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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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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 載 勳 (慶尙大)**

    Ⅰ. 머리말

    Ⅱ. 고비 남부를 둘러싼 武周와 突厥

    의 각축

    Ⅲ. 中宗의 北伐 구상 내용

    Ⅳ. 三受降城 건설과 포위망 구축

    Ⅴ. 北伐 중단과 突厥의 반격

    Ⅵ. 맺음말

    Ⅰ. 머리말

    中宗時期(705-710)는1) 趙翼이 소위 ‘女禍’라고 한 전통적인 평가와

    내적인 모순을 조정하려 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는 武則天(624-705,

    * “이 연구는 2012년도 경상대학교 발전기금재단 연구비재원으로 수행되었음(재

    단법인 경상대학교 발전기금재단-2012-02)”

    ** 경상대학교 사학과 교수 겸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1) 中宗(李顯, 656-710, 재위 684, 705-710)은 高宗(李治, 628-683, 재위 649-683)

    사후 684년 정월에 즉위한 다음 처가인 韋氏 세력을 통해 모후인 武后를 견제

    하려다가 다음 달에 폐위 당했다. 이후 廬陵王으로 강등되어 오래 동안 지방에

    연금되었다가 699년 突厥의 위협이 심화되자 다시 황태자로 복귀했다. 그러다

    가 705년 2월 22일에 宰相 張柬之 등이 禁軍을 이끌고 노쇠한 武則天에게 양

    위를 요구한 소위 ‘神龍革命’을 통해 즉위했다. 이후 中宗은 3월에 바로 唐朝를

    부활시키고 정력적으로 정치를 펼쳤지만 권력 쟁탈을 벌인 韋后와 安樂公主에

    게 허무하게 독살 당함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은 710년 5월로 끝나버렸다(史

    曉雲, 唐帝列傳 唐中宗 唐睿宗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95).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8재위 690-705)과 소위 ‘開元之治’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玄

    宗(682-762, 재위 712-756) 사이에 끼여 있고, 그 재위 기간마저 상대

    적으로 짧아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또한 中宗 자신의 개인적 능

    력이 부족해 실제 정치를 韋后와 安樂公主, 그리고 부마인 武三思 등

    에게 맡겨 그 자신이 한 것이 별로 없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中宗시기에 대한 일반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지나쳐버리기 어렵다. 왜냐하

    면 재위 기간 내내 中宗은 능동적으로 대외 정책을 펼쳐 최대 현안이

    었던 突厥을 약화시키기 위해 北伐을 하려 했으며 吐蕃과의 관계 역시

    새롭게 전환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짧은 재위 기간으로

    인해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기 어렵지만 이후 唐朝 중심의 새로운

    질서 구축에 성공해 소위 ‘世界帝國’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되는 玄宗時

    代의 성과와 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中宗시기 최대의 현안이었던 突厥에 대한 대응

    과정을 정리해봄으로써 8세기 초반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 과정과 그

    이후의 영향 등을 확인해보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기존에는 唐朝와

    突厥의 대결 과정 내지는 최대 현안이자 대외 정책을 결정했던 突厥

    문제2) 해결의 중요 성과로 평가되는 張仁愿(본명 張仁亶)의 受降城 건

    설과 관련된 문제가 많이 다루어졌다. 주로 착종된 사료상의 문제로

    인한 受降城 건설 연대 비정이라든가 정확한 위치, 관리 방식, 그리고

    성채의 역할 및 성격 변화 등이 중요한 주제였다.3) 그 중에서 受降城

    의 건설을 長城 방어의 관점에서 朔方軍의 설치에 초점을 맞추거나4)

    2) 唐朝에 대한 突厥의 대응과 관련된 연구는 薛宗正이 대표적이다 (突厥史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2).

    3) 方曉, 築“三受降城”時間考 (甘肅理論學刊 1984-6); 王亞勇, 三受降城修築時間考 (內蒙古師大學報(哲社漢) 1988-3); 黃利平, 唐天德鎭領三受降城說質疑 (歷史地理論叢 1989-1); 李鴻賓, 唐朝三受降城與北部防務問題 (隋唐五代諸問題硏究, 北京: 中央民族大學出版社, 2006).

    4) 李鴻賓, 唐朝朔方軍研究: 兼論唐廷與西北諸族的關系及其演變 (長春: 吉林人民出版社, 2000).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09아니면 운영과 그의 성격 변화 등을 추적한 것 정도가 주목된다.5)

    이런 다양한 접근에도 中宗시기 대외 정책에 대해서는 武則天의 한

    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에 불과했다는 일반적인 설명에 그쳤고, 건설

    당시 受降城의 성격 역시 군사적 방어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었다. 따

    라서 본고에서는 이런 성과를 기초로 突厥 대책의 중요한 성과인 受降

    城의 건설과 운용 문제에서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中宗시기 대외 정책

    의 성격을 밝혀보기 위해 突厥을 상대로 계획, 추진되었던 北伐 전 과

    정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기존처럼 受降城에만 초점을 맞추

    어서는 中宗시대 대외 정책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어렵기 때문

    이다. 이와 함께 일방적일 수 없는 대외 정책의 성격을 다각도로 조명

    해보기 위해 唐朝에 대한 突厥의 대응 역시 동시에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배경적 측면에서 中宗 이전 受降城이 건설된 고비

    남부(漠南)를 둘러싼 武周와 突厥의 각축 과정을 정리하려고 한다. 왜

    냐하면 당시 고비 남부 초원의 장악 여부가 양국 관계를 결정하는 중

    요한 변수로 특히, 突厥의 발전 여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705

    년 中宗이 즉위한 이후 北伐을 구상을 하고 추진한 배경과 그 과정에

    서 건설된 三受降城의 성격과 突厥에 대한 포위망 구축 노력 등을 정

    리해볼 것이다. 이와 동시에 北伐에 대한 突厥을 비롯한 주변 세력들

    의 대응을 정리함으로써 8세기 초반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화를 입

    체적으로 그려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이제까지 별다른 주목 받지 못

    했던 北伐을 중심으로 한 中宗시기의 대외 정책이 이후 睿宗(662-716,

    재위 710-712)을6) 거쳐 玄宗시대에 唐朝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 질

    서의 재구축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5) 仝建平, 唐代三受降城述论 (黑龍江民族叢刊 2009-5); 李基天, 8세기 唐의對遊牧民族 政策과 三受降城의 運營 -唐代 ‘長城’說에 대한 비판을 겸하여-

    (2012년 6월 13일 174회 中國古中世史學會 정례발표회 발표논문).

    6) 본고는 Ⅳ장에서 中宗 사후 그의 北伐 중단에 대한 突厥의 대응을 다루며 睿

    宗시기의 대외 정책을 일부 서술했다. 이것은 北伐을 중심으로 한 中宗시기 대

    외 정책의 종결과 그 영향을 다루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밝혀둔다.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10

    Ⅱ. 고비 남부를 둘러싼 武周와 突厥의 각축

    50여 년 동안 羈縻支配를 받다가 679년부터 고비 남부 초원에서 부

    흥운동을 세 차례에 일으킨 突厥은 초기에 자신을 옥죄어오는 武則天

    의 강경한 무력 진압과 포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687년

    몽골 초원의 安北都護府에서 唐朝에 협조하던 위구르를 河西로 몰아낸

    다음 초원의 유목 부락들을 재통합하고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7) 이

    것을 계기로 中國을 중심으로 한 一存的인 질서 체계였던 소위 ‘羈縻

    支配體制’가 붕괴되었으며 이후 초원을 비롯한 中國 주변 세계는 새로

    운 질서 재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8) 그리고 突厥이 이탈한

    다음 이들이 살던 고비 남부 초원은 여전히 武周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었다.

    武則天은 突厥이 부흥에 성공한 이후에도 이들을 좌시하지 않고 계

    속 강경하게 군사적으로 제압하려고 했고, 突厥 역시 이에 굴하지 않

    았다. 692년 突厥을 부흥시킨 일테리쉬 카간(Ilteish qaghan, 阿史那骨

    咄祿, 재위 682-692)이 죽은 다음 그를 이은 동생 카프간 카간

    (Qapghan qaghan, 黙啜, 재위 692-716)9) 역시 즉위 이후 내적인 안정

    에 노력하다가 693년부터 고비를 넘어 中國 변경을 공격하기 시작해

    7) 拙稿, 突厥第二帝國時期(682-745) 톤유쿠크의 役割과 그 位相 -《톤유쿠크

    碑文》의 分析을 中心으로- (東洋史學硏究 44, 1994).8) 拙稿, 唐初의 民族政策과 西北民族의 中國 認識 -‘羈縻支配體制’의 成立 過程

    과 관련하여 (서울大 東洋史學科論輯 19, 1995); 鈴木宏節, 唐代漠南における突厥可汗國の復興と展開 (東洋史硏究 70-1, 2011), pp.46-50.

    9) 중국 기록에는 즉위 이전의 관칭인 黙啜로 그를 卑稱하는데, 고대 투르크 비

    문에 따르면 카프간(Qapghan qaghan)으로 보인다(D., Sinor, “Qapqan”, The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 Ireland, 1954, p.178; 澤田勳, オンギン碑文東面第四行の解釋について , 內陸アジア, 西アジアの社會と文化, 山川出版社, 1983, pp.80-85). 그의 본명을 突厥集史 下(中華書局, 1958, pp.809-825)에실려 있는 毗伽公主墓誌拓本校注 를 근거로 阿史那瓌로 추측하나 분명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卑稱으로 보이는 중국식 표기가 아니라 비문의 표기에 따라

    인칭을 표기했다.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11武周를 어렵게 만들었다. 나아가 자신에 반해 武周의 지원을 받는 위

    구르를 비롯한 유목 부락들을 몽골 초원에서 완전히 몰아냄과 동시에

    주변의 여러 세력마저 다시 장악하려고 했는데, 그 첫 번째가 동부의

    거란(契丹)과 奚였다.

    이런 상황에서 突厥은 696년 5월 거란의 추장이며 松漠都督이었던

    李盡忠이 武周의 지배에 봉기한 것을 기회로 본격적인 동부로의 진출

    을 시작했다.10) 이 때 武則天이 토벌하다가 8월에 전군이 몰살당한 다

    음 토벌을 재개해도 군사 모집이 여의치 않아 어려움을 겪자 突厥이

    武周에 사신을 파견해 거란 토벌 원조를 빌미로 청혼을 하면서 河西에

    있는 降戶들을 돌려달라고 했다.11) 이에 武則天이 이런 요청을 받아들

    여 카프간 카간에게 左衛大將軍 歸國公을 제수한 다음 左豹韜衛將軍

    閻知微를 보내 遷善可汗으로 책봉했다.12)

    696년 10월에 李盡忠이 죽고 그를 이은 처남 孫萬榮이 부락을 통솔

    하게 된 다음에도 武周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자 카프간 카간이

    거란의 본영을 급습해 李盡忠과 孫萬榮의 처자를 모두 잡고 물자를 약

    탈했다. 武則天은 이런 공로를 인정해 카프간 카간을 特進 頡跌利施大

    單于 立功報國可汗으로 책봉해주었다.13) 하지만 孫萬榮이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세력을 규합해 冀州를 공격하고 나아가 17만의 대군으로 구

    성된 토벌대를 697년 3월 동협석곡에서 대파하자 武則天은 다시 突厥

    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14)

    武周의 허약함을 확인한 카프간 카간은 이를 적극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고 했다. 사신으로 온 閻知微와 田歸道 등을

    모욕하며 豊州, 勝州, 靈州, 夏州, 朔州, 代州 등 여섯 주에 남아 있던

    降戶들과15) 함께 과거 자신들이 살던 고비 남부 單于都護府 관할 지

    10) 전영, 武后時期의 對外關係, -契丹의 亂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35-1, 2008).

    11)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68(이하 正史는 中華書局 標點校勘本).12) 上同.

    13) 上同.

    14) 舊唐書 권199下 東夷傳 契丹 , p.5351.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12역을 모두 돌려줄 것, 그리고 양국 간의 결혼을 허가하면서 곡식과 씨

    앗 10만 곡, 채단 5만단, 농기구 3천 구, 무쇠 수만 근 등의 물자를 제

    공해줄 것을 요구를 했다.16)

    武則天은 이런 요구의 받아들이는데,17) 이로 인해 突厥은 687년 몽

    골 초원으로 복귀하면서 포기했던 고비 남부의 突厥 降戶를 다시 포섭

    하고 單于都護府 관할의 초원까지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프간

    카간은 약속에 따라 697년 4월 武則天이 20만의 병력을 보내 거란을

    공격해 무너뜨린 다음 남쪽에서 토벌을 맡았던 武懿宗이 이후 안무가

    아니라 보복을 하자 이를 이용해 거란만이 아니라 奚와 霫 등을 모두

    장악했다.18) 따라서 突厥은 원조의 대가로 武周와 관계를 개선하고 자

    신의 요구마저 강요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카프간 카간[黙啜]이 더욱

    강성하게 되었다.”는19) 평가가 가능했다.

    그런데 698년 5월 9일 武則天이 單于都護府를 安北都護府로 개칭해

    서 유명무실화 된 두 都護府를 하나로 통합시켰다.20) 이것은 이미 長

    15) 舊唐書의 기록에 따르면, 카프간 카간은 武則天에게 보낸 편지에서 河西에있는 降戶를 돌려주면 거란에 대한 원정을 하겠다고 되어 있다. 카프간 카간이

    河西라고 한 것은 위에서 豊州, 勝州, 靈州, 夏州, 朔州, 代州 등을 말하는 것으

    로 보인다. 하지만 원래 河西가 黃河 서안을 지칭하는 것이라 내용상의 혼돈일

    수도 있다. 이와 달리 突厥이 몽골 초원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남하한 위구

    르, 渾, 契苾 등과 같은 부락들이 河西에 거주했다는 점에서 이들을 지칭한 것

    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검토가 필요하다.

    16)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68.17) 조정의 논의 과정에서 먼저 麟閣少監 知鳳閣侍郞 李嶠와 사신으로 다녀온 田

    歸道 등은 突厥의 군대를 빌리는 것이 도적 병사를 빌리는 것과 같고, 또한 突

    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화친을 하기 보다는 군사적 대비를 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하면서 원조를 반대했다. 그와 달리 閻知微는 화친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거란을 평정하려면 카프간 카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양

    자의 격렬한 토론 끝에 姚璹 등이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자 武則天 역시 이를

    받아들여 降戶를 모두 돌려보내주는 등 突厥의 요청을 받아들였다(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p.5168-9).

    18) 資治通鑑 (中華書局 標點校勘本) 권205 武則天 神功元年(698), p.6522.19) 唐會要 (中華書局 點校本) 권94 北突厥 , p.1691.20) 唐會要 권73 單于都護府 , p.1309.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13城 이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武周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여

    전히 고비 남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며 突厥에 대응하겠다는 의지

    를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불만을 야기했다. 이에 카프간 카간은 698년

    7월까지 결혼을 약속한 딸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武則天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突厥에서 오래 지낸 경험이 있

    고 말도 능한 淮陽王 武延秀를 보내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7

    월에 武則天의 명을 받은 武延秀는 和親大使인 閻知微 등과 함께 대규

    모의 사절단을 구성해 突厥로 갔다. 하지만 카프간 카간은 黑沙城에

    위치한 南庭에 도착한 武周 사신 일행을 구금한 다음에 항복하라고 위

    협해 閻知微를 항복시킨 다음 그를 선봉으로 삼아 武周를 공격했다.21)

    이는 먼저 표면적으로 거란 원조시기 자신의 요구가 제대로 이행되

    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 표출처럼 보였다.22)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거

    란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武周의 허약함을 파고들어 이익

    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원조 대가로 받은 六州의 降戶와 單

    于都護府 관할의 고비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특히,

    突厥이 내지까지 공격하면 武周와의 경계가 長城이 되면서 그 이북을

    자연스럽게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카프간 카간을 비롯한 10여 만에 이르는 突厥 기병 부대가 嬀州와

    檀州를 지나 蔚州와 定州로 나아가 약탈을 했음에도 武周는 별다른 대

    응을 하지 못했다. 이에 크게 노한 武則天은 698년 9월에 카프간 카간

    을 참하는 자를 王으로 봉하겠노라고 상을 걸었고, 그를 斬啜로 바꾸

    어 부르게 해 토벌군을 고무시켰다. 그럼에도 남하한 突厥은 趙州를

    포위해 함락하고 나아가 定州 등지를 약탈한 다음 그곳에서 五回道(지

    21)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68.22) 카프간 카간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武周를 공격했다. 그

    내용은 ① 제공된 씨앗이 발아하지 않은 것, ② 제공된 금은기가 모두 진품이

    아니라는 것, ③ 突厥 사신들이 입고 있던 붉은 비단 옷을 모두 빼앗은 것, ④

    제공된 비단의 품질이 나쁜 것, ⑤ 天子의 아들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에 걸

    맞지 않는 武氏를 보내 결혼하려고 한 것 등이었다(資治通鑑 권206 武則天聖曆元年(698), p.6531).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14금 河北省 易縣 서쪽 滿城縣)를 따라 가면서 곳곳마다 약탈을 했다.23)

    이런 엄청난 승리는 투르크 비문에서24) 중요한 업적으로 다룰 만큼

    突厥 전체가 동원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빌게 카간 비문》에서

    “(동:15) 동쪽으로 야실 강과 산퉁 평원˙ ˙ ˙ ˙ ˙ ˙ ˙ ˙ 까지25) 출정했다.”라고 했으며,《톤유쿠크 비문》에서도 “(Ⅰ비문 동:01) 투르크 보둔(백성)이 만들어

    진 이래 투르크 카간이 즉위한 이래 산퉁의 도시˙ ˙ ˙ ˙ ˙ 들에, 바다에 이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나의 카간에게 요청해 군대를 보냈다. (동:02)

    내가 산퉁˙ ˙ 의 도시들에, 바다에 이르게 했다. 23개 도시를 점령했다.”라고 업적을 자랑했다.

    카프간 카간 역시 이 때 “4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땅이 천리가 넘어

    서북의 여러 오랑캐가 모두 항복하니 더욱 中國을 가볍게 여기는 마을

    을 갖게 되었다.”라고 한 것이나26) “中國에 가볍게 이긴 것을 힘입어

    교만스런 생각이 드니 과거 일릭 카간(Ilig qaghan, 頡利可汗 재위

    620-630) 시기와 비슷했고, 땅의 넓이가 만리나 되니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와서 그 명령에 따랐다.”고27) 할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로부터 高句麗 호구를 가진 자로 安東에 있었던 자들이 점

    차 줄어들어 나뉘어 突厥과 渤海에 투항했다.”라고28)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698년 이후 安東都護府 역시 약화되면서 그의 일부가 突厥에

    들어갔다. 이에 신흥 세력인 渤海의 大祚榮이 사신을 보내 武周에 대

    응했는데,29) 이것은 渤海가 突厥과의 통교를 통해 武周를 견제하기 위

    23)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69.24) 본고에서 인용한 고대 투르크 비문 자료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조(탈

    랴트 테킨, 이용성(역), 돌궐비문연구 -퀼 티긴 비문, 빌개 카간 비문, 투뉴쿠크 비문, 서울: 제이앤씨, 2008).

    25) 東征에 대해 芮傳明은 야실 강이 시라 무렌(누런 강을 의미)이라고 지적하면

    서 697년에 있었던 突厥의 契丹에 대한 원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芮傳明,

    後突厥政權“東征”考 , 中華文史論叢 47, 1991). 하지만 여기에서 야실 강은黃河를, 산퉁은 太行山脈 너머에 있는 지금의 河北省 지역을 지칭한다.

    26) 資治通鑑 권206 武則天 聖曆元年(698), p.6535.27) 新唐書 권215上 突厥傳 上, p.6046.28) 舊唐書 권199上 東夷傳 高麗 , p.5328.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15함이었고 突厥의 눈부신 성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698년 이후 카프간 카간은 고비 남북을 아우르는 몽골 초원을 장악

    한 다음 세력을 서방으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30) 이것은 交易國家

    로 발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突厥의 復興’이라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西突厥 영역은 唐朝의 기미지배를 거치면서 고

    비 남부의 突厥과 마찬가지로 지배집단인 阿史那의 영향력이 크게 약

    화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카프간 카간은 자신의 아들

    인 이넬 카간(Inel qaghan)을 서방으로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

    카 타르두쉬 샤드 黙矩(716년 빌게 카간으로 즉위)와 퀼 테긴 등을 남

    쪽으로 보내 武周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黙矩는 700년에 탕구트를 공격해 약탈했고,31) 그 다음 隴右 諸監의

    말 만여 필을 약탈했다.32) 또한 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701년 동생 퀼 테긴과 함께 소위 “알트 춥 소그닥(altï chub

    Soghdagh)”이라고 한 六胡州를33) 공격했다. 그 다음 남하해 鹽州와

    夏州 등지를 약탈했으며 다시 石嶺을 거쳐 幷州까지 들어가면서 격파

    하고 병주를 포위한 다음에 代州와 忻州까지도 약탈했다. 이것은 모두

    長城 남부까지 약탈을 함으로써 고비 남부의 초원에 대한 지배를 공고

    히 하기 위함이었다.

    突厥은 이미 第一帝國(552-630)이 분열된 7세기 초반부터 隋朝에 투

    항한 다음에 고비 남부와 오르도스 등지에 거주한 바가 있어 이곳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소위 ‘河南’이라고 불린 오르도스는 “좋은 풀

    29) 舊唐書 권199下 北狄傳 渤海 , p.5360.30)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70.31) 빌게 카간은 17살에 탕구트에 대한 원정을 자신이 지휘한 첫 번째 군사 작전

    이라고 했다(《빌게 카간 비문》 동면 24행).

    32)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70.33) 六胡州는 679년 突厥이 復興運動을 일으키자 唐朝에 투항한 소그드 상인들을

    靈州 남쪽에 있는 魯州, 麗州, 含州, 塞州, 依州, 契州 등지에 성을 건축하고 거

    주하게 한 곳이었다. 이곳의 소그드 상인들은 이후 武周의 통제를 받으며 羊馬

    와 騎兵의 중요 공급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朴漢濟, 唐代 六胡州 州

    城의 建置와 그 運用 , 中國學報 59, 2009).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16과 아름다운 샘이 목축에 이로워 백성들이 날로 늘어났다.”34) 평가를

    할 정도로 목축민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당시 突厥은 남쪽으로 내려

    가게 되면 더욱 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이곳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기까지 했다. 또한 640년에 이주한 고비 남부 역시

    陰山 山脈을 중심으로 한 초원 지대 역시 목축만 아니라 中國으로 이

    어지는 교통로가 연결되는 등 세력화하기에 알맞은 곳의 하나였다.35)

    따라서 이곳을 회복한 카프간 카간 역시 여름에 지낼 수 있는 牙帳을

    이곳에 설치하는 등 통치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唐朝는 과거에도 突厥이 이곳에서 세력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羈縻支配時期에 單于都護府를 설치해 투항한 突厥과 薛延陀 등을 통제

    했다. 이런 경험을 갖고 있었던 黙矩는 에서 唐朝의

    속임에 빠져 고비 남부로 남하함에 따라 나라가 망했다며 이곳의 위험

    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남:05) 타브가치(中國) 보둔(백성)은 금과 은, 비단을 어려움 없이 그

    렇게 우리에게 준다. 타브가치 보둔의 말은 달콤하고 비단은 부드럽다고

    한다. 달콤한 말과 부드러운 비단으로 속여 먼 보둔을 그렇게 가까이 오

    게 한다고 한다. 가까이 자리 잡은 뒤에 악의를 그 때야 생각한다고 한

    다. (남:06) 좋고 현명한 사람을, 좋고 용감한 사람을 나아가지 못하게 한

    다고 한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그의 우구쉬(무리), 보둔, 비쉬크(친척)까

    지 죽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달콤한 말에 부드러운 비단에 속아

    투르크 보둔아! 너는 많이 죽었다. 투르크 보둔아! 너는 분명히 죽을 것

    이다. “남쪽에 초가이 산지(陰山 山脈), (남:07) 퇴귈튄 평원(白道川)에

    나는 자리 잡겠어.” 라고 말한다면 투르크 보둔아! 너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이런 언급은 黙矩가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中國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어 혹시 백성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 남하할 것을 경계를 한 것으로

    특히, 유목 부락들의 唐朝에 대한 투항을 우려한 것이었다. 실제 突厥

    은 과거 中國의 지원을 받기 위해 고비 남부로 내려가 투항을 했고,

    34) 新唐書 권215上 突厥傳 上, p.6036.35) 吉田順一, ハンガイと陰山 (史觀 102, 1980), pp.48-61.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17이것은 끝내 자신을 재기 불능상태로 만들었다. 즉, 이곳은 中國이 강

    력해지거나 그들과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위험해질 수도 있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반대로 과거 자신들이 지냈던 고비 남부의 이점을 잘 알고 있었던

    카프간 카간에게 이곳은 바로 군주의 牙帳이 위치한 ‘외튀켄(Ötüken)

    산지’를36) 중심으로 한 몽골 초원의 안정 보장만이 아니라 나아가 中

    國에 압박을 가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교두보였다. 즉, 突厥이 中國을

    압도하게 될 경우 오히려 위협을 가하면서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전략 지역이었다. 따라서 700년대 초 카프간 카간이 武周와의 각축 과

    정을 통해 고비 남부 초원을 장악함으로써 突厥은 다시 초원의 패자로

    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고, 이를 기초로 서방으로도 진출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Ⅲ. 中宗의 北伐 구상 내용

    突厥의 발전으로 인해 武則天은 이제 長城을 사이에 둔 실질적 위

    협이 되어 언제든지 자신을 약탈할 수 있는 突厥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고비 남부를 넘겨준 이후에도 武

    則天은 突厥의 도발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703년 카프간 카

    간이 서방 진출이 주춤하게 되면서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해 화친 사

    절을 보내 청혼을 하자 그를 수용했을 뿐이었다. 성사된 양국의 화친

    이 이제까지 계속되었던 대결 국면을 일시 소강상태를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705년 정월 정변을 통해 武則天이 물러나고 즉위

    한 中宗이 突厥을 견제하면서 북변의 안정을 확보하려고 함에 따라 다

    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36) 山田信夫, テユルクの聖地ウトユケン山 (北アジア遊牧民族史硏究, 東京:東京大學出版會, 1989), p.64.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18만약 唐朝가 고비 남부 초원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아 突厥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唐朝의 현실이었다. 中宗의 당

    면 상황은 고비 남부를 차지하고 西突厥 지역에 대한 진출을 도모하면

    서 계속 중국 내지까지 공격하는 강력한 突厥이 실제하고 있다는 점이

    었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향후 唐朝가 더욱 심각한 어

    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中宗은 이를 막기 위해 먼저 방어

    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해 中宗은 먼저 705년 6월에 靈武軍大總管에 左驍衛大將軍

    裵思諒을 임명했다가37) 다음 해에 거란 출신의 장수인 沙吒忠義로 교

    체했다. 이것은 북변의 사정에 밝고 기병 전술에 능한 蕃將의 등용을

    통해 突厥를 방어를 제대로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唐朝가 突厥에

    군사력을 강화하자 일시적 화해 국면을 깨고 카프간 카간이 706년 12

    월에 長城을 넘어 黃河를 따라 내려와 靈州에 속해 있었던 鳴沙縣(지

    금 寧夏回族自治區 中寧縣 동북 鳴沙鎭)을 공격했다.38) 이것은 또한

    외교적으로 突厥을 고립시켜 서방으로의 진출을 방해하려고 한 것과

    관련되었다.

    당시 中宗은 西突厥 지역에 대한 羈縻支配가 약화되고 난 다음 강

    력한 세력을 갖게 된 튀르기쉬(Türgish, 突騎施)와 연계해 突厥에 대

    응을 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中宗은 706년 정월에 튀르기쉬의 추장

    烏質勒을 懷德郡王으로 책봉해 그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이것은

    명목적이었지만 이제까지 西突厥지역 서부에 蒙池都護府를 설치하고

    阿史那氏 후예를 카간으로 계속 책봉해주던 羈縻支配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큰 전환이었다. 中宗이 이런 전환을 한 것은 唐朝의 羈縻支

    配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튀르기쉬를 이용해서라도

    突厥을 서방 진출을 막아 그들의 발전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37) 新唐書 권4 中宗本紀 , p.106.38) 許震, 唐中宗神龍二年唐與突厥鳴沙之戰考 (重慶科技學院學報 2012-8).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19다.

    당시 西突厥 지역에 대한 羈縻支配의 와해가 진행되었던 것은 이미

    2대 蒙池都護 繼往絶可汗이었던 阿史那斛瑟羅이 카프간 카간의 공세로

    碎葉을 포기하고 도망쳐온 것에서 확인된다. 그는 튀르기쉬의 烏質勒

    이 碎葉을 탈환하자 다시 고지로 되돌아갔지만 703년에 쫓겨났다. 그

    리고 704년에 다시 斛瑟羅의 아들 阿史那懷道도 3대 蒙池都護 繼往絶

    可汗으로 책봉되나 토착 세력인 阿史那忠節과 대립하면서 역시 약화되

    었다.39) 따라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西突厥 지역 서부를 튀르기쉬의

    烏質勒이 완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된 것은 카프간 카간에게 더욱 더 西突厥 회복이

    완전한 ‘突厥의 復興’이라는 명분을 주어 그에 대한 진출을 도모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먼저 突厥을 견제하기 위해 군비를 강화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방 진출을 방해하고 있는 당조를 견제하지 않

    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카프간 카간은 이넬 카간을 시켜 튀르기쉬에

    대한 공격을 진행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조를 제압하기 위해 黃河

    를 건너 남하해 唐軍을 기습 공격했다.

    당시 양군의 전투가 벌어진 鳴沙는 隋代에 環州라고 할 정도로 강

    이 산을 휘감아 도는 요해지로서 靈州 방어의 중요 거점이었다. 만약

    여기가 뚫리게 되면 京師까지도 위험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

    었는데 唐軍의 주장인 沙吒忠義가 어이없게도 대패했다. 主將이었던

    沙吒忠義가 8만이나 되는 병력을 갖고도 싸우지도 않고 자신이 먼저

    도망갔기 때문에 쉽게 승리했다는 기록에서 확인되듯이40) 突厥이 쉽

    게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마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려

    는 기록상의 문제로 보이고 실제 전투는 생각보다 치열했음을 다음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선봉에서 공격을 지휘했던 퀼 테긴의 활약상을 기록한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20긴 비문>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동:32) 21살에 우리는 차차 셍귄(沙吒 將軍)과 싸웠다. 맨 처음에 타

    드크 초르의 잿빛 말을 타고 공격했다. 그 말이 그곳에서 (동:33) 죽었다.

    그는 두 번째로 으시바라 얌타르의 잿빛 말을 타고 공격했다. 그 말이 그

    곳에서 죽었다. 그는 세 번째로 예겐 실리그 벡의 치장한 밤빛 말을 타고

    공격했다. 그의 말이 그곳에서 죽었다. 그들은 그의 갑옷을 카프탄을 백

    여 개의 화살로 쳤다. 하지만 그의 얼굴, 머리에 하나도 맞지 않았다.

    (동:34) 그가 공격한 것을 투르크 벡들 너희 모두는 안다. 우리는 그

    군대를 거기에서 없앴다. (강조는 인용자)

    이 전투에서 突厥이 대승을 거둔 것에 대해 참전했던 黙矩 역시 《빌

    게 카간 비문》에서 “(동:25) 내가 22살에 타브가치(唐朝)로 (동:26) 군

    대를 이끌고 갔다. 내가 차차 셍귄(沙吒忠義 將軍)의 8만 군대와 싸웠

    다. 그의 군대를 그곳에서 죽였다.”라고 설명했다. 이것 역시 비록 구

    체적인 장소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적장이 沙吒忠義였다는 점에서 鳴沙

    에서의 승리를 기록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북변 방

    어를 책임진 沙吒忠義를 격파한 突厥은 鳴沙城을 함락한 다음 12월 11

    일에 原州와 會州 등지를 공격해 약탈한 다음 隴右에서 사육하던 말

    만여 필까지 몰고 돌아가 버렸다.41)

    이런 突厥의 엄청난 승리는 그 만큼 唐朝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주

    어 단순한 변경을 도발하는 위협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존재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中宗은 707년 정월 11

    일 突厥의 도발에 대응해 청혼을 없던 일로 함으로써 과거 맺었던 화

    친을 깨버렸다. 그리고 방어를 위해 용맹한 군사들을 모아 突厥에 대

    응할 수 있는 병력 모집함과 동시에 함께 카프간 카간을 참해 목을 가

    져오는 사람을 國王에 봉하고 諸衛의 大將軍으로 임명하며 재물 2천단

    을 주겠다고 상을 내걸었다.42) 이것은 突厥의 도발에 대한 대책으로서

    일단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 조치와 함께 突厥 공격과

    41)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70.42) 上同.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21관련된 포상 의지를 강하게 표명함으로써 공격을 독려하려고 한 것이

    었다.

    여기에서 특히, 포상을 하겠다고 한 것은 단순히 카프간 카간을 공

    격해서 죽였으면 하는 바람과 관련된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突厥 예하에 있는 유목 부락 추장들 내지는 그 주

    변의 여러 세력들의 도발을 유도하려 한 것과도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 太宗이 유목 부락의 추장들을 皇帝를 중심으로 한 질서

    에 넣는 것 즉, 宿衛로 삼아 그들을 蕃將으로 포섭함으로써43) 수령들

    의 이반 내지는 공격을 충동질해 突厥을 공격하게 했던 전례와 연결되

    기 때문이다. 실제 이런 방법을 통해 당조는 과거 630년 東突厥, 646년

    薛延陀 모두를 예하의 부락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족속들을 끌어

    들여 무너뜨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44)

    이런 임시적인 대응책에서 나아가 中宗은 여기에서 나아가 보다 근

    본적인 해결책 즉, 突厥을 완전히 ‘破滅’시킬 수 있는 방책을 구체화하

    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 조정의 모든 관리들에

    게 突厥을 무너뜨릴 방법을 올리라고 명했고, 논의된 여러 의견 중에

    서 右補闕 盧俌가 올린 방안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당시 盧俌의 주장

    은 突厥은 먼저 화친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할 대상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를 무너뜨리자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에 따르면, 먼저 鳴沙에서 唐軍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진단한 다음 이런 문제를 시정할 수 있는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함

    으로써 자신의 구상을 구체화했다.

    신이 듣건대 …… (중략) …… 변방의 황량한 땅은 흉악하고 사나운

    습속이 있기 때문에 덕으로도 부드럽게 만들기 어려워서 위엄으로만 제

    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三代이래로 이것 보다 나은 上策을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지금 突厥이 신속하지 않고 우리의 亭障을 소란스럽게 만

    43) 李基天, 7세기 唐朝의 諸衛將軍號 수여와 蕃將의 대응 (東洋史學硏究 120, 2012).

    44) 段連勤, 丁零高車與鐵勒 (桂林: 廣西師範大學出版部, 2006), p.287; p.326.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22들어 황제께서 노여워하시니 장차 군대를 정비해야만 할 것입니다. 신

    이 듣건대 …… (중략) …… 만리 밖에서 적의 창끝을 막아 지키는 것은

    장수를 고르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春秋에서 元帥를 논할 때에 禮記와 樂經을 말할 수 있는 사람과 詩經과 書經에 능한 사람을 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중략) …… 그런 蕃將인 沙吒忠義 등은 몸

    은 비록 강하고 단단하지만 심원한 전술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이는

    騎兵 장수의 재목에 불과할 뿐 본래의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군사가 출정할 때에는 軍律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군

    대가 패배해 물러난다면 장수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 (중략)

    …… 가까이로는 鳴沙의 전투에서 主將이 먼저 달아나 나라의 위신이

    쉽게 꺾였으니 마땅히 국가의 법률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한 그 中

    軍이 이미 패해 진영이 어지럽고 화살이 다해 궁한데도 불구하고 의롭고

    용맹한 병사가 오히려 능히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전쟁에 임하니 그 공을

    기록함으로써 전쟁을 독려할 수 있는 것처럼 상과 벌이 명확해야만 장

    수와 병사들이 절개를 다할 것이니, 이것이 적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45) (강조는 인용자)

    盧俌는 오직 위엄만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는 突厥을 방어하는데 첫 번

    째 문제가 主將을 잘못 선택한 것에 있었다고 진단했다. 특히, 鳴沙 전

    투에서 大總管으로 패전한 沙吒忠義이 蕃將으로 기마전술에만 능할 뿐

    여타 전술적 능력이 부족했고, 전투가 벌어지자 싸우기보다 먼저 도망

    을 가는 등 자질이 부족했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강력한 突厥과 대결

    을 하려면 단순하게 전투력만으로는 제압이 불가능하고 장기적 대응을

    이끌어갈 수 있는 主將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따

    라서 主將은 반드시 유가적인 교양을 갖춘 장수를 골라 적을 막게 함

    과 동시에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잘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信賞必

    罰을 엄격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향후 突厥을 대적할

    장수의 자격을 설명한 것인데, 朔方道 行軍大總管의 중요한 발탁 기준

    이 되었다.

    그 다음에 盧俌는 突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45)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71.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23신이 듣건대, 蠻夷가 蠻夷를 공격하게 하는 것이 中國의 좋은 계략

    입니다. …… (중략) …… 신이 듣건대 옛날에 新秦中을 설치해 長城 부

    근을 충실하게 한 것처럼 마땅히 옛 법도에 따라 사람들을 모집해 변경

    으로 이주시키고 그 정예 병사를 가려 뽑아 그 행군의 역을 면제시켜

    주며 廬伍에 머무르게 하면서 敎令을 밝게 한다면 전쟁에 관한 일들

    을 바로잡고 익힐 수 있으며, 평탄함과 험함을 숙지하게 해 그 사로잡

    은 것으로 상을 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중략) ……

    邊方의 州 刺史는 신중히 고르지 않을 수 없으니 그에 맞는 사람을

    얻어 일을 맡겨야만 합니다. …… (중략) …… 땅의 이로움과 하늘의

    때를 살펴 경작과 수확에 힘쓰게 하고, 가을과 겨울에 사냥하라고 명령해

    서 전쟁의 진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수년 후에 용맹하고 지

    혜로운 방책이 생기며 창고의 재물이 산처럼 쌓여 병기와 갑주가 견고해

    지고 날카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六軍을 정비해 고비[大漠]에

    서 막아낸다면 벼락은 만리까지 치게 되고, 바람은 두 牙庭을 쓸어버

    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蹛林의 추장을 죽여 藁街의 저택에 머리를

    메달아 모든 百蠻들을 놀라게 할 수 있어 五兵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

    면 위로는 天時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人事에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46)

    (강조는 인용자)

    위의 내용에 따르면, 먼저 以夷制夷를 통해 突厥을 약화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앞서 中宗이 유목 추장들에게 현상금을 걸어 突厥을 공격하게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즉, 唐朝의 군비가 갖추어지기 전에 부락들의

    추장을 충동질해 突厥을 공격하게 하거나 이탈하게 함으로써 약화시키

    려는 전형적 전술이었다. 실제 이것은 이제까지 唐朝와 관계를 독점한

    突厥의 존재로 인해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唐朝과의 관계를 간절하게

    원하는 다양한 세력들을 끌어들여 突厥의 권위를 해체하는 방법이었

    다. 즉, 내적인 이반을 충동하여 突厥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주변의 세력을 唐朝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또한 以夷制夷를 통해 突厥을 약화시킬 여건을 조성한 다음에 공격

    에 필요한 장기적인 계획을 이끌어갈 유능한 刺史(主將)를 골라 변방

    에 파견하고 그곳에 내지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屯田을 설치함으로써

    공격에 필요한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자고 했다. 그리고 이런 생활 기

    46) 上同.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24반의 마련을 토대로 변방 지역에 突厥을 방어하기 위한 근거지를 마련

    해 黃河 주변의 초원 지대를 회복하고 여기에 방어 체제를 구축함으로

    써 突厥의 준동을 없앤 다음 최종적으로 몽골 초원의 중심인 ‘외튀켄’

    까지 공격해 들어가 완전히 제압하고자 했다. 이것은 羈縻나 和親 등

    의 방법을 통해 突厥을 위무해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인 준비

    를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突厥을 무력 정벌로 무너뜨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北伐의 추진이었다.

    이런 계획을 적극 지지한 中宗이 北伐을 추진해 突厥을 제압하려한

    것은 먼저 突厥의 부흥 이후 唐朝를 중심으로 한 一存的 질서가 해체

    되면서 주변의 다양한 세력인 渤海, 突厥, 튀르기쉬, 吐蕃 등이 자신을

    위협하는 현실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羈縻支配의 와해는

    주변 세계의 分節的인 경향을 강화시켰고, 이로 인해 唐朝는 과거와

    같이 질서의 중심에 위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적으로 이

    합집산하면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여러 세력들 중에서 초원을 통합

    하고 세력을 확장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내려고

    했던 突厥의 움직임을 우선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우선의

    과제였다.

    이것은 또한 무력 정벌을 통해 東突厥과 薛延陀, 그리고 西突厥 등

    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거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高宗시대를 목도했

    던 中宗이 갖고 있었던 구질서 회복에 대한 열망과도 관련되었다. 그

    만큼 中宗은 武則天 시기에 무너져버린 唐朝 중심의 질서를 극복하고

    다시 과거와 같은 羈縻支配體制를 재건함으로써 唐朝의 영광을 되살리

    려고 했다. 물론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고 나아가 최대 현안인 突厥에 대한 北伐이 성공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런 구상을 기반으로 이후 북벌은 아주 신속하게 준비

    되고 추진될 수 있었다.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25

    Ⅳ. 三受降城 건설과 포위망 구축

    中宗은 708년 5월 1일 北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을 主將인 朔

    方道大總管에 洛州長史 左屯衛大將軍 張仁愿을 임명했다.47) 그는 武則

    天시기 吐蕃과 突厥과의 전투에 여러 차례 참가했고, 703년 突厥의 대

    공세시기에 유일하게 빌게 톤유쿠크의 공격을 물리친 바가 있었으며

    中宗 즉위 이후에는 洛州長史로서 곡가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엄격하

    게 적용해 큰 성과를 올리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48) 그는, 盧俌가 주

    청한 것처럼, 먼저 이미 변경에서 突厥과 많은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

    을 뿐만 아니라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突厥

    에 패배한 기병 장군 沙吒忠義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張仁愿의 열전에 따르면, 그는 朔方道大總管이 된 다음 行軍을 이끌

    고 출전하자마자 唐朝를 공격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돌아가던 突厥 부

    대를 추격해 야간에 격파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승리에 대한 기록

    은 시점이 분명하지 않아 정확한 상황을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전

    에 鳴沙를 공격했던 突厥 부대가 5월까지 남아 있었을 리가 없으며 혹

    시 공격이 있었다면 그 시점에 또 다른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별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카프간 카간이 5월에 그가 大總管으로 임명되기 이전 突厥

    에 파견되었던 사신 假鴻臚卿 臧思言을 살해한 것과49) 이상의 공격

    사실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大總管으로 임명된 다음에

    어느 시점인가 突厥을 추격해 승리한 것을 단순하게 연결해 기록한 것

    으로 보인다. 물론 승리를 했다는 것은 그가 突厥에 대해 우위를 점하

    면서 북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실제 張仁愿은 15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규

    47) 舊唐書 권7 中宗本紀 , p.144.48) 舊唐書 권93 張仁愿傳 , pp.2981-2.49) 舊唐書 권194上 突厥傳 上, p.5172.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26모의 행군을 거느리고 黃河 방어선까지 별 다른 저항 없이 북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벌군의 북상에 대해 이제까지 계속 북변을 약탈하던 突厥은

    별다른 반응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카프간 카간이 고비 남부에 내

    려와 있었던 병력을 모두 서방에 투입함에 따라 생긴 전력상의 공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카프간 카간은 西突厥 지역에서 세력

    을 차지하고 있었던 튀르기쉬 추장 沙葛이 唐朝의 碎葉鎭守使 周以悌

    의 지원을 받은 闕啜忠節과 갈등을 벌이다가 고립되자 突厥에 원조를

    요청하자 이를 기회로 서방으로 원정을 떠났다.50) 더욱이 “변경의 병

    력을 모아 서방을 정벌했기 때문에 고비 남부가 텅 비게 되었다.”라

    고51) 한 것처럼 고비 남부에 있던 병력까지 모두 동원할 정도로 대규

    모의 서방 원정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張仁愿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黃河까지 북상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突厥과 맞닿은 경계인 黃河를 건너 고비 남부 초

    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앞서 구상과 달리 黃河 이남에 방어

    기지를 건설해 군사적인 역량을 키울 시간적 여유를 필요 없게 만들었

    다. 이에 張仁愿은 秦代 蒙恬이 오르도스에 살던 匈奴를 몰아내고 이

    곳에서 新秦中을 건설한 것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고비를 넘어 북쪽

    을 겨누고 突厥의 말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풀을 뜯지 못하게 하기 위

    해”52) 黃河 북쪽에 세 곳의 성채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것은 단순히

    둔전을 설치하고 병력을 양성해 돌궐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 기지를 만

    들어 시간을 두고 돌궐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앞당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黃河 이남이 아니라 너머 적지에서 突厥을 강하게 압박하고 바로

    공격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당시 고비 남부 초원에는 카프간 카간이 설치한 突厥의 南庭이 위

    치하고 있었는데, 唐朝가 만약 이곳에 성채를 세우게 된다면 직접 공

    50) 舊唐書 권150 宗楚客傳 , p.2972.51) 呂溫, 三受降城碑銘並序 (全唐文 中華書局 影印本, 1983, 권630), p.7353).52) 上同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27격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唐軍이 이곳에서 나아가 만약 카프간

    카간을 잡게 된다면 과거 630년 일리 카간을 사로잡아 東突厥을 무너

    뜨렸던 것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고비를 넘어

    대규모의 원정부대가 몽골 초원까지 들어가는 번거로움도 없앨 수 있

    었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계획과 달리 당조는 北伐에 장기간을 소요

    하지 않고 바로 突厥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黃河를 건너 적지에 성채를 건설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건설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 찬반 논쟁

    이 벌어졌다. 먼저 太子少卿 唐休璟은 “兩漢시대이래 모두 북쪽을 黃

    河로 막았는데, 지금 성을 쌓아 경계를 넘어서게 되면 아마도 백성들

    을 수고스럽게 하고 비용을 쓰게 되어도 결국에 오랑캐가 갖게 될 지

    도 모릅니다.”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53) 이것은 천연 방어선인 黃河를

    포기하고 성채를 새로 구축할 경우 많은 관리 비용과 함께 결국 突厥

    이 복귀하게 될 경우 뺏길 수도 있다는 현실론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결국 突厥을 공격해서 굴복시키기보다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

    현상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唐朝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과 관

    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突厥을 파멸시키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던 中宗

    의 생각과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축성 계획에 대해 “오래 동

    안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54) 하면서 찬성을 한 宗楚客 등의 주장이

    中宗에게 더욱 설득력이 있게 다가왔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中宗은

    盧俌의 주장처럼 突厥은 위무의 대상이 아니라 무력으로 정복할 대상

    으로서 강력한 대응을 통해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中宗이 강력하게 축성을 통해 突厥을 공격하자는 의

    사를 굽히지 않는 張仁愿의 요청을 결국 받아들여 줌에 따라 건설은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53) 舊唐書 권93 張仁愿傳 , p.2982.54) 新唐書 권109 宗楚客傳 , p.4103.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28張仁愿은 708년 2월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미구에 발생할지도 모

    를 突厥의 공격을 막기 위해 論弓仁을 諾眞水(지금 內蒙古自治區 包頭

    市 達爾罕茂明安聯合旗 百靈廟鎮 북쪽의 艾不盖河)와 草心山에 보내

    突厥을 경계하게 했다. 이것은 공사 도중 突厥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에 대한 대비였다. 왜냐하면 受降城의 위치가 黃河를 등에 지고 있어

    방어 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받을 경우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시 진행된 공사가 언제 올지 모를 적을 앞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라 朔方道 行軍 전 병력을 동원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

    다.

    그리고 張仁愿은 신속한 축성을 위해 그 과정에서 200여 명의 병사

    들이 도망가자 이들을 모두 잡아 죽여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이

    런 노력 끝에 행군을 총동원한 공사는 60일 만인 3월에 끝났고, 세 곳

    의 성채가 완성되었다.55) 세 성채와 함께 동시에 성채 간에 통신을 위

    해 牛斗朝那山(당시 豊州에 있는 黃河의 북안)에서 시작해 모두 1800

    여 곳의 봉수대가 黃河를 따라 설치되었다. 이것은 동서만이 아니라

    북쪽으로 艾不盖河 유역까지 연결되어 突厥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해

    후방으로 전달할 수 있게 했다.56)

    새롭게 만들어진 受降城은 黃河 북안에 모두 세 곳 건설되어 三受

    降城이라고도 불렸다. 먼저 中受降城은 원래 突厥이 남침을 할 때 반

    드시 들러 축원을 하는 拂雲神祠가 있었던 곳으로 황하가 만곡 하는

    지점 중에서 가운데에 위치했다. 지금 內蒙古自治區 包頭市 서남쪽 昆

    都侖江이 黃河로 합류하는 곳 서쪽에 있는데, 黃河를 건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그로부터 동서로 400 여리 떨어진 곳에

    두 곳의 성채가 더 건설되었다. 東受降城은 지금 內蒙古自治區 托克托

    서남 黃河 東岸에 있었는데, 關內道 豊州에 속했다. 그리고 西受降城은

    지금 內蒙古自治區 杭錦後旗 북쪽 烏加河 북안에 있었는데, 關內道 勝

    55) 舊唐書 권93 張仁愿傳 , p.2982.56) 上同; 李鴻賓, 唐朝三受降城與北部防務問題 , 2006, p.116.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29

    關內道 三受降城 (譚其驤 主編, 中國歷史地圖集 권5)州에 속했다. 세 곳 모두 고비 남부 초원에서 黃河를 건너 오르도스로

    내려오는 지점이라 전략적으로 중요해 이후에도 계속 군사 기지나 교

    통로의 거점 등으로 역할을 했다.

    현재 受降城 자체의 구조나 크기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조사 보고도 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처음에

    성채가 완공되었을 때에 甕門과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추지 않은 구조였

    다는 점에서 초기 성채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그 이유를 張仁愿은

    호기롭게 방어를 위해 성 안으로 물러나지 않고 적이 오면 바로 대응

    을 하러 나아갈 뿐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자랑했다.57) 하지만 이것은

    기병 돌격전에 능한 突厥과 대응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아

    직까지 그의 위협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이다. 실제로 唐朝가

    突厥의 기병과 전투를 할 때에는 그를 상대하기 위해 기병전에 능한

    蕃部落兵을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내지에서 동원된 唐軍은 주

    57) 舊唐書 권93 張仁愿傳 , p.2982.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30로 보병으로서 성을 지키며 농성하거나 후방 지원을 맡았다.

    이런 전술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60일이라는 빠른 기간 내에 만들어

    지면서 아직 충분한 방어 시설을 갖추지 못한 초기의 성채는 먼저 방

    어라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보다

    중요한 목적은 당시 15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많은 행군 병력이 주둔

    하고 북벌을 할 때까지 생활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는 것임에 분

    명했다. 왜냐하면 북벌을 위해 준비되어 일단 이곳에 병력이 일단 주

    둔했다가 기회를 보아 바로 突厥을 공격하기에 접합하면 되었기 때문

    이다. 즉, 북벌이 개시되면 바로 突厥의 아장이 있는 陰山 山脈 인근의

    黑沙城을 타격하기 위해 세 방면에서 군대를 출동해 삼군으로 구성된

    突厥을 공격하는데 세 곳의 성채는 아주 적합했다.

    또한 張仁愿이 전격적으로 黃河를 건너 세 곳의 受降城을 건설함에

    따라 과거에 비해 북방으로 300리 이상의 땅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

    었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언제든지 고비 남부에 있는 突厥을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 결과

    “突厥이 산을 건너 방목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朔方이 다시 突厥의

    약탈을 받지 않아 병사 수만 명을 줄일 수 있었다.”고58) 했다. 이것은

    그 만큼 당조의 전격적인 작전이 突厥을 압박할 수 있을 만큼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受降城이 건설될 당시 突

    厥이 고비 남부에서 철수했기 때문이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

    다. 하지만 이후 突厥의 다시 고비 남부로 돌아와 그의 위협이 현실화

    될 경우 이런 성과는 쉽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西受降城의 경

    우 이후에 黃河의 홍수 등으로 인해 성채가 파괴되면서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초기에 북벌을 염두에

    둔 張仁愿이 성채를 세 곳을 건설함으로써 唐朝는 손쉽게 突厥을 견제

    하면서 직접 공격할 수도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이

    58) 上同.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31후대 中宗시기 대외 정책의 성과를 평가할 때 三受降城의 건설을 중요

    하게 다룬 배경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中宗은 성채를 건설한 다음 武則天이 698년 單于都護府

    가 위치했던 고비 남부로 이동시켰던 安北都護府를 고비를 가로질러

    만곡 하는 황하의 서쪽 끝단을 건너 靈州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던 西受降城으로 옮겼다.59) 이것은 동부에 있었던 單于都護府과 함

    께 고비 남부 초원의 동서에 유목 부락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관리 기

    관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조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몽골 초원에 대

    한 羈縻支配體制가 완전히 붕괴된 다음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유명무실

    하게 된 安北都護府를 재가동하려고 했다. 이것은 바로 中宗이 과거처

    럼 고비 북방까지 진출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이곳을 중심으로

    고비 남부라도 과거와 같이 통제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

    다.

    또한 이것은 北伐 이후 突厥을 와해시킨 다음에 그 예하의 부락들

    을 포섭하고 다시 통제하기 위해 한 준비이기도 했다. 이런 면모는 張

    仁愿이 성채의 이름을 ‘受降’이라고 한 것에서도 짐작이 된다. 中宗은

    이미 북벌을 추진하면서 카프간 카간을 참해 목을 가져올 수 있는 사

    람을 國王에 봉하고 諸衛의 大將軍으로 임명하며 재물 2천단을 주겠다

    고 현상금을 내걸어 유목 부락 추장들을 포섭하려고 한 것 즉, ‘受降’

    을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이런 의도대로 추장들이 突厥에게 이탈

    을 해서 唐朝에 투항하게 될 경우 이들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때 受降城을 그를 담당했던 중추적 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受降城은 주둔한 행군 병력과 함께 이곳에 투항한 蕃部落兵을

    받아들인 다음 이들 역시 활용해 北伐을 추진하기 위한 전진 기지이기

    도 했다. 이후 安北都護府는 黃河 홍수 등으로 인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西受降城을 대신해 714년에 다시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던 中受

    降城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실제 이곳은 受降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59) 舊唐書 권38 地理志 1, p.1458.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32카프간 카간에 반발한 突厥의 僕固 등과 같은 부락들이 唐朝에 내려오

    자 이들을 적극 편입시켜 朔方軍의 일원으로 만들었다.60) 이것은 유목

    부락의 투항과 거주를 통해 中宗이 처음 의도한 것처럼 受降城이 이후

    에 본래의 역할을 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상과 같이 北伐 계획에 따라 中宗은 능력 있는 主將의 기용과 受

    降城을 통해 北伐을 위한 교두보의 확보와 투항한 부락들을 관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1단계 북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런 준비

    는 突厥의 부재로 인해 쉽게 고비 남부까지 진출하게 됨에 따라 신속

    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에 남은 것은 北伐을

    추진하기 위한 주변 세력들과의 외교적 연대를 구축해 突厥을 포위망

    에 집어넣는 것과 함께 北伐을 실제 담당할 원정군의 조직뿐이었다.

    따라서 中宗은 먼저 盧俌가 突厥을 파멸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인 ‘以夷制夷’를 구체화하려고 했다.

    이런 唐朝의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한문 사료나 현재 남아

    있는 고대 투르크 비문 자료에는 三受降城 건설을 전후로 한 突厥 내

    부의 사정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원정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

    는 비문 자료에서도 당시 카프간 카간이 벌였던 西突厥 지역에 대한

    원정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문의 주인공들이 카프간

    카간의 업적 기록에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실패한 전투에 대해 기록하

    지 않았던 것과 관련된다. 즉, 突厥이 서방 원정에 고비가 비었다고 할

    정도로 전력을 투구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당시 突厥은 唐朝의 北伐이라는 위협에 적극 대응하기 어려운 상

    황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709년부터 中宗은 突厥을 포위하기 위해 그들이 전력을 투구

    60) 이후 安史의 난 시기에 적극적으로 唐朝를 위해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朔方

    軍 副節度使 僕固懷恩의 경우 受降城을 통해 투항을 한 인물의 하나였다. 그

    만큼 中宗의 受降城 건설과 突厥 예하 부락들의 투항은 긴밀한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 玄宗시기 적극적인 受降 정책으로 인해 714년 몽골 초원

    의 많은 유목 부락들이 고비를 건너 남하해 투항했고, 이것이 카프간 카간 말

    기 突厥의 약화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33해 진출을 시도했던 西突厥 지역에 위무 정책을 본격화했다. 이를 위

    해 中宗은 闕啜忠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동안 충돌을 벌이던 튀

    르기쉬 추장 沙葛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그동안 唐朝에 저항을 했던

    沙葛이 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唐朝에 도움을 청했기 때

    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이에 中宗은 바로 그에게 守忠이라 이름을 내

    려줌과 동시에 突騎施十四姓賀獵毗伽欽化可汗으로, 그의 동생인 遮弩

    에게도 守節이라 이름을 내려주고 右領軍將軍으로 책봉했다.61) 이것은

    沙葛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해 突厥과의 연계를 단절시키고 오히려

    北伐에 적극 참여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와 함께 혼란

    스러웠던 西突厥 지역을 안정시켜 突厥에 대한 서방으로부터의 압박을

    가시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다른 한편으로 唐朝는 709년 11월에 키르기즈(Qïrghïz, 堅昆 또는 黠

    戛斯)로부터 사신이 오자 그들과도 적극 교섭을 벌였다. 이들은 몽골

    초원의 배후인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으로부터 突厥을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中宗은 이들을 크게 환대하고 자신이

    李陵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키르기즈의 추장과 자신이 같은 집안이라고

    강조하면서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62)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中宗은 몽

    골 초원 동부에 있는 渤海와 室韋 등과도 연계해 突厥을 완전히 포위

    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中宗은 北伐에 동원할 병력을 三受降城을 중

    심으로 포진시키고 외교적으로도 튀르기쉬와 키르기즈 등을 끌어들여

    突厥을 포위했다.

    이와 함께 中宗은 최대의 현안 중에 하나였던 서부의 안전을 확보

    해 北伐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동안 대결 구도를 유

    지해왔던 吐蕃과 화해를 함으로써 突厥을 공격하기 위한 포위망에 끌

    어들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도발로 전열이 분산되는

    것은 막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당조를 계속 괴롭혔던 吐蕃과

    61) 資治通鑑 권209 中宗 景龍2年(708), p.6626.62) 新唐書 권217下 回鶻傳 下, p.6149.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34전선이 형성된다면 北伐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中宗에게 吐蕃과의 화해는 중요했고, 실제 즉위 초부터 화친에

    적극 노력했다.

    705년 사신이 와서 武則天 말기에 혼인을 하기로 했던 贊普 器弩悉

    弄의 죽음을 알리자 애도를 표하며 예를 거행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

    가 일곱 살에 즉위한 贊普 棄隸蹜贊의 할머니가 大臣 悉薰然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청혼하자 받아들이고, 雍王 李守禮의 딸을 金城公主

    로 봉해 시집보내기로 했다. 709년 11월 吐蕃의 贊普 棄隸蹜贊이 大臣

    尙贊吐 등을 보내 공주를 맞으려고 오자 710년 정월에 金城公主를 吐

    蕃에 시집을 보냈다.63) 이를 통해 中宗은 吐蕃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확보해 突厥을 공격할 수 있는 주변 여건을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 있

    었다.

    마침내 2단계 준비가 완료되었고, 이제는 北伐을 추진하는 일만 남

    게 된 中宗은 드디어 710년 5월 15일에 北伐制를 반포했다.64) 中宗은 突厥을 무력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카프간 카간이

    포악해 계속 中國을 침탈하자 자신이 회유를 통해 설득하려고 노력했

    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아 결국 토벌할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설명했

    다. 이것은 명분에 불과할 뿐 일찍부터 무력으로 突厥을 무너뜨리려

    노력해왔던 中宗의 강한 의지 천명이었다. 그리고 80만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행군을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했는데, 이것은

    突厥을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하는 편제였다.

    먼저 서부에서는 大總管인 右領軍衛將軍 겸 檢校北庭都護碎葉鎮守

    使安撫十姓 呂休璟과 副大總管인 金山道行軍大總管 北庭副都護 郭虔瓘

    와 安處哲 等이 이끄는 5만기와 함께 튀르기쉬의 蕃部落兵 25만기가

    출동하는데, 이들은 북방의 키르기즈가 연합해 작전을 펼치게 했다. 그

    리고 受降城이 있는 朔方에서는 朔方道行軍大總管인 張仁愿과 副大總

    63) 舊唐書 권196上 吐蕃傳 上, p.5226.64) 唐大詔令集 (商務印書館, 1959) 130 命呂休璟等北伐制 , p.705.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35管 魯受信이 이끄는 15만기, 赤水軍大使 涼州都督 司馬逸客과 右武衛

    將軍 陳邱, 右金吾衛翊府中郎將 李元通, 副使 右驍騎衛鹿陵府折沖 能昌

    仁, 左衛神山府折沖 陳義忠 등이 끄는 7만기, 豐安軍大使 靈州都督 甄

    粲, 副使 張趙璧·常元寂이 이끄는 6만기, 防禦群牧大使 臨洮軍使 甄亶

    가 모은 2만기 등이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建康軍使 甘州刺史 李

    守徵, 玉門軍使 肅州刺史 湯嘉惠, 墨離軍使 瓜州都督 李思明, 伊吾軍使

    伊州刺史 李眘交 등은 서방에서 오는 呂休璟과 연합해 서로 돕게 했다. 이와 함께 동부에서 어떤 부대가 차출 되었나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당시 거란과 奚 등은 唐朝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

    서 幽州에 있었던 薛訥 정도만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北伐軍의 구성은 전에 없었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三受降城의 건설 완료와 함께 突厥에 대한 포위망이 완전히 구

    축되었음을 보여준다. 中宗이 이런 만반의 준비를 모두 갖추고 북벌을

    선언하자 突厥은 이제 삼면으로부터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어

    극복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突厥 역

    시 이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Ⅴ. 北伐 중단과 突厥의 반격

    만반의 준비를 갖춘 北伐은 이후에 바로 추진되지 못하고 중단되었

    다. 이것은 마침 北伐의 의지를 표명했던 中宗이 바로 암살되고 少帝

    (殤帝)가 옹립되었다가 李隆基 등이 7월에 다시 정변을 일으켜 睿宗이

    즉위하는 등 唐朝 내부에서 정치적 격변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 즉위한 睿宗이 내부 사정으로 中宗과 달리 突厥에 대한 군사적

    정벌 보다는 화친을 원함에 따라 정벌에 반대했던 대신들이 세력을 차

    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主將으로 受降城을 건설하고 北伐을 준비하

    던 張仁愿마저 물러남에 따라 中宗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北伐은 어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36떤 성과도 남기지 못한 체 어이없게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9월에 朔方道 行軍大總管이 된 唐休璟은 앞서 受降城 건설

    반대에 입장을 띠고 있었으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고려해 화친을 통해

    전비를 줄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앞서 조정의 논의 과정에서 알 수 있

    듯이 受降城은 北伐에는 적합하나 이것이 추진되지 않을 경우 큰 부담

    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군대가 변경에 주둔해야할 뿐만 아니라 성

    채와 봉수 시설을 유지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北伐이 중

    단된 상황에 더 이상 이를 유지시켜야 할 필요가 없게 되자 그를 변화

    시켜야만 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정변을 통해 황제가 교체되자 다시

    시작된 吐蕃의 도발에도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

    다.

    서부에 예기하지 않은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는 등 대외적 환경이

    변화하자 受降城의 기능 역시 변화의 압박을 받았다. 唐休璟은 朔方道

    行軍의 병력을 2/3인 10만이나 줄이는 등 北伐 준비에 투자되었던 군

    사적 배치를 변경시켰다.65) 그리고 受降城 역시 더 이상 北伐을 위한

    공격 기지가 아니라 장기간 주둔의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그에 수반된

    여러 가지의 방어 시설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이후 朔方軍 總

    管이 된 常元楷가 비로소 雍門을 갖추었다고 한 기록에서도 확인된

    다.66) 또한 이후 교류를 위한 기능 역시 부가되어 이곳에서 突厥과 互

    市가 전개되는 등 공격적인 측면 이외의 다른 역할을 하게 된 것도 확

    인된다.67)

    이렇게 唐朝의 北伐 중간으로 인해 엄청난 위협을 느끼던 突厥은

    반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突厥 역시 포위망이 형성되

    고 北伐이 결정되자 강한 우려를 갖고 있던 빌게 톤유쿠크는 그 초조

    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65) 舊唐書 권100 解宛傳 , p.3112.66) 上同.

    67) 舊唐書 권50 兵志 馬政 , p.1338.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37(Ⅰ비문 동:02) 타브가치(唐朝) 카간(황제)이 우리의 적이었다. 온 오

    크(十姓)의 카간이 우리의 적이었다. (동:03) 수가 많은 크르그즈(키르기

    즈)의 강력한 카간이 우리의 적이 되었다. 그 세 카간이 서로 의논해

    “알타이 산(金山) 위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중략)

    …… (동:04) 셋이서 합쳐 군대를 보냅시다. 완전히 없앱시다.”라고 그들

    이 말했다고 한다. 튀르기쉬 카간이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의 보둔이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고 그가 말했다 한다. (동:05) “투르크 보둔도 어

    지러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의 오구즈도 불안합니다.”라고 그

    가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밤에도 잠을 잘 생각이 나지 않

    았다. 낮에도 앉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북벌이 중단된 이후 빌게 톤유쿠크는 자신들에 대한 포위망을

    와해시키기 위해 먼저 가장 약한 키르기즈를 기습 공격하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카프간 카간은 먼저 北伐 의사를 완전히 약화시키기 위해

    710년 12월에 奚와 霫 등을 시켜 공격함으로써68) 唐朝의 대응 태세를

    확인했다. 또한 唐朝가 도발에 대응하면서도 내부적으로 대결 보다는

    화해의 입장이 강하다는 점을 확인한 카프간 카간은 711년 정월에 바

    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이 때 睿宗은 宋王 李成器의 딸을 金山公主로 삼아 시집보낼 것을

    허락하고 御史中丞 和逢堯를 突厥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和逢堯는 도

    착한 다음 만난 카프간 카간에게 당나라의 관모와 관대를 착용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인 카프간 카간은 다음 날 옷을 바꿔 입고 남쪽

    으로 再拜를 한 다음에 稱臣을 했다. 그리고 카프간 카간은 711년 11

    월에 아들 楊阿支特勤을 보내 혼인 성사에 답례를 했다. 이에 睿宗은

    楊阿支特勤을 右驍衛員外大將軍에 제수하고 突厥과의 혼인을 성사시키

    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玄宗 즉위와 함께 취소되는데,69) 突厥이 포

    위망을 와해시키려고 원정을 감행함에 따라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 711년 초 카프간 카간이 唐朝에 혼인을 청하고 칭신을 할

    68) 資治通鑑 권210 睿宗 景雲元年(710), p.6659.69) 資治通鑑 권210 睿宗 景雲2年(711), p.6669.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38정도로 관계 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은 빌게 톤유쿠크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상황이 아직도 엄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단 唐朝를 안심시키고 난 다음 상대적으로 제압하기

    쉬운 키르기즈, 튀르기쉬를 공격하기 위한 시간 벌기였다. 당시 突厥에

    게 北伐을 위한 포위만 구축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였다. 따라서 突厥

    은 北伐을 중단한 상황에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포위망을 와해시켜

    야만 했다.

    카프간 카간은 唐朝와 화해를 통해 안심시킨 다음에 군사 작전이

    불가능한 711년 겨울에 전격적으로 키르기즈를 공격했다.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공격 계획을 수립했던 빌게 톤유쿠크는 키르기즈의

    본영에 도착했던 험난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Ⅰ비문 동:06)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맨 먼저 크르그즈에 군대를

    보내면 더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쾨그멘(사얀 산맥) 길은 하나라

    고 한다. 막혔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우리가 이 길로 나간다면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나는 말했다. …… (중략) …… 나는 말 위에 태워 눈

    을 헤쳤다. 나는 위로 말을 밧줄로 끌며 걸고 나무에 매달리며 오르게 했

    다. 전위 군사들을 (북:02) 눈에 뒤덮여 나가게 하고 숲으로 덮인 꼭대

    기를 우리는 넘었다. 우리는 구르며 내려갔다. 우리는 열흘 만에 장애

    를 넘어 갔다. 안내가 길을 잘못 들어 목이 잘렸다. 지루해진 카간이 “말

    을 전속력으로 몰아라!”라고 말했다 한다. (북:03) 아느 강에 이르렀다. 우

    리는 그 강을 따라 갔다. 우리는 기어오르기 위해 군사들을 말에서 내

    리게 했다. 우리는 말을 나무에 메고는 했다. 우리는 말을 전속력으로

    몰며 갔다. (강조는 인용자)

    이상과 같이 빌게 톤유쿠크가 원정 자체의 어려움을 자세하게 토로한

    것은 겨울에 북방으로 원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

    에도 突厥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가 키르기즈를 기습 공

    격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선봉에 섰던 퀼 테긴의 활약을 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동:34) 퀼 테긴이 26 (동:35) 살일 때 우리는 크르그즈를 향해 출정했

    다. 우리는 창이 빠지는 깊은 눈을 헤치고 쾨그멘 산을 넘어 나아가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39크르그즈 보둔(백성)을 밤에 기습했다. 우리는 그들의 카간과 송아 산

    에서 싸웠다. 퀼 테긴이 바이르쿠(拔野古)의 흰 종마를 (동:36) 타고 돌진

    하며 공격했다. 그는 군사 하나를 화살로 쏘았다. 군사 둘을 뒤쫓아 창으

    로 찔렀다. 그 공격에서 그들은 바이르쿠의 흰 종마를 그 엉덩이를 부수

    어 쳤다. 우리는 크르그즈 카간을 죽였다. 그의 일(나라)을 빼앗았다.

    (강조는 인용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방심을 하고 있던 키르기즈에 대한 불가능한 원

    정을 성공시킨 突厥은 그 직후 튀르기쉬의 공격 사실을 파악하고 알타

    이 산맥 방향으로 내려와 다시 방향을 틀어 서방으로 공격을 시작했

    다.

    《톤유쿠크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이제까지 서방 진출에 몰두하

    던 카프간 카간은 카툰의 사망을 핑계로 몽골 초원의 본영으로 돌아가

    면서 아들인 이넬 카간과 조카 타르두쉬 샤드 黙矩를 보냈다. 이에 10

    만에 이르는 온 오크의 군대가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퇴각하려고 하

    자 오히려 빌게 톤유쿠크가 이르티쉬 강을 건너 두 배나 많은 튀르기

    쉬를 기습 공격해 카간을 사로잡고 야브구와 샤드들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런 승리를 바탕으로 서쪽으로 더 나아가 옌취 강(珍珠河)을

    건너 테미르 카프그(鐵門)까지 진출해 소그디아나를 차지하고 많은 공

    물을 받아냈다.70)

    이상과 같이 빌게 톤유쿠크가 비록 과장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비문에서 아주 자세하게 자신의 활약상을 묘사한 것은 그 만큼 키르기

    즈와 튀르기쉬에 대한 원정 성공이 자신의 업적 중에서 부흥운동과 함

    께 중요했기 때문이다. 실제 빌게 톤유쿠크는 자신의 눈부신 활약으로

    튀르기쉬 원정에서 이넬 카간을 도와 큰 승리를 거둬 唐朝를 중심으로

    한 키르기즈와 튀르기쉬의 포위망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렸다. 이런 突

    70) 빌게 톤유쿠크는 《톤유쿠크 비문》의 (Ⅰ비문, 북:05)에서 (Ⅱ비문, 남:04)까

    지 모두 20행에 걸쳐 자신이 참여한 튀르기쉬 원정과 그의 성과를 자세히 기

    록함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크게 자랑했다. 이 부분은 비문 전체 62행중에서

    1/3에 해당될 정도로 비문의 전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서방 원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40厥의 성공은 단순히 포위망의 거둬낸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 第一帝

    國의 영역을 거의 확보했다고 할 정도의 발전이었다. 즉, 이제까지 카

    프간 카간이 추구했던 진정한 ‘突厥의 復興’을 완성해냈던 것이다.

    반대로 唐朝는 睿宗이 즉위 이후 내부적인 문제와 함께 서부의 吐

    蕃이 공세를 시작되자 어쩔 수 없어 그를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突厥은 中宗의 북벌 시도가 중단되면서 오히려 강력한 반격의 기

    회를 얻어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만큼 中宗의 급사와 북벌의 좌절은

    唐朝에게는 기회 상실을, 突厥에게는 발전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따

    라서 唐朝에게는 內政이 안정되면 어떻게든 突厥에 대한 대응을 통해

    中宗이 이루지 못한 北伐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과제가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직후 睿宗만이 아니라 玄宗의 집요한 북벌 노력으로

    실제 구현되었으며71) 이를 통해 突厥의 위협을 해소하고 나아가 唐朝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영향에 대해

    서는 더 많은 지면이 요구되는 관계로 玄宗時代의 北伐에 대해서는 후

    속 연구를 통해 구체화해볼 것이다.

    Ⅵ. 맺음말

    突厥은 696년 거란을 진압하는 군사적 원조를 계기로 武周로부터

    고비 남부의 降戶와 單于都護府 관할 지역 등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또한 거란 진압 이후 突厥은 武周를 제치고 거란을 비롯한 동부의 奚

    와 霫마저 차지해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

    71) 睿宗은 712년 8월 양위를 한 다음 玄宗에게 北巡을 하게 하는 등 그 역시 北

    伐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玄宗 역시 즉위 초의 北巡에는 반대했지만 713

    년 7월 太平公主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북벌 준

    비를 했으며 이를 기초로 실제 716년 正月 북벌을 추진해 카프간 카간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 中宗시기에 입안, 추진된 북벌 정책의 연

    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 唐 中宗時期(705-710) 對外 政策과 突厥의 對應 (丁載勳) 141고 698년에 돌궐은 이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河北 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약탈을 통해 고비 남북의 초원을 모두 차지한 유목국가

    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향후 이를 기반으로 서방으로의 진출하려고

    했다. 이것은 모두 突厥이 전략적 중요했던 고비 남부 초원을 武周로

    부터 탈환해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