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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건축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검약주의의 표방으로 지나친 사치를 멀리하였기 때문에 큰 건축물을 짓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 경복궁처럼 고려 왕궁인 만월대보다 면적이 컸던 경우에도 정전은 더 작게 지었으며 , 건축 영역 전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보다 수수하고 규모가 작아졌다 .
▲[ 외부 ] 숭례문 ▲ [ 내부 ] 숭례문 청장 ( 홍예반자의 황룡 )
발표 설명숭례문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 남쪽에 있다고 해서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 년 (1395) 에짓기 시작하여 태조 7 년 (1398) 에 완성하였다 .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 년 (1447) 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 년 해체 · 수리 때 성종 10 년 (1479) 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 그 위에 앞면 5 칸 · 옆면 2 칸크기로 지은 누각형 2 층 건물이다 .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다포 양식으로 ,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
조선시대 건축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검약주의의 표방으로 지나친 사치를 멀리하였기 때문에 큰 건축물을 짓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 경복궁처럼 고려 왕궁인 만월대보다 면적이 컸던 경우에도 정전은 더 작게 지었으며 , 건축 영역 전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보다 수수하고 규모가 작아졌다 . 특히 장식에 있어서는 상당히 절제를 많이 했는데 , 조선 건축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는 종묘도 장식과 단청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의도된 엄숙함을 보인다 . 이를 가칠단청이라고 하며 , 단청 중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색의 특정 안료만 칠해놓은 단청이다 . 보통 가칠단청은 다른 단청을 칠하기 전 밑바탕으로 칠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단청이라 종묘를 비롯한 극소수 건물 외에는 찾기 힘들다 .
가칠단청 .또한 유교로 인한 강력한 신분사회는 가사제한령 등의 법을 통해 지배층인 양반의 가옥에조차 그 장식이나 재료를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수수해질 수 밖에 없었다 . 건축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서 금과 은 , 옻칠 등 사치스러운 물품에 대해 강력하게 금지하였고 , 이런 제약으로 인해 수백년간 장식에 대한 기술이 수요를 잃어버리고 괴멸적인 전란으로 인해 기술자가 손실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중세 건축 관련 장식 기술이 퇴보하였다 . 다만 조선시대가 매우 길었기 때문에 조선의 시기에 따라서 모습이 꽤 차이가 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 후기에 와서는 암암리에 풀어지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 그러나 공납의 폐단으로 인해 장인들의 수준과 의욕이 저하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바닥 전체에 온돌을 깐 온돌방이 비로소 전국적으로 일반화되는데 , 이는 당시 소빙하기 도래로 인한 저온 현상과 관련이 있다 . 아무튼 이 온돌의 도입으로 인해 바닥의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중층 구조의 가옥이 사라지는 한 원인이 된다 . 또한 이 온돌은 , 아마도 , 땔감의 수요를 늘어나게 해서 쓸만한 재목을 사라지게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거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왕궁 혹은 종교적 건축물이다 . 그러나 이런 면에서도 조선은 굉장히 건축에 있어서는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시대까지만해도 불교가 곧 국교였으며 , 도시 특히 수도에는 도심 한복판 이곳 저곳에 황룡사 , 흥왕사등과 같은 대형 사찰이 있었다 .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 세조 사후로는 노골적인 절에 대한 압박과 심지어는 고의적인 테러까지 벌어졌다 . 심지어는 조선초에는 조선왕사라고까지 불렸던 회암사 역시 조선 중기 이후로는 몰락한다 . 때문에 현재는 거대한 사찰이나 왕궁 건축물 중 후대까지 전해지는 것은 극히 드물다 . 많은 전란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타버린 대규모의 사찰 , 특히 도심지 사찰들을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에서 재건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화방벽또한 목재가 부족해지다 보니 나무를 절약하면서 맞배지붕의 단점 ( 지붕이 보호하지 못하는 좌우 벽면에 비바람이 들이친다 .) 을 보완하기 위해 맞배지붕의 양 옆에 커다란 풍판을 달고 화재에 대해 저항력을 늘리기 위해 일반 벽 겉에 덧씌우는 화방벽이 출연하였고 , 기둥이나 추녀같이 긴 부재를 만들 때 길이가 다소 짧은 부재를 이어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 .
조선시대 _ 한옥의 용도
주거건축
좁은 범위의 한옥이 가지는 주거용 건축을 의미하며 , 크게 조선시대 서민들의 주택인 민가와 양반사대부들의 주택인 반가로 나눌 수 있다 . 전국토의 2/3 이 산으로 구성된 지형특성과 뚜렷한 사계절을 갖는 기후 , 풍수지리설의 영향 등으로 인해 , 한옥은 온돌과 마루시설을 기본으로 , 다양한 성격의 실들이 조합되어 있는 특색을 보여준다 . 또 , 건물과 마당으로 어우러진 배치가 다채롭다 .
유교건축
유교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정치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중심이념이 되면서 이를 위한 유교건축이 발달하였다 . 사직단과 종묘 , 성균관 , 향교 , 서원 등이 대표적이다 . 이 중에서도 향교와 서원은 공부하는 곳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 함께 구성되어 있고 , 전국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한옥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 일반적으로 유교건축은 성리학의 미학 즉 절제와 명분에 따라 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 장식을 줄여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어졌다 .
불교건축
불교건축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4 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진 건축유형이다 . 따라서 시대별 , 지역별 , 사상별로 다양한 유형이 발전되었고 , 현재에도 많은 수가 남아있다 . 우리나라의 불교건축은 산악숭배 신앙 , 풍수지리 , 조선시대의 억불정책 등에 의하여 산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갖는다 . 불교건축은 고려시대에 융성하였고 , 조선시대 중기에는 종합적인 사찰 형식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후기에는 건물의 장식이 화려해지기 시작하였다 . 이들의 구성과 배치는 불교의 세계관이 표현되어 있어 다양하고 체계적이다 .
조선시대 _ 지붕형식과 재료
팔작집
팔작이란 우진각집의 양쪽 측면 지붕 윗부분을 수직으로 잘라낸 모양의 지붕을 말한다 . 이 경우 , 수직처리 된 부분의 삼각형 모양을 합각이라고 한다 . 맞배지붕의 특징이 엄숙하고 경건한 느낌이라면 팔작지붕은 화려한 느낌을 준다 . 이렇듯이 가장 화려하고 장식적이기 때문에 궁궐과 불교건축의 중요한 건물에서 , 살림집에서는 안채 , 사랑채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
우진각집
마주보는 지붕 전후와 좌우 , 네 면 모두가 경사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 집이다 . 지붕 앞뒤에서 보면 사다리꼴 형태이고 , 측면에서는 삼각형 형태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격식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민가나 초가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
맞배집
지붕구조가 제일 간단한 형태로 , 마주보는 두 개의 지붕면이 있고 측면에는 지붕이 없는 대신 , 박공이라는 삼각형의 벽이 있다 . 보통 행랑 , 곳간 등의 간단한 건물 혹은 사당 건물에서 많이 보인다 .
조선시대 _ 평면과 형태
지역마다 우리나라 한옥의 형태가 달라진다 . 추운 북부지방은 ㅁ자 모양 , 중부지방은 ㄱ자 모양 , 더운 남부지방은 一자 모양의 한옥이 지어졌다 . 기후와 우리 생활은 매우 밀접함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
홑집대들보 아래 방을 1열로 배치한 일 (一 ) 자형의 단렬형 가옥을 말한다 . 전 (田 ) 자형의 겹집에 비해 개방적인 구조로서 채광과 통풍이 유리하다 . 고온 다습한 여름에 유리한 가옥 구조로서 남서부 평야 지대에 분포한다 .
겹집곁집은 따뜻한 실내온도유지를 위해서 관북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폐쇄적인 가옥구조를 취한 형태이다 .
조선시대 _ 건축 특징
가칠 단청
특히 장식에 있어서는 상당히 절제를 많이 했는데 , 조선 건축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는 종묘도 장식과 단청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의도된 엄숙함을 보인다 . 이를 가칠단청이라고 하며 , 단청 중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색의 특정 안료만 칠해놓은 단청이다 . 보통 가칠 단청은 다른 단청을 칠하기 전 밑바탕으로 칠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단청이라 종묘를 비롯한 극소수 건물 외에는 찾기 힘들다 .
온돌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바닥 전체에 온돌을 깐 온돌방이 비로소 전국적으로 일반화되는데 , 이는 당시 소빙하기 도래로 인한 저온 현상과 관련이 있다 . 아무튼 이 온돌의 도입으로 인해 바닥의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중층 구조의 가옥이 사라지는 한 원인이 된다 . 또한 이 온돌은 , 아마도 , 땔감의 수요를 늘어나게 해서 쓸만한 재목을 사라지게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
풍판과 화방벽
풍판과 화방벽을 설치한 조선시대 건축물의 모습 . 사진의 건물의 화방벽은 기둥을 덮지 않고 용지판을 대 기둥과 화방벽을 구분한 것으로 , 화방벽이 기둥을 덮어 감싸는 완전밀폐형도 존재한다 . 이 경우 습기로 나무로 된 기둥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 화방벽 아래쪽에 기둥의 목재 하단부 일부가 공기와 접촉하도록 작은 공기구멍을 뚫어 놓는다 .
조선시대 _ 문양
▲ 내소사대웅보전 무늬 문살 ▲ 대적광전 꽃문양 무늬 문살 ▲ 기림사 낮 무늬 문살 ▲ 명정전 무늬 문살
▲ 금성관 꽃무늬 목재 문살 문양 ▲ 고건축 궁전 낮 단청 로우앵글 무늬 문양
조선시대 _ 장신구
비녀신분에 따라 재료와 모양이 많이 달랐는데 , 금 , 은 , 진주 , 비취 , 산호 비녀는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했으며 , 일반 서민은 나무 , 뿔 , 백동 , 놋쇠 비녀를 주로 사용했다 .
첩지부인이 예복을 입을 때 머리 위에 꾸며 품위를 돋보이게 하던 장식품의 하나인데 ,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 얹은 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하고 여기에 족두리를 하게 한데서 시작된 것이다 .
떨잠일명 '떨철반자 ' 라고도 한다 . 의식 때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에 한해서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원형 , 각형 , 나비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으며 , 칧보 , 진주 ,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들었다 .
뒤꽂이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을 말하는데 , 끝이 뾰족한 단순한 뒤꽂이 이외에 실용적인 면을 겸한 귀이개 , 빗치개 뒤꽂이 등이 있었다 . 국화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 ,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한 것 , 매화 , 나비 , 천도 , 봉황 등의 모양을 장식한 것들이 있었으며 산호 , 비취 , 보석 , 칠보 , 진주 등을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게 만들었다 .
빗치개가리마를 갈라 머리를 정제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도 되었다 . 대개 빗이나 빗접 , 면경 , 쪽집개 , 살쩍밀이 , 분통 등과 함께 경대에 간직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 쪽진머리에 꽂아 머리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
댕기머리를 묶는데 사용되는 헝겁으로 금박을 찍거나 수를 놓았고 , 옥이나 석옹황 등의 보석을 붙여 화려하게 만들었다 .
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아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 특히 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 귀걸이 , 팔지 등의 사용 습관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 아울러 금 , 은의 사용을 막았던 정책은 찬란하였던 우리의 금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켰다 . 그러나 머리장식이나 노리개 등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_ 장신구
귀걸이 귀고리는 귓볼을 뚫어 작은 고리를 꿰던 것으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많이 유행하였다 . 그 후에 이 풍속이 오랑캐 풍습이라는 이유로 선조 때 고치게 하였으며 , 귀고리를 다는 풍습은 또한 ' 신체발부 수지부모 ' 라는 유교 윤리와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남자의 귀고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 여자는 귓바퀴에 거는 것을 많이 사용했다 . 장식은 극히 단조로와 오색술을 달았고 , 의식때만 주로 착용하였다 .
지환 반지와가락지는 노리개와 더불어 조선시대때 가장 일반적인 장신구였다고 할 수 있는데 , 그 모양은 매우 단순했다 . 가락지는 2 개를 쌍으로 하여 금 , 은 , 비취 등으로 만들며 기혼부인이 사용했다 . 이 가락지는 기혼 , 미혼에 관계없이 일반 여인들간에 사용되었다 .
노리개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로 다채로운 색상과 귀한 패물을 사용하여 단조로운 우리 나라 의상에 화려하고도 섬세한 미를 더해준다 .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로서 전 시대에 많이 애용하던 목걸이나 귀걸이가 쇠퇴한 대신 가장 다양하게 발달한 장신구라 할 수 있다 .
조선시대 _ 남성 의상
도포 (道袍 ) 사전엔 통상예복으로 입던 남자 겉옷으로 설명돼 있으며 , 임진왜란 후 문관의 평상시 웃옷으로 벼슬하지 않은 선비들의 예복이었다 . 실로된 띠를 띠며 집에있을 때는 관을 썼고 밖에 나들이 할 때는 갓을 썼다 .
심의 (深衣 ) 높은 선비 (학자 ) 들이 입던 웃옷을 말한다 . 흰 베로 두루마기 모양 만들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음 . 큰 띠를 띠고 복건을 썼다 .
중치막 지난날 벼슬하지 않은 선비가 입던 웃옷 한 가지 .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으며 앞은 두 자락 , 뒤는 한 자락이며 , 옆은 무가 없이 터져있음 . 큰 창옷 이라고도 하는데 선비와 상민이 입던 웃옷이었다 . 선비는 푸른 빛 , 상민은 흰색으로 신분을 구별하였다 .
두루마기 우리나라 고유의 웃옷으로 주로 외출할 때 입는다 . 옷자락이 무릎아래까지 내려온다 . 웃옷 밑에 받쳐 입는 옷이나 천민은 도포나 중치막을 법으로서 입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두루마기를 웃옷으로 입었다 . 후에 도포와 중치막이 없어지면서 두루마기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웃옷으로 입었다 . 남자들의 대표적인 옷이다 .
창 (氅 )옷소창 (小氅 )옷의 준말로 중치막 밑에 입던 웃옷의 하나로 두루마기와 같되 소매가 좁고 무가 없음 . 그러나 중치막을 입지 못하는 상민과 천민들은 이 창옷을 웃옷으로 입었다 .
조선시대 _ 남성 의상
도롱이 짚 , 싸리껍질 , 띠 따위를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재래식 우장 (雨裝 ). 농군이나 어부가 두르는 우비일종으로서 녹사의라고도 한다 .
상복 (喪服 ) 상중 (喪中 ) 에 입는 예복으로 성긴 베로 지은 바느질을 곱게 하지 않았음 . 굵은 베로 만들었으며 치마를 두르고 제복을 입은 위에 머리엔 두건과 굴건을 쓰고 수질을 얹은 다음 상장을 짚는다 . 부상 (父喪 ) 에는 제복단을 하지 않으며 죽장을 짚는다 . 중단은 제복아래 입는 옷으로 외출할 때엔 중단만 입고 방립을 썼다 .
승려 (僧侶 ) 모 * 굴갓 - 승려 갓으로 노감투로서 받쳐 쓴다 .* 고깔 - 헝겊을 접어서 세모지게 만든 것으로 승려들이 썼다 .* 대삿갓 - 가늘게 쪼갠 대가지로 엮은 것이다 .* 송낙 - 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것이다 .
조선시대 _ 남성 의상
망건 , 관 , 건 등 *망건 -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오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모양의 물건 . 말총으로 만들었으며 고급품은 곱고 윤이 흐르게 만들었다 . 관 (冠 ) - 관은 신분과 격식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며 문관과 선비들이 집에 있을 때 쓰는 데 정자관 (程子冠 ) 이 가장 널리 쓰였다 . 정자관이란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관으로 위는 터지고 세 봉우리가 지게 두층 , 세층으로 되었다 . 상투관은 머리털이 적은 노인이 상투에 쓰는 관이다 .* 감투 - 탕건 (宕巾 ) 이라고도 하며 말총 (말갈기나 꼬리털 ) 으로 떴다 . 관인들은 망건위에 이를 쓰고 정식 관이나 갓을 썼다 . 탕건은 예전 벼슬아치가 갓 아래에 받쳐 쓰던 관으로 앞은 낮고 뒤는 높게 말총으로 만들었다 .* 건 (巾 ) - 헝겊 따위로 만든 쓰개의 총칭 . 쓰개란 머리에 쓰는 물건을 일컫는다 .
갓 , 패랭이 등 :* 갓 - 예전 어른이 된 남자가 머리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의관 (衣冠 ). 가는 댓개비로 만들어 검은 옷 칠을 하고 광택을 낸다 . 천민을 제외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쓰개였다 . * 갓모 - 갓모는 궂은 날 우비로 갓 위에 씌우는 유지로 만든 모자다 .* 패랭이 - 가는 댓개비로 만든 갓 모양의 쓰개인데 , 신분이 낮은 천민과 상제가 썼다 . 역졸은 검은색을 쓰고 보부상은 갓 끈을 꿰어 단 꼭대기에 목화송이를 얹어 썼다 . * 초립 (草笠 )- 왕골이나 누른 풀로 엮어 만든 갓인데 관례한 ( 어른이 되는 ) 소년이나 별감 ( 관청에 딸린 하인 ) 등이 썼다 .
먹장삼 , 가사* 먹장삼 (長衫 ) - 검은 물을 들인 장삼 . 검은 비단이나 베로 짓는다 . * 가사 (袈裟 )- 어깨에 메는 (왼쪽어깨에서 오른 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 법의 (法衣 ) 로 종파에 따라 그 빛깔과 형식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음 . 즉 먹장삼을 입고 가사를 메는 차림은 승려의 정장이다 .
조선시대 _ 여성 의상
삼회장 (三回裝 ) 여자 저고리 중 깃 , 겨드랑이 , 소맷부리 (끝동 ) 에 대는 회장을 말한다 . 저고리 색깔 과 다른 빛깔을 냈으며 고름도 같은 자주 색깔을 댔다 .
배자 (褙子 ) 마고자 (저고리에 덧입는 방한복의 하나로 깃과 고름이 없고 앞을 여미지 않음 . 대개 비단으로 만들어 호박 등의 단추를 닮 .) 모양으로 되고 소매가 없는 덧저고리 . 여자들의 털옷 일종이다 . 팔 소매가 없으며 맵시가 있어 젊은 여자들이 즐겨 입는다고 소개돼 있다 .
여자 평상복 ( 한복 ) 평상시 부녀자들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 저고리 깃과 끝동에만 다른 빛깔을 댄 것을 반회장이라고 했다 . 삼회장이나 반회장은 다 젊은 부녀 (婦女 ) 가 입으며 나이 많은 부녀들은 저고리 끝동과 고름만 다른 빛깔로 한다 . 치마는 폭이 넓고 긴 것을 숭상하고 , 일할 때는 휩싸 걷어서 치마끈에 꽂거나 중둥끈에 둘러매기도 하고 행주치마를 입었다 . 머리를 얹는 것은 17 세기 초엽 이전에는 보편적이었으나 그 후에는 향촌에서만 오래도록 계속했다 .
조선시대 _ 여성 의상
장옷 ( 장의 /長衣 ) 여자가 나들이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서부터 길게 내리쓰던 옷 . 이는 15 세기 중엽부터 여자들이 밖에 나갈 때 사용했다 . 소매 끝에 한삼을 대고 자주고름을 단 두루마기다 . 서민부녀들이 썼다 .
쓸치마 여자들이 바깥에 나갈 때 머리와 얼굴을 가리는데 가장 간편한 도구로서 치마를 썼다 .
너울 15 세기부터 여자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 내려쓰는 폐면구이다 . 흔히 사 (紗 /얇고 가벼운 비단의 하나로 여름옷감으로 많이 쓰였다 .) 로써 만들었다 . 두꺼운 비단으로 만들 때는 눈 닿는 데만 사 (紗 ) 를 댔다 . 흑색은 높은 신분을 , 청색은 낮은 신분을 표시했다 .
조선시대 _ 여성 의상
여자 신발 여자 가죽신은 신의 코와 모양이 남자 것과 다르고 빛깔과 무늬가 더욱 화려하다 . 당혜 (唐鞋 ) 는 화려한 신발 중의 하나로서 비단 울을 하기도 한다 . - 당혜 란 가죽신의 하나로 울이 깊고 코가 작으며 앞코와 뒤에 넝쿨풀 무늬 ( 당초문 ) 를 새겼음 . - 짚신이나 나막신은 모양이 더욱 아름다우며 모양과 조각 등에 의해 구별된다 .
토수 (토시 /투수 )와 버선 토수와 버선은 신분에 관계없이 남녀노소가 함께 사용했다 . 팔뚝에 끼어 추위를 막는 제구로 한 끝은 좁고 다른 한 끝은 넓게 만들어졌다 . 토수는 팔목을 드러나지 않게 끼는 것으로 계절에 따라 봄 , 가을에는 겹 토수 , 누비토수를 꼈고 , 겨울에는 솜 토수 , 털 토수를 꼈다 . 버선은 속버선과 겉버선이 있다 .
머리 수건 향촌 ( 시골마을 ) 여자들은 머리 수건을 썼다 . 그림들은 평안도 , 황해도 , 함경도 지방여자들의 머리 수건이다 .
난모 그림과 같이 여자 난모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 남바위 (추울 때 머리에 쓰는 방한구 하나로 , 앞은 이마를 덮고 뒤는 목과 등을 내리 덮었다 .)와 조바위 ( 여자 방한모의 하나 )와 아얌 (겨울에 부녀자들이 나들이 할 때 춥지 않도록 머리에 쓰는 물건으로 머리만을 가리고 털을 넓게 붙여 뒤에 댕기를 늘이었다 .) 이 있다 .풍차 (風遮 ) 는 남자가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해 볼을 가리고 머리에 쓰는 두건의 한가지다 .
조선시대 _ 아동 의상
어린이 색동옷 여자애는 조바위를 쓰고 당혜를 신었다 . 남자애는 복건을 쓰고 전복을 입는다 . 신은 태사 (太史 )혜 / 신을 신었다 . 태사신이란 남자 신으로 울을 헝겊이나 가죽으로 하고 , 코와 뒤에 선문 (線紋 ) 을 새겼다 .
아동복 머리가 땋을 만큼 길지 못했을 때는 도투락댕기를 드렸다 . 도투락댕기란 어린 계집아이가 드리는 자주 빛 댕기를 말한다 . 어린 아이들은 돌띠 저고리를 입는다 .
색동 돌띠 두루마기 아이들이 입는 두루마기는 색동을 달고 무를 다른 빛깔을 대고 고름도 다른 빛깔로 길게 하여 돌려 맨다 . 바둑판 머리를 땋는 아이는 굴레를 쓴다 .
조선시대 _ 가구
반닫이는 가구로 쓰는 나무 궤이다 . 대개 앞면 위쪽 반을 문짝으로 하여 아래로 잦혀 여닫기 때문에 반닫이라 부른다 . 그러나 드물게는 위판의 절반을 여닫는 문으로 만든 반닫이로 있다 . 옷이나 옷감을 넣기도 했지만 주로 여자가 지니는 귀중품이나 살림에 필요한 용구들을 넣어 두었다 . 잔치에 필요한 여분의 그릇이나 제기를 보관하기도 했다 . 또 , 반닫이는 생산 지방에 따라 모양과 특색이 다르다 .
▲ 반닫이 세부 명칭 ▲ 반닫이 종류
조선시대 _ 가구
서안서안은 선비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사용하던 책상이다 . 선비는 앉은 자리 앞에 서안을 두고 그 옆에 벼룻집 , 문서를 넣어 두는 문갑 , 붓을 꽂아 두는 필통 , 두루마리 종이를 꽂는 지통 등을 갖추어 놓고 글을 읽고 썼다 . 원래는 절에서 불경을 올려놓던 것이었는데 점차 일반 가정에서도 쓰게 되었다 . 지체 있는 집에서는 안방에도 서안을 두었다 .
경상경상은 서안의 한 종류로 당나라와 송나라 양식을 받아들인 책상이다 .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기호와 생활형편에 맞게 고쳐져 중국의 것보다 훨씬 모양이 아름답고 세련된 민속 예술품이 되었다 . 특히 경상의 다리 장식과 서랍 장식 , 가장자리 꾸밈에 나타난 세공미가 뛰어나다 .
조선시대 _ 가구
사방탁자 , 갤러리현대 소장사방탁자의 뼈대는 가늘면서도 튼튼해야 했기 때문에 질이 강한 배나무나 참나무를 쓰고 , 판자는 가벼운 오동나무나 소나무를 썼다 . 아래층 장은 문갑을 만드는 자료인 먹감나무나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
책가도 ,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장이란 농장 ·옷장 ·찬장처럼 물건을 넣어두는 나무 상자를 말한다 . 장은 물건을 탁자 선반에 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자에 넣어서 갈무리하기 위해 붙여 두었다 . 장은 양옆과 뒤가 막혀 있고 , 앞쪽에 여닫이문 두 쪽을 달았다 . 여기에 놋쇠장석을 박고 놋쇠 돌쩌귀를 박았다 . 놋쇠 문고리도 달려 있어서 자물쇠를 채울 수 있다 . 여닫이 위에는 예쁜 손잡이가 달린 작은 여닫이 두 개를 두었다 .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로 좁은 한옥 공간을 시원하게 보이는 효과를 주는데 , 이러한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현대적 감각에 가장 가까운 가구로 평가받는다 .
조선시대 _ 가구
이층장 , 신구대학교 우촌박물관 소장머릿장은 머리맡에 놓아두고 자주 쓰는 작은 물건을 넣어 두는 가구다 . 단층으로 되어 있고 부피가 작다 . 이층장 ·삼층장은 주로 옷을 넣어두는 가구다 . 삼층장은 손을 뻗힌 높이 정도다 . 아래쪽에는 공기가 드나들 수 있게 네 개의 다리를 붙여 놓았다 . 의걸이 장에는 옷을 거는 횃대가 있어서 두루마기나 도포같이 길이가 긴 옷을 걸어 두었다 .
이층장 , 신구대학교 우촌박물관 소장농은 한 층 한 층 따로 된 것을 포개어 놓을 수 있는 가구다 . 대개 삼층장보다는 작으며 몸체를 포개면 하나로 이어진다 . 위에 몸체보다 약간 넓게 지붕이 씌워져 있는 점이 장과는 다르다 . 농에도 이층농 , 삼층농이 있다 . 아래쪽에는 공기가 잘 드나들게 따로 다리가 있는 받침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을 농다리라 한다 . 이와 같이 장과 농은 모양이 비슷하고 쓰임이 같다 .
이층지장 , 신구대학교 우촌박물관 소장장롱의 재료로는 오동나무가 많이 쓰였는데 가볍고 뒤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을 특히 ' 오동장롱 ' 이라 하여 귀하게 여겼다 . 이러한 고급가구에는 놋쇠나 백동으로 된 장석을 붙였다 . 광채가 나는 자개로 무늬를 농은 자개농은 비싼 값에 팔렸고 , 화초장은 화초무늬를 넣은 장롱으로 뛰어난 목공예품이었다 .
머릿장 , 부산박물관 소장이불장은 이불과 베개 등을 포개어 두는 가구다 . 이 밖에 버선을 넣어 두는 버선장 , 수를 놓는 수실과 바느질실을 넣어 두는 실장 , 의복에 놓은 솜을 넣어 두는 솜장이 있다 . 버선장과 실장 ·솜장은 대개 이층으로 구성되고 , 작고 아기자기한 가구다 .
조선시대 _ 가구
경대는 거울이 장치된 화장대다 . 좌경이라고도 한다 .
경대 , 신구대학교 우촌박물관 소장옛날의 경대는 오늘의 경대와는 모양이 달랐다 . 거울에 두 개의 기둥과 발을 달아 거울 면을 조종하게 만든 것도 있었지만 화장품 통에 거울을 접어 넣는 것이 많았다 . 이런 경대는 겉보기에 직사각형으로 된 상자처럼 보이고 뚜껑을 열면 거울이 있다 . 거울은 테가 있는 액자 모양이며 경대 몸체에 붙어 있어 눕혔다 일으켰다 할 수 있다 .
경대 , 신구대학교 우촌박물관 소장 경대 뚜껑은 거울을 세울 때 뒤를 받쳐 주는 일을 했다 . 부녀자가 화장을 할 때는 경대 뚜껑을 열고 거울을 일으켜 경대 뚜껑을 받쳐 비스듬히 세운 다음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 거울을 눕혀 두는 아래쪽에는 서랍이 한두 층 있었는데 그 안에 빗 ·빗치개 · 비녀 등 화장 도구와 분 · 연지 등 화장품이 들어 있다 . 경대는 여자 용품이었으므로 뚜껑과 장석 , 손잡이 고리 등에 꾸밈이 많았고 , 자개를 박은 경대도 있었다 .
조선시대 _ 조명
등잔 , 신구대학교 우촌박물관 소장 전기가 없던 옛날에는 등잔에다 불을 켰다 . 일반 가정에서는 작은 접시를 등잔 그릇으로 사용했다 . 불을 밝히는 연료로 쓰이는 것은 아주까리 (피마자 ) 기름 , 들깨기름 , 참기름 , 산초기름 , 목화씨기름이 등이었다 . 심지가 다 타면 불이 가물가물하며 꺼지려고 하는데 , 이때 심지를 등잔가로 끌어올린다 . 이것을 ' 심지를 돋운다 ' 고 표현한다 . 등잔불을 켤 때는 하룻밤 동안 여러 번 심지를 돋우었다 . 조도를 높이려면 심지를 두개 또는 그 이상으로 하여 불을 켜면 되는데 , 이렇게 하는 것을 쌍심지라 한다 .등잔 , 신구대학교 우촌박물관 소장재료에 따라 목제 ·토제 · 대리석 · 백자 · 사기 ·놋쇠 ·철제 따위의 등잔이 있다 . 여기에 한지 ·솜 · 마사 (麻絲 )1 등으로 심지를 만들어 기름이 배어들게 하여 불을 켠다 . 등잔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게 근원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 삼국시대의 발굴품 중에서 각종 형태의 등잔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
조선시대 _ 조명
1876 년 이후 일본에서 석유가 들어왔다 . 왜국에서 들어왔다 해서 처음에는 석유를 왜기름이라 했다 . 왜기름 석유가 등유가 되자 등잔 대신 호롱이 나왔다 .
제등제등은 들고 다니는 등기구로 , 휴대용으로 사용되었다 .
호롱호롱은 대부분 사기로 만들었다 . 호롱은 석유를 담는 호롱 그릇과 호롱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 호롱그릇에는 석유를 담고 호롱꼭지에는 헝겊이나 여러 겹의 실로 심지를 만들어 꼭지 구멍에 끼웠다 . 그런 다음 심지를 석유에 담그고 호롱꼭지에 불을 켰다 .호롱불은 등잔불보다 밝지는 않았으나 성가시지 않고 편리했다 . 더러 호롱그릇이 깨지면 헌 잉크병을 대용하기도 했다 . 등잔이 호롱으로 바뀌고 나서 등잔걸이 모양도 호롱을 놓기에 알맞게 바뀌었다 . 시골에서는 30 년 전까지도 호롱불을 켰다 . 농촌 어린이는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숙제를 했다 . 호롱불보다 더 밝은 등불이 필요한 집에서는 남포등을 켰다 .
남포등1970 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부분 양초를 애용하고 있어 전통의 등잔은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