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국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한 가지: 동아시아 해역의 새로운 상상 강명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소장·언론정보학과 I. 들어가는 말 아시아의 부상이 지식인 세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 아들여지고 있지만, 어떤 아시아인지, 누구를 위한 아시아인지에 대해 구체적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이 그리는 아시아가 ASEAN 각국이 그리는 아시아와 다르고, 남아시아, 서아시아는 더구나 다른 아 시아를 상상하고 있다. 여러 가지의 상상의 지리를 다양하게 그리는 일은 자연 스러운 현상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주체들이 다양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상상의 아시아(imaginary Asia)에 대한 그림의 다양함은 바람직한 작업일 뿐만 아 니라 패권적이고 지배적인 권력의 작동을 제어하는 데 기여하리라 믿는다. 특 히, 동북아시아 두 개의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국가주의(state driven)를 중심으 로 상상하는 아시아가 패권적 위치를 차지하기 전에 다양한 아시아의 지도, 새 로운 ‘아시아의 사회(the social formation of Asia)’를 상상하는 작업은 21세기 초 아시 아가 부상하는 시점에서 긴요하다. 이 발표에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비전 중에 하 나인 “동아시아 해역(East Asia Ocean 혹은 Seas), 초국경 네트워크 기반 구축” 작업은 새로운 아시아적 사회를 그리기 위한 조그만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바다를 동아시아 해역으로 명명하고, 위로 극동러시아부터 아시아리뷰 제4권 제1호(통권 7호), 2014: 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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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기조발제 강명구 OK - snuac.snu.ac.krsnuac.snu.ac.kr/2015_snuac/wp-content/uploads/2015/07/02... · 강명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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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한 가지: 동아시아 해역의 새로운 상상
강명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소장·언론정보학과
I. 들어가는 말
아시아의 부상이 지식인 세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
아들여지고 있지만, 어떤 아시아인지, 누구를 위한 아시아인지에 대해 구체적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이 그리는 아시아가
ASEAN 각국이 그리는 아시아와 다르고, 남아시아, 서아시아는 더구나 다른 아
시아를 상상하고 있다. 여러 가지의 상상의 지리를 다양하게 그리는 일은 자연
스러운 현상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주체들이 다양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상상의 아시아(imaginary Asia)에 대한 그림의 다양함은 바람직한 작업일 뿐만 아
니라 패권적이고 지배적인 권력의 작동을 제어하는 데 기여하리라 믿는다. 특
히, 동북아시아 두 개의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국가주의(state driven)를 중심으
로 상상하는 아시아가 패권적 위치를 차지하기 전에 다양한 아시아의 지도, 새
로운 ‘아시아의 사회(the social formation of Asia)’를 상상하는 작업은 21세기 초 아시
아가 부상하는 시점에서 긴요하다.
이 발표에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비전 중에 하
나인 “동아시아 해역(East Asia Ocean 혹은 Seas), 초국경 네트워크 기반 구축” 작업은
새로운 아시아적 사회를 그리기 위한 조그만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바다를 동아시아 해역으로 명명하고, 위로 극동러시아부터
아시아리뷰 제4권 제1호(통권 7호), 2014: 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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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3성, 일본 섬과 한반도, 오키나와 필리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까지
를 포괄하는 바다로 연결된 대륙과 섬을 설정하고자 한다. 동아시아 해역은 바
다와 육지를 아우르는 공간이다. 그것은 국가적 영토로 묶인 영토와 바다일 뿐
만 아니라 그 공간과 장소를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역사와 문화, 물질
적·경제적 삶을 가리킨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동아시아 대륙의 동쪽은 서태평양(West Pacific)이라는 범
주로 흔히 묶여 왔고, 남북미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바다였다. 대서양에 비해
‘평온한 바다(Maris Pacifici)’였기에 마젤란이 붙였다는 태평양의 명칭 자체가 서구
의 해양탐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이후 태평양은 그런 의미에
서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이었지, 아시아 대륙의 동쪽인 적은 없었다. 탈냉전 이
후에도 동아시아 대륙의 여러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는 여전
히 미국의 역사적·현실적 존재와 영향력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TPP가 그렇고
ASEAN+2 모두 이런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자장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태평양이라는 범주를 대신해 아시아 대륙 전체의 동쪽 바다를
동아시아해(East Asian Ocean)로 설정하여, 탈냉전 이후 국민국가 중심의 사고를 넘
어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기초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해라는 명칭이 또 다른 아시아 중심주의를 배태하는 사고방식이라
면 경계해야 마땅하다. 오히려 동아시아 안에 존재하는 국민국가의 국경적 분할
을 넘어서기 위한 방편과 도구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국
경 범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초국경 네트워크(transnational network)의 기반으로 식민통치와 냉전 이후(분단된
한반도의 경우 아직도 냉전 후기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중국의 부상 이후 강해지고 있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범주로서 초국경이란 범주를 설정하고자 한
다. 국민국가 중심의 현실주의적 국제 정치, 국가 간 관계만으로는 특정한 국가
의 패권을 넘어 평화와 번영의 아시아를 상상하기 어렵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패권적 경쟁 안에서 중소국, 약소국 처지를 고려하
면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협력과 공존의 사회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은 이들 중소
국, 약소국의 생존을 위한 기반이 된다. 영토 분쟁과 역사 분쟁, 일본의 우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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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군비 팽창 등 최근 동북아시아의 갈등은 이 지역의 시민과 시민사회 공동체
에게 어떻게 대안적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천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
하고 있다.
II. 동아시아 지역에서 초국경(transnational) 범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
동아시아에서 초국경에 대한 사고는 일반적인 초국경과 상당히 다른 인식론
적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다. 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 몽골 등 동북아시아 국
민국가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
정에서 볼 때 서구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근대 국
가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성립했던 반면, 동아시아 사회는 (특히 중
국과 조선, 베트남의 경우)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지 않았고, 국가 안에 부르주아
사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 사회에서 상인 계급이 국
가의 자장 바깥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러한 자율성을 통해 부르주
아 공론장의 단초가 나타났는가 하는 논쟁이 진행되었다(Rowe, 1990; Rankin, 1986;
Strand, 1990).
어느 주장이 타당하든 동아시아 사회의 경우 대부분의 부르주아 집단과 관
료/지식인 집단도 국가의 자장 안에서 존재했다고 봐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
다. 한국의 경우는 국가의 우산 아래 생활세계가 있었고, 해방 이후 시장과 시민
그림 1 유럽 공론장의 구조
생활세계
국가 시장 시민사회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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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서서히 형성되는 전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2013년 한국과 유
럽의 공론장의 차이를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안에서 대비시킨 바 있다(강명구,
2013). 유럽의 국가와 시민사회 안에서 공론장은 그림 1의 모습을 띤다.
이 도해가 보여주는 것은 유럽의 경우 국가는 사회 위에서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사회를 포괄하고 있는 중국이나 조선 사회와 달리 유럽
의 국가들은 사회 위에 존재했다. 일반 대중이나 상인 계급이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에 복속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 중국이나 조선의 경우
(일본은 막부가 통일하기 전까지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다), 황제와 왕 아래 거대한 양반 관료
의 권력이 시장과 시민을 포괄하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 최근 19세기 말 상인
계급이 중앙 권력이나 지역 권력의 자장에서 얼마만큼 자율성이 있었느냐에 관
해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국가의 자장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추후에 실증적 검토를 거쳐야 하겠지만(필자가 기존 문헌을 검토해 본 지금까지 판단
에 따르면), 조선의 경우에도 19세기 말까지 조선 반도에서 활동하던 상인이나 상
권이 왕의 통제 바깥에 존재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그림 2 참조).
해방 이후 한국의 공론장을 훈민공론장이라고 개념화한다는 이론적 시도에
서 볼 때,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장은 국가의 우산 아래에서 천천히 영역을 키우
고(오랜 민주화 운동은 시민 영역의 성장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가
의 우산으로부터 부분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시장 역시 국가의 자장 안에서
존재했다(제1공화국에서는 무상원조의 배분권을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고, 제3공화국 이후에는 조국 근
대화의 이름 아래 유상원조와 차관, 경제개발 정책, 특혜와 유착을 통해 사실상 시장을 통제했다). 일본
그림 2 한국 공론장의 구조
공론장
시장 생활세계 시민사회
국가
29초국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한 가지 | 강명구
사회에서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는 일본의 봉건제 논쟁이 보여주었듯 중국, 조선
과는 차이가 있지만, 국가 우산 아래 시민사회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
을 것이다.
이런 점에 근거해서 동아시아 시민사회에 계몽된 주체로서 시민은 역사적으
로 형성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 안에서 ‘애국계몽적(patriotic enlightenment)’ 시민
이 성장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강명구, 2013).
동아시아 근대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 약한 시민사회 혹은 국가
의 자장 안에서 작동하는 시민사회는 공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21
세기 동아시아 지역에서 초국경을 상상하는 작업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
니게 된다. 서구에서 ‘초국경(transnational)’ 혹은 ‘국가를 넘어(beyond nation state)’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