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과 첨단기술 MARCH 2017 35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과학원, 서울대학교 이론물 리연구센터, 연세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KAIST, 고려대학교, 건국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 며 가속기에서의 힉스입자, CP 대칭성 깨짐, 암흑 물질 등의 현상에 대해 연구해왔다. 현재 경상대 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LHC에서의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연구하고 있으며, 물리학회 ‘물리학과 첨단기술’ 실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그는 왜 그랬을까?* 이 강 영 *이 글의 내용 중 일부는 “말과 활” 2014년 5/6월호 에 실린 같은 필자의 글 <요르단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난 2014년 3월호에 <빗나간 과학자 들>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스에 부역했던 두 노벨상 수상자, 필립 레나르트(Philipp Lenard)와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이야기를 했다. 이번 호에서는 역 시 나치스를 지지했으나 그들과는 조금 결이 달랐던 물리학자를 이야기해 보자. 물리학자들에게 1925년은 하이젠베르 크가 새로운 양자역학, 진짜 양자역학을 가져온 해로 기억될 것이다. 괴팅겐 대학 의 강사 하이젠베르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해 6월에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 트로 휴가를 갔다가 새로운 양자역학 체 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돌아온 후 7 월 29일에 논문을 투고했다. 하이젠베르 크의 이론은 보른에 의해 수학적으로 체 계화되어 9월 27일에 “양자역학에 관해 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그 리고 11월 16일 다시 후속 논문 “양자역 학에 관해서 II”가 발표되었다. 괴팅겐에 서 나온 이 세 편의 논문을 흔히 양자역학 을 만든 삼부작(trilogy)이라 칭한다. 삼부 작의 첫 논문은 물론 하이젠베르크 혼자 쓴 것이지만 두 번째 논문에는 하이젠베 르크의 이름은 없고, 그의 지도교수인 막 스 보른(Max Born)과 보른의 학생 파스쿠 알 요르단(Pascual Jordan)의 이름만 있 다. 그리고 세 번째 논문에는 이들 세 사 람의 이름이 모두 실려 있다. 요르단의 집안은 스페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페인 남부의 귀족 가문인 호르다 (Jorda) 집안의 파스쿠알 호르다(Pascual Jorda)는 스페인-영국 연합군 기병대의 일원으로 나폴레옹과 맞서 싸웠고, 그 인 연으로 영국이 웰링턴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당시 영국 왕실 소유였던 하노버에 정착했다. 호르다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며 가문의 이름을 요르단(Jordan)으로 바꾸 었다. 1902년 10월 18일 요르단 집안에 첫 아들이 태어났다. 집안은 장손에게 에 른스트 파스쿠알 요르단(Ernst Pascual Jordan)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장남 에게 파스쿠알이라는 이름을 붙아는 것은 이 집안의 전통이었다. 수학에 재능이 있던 요르단은 1921년 하노버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수학과 물리 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하노버 공과대학의 물리학 강의는 수준이 너무 낮았다. 요르 단은 조머펠트의 책 “원자 구조와 스펙트 럼 선 Atombau und Spektrallinien”으로 원자 이론을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다음 해에 당대 수학과 이론물리학 분야의 중심 지 중 하나였던 괴팅겐 대학으로 옮겼다. 괴팅겐은 가우스 이래로 독일뿐 아니 라 세계의 수학의 중심지였다. 20세기 초에도 괴팅겐의 수학과는 펠릭스 클라 인(Felix Klein)에 이어 다비드 힐베르 트(David Hilbert), 헤르만 민코프스키 (Hermann Minkowski) 등이 자리를 지키 며 수학의 중심 위치를 잃지 않았다. 또한 가우스가 그랬듯이 괴팅겐 수학의 전통은 수학을 과학과 공학에 응용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괴팅겐 대학은 최초로 산학 협동 협의체를 만들고 응용 전기학연구소와 응용수학연구소 등을 설 립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과학과 공학 분 야에서도 우수한 교수진을 갖추었다. 요르 단은 괴팅겐에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수학 자인 리하르트 쿠란트(Richard Courant) 에게서 수학을 배웠고, 쿠란트의 조수가 되어 쿠란트와 힐베르트(David Hilbert)가 함께 쓴 유명한 수리물리학 책을 쓰는데 도 기여했다. 한편 요르단은 이론물리학 정교수인 막스 보른의 강의와 세미나에도 참가했다. 보른은 괴팅겐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베 를린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피터 드바이 (Peter Debye)의 뒤를 이어 1921년에 괴 팅겐 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로 부임했 다. 보른은 유명한 뮌헨 대학의 조머펠트 의 그룹처럼 젊은이들을 모아서 떠오르는 새로운 학문인 양자론을 연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보른은 처음에 조머펠트 밑에 서 공부한 볼프강 파울리를 채용했고, 파 울리가 떠난 뒤에는 역시 뮌헨에서 조머 펠트의 학생이었던 하이젠베르크를 받아 들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서 보른 의 지도 아래 하블리타치온 논문을 제출 하고, 1924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의 사강 사(Privatdozent)가 되었다. 여기에 요르 단이 가세하고, 또 다른 학생인 훈트 (Friedrich Hermann Hund)도 합류해서, 보른의 그룹은 원자 이론의 중심지 중 하 나로 당당히 꼽힐 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 었다. 교수인 보른을 중심으로 강사인 하 이젠베르크와 보른의 학생이던 요르단과 훈트는 원자의 분광학의 이론적 해석에서 가장 앞서가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5년 이들은 양자역학을 세상 에 내놓은 것이다. 당시 요르단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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