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극치를 만나다, 폐사지 폐사지를 만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학술적인 목적일 수도 있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우 연히 마주친 여행지일 수도 있다. 탑 한 기, 주춧돌 몇 개 남은 허허로운 공간에서 위안을 얻 었다는 이도 있고, 비울수록 차오르는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 찾는다는 이도 있다. 같은 공간, 다른 느낌… 폐사지는 그런 곳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향을 쳐다봐도 가슴 에 와 닿는 감동이 전혀 다른 공간. 아무리 열심히 지워도 남는 도화지 위 흐릿한 연필 자국처 | 풍경으로의 여행 | 남한강 물길 따라가는 원주 폐사지 여행 원주는 폐사지 순례로 이름난 고장이다. 천년 고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흥법사지, 법천사 지, 거돈사지는 모두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스러진 절터다. 역사 속으로 흩어진 1000년 세월의 편린을 따라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글·사진 정철훈 여행작가 서울예전 사진과를 졸업했다. 사진이 좋아 여행을 시작했고 여행이 좋아 여행작가로 살아간다. - 2017~2018년 한국관광공사 <추천 가볼 만한 곳> 선정위원 - 2013~2014년 코리아 실크로드 탐험대 역사기록팀(오아시스로, 해양로 탐험) -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 2005년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선정 <2030 청년작가 10인>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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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으로의 여행 | 남한강 물길 따라가는 원주 폐사지 여행 · 거돈사지의 가람 배치 역시 통일신라 후기 특징인 일탑일금당 방식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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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극치를 만나다, 폐사지
폐사지를 만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학술적인 목적일 수도 있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우
연히 마주친 여행지일 수도 있다. 탑 한 기, 주춧돌 몇 개 남은 허허로운 공간에서 위안을 얻
었다는 이도 있고, 비울수록 차오르는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 찾는다는 이도 있다.
같은 공간, 다른 느낌… 폐사지는 그런 곳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향을 쳐다봐도 가슴
에 와 닿는 감동이 전혀 다른 공간. 아무리 열심히 지워도 남는 도화지 위 흐릿한 연필 자국처
| 풍경으로의 여행 |
남한강 물길 따라가는 원주 폐사지 여행
원주는 폐사지 순례로 이름난 고장이다. 천년 고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흥법사지, 법천사
지, 거돈사지는 모두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스러진 절터다. 역사 속으로 흩어진 1000년 세월의
편린을 따라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글·사진 정철훈 여행작가
서울예전 사진과를 졸업했다.
사진이 좋아 여행을 시작했고 여행이 좋아 여행작가로 살아간다.
- 2017~2018년 한국관광공사 <추천 가볼 만한 곳> 선정위원
- 2013~2014년 코리아 실크로드 탐험대 역사기록팀(오아시스로, 해양로 탐험)
-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 2005년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선정 <2030 청년작가 1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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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폐사지에 깊게 파인 시간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폐사지를 ‘공(空)의 극치’라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빈터로 남았지만 비지 않았고,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화려한 금
당과 불상은 흩어졌지만, 우리가 폐사지를 감히 폐허라 부르지 못하는 건 실재하는 공간보다
또렷이 남은 여백의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채우기 위해 빈 공간을 찾아가는 폐사지 여행은 그
래서 ‘고즈넉하다’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즈음이 제격이다.
폐사지 순례의 정수, 흥법·법천·거돈사지를 만나다
태백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충주에 이르러 한껏 몸을 불린 뒤 원주로 넘어온다. 힘차게 흘
러가는 남한강 물길 따라 사람도, 물품도 원주로 흘러들었다.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는 불교
문화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원주의 대표 폐사지인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가 모두
남한강 주변에 위치한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 절터는 많은 점에서 닮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절터가 대부분 남한강을 곁에 두고
보물 제464호로 지정된 흥법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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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외따로 떨어진 흥법사지가 섬강에 접하지만, 섬강 역시 남한강과 몸을 섞어 서해로 흘러
드니 같은 물줄기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절집이 태어나고 스러진, 창건과 폐사 시기도 비슷
하다. 세 사찰이 언제 처음 산문을 열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에 창
건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이는 가람 배치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흥법사지와 거돈사지에 삼층석탑이
있는데, 석탑 한 기와 법당이 나란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 방식은 통일신라 후기에 보이는
전형적인 가람 배치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중기에는 경주의 감은사지와 불국사처럼 법당 앞에
석탑 두 기를 세우는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 배치가 일반적이었다. 산중이 아니라 평지에 터
를 잡았다는 점도 통일신라 후기 사찰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고려 시대 왕의 스승인 국사가