설과�험담을�말하는�것이다.� 그리고� '광패'(*� � � � � � � � � � � � � � � ,� 아프로쉬네)는� 도

덕적� �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을� 뜻한다(foolishness;AV,� RSV).� 그리고� 도덕질(*� � � � � � � � � � �

� ,� 클로파이)은� 제� 8계명,� 속임(*� � � � � � � � � ,� 돌로스,� '을가미',� '덫'이란� 뜻)은� � 제� 9계명,� 탐욕(*� � � � � �

� � � � � � � � � � � � � ,� 플레오%시아이),� 곧� 좀더� 많이� � 가지려는� � 욕망은� 제� 10계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십게명에� 사람과� 판련된� 6가지의� 계명� 중� 부모

와의� 관계만� 빼고� 5계명� 모두� � 포함되어� 있어� 마가� 역시�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한� 것의�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이� 품은� 마음에� 있음을,� 그리고�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예시된� 것일� 뿐이다.� 본절은� 이와� 같은� 뜻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컨대�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 때문에�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통해서�

부정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씻지� 않고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도� 못한다.� 참으로�

정결하게� 하는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 변혁인� 회계뿐이다(욜� 2:13).� � �

� � � � � � � � � � � � � � � �

=====7:24�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 여기서� 먼저� '거기를� 떠나'란� 문자적으로� � '이곳에서� 부터

'(from� here)가� 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아마도� 이곳은� '집'(17절)� 또는� '게네사렛'(6:53)�

아니면�그� 밖의� 다른� 장소를�가리킬�것이다.� � 이중에서� � '게네사렛'곧� 갈릴리로�보는�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즉�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는� 일단� 갈릴리� 활동을�

증단하시고� 그곳을� � 떠나� � 북쪽� � 두로� 지경으로� 그� 거처를� 옳기셨다.� 이� 같은� 활동� 무대의� 이동은� 벱

새다율리아스� 이후� 두번째� 경우이다.� 한편� '두로'라는� 도시는�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서� '뵈

니게'(Phoenicia)라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 도시는� � 원양� � 항해술과� � 예술이� 발달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 지역에� � 얼마만큼� 진입해� 들어갔는지에� 관해�

본서는� 침묵하고� 있다.� 혼히� 마가는� 이런� 세부적인� � 사실들을�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

(W.W.� Wessel).� 어쨌든� � 예수는� � 유대인들의� � 땅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에� 조용히� 스며들어� 가셨던�

것이다.� � �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여기서� 예수가� 왜� 두로에� 왔는지� � 그� 이유를�

추측할� 수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이곳에� 올� 때에� 자기의� 신분을� � 숨기고� 왔음을� 알� 수� 있는

데,� 그례다면� 선교나� 치병� 활동� 또는� 가르침을� 위한� 공적인� 목적에서가�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추측

할�수� 있는� 것은� 휴식과�새로운� 활동을�위한� � 준비를� 위해� 온� 것으로�볼� 수� 있다.� 그러나�상황은�여의

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방� 지역에서도� 이미� 예수� 자신이� 슴어지낼� 수� 없을� 만큼� 당신에� 대한� 소문

이� 널리� 퍼져� � 있었기� 때문이다.� 눅6:17에� 의하면� 산상수훈� 당시에� 이미� 두로와시돈� � 사람들이� � 예수

를� 만난� 사실을� 지적해� 주고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조용하게� � 피신하여� � 쉬려했으나� � 그� � 명성� 때문

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치병과� 선교� 활동을� 하게� 된� 사례가� 이미� 앞에서� �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

(6:30-34;53-56).� 한편� 본문에� 제시된� '한� 집'이란� 그곳� � 원주민의� 집인지,� � 유대인의� 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예수께� 대해� � 상당한� �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집임이� 분명하다(Meyer).� 이러한� 모

호한�사실들과�더불어� 또� 한가지�여기서�분명치� 않은것은�예수가�제자들과�동행한�것인지�아니면�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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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두로까지� 왔는지이다.� 이에� 대한� 답이될� 만한� 근거를� 이� 이야기� 속에서� 전혀� 발견할수� � 없다.� � 그

러나�평행� 본문인�마� 15:23에서� 제자들에�대한�언급이�나오고� 있는� 것으로�보아� 이때� � 제자들도�예수

와� 동행하였다고� 단정할� 수있다.� 다만� 마가는� 이� 여행에서� 제자들의� � 역할이주목할� 만한� 것이� 못되었

다고�판단되어�언급하지�않은�것으로�볼�수�있다.� � � � � � � � � � �

=====7:25,26�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께� 대한� 소문,� � 그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신유의�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찻아왔을�것이다.� 그녀는� 예수의�오신소문을� 듣자�마자� '곧'(*� �

� � � � � � � � ,� 유뒤스)� 와서� 예수의� 발� � 앞에� � 엎드려� �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다.� 한편� 그� 여인

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1� :23;5:2� 주석� 참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

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악령'과� '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밖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精神的)�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한� � 딸을� 두고� 있던�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 것이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

라인(a� Greek)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그녀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이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헬라인'(Greek)은� 유대인콰� 구별되는� 의

미에서의� '이방인'(Gentile)� � 에� 해당하는� 말이거나,'헬라어를� 상용하는'(Greek-Speaking)� 사람이라는�

의미일� � 것이다(행� 18:4;롬� 3:9;10:12).� 한편�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었는데,� 여기서� � '수로보니게'

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 '시리아'에� � 야한� � '뵈니게'(Phoemicia)지방을� 말한

다(24절� 주석� 참조).� 당시� '뵈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

는� '리비오�보니게'(Liobyo-Phoemicia)와� � 혼돈을�피하기�위해� '수로'라는� 지방� 이름을�붙여� '수로� � 보

니게인'(SyroPhoemicia)이라이름하였을�것이다.� 실로� 여기� 언급된� 여인은�분명� 헬라화된�이방사람� � 이

었다.� �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 지니고� 있

었다고� 한다(Josephus).� � � 간구하거늘(*� � � � � � � � � � ,� 에로타).� 미완료� 시제로서� 그� 어미가� 자기� � 딸의� �

치유를� 소망하며� 예수께�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있다.� 실로� 그녀는� 오직� 딸

의� 구원을�위해� 민족적�반감이나�개인적�자존심을�모두�팽개치고�예수께� � 매어달리고�있는�것이다.

=====7:27� �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개들에게� -� 예수는� 은유적인� 표현을� 빌어� � 유대민족

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자녀'(*� � � � � � � � � � � � ,� � 테크논)란� � 하나님의� 선민(選民)� 곧� 유대인을� 가리키며.� '배불리� 먹게� 하다'는� 말은� 본� � 상황에서� � '유대인�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의미

로� 볼� 수� 있고,� 좀더� 포괄적으로는�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한� 유대인에케� 우선권이� 있

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 결코�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서� 비롯된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전�

인류에게� � 하나님의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우선� 선택된� 것일� 뿐이었다(창� 12:2,� 3).� �

이러한�특수한�유대인의�선민적�위치에�대해� 예수께서는�제자들의�선교�여행의�지침을� � 통해서도�간접

적으로� 언급하신적이� 있고(마� 10:5),�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원칙을� � 고수하고� 있다(롬� 2:9� ff).한편�

본문에� 언급된� '개'는� 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 때(시� 59:6),� 또는� 자신을� 비하시킬� 때와�

악한� 존개를� 상징할� � 때� � 사용하던� � 말이다.� � 그런데� 본문의� '개'를� 뜻하는� 헬라어'퀴나리온'(*� � � � � � � �

� � � � � � � )� 야생의� 들개가� � 아닌� 가정에서� 기른� 애완용� 또늘� 귀여운� 강아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은� 부드러운�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마� 15:26)� 그러나� '개'라는� 사실� 그� 자체는�

본질상� 비천하고� 속된� 경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녀'와� '개'의� 대비

(對比)를� 통해� 신적� 특권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 이방인사이의� �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이것은�영구한�숙명론적�차이로�볼� 수는� 없다.� 그에� � 대한�증거로서�마틴(Martin)은� 본문의'먼저'(*� �

� � � � � � � � � � ,� 프로톤)라는� 말에� 주의를환기시고� 있다.� 즉� 그는� 13:10� 주석에서처럼� 이� 말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 다음과같은�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프로톤)'이� 삽입된� 것은� 이스라엘의�

배타적� 특권이� 한� 때뿐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교회가� 생긴� 직후의� 기간까지는� � 자녀들(이스라옐)이�

'(먼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이� 특권이� 영원히� � 유대인에게만� � 속하는� 배타적인� 특권일� 수만은�

없었다.� '후에는'(*� � � � � � � � � � � � � ,� � 휘스테론)� � 이방인� � 개들� � � 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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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이여인에� 관련하여� 사용된� '후에는'� (이� 말은� 성경� 본문에는� 없는� 것이며� 임의로� 붙인� 것임)이라는�

시간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간구에� 응

답하고� 게시기� 때문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28� � 주여� 옳소이다마는� -� 본서에서�예수가'주'로� 불리운�곳은� 이곳� 밖에� 없다.� 여기� 언급된� '

주여'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참신

앙이�마음에�내포되어�있다.� 그리고� '옳소이다마는'이라는� � 말은� 상대의�말을� 일단은� 인정하나�그� 말에�

대한� 또다른� 자기� 이견(異見)을� 피력하고자� �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반의� 접속사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그녀는�예수께서�언급하신� � 바� 유대인의�우선권과�특수한권리를� 인정하는�동시에�비천한�자신의� 존

재('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 자신이� � 그리스도의� � 은혜에

서� � 제외되는�것을� 결코� 인정할�수� 없었다.� 이� 같은� 불굴의�답변은� 그녀에게� 내재된� � 강한믿음의� 반영

으로� 볼� 수� 있다.� � �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수로보니게� 여인은� 재치있게� � 예수

의� 말을� 받았다.� 즉� 그녀는� 마치� 상� 아래서� 꼬리를� 혼들고�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시키면서� 적어도� 자신과� 자신의� 딸도� 그러한� 입장에서� 당신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청한� 것

이다.� 실로� 그녀가� 간청한� 것은� 유대인에게� 특별히� � 허락된은혜와� 축복의� '부스러기'에� 블과했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뒤�유대인들의�배타적� 우월감과�편견에� 대해� 극한� 대조를�보여� 주고� 있다.� '개'라

는� 말로� 자신을�지칭할� � 때� 받는�인격적�모멸감과�훼손된�자존심을�개의치�않고� 주의� 은총을�간청하는�

모습은� � 극한� 겸손(謙遜)의� 표시이다.� 이� 같은� 겸손과�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대비되어� � 이방� 여인의� 믿음이� 높여진다.� 마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유대인들의잘못된� � 전통을� 무효화하고� 이방인

의� 모습� 속에서� 겸손하게� 복음을� 수용하는� 모델을� 제공하며� 예수의� 언행에� 대해� 사사� 건건� 시비를� 거

는� 유대인들을�간접적으로�공격하고자�한다.� � � � � �

=====7:29� 이� 말을� 하였으니� -�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매우� 만족하셨다.� 즉� 예수는� � 그� 여인

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로써�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셨던� �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평행본문에� � '네� � 믿음이� � 크도다'(마� 15:28)라고� 기록하고� 있다.� � � � 돌

아가라� 귀신이�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 이제� 이방� 여인이�안고� 시름해했던� �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다.� 예수는� 순수하고� 끈질긴� 그녀의� 믿음에� 충분히� � 만족하시고� 이제'돌아가라'(you� may� go,�

NIV)고� 말한다.� 이것은� 치병� 기적을� 행한� 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투로서� 완전한� 회복을� 전제한� 말

이다.� 즉� 육체적,� 정신적�소명� � 뿐� 니라� 가정� 복귀� 또는� 사회복귀를�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예수는� '귀

신이�네� � 딸에게서�나갔느니라'는� 선언을�통해� 그녀의�믿음에�확실히�응답하셨다.� 특히� � 여기� � '나갔느

니라'는� 말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어� 그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 떨어져� 나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그

리고�놀라운�사실은�예수가�어떤� 특별한�명령이나� � 외침� 없이� 당신의�거룩한�의지로�치병� 기적을�이뤄

냈다는� 것은� 그분의� 시간과� 공간을� � 초월한� 신적� 권능을� 보여� 준것이라� 하겠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30� � 집에� 돌아가� 본즉...귀신이� 나갔더라� -� 예수께서는� 그녀의� 집에� 상에서� 떨어진� � 부스러

기를� 선사하셨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수께서� 허락하신� � 선물을� � 분명히� �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가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딸이� 침상에� 누워� �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아마도�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오면서� 최후의� 발악을� 함으로써� 그� 딸을� 기진� 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9:26,�

W.W.� Wessel).� 이와�더불어�마가는'귀신이�나갔더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

이모니온� � 여세레뤼도스)는� 말을� 완료� 능동태� 분사로� 기록하여� 그� 딸에게서� 귀신의� 존재가� 완전히� 떨

어져나가�매우�깨끗한�정신�상태를�유지하고�있었음을�암시하고�있다.� � � � � � � � � � � � � � � � � � � � �

=====7:31� �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 물론� 이'갈릴리� 호수'는� 이방� 지역에� 속한� 땅을� �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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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문에� 제시된� 예수의� 여행로를� 지리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기는� � 쉽지� � 않다.� 아마� 예수는� 두로�

지경에서� 북쪽으로� 약40km� 올라기시돈� 지역의� 이방인� 거주지를� 통과하며� 레온테스� 강(the� Leontes)

을� 건넌� 후� 다시� 남동쪽으로�내려가�헤롯� 빌립의� � 영토를�통과하여� � 갈릴리호수의�동쪽에�이르러�데가

볼리(Decapolis)� 지역으로� � 들어가셨을� 것이다(가이사랴,� 알럭산드리아,� 서방� 사본� 등.)� 이� 여행을� 하

는� 동안� 예수께서� �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해서� 마가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예수는� � 지금� �

이방인� 구역에� 거하고� 계신다.� 여기� 언급된� 데가볼리(10개의�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 및� 그� � 영토)에는�

대부분�이방인들이�거주했으나�상당수의�유대인들도�함께�살고�있었다.� � � � � � � �

=====7:32� 귀먹고� 어눌한� 자� -� 사람들이� 예수앞에� 데리고� 온� 환자는� 귀먹고� 말을� 하기� 곤란한사람

인데�귀머거리는�자연히�말하기�곤란해지거나�아예�무의미한� 소리만�지을� 줄� 아는� 벙어리가�되는�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본문에� 사용된� '어눌하다'(*� � � � � � � � � � � � � � � � � ,� 모기랄로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이곳� 한� 곳에만� 나오며� 70인역(LXX)에서도� 단� 한� 곳에만� 제시되있다.� 특히� 70인역의� 상황은� 본� 기사

와� 깊은� 상관관계를� 맺는다.� 즉70인역의� 사� 35:6은� 메시아시대를� 제시한� 것으로� '그� 때에� 저는� 사나�

사슴같이� 살� 것이며�벙어리('모기랄로스')의� 혀는� 노래하리니'라고�시적으로�묘사하고� � 있듯이,� � 마가는� �

이� � 같은� 사실을�분명� 염두에� 두고� 본� 사건을� 기록했을�것이다.� � � 안수하여�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이

미� 5:20주석에서� 언급된� 바처럼� 이� 지방에� 예수의� 치병� 기적이� 널리� 알려져있다.� 그리고� 안수하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 알려져� � 있는� 치병� 행위였다(5:23;6:5).�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33� �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환자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피해간� 이유로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36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 군중들의� � 흥분된� 분위기를� 잠재우

기� 위해� 병고치는� 기적을� 비밀로� 하려� 했기때문이다.� (2)� 예수가� 한자와�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 환자는� 사람들의� 손에� � 이끌려� 온� 피동적� 인물이었고� 자신의� 치유� 의지가�

거의� 없던� 상태였을� 것이다.� 이에� � 예수는� 그� 무감각하고� 피동적인� 인격에게� 당신의� 존재� 본질을� 분명

히� 드러내시고� 그로하여금�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5:40에서� 회당장� �

야이로의딸을� 살릴� 때도� 이러한� 은밀함을� 요구하신� 바있다.� � �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

이와� 같이� 환자의�취부에�직접� � 접촉하면서�침사용하는�치료법은�당시�일반� 백성들�사이의�민간요법으

로� 많이� 활용되었던� 것� 같으며� 특히� 침이� 치유의� 효과와� 화를� 막아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형태로� 치병� 활동을� 했다는� 고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

(A.D.� 69-79)이� 소경에게� 침을� 눈에� � 발라� � 치료호다는� � 기록도� � 전해지고(Tacitus,� Hist,� iv.� 81)� 그

외� 플리니우스(Plinius),슈톤(Sueton)등의� 기록에도� 나온다.� �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치유� 행위는� 당시�

혤라와�유대인�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방법으로볼�수� 있다(Taylor).� 그런데�왜� 예수께서는�환자에

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능히� � 치유하실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게셨음에도(2:3-12;3:5)이러한� 행동,�

그것도� 미신적� �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치유법을� 선택하셨을까?� � 이는참으로� 신비한� 장면으로서� �

다만� 추측하건대,� (1)� 예수는�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시

하셨고,(2)� 그를위해�당신께서� 지금�힘쓰고� 게신다는�사실행동으로� 보뗘� � 주셨으며,� (3)� 귀먹고�어눌한�

자가� 능동적으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도와� � 주시기� � 위해� 이� 같은� 행동� 언어를� 취했을� 것이라� 본다.�

여기서�양� 귀에� 손가락을�넣은� � 것은� � 그의� 귀가� 열릴� 것을� 암시하며.� 혀에� 손을� 대신� 것은� 그의� 혀가�

정상으로� 회복될� �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34� �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이� 같은� 행동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볼� � 수� � 있는데,�

6:41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한� 모습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탄식'

이라는� 말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하늘을� � 바라보며� 신음� 소리를� 나타내는�

행위는� 고대의� 기적� 설화에서� 초인적인� 힘을� 끌어들이는� 형식적� 표현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본너

(Bonner)는� 능력있는� 발언이나� 기적능력을� � 나타내기� 전에� 예언자나� 기적행위자가� 하는� 준비� 동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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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 물론� 마가가�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의� 행위를� 이해했을� 리는� 없을�

깃이다.� 오히려� 그는� 이�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 고통마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애정의� � 탄

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물론� 예수가� 하늘을� 보며(요� 11:41;17:1)� 탄식한� 것은� 단순히� 당신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간구한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탄식은�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아픔을� 탄식하는� 당신의� 지극한� 애정� 표현으로� 이해할� � 수� 있다.� 한편� 혹자(Van� der� Loos)에� 따르면�

'예수의� 탄식은� 기도의� 탄식이었으며� 성부와� 성자� 예수의� 감추어진� 교제에� 따르는� 탄식이었다.�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 것이� 늘상� 예수의� 기도� 방법이었다면� 초대교회도� 역시� 이런� 기도의� 자세로� 병

을� 치료� �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단지(예수의� 이름으로)� 치료할� 수� � 있었을� � 뿐이었다'라고�

이� 장면에� 관해� 언급한� 바있다.� � � 에바다(*� � � � � � � � � � � � ,� 여파다)� -� 이� 말은� 아람어의� 음역으로서� 마

가는� 그� 뜻을� 열리라(*� � � � � � � � � � � � � � � � � � � � � ,� 디아노이크데티)로� 밝히고� 있다.� 즉� 마가는� 자신의� �

이방� 독자들에�대한�친절한�노력� 으로서�예수께서�친히�말씀하신�아람어를�언급한�후� 그뒤에� 헬라어로�

설명구를� 덧붙이고� 있다(5:41).� 그런데� 이� '열리라'는� 말이� 단지� � 닫혀진� 귀에만� 관련된� 말이� 아니라�

혀에도� 그영향이� 미치는� 명령어로� 보아야� 한다.� 어떻든예수의� 이� 같은� 명렁은� 그� 환자의� 심령� 뿐� 아니

라� 그� 닫혀진� 귀를� 뚫고� 들려졌다.� � 이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 열릴� 것이다'는� 사� 35:5� 말씀의� 완전한� 성취로서� 지상에� 돌입한� 메시아� 왕국의� 현

존을�분명히�보여�주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35� 귀가� 열리고...곧� 풀려� -� '열리라''는� 명령과� 함께� 즉시� 귀가� 열리고� 말문이� � 열리게�된다.�

여기서� '말이� 분명하더라'(*� � � � � � � � � � � � � � � � � � � � � � ,� 엘라레이� � 오르도스)는� 그가� 적어도�완전한�벙어

리가�아니었으며(그는� 말을� 기억하고�있었다)� 단지� 언어에� 장애(障碍)가� 있었을�뿐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가� 미완료시제로서� 그의� 말의� 호전된� 상태가� 점점� 구체적으로� 또렷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 � � � � � � � � � � � � � �

=====7:36�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 이렇게� 치병� 기적에� 대하여� 비밀로� 침묵하라는� 명

령은�마가가�자주�묘사하는�내용이다(1:43,� 44;3:12;5:43).� 침묵을�요구한� � 대상은�환자자신에게만�아

니라� 그�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과�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 사람� 들에게� 명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명성이� 치병� 기적과� 함께� �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문제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보인다(5:43� 주석� 참조).� � 특히� 여기서� '경계하사'(*� � � � � � � � � � � � � � � � � � � � � � ,� 디에스테이라토)

란� 당신의� � 금지의사가�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반영한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어길� � 것이

라는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들이� 흥분된� 상태로� 당신에� 관한� 소문

을� 퍼뜨리는� 것보다� 오히려� 조용히� 그들� 스스로가� 예수의� 명령에� 순복(順服)� 하고� 또� 그들� 각자가� 당신을�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만나기를�원하셨던�것이다.� � � 경계하실수록�저희가�더욱� 널리� 전파하니� -�

이� 구절� 역시� � 마가의�공통된�언급으로서�침묵�요청�다음에�목격자들은�침묵으로�비밀을�지킨� 것이�아

니라� 오히려� 널리� 소문을� 내어� 전파시켰다고� 소개하고� 있다(1:45).� 이� 같은� 언급은� 침묵� 명령과,� 그� �

명령을� 어기고� 전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감격적� 기적의� 체험을� 잘� 대비시켜� 그들의� � 후분된� 환호

가� 지닌� 부정적인� 모습을� 은연중에� 제시해주고� 있다.� 사실� 그들은� 막상� 예수께서� 로마세력에� 의해� 체

포,� 처형� 당하실� 때� 극한� 조롱으로� 그� 환호를� 대신했던� 것이다.� (마� 27:22,� 23).� 이는� 인간적� 판단과�

기대가� 하나님의� 생각과� 배치(背馳)되고� � 만다는� 사실을� 보여� 준� 단적인� 예라� 하겠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37� � 심히� 놀라...그가� 다� 잘� 하였도다� -�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 묘사하

고� 있다.� 그것은� 놀라� 경탄하는� 것이다.� 여기서� '심히'(*� � � � � � � � � � � � � � � � � � � � � � � � � � ,� 휘페르페리쏘

스)는� 헬라어�문헌들에서�단� 한번� 나오는�단어로서� � '심히� � 이상의',� 곧� '극도로',� '측량할수�없이'란� 뜻

이다.� 이것은� 적어도� 그� 이방지역의� 주민들이� 예수의� 존재와� 능력을� 충격적일� 만큼� 크게� 느꼈고� 또� 그�

모든� 것을� 긍정적� 으로� � 평가했음을� 보여� 준다고� 본다.� 이와� 함께� 마가는� 사람들이� 예수의� 행위를� '그

가� 다� � 잘했다'고� 하는� 말로� 칭찬하며,� 또� 그분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평행� � 본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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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31에서는�그� 감격의�표현을� '이스라엘의�하나님께�영광을�돌리니라'로� � 하면서� � 그� 능력이�하나

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접�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가� 다� � 잘하였도다'란� 말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왜냐하면� 깊은� 의미에

서� 예수의�이� 같은� 기적은� � 메시야� � 왕국의�현존을� 알리는�메시지일(사� 35:5,� 6)뿐� 아니라� 하나님의� '

새� 창조'� � 역사를� �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예수의� 메시야적� 활

동의� � 분명한� 표시임과� 동시에� 이방인� 거주지에서도�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가� � 폭발적으로� � 확장(擴張)되고� 있음을�의미하는�사건이라�할� 수� 있다.� � � � � 마가복음�제� 8장

=====8:1� � 그� 즈음에.� -� 문자적으로� ‘그� 날들� 동안’� 으로서� 본� 사건을� 앞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

유한� 사건(7:31-37)과� 연결� 시킨� 것이라� 본다.� 마가는� 지금의� 장소에관해� 침묵하고� 있으나,� 대개� 이곳

이�갈릴리�호수� 동편에�위치한�데가볼리로�인정되고�있다.

=====8:2� �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먹을� 것이� 없도다.� -�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이유

와� 본� 이적의�근본� 동기를� 말하고�있다.� 즉� 예수의�가르침을�듣기�위해� 모여든� 수많은�군중들을� � 불쌍

히� 생각하여� 그� 대책을� 마련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이것이� 바로�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

을� 버리기�까지� 하신�예수� 그리스도의�심정이다.

=====8:3� �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 여기서� 군중들을�

향한� 예수의� 애정과� 책임� 의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자상한� 어머니처럼� 군중들의� 굶주림을�

자기의�책임으로�여기며�걱정하고�있는�것이다.

=====8:4� �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 예수의� 제안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기력했으며� 부

정적인�것이었다.� 이유는� 5,000명� 급식� 기적때의�금전�문제와는�달리�장소� 문제�였다.� 즉� 집회�장소가�

‘이� 광야’� 곧� 내륙� 한가운데로서� 인가와� 마을로� 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외진� 광야였기� 때문이다.� 따

라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하였으�

것이다.

=====8:5� � 일곱이로소이다.� -� 제자들의� 불가능한� 대답을� 듣고� 예수는� 희망적인� 암시를� 갖고� 남아있

는� 음식에� 대해� 묻고� 있다(6:38주석� 참조).� 여기서추측할� 수� 있는� 것은� 군중들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

음식이� 남아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7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수,� 완전한� 숫자로� 보아�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충만한�축복을�상징한다는�주장도�있다.

=====8:6� � � � 땅에� 앉게� 하시고...� 축사� 하시고.� -� 예수는� 6:41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급식� 기적을� 행

한다.� 그러나� 6:39,40과�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6:39에서는� 무리들을� 푸른� 잔디위에� 앉도록� 했다

고�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냥� 땅에� 앉게� 했다고만� 한다.� 이는� 분명� 장고적� 차이뿐� 아니라� 시간적�

차이를�여실히�증명해� � 주는� 것이라�본다.� � � �

=====8:7� � 작은� 생선� 두어�마리.-� 여기서는� 6:41과� 달리� 물고기�숫자가�불분명하게�언급되고�있는데�

‘생선� 두어마리’는� 헬라어� ‘잌뒤디아�올리가’� 를� 번역한� 것으로서� ‘생선� 몇마리로�번역하는�것이�더� 적절

하다(공동번역).

=====8:8� �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 -� 이처럼� 주님께서는� 필요한� 바에� 넘치도록� � 채워� 주시는�분이시

다(눅6:38).�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우의� 주로서(대상29:11)지극히� 충만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요1:16)성도의� 필요를� 먼저� 아시기� 때문이다(마6: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난과� 궁핍에� 처했

을때,� 하나님께� 의뢰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좌절하는� 등� 매우� 근시안적이

고�즉각적인�반응으�보이는�경우가�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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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 6:44에서는� 남자가� 오천명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구분이�없고� 사람이� 4,000명�이라고�말한다.

=====8:10� �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지방으로.-� � 6:45에서는� 벳세다로� 갔다고� 언급하지

만�여기서는� ‘물통’이란� 이름의�뜻을� 지닌� ‘달마누다’지방으로�갔음을�밝히고�있다.

=====8:11� -� 13� � 이� 이야기의� 발생� 장소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고� 앞에서� 언급된� 급식기적과도� 아

무런�관계가�없어�전혀� 다른� 사건의�이야기가�삽입된�것으로�보인다.� 아마도� 8:1-10주석에서도�언급했

듯이� 6:31-7:37에� 포함되어� 있는� 7:1-23과� 평행을�이루는� 부분을� 8:1-30에� 서도� 만들기� 위하여�마가

가� 이곳에� 본사건(11-13절)을� 하나의� 독립된� 부분으로� 기록�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

다.� 7:1-23과� 본사건은�모두�바리새인과� 예수와의�충돌을� 다루고�있다.� 그리고�본� 사건의� 주제는�하늘

의� 표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논쟁이� 복음서에서� 여러� 곳� 나타나고� 있다(마

12:38-42;16:1-4;눅11:29-32)

=====8:14� � 떡� 가져� 오기를�잊었으매.� -� 여기서�말하고�있는� � 떡이� 어디에�필요한�떡인지�또는� 어디

에� 있는� 떡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본문을� 1-10절의� 급식� 기적과� 연결시켜� 이해한

다면� 4,000명을� 먹이고� 남은� 떡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의�활동에�필요한�식사였을�것이다.

=====8:15� � 경계하여� 가라사대.� -� 여기서� ‘경계하여’란� 미완료� 중간태를� 취하고� 있어,� 예수께서� 몇�

번이고�계속해서�지시하시고�당부하셨음을�보여�주고�있다.

=====8:16� � 이는...없음이로다.� -� 헬라어�원문상으로�이유를� 나타내는�접속사� ‘호티’(왜냐하면)가� 포함

되어� 있는데� 이는� 제자들의� 말을� 직접� 인용문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옮기면,‘이

는� 우리에게� 떡이� 없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가된다.� 그리고� 이를� 보다� 자연스럽게� 옮기면,� ‘하지만

우리에게는�떡이�없는걸’로� 된다.

=====8:17� 의논하느냐.� -� 평행구인� 마16:8에서는� ‘서로’라는� 말을� 추가� 함으로서,� 본절의� 의미를� 더

욱� 명확히� 드러� 내었다.� 즉� 제자들은� 근심되거나� 의혹스렁ㄴ� 문제에� 봉착하여� 먼저� 조님께� 진실하게�

의뢰하기� 보다는� 그들끼리� 왈가왈부함으로써� 해결의� 시???마리를�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형제들

끼리의� 교제가� 신앙생활에� 있어� 필수적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서로를� 비신앙적인� 방향으로� 흐지부지�

하게�끌고� 가는� 합리화의� 도구로,� 전락될� 우려가�있다.� 따라서� 후자의경우에�직면했을� 때에,� 우리는�혼

자서라도�과감히�진리를�위해� 설� 수� 있는� 용기와�지혜를�갖추어야�할�것이다(잠4:27)

=====8:18� � 눈이� 있어도�보지� 못하며.� -� 앞에서도�언급했듯이�마태의�평행� 본문에는�없는� 말인데�이�

구절은� 4:12� 에서� 군중들을� 향해� 했던� 말과� 비슷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사6:9,10을� 인용하여� 책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택망은� 17절의� 책망보다� 더� 강도� 있게� 들리는데� 제자들에게만� 내리는� 책망이기� 보

다는�미련하고�돌이킬줄�모르는�백성과�하나님의�뜻을� � 배반하기를� 일삼는�유대� 백성들을�향한�심판적�

탄식으로� 들린다.� 아마도� 예수는� 제자들을� 나무라면서� 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탄식적인� 책망을� 하

였을�것이다.�

=====8:19,� 20� � 몇바구니...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예수는� 격한� 책망과� 더불어� 제자들에게� 질문

을� 통해� 그들의� 깨닫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치셨으며,� 또� 그들에게� 바른� 개달음을� 주시

기�원하셨다.� 예수를�따르는�것은� 육적인�해방과�함께� 7광주리,또는� 12광주리의�떡만큼이나�넉넉한�영

적� 풍요함을�준다는�암시적인�메시지를�제공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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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되묻는� 말로� 이야기의� 끝을� 장식

하고� 있는데(제자들이� 깨달았는지� 못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평행� 본문인� 마

16:11,12에서는� 예수의� 반문이� 더� 친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반문한�

후� 자신의�이야기가�단순히�누룩에� 관한� 것이� 아니라�바리새인과�사두개인의�누룩에�관한� 것임을�밝히

면서�급식�기적과� 15절의�교훈을�연결� 시키고�있다.

=====8:22� -� 26� � 벳세다에서� 소경을�치우하신� 본�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서는�소개�되지� 않은� 마가만

의� 이야기인데� 내용� 전개가� 7:31-37과� 비슷한� 점이� 많다.� 즉� 환자의� 환부에� 침을� 바른다거나� 제자들

에� 대한� 언급이� 없는점,�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치유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이� 두� 이야기는� 같이�

전해져온� 이야기라고� 보면서� 오히려� 이� 본문이� 7:31-37보다� 앞선�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

나�본문의�위치가�정확히�어딘지는�알� 수� 없다.�

=====8:27� � 가이샤랴� 빌립보.� -� 이곳은� 갈릴리�호수� 북방에있는� 헤르몬산� 기슭에� 위치하여� 요단강의�

수원지가�있는�경치� 좋고� 비옥한�지역으로�알려져�있다.�

=====8:28� � 세례요한...선지자� 중의� 하나.� -� 제자들이� 파악한� 여론을� 통해� 대중들은� 예수에� 대해서�

다양하면서도� 신화적� 인물로� 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언급하고� � 있음

을6:14에서� 헤롯의� 입을� 통해� 밝혔고,� 뿐만� 아니라� 예수를� 엘리야나� 선지자�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하

나와�같다는�평을6:15에서�대중들의�여론으로�밝힌�바� 있다(6:14,15주석� 참조).� �

=====8:29� � 너희는�나를� 누구라�하느냐.� -� 예수께서�지금껏�던지신�질문들은� 바로�본문의� 이� 질문에�

귀착되고� 있다.� 즉� 예수는� 비록� 당신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

신과�가장� 가까운�친구이자�믿을만한�제자들은�과연�당신을�누구라� 생각하고�믿고�있느냐는�것을�묻고�

싶으셨던�것이다.

=====8:30� �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여기서� 예수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하는� 일

체의�반응� 없이� 늘� 하던� 것처럼�침묵을� 지시� 하고� 있다.� 예수의� 침묵� 명령은� 아직� 자신의�신분과� 목적

을� 공개적으로�노출시킬�시기가�아님을�말하면서�한� 쪽으로는�간접적인�암시를�통해� 자신의�신분을� 나

타낸다고�볼� 수있다.� �

=====8:31� � 본절은� 본서� 가운데� 유일하게� ‘메시야적� 비밀’이� 공개� 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시의� 메시야임을� 좀처럼� 밝히려�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메시야직을� 수행하기� 위

해서는� 고난.� 죽음,� 버림받음등의� 수모를� 감수해야�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 하던� 메시야관은� 그

것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야상을� 제쳐놓고� 오직� 영광의�

메시야상만을�고대해�왔기� 때문에� � 만약� 예수가� 자신의�메시야성을� 공개�하게� 된다면�분명�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메시야적�사역을�성취하는데�방해�받을�것이기�때문이다.�

=====8:32� � 드러내놓고� 이말씀을� 하시니.� -� 여기서� 드러내놓고� 라는� 말은‘파르레시아’인데� ‘숨김없

이’.‘명백하게’� 라는� 뜻을�갖고� 있으며�자유롭게�말하는�언론의�자유라는�의미도�있다.

=====8:33� �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 마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로� 돌아서신� 것만을�

언급하는데�비해(마16:23)마가는� 베드로�이외의� 제자들까지를� 향해� 서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마

가는� 예수께서� 꾸짖으시고자� 하신� 대상을�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제자들에게도�

주의를�환기시키고�계심을�묘사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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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 27절에서는� 길가는� 중에�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제자들과�무리에게로�그�대상이�확장되고�있다.� � 따라서�그� 대상은� 12제자들에게만�국한된것이�아니라�

예수를�따르기로�결심한�모든� 신자들에게로�확장�되는� 것이다.

=====8:35� �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역설의� 극치를� 아루는� 이문장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

되고� 있는데� 34절의� 선언을� 설명하기� 위한것으로� 보인다.� 즉� 자기� 부인과� 고난과� 죽음을� 요청한� 이유

를�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집착이나� 이기심에차� 자기� 존제� 보호에철저히� 집착

해� 있다면�궁극적�측면에서�그는�영원한�생명에서�멀어져�있다는�뜻에서�자기� 목숨을�살리려하면�잃게�

될것이라고�경고하는�것이다.

=====8:36�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여기서는� 문장이� 반문하는� 형태로서� 격언적인� 어투인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거나� 당연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형태의� 질문을� 통해� 34,35절에서� 언급한� 내용

을�이해시키고자�한다.�

=====8:37� �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 말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앞절의� 결론구,� 즉� 이�

세상에서� 생명과�맞바꿀�수� 있는� 것은� 하나도�없다는�자명한� 대답을�요구하는�것처럼�보이지만�오히려�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보라는� 질문으로� 이해� 할� 구� 있다.� 그� 디답은�

35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이기� 때문에� 자명해진다.� 즉� 참으로� 목숨과� 맞�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와‘복

음’이다.� 따라서�예수의�가르침과�질문의�내용은�죽지� 않고� 사는� 길에� 대한것이�아니라�참된� 삶을� 위한�

참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촉구하는� 것� 이다.�

결국�예수를�따르는�제자가�되기� 위해서�자기�부인과�자기�십자가를�지고�목숨까지�내어�놓을� 수� 있는�

결단을�촉구� 하고�있는� 것이다(마1:38;� 눅9:23).

=====8:38� �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 예수는�자신의�입장을�결정적으로�밝히면서�이� 시대를�음란하

고� 죄많은� 세대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과� 죄는� 예수와�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예수를�모독하고�교회를�업신여기는�세대를�말한다.� 이� 본문의�핵심은� 33-37에서�

언급한� 제자됨과� 그리스도인됨을� 위한�예수의� 요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종말에� 임할� 심판묘사로� 명백

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희망찬� 종말� 언급을� 통해� 박해받는� 제자들과� 추종자� 곧� 그리스

도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한� 용기와� 믿음으로써(요16:33)예수�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

� � � 마가복음�제� 9장

======9:1�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

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 스럽게� 연결된다.� 그래

서�본절을� 8:28-38의� 구조� 속에�포함하여�이해�하는� 것이�적걸하다.

======9:2� �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제시되는데�눅� 9:28에서는� ‘8

일� 쯤’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

슨한�유대인들의�표현법에�근거한�것이라�본다.� � � �

=====9:3� � 그� 옷이� 관채가� ...�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

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

에�변화된�것으로�말하고�있다.

======9:4� �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와‘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와� ‘모세‘� 라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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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더�자연스런�표현일�것이다.

======9:5� �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응답하다’으�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변화된�예수와�엘리야와�모세의�모습에�의한� 수동적�반응이라고�이해�할� 수� 있다.

======9:6� �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

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

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암시를�제공한다.

======9:7� � 구름이�와서� 저희를�덮으며.� -� 여기서는�산상� 변형에�대한� 하나님의�개입이�묘사되고�있

다.� 구름이�모려왔다는�표현은�하나님의�직접적인�개입을�시사하는�엄숙한�장면을�나타내�준다.�

======9:8� �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

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

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

고�볼� 수� 있다.

======9:9� �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언제나�그러하듯이�산� 위에서�보았던�신비적�체험에�대해� 비밀로�할� 것을� 지시하고�있다.

======9:10� �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

고� 있음을�밝히고� 있지만�제자들을�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뜻하는지�그� 진의를�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

이�아니라�예수� 자신의�죽음과�부활을�제자들이�믿을�수�없었던�것� 같다.

=======9:11� �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

말론에�대해서� 언급하고�있다.� 당시� 서기관들이�가르쳤던�종말론의�내용인� 말� 3:1과� 4:5,6에는� 메시야

가�오시기�전에� 엘리야가�먼저�올�것이라고�되어있다.� � �

=======9:12� � 머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란� 잘

못된�것을� 고치고�바로잡는�것을�뜻한다.�

=====9:13�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

가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

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

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

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마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을�분명히�시사해�주고� 있다..

=======9:14� �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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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

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이라

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본문은� 산상�

변화�사건과�그렇게�큰� 시간� 차이가�없이� 연결된�것으로�볼�수�있다.

=======9:15� �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

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

라와�한�이유에�관해서는�침묵하고�있다.

=====9:16� �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

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

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을...변론� 하느냐.� -� 제자

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

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

3:9).� 진정�하나님의�나라는�말에�있지� 아니하고�오직�능력에�있을� 따름이다(고전4:20).� � �

=======9:17� �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모인� 무리들이나�서기관들은�예수의�질문에�대답할�아무런�책임을� 못느꼈기�때문일�수� 있을� 것

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

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

고� 나선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그간의�되어진�일을� 설명하게�된다.�

=====9:18� � 귀신이� 어디서�든지...�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자기� 아들에게�대한�귀신의�만행

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란� ‘부셔버리다’,‘소리지르다’,‘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파생된�말로서�괴성을�동반한�심한� 경련과�뒤틀림을�의미한다.�

=====9:19� �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세대

‘란� ’족속‘’자손‘,’�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말로� 사용되고�있다.� �

=====9:20� � 귀신이� 예수를� 보고...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

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

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있다.

=====9:21� � 언제부터...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

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

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생애�동안� 계속되어�온� 것임을�시사하고�있다.�

=====9:22� � 귀신이� 죽이려고...� 자주� 던졌나이다.�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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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데� 아마도� ‘물’� 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악한� 영향력이�한� 두� 번에�그친것이�아니라�빈번히�지속되었음을�암시한다.

=====9:23�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 �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

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

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능력을�발휘하는�능동적인�힘인�것이다.�

=====9:24� � 곧� 그� 아이의� 아비가�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더해� 주는� ‘곧’이란� 부사

로써�본문이� 시작되고�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듣자마자�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반항의�고함처럼�크고도�계속적으로�터져나왔음을�암시한다.�

=====9:25� �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

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

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

=====9:26� � 귀신이� ...� 죽었다�하나.� -� 이� 장면은�마가만이�언급하고� 있는데�귀신이�그아이에게서� 쫓

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구신이� 도망치며�

지르는�비명소리라고�볼� 수� 있으며�그� 같은� 귀신의�행동� 때문에�환자는�크나큰�충격을�받아� 다시� 발작

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

으로�치료된것은�다른�치병�기적과�독특하게�다른�점이라고�볼�수�있다.

=====9:27� �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일으켜�세운�사실은�문맥상�새로운�인간의�탄생으로�보는�것이� 좋을� 것이다.

=======9:28� �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

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

자들에게�보충�설명하는�장면이�자주�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아니라�한적한�곳).�

=======9:29� � �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

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

하는�것이�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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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 그� 곳을� 떠나� 가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

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

어난�그�사건� 현장으로부터�떠나�갈릴리�지역을�가로질러�지나가는�것으로�보인다.

=======9: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로� 연결되는데,� 앞

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

을�가르치기�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예루살렘으로�향하시는�동안�이� 일에�거의� 전념하시게�된다.

======9:32� �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제자들이�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

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

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21등).

=====9:33� � 가버나움에�이르�집에� 계실새.� -� 예수의�일행이�가버나움의�어떤� 집에� 들어가� 후식을�취

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아마

도�예수는�선교� 활동의�거점이�되었던�곳을�예루살렘으로�가기�전에� 들러보고�싶었을�것이� 틀림� 없다.

=====9:34� �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

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

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

서�서열�문제가�분명하게�서� 있지�않았기�때문에�발생한�것이라�본다.�

=====9:35� �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

8:2),� 이때�예수께서는�양쪽다리를�주욱�뻗으시고�앉으셨을�것이다.�

=====9:36� �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

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

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내세운�것은,� 그� 시대에�그들이�가장�낮은� 자로� 평가�되었기�때문이다.

=====9:37� � 내� 이름으로�이런�어린아이�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가장� 낮고� 천하며�약한자로�상징

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

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마치�예수를�대하듯이�하라는�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라는�말이� 그것을�암시해�주고�있다.�

=====9:38� �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질문은�앞에서�언급한�섬김에�대한� 예수의�가르침을�듣고�나타낸�반응으로�보인다.� 즉� ‘� 내이름

으로�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예수의� 가르침에�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

용한�것으로�보아,� 그� 상황� 에서�그가� 모든� 제자들을�대표해서�말하였다는�사실을�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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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 �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소속되지�않았다�할지라도�그의�예수� 이름으로�귀신을�내어� 쫓는� 행위를�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듣거나�직접� 보았기�때문에�모방했을�가능성도�배제할�수는� 없다.

=====9:40�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자.-�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를�위하는�자요� 언젠가는�우리의편이�된다는�사실이다.�

=====9:41� � �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

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

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받게� 될� 것이라는�적극적인�의미로서�동조자라고�할� 수� 있다.

======9:42� �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

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

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

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

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

은� 38절에서�요한에�의해서�언급된�질문을�연관시켜�생각할�수도� 있다.�

======9:43� -� 48� �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

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

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

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과� ‘발’그리고� ‘눈’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

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

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발,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이라

는� 형용사‘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이라고�언급하고�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된다.� 물론� 이’조엔‘은� 단

순히�육체적인�생명’을� 뜻하는� ‘프쉬케’가� 아니라�하나님과�연관된�영원한�특성을�지닌�초월적인�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 6)� 44절

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모스코,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대한� 형벌과�심판이�중심을� 차지한�듯� 하지만�사실상� 강조점은�사람의현재적�행동�윤리에�관심

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

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아니고�회개의�철저성과�전인격의�경건성을�강조하기�위함이다.�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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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 �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

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

되지�아니한� ‘가르’라는� 접속사가�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자연스레�연결시켜�주고� 있다.� 따라서�여기

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

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

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도�특별히� 48절과�연결성을�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가장� 타당한�해석으로�볼�수�있다.

=====9:50� �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

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 � � � � � 마가복음� 제� 10

=====10:1유대지경과� 요단강�건너면---즉� 베뢰아지방을�가리킨다.이와같이� 이시기의�지리적배경이�베

뢰아인� 것을� 밝히는데� 있어본서가� 가장� 명확하다.� 마19:1에는� “요단강건너� 유대지경”으로� 되어� 저자가�

강동편에� 거주� 했다면� 바로� 요단강서편� 유대지경이되므로� 혼란이� 되기도한다.� 당시갈릴리지방의� 유대

인들은� 유대로갈때에� 사마리아를통과하지않고(요4:9)� 강동편� 베뢰아를� 우회한� 것이� 관례였다.예수께서

는� 사마리아� 지방으로� 들어가셨으나� 사마리아인의� 반항으로� 베뢰아지방을� 택하신사정을� 누가는� 전한

다.� (눅9:51-56)� .하여튼� 이때유월절을� 맞이하여� 상경하는� 수많은� 순례자의� 행열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신� 것이다.무리가모였거늘---제자들에게� 주신사적교훈(6:33-50)� 이끋나고� 다시무리에게� 에워싸여�

공적광장에�나서신�것이다.

=====10:2그를� 시험하여---당시바리새인들은� 신24:1-2(사람이� 아내를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일

이� 그에게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의� 해석에서� 대립되는� 논쟁

을� 계속하였다.엄격파인� 샴마이파는� 위의“수치되는일”을� 간음으로보고� 간음한이유외에는� 이혼을� 못한다

고� 하였고� ,자유적인� 힐레파는� 무슨조건이든(가령아내가� 밥을태웠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여

기� 바리새인의� 시험한� 목적은� 몇가지로� 추리할수� 있을� 것이다.� (1)예수께서는� 모세의율법주의자보다�

차원�높은� 도덕을�가르켰으므로(마5:27-32)� 이문제에대한�견해를�알고싶어서� (2)이와같은�논쟁에� 예수

를� 끌어내어� 어느편에� 가담시키려고� (3)당시� 헤롯이� 이혼하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가� 죽었으므

로�예수를�같은운명에�빠뜨리기�위해서�등으로.

=====10:3-4모세가어떻게.....이혼증서를� 써주어---예수께서는� 대답에� 앞서� 반문하시므로� 질문자의� 입

장부터� 밝히셨다.그리고� 그들의� 대답으로� 대밥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앞서� 인용하신� 신24:1-2을�

들어�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줌으로�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회답은� 곧저들자신의� 이혼관이

었다.� 저들은� 모세의말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혼증서를�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

이다.� 그러나�예수께서는�모세의말의�근원을�캐서� 밝히신�것이다.

=====10:5마음의� 완악함---합성혀으로“완고한마음”이다.� 앞서� 제자들에게� 실물교수하신� 어린아이와�

(9:36)는� 대조적으로� 감수성이없는� 굳어진� 마음이다� .� 모세의� 율법은� 정상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

간성의� 완악한� 것을� 전재로주신� 차선의� 길이었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계명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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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계명을� 대립시키거나� 성경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21:1의� 참뜻을� 밝히시려

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뜻을� 들어낸것과� 인간의� 실제적인� 죄성과� 그로� 말미암아� 어떤제한이� 불

가피한�사실과의�구별을�명백히�하셔야만�했던것이다”(Cranfield)

=====10:6-8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창1:27� 및� 2:24의� 인용으로서� 모세를� 거슬러� 올

려� 창조에� 시작� 하신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원시적인� 뜻과의� 차이점을� 지적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귀절은� 문자적으로“한남자와� ?여자로”다.� 하나님은� 부부의제도를�창조하시되� 일부� 일처의제도

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일부� 일처의� 제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혼한것에서는� 벌써� 파괴된� 것이

다.그둘이� 한몸이� 될찌니라---“...한육체가� 될찌니라”(몸� σωμα� � � 가� 아니라).그러나� 이는� 히브리용법으로�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몸”으로� 또나아가� “한인격”으로형성되는� 것을� 뜻한다.� 사

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로� 성장하거나�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아담과� 하와는� 떠날부모가� 없었지

만)이성을�마난� 새로운가정을�형성한다.� 가정은�한몸이요.� 한인격인�것이다.

=====10:9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여기� 관계대명사는� 단수로� 부부는�

둘이아니요�벌써하나인�것을�표시하고� ,동사는�부정과거형으로�단번으로�영영짝지워�주신�것을� 말한다.�

여기� 영원� 불변한� 부부의�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 부부는� 창조적인� 원리에서� 또개인적인� 면에서� 하나님

이� 짝지워� 주신� 것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있는곳에� 이혼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 그기원이�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있으므로�피조물인�사람이�이를� 파괴할�수는� 없는� 것이다.�

=====10:10집에서� 제자들이� ---밖에서� 무리에게� 공적으로� 가르치시고� 집에들어가사� 제자들에게� 그교

훈을� 되새겨� 주는� 것이� 예수의� 관례였다.(4:10,� 7:17.� 9:33� 등).이때에도� 이혼문제에관해� 제자들은� 질

문하였고� ,� 그질문에�대답하셔서�보충설명을�하신�것이다.

=====10:11-12그� 아내를� 내어버리고.....아내가� 남편을� 버리고---마태에서는� 산상보훈의� 일부로� 인용

된다.(마5:32).�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창조의� 원리는� 불변의� 원리� 이므로� 가령� 이혼증서를� 써주었다� 하

더라도�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승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부관계는� 불변이며� 따라서� 아내를�

두고� 다른여자에게� 중요한� 셈이되므로� 본처에게� 간음죄가� 되고� �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남자가� 유부녀와� 간음했을� 경우� 그남편에게� 간음죄가되고� 아내의경우는� 남편에게� 간음죄가

되나�남편이�아내에게�간음죄가�되는�경우는� 없다.� 그러므로�예수께서� “본처에게�간음을�행함이요”하신�

것은�랍비들의�교훈을�초월하는�것이라�하겠다.

=====10:13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마태와� 본서의� 낱말은� 갓난� 어린

아이를� 가리키나� 누가의� 용어는� 약간� 큰아이를� 뜻한다.� 또� 이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데리고�

오던� 것을� 묘사한다� .� 저들을� 데리고� 오다가� 제자들의� 꾸지람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납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이� 있었고� (Carr).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머리위에� 손을얻는� 풍속

도� 있었다.� (창48:14).� 예수를� 숭앙한� 추종자들이� 예수께� 축복을� 받고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것도�

제자들의� 자연스런� 행동이다.� 아이들을� 경시하고� 귀찮은존재로� 억누른�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성� 이었

다.� 스팔타에서는� 자녀의� 생살여탈.권은� 아비에게� 있었고� ,� 고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돈받고� 파는수도� 있

었다.

=====10:14분히여겨---본서에만� 보이는� 첨가로� 감정묘사에� 예리한� 저자의� 필치를� 보이는� 것이다.� 제

자들의� 당치않는� 행동을� 강하게� 제지� 하신� 것이다� .�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장� 순수하였

고� ,� 그들의� 오는� 것을� 가장� 반가왔는데� 이런� 스승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그들을� 꾸짖는제자들에게� 실

망과� 의분을� 표하신� 것이다.하나님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이의� 위치를� 높

여줘� 주� 자신과� 같이� 두셨다.� (9:36-37).� 여기에서� 다시� 어린이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 이는� 물론� 문자적인� 의미보다� 어린이의� 성품이� 하나님의� 시민의성품인� 것이다� .� 어린이의� 성품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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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가지로� 지적되나� 중요한� 것은� 순결과� 겸손과� 신뢰(신앙)일� 것이가.�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나라� 시

민의� 성품인� 것이다.� 하여튼� 부모들은� 단순한� 축복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나� 예수께서는� 하나

님의나라�시민에게�까지�그들을�올리시고�또� 축복하신�것이다.

=====10:15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7과� 문자적으로� 같으나� 마태에서는� 다른경우에� 다른�

말씀을� 주셨다.� (마18:3).여기�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 귀와� 더불어� (3:28주참조)또� 이중의�

부정사와�더불어�뜻은� 극히�강하다� .� 전절을�받고� 이를�부정적으로�반복하시면서�강조�하신� 것이다.

=====10:16안고� 안수하시고,축복하시니라---부모들의� 요구(13절)보다� 훨씬� 더많이� 하셨다(Bengel).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걸자의� 그림자인� 어린�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신� 것이다.� 축복하심은� 미완료형이

므로� 얼마동안� 계속된�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하나씩�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Bruce)그러므로� 그

시간은�한참이나�걸리셨을�것이다.

=====10:17한� 사람---그는� 마태에� 의하면� 부자였고� 또� 청년이었으며� (마19:22)� 누가에� 의하면� 관원�

이었다.(눅18:18).� 중앙에�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편

이든� 나이는� 30세가� 지났을� 것이다.� 아마30세가� 겨우지난� 청년� 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서� (10

절)나와길에� 나가실때에� 그가� 달려와� 생의� 도를� 물었다� .� 부자요.관원이요.� 또청년인� 그가� 현세를� 살기

위하여는� � 최고의�조건들에� 만족하지� 않고�영생의� 도를� 물은� 것은� 장한� 일이었다.달려와서�꿇어앉아---

본서에만� 보이는� 상세한� 묘사다.� 달려온데� 그의� 구도의� 열심을� 볼수� 있고� 꿇어� 앉은데� 그의� 겸손을� 엿

볼수� 있다.� 실로� 그는� 여러면으로� 좋은� 점들을� 갖추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가� 부족하여� 영생의� 길에

서� 탄락된� 것이었다.(21절)선한� 선생님이여---독특한� 칭호로� 랍비에게도� 부른적이� 없다.� 마태에는� “선

한”이� 다음어귀에�붙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얻으리이까”로� 되어� 있다.� 두책을� 종합하면그의�

의도를� 추측할수� 있을� 듯하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일을� 행하여야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

이신� 예수께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질문에� 율법주의적� 근본� 과오가� 들어

났다� .� 구원은�무엇을� 행하는데� (to� do)있는� 것이� 아니라�어린아이와같이� 되는데(to� be)있기� 때문이다

영생---본서에는�이절과� 30절에�두� 번나타나고�마태에� 3회� 누가에� 3회만�보이나� 요한복음에는� 17회나�

사용된다.

=====10:18하나님의� 한분이외는� 선한이가� 없느니라----여기� 명사는� “선한”이로다(마가.누가)(선한일으

로도(마태)번역할수� 있다.� 여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유니테리안의주장처럼)

그� 부자청년의� 구도적� 자세의� 과오를� 고치시려는� 것이었다� .� 첫째는� 그를� 인간적� 선의� 개념에서� 하나

님의� 절대적� 선으로� 전환� 시키려는� 뜻이다.� 그는� 예수를� 인간적의미에서� 선한� 선생으로� 불렀기� 때문이

다� ,.� 인간의� 선은� 진보적이고�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인� 것이다.� 둘째는� 율법적� 선에서하나

님께대한� 신앙으로� 돌이� 키시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율법외에� 선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관념에서�그를�깨우쳐�하나님께대한�절대적�신앙으로�이끄시는�말씀일�것이다.

=====10:19살인� 하지말라...속여� 취하지말라,네부모를� 공경하라.제5.6.7.8.9.계명.즉� 둘째� 돌비의� 계

명들로� 인간에� 관한� 것이다.� 마태에는� 결론으로� “네이웃을� 네몸과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맺는다.�

본서에는� 제10계대신� “속여� 취하지� 말라”를� 첨가하고� 있다.� 제10계를� 반영� 하면서도� 위의� 계명들의�

결론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서는� 다같이� 제5계를� 마지막에� 둔다.� 이청년이� 특히� 이계명에� 불

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Bengbl)그리고� 여기� 인륜에관한� 계명만을� 제시하신�것은� 첫째� 돌비에� 나타

난�하나님께대한�계명보다�중하기�때문애가�아니다.� 오히려�그것을�구현하기�때문이다(Calvin)

=====10:20so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허위도� 아니고� (다음절,예수께서� 그를� 보시며� 사랑

하신�것으로보아),예수의�진의를�파악한�것도� 아니었을�것이다.� (종래� 탄락하여�물러간�것으로�보아).그

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쫒아� 6세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또� 준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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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범위에서�였고�율법의�참뜻을�안� 것은� 아니며� .따라서�중심으로�준수한�것도� 아니었던�것이다.

=====10:21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주의깊게� 응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이다.� 역시� 마가� 톡특한� 묘사

다.� 예수께서는� 진실된� 구도자에� 깊은� 관심을� 두시고� 또� 사랑� 하시는� 것이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

으니---누가에는� “한가지� 남은것”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다.� 전절의“� 나지키었다이다”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

중에서� 내가� 미쳐� 실행치� 못핸� 것이� 있나� 보아달라”는� 말이� 있다.그러나� 이부자청년에게� 부족한� 한가

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게는� 무상이었고�

영생의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쳐였다�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한가지� 부족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아니라� 명령이었으며� ,강압적이었으나� 이

영혼의� 성격을� 따른� 개인� 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명령을� 같이주

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것이고�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주고

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줄것과�

,� 예수를� 따를� 것� 두가지였다.� 중심문제는� 후자였으나� 전자는� 그조건� 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시작되지�않는�것이다.

=====10:22슬픈� 기색을띠고---마16:3에는� 하늘에(하늘에� 얼굴을흐리면)적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그부

자청년의� 얼굴색을� 묘사한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냐.재물이냐.(마6:24)는� 선택에� 있어후자를� 택했고� ,�

그결과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만일� 그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왈드의상인� 베드로(Peter� of� Waldo.� 1170-1217)는� 이때� 예수께서� 부자청년

에게� 명하신� “네게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쫒으라”하신� 말씀을� 읽고� 감

격하여� 문자적으로� 모든재물을�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고� 리온의성자� 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 부자청

년이�근심하여�간�것은� 그에게�아직� 회개의�소망이�있는�표시가�될것이다.(Cranfield)

=====10:23� � � �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본서의� 특징어로� 6회� 나타난다.� (3:5주참조)감정적� 표정묘

사에� 능숙한� 마가의솜씨인� 것이다.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구약에

서� 부에대한� 개념은� 상반적인� 두가지� 였다.� 하나는� � 선에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했고,다른� 하나

는� 가난한자가� 경건하고� 부자는� 불경건한자로� 지탄된� 것이다.� 첫째가� 일반적� 개념이었고� (제2계의� 성

취로)둘째는� 특수한� 개념이었다.� (합1:4처럼)하여튼� 이런� 구약적� 배경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의말씀은�

또하나의� 그리고� 전연�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신� 것이다.� 부자는� 개인에� 한하지� 않고� 사회나� 시대에도�

적용될수� 있을� 것이다.� 재물이� 많은� 부자가� 경건된�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것처럼� 재물이많은� 시대나�

사회역시� 신앙에서는� 후퇴한다.� 현재의� 서구제국이나� 미국의� 경향이�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부는� 반드

시� 재물에� 한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아� 지위� 등에� 부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

려운�것이다.

=====10:24제자들이� 그말씀에� 놀라는지라---구약적� 개념에� 젖은� 제자들은� 부자에대한� 그리스도의� 새

로운�견해에�더구나�부자에게�모든�것을� � 버리라는�조건이�너무� 무거움으로�놀랐을�것이다.

=====10:25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것이---약대� � � 는� “밧줄”의� 뜻이있고� 바늘귀� � � � 는� “바늘문”이라�

불리우는� 성의� 작은문으로� 볼수� 있으므로� 이를� � (1)밧줄을� 하늘에� 궤는� 것처럼� 어려운� 것� (2)약대가�

바늘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것등으로� 조화하는� 설명들이� 있으나� 수락되지� 않는다.� 이는� 문자적

이며� 또� 동양적� 과장법으로� 극히� 어려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랍비들이� 인용한� 바벨론� 탈무드에� 절

대� 불가능한일을� “코끼리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것”이란� 말이� 있다.� 탈무드의� 다른귀에� 바늘귀는� 두

친구를� 위해서는� 좁지않고� ,� 온세계도� 두원수를� 위해서는� 넓지� 않다라는� 말도� 있다“또� 코란경에는� “불

경건한� 자에게는� 하늘의� 문이� 닫혀� 있을것이고�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까지는� 그는� 거기�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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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다”라는�귀가� 있다.

=====10:26제자들이�심히놀라---예수님의�말씀은�더욱� 엄격해지고� ,� 제자들의�놀람은�더욱� 심해졋다.�

누가에�의하면� “그런즉�누가� 구원을�얻을수�있는가”� 라는� 질문은�일반� 군중들에게서�나왔다� .� 제자들도�

일반� 군중도� 다같이� 예수의� 엄격한� 교훈에� 놀랐을� 것이다.� 회당을� 지배하던� 관원이며� 따라서� 일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부자청년의� 구원이�그렇게� 어렵다면� 다른사람들이야�누가� 감히� 구원을� 얻을수� 있겠

느냐는�것이다.

=====10:27사람으로는� 할수없으되....하나님으로는� 다하실수� 있느니라---구원론의� 대강령이다.� 구원은�

사람편에� 있지않고� 하나님편에� 있는� 것이다.� � 사람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각성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 그것은� 부자의� 구원에만� 한하지� 않는다.� 부자도� 하나님은� 구원하실수� 있고� 가난한자

도� 스스로� 구원� 하지는� 못한다.====10:28보소서� 우리가---두낱말이� 모두� 강조적이다.� 첫째는� 감탄사

며� 둘째는� 부자청년과� 대조되는� 우리다,역시� 제자들의� 대변자격인� 베드로의� 발언� 이었다.� 예수와� 부자

청연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드로는� 타락해가는� 부자청년에대해� 저들은� 예수의� 요구대로� 행하였다

는� 자각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의� 요구하신� 것처럼� 모든길을버리

고� 예수를� 쫒았다.� (1:18.� 20.� 2:14).이와같은� 저들에게� 하나님의나라의� 구원이과연� 확실한지를� 보장�

받고�싶었던�것이다.

=====10:29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3복음서에� 모두� “내가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귀로시작하여� 강조적이다.� 누가에는� “하나님의나라를� 위하여”로� 되어� 있다.� 결국예수� .� 복음.� 하나님

의� 나라는� 다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버릴것에대해서도� 누가는� “아내”를� 첨가하고“전토”를� 생

략하나�뜻에는�차이가�없다.� 마태는� “세상이�새롭게되어.....너희도�열두보좌에�앉아....”를� 삽입시킨다.

=====10:30금세에� 있어...백배나,내세에� 영생을�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배”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 .� (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

로).본서의� 특색은� “핍박을겸하여받고”에� 있다� .�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 늘� 핍박을� 각오하여

야� 한다.� 정당한� 수고가없이� � � 받은� 축복은마귀의� 선물인� 것이다.� (욥42:12-16).하여튼� 예수께서는� 버

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라고� 보장하신다� .� 그것은� 신령한� 세계의�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을� 체험

치�못하면�주의� 깊은�은총도�깨닫지�못하는�것이다.

=====10:31먼저된자로서� 나중되고...---마태에는� 이� 병행귀� 외에� 21:16에� 다시� 나타나� 일종의� 격언

조로�되어�있다.� � (1)전자는�베드로이하�신도들,후자는�그외신도들(Gould,� Plummer,� Cranfield),� � (2)

유대인과� 이방인(Clarke)� � (3)바리세인과� 세리� (4)부자와� 가난한자들� 등으로� 해석된다.� 첫째가� 일반적

인� 견해다.� 하여튼� 이는� 종말적원리요� .� 하나님의� 세계의� 순서다.� 종말적원리는� 현세적원리와는� 상반되

며� ,� 하나님의� 순서는� 인간의� 그것과� 는� 모순된다.� 이런사실을� 통해� 신앙적� 우월감에� 잠긴� 제자들을�

경계하신�것이다.

=====10: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길에� ---아직� 요단강� 동편� 베뢰아에� 계시는� 것인지(Bruce).dlal� 요

단강� 서편으로� 건너� 가셨는지(Meyer)는� 밝혀지지� 않으나� 여리고에� 가까운� 지점까지� 당도한� 듯하

다.(46절).이여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서� 밝혀진다.� 예수께서� 제자들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쫒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 --감정묘사에� 정밀한� 본서의� 특징이� 여지없이� 나타난� 장면

이다.� 예루살렘의� 지명과� 더불어� 예수의� 수난을� 향해� 감연히� 앞서가시는� 예수의� 자세는� 엄숙했다.� 그

리고�이와같이� 엄숙한�주의� 모습에서� 심상치않는� 정세를� 감지하면서�제자들은�놀라고� 일반� 추종자들은�

오히려� 두려워한� 것이었다.열두제자를� 데리시고---“곁으로.취한”것이다.놀라�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제자

들을�곁으로�불러들이셔서�수난의�예고를�다시�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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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34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그들이� 능욕하며� 침밷으며,채찍질하고� 죽일것이니----수난의�

장소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소� 밝혀진다.� 그리고� 수난의� 예고도� 처음� 두� 번에비해� 구체적이고� 세밀하

여� 축자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이었다.� 예수의� 고난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유대� 유권자들이� 주동이되

고� 이를� 이방인인� 로마� 정권자들의� 힘을� 빌어� 모욕과� 폭행을� 가한후에�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리

고� 3번의� 예고에� 빠짐없이�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첨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승리로� 끋날� 것을�

확인�하신� 것이다.

=====10:35야고보와� 요한이� ---마태에는� � 그들의� 어머니가� 구한� 것으로� 되어있다.� � 아마모자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처음� 부르심을� 받은제자들이며� 베드로와� 더불어� 특히예수의� 신임을�

받은제자였다.� 또그들의� 어머니살로메� (16:1)는� 성모마리아와� 자매간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사

실들이�이런특청의�근거가�되었을지모른다� .

=====10:36무엇을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의구한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

를� 원하옵나이다.� ”� 하였으나�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유도하시기� 까지는� 그소원을� 진술하지는�

못하였다,.� 역시� 양심의�가책을�느껴� 머뭇거렸를�것이다.

=====10:37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우의정과� 좌의정의� 자리였

다.� 우편과� 좌편은� 왕과� 가장� 친근하고� 왕다음가는� 영광의� 자리였다.� 베드로가� 예수께� 모든� 것을� 버린�

보상을� 요구� 했을때(28절)� 예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되어� 인자가� 자기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나를�

쫒는� 너희도� 열두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리라(마19:28)하셨다.그말씀을� 기억하면서�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이다.� 또� 메시야가� 오시면� 곧지상에� 왕국을� 세우고�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는� 유

대인의� 일반적� 개념� 이었다(행1:6)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새롭게되는� � 때는�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

고� 그종말� 이전에� 메시야의� 고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야고보� 형제나� 유대인들의� 오해는� 종말

적� 메시야왕국� 이전에� 있을� 고난을� 생각지� 못한� 것이� 었다.� 하여튼� 야고보� 형제의� 요구는� “인간의� 허

무한�공명심을�비치는�밝은�거울� 이었다(Calvin)

=====10:38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근본적으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구하는바를� 알지� 못한다.� 자기자신을� 바로� 알지못하며� 자기의� 하는일을� 알지� 못하는사람이� (눅23:34)

자기의� 구하는�것을� 알수� 없는� 것이다(롬8:26)구체적으로말해� 이때� 야고보�형제는� 그들이�구한� 우편과�

좌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곳은� 두강도가� 달린� 십자가� 들이었다.)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

자가에� 달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행진� 하시는데� 저들은� 왕의� 보좌를�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근

본적인� 착오에서� 모든견해나� 구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나의� 마시는잔을� ...받는� 세례를---구

약에서� 하나님의� 총애도� 뜻했으나� (시23:5,116:13)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았

다.� (시75:8,� � 사51:17-23,� 렘25:15-28,� � 49:12,� 51:7,겔23:31-34,� 합2:16,� 슥12:2).본문의� 배경은�

물론� 후자다.� <세례>는� 본서에만� 첨가된� 것이다.� 이낟말의� 동사형은� 물이� 넘치는� 것이나� 거리에� 사람

들이� 쇄도하는� 것으로� 넘치는�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잔이나� 세례는� 다같이� 그의�

받으실�고난을�상징한�것이다.

=====10:39� � � � � � 할수� 있나이다----이자신에�넘치는�회답은�저들이�아직� 예수의�말씀하신�뜻을�이해

하지� 못한� 증거였다.� 그들의� 오해는� 두길로� 추측할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를� 영광으로� 착

각하고� 이와같이� 혼연히� 대답할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령� 그것을� 고난의� 잔으로� 알았다해도� 메시야

왕국을� 건설을� 위한� 충신들의� 고난� 정도로� 알았을것이고� 십자가의� 수치고� 극심한� 순교의� 고난으로는�

상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편이든� 저들은� 예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단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잔을� 마시며---그리스도는� 높고�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대답을� 긍정하신다.�

이와같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이상하게� 진전된� 문답을� 관찰할� 것이다.� 과연� 야고보� 형제가� 장차� 그리스

도의� 참뜻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뜻대로� 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본절에� 의해�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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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보와� 요한이� 다같이� 초기에� 순교하였다는� 교회의� 오랜� 전승이� 성립� 된� 것이다.� 야고보가� 헤롯에� 의

해� 조기의� 순교한� 것은� 분명하나� (행12:21.� 44년경)요한의� 경우� 그가� 천수를� 누리면서� 도미시안� 황제

때� 밧모섬에� 귀양가서� 계시록을기록하고� 100세가� 지나� 죽었다는� 전설이� 유력한� 것이다.� 순교만이� 주

의잔을�마시는�것이� 아니며�주를� 위한� 이와같은�고난의�생애� 역시�주의잔을�마신�것이었다.

=====10:40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는지---마태는� 보다� 분명하게� :내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든지� “라한다.� 종말적인� 메시야� 왕국에서� 메시야� 의� 좌우편에� 앉을사람이� 있을� 것은� 부정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는� 이제� 새삼스러히� 예수께서� 주실것이� 아니라� 이미� 성부�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사람이� 얻을� 것을� 밝히신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복종하는것만이� 성도들이� 취할� 태도인�

것이다.�

=====10:41열제자가듣고...분히� 여기거늘---그들도� 야고보� 형제와� 꼭같은� 공명심이� 있었고� 그러므로�

시기에� 차서� 분히� 여길� 것이다.� 두사람이� 예수의� 좌우편� 같은� 가장좋은� 지위를� 독점하게되면� 저들은�

그� 자리를� 바라보지� 못하므로� 두사람에대해� 노여워한� 길이다.� 교회는� 언제나� 이와같은� 불순항� 욕망� 때

문에�분규에�빠지는�것이다.

=====10:42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고---전자

는“주로행세하는자로� 왕을� 말하고� 후자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백급의� 중신을� 가리킨다.� 세속적� 체계에�

있어서는� 왕이� 백성을� 임으로� 주관하여� 종으로� 삼고� ,� 왕의� 권력을� 맡은� 방백들역시� 백성들위에� 세도

를� 부리는� 것이� 상징적� 일이가.� 그러나� 교회력� 체계에� 있어서는�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이하� 교훈은�

야고보�형제에대해�분히�여기는�제자들에게�전반적으로�주신�것이다.

=====10:43-44크고자하는자는....섬기는자가되도� 으뜸이�되고자하는자는....종이� 되리라---일종의� 히브

리� 용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같은교훈은� 제자들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

툼이� 일어� 났을� 때� 이미� 주신바� 되었다(9:35,� 36,� � 눅22:25-27)세속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같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이다.� 남의� 으뜸이되고� 위대해지는자는� 오히려� 남을섬기는� 종의� 자세에�

서는� 것이다.섬기는자.종---전자는“집사”로� 번역되었고� (딤전3:8)후자는� 당시의� 노예제도에서� 이해� 되어

야� 한다.� (빌1:1).전자는� 일의� 성격에서� ,후자는� 일하는자의� 신분에서의� 표현이나� 결국� 같은� 뜻이다.�

바울은�자신을�복음의일꾼(섬기는자)으로도(고전3:5,� 엡3:7),그리스도의종으로�롬1:1불렀다.

=====10: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여� 섬기려하고--접속사� “왜냐하면 (� γαρ)

으로� 시작하여� 전절의� 의미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섬기는자가되고� 종이� 되어야학것은� 스승되는� 그리스

도께서� 사람을� 섬기기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전생애는� 철저히� 섬기는� 생애였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생명까지�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최고의� 모본이� 되었다.자기목숨을� 많은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논

한� 중요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근거로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구

절로도� 취급된다.� ,� 더구나� 본절이� 복음서의� 일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슴이라는데� 그으으는� 큰� 것이

다.우선� 본귀절의� 본문� 비평적인� 문제부터� 취급해야� 할� 것이다.� 여러� 학자들은� 본절의� 진정성을� 거부

하여� 왔다.� 그근거로서는� � (1)본문이� 전후내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 것� (2)대속물이란� 낯말은� 이곳이외

는� 신약� 전체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 (3)인자의� 온것은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끋난� 후를� 암시하는� 것�

(4)사상적� 내용은�바울의� 영향이�현저한�것.� 등이다�그러므로� 대체로�눅22:27(나는� 섬기는자로�너희중

에� 있노라)가� 원형이었고� 본귀절은� 후대의� 신학적� 첨가라는결론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요

한� 발언은� 언제나� 어떤� 기회를� 따라� 지나가는� 말씀으로� 주어졌다는사실에� 비추어� 본문의� 위치를� 의심

할� 필요도� 없을듯하다.� 대속물---가장� 중요한� 구절의가장� 중요한� 낱말이다.� 신약에서� 이곳에서� (마태의�

병행귀와� 더부어)한번만� 나타나고� 바울서신에는� 합성형이� 한� 번(딤전2:6)보인다.� 이낱말의� 동사형� 대속

함은� 3회(눅24:21,� 딛2:14,� 벧전1:18).대속물을주고� 성취된사실인� “대속”이역시3회(눅1:68,� 2:38,�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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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나타난다.이낱말의어근은� “푼다”이며� 구약의� 제사법전에서� 출발하였다.즉� (1)이스라엘남자들이� 받

쳤던� 반세겔의� 생명의속전(출30:12).� � (2)소가� 사람을� 죽였을때지불한� 은30세겔의� 속전(추21:30).� �

(3)처음난� 아들을위해� 바친� 대속전(민18:15)� � (4)팔린� 친족을� 속량하기위해� 지불한속전(레25:47-53)� �

(5)팔린� 토지를� 무르기위해친족이� 지불한� 대가(레25:25-27)등의� 배경을� 고찰할수� 있다.� 이낱말의고전�

그릭의배경은� 보통복수로� 사용되고�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위한� 속전을� 뜻했다.� 이와같은� 구약적�

및� 고전� 그릭의� 배경아래� 이낯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즉� 그

가�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위해� 지불하신� 보혈의값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

스도의� 대속은� 교회역사를� 통해� 논의되어� � (1)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었다.� �

(2)마귀에게� 인간의죄값을� 지불하셨다.� � (3)단지�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주었다.� 등의� 학설로� 발전되

었다.� 3번은� 속죄론과� 방향이� 엇긋난� 것이다.� 2번에� 있어� 하나님은� 인류의� 범죄와� 구원에관해� 마귀를�

징벌하실일이지� 그에게� 값을치루셔야� 할의무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지불하신대상은� 범

죄한인간은� 죽으리라(창2:17)는� 하나님� 스스로� 정하신� 법도이다.� 결국�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

스도의죽음이� 만족하게� 성취하므로� 인류를�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의---“많

은사람을� 대신하여� ”다.여기� 역시� 전치사중요한� 것으로� “을� 위해On� behaif"가� 아니라� ”의� 자리에서�

(대신하여)in� the� Place� of"다.� 즉� 이와동의어인� ?π?ρ“단수이”...의� 유익을� 위한것“을� 표시함에대해� 이

는� 엄격히� 남의자리에서� 그를� 대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또� 여기<망은사람>은� 오히려� “모든사

람”all“으로� 이해된다.� 딤전2:6(그가� 모든사람을� 위하여� 자기를�속전으로�주셨으니� )에는� 모든� 사람으로�

되어� 있으며� 그외� 명사나� 전치사등도� 본절과� 대조가� 되는� 것이� 주목된다.� 아마� 본절은� 사53:11(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의� 반영으로�

보인다.

=====10:46여리고에서� 나가실때에---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방을� 우회하시고� 이제� 요

단강을� 건너� 강서편의도시오�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이른� 것이다� .� 그것은� 당시� 북방� 갈릴리인의�

일반적� 순례길이기도� 했다.� 여리고는� 지중해면에서� 2500미터나� 낮은곳이며� 따라서� 해발� 762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에서는� 내림길이� 있다.� 사해� 북쪽� 요단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한� 비옥한� 곳이며� 현재는�

엘리하Er� -Riha라� 불리운다.� 일찍부터� 주민이� 많아� 융성한� 산업도시였고� 헤롯대왕이� 궁전을� 건축하여�

이도시를� 미화시켰고� 이곳에서� 사망� 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여호수아� 때부터� 관련되었고� 지금도�

구도시의� 유적에는� 여호수아가�파괴한� 성곽이� 남아있다.� 기후는� 아열대성이다.디메오의� 아들인거지소경�

바디메오---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본서� 뿐이다.� “바디메오”역시“디메오의� 아들”을� 뜻함으로� 결국� 겹

말이� 된셈이다.� 히브리어를� 알지못한� 이방인� 수신자를� 위해� 주해적� 설명을� 부친� 것이다.� 그의� 부친� 디

메오는�당시�여리고에�알려진�인물같다.

=====10:47나사렛� 예수시란.....다윗의자손� 예수여---본서에는� 흔하지� 않는� 이름이다.� 전자는� 1:24이

후� 처음이고� ,� 후자는�이곳에만�나타난다(48절� 및� 간접적으로는� 12:35).� 전자는�비하하신�주의�인성을�

가리키고� (요1:46),� 후자는� 바로� 메시야의� 별명이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왕의� 재현으로� 생각하고�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윗왕국을� 재건�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일반군중이�

그에게�나사렛�예수라고�가르쳐�줄때에�즉각� 그를� 다윗의�자손이라� 부른데�이소경의�위대한�신앙이� 엿

보인� 것이다� .� 아마� 그는� 일찍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고� 이예수가� 바로� 메시야이신것도� 믿어� 그를� 만나

기를�소원�하고� 있었을�것이다.�

=====10: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짖궂게� 돈을� 구하는� 것은� 거

지의� 본성이었고� 또� 이런거지를� 무조건� 제지하는� 것은� 일반의� 군중� 심리였다.� 그러나� 입전만은� 사정이�

달랐다.� 거지는� 상대를� 바로� 알았고� 또� 바른� 것을� 구했고� 군중은� 그런� 것을� 모르고� 무조건�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지는� 굴복하지�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신앙에는� 언제나� 장해가있고� 그장해를�

극복하므로� 신앙은� 성숙해� 지는� 것이다.� “군중이� 이적행사를� 막기위해� 거지를� 제지한� 것은� 부당한� 것

이다.� 저들은� 거지의� 성급한� ”다윗의자손을� 제지했고� 그것을� 입성하실때까지� (11:10)마21:15.� 보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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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원했던� 것이다.� (Gould)� � 아마� � Gould의� 견해역시� 정당하게는�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때� 군중은�

아직�예수의�메시야성(다윗의자손)에� 명백하지�않았기�때문이다.

=====10:49머물러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른다----갇은동사의� 세변화가� 주목된다� .� 이부근의묘사는� 본서에� 독특하고� 또� 정밀하다.� 목격자의� 증

언을받아� 거룩한� 본서의� 특징인� 것이다.� 군중은� 이제� 약간의� 동정을� 나타내어� 거지소경을� 도와� 예수께�

나아가게�한� 것이다.� 하여튼�예수의�관심은�약한자,� 그리고�진실된�구도자에게�쏠리신�것이다.

=====10:50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일어나---역시� 본서만이� 간직하는� 생생한� 묘사다.� 소경은� 기쁨과�

열정� 때문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 나와왔다.� 천재� 일우의기회를� 잃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순수한�구도자를�주는�또한� 환영� 하신다.

=====10:51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보기를� 원하나이다---직접적� 질문에� 솔직한� 회답이었

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전에� 흔히� 이와같은� 질문을� 하셨다(5:9,� 30,� � 6:38,� � 9:21).병자에게�

용기를주어� 신앙을� 고백을� 시키시려는� 것이었다.� 소경의� 회답은� 솔직하고� 근본적이었다.� 그는� 성전� 미

문의� 앉은뱅이처럼� 돈을� 구하지는� 않았다.� (행3:2)� .�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근본적� 해결을� 구해야한다.

선생님이여--이곳과요20:16(부활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 부른)에만� 나타나며� ,� 선생에대한� 최고� 존

칭어다.� 일반적인용어� “랍비”(9:5,� 요1:38).는� “나의큰자”의뜻으로“선생”을� 가리키나� 이는� “나의증인,� 또

는� 나의선생”을� 뜻한다.� 앞선“다윗의� 자손이여”� 와� 더불어� ㅣ칭호에서도�이소경� 거지의� 큰� 믿음이� 보인

다.

=====10:52네믿음이�너를�구원� 하였느니라---5:34주� 참조.� 예수께서�병자를�고치실�때� 흔히�하신� 말

씀� 이었다.(마7:50,� 8:48,� 9:22,� 17:19,� 18:42� 등).그리스도의� 이적적� 권능을� 유도하는� 것은� 믿음이

다.� 본문의� 경우� 소경의믿음은� 그의� 간곡한� 태도와� 메시야적� 칭호를� 부른데�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경

우� 소경이� 고침을받은후� 예수를� 쫓는� 것이� 특기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자는� 주의뒤를�

따라살� 의무가� 있는� 것이다.� � � � � 마가복음� 제� 11장� � � � 마가복음의� 다섯� 번째� 주요� 부분은� 예루살렘�

안과� 그� 주변� 안에서의� 예수의� 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들� 특히� 최후의� 사자인� 하

나님의� 아들을� 거역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였다.�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에게� 향하

신�하나님의�임박한�심판에�대해� 경고하셨다.� �

=====11:1상� 예루살렘�남쪽� 1마일� 앞에는�벳바게�마을이�있었고�약� 2마일� 밖�감란산�동편에는�많은�

감람나무로�유명한�약� 2마일� 정도� 넓이의�베다니가� 있었다.� 예루살렘�여리고까지�사람이�살지� 않고� 위

험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가에� 있는� 베다니에는� 예수가� 유대에� 계실� 때� 대체로� 예수의� 숙소로� 제공되

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다.�

====11:1하-3�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보냈다.� 거기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귀를� 풀어� 예수께로� 끌고� 왔다.� 마태는� 그� 나귀

의� 어미까지� 언급하고� 있다.� � � � “약� 누가� 외�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쓸� 것이며� 곧(지체없이)�

다시� 여기로� 돌려보내리라”� 라고� 말해야� 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주”(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나귀� 소유주를�언급한�것이� 아니라�예수� 자신을�언급한�것이라�할� 수� 있다.

=====11:4-6�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을� 따랐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그의� 예고가� 자세하고도�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2-3절� 참조)� 이것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강조한� 것인데� 이� 어린�

나귀는� 예수의�메시야적� 표상을�나타내기�위해�사용된� 것이었다고�볼� 수� 있다.� � � � 예수께서� 그� 나귀의�

주인과� 미리� 약속해� 놓은� 것인가?� 아니면� 이� 사건이� 그의� 초자연적� 지식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후의�

상황을� 볼� 때� 아마� 첫� 번째� 견해를� 뒷받침하는�것� 같다.� 그러나� 나귀를�얻어� 오는� 마가의�상세한� 묘사

의� 많은� 부분을� 볼� 때� 분명히�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나귀의� 주인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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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사전에�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 � � 마가가� 기록한� 많은� 상세한� 기사는� 직접적인� 목격자의� 보고

를� 통하여� 기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심부름에� 보냄을� 받은� 두� 제자� 중의� 하나가� 아마� 베드로� 였을�

것이다.�

=====11:7-8� 예수의�제자들은�자기들의�겉옷을�나귀등에�걸쳐�안장을�대신했다.� 예수께서�전에는�아

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에� 오르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

다.� 그리고� 즉시� 그들의� 겉옷을� 먼지� � 투성이의� 길� 위에� 깔고서는� 환호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싱싱하고� 푸른� 나뭇가지들(스티바스,� 잎사귀들� 혹은� 우거진� 가지들)을� 깔았다.� 종려나무� 가지는� 요

한� 복음� 12:13에�언급되어�있다.

=====11:9-10� 이� 구절들의�교차� 대구� 법적� 배치는�두� 그룹이� -예수의� 앞서� 가는� 그룹과� 그� 뒤를� 따

라� 가는� 그룹-� 서로� 번갈아� 노래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시편� 118:25-26을� 노래했다.� 해마다� 유

월절�축제가�되면� 유대인들은�하나님께�감사와�찬양과� 기원을�나타내는�여섯�편의� 순례� 시를� 노래하였

다.� � � � 히브리어(호시아나)를� 헬라어로�음역한�것을� 다시� 우리말로�음역한�호산나라는�말은�원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뜻하는� 기도였다.� 이후에� 이� 말은� 큰� 소리로� 외치는� 찬양으로� 사용되었고� 순례

자들이나�유명한�랍비들을�열렬하게�환영할�때� 사용되었다.� “가장�높은� 곳에서�호산나는� “가장�높은� 곳

에� 계신�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소서”와�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군중들의�성겨�때문에�이런�모든� 요소가�혼합되어�있다는�것을�반영한다.�

=====11:11�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 가셨다.� 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성전이�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보기� 위하여� 성전� 주위를� 관찰하셨다.� 이것이� 다음� 날� 그의� 행동을� 유

발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는� 해질� 무렵이어서� 성문이� 닫혀졌기� 때문에� 예수는� 12제자들과� 함께� 베다

니로�가셔서�그날�밤을� 지내셨다.

=====11:12-13� 다음날�이른� 월요일�아침� 예수께서�예루살렘을� 향하여�베다니를�떠나신�후� 도중에서�

시장하셨다.� 멀리서� 예수께서는� 길가에�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셔서� 나무에게�

무슨�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쳐다보셨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무성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가는� “때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더라”� 라고� 설명해� 놓았다.� � � � 그� 때는� 니산월(4월)� 중

간인� 유월절� 절기� 때였다.� 팔레스틴에서는� 3월에� 무화과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렸고�

뒤이어� 4월이�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다.� 이러한� 일찍� 열리는� 푸른� “열매”가� 지방� 소작농을� 위한� 일

반적인� 식물이었다.� 이러한� 작은�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들이�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를� 낸다

는� 것을� 그� 해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징조였다.� 이러한� 작은� 열매들은� 정상적으로� 무화과가� 열려

서� 무화과� 철인� 늦은� 5월이나� 6월에� 익게� 되면� 마침내� 떨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월절(4월

중)� 직전에� 비록� 그때가� 무화과�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무화과나무에서�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

매를�찾기를�기대한�것은� 당연한�것이었다.

=====11:14� 그� 무화과나무에� 대해� 예수께서� 강하게� 저주한� 것은� 예수께서� 시장하셨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극적이고도� 예고적으로� 보여준� 표징이었다.�

잎은� 많으나�열매를�맺지� 못하는�무화과나무는�하나님의�은총과�그들의�종교에�대한� 외적인� � 인상적인�

모습에도�불구하고�이스라엘의�영적인�불모성을�상징한�것이었다.� � � �

=====11:15-16�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뜰인�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어떤� 이방인도� 이� 뜰을� 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필요한� 순결한� 품목들을� 그� 곳에서� 사고� 팔�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 � 그� 자리에는� 돈을� 바

꾸는� 일들이� 성행했으며� 그� 돈에는� 우상적인� 모습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거래는�

보통� 강탈과� 사기� 속에서� 행해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물건을� 싣고� 성전을� 두루� 돌아� 다녔을� 뿐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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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예루살렘� 이곳� 저곳을� 다니기도� 하였다.� � � 예수께서는� 특별히� 이방인들이� 사용하도록� 구별해� 놓은�

성전� 뜰을� 무시하고�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둘러엎으시고� 아무도� 성전에서�

돌아다니는�것을�허락하지�않았다.�

=====11:17� 예수의� 이러한� 대담한� 행동은� 사람들의� 주의를� 사로잡았고� 그는�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서�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무감각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뜰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

다.� 예수께서� 노하신�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속이는� 장사꾼들에� 대한� 예수의� 거절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메시야로서의� 예수는� 대제사장들

보다�성전에서�더�큰�권위를�가지고�있다고�주장하셨다.

=====11:18-19� 종교적�지도자들이�이� 사실을�들었을�때� 큰� 소요�없이� 예수를�잡아죽일�최선의�방법

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놀란� 군중들과� 예수는� 그를� 체포하려는� 유대인의� 권위를�

무력하게�만들어�버렸다.�

=====11:20-21� 이� 구절은� 12-14절의� 계속이다� 다음날� 아침� 즉� 화요일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

루살렘으로� 되돌아가고� 있을� 때� 그들은� 어제� 그�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이�

실현되어� 뿌리로부터� 완전히� 말라� 시들어� 있었다.� 비록� 예수께서� 그�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았지

만�많은�사람들은�그것이�이스라엘에�대한�하나님의�임박한�심판의�생생한�묘사였다고�믿고�있다.�

=====11:22-24�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 � �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

은� “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

다.� � � 그러므로�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

에�예수는�그의� 제자들에게�무엇이든지�기도로�구한� 것은� 이미�받은� 줄로� 믿으라고�훈계하셨다.�

=====11:15:26� 하나님을� 신뢰하는�것� 뿐� 아니라�다른� 사람을�용서하는�태도는�기도를�효과� 있게� 하

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서서� 기도하다가� 믿는� 자들에게든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든지� 누구에게든

지� 악의를� 기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일단� 그것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 � �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한� 관계는� 서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는� 하나의� 결속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요구된다.�

만약�그가� 용서하지�않는다면�그는�일상생활�속에서�하나님의�용서하심을�상실하게�될� 것이다.�

=====11:27-28� 화요일� 아침�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갔다.� 성전� 뜰에서� 예수

님은� 산헤드린의� 대표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감시인인�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1)너의� 권세가� 무엇이냐?� (2)너의� 권세는� 근원이� 누구이냐?�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할� 권세

를�주었느냐?�는�것이다.�

=====11:29-30� 랍비들의� 일반적인� 논쟁� 기술인� 예수의� 반문은� 그에� 대한� 대답을� 그들� 스스로� 하도

록� 만들었다.� 예수는� 그� 자신의� 권세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상대할� 자가� 없었던� 요한의� 권세와� 출처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셨다.� 요한에� 관한�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예수에� 대한� 결론도� 달라지게� 된

다.�

=====11:31-32� 예수의� 질문은� 이러한� 종교적� 지도자들을� 궁지에� 빠지게� 했다.� “사람에게서”라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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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대답이� 그들에게는� 더� 타당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두려워� 이� 대답을�

하지�않았다.�

=====11:33� 따라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시도로� 변론을� 했던� 그들은� 그� 어느� 쪽도� 받

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의� 질문은� 그의� 권세가� 요

한처럼� 하늘에서� 왔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 � � � 종교� 지도자들이� 판단을� 보류함으로써�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사자로서의�요한과�예수를�받아들이지�않았다는�것을�보여� 주었다.� � � � � 마가복음�제� 12장

=====12:1상� 이� 간결한� 요약적인� 말은� 마가가� 여기에서� 기록한� 단� 하나의� 비유를� 소개하는� 말이다.�

예수는�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던� 산헤드린을� 대표하여� 질문� 해� 온�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

다.� 이것은�적의에�가득찬�그들의�의도를�폭로한�것이며�그� 결과에�대하여�경고한�것이다.�

=====12:1하� 포도원� 건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사야� 5:1-2에서� 온� 것으로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알려진� 표상이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에�

비유할�수� 있다.� “산� 울을� 두르고”-포도즙을�짜서� 모으기�위한� 구유� 자리를� 파고� 보호와� 저장고�안전을�

위해� 망대를� 세웠다.� 이것은� 좋은�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주인의�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소작농�즉� 포도원�재배자들에게�포도원을�맡기고�타국에�나가� 살기�위하여�여행을�떠났다.�

=====12:2-5� 주인은� 추수� 때가� 되어� 소작료로� 그� 과실을� 받기� 위해� � 종들을� 차례로� 그들에게� 보냈

다.� 그러나� 그들은� 난폭한� 행동으로� 종들을� 때렸고� 마지막� 종은� 죽였다.� � �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개

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몇� 번이고� 거듭�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능욕을� 당하고� 상처

를�당하고�죽임을�당했다.

=====12:6-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한� 사람� 즉�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소작농들은�

자기� 아들은� 존경하리라고� 기대하면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상속자인� 것을� 알고�

음모를� 꾸며� 그를� 죽여서�포도원� 밖으로�던져� 버렸다.� � � �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땅의� 일부분이� 어떤�

기긴�내에� 상속에�대한� 요구가�없는� 주인� 없는� 재산이�될� 때에는�그것을�먼저� 주장하는�자가�합법적으

로� 그�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만약�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버린다면� 포도원을�

자기네들이�차지할�수� 있을�것이라고�생각했던�것이다.�

=====12:9�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그� 주인이� 어떤� 행동을� 했겠는가를� 결정하는� 데� 청중들을� 함께�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주인의� 아들을� 배척하는� 것은� 실제로� 주인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강한� 권한을� 갖고� 와서� 악한� 소작인들을� 죽인� 후에�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릴� 것이다.� 예수에�

대한� 배척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배척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

오게�되었고�그들의�특권을�다른� 사람들에게�일시적으로나마�넘겨주게�되었다.�

=====12:10-11� 예수는� 이� 비유를�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그� 비유를� 확대시

켰다.� 소작인이� 비유에서� 시편에� 나오는� 돌과� 건축자의� 비유로� 바뀌었고� 그것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비유적으로� 언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건축자가� 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돌은�

거물에서� 가장� 중요한� 돌로� 간주되었다.� 건축자들의� 버림과� 버림받은� 돌의� 귀히� 쓰임은� 하나님의� 놀라

운�주권적인�행동이었다.�

=====12:12� 산헤드린을� 대표하던� 그들은� 예수께서� 그� 비유를� 자기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흥분하기� 쉬운� 유월절�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홀로�

버려두고� 떠나갔다.� � � � 예수의� 대적자들이� 이� 비유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새로운� 발전이며�

그의� 진정한� 정체의� 비밀을� 자신하여� 공공연하게� 선언하심으로써� 예수의� 주권� 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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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2:13� 바로� 전에� 나오는� 비유로� 예수께서� 산헤드린에게�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리

새인과� 헤롯당� 몇� 사람을� 보내어� 그의� 말을� 책잡으려� 하였다.� “책잡는다”고� 번역된� 말은� 덫을� 가지고�

짐승을� 사로잡는�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 � � 12:14-15상�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그들

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면서도� 예수께서� 자기들의� 어려운� 질문을� 피하지� 못하도록� 머리를� 짜낸�

질문을� 조심스럽게� 예수께� 던졌다.� 그들은� 예수가� 참되시며� 편견이� 없으시고� 사람들의� 외모에� 따라� 판

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는� 그가� 사람의� 현재의� 모습에� 관심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물었다.� � � �

“세”는� 인구조사를� 의미하는� 라틴어였다.� 이것은� 유대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던� A.D.� 6세기� 이래로�

모든� 유대인들이� 해마다� 바치는� 인두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돈은� 곧바로� 로마� 제국의� 국고로� 들어

갔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정복되었다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 � � 이

러한�질문을�예수께�한� 것은� 예수님으로�하여금� 정치적으로�그리고� 종교적으로�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수단이었다.�

=====12:15하-16� 예수는� 즉시� 그들의� 정직한� 체� 하는� 질문의� 이면에� 그들의� 위선이� 가려져� 있음을�

간파하였다.� 예수는�그들이�왜� 자신을�책잡으려�하는지를�수사적인�질문으로�폭로하셨다.�

=====12:17� 가이사가� 새겨진�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권위와� 정부의� 유익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결국�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가이

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선언하셨다.� 이� 세금은� 가이사의� 돈을� 사용했다는� 데� 대한� 빚이며� 그가�

통치함으로써� 백성들이� 유익을� 보았음으로� 내는� 빚이었다.� 예수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은� 성전� 세를�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황제를� 신성시하는� 데�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즉� 황제가�

신적인�영예와�숭배를�결코�받아서는�안된다는�것이다.� 하나님께만�영광과�예배를�드려야�한다.� � � � � � �

=====12:18�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깎아� 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 왔다.� 일

반적으로� 그들은� 주로� 제사장과� 상류� 계급� 출신인� 유대의� 귀족� 당이라고� 믿어졌다.� 그들은� 산헤드린에

서� 영향력�있는� 지위를�차지하고�있었고�유대� 최고의�법관이며�주로�로마� 권력자들과�협력하는�자들이

었다.� 그들은� 부활의� 진리,� 미래의� 심판,�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들은� 모세의� 책만�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 들였고� 바리새인들이� 수집하여� 지키고� 있는� 구전은� 거부하였다.� 이것이� 사두개인들에� 대

한�마가의�유일한�언급이다.�

=====12:19-23� 그들은�공식적으로�예수를�선생이라고�부르면서�형사� 취수에�관한� 모세의�규례에�대

하여� 질문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가족의� 혈통을� 잊고�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취해지던� 전통

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자식� 없이� 죽어� 버린� 7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사두개인들은� 분명히� 불

활� 신앙을� 믿고� 있지� 않으면서도� “부활했을� 때에� 과연�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고� 물

었다.�

=====12:24�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두� 가지� 반문을� 하시면서� 예수는� 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

는지를� 두� 가지� 이유로� 말씀하셨다.� 먼저� 그들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두�

번째�이유와�더불어�그� 첫� 번째� 이유를�각각� 보충�설명하였다.�

=====12:25� 사두개인들은� 부활� 후에도� 결혼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잘못�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들의� 삶에는� 정혼도� 결혼도� 없다.� 다만� 하늘에� 잇는� 천사들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 � � �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 후에� 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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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그와� 관련된� 눈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질문은�부당한�것이다.

=====12:26-27� 사두개인들은� 알지� 못하여� 부활에� 대한� 이해가� 오경에는� 없는� 것으로� 단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을� 하시면서� 모세의� 책� 즉� 모세� 오경에� 호소하셨다.� 그

리고�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출3:1-6)� � �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

함의�하나님,� 이삭과� 야곱의�하나님”이라고�확언하시면서� 모세에게� 자신의�신분을� 밝히셨다.� 그들은� 비

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죽으면� 끝이라고� 이해한� 사두개인들의� 이해대

로� 하나님은�죽은�자의� 하나님이�아니라�산� 자의� 하나님이라는�것을�확증하는�것이라고�예수는�결론을�

내렸다.� 만일� 그들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지� 않거나� 죽음이� 끝이라면� 그는� 진실하지� 못한� 하나님일� 것

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 속의� 신실함이� 바로� 육체적� 부활을� 보증해� 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 � �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살에� 대한� 사실을� 확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육체적� 부활도� 있을� 것

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 � �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부활과�죽음� 후의� 삶을�부인한�것이�얼마나�심각한�잘못� 이었는가를�강조하신�것이다.�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의� 사두개인과의� 변론을� 듣고� 그들에� 대한� 그의� 훌륭한� 답변

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바리새인이었음을� 암시한다.� � � � 그는� 서기관들� 사이에� 토론되던�

주제에� 대해� 예수의� 답변하는� 솜씨를� 평가하기� 위하여� 어떤� 적대감이나� 숨겨진� 저의� 없이� 찾아왔다.�

전통적으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613가지의� 개별적인� 율법(365가지는� 부정적인� 것이요�

248가지는� 긍정적인� 것이다.)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믿으면서도� 더�

무거운� 것과� 가벼운� 법령을� 구분하여� 생각하였고� 전체의� 율법을� 단�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려는� 시도

를�하기도� 하였다.� � � � 이러한�논쟁의�견지에서�이� 서기관은�이� 모든� 율법� 주에서�어느� 계명이�가장� 중

요한�계명이냐고�물었던�것이다.�

=====12:29-31� 예수의� 대답은� 어느� 것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를� 뛰어넘어� 전체� 율법을� 요약해� 주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가는� 것이었다.� � � � “주� 너의� 하나님을�사랑하라”라는�계명은� 인격적으로,� 포괄적

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음,� 뜻,� 힘등� 반복되

어� 사용된� 말들이� 이� 계명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뜻”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70인역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두� 낱말을� 모두� 포함시켜서� 계

명의� 본질을� 포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 � 다음으로� 예수는� 첫� 번째의� 계명과� 분리� 할� 수� 없는� 그리

고� 첫째� 계명에� 보충이� 되는� 두� 번째� 계명을� 인용함으로써� � 이웃에� 대한� 헌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사랑하는� 사람은�본질적으로� 자신에�대한� 관심을�가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 것이다.� � � �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왜냐하면� 전심으로� 하나님

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은�다른� 모든� 것을�지키는�것이다.�

=====12:32-34상� 이� 구절은� 마가에� 독특한�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영적인� 것과� 예식� 적인� 예배�

사이의� 관계와� 싸우는� 그의� 독자들을� 훈계한� 것이었다.� � � � 서기관은� 예수의� 답변이� 정확함을� 인정하였

다.� 그리고� 예수를� 뛰어난� 선생으로� 보았다.� 신의� 이름을� 지나치게� 존중하여� 신의� 이름을�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예

수의� 대답을� 다시� 표현하였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은� 신명기� 4:35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또한� 마음과�듯에� 대하여�그가� 이해한� 말로� 대신했다.� � � � 그는� 대담한�말을� 했는데�사랑의�두� 가지� 명

령은� 모든� 번제나� 기타� 제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는� 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선언을� 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사람은�영적인�이해와�예수에�대한� 개방적인�마음을�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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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하� 예수는� 그를� 깎아� 내리려는� 모든� 시도를� 효과적으로� 좌절시키고�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의도와�잘못을�능숙하게�드러내셨으므로�아무도�감히�그에게�더� 이상�질문을�하지�못하였다.�

=====12:35� 그� 후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기다리던� 메시야를� 그리고도� 즉� 승리의� 구원자가� 될� 다

윗의� 자손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는� 물으셨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 확고하게� 그� 기초를� 둔� 기본적인� 유대인의� 신앙이었다.� 예수는�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이� 옳다고� 덧붙였다.� 서기관들의� 견해도� 옳은� 것이었지만� 불완전하였다.�

성경의�견해는�바로� 그들의�좁은� 민족주의적인�희망보다�훨씬�더� 넓은� 견해를�가지고�있었다.�

=====12:36-37상�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다윗�

자신이� 시편에� 선포해� 놓은� 것을� 인용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이� 시편이� 다윗의� 저작이며� 하나님의� 영

감을�받았다는�사실을� 지적한다.� � � � 공격할�수� 없는� 것은� 다윗이�메시야를� “주”로� 불렀다는�것이다.� 이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 시켰다.� 그러면� 어떻게� 그는(메시야)� 그의(다윗)�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청중들로� 하여금�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주”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메시야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는� 이� 지상

에서� 미래의� 다윗� 왕국을� 회복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자기와� 연관시켜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문제를�신중하게�부각시켰다는�것은�분명하다.�

=====12:37하� 교묘한� 질문으로�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던� 유대� 지도자들과는� 달리� 많은� 유월절� 군중

들은�비록�다� 이해하지는�못하였지만�기쁨으로�처음부터�그의�가르침을�듣고�있었다.�

=====12:38-39� 예수는�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하고�또� 그들의�특권을� 남용하는�서기관들을�삼

가라고� 경고하셨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많은� 서기관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 � � 그들은� 긴� 옷�

즉�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들이� 입었던� 길고� 흔� 술� 달린� 가운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공적인� 명칭

인� 랍비,� 주인,� 아버지와�시장에서� 인사� 받기를�좋아했다.� 그리고�그들은� 회당에서�가장�중요한� 자리를�

좋아했고,� 연회에서도�영예의�자를� 차지하여�주인�다음의�좌석에�앉아� 특별� 대우를�받기를�원하였다.�

=====12:40� 1세기의� 서기관들은�자기들의� 직무에�대하여� 급료를�받지� 못했기�때문에� 그들은�신앙심

이� 깊은� 유대인들이� 바치는� 자선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용하는� 면이� 있었다.� 과부의� 밭

을� 삼킨다는� 비난이� 바로� 한정된� 재산을� 가진� 사람들� 특히� 과부들의� 호의를� 악용하고� 있는데� 대한� 생

생한� 표현이다.� 그들은� 비윤리적으로� 사람들의� 재산을� 착복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장시간� 기도를� 드렸다.� � � � 예수는� 그들의� 화려한� 행동,� 탐욕,� 위선을�

꾸짖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강조하지� 않고� 경건한� 척� 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그런� 위선을�

요구하였다.�

=====12:41-42� 예수께서� 그의� 공적인� 가르침을� 행하시던� 이방인의� 뜰로부터� 여인의� 뜰로� 들어가셨

다.� 이� 뜰� 벽� 맞은� 편� 벽에는� 예배� 자들의� 자발적인� 제물과� 헌금을� 거두기� 위하여� 나팔� 모양을� 새겨�

놓은� 13개의� 연보궤들이� 있었다.� � � � 맞은� 편�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시고�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어떻게�

성전� 금고에� 그들의� 돈을� 넣는가를� 살피고� 계셨다.� � � � 한� 불쌍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한�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유대인의� 청동� 동전이었다.� 두� 렙돈은�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었던� 로마� 데나리온의� 64분의� 1읠� 가치였다.� 마가는� 자기� 로마인� 독자들을� 위하여� 다시� 로마�

화폐�단위로�그� 가치를�말했다.�

=====12:43-44� 엄숙한� 서론적인�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이� 여인이� 더� 많이� 넣

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과부는� 어려운� 중에서� 모든� 것을� 넣었기� 때문이다.� 비례로� 따지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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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ㅇ� 가장� 많이� 바쳤던� 것이다.� 그� 여인은� 희생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필

요한�것을� 채워� 주시리라고� 신뢰하였던� 것이다.� � � � 그녀는� 자신을�위하여� 동전� 하나를�간직해� 둘� 수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전적인�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녀의� 예를� 사

용하셨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은� 곧� 시험�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전적

으로�죽음에�내어�주심을�예증하여�주는�것이다.� � � � � � 마가복음�제� 13장

=====13:1� 고난� 주간� 수요일� 저녁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그를� 선생이라고�

호칭한� 다음� 놀라움과� 감탄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 뜰과� 발코니,� 콜로나레와� 행각으로� 된� 성전의� 거대

한� 돌들과�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 �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호의를� 얻고� 헤롯을� 영원히� 기념

하기� 위하여� 헤롯� 왕조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것은� 고대� 세계의� 놀라운� 건축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크고� 흰� 돌들과�광택이�있는� 풍부한�금으로�장식하여�지은�것이었다.� 그것은�옛� 예루살렘�땅의�약� 6분

의� 1을� 차지하였다.� 유대인들에게�성전만큼�장엄하고�굉장한�것은� 없었다.�

=====13:2� 예수의� 대답은� 이� 엄청난� 큰�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었다.� “돌� 위

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질� 것이다.”� 예수께서� 강한� 이중� 부정을�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은� 그의�

말씀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불길한� 예언은� 성전을� 잘못� 사용한� 데� 대한�

예수의� 심판의� 결과이다.� 이� 예언은� 말� 그대로� 한� 세대� 내에� 성취되었다.� A.D.� 70년� 티투스는� 성전을�

불태우고�나서�전�도시를�파괴하고�그� 건물을�완전히�파괴하라고�로마�군인들에게�명령하였다.�

=====13:3-4� 기드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성전을� 마주�

바라보며� 앉았다.� 감람산은� 바다의� 수면보다� 약� 2700피트� 높이� 솟아� 있었지만� 예루살렘보다는� 약�

100피트� 정도밖에� 높지� 않았다.� 감람산� 서쪽에� 성전과� 예루살렘� 시가� 위치해� 있었다.� � � � 제자들은� 예

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질문은� 두� 부분으로� 표현될� 수� 있다.� (1)이

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2)그것들이� 일어나려고� 할� 때� 일어날� 징조가� 무엇인가?� � � � 제자들

은� 구약� 성경의� 예언의� 관점만� 가지고� 있었음으로� 그들은� 성전의� 파괴와� 인자가� 다시� 재림하는� 그� 종

말� 시간�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예루살

렘�성전�멸망이�현�시대의�끝이� 일어날�사건이며�그때에�비로소�메시야�왕국� 시대가�열릴� 것이라고�생

각하였다.�

=====13:5-6� “주의하라”(플레페테,�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경계하라는� 외침이

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이름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위기�

시기에는�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내가� 그로라”라고� 주장할� 것

이다.� 신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형식� 속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많은� 사

람들을�잘못된�길로� 인도할�것이다.

=====13:7-8�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잘

못에� 대해� 경고하셨다.�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의� 소문이� 멀리서� 들을� 때마다� 놀라서� 하던� 일을� 멈

추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번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다.� � � � 종

말�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

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

운�메시야�시대의�출현을�향하여�나아가고�있는�것이다.

=====13:9� “너희는� 주의하라”라는� 훈계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박해� 아래서� 사악한� 사람들을� 대

비하여� 정신을� 차리도록� 경고하셨다.� 그들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회당에서� 열리는� 지방� 유대인의� 법정

인� 공회(산헤드린)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회당에서� 이교도들처럼� 40에� 하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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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매를� 맞을� 것이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증거한� 그� 증거가�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하실�때� 그들을�박해한�자들의�고소하는�증거될�것이라는�예언이다.�

=====13:10� 복음이� 반드시� 먼저� 모든� 민족� 즉� 전� 세계�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 � � 복음을� 선

포하면서� 제자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나� 그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이것은�이� 시대를�향한� 하나님의�계획�속에서�최우선�적으로�해야�될�일이며�또� 그의� 목적에�

따라�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 것은� 가� 세대의� 책임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 세계에� 선포한다는� 것이�

곧� 이� 시대에� 혹은� 이� 시대의� 끝에� 가서� 복음을�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마25:31-46)

=====13:11� 제자들이� 체포되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질� 때에� 변명하기� 위해서� 염려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적

당한� 시기에� 적당한� 것을� 담대하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도움이� 꼭� 석방을� 보장하지는� 않는

다.�

=====13:12-13�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반대가� 공공연하게� 일어날� 것이며,� 또한� 가까운� 자기의�

친척들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반대는� 매우� 심각하여� 가족들이� 서로� 대적자들에게� 넘겨� 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 � � 경고에� 관한� 이러한� 말씀은� 예수를� 위한�

충성� 때문에� 박해로� 고통� 당하는� 로마에� 잇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고통을� 전� 세계적

인� 복음� 전도와� 변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게� 될� 때� 더� 한층� 그� 고통을� 쉽게�

참을�수�있게� 된다.

=====13:14� “가증한� 것”이란� 말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을� 가리켰다.� “멸망

의� 가증한� 것”이란� 표현은�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 대상이�너무� 가증하여� 성전을�버리게� 하고� 황폐

케�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 � 예수께서� 사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말은� 그� 예언이� 또� 한�

번� 성취될� 것을,� 즉� A.� D.� 70년의� 성전� 모독과� 파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 즉�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이같은� 성전� 모독�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베뢰아�요단강을�건너�산으로�도망하라는�신호이다.� � � � 요세프스는� A.D.� 67-68년에� 유대� 열

심당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침략

자� 파니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 � � “가증한� 것”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서� 있지� 못할� 곳에� 서� 있

는� 장래의�어떤� 인물이라는�것을�암시한다.� � � �

=====13:15-18� 이러한� 위기가� 일어날� 때에�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지려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추운� 밤� 공기를� 막아� 주는� 겉옷을� 가지려고�

다른� 밭이나�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도망가야만� 하는� 아이� 밴� 여자

와�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동정을� 나타낸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강물이� 많이� 불어� 건너

기�어렵게�될� 우기인�겨울철에�일어나지�않도록�기도하라고�권고하셨다.�

=====13:19� 그들이� 급하게�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행히도� 도망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인

데� 그� 이유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재난의� 날들이� 없었고� 결코� 또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것이기� 때문이다.� � � � 이� 전례� 없는� 재난은�예루살렘의�멸망에도�해당되지만�거기에만�국한�된� 것

은� 아니었다.� 이것은�예루살렘�멸망을�넘어서�재림에�앞서�있을� 마지막�대환란�이기도�한� 것이다.� �

=====13:20� “만약� 주께서� 그이� 구언� 계획� 속에서� 이미� 결정된� 그날들을� 감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13:13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택하신� 그� 택한�

자들� 때문에� 마지막� 때� 환난� 기간을� 감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A.D.� 70년에�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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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이� 구절은� 마지막� 때의� 대환란인�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암시한

다.�

=====13:21-22� “그� 때에”� 즉� 심한� 고통과� 도망하는� 그날� 중에� 만약� 누가� 그리스도가�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고� 주장하여도� 예수의� 제자들은� 이것을� 믿지� 말고� 계속해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의� 목적은� 선택받은� 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구절은� 그들이�

성공하지�못할�것이라는�것을�보여준다.

=====13: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기의� 날에� 거짓� 함정에� 바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다시� 교훈�

하셨다.

=====13:24-25� “그러나”라는� 말이� 기적적인� 이적들을� 베푸는� 거짓� 메시야의� 출현과� 재난� 이후의� 때

에� 참� 메시야의� 극적인� 오심�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표현은� 14-23절과� 밀접한� 관계

가� 있음을�가리킨다.� � � � 해와� 달� 그리고� 별들과�관련되는� 여러�가지� 우주적인�무질서가� 바로�재림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예수는� 정확하게� 어느� 한� 편의� 구절만� 인용하지� 않고� 이사야� 13:10과� 34:4� 둘�

다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주� 속에�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천체� 변화를� 언급하신�

것이다.� � � �

=====13:26� 방금� 언급한� 우주적인� 사건이� 발생한� 그� 때에�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은� 신이�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그는� 큰� 권능을� 행하실� 것이며� 하

늘의�영광을�나타내실�것이다.�

=====13:27� � 또� 그때에� 인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방에서� 그의� 택한� 자들을� 모을� 것이다.� 사

방이란� 세계�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방향으로부터를� 의미한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버림

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언급은� 없지만� 이� 말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 대환란� 동안� 순교한� 신자들

이�부활을�언급하는�것� 같다.� 여기에는�선택받지�못한�자들에�대해서는�아무런�언급이�없다.�

=====13:28� 제자들이�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일들이�언제� 일어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께

서는� 무화과� 나무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그들에게� 충고하셨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사용되었다�하더라도�예수는�여기에서�그런�의미를�의도하지는�않아다.�

=====13:29� 이� 절은� 28절의� 교훈을� 응용하고�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너희� 제자들은� 14-23절에� 언

급한�이러한� 일들을�볼� 때마다� 너희들은�임박한� 위기가�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임박한�사

건에� 대한� 일반적인� 상징인� 것이다.� 만약� 이런� 사건들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한다면� 제자들은� 그� 사건

의�진정한�의미를�충분히�분별할�수� 있을� 것이다.�

=====13:30-31� 엄숙한� 서론적인� 말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이� 세상의� 종말

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수의� 주장은� 그의� 예언(30절)의� 성취를� 보증한다.� 현재의� 우주

는� 대변동으로� 종말이� 올� 것이나� 이� 예언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말씀들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씀은� 영원히�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의� 말씀과�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기�때문이다.�

=====13:32� 비록� 위기가�가까이�와� 있다는�것은� 식별해�낼� 수� 있으나�다가오는�그� 날과� 그� 시의� 정

확한� 시간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예수의� 지식의� 한계는�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육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

종하여�예수는�자발적으로�인간의�한계를�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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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3� “그� 때”� 즉� 하나님께서�개입하실�정한�때가� 언제� 올지� 아무도�알지�못하기�때문에� “주의

하라”� “깨어�있으라”라고�거듭�훈계하셨다.

=====13:34-37�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특한�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는�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 � � 예수는� 비유를� 이� 비

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대해서�정신을�바짝� 차려야�할�책임이�있다.� � � � � � 마가복음�제� 14장

=====14:1상� 마가는� 수난� 사화에서� 시간� 측정의�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일련의� 사건을� 열거시키고�

있다.� 고난� 주간의� 사건들의� 시간표는� 당시� 시간� 계산법이� 하루를� 자정에서부터� 계산하는� 로마식과� 해

질� 무렵부터� 계산하는� 유대식이� 다같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계산하기가� 좀� 어렵다.� � � � 유월절은�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지켜야� 했으며� 이� 절기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유월절� 식사� 준비는� 유대식으로� 계산

하면� 수요일� 저녁으로� 추정되는� 니산월� 14일� 저녁에� 유월절� 양을� 잡는� 것을� 포함한다.� 유월절� 음식은�

니산월� 15일이�시작될�때� 곧� 수요일�저녁� 해질�때부터�자정�사이에�먹게�된다.�

=====14:1하-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산헤드린� 회원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지만� 일반� 백

성들이� 봉기할까� 두려워� 그를� 공공연하게� 붙잡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활한� 방법으로� 예수를� 은밀

히� 체포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수한� 유월절� 군중� 속에� 있을� 예수의� 보이지� 않는� 지지자들� 특히� 총동적

인� 갈릴리�인들을� 건드리고� 싶지는�않았다.� 그래서� 그들은�그들의� 명절� 곧� 니산월� 14-21일까지의� 8일�

동안에는� 체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유다의� 예기치� 않은� 제안이� 상황을� 촉진시킨다.� 이렇게�

하여�하나님의�시간�계획대로�이루어�졌다.�

=====14:3� 배다니에� 잇는� 동안� 예수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유월절� 음식을� 대접받으셨는데� 그는�

분명히� 이전에� 예수께� 치료를� 받은� 사람이며� 일찍이� 제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름이� 알려지

지�않은�여인은�나사로의�누이인�마르다와�아리아였다.�

=====14:4-5�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유다를� 따라서� 이� 분명한� 낭비적� 행위에� 분노를� 표시했다.�

그들� 생각에는� 이� 향유가� 1년분� 품삯보다� 더� 비싸게� 팔� 수� 있었고� 가난한� 자들에게� 그� 돈을� 나눠� 줄�

수� 있었다.� 이것은� 합당한� 관심이기는� 했으나� 그� 이면에는� 제자들의� 무감각함과� 가룟� 유다의� 탐욕이�

숨겨져�있었다.� 그리하여�그들은�그녀를�책망하였는데�이는�마가의�독특한�언급이다.�

=====14:6-8� 예수는� 마리아에� 대한� 비난을� 꾸짖으시며� 그� 행동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녀를� 변호하

였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것을� 그의� 메시야로서의� 환영받음� 뿐� 아니라� 그의� 다가오는� 죽음의�

빛� 아래서� 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표현으로� 보셨다.� 그녀는� 예수의� 몸의� 장례를� 위해� 미리� 기름� 부

은� 것이다.�

=====14:9� 엄숙한�서론적�말씀으로�예수는�마리아에게� “온� 천하에�어디서든지�복음이�전파되는�곳에

는”� 그녀의�사랑의�행위가�복음� 선포와�함께� 증거� 되어� “그녀를�기념하게�될�것이다”라고�약속하셨다.�

=====14:10-11� 이� 구절들은� 1-2절을� 보충하면서� 3-9절과� 강하게� 대조된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영향력� 있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무리가� 없을� 때”� 그렇

게� 하겠다고� 제안했다.(눅22:6)� 이는� 군중들로� 인한� 분쟁을� 피하려는� 것이었고� 제사장들이� 가장� 염려

하고� 잇는� 것이었다.� 그들은�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이� 뜻밖의� 제안을� 환영하였다.� � � � 왜� 유다는� 예수

를� 배반하기로� 했는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 여러�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첫째로는� 유다만이� 열� 두�

제자� 중�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회의� 명령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둘째로� 그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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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정치적� 왕국을� 세우지� 않는데� 실망했고� 또� 물질적�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 예수를� 배반했다.� 셋째로� 돈에� 대한� 사랑이� 그를� 옭아매었다.� 결국� 그는� 사탄의� 지배� 아래� 들

어갔다.�

=====14:12� 여기서� 무교절의� 첫날은� 니산월� 15일(금요일)이� 되지만� 그러나� 유월절� 양을� 잡는다는�

언급이� 있음을�볼� 때� 엄격히� 말하여�니산월� 14일(목)을� 마가가� 말하는� 것� 같다.� 유월절� 음식은�예루살

렘� 사면�성벽� 안에서�먹어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예수가�어디에서�유월절�음식을�준비하기를�원하는

지�물었다.� 그들은�이� 가족� 축제의�음식을�그와� 더불어�먹으려�한� 것� 같다.�

=====14:13-15� 이�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11:1절하-7과� 병행한다.� 이는� 예수께서� 초자연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음에� 대한� 또� 하나의� 예증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또한� 안전에� 대한� 필요와� 제자들의� 질문�

그리고�거기에�따른� 예수의�지시를�볼� 때� 예수께서는�유월절�음식을�아무런�방해� 없이� 다같이�들기�위

하여�미리� 용의� 주도하게�준비하셨다고� 생각하는� 것보다�타당하다.� � � � 물� 한� 동이를�가지고� 가던� 사람

은� 아마� 동문� 근처에서�두� 제자를�만났을� 것이다.� 이런� 특별하고도�시선을� 끄는� 광경을�볼� 때� 이는� 미

리� 준비된� 신호임을� 보여준다.� 보통은� 오직� 여자들만이� 물동이를� 이며� 남자들은� 가죽� 부대를� 가지고�

다녔다.� 제자들은�하인임이�틀림없는�이� 남자를�따라� 들어갔고�하인은�이들을�인도했다.�

=====14:16� 아마도� 유월절� 음식� 준비는� 양고기를� 굽는� 것과� 무교병과� 포도주를� 배열하는� 것� 그리고�

식초와�포도주�및�그�외�양념에�적신�마른� 과일� 사이에�쓴나물을�배열하는�것이었을�것이다.� � � �

=====14:17� 그� 날(목)� 저녁� 곧� 니산월� 15일이� 시작되었을� 때� 예수와� 12제자는� 해질� 때� 시작되어�

한밤중에� 끝나는� 유월절� 식사를� 먹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마가는� 빵과� 쓴� 나물을� 양념� 그릇에�

같이� 찍어� 먹는� 사람� 중에� 자기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의� 선언과� 식사� 후� 빵과� 포도주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의미� 부여를�강조하기�위해서�식사� 중의� 사건들을�의도적으로�생략한다.�

=====14:18-20� 절기�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음식은� 먹어야� 했다.� 이� 자리에서의� 배반은� 다윗이� 그와� 함께� 친밀한� 식탁�

교제를� 나누던� 이히도벨(삼하16:15-17:23)이� 그를� 배신했을� 때� 시편� 49편에서� 한탄한� 그� 한탄을� 상

기시켜� 준다.� � � � 어떤� 사람과� 더불어� 식사하고� 즐긴� 다음� 그를� 배신하는� 것은� 가장� 큰� 변절이었다.� 제

자들은� 심히� 슬퍼했다.� 제자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자기가� 결백하기를� 원했다.� 예수는� 배신자의� 배신�

행위를�강조하면서�그에게�회개할�기회를�주셨다.�

=====14:21� 여기에는� 가슴을� 울리는� 한탄� 스러운� 어조가� 울려� 퍼지고� 잇다.� 배신자는� 사탄의� 도구

가� 되었다.� 무서운�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 차라리� 나지� 않았더면� 좋을� 뻔하였다.� 비록� 그가� 하나

님의� 계획안에서� 행동을� 했으나� 그는� 그의� 행동에�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 유다에게� 내려진� 저주

는�마리아에게�내려진�축복의�약속(9)과� 너무도�대조적이다.�

=====14:22� 분명히� 식사의� 주된� 시간� 전에� 그리고� 유다가� 이미� 떠나� 버렸을� 때� 떡을� 가지사(납작하

게� 구원� 무교병)�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 말씀하셨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 예수는�

문자�그대로의�물건들을�말씀하셨으나�그들�사이의�관계에�대해서는�상징적으로�표현하였다.�

=====14:23� 식사가� 끝난� 뒤� 예수께서는� 물과� 혼합된� 포도주� 잔을� 들고� “사례하고� 저희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를� 마셨다.”� 예수께서� 기존의� 유월절� 의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본다면� 이� 잔은� 준비된� 네� 잔

의� 포도주�잔� 중� 세� 번째� 잔이며� 식사의�주된� 시간을� 마치는�의식에� 사용되었다.� 아마� 그는� 완성의�잔

인� 네� 번째�잔을� 마시지�않았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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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 “언약”이란� 서로� 대등한� 당사자들끼리의� 합의에�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어느쪽의� 주도하

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설정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에� 이� 약속� 된� 모든� 물질적인� 축복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이스라

엘�백성과�함께� 그� 땅에서�천년� 왕국의�통치를�하�때�성취될�것이다.�

=====14:25�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있는� 것과� 연관을� 시켜� 이야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질적으로� 새롭게� 된�

삶� 속에서� 식사의� 교제를� 즐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 땅�

위에�세워질�천년�왕국을�말한다.

=====14:26� 유월절에는� 찬양� 시편을� 부르거나� 연주하였는데� 두� 시편(113,� 114)은� 식사� 전에� 나머

지� 넷은(115,� 116,� 117,� 118)� 식사� 후에� 저녁� 예식의� 끝� 순서로� 불려졌다.� � � � 식사� 후에� 있었던� 예

수의�선언과�기도가�끝났을�때는� 거의� 자정이�다�되었을�것이며�예수와�열� 한� 제자는�다락방과�마을을�

떠났다.� 그들은�기드론�계곡을�지나�겟세마네�동산이�있는�감람산�서쪽�기슭으로�갔다.�

=====14:27� “버리리라”로� 번역된� 동사는� 어떤� 사람을� 외면하고� 죄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열� 한� 제자�모두가�그의�수난과�죽음에�흩어질�것이라고�예언했다.�

=====14:28�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의� 도망에� 대한� 예언을� 부활� 후� 재결합한다는� 약속으로� 완화시키

고� 있다.� 다시� 살아나신� 목자로서� 그는� 그들이� 살고� 있었으며� 제자로� 부름� 받아� 위탁� 명령을� 받았던�

갈릴리로� 제자들� 보다� 먼저� 가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그들의� 미래의� 사역을� 위해�

부활하신�주님을�따라가야�했다.�

=====14:29-31� 이전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의� 전반부에� 관심을� 기울이고� 후반부는� 무

시해� 버렸다.� 모든� 제자가� 예언처럼� 예수를� 버리더라도� 자기는� 예외이며� 자기는�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 � � 그러한� 베드로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심각한� 것

이라고� 강조하여� 말했다.� 바로� 그� 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베드로는� 도망했을� 뿐� 아니라� 예수를�

세� 번� 부인까지� 했다.� “새벽”은� 해뜨기�전의� 이른� 새벽을�뜻하는� 속담적�표현이다.� 오직� 마가만이� 수탉

이� 두� 번� 울었다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베드로의� 직접적� 증언을� 명확하게� 들었던� 때문

이었을�것이다.�

=====14:32-34� 예수와� 열� 한� 제자는� 겟세마네로� 갔다.� 그곳은� 감람산� 기슭� 근처에� 올리브� 나무로�

사방이� 둘러싸인� 곳이었다.� 이� 고립된� 장소는� 유다도� 알고� 있던,� 그들이� 즐겨� 모이던� 장소였다.(눅

22:39,� 요18:2)� � � 네� 명이� “동산”안에� 들어갔을� 때� 예수는� 심히� 놀라며(깜짝� 놀라다)� 슬퍼하셨다.� 그

는� 세� 제자에게� 그의� 영혼이� 슬픔으로� 압도당하여� 거의� 죽기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했던� 것이다.� 그� 앞에� 닥친� 고난과� 죽음의� 무게� 앞에서� 예수는� 거의� 무너

질�지경이었다.�

=====14:35-36� 기도의� 중심은� “가능하다면� 이� 때가� 그냥�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가

능하다면”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탄원이� 근거하는� 구체적

인� 전제였다.� � � � “이� 때”란� 예수가� 고난� 당하고� 죽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을� 말한다.� 이것과� 관계된�

비유인� “이� 잔”� 역시� 똑같은� 사건을� 가리킨다.� “잔”이란� 육신을� 입은� 자로서� 받을� 수밖에� � � 없는� 고난

이나�죽음을�의미할�수도�있고� 그보다�더한� 죄에�대한� 하나님의�진노로�인한� 육체적일�뿐� 아니라�고통

과�죽음을�의미할�수도� 있다.�

=====14:37-41상� 이제� 마가의� 이야기의� 초점이� 예수의� 기도에서� 깨어� 있는� 데� 실패한� 세� 제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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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옮겨간다.� 예수는� 세� 번이나� 기도를� 중단하고� 제자들에게로� 갔으나� 그� 때마다� 그들이� 잠든� 것만을�

볼뿐이었다.� “아직도� 쉬느냐?”고� 하신� 말씀은� 죄를� 깨우쳐� 주는� 말일� 수도� 잇고� 역설적이나� 애정� 어린�

명령일�수도� 있으며�갑작스런�책망의�외침이라고�할� 수도� 있다.� 37절� 40절에� 비추어�볼� 때� 첫째번�해

석이�가장� 타당한�것�같다.�

=====14:41하-42� 41절�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잇는� 것� 같다.� 이제는� 자

고� 쉬라,� 그만이다� 라는� 말로� 인해� 제자들은� 일어났다.� 그� 때� 예수께서는� 때가� 왔음을� 알린다.� 그리고�

예수의�배신자가�도착하였다.� 예수와�세� 제자들은�도망치는�대신에�유다를�맞으러�앞으로�나갔다.�

=====14:43�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곧� 유다가� 단검을� 가진� 로마� 병사들과� 몽

둥이를� 든� 성전� 지키는� 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유다는� 밤에�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에게로� 그들을� 인

도하여� 왔다.� 그래서� 아무런�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예수를� 잡을� 수� 있었다.� 산헤드린이� 예수의� 체포를�

위해�영장을�발급했을�것이고�대제사장은�로마�군대의�협조를�얻어� 왔을�것이다.�

=====14:44-47� 유다는�동산에� 들어가자�즉시�예수께�나아가�랍비여라고�인사하면서�그에게�입을� 맞

추었다.� 뺨이나� 손에� 입� 맞추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 그의� 스승에게�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통상적인� 행

위였다.� 그러나�유다는� 그것을�배신의� 표로� 사용했던� 것이다.� ====14:48-50� 예수는�은밀하게� 행동하

는� 혁명가가� 아니라� 분명한� 종교� 지도자� 였다.� 그� 주간� 내내�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 모습을� 드러

내어� 가르쳤으나� 그들은� 그를� 잡지� 아니하였다.� 마치� 죄인처럼� 한적한� 밤에� 인적인� 드문� 곳에서� 그를�

체포한� 것은� 그들이� 겁에� 질려�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

다.� 물론� 제자들은�예수를�버려두고�도망쳐�버렸다.�

=====14:51-52�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독특한� 구절은� 제자들이� 모두� 완전히�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는� 50절을� 보충해� 주고� 잇다.� 이� “청년”은� (24세에서� 40세� 사이의� 한창� 때의� 나이)� 마가� 자신

일� 것이라고� 주석가들이�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 � � 이� 청년은� 잠을� 자다가�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는�

소식을�알려주자�그는�옷�입을� 틈도� 없이� 황급히�이�소식을�예수께�전하기�위해� 겟세마네�동산까지�뛰

어� 올라� 갔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예수께서� 체포되신� 후� 였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다

가�그만�발각되자�그는�홑이불을�팽개친�채�도망가�버렸다.�

=====14:53� 겟세마네에서� 예수를� 체포한� 자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집으로� 예수를� 끌고� 갔다.� 그

때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그는� A.D.� 18-36넌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다.� � � � 대제사장을� 포함한�

71명의�산헤드린�회원들은�야간�회의를�위하여�급히� 다락방으로�모였다.� � 이것은�비공식이었는데�낮에

만� 재판을�허락하는�유대인들의�엄격한�법적� 재판� 과정을�충족시키기�위하여�새벽� 이후에�공식적인� 인

가를�받아야�했다.�

=====14:54� 베드로는� 다시� 용기를� 내어�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다.� 이� 곳은� 제사장� 관저�

앞� 사각형의�정원이었다.� 그는� 예수에게�어떤�일이� 생길� 것인지�알고� 싶었다.

=====14:55-56�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에게� 사형을� 내릴�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지만� 그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서� 그들의� 증언을� 증거로� 삼을� 수� 없었다.�

아마� 이들은� 예수의� 체포� 이전에� 이미� 예비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고소� 내용을� 서로� 조화시킬� 것은� 없

었던�것� 같다.� 유대� 재판에서� 증인은�기소� 자� 역할을� 할� 수� 있으나� 그들의�증언은� 각각� 따로따로� 행해

야�했다.�

=====14:57-59�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대한� 것으로� 죄목을� 삼았다.� 여기서� 말해지는� 성전은� 예수의�

편에서� 보면� 그이� 몸� 된�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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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예배� 처소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고대� 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범죄였

다.�

=====14:60-61상� 대제사장은� 죄를� 찾기� 위해� 질문을� 했으나� 예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예수의� 침

묵은� 재판정을� 좌절시켰고� 재판의� 과정을� 벽에� 부딪치게� 했다.� � � � 14:61하-62� 대제사장은� 전술을� 바

꾸어�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나?”라고� 예수께� 물었다.(문자� 적으로는� 계속해서� 묻다의�

뜻)� 신약� 성경� 중에서� 여기서만� 발견되는� “찬송� 받으실� 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잇는� 유대� 칭호였다.� � � � 예수는� 명확하게� “내가� 그니라”� 곧� “나는�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마가복음에서는� 이곳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는� 자기가� 메시야임을� 공적으로� 천명하였

다.�

=====14:63-64� 대제사장이�그의�옷을� � 찢었다고�할�때�그의� 예복보다는�오히려�속옷을�찢었다고�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자기가� 예수의� 담대한�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

여� 주었다.�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는� 대답을� 함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

므로�그는�또한� 다행스럽게�생각하기도�하였다.�

=====14:65� 산헤드린� 회원� 몇� 명이� 그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를� 모욕하고� 침을� 뱉기까지�

했다.� 얼굴에�침을� 뱉는� 것은�관계를�완전히�단절하는�것이며�엄청난�인격적�모욕을�뜻하였다.�

=====14:66-68� 대제사장의�비자�중� 하나가� 베드로에게�다가와서�베드로가�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

임을� 알아본다.� 그� 여자는� 분명히� 베드로의� 신분을� 파악하였으나� 베드로는� 그것을� 부인하였다.� 그는�

자기�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부인했다.� 더� 이상� 발각되는� 것이� 두려워� 그는� 길거리로�

통하는�포장된�길�곧�앞뜰로�나아갔다.�

=====14:69-71� 동일한� 계집종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폭로하였다.� 다시�

그는� 부인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고소하여� “확실히� 너는� 그들� 중의�

하나니�너는� 갈릴리�사람이기�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갈릴리�사람들은�아람�방언을�말할� 때� 그� 발음에�

있어서� 현저히� 구별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단자인� 예수의� 제자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 � �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말은� 그가� 신성� 모독적� 발언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그들

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며� 법정에서처럼� 부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

하여�맹세한�것이라고�할� 수� 있다.�

=====14:72� 두� 시간이� 채� 못되어� 베드로가� 세� 번째로� 예수를� 부인하자� 그� 즉시� 닭이� 정확히� 두� 번

째� 울었다.� 베드로는�통곡하였다.� � � � � 마가복음�제� 15장

=====15:1� 날이� 밝아� 오자� 그� 즉시� 대제사장의� 인도에� 따라� 예수를� 정죄하고� 로마의� 판결을� 얻기�

위해� 예수를� 로마� 법정으로� 끌고� 갔다.� � � � 비록� 산세드린� 공회가�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나� 사형�

집행은� 직접� 할� 수� 없었다.� 판결을� 받은� 죄수는� 로마� 정부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어

야�했다.� 로마� 정부는�공회의�사형� 판결을�재가할�수도�있고� 기각할�수도� 있었다.�

=====15:1하� 산헤드린은� 예수를� 결박하여� 가야바의� 집으로� 갔다가� 다시� 거기서� 나와� 헤록� 궁궐로�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사형� 판결을� 얻어내기� 위하여�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유대를�통치하였다.� 그는� 유대인을�멸시한�다소� 거친� 총독이었다.�

=====15:2� 빌라도는�로마� 정부를�대신할�수� 있는� 완전한�권한을�가지고�있었다.� 산헤드린이�내린�사

형� 선고를� 확정� 시켜� 주는� 대신� 빌라도는� 이� 사건을� 좀더� 상세히� 듣고� 싶었다.� 예수가� 자기를�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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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주장한�것에� 대하여�로마� 황제에�대한� 엄청난�반역이요� 사형에�해당하는�범죄로�빌라도에게�여겨

졌을�것이다.�

=====15:3-5� 예수의� 답변으로� 볼� 때� 사형� 선고의�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 빌라도는� 다른� 정보를� 더�

얻기� 위해서� 예수를� 고소한� 사람에게로� 갔다.� 대제사장들은� 그� 사이� 예수를� 고소할� 전략과� 근거를� 더�

많이� 찾아� 놓고� 있었다.� � � �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빌라도는� 이� 귀찮은� 재판을� 피하

기� 위해� 역시� 그� 때� 예루살렘에� 와� 있던� 갈릴리의� 영주� 헤롯� 안티파스에게� 예수를� 보냈다.� 그러나� 헤

롯은�그를� 곧� 빌라도에게�다시�보냈는데�오직�누가만이�중간에�있었던�이� 사건을�기록하고�있다.�

=====15:6� 유월절이� 되면� 해마다� 백성들이� 환심을� 얻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백성들이� 선택하는� 죄

수� 한� 명을� 석방시켜� 주는� 관습이� 있었다.� 빌라도는� 백성들이� 예수의� 석방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예

수를�풀어� 주는� 대신�유월절�사면�관례를�이용해�예수를�놓아주려�하였다.�

=====15:7� 바라바는� 민중� 선동가였고� 강도며� 살인자로� 기록돼� 있다.� 아마� 그는� 로마에� 대해� 혁명을�

일으킨�민족주의자인�열심당의�일원이었을�것이다.� 그는� 지금�체포되어�사형�집행을�기다리고�있었다.�

=====15:8-11� 많은� 무리들이� 재판� 장소�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관례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시

켜� 달라고� 요청하였다.(6절� 참조)� 이마� 그� 중의� 상당수가� 바라바의� 추종자였을�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

대신�바라바를�놓아�달라고�충동질하였다.�

=====15:12-14� 빌라도는� 예수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기

를�원했던�것이다.� 그리하여�빌라도는�마침내�십자가�형을�선언하게�되었다.

=====15:15� 빌라도는� 군중의� 요구에� 이끌려� 결국� 정의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을� 선택했다.� 사형� 선고

를� 받은� 남자는� 처형되기� 전에� 잔혹한� 매질을� 먼저� 당하는� 것이� 당시� 로마의� 관례였다.� 죄수는� 벌거�

벗기워지고�때로는�나무에�묶인�채로� 날카로운�금속이나�뼈� 조각을�박은� 짧은� 가죽� 채찍을�든� 로마�병

사들에게�사정없이�등에�매질을�당하여야�했다.

=====15:16� 예수를� 매질� 한� 후� 로마� 군병들은� 예수를� 데리고�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뜰� 안에서� 모

든� 군대를�모았다.(약2,300명)

=====15:17-19� 예수를� 조롱하는� 행위는� 단순히� 예수� 한�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

들의�왕을� 기다려�온�유대� 민족� 전체에�대한� 모욕이기도�했다.

=====15:20� 조롱을�다한� 후� 백부장의�휘하에�있는� 4명으로�된� 사형� 집행조가�예수를�십자가에�못박

기�위해서�성밖으로�끌고�나갔다.� �

=====15:21-22� 정죄� 받은� 죄수는� 자기� 십자가의� 파티불룸� 즉� 150파운드� 정도의� 십자가의� 가로� 목

을� 직접� 지고� 시내를� 거쳐� 처형� 장소까지� 가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 � � 군병들은� 예수를�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골고다로� 끌고� 갔다.� 골고다는� 해골의� 장소라는� 아람어에� 해당한는� 헬라어� 음역

이다.� 골고다는�사람의�두�개골을�연상시키는�둥근�바위� 언덕이었다.�

=====15:23-24� 마가는�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만� 기록하였다.� 로마

에� 있는� 그이� 독자들은� 상세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것도� 제기하지� 않았다.� 십자가

에�달린� 자는� 먼저� 극도의�피로와�고통과�갈증이�엄습해�왔고� 2,3일� 후에� 천천히�죽었다.� 때로는�희생

자의�두�다리를�부러뜨림으로�죽음이�빨리� 찾아오게�하기도�하였다.�

Page 144: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15:25� 해뜰� 때부터� 계산하는�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을� 사용하면서� 오직� 마가만이� 예수의� 십자

가형이� 제� 3시� 즉� 아침� 9시경에� 이루어� 졌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요한� 복음� 19:14의� 제� 육시� 라는�

말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요한의� 시간� 계산을� 로마� 식으로� 한다면� 요한이� 말한� 시간은� 오전� 6시

가� 된다.�

=====15:26� 죄인의�이름과� 그의� 죄목을� 판에� 써서� 조인의�머리� 위에� 매다는�것은� 당시� 로마의�관례

였다.� 복음서에서� 죄패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은� 죄패가� 세� 가지�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인� 듯하다.�

빌라도가�이� 말을�쓰게� 한� 것은� 유대인들의�독립에�대한�열망을�모독하기�위한�것이었다.�

=====15:27-28� 예수와� 함께� 처형을� 당한� 두� 명의� 강도는� 예수의� 죄목을� 잘� 아는� 것으로� 보아� 예수

와� 함께� 재판을� � 받은� 것� 같다.� 빌라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사야서� 53:12의� 예언을� 성취시키게�

되었다.

=====15:29-30� 군중들은� 예수를� 다시� 모욕하였다.� 성전을� 사흘만에� 지을� 엄청난� 능력이� 있다면� 그

는� 십자가에서�내려와�먼저�그�자신을�구원할�수� 있을� 것이�아니냐고�예수를�비웃었다.�

=====15:31-32� 유대인의� 지도자들도� 군중들과� 함께� 예수를� 조롱하였다.� 그들의� 소원이� 마침내� 이루

어�진� 것이다.�

=====15:33� 예수는� 낮�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제6시에� 완전한� 어둠이� 온� 땅에� 내려� 덮혀� 제9

시까지� 계속� 되었다.� 이� 어둠은� 예수� 위에� 내려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우주적�

표상이다.�

=====15:34� 마가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 말씀� 중� 오직� 한� 마디� 말씀만� 기록해� 놓았다.�

이� 외침은� 예수가� 단순히�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 것도� 아니다.� 예수의� 부르짖음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법적인� 의미에서� 버림을� 받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15:35-36� 곁에� 섰던�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의�부르짖음을� 엘리야를�부르는�것으로�잘못� 들었거

나� 조롱하기� 위하여� 잘못� 해석하였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의로운� 수난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엘

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예수는� 땅에� 2-3피트� 떨어져� 매달려�있었다.� 구경꾼� 중의� 하나

가�그� 예수께�신� 포도주를�갖다�주어�마시게�하였다.�

=====15:37� 그가� 그때� 십자가에� 달린� 일반� 죄인들과� 똑같이� 죽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큰� 소리

로� 외쳤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 직전에�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갑작스러

운�것이었다.� 이것이�빌리도의�놀람에�대한� 설명이다.�

=====15:38�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그�

행위가� 하나님의� 행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순간� 유대� 저녁� 봉헌을�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의

해�관찰되고�보고되었을�것이�틀림없다.�

=====15:39� 예수의� 곁에� 서서� 이� 모든� 이상한� 일들을� 관찰했던� 백부장은� 사형� 집행관의� 일을� 맡았

던� 이방� 로마� 관리였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에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다.(44절� 참조)� 예수의� 죽

음을�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하나님의�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 � � 백부장이�고

백은�예수의�정체를�드러내려는�것� 중� 핵심�부분이다.� 이것은�비웃는�자들과�대조되는�부분이다.�

Page 145: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15:40-41� 헌신적인� 여인들� 몇몇은� 멀리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있

을� 때� 이� 세� 여인들이� 이곳� 저곳으로�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그의� 물질적� 욕구를� 돌보곤� 하였다.� 예수

를�정기적으로�따르지�않았던�여인들도�거기에�있었다.�

=====15:42-43� 예수의�매장� 당하심은�그가�확실히�죽었다는�것을� � 확증하여�주는� 것이며�초대� 교회

의�선포�내용� 중� 중요한�것이었다.

=====15:44-45� 예수가� 벌써�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빌라도는� 놀랐다.� 그는� 백부장을� 불러� 예수가� 정말�

죽었는지� 확인을� 해보았다.(39절)� 이� 백부장은� 십자가� 처형을�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예수가� 죽었

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빌라도는� 요셉에게� 시신을� 내� 주었다.� 요셉의� 요구에� 빌라도가� 선뜻� 응한� 것은�

예외적이었다.�

=====15:46-47� 요셉은�틀림없이�하인들의�도움을�받아�해지기�전� 약� 두어�시간� 동안에�장례를�마쳤

을� 것이다.� 요셉과� 같이� 산헤드린� 회원이었던�니고데모�역시� 장례식을� 거들었다.(요19:39-40)� � 그리고�

요셉의� 새� 무덤에� 안치되었다.� 무덤의� 입구는� 산� 위에서� 굴러� 온� 둥글고� 평평한� 돌로� 막아� 침입자들로

부터�예수의�시신을�보호하였다.� � � � � � 마가복음�제� 16장

=====16:1� “안식일”� 곧� 토요일� 자정이� 지나고� 유대인의� 새� 날인� 일요일이� 시작되었다.� 여인들은� 향

료를� 준비했다.� 향료는�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서� 시신� 위에� 뿌려졌고� 이는� 사랑의� 헌신을�

표현하기도�하였다.�

=====16:2-3� 그� 주간의� 첫날� 아주� 이른� 아침해가� 뜨기� 바로� 전에� 여인들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새벽� 어둠� 속에� 집을� 나서서� 해가� 뜬� 직후에� 무덤에� 도착하였다.� 분명히� 그들은� 무덤� 위에� 있는� 공식

적인�인봉이나�지키는�사람들이�있다는�것을� 알지�못했다.�

=====16:4-5� 누가와�요한은�합법적인�증인을�위해서�필요한�수인� 두� 천사가�나타났음을�언급하였다.�

그러나� 마태와�마가는�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는데�아마� 이것은� 대변인을� 의미하는� 것� 같다.� � � � 여인들

은� 하나님의� 사자와� 만나자� 깜짝� 놀랐다.� 강한� 감정을� 나타내는� 이� 복합� 동사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에�부딛칠�때�압도당하는�느낌을�표현하는�단어이다.�

=====16:6� 여인들은�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사람�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예수의� 몸이� 없었다.� 천사의� 메시지는� 부활하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며� 동일한� 역사적� 한� 인물임을� 밝혀� 주었다.� 또한� 빈� 무덤이� 그것을� 증거해� 주었다.� 부활

의�확실성은�하나님께�받아�천사가�전해� 준� 이� 증언에�근거하며�그� 때나�지금이나�사람들을�믿느냐�믿

지� 않느냐의�결단�앞에� 서게� 한다.�

=====16:7� 여인들에게�하나의�임무가�주어졌다.� 그것은�부활의�소식을�다른� 제자들에게�전하는�것이

었다.� “제자들과� 베드로”라는� 말은� 베드로를� 구별하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이다.� 이것은� 마가의� 자료의�

상당� 부분이� 베드로로부터� 나온� 것임을� 반영한다.� 베드로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음에도�불구하고� 용서를�받아� 열� 한� 제자의� 무리� 속에� 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 � 유대� 법

에� 의하면� 여인들은� 신빙성이� 있는� 증인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16:8� 여인들은� 두려웠고� �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두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의�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경외감과� 두려움에� 압도되어서� 침묵에� 빠져들� 수밖에� �

Page 146: 마가복음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mark.pdf · 마가복음제1장 =====1:1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복음의시작이라-책의제목으로여겨지는이선언적인

� 없었다.�

=====16:9� 이� 구절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날�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 온� 것에� 갑작스럽게� 관심을� 돌

린다.� 전에는� 이름만� 세� 번� 언급되었지만� 여기서는� 처음으로�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준� 마리아

라고� 설명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즉�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 � � 이것

은� 예수께서�의도적으로�자신을�나타내시지�않으면�사람들은� 부활�상태의� 예수를�인지할�수� 없다는� 것

을� 의미한다.�

=====16:12-13� 이� 구절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한다.� “저희� 중� 두� 사

람”이라는� 말을� 볼� 때� 이들이� 마리아의� 보고를� 믿지� 않았던� 무리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

게� 예수님은� 나타내셨다.� 그들도� 역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의� 사실을�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역시�

믿으려�하지� 않았다.� 제자들은�그들이�예수의�환영을�본� 것으로�여겼다.�

=====16:14� 그�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

들의� 불신과� 완악함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

다.�

=====16:15� 후에� 예수께서는� 그이� 제자들에게� 그의� 위대한�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셨다.====16:16�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보통� 믿는� 자와� 세례� 받는� 자를� 동일시� 하지만� 세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임

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 후반부는� 복음을� 믿는� 자와는� 대조적으로� 믿지� 않는� 자는� 최후의� 심

판� 날에�하나님께�정죄를�당할�것이라는�것을�보여주고�있다.�

=====16:17-18�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확실성을�보증해�주는� 것이지�그들�중의� 누가� 임의로�행사할�수� 있는� 개인적�능력이�아니었

다.� 사명을�완성하는�데� 있어서�신자들은�예수의�이름으로�기적을�행할�능력을�받을�것이다.�

=====16:19-20� 이� 구절은� 두� 개의� 상호� 밀접히� 관련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주� 예수께

서� 부활하신� 후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다.� 거기서� 예수는�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하

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 사실은� 스데반이� 본� 환상에� 의해�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증명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의� 지상적� 사역은� 끝난� 것이다.� � � � 또� 하나는� 어떤� 다른� 의미에서� 이� 땅� 위에서의� 지상

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나가�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되었다.�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힘� 주고� 그의� 말씀에� 수반하는� 표적들을� 통하여� 자기의� 말씀을� 확증함으로써� 그

들과�함께� 일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