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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류지(廣隆寺)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투하 결정지인 히로 시마와 나가사키 외에도 교토, 요코하마, 고쿠라, 니가타, 도쿄 등에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원 폭 12발을 추가로 투하할 계획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종안에서 도쿄는 소이탄 공습 으로 이미 10만 명 이상이 숨지고 16제곱마일 면적이 불에 타는 등 상당한 피해를 본 데다 항 복협상을 끌어내는데 히로히토 국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관계자들 사이에 넓게 퍼졌기 때문 에 제외되었으며 이어 교토도 잠재 표적에서 빠졌다. 그 이유는 신혼여행을 교토로 다녀온 적 이 있는 육군장관 스팀슨은 교토가 중요한 문화 중심이기 때문에 폭격 대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경하게 내세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들은 고류지(廣隆寺)에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 지상의 시간과 속박을 넘 어서 달관한 인간 실존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예 찬했던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백제의 미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우리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반가 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아 일본미술사에서는 한반도에서 도래한 불상의 상징으로, 한국미술사 에서는 사실상 삼국시대 불상의 하나로 여겨온 '명작'이다. 역사연수의 멘토역할을 해주셨던 정영호 교수님은 이 불상과 우리와의 관련성을 손가락 사건을 일화로 들어 설명해주셨다. "불상 의 미소, 그 자태에 반한 일본 대학생이 일행이 떠난 자리에 남았다가 몰래 불상을 안아보려 하다가 손가락을 하나 부러뜨렸지요. 국보 훼손이라고 난리가 났는데, 이 와중에도 어느 역사학자가 손가락이 부러질 때 떨어진 나뭇조각을 연구했더니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적송(赤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겁니다. 일본 국보인 이 불상이 한반도에서 제작됐다는 유력한 근거가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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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류지(廣隆寺) - 일본속의 한민족사탐방tour.chosun.com/review/201502-kys4.pdf · 그 이유는 신혼여행을 교토로 다녀온 적 이 있는 육군장관 스팀슨은

Jul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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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류지(廣隆寺) 』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투하 결정지인 히로

    시마와 나가사키 외에도 교토, 요코하마, 고쿠라, 니가타, 도쿄 등에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원

    폭 12발을 추가로 투하할 계획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종안에서 도쿄는 소이탄 공습

    으로 이미 10만 명 이상이 숨지고 16제곱마일 면적이 불에 타는 등 상당한 피해를 본 데다 항

    복협상을 끌어내는데 히로히토 국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관계자들 사이에 넓게 퍼졌기 때문

    에 제외되었으며 이어 교토도 잠재 표적에서 빠졌다. 그 이유는 신혼여행을 교토로 다녀온 적

    이 있는 육군장관 스팀슨은 교토가 중요한 문화 중심이기 때문에 폭격 대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경하게 내세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들은 고류지(廣隆寺)에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 지상의 시간과 속박을 넘

    어서 달관한 인간 실존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예

    찬했던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백제의 미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우리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반가

    사유상'과 쌍둥이처럼 닮아 일본미술사에서는 한반도에서 도래한 불상의 상징으로, 한국미술사

    에서는 사실상 삼국시대 불상의 하나로 여겨온 '명작'이다. 역사연수의 멘토역할을 해주셨던

    정영호 교수님은 이 불상과 우리와의 관련성을 손가락 사건을 일화로 들어 설명해주셨다. "불상

    의 미소, 그 자태에 반한 일본 대학생이 일행이 떠난 자리에 남았다가 몰래 불상을 안아보려

    하다가 손가락을 하나 부러뜨렸지요. 국보 훼손이라고 난리가 났는데, 이 와중에도 어느 역사학자가

    손가락이 부러질 때 떨어진 나뭇조각을 연구했더니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적송(赤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겁니다. 일본 국보인 이 불상이 한반도에서 제작됐다는 유력한 근거가 된 것이지요."

  • ▲고류지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왼쪽)과 우리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반가사유 정영호 교수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영보전에 들어가면 왼쪽에 약사여래상을 호위하는 십이신장상

    (十二神將像, 藤原時代)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봐도 십사신장이기에 왔다갔다 하다가 안내하

    는 분에게 여쭤봤더니 호위상의 양쪽에 조금 덩치가 더 큰 형상은 십이신장을 보호하는 수호상

    이라는 설명에 작은 궁금증이 풀렸다. 영보전 안 쪽 중앙에 자리잡은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재

    질이 나무이다 보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모습이지만

    얼굴이 좀 더 부드럽고 편한 느낌을 주면서 나무 특유의 자연미가 흐르는 것 같았으며, 금동미

    륵반가사유상은 뺨에서 금세라도 뗄듯한 손가락의 모습과 왼쪽 무릎에 올려놓은 오른쪽 발의 엄

    지발가락이 살짝 들려 움직이는 듯한 모습, 왼쪽 무릎이 좌대를 벗어나 있는 점으로 볼 때 동적

    인 움직임이 강조된 데 비해 이곳의 반가사유상은 정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이라 두 나라 문화의

    미묘하고도 뚜렷한 차이를 보는 듯 하였다. 고류사에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자연스럽고 자비

    로운 인상을 지닌 불상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면서 어머니께서 무릎만 편하시다면 한 번 모시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헐레벌떡’ 고등학교에서 국사를 지도하는 곽선생이 쇼토쿠태자상을

    못보고 지나쳤다고 다시 보기 위해 되돌아왔다면서 쇼토쿠태자상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영보전을 나서려던 나는 친구인 곽선생과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다시 한 번 여유있

    는 마음으로 눈에 담았다. 조각에 문외한인 내가 한참동안 넋을 잃고 그 앞에 서있었다.

  • ▲영보전(靈寶殿) 앞에서

    ▲쇼토쿠태자 효양상(17세 때 모습 목조상)

    ▲쇼토쿠 태자의 목상이 모셔져 있는 상궁왕원태자전

  • 『 니조성(二條城) 』

    니조성은 일본을 통일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이에야스가 천황이 있는 교토에 머무를 숙

    소로 지은 성이다. 공식적으로는 성이라고 하지만 니조성은 으리으리한 성이라기보다는 요새

    화된 궁전에 가까웠으며, '혼마루'와 '니노마루'라는 이름의 개별 궁전이 있는데 두 궁전에는

    각각 많은 수의 건물과 정원들이 딸려 있다. 혼마루 궁전의 원래 건물들은 1750년 화재로 소

    실되었고, 현재의 건축물은 1893년 교토의 황궁에서 옮겨온 것이며, 니노마루 어전은 세 개의

    섬과 3단 폭포가 있는 니노마루 정원 안의 호수를 따라 비스듬한 형세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

    궁전들이 지닌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복도에 있는 '꾀꼬리 마루'인데, 이 마루는 침입자가 들

    어와 그 위를 걸으면 새소리처럼 삐걱대도록 건축되었다. 니조성에 있는 미닫이문과 벽의 대

    부분에는 유명한 가노 학파의 화가들에 의한 소나무, 매화 등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니조성(二条城) 약도

    ▲니노마루어전

  • 우리들은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니노마루어전에 들어가기 위해 신을 벗고 들어가 줄을

    지어 관람을 하였는데 혼마루 궁전과 6개동으로 이어진 지그재그식 복도를 삐걱거리면서 걸어

    30개방을 모두 돌아보았다. 쇼군의 거처는 제일 안전한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고 주변에는 장

    관들이 묵는 방과 회의실 등 많은 용도의 방들이 있었다.

    니노마루의 여러 방을 지나면서 각 방의 용도를 보여주는 인형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 가

    장 인상깊게 본 곳은 대정봉환(大政奉還,1867년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반납한 사

    건으로 700년간 무인정치의 마감한 역사적 사건)이 열렸던 큰방으로 방 안을 가득채운 인물 중

    가장 상석에 자리잡고 있는 쇼군과 그를 따르는 다이묘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비장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었다. 니조성은 도쿠가와 막부의 출발지이기도 하고 문을 내린 종착지이기도 하여

    그 당시 영화와 비운이 담겨져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대봉정환(大政奉還), 사진출처: 야후재팬

    ▲黑書院방, 사진출처: 야후재팬

  • ▲니노마루 정원

    ▲해자((垓字/垓子,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城주위를 둘러서 판 구덩이)

  • ▲교토 지도 ▼오사카 지도

  • 『 오사카성(大阪城)』

    일본에서 구마모토성, 나고야성과 함께 3대 성(城)으로 꼽히는 오사카성. 메이지 시대 수도

    이전까지는 오사카 지역이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을 감안하면 오사카성이 가지는 의의는 그

    자체로 크다고 볼 수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누린 부귀영화의 상징으로서 알려져 있는 오사카 심벌!

    1583년 히데요시는 그때까지 있었던 혼간지 절터에 축성을 시작해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곽을

    3년에 걸쳐 완성시켰고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 지방을 거점으로 하여 1세기 이상 이어져 온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일본 국내를 통일하였다.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의 중신이었던 ‘도쿠카와이에야스’가 대장군이 되어 에도(현재의 도

    쿄)에 정권을 창설하고 1615년에는 오사카성을 함락시켜 (오사카 여름 전투 )도요토미 일족을

    멸망시켰다. 그 후, 도쿠카와 정권의 직할성으로서 관리되어 왔다. 외부 5층, 내부 9층 천수각

    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으나 오사카 나쓰노 지진으로 인해 소실되고, 재건

    후에 다시 한 번 화재로 소실하여 1931년, 당시 육군의 토지였던 오사카 중심부에 오사카 시민

    의 기부금으로 천수각이 재건되었다. 전투로 소실된 도요토미 시대의 천수각, 낙뢰로 소실된 도

    쿠카와 시대의 천수각에 이어서 세 번째의 천수각이라고 한다.

    ▼오사카성 지도

  • ▲오사카성 역사 강의(손승철 교수님)

    ▲장식물기와 『샤치가와라』, 호랑이얼굴에 물고기모양의 상상의 동물

    ▲오사카성의 천수각

  • ▲전시관의 자료

    16.조선출병이라고 쓰여진 역사해설자료에는『규슈·나고야성까지 원정』이라는 소제목이 있

    었는데 그 내용은 “히젠나고야성은 히데요시의 중국대륙정복이라는 무모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기지로 축성되었다.....(중략)....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비전투원을 포함한 대량살육과 포

    로의 강제연행 등 조선민중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 내용을 보고

    “아! 역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로 보려고 하는 일본인도 있구나.”라고 하는 생각에 바로 전

    까지 도요토미의 천수각을 온 일을 불편하게 여겼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면서 작년에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 배관시간이 넘어 입장하지 못한 시텐노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준비를 하였다.

    ▲오사카 여름 전투장면(모형)

  • 『 시텐노지(四天王寺) 』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시텐노지의 가람 배치는 중문, 오층탑, 금당, 강당이 일

    직선상에 이어지고 이를 호위하듯 주변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인

    데 이 형식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건축양식양식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는 백제의 여

    러 사찰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가람배치인데 비록 입구가 오층탑 보수공사로 다소 어수선했

    지만 백제의 정림사지 절터 안으로 들어가 역사 여행을 하는 듯한 포근한 느낌을 받으며 경내

    를 돌기 시작했다.   

    ▲시텐노지 (四天王寺) 경내지도

    ▲시텐노지의 오층탑

  • ▲西重門에서 본 시텐노지. 사진출처:위키백과

    ▲西重門에서 본 시텐노지(현재 오층탑 보강공사 중)

    ▲금당과 오층탑

  • ▲六時禮讚堂과 또 하나의 이시부타이(石舞臺) ▼六時禮讚堂

    시텐노지의 주요 건축물들은 목재로 만들어져 있어 여러 차례의 화재를 당했는데 에도 시대

    에 재건된 목조 건물 중에는 금당 뒤편의 로쿠지도(六時堂, 六時禮讚堂)만이 화재를 잘 피해 아

    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며 돌아가신 분

    의 위패도 모시고, 명복을 비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거북연못과 北引導鐘堂

  • ▲소원성취 기원등

    ▲회랑

    연못 안에는 불자들이 방생했다는 자라들이 있다고 하는데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눈에 띄는

    녀석은 없었다. 일본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최초로 만든 시텐노지는 경건한 사찰이라기보

    다 이렇게 기복 신앙의 도량으로 자리잡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 『 백두학원(白頭學園) 』

    ▲백두학원 교문과 사물놀이 공연

  • 시험기간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멀리 고국에서 온 교사들을 위해 귀한 시간을 냈다는 교

    장선생님의 말씀에 공연단 학생들과 백두학원에 대한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공연을 알리는 또

    렷한 우리말에 눈과 귀가 모아졌고 당찬 전통예술부 학생들의 역동적인 사물놀이 공연을 보는

    내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당찬 모습에 대한 고마움에 눈물이 났다. 밝은 얼굴로 주어진 역할

    에 최선을 다하는 몸짓에서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함과 희망을 보면서 다시 한 번『우리』라

    는 인연은 확인하는 뜻깊은 자리를 가졌다.

    5박 6일, 일반적인 여행계획으로는 가보지 못할 일본 속에 퍼져있는 한국 문화의 페로몬을

    확인하기 위해 뜻을 함께 하는 교사들과 일본을 찾았다. 이번 연수는 고대 한국인들이 벼농사

    와 철기문화 등 선진문화의 힘을 일본에 전수하고 그들은 선도했던 다마나(玉名)의 후나야마고

    분으로부터 출발했다. 고분에서 발굴된 5세기 금동신발과 금동관, 청동거울 같은 부장품들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흡사해 우리역사의 DNA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지금은 빨간색이 인상적인 신궁으로 어린아이들의 건강과 복을 발원하는 곳이 되었지만 과

    거 조선통신사들이 묵은 숙소였다는 시모노세키의 '아카마 신궁'과 바로 옆에 자리잡은 청·일

    양측이 조선의 운명을 놓고 협상했다는 요정 '슌판로(春帆樓)'를 관람할 때는 조금은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기도 하였다. 이들이 조약을 맺은 것처럼 우리들이 역사연수를 다녀온 후 한일

    정상들의 군위안부 청산을 위한 합의가 있었지만 민간차원에서 불편한 관계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한일통신사의 역사를 느끼는 이곳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교훈을

    상기해 양국이 미래를 같이 개척하면서 공생의 우호관계를 구축해나가길 바라면서 조선통신

    사들의 이동통로가 되었던 세토나이카이(세토내해, 瀨戶內海)의 어두운 바다를 헤치고 오사

    카에서 아침을 맞이하였다.

    내가 사는 충청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아스카 들판에 어둠이 내릴 무렵 백제 유민들이 건

    너가 일본 고대문명의 토대를 일군 땅에서 백제 왕흥사를 옮겨간 듯한 아스카테라(飛鳥寺)를

    들른 후 삼국의 굴식돌방무덤을 그대로 본뜬 이시부타이(石舞臺)고분 등 그 흔적들을 확인하

    였고, 신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고류지에서 만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자연스러움과

    편안한 표정에 반해 그 앞에 한동안 서있기도 하였으며 오사카성의 천수각에서 우연히 본 역

    사자료에 실린 조선침략을 반성하는 글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본인들이 있어 한일

    간의 고대의 인연이 미래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의 빛을 보았다.

    마지막 여정으로 방문한 백두학원에서 학생들의 밝고 힘찬 모습에서 한민족의 뿌리와 역동

    성을 새삼 느끼면서 고교동창, 중학교 친구와 셋이 함께 해서 더욱 뜻 깊었던 역사연수의 기

    억을 해마(hippocampus) 깊숙이 저장해놓기로 한다.

  • 『 참고 자료 』

    1. 일본 속의 한민족사 (조선일보사, 신한은행, POSCO)

    2. 조선이 본 일본 (두산동아)

    3. 야후재팬

    4. 조선일보

    5. 동아일보

    6. 연합뉴스

    7.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